내가 의지하는 여호와
2023년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 | 2023년 09월 03일 – 10월 08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10월 16일
목 차
1.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1)(시 27:1) 2023.09.03. 주일오전예배 9
2.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2)(시 27:1) 2023.09.10. 주일오전예배 23
3.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3)(시 27:1) 2023.09.17. 주일오전예배 31
4.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시 27:2-3) 2023.10.01. 주일오전예배 41
5. 시련 중에 갖게 된 소원(시 27:4) 2023.10.08. 주일오전예배 48
<설교 프레임>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1 2023. 9. 3 주일 낮 예배
<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I >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 본문 해설
다윗의 시다. 정확한 저작(著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주석가들은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다윗이 황급히 망명하던 때 씌여진 시(詩)라고 본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쫓겨나 왕궁(王宮)을 떠나고 왕권의 정통성의 상징인 법궤(法櫃)까지 두고 황급히 떠나와야 했다.
그렇지만 그 큰 고난 속에서도 다윗은 결국에는 자기가 의지(依支)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勝利)할 것을 믿었다.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면서 뼈아픈 시련 속에서 특별한 믿음과 용기를 얻었다.
다윗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이 쓰라린 고난(苦難)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선지자에 의해 예고된 바였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姦淫)한 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 12:10)
다윗은 극심한 환란(患亂)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지난날 자기의 죄(罪) 때문에 겪도록 예고된 고난(苦難)이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 곧 진리(眞理)의 빛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I. 여호와는 나의 빛이심
“여호와”( )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존함(尊銜)이다. “하나님”(God)이라는 존함은 모든 이방 백성들에게까지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한 “여호와”라는 존함은 오직 일찍이 당신과 언약(言約)을 맺은 이스라엘(Israel)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었다.
이전에 겪어 본적 없는 고난(苦難) 속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불렀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때,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사이에 맺은 언약(言約)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이 지금은 비록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믿는 신앙을 보여준다.
A. 빛의 정체
여기서 “빛”( )은 무엇일까? 여기에 나오는 “빛”은 성경(聖經)에서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a. 물리적인 빛(창 1:3-4, 겔 32:7)
b. 윤리적인 빛(마 5:16)
c. 신학적인 빛(요 9:5, 요일 1:5)
여기서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주의 진리(眞理)의 빛을 가리킨다.
이것이 “빛”(Light)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세상이 비진리(非眞理)의 어둠으로 가득 차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와서는 그 신학적인 “빛”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이신 것으로 제시된다.
“그 안에 이 있었으니 이 은 사람들의 이라”(요 1:4)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진리(眞理)의 핵심이자 전부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形體)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오직 예수께서 범죄한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길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계는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와 같이 오직 빛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참된 진리(眞理)에 이를 수가 있다.
B. 빛과 침체
원래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시 18:1).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큰 죄(罪)를 지었다. 첫째로 인구조사(人口調査)를 실시한 것이었고(심하 24:1), 둘째로 밧세바와 간음(姦淫)한 사건이었다(삼하 12:24).
이스라엘의 인구(人口)를 조사한 것은 행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실시한 신앙적인 동기(動機)가 문제였다.
인구조사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인격적 신뢰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왕이 자기의 이스라엘(Israel) 왕국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確認)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하나님은 다윗의 교만(驕慢)으로 보셨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첫째는 그것은 다윗이 은근히 이스라엘 왕국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王)으로 삼은 신정국가였다.
둘째로 당시 인구조사는 전쟁에 나갈 병력(兵力)의 수와 군마(軍馬)와 같은 물자를 함께 헤아리는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왕국이 크고 강한 나라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대신 마병을 의지하는 불신앙(不信仰)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죄(罪)를 심각하게 다루셨다. 인구조사의 범죄(犯罪)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내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7만 명이었다(삼하 24:15).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과 영혼에 더 깊은 상처(傷處)를 남겼다.
다윗은 생전 처음으로 극심한 영적 침체를 경험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단절(斷絶)이었다.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이 깊고 어두운 영혼의 쓰라린 밤을 지나야 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그 범죄로 말미암아 암흑 같은 영적 교제의 단절 속에서 홀로 몸부림치며 지내야 했다.
그러면 그 옛날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순전한 다윗이 그렇게 끔찍한 범죄(犯罪)를 두 번이나 저지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마음의 부패 때문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마음이 진리(眞理)의 빛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은 지금 그 범죄(犯罪)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악인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었으니,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징계를 받고 있는 이때만큼은 다윗의 온 마음에는 진리(眞理)의 빛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시련의 때에 캄캄한 영혼(靈魂)의 밤을 지나고 있었다. 불쌍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되어 주었다.
그 빛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이 세상에 진리(眞理)보다 큰 것이 없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아니시겠는가?
다윗의 육체는 홀로 소외된 가운데 온 몸과 영혼이 갈갈히 찢기는듯 한 환란을 겪고 있었지만 그의 영혼(靈魂)은 말씀의 빛으로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말씀의 빛은 다윗을 붙잡아 주었다. 예전에 범죄했을 때와는 달리 또다시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주었다.
그 말씀의 빛은 다윗의 지성(知性)에 깨달음을, 감정(感情)에 까리따스의 사랑을, 의지(意志)에는 올곧음(uprightness)을 주었다.
고난(苦難)을 겪을 때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어쩌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지난 날 지은 어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懲戒)일 수 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겸손히 고백하라.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내가 범한 죄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더욱 치셔서 나를 고치소서”
그러나 징계는 결코 범죄한 우리가 미워서 보복(報復)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에게 복수(復讐)하시겠는가?
비록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당신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당신으로 하여금 시련(試鍊)을 겪게 하시는 것은 불결한 당신을 연단하여 순전한 새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믿음의 사람 욥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쓰라린 연단(鍊鍛)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다윗이 당한 그 시련은 하나님의 존재(存在)의 위대하심과 도덕적 성품(性品)의 탁월하심을 알게 한다.
이러한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정금(精金) 같이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는가?(욥 23:10)
시련(試鍊) 속에서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약해져서 시험에 들기 쉽다.
어려운 환경으로 정신(精神)이 혼란스러울 때 마음은 진리(眞理)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마음을 특별히 지키지 아니하면 시험에 든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現實)이 아무리 힘겹고 어렵더라도, 마음이 말씀의 “빛”을 깨달으면 우리의 갈 길이 보인다. 성령(聖靈)께서 그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시인(詩人)은 말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여기서 소유격을 눈여겨보라.
“나의 빛”(my Light), 여호와는 항상 빛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 왜 그것을 “나의 빛”이라고 하였을까? 어떻게 여호와의 진리가 다윗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었을까?
이는 그가 진리(眞理)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 안에 소유(所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시인이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 진리의 빛을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난과 핍박, 시련과 고통(苦痛)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시험(試驗)에 들게 하지는 않는다.
오직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말씀의 빛에서 아주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빛”이 “나의 빛”(my Light)이 되는 우리 자신의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 26:41上)
육신의 절망적인 질병(疾病)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영혼의 커다란 시험(試驗)으로 어두운 벌판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처지에 있는가?
처마 끝 빗줄기에 바위가 패이듯이, 당신을 붙들어주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이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끝없는 세상 사랑과 반복되는 유혹(誘惑)과 시험 속에서 당신의 영혼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지금 환경에 대한 불만(不滿)과 사람에 대한 미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원망(怨望) 속에서 자기연민에 빠져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무엇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앙심을 품고 관계없는 사람에게조차 원한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죽은 것과 같은 영혼(靈魂)의 상태에서 온전히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때일수록 당신이 어린아이처럼 회개(悔改)하며 하나님의 품속으로 파고 들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런 시련의 때에, 낙심(落心)하고 절망하는 대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하나님(God)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든지 마음에서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 누구든지 자기 육체(肉體)만을 편애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따라 공정(公正)히 사랑하게 된다.
고난과 핍박(逼迫)이 겹치고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도, 그것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들을 하나님 만날 기회(機會)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苦難) 속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품으로 파고 든다.
그들은 오직 진리(眞理)를 소망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 진리가 자유를 주기에 오직 “여호와를 나의 빛”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의 빛으로만 침체에 빠진 우리의 영혼(靈魂)을 건져내시는 분이시다.
살다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때, 자신의 신앙(信仰)의 깊이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요동치는 현실 때문에 정(定)함이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응답(應答)이 없다.
조용히 침잠하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조차도 겁내지 말라.
세계의 운명(運命)과 자신의 일생 전체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시인처럼 고백하라.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2-24)
온 마음을 다하여 진리(眞理)의 빛을 구하라.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요동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비록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결코 진리(眞理)의 빛을 볼 수 없다. 먼저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確定)하라.
오직 말씀의 빛에만 당신이 영혼의 침체(沈滯)로부터 벗어날 길이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만 감화(感化)를 받기로 뜻을 굳게 세우라.
육체가 자연(自然)에서 멀어지면서 질병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영혼은 말씀의 은혜(恩惠)를 떠나면서 죄에 가까워진다.
신자(信者)라도 마음이 진리의 빛을 잃어버릴 때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들고 성향은 오만불손하게 된다.
저급한 욕망에 달뜬 마음은 고르지 못한 정염(情炎)으로 말씀을 떠나고 영혼은 외도(外道)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의 정체(正體)를 정직히 깨닫고 낮아지는 죄인들에게는 다시 은혜(恩惠)를 주신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시 146:8)
이때 지성(知性)은 진리의 빛을 포착한다. 자기가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깨닫게 된다. 왜 그토록 뜨거웠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도 뼈져리도록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 지난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다시 붙들어 일으켜주신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主體的)으로 살아갈 새로운 힘을 주신다.
C. 빛과 회복
영혼의 침체는 시험(試驗)에 든 것이다. 마음이 시험에 들면 유혹(誘惑)에 빠지기 쉽다.
그는 말씀의 빛보다는 잔머리를 굴리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판단(判斷)을 따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더 깊은 시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신자가 시험(試驗)에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 Owen)에 따르면, 시험(試驗)은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된다.
“신자가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순종(順從)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은 마음의 모든 상태다.”(J. Owen)
시인(詩人)은 수많은 악인(惡人)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지(無知)하고 자신은 지혜(智慧)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方式)으로 말씀의 빛을 사용하셔서 시인을 시험(試驗)에서 건져주셨는가?
어떻게 그 빛을 사용(使用)하셔서 오늘날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靈魂)들을 살려주실까? 그것은 대체로 다섯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a. 말씀의 빛은 지성(知性)에 깨달음을 준다.
b. 깨달음은 하나님(God)의 뜻을 알게 한다.
c. 하나님의 뜻을 알면 올바른 질서(秩序)를 안다.
d. 올바른 질서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죄(罪)를 보여준다.
e. 자신의 죄를 보여주면 회개하고 다시 살 은혜(恩惠)를 구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시험은 말씀(Word)의 빛을 멀리하고 세상(世上)의 어둠을 가까이함으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환경(環境)의 어려움은 마음이 시험(試驗)에 들기에 좋은 조건이다. 그때는 영혼(靈魂)이 죄로 말미암아 침체(沈滯)에 빠지기 쉬운 때이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30:1-2)
여기서 시인은 고난의 때에 환경적인 어려움과 영적 침체의 깊음을 동시에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안팎으로 시험이 닥친 것이다.
두려움과 낙심(落心), 염려와 절망 같은 감정(感情)들은 대개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환경적인 어려움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
세상의 번영(繁榮)과 평안(平安)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적 환경에 빠진 것 자체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그 사람들은 아직 영적으로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시험(試驗)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때때로 욥과 같이 뛰어난 신앙(信仰)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도 지속되는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 희망(希望)이 사라질 때 불신자와 꼭같이 낙심과 절망(事實)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이때 신자는 오직 세상에서 인생의 행복을 위한 모든 희망(希望)을 찾는 불신자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인간으로서 신자의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말씀의 빛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한 원인(原因)을 자기 바깥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는 반성(反省) 대신 핑계를, 진실한 회개(悔改) 대신 구차한 변명으로 갈 길을 잃는다. 그런 사람은 결코 진정한 말씀의 빛을 볼 수 없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늘로 향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세계(內面世界)로 향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빛을 가로막고 진리(眞理)에 저항하는 마음의 죄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불경건한 고집과 교만, 하나님께 반항(反抗)하는 것들을 샅샅이 찾아내야 한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지극히 겸비(謙卑)해져야 한다. 다시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도록 간구해야 한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에는 다시 진리(眞理)의 빛이 밝게 비춰온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교만한 자의 마음에서는 거두어져서 겸비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로 흘러간다.
진심으로 당신의 침체된 영혼이 놀랍게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는가? 다시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일들을 젖혀 놓으라.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라.
오직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오”라고 고백(告白)하라. 당신이 비록 징계를 받고 있더라도 다윗에게 주셨던 진리의 빛을 비춰달라고 간구하라.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게 하라. 당신의 기도가 피어린 통곡(慟哭)이 되게 하라.
그러면 반드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 당신의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살려낼 것이다.
두 번의 커다란 범죄로 인해 징계(懲戒)를 받으며 영혼(靈魂)의 어두운 밤을 지냈던 다윗을 생각해보라.
그 징계의 고통 속에서 그는 깨달았고, 그렇게 시련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용서(容恕)하시는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였다.
그의 회개는 범죄보다 열렬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징계의 아픔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자신의 죄악(罪惡) 때문에 가슴 저려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누구를 구원하시겠는가?
다윗을 그렇게 진리(眞理)의 빛으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지금도 범죄한 당신을 그 사람처럼 살려내시기를 원하신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범죄한 우리를 위해 대신 흘려주신 십자가의 보혈(寶血)이 있지 아니한가?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이 어떠한 말씀의 갈증, 진리(眞理)에 대한 굶주림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깊은 영혼의 침체(沈滯) 속에서 절망적으로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은 자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깨어날 때가 아닌가?
거듭난 영혼(靈魂)은 본성상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굶주려 한다.
그 영혼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목말라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것이 영혼의 양식이며 생명(生命)의 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진리의 빛을 받으면 시련을 이기고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2 2023. 9. 10 주일 낮 예배
<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2) >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 본문 해설
시인(詩人)은 나라를 잃고 망명생활(亡命生活)을 하고 있었다. 악인(惡人)들은 승리한 듯이 기세등등했고, 다윗은 고통(苦痛)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날 다윗의 범죄(犯罪)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懲戒)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苦痛)을 받았으며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그것은 “말씀(Word)의 빛(Light)” 때문이었다.
시인(詩人)은 그 큰 징계(懲戒) 속에서도 고통(苦痛)을 당하며 자신에게 두려움이 없었던 또 다른 이유에 대해 말한다.
“여호와는 …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上)
II.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 : 구원
A. 구원의 의미
구약(舊約)에서 구원(救援)이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의미의 핵심은 “어려움과 곤경으로부터의 구출(救出)”을 의미했다. 즉 시련(試鍊)과 고난(苦難)으로부터의 구출(救出)을 뜻했다.
그리하여 다시 모든 방면에서 평안(平安)을 되찾고 이 땅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구원의 결과로 묘사되었다.
그 말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고통과 시련(試鍊)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영원토록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원(救援)의 경험을 통해 신앙(信仰)에 있어서 치명적인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다.
a. 하나님은 모든 신(神)들 위에 뛰어난 능력의 주(主)시다.
b.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c.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한 가족(家族)으로 부르셨다.
d. 하나님은 한번 구원한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引導)하신다.
e. 그러나 하나님은 불순종(不順從)하는 이스라엘에 징계(懲戒)와
용서(容恕)를 동시에 베푸신다.
B. 구약과 예표
이러한 구원(救援)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은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있을 완전한 구원의 예고편이었다. 보다 더 궁극적인 구원(救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Christ)를 통해 주어질 완전한 영적 구원(救援)이었다. 그 구원은 하나님께 순종(順從)할 수 없는 죽은 영혼(靈魂)을 완전히 신비하게 살리셔서, 제사(祭祀) 없이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交際)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신령한 교제(交際)에서 오는 사랑과 생명(生命)으로, 오직 하나님께 순종(順從)하고 죄(罪)를 이기며 사탄의 능력(能力)을 깨뜨리며 살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신양(信仰)의 구원이다.
더욱이 구약(舊約)에서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한 계시(啓示)가 다소 불명확했지만, 신약(新約)에서는 아주 분명하고 풍성하게 계시(啓示)된다.
이 세상에서 신자(信者)의 삶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 길과 같으나 죽은 후에는 완전한 행복(幸福)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행복(幸福)의 핵심은 거기서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이라는 사실(事實)이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개념은 서로 신학적인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발전해왔지만, 그 둘을 비교(比較)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약(舊約)의 구원은 육적이고 물질적인 구원을 통해 영적 구원을 암시(暗示)하고 있고, 신약(新約)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을 통해 육적이고 물질적인 구원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모두 아우르는 전인적(全人的)이고,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포괄하는 영원한 구원(救援)이다.
구약시대(舊約時代)에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육적이고 물질적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救援)을 갈망(渴望)하게 하셨고,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구원을 통해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으며 나라를 잃은 채 원수들에게 쫓기고 압제를 당하는 시인(詩人)을 생각해 보라. 그가 그 절망(絶望)적인 상황에서 겸비(謙卑)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라.
“…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 27:1上)
C. 내 삶과 구원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다. 구약(舊約)에서 그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犯罪)하였다. 교만(驕慢)으로 시작된 인구조사(人口調査)와 정욕(情慾)으로 이루어진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은 그의 아름다운 생애에 큰 오점(汚點)이었다.
선지자의 예언(豫言)대로 징계(懲戒)가 주어졌다. 그것은 이중적(二重的)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영혼(靈魂)의 깊은 침체였다. 범죄(犯罪)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캄캄한 영혼(靈魂)의 깊은 밤 속에서 다윗은 홀로 있었다. 처절한 회개(悔改)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혼(靈魂)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깊이 깨달았다.
어둠을 통해 빛의 고마움을 알 듯이 다윗은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깊은 영적 침체(沈滯)를 통해 영혼(靈魂)을 비취는 복음 진리(眞理)의 빛(Light)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불행(不幸)과 고통(苦痛), 죄(罪)와 징계(懲戒)까지도 합력해서 선(善)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智慧)와 선(善)이었다.
회복(回復)한 후에는 그는 영적 거인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범죄(犯罪)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셔서 구원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信仰人)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후일에 예언(豫言)대로 이루어진 육적이고 환경적인 징계(懲戒)였다. 그것이 바로 압살롬의 반역(叛逆)과 다윗의 망명생활(亡命生活)이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이미 그런 시련(試鍊)을 감당할 믿음이 되어 있었으니, 이 징계(懲戒)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난날의 죄(罪) 때문에 미움이나 복수심을 내리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련(試鍊)을 통해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알게 하심으로 더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탁월한 지혜(智慧)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性品)을 가르쳐주어 자신과 같은 죄악(罪惡)에 빠지지 않게 하게 하심이었다. 따라서 이 징계(懲戒)는 오히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다.
누구도 용서(容恕)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으니, 큰 범죄(犯罪)는 다윗 자신이 저질렀으나 하나님은 용서하심으로 그를 광대한 은혜(恩惠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많은 범죄(犯罪)자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버려진 채 방황하는가? 아무도 돌보는 자 없이, 하나님께 조차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悲慘)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믿음과 은혜(恩惠)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범죄(犯罪)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믿음으로 회개(悔改)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恩惠)의 경험이 없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하는 고통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라. 오늘 겪고 있는 시련(試鍊)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나의 죄(罪)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懲戒)일 수도 있다는 사실(事實)을 생각하라.
거기서 하나님(God)의 구원(救援)을 사모하라.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和睦)을 회복하라. 마음을 다하여 회개(悔改)하고 용서(容恕)의 은혜(恩惠)를 사모하라.
우리에게는 십자가(十字架)에서 속죄(贖罪)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중보자(仲保者)로 계시지 않는가? 다윗은 미처 몰랐던 십자가의 은혜(恩惠)가 있지 않은가?
III. 적용과 결론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3 2023. 9. 17 주일 낮 예배
<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3) >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 본문 해설
“…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下)
II.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 : 생명
A. 생명의 의미
1. 육체의 생명
2. 영혼의 생명
B. 생명과 능력
1. 생명과 성령
2. 성령과 능력
C. 내 삶과 구원
III. 적용과 결론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4 2023. 10. 1 주일 낮 예배
<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 >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I. 본문 해설
II.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
A. 원수들이 실족함
1. 내 살을 먹으려 함
2. 원수들이 실족함
B. 내 마음이 태연함
1. 많은 적군과 전쟁
2. 내 마음이 태연함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5 2023. 10. 8 주일 낮 예배
< 시련 중에 갖게 된 소원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I. 본문 해설
시인은 범죄하였으나 이미 오래전에 회개(悔改)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예고하신 대로 환란이 찾아왔다.
그것은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그를 연단하심으로써 그의 신앙을 정금같이 나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시련(試鍊)의 폭풍을 지나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은혜가 있었다. 말씀의 빛, 구원의 은혜, 생명의 능력이 있었다.
악인이 군대(軍隊)를 이루고, 전쟁이 일어나서 그를 치려 할지라도 시인이 태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은혜 때문이었다.
징계로 말미암은 큰 환란 속에서 시인(詩人)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苦痛) 가운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갔다. 그때 자신의 마음 안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소원을 발견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II. 징계 중에 갖게 된 소원
그것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원수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하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A. 여호와의 집에서 삶
첫째로,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일평생 동안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시 27:4).
“내 평생”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의 모든 생명의 날 동안”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시련의 폭풍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는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만 살고 싶다는 단순한 소원(所願)을 갖게 되었다.
커다란 환란 속에서 발견한 소원이다. 시련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때에 시인의 마음이 세속적인 욕망에서 깨끗하게 된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영원히 살고 싶어 하던 당시 “여호와의 집”이 어떠했는지 기억해 보라.
그때는 아직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聖殿)이 건축되기 전이었다. 당시 “여호와의 집”은 성막으로서 작은 천막에 불과했다.
성소와 지성소를 합해서 약 18평쯤 되고 성막(聖幕)의 뜰까지 합해도 약 300평에 불과한 작은 땅이었다. 그리고 성막 지붕의 덮개는 물돼지 가죽으로 덮여 있는 텐트였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왕(王)으로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거의 다 누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큰 시련을 당하면서 세상의 헛된 욕망(慾望)을 다 버리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 소원에 불타올랐다.
“… 곧 …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下)
B. 아름다움을 바라봄
이 본문에서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노암”( ) 인데, 이는 “아름다움”(beauty) 외에도 “친절”(kindness)을 의미하기도 한다(시 90:17, 3:17).
그러면 시인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죄인(罪人)인 자기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은혜의 친절함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시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친히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온갖 부귀(富貴)와 영화를 누리게 하셨다. 태평성대를 지나게 하셨다.
그런데 그때에는 이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발견(發見)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시인의 살을 찢는 것 같은 모진 시련의 고통(苦痛) 속에서야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
시인이 당한 시련은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그런 시련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여호와의 성품의 “아름다움”(beauty)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악인을 통해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시인을 잊지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친절(親切)한 사랑을 통하여 드러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모든 성품(性品)이 탁월하리만치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 아름다움과 친절하심에 대한 새로운 경험 때문에 시인은 고난과 시련 중에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호와는 나의 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악인들을 통해 퍼부어지는 핍박(逼迫)의 고통보다 그 일의 전개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의 광채가 더욱 찬란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들이 보기에 시인은 단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쓰라린 시련(試鍊)을 통해서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이었다.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당신의 아름다움과 친절함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것은 시인 이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것은 시련을 당하는 시인에게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幸福)은 하나님을 바라봄에 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시간과 장소 속에 드러난 그분의 성품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어거스틴(A. Augustine)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붙잡는 마음의 능동성(能動性)이 있다.
“… 거기에서 … 내 마음의 생각들을 습관의 세력에서 벗기어 그 생각들을 적셔주는 그 빛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 나는 눈 깜박할 순간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A. Augustinus,『고백록』7.17.23
지성(知性)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신 하나님과 스스로 사랑으로 일치하는 연합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存在)가 아니라, 그분의 성품(性品)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幸福)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였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의 지혜(智慧)는 끝이 없지 않은가?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다윗은 나라를 잃은 망명객의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옛날 화려한 왕궁에서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을 그런 처지에서 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랑하던 백성들의 멸시와 천대, 충성스럽던 신하들의 배신 속에서 하나님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토록 큰 시련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이 거룩한 천상(天上)에 올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때에 발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 때문에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된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의 일생은 한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기 위해 많은 시련과 환란을 사용하신다.
이 땅의 욕심에 붙어있는 우리의 마음을 떼어 당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래서 신자에게 고난은 성화의 도구다.
어떤 환란 가운데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 시련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라! 거기서 힘을 얻으라. 주가 함께 하신다.
1.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 1(2023.09.03._주일오전)
다윗의 시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황급히 망명하던 때에 쓰인 시라고 봅니다. 다윗은 악인에게 쫓겨나 왕궁을 떠나고 법궤까지 버려둔 채 황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큰 고난 속에서도 다윗은 결국에는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뼈아픈 시련 속에서 특별한 믿음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쓰라린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선지자에 의해 예고된 바였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 12:10)
II. 여호와는 나의 빛이심
다윗은 극심한 환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기의 죄 때문에 겪도록 예고된 고난이었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 진리의 빛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 27:1)
'여호와'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함 중 가장 거룩한 존함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성함은 모든 이방 백성들에게까지 두루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존함은 일찍이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이전에 겪어본 적이 없는 고난 속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때,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맺은 언약관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이 지금은 비록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에게 은총을 베풀어 지켜주실 것을 믿는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A. 빛의 정체
그러면 ‘빛’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에서 ‘오르’(אוֹרִ֣)라는 이 ‘빛’은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빛입니다. 그냥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그 빛은 우리가 보는 그런 빛이었습니다. 또 윤리적인 빛이 있습니다. “···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런가 하면 세 번째는 신학적인 빛입니다. 여기서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말씀 곧 주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비진리로 어두움에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지나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신학적인 빛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데,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모든 진리의 핵심이자 전부이신 분이 예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범죄한 인간들이 거룩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를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는 빛이신 것입니다. 구약의 빛인 그 빛은 희미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찬란한 빛이었으니 무지몽매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가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살고 죽으셨는지를 깨닫기만 하면 인간의 참된 도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천지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빛이시고 지금도 역시 오류와 어둠 속에 가득한 세상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찬란하게 빛나고, 그분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만이 찬란한 빛을 발하니, 무학자도, 어리석은 자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아무 학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그 빛을 보고 참된 인간의 도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만 높임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천한 사람들, 창기와 기생들, 그리고 세리와 도둑들, 그리고 어리석은 모든 사람들에게조차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 되어서 알지 못하던 이 모든 세계에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의 가치가 무엇이고, 사랑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거미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매 순간순간 이렇게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시종일관 짐승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짐승 같았지만, 때로는 성도답게, 때로는 넘어졌지만, 때로는 예수의 손을 붙들고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직 빛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빛의 정체를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 모든 하나님 말씀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참된 진리의 빛으로 돌아와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빛과 침체
빛과 영적인 침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에 씻을 수 없는 큰 두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는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한 것은 행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동기가 문제였습니다. 인구 조사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인격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에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왕이 자신의 왕국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다윗의 교만으로 보셨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랬습니다. 첫째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마치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은 신정국가였습니다. 둘째로 당시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 병력의 수와 군마 같은 물자를 함께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내 나라는 이렇게 엄청난 대군이 있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의 마필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왕국은 크고 강한 나라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마병을 의지하는 대신 목동이었던 자신을 그렇게 높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 되신 군대를 의지하는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범죄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내렸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만 7만 명이었다고 사무엘하 24장 15절이 보도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과 영혼에 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다윗은 생전 처음으로 간음하였고 극심한 영적인 침체를 겪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고 수많은 후궁과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도 피 끓는 젊은이였으니 시시때때로 정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후궁과 비빈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금단의 실과를 따먹고 싶었던 하와처럼 남편이 있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외로움 속에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휘지 않는 하나님의 법으로 볼 때는 잘못이었습니다. 이 범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말로 이루 다할 수 없이 깊고 어두운 영혼의 쓰라린 밤을 지냈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죄로 말미암아 암흑 같은 영적 교제의 단절 속에서 홀로 몸이 여위어지기까지 몸부림치며 눈물로 침상을 띄워야 했습니다.
그러면 의문이 있습니다. 그 옛날 그처럼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던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두 번이나 저지르고, 자신의 범죄 때문에 7만 명의 백성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의 그림과는 도무지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주님을 찬송하는 시인이자, 매 순간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해 주셨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약 전체에서 다윗처럼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커다란 죄를 두 개나 지을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모두 그의 마음이 잠시 은혜에서 물러나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그의 마음이 진리의 빛에서 멀어졌고, 진리의 아름다움보다는 명예의 아름다움, 말씀의 찬란한 아름다움보다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순식간에 범죄 때문에 엄청난 징계를 받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자들이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악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었으니, 다윗의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징계를 받고 있는 이때만큼은 다윗의 온 마음에는 다행히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범죄할 그때 그렇게 말씀의 빛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때는 그 불빛이 사위어졌고, 징계를 받는 시간에는 오히려 그 진리의 불꽃이 찬란하게 타올라 사리를 분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다윗이 경험한 비극인 것입니다. 그는 절망적인 시련의 때에 캄캄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났습니다. 불쌍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윗이 망명 온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를 맞되 영원히 버림받은 사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으면서도, 언젠가 하나님은 다시 당신의 품으로 자기를 불러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빛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진리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의 육체는 홀로 소외된 가운데 온몸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환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스올에서 눈을 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말씀의 빛으로 대낮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환경에서 오는 쓰라린 상처들을 그 말씀이 포도주가 돼서 치료해 주었고, 양식이 되어서 핍절하게 외로운 이 시인이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조차도 발꿈치를 들고 배신을 하고, 일생동안 생명과 같이 함께 붙어 있었던 친구들이 침을 뱉으며 다윗에게서 돌아섰으나, 그 모든 모욕보다는 말씀의 빛을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컸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주님을 붙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의 빛은 다윗의 지성에 깨달음을 주었고, 감정에는 까리따스의 사랑을, 의지에는 올곧음을 주었습니다. 다시 그 본래의 다윗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끔찍한 살을 에는 것 같은 징계 속에서 그는 바르게 될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지난날 지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함부로 나는 욥과 같이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많은 고난은 우리 스스로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이 실수하셔서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길이 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결코 너의 죄 때문이 아니란다. 너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함 때문에 네가 애매히 겪는 것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오해하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옳습니다. ‘하나님, 내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은 애매한 고난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잊지 말거라. 그 옛날 너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고, 그 죄는 나 보기에 심히 악했으니 지금 네가 당하는 고통은 바로 그때 그 열매이니라.’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는 우선 무조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십시오. ‘아, 이것이 나의 죄 때문이구나!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언젠가 내가 지은 죄, 그것 때문에 내가 고통을 겪고 있고, 쓰라린 채찍을 맞으며, 비루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버린 인간들에게 멸시와 욕을 당하며, 쓰라린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이 나의 죄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겸손히 이렇게 고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내가 범한 죄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더욱 치셔서 나를 고치소서.”
평화롭게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인생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징계를 당하며,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을지라도, 그렇게 해서 바르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징계는 두렵고, 무섭고, 때로는 뼈마디를 다 부러뜨리는 것 같고, ‘아, 내가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결코 범죄한 우리가 미워서 하나님이 보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이 어찌 피로 값 주고 사신 당신의 자녀인 나를 복수하시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차라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분이 나의 죄에 대해서 복수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당신의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고난이라 할지라도, 오늘 당신으로 하여금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은 불결한 사람을 연단하여 순전한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사람 욥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연단을 통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당한 그 시련은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품의 탁월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벤저민 브레킨리지 워필드(B. B. Warfield)라는 구(舊)프린스턴의 구약학 교수는 시편에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을 진리의 참된 찬란한 빛들을 보여주셔서 오늘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워필드가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일이 꼭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것은 사악한 다윗이었으나, 좋으신 하나님은 그의 뼈저린 실패를 통해서라도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구원하시는 위대한 능력과 어머니 같은 자상함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범죄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과 그 믿음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소산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시련 속에 있을 때의 마음은 약해져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어려운 환경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 마음은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특별히 지키지 아니하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으니,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모든 인물 중 시험에 들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었으나 믿음이 없고, 진실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은 악을, 악은 심판을 불러와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 자기의 그릇됨을 깨닫고, 자신의 악함을 주님 앞에 용서를 빌며 주님의 은총 앞에 매달리기를, 어미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가 통곡하며 엄마를 찾는 것 같이 그렇게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 주시고, 그를 고쳐주셔서,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 주셔서 다시 살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씀의 빛을 깨달으면 길이 보입니다. 성령께서 깨달은 말씀을 가진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시 27:1上) 여기에서 "나의"라는 소유격을 눈여겨 보십시오. 나의 빛, my light. 여호와는 항상 빛이십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왜 그것을 나의 빛이라고 하였습니까? 어떻게 감히 여호와가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여호와의 진리가 다윗의 소유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가 진리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시인이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 빛을 활용하며 이제는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고난과 핍박, 시련과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을 기억해 보십시오. 왕궁에서 모든 좋은 것을 누리고, 비빈들에게 에워싸여 사랑을 받고, 만조백관(滿朝百官)에게 존경받을 그때에도 그의 마음이 시험에 들자, 아무것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마음은 정욕과 명예에 꽂혀버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망명객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하도 없고, 황금보석도 없고, 아름다운 왕위도 없고,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다윗의 마음에 비쳤습니다. 이제 그런 것 아무것도 없어도 시인의 영혼은 만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자기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빛이 나의 빛이 되는 우리 자신의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上) 육신의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영혼의 커다란 시름으로 어두운 벌판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외로운 처지에 있습니까? 빗줄기에 바위 패이듯 나의 작은 믿음 사라져 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없는 세상 사랑과 반복되는 유혹, 시험 속에서 당신의 영혼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환경에 대한 불만, 사람에 대한 미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원망 속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하여 무엇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막연한 앙심을 품고 관계없는 사람조차도 원한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끔찍한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온전하게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때일수록 당신이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주님의 품을 파고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때로는 근심과 염려에 휩싸여 있을 때도, 때로는 육신의 질병으로 죽음의 순간이 초침 소리를 내며 다가올 때조차도, 때로는 쓰라린 범죄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하나님을 부를 수조차 없을 때도, 그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희망은 믿음입니다. 우리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시는 그리스도, 우리를 두들겨 패서 징계하실지라도 우리를 당신의 호적에서 파버리지 않으시고, 때리시면서도 뒤돌아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말고 무슨 길이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런 시련의 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낙심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대신 다시 살아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가슴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가슴에 얼굴을 묻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주님은 안아주십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욕을 퍼부으며 저주했던 십자가에 매달린 한 강도가 신앙을 고백했을 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그 낙원을 예비하시고 첫 열매로 당신을 욕하고 비난하던 강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마음에서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 자기의 육체만을 편애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달으면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공정하게 사랑합니다. 고난과 핍박이 겹치고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어떤 희망의 가능성이 단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절망을 하나님 만날 기회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이며, 주님께 징계를 받으며 그 징계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죄에 대해 쓰라린 채찍질을 반복하시는 것은 내가 여전히 주님의 마음에 친아들로 기록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죄를 깨닫고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품을 파고듭니다. 그들은 오직 진리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들이니, 그 진리가 자유를 주기에 여호와를 나의 빛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의 빛으로만 침체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건져내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살다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때 그는 신앙의 깊이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요동치는 현실 때문에 정함이 없는 마음을 갖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용히 침잠(沈潛)하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조차도 겁내지 마시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조차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세계의 운명과 자신의 일생 전체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렸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시인처럼 고백하십시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 73:22)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라”(시 73:24) 온 마음을 다하여 진리의 빛을 구하십시오. 비록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하십시오.
시인이 이 시를 쓰며 혹은 이 시를 쓰게 된 그때를 생각할 때 시인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도망간 남의 나라 땅에서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조롱 소리를 들으며, 피신해 와서 아름다운 후궁도 없고, 노래가락도 없고, 화려한 궁전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 불쌍하게 우거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다윗은 한 나라의 왕도 아니었고, 전쟁터에서 늘 승리했던 위대한 장군도 아니었고, 하나님이 그 많은 계시를 주셔서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작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냥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왕위와 이전에 누렸던 모든 영광을 다 버린 채 벌거벗은 몸으로 재 위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은 비천한 존재이오니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나를 다루소서.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의 죄에 비하면 그 죽음은 가벼운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몸부림치며 회개하는 이 불쌍한 다윗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모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쌍한 다윗을 당신의 은밀한 장막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당신의 품에 안고 앞가슴을 헤쳐 당신의 젖을 물려주셨습니다. 핍절하고 굶주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말씀의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의 젖을 먹으며 그는 자신의 지성 속에 새롭게 들어오는 진리의 빛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사랑 때문에 영혼의 침체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악인의 비난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였으나 시인은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범죄한 다윗의 눈물을 씻겨주시며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자연에서 멀어지면 질병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영혼이 은혜에서 떠나면 죄에 가까워집니다. 신자라도 말씀의 진리의 빛을 잃어버릴 때 어두움이 깃들고 성정(性情)은 오만불손하게 됩니다. 저급한 욕망에 달뜬 마음은 고르지 못한 정념으로 말씀을 떠나고 영혼은 외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만하게 왕의 행세를 하는 대신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어 엎드려졌고, 대굴대굴 구르며 주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겸비한 마음이 되었으니 이는 왕도 아니요 하나님 앞에 그저 싫어 떨쳐버리고 싶은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시인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살아온 모든 날들의 추억이 하나님과 나눈 기억밖에 없는데, 이 시인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는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을 찾았습니다. 염치없지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면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언약 백성임을 기억해 달라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 불쌍한 시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범죄하였으나 하나님은 다윗과 나누었던 그 오래된 아름다운 추억들을 당신도 지워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지성은 진리의 빛을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미끄러졌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잠시 밧세바와의 쾌락을 누리고 큰 나라의 임금이 된 것 같은 우쭐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쓰라린 고통을, 1만 배나 더 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졌습니다. 지난 죄를 모조리 회개하였고, 왕도 필요 없고, 위대한 시인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그냥 희망이 없는 죄인 중 한 사람으로만 여기지 말고,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불러주실 만한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가련한 다윗의 소원에 응답하셨고, 그를 불쌍히 여겨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더 많은 자기 같은 죄인들에게 그 죄의 마지막이 무엇이고, 그 죄의 길에서 얼마나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그 끔찍한 죄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치시는 모진 매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앙심을 품는 대신 피투성이가 된 채 우리 주님의 가슴을 파고들었으니, 어머니이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어떻게 버리실 수 있었겠습니까?
앞을 보아도 길이 없고, 영혼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여러분, 남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거나 혹은 말 못 할 비밀을 간직한 채 고뇌하는 여러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일 수 없습니다. 고통받고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을 내어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침체에 빠진 여러분은 주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 빛과 회복
마지막 세 번째 빛과 회복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는 말씀에 빛보다는 잔머리를 굴리며 인간적인 판단을 따르게 됩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시험 속에 빠지게 되고, 헤어날 길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한 마음에 정욕이 들끓고 범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마는, 그 죄가 그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으니, 그의 영혼의 굶주림은 쾌락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느끼는 빈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신자가 시험에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청교도 존 오웬에 따르면 시험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신자가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은 마음의 모든 상태다.”(J. Owen) 시인은 수많은 악인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자신의 뼈만 남도록 후려치셔서 징계를 하셨으나 그 징계 속에서 결국 죄를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자 당신의 비밀스러운 장막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앞섶을 여시고 당신의 젖을 시인에게 물려주시고 하나님은 그렇게 젖을 빨고 있는 시인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머리를 쓰다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빛은 이제 시인의 마음에 다시 찬란하게 들어왔고, 그 빛은 예전의 빛보다 더 탁월한 광채를 바라는 빛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체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체험이, 그리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그 고통의 경험이 진리의 빛을 더 많이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무지했으나 이제 지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의 빛을 사용하셔서 시험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 빛을 사용하셔서 영혼의 침체 속에서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5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말씀의 빛은 지성에 깨달음을 줍니다. 둘째, 그 깨달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알면 질서를 깨닫습니다. 넷째, 질서에 대한 깨달음은 그 질서에 거스르는 자신의 죄를 또렷이 보여줍니다. ‘아, 내가 곤고한 것이 이 죄 때문이었구나! 오늘날 내가 원수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몽둥이로 피가 터지도록 매를 맞고 이렇게 고통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질서에 어긋난 죄 때문이었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자신의 그런 죄를 보여주면 그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미워합니다. 자기가 왜 그 자신에게 설득되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인구 조사를 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통곡하며 회개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용서를 베푸시고 이전에 없던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멀리 떠났던 탕자가 그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일찍이 베푼 적이 없던 잔칫상을 차려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시험은 말씀을 멀리하고 세상 어두움에 가까이 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의 어려움은 마음이 시험에 들기에 좋은 조건입니다. 그때는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침체에 빠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주님을 위해 눈물 흘리는 것, 간절히 주님 앞에 부르짖는 것, 가난한 마음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매 순간 불현듯 넘어질 수 있는 인간이 자신임을 기억하고, 매 순간 주님의 은혜에 잠겨서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30:2) 시인의 흐느끼는 탄식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은 핍박과 환란이나 혹은 가난이나 말기암을 선고받은 것도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때, 불러도 주님께로부터 들리는 음성이 없는 영혼의 단절을 경험할 때가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때에 환경과 영혼의 어두움을 동시에 겪었습니다. 두려움과 낙심, 염려와 절망 같은 감정들은 대개 환경적인 어려움을 만나는 데서 옵니다. 세상의 번영과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절망적인 환경에 빠진 것 자체가 큰 어려움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때때로 욥과 같이 뛰어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지속되는 어려움 속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 불신자와 똑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망했습니다. 이때 신자는 오직 세상에서 인생의 행복을 위한 모든 희망을 찾는 불신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게 됩니다.
말씀의 빛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더 깊은 영혼의 음부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반성 대신 핑계를, 진실한 회개 대신 구차한 변명으로 갈 길을 잃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열렬한 기도도, 그리고 넉넉한 헌금도,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는 성경 읽기도,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하는 교회 봉사도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의 빛없이 불가능한 것이니, 조용히 진리의 빛을 받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커다란 불명예를 받으셨고,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자세로 돌아갈 때 그의 마음에는 지옥과 방불한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빚쟁이가 와서 독촉을 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싸워 여기저기 얻어맞으며 억울하게 발에 밟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지은 죄도 없이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으며 경찰과 검찰에서 취조를 받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시뻘건 하나님의 말씀의 꼬챙이가 진실하게 회개하려고 무릎을 꿇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며 불로 고문을 합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그의 가슴과 등을 지지고, 날카로운 집게로 열 개의 손톱과 발톱을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등 뒤 가죽을 벗기고 굵은 소금을 뿌리며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그 순간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왜 이렇게 가혹하실까?' '내가 잘못했다는데, 왜 이렇게 끊임없는 고통이 나의 살을 후벼 파고 내 뼈를 쪼아 깨뜨리는 것일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징계를 받을 때 '주는 의로우십니다.' '나는 불의하고 주님의 이 쓰라린 징계는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나의 죄가 이 징계에 의해 대가가 치러질 수 없지만, 주님이 무지한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크고 쓰라린 고통이 필요하다면 저의 팔다리를 자르시고, 온몸을 육시(戮屍)하시더라도 제 정신은 살아서 휘지 않는 주님의 법을 보고 나의 죄를 뉘우치게 해 주시옵소서. 살아서 주님과 원수가 되느니, 죽는 순간에 주님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바실레이아 슈링크(B. Schlink)라는 자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잘못한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다 받고 파멸될지라도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로 우리의 머리를 향하는 대신 우리의 머리를 자기의 죄된 마음 깊은 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가 겪는 모든 이 징계의 고통과 모든 아픔이 오직 나의 죄,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고백할 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자신의 불경건한 고집과 교만,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을 샅샅이 찾아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의 빛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어떠한 난관에 처해 있든지, 어떠한 죄를 짓고,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외로운 땅에 홀로 매 순간 죽음을 상기하며 살아있다 할지라도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겸비한 사람들을 만나 주시니 다시 하나님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찬양)
나의 말의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그러하니 온 마음을 낮추고, 여러분의 마음에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사람을 향한 원망,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을 모두 버리고,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여러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상기할 수 있도록 내 마음에 말씀의 등불을 비춰주시고, 어릴 적 지은 죄까지라도 생각나게 하셔서,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나의 심령을 갈가리 찢고, 나의 심정을 모두 다 찢어서, 나의 심정을 모두 드려 주 앞에 진실한 회개를 드릴 수 있도록, 그렇게 회개하다 죽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침체된 영혼이 회복되기를 바라십니까? 다시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십시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에게 영혼을 고정시키십시오. 내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나의 원수들이 나에게 무엇을 욕하든지, 어떤 시련과 고난이 가득 차 먹구름으로 내 주위를 두르고 있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직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만이 나를 죄에서 구했으니 이 시련에서도 나를 건져 주시는 의지할 여호와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흐느낌이 되게 하시고, 흐느낌이 변하여 피어린 통곡이 되게 하시고, 급기야 토혈(吐血)의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토혈(吐血)의 기도를 드리며 당신께 돌아가고 싶다는 우리들이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떠한 과오를 저질렀든지 간에 당신의 품으로 안아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려내실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의 이 끔찍한 범죄로 인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죽음에 이르는 징계를 받으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냈던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다윗만큼은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용납해 주셔서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보다 작은 죄를 지은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는 그보다 작았지만 회개는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회개는 범죄보다 열렬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징계의 아픔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는 자의식 때문에 그의 마음은 더 큰 고통을 느껴 쓰라림으로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를 구원하시겠습니까? 다윗을 그렇게 진리의 빛으로 살리신 하나님은 지금도 범죄한 당신을 살려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범죄한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분이 계십니다. 다윗은 아직 만나지 못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창에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채, 채찍으로 살점이 모두 뜯겨져 나가는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채 못 박혀 매달렸습니다.
(찬양)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대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우리가 지은 것이 죄밖에 없고, 일생 살아온 길이 예수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성도로 훌륭한 삶을 살았겠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은 죽었다고 독설을 퍼붓고, 무신론자 되기를 고집했고, 예수 믿는 사람을 꼬드겨 신앙을 버리게 만들었고, 그 후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었고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많은 세월 동안 몸부림치며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기에 매우 패역한 때가 없었더라면 제가 어찌 그렇게 상세하게 패역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혼의 침체에 빠져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그림처럼 생생하게 영혼의 침체를 겪을 때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비참해지는지를 여러분에게 그림처럼 보여줄 수 있었겠습니까? 때로는 넘어질 때가 있었기 때문에 넘어지는 자의 비참한 마음과 다시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감격을 아울러 전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시대의 신농처럼 저의 온 몸과 마음은 여러분을 위한 실험 실습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붙잡아주시는 은혜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진노 중에 멸망했을 것이며, 이 자리를 지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살아온 모든 날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날들이고, 시원하게 한 날들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희귀하니, 이런 사람을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여러분에게 희망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시간도 우리 모두가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빛에서 멀어져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고, 그 끔찍한 징계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시간을 갖는 대신 주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빚 없이는 침체된 영혼이 회복될 수 없으니 반드시 이 말씀을 듣고 다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는 없으니 여러분은 저보다는 나은 사람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빨리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모두 진리의 말씀이지만 난 한 구절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할 때 그 구절은 틀린 것입니다. 그가 아니라 나요, 그리고 우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괴수인 사람이 될 수 없으리만치 하나님을 사랑하며 선교를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잊지 않고 일평생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이 손에 피를 묻힌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산다면 기도하기 위해서 손바닥을 볼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회복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이 어떠한 말씀에 갈증, 진리에 대한 굶주림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무 깊은 영혼의 침체 때문에 절망으로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더 자야 되겠습니까? 편안하지도 않은 잠, 매일매일 계속되는 악몽과 가위에 눌리며 살아가는 그런 잠을 언제까지 더 자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낮이요 일어날 때입니다.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에 굶주립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과 만남에 목마릅니다. 영혼의 양식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돌아오십시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 빛으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 앞에 화목한 관계로, 멀리 떠났기 때문에 자기 집의 소중함을 알았던 탕자처럼 미끄러졌었기 때문에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예수 품으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2)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 2(2023.09.10._주일오전)
시인은 나라를 잃고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인들은 마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듯이 기세등등했고, 나라를 잃어버린 다윗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었습니다. 그 말씀의 빛이 시인을 살려주셨고, 그 말씀의 빛 때문에 죽었던 시인의 심령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 큰 징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자신에게 그래도 두려움이 없었던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호와는 ···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오···”(시 27:1上)
II.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 : 구원
그가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시인의 구원이셨기 때문입니다.
A. 구원의 의미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구원이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핵심은 어려움과 곤경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했습니다. 즉, 시련과 원치 않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모든 방면에서 평안을 되찾고, 이 땅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구원의 결과로 묘사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행은 하나님과의 샬롬, 곧 화목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또 이웃과의 화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 가운데 있게 되고, 그 고통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다시 모든 것을 제대로 된 질서 위에 놓으시고, 하나님과 샬롬을 회복하고, 사람과의 샬롬을 회복하고, 그리하여 이 땅과의 샬롬을 회복하여 물질적인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라는 단어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포함하는 것입니다.
역시 구원이라는 단어는 그래도 대부분 시련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 것이 구약의 계시였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영원토록 깊이 아로새겨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원의 경험을 통해 신앙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을 경건의 표징으로 삼았습니다. 400여 년이 넘는 생활 동안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모든 희망이 끊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징벌하시고, 그들을 포악한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신 후, 뒤따라오는 애굽의 병력들을 모두 물로 수장시켜버린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마음속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깊이깊이 아로새겨 주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 사건을 회상하며, 그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구원에 관한 다섯 가지 훌륭한 교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의 주(主)시다. 두 번째, 하나님은 특히 이스라엘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신다. 세 번째, 하나님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을 한 가족으로 부르셨다. 네 번째,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다섯 번째, 그러나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징계하시고, 회개하는 백성들에게는 용서를 동시에 베푸심으로 영원한 언약에 충실하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B. 구약과 예표
이러한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은 신약시대에 있을 완전한 구원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즉, 구약의 모든 구원의 그림은 더 궁극적인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궁극적인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하고도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께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죽은 영혼을 신비한 방식으로 다시 살려내셔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과 같이 제사를 드림으로 잠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잠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리고, 끊어지지 않는 그 교제를 통하여 오는 신령한 사랑과 생명으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죄를 이기며, 사단의 능력을 깨뜨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말하는 구원이었습니다. 더욱이 구약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계시가 불명확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아주 분명하고 풍성하게 사후세계를 계시합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의 삶은 잠깐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은 후에는 완전한 천국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행복의 핵심은 그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구원 개념은 서로 신학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발전해 왔지만, 그 둘을 비교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구원은 육적이고 물질적인 구원을 통해 영적 구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을 통해 육적이고 물질적인 구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영혼과 육체를 모두 아우르는 전인적이고 현세와 내세를 포함하는 영원한 구원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육욕적이고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셨고, 더 궁극적인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생명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C. 내 삶과 구원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나라를 잃은 채 원수에게 쫓기고 악재를 당하는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바로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고, 그 갈망하는 겸비한 마음이 다음과 같이 고백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上)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그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고, 그 사람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범죄 했습니다. 교만으로 시작한 인구 조사는 7만 명의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순간의 정욕으로 이루어진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은 그의 아름다운 생애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범죄한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이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영혼의 깊은 침체였습니다. 이 징계는 그가 범죄 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캄캄한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수많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올렸으나, 하나님은 외면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이며,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죄지은 만큼 처절한 회개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심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어두움을 통해서 빛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이, 다윗은 자신도 그 어느 때조차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깊고 가혹하리만치 긴 영혼의 침체를 통해 하나님의 무서운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내려치는 채찍을 맞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그의 몸이 바짝 야위기까지 그는 하나님을 찾아 눈물을 흘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의 불꽃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마치 상한 갈대처럼 꺾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영혼의 침체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서운 고통이었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때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위대한 장군도 아니었으며,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던 시인도 아니었고, 여러 나라를 통치하며 거느리던 위대한 임금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마리 길 잃어버린 양의 신세가 되어 목자이신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약 없이 자기를 영혼의 깊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 주실 날을 기다리며 주님 앞에 매달리고 울고 또 울고, 흐느끼고 또 흐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그에게 말씀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할 데 없는 영혼의 깊은 밤 속에서 찬란한 복음의 진리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두꺼운 비닐로 캄캄하게 막혀 있는 천장, 눈앞에 1cm도 볼 수 없는 그 어둠의 시간에 천장을 찢고 내려오는 찬란한 빛줄기에 눈이 부셔하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그 영혼의 깊은 침체로부터 건져 주시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인도의 불빛이었으며, 그 불빛을 통해서 영혼의 어두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또 그 영혼에 어두움의 빛이 들어올 때 무지갯빛으로 찬란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목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불행과 고통, 죄와 징계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일생에 걸어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사망의 골짜기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의지할 것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만큼은 충성스러운 신하들도, 자신을 사랑하던 아내와 후궁들도,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 이외에 자신을 그 깊은 영혼의 침체에서 건질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어 골짜기에 미끄러진 채 흐느끼며 울듯이 오직 주님의 도움만을 바라며 눈물로 침상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 깊은 영혼의 침체로부터 회복을 한 다음에 그는 영적인 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죄가 다윗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죄는 다윗이 지었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일찍이 그가 보지 못했던 위대한 구원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범죄로 이름난 죄인이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징계는 후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육적이고 환경적인 징계였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예기치 않은 반역과 그로 인해 벗은 발로 도망쳐야 했던 다윗의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다윗이 이미 그런 시련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난날에 지은 죄 때문에 미워하시거나 복수하시기 위해서 내리신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온 다윗에게 이 큰 시련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겸비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그 시련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을 더욱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탁월한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후 놀라운 지혜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죄악에 빠진 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불행과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기 위하여 다윗을 쓰시려고 그렇게 큰 징계의 고통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징계는 오히려 무지한 다윗을 더 지혜롭게 만들고, 신앙적으로 어린 다윗에게 더 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용서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 신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크게 사랑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범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 죄를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 일찍이 보지 못했던 광대한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징계를 당할 때 다시 한번 자신의 죄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었지만, 다윗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지만, 다윗만큼 하나님의 가슴에 배신의 비수를 꽂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다윗이 지은 죄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그 큰 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를 경험했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분명히 그는 수많은 사람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으로 인구 조사를 했고, 7만 명의 죄 없는 백성이 온역(瘟疫)으로 3일 만에 죽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죄, 다윗의 죄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윗의 죄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죽었다.' '죽일 놈은 다윗이다.' 다윗의 죄가 우리를 모두 불행하게 했다고 수많은 비난을 한 몸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초라한 모습은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위대한 임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아의 집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보기 드문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다윗왕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죄를 감추기 위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간교한 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아의 집안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다윗의 죄, 다윗의 배신 때문에 우리 우리아가 죽었다고 통곡하며 다윗에게 손가락질과 침을 뱉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다 겪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자기가 지은 죄는 그 고통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아무리 멸시와 천대, 모욕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 때문에 겪으신 하나님의 불명예에 비하면 자신이 당하는 수치와 모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존경받는 임금이 아니요 버림받을 몹쓸 인간, 사람 중 쓰레기가 되어서 가장 비루한 죄인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 집안을 무너뜨린 다윗을 징계하신 사건이며, 정의가 회복된 사건이라고까지 다윗에게 마음의 돌을 던졌으니, 그가 의지할 곳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 큰 고통 속에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징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피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에는 하나님의 가슴에 칼을 꽂은 피가 묻어 있었으나, 모든 고통을 겪고 난 후에 자신이 돌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 하나님 여호와의 품뿐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기까지 회개하였고, 온몸이 수척하기까지 참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님의 품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파고들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품에 안겼을 때 하나님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다윗이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 모든 의존하는 것들을 버리고 오직 당신의 품속으로 어린아이처럼 파고드는 다윗을 내치지 않고 두 팔로 꼭 안아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품 안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앞섶을 풀어 영혼이 굶주린 다윗에게 젖을 물렸으니, 말씀의 신령한 젖이었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원기를 회복하면서 죄를 지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며 흘리는 뜨거운 눈물을 하나님은 당신의 손등으로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 흐르는 피를 당신의 손바닥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자신의 배신으로 꽂힌 칼과 그 칼 사이에 흐르는 하나님의 가슴에 피를 느끼며 다시 흐느끼며 통곡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 같은 다윗의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이는 '울지 말라. 울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하는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그런 돌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돌아온 다윗, 그렇게 끔찍한 교만의 죄를 지어 7만 명의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였던 그 흉악한 죄인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은 그의 생명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장막에서 환란 날에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다윗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를 경험하고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 시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이 상처받은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추의 범죄자요, 씻을 수 없는 악을 행하고 벌을 받을 죄인이었으나, 그렇게 눈물로 회개하며 당신의 품에 돌아와서 우는 다윗이 하나님에게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통받아 아파하는 당신의 친 어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오늘날 현실을 돌아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다시 구원의 은혜를 회복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길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무도 돌보는 자 없이 하나님께조차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하게 죽은 것과 같은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과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믿음으로 회개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 고통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보다도 훨씬 작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갈 길을 찾지 못하니, 그는 다윗이 찾았던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겪고 있는 시련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는 죄 없으나 욥처럼 의롭게 고난 당한다고 그렇게 짐작하지 마십시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숙고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십시오.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넉넉히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을 의지할 수 있음을 깊이 깨닫고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어떤 고통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곧장 달려가 그분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진실한 다윗이었으나, 하나님의 가슴을 파고든 다윗이었으나, 그는 아직 예수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범죄한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계시지 않습니까? 구약의 백성들은 고통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고, 그럴 때마다 출애굽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때 그 하나님이 능력으로 지금 여기에, 나를 위해 역사해 주시기를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율법의 정죄의 채찍에 모질게 맞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의 비난하는 욕설과 손가락질이 우리를 가리킬 때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는 공로 없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한히 더러운 죄인인 내가, 그분의 품으로 달려갈 용기를 얻습니다. 보혈을 뿌리신 그 피 길을 자기 의(義)의 신발을 벗어 버리고 맨발로 걸어갑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찢으신 휘장을 지나 주님의 임재가 있는 그 지성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면목 없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빕니다. '나는 공로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보시옵소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그 피에 담그시고 나를 의롭다 불러주셨으니, 예수의 그 칭의케 하시는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드니,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보혈의 공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슬퍼하며 흐느끼는 우리들을 다윗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안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당신의 손등으로 씻기시고, 피어린 통곡의 눈물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등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언제든지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제물로 드리기만 하면 무제한의 용서를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절망적인 사람도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할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왼쪽 손목 위에 면도칼을 살며시 얹고 싶었던 사람들도 오늘 이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보며 희망을 가지십시오. 원수들에게 쫓겨 벼랑 끝에 몰려서 이제 투신하는 것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믿던 절망하는 우리들의 쓰러진 어깨 위에 날개를 달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망의 계곡이 변하여 그 계곡을 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원수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파멸되는 것을 보았으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왜 오늘이 아니라 또 내일이어야 합니까? 그때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면 지금도 우리를 넉넉히 구원할 수 있고, 그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면 지금도 우리를 넉넉히 다시 용서하시고 당신의 품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흐느끼십시오. 피어린 통곡으로 변할 때까지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이옵나이다.' 당신의 용서와 사랑을 비오니 저를 당신의 품에서 내치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주님께 애원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에서 돌이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파멸에서 구원으로, 다시 살 기회를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3)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 3(2023.09.17._주일오전)
시인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커다란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큰 시련과 환란 속에서도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말씀의 빛이 그의 마음을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지만, 이 징계를 통하여 시인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 말씀의 찬란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빛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 깊은 회개의 기도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가 되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비록 원수에게는 짓밟히고 나라를 잃어버린 채 남의 땅에 망명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조롱을 당하는 신세를 겪어야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시인에게 구원이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시인은 오히려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오히려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 내게 두려움이 없는 이유 : 생명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 시인이 시련 속에서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마지막 세 번째 이유인 생명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下) 즉, 시인은 자신이 큰 환란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또 다른 세 번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A. 생명의 의미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생명이라는 것의 현상들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하고, 또 실제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 그 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 학문의 분야에 따라서 육체의 생명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릅니다. 화학이나 열역학 쪽에서 보는 생명의 견해와 생물학이나 혹은 의학 쪽에서 보는 생명에 대한 견해 혹은 철학 쪽에서 보는 생명의 견해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여러 학문에서 탐구해 낸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는 있습니다.
먼저 우리말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크게 사전적으로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있게 하는 힘 혹은 살아있는 힘을 가진 모든 것을 그냥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봄이 와서 온 들녘에 생명이 넘친다.' 이런 예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뱃속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를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미는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도록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크게 차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사전적인 의미와 거의 유사하게 육체의 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그냥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살아있는 것으로 하여금 살아있도록 만드는 본질적인 그 무엇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모든 학문에서 말하는 생명을 전체적으로 통합할 때 생명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있어야지만, 최소한 이런 요건을 갖춰야지만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정도는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진대사입니다.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영양으로 흡수가 되고 에너지화해서 온몸이 움직입니다. 그러면 누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우리의 몸이 그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빨아들인 영양분으로 신진대사를 하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온몸을 소통하며 흐르게 하여 살아갈 기운이 있도록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환경에 스스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양(變樣) 혹은 감응(感應)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더운 지방에 오래 사는 생명체들은 더운 지방에 맞게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것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캄보디아에서 이상 기온이 생겨서 한파가 닥쳤습니다. 수십 명이 그날 죽었습니다. 그런데 최저 온도가 19도였습니다. 19도면 우리 가을 날씨같이 아주 기분이 좋은 날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35도, 40도에 살도록 적응이 되어 있기 때문에 19도 이하로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을 때 신진대사가 멈추고 쇼크를 받으면서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똑같이 에스키모인들에게,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그런 더위가 닥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로서 그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양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생명의 요소는 자기복제(自己複製)입니다. 전사(轉寫)라고 하는데,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자신의 종자 혹은 씨를 계속 퍼뜨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들은 끊임없이 꽃을 피우고 또 수정 작용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를 퍼뜨리려고 하고, 짐승도 끊임없이 번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전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화학물질로부터 에너지를 공급을 받고 또 에너지를 자신의 몸이 사용하는 요건을 갖춰야지만 생명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항상성(恒常性)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크게 놓고 보면 안정돼 있지만 부분적으로 보면 우주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고 불안정합니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불안정함 속에서 자신도 함께 불안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항상 똑같은 성질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스스로 조절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안정되게 지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것을 항상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신진대사, 변양, 자기 전사, 그다음에 화학물질과 에너지 활용, 항상성, 이 다섯 가지 조건을 갖췄을 때 생명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생명이라는 말은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명체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밝혔다는 점에서 국어사전보다는 훨씬 나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육체의 생명과 영혼이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우리를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결합이 어떤 종류의 결합인지, 어떤 형식의 결합인지, 그 결합의 구체적인 내용이, 메커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이 내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내가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을 때, 이 생명이 육체의 생명을 제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끊임없이 육신의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난의 때를 지났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있을 때도 그는 영혼의 생명뿐 아니라 육체의 생명이 멸절될까 봐 염려하면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그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 하는 것을 적군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부하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받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체의 생명을 제외해 놓고 생명의 능력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한 것은 생명의 능력이라고 할 때 육체의 생명의 능력뿐만 아니라 특별히 영혼의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역시 고난받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썼던 시편 18편 1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 힘이란 무엇입니까? 역시 육체의 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기까지 자신의 영혼을 힘 있게 하신 영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이 생명은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능력이라고 한 이 표현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생명의 능력이라는 이 구절이 동격을 나타내는 소유격으로 보아서 "여호와는 내 생명, 곧 능력이십니다."라는 해석을 저는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육체와 영혼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혼의 생명은 영혼이 올바른 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 이것이 영혼의 생명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충만한 생명의 상태에서 멀어질수록 영혼은 육체를 감독하고 지시해야 할 자신의 고유한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육체가 충만한 힘으로 살아있는 것은 건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혼이 올바른 힘으로 충만해져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영혼이 제대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음이 있지만, 영혼은 어떤 경우에도 멸절되거나 죽는 일이 없습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는 실제로 영혼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혼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힘이 매우 약하게 되었거나, 그릇된 힘으로 가득 차서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육체를 이끌 때, 그것을 가리켜 '영혼이 죽었다', '영혼의 생명이 결핍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기서 뜻하는 생명의 의미를 이해하셨을 것 같습니다.
B. 생명과 능력
그러면서 시인은 생명이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이 경험했던 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세 직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이고, 또 하나는 선지자고, 마지막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일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해주고 또 율법을 해석하여 그 시대에 적용해 주는 설교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사장은 죄인들의 편에 서서 그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왕은 하나님 마음에 있는 질서를 자신의 왕권을 통해 나라와 온 백성 안에서 펼쳐서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된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 세 직분 모두 매우 매우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 직분을 받은 사람들을 실제로 직분자로 부르실 때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름을 부을 때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여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줘서 그 일을 감당하기에 모자라지 않게끔 북돋우어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생애에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기름 부음의 사건은 바로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하여 하나님이 기름 부으라고 명하신 다윗을 찾아낸 후 기름 부을 때, 그것이 첫 번째 기름 부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첫 번째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없던 성령으로 다윗이 충만해진 것입니다. 성령에 관해서 구약시대의 경륜과 신약시대의 경륜이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믿은 사람 안에 성령이 오셔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통하게 해주시고 이 교통을 가리켜 내주(內住)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신자를 떠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달랐습니다.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고, 혹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는 것으로 성령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부어졌고, 다윗은 그 순간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충만하게 되었고, 용기와 지혜와 믿음에 있어서 비상하리만치 놀라운 능력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넉넉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질서를 구현할 만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한 후 회개하며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는 것과 성령을 자신에게서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는 것을 다윗이 그렇게 두려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임자 사울의 말로(末路)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한때 기름 부으심을 받고 다윗과 똑같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미치광이처럼 살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전임자 사울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 기도가 바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한 회개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성령의 충만함은 다윗에게 큰 능력이었고, 이 능력은 영적인 싸움에서 다윗으로 하여금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레슬링 경기가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각기 모두 옷을 벗고, 아주 짧은 팬티만 입고 손에 쇠 장식이 박힌 구두, 장갑을 끼고, 철창에 갇힌 채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6장 12절에 나오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을 때 그 씨름이 팔레(πάλη)라는 경기였습니다. 그리스어로 팔레(πάλη)입니다. 그런 씨름에서 선수들이 겨룹니다. 그때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누가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에 의해서 성패가 결정되고, 그런 사람은 승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패자가 되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의 전쟁, 거기서 힘이 없고 무력해질 때 죽임을 당하는 전투의 광경들이 수없이 시인의 마음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의 능력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놀라운 간증이었던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쫓겨 나라를 잃어버리고, 법궤도 두고 온 채 남의 나라 땅에서 걸식을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예루살렘에 돌아갈지 기약할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큰 징계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인의 영혼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고 생명이 가득하게 되자 육체적인 환경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과 정신은 환란과 징계의 아픔을 감당하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넘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능력 있게, 힘 있게 인생을 살아가던 용사와 같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넉넉히 이기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유혹과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사랑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관점에서 본 것이고, 사랑은 그 생명을 관계적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시인은 이렇게 징계를 받으면서 찬란한 말씀의 빛을 발견하였고,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곧 생명의 능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이 오묘한 징계의 섭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죄 없는 7만 명의 소중한 백성들의 목숨을 죽음으로 앗아간 악한 자여.' 이런 원망이 빗발쳤을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더러운 인간이여.' 이러한 손가락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아의 충성스러운 헌신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살인자여,' '너는 하나님께 어떠한 용서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손가락질이 사방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며, 거기서 그 치열한 징계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 징계를 통해 베푸시는 진리의 빛과 구원의 은혜와 생명의 능력을 함께 경험하며, 그는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다윗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의도하셨던 바입니다.
C. 내 삶과 생명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 삶과 하나님의 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 대부분의 사람은 한때 불신자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혼은 죽어 있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었습니다. 영혼이 진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미친 기운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답게 살도록 우리의 육체를 지도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능력이 영혼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영혼이 죽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의 귀에 복음이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점점 점점 크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단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분이 너를 구원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보배 피로 네가 구원을 받았다" 이러한 복음의 음성이 우리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고, 걸어온 인생길 자체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걸어오면서 괜히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했던 죄에 대해 고백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 가득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회개했을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만하게 부어주셨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험한 세상을 기쁨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바뀐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안에 부어지자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아들을 사랑하라.’고 간절히 부탁하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놀라운 생명이 깃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 혹은 아들인 자신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왜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없습니까? 성령은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을 사랑하라는 동의어의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라고 명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계신 것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굳이 성령을 사랑하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 우리의 구원의 경험이었습니다.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종종 삶을 접고 싶은 인생의 위태로운 고비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수없이 그런 고비를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제 인생에 뚜렷이 각인된 한때는 제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졸업반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겨누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내 죄가 컸고, 언제나 나는 죄인이었지만, 그 상황은 죄에 비해 더욱 가혹하게 느껴지리만치 너무 무서운 상황이었습니다. 생명처럼 사랑하던 할머니는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암 투병을 하시며 죽음을 앞두고 계셨고, 살던 집은 사기를 당하여 길거리에 내쫓기게 되었고, 직업은 없으니 수입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최루탄 가스를 마시고 모세기관지염이 되어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도저히 우리의 형편으로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의료보험 혜택도 끊어졌었습니다. 그때 사면을 돌아보아도 예전에는 그렇게 나하고 친했던 사람도 많고 도움을 기꺼이 줄 만한 사람도 많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7년 동안 다니던 교회는 사임을 하고 떠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으로 휴교하던 때니까 가서 하루에 한 열다섯 시간씩 생명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시간을 내어 채플실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안 됐지만 그런 와중에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 시간 반에서 길면 세 시간 반까지,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옷이 모두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되었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채플실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계단을 밟으며 내려갑니다. 그때 마음에 아무 가진 것도 없지만 결심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찬양)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내가 믿을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복받쳐 오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며, 벌레와 같은 죄인에게 무엇 때문에 끝없는 은혜를 베푸시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단에 다시 앉아 긴 통곡의 기도를 드리고, 5층을 걸어서 4층, 3층, 2층,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마다 경험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 마음에 넘치는 생명의 변화였습니다. '그래! 충만한 생명을 내게 주셨으니, 내가 넉넉히 이길 것이다.' 원수도 사랑하며 내 운명까지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자신감은 나를 믿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앞뒤로 모든 상황은 막혔고, 가정도 깨지기 직전이고, 더 이상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죽을 것 같은 때에 닥치면 신자라도 자살의 유혹을 받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왔다가 막상 밤거리에 나와 보니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걸어옵니다. 엎드려서 기도를 해보려고 하지만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눌리고 또 적당하게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죄도 짓고 강퍅해졌을 터이니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리가 없습니다. 얼마를 엎드려 시간을 보내고 나니 뭔가 액체가 흥건해졌습니다. 눈물이 아니라 침이었습니다. 졸면서 얼마나 잤는지 침에 침을 흘려 손바닥과 탁자 위가 흥건해지도록 잤습니다. 깨고 나니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닥치면서 더 절망의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 이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잠시 후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나니까 살아온 모든 날이 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혈기를 부리며 살았던 날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 시작하니, 하나님이 그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세상에 많은 근심, 걱정, 가정에 수많은 문제가 있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의 그림이 자신 앞에 말하자면 압도하듯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골고다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광경이었습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 십자가를 보면서 내 고통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셔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의 십자가 고난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에 밀려와 참을 수가 없기에 그 고통 때문에 떨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셨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내가 고난받는 이 순간에도 날 위해 십자가에, 내 마음에, 못 박혀 계셨구나!' 이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투사시킵니다. 그러자 나와 예수 사이에 있던 죄의 담은 허물어지고 그분과 나는 하나 되고, 그분과 내가 하나 되고 나니 나의 그 고난이 예수의 고난이 되고, 예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니, 그 예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던 나의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창에 허리 상하고, 팔다리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며 생명이 끊어져 나가는 고통을 경험했다면, 나는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이 나의 잘못된 자아를, 옛 본성을 죽이는 그 과정을 통해 똑같은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픔에 대한 공통적인 경험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증가시키고, 죽는 것만큼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얼마를 기도했는지 사방이 고요할 때 눈을 떠보니 함께 기도하던 교인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밤거리에 가을바람이 불면서 얼굴을 스쳐 가는데,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같이 죄 많은 것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적이 없으신 예수님과는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많은 고통 속에 통곡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내가 주님의 것이오니 주 뜻대로 하옵소서. 내가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지 않았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생명의 기운이 다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곧 생명에 대한 경험입니다. 인생을 힘들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힘든 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조차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세상의 본질이 그러하니 우리 죽는 날까지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만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그 처음 사랑의 능력을 내 마음에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이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절망을 이기고 극복하며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굽이굽이 고통과 시련이 있고,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징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을 보십시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징계였지만 그 징계를 통해 하나님만이 자신의 생명이시며, 우리 여호와만이 자신의 생명의 능력이심을 경험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망명 생활하는 중에 오히려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경험했고, 거친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사랑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매달려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때로는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을지라도 '내게는 두려움이 없사옵나이다.' 고백하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생명의 능력의 은혜가 오늘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이 충만한 생명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2-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내가 의지하는 여호와 4(2023.10.01._주일오전)
시인은 그 큰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끊임없이 샘솟듯 솟아나는 생명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난 후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묘사합니다.
II.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
그것은 시련이 폭풍처럼 닥칠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범죄한 죄를 침상을 눈물로 띄우기까지 기도했으며, 요를 적시기까지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다윗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 징계는 다윗이 미워서 내린 복수의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징계는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더 연단을 받은 후에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의 땅으로 망명을 와야 했습니다. 가족들이 자신을 대적하고,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일생동안 나라를 세우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자기의 충신들 가운데 변절자들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의 편에 붙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동지였고 주군이었던, 사랑하고 충성했던 다윗에게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는 불의한 압살롬과 함께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많은 백성이 한때는 목자처럼 여기며 다윗을 따랐고, 그 품 안에서 쉼을 얻었으니, 그는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한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은 그에게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갖은 저주와 모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망명의 길로 떠나왔습니다. 그가 오늘 많은 원수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A. 원수들이 실족함
2절에 보면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둘러싼 악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압살롬은 승자가 된 것 같았고, 다윗은 완전한 패배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섭리 속에서 다윗을 다루시고자 징계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이는 그에게 악에 대해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요 이 징계를 통하여 그가 도저히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징계 속에서 매만 맞은 것이 아니라 위로도 받았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시 27:2上) 사람은 사람의 살을 먹지 않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당시에 흔히 있었던 맹수들의 습격을 염두에 둔 그림 언어입니다. 맹수들이 습격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이고, 사냥하기 위해서입니다. 양이든지, 염소든지, 소든지, 심지어 사람이든지 간에 공격하여 살을 뜯어 먹는 것이 맹수입니다. 그렇게 악인들이 맹렬한 분노로 다윗을 대적했지만, 다윗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의 원수들인 그들이 자신에게 덤벼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던 것입니다. 시인이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 힘이 없이 이제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군대도 없이 남의 나라에 쫓겨 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맹렬하게 맹수처럼 달려드는 그들을 하나님은 다루셨습니다. 그들의 무서움을 보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품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한 손으로 당신의 품에 다윗을 안으시고, 또 한 손으로 다윗에게 덤벼드는 그 수많은 원수를 다루셨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맹렬한 분노와 용기로 다윗을 삼켜버리고자 달려들었으나, 그들 스스로 발을 헛디뎌서 발이 꺾어지고, 무릎이 부러지고, 발등이 부서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다윗은 자신이 비록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임을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악인들보다는 범죄하고 징계를 받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울면서 하나님 앞에 나라의 위기를 호소하며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구했을 때,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 명이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된 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창 하나 겨누지 않고, 활 하나 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앗수르의 군대들을 시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이러한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해하려고, 뜯어먹으려고 달려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심으로써 이 시인은 하나님이 한 손으로는 자신을 안으시고 한 손으로 그들을 다루시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받는 징계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에 갔을 때 제 마음을 울린 찬송가가 생각이 납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원수들은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다윗 앞에 실족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다윗이 잘못했으면 자신의 손으로 그를 때리고 징계할지라도, 원수들이 다윗을 해치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전히 다윗은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당신의 자녀였습니다.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下)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다윗을 때려 징계할지라도, 다윗을 해치는 원수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원수로 여기시고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셨으니, 그의 살을 뜯어 먹으려고 맹렬하게 달려오던 그들의 기세는 꺾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 중에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큰 징계 속에서도, 그 징계는 다윗을 아프게 했으나, 징계가 아니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은 그의 죄악의 어두움 때문에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건질 수 없도록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되는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신이 환경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그 환경 속에서 늘 살아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자신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나, 다윗은 그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죄 위에 죄를 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자기 삶의 사태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돌아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형편 속에 있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는 원수들이 우리 주위에 즐비하고, 그들이 때로는 군대를 이루어 우리를 대적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하여 분투하기 때문에 악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이때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원수 사단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모든 악한 자들과 함께 대적합니다. 이때 그들은 다수요, 자신은 홀로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현실을 극복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기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품으로 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품으로 피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우리에게 기적을 행하십니다. 내가 원수 갚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시고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고, 때로는 그 시련이 약속이나 한 듯이 폭풍처럼 밀려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육신의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육신의 현실을 보는 눈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전달해 줍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형통하고, 모든 것이 편안하면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던 마음은 무뎌지게 되고, 또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존하던 마음도 약하게 되어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것 같았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다루실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맹렬하게 공격하였으나 실족했고, 시인을 잡고 살을 먹으려고 하였으나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언제 사형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바울을 향해 착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많이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렇게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들을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시련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시련 속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미 회개하였어도 징계를 통하여 다시 한번 우리의 죄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또 자신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행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큰 징계 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와 함께 위로를 경험했으니, 바로 원수들을 실족케 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통하여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증거를 다윗 앞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께 매를 맞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분의 품 안에서 자기의 살을 먹으러 달려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원수의 시체와 같이 된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 속에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지명하여 불러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분의 품으로 피하고, 그분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것이 징계일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나니, 여러분 앞에서 원수들이 실족하는 것을 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마음을 굳건히 하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우리 주님을 의지할 결심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내 마음이 태연함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태연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3절에서 말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그런데 여기 "태연하리로다"라고 번역된 것은 의역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보테아흐(בוֹטֵֽחַ)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타흐(בָּטח)라는 동사에 목적어가 뒤에 따라와서 "무엇 무엇에 희망을 두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라'. '내가 하나님을 바라리이다', '여종이 주모를 바람같이', '종이 상전을 바람같이'라고 할 때 '바라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그분께 둔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희망을 두리로다."(시 27:3) 그러니까 자연히 그 믿음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오고, 전쟁이 눈앞에 벌어져 자신을 치려는 상황이 닥칠지라도 시인은 태연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대와 전쟁, 다윗은 신물 나도록 두 명사와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때마다 사랑하는 부하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아야 했습니다. 자신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부상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군대, 전쟁, 이것은 그가 생각하기만 해도 그 그림은 아주 현실적으로 커다란 재앙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시 27'3上) 진을 칠 정도면 이것은 대군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무력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모든 군대의 목표가 한 사람 다윗을 멸망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싸울 백 명의 군대도 자신을 지킬 한 자루의 창과 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모든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었기에 그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진 칠지라도, 또 전쟁이 일어나 자신을 공격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태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자기를 지킬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징계를 내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미워서 다윗을 죽이려고 내리는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다윗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연단한 후에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은 다윗을 때릴지라도 원수들이 다윗에게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을 해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군대로 악한 자들의 군대를 대적하게 하여 무너뜨려 버리시고, 다윗은 당신의 품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고통 가운데 예루살렘을 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힘 없이 악인들의 저주를 한 몸에 받아야 했습니다. 충성스럽던 신하들은 배신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꿰찼습니다. 그리고 한때 자기를 목자처럼 의지하던 백성들은 이제 다윗을 저주하고 원망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보였으나, 이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신 후에 더 크고 위대한 임금으로 사용하여 여기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풍부한 계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닥치고 있는 시련과 고통이 여러분의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겸비해져서 이 시인처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라며 주님 앞에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죄가 많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실제로 죄를 별로 짓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잘못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간절히 통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내세우는 위선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리는 직업 그 자체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통하여 동족들의 돈을 빼앗아서 먹고 사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바리새인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했고, 세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바리새인이 받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이 죄인인 세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성전을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다. 그리고 어떤 시련이 닥치든지 내가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모두 구하며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내 마음이 태연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태연하다'라는 것은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평강이었습니다.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것 때문에 군대들이 진치고 전쟁이 일어나서 자기에게 창칼을 겨눌지라도 그의 마음은 안온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주님의 품으로 피한 사람, 주님의 의(義)로 덧입혀진 사람 속에 찾아오는 진정한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이렇게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시인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아프고 요동치는 현실 속에서 마음이 태연하였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물질이 가져다준 태연함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희망을 단호하게 버리고, 오직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나를 바라보는 데서 밀려오는 평안이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오늘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흘리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혹은 타인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그를 위해 비는 눈물의 기도가 사라진 것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비록 우리가 잘못할 때 당신은 때리시나 원수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피한다면 그분의 품에서 쉼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 아니 최소한 적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때로는 고통을 받고,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회개했지만, 하나님은 세월이 흐른 다음 다윗을 징계하셨습니다.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이 징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찬란한 말씀의 빛을 보여주시고,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게 하시고, 생명의 능력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다윗을 때리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을 정금 같게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때리시는데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여기며, 그분의 가슴을 피난처 장막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당신의 은혜의 비밀을 그에게 보여주셨고, 이로 인하여 다윗은 한없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찬란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어두움 때문에 말씀의 밝은 빛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무능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했고, 사망에 에워싸였기 때문에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깊이 주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소망을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납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사셔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당신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 앞에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신 핏덩이 같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고, 희망을 하나님께만 두며, 원수들에게 에워싸여도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시련 중에 갖게 된 소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시인은 범죄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고하신 바와 같이 다윗에게 환란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다윗을 연단하심으로써 그의 신앙을 정금같이 하여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시련의 폭풍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남이 모르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말씀의 빛, 구원의 은혜, 생명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시련의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일생일대의 큰 환란 속에서 시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눈먼 자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그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사랑하리
II. 시련 중에 갖게 된 소원
오히려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때 시인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한 가지 소원을 발견했습니다. 그 소원은 바로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련 중에 갖게 된 소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왕궁을 버린 채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을 왔고, 언제 다시 나라를 되찾고 돌아갈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악한 원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때문에 승리했다고 믿었고, 다윗은 하나님이 저주하여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수들에게 멸시와 함께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껏 믿음으로 살아왔던 존경받는 다윗에게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 시인의 마음에 숨길 수 없이 용솟음치는 강력한 소원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A. 여호와의 집에서 삶
첫째로 시인이 자신의 일평생 동안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산다'는 말에 반대말은 '죽는다'가 아니라 '머문다'(‘떠돈다’, 반대로 말씀하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시 신앙고백을 보면 하나님 앞에 모두 추수하고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자기들이 원래 어떤 정체성을 가진 백성들이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떠도는 아람 자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떠도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양떼를 치고 소떼를 치면서도 그는 어느 곳에 가든지 나그네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거처를 정하고 삶의 터전으로 삼아서 생명 있는 날 동안에 거기에서 생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 반대말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오늘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겠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단순한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거기를 중심으로 거기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개하고 꽃 피우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거기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겪고 해석하고 그 해석을 따라 좀 더 나은 삶을 살다가 숨을 거두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내 평생"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의 모든 생명의 날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의 폭풍 속에서도 시인은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만 살고 싶다는 단순한 소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왕입니다. 왕은 왕궁에 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곳은 왕궁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커다란 환란 속에서 발견한 그의 마음에 강력한 소원이었습니다. 시련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때에 시인의 마음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깨끗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약 650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 황제들은 대부분 아주 소수의 황제를 제외하고는 이른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반역으로 인한 모살과 무절제한 탐식과 운동 부족, 그리고 여색을 탐하는 것 같은 욕망으로 인해서 그들은 이른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중국 황제들의 삶입니다. 책을 한 권 다 읽었을 때 황제들이 행복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단연코 ‘노(no)’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왕궁에 두께 3m 정도의 돌멩이를 모두 깔아야 했고, 잠자는 동안에도 2층에서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는 눈길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니, 황제의 삶이 어찌 행복했겠습니까?
다윗은 황제까지 이르지는 못해도 이스라엘의 최고 번영기의 제왕이었습니다. 모든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영원히 살고 싶어 했던 집은 여호와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여호와의 집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아직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름이 여호와의 집이지만, 사실은 여호와의 텐트였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합해서 약 열여덟 평쯤 되고, 그 앞에 있는 휘장을 두른 성막의 뜰을 모두 합해도 약 삼백 평에 불과한 작은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 지붕의 덮개는 물돼지 가죽으로 덮여 있는 텐트였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그 천막의 지붕 밖에는 우중충한 빛깔을 띠었을 것입니다. 아무 예쁠 것도 없고 사랑스러울 것도 없는 그 텐트에서 내 평생동안 살고 싶다고 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거의 다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시련을 당하면서 세상의 헛된 욕망을 모두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 소원에 불타올랐습니다. “··· 곧 ···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한번 보십시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 시인의 소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이런 진실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큰 교만으로 인구 조사를 하고,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시련이 다윗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회개와 시련이 다윗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 이 고난을 통해 이 세상 부귀영화의 헛됨을 알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임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40년 전만 해도 교회는 항상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교회를 지키시는 권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남자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권사님들이 대부분 교회에 와서 저녁 먹고 오셔서 기도하시다가, 또 잠깐 졸으시다가, 또 기도하시다가, 그렇게 하는 분들이 교회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밤에라도 문을 열고 가면 교회 한 귀퉁이에는 그런 권사님들이 교회를 지키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편한 집 놔두고 연세 든 나이에 교회를 사랑했던 것은 그 교회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랑과 감격이 그의 마음에 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지옥 같을 수도 있고, 천국 같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고 본인도 시험에 들면, 교회는 최고의 지옥 같은 곳입니다. 또 교회는 시험에 들지 않아도 본인이 신앙에서 미끄러져 방황을 하기 시작하면, 교회 오는 일만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겨보기도 하지만, 어디에 간들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과의 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또 다른 곳으로 교회를 옮겨서 똑같은 일들을 겪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말씀의 은혜에 넘치고, 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게 될 때, 교회처럼 행복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갑갑하고 외로울 때도 교회로 달려오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와서 눈물을 흘립니다. 원하는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을 때도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어린 자녀들에게 힘겨운 일이 생겼을 때도 교회에서 눈물을 쏟으며 자녀들을 위해 웁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교회의 찾아와서 그 마음을 쏟아놓으며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게 됩니다. 거기서 응답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제가 회심하고 두 번째 옮긴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는데, 저도 열심히 설교를 들으려고 애썼고, 노트에 필기까지 빼곡히 하면서 설교를 들으려고 애를 쓰는데, 필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하시겠다고 교회를 비우시고 1년 동안 미국을 가셨고, 교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고, 심지어 회의할 때는 큰 소리가 교회 바깥까지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제 생애 최고의 은혜 생활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믿은 어린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의 신앙은 교회 탓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없었는데도 퇴근하면 항상 예배당을 들렀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어린 양떼들과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이면 한 주간을 교회에서 직장에 출근하며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은혜가 넘치던 때 중에 한 시기였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시편 속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이여,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나이다."라고 한 그 고백과 아주 기가 막힌 짝을 이룹니다. 더 이상 내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서 방황하는 삶을 사는 대신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거기서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내 인생을 살아가며, 거기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며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많은 일을 겪어보니 시인이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여호와의 집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아름다움을 바라봄
마지막 두 번째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노암'(נֹעַם)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아름다움'이라는 뜻도 있지만, 시편 90편 17절, 3편 17절에 보면 '친절함'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친절함, 곧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시인에게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시인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크기와 색깔, 형체와 모양, 부피와 넓이를 가지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들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보았다는 것이지, 우리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그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육신에 감각의 눈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발견했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또 더 발견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인 자기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친절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미루어 추측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물 한 잔을 대접할 때 (컵에) 정성껏 담아서 공손하게 가지고 오면 그것은 물 주전자를 내려놓으면서 컵을 갖다가 따라 먹으라는 대접보다는 그를 마음으로 깊이 존중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갈 것 같아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매였는데, 그야말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 몰렸습니다. 직장도 잃어버렸고, 건강도 심하게 상했고, 의지할 때라고는 아무 데도 없고, 돈도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월세방에서 쫓겨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임에도 삶보다는 죽음이 친근하게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힘도 잃어버린 채 그냥 한없이 까부러져서 절망 속에 누워서 눈물만 흘리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가서 '누구세요?' 그리고 문을 열어보니까 아주 오래전에 알던 친구였습니다. 그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이다. 너 어떻게 지내니? 소식을 듣자 하니 네가 몹시 아프고 직장도 잃어버리고 힘들게 산다는데, 어젯밤에 네가 꿈에 보이더라. 네가 너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내가 너를 찾아왔다.' 그러면서 같이 차 한 잔을 나누고 가면서 두툼한 봉투를 남겨두었습니다. '이것으로 병도 치료하고 월세도 내고, 걱정하지 말고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갚아라.' 그리고 두고 갔습니다. 친구와 헤어진 다음에 이 자매는 빈방에서 혼자 그 봉투를 들고 열어봤습니다. 오백만 원은 될 법한 엄청난 액수의 돈이 봉투 안에 들어 있었고, 그 봉투를 꽉 잡고 이 자매는 펑펑 울었습니다. 묻고 싶은 건 이것입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돈이 생겼으면 '아! 신난다. 오늘 진짜 운수 대박이구나. 야! 진짜 땡잡았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펑펑 웁니다. 그리고 그 친구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받은 건 돈인데, 이 자매가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것입니다. 자기같이 미련하고 완악하여 이렇게 고통을 받고, 지혜가 부족하고 또 절제 없이 살아서 이렇게 어려운 인생의 날들을 대비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도저히 더는 살 기력이 없을 것 같은 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려서 죽음을 생각할 때였는데, 하나님이 친구를 통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때 이 자매가 발견한 건 돈이 아니라 하나님 성품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성품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신자의 일생은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경험하면서 사는가에 의해서 영적인 삶의 풍부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 시험 볼 때의 일이었습니다. 4년 야간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시험을 보는데, 경쟁률이 20대 1이었습니다. 1,200명 중에 60명을 뽑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수험번호가 7번이었는데, 한 사람도 앞에 1번부터 6번까지 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확률적으로 '아! 나도 이제 떨어지겠구나.' 그러고 봉투를 받았는데, 쫙 열어보니까 '석사과정에 합격하신 것을 통지합니다.' 그래서 봉투를 들고 천천히 걸어서 정신도 없이 학교 뜰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서 정원에 동산이 있는 곳에서 나무 하나를 붙들고 주저앉아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제 손에 들린 것은 합격 통지서였지만, 제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나타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가장 많이 모여 있냐 하면 성경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잘 깨닫고 그것을 자기에게 적용할 때 객관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내가 주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좋아합니다. 예쁨은 사랑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예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쁨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시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친히 모든 것을 주셔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셨고, 태평성대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별로 발견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망명객으로 와 있는 비참한 신세, 그 처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제나 거하시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어떤 것이 되냐 하면 이것입니다. 신랑이 맹인이면 신붓감이 아무리 예쁜 클레오파트라가 앞에 서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못 봅니다.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상상할 뿐입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남자에게는 목소리나 혹은 자기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 신붓감을 결정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외모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쁨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사랑이 쏠리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래서 재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태평성대와 같은 평안한 시기를 주시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셨으니 그게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 하나하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니 그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고 예쁜 분이신가? 이것을 발견했으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됐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때는 마음의 눈이 닫혔던 것입니다. 그걸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매 순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지구를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일 가운데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속에서도 하루 동안 하나님이 내게 보여준 그 아름다움의 성품이 얼마나 예뻤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때 새로운 사랑이 이 속에서 샘솟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랑이 (샘솟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계속 사랑을 유지하고 살려면 화장품 가지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유효기간은 6개월밖에 안 됩니다. 그다음에는 인물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그 아름다운 성품의 빛이 무언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때, 그렇게 될 때 그 예쁨을 보고 사랑이 계속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의 깊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와 사랑과 친절함에 있어서 깊이가 끝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여주셔도 그 밑에는 더 많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왕궁에서가 아니라, 태평성대의 때가 아니라, 온갖 춤과 노래와 화려한 향연 속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을 찢는 것 같은 모진 시련의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당한 시련은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원인은 예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시련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악인을 통해서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시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친절함을 통해 드러났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고난받고 마음이 가난해진 때였기에 시인의 마음은 세상의 예쁨보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모든 성품이 탁월하리만치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친절하심에 대한 경험 때문에 시인은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악인들을 통해 퍼부어지는 비난과 핍박의 고통보다 그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광채가 더욱 찬란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악인들을 통해 퍼부어지는 비난과 핍박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들이 전개되는 과정을 통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의 광채가 찬란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태평할 때 덜 사랑했던 하나님을 고난 속에서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남들이 보기에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같았습니다. 나라는 악한 자들이 차지했고,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셨고, 다윗은 버리셨다고 사람들에게 선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미워하는 사람은 다윗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쓰레기같이 버림받은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쓰라린 시련을 통해서 이전에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일찍이 모든 풍족한 조건 속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친절함을 경험하게 되자, 시인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모든 영화를 누릴 때보다 말입니다.
(찬양)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것은 시인 이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비밀이었습니다. 시련의 아픔보다 하나님의 예쁨을 발견한 기쁨이 더 컸기 때문에 시인은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시간과 장소 속에 드러난 그분의 성품을 마음으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이기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거울이 있으면 거울에 꽃이 비치고 또 거울에 풀이 비추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이지만 않고, 마음은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예쁨의 대상을 찾습니다. 그리고 진짜 예쁨의 대상을 발견하면 마음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서 그 예쁜 것을 꽉 움켜쥐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의 능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마음의 능동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가 최초로 자신의 마음에 들리자, 그 능동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꽉 붙들고 알았던 경험을 고백록 7권 17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거기에서 … 내 마음의 생각들을 습관의 세력에서 벗기어 그 생각들을 적셔주는 그 빛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 나는 눈 깜박할 순간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뒷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눈 깜빡할 순간에 스스로 계신" 무슨 뜻입니까?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즉, 누가 창조하거나 누구를 의존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한 것입니까? 정신이 그렇게 도달하게 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가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봤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간절히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 만나기 이전에 살았던 자신의 인생까지 다 해석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붙들면 그분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신 하나님과 ······ 잘 들으십시오. 다시 말하겠습니다. 지성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신 하나님과 스스로 일치하는 연합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지성이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일치하는 연합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바로 사랑 때문에 생기는 연합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연합의 경험을 갖게 될 때 그 사랑의 눈으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 하는 것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빛은 보이지 않지만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일곱 가지 찬란한 빛깔로 나타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성품을 발견하게 되면 'I can't stop loving you',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인간의 가장 큰 숙제는 이 허무한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질 이 허무한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합당한 사랑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숙제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늙게 돼 있고, 늙으면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에 삼켜지고, 결국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일생입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텔레비전의 스타들도 어느 때 보면 '아 저 사람 왜 저렇게 늙었지?' 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얼마나 예쁜 분이신가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기쁨이 샘솟듯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자체를 바꿔 놓을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일생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항상 풍족하고 돈 많고 여유롭고 사업이 잘되고 모든 것이 좋을 때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의 경험에 의하면 고난과 시련이 겹칠 때, 고통과 아픔이 계속될 때, 그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더 찬란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누린 시절은 우리에게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그 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처음 하나님의 예쁨에 눈빛에 우리의 마음이 터지던 그날이 우리 회심의 때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성품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의 존재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의 빛을 가난 속에서도, 애통하는 눈물 속에서도, 억울하게 당하면서도, 온유한 가운데서도,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면서도,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어제 120만 명이 모이는 불꽃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안 갔는데,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뭔지 아십니까? 여러 나라가 중국도 참석하고 폴란드 같은 나라도 참석했는데, 그 불꽃을 만드는 기본적인 기술은 뭐냐 하면 화약입니다. 화약인데, 그 화약을 쏘면 색깔이 눈부신 반짝이는 빛부터 시작해서 빨강, 파랑, 노랑, 온갖 색깔이 나옵니다. 그 색깔을 어떻게 하는 거냐면 화약에다 촉매제를 집어넣습니다. 촉매제를 구리의 가루를 집어넣느냐 아연의 가루를 집어넣느냐 혹은 쇠를 집어넣느냐, 여러 가지 금속의 색깔을 적절히 조합해서 집어넣을 때에 쏘면 그것이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각종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성품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면 그 아름다움은 형통할 때만 보이는 게 아니라 가장 극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몇 년 전에 단체 관람했던 <교회 오빠> 그 영화에도 보면 자기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진통제를 끊지 않습니까? 그건 뭐냐 하면 그 기쁨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지 않습니까?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윗은 나라를 잃은 망명객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화려한 왕궁에서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가 목숨 바쳐 사랑하던 백성들의 멸시와 천대, 충성스럽던 신하들의 배신 속에서 하나님의 지고(至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윗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을 에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예쁘심을 다윗에게 충만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보다 망명객 처지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더욱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이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어리석은 말임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토록 큰 시련을 통해 시인의 마음은 거룩한 천상으로 올려졌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발견하고 나니 나라를 빼앗긴 것도, 남의 나라 땅에 유배를 온 것도,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것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모든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의 빛이 비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폭죽속에 들어가는 매체(媒體)처럼 공중으로 쏘아 올려서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의 온갖 아름다운 빛들을 연출했으니, 어린 아이가 불꽃놀이를 보며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러나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때 발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붙은 여러분의 눈을, 마음의 눈을 떼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아름다우심에 주목하십시오. 그 아름다움을 깊이 천착(穿鑿)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전보다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의 일생은 한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꿔 놓으시기 위해서 때로는 시련과 환란을 사용하십니다. 땅에 붙어 있는 우리 욕망의 마음을 떼어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신자에게 고난은 성화의 도구입니다. 어떤 환란 가운데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시련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도처에 깔려있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잠시만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그 묵상의 결과를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거짓된 사랑 때문에 세상에서 상처받고 방황했는데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십니다. 이는 마치 집을 멀리 떠난 허랑방탕했던 탕자를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성부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힘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마음으로 붙든다면 주(主) 또한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이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