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세 생명줄
2022년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 | 2022년 10월 17일 – 10월 1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12월 09일
목 차
1. 눈물이 있는 신앙(딤후 1:3-4) 2022.10.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1 3
2. 거짓이 없는 믿음(딤후 1:5) 2022.10.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2 8
3. 불붙는 은사(딤후 1:6) 2022.10.19. 새해말씀사경회 새벽3 14
신앙의 세 생명줄1 (2022.10.17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눈물이 있는 신앙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딤후 1:3-4)
녹취자 : 김세나
어느날 디모데후서를 읽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부분에서 특별히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본문 말씀에 1절부터 6절까지 기초를 하여 볼 때 크게 ‘신앙의 세 생명줄’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일 때, 사도바울은 로마의 지하감옥에 투옥된 채 이 편지를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썼습니다. 2차 투옥은 1차 투옥과 달랐습니다. 1차 투옥되었을 때는 제법 대우를 받았고, 로마 시민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투옥에서 해방되고 난 후 사도바울은 다시 전도여행을 떠났고 그때 전도했던 곳이 스페인, 크레타, 에게헤 연안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열렬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두 번째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때 상황이 매우 나빴던 것은 이때는 기독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아주 고조되어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단순히 유대종교 안에서 일어난 어떠한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낙인이 찍힌 채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매우 가혹하였고 이때 두 번째 투옥될 때 로마를 다스리던 황자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악랄한 네로의 시대였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추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들이 겹치면서 사도바울은 사실상 이것이 마지막 투옥으로서 결국 순교를 맞이하게 됩니다. 석방의 가능성은 없었던 것입니다.
저도 로마를 방문했을 때, 바울이 갇혀 있었다고 하는 지하감옥의 유적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안내해 주는 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이 확실하게 바울 시대 때부터 있었던 감옥이라고 하면서 보여 주었는데, 교회 지하였습니다. 그 지하에는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고 다행히 바깥쪽으로 철장에 약간의 빛과 공기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는 아주 황량한 지하감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 추측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사실 아들과 같은 목회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역을 디모데에게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시작하는 말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라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먼저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결국 디모데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필요한 연약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 3일에 나누어서 생명줄처럼 붙들어야 할 우리의 신앙의 요소 세 가지를 하루씩 나누어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눈물이 있는 신앙”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딤후 1:4)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사람을 떠올리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늘 쾌활하게 웃고 떠들고 다니던 수다스러운 사람, 이러한 인상이 떠올릴 수도 있고, 늘 말수가 없지만 뭘 먹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뭔가 대화를 하면 꼬치꼬치 따지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있고, 뭘 빌려 가면 잘 돌려주지 않는 셈이 흐린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마음속에 생각나는 그림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눈물이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건강을 염려하며 쓴 편지를 보더라도 디모데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편지를 쓸 정도로 건강이 위협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사도바울이 디모데의 이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늘 눈물을 흘리는 디모데였습니다. 사람 앞에서 비참하게 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모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배운 신앙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상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외모 자체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고 목이 짧고, 머리가 벗겨지고, 아주 고집스럽게 생겼고, 무엇인가 집착이 강하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성격을 어디에서도 알 수 있는가 하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가는 그 대목에서도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이고, 나쁜 의미에서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사도바울은 바탕은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끊임없는 자기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닮아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팔복의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청결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그러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사도바울이 배운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다 못하고 온 유언적인 설교를 합니다. 그때 했던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시아 지방에서 선교를 하면서 그가 가장 기억나는 일이 말할 수 없이 겸손한 가운데, 이것은 좋은 뜻도 있지만 그렇게 자신이 한없이 비참할 정도로 낮아지지 않을 수 없는 고난의 상황이 계속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속에서 그렇게 강인하였던 사람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야말로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위로를 많이 주셨습니다. 신자의 일생은 바로 이렇게 팔복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고대 교부중 오리겐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부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설교 속에서 말하기를 “이 팔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고백이다.” 즉, 당신이 이미 된 사람으로서 당신 안에 있는 경험을 녹여낸 것이 팔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의 인격은 사도바울에게 전해져 그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었고, 사도바울에게 전해진 예수의 신앙은 디모데에게 전해져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눈물이 있는 목회를 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눈물이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 중학교 2학년 2월 초까지 다니던 교회를 기억합니다. 교회마다 조금 차이는 있었고 중학교때와 초등학교때 다니던 교회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미 건립된 지 오래되어 큰 교회와 막 설립되기 시작한 교회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통점은, 여러분은 안 믿어지겠지만, 예배 시간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네에 있는 가마니를 쭉 깔고 앉아 예배드리는 그 현장은 언제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아무리 어리지만 한 두편 설교가 생각날 듯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설교가 내용이 없어서 기억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농담과 웃듯이 설교하는 분을 거의 볼 수가 없었고, 언제나 피를 토하듯 설교하는 분들이었고, 끝나고 나면 어린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테마학교 같은 것이 없던 때였으니까 수요예배에도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항상 눈물이 있었습니다. 눈물바다가 되고 통곡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주일날 제법 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도 항상 흐느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잘 살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사회적인 요인들도 점점 우리에게 눈물이 없는 신앙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일을 끝내고는 밤 시간에 모두 모여서 그렇게 힘든 인생에서 괴로운 일들을 주님께 쏟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일학생이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할 것 없이 그렇게 가마니 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디모데가 무슨 이유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와 자신의 죄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사역을 위해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가노라면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때 눈물이 있는 신앙은 결국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주님을 붙들게 만들어 줍니다. 그 눈물이 있는 신앙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난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때 눈물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있고, 후회와 회개의 눈물이 있고, 자기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며 흘리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나만을 중심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를 함께 엮으면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천이 짜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눈물이 있는 디모데의 신앙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을 가진 신앙이었습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진 신앙이었습니다. 물같은 것으로 씻어서 더럽혀진 것들이 깨끗이 사라진 그러한 종류의 양심을 가진 신앙으로서 눈물이 있는 믿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지금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옛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공부를 하러 오는데, 한국학생들은 유학을 가서도 특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학생들이 그래도 우리가 기도해야 산다고 하면서 새벽기도를 만들었습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교역자도 아닌데 새벽기도를 모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여러 개의 신학교에 한국학생들이 만들어놓은 새벽기도가 있었고, 학생들이 나와 기도하는데, 전 세계 학생들이 자고 있을 때, 새벽에 학생들이 나와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준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 한 시간에 얼마씩 계산하여 돈을 준다고 하면, 새벽에 누군가가 나와 감시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시계보고 들어가 청소를 다 한 다음에 한 시간 하였다고 써놓고 나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나라 학생들에게 알바를 시켜 보아도 그 시간을 가짜로 더 많이 부풀려 쓰는 학생은 새벽기도하는 한국학생들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아이러니이지 않습니까. 체험적이고,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유혹이야 받을 수 있겠습니다. 한 시간을 하면 예를 들면 10달러를 받는데 한 시간 5분쯤 하고 두 시간이라고 쓰면 10달러씩 더 나오고, 그것이 20일이면 200달러나 되니까 유혹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도 가끔 저의 사역 때문에 외국인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번역을 모두 끝내놓고 원어민 감수를 하게 되면 계약을 하게 됩니다. 한 시간 봐주는데 50달러를 받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확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원고를 모두 보고 몇 시간 몇 분 걸렸다고 통보가 오면 그것은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시계를 놓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졌는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그랬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청결한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디모데는 종교적인 체험과 생활의 윤리가 일치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리는 체험적 신앙과 함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한 양심의 바닥 위에 그렇게 뜨거운 눈물이 있는 체험의 신앙이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함께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어떤 거짓도 없는 투명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종교의 가치를 빛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손해가 돌아오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요소, 눈물이 있는 디모데의 신앙은 ‘섬기는 신앙’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데 그것이 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상적부터 섬기던 너의 선조들을 따라 너도 섬기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하였을 때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으로서 바리새인으로 길을 가고 있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 길을 가고 있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집안에서 끊어져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가족과 모든 혈연이 끊어진 상태에서 외롭게 살고 있을 때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 오고, 또 이렇게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깨달으면서 이렇게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그 하나님을 어린 디모데도 섬기는 것을 보면서 사도바울은 얼마나 부러워 하였겠습니까.
이 디모데를 보면서 사도바울은 감사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마음에 고통을 주며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에 감사를 불러일으키며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목회자에게, 여러분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교우들, 사랑하는 구역장들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솟아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눈물이 있고, 섬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있는 체험적 신앙과 함께 그는 조상적부터 섬겨온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섬기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었고, 사도바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목회자로서의 뜨거운 형제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청결한 양심과 뜨거운 섬김을 함께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자신은 감옥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늘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교회를 위해 슬프게 우는 디모데가 가엾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를 만나면 네 뺨에 흐르는 눈물이라도 씻겨 주련마는…’하는 마음으로 사도바울은 죽기 전에 아들같은 디모데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봐야만 사도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스승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에게 기쁨이 되고, 스승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사람의 신앙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이것을 누구에게서 배웠겠습니까. 이것을 디모데는 사도바울에게 배웠고, 바울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배웠으니, 그가 친히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돼라” 하였던 말씀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신앙의 생명줄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물이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그치지 않게 합시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나라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그리고 불쌍한 영혼들 때문에,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때문에, 그리고 내가 긍휼히 여기는 우리 가족 때문에 눈물이 늘 있는 신앙을 갖길 바랍니다. 청결한 양심, 끊임없는 섬김, 그리고 스승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믿음 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세 생명줄2 (2022.10.18.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2. 거짓이 없는 믿음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녹취자 : 김세나
사도바울이 아들같은 디모데를 간절히 보기를 원했는데, 사도바울 마음속에 남아있는 디모데에 대한 인상을 지난 시간에 ‘눈물이 있는 신앙’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에서 이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놓은 제자에게 있었던 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청결한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조상적부터 섬기던 그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었고, 스승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가 미끄러짐을 면하는 길이며, 이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그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마음은 죄에 미끄러지고, 세상사랑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갈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눈물이 있는 신앙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앞의 말의 어떤 의도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까닭은…’ 이런 뜻입니다. 너를 만나서 너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그래야만 내 마음이 기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만나면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하니까 더욱 네가 보고 싶구나. 이런 뜻입니다. 핍박의 시기였습니다. 네로황제의 시기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곳곳에서 배교자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핍박 때문에 배교하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혼을 목양해 본 사람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너무나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화) 얼마 전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한 교회를 51년째 다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마음 깊이 존경했습니다. 본인은 주변이 없고 특별한 게 없어서 오래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무가 산에 심겨져 쓰러지지 않고 50여 년 있었다고 하는 것은 계속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바람만 불어도 가지가 꺾이고, 뿌리가 뽑혀 나가는 태풍에도 견디면서 그 땅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생명력을 지속해 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다시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자기의 인생을 의탁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죽은 다음에 누구한테 장례를 부탁해야 할지 모른 채 인생을 끝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죽은 결과라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배교하는 수많은 사람들, 배교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변심해서 은혜받는 자리에서 떠나갔던 사람들, 한때는 간이라도 빼어줄 것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잘하였지만,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또 다른 세속주의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단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미끄러졌던 갈라디아교회나 고린도교회같은 교회에 다니던 교인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신앙이 시종일관 똑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앞둔 순교의 순간에 디모데를 보면서 바울은 마음에 적잖은 위안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거짓’은 우리말에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에 어긋나는데, 그것이 진짜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일 의향으로 제시하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을 참이라 믿고 참을 숨기는 것을 거짓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거짓’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가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실도 진실에 해당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거짓이 없다고 하는 것은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실’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진리에 일치한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진실하다고 부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성경의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진실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진실은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약속하시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며 ‘신실하다’라고 말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송합니다.
그러면 이 ‘faithfulness-신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 ‘신실함’은 ‘진실’의 일종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지을 때 신실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 지키심’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어겨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불신실한 우리와 또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사이에 대조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하지 않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게끔 만드십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러한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을 꾸준히 이루어가시는 것을 우리는 ‘성실하심’이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러한 ‘신실하심’, 또는 ‘성실하심’은 결국 ‘진실하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리를 감출 수도 없거니와 굳이 감춰야 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진리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진리에 어긋난다는 것은 스스로 진리에 모순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성품에 있어서 진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심에 있어서 신실하시고, 그 약속된 것을 행하심에 있어서 성실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다음에 깊이 통곡하다가 위로를 받습니다. 그것이,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참 신기한 것은, 자기 자신은 진실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은 게을러도 자기가 고용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도둑이 직원을 고용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기와 똑같기를 원하는 도둑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과 땅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거짓이 없는 믿음, 진실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신앙의 덕목 중 진실을 팔아서 살 수 있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재능이 모자라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지혜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을 잃어버리고 나면 거기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높은 가치로 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하고, 무엇인가 더 많은 업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더 큰 것을 누리기를 원하지, 진실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가 깨어지고, 회개할 때 가장 사모하게 되는 덕목이 진실입니다. 결국 자기깨어짐은 자기사랑에 대해 깨어지고, 자기 의에 대해 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의 가치를 터득하면서 ‘내가 사랑한 것이 가짜 사랑이었구나, 거짓된 것에 대한 사랑이었구나!’ 분노하는 마음이 들고 자기를 속인 모든 그릇된 오류와 그 오류를 생각 없이 따랐던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 미움의 크기만큼 진실해지고 싶어합니다. 큰 소리를 내고 미친 듯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진실한 자의 마음속에 언제나 계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신데, 그가 사랑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보여줍니다. 진실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짓지 않은 거짓된 사람보다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입니다. 거짓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죄를 저지르지 않은 참되지 않은 신앙을 가진 사람보다는 큰 죄를 지었어도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디모데를 생각하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떠올랐을까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진실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몸도 약하였고, 아주 힘겨운 목회 사역을 감당하며 이단과 싸우고 있었고,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울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면 진짜 힘들어서 운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짜 우리를 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실. 진리를 발견할 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 모습과 지금 내가 실제로 있는 내 모습 사이에 큰 격차를 느낄 때 진실과 거짓의 격차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너무 비참합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제사이고 희생의 제물입니다.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신앙에 있어서 재밌는가 하면, 정말 진실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이 거짓되다 믿고 눈물을 흘리고, 거짓된 사람은 자신이 진실하다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사랑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많이 섬기는 사람은 늘 자신이 불충성하다고 생각하며 애통해하고, 주님을 거의 안 섬기는 사람은 자기가 굳이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며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점점 더 많이 주시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디모데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신앙생활을 하였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커다란 이유는 진실한 신앙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눈물 흘리던 제자로, 어린 목회자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해야 할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을 찾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 설명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이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이 믿음,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디모데 마음속에 있는 이 거짓이 없는 믿음, 진실을 찾는 이 믿음은 ‘먼저’ 어디로부터 영향이 받은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네 외할머니 로이스 그리고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집안 식구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믿음이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굳게 믿노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할아버지, 아버지는 다 빠지고 외할머니와 어머니만 들어갔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로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가정의 구조가 남자가 경제권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 있는 경제권을 남편들이 아내에게 주급을 타 쓴다든지, 매일 용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반적으로 남자가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남편에게 돈을 타서 쓰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는 그 사회를 통일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아주 국가 우선주의였고, 개인의 분방한 삶도 존중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가정에 있어서 위계적인 질서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대가족사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핵가족사회도 이미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든지 남자의 하는 일과 여자의 하는 일이 또렷하게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여자의 활동 범위는 가정에 딱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낳고, 자녀를 양육하고 기르고 하는 이 모든 일은 아내에게 위탁된 일이었고, 남편은 나가서 국가를 지키고, 직업 활동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목소리가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될 때 남자는 매우 큰 수치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조시대 때의 여인들처럼 울타리가 정해져 있었고, 그 안에서의 활동반경이 있었으니 아이들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밖으로 계속 도니까 실제로 접촉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굉장히 활발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더 활동반경이 넓지 않으니까, 기독교인들 사이의 모임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으로는 약자일지 모르지만, 외부와 많이 접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나누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독교신앙을 전파하기에는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중동지방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한 것이 중동에 있는 부자들의 다음세대가 기대가 된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필리핀을 비롯한 수많은 동남아시아 세계에서 가정부들이 취업을 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중동의 부자들이 식모에게 자기 자녀들을 영어교육을 비롯하여, 돌보는 일들을 맡기는데 엄마도 자녀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아빠는 사업하고 돌아다니느라 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풍족한 환경에서 남는 시간에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들이 누구와 함께 오래 있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구조적으로 남자는 자녀들에게 살뜰하게 영향을 많이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애국자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항일투쟁자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독재와 싸우던 큰아빠를 존경할 수도 있겠지만, 가정은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사실 자기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앞에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녀들의 교육을 통해 위로부터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가운데 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디모데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도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는 그 믿음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생활하는 그 자체가 진실 속에서 살았고, 일체의 거짓을 미워하는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환경 자체가 거짓이 없는 믿음을 추구하는 집안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충만하게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의 DNA처럼 디모데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배교와 배신의 시대에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사도바울을 끝까지 존경하며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들었던 하나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리키는 부모님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이 충분히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하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결국 마지막에 아이들의 마음속에 여러분들이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였던 그 눈물, 그리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았던 태도, 눈앞에 있는 이익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가치가 거짓이 주는 편리함이나 유익보다 더 크게 생각하며 살았던 여러분들의 삶이 인간의 참된 도리라는 것을 깨달을 날이 오게 됩니다. 참 놀라운 게 세월이 많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기회가 닿으면 그것을 털어놓습니다.
상처와 신앙과 비슷합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상처받으며 살지만 상처받을 때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다 털어놓았던 사람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는 그 상처의 의미도 잘 모릅니다. 자신이 성인이 되어 살아보면 그 상처가 무슨 의미였는가 알게 되어 어렸을 때는 오히려 아프지 않았는데 나이가 든 다음에 그 의미를 곱씹으면서 쓰라린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런 것이 상처이듯이 신앙도 똑같이 언제 스며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그때그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때 그것이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져 오고 오류에 빠져서 외로울 때 진리 안에 진실하게 살아오던 그 하나님과의 우애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 우애를 생각하면서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참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 그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 눈에 보이는 변화가 당장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한 인간이 저렇게 일관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좋아하며 한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그것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그것, 그 자체가 너무 위대합니다. 그래서 한 자녀가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당대 그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혹은 아버지를 통해서 그런 믿음을 물려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 진실한 믿음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 앞에 담대할 것이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아무리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 쌓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편일 것입니다. 불행하면 하나님이 그 불행 속에서도 그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이며,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고통보다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오늘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불붙는 은사
“그러므로 너는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녹취자 : 김세나
첫 번째는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 ‘눈물이 있는 신앙’이 떠올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떠올랐습니다. 세 번째는 ‘불붙는 은사’가 기억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를 원한다”고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얼마나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렇게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사도바울의 마음에 떠오르고 있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성직으로 부름받을 때, 아마도 바울이 안수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셔서 은사가 디모데의 마음속에 불붙는 것같이 타올랐습니다.
여기에서 ‘은사’는 당연히 목회직에 적합한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고, 목회를 하기에 적합하도록 주시는 은사가 포함되었겠지만,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살아가게 하는 모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사들을 통칭하여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 안수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셨던 은사들이 다시 한번 불일 듯 일어나고 목회사역에 적합한 은사를 하나님이 그 안수하는 순간에 부어주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모든 은사들을 충만하게 하신 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기억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순교를 앞둔 그 순간에 남겨져 있는 이 디모데가 어찌하든지 그러한 충만한 은사가 다시 불길처럼 일어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들을 넉넉히 감당해 나가며 자신의 뒤를 이어 하나님나라를 위해 이바지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은사’라는 말과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단어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선물입니다. 좁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목회사역을 감당하기에 적합하도록 주신 특별한 영적인 은사뿐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연적인 은사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그것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이것은 열정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간절히 이 디모데를 보기 원하였던 것, 어쩌면 마지막이 될 면회를 원하였던 것은 다시 한번 그를 위해 기도해 줌으로써 다시 한번 그 불붙는 열정을 디모데의 마음속에 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고, 살아있는 믿음은 언제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은혜의 불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붙습니다. 열정과 함께 우리의 은사가 발휘될 때, 그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재능은 많습니다. 그런데 열정이 없습니다. 재능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정이 있습니다. 누가 더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사도 별로 없고 열정도 별로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말입니다. 있는지 없는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사용을 해봐야지 그런 은사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용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정을 가지고 목표를 정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본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무슨 은사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해 보지 않고 그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법은 없습니다.
달란트 맡은 종의 경우에는 그 달란트가 돈이었으니까, 눈에 보이지만 우리 안에 주신 탤런트,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와 작용하여 밖으로 발휘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떨 때 우리들은 자신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 옵니다. 그래서 해 봤는데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깜짝 놀라고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면 어쩌면 저렇게 재능도 많고 은사가 많은가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감탄하는 사람들은 그가 열정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 은사가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없다고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충만하게 발휘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은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그 열정적인 삶을 살기를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간절히 바랐습니다. 자신은 핍박을 받아 지금 사형수의 신세로 로마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기를, 다시 말해서 ‘디모데야, 너는 나처럼 이렇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8절에서 말하기를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사랑하는 자식같은 목회자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그 앞에 ‘오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다른 길을 택하라. 오직 또 다른 한 길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람들은 능력을 많이 받으면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력이 있으면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 자신을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없으면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묻어놓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능력이 있으면 결코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자의 소명이고, 목회자의 부르심입니다.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 일을 위해 더 수고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마음속에 불타는 열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중 자기의 분야에서 탁월하게 업적을 이룬 사람 중 냉랭한 가슴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팔복>을 완성하여 여러분들이 아마 11월 첫 주 정도 되면 공과책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전보다 훨씬 책 쓰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예전에는 한 대여섯 번 정도 교정을 보고 책을 끝냈습니다. 한 2년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생각하고, 테이블에 책을 이만큼 쌓아놓고 1월달에 현대문체도 공부할 겸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권을 읽다가 하루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보통 책을 쓸 때, 열한 번을 교정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문장이, 물론 번역이지만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습니다. 일본 사람이 썼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매끄럽습니다. 원저작자가 열한 번을 하고, 그리고 번역자가 번역한 후에 몇 번을 더 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읽으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책을 읽으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다음서부터 아주 깊은 마음의 각성을 하면서 책을 다른 방법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후로는 책을 한 권 넘기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17교 정도를 봅니다. 이번에 본 것이 15교 정도 보았고, 이 책이 다시 출판사에서 나올 때에는 다섯 번 정도 더 봐야 하니까 아마도 20교 정도를 거쳐 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두 달 동안 몸이 힘들 정도로 원고에 매달려 훨씬 완성도 높은 원고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은 25번을 교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최선을 다해 보니까 15번을 볼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잘못된 부분들이 파악이 되고, 위치를 정돈하고, 틀린 것을 찾아내고, 보충하고, 새로운 내용들이 떠오르면서 완성도가 높아져 갔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내게 은사가 없다 혹은 재능이 없다고 하지 말고 이미 주신 것이라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또 다른 것을 묻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지, 노는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이 함께 말하고, 게으른 사람은 뭐라고 말합니까?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어리석어서 삶의 목표를 못 찾고, 자연적으로도 한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까 지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가끔 하는 사람과 매일 하는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의사들이 왜 그렇게 수술이 뛰어난지 아십니까? 외국의 의사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술 건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에 익은 것입니다. 같은 수술을 1년에 한 의사가 수백 번을 합니다. 수백 번 아니 천 번 가까이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서 자기의 기술이 최대한 발휘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실행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열정으로 불붙지 않으면 몸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자기 하나도 간수하며 사는 일도 감당하기 어려워 허덕이는데 그 사람이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하겠습니까? 교회를 위해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분투하겠습니까?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면 이야기를 나눠 보면 모든 사람이 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 일입니다. 그 자기 일도 거의 자기의 육신과 세상에 관한 일입니다. 돈이 없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의욕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남편이 속을 썩입니다. 아내가 마음을 너무 많이 상하게 합니다.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평안을 좀 누려보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려보고 싶어하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모든 일이 다 잘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좋은 환경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짓거나 태만하게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타오르는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는 마음이 없으니까, 결국 없는 것은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못 사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은 있는 것 때문에 마음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빠 보이는 모든 일도 결국 좋은 일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 보이는 모든 일도 결국 나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눈을 감고 퇴장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그 기억과 마지막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이 인생의 황혼, 로마의 감옥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 회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디모데를 얻은 것이었고, 그리고 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성직을 주셔서 불타는 열정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안된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열정을 가지고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될 수 있다는 소망으로 자신을 설득해서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직의 부르심이고, 성도의 부르심이고, 우리가 섬김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눈물바다가 된다면, 우리가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가슴에 불타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이 열정의 불길을 옮겨 받아 그들도 모두 함께 불타오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실 때, 그렇지 않은 사람 수만 명이 몇 년 동안을 해도 이룰 수 없는 지지부진한 일들을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사랑하라고 우리의 인격 안에 주시는 것이고, 은사는 잘 섬기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입니다. 섬기면 섬길수록 은사는 더 많이 발견되고 하나님이 더 주시지만 섬기지 않고 나태하게 살면 결국 있던 은사도 사라져 버리고 마음의 은혜의 불도 꺼지게 되어서 타다만 장작같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난로를 피워 보면 제일 불태우기 어려운 것이 타다가 저절로 꺼져서 꺼멓게 숯으로 일부 변해 있는 나무를 다시 불 붙이는 것입니다. 차라리 갖다 버리고 새 장작을 갖다 놓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아무리 불을 붙여도 검게 된 숯만 빨갛게 달아오를 뿐 불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불타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그 마음속에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정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불타오를 때, 그때 우리는 타오르는 심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봉사 안에서 우리의 믿음도 유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물을 계속 퍼서 쓰면 맑고 깨끗한 물이 나오지만, 더 이상 우물을 긷는 사람이 없을 때 우물에는 이끼가 끼기 시작하고 오물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물은 결국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매일 매일 길어 올려 그렇게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 쓰는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은 그 섬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뜨거운 열정을 주셔 샘솟게 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한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주신 은사와 은혜를 묵혀 두었다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신 은사를 열렬하게 사용하여 나이가 많이 먹어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요긴한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살다가 죽으시겠습니까? 어느 것이 우리의 인생에 더 큰 행복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으로 채워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누군가 그렇게 섬겼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있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이 로마감옥에 자기의 스승이 갇힌 것을 생각하면서 디모데는 어떤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스승을 위해 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잇기 위해 불타는 열정으로 살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본을 보이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많은 영혼들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라고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리고,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하나님의 일에 합당한 은사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이 은사가 다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때 충만한 은혜를 받고 소명을 느끼며 열렬히 섬기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그 불을 다시 한번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그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니, 오늘 이 열정을 마음에 다시 한번 불일 듯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