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14과
녹취자 : 오희열
신나 14과 <변천하는 시대와 목회>를 배우겠습니다. 3분단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문제 1) 잊히지 않는 은사를 찾아가 만나 뵌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준 역사적 인물이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이것은 하나의 워밍업입니다. 그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96세 때 제가 찾아뵈었는데 제가 다녀가고 나서 몇 년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100세를 사셨거나 101세쯤 되어서 돌아가셨을 겁니다.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92세까지 운전을 하고 미국 시내를 돌아다니셨다고 합니다.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분의 사랑을 받고 조교를 지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할 얘기가 많을 것입니다.
문제 2번입니다.
문제 2)현대교회에서 신학이 없는 목회와 설교가 유행하는 것을 ‘탈신학화’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이런 현상은 현대인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탈근대주의 사고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철학적 배경에 대하여, 교역자가 미리 준비해 배부해 준 자료를 가지고 구역장(순장)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김성구 목사님, 교역자들이 진짜로 자료를 배부해 줍니까? 이것은 제가 정리한 자료입니다.
현대를 이해하는 두 가지 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알고 계시면 굉장히 좋습니다.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modern”, “현대적인”이라고 배웠을 텐데 철학에서는 그런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modernism 이라는 것은 “근대주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현대”가 아닙니다. “현대”는 영어에서 별로 없습니다. “contemporary”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시대의”, 혹은 “우리시대의”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얘기하는 동안에 그 시대는 또 지나갑니다. 어쨌든 모더니즘을 우리는 근대주의라고 부릅니다.
근대주의라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이런 말을 하다보면 우리는 “조국 근대화”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것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나라가 너무 뒤처져있으니까 경제나 산업을 일으키고 사회를 빨리빨리 발전시켜서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평균적인 세계의 환경에 따라가자는 것이 “근대화”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기 때문에 잘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주의는 그런 근대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모더니즘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간단히 얘기하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근대의 철학사상입니다. 그것이 근대주의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이전까지는 중세였습니다. 중세에서 계몽주의가 나오고 계몽주의가 체계화되면서 근대주의가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근대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쭉 살아오고 있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 근대주의가 강력하게 지배하는 나라도 있고 덜 지배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처럼 신 아래에 복종하는 인간, 계시 아래에 굴복하는 인간의 사고가 아니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궁극적으로 이성이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더니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모더니즘에는 기본적으로 층차가 다양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근대주의부터 시작해서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완전 불신주의적 근대주의까지 층차가 다양합니다. 그 이전의 계몽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층차가 다양합니다. 계몽주의에서도 확고하게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 내지 반신론적인 계몽사상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신론 내지는 반신론까지 다양하고 이렇게 많은 층차에 걸쳐서 근대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근대주의와 기독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은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그 자유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이시고 인간은 결국 하나님이 생각하고 뜻하는 의지와 계획의 한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될 때 모더니즘 안에서는 기독교가 전혀 존재할 수 없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확고한 설명 하나를 해 보겠습니다. 모더니즘이라 말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길지만, 라틴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via antique”, “via moderna”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via”는 “길”, 혹은 “방식”을 가리킵니다. 영어에서는 “어디를 경유하여”라는 뜻입니다. “via airmail” 하면 항공편으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antique”는 “옛길”이고, “via moderna”는 “새길”입니다. 더 잘 표현하면 “via antique”는 “옛날의 방식”, “via moderna”는 “현대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방식”은 “학문과 사고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옛 방식과 새 방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옛 방식은 중세시대까지(의 학문 방법론인데) 신이 존재하고 하고 신의 계시가 인간의 판단을 초월해서 이미 있고 인간은 그것을 그대로 수납하고 그 질서 아래에서 사유하고 생각하면서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이 옛날 방식의 학문입니다. 신학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via moderna”, 곧 “새 방식”은 옛 방식이 모두 깨집니다. 12세기 넘어오면서 이미 이런 조짐이 있었고, 13세기를 지나 윌리엄 오캄이나 쿠자의 니콜라스 같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나타나면서 무너질 듯한 붕괴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들은 중세를 지배하던 소위 철학에서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유명론”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복잡하니까 인터넷에 가서 한번 찾아보십시오.
(새 방식의 학문 방법론은) 신이 존재하며, 그분의 계시가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그 아래에서 복종하면서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학문을 해야 한다는 옛 방식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훨씬 더 주체적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면서, 학문함에 있어서 신이 존재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 심지어는 진리조차도 판단할 수 있다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via moderna”이고,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이 “moderna”에서 온 용어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더니즘”은 결국 신의 존재와 계시를 중시하고 인간을 그 아래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생각, 다시 말해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와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으로서 사고를 하고 학문을 해야 한다는 근대 이전의 철학사상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절대시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전에 던졌던 질문, “도대체 근대주의 안에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지 않습니까?”에 대한 답을 하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근대주의라고 하는 틀이 있기 때문에, 다시말해 근대주의는 인간의 자율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틀을 가지고 이 틀 안에 기독교를 맞추려고 합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여하튼 기독교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진리의 어떤 부분들을 훼손하지 않고는 이 근대주의 속으로 기독교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유주의 기독교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극도로 이성화된 종교를 가지게 되면, 말하자면 성경의 계시를 다 제거해버리고 성경이 지닌 절대적인 권위도 제거해버리고 나면, 신은 있지만 인간 사회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윤리 혹은 도덕의 기본 원천으로서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신론 같은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입니다. 굉장히 오래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하는데 도대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슨 뜻일까요? 글자를 그대로 놓고 보면 “-뒤에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스트”(post)와 “근대주의”라는 말인 “모더니즘”(Modernism)이 합쳐진 것으로 “근대주의, 그 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번역하는데, “탈 근대주의”라고도 번역하고 “후기 근대주의”라고도 번역합니다. 그 차이는 거의 없는데 쓰는 사람들이 사상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는 “탈 근대주의”를 많이 사용하고 역사와 관련해서는 “후기 근대주의”라는 말을 많이 선호합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나 대체로 그렇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사상을 벗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근대주의에서는 이성과 자유를 중시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이것을 다 벗어버렸다고 했으니 (그 사상은) 신께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대주의에서는 그래도 다양한 층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류에서 시작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부류인 무신론까지-가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공통의 도덕 근거”를 대부분 인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류가 그동안 공통적으로 가져왔던 공통적인 가치들, 즉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 인류는 모두 가족처럼 살아야 한다, 결혼제도에 있어서 동성애에 대한 거부 같은 것들, 선악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명료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것 자체를 깡그리 부숴버리고 부인해버립니다. “그런 기준, 가치관이 뭔데?”라고 반문하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와만 결혼해야 하는가?” 심지어 “왜 부모와 자식은 부부가 될 수 없을까?”와 같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얽매는 모든 것들은 어떤 인간들이 조작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혹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어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면서 타파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에겐 자유가 없다.”라고 하면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들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기타 매체들을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오늘날 벌어집니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면서 기존의 가치관들이 무너지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굉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구역질나고 무서운 일들이 이 사상의 배경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들은 일체의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결정적인 특징이 “상대주의”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그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길지만 이 정도만 해도 공과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불변하며, 목양자의 사명은 불변하는 이 성경의 진리를 붙들지만 시대는 계속 변합니다. 시대와 사상이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서로 연관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시대가 아무리 변천한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일관성 있게 믿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자신만 빠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구역장과 순장을 하는 동안에 투덜거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사람들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생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의 경향성들은 현대교회의 “탈 신학화” 혹은 “탈 진리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다. 왜 그런가? 그냥 그렇기 때문에 진리다.”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검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 “누가 인간에게 무엇은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느냐?”고 되묻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하면 “그런 것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속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경향을 무시하며 거기서 탈출하려는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한쪽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근대주의 정신이 함께 깔려있어서 마구 섞여 있는 속에서 우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더 근대주의의 영향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본적으로 나라에 충성하면서 살아가자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이전 설교시간에서도 예화를 들었습니다. (시대마다 표어의 내용은 달랐으나) 학교에 가면 기본적으로 교문에 걸려있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6.25가 끝나고 나서는 “무찌르자 공산당”이 걸려 있었고- 공산주의에 철저하게 이를 갈았던 때였기에-, 박대통령이 60년대 혁명을 하고 집권하면서부터는 “증산, 수출, 건설”이 -물건을 생산하고 외국에 수출해서 돈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공장도 짓고 다리도 짓고 길도 놓게 되고 그것으로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더 잘 사는 나라가 되자는 취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박대통령이 물러나지 않고 장기집권하려고 유신을 합니다. 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유신 헌법을 만들어서 자기가 국회위원의 3분의 1을 임명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놓고 체육관에 2000명 앉혀놓고 거기서 대통령을 뽑으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신체제를 만들어 놓고 새로운 구호를 내 겁니다. “유신으로 번영하자” 그것이 1970년대 박대통령이 암살되기 전까지 일입니다. 그러다가 민주화의 봄이 오고 볼 차는 것처럼 정권이 이리저리 뒹굴다가 결국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정권이 가게 됩니다. 그때는 학교 앞에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 다음에 김영삼 대통령이 됩니다. 중요한 일이 그때 일어납니다. 모든 학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런 표어가 붙었다고 합니다. “삐삐는 진동으로” 이것은 의미심장한 조크입니다. 학교에 온 학생들에게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쳐야할 가치를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가치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이미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비록 지배층들은 개판으로 살아도, 선생들은 비록 뒤에서 호박씨를 까도 자라나는 학생들만은 모아 앉혀놓고 바른 가치를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0년대에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늦게 찾아온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훨씬 일찍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학교에 무엇이 붙어있느냐인데, 요즘은 그냥 하얗게 둡니다. 쓸 게 없는 것입니다. 아니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무찌르자 공산당,” 하면 “와!” 하는 마음이 있었고 “증산, 수출, 건설” 하면 “와!”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누가 거기에 억지로 무엇을 쓴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는 교훈, 급훈 하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직, 청결, 근면”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교훈이었습니다. 수년 전 딸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에 처음 그 학교를 가서 보니까 급훈이 있었습니다. 우리 때는 “우정, 사랑, 신뢰” 등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경쟁은 존재한다. 살아남자.”가 급훈이었습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묻기를, 선생님이 지은 것이냐고 하니 언제 써 놓은 지도 모르게 거기 늘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가훈 만드는 집 보셨습니까? 옛날에는 모든 집에 가훈이 있었고 아이들이 항상 집에 와서 가훈 써달라고 하면 아빠가 처음으로 가훈을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이제는 웃기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사조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탈 진리화” 되니까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는 내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처받고 고통 받는 것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상처받고 고통 받은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어디서 이런 사고방식을 받은 것입니까?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주 광범위하게 받았습니다. 15초짜리 광고에서 시작해서 신문, 잡지, 모든 매스 미디어가 그것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의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또 신앙을 자아의 결핍이나 타자의 부당한 대우로 인한 억압에서 해방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윤리와 도덕조차 개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가치로 보고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현대사상입니다. 그런 그 사상이 신학 속으로 들어와서 신학도 탈 신학화 되는 것입니다. “힘들지?”, “너는 상처받았지? 왜 상처받았을까? 상처로부터 낫고 싶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하면서 다가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탈 신학화”가 일어나는 것은 첫째는 현대사상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적 사상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 보니 결국 시대정신이나 가치관에 대해서 신학적인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든 드라마를 보든 그런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보지도 않았습니다. 수년 전에 “밀애”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김희애와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남녀 주인공으로 나오고 20살 차이가 나는 피아노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는 드라마였습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불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설득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런 것을 볼 때 옛날 같은 도덕적인 엄격한 기준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이해가 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문화에 감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감염이 되면서 그런 것이 계속 좋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시대정신이나 가치관이 되어서 전 영역에 다 배어 있는데 그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의 탈 규범적인 정신들이 기독교의 옷을 입을 때 기독교신앙의 탈 신학화를 부추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이 나빠서가 아니라 성경을 중심에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정신과 너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사고방식에 성경의 진리를 살짝 타서 교회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그 이야기가 비슷하게 흘러서 공감을 얻는, 그런 기독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내에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3번을 1분단이 읽겠습니다.
문제 3) 선적 행복론과 점적 행복론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 기독교는 이것들 중 어느 하나를 따르지 않는 종합적 행복론 임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나누어 봅시다. 극단적 금욕주의와 극단적 개인행복주의가 왜 신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한두 사람의 견해를 들어봅시다.
행복에 대한 관점은 딱 두 가지입니다. 선적인 행복과 점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이미 알프레드 아들러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선적인 행복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어떤 한 지점에 서 있고, 거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 서 있는 현실에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뭔가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미래에 도달할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를 Goal이라고 합시다. 어느 한 목표 G1이 미래에 있기 때문에 오늘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G1에 도달하게 되면 또 목표 G2를 세웁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향해 현재를 열심히 살면서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을 열심히 산다고 한다면, 행복은 항상 미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나중에 맛볼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희생되고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막상 거기에 도달하면 거기가 끝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또 다른 행복을 꿈꾸고 목표를 꿈꿔야 한다. 덜 먹고 덜 자고 또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어느 시점도 그 행복을 누리는 시점은 없게 된다. 목표한 미래에 도달해도 이미 도달한 순간 다음의 목표가 생기니까 “아, 이제는 내가 행복하다!” 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틀린 것 같습니까? 자유롭게 대답을 해 보십시오. 맞는 것 같습니까? 맞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사조에 굉장히 많이 감염이 된 것입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사람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 새끼가 자랄 것입니다. 엄마아빠에게는 그 자식에게 대한 꿈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이 바라는 것처럼) 이 아이가 커서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해 봅시다. 의사가 되어서 미스 코리아 같은 며느리를 만나고 부잣집 처가를 만나서 열쇠 세 개쯤 받고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해 봅시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꿈이 이루어졌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 자식을 뱃속에 품고 낳아서 미래에 의사가 되어서 열쇠 세 개를 얻을 때까지는 우리에게는 그 아이로 인한 그 어떤 기쁨도 없고, 그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열쇠 세 개 얻는 것을 위한 수단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앞서 대답하신 분들은) 모순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낳은 후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보면서, 그 아이를 사랑하고 함께 웃고 울고 하는 모든 것 자체가 자기를 완성하고 행복을 누리며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제게 26개월된 손녀가 있습니다. 밤 11시 반에 “치킨 줘! 치킨 줘!”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가 야단을 쳤습니다. “지금 치킨 먹을 시간이 아니야! 잠 자야해. 혼날래? 어서 자!” 하고 야단을 치니 주눅이 들어서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그러나 치킨이 먹고 싶어서 다시 기어 나와 거실에서 자고 있는 고모에게 갔습니다. 살며시 기어와서 고모의 손목을 꼭 잡더니 “치킨 없어?”하고 속삭입니다. 그 아이가 벌써 그것을 속삭이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엄마가 들으면 또 혼날 테니까 말입니다. “고모, 치킨 없어? 치킨 없어?”라고 속삭입니다. 나에게도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씁니다. 없는데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손녀가 “아이스크림 줘.”하면, 제가 더 큰 소리로 “나 아이스크림 줘!”라고 따라합니다. 그러면 손녀가 “나 아이스크림 없어!”라고 하고, 나는 더 크게 “아이스크림 줘!”라고 외치면 손녀는 “없다니까!” 하고 막 도망을 갑니다. 얼마나 재밌습니까? 솔직히 그 아이가 몇 살에 시집갈지, 어떤 남자를 만나서 몇 개의 열쇠를 받을지, 선교사가 될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이 관심사입니다. 이제 몇 달 후면 아빠를 따라서 어디로 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렇게 함께 사는 것 자체가 기쁨이지 그 모든 것이 이 아이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의 수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서 언급된 비판과 같은 그런 엉터리가 또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인생의 행복을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객관적인 가치에 입각한 삶 자체를 깔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제시한 논리입니다. 이것이 선적인 행복론에 대한 견해이고, 제가 지금 이것을 비판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점적인 행복론입니다. 이것은 매 순간순간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요나스 요나손의『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전문소설가도 아닌 사람이 쓴 소설인데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영화까지 나왔습니다. 지금 제 설명을 듣지 않고 그 영화를 보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영화 줄거리를 모두 얘기할 수는 없고 한번 찾아서 보십시오. 그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계속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이 시점에서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 살아라. 내 인생이 어디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매 순간순간 즐거울 수 있는 그 순간을 기뻐하고 즐기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아라.”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들이 현대인들에게 폭발적인 자극을 주줍니다.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논리에 엄청나게 빨려듭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그런 논리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선적 행복이니 점적 행복이니 이야기하지만 기독교의 행복은 포괄적이고 원적인 행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행복이신 하나님 자신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 삶을 살아가다보면 하나님 안에서의 삶 안에는 이런 선적인 행복과 점적인 행복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오랜만에 굉장히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을 굉장히 즐거워합니다. 또 뜻밖에 좋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1인분에 2만 원짜리, 3만 원짜리를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이것을 팔면 가난한 사람들이 호빵을 몇 개를 사서 줄 수 있는데…’ 그런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매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식사를 거절하고 호빵을 사서 빈민촌으로 가고 싶으면 가도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식사를 그냥 즐기셔도 됩니다. 더 비싼 음식을 먹을 기회가 주어져도 기쁘고 감사하게 드십시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을 이런 곳에 오게 하셔서 이런 맛있는 식사를 하게 하시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즐기십시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것을 탐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영적인 건강이 파괴됩니다. 누리십시오. 그러나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또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나는 하나님 안에 있어서 참 행복해. 주님이 매 순간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셔. 그리고 나를 도우셔.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목표도 없어.’ 라고만 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연도에는 오랫동안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떨어져 나간 모든 지체들이 나와 함께 신앙 생활했으면 참 좋겠다. 그것이 이뤄질 때까지 그들은 내 마음에 항상 부담이 되고 안타까운 기도제목이 된다.’ 이렇게 선적인 개념들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라는 게 발전이 있고 목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의 관점은 이 두 가지를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미 도입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현재적으로 즐거워하고,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 안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행복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안에서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안에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2분단, 문제 4번입니다.
문제 4) 지식의 세 대상은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와 튜레틴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지식의 대상은 사실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념을 따라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으니 말입니다. 나머지 두 대상인 인간에 대한 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거기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은) 자연 사물에 대한 지식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에 대한 지식은 인간 일반에 대한 지식과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나도 인간이다”라고 할 때처럼 개별적인 인간이 있고 “인간이 그러면 안 되지” 할 때처럼 보편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외에는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학이라고 하는 모든 학문도 자연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고, 사회학이라는 것도 사회 현상에 대해 연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생각은 세계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사회도 발전시키고 과학도 발전시키면서 예전에 상상도 못했던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기술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에 있습니다. 이 지식은 꼭 필요한데 인간이 이 지식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살면 마지막 죽을 때에도 이 질문에 답을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하게 되면 한 60세 정도 되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갖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철들자 죽는다.” 우리 인생살이가 끝나갈 때 즈음에 그런 지식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그것을 거의 깨달아 간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용기만 있는 사람들이 함께 섞이면서 발전과 유지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회에 갈등이 있고, 집안에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자식이고, 이상한 부모입니다. 그런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이해 못 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사회는 움직여 갑니다. 지식의 세 대상, 곧 우리가 무엇에 대해 배워야 하나라고 물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운다고 답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기독교 교양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물은 향유할 대상과 사용으로 그칠 대상과 향유하고 사용할 대상이 있다.” 이것은 향유할 대상은 하나님 뿐이고, 향유하고 사용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며, 사용으로 그칠 대상은 그 밖에 모든 사물이라는 뜻입니다. 향유한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 외에 더 이상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왜 사랑해?” “니네 아빠가 부자잖아.” 이런 것은 향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답을 줘야겠지요. “모르겠어. 난 너만 보면 너무 좋아.” 이것이 그 여자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난 네가 좋아.”, “왜?”, “살림을 잘 해줘서.” 이것은 살림을 잘 하는 것이 그 여자 자체 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살림을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니 (사실은 그 사랑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살림이 받는 사랑인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오늘 저녁에 가서 남편과 어떻게 한 판 싸울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즘 모든 여성들의 꿈이 예능인 송해 씨 같은 남편을 갖는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90세가 다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많은 돈을 벌어오고 게다가 집에서 밥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송해 씨의 부인은 그렇게 벌어다 준 돈을 쓸 기력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게 꿈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좋아.”, “왜?”, “돈을 벌어다줘서”가 아니라 “당신이 삼식이가 되도 좋아.”, “왜?”, “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모르겠다고 대답해야 정답입니다. 왜요? 사랑하는 그 근원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혜를 많이 받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하시면 안 됩니다. 은혜 떨어지는 날은 쫓겨나는 날이 됩니다.
(마스트리히트도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신학은 복합적이다. 즉, 부분적으로는 이론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실천적이다. … 신학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인데, 이 행복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봄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데 있다. 그 둘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닮게 된다.” 인간의 행복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유익입니다.
그 다음 5번 마지막입니다. 이것은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 읽겠습니다.
문제 5) 오늘 공과의 마지막 순서는 우리 작은 모임의 특별기도회입니다. “진리 탐구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고 우리 구역(순)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기도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특별기도회 담당자가 미리 수집하고 준비한 기도제목을 따라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기도 담당자를 세워서 문자로 주고받으면서 기도제목들을 모두 모아서 복사해 오면, 그것을 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의 기도제목은 세 개입니다. 첫째, 신학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복한 신자들이 되기 위해서, 세 번째는 카타르 한인교회 집회를 위해서 입니다. 저는 오늘 밤에 떠납니다. 카타르에서 집회를 목마르게 기다려서 거기서 말씀을 전하고 토요일에 일찌감치 1시쯤에 돌아옵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당회를 하는데 장로님들이 제발 좀 가지 말라고, 몸도 별로 좋지 않은데 왜 가느냐고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간다고 해도 계산을 해보니까 40번 가면 은퇴입니다. 메뚜기도 한 철입니다. 허리가 아픈 것도 잘 다독이고 기도하고 약도 먹으면서 아직 메뚜기인 시절에 뛰어야지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염려해주시는 것은 너무 감사하고 참고하겠습니다.” 오늘 장로님들이 간곡히 권하셔서 아프리카에서 요청한 집회 하나를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갔을 텐데 장로님들의 눈빛에 하도 찔려서 제가 하나를 취소했습니다. 잘 했다고 하셔야 합니다. 자, 신학생, 행복, 집회, 이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