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지혜적 사유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
우리의 온 몸의 지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구석 안중요한 데가 없지만 눈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눈이 어두우면 건강한 다리를 가졌는데도 씩씩하게 걸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그래서 종종 보면 앞을 못 보는 분들이 이렇게 지팡이로 두드리고 가면 제가 가끔 손을 붙들고 인도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참 너무 안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과학자들이 많이 노력을 해서 그분들이 앞을 좀 못 보더라도 보는 것처럼 편안하게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도구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거든요. 영혼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올바로 보고 사느냐는 그것이 우리 인간 존재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시다. 지식이 많아요. 이것도 하나의 힘이죠. 그렇죠? 재능이 뛰어나요. 그것도 하나의 힘이죠.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없는 놀라운 야망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도 하나의 힘이죠. 그런데 영혼이 올바른 영혼의 판단력과 이런 것들을 안 가지고 있으면 마치 소경과 같아요.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다리가 튼튼하다고 막 달리면 큰일 나죠. 마찬가지로 지식과 재능 혹은 야심 이런 힘들이 있어도 우리가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무엇을 생각하게 되느냐하면 눈에 보이는 물체들은 우리에게 항상 착각을 불러일으켜요. 두 가지 때문에 그런데 우선 첫째는 물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물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 물체로 말미암아 물체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없도록 그 보이는 것들이 계속 방해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뭔가를 이렇게 가치가 없는 것들을 많이 보고,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면 호기심이 많고 마음이 잡화상같이 완전히 개방된 사람들이 고도의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하나는 사물의 한계 때문에 그렇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의 감각의 한계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물체가 있고 사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표상이 있어요. ‘환타스마타’라고 하는데 표상이에요. 물체를 쳐다보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딱’하고 상이 맺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상이 맺히는 게 물체를 갖다 주면 상이 그냥 탁하고 객관적으로 맺혀서 언제 이것을 보든지 항상 똑같은 상이 맺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상이 각각 다르게 맺히는데 이것을 맺히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뭐냐 하면 존재하는 객체로서의 사물만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는 일이 있으면 봐도 다 기분이 안 좋아요. ‘왜 그렇게 실실 웃고 난리야!’ 그런 생각이 탁 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뭐야 저 벌레 씹은 얼굴을 해가지고 아이고 왜 저 모양이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가다가 돌멩이 하나가 딱 걸리면 ‘이게 도대체 여기에 왜 있는 것이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런데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요. 그러면 화나고 웃는데도 자기보고 웃는 것도 아닌데 자기보고 웃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식하는 사물은 같아도 이 속에 있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이 감관이 발동을 하는 것이에요. 감각기관들이 움직여요. 그래서 그것을 다른 표상을 여기에다가 계속 맺히는 것이에요. 보는 기능은 똑같은데 말하자면 그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지된 것을 이 속의 이성이 해석을 할 때 각기 다르게 해석을 해서 볼 때마다 다른 상들이 맺혀지게 하는 것이죠. 이게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쳐다보면 항상 그런 식으로 변화무쌍하게 표상이 맺히는 거죠. 그 표상을 따라서 판단을 하고 살면 계속 출렁거리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직장을 다닐 때인데 어느 여직원이 아침에 훌쩍거리면서 울어요. 그래서 왜 우느냐고 했더니 자기 사진을 보고 울어요. 그래서 네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우느냐고 했더니 자기 사진을 봤는데 그 공무원증인가를 만들려고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아니 그 처녀가 조금 못생기긴 했어요.) 그런데 사진에 너무 아니게 나온 것이에요. 그것을 보고 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울 일도 되게 쌨다. 그게 잘나왔다고 해서 못생긴 얼굴이 예뻐 지냐? 못 나왔다고 해서 잘생긴 얼굴이 망가 지냐? 그 다음날 다시 찍으면 예쁘게 나오잖아요. 표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결론을 얻게 되느냐하면 그냥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본 것이 자기에게 가져다주는 표상대로 살고 이러면 계속해서 그 표상에 뒤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덕목이 하나 나오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관상의 삶이에요. contemplation이라고 하는데 관조의 삶을 사는 것이에요. 관상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혹은 관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늘 설교시간에 잘 표현하는 숙고하는 삶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물이 보이고 그 사물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서 내 마음에 맺히는 그 상들에 흔들리지 않고 그 사물의 원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관조의 삶을 살아야 해요. 숙고하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이 마음의 출렁거림과 욕망, 탐심 이런 것들을 계속 이렇게 지워버리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 이것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나 이것을 지우려고 하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현저해요. 그게 바로 철학자들이나 말하자면 종교가들이 도달했던 명상의 경지가 그런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훨씬 아주 훌륭한 입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뭐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셔요. 그 성령님은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면 우리 모두 어떤 마음이 드느냐하면 순결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에요.
한 십여 연전에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잊히지도 않아요. 내가 무슨 설교를 했느냐하면 죄 많은 여인의 향유를 부은 것을 설교했어요. 저를 초청한 목사가 있었는데 그날 밤에 있는데 그 때는 전도사였지요. 청년한테 전화가 왔대요. 아주 교회에서 착실하고 그런 모범적인 자매인데 왜 전화를 했느냐고 하니까 말씀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래요. 그게 뭐냐고 했더니 설교를 듣고 나서 자기가 그렇게 창녀같이 더럽게 자신이 느껴지더라는 것이에요. 그게 결국 무엇을 반영하느냐하면 성령님의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순결하게 하는 작용이에요.
그래서 희랍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퓨라멘스’라는 것이 있어요. ‘퓨라’는 순수하다는 뜻이고 ‘멘스’는 지성이에요. 순수한 지성이라고 하지요. 이게 희랍사람들이 아니라 로마에 와서 그렇게 교부들한테 불린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순수 지성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에요. 순수 지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욕망과 탐심으로부터 해방된 지성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루스카탈로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카탈로스’라는 단어가 뭐냐 하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마태복음 5장에 나와요. ‘막까리오이 호이 카탈로이’ 그러고 나와요. 그러니까 ‘심령이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할 때 그 청결하다가 그 ‘카탈로스’에요. 여기는 복수로 나오죠. ‘카탈로이’라고 나와요. 그래서 ‘루스 카탈로스’ 하면 순순한 지성이에요. 그런데 그 ‘카탈로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에 맞먹는 히브리어가 ‘타헤르’ 라고 하는 단어인데 물로 씻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물로 깨끗이 씻어 세척을 해서 깨끗하게 하는 이것을 ‘카탈로스’라고 얘기하는 것이에요. 형용사이지요. 거기에서 나온 영어가 카타르시스라는 단어에요. 이게 물로 씻어낸 듯이 세척해낸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해서 씻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기 자신의 본성의 빛으로 자기를 닦아내려고 했던 것이지요. 본성의 빛으로……. 본성의 빛으로 욕망과 탐욕을 물리치고 그 속된 욕망과 더러운 잡념에 의해서 자신의 순수한 지성이 더럽혀져서 진리를 관상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애를 쓰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삶은 탁월해요.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할 정도로 탁월해요. 그러니까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생각하는 것까지 철저히 이 방탕을 멀리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이방인으로서의 올곧음을 갖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지성은 많은 얽매인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그래서 지성이 사유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도움을 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보면 알지만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탁월한 위치에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성령님이 우리가 만약에 정말 이 욕망과 탐욕, 교만 그 다음에 미움 이런 것에 의해서 얽매이고 방해받는 지성을 갖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떨쳐버리려고 그 사람들이 노력했던 것처럼 노력하면서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더 놀라운 순수 지성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순수한 ‘퓨라멘스 루스 카탈로스’를 소유하게 될 때에 그 때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딱 쳐다볼 때에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그것이 주는 진짜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한 것에 아주 뛰어난 모본을 보이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신 것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병든 자, 가난한자 꼭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 찾아다니신 것은 아니고 어쨌든 그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표상에 매이지 않으셨어요. 부자, 높은 사람이 찾아와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의 곤고한 영혼을 보시고 창녀같이 일생을 더럽게 살던 여자가 와서 당신에게 향유를 부어도 그 여자의 더러운 표상에 매이지 않고 그 여자의 영혼을 보신 것이죠. 이런 것들을 가지신 것이죠. 이게 영혼사랑의 가장 기본이에요. 표상을 넘어 설수 있어야 되요. 그때 비로소 그 속에서 들려요. 그 영혼의 신음소리, 영혼이 기뻐 뛰는 소리, 영혼이 흐느끼는 소리 그런 것들이 들리는 것이에요. 그 때에 비로소 그것이 들리는 것이에요. 그거에요. 그 다음에 이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런 이치를 가지고 놓고 보면 우리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감각으로 볼 수 있는 소유한 사물의 아름다움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영광의 아름다움이 그 존재의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인간의 아름다움은 오직 딱 하나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영혼의 아름다움……. 이제 이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존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인 동시에 그를 행복하게 하는 요건이 되요.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 요건이 되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에 어울리는 것을 찾아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름다운 영혼은 그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에서 그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풍미를 가지고 있어요. 자 아름다운 영혼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아름다운 영혼이 세상의 권력을 탐합니까? 아니죠. 아마 그 아름다운 영혼은 아주 높은 권력보다는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는 행복을 택할 것이에요. 그렇죠? 아름다운 영혼은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랑하며 살기에도 바쁜 시간이니까. 아름다운 영혼은 물질을 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름다운 영혼의 진정한 만족은 그러한 물질이 영혼에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더러운 영혼은 그것을 탐해요. 왜냐하면 더러운 영혼은 그것으로 만족을 해요. 그러니까 아름다운 영혼 자체가 그 존재를 아름답게 하는 동시에 그를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왜? 자기 영혼에 어울리는 풍미를 찾아서 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영혼에 의해서 인생의 가는 길들이 정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 획득이 되느냐? 영혼이 어떻게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가? 영혼이 어떻게 해서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완전성이 합쳐져서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에요. 요번에 기도원에 있으면서 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주 깊이 관상을 하면서 하여튼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거기가 좋사오니…….’ 그러면서 거기서 몇 달이고 있고 싶었어요. 얘기하면 한없이 길지만 간단하게 요점만 얘기할게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두 개의 완전성이 합쳐서 아름다움이 되는 것인데 첫 번째 완전성은 뭐냐 하면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에요.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있어야할 자리에 그게 딱 있어서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울림을 갖게 될 때에 그 때에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에요. 그러면 그 보편적인 질서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느냐하면 조화와 균형과 절제에 의해서 그 보편적인 많은 것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조화라고 하는 것은 주위와 어울리는 것이고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맞은편에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는 것들이에요. 이것을 보세요. 이쪽 눈과 이쪽 눈의 크기가 같아요. 이게 짝짜기이면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이 모든 것들이 다 대칭을 이루고 있어요. 가구를 짤 때도 대칭으로 짰잖아요? 여러분도 이렇게 대칭으로 앉아 있잖아요? 벽과 벽이 마주보죠? 상하가 마주봐요. 또 힘과 힘이 균형을 이루면서 대칭이 될 때 그것이 보편적 아름다움의 요소이고 마지막 하나는 절제에요. 절제는 뭐냐 하면 그 존재가 그 존재로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그것이 절제에요. 한 존재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그것은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에요. 존재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죠.
언젠가 한번 어디를 갔는데 선교사와 같이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좀 잘못했어요. 그랬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뒤에 있는데……. 이 선교사가 열을 받았어요. ‘야, 이 개새끼야, 네가 갈수 있다고 해놓고 우리를 이렇게 골탕 먹이는 거야?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그것도 여선교사가……. 그 순간에 막 걔는 모욕을 안 받지요. 한국말을 모르니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똥물을 뒤집어쓰지는 않았는데 똥물이 튀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거기서 선교사의 입에서 욕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이질적인 것이에요. 그게 절제가 없는 삶이에요. 그 순간에 그 존재 자체를 더럽히는 것이에요. 이런 것이에요. 성경에 보면 이렇잖아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나오기 전에 뭐가 나오느냐하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막 쏟아져 나오잖아요? 이게 전부다 이질적인 것이에요. 절제가 안 된 것이죠.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게 쏟아져 나오는 것에 의해서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서 그것으로서 만족하려고 할 때 그게 보편적인 질서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하나가 이렇게 자기의 자리에 만족하려고 할 그 때에 이제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딱 어울리는 위치에 있는 것이 그게 아름다운 것이라는 거죠. 저 꽃을 가을이 되니까 바꿨어요. 참 예쁘네요. 그런데 저 꽃이 저기에 안 있고 만약에 여기다가 누가 올려놨다고 칩시다. 그러면 차라리 여기에 있느니 없는 것이 이 방이 더 편안할 것이에요. 왜 그렇죠? 저게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를 이탈해서 있으니까 다른 것과의 조화가 깨지는 것이죠. 그러한 보편적 질서 안에 딱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간의 영혼에 이것을 적용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에요. 어떻게? 인간의 영혼이 자기가 겸손하게 영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혼 자신이 사용하면서 살아가야할 육체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영혼 자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자기가 있는 것이에요. 그 자각, 그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도 이 자각을 잊어버려서 영혼이 그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순식간에 더러운 것이 되는 것이죠. 그 더러운 것에서 쏟아내는 많은 섬김 들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많이 섬겼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제사는 싫다.’ 그러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그 제사가 율법에 어긋난 제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위치를 이탈한 영혼들이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에 싫은 것이에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면 그 존재 자체의 완전성에서 오는 것이에요. 저 꽃이 저렇게 되는데 저게 몇 개가 발에 짓밟히고 잎사귀가 떨어지고 오물이 묻었다고 칩시다. 저게 아무리 제자리에 있어도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똑같은 것이에요. 우리의 영혼이 순결해지고 깨끗해질 때 그게 아름다운 영혼이에요. 그리고 지금 이야기한 그 위치를 찾는 것과 영혼의 깨끗함을 회복하는 것은 저 꽃에 의해서는 나뉠 수 있지만 인간 영혼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나눠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를 이탈한 순결한 영혼,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제 위치에 정확히 자리하고 있는 불결한 영혼, 이런 것은 없다 이거에요. 저 꽃은 가능한데 이 인간의 영혼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비유의 한계에요. 영혼은 그렇게 안 돼요. 그러면 삼단논법에 의해서 우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하면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간의 영혼에 있고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 영혼의 순결함에 있다고 말을 하면 정확하게 명제가 되는 것이에요. 결론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세상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안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보다 못한데 어떻게 이 한계를 극복할까?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영광 없음을 슬퍼하기도 하고 그것이 탐욕 혹은 시기심 이런 것들로 발전하기도 해요. 그런데 영혼의 참된 아름다움은 그렇게 시기해서 얻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무슨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데 몇 대 몇의 경쟁률이 있고 선착순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그 물로 씻어서 우리를 순결한 영혼이 되게 만들어주시고 그 때에 그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그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충분하지 않아요?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 아름다운 영혼으로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생명주시는 날까지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렇게 인정하는 효과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나타나기 위해서 힘닿는 때까지 사는 것이니 이러한 관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이에요. 넘나든다기보다도 마음대로 넘나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래놓고 또 금방 사도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하면서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안 돼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런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아가야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을 잃어버려요. 잃어버려요.
오늘 시인이 뭐라고 했느냐하면 ‘주의 은혜로 나의 산을 굳게 세우셨는데 주께서 얼굴빛을 가리셔서 내가 슬퍼졌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앞에는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내가 형통할 때에는 영원히 견고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자기가 은혜가운데 살고 그럴 때에는 항상 무엇이 들어오기 쉬우냐하면 처음에는 안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헛되니 안전감이 들어오게 되요. 헛된 안전감……. 누구든지 그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 번에 댐이 무너지듯이 폭격을 만나서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구멍이 뚫어지듯이 야금야금 파 들어가면서 그 다음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형통할 때에는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나중에 어느 시점에 가보니까 영혼의 이런 아름다움을 다 잃어버려요. 그래서 자기가 너무 추루한 존재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깊이 좌절하지요.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철이 든 거예요.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예전에는 몰랐는데 침체에 빠지고 보니까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으로 견고하게 서있었던 것이 주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산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관련된 존재를 뜻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견고하게 세우셨는데 그 때는 몰랐는데 침체에 빠지고 보니까 주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뭐가 부족했다는 것이죠? 영혼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요. 오늘 나의 이 아름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니 내가 이 은혜를 잃어버리면 마치 아무 낙이 없을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밤에 어디를 갔다가 교회에 들어올 때에 제일 기분 좋은 것이 열린 공간의 네온사인이에요. 그게 꺼져있으면 기분이 우울해요.(웃음) 이것도 표상이야. 그러면 얼른 가서 그것부터 켜요. 나는 그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엊그제 나동훈 집사보고 그랬어요. ‘아, 우리 저것 좀 크게 만들걸 그랬다.’ ‘왜요?’ ‘예쁘니까…….’ 그랬는데 그것을 보면 기분이 그렇게 좋아요. 우리의 영혼에 아름다움이 있고 주님을 잘 섬기고 우리의 존재가 빛나고 하는 모든 것들은 커다란 네온사인과 같아요. 전기가 들어오면 빨강, 파랑, 노랑, 깜박이는 불빛이 다 나오지만 어느 순간이 되어서 전기가 다 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캄캄한 어두움이고 글자 안보이게 하려고 검은 테이프 감아놓은 것까지 다 보이잖아요. 추루한 것이죠. 그런데 형통할 때는 그것을 잘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잃어버린 상태에 들어가게끔 허락하시는 그 섭리적인 이유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은혜 없이 사는 고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종종 은혜를 잃어버리도록 허락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랬더니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게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주님이 얼굴빛을 가리시니까 이제 근심하게 된 것이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이죠. 이게 바로 영혼의 침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까? 여성들이 얼굴을 계속 아름답게 유지하고 싶어 하잖아요? 원판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상관없이 그것을 되게 유지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서 화장품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의 화장품들도 외국에 가면 정말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렇게 유지하는데 영혼의 아름다움도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비결이 있어요. 그런데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에요. 하나……. 영혼의 그 순수한 아름다움은 오직 한 가지에 의해서 유지 되요. 인간의 뛰어남은 영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이 뛰어난 것이에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그 하나가 뭐냐 하면 진리에요. 영혼이 그 진리를 굳게 파지하고 있을 때에 그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것이에요. 그 아름다움의 정도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의 밝기처럼 각기 상이하지만 그러나 그 진리를 굳게 파지하고 있으면 영혼은 점점 아름다워 가는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의 침체로부터의 회복이라는 것도 결국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위로, 용서, 사랑, 주의 권면, 이런 많은 것들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부속품이고 마지막에 그 영혼이 침체에서 회복될 때에 굳게 붙드는 것은 진리를 붙들고 일어서는 것이에요. 그 진리를 붙들게 될 때 다시 아주 부패하고 더러워진 영혼이 그 진리의 물에 씻겨나가면서 그러면서 아주 순결한 ‘루스카탈로스’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지성이 회복이 되고 사랑의 기능들이 회복이 되어서 순전한 사람으로 아름답게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이에요. 세월이 많이 흘러도 우리의 삶의 상황이 매우 다양해도 이 진리는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그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잖아요? 그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일군이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더 많아요. 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하나님이 일순간에 우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얘들아! 어두운 하늘에 별이 되어라.’ 그래서 우리들이 모두 별이 되어서 어두운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고 칩시다. 그래서 밤하늘에 곳곳에 흩어져있다고 쳐요. 그대들의 영혼의 별은 어떨까요? 얼마나 반짝일까요? 정말 밝고 찬란한 동방박사가 보던 별처럼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것보다 더 진지한 질문은 없어요. 나머지는 모두 다 사소한 것이에요. 모두 사소한 것이에요…….
(찬양)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저는 밤마다 산책을 하면서 두 가지 사실,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머지는 아무렴 어때요? 그래서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라우다떼 에시데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깊이 주님이 내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아도 주님이 그냥 계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한없이 즐거워요. 그래서 매일 밤 기도해요.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그 하나님을 인식하는 나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잊지말아주십시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거기 계신 주님 때문에 만족하는 것처럼 주님도 여기 있는 나 때문에 만족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에요.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면서 매일매일…….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진리를 굳게 파지해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전하는 것들이에요. 흘러가요. 계속 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그리고 소멸하는 것들이에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아니하고 진리를 굳게 파지하고 마치 아름다운 영혼으로 남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끊임없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찾고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해요. 그 때에 자신을 꿈꾸지도 못했던 아름다움을 영혼 안에 가득 소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만드시는 것이에요. 길 잃은 수많은 뱃사공들에게 북두칠성 하나가 갈 길을 찾게 해주듯이 그 사람도 어두운 밤하늘에 그렇게 빛나는 별처럼 살게 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느냐, 시집가느냐, 장가가느냐, 지위가 높아졌느냐, 목사가 되었느냐, 전도사가 되었느냐, 사장이 되었느냐, 회장이 되었느냐, 늙었느냐, 젊었느냐,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찬양)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래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기가 그렇게 닮고 싶은 이 모상을 뛰어넘어서 자기가 정말 그렇게 닮고 싶은 아름다움의 실체를 우리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분과 같은 순결한 영혼으로 그렇게 삶과 죽음, 순경과 역경, 고난과 기쁨, 슬픔과 환희 이 모든 것을 초극해서 그래서 진리를 파지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풍랑이 이는 바다위에서도 잠들게 만드셨던 것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랬어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누가? ‘사랑으로 가득한 영혼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 진리가 자기를 아름답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