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2020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0년 1월 13일 – 2월 23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7월 24일
목 차
1. 인간이란 무엇인가?(창 2:7) 202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1 10
2. 행복이란 무엇인가?(시 72:28) 2020.0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2 25
3.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1)믿음과 지혜(시 73:28) 202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3 38
4.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2)생명과 사랑(요 20:31) 2020.01.19. 주일오전 53
5.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요삼 1:2) 2020.02.02.. 주일오전 64
6.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시 107:10-11) 2020.02.09. 주일오전 72
7.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잠 3:18) 2020.02.16. 주일오전 81
8.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라(계 2:5) 2020.02.23. 주일오전 91
<설교 프레임>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1 2020. 1. 13 새해말씀사경회(첫째 날 저녁)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I. 본문해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마다 서로 생각이 달라도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한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은 기대를 저버린다.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하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
행복하고자 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내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있겠는가?
II.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행복하고자 욕망하는 주체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서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A.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람.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
1. 존재의 근원
인간은 원래는 없었는데 있게 되었다.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
이는 인간 존재가 “있게 한 이”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는 창조된 것이다. 창조되었다면 창조하신 이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인간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설명된다.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그를 만드셨는지에 달렸다.
2. 육체와 영혼
모든 사물은 구성요소(構成要素)를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육체(肉體)는 흙으로 빚으셔서 만드셨고, 영혼(靈魂)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생명(生命)을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기서 “생령”은 “살아있는 사람”(nepesh haya)이다. 이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한 결과다. 죽음은 이 둘이 분리되는 것이다.
a. 지상의 자원: 육체(肉體)는 물질이다. 자연과의 교류 속에서 생명을 유지한다.
b. 천상의 자원: 영혼(靈魂)은 물질이 아니다. 영혼(靈魂)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한다.
진리는 영혼의 양식이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이시다.
B. 나는 왜 나인가?
인간의 본질이 육체와 영혼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행복하고자 욕망하는 것은 단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나”로서다.
그러면 나는 누구이기에 같은 인간이면서도 또한 다른 “나”인가?
1. 개별적 영혼
내가 나인 것은 나만의 고유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고유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같은 사람이면서도 서로 다른 개인이 된다. 각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가진 것처럼.
그것이 나를 “나”이게 한다. 사람을 서로 다르게 창조하심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 ‘다름다움’이 ‘아름다움’이다.
2. 고유한 자아
내가 나인 것은 나만의 자아(自我)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타인과 세상을 인식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主體)다.
자아는 의식의 통일체다. 이로써 “자기”라는 주체성을 갖게 된다.
육체가 변하고 경험한 내용이 달라져도, “나”로서의 동일성(同一性)을 갖는다. 고유한 영혼과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동일하게 자신이면서도 삶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변한다.
자아(自我)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인생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다.
단지 관찰함으로써 자아를 알려고 하는 것은 밑도끝도없는 심연을 보는 것과 같다. 스스로 답을 얻지 못한다.
3. 진리의 빛
진리의 빛 없이는 자아를 대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모두 아시나, 인간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아(自我)를 대면하여 아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 행위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사람이나 환경을 거울로 삼을 수 있으나 거기에 비취는 형상은 아주 희미하다.
진리는 자기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하나님이 곧 진리시다.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신다.
C.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달렸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하나님 사랑을 깨달을 때, 어둡던 인생의 의미에 불빛이 들어온다.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면,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갈팡질팡하여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었다면,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행복도 그러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
인생의 방황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원인과 목적을 잊어버린 데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나를 알 수 있다.
III. 적용과 결론
나는 진실로 행복하기를 욕망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알라.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라.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행복에 이르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2 2020. 1. 14 새해말씀사경회(둘째 날 저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73:28)
I. 본문해설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면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났기 때문이다(시 73:12).
그들이 죽을 때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였다(시 73:4). 그는 낙심했다.
경건하게 살고자 애쓴 것이 모두 헛되게 느껴졌다. “그들처럼 쉽게 살”걸 했다(시 73:15). 무지(無知)에서 온 영적 침체였다.
그러나 성소(聖所)에 들어갈 때,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시 73:17). 파멸이었다. 그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시 73:28).
II. 행복하기를 원하는 인간
모든 인간은 행복하길 원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행복한 상태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새겨진 기억과 같다.
A. 행복을 추구함
창조된 영혼은 자신의 근원(根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의 기억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감각적 행복만을 추구하게 된다.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행복도 그러하다.
사랑할 욕망은 있으나 하나님을 모를 때, 그 욕구는 육욕(肉慾)으로 흐른다. 행복에 대한 욕구도 그러하다.
인간의 불행(不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행복과 거짓된 행복을 혼동하게 된다.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B. 네 부류의 사람들
행복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인간은 다음 네 부류로 나룰 수 있다.
1. 행복에 이르는 길을 모르는 사람들
2. 잘못된 길을 확신하며 사는 사람들
3. 행복에 이르는 길에서 미끄러진 사람들
4.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
III.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적인 만족감도 아니고 객관적인 성취도 아니다. 행복은 “사용”(uti)이 아니라 “누림”(frui)에 있다.
그것은 관계와 사랑하는 자를 누리는 복된 상태다. 최고선(最高善)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상태다.
A. 인간의 불행
행복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려면 불행(不幸)을 생각해 보면 된다.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인간은 불행하다. 인간의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소유(所有)하는 데 있다.
행복(幸福)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하게 할 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인간은 불행하다.
그가 원하는 것을 소유했을지라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악(惡)한 것일 때
그것이 악한 것일 때, 행복하지 않다. 왜냐하면 행복은 선(善)을 누리는 것이고 악(惡)은 선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악(惡)한 것일 때, 행복하지 않다. 왜냐하면 행복은 선(善)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일시적인 만족감은 행복이 아니다. 불행이다.
악한 것을 선택하는 마음 자체가 선(善)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복(福)에서 멀어진 사람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허무(虛無)한 것일 때
그것이 허무한 것일 때, 행복하지 않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肉體)는 사라질 존재다. 사라질 것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것과 함께 사라진다. 허무한 것을 소유함으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B. 행복과 소유
인간의 행복은 “복(福)됨”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없이 복될 수 없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 행복이다.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가?
1.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
그것은 결코 변질(變質)되거나 소멸(消滅)될 것이 아니어야 한다.
결함이 없기 위해서는 완전해야 하고, 일시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아무 것도 완전하고 영원하지 않다.
모두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에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소유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상실할 두려움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God)밖에 없다.
2. 하나님을 소유함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분과 사랑의 관계는 갖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物質)이나 상태(狀態)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같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공경(恭敬)함으로 모시는 것이다.
선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하나님뿐이시다. 인간의 행복은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IV. 적용과 결론
육체는 잠시 살다가 없어지나, 영혼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한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소유한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모시는 데 있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3 2020. 1. 15 새해말씀사경회(셋째 날 저녁)
<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1) >
- 믿음과 지혜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73:28)
I. 본문해설
인간의 비참은 무지(無知)에 있다. 자신과 행복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의 성품(性品)과 그것의 시행방식(施行方式)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인간을 다루시는지 알아야 한다.
II. 인간은 왜 비참한가?
인간의 비참(悲慘)은 궁핍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의 궁핍이다.
육체(肉體)는 생명(生命)에서 멀어진 만큼 건강을 잃어버린다.
물질이 궁핍할 때, 삶은 불편해지고 건강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영혼이 궁핍하면 인생을 망친다. 따라서 참으로 비참한 것은 영혼(靈魂)의 궁핍이다.
이것은 영적 생명의 결여다. 영생(永生)에서 멀어진 것이다.
영혼이 궁핍하면 마음에는 분열(分裂)이 일어난다. 주체적으로 살 수 없게 된다. 게임이나 포르노에 몰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靈魂)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III.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1): 믿음과 지혜
어떻게 행복에 이르게 되는가? 믿음으로 지혜를 얻음으로써이다.
두 가지 인식(認識) 능력을 주셨다. 이성(理性)과 믿음(信仰)이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믿음으로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A. 믿음과 지식
믿음은 보이는 현실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을 알게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고자 하는 자에게 주신다(행 16:31).
악인의 형통함과 오만한 자의 번영을 보면서 침체에 빠졌다(시 73:16).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니 경건하게 산 것이 후회되었다.
그가 성소에 들어갔다. 좁은 의미로는 지성소와 대조되는 장소를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성막(聖幕) 전체를 가리킨다.
거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자 이제껏 품었던 의문이 사라졌다.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知識)이다. 믿음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다. 이로써 인생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무지로 캄캄했던 천정이 찢어지며 눈부신 지혜의 빛이 지성(知性)에 들어왔다. 침체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B. 지식과 지혜
지식과 지혜는 어떻게 다른가? 지식(知識)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꿰어서 목걸이로 만드는 능력이다.
지혜(知慧)가 집을 짓는 기술이라면 지식은 그 방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물건이다(잠 24:2-3).
지식(知識)은 사물에 대한 이해다. 지혜(知慧)는 그것을 인생의 의미와 연결 짓는 능력이다.
지식의 대상(對象)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다. 이 대상을 앎으로써 ‘나’를 알게 된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 곧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 그리고 자연세계에 대해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 (KNJ)
현대인들은 인생의 의미를 자기만족에서 찾는다. 그러나 자기는 결코 영원한 의미(意味)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이시다. 영원(永遠)을 아는 것은 사랑으로써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간과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영혼과 육체를 치우치지 않게 사랑할 수 있다.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가 있다. 육체는 자연적(自然的) 지혜를, 영혼은 도덕적(道德的)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인생이라는 직조물이 짜여진다.
자연적 지혜: 자연의 법칙을 아는 데서 오는 판단력이다.
도덕적 지혜: 하나님의 질서를 아는 데서 오는 판단력이다.
도덕은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도”(道)는 객관적으로 있는 진리고, “덕”(德)은 그것에 합치하는 영혼의 힘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善)이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질서다. 이것을 거스름으로써 인간이 불행(不幸)하게 된다.
도덕적 지혜는 영적 지혜에서 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이 지혜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幸福)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영적 지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키며 우둔한 지혜롭게 한다(시 19:7).
IV. 적용과 결론
인간은 행복하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무지(無知) 때문에 불행해진다.
인간이 무지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지혜는 인간이 선(善)한 삶을 살아 행복(幸福)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달으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지혜를 가지라.
오직 믿음과 지혜로써 행복에 이르는 인생을 살아가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4 2020. 1. 19 주일 낮 예배
<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2) >
- 생명과 사랑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I. 본문해설
인간의 비참(悲慘)의 또 다른 원인은 영혼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生命)이 없으므로 불행하다. 영혼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불행하다.
종교는 길(道)을 말했고, 철학은 진리를 가르쳤지만 생명은 없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이 생명은 영적(靈的) 생명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생명이다.
II. 인간은 왜 비참한가?
인간의 비참은 영혼(靈魂)의 궁핍이다. 이는 지혜(知慧)와 사랑(love)의 궁핍이다. 사랑은 생명에서 나온다.
생명(生命)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생명이란 생명체에 존재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으로서 그것으로 하여금 살아서 활동하게 하는 힘이다.” (KNJ)
물질적 생명체는 세포를 갖고 있으며 변화와 신진대사(metabolism), 그리고 번식의 특성을 갖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 중간은 없다.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생명의 정체는 불가해(不可解)하다. 생명체는 결코 생명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육체의 생명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영혼의 생명도 영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이 생명(生命)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 받은 자에게 있고 불신자에게는 없다(요 5:11-12).
이 영적 생명은 인간이 죄(罪)를 지음으로써 상실했던 것이다.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영혼의 죽음은 영적 생명이 없는 것이다. 이로써 불행한 삶을 산다.
III.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2): 생명과 사랑
생명은 피조물을 자신으로 살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vita increata)이고, 피조물은 창조된 생명(vita creata)이다.
A. 영혼의 생명
영혼의 생명은 영혼으로서 올바르게 기능하며 살아있게 한다.
영혼과 육체의 죽음은 서로 다르다. 육체의 죽음은 소멸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잘못 기능하는 것이다. 죽은 행실로 나타난다(히 9:14).
영혼에 생명(生命)이 충만할 때, 영혼의 기능인 지성(知性)과 의지(意志)를 잘 발휘하게 된다.
구원은 이 생명을 처음 받는 것이고, 성화는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영혼의 생명으로써 하나님 사람을 알고 사랑하게끔 창조하셨다.
영혼에 생명이 없을 때 바르게 사랑할 수 없다. 영적 생명(生命)은 사랑을, 죽음은 미움을 가져온다. 이로써 불행하게 된다.
B. 사랑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랑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그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1. 사랑의 정의
“사랑은 어떤 대상에 마음을 고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누리려는 영혼의 경향성이다.” (KNJ)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다. 성부‧성자‧성령이신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은 행복(幸福)하시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행복을 본뜬다. 진리(眞理)가 있는 사람은 올바르게 본받고, 없는 사람은 그릇되게 본받는다.
교만과 사치, 음란과 폭력은 하나님의 행복을 그릇되게 본뜬 것이다. 겸손과 절제, 순결과 온유는 바르게 본뜬 것이다.
“누린다”(enjoy)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여 더 이상 즐거워할 목표가 없는 상태다. 물질과 하나님에 대한 누림은 서로 다르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용(利用)해서 더 누리고 싶은 행복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충만한 생명이다.
2. 생명과 사랑
영혼(靈魂)의 생명은 관계 속에서 사랑(love)으로 나타난다. 그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올바르고 힘차게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다. 또한 사람을 강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사랑은 관계(關係)를 갖게 하는 힘이다.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고 이미 맺은 관계를 심화시키는 힘이다. 인내(忍耐)하는 힘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인간은 영혼의 생명 때문에 사랑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대(善待)하게 한다.
생명(生命)은 진리와 성령으로 풍성해지고, 죄(罪)로 쇠약해진다.
영혼의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사람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C. 사랑으로 행복에 이름
인간의 행복(幸福)은 선(善)하신 하나님을 누리는 데 있다. 거기에 영혼의 생명이 있다. 이로써 사랑하게 된다.
은혜를 주심으로써 사랑하게 하신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恩惠)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KNJ)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은혜를 받아 사랑하게 하신다.
생명(生命)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를 휘감고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우주적 사랑이다.
행복은 하나님 사랑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함에 있다.
인간의 소외와 고독감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데 있다. 참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IV. 적용과 결론
영혼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행복(幸福)은 그 생명으로 사랑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은혜를 받자. 영혼에 넘치는 생명을 가지라. 이 생명으로 행복에 이르도록 사랑하며 살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5 2020. 2. 2 주일 낮 예배
<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I. 본문해설
요한 사도가 디오드레베라는 악한 교인 때문에 고생하는 목회자를 위해 쓴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가이오의 영혼이 잘 되었음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입증되었다(3, 6).
“영혼이 잘됨”이 있다면 “영혼이 잘못됨”도 있을 것이다.
II.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
행복(幸福)을 외적 조건에서 찾다가 지친 사람들이 있다. 행복이 전적으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악하거나 허무한 것을 사랑할 때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욕망이 없을 때에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영혼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A. 영혼의 완전성
인간의 영혼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영혼을 가졌기에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행복은 완전한 영혼을 소유하는 데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되었기에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영혼도 의도하신대로 창조되었다.
a. 영혼의 완전성
b. 관계의 완전성
정신작용은 영혼의 활동이다. 하나님 알고 사랑하게 하셨다.
정신작용은 얼마나 탁월한가? 감각은 사물의 정보를 전달하지만 정신은 존재의 법칙과 작용의 원리를 찾아낸다. 이로써 문명을 일궜다.
인간의 영혼에는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완전성을 잃어버렸다. 영혼은 질병 상태에 놓였고 정신은 불구의 상태가 되었다.
영혼의 질병 상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無知)와 이기심(利己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행복하기를 욕망할수록 더욱 불행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행복은 결코 마음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영혼이 완전성을 회복할 때까지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에 관해 다음의 명제를 얻게 된다.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영혼은 가장 큰 평화와 만족, 안식과 기쁨을 얻는다.” (KNJ)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질병 상태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다.
하나님은 진리와 성령으로써 영혼의 완전성을 회복하게 하신다.
B. 영혼의 두 바람
영혼에는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인자(因子)와 같은 바람이 있다.
1. 목적을 따름
첫째로, 영혼은 지으신 목적을 따르고자 한다. 영혼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영혼에는 원래 이 목적을 따르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다. 영혼이 존재 목적대로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때, 평화와 만족, 쉼과 기쁨을 누린다.
진리와 사랑으로써 영혼의 고유한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신다. 당신의 영혼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2. 완성을 향함
둘째로, 영혼은 완성되고자 한다. 영혼은 완전성에서 멀어진 것만큼 고통을 겪는다. 본래의 완전성을 회복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영혼을 불결하게 하는 것은 죄다. 불결한 영혼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된다.
영혼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완전해진다.
영혼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완전하게 된다.
진리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고 은혜는 완전성을 회복시켜준다.
III. 적용과 결론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또한 외적 조건에 달린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완전한 영혼을 소유하는 데 있다.
영혼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다.
진리와 성령으로써 영혼을 변화 시키신다. 간절히 기도하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6 2020. 2. 9 주일 낮 예배
<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107:10-11)
I. 본문해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면 불행하다. 행복이 그분께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이미 행복(幸福)을 찾은 사람이다. 구원의 첫 경험은 완전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구원 받은 사람인데 행복하지 않고 곤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107:10-11)
이는 깊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그림이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가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II.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A. 행복이 가변적임
첫째로, 신자의 행복이 가변적(可變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불변적이나 행복은 가변적이다.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의 문제다.
칭의와 거듭남은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거듭남으로써,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졌다. 그러나 사랑의 경험은 현재적 은혜 안에서만 지속된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만 행복하다. 그 사랑은 영혼과 마음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a. 심겨짐으로써
거듭남과 함께 하나님 사랑의 성향(性向)이 영혼에 심겨진다. 이로써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수립된다.
b. 감화됨으로써
성화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感化) 속에서 이뤄진다. 지성이 설득됨으로써 마음에 불러일으켜진다. 성령의 감화로 생겨난다.
이미 심겨진 사랑(love)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불러일으켜질 때 신자는 행복을 누린다.
B.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함
둘째로,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
“소유하다”는 동사는 주어나 목적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Habere jam non potest Deum patrem gui Ecclesiam non habet matrem) T. C Cyprianus, Liber de Unitate Ecclesiae, 6장.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하다.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a. 관계의 측면에서: 사랑
관계(關係)의 측면에서, 그것은 사랑이다. 즉,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b. 사용의 측면에서: 활용
사용(使用)의 측면에서, 그것은 영적 자원의 활용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활용할 수 있는 상태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은 결핍이 없는 상태다. 이로써 지혜롭고, 정의롭고, 용기 있고, 절제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2. 그리스와의 영적 연합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본성적 연합: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人性) 안에서 인류와 본성적(本性的)으로 연합되어 있다. 이로써 인간은 존엄성을 갖는다.
신비적 연합: 이는 “원리적 연합”이라고도 한다(J. Owen). 칭의(稱義)를 통한 연합이며 불변적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과만 영적(靈的)으로 연합되어 있다. 신비적 한 몸을 이룬다(엡 1:23).
영적 연합: 이는 “실제적 연합”이라고도 한다(J. Owen). 성화(聖化)를 통한 연합이며 가변적이다. 그 분량만큼 행복을 누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은혜에서 멀어질 때, 죄와 정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자(信者)임에도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신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순종의 삶을 살면서 행복을 누린다.
잘 믿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
은혜를 받음으로써,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신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 안에 살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누림으로 행복하게 살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7 2020. 2. 16 주일 낮 예배
<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 3:18)
I. 본문해설
지혜자가 아들에게 준 교훈이다. 지혜가 행복의 조건임을 가르친다.
지혜(知慧)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잠 3:19-20).
이 지혜는 “영혼의 생명이 되고” 명예로운 삶을 살게 한다(잠 3:22).
II.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
신자의 행복은 조건적이다. 신앙과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신자가 되었을지라도, 지혜를 잃어버리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A. 지혜란 무엇인가?
1. 지혜의 정의
국어사전적으로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속히 깨닫고 사물을 정확히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지혜란 자신 밖에 있는 법과 이치에 비추어 사물의 좋고 나쁨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이다.” (KNJ)
지혜는 둘로 구분된다.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로 나뉜다.
a. 자연적(自然的) 지혜는 자연적 사물과 인간 본성의 법칙에 대한 판단력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의 지혜가 자연에 투영된 것이다.
b. 도덕적(道德的) 지혜는 참된 선(善)과 악(惡)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력이다. 영혼이 어둠 속에 있다면 마음은 이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엡 4:18).
근원적으로 하나님은 원천적 지혜시며 인간의 지혜는 파생적 지혜다.
“그러므로 (만물을 재는) 정신의 척도가 곧 지혜다”
(Modus ergo animi sapientia est) Augustinus,「인생의 행복에 관하여」(De Beata Vita), 4장 32절
성경은 도덕적 지혜의 기원과 기능에 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2. 지혜의 부족
의심할 여지없이, 지혜는 ‘어리석음’(foolishness)의 반대말이다.
지혜가 무엇인지는 그것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인데, 판단과 욕구로 나타난다.
지혜는 욕망(慾望)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욕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표상(表象)을 만들고 지성을 속이기 때문이다(약 1:14).
a. 허탄한 일에 빠짐
지혜는 존재의 질서에 따라 각 사물에 알맞은 지위(地位)와 가치(價値)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정신이 진리(眞理)의 빛에서 멀어지면 이 질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뒤틀린 채로 인식된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본래의 질서를 뒤바꾸게 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롬 1:23). 이것이 불행이다.
b. 자신을 진리 삼음
진리를 힘입어 사물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지혜다. 마음이 진리를 떠나면 “미련한 마음”은 어두워진다(롬 1:21).
이때 인간은 기껏해야 이성(理性)의 판단을 따르게 되고, 그만 못할 때는 육욕(肉慾)을 따르게 된다. 거기서 불행이 비롯된다.
지혜가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하나님 위에 둔다. 이때 마음은 어두운 바다가 되며 욕망(慾望)은 커다란 물결이 되어 출렁거린다.
생각과 삶은 질서를 상실하고 대신 혼돈과 불안을 겪게 된다.
3. 지혜의 근원
모든 이치는 그것을 참되게 하는 더 상위의 진리 때문에 참되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리(眞理)가 되게끔 하는 더 높은 진리는 없나니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veritas ipsus)시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곧 지혜다.
B. 무엇이 지혜를 주는가?
행복은 정신의 부유(富裕)이며, 불행은 정신의 빈궁(貧窮)이다. 이 정신의 빈궁함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정신의 부유는 많은 열매를 가져오지만(frugalitas), 빈궁함은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음(nequitia)만을 가져온다.
구약성경의 교훈들은 한 가지 지혜(the Wisdom)를 향해 달려왔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나 사라질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니다(고전 2:6).
이 지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경륜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복음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7)
그 경륜의 핵심이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지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4)
개인의 인생(人生)의 의미는 세계와 이웃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 위에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있다.
행복에 이르는 지혜는 이 경륜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긴다(시 10:4). 그러나 모든 지혜(知慧)의 근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곧 전적인 순종을 요구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완전한 존재시며, 그보다 높은 분을 상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순종(順從)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순종을 거부할 때 자유(自由)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비참한 속박은 모두 자유로워지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Christ)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지혜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의 지혜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경륜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다.
진리를 알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실천함으로써 지혜를 소유하라.
III. 적용과 결론
신자(信者)는 이미 행복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행복하지는 않다. 진리의 빛을 떠나 어리석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는 모두 현자(賢者)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그가 천지창조와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미 이 진리(眞理)를 사랑으로 붙잡은 마음이다. 그 사랑을 잃어버릴 때 어리석게 된다.
이 신령한 지혜(知慧)를 소유함으로 행복한 자가 되라. 진리를 알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실천함으로써 지혜로운 자가 되라.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8 2020. 2. 23 주일 낮 예배
<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라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5)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의 “첫째 되는 계명”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것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눅 10:27).
II.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라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다. 행복의 두 기둥이 있는데 지혜와 사랑이다. 이 둘을 묶는 아치(arch)가 바로 은혜(恩惠)다.
A. 사랑이란 무엇인가?
1. 사랑의 정의
사전적으로 “어떤 사물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마음이다”.
“정신이 어떤 대상에 고착하여 그것 자체를 즐거워하고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영혼과 마음의 경향성이다.” (KNJ)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
2. 사랑의 방향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성(知性)은 명정하고 감정(感情)은 고르며 의지(意志)는 올곧았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사랑(love)했으며 만물에 대해 선의(善意)를 가졌다. 그러나 타락하자 사랑의 방향(方向)이 바뀌었다.
능력은 동일하나 하나님 사랑에서 자기사랑(自己愛)으로 바뀌었다.
자기를 최고의 존재로, 자기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3. 자기사랑과 무질서
하나님의 사랑은 선한 질서다. 거기서 떠나면 무질서와 혼돈이다.
자기사랑이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 “자기”가 항상 참으로 선(善)하고 행복(幸福)하게 할 것만을 욕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이로써 평화와 안식,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B. 어떻게 그 사랑으로 돌아가나?
에베소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항구도시로 수도였다. 이교(異敎)의 중심지였으나 바울을 통한 큰 부흥으로 회개했다.
마술하는 책들을 불태웠는데 당시 은(銀) 5만 드라크마, 약 60억 원 어치에 달했다(행 19:19).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5)
1. 생각하라
에베소교회는 행위와 헌신, 인내와 도덕, 성실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으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계 2:3).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행복도 상실했다. 선한 행실의 모양은 남아있을지라도 그것은 낙과(落果)를 실로 매단 것이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enthumou)…” 이는 “기억하고”라는 뜻이다. 먼저 할 일은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진리(眞理)로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다.
신앙의 덕목은 믿음과 생각이니 이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기독교는 지성적 기반을 강조한다. 집을 짓는 것과 같다(마 7:24).
“생각하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어찌하여 잊었느냐”는 당부와 질문은 지성(知性)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생각하라
2. 회개하라
“회개하다”(metanoeo)는 “후에”, “다시”(meta)와 “생각하다”(noeo)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합당하게 행동하기 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F.W. Danker,「그리스어-영어사전」Greek-English Dictionary, 675
회개의 핵심은 생각하는 관점(觀點)의 변화다. 먼저 생각의 변화다. 이에 거룩한 감정(感情)이 생기고 의지(意志)를 행사하게 된다.
은혜는 뼈 속까지 깃든 자기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力)이다.
회개(悔改)는 죄에 대한 후회(後悔)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전존재(全存在)가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해 불결함을 경험하고 두려움에 떨며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5:8)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데서 온다. 그분의 위엄과 자비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회개다. 이로써 사랑으로 돌아간다.
미끄러진 신자는 행복하지 않다. 회개 없이 사랑의 회복은 없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눅 15:7).
3. 순종하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do the things you did at first).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신앙에 있어서 초심은 초애(初愛)다. “처음 행위”는 처음 사랑에서 우러난 순종(順從)의 삶이다.
참되게 살고자 은혜(恩惠)를 구하는 자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신다.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faith)을 가지라.
실패하지 않았던 신앙의 사람은 없다. 인간의 행복은 회개함으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다.
“은혜롭다”는 뜻이 무엇인가? 은혜는 사랑의 정동(情動)이다. 은혜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한다.
III. 적용과 결론
처음 사랑을 떠나서 과연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누구를 위한 삶인가? 왜 좋지도 않으면서 그 삶을 돌이키지 않는가?
“회개하라”는 명령이 불같은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은 못할지라도 이미 할 수 있는 바를 실천하라.
또한 아직 할 수 없는 좋은 것은 이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라. 그때 행복(幸福)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할 것이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1 (2020.01.13_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녹취자 : 오희열
Ⅰ. 본문해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인생에 대한 생각은 달라도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마다 행복하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번번이 그런 기대를 저버립니다.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나이니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열망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아무리 행복을 꿈꿔도 그렇게 행복하고자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어찌 그가 행복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Ⅱ.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중 한 사람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누군지를 알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했지 불행하기를 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행복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사람들 앞에서는 행복한 것처럼 말하지만 정말 그 사람 속속들이 행복한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주체입니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행복하고 싶은 것도 사람으로 행복하고 싶은 것이지 동물로서 행복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나의 행복과 인간으로서의 나의 행복은 떨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A.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이것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사람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입니다. 한눈에 봐도 이것으로서는 도저히 사람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넓고 광범위해서 이 정의가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것이 과연 사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일지 우리는 의심하게 됩니다. 더욱이 인간에 대한 이런 사전적인 정의가 우리의 인생의 행복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전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합니다. 국어사전 말고 철학사전을 읽어보면 인간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역시 국어사전보다는 훨씬 긴 길이로 인간을 설명하지만 그것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1. 존재의 근원
우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색은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대답하기 위해서 ‘인간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없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되어 얼마 있다가 아이가 태어납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없었던 아이인데 생겨납니다. 뱃속에서 이미 생겨나고 아홉 달 반 정도 있다가 인간이 가져야 할 외관을 거의 모두 가진 존재로 태어납니다. 분명히 1년 전에는 없었는데 생겨난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루 차이의 생일은 무한한 차이입니다. 그가 비존재이던 시점에 나는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듣지 마십시오. 구별이 안 되십니까? 그가 없던 시절에 내가 있었으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한대의 차이입니다. 그것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과학이 발달되면서 어떻게 인간이 생겨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체가 되고, 그것이 점점 성장하면서 신체의 모습을 갖추고 탯줄을 통해서 양분과 모든 것을 공급받으면서 자란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자도 사람이 아니고 난자도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냥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서 수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과) 비슷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없었던 곳에서 인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당연히 그 위로 끊임없이 올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올라가보면 마지막에는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생겨났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조된 것입니다. 만약 창조되었다면 창조하신 이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설명됩니다. 자기를(인간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맨 최초의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이 살 세계를 지으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지금도 살아 있게 하시고 또 언젠가는 죽음으로 데려가시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는 설명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자기가 누구인지는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알 수 없고 자기를 지으신 분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만드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2. 육체와 영혼
모든 사물은 구성요소(構成要素)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계는 부품을 가지고 있고 부품이 없어 보이는 물체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두 여러 가지 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일한 물질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다양한 원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물질이, 우주가 펼쳐지듯이 어떻게 끝없이 안으로 접혀져 있는지는 지난 주일에 보신 영상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독특성입니다. 어떠한 무생물이나 생물도 영혼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각기 다른 층차의 생명(生命)의 기능을 주셔서 훨씬 낮은 수준에서 생명의 작용을 하는 사물이 있고 감각기관을 가지고 약간 높아 보이는 정신작용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육체의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즉 그것들은 실체로서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빚으시고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얼핏 보면 쉬운 구절 같지만 이것은 어려운 몇 가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했는데 ‘지으시고’라는 히브리 단어는 ‘야샤르’입니다. 이 단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 의미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동작을 가리킬 때 쓰인 단어입니다. 즉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가공하고 빚어서 다른 형체의 것을 만드는 동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 흙을 빚으셨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니 어떤 방식으로 그 흙을 빚으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육체의 기원을 물질적으로는 땅에 두시고 더 근원적으로는 당신 자신에게서 난 땅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땅의 흙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흙’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티끌’ 혹은 ‘먼지’를 의미합니다. 그 먼지가 만약 흙에서 나온 먼지라면 흙과 동일한 성분일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단어는 ‘티끌’이라는 의미를 압도적으로 많이 가졌습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티끌이라는 단어, 성경에 자주 나오는 티끌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흙과 모래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모래와 섞인 흙, 혹은 흙으로 만드시지 않고 티끌로 만드셨다고 묘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티끌은 가장 존재감이 없는 사물입니다. 티끌과 같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허무함을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의 먼지로 만드셨다고 하신 의미는 결국 그 육체가 물질에 속했기 때문에, 육체의 기원이 땅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존재의 측면에서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치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거의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기원이 티끌로부터인 것을 알아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신의 육체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지 말도록 하나님이 깊은 뜻으로 이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아주 생생한 하나님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육체는 죄가 들어오는 것과 함께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땅에 묻고 7년 정도 지나면 거의 모든 살이 없어지고 뼈만 남습니다. 남은 뼈는 7년을 지나든 70년을 지나든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1천 년, 5백 년 전의 무덤이 발굴될 때 그 뼈들이 사람의 뼈로 똑같이 남아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물론 더 많은 세월이 흘러간다면 그 뼈도 결국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비해서 영혼을 만드신 방식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생기”는 히브리말로 ‘생명의 숨’입니다. ‘후-’하는 호흡을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입이 어디 있는 분은 아니실 것입니다. 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마치 사람이 숨을 불어 넣어 호흡이 멈춘 사람을 다시 호흡하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일부를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닙니다.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동작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영혼을 그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사람이 되게 하셨고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시점을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사람 속에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아무리 읽어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생령”이 무엇입니까? 직역을 하자면 ‘생명이 있는 영혼이 되니라’입니다. 히브리말에서 ‘네페쉬 하야’(nepesh haya)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한 해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해석은 이 ‘네페쉬’를 ‘혼’이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영’이 아닙니다. ‘영’은 ‘루아흐’라는 단어이고 ‘네페쉬’는 인간의 ‘혼’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영과 혼은 따로따로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인간은 처음부터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루아흐’라는 단어와 ‘네페쉬’라는 단어는 아주 쉽게 말하자면 감각하는 정신과 모든 것의 총체가 ‘네페쉬’이고 그 실체는 ‘루아흐’입니다. 그래서 영과 혼이라는 단어는 교호적으로 쓰이지만 혼이라고 표현할 때는 훨씬 더 육체의 감각까지 망라하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살아있는 혼이 되니라’, 혹은 ‘살아있는 영혼이 되니라’라고 번역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어색합니다. 살아 있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이 영혼이 되겠으며, 또 하나님이 영혼을 불어넣으실 때 죽은 영혼을 불어 넣으시고 그 후에 그것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에서 “생령”을 ‘living soul’로 번역했습니다. ‘네페쉬’는 히브리어에서 아주 자주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오래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배운 영어 표현 가운데 ‘There is not any soul in the street’, ‘길거리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번역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생령”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지가 문제입니다. 조금 더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원문에 충실했던 NIV성경은 “living being”으로 번역했습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되니라’,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생령은 사실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옮긴 것이고 진정한 의미는 ‘살아있는 사람’이거나 좀 더 보수적으로 번역한다면 ‘살아있는 존재가 되니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육체와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아담의 영혼이 만나서 결합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두 개를 결합하시고 그 결합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의미는 이렇게 결합했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티끌로부터 창조되었고 더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육체는 끊임없이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병듦, 늙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늙는다는 것은 젊은 몸이 변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원래 없던 티끌 같은 존재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육체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무’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기적인 본성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소적으로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을 돌아갑니다. 영혼은 그 자체의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강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와 헤어지고 나면 즉시 자신의 성질에 의해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거기서 하나님과 합쳐지지 않고 그 영혼 그대로 남아 있다가 부활의 날에 다시 그 육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써 육체도 완전한 상태에서, 영혼도 완전한 상태에서 결합함으로 우리가 그렇게 꿈꾸던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육체와 영혼은) 각각 이렇게 기원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물질이기 때문에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즉 인간의 육체는 끊임없이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유지합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적절한 환경을 갖추지 못한다면 인간은 생각보다 빨리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육체가 물질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자연 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죽으면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은 육체처럼 소멸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가 육체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영혼은 육체처럼 썩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들 수 있습니다. 온전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죽었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한다.’, ‘생명의 기운이 없다.’, ‘원래 영혼에게 주신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혼은 끊임없이 천상의 자원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생명을 갖고 그 충만한 생명력으로 육체를 지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세계와 화목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고 거기에서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육체의 양식은 물질이지만 영혼의 양식은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와 함께 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꼭 필요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하나님의 영혼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것은 결국 영혼과의 결합에 있고 영혼이 영혼답게 살아서 육체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게 하는 생명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B. 나는 왜 나인가
그러면 이제 우리는 비로소 ‘나는 왜 나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행복하고자 욕망하는 것은 단지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각 사람은 각기 저 나름대로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게 의과 대학에 입학해서 의학 공부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의사가 되었는데 도저히 그 꿈에 만족하지 못해서 모두 버리고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만화가라는 직업이 의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압력이 어느 정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어렵게 공부해서 의대를 입학할 때는 의대에 입학한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도 의사가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막상 그렇게 살아보니 별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변호사로서 명성을 떨치고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직업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기에도 의뢰인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닌데 마치 일체의 죄가 없는 것처럼 변호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 직업에 염증을 느낀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수입을 마다하고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이 선생님이라는 직업과 변호사라는 직업의 우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막상 나로서 무엇이 행복한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도 알았으니 이제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고자 욕망하는 것은 단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 그 상태가 나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이기에 같은 인간이면서도 또 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나일 수 있는가?’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한 재벌의 딸이 불의의 죽음을 당했고 사람들은 아마도 자살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죽을 때 30세가 조금 넘은 그녀의 재산을 정리하고자 조사해보니 받은 유산이 2천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이 물질, 혹은 소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그렇게 많으면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기가 있었는데, 그 자기는 다른 모든 것을 접어두고 돈이 그렇게 많다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그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개별적 영혼
그러면 도대체 나는 누구이기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은 다른 나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두 가지로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나인 것은 나만의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모두 설명할 수 없고 그것을 설명하려면 철학의 도움을 어느 정도는 빌어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우리는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이 우리의 영혼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고 그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은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영혼이 영혼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영혼이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뿐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기 모든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사람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도 동일한 지문과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혀 없듯이, 똑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쌍둥이가 똑같아 보여도 정확하게 검사해보면 어떻게 똑같은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안면인식기는 쌍둥이의 얼굴을 혼동하고 아빠와 꼭 닮은 아이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과 혼동하기도 해서 아버지가 아들의 휴대폰을 들면 잠금이 풀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비한 기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각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일은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비교가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의 훌륭한 특징을 생각하며 자신을 살피는 기회로 삼는 것, 이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끼고 자신이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느낀다면)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힘을 빼 놓는 것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개별적인 영혼의 소중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 잘 하는 사람은 공부 못 하는 사람보다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회가 이렇게 복잡하게 되었으니 우열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채집이나 하고 돌멩이를 던져서 동물을 잡아먹고 살던 때에는 아마 사람들이 공부를 가지고 열등감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빠른 다리와 날쌘 팔, 그리고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는 던지기 기술 같은 것들이 오히려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낙심하거나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동안 단 하루도 학교에 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공부 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학교 교육이 너무 재미없었던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그리 불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열등감을 느낍니다. 앞에서 든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부유함은 각 사람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도록 마취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가난하고 힘들 때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다가 먹고 살만해지면서 신앙이 태만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외모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허무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열등감을 많이 느끼면 얼굴이 조금 예쁘게 변합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근심과 걱정으로 그의 얼굴은 상할 것이고 못 생긴 얼굴은 좀 더 못 생기게 보일 것입니다. 조금 덜 생겨도 생글생글 웃으며 사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런 외모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렇게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만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자기 마을 사람들입니다. 먼 거리를 여행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네에서 다 그렇게 그렇게 생긴 사람들끼리 사니까 딱히 외모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봐도 눈에 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도 빠지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사는데, 이제는 수많은 매스컴이 발달되면서 예쁘게 생긴 배우들, 피부가 곱고, 아주 키도 크고 멋있게 생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수만 명 중에 한두 명을 뽑은 것입니다. 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고, 그 사람이 화장품을 선전하면서 나오니까 그 화장품을 계속 바르면 자신도 모델처럼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킵니다.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그 열등감이 극에 달할 때 물질적인 능력이 있을 때는 얼굴에 칼을 댈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시집가서 아이를 낳아봐야 바뀐 얼굴대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허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도 젊었을 때 잠깐이지 완전히 나이가 들어 늙어보면 아무도 그의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혼자 관람객이 됩니다. 거울 앞에서 말입니다.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 어느 정도 자신의 만족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면서 그 사람의 행동과 마음가짐, 속을 꿰뚫어 보며 그의 영혼의 어떠함을 보고 ‘나의 영혼은 왜 저 사람만 하지 못할까?’ 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진짜 은혜 받은 사람들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두 자신의 영혼은 한 인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정말 추하기가 짝이 없고 그 모자람과 추함 때문에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누가 못난 사람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직한 삶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비해서 나는 얼마나 견실한 사람이 되었는가? 얼마나 나의 삶에 대해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 작년에 비해서 내가 모든 삶의 사태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 10년 전의 나에 비해서 나를 만나 덕을 보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졌는가? 나는 정말 10년 전의 내가 부끄럽기 짝이 없고 지금의 내가 더 만족스러운 내가 되었는가? 이렇게 비교하면서 살 때 그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젊은 사람은 늙고 늙은 사람은 죽은 자처럼 되고 진짜 죽은 자처럼 된 사람은 결국 마지막에 진짜로 죽게 됩니다. 누가 거기에서 예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고유한 개별적인 영혼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서로 다른 영혼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다르게 창조하심으로써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 름다움”은 ‘다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움’은 ‘다름다움’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기에 그 사람과 어울리게 되고 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짐으로써 그에게 도움을 주고 그가 가진 것으로 내가 도움을 받으면서 어떤 인간도 자신으로 충족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이 서로를 의존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서로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눈에 띄는 재능이 있어서, 또 그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유익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렇게 발현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묻어두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극작가가 되고 소설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군인이 되고 전략가가 되고 생물학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적절한 기회를 만나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독특성과 그 안에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한 세기에 몇 명밖에 태어나지 않는 예술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독특한, 정도에 있어서 인류 역사에 있어서 몇 명 태어나지 않은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통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능 중에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힘써야 할 일은 교육인데 그런 것들을 모두 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어렸을 때 많이 제공해 주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기회를 사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자기 속에 있는 독특한 영혼의 장점들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무것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힘써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에 출연했던 어떤 아줌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골 마을의 마트에서 계산원 일을 하던 마흔 일곱쯤 된 아줌마인데 정말 연예인처럼 생기지 않은, 평범한 동네 아줌마였습니다. 그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저는 한 번도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부끄럽게 고백하는 아줌마였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I have a dream이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제 그녀는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어떤 극에 출연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만 목소리로 감동을 줍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냥 시골 마트에서 사람들에게 계산을 해주면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삶이 가수가 된 삶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삶의 기회를 포착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실험해보니까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영혼을 각자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 자신이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사회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개별적인 영혼으로 창조되었고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영혼도 아니고 또 미래에 반복될 영혼도 아닙니다. 영원에서 영원에 흐르는 그 모든 역사 가운데 있을 단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는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인생을 다 살고 나면 그 영혼은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없습니다. 육체와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지만 그때 우리의 삶의 무대는 지금의 무대와는 완전히 다른 무대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개별적인 영혼은 서로 다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열이 없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독특하게 창조된 영혼이 죄로 병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혼은 원래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육체를 잘못 인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을(은) (죄를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내가 왜 나인지는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만의 개별적인 영혼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는 나이다. 이것은 실제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자신 속에서는 인식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존재를 직접 지각할 수 없습니다.
2. 고유한 자아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실제적인 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고유한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인 것은 개별적인 영혼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만의 독특한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자아는 무엇입니까? 이 자아는 타인과 세상을 인식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主體)입니다. 이 자아는 의식의 통일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인식하고 그것에 정동되고 결정하고 의지로서 행동하는 일체를 이루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 자아 때문에 ‘자기’라는 주체성을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하기를 원하는 자기는 누구인지 모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불행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데서 불행해집니다. 매우 큰 죄를 짓고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불행하게 할 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죄를 짓고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튼 자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라는 주체성을 갖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주체성을 갖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는 멀리는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고 (가까이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마주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혹은 회사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심오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줍니다. 나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때로는 죄짓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인간에게 집요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입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 사람을 그렇게 죄짓고 나쁜 짓만 하며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개별적인 영혼으로 창조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실리가 없습니다. 악하게 창조했다면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이 되고 설령 자신의 창조에 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음을 즐기신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문제는 그가 어떤 자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현실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개별적인 영혼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매우 힘겨운 인생이,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인생이,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도 자아 안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니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할 것이고 내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학습해야 습득되지만 악은 배우지 않아도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악을 행하라고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라면서부터 자신 속에 있는 결함들이 발현되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망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욕망합니다. 불행하게 된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됩니다.
재밌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아이들, 혹은 유치부 아이들이 수련회나 성경학교 때 은혜를 많이 받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합니다. 이 아이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회개하는 것은 엄마 말을 안 들은 것과 동생하고 싸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그 이상의 욕망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남의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아내 접속해서 뱅킹으로 돈을 꺼낼 생각을 한다거나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서 청부 살인을 한다는 것은 꿈꾸지 않습니다. 욕망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나이에는 도저히 품지 않았던 욕망을 갖게 됩니다. 현대의 철학자들 중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그 관찰은 틀린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을 선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을 표출하고 욕망대로 (살다가) 마지막은 불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의 원인이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 주체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느끼는 자기가 고장 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그 많은 것들이 육체의 쏠림 현상을 가져옵니다. 행복의 관점을 영혼과 육체 골고루 균형 있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편중되어 편애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육체를 적도에 어긋나게 사랑하는 것만큼 영혼은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은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행복인데 그 중 한쪽으로 치우쳐버렸으니 그가 어떻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겠습니까? 마치 기름을 손을 잡으려는 것처럼 행복은 빠져나가 버립니다. 몸부림치며 움켜쥐었지만 행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손에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바로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자아 때문에 동일(同一)하게 자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개별적인 영혼이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이고 동시에 그 영혼이 ‘자아’라는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이 ‘나’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는 ‘계시다’가 아니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열네 살에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다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치 않고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신론자에서 무신론자,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의 나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여전히 나입니다. 그것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나만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나만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의 영혼도 끊임없이 변화를 겪습니다. 영혼의 변화를 받고 쇄신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받을 때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의 영혼은 얼마나 사뭇 다른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은 불행의 어둠 속을 헤매고 한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그렇게 변합니다. 자아도 동일한 자아지만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그 자아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합니다. 아무리 변화해도 내 자아가 내 동생의 자아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서로 비교할 수 없이 사뭇 다른 자아가 됩니다.
제가 무신론에 빠졌던 때를 기억합니다. 저는 무신론에 빠지면서 허무주의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매일 매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삶보다는 죽음이 나의 친구였습니다. 당연히 글을 읽어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죽음의 강에 발을 담그던 사람들이 쓴 글이 훨씬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는 아니지만 사람의 영혼의 밑바닥을 흔들어 놓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아의 고뇌 속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건너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말장난이었습니다. 몇 편 읽으면 그 다음에는 너무 뻔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생명이겠습니까?
더구나 자아는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자신의 자아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단지 관찰함으로써 자아를 알려고 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결코 스스로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아의 깊이와 넓이는 거의 우리가 인식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끝없이 넓고 넓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얻는 지식이라는 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손전등으로 한 지점을 비춰보는 (정도의) 지식밖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임상 실험입니다.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 어떤 법칙들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작업들은 의미가 있는 것도 있고 어떤 작업들은 의미가 없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내가 알리가 없습니다. 안다고 믿는 것은 기껏해야 내 자신의 육체, 그리고 가벼운 정신과 관련된 위안거리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배를 바닥에 고정시키는 닻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외국 항공모함 가운데 제일 큰 것은 약 10만 톤 정도 되는 배인데 6000명 정도 되는 승무원이 근무하고 한 나라를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공중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10만 톤짜리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닻을 내려야 하는데 닻 하나만 25톤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는 내려야만 바닥에 걸려서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아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행복을 원한다? 그가 원하는 행복이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 자신이 누군지를 모를 때 종종 느끼는 행복은 그 인생이라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닥에 고정시킬 수 있는 닻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닻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데, 그렇게 흔들리고 요동치고 평안이 없으면서 그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살펴도 자신 스스로 관찰함으로써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불가지론에 빠집니다.
3. 진리의 빛
(인간은) 진리의 빛 없이는 자아를 대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모두 자기에게 알려지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안다면 하나님이 유한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우리를 모두 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유한하다는 증거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식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무한한 당신도 자신에게는 모두 알려지셔서 하나님 자신에게 파악되지 않은 자기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이 자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심지어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려내지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하기를 욕망하지만 끊임없이 인생의 삽질을 하면서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영혼에게 해 주지 못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육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아를 대면하여 본다는 것은 신을 대면하는 것처럼 고도의 정신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이성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듯이 자기(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우리 자신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의 두 눈을 빼내어 1미터쯤 바깥에 두고 우리를 바라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학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껏 봤다고 해도 거울을 통해서 보았을 뿐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아주 맑은 거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또 사진 기술이 있어서 사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이전 시대에는 그저 석경을 사용했습니다. 검은 돌을 반짝반짝하게 문질러서 거기에 자신을 비추어 보거나 혹은 그 후에는 동을 문질러서, 구리를 문질러서 자기를 비추어 보기도 했고 중국의 어느 유명한 왕비는 호수 다리에 구멍을 뚫어놓고 잔잔한 물 위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거울로 삼았다고 하니 그렇게 비치는 형상이 얼마나 희미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도 있고 환경을 통해서 깜짝깜짝 놀라는 자신을 보면서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돌로 만든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그 형상은 아주 희미한 것입니다.
바로 진리가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그의 의식 속에 들어올 때 그는 그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자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곧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생각을 보여주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진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깨닫고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픈 부분을 잘 보살펴 주어 온전한 영혼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은 망가진 그 자신을 놀랍게 고치면서 회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C.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 저는 여러분에게 매우 매우 깊은 신앙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성으로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행복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행복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를 때 그 행복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의 느낌의 만족에 달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행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있는 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는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만 파악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은 불 꺼진 방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불이 꺼졌던 모든 등 기구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찬란한 빛이 내리쬐기 시작합니다.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보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면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으로 갈팡질팡하게 되어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간적으로는 만족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 만족은 잠시 후에 지겹게 되고 또 그 만족감이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시간에 의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박탈됩니다. 우리의 젊음, 건강, 생명, 소유, 모든 것들이 그 따위의 것들입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면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내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도 그 의미를 따라서 사는 나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역시 동일하게 지혜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모든 사람들을 알고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고 인간의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 사실에 이미 동조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행합니다.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누구를 위해 그런 삶을 계속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덧 우리의 인생은 나이를 먹고 저물어 가고 젊은 사람은 늙고 늙은 사람은 죽는데 우리가 수없이 실험해 본 실패한 행복의 길을 또 다시 걸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의 방황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오늘 내게 일어나는 행복하고 불행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들은 나의 자아를 얼마나 더 바람직하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의미의 줄을 놓칠 때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방황하는 동안에는 결코 행복이 있을 수 없으니 방황 자체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을 얻은 후에 그 연결을 가지고 뒤를 바라보기 때문에 회고적인 의미에서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이지 진실한 말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여러분을 후려치고 때려서라도 그 의미를 찾도록 만들어주시지만 여러분은 잠자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잠깐 깨어나다가 또 잠에 듭니다. 그러는 동안 행복을 열망하면 열망할수록 행복에서 소외된 채 불행을 곱씹으며 살아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삶입니까? 내 이웃을 위한 삶입니까? 이웃도 내가 행복할 때 뭔가 덕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나 자신은 행복합니까? 당치도 않은 행복을 꿈꾸고, 행복을 꿈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어두운 무지 속을 걸으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있지도 않은 물건을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나는 진실로 행복하기를 욕망합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정확하게 말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그때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창조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은 나를 나로서 아주 아름답게 꽃피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기 위해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더 이상 여러분 자신도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고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그 길을 고집하면서 불행하게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니 이런 주님을 만나고 행복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3 (2020.0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녹취자 : 구문회
Ⅰ. 본문해설
이 시의 저자는 아삽입니다. 아삽은 성경에서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에 찬양대를 인도하던 악장이었을 것이라고 역대상 16장 5절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에 12편의 시를 썼습니다. 이 73편은 그 시편들 중 하나입니다.
오늘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항상 평온하고 재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죽을 때에는 큰 벌을 받고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4절을) 살펴보니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였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낙심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매일 애쓴 자신이 헛된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나도 그냥 그들처럼 살아버릴 걸’(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후회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무지(無知)에서 오는 영적인 침체였습니다. 시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침체에 빠졌다기보다는 악인의 형통함, 그리고 그 악인이 평안히 죽고 죽을 때까지 잘 사는 것을 보니 마치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으니 무지에서 영적인 침체가 온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무지에 대해서 (비교적) 너그러운 사람은 ‘거의 악’이라고 불렀습니다. ‘the almost evil’이라고 말입니다. 더 엄격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the very evil’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사랑하는 (개) 코코가 있습니다. 벌써 이제 두 살이 훨씬 넘었습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랐는데 귀가 예쁩니다. 털이 많이 나고 온 몸이 하얀색인데 귀만 약간 브라운 빛깔이 납니다. 신기하죠? 털이 길어서 자꾸 돌아다니다가 귀때기가 눈을 때려서 눈을 찔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딸이 귀를 고무줄로 양쪽을 소녀처럼 묶어 주었습니다. 한쪽 고무줄은 계속 풀어졌는데 한쪽 고무줄은 하루 동안 묶여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후부터 얘가 아주 기분이 우울해지면서 밥도 잘 안 먹고 주인이 나타나도 요란하게 짖지를 않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무줄로 묶은 그 옆 부분이 500원 짜리 동전 크기만 하게 상처가 난 것처럼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데리고 가보니 피가 안 통해서 괴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만약 약을 발라도 끝까지 치료되지 않으면 한쪽 귀를 잘라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딸은 코코를 매우 이뻐하는 견주입니다. 그렇게 만들려고 리본을 묶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를 훨씬 편하게 해주려고 고무줄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피부를 괴사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약을 발라주고 있는데 치료되면 참 좋겠습니다. 한쪽 귀가 잘린 코코를 보는 것은 코코가 죽을 때 까지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생각나게 할 것 같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지하면 잘 해보고자 한 노력도 결국은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배우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빨리 많이 깊이 배우고, 덜 중요한 것은 천천히 덜 배워도 되게끔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전제품을 종종 사용법을 몰라서 잘못 사용해서 망가뜨려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서가 얼마나 두꺼울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썼지만 여러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에서 오는 영적인 침체는 깨닫기 전까지는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결국은 깨닫고 나서야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러했습니다. 혼란 속에 있었고 악인의 번성함을 보면서 자신이 경건하게 살아온 모든 것들이 헛되게 느껴졌습니다만 성소(聖所)에 들어갈 때 그는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17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파멸이었습니다. 즉 인생은 인생 한 토막 안에만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까지 그 의미는 연결되어서 행한 대로 하나님은 정의롭게 갚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28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Ⅱ. 행복하기를 원하는 인간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보고 ‘무엇이 행복이냐’고 설명하라고 하면 그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진리와 비슷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지만 진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행복도 이와 같아서 ‘행복이 무엇이냐’고 설명해 보라면 못 하지만 그러나 그가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아.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은 영혼에 새겨진 기억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철학가들과 사상가들이 노년에 빼놓지 않고 쓰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에 관해서입니다. 그것은 곧 인생 전체에 관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무엇을 배우는 것도,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도, 무엇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도, 그 모든 욕망은 결국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A. 행복을 추구함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자아는 그것을 의식 못 할 때가 있으나 영혼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적절한 때에 우리의 자아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들이 볼 수 있는 많은 미신적인 종교들이 바로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근원(根源)이 무엇인지를 잘못 추적한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감각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한 사랑 안에서 한 하나님으로 계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신 이유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삼위 하나님은 행복하셨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행복을 본뜰 때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릇되게 본받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본받음으로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욕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를 때 그 욕구는 육욕(肉慾)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으나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 행복하기를 갈망하는 것만큼 육욕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不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 행복해지고자 열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참된 행복과 거짓된 행복을 혼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깊은 곳에 남아있는 참된 행복에 대한 기억과 육체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세속적 행복 사이에서 인간은 갈 길을 잃게 되고 여기에서 인간은 불행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해진 사람은 불행해지려고 하다가 불행해진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불행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애쓴 결과로 결국은 불행해진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에 의해서 악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악은 없습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물질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으나 돈이 없습니다. 결국은 돈이 많은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뺏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그 행동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악행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그 일이 선하다고 믿었고, 아름답다고 믿었고,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행복과 거짓된 행복을 혼동하면 혼동할수록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만큼 더 큰 불행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참된 행복만을 욕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바탕 그 자체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운명적으로 그 악을 지니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행복하게 할 것만을 욕구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육체의 욕구대로 살다가 더 큰 불행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B. 네 부류의 인간
행복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때 사람은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무지해서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빛이 거의 없거나 매우 매우 희미합니다. 진리를 모르니 자기를 그 진리의 거울로 대면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먹고 마시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그만두면서 자기를 완전한 중심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알면서 그렇게 살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그런 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짐승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선, 참된 행복, 보람, 가치, 질서 이런 것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있다고 할지라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굽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도 죽어도 결코 행복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잘못된 길을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확신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고,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단을(이단인 종교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름대로 이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믿는 어떤 사상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리로부터 매우 멉니다. 이럴 경우에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길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다가 미끄러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았고, 그 길을 걸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으나 거기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행복이 아닌 거짓된 행복을 욕구하고 있기 때문에 미끄러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참합니다. 이 사람들은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 행복의 길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게 살아가고, 심지어는 잘못된 길을 확신하며 사는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확신과 기쁨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잘 믿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던 때에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길이 즐거운 길이었다면 여러분들이 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길에서 한번 미끄러져서 넘어진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나의 이성으로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육체의 욕구로는 행복이 아닌 길을 끊임없이 가고자 할 때에 나는 찢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의 ‘나’이지만 이것이 산지사방으로 찢어져서 각기 소리를 치며 주장하기 때문에 분열증에 걸린 사람처럼 혼란을 느낍니다. 거기서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을 향해서는 이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행복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전하는 종교를 무엇 때문에 믿겠으며, 소비자들에 의해서 소용없는 것으로 입증된 신앙을 왜 갖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행복해야 할 이유는 여러분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까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굳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모두 부자가 되고 수많은 물질을 누리고 높은 지위에 이르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재능을 갖게 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합니다. 삶의 여러 상황들을 만나도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또 자기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웬만한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드론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작은 것 하나가(를) 네 개의 날개를(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하늘로 떠오릅니다. 나는 항상 내 키 너머에서 세상을 본 적이 없고, 내 키 아래서도 앉아 있는 경우(나) 드러누워 있는 경우가 아니면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이 드론은 높이 날아오릅니다. 원하면 몇 십 미터까지 올려 보낼 수 있고, 1 킬로(미터)까지도 멀리 보낼 수 있고, 성능이 좋은 것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카메라를 비춰보면 나는 보이지도 않고 산과 희미한 들판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천천히 내려오면 내가 있는 지역을 비추고, (내가 있는) 장소를 비추고 나를 희미한 점으로 보여주고 점차 점차 내려와서 화면 전체에 가득 찬 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수시로 뒤로 드론을 띄워 자기를 넓은 지형 안에 있는 사물로 포착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느 지점을 가고 있는지를 파악합니다. 희로애락(의) 수많은 상황들을 만나지만 기쁘다고 들뜨거나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좌절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는 희로애락을 겪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포착해서 하나님과 연결 짓고 자신의 인생에 주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동치는 세상에서 바다 물결을 따라 떠오르고 내려앉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지만 북극성을 바라보고 노를 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슨 일을 만나던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변천하는 사물 속에서 불변하는 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III.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주관적인 만족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인 도달도 아닙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확실히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행복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평안과 기쁨과 쉼이 그 안에 있어야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행복을 내가 기쁨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을 경험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약을 왜 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들에게 그것이 매우 기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쾌락을 누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쾌락은 너무 커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쾌락의 어떤 것도 그 수치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을 합니다. 생명 과학에서 ‘역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역치는 어떤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 투여해야 하는 힘을 뜻합니다. 생리학에서 이 역치는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 최소의 자극과 그 이상 자극해서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그 지점을 끊어서 그 중간에 평균을 내어 역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역치는 어떤 작용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최소한의 자극입니다. 그것이 역치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마약을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예를 들어 1의 역치로 마약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역치 2를 집어넣어야지 동일한 자극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점점 심해져서 결국은 생명을 건 도박 수준의 역치를 넣어야 자극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행복이 주관적인 만족감에 그친다면 마약을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행복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마약을 권장했습니다.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ecstasy’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설득에 설복된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복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이든 자유주의 국가이든 진보적인 나라든 혹은 보수적인 나라든 상관없이 이 마약은 정죄됩니다. 물론 미국에서 마약보다 가벼운 마리화나 같은 것에는 합법화한 주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국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금지하고 어겼을 경우에는 매우 심한 형벌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은 몰라도 역시 행복은 그렇게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미 영혼 속에서 기억으로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은 객관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비혼으로 외롭게 지낸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하는 것이 행복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행복한 모든 사람들은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의학적인 보고서에 의하면 결혼하지 않고 함께 부부로 살지 않은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 기간을 5년 정도로 계산을 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결국은 돈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것만큼 돈을 매우 중요한, 때로는 결정적인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고 행복한 사람들은 반드시 돈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현저히 부족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들은 나보다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식이 뛰어난 많은 사람들의 자살 비율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높습니다. 결국 지식을 가지고 행복한 사람은 지식 자체 때문이 아니라 지식과 함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행복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사용하는(uti)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frui) 데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에 있고,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누리는 복된 상태가 행복입니다. 신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행복은 선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행복’, ‘happiness’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행복이라고 번역된 대부분의 본문은 그 단어가 ‘토브’입니다. 그 ‘토브’라는 단어는 원래 ‘좋음’, ‘선함’ 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할 때에 사용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볼 때에 선과 인간의 행복은 결코 떨어질 수 없고 그것은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선이 무엇일까라는 꽤 긴,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혹은 철학적이기도 한 문제까지 넘어갈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선하고, 하나님의 선이 그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행복은 모든 선들 중에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A. 인간의 불행
인간의 불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하려면 행복이 아닌 것, 불행을 생각해 보면 아주 빨리 이해가 됩니다. 즉 행복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고찰할 때 행복이 무엇인지를 빨리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에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이란 원하는 것을 소유(所有)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돈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건강이 없어서 건강해지기를 열망하는 한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가 아무리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무지해서 고통을 느끼고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갈망하고 있는 한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참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이 악(惡)한 것일 경우입니다. 만약에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선을 누리는 것인데 악은 선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악한 것을 가짐으로써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악하다면 그것은 선이 결핍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누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기쁜 것만큼 결국은 불행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것을 선택하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선이신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善)이시고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그 복(福)에서 멀어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허무(虛無)한 것일 때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이 그렇게 사랑을 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고, 또 무로 돌아가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한 것을 사랑하면서 인간은 거기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사라져 갈 육체(肉體)가 없어질 허무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니, 있지 아니할 것이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어떻게 인간이 귀히 여길 만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이 있겠습니까? 사랑한다 할지라도 이기심에서 비롯된 육욕은 결국 육체의 욕망입니다. 그런 육체는 사라질 존재입니다. 사라질 것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것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기쁨도 없어집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만약에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가 사랑을 안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없을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라질 육체로서 없어질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육체가 없어질 것들에 매달리는 동안에 영혼은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 아름다운 질서는 깨지고 결국 간절히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다가 결국 영혼과 육체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는 잠시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거나 혹은 허무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은 허무한 것을 소유함으로서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행복과 소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B. 행복과 소유
인생의 행복은 자기가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복된 것입니다. 이 복됨은 하나님의 행복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복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하시는 방법은 그들을 당신 안에 오게 하셔서, 당신 안으로 이끄셔서 (그들이) 당신 안에 있음으로 행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는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게 되고 마약과 같이 일시적으로 주는 기쁨을 영원한 행복과 교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 (간의) 아름다운 결합이 깨지고, 그리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할 영혼과 육체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윤리학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양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욕구대로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잠시 떨어졌을 때 그는 무한한 적막으로 가득 찬 우주공간에 던져지는 것 같은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정죄하고 자기 안에 새겨진 율법은 자신을 심판합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욕구하면서도 진정한 행복과 평안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각 있는 어떤 종교도, 도덕성을 갖춘 어떠한 종교나 사상도 ‘니 마음대로 살아라. 결국은 행복하게 되리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사상은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행복이 인간 스스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바깥에 있는 그 무엇에 의해서 (그 무엇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소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 때문에 행복한 것은 거짓된 행복이고, 잠시 거짓 행복을 느끼나 궁극적으로는 그를 불행하게 합니다.
1.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
그러면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해야 되겠습니까? 첫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를 소유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변질(變質)되는 것일 경우에는 결코 그것을 가짐으로 우리가 행복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자,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변절했습니다. 그 여자가 변절할 때 똑같은 정도로 (남자의) 사랑도 식었더라면 그 남자는 덜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일편단심으로 그 여인을 사랑하는데 이 여인의 마음이 변하고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 반대 방향으로 똑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그녀를 사랑하며 행복했던 것만큼 똑같은 정도로 불행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도 보면 안나 카레니나가 덕스럽고 이성적인 남편을 버리고 미모의 청년을 좋아하게 됩니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마지막 결과는 비참한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일시적인 육욕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 그것은 소멸(消滅)할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친구 중에 개를 끔찍이 사랑하던 친구와 그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전 그 개를 죽음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코코를 키운다고 하니까 왜 시작을 했냐고 그러면서 그 개가 결국은 나이 들어서 죽은 후에 온 가족이 그 슬픔을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웠는지를 길게 설명하면서 그런 인연은 가질 것이 못 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친구는) 그 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은 다음에 정식으로 개 장례업체에 부탁을 해서 몇 십 만원을 들여서 공식적인 장례식을 치르고 납골당에까지 넣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개를 향한 사랑이 애틋하겠습니까?
인간의 불행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사라졌는데 그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가는데 매우 큰 영향을 줄 때 그것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날이 갈수록 서로를 아껴주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사랑한 것이 한 사람이 죽었을 때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적도에서 - ‘적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도입니다. 정도와 분량입니다. 영어로는 ‘measure’이라고 합니다 – 벗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 남편이 깊은 우울증에 걸려서 아침부터 밤까지 아내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죽음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적도에 어긋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이외에는 이런 사랑을 할 대상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으실 염려가 없고, 우리가 잃어버릴 걱정을 해야 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그런 감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최대치의 적도를 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무한하고) 그분의 가치는 무한하고 그분의 존재는 영원하기 때문에 아무리 완전한 사랑을, 아무리 무한하게 드려도 적도에 어긋나서 그 사랑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단 한 분만이, 그것이 한 분에게만 그런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잃거나 소유를 잃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무한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극복하지 못할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슬플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인간의 정이 있기 때문에 비록 전체적으로는 그 적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불완전한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적도를 절대로 어긋남이 없이 모든 사람과 사물을 꼭 들어맞게 사랑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정을 느끼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또 함께 만날 것을 믿어도, 사랑하는 혈육이나 남편과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인지상정으로 슬픔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소유함으로써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소유의 대상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함이 없기 위해서는 완전해야 하고 일시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부동산 가격이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고공 행진하는 부동산 가격 속에 삽니다. 부동산이 없는 우리는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까 봐 염려할 것도 없고, 오를 것이라고 기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부동산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항상 남의 일 듣듯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부동산을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벌었고,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매우 심화시켰습니다. 경기가 불안정할 때마다 부동산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부동산의 경기를 부추기려고 하는 정부나 그러한 정책에 널뛰기를 하면서 인생의 행복을 한번 부동산 투자에 걸어 보는 것 모두 좋은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도 모두 야채밭, 채소밭, 심지어 호박밭 천지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저는 이미 안양을 다니고 있었고 또 살고 있었습니다. 항상 거름 지게를 메고 밭에다가 거름을 주고 대대로 채소를 길러서 먹고 살던 사람들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뉴스가 들렸습니다. 안양 이쪽 지역이 어마어마한 주택 단지로 개발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안양지역에서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매우 잘 알았습니다. 얼마나 부동산 가격이 헐했는지 관양동의 현대아파트 32평 한 채가 4천만 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뒤로 백 하면 (그쪽 부동산들은) 하잘 것 없는 가치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배추밭에 거름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수백억의 보상금을 받은 것입니다. 늘 채소나 기르고 뜨물이나 거두던 아낙네들은 이제 사우나와 마사지 집에 누워서 기사가 몰고 다니는 그랜저를 타는 처지로 바뀌었고, 남자는 할 일이 없어도 돈이 많으니까 이리저리 다니다가 변신의 변신을 꾀하여 국회의원 출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에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농부의 집안에 결국은 정부의 통보가 왔고, 아주 너른 논과 밭은 수용이 되어서 그 당시에 150억 가까운 돈을 보상금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운명이 그저 조상 대대로 물려준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인 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보상금을 가지고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가서 땅을 산 후 평생을 업으로 삼고 살았던 농업에 종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3명인가 4명인가 있는 남매들은 즉각적으로 그 보상금을 수령하여 자신(들)에게 분배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를 부추겼고, 결국은 어머니는 넷을 공평하게 편들지 않고 그중에 아끼는 아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배분은 불공정하게 됐고, 이것은 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전에도 살갑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일을 통해서 각각 며느리와 사위까지 가세하며 이 형제들은 아주 거친 소송 전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너무너무 괴로워하던 아버지는 결국 몸져눕게 되었고, 병든 남편이 회복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결국 이 아내도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150억이 되는 돈을 찢어 가졌습니다. 돈을 많이 받은 형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이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산산이 가정이 불행해지고 그리고 고통으로 휘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 그것들을 갖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불행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슈퍼볼의 역사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억에 이르는 당첨금을 받은 많은 사람들을 언론기관에서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는 거의 다 불행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해 전에 TV에서 그렇게 대박 로또를 맞은 사람들을 추적했는데 대부분 사람이 불행했습니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는데 삼천오백 만원을 1등으로 당첨되어서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이 당첨이 되고 아내에게 숨겼습니다. 그리고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로또 1등에 당첨이 돼서 몇 천만 원을 받으면 뭐하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아내는 순박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을 좀 넓히고 싶어, 뭐도 사 놓고 싶어, 그중에 일부는 엄마를 드리고 싶어” 등등 말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그런 것이 없어서 불행해?” (했더니) “그렇지는 않지”(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남편은) “그러면 여보, 내가 솔직히 말할게. 1등 복권 삼천오백 만원에 당첨됐어. 불우 이웃을 돕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은 오히려 그 사건이 있고나서 부부가 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인간이 열망하는 정도가 열망하는 그것의 가치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인간은 가장 영원하고 완전하고 무한한 것을 열망해야 됩니다.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소유할 때만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라질 뿐 아니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주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그런 것이 있습니까? 있는 모든 것들은 없었던 때가 있고 그래서 결국은 없는 시절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때가 있었으니 언젠가는 잃어버리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랑하는 부유함도 젊음도 아름다움도 건강도 모두 욕망은 남아 있으나 실제로 그것들은 손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라지지도 않고 상실할 두려움이 없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행복은 소유하는데 있지만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을 소유해서도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을 소유함
그러면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내 인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분과 사랑과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물질(物質)이나 상태(狀態)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부피와 크기와 형체와 가격을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을 갖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물질과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 자체도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분을 공경(恭敬)함으로 모시는 것이 그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존재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무한하고 영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그분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없이 두렵게 여기는 사망이나 죽음이나 깊음이나 이런 모든 피조물들 혹은 그 상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데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누구로 창조되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부분적으로는 인생의 의미를 주었지만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의미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았고 나도 좋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의미를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여인을 열렬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날들은 사실상 산 것이 아니었고, 사랑할 때 이런 감정이 되고 이렇게 행복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에 그 사람을 변치 말고 사랑해야지 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는 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궁핍 속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함부로 낭비하고 자원을 허비함으로 미래에 다가올 궁핍을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의미를 준 것입니다. 혹은 이제 나이가 들고 인생에 철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아등바등하며 사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너그러워지고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미국 연방 대법관에 올랐던 그분은 자기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설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무례하고 못된 사람이 당신을 함부로 대하거나 잘못 대한다면 그와 다투지 말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순간 반박을 한다고 해서 설득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 이렇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모두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에 있어서 우리를, 아주 적은 부분의 행복의 한 조각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으니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생활과 절실한 말씀 생활,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삶을 우리의 기도에 합치시키려고 하는 이 모든 애쓰는 노력들은 결국 내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한 행위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손으로 혹은 우리의 통장에 소유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격으로 그분을 소유하고 우리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시는 것이니 그렇게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입니다.
모든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하기 위해서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인데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기를 넘보았기 때문에 결국은 행복하려다가 불행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행해지지 않는 비결이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급박한 문제인지를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진리의 빛이 모자랐기 때문에 내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좀 더 나은 지위에 오르고, 누군가에게 지배를 받기 보다는 누군가를 지배하면 걱정은 사라지고 행복이 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일시적으로는 만족감을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그 크기만큼 공허와 불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높아진 사람 이외에는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져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잊혀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사람들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 무엇 때문에 불행한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소유하지 않고는 여러분도 행복할 수 없으니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하게 만드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결국 모든 갈등과 고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고뇌의 과정을 통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듯이 지성의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질서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악한 자는 마지막에 악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게 되고, 선한 사람은 그 선에 대한 부응을 받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은 의롭지 못한 분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지상의 세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잠시 살다가 지나가는 인생에만 한정시켜도 안 되고, 심지어는 내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 그 한 조각에만 나를 맡겨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성의 벼락을 맞고 장엄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는 선이라’ 혹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나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부디 하나님을 소유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잠시 살다가 시간 속에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소유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물질을 소유하고 기쁜 것도, 건강을 소유하고 즐거운 것도, 젊음을 소유함으로써 마음에 소망이 생기는 것도 모두 하나님을 소유하는 행복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소유하는데 있으니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언제든지 그분을 여러분들의 생명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어떤 삶의 상황을 만나든지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4 (2020.01.19._주일오전4부)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 (1)믿음과 지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녹취자 : 박나리
I. 본문해설
저는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그러면 어떻게 행복에 이르게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살펴볼 것은 우리가 믿음과 지혜로써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통해서 지혜를 가짐으로써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무지에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性品)과 그 성품을 어떻게 시행(施行)하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을 걷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이 지식이 없이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고, 그러면 그는 행복하기를 욕망하나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II. 인간은 왜 비참한가?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고 그것은 곧 비참(悲慘)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비참할까요? 인간의 비참은 궁핍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의 궁핍입니다. 먼저 육체의 궁핍을 살펴보겠습니다. 육체(肉體)는 생명(生命)을 잃은 것만큼 건강을 잃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80세까지라면 중간 나이가 40세라고 압니다.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활기차고 건강하고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일도 나이가 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한 인간 육체의 완전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궁핍하면 삶은 불편해집니다. 그리고 물질이 부족하면 결국 건강과 생명을 위협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부정적일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보면 약간이라도 편하게 앉고 편하게 지내야지만 한정된 에너지를 덜 소모할 수 있습니다. 몇 시간을 서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다 앉는 것이 에너지가 덜 소모되고, 상체를 젖히고 기대있는 것은 좀 더 편안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완전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에너지의 양으로 보면 사실 80세 인생의 중간은 30세 또는 35세 정도 된다고 봐야합니다.
물질이 궁핍할 때 생활은 불편해지고 아주 부족하면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靈魂)이 궁핍하면 인생 자체를 망칩니다. 아무리 육체가 건강해도 영혼이 궁핍하면 오히려 그 건강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따라서 참으로 비참한 것은 영혼의 궁핍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의 결여입니다. 하나님의 영생(永生)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궁핍하면 인간의 내면세계는 갈가리 찢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영혼이 강력한 힘으로 마음과 생각과 의지, 모든 육체의 작용까지 통솔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을 생각해봅시다. 한 아버지가 있는데, 그는 신앙이 돈독하고, 도덕적이고, 삶의 모범을 보이고, 가족을 매우 사랑하고, 게다가 능력도 있어서 많은 돈을 벌어옵니다. 이웃 사람에게 존경과 신망도 받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그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가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거나 복잡한 일이 생길 때, 아버지는 탁월한 판단력으로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뒤따르는 책임을 자신이 다 집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정에서 아내가 가끔 성질을 부리고 아이들이 조금씩 빗나간다고 하더라도 질서가 잡혀있기 때문에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내도 생각해보니 어디를 가도 이만한 남편을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아갑니다. 이렇게 질서가 잡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수많은 영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각각 인상을 남겨서 소위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중에는 내가 마땅히 욕망해야 할 것을 욕망하게 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떤 경우는 내가 욕망하면 안 되는 것을 욕망하게 합니다. 영혼이 건강하여 이를 통솔하고 허락할 것과 통제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서 나의 온 정신과 마음을 바르게 할 때,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온전하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하고 욕을 하다가 경찰서에 수시로 잡혀가며, 사람들이 자신을 속여 돈을 취했다고 집에 와서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장판이 됩니다. 게다가 능력도 없어 아내가 돈을 빌려오면 그 돈으로 술을 마십니다. 그것을 아이들이 다 보고 자랍니다. 그런 경우에 그 집안이 통솔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엄마도 그렇다면 그 집안은 망할 것입니다. 바로 질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정신과 모든 것이 그 속에 반영됩니다. 영혼이 병들었으면 그 사람의 마음, 감정, 생각, 모든 것이 병듭니다. 그리고 바르지 않은(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삶은 분명 부도덕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집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열 현상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욕망들이 서로 싸움을 하고 다투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자기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 혼란 속에 안정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안정이 있다면 혼란이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까? 끊임없이 싸우고 갈가리 찢겨진 마음에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평화와 안정이 없으니 거기에는 쉼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내면에서 오는 깊은 기쁨, 인간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기쁨 대신에 마음 안에 싸움을 잠시 멈추고 한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즐거움에 탐닉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야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면서 주체적으로 살아야합니다. 내가 언제나 나임을 잃지 않고 나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는 삶을 살아야 행복합니다. 영혼이 궁핍하여 마음이 찢어지게 되면 주체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살 만큼 살아도 게임에 중독됩니다. 회사 다녀온 후 새벽까지 게임하고 포르노에 몰두합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혼의 생명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디 게임이나 포르노뿐만 입니까? 성적으로 깊이 탐닉해 중독 상태에 빠진 사람도 많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데에만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 분주히 쾌락을 좇지 않으면 안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산업은 영혼이 궁핍한 사람을 찾아서 쾌락을 공급합니다. 그 시장이 어마어마합니다. 미국의 한 포르노 기업은 일 년에 10조원씩 매출을 올린다고 합니다. 이들이 번창하는 이유는 놀랍습니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진 사람이 게임에 몰두하면 찢어진 마음이 하나가 되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섹스에 몰입하면 갈가리 찢어졌던 마음이 놀랍게 하나로 모입니다. 순간적인 안식을 느낍니다. 이런 이유로 영혼이 궁핍하면 결국 사람들은 헛되고 가치가 없는 것에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은 비참하게 됩니다.
육체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건강해야 합니다. 영혼의 건강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고픈 배를 움켜잡고 밥 대신 모래를 삼킨다면, 목마른 목을 부여잡고 설탕물을 마신다면, 과연 배고픔과 기갈이 끝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궁핍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III.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1) : 믿음과 지혜
그러면 어떻게 궁핍하지 않고 영혼의 풍성함에 이르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 조건이 지혜입니다. 오늘 설교의 부제를 ‘믿음과 지혜’로 단 이유는 가장 결정적인 지혜가 믿음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과 하나님을 포함해 자신 바깥의 대상을 인식(認識)할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계와 자신에 대해 알 때에는 두 손으로 물건을 들듯이 믿음과 지혜로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가 이성(理性)이라는 손이고 또 하나는 믿음 혹은 신앙(信仰)이라는 손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크기가 150억 광년이 된다고 과학자들이 대부분 의견을 내놓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우주의 크기가 150억 광년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정한 것입니다.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고 그 뒤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선 이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리고 신앙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성의 기능은 기본적인 기능이 사물의 전건과 후건을 연결해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컵이 이렇게 뚜껑으로 닫혀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뚜껑을 열었습니다. 이 때 닫혀 있는 것이 전건이고 연 후가 후건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건데, 이 컵의 뚜껑은 붙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고 뚜껑을 들고 (보니) 안이 텅 비어 있어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전건과 후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하게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탄탄히 묶여 있습니다. 예외가 없이 원인과 결과로 탄탄히 묶여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법칙을 발견했는데, 수천 개의 숫자를 대입했을 때(는) 답이 나오나 한 개의 숫자만 대입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법칙은 성립을 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맞아야 합니다. 이성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기능이 뛰어난 사람이 공부를 잘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것은 이성, 지성의 크기와 감성의 크기입니다. 지성의 크기가 뛰어나면 학자, 연구원을 하면 잘 할 것이고, 감성이 뛰어난 사람은 예술을 하면 뛰어날 것입니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때 하나님이 이성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왜 그럴까 항상 설명하고 익숙해져야 편안함을 느낍니다.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는데 만약 여기 앉아 계시다면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확실히 그분은 우리 아버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만약에 와 계시다면 두려울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공포를 느낍니다. 저기에서 문을 두드리고 누가 걸어오면 무섭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갑자기 사람이 눈앞에 서 있다면 무서울 것입니다. 이성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에 비해 신앙, 곧 믿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아닙니다. 음성학에서 이야기하는 가청 (주파수) 대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파수가 저주파부터 고주파까지 있습니다. 모두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 대역은 정해져 있습니다. 쥐가 많이 나타나는 집에 초음파 발생기를 놓으면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데 쥐가 듣기에는 기차 소리처럼 시끄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에 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선을 통해 보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광선이 가시광선인데 극히 일부입니다. 촉각과 후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는 인간의 후각에 250배라고 합니다. 개가 맡을 수 있는 냄새를 우리는 못 맡습니다. 개는 공항 검색대에서 마약을 탐지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부분에서 인간은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시력으로 볼 때도 모든 동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의 존재를 보여주시지 않고 볼 수 없는 존재로 우리에게 오셨을 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 그분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일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나면 그분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선하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다음에 말씀을 듣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어떤 사람의 인품에 깊이 반했습니다. 너무 훌륭하신 분입니다. 왠지 그 사람과 마주 앉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모든 이야기가 자신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인품과 성격 모든 면에서 자기가 정말 본받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하면 그분의 말을 당연히 믿을 것입니다. 일일이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면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확인해 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도 확인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숨소리만 빼고는 거의 거짓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해 볼 것입니다. 확인하지 않고 발을 내딛으면 인생의 낭패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선하심을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모두 사실이자 진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디에 말씀하십니까? 성경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믿음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율배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믿음을 주셔서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데, 성령의 작용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성도 파괴되고 신앙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신앙이 더 심각하게 파손되었습니다. 거의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을 정도로까지 이 두 개의 인식 능력 중 하나가 망가진 것입니다. 사람으로 보자면 한 쪽이 실명되고 한 쪽은 시력이 남아 있으나, 두 눈으로 함께 사물을 보아야 알 수 있는데 어두워졌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서도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15년 전 일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다가 천문학이 너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분명히 이 안에 무언가 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외선생님을 불렀습니다. 한 달 과외비가 170만원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박사과정을 거의 끝낸 분이 와서 천문학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일 년을 꼬박 천문학을 배웠습니다. 천문학 자체에 대한 사실은 선생님이 저보다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제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별이 마지막 죽을 때 폭발하면서 먼지로 사라집니다. 새로운 별은 그 먼지가 뭉쳐져 핵반응이 일어나 폭발과 함께 새로운 물질이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의미를 설명을 해주니, 그 선생님도 그리스도인인데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별이 폭발하고 새로운 별이 생기는 과정을 한 번도 인생의 의미와 연결시킨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생물학 과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인간의 몸 안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저는 6개월 동안 거의 전율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세포가 어떤 것은 타살됩니다. 부딪히거나 파괴됩니다. 하나는 원인이 없이 죽습니다. 그런데 과학도 왜 원인이 없이 죽는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죽음으로써 에너지를 만들어 내서 그 옆에 있는 세포에게 에너지를 전달하고, 그 세포는 그 에너지를 받아서 세포 분열을 하며 증식합니다. 우리 몸 전체는 넉넉잡고 1년을 잡으면 뇌세포 빼고는 1년 전에 있던 세포는 거의 없습니다. 다 다시 살아납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는 세포가 끊임없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타살에 의해 죽는 것을 네크로시스(necrosis)라고 하고 스스로 죽는 것이 아포토시스(apoptosis)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포토시스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죽는 세포들로 인해 몸이 살아 있습니다. 몸이 망가져서(망가졌는데) 아무 세포도 죽지 않으려고 하면 그것은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들은 덩어리를 이루면서 커집니다. 그것이 암입니다. 저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천문학의 내용과 너무 일치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장에 “내가(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서 한두 명이 엉뚱한 일을 하고 말썽을 피우고 다녀도 한 사람만, 엄마든 아빠든 목숨을 걸고 가정을 지키면 그 가정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죽겠다고 난리를 치면 어느 날 암세포가 되어서 모두를 죽게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연결하는데, 생물학을 하는 사람은 천문학을 모르고, 천문학을 하는 사람은 신학을 모릅니다. 어느 날 그 세 가지를 연결해서 이야기를 해주니 다들 감탄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인 것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그 이성적 지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해 주는 것이 없을 때에는 그 현란한 지식이 절대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아주 촉망받는 사람들이 종종 악에 빠지고 죄에 연루되는 것은 이성으로써 인간이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A. 믿음과 지식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과 지식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현실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을 알게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는 믿고자 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과 오만한 자의 번영을 보면서 깊은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니 바보같이 하나님 앞에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산 것까지 후회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시 72:16).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이 시인처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정결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하나님을 만날 정도로 고도의 경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도 일단 무지에 빠지게 되니 깊은 영혼의 침체가 오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산 날들을 후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나도 죄를 짓고 마구 살 것을 그랬다는 마음까지 든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성소란 좁은 의미로는 네모난 천막을 친 시설을 3등분 했을 때 두 칸이 성소고 한 칸이 지성소입니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성막(聖幕) 전체를 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성막에 갔다는 의미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나중에는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성소에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항상 성막 위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활 활 타는 하나님의 임재의 불꽃을 바라보며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에 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이제껏 품었던 모든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자기는 악인이 형통하고 오만한 자가 번영한다고 보았고 죽을 때도 평안히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지성이 열리면서 새로운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믿음이 가져다 준 인식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는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악한) 인간을 볼 때 형통하고 잘 되고 마지막 죽을 때도 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며 정말 하나님이 있다면 이러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경건하게 산 것까지 후회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니 하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잠시 살다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뿐 아니라 죽은 후 운명까지도 장악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 사람들의 운명이 파멸에 떨어졌고 도자기를 땅에 던진 것같이 산산이 부서진 운명이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깊은 영혼의 침체는 돈으로 쾌락으로 이 세상에 있는 높은 지위로 남다른 재능으로 먼 곳을 여행한다고 해서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무지에서 생겨난 깊은 영혼의 침체이기 때문에 지식이 없이는 살아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지식 나부랭이와 같은 것을 통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적인 탐구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SNS를 통해, 스마트폰을 통해, 컴퓨터를 통해 하루에 3~5시간씩을 보내며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대부분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입니다. 알아야 되는 것을 가르칠 때 학교에서 공부를 안 하던 사람들이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는 그 정보를 얻는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절대로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애플 CEO의 아이들은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만들면서도 그것이 인간성을 개발하는 데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학문은 암기를 통해 습득됩니다. 여러분도 부지런히 교리와 같은 것을 암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뇌를 사용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살아갑니다. 무엇이든지 스마트폰에서 찾습니다. 스마트폰에 아무리 많은 정보가 저장되어 있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내 안에 있는 기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 때 어떻게 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펑펑 웁니다. 유투브에 들어가면 울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이런 음악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지식(智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새로운 지식이었습니다. 그럼 한 번도 안 적이 없고 완전히 새롭게 배우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와서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펑펑 울고 가슴을 쥐어뜯는다면 그 일이 처음입니까? 물론 처음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옛날에 십자가 만난 사람들이 다시 만납니다. 결국 알고 있었지만 생생한 자기 마음에서 사라지고 망각 속에 있던 것들을 다시 소환해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자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이 일깨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인생을 그냥 먹고 살고 죽는 것까지의 과정으로 보지 않고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지혜(知慧)가 생겨냈습니다. 이제는 시인이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아도 넘어질 일이 없습니다. (악인이) 죽을 때까지 형통할 수 있으나 죽음 이후에 더욱 심각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그때의 고통은 (악인이) 오늘 누린 이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만한 자는 그냥 교만한 자가 아니라 그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을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번영합니다. 예전(의 시인) 같으면 넘어졌을 텐데 이제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지혜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온 천장이 새카만 지붕으로 덮어져 있어 빛 없이 캄캄합니다. 1mm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공간 안에 있지만 그 공간이 어떠한지 네모난지 둥그런지 아니면 (이 공간 안에) 누가 있는지, 자신이 위험에 처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천장이 칼로 찢어지며 찬란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무지로 캄캄했던 천장이 찢어지며 눈부신 지혜의 빛이 지성(知性)에 들어왔습니다. 단숨에 침체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습니다. 지혜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지혜입니다.
B. 지식과 지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지식과 지혜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얻기 원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그 지식을 습득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많은 돈을 투자하고 신경을 씁니다. 생활비 중에서 아이들의 교육비로 들어가는 비중이 엄청날 것입니다. 아예 아이교육을 포기한 사람들, 학교 교육에만 맡기는 사람들은 그 비중이 적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켜서 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게 만들어야겠다는 사람들, 아이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나 최고로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지출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SKY 캐슬’ 같은 드라마가 나왔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현실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러한 전략도 모르고 ‘SKY 캐슬’이 세상에 대해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고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강남 전문가들은 이 현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가난이 대물림되는 가장 큰 이유가 교육의 기회 균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학교 교육은 사람을 만들기 위한 지식의 학습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때만해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훈이 정직, 근면, 성결이었습니다. 아니면 바르게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과연 학교에 교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주입시키지만 원래 학교 교육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시키는 교육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제일 중요한 덕목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런 삶을 살려고 적어도 애쓰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실제로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도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인생은 행복해집니까?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제가 만든 비유로는 지식이 한 알 한 알의 구슬이라면 지혜는 이것을 꿰어서 목걸이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잠언 24장 2~3절에는 지혜가 집을 짓는 기술이라면 지식은 그 방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탁월한 비유입니다. 지혜는 집을 짓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재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거처하는 집을 짓습니다. 지식은 그 방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물건입니다. 인테리어 소품들입니다.
중국에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이 아파트가 거의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 쪽 (아파트) 값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하고 그 아파트 안을 들어가 보았는데, 옛날 시형 아파트와 비슷했습니다. 중국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나 그 당시만 해도 아무리 큰 아파트를 지어도 그 안을 어떻게 만드는 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간신히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서 들어간 사람은 그냥 시멘트 벽 그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아파트이고 가격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돈이 많은 집에 들어가 보면 몇 억씩 들여서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똑같은 아파트인데 이 집은 들어가면 별로 지내고 싶지 않은 집이고, 저 집은 너무 화려해서 불편할 정도로 좋은 집이었습니다. 지식은 방을 예쁘게 꾸미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집이 없는데 방이 있겠습니까? 마치 지혜는 없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간신히 비만 피하도록 판잣집을 하나 지어 온갖 외제 인테리어 물건을 사다가 장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지혜만 있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집을 웅장하게 지어서 비도 안 새고 천둥 벼락이 쳐도 끄떡없지만 들어가 보면 그냥 시멘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사는 데에 근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사치품으로 장식을 했는데 비만 오면 그릇을 두어야 하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집에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인테리어는 별로 안 되어 있지만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쳐도 끄떡없는 집에 살고 싶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입니까? 안전하고 튼실한 집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을 자신의 취향대로 잘 꾸며서 어디에서든지 에너지를 덜 낭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장식이 되어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나 이탈리아, 유럽에서는 똑같은 파스타 한 그릇인데 먹는 장소에 따라서 가격이 다릅니다. 바깥에서 먹는 사람, 비닐을 친 곳에서 먹는 사람, 안쪽에서 먹는 사람에게 똑같은 음식을 다른 가격으로 받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음식을 대접받았다고 하더라도 비가 오면 빗물 받는 그릇을 옆에 두고 밥을 먹어야 하는 곳에서 먹겠습니까? 아니면 검은 넥타이에 하얀 수건을 든 사람들이 서빙을 하고, 빨간 카펫이 깔리고 하얀 식탁보를 펼친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만족스럽고 좋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나, 가장 좋은 것은 지혜와 지식을 함께 갖추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미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에 있으면 사람들이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열린 공간’처럼 말입니다. 한번 들어와 소파에 앉으면 나가지 않습니다.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깨어지고 장식을 뜯어내서 콘크리트가 나오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조명이 달려 있다면 그곳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지식은 사물에 대한 이해이고 지혜는 그것을 인생의 의미와 연결 짓는 능력입니다. 비록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있더라도)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 사는 사람보다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은) 없어도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매일 매일 뜨겁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훨씬 사람답게 삽니다. 그분들이 훨씬 행복합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지식의 대상(對象)이란 무엇일까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계입니다. 이 대상을 앎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 문장은 교리반에 들어오면 항상 외워야 하며 열린교회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 곧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해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KNJ)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무지했었는지에 대해 깨닫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현저히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에 이것 밖에 몰라서 이렇게 살았는데 사실은 그 옆에 있는 것을 못 봤고, 그때 이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 되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가 생긴다는 것은 삶의 지혜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세 가지 대상에 대한 지식 안에서 자라 갑니다. 하나님, 인간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누구인지 나의 자아를 스스로 살핍니다. 끊임없이 나에 대해 배워갑니다. 나는 자연 세계의 일부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육신은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마구 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 짓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어마어마한 폭력을 행합니다. 우리가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인류 최악의 발명품은 비닐입니다. 이것이 모든 환경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시켰습니다. 바다에 흘러들어 간 플라스틱 쓰레기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반도의 다섯 배 이상 되는 쓰레기가 한데 뭉쳐서 바다에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수백 년 동안 분해되면서 그것을 모든 물고기가 먹습니다. 해류는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므로 모두 오염시킵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뉴질랜드는 청정국을 자칭했습니다. 뉴질랜드에 입국할 때는 쿠키를 조사합니다. 쿠키 성분 속에 우유가 섞여 있으면 폐기해야 합니다. 뉴질랜드산 우유가 아니면 폐기합니다. 그런데 뉴질랜드 사람 한 명이 올림픽에서 마라톤 1등을 했습니다. 그 후에 월계관을 가지고 입국할 수 없었습니다. 농수산부에서 금지시켰습니다. 그 잎사귀에 무엇이 묻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월계수 잎을 외국에서 동포들에게 나눠 주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할 정도로 청정을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해변으로부터 2000km 바깥의 바다에서 측정했는데 완전히 플라스틱으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포장공학을 전공한 교수님을 만났는데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비닐이 발명되었는데 전문가인 자신이 보아도 일반 비닐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비닐은 옥수수로 만든 것이랍니다. 그래서 비닐을 다 수거한 후에 갈아서 사료로 쓰면 된다고 합니다. 바다로 들어가 물고기들이 먹어도 생분해되어 옥수수로서 소화가 된답니다. 하루 속히 그런 것이 모두 유행하길 바랍니다. (인간은) 자연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합니다. 사람들이 아프리카 코끼리 잡아 상아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남획을 하는 지역에서는 아예 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가 30%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 자연의 의미를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지한 상황을 내버려 두면 영화 속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히 인간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이 될지 모릅니다. 이러한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복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나와 함께 사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자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의 행복은 이 세 가지 대상과의 연관 속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을 나를 위한 것입니다. 힘들게 자신에 대한 탐구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대부분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항공기에서 일어난 일 중에 (어떤 사람이) 땅콩버터를 살짝 먹었거나, 옆에서 다른 사람이 먹는 냄새만 맡아서 (땅콩) 알레르기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는) 육체의 결함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을 남획하고 파괴하면 그 영향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목회를 하면서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생활이 안 되는 학생들, 그 가족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아예 어떤 집은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숯으로 가득 찬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육체가 자연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를 건강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우리가 아주 각박한 도시 문명 속에서 공해와 매연 속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장시간 노동하지 않는다면, 아마 굉장히 많은 병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대부분이 도시 생활에서 비롯된 병입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는 얼마나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사람과 연관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 끊고 나만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적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살고, 마지막에는 그 결과 자연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 고립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다가도 이 음식을 먹으면 나의 체질과 어울리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하며 먹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많이 먹으면 순간 먹는 즐거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의 건강을 훼손시키며 많은 성인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간의 육체만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도 그런 식으로 살면 망가집니다. 망가진 자아로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욕망하지만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의미를 자기만족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니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은 뒤 최고급 호텔에 가서 씁니다. 한 번 그렇게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를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면서 수레바퀴를 돕니다. 거기에 인생의 의미가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호텔에서 묵은 후 허름한 자기 방에 누울 때 만족감이 있겠습니까? 그다음 행복을 위해 다시 돈을 모아야 합니다. 결국 노예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돈이 우상이 되고 소비하기 위해서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물질을 위해)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젊었을 때 소비에 탐닉하면 건전한 자아상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자기만족에서 찾지만 자기는 결코 영원한 의미(意味)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기초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수학, 과학적인 사실을 안다는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 마리아가 자신이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고 묻습니다. 안다는 것은 성교하고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앎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합니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까? 시간에 묶여 있는 인간이 영원(永遠)을 알게 되는 단 하나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영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은 파악이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이성으로는 무한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지만 그분을 사랑할 때 그분은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간과 세계와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영혼과 육체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함께 사랑을 받으며 올바른 자아를 가지게 됩니다.
이 지혜는 자연적(自然的) 지혜와 도덕적(道德的) 지혜가 있습니다. 육체는 자연적 지혜를 필요로 하고 영혼은 도덕적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지식이 아니고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던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 상무로 가 있습니다. 공부는 그 학생이 잘했지만, 사람을 사용해서 경영을 하는 수완은 공부 못한 사람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연적인 지혜입니다. 일을 시켜보면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 일머리가 거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는) 데리고 있을수록 피곤합니다. 차라리 혼자하면 오히려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한 일임에도 계속 설명해야 하고 만약 그것을 맡기면 망쳐 놓습니다. 교정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아주 서서히 깨우치기는 하고 나아지긴 하지만 기본적인 자연적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큰 회사를 경영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연적 지혜가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을 비롯해 큰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들을 만나 뵈었는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신학적 입장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고, 설교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큰 교회 목사님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똑똑하십니다. 그리고 2~3만 명을 직원을 거느린 회사를 운영하셔도 능히 하시겠다는 인상을 공통적으로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몇천 명, 몇만 명 교인을 둔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은 어벙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 없습니다. 훌륭하게 설교해서 사람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나 그것이 물 흘러가듯이 잘 흘러가게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건물, 위치, 주차장 등 하드웨어, 다음은 경영에 관한 소프트웨어, 세 번째 요소는 제가 만든 용어인데 ‘스피릿웨어(Spirit-ware)’입니다. 그 교회에 오면 웬일인지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것이 느껴지고 임재가 경험되고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것은 건물이나 경영 수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지혜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연적 지혜가 있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매일 만나 회의하고 더 좋게 만들고자 하니 ‘열린 공간’에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맛있는 커피가 있으며, 유리창은 늘 깨끗합니다. 경영하는 사람들이 지혜를 가지고 (잘) 경영하면 그것이 바로 자연적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잘 사용해야 회사나 기관이 발전합니다. 그리고 엄마나 아빠나 아이들도 (맡은 바를 잘 경영해야) 집안 살림이 탄탄하고 윤택해집니다.
자연적인 지혜가 씨줄이고 도덕적 지혜가 날줄인데, 두 개가 만나며 천이 짜입니다. 그 천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자연적 지혜가 매우 부족하면 같이 신앙생활 하는데 고달픈 인생길을 갑니다. 자연적 지혜는 있는데 신앙적 지혜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인정받는데 올바른 삶을 살지 않습니다. 둘 다 하나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관계처럼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의 관계가 함께 만나서 엮어지며 tapestry가 만들어지는데, 마치 직조물과 같이 우리 인생이 짜입니다. 부지런히 자연적 지혜를 배우고 도덕적 지혜를 배워서 두 씨줄과 날줄을 탄탄히 엮어야 합니다. 옷을 샀는데 날줄 밖에 없다면 다 벌어질 것입니다. 좌우로 위아래로 벌어지면 쓸 수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서 도덕적 지혜를 갖고, 한편으로는 가정에서 어떻게 살림살이를 해야 하나 회사를 어떻게 경영하고 일을 해야 하는지를 다 연구해야 합니다. 왜 다른 사람이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사업이 계속 실패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도덕적 지식을 배우고 자연적 지식을 배우며 우리 인생의 태피스트리가 엮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지혜는 자연과 사회의 법칙을 아는 데서 오는 판단력이고 도덕적 지혜는 하나님의 질서를 아는 데서 오는 판단력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번역은 ‘moral’에서 왔습니다. ‘도(道)’는 객관적인 진리이고 법입니다. ‘덕(德)’은 주관적으로 자기가 거기(도)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가지고 있는 사랑하는 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받았고 혈서까지 썼는데 자기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당연히 거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못 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집 아이가 ‘열린 공간’에 와서 어깨로 유리문을 탕탕 기댄다면 달려가서 팔을 붙잡고 그렇게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리가 넘어가서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매우 싫어하는 집안의 아이가 그렇게 한다면 놔둘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이 그것을 하길 원해도 안 된다고 선을 그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사랑은 허언이 되고 맙니다. 사랑 그 자체가 질서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손가락을 걸고 이제 우리가 영원히 서로 밖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때에는 각자가 사랑의 질서 속에 들어오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질서를 따르고 그는 나의 질서를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면 그것은 노예를 삼는 것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질서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갈등이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타협하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하시고 무엇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분이 세운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 질서가 무엇입니까? 넌 나를 사랑하라, 나만 사랑하라, 모든 사랑하는 것들이 내 안에 굴복하는 질서가 되게 하라, 그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나쁘게 보이고 고통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 없이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굳세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을 것이고, 그 질서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여자와 사는 사람은 에너지가 훨씬 덜 듭니다. 너무나 질서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질서를 잘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당연히 거기에는 질서가 있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뜨겁다면 우리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택할 때에 우리를 엄중하게 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질서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행복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이 질서를 거스르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결국 불행에 떨어집니다. 이 도덕적 지혜는 영적 지혜에서 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잠언 1장 7절에서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지혜는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있는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적인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가 관여하는 영역이 신령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영적인 지혜를 주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 주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영혼은 소생되면 시편 19편 7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 온몸을 던져 고통을 겪고 난 후에 부스러기 같은 지혜를 겨우 깨닫습니다. 그것은 이미 수없이 성경에서 말한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행복에 이르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신령한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 얻게 됩니다. 이 지혜를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욕망합니다. 그러나 무지하기 때문에 결국 불행해집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할 것을 원하지 않고 불행하게 할 것을 열렬히 갈망합니다. 따라서 모든 불행한 인간은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해집니다. 인간이 이렇게 무지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삶을 살아 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욕망만을 따라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행복하기를 열망하는 만큼 더욱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죽음 이후에는 더 불행한 처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은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지혜, 이제까지 살았던 실패한 삶을 다른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어디서 찾으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소생시킬 뿐만 아니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지혜롭게 만듭니다. 방탕했던 사람을 단정하게 살게 만들고 욕망으로 이글거리게 만들었던 모든 불을 끄고 단정한 마음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을 봅니다. 자연의 세계를 착취하기 위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자연이 육체적으로 동료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끼고 돌보는 가운데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비로소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눈에 갇힌 인생이 아니라 이 인생 너머에 있는 신령한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믿음에서 오는 지혜를 갖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행복에 이르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방향도 없이 욕망만 들끓는 삶으로는 결코 행복에 도달할 수 없으니, 여러분들은 이제까지 되지 않았던 것들을(방향도 없이 욕망만 들끓는 삶을) 다시 반복해서 불행하게 살지 마십시오. 큰 지도를 보는 것처럼 신앙을 보십시오. 이것은 인류의 유일한 지혜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행복에 이르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5 (2020.02.02._주일오전)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 (2) 생명과 사랑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녹취자 : 장미연
I. 본문해설
사경회 마지막 날에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지혜로 사랑에 이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비참은 바로 무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지혜가 오는 것이니 이 지혜 없이는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것은) 인간 비참의 또 다른 원인은 영혼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생명이 없음으로 불행한 삶을 삽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종교는 길에 대해서 가르치고 철학은 진리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아무것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20장 31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많은 기록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넓게 본다면 그분이 행하신 모든 기적이고, 좁게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믿고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인간은 왜 비참한가?
인간이 비참한 것은 바로 이 영혼(靈魂)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비참한지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비참은 결국 궁핍 때문입니다. 육체의 비참은 물질적 자원의 궁핍 때문이고 영혼은 영적 자원의 궁핍 때문입니다. 이 자원은 곧 지혜(知慧)와 사랑(love)인데 이것이 없음으로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랑과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이 있는 것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영혼의 생명은 결국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이 영혼의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명(生命)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전적인 언급들을 종합할 때 생명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란 생명체에 존재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으로서 그것으로 하여금 살아서 활동하게 하는 힘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인데 생명체는 생명 자체를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생명체는 당연히 물질을 가지고 있고 세포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세 가지 작용을 하게 되는데, 첫째는 환경에 대한 변화, 신진대사(metabolism), 그리고 번식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물학은 생명의 현상에 대해서 설명하는 학문이지 생명 그 자체를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난제로 여겨왔던 주제중 하나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물질 그 자체가 생명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생명체처럼 똑같이 물질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물질이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어디로 부터 올까요? 생명의 정체는 불가해(不可解)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생명체는 결코 생명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사라질 때 물질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생명체는 생명의 작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물질적 생명체가 그 스스로 생명을 갖지 못한다면 그 생명은 누군가를 의존해서 가지고 있는 생명입니다.
영혼의 생명도 영혼 자체 때문에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생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을 육체의 만족에서만 구하고 그 만족을 줄 수 있는 자원에서만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어서 육체는 물질적 생명을 누리고 영혼은 영적 생명을 누림으로써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 생명이 있고 불신자에게는 없다고 요한복음 5장 11절에서 12절은 말합니다. 이 영혼의 생명은 원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것인데 인간이 죄(罪)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아무리 육체를 위한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영혼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참한 인간들을 다시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구원의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구원 받음으로써 이 영적 생명을 다시 찾게 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비참한 이유는 근원적으로 영혼의 생명이 없는 데에 있습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자원을 육체가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는 삶은 온전한 인간의 삶일 수 없습니다. 이로써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영혼의 생명은 찾지 않고 육체를 위한 자원만을 구하는데 인간의 비참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III.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2): 생명과 사랑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에 이르게 될까요? 생명과 사랑으로써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으로서 살게 하는 힘입니다.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과 창조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vita increata)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창조된 생명(vita creata)입니다. 그리고 창조된 생명은 창조되지 아니하는 원래 있는 생명을 의지하여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A. 영혼의 생명
그러면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영혼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스스로 살아있게 하는 힘인데 영혼의 생명이 있으면 영혼답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같은 동사라 할지라도 그 주어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의미는 결정이 됩니다. ‘탁자위에 사과가 있다’라고 하는 말과 ‘너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라는 말은 똑같이 ‘있다’지만 주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미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탁자위에 사과는 보이도록 형체와 크기와 색깔과 모양과 냄새를 가지고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부피와 크기와 색깔이 있을 수 없지요. 분명한 것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있는 그 방식이 사과가 있는 방식과 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죽었다’라고 하는 표현도 ‘육체가 죽었다’라는 표현과 ‘영혼이 죽었다’라는 표현은 사뭇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생명의 기운이 멸절되었다는 것이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인생 속에서 불멸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흙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물질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으나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멸절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체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으면 없어지지만 영혼이 죽으면 잘못된 방식으로 영혼이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을 때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을 끊임없이 나타낸다고 히브리서 9장 14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에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면 육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에 가깝게 됩니다. 눈은 정확히 보고, 코는 정확히 냄새를 맡고, 모든 감각의 기관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감각의 기능들은 건강한 상태에서 많은 정보를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실어 나르고 그렇게 전달된 정보는 인간의 생각과 의욕을 끝없이 자극해서 행동으로 옮기게 만듭니다. 육체가 건강하면 뜻밖에 것을 보았을 때 당연히 호기심이 생기고 달려가서 처음 보는 그것을 목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현저히 잃어버리게 되면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것임을 확증하는 옛날의 기억을 불러올 수 없고 혹시 희미하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몸은 피곤하게 움직여 그것을 목격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생명의 기운이 넘치면 영혼의 기능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지 않아도 영혼의 하등한 기능들은 저절로 작동합니다. 먹고 배고픔을 느끼고 보고 싶음을 느끼고 눕고 쉽고 쉬고 싶어 하는 이런 육체 활동들은 행복을 위한 하등한 활동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이 충만하지 않으면 영혼의 고등한 기능은 거의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혼의 고등한 기능은 곧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기능입니다. 자신과 타자에 대해 이해를 하고 선악을 판단하여 그것을 욕구할 수 있는 기능이 영혼의 기능인데, 생명이 충만하면 이것이 올바르게 작용하게 되지만 생명이 없으면 이 기능이 현저히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영혼의 생명을 처음 받는 것이고 성화는 이미 받은 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영혼에 충만한 생명을 가질 때 지성으로써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를 알고 또 분량에 맞게끔 그 대상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에 생명이 없을 때 그는 결코 바르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영혼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고 영적 죽음은 미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영혼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왕성하다 할지라도 영혼의 생명이 없으므로 영혼은 참되고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그런 영혼을 생명으로 가지고 있는 육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B.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국 영혼의 생명이 사랑으로 나타난다면 사랑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 이 사랑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랑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그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이러한 식의 정의는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주체의 즐거움에 대한 언급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없이는 결코 사랑할 수 없고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 없이는 결코 좋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사랑의 정의
그래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과 같이 정의를 갖는 것이 유익하다고 봅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에 마음을 고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좀 더 이 내용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마음과 관계된 것이고 ,따라서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 안에서 세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의 인격은 곧 하나의 개체라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인격은 세 인격이면서도 세 개체는 아닌 교통적인 인격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지성으로서 자기를 아는 것, 혹은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등의 공식으로 셋이면서도 하나인 하나님을 설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은 행복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뜬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열망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행복을 흉내내보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결국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선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은혜의 하나님을, 하나님을 거역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떤 하나님을 만나는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이 행복의 원인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의 행복을 본뜨고자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욕구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이것입니다. 진리(眞理)가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 행복을 올바르게 본받고 또 진리가 없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되게 본받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해지고자 하는데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요소는 진리라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만과 사치, 음란과 폭력은 하나님의 행복을 그릇되게 본뜬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끝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으시기 때문에 굴복해야할 대상이 없고 하나님의 생각이 끝이고 하나님의 판단이 가장 정확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판단을 측정해볼 보다 높은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가장 높으시고 자신은 그 아래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최선이고 자기의 결정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것을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아서 그 분이 옳다고 하는 한에서 고집하는 것을 가리켜 겸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치를 생각해 봅시다. 사치는 분수에 넘치는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셔도 그 자원에 고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넘치도록 한 인간을 사랑하신다고해서 당신의 사랑이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남을 질투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자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한정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한계 안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적절히 그 물질을 사용하고 누릴 때에 미래의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모든 것을 무한하게 가진 것처럼 소비하고 사용해 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사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그 풍요로우심을 유한한 인간이 진리 없이 본뜨려고 하다가 사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자신의 자원은 유한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적도에 맞게끔 사용하는 것이 절제라는 미덕입니다.
음란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상대할 대상이 없어도 영원히 행복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당신 때문에 행복을 누립니다. 음란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서 스스로 즐거움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흐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모든 사람을 적시는 사랑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스스로 충족한 사랑을 진리 없이 본뜬 것이 음란이라는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폭력만 생각해 봅시다. 폭력은 선악을 자신이 결정하고 이에 합당하도록 응징하는 것이 폭력입니다. 하나님은 그 판단이 정확하시고 그 선과 악의 분량에 맞게끔 공정하게 형벌과 상급을 집행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라는 수단이 없을 때 하나님의 그런 판단과 심판은 본받지만 그것이 결국은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에 상관없이 한없는 너그러움은 뇌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든지 모르든지 영원하신 하나님을 본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올바르게 본받아 자신의 위치를 알아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고 진리가 없는 사람은 자기밖에 사랑할 줄을 몰라 하나님을 그릇 되게 본뜨면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누림입니다. 우리말의 이 ‘누림’(enjoy)이란 단어는 가장 고상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이 누림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그 누림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을 누린다’라고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인간이 궁극적인 행복을 느끼는 것이니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하나님일 때에는 그것은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화를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한 예화로 이 긴 설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예화) 한 여성이 남성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외모도 아주 멋지고 누구 허락을 받고 그렇게 잘 생겼는지 아주 출중합니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속이 별로 없는데 속도 꽉 찼고 인격이 그렇게 꽉 찬 사람은 재산이 별로 없는데 부자입니다. 그리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여성은 거울을 보고 생각합니다.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고 성격도 좋지 않은데 나보다 우월한 이 남자가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 여자는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 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정말로?” “그럼” “얼마나?” “하늘만큼 땅만큼” ‘무한하다’는 뜻이겠지요.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해?”라고 할 때는 “나도 모르겠어.” 라고 말해야 합니다. “너 네 아빠가 부자잖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여자를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그 처가의 재산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산 그 자체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있지 아니하니 자기가 만족을 얻고자함에 있는 것입니다.
‘누린다’라고 하는 영어의 ‘enjoy’ 라고 하는 단어는 ‘happiness’나 혹은 ‘pleasure’ 보다 훨씬 높은 정신적인 측면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누린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해서 더 이상 즐거워할 목표가 없는 상태입니다. 신앙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을 이용(利用)해서 무엇인가를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없이 행복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감사 제목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 그 자체입니다. 그것으로써 모든 욕심을 기꺼이 버릴 수 있고, 설사 욕망하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을 누리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2. 생명과 사랑
영혼의 생명은 혼자 있을 때에는 생명이지만 지성적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충만한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올바르고 힘차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듣는 이 순간도 여러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행복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그 행복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억하심정으로 말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도 그렇게 고백한 것을 욕구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런 행복이 끊임없는 물질적이고 외적인 조건. 혹은 자기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음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자기를 그렇게 끔찍이 사랑해 주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는데 실제로 자신도 그렇게 해본 사랑이 없는데 누구에게서 그런 사랑을 기대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일까요? 아무리 육체가 많은 자원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육체에 환경을 좋게 할 뿐이고 육신의 즐거움을 주는 일에 이바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상의 자원도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물질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수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불평하는 삶은 얼마나 유아기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삶입니까? 인간의 행복은 성숙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일적에는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점차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어른스러워져 가는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와 같이 이렇게 감각적인 것에 몰두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행복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종종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수준 높은 사랑을 합니다. 우린 여기서 혼란을 느끼게 되지요. 에드워즈는 이것을 단순한 자기사랑과 복합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로 설명을 했습니다. 단순한 자기사랑은 그야말로 단순한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타자에 대한 고려가 거의 섞여 있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그에게 크면 클수록 그는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기 이외에 누구의 선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하고 단순한 자기사랑입니다. 이것은 악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합적인 사랑은 좀 복잡합니다. 한편으로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순한 자기사랑도 있고 또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에 대한 고려도 함께 섞여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끔찍한 사랑, 이것은 덕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공경하는 사랑, 부부에 대한 신뢰와 희생하는 사랑은 높은 덕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높은 덕목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성경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자기사랑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되는 그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는 버렸으나 자식을 하나님 자리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물결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에 한 가운데 하나의 돌멩이가 떨어졌습니다. 정확하게 원을 그리며 물결의 방해가 없는 한 같은 속도로 원을 그리며 파문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만약에 두 개의 돌멩이가 가까운 거리에 떨어졌다면 서로 다른 원을 그리며 확장될 것이고 두 물결은 어디에선가 간섭을 일으키게 되겠지요. 극단적인 이기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면충돌하는 사랑이고, 이렇게 자녀를, 형제를, 동포를, 그리고 친구를 사랑하고, 부부를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파문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버리고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한 이기적 사랑도 아니고 복합적 사랑도 아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는 이 복합적인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은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이 그렇게 섞여서 작용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결국 누림의 관계(關係)를 갖게 하는 힘입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관계를 심화시키는 힘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순수할 때 그 관계를 깨뜨리고자 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인내(忍耐)를 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만이 아니라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순수하면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대상과 모든 정도를 그 사랑의 힘으로 이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없이 사는 고통이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천사의 말을 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사랑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아닌 다른 사랑으로도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생명 때문에 사랑의 삶을 살게 되고 이로써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들을 선량하게 대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완벽한 쉼을 누리고 행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어지는 법은 결코 없지만 가변적입니다. 진리와 성령을 많이 받으면 더 풍성해지고 죄를 지으면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이 풍성해지면 풍성해질수록 그는 사람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이는 그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자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할 때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처음부터 자신의 창조의 근원이고 목적이신 하나님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자신의 존재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생명을 누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C. 사랑으로 행복에 이름
그러면 자기 밖에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자기 안에 있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밖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하셔서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주심으로써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恩惠)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좀 더 눈여겨 이 문장을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은혜라는 작용을 통해 우리의 사랑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로 인간이면 마땅히 행하여야할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느끼는 즐거움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의식을 갖게 만들어주는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은혜를 주십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역사하게 하셔서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내용을 종합해보면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행복에 이르는 길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을 때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인간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행복은 사랑으로써 이르게 되는데 그 사랑이 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없는 사랑은 은혜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있게 되고 이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부르게 할 수 없는 양식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결코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하나님 사랑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소외와 고독감은 역설적으로 그가 그렇게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낮에는 물질을 소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유쾌하게 지내지만 밤이면 홀로 어두운 방에서 벽을 마주하며 고립감을 느껴야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고립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고립해서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행복할 텐데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고립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 고립은 그 자체가 무엇을 생산해 주지 않는 것이니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자원의 고갈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정신적인 질병의 현상들이 결국은 이러한 소외에서 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삶입니다. 이 생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점점 나이가 들고 육신은 완전성에서 멀어질지라도 의미는 진리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빛을 바래지 않습니다. 그 불변하는 의미를 붙들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인생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지 않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회의할 때 긴급동의가 들어오면 그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의에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의 피곤한 삶이 어디에서 옵니까? 결국은 완전히 신앙이 없어서 불신자처럼 살지도 못하고 완전히 신앙을 따라 살자니 신앙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내 힘대로 살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제약을 받으면서 몰래몰래 행복하려고 노력을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을 얻어내려고 살아가는데서 신자의 허한 삶이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삶속에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 행복이 여러 개의 행복이 아니기에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 부르셔서 당신 속에 있게 하심으로서 행복이신 당신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생명을 걸게 되고 나머지 모든 것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심지어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지요.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것을 염려하고 가져보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으며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도 혹시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잃을 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어야 하는 것은 꼭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에 이르게 되는 길에서 결코 실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의 말속에 있는 신앙을 자기의 신앙처럼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내면 20년 후에는 이 결과가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까? 과연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행복에 이르는 길과 진리에 대한 탐구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죽음의 기운이 하는 일입니다. 그 죽음을 따라 살다가 여러분들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죽음을 많이 겪고 어떤 사람은 생명을 누리고 있지만 결국 영혼의 죽음은 그런 죽음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생명의 목소리를 거절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나님 사랑 아닌 다른 것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한 번 걸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노력해보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여러분들을 이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그렇게 확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있는 룰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만히 거기 계셔도 이 행복의 길을 따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누리고 그 길로부터 멀리멀리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므로 불행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를 불행하게 하고자 힘써서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렇게 질서의 결들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결을 떠나서 행복의 결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 회개를 통하여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그 자리에서 돌이켜 새 삶을 살 수 있게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어버렸던 사람에게 순식간에 당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그 생명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사랑을 할 수 있게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 전체를 내려다보는 기독교의 결정적인 관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말하고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이 사상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소외와 고독감을 벗어버리는 길은 관계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낮고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고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존재가 하나님을 피해서 살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 것인지 하나님을 미워함으로써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면서 살 것인지, 그리고 나의 행복은 과연 어느 경우에 속해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하셨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행복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행복은 그 생명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은 최고의 사랑을 하나님과 자신에게로부터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사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멀리멀리 떠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로 부르시나니 이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여 추루한 자기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가장 현실적인 숙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한 번 착념해 보십시오. 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넘치는 영혼의 생명력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을 찾는 그대에게 6 (2020.02.09._주일오전)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짧은 신약의 편지는 요한 사도가 디오드레베라고 하는 악한 교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또 다른 목회자 가이오에게 쓴 편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한 말씀입니다. 가이오의 영혼이 잘 되었다는 사실은 3절과 6절에서 입증됩니다. 즉, 진리와 사랑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영혼이 잘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은 이 한 구절 전체를 해석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을 찾는 길에 대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이 행복의 매우 중요한 조건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잘된 영혼이 있다면 당연히 잘못된 영혼이 있을 수 있으니 여기에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서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II.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하는 주제는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외적인 조건에서 찾습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찾고, 세속적인 것에 찾다가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 전적으로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악하거나 허무한 것을 사랑할 때에는 그가 아무리 큰 기쁨을 누려도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보고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 영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쉽게 이해하도록 제가 한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있고 건강하면 음식을 먹어야 할 욕구를 느낍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아무 음식에도 어떠한 욕구도 느끼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는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영혼이 올바른 것을 욕구해야 한다면 영혼이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은 결국 영혼이 병들어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마음먹기에만 달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A. 영혼의 완전성
여기에서 우리는 영혼의 완전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각 사람은 영혼을 가졌기에 모든 동물 위에 탁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행복은 완전한 영혼을 소유하는 데에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은 유한하게 완전합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실 때 그것에 알맞은 한계를 정하시고, 그 한계 안에서 완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모든 피조물들은 완전하게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선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기로 하셨고, 그 결과는 당신이 의도된 대로 영혼은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으로는 모자람이 없이 참 그 영혼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그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에 꼭 맞는 영혼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영혼은 이 완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후에 모든 영혼은 이 죄를 물려받음으로써 영혼이 인간의 몸과 결합하는 그때부터 이미 불완전한 영혼이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혼은 질병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정신은 불구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삶이 어그러지고 질서에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이 모든 악과 고통은 바로 이 영혼이 완전성을 잃어버린 징후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 작용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혼을 왜 창조했을까요? 영혼을 부여받지 않은 수많은 짐승들도 능히 살아있고 기동합니다. 먹고 마시고 활동하고 자기 나름대로 군집을 이룹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이 모든 짐승들과 구별되도록 영혼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는 탁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혼 때문에 인간은 참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유독 인간에게 이 영혼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물도 세계 전체와 그 계획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위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그 지식과 사랑을 가지고 하강하면서 세계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나의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영혼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영혼의 기능인 정신 작용은 얼마나 탁월합니까? 감각은 사물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하지만 정신은 이 사물들의 존재의 법칙과 작용의 원리를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계속 바뀌어도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류는 거대한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영혼에는 탁월한 기능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감각 세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세계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이 완전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영혼은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無知)와 이기심(利己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알도록 창조된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도록 영혼이 창조되었으나 이기심에 넘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영혼의 죽은 상태가 가져온 필연적인 귀결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알아야할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행복하기를 욕구하면 욕구할수록 더 불행해지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모르기에, 또 그것을 원하지 않기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불행함으로써 그가 행복해지게 된다는 것이니 이런 비이성적인 논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욕망하고 그것이 결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입니다. 문제는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면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결국 하나님 앞에 완전해짐으로써 행복에 이르게 되는데 영혼을 망가진 채, 내버려둔 채 행복하기를 원하니 그 행복을 따라갈수록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숙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영혼은 이 완전성을 회복할 때까지 결코 행복하지 않고, 결코 평화롭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 징후는 똑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속히 극복할 수 있기를 원하지만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1918년 스페인에서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감기인줄만 알았던 그 증상 때문에 당시 약 9000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약 750만명이 감염되었고, 약 9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는(가) 과학적인 지식이 없을 때에는 이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병원체에 의해서 모든 감염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질병의 본질과 증상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저녁에 활동할 때까지 온 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느껴집니다. 하루 종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온 몸이 아픕니다. 이틀이 지나도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통제를 선택합니다. 몇 알의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은 사라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은 우리 질병의 징후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온 근육 속에서 일어나는 염증 때문에 발생한 통증이었습니다. 수십 알의 진통제를 먹어도 염증이 가라앉지 않는 한 그 근육의 통증은 멎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염증은 또 다른 몸의 기관으로 이동을 해서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질병을 치료할 때에는 항상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증상을 완화 시켜서 고통을 더는 일과 그 질병의 근원적인 근본적인 원인을 뿌리째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진통제를 먹지만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그 염증을 완전하게 치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중 특별히 근본을 고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많은 인도주의적인 노력과 그리고 사람을 향한 많은 박애의 정신들, 그리고 선한 윤리의 실천과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이 모든 것들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이지 불완전한 영혼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누군가 구제해야 하고, 건강을 잃은 사람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영혼이 망가져서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은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행복과 영혼의 완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영혼은 가장 큰 평화와 만족, 안식과 기쁨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이 완전한 상태로 돌아갈 때, 인간은 행복해지게 되는데 결국은(반대로) 영혼이 불완전하게 됨으로써 이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질병 상태는 결국 정신의 불구를 낳고, 정신이 불구된 상태에서 그는 육체를 통하라고 갈 수 있는 온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결국 영혼은 육체의 욕구에 휘둘리게 되고, 육욕의 눈이 어두워져서 영혼의 밝음을 잃게 되는 것이니 이로써 인간은 가진 것이 있어도 불행한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완전성을 잃어버린 것이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라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은 완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병 상태에 있는 영혼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의) 영혼은 죄 때문에 망가지고(망가졌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망가진 영혼을 고칩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써 영혼에 잃어버린 완전성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망가진 영혼을 고치고 질병 상태에 있는 영혼을 온전케 해서 그 모든 정신 작용들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착각했던 그 정신의 잘못된 작용을 고쳐주시고, 선하지 않을 것을 선하게 여겼던 굽은 판단을 올바르게 하시고, 선한 것을 알지만 그렇게 살 힘이 없었던 사람들의 의지에 사랑의 힘을 부여하심으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 행복이 영혼의 완전함에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미친 듯이 행복을 갈구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행복을 원했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는 바로 인간의 행복이 영혼의 완전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영혼은 완전성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 사이에 모든 조화로운 질서들을 회복하게 되면서 결국 인간은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영혼은 완전하게 창조되었거늘(창조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까지는 불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완전하게 하였거늘 (현재)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혹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유기견처럼, 버려진 고아처럼 그렇게 망가진 채로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이 본래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영혼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도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잠시 인생의 통증을 잊으려면 (잠시) 잊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치료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망가진 영혼을 고치는 치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써 이런 영혼의 완전성을 회복하게 하시니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완전한 영혼으로 살기를 주님의 은혜로 축원합니다.
B. 영혼의 두 바람
마지막 두 번째는 영혼의 두 바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혼에는 영혼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강력한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에 인자(因子)가 있어서 그 인자가 끊임없이 그렇게 발현될 때를 기다리며 작용하는 것처럼 영혼에 두 가지 인자와 같은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목적을 따르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어려운 말로 목적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본래 자기가 창조된 그 목적을 따라서 살아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그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물려받아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돌보시는 것처럼 그의 대리자로 (세상을) 돌보게 하기 위하여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고등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항상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배부르게 먹고 누운 돼지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배부르게 먹고 누운 인간은 그 이유만으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높은 정신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저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술가들입니다. 아름다운 산에 올랐습니다. (저는) 삼겹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예술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깊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천지의 무한함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당나라의 진자앙 같은 시인이나 혹은 대동강에 가서 그 아름다움을 보고 눈물만 흘리고 시를 짓지 못했다는 시인들의 정신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부여 낙화암 고란사에 가면 여기저기 땅을 파보면 새카맣게 탄 쌀알들이 나옵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불탄 흔적들입니다.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발로 차서 여기저기 흩어지는 불에 탄 쌀알들이 뭐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은 손에 몇 알의 불에 탄 쌀알을 놓고 역사를 호흡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는 것만큼 보이게 마련입니다. 역사에 무지한 사람은 그저 그 유적지에 들어서자마자 커피숍을 찾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은 부서져가는 기왓장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돼지보다 만족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돼지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있고 그리고 종종 인간이 느끼는 이 만족감과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돼지가 맛있는 사료를 먹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것은 당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목적으로 영혼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하여 영혼을 주셨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모든 세계를 이용하고 돌보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은)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영혼은 이 본래의 목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무지와 자기 사랑 때문에 이것을 잊어버렸을 뿐이지 영혼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이 기억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상시키는 것입니다. 자,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진리라고는 인정하지 않고, 죄를 따라서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신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듣고) 강한 충격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고, 자신이 회개하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오는 날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치 그 영혼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순간 기억이 난 것처럼 조각조각 흩어졌던 세계와 모든 사실들에 관한 지식은 연결이 되게 되고 찬란하게 불이 들어오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순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놀라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혼의 존재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만약에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깨닫고, 또 생전 듣지 못했던 진리가 주어졌을 때 저것이 진리이다 확신하고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영혼은 이런 기억 속에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 기억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 목적대로 자신이 쓰여지기 전까지 영혼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여러분들의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혹시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목적을 위해 지음 받지 않았다. 너와 함께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고, 염려하고, 이 세상 사랑에 빠져 살기 위해서 너 같은 사람이나 치다꺼리하라고 영혼인 나는 창조되지 않았다. 나를 제자리에 돌아가게 해다오. 나는 슬프고 고통받는다 라고 말입니다.
인간은(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때 인간의 영혼은(도) 그 목적을 따라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평화와 만족, 안식과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와 욕심이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자기 사랑이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인간의 불행의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원래 고유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이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재물을 모으고, 자신의 지위를 높게 하고, 그리고 명성을 얻어 보아도 결코 찾을 수 없는 행복을 결국은 신앙 안에서 찾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영혼이(은) 목적을 따라 살아있고자 하는 경향성과 함께 완성을 향하고자 하는 경향성을(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자신이 완전한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불완전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불완전하게 되었는데 그 죄를 없앰으로써 본래의 완전성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고통은 이 불완전한 상태로부터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진통인 것입니다. 원래 있을 그 자리에 있지 않는데서 오는 괴로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체입니다. 영혼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육체가 불결하게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혼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불결한 영혼이 되고, 불결한 영혼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이 영혼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지 못합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고통을 받지만 원래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도시를 옮겨 다니고, 아무리 풍족한 삶을 누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소비해도 평안이 없습니다. 결국은 고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련한 이 사람은 자신의 근본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고향이 어디이고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근원도 알지 못하는 소외감과 고통을 끊임없이 겪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거부한 인간의 영혼의 모습이 부모의 집과 고향을 떠난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행한 적이 없고, 행할 이유가 없는 또 다른 선택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왔던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은 스스로를 완성하지도 못하고, 자기의 갈 곳을 찾지도 못합니다. 영혼으로서의 완전성을 잃어버릴 때 그는 실질적으로 끊임없는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은 마음에 전해지고, 마음에 전해진 고통은 자신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불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인생이 의미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영혼은 완전성을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렸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본래의 완전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인간성이 굽었던 아이가 좋은 양부모를 만나 오랜 세월을 사랑을 받으면서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해 하가는 것처럼 죄 때문에 망가졌던 그 영혼의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완전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완전성의 회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자신의 영혼의 현재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원래 참 아름다운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 말씀을 통해 받는 은혜는 자신으로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완전성을 회복하게 해주고, 끊임없이 불안한 자신의 영혼을 안정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기독교 생활에 있어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적이 있었던 만큼 불행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즉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면 그런 치료 방법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영혼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진리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고, 은혜는 잃어버린 완전성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함께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간절히, 간절히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살게 하고, 그 은혜만이 나를 고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행복은 결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비관에 치우친 우리 생각을 바로 잡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먹는 그것 자체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하면 행복한 것이고, 행복이 없으면 불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완전한 영혼을 소유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그 뛰어난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조금만 높은 사람을 알고 있어도 얼마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그것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영혼은 여러분들 속에서 여러분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로 언제나 부르짖습니다. 나를 원래 창조된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다오. 나의(를)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함에 이르게 해다오. 결국 영혼의 행복 없이 인간 존재의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는 이 상태에 돌아갈 수 없으니 진리의 말씀으로 비췸을 받고, 성령의 은혜로서 변화를 받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현실에 수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자신의 영혼이 변화되기 위해 간절히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그 은혜로 나아오는 여러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미 행복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첫 경험은 언제나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구원받은 사람인데 곤고하게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깊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II.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에서 신자가 왜 행복하지 않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A. 행복이 가변적임
첫째는 행복이 가변적(可變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불변하게 주어졌으나 행복은 가변적입니다. 구원 없이는 행복에 이를 수 없으나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그 사실 하나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고 죽은 영혼이 거듭나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행복은 그것을 기초로 우리의 성품이 거룩해져 가는 것과 비례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험이 살아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구원뿐 아니라 현재의 은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 행복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속에서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심겨진 사랑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영혼은 죽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음성에도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말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영혼을 살려내십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날 때 하나님은 그 영혼 안에 당신을 사랑하는 성향(性向)을 심으십니다. 이 심겨진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겨진 사랑 때문에 신자는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 안에 심겨진 이 사랑의 성향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 사랑이 작용하는 곳은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랑의 크기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신자의 행복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겨진 사랑 말고 또 하나의 사랑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감화(感化)된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이미 심겨진 사랑이 활발하게 작용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변적입니다. 즉, 심겨진 사랑(love)은 불변하는 성향이지만 감화된 사랑은 계속 감화가 있을 때에 넘쳐나는 사랑입니다. 잔잔한 물결에 거칠게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사랑의 물결은 일어나게 되고, 그 물결의 크기와 지속성에 의하여 신자는 평화와 만족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사랑의 반복적인 감화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 사랑을 느끼고 거기서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도록 감화하시는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없는 사랑이 (신자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심겨져 있던 성향으로서의 사랑이 진리의 말씀을 수단으로 다시 불러 일으켜질 때에 그 사랑의 크기가 신자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인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바람을 거스르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현실을 이겨나가는 힘이 감화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행복이 외적인 조건에 달린 것이라면 이런 감화된 사랑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이 갖춰지면 그것이 곧 행복이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작용은 복잡 미묘합니다. 어제 본 풍경이 오늘은 즐거워도 내일은 지겨울 수 있고, 오늘은 나를 기쁘게 한 사람이 내일은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들과 함께 만나 감각과 해석이라는 작용을 거치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만 가지의 영향을 우리 마음 안에 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망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의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관성이 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일관성이 없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자아가 수없이 찢어지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오는 작용이기 때문에 놀라운 일치된 질서를 우리에게 새겨줍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결국 신자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신자의 행복을 가변적이게 만드셨을까?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그냥 우리를 계속 행복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가변적이게 허락을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우리에게 행복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죄가 남아있고,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사람이 예수를 믿었는데도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을 욕망하며 행복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변적이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가장 자극적인 요소가 행복과 불행입니다. 은혜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삶이 자신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것이 쉽고 좋은 삶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한 사람은 불행하도록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심으로 인간은 불행해지게 되고, 그 속에서 행복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불이 나서 한번 손가락을 데어 본 아이가 다시 성냥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불행을 통하여 우리가 찾는 행복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반대편에서 보면 행복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신앙심이 있는 신자들은 한 번 얻은 행복으로 태만해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게 하시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의 행복이 유지되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행복을 가변적으로 설정하셨기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지 않을 때 행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원래 그 사랑의 참된 맛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사랑 받을 때에 행복한 상태와 어떻게 비교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는 처음 회심의 경험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시간이 아무리 짧을 지라도 말입니다. 한 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갈이 아주 심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는 이유로 태만해지거나 심지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태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 사랑을 붙드는 것이 결코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행복한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 귀찮을 이유가 없고, 알게 된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행복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신자는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함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신자임에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소유하다’라는 동사는 주어나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손 안에 한 권의 책이 있다는 말과 내가 내 마음에 평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내가 빵 한 덩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소유한다’라는 이 단어는 목적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2세기 초반에 태어나서 중반까지 살았던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교회의 단일성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여기에 “가지지”라고 하는 단어가 ‘하베레’, 라틴어로 ‘소유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어머니로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 묘사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내가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내가 교회를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든지 혹은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든지 혹은 내가 교회를 그냥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그와의 일치 그리고 그에 대한 순전한 복종과 그러면서도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는 소중한 한 지체로 교회에 의해 연합되어 사랑으로 한 몸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소유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유할 수 있으니 또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신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아직도 사랑합니다. 그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10년 전 집을 떠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는) 마음으로 그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 아버지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집에 있었더라면(계실 때) 행복한 만큼 행복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다음 두 가지의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관계(關係)의 측면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만큼 이미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받은 만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용(使用)의 측면에서 활용입니다. 즉, 하나님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랫것이 위에 계신 가장 높은 분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이용되는 분이 아니시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허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활용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하늘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수시나니 이 생명과 사랑이라는 하늘의 자원을 우리의 삶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소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활용할 수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국은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누리고, 누리는 것만큼 하나님을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을 활용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자원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결핍이 없어 행복에 이르나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이 결핍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로써 신자는 미련하나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고, 완전히 의롭지 않으나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고, 연약한 존재이나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여전히 거짓된 욕망을 가진 사람이지만 절제 있는 삶을 살아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항해사와 같습니다. 세상과 자신의 삶 속에는 끊임없는 변동의 물결이 있으나 그 위에 신앙의 배를 띄우고 그 물결을 인하여 주께로 더 가까이 항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소유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결국 주님을 붙들고 사는 것과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우리가 이 하나님을 소유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연합은 고전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본성적(本性的) 연합입니다. 그리스도는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인성이었습니다. 이 인성은 죄가 없는 인류의 본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또 다른 아들들을 얻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인성의 연합 때문에 인간은 존엄성의 근거를 갖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성입니다. 그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온 인류와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장 나쁜 인간도 그 나쁘다는 이유로 존엄성을 취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의 토대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저절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연합이 제시되는데 신비적 연합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것을 ‘원리적 연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칭의(稱義)를 통하여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는 불변적이라는 점에서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신자들과만 영적으로 연합되어 계시며 에베소서 1장 2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비적인 한 몸을 이루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신비적인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신비적인 연합 없이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으나, 이 신비적인 연합 하나로 모든 신자들이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연합이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되는데 바로 영적(靈的) 연합입니다.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실제적 연합’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렇게 부른 이유는 실제로 우리들이(우리들로 하여금) 행복을 누리게 하는 연합다운 연합이라는 뜻입니다. 신비적 연합이 칭의를 통한 연합이고, 영적 연합은 성화를 통한 연합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은 불변적이지만 영적 연합은 가변적입니다. 이 연합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누릴 수 있으며 그 분량만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경에서 이 실제적인 연합을 아주 충만하게 누렸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한 고백을 로마서 14장 8절에서 만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차이가 없으니 사는 것도 결국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니, 우리는 죽고 삶으로 있고 없어지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은 항상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행복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소유된 의식이며 이 의식이 바로 하나님을 통째로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을 충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신자는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信者)가 은혜에서 멀어질 때 이 연합은 느슨해지게 됩니다. 죄와 정욕은 결국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은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임에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행복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태어났으나) 또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구원받았으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을 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사랑의 연합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사랑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온 우주 공간에 던져진 것 같은 절대적인 소외감, 그리고 밀려오는 염려와 자신과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이 낯설어 보이는 이 심리는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에서 끊어진 것이 의식 속에 투영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해 볼 때 결국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채 행복하지 않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휘지 않는 법과 같아서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의해 타협되지 않는 규칙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행복을 잃어버리게 하셔서 그것을 지겨워하고 당신을 찾게 만드시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아무것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 당신 사랑에 머물러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애정 결핍증에 걸리셨습니까? 여러분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서 무엇에 쓰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사랑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분이시면 하나님이 완전하신 신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만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보냈으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니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또 다른 아들을 얻고, 육신으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나 영으로는 다시 살아 모든 아들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행하게 살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순종의 삶을 살면서 행복을 누립니다. 잘 믿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참된 행복을 갈망하면서 거짓된 행복에 이끌립니다. 그런데 순간순간 말씀의 빛으로 이 참된 행복이 내 마음에 증거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참된 행복의 상태와 지금의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이 길고 넓고 깊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돌덩이 같이 굳었던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성령의 바람을 보내십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마음이 설득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단 이 물결이 일어나면 이 물결이 없었을 때에 사랑을 버리는 것쯤은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만큼 공허하게 하시지 않으시고, 버리는 것만큼 참된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행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큼 행복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행하게 살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선택지가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이제 여러분 중) 하나님 없이 불행하게 살기를 선택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는 우리의(우리에게) 선택의 고려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내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답을 찾습니다. 몇 시간씩 간절히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열렬히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힘들 때는 토막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0년, 1년, 한 달 뒤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 없어도 고통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명은 지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실을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비명은 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사오니 나에게 다시 그 사랑을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1분, 2분, 아니 그것도 너무 길어서 할 수 없다면 한 문장으로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살 수가 없나이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내게 은혜를 주옵소서.’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아무도 암시 없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암시의 본질이 호소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인지되어서 도움을 받고, 어떤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아서 죽는 것입니다. 조용히 여러분들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그 영혼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불신앙과 우리의 세속적인 사랑은 이 목소리를 못 듣게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집중할 마음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쾌락과 오락에 자신의 마음을 던져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도피일 뿐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음으로써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불행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꿈꾸다가 불행해진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속았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멀리 멀리 버리고,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선택할 당시에는 행복에 기대를 가졌으나 지금에 와서는 행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도 허무하리만치 짧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멀리 멀리 떠나서 불행하게 산다면 그것이 어찌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분의 뜻이겠습니까?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이고, 모든 나쁜 것은 우리의 나쁨 때문에 나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사랑에서 멀어져 행복을 원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를 충만한 사랑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들이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행복이 하나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 모든 뒤틀린 상태에서 해결을 향해 내딛는 첫 발자국은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에워싸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그 마음이 잘못된 사랑에 사슬이 묶여 행복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실제적인 진리입니까? 이것보다 우리의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교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어마어마한 변화를 순식간에 받을 그런 꿈을 꾸지 마시고 오늘 내 마음에 뿌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작은 진리를 마음에 굳게 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다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여러분의) 기도를 물리치신다면 그분의 성품과 어울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다른 기도는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 비록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행복을 찾다가 길을 잃었으나 은혜를 주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주님이 물리치시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는 자녀들이 그 어두운 길에서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드리는 눈물의 기도는 그분의 마음 전체를 사로잡고야 맙니다. 멀리 멀리 집을 떠난 자식이 저 풀숲의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달려가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왜 또 내일입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고 난 후에야 ‘이제는 하나님 안에 행복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겠습니까? 오늘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혜자가 아들에게 준 교훈입니다. 지혜(知慧)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9절과 20절에 보면 이 지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22절에 의하면 이 지혜는 영혼의 생명이 되고, 명예로운 삶을 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에 지혜자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렸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지혜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것은 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번 받은 지혜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Ⅱ. 지혜로 행복에 이르라
신자의 행복은 조건적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행복의 길에 들어섰으나 그가 계속 행복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을지라도 지혜를 잃어버리고 나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니 행복의 길을 알고도 불행한 사람은 원래 행복의 길을 몰랐던 사람보다 더 불행한 것입니다.
A. 지혜란 무엇인가
1. 지혜의 정의
그러면 도대체 지혜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속히 깨닫고, 사물을 정확히 처리하는 정신적인 능력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이것으로서는 오늘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지혜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좀 더 정리해보면 지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지혜란 자신 밖에 있는 법과 이치에 비추어 사물의 좋고 나쁨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둘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입니다. 자연적(自然的) 지혜는 자연적 사물과 인간 본성의 법칙에 대한 판단력입니다. 이 자연적 지혜 속에 담긴 법칙은 하나님의 지혜가 자연에 투영된 결과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셔서 하나하나의 사물을 있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사물들을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또한 창조하셨습니다. 그 원리는 법칙으로 나타나고 그 원리는 그 모든 사물들의 공통된 존재와 작용의 법칙을 생산해 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만큼 불변하기 때문에 학문이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통해서 자연적 사물의 존재와 작용의 이치를 파악할 때 현재를 보고 과거를 알게 될 뿐 아니라 또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게 되고, 아무리 먼 미래에라도 같은 조건하에서 어떻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이루어온 이 눈부신 물질문명은 바로 그런 학문의 덕을 입은 것입니다. 어디 물질문명뿐이겠습니까? 나름대로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 모든 것들도 자연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지혜는 인간의 본성에도 관여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편리함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자연적인 지혜가 뛰어난 사람을 주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이만 못한 사람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책으로 알려진 잠언은 반드시 하나님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지혜를 많이 다루고 있으니 인간의 마음과 본성의 작용의 법칙이 어떠함을 알아 일의 물리를 알고 그것을 처리하는 사람의 유용성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도덕적(道德的) 지혜입니다. 이것은 참된 선(善)과 악(惡)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력입니다. 자연적인 지혜는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만 도덕적인 지혜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도덕적인 지혜를 발견함으로써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영혼이 어두움 속에 있다면 영혼의 작용인 마음은 이 지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에베소서 4장 18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원천적 지혜이시고,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기 때문에 지니게 된 파생적인 지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참된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기념비적인 책『인생의 행복에 관하여』(De Beata Vita) 제 4장 32절에서 이렇게 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재는) 정신의 척도가 곧 지혜다”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기에 길어보여도 자로 재보면 사실은 짧을 수 있고, 얼핏 보기에 짧아도 자로 재보면 길 수 있으니 실제의 길이와 마음으로 느끼는 길이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는 것이니 마음 그대로 사물을 측정한다면 기분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드는 자로 측정하는 것이니 한결같은 값이 나올 수가 없고, 측정이 잘못될 때 인간은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나쁜 것을 좋게 생각하는 오류에까지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기분이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로 인해서 사물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척도를 지닌 것이니 이 척도는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그 크기가 줄어들거나 혹은 짧아지지 않는 불변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사물들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그 진리의 척도에 의해서 측정하는 것이니 모든 지혜가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변의 잣대를 인간이 소유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이 끊임없는 진리의 빛 아래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이 척도로 측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가치에서 멀어지기 쉬운 자신의 마음조차도 그 척도로 측정하여 올바른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정신을 갖는 것이 바로 지혜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척도가 상실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것을 거짓된 것과 바꾸고 가치 없는 것을 매우 소중한 것과 교환함으로써 그는 질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 모든 혼란과 고통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근원적으로 지혜는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를 진리로 보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당신의 지혜를 소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에게 인식되어 지혜가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대상일 뿐입니다. 즉, 아무리 진리라 할지라도 나의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나에게 소화되어 지혜가 되어야 그 진리가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진리를 많이 섭취하고 소화할수록 그는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영혼의 빈궁함에서 벗어날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그는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지혜의 부족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다음의 언명을 기억하십시오. 지혜는 어리석음(foolishness)의 반대말입니다. 지혜가 어리석음의 반대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부인할 수 없는 언명입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족할 때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진리로부터 멀어져 지혜를 잃어버리고 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입니다. 즉, 자기가 옳은 데로 판단을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욕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정신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항상 옳을 수 없으며, 그는 선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것을 욕구하지 않으니 그 판단과 욕구대로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멀어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한때는 지혜 아래 있었으나 그 지혜를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분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는 욕망(慾望)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슬기로운 사람들조차도 지혜로워지는 가장 중요한 길은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욕망을 따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이 욕망을 피한다고 가르친 이유도 인간의 본성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자연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욕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표상(表象)을 만들어 냅니다. 이 표상은 어떤 사물에 자기의 욕심을 투사시켜 실제로는 그런 가치가 없는데 큰 가치를 지닌 것처럼 느끼는 것이고 또 실제로는 그 정도 지위가 아닌데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표상입니다. 이 표상은 지성을 끊임없이 속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4절에는 죄가 미혹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지혜가 부족하게 될 때 결국 인간은 허탄한 일에 빠지게 됩니다. 지혜는 존재의 질서를 따라 높은 위치에 있는 것에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저 아래 있는 것에는 낮은 가치를 부여함으로 상위의 가치를 위해 하위의 가치를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바로 그렇게 사물들의 지위(地位)와 가치(價値)를 부여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번 진리를 안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진리의 영향 아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한 번 비춰서 사물이 어딨는지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 빛을 비추어 사물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물에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이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면 이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뒤틀린 채로 인식되는데 이것을 성경은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밖에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 진리(眞理)의 빛을 떠나 본래의 질서를 뒤바꾸게 되면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고 로마서 1장 23절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불행인 것입니다.
(둘째, 지혜가 부족하면 자신을 진리로 삼게 됩니다.) 진리를 힘입어 사물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1절에 의하면 마음이 진리를 떠날 때 미련한 인간의 마음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인간은 기껏해야 이성의 판단을 따르게 되고, 그만 못 할 때에는 육욕(肉慾)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성의 판단을 따른다고 하지만 이성의 판단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때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성의 판단을 따르게 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그는 지혜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만 못할 때는 육욕을 따르게 되는데 육욕은 일관성이 없고 육욕은 우리를 데려가고 자 하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우연적인 것이고, 불끈불끈 솟아나는 것일 뿐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는 목적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는 행동을 수시로 충동적으로 행할 때 (그러한 행동들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갈 리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매순간 솟아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지혜가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하나님 위에 두게 됩니다. 이때 인간의 마음은 어두운 바다가 되어 망망한 대해를 이루며 욕망은 커다란 물결이 되어 어둠 속에 뒤웅치는 것입니다. 생각과 삶은 질서를 상실하고 혼돈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할 수 없고,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으니 그는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 느끼며 인생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도피책은 순간순간 쾌락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채로 사는 것인데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인생의 허무와 불행에서 건져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지혜의 근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진리의 길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져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천지에 모든 만물 속에 깃들여져 있는 자연적인 이치를 알고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혼란과 불행 속에서 살지만, 모든 이치들을 다 깨우치지 못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니 인간의 행복이 지혜에 달렸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이치는 그 이치를 참되게 하는 더욱더 상위에 있는 진리 때문에 참된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리가 되게끔 만들어 주는 더 높은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veritas ipsus)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에 대해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니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요, 그 뜻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니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행복은 원하나 지혜가 없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B. 무엇이 지혜를 주는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지혜를 줄까요? 행복은 정신의 부유(富裕)이며 불행은 정신의 빈궁(貧窮)입니다. 이 정신의 빈궁함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정신의 부요는 언제나 많은 열매를 가져옵니다(frugalitas). 인간의 정신이 선하고 부요하면 굳이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 선한 열매를 맺기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저절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빈궁함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니 쓸모없는 것(nequitia)만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지혜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음에 복종하며 부지런히 살았던 모든 날들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알곡이 없는 쭉정이와 같은 인생뿐입니다. 이런 쭉정이와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어떠한 보람도 느낄 수 없고, 살아온 인생의 날들이 한스럽고 후회되고 그것을 통해서 실다운 열매를 맺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들이 담겨있습니다. 그 모든 규칙과 교훈들은 한 가지 지혜(the Wisdom)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나 사라질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니라고 고린도전서 2장 6절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지혜나, 꼭 정치적인 통치자들이 아니라도 인간의 철학과 사상, 종교를 지배하여 우리에게 주도권을 행사했던 모든 뛰어난 사람들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 지혜는 무엇일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經綸)이며 그것을 명백하게 요약해서 나타난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시고, 나를 만드신 그 경륜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경륜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이 경륜을 따름으로써 가치 없고 누추하던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두루마리가 그리스도 예수시고, 이 두루마리가 펼쳐진 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고 완성하시는 역사의 전개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은 바로 이 커다란 하나님의 경륜의 끝없는 두루마리 속에 한 점으로 나타났고, 나의 이 한 점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경륜의 전개에서 아름답게 나타나도록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륜의 핵심이 바로 복음이고, 그 복음의 주인공이 그리스도이시니 결국 인간이 지혜에 이르는 길은 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4년 2개월을 살았을 때 저는 교회를 가던 주일날 논 언덕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나를 압도하는 질문은 네 가지였으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무엇이고 나는 왜 이 세계에 소외감을 느끼는가, 그리고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서도 이 네 가지 질문에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열리지 않은 나의 마음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고, 어린 아이의 마음에 이 질문을 찾아내어 정확히 가르쳐 주지 아니한 교회의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 진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저는 이 때문에 나의 온 존재를 억압하여 누르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후에 많은 문학가들과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이 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모두 이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일 뿐이었지 그것이 나에게 참된 지혜를 주는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금고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금고를 여는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생과 우주에 대한 문제의 답을 금고 속에 넣으시고 그 금고를 잠그셨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그 열쇠로 금고를 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제껏 문학가들과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들려준 많은 가르침 속에 (순)간이라도 참된 것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금고에 귀를 대고 흔들면서 조용히 그 소리를 들어보거나 유추해 본 것 때문에 생겨나게 된 참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통해 그 문을 열지 못했으니 진리에 대한 그들의 말은 풍성하나 울리는 꽹과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에게 지혜로운 것이 모든 인간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나니 미련해 보이는 방법인(방법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아는 길에 도달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진리의 저장고 세 개를 이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말씀 사역의 목회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목회 사역으로 부지런히 탐구하여 그리스도 로 성경을 열고, 그 속에서 지혜의 말씀을 펼쳐 목회 사역을 통해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실제로 활용함으로써 그 신자는 비로소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면 리차드 벡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천국은 여러분에게서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을 기울여 탐구하지 않고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은 피를 흘리기까지 희생하고 난 다음에야 진리의 부스러기 같은 작은 조각을 깨달을 뿐이니 참다운 진리의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분들이 탐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생각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 경륜의 위대한 창고를 여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의 창고를 엶으로써 지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라고 말입니다. 개인의 인생의 의미는 세계와 이웃의 인생의 의미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개인과 이웃, 세계와 다른 모든 인류의 의미들로 하여금 그 위에 있어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지혜는 바로 이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10장 4절에 의하면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곧 전적인 순종(順從)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완전한 존재이시며 그보다 높은 분을 상정할 수 없다면 우리의 세계와 인생의 모든 의미는 그분의 존재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행복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들어옴으로 행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순종을 거부할 때 자유(自由)를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한 속박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누리려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기 위해서는 5회 정도의 습관적인 투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약을 경험해 본 일이 없으니 그것이 주는 쾌감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공허하고 자기를 지탱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정도 이상의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쾌락에 대한 추구는 자신을 주체적으로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것을 선택하면 선택할수록 자신의 인생을 주제적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근원적인 이유가 모르면서도 모든 나라의 법들이 지나친 쾌락을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더슨 헉슬리같은 미국의 사상가들은 당시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유한한 세계에 묶여있는 인간이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가장 훌륭한 지름길은 약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이로 말미암아 60년대와 70년대 커다란 약물 복용의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그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신세계를 선사해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주체성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특별한 쾌락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나 횟수가 거듭할수록 결국은 자신의 선택은 없고 그 약물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약물이 누구를 노예로 삼을 수 없으니 자기 스스로 정신이 굴복하여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행복이 있을 수 있겠으며 우리를 행복하지 못 하게 하는 선택인데 그것이 어찌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에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니 이 순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누리고자 할 때 그는 비참한 속박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죄와 욕망에 매여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밖에 있는 자유를 꿈꾸다가 올무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Christ)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넘어서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니 그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지혜인 이유는 그분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바라보고 달려온 경륜도 사랑하고, 그를 통해 펼쳐진 경륜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두 경륜을 영원 속에서 이루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경륜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인 이 경륜을 즐거워하고, 그 경륜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때문에 펼쳐지는 것이 즐겁게 느껴지면서 사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부여된 행복인 것입니다. 일찍이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 속에 살지만 온몸으로 부딪혀 이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그 힘의 크기만큼 그는 불행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나의 지혜로 삼는 길이며 이 지혜 때문에 신자는 행복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육체의 질병은 사람이 만든 약으로 치료합니다. 인간의 영혼의 질병은 이것으로서 치료되지 않습니다. 고장난 우리의 영혼에 빨간 약을 바르겠습니까? 아니면 첨단 의약품을 투입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의 육체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니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약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이시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디슨이나 곧 약이 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발견한 약은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약으로 주셨습니다. 고장난 모든 영혼, 병든 모든 영혼을 그리스도가 치료하십니다. 첫 사랑을 간직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만큼 영혼은 병들고, 고장 난 영혼을 가지고 사는 인생은 지혜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음과 짝하게 됩니다. 지혜는 수많은 선한 것과 행복을 생산해 내지만 어리석음은 끊임없는 고통과 무용한 것을 생산해 냅니다. 이(어리석음) 때문에 인간은 허무하면서도 이상하게 허무하기 때문에 그 허무에 빠져드는 모순의 삶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안정한 모든 굴레의 연속을 깨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의 영혼의 약이신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망가진 영혼을 고쳐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게 만드시고,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지혜를 되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성도가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의 척도로 변질된 자신의 마음을 재어봄으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에 자라나는 정상적인 몸의 일부인지, 병적인 성장인지를 찾아내고, 간직해야 될 것은 간직하고, 잘라버릴 것은 잘라버릴 용기를 가짐으로써 우리 영혼의 생명을 보존할 뿐 아니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목적이 없이 흐릿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빛나는 눈동자는 인간의 이성의 눈동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경륜을 알고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그리고) 도(道)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찾는 눈빛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외에 이 눈빛을 가질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사람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탐할 때 우리의 눈이 얼마나 빛났습니까? 예기치 않은 명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욕망의 눈동자는 반짝거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사치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빛나는 눈동자를 지녔습니까? 진리를 향해서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향해서도 눈동자는 빛납니까? 가치 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쉽게 획득되고, 영원한 가치가 있고 빛나는 것은 어렵게 획득됨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행복하게 사는 일은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흔하고 가치 없는 것입니까? 목숨을 주고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극도의 가치를 지닌 것입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십시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는 이미 행복의 길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의 길로 들어서서 행복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행복의 길을 아예 들어서지 않은 사람보다 실제적으로 더 불행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이 진리의 빛을 떠나 어리석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두 이미 현자(賢者)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 온 우주와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인류를 당신과 교제하기 위해 만드셨으며 나라고 하는 인간을 목적이 있어서 지으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누구도 쉽게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미 현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를 얻었다 할지라도 한때 얻은 것만으로는 그 지혜를 따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진리(眞理)를 사랑으로 붙잡은 사람들이 바로 오늘을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지혜(知慧)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한 자가 되십시오. 행복은 여러분들이 육신을 위해 찾은 것들에 있지 아니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덧없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어두운 밤바다에 큰 물결이 뒤웅치고 있다면 그 물결 바로 위에 얹혀진 하나의 물방울 같은 존재가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늘은 있으나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뒤웅치는 파도 위에 잠시 생긴 아주 작은 물거품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 바다가 역사라면 풍랑은 우리의 삶에 변천하는 사태이고, 우리는 (바다에)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일생입니다. 바다 속에서는 인간의 목숨보다 훨씬 더 긴 생명을 살아가는 사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짧게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것이 인간이니 만약에 행복이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행복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이렇게 덧없이 자연의 일부로 우리의 육체가 태어나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물방울은 생각하는 물방울입니다.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역사의 바다에서 우리 모든 인생의 파도가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이 바다를 거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피조물 중) 인간의 위대함을 아무리 높게 칭송해도 지나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위를 인간에게 주신 것은 그 지위에 알맞은 행복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니 어떠한 만족을 느끼는 동물도 인간의 이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어지심을 누리며 하나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우리들이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부르시나니 광야에서 엎드려 죽어간 수많은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고, 어리석음으로 불행한 길을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지혜를 소유함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깊이 생각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열렬히 실천함으로써 지혜를 소유하여 행복에 이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크고 제일가는 계명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 계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지혜로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 행복에 이르는 두 조건이 되는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 두 기둥을 아치(arch)로 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恩惠)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지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은혜로 이 둘을 묶으시기 위해 성령이 오셨으니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지혜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오늘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가 어려웠다고 하는 분들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차분하게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II.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라
A. 사랑이란 무엇인가?
1. 사랑의 정의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는 어떤 사물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의 신앙적인 논의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더 깊고 정확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정의를 해보았습니다. “사랑이란 정신이 어떤 대상에 고착하여 그것 자체를 즐거워하고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영혼과 마음의 경향성이다(KNJ)”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불쑥 좋아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경향성이고 성향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에 이르지만 그럴 가치가 없는 것에 사랑을 바칠 때에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올바르게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았다 할지라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방향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지성(知性)은 명정했으며, 감정(感情)은 고르게 되었고, 의지(意志)는 올곧았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자연 만물을 선량한 관리자로서 선의를 가지고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서로 사랑(love)했으며 그들이 만물을 가꾸고 돌봄으로써 창조세계에는 아름다움이 증대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랑은 방향(方向)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랑할 능력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자기사랑(自己愛)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를 하나님 삼고 싶어하는 자기였으니 결국은 행복의 근원을 떠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순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은 최고의 존재로 여기고, 자기만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인간의 불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3. 자기사랑과 무질서
질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선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질서에서 떠나면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이 순간순간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영원한 행복은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기라는 존재가 항상 선(善)하고 행복(幸福)할 것만을 욕구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선하지 않고 악한 것을 바라고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길을 가는(갑니다.) 자기 길을 두둔하고 사랑하는 비극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한순간은 기쁨을 누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짜릿한 쾌락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속적이어야 하고,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자기를 두둔하고 사랑함으로 질서를 떠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이런 운명에 처한 우리를 바꾸어 놓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원래 행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B. 어떻게 그 사랑으로 돌아가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그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편지를 받은 교회는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제국에서도 매우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많은 나라와 문물이 만나고,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양한 이교(異敎)들이 번성하고 있는 그러한 중심지였습니다. 아직도 에베소에는 어마어마한 도시의 유적이 남아있어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문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 위에 불모지와 같은 이곳에 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보내시고 예전에 흔히 일어나지 않았던 크고 위대한 부흥을 주십니다. 이 선교의 이야기가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을 믿지 않고 이성에 빠진 것 같은 도시일수록 이교가 성행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마술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마술하는 사람들까지 회개시켜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였고, 또 그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이 이교의 마술을 버리고 복음을 믿게 됨으로써 에베소 교회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이 이교의 마술이 얼마나 사악하고 허무한지를 깨닫고, 마술을 가르치는 책들을 모두 모아서 불태우는 허영과 이교의 화형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불태운 책의 값이 당시 화폐로 은(銀) 오만 드라크마의 가치였는데 어느 학자에 의하면 오늘날 한화로 환산할 때 약 60억원 어치에 달하는 책이 그 화형식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이게 사도행전 19장 19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으니 이것은 그냥 인간의 도모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십자가 사랑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교회는 너무 너무 탁월한 점을 많이 가진 교회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복음 사역을 하였지만 이런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칭찬은 사람이 한 칭찬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그 교회를 바라보며 내리신 평가였습니다. 많은 교회가 말만 무성한데 이 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만 수고하지 않는데 이 교회는 수고한 교회였습니다. 철 좋은 시절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어려움이 오면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교회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불법하고 더러운 자들을 용납하기 쉬운데 이 교회는 사랑이 있으면서도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순결까지 가진 교회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얼마나 뛰어났는지 자칭 사도라 하는 사람들을 시험해서 그가 거짓된 사람들인 것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영적 분별력과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가 많은 시련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참고 견디고 인내한다는 이야기가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열거하였던 덕목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딘 교회였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다면 불 속에라도 들어가는 모든 고통을 견디며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섬겼던 교회였습니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이 교회는 주님이 보시기에 결코 게으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착하고 충성된 교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지금 열거한 모든 아름다운 행실들은 하나의 뿌리에 모여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결국은 그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던 모든 아름다운 처음 행위들은 잃어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스럽고 탁월했던 교회에 대해 안타깝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처음 있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행실을 상실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온 성도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처방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나쁨을 보고는 종종 마음 깊이 그를 버리고 포기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교회도 당신 아들의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교회를 버리실 수가 없었고, 그래서 눈물겨운 심정으로 이 교회가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처방을 내리신 것입니다.
1. 생각하라
첫 번째는 ‘생각하라’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헌신, 인내와 도덕, 성실에 있어서 인정을 받았으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3절에서 말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처음 행복도 잃어버렸겠죠. 마술을 하던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 허무한 철학과 인간의 사상으로부터 돌이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오고, 그 모든 마술의 책을 장례식을 치르며 화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이제껏 섬기던 허무하고 더러운 신들을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행복도 잃어버렸습니다. 비록 이때까지 선한 행실의 모양은 남아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을 실로 매단 것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주님이 어떤 처방을 내리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라고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생각하고’라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엔듀무’(enthumou)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기억하고’ 라는 뜻입니다. 먼저 할 일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생각을 소환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진리로 자신을 비추어 예전에 있었던 일에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에 비추어서 오늘을 반성해 보는 것이 생각인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뛰어난 덕목은 사랑이지만 마르틴 루터가 레오 10세에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된 사랑은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생각은 그런 점에서 신앙의 우선적인 덕목이니 이 믿는 바와 생각에 성령의 역사를 더할 때 여기에서 하나님 향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할 일은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고, 쉽고, 깊고, 넓고, 확고하게 가르치는 것과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각하는 것, 믿는 것을 매우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지성적인 기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남을 위대한 산상 수훈의 마지막을 집 짓는 비유로 마무리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즉, 이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 같으니 큰물이 일어날 때에 반석 위의 집은 흔들림이 없으나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너희는 생각하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어찌하여 잊었느냐. 이런 당부와 질문의 말씀은 신앙에 있어서 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는 데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신앙의 가치를 경험했지만 그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의미를 파고들면 경험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말씀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일치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시간이 흐르며 마음은 미끄러져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랑에 매달려 있어야 할 행위는 결국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거나 차가운 형식만이 남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떨어진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떨어져 그 사랑을 잃어버렸고, 어느 지점에서 취약하여 사랑과 삶이 찢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진리(眞理)의 말씀으로 비추어 자신이 지나간 길을 기억하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돌아갈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2. 회개하라
그러면서 주님은 두 번째 처방을 내리십니다. ‘회개하라’ 였습니다. ‘회개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입니다. 앞에 ‘메타’(meta)는 전치사인데 ‘후에, 다시 한 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뒤에 ‘노에오’(noeo)라는 단어는 생각하다 라는 단어인데 두 개가 합쳐져서 ‘메타노에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에오’ 생각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그냥 가벼운 뜻에서의 생각이 아닙니다. 얼핏 얼핏 떠오르는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떠오르는 그런 의미에서의 생각하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노에오’라는 단어는 이런 뜻이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합당하게 행동하기 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얼핏 얼핏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새가 날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아니라 합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집중된 의도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가 생각하다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이렇게 하는 것, 혹은 후에 올바르게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이 회개하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울고불고 하는 것으로 요약하지만 원래 정확한 의미는 생각하는 관점(觀點)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것이 회개의 결과입니다. 회개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각하는 관점이 회개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의 변화가 있고, 이 생각의 변화를 뒤따르며 거룩한 감정(感情)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면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은 욕구하고, 새롭게 싫어하게 된 것은 혐오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 인격적인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때문인데 이 은혜는 뼛속까지 깃들여 있던 자기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이 힘 때문에 무능한 인간이 행할 수 있게 되고, 이 힘 때문에 무지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두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죄에 대한 후회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그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두 번째는 후회해도 도저히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어떤 하나의 개별적인 죄에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존재(全存在)가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해 불결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며 자기를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의 두 장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일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어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선생 같은 분이 오셔서 이상하게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상식에는 어긋났으나 왠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어서 그대로 했더니 엄청난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사람들은 만선이 된 기쁨에 가슴 벅차 했지만 베드로는 그분이 하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엎드려 그분께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 5:8)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기에 베드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물고기를 잡는 데 있어서 누구를 속였나요? 거래했을 때 누구에게 근수를 속였을까요? 물론 그런 것도 포함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고 나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죄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분에게 죄송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은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은 거룩하고 자기는 너무나 더럽기 때문에 그 거룩한 분에게 자기가 서 있는 것이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 예수께 떠나달라고 하였으니 떠나달라는 말은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나옵니다.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을 속였고 세리였기 때문에 동족들을 수탈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세리에게 한 구역을 정해주고 얼마의 세금을 거둬내라고 요구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생활비로 쓰는 형태였답니다. 그러니 당연히 동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 이 사람들은 창녀와 함께 가까이해서 안 되는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을 찍혔던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죄를 짓고 수많은 사람의 돈을 갈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슴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눈물을 흘리듯 기도하고 있는 이 세리의 모습은 그 많은 죄 중 어느 하나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고, 그래서 살아온 모든 삶이 죄였고, 자신의 존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악의 덩어리였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분의 용서를 받는 것 이외에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해서 통탄해하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받음으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제로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받았어도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에 함께 있어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데서 옵니다. 그분의 위엄과 자비 앞에서 자기를 깨닫고 생각하고 돌이켜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잃어버렸던 행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끄러진 신자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기 전까지 사랑의 회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삶을 살면서도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허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고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기쁨은 극도의 기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내리시는 두 번째 처방은 회개하라 그러면 너희가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요 그러면 행복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잃어버린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순종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do the things you did at first)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이 말씀은 원래 희랍어 원문에는 처음에 네가 행했던 그것들을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초심은 곧 초애(初愛)입니다. 즉, 신앙에 있어서 처음 마음은 곧 처음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행위는 처음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順從)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참되게 살 수 없고, 자력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되게 살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恩惠)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참되게 살고자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니 이는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faith)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한 설교자의 말씀 선포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면 마지막 그 결과가 은혜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은혜를 받고 난 후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고, 그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고 싶었으나 그럴 힘이 없었는데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면 근원이 어딘지도 모를 힘이 솟아나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은혜 경험의 깊이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깊이를 경험하고 자신은 할 수 없는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깊이가 그리고 그 빈번함이 바로 신앙의 깊이인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과거에만 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누리면서 살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았던 신앙의 사람은 없고,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사랑의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면 그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면 그렇게 산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은혜롭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어떤 일이 은혜롭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감정을 출렁거리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경험은 항상 사랑의 정동(情動)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가 예전에 누구였든지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 돌같은 사람의 마음을 녹여 물처럼 만들고, 얼음과 같이 그렇게 굳어버린 그 사람의 마음을 녹여 물처럼 흐르게 합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의 힘을 북돋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미끄러지지 않은 사람도 은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예전에 미끄러졌으나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선한 행실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되찾아야 했는데 이 행위는 하나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두 은혜를 받고 새 삶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 예배드리러 오는 그때는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리고 처음 사랑의 때는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까? 처음 사랑을 떠나서 과연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삶은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왜 좋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그 괴로운 삶을 지속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회개하라는 명령이 때로는 불같이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무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돌이켜 회개하기에 너무 큰 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은 그의 작은 허물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앞에 회개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은 못 할 것입니다. 문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것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이 남아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도저히 못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못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그분께 돌아가지 않으려는 그 불순종의 마음이 여러분들을 행복하지도 않은 이 삶에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짧은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행복을 갈망하고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인류가 잃어버린 참된 행복의 길을 다시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참사랑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은 탄식하며 여러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간구의 궁극적인 제목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은 못한다 할지라도 이미 할 수 있게끔 은혜를 주신 것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 순종을 통해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마귀와 사단이 권세들이 끊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 할 수 없는 좋은 것이 남아있다면 이제는 제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렸던 행복(幸福)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복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