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 오희열
의무감에서 하는 일은 별로 성취가 없고 억지로 해도 본인이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언제나 신나고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학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전문교과 과목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가장 좁은 의미의 신학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역사의 유고한 전통에 비춰보면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것이 곧 신학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인류가 꼭 해야 하는 학문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신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견해가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누어진다면 “신은 없다.” 라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알빈 플란팅가(Alvin Carl Plantinga)의 지적과 같이 이 세상이 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학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또 그 올바른 신학을 공부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드려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올바른 신학함’이란 무엇인가? 오늘 여러분에게 앞에 보이는 이런 저도의 내용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보겠습니다.
‘올바른 신학함’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신학함’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데 이 사랑이 이웃, 자기 자신, 나아가서 자연세계에까지 적용되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이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학공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장에 보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지식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한 이성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전통에서는 지식과 사랑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두스 같은 신학자는 “amor ipse notitia est”(사랑 그 자체는 앎이다), “지식은 곧 사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참된 사랑을 동반한다. 그래서 지식에 기반하지 않은 사랑,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지식은 둘 다 참 사랑이나 지식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첫 번째로) ‘속성’,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 중에) 특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성품을 가리켜서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시행되는가? 이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의 앎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예수 그리스도가)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성자의 성육신입니다. 성자이신 그분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그 성육신 사건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시대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면서 소위 말하는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이시고 또 당신의 속성이 어떻게 이 세상에 시행되시는지를 쫙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위해서 천지를 헤맬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집중해서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냈는지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지만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 예수의 생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 즉, -신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특히 세 대상에 대한 지식, 하나님이 누구신가?, 인간이 누구인가?, 세계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이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의 qualification, 자격이 (신학에서) 필요합니다. 그 자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직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우리의 정신과 영혼으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직관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앞에서 부복하는 떨림, 두려움,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참다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에 이끌리는 그런 사랑을 경험하며 그 하나님과 더 연합되고 그 하나님과 하나 되려고 하는 그 무엇이 합쳐져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형성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비적인 능력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미약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심미적인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이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새로운 영적인 감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이해력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감각들- 이 (회심을 통해 우리에게)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심미적 능력입니다.
존 칼빈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지식과 사랑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경건과 학문’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pietas et scientia”, 경건이 제일 앞에 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지식으로 추구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일치가 될 때 진정한 신자의 삶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굉장히 유명한 글이고 제네바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던 칼빈의 고백입니다. “주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여기에 나오는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라고 하는 사람은 화란의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였고 당대에 가톨릭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았고, 기울어져가고 있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다시 한 번 높이 들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게(그 방향성이) 바로 “Nadere Reformatie”라고 해서 네덜란드 제2 종교개혁의 기치를 드는 역할이 되었고, 이 사람의 영향으로 후에 성경공부라든지 소그룹 모임들이 생겨나고, 멀리는 경건주의 운동도 이 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이 분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엄정주의”입니다. (이 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교훈대로 철저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입니다. (그가) 이런 발언을 했던 것도 지식과 삶이 완전한 합치를 이루는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참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왜 신앙생활을 엄정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해서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종교를 구현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속 깎고 다르게 해석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느슨한 삶을 사는 것으로서는 신학의 목적이 성취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엄정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식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각성들은 교회사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교회가 침체에 빠질수록 이 지식과 삶이 이탈되다가 마지막에는 지식까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 18세기에 옥스포드의 ‘홀리클럽’의 표시인데, 소위 말하는 ‘메서디스트(methodist) 운동’이 (이 클럽의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18세기는) 여러분이 잘 아는 존 웨슬레, 찰스 웨슬레, 조지 휫필드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게 되는 시대입니다. methodist라는 말 자체가 영어의 “method”에서 나왔습니다. 이것(methodist)을 감리교 신자라고 번역하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저 사람들이 옥스포드 홀리클럽으로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자고 다짐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까 다릅니다.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을)게 methodist(라고 부릅니다.) 입니다. 그렇게 그 이름이 붙여지게 됩니다. 저런 운동 자체가 결국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실제로 살아가는 삶,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통합해서 아는 것만큼 살고 사는 것만큼 알려고 하는, 그런 지식과 사랑의 일치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통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활용이었습니다.
개혁주의 목회는 특히 이런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해 아는 지식,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과 행동하며 사는 실천, 이것을 모두 하나로 녹여내는 것이 기독교인의 이상이라고 보았고 신학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작업이라고 봤습니다. 또한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이 함께 그 시대에 펼쳐지고 다음 시대에 계승되는 것, 학문적인 지성을 풍성하게 하고 목회적인 실천에서 아주 강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열매들을 거두어서 그것을 다음 세대에 계승해 줌으로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다시 증가된 학문적인 지성과 증진된 목회적인 실천, 혹은 열매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개혁주의 목회에 있어서는 목회자가 고도의 지성을 필요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목사가 학자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 scholar 라는 말 자체를 서구권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I am a scholar.”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중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목회자는 academic, 학문인이어야 합니다.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학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학문적인 지성이 증가하고 이에 따른 목회적 실천도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회의 문제는 이런 전통들이 끊어지면서 신학과 설교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혹은 전도사로 사역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야하는 과정이니까 공부를 하고,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전문가에게서 배워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부지런한 사람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에게 배우려고 해도 어떤 전문가가 그렇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잘 알려진 교회에서 사역하고 싶은데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각자 하는 것입니다. 실컷 3년, 혹은 7년 동안 공부를 가르쳐놓으니까 학생들은 나가서 하는 말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무 쓸데가 없다.” 고 합니다.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결합되어서 신앙의 열매를 맺고 사역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들을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그런 고백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한 편의 설교는 자신이 믿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표명입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저 사람의 사상이 이런 것이구나, 다시 말하면 저 사람이 생각하는 성경적 사상이 어떻다는 것이 표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모든 설교는 신학을 요청하고 모든 신학은 설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설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윤리적인 가르침을 한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은 이 사회에도 아주 많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과 설교가 떨어져 버린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아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에) 힘이 없습니다. “…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뼈대가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 사상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 사회에 대해서 확고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바가 있고 이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세상이 마음대로 어떻게 못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본받지 말고” 라는 말이 “시슈케만티조”(συσχηματίζω)라는 희랍어인데, 붕어빵을 만들 때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팥을 넣으면 붕어 모양이 됩니다. 똑같은 재료를 국화빵틀에 넣으면 국화빵이 됩니다. 그게 “시슈케만티조”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의해서 찍혀내어지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찍을 수 없는 사람이 되려면 뼈대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 그리스도인은 낙지 같습니다. 뼈가 없습니다. 접시에 담으면 누워있고 컵에 담으면 서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에서 신학적인 설교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올바른 신학함'이란 지식과 경건, 경건이 중심에 서고 참된 지식, 그리고 자기가 믿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목양, 이것이 진정한 신학함이 주는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이야기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뿌리가 개혁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복음주의도 이쪽부터 저쪽까지 층차가 크기 때문에 프란시스 쉐퍼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이름만 복음주의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복음주의도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표준적인 복음주의라고 하면 성경, 하나님,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개혁주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주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경우는 개혁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경우, 구라파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이지만 현대 복음주의는 또 하나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주의라고 하는 뿌리입니다. 이것은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에 미국에서 생겨납니다. 그런 노선들이 미국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고 늘 교회사 속에 있었던 것인데 현대 복음주의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결정적인 형성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 이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부흥주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신앙의 체험, 정적인 사상보다는 역동적인 실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관, 이성에 대한 경시, 이런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런 것은 부정과 긍정, 양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 근대 선교운동에 이바지 한 것, 사회 개혁에 공헌한 것, 신앙에 있어서 체험의 중요성 같은 것을 다시 강조한 것, 이런 것들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부정적인 것은 목회자직에 대한 반 지성주의, 유구히 계속되어 왔던 기독교 신앙의 웅장한 지성적인 전통들을 무너뜨리고 아주 감각적인 기독교로 나아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여기 이상한 그림이 나옵니다. 숲속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합니다. 전통적인 예배라고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누가 올라가서 손을 쳐들고 행동을 하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횃불이 타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습니다. 18세기 말 켄터키 지방에 있었던 부흥운동입니다. 멧 리먼 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New freedom, Wonderful freedom”을 이야기 합니다. (이 시기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지성의 자격을 측정하고 제도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사람이 설교를 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통용되었던 방식이었고 이제는 성령의 놀라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모두 넘어서는 놀라운 자유를 주셨다고 하면서 극단적인 성령체험을 강조하고 성직의 질서에 도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가 될 수 있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격을 갖춘 목사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안 머레이 같은 분은 많은 책을 썼습니다. 특히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했던 분이고 청교도 신학과 부흥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이들은 설교를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 두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튀어나와서 설교를 하면 그게 예배가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결국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은 발언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계속 되어왔던 신학적인 전통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조들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19세기 무디의 부흥운동을 이어집니다. 그리고 20세기 오순절 운동, 극단적인 은사주의 운동으로 펼쳐지면서 반지성주의 성향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운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또한 조지 휫필드는 그 당시에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고 에드워즈는 아직 한 교회의 목회자였던 때였는데 조지 휫필드가 와서 부흥강사로 설교를 하면서 사실은 대각성 운동을 에드워즈와 함께 주도하게 됩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조지 휫필드와 상반된 입장에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설교자가 회중들을 주관적으로 충동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충동은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보다는 대부분이 인간의 상상력의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조지 휫필드는 에드워즈의 이의제기를 차갑게 무시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가라고 할 수 있는 조지 마스던 교수는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휫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정직하게 꾸짖었을 때 이 설교자는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채 냉정하게 무시했다. 두 전도자는 굳건한 협력자로 남았지만 가까이에서 사역하기에는 그 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래서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심지어는 회심한 성도들이 전혀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와 함께 있을 수 없고,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를 내보내고 은혜 받은 사람을 목회자로 모셔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적으로 지성을 무시하고 체험과 감정중심으로 흐르는 것의 위험성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한국교회가 받은 중요한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신학을 하려면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구속 사역의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들을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최고의 책이고, 에센스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정수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성경으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구속사역이 세계 역사 속에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구속의 사역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이런 구속사역의 전개가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구속사역이 어떤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왔는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학교에 여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프러포즈를 받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 명에게 프러포즈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학생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까? 기도는 원래 못 생긴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못생긴 사람들은 얼굴 보러 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어서 그저 주님 보는 재미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굴이 예쁘면 사람들이 수없이 와서 대시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왜? 예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보고 결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입술의 말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취하지만 신학생들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취합니다. 어느 청년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네가 이 다음에 목회를 잘하려면 기도 많이 하고 신앙이 좋은 자매에게 장가를 가야한다.”, “목사님, 신앙 좋은 자매 만나서 편안한 길을 걸어가기 보다는 예쁜 자매를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것을 보면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막 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인식, 지각이 생겨날 때 (인간은) 그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하는 중요한 방식이 됩니다.
조지 마스던 교수와 한 5년 전쯤에 만나서 두 시간 정도 강가에서 밥을 먹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대가다운 풍미를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만 읽었고 처음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화를 하면서 우리가 의견의 합치를 본 것이 있었습니다. 목회의 본질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보는 목회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미학적인 사역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깨닫게 하고 탁월하고 뛰어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제가 그 교수님께) “그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목회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라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유명합니다.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가 “Preaching and Preachers”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일주일 동안 특별 세미나를 한 내용을 모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 것입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첫 번째는 “Logic on fire, eloquent reason.”, “설교는 불이 붙은 논리이다.” 두 번째는 “설교란 감동시키는 추론이다.” 둘 다 공통점은 논리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학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설교란 신학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설교하지 않는 설교는 훈화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설교할 때, 어떤 교리를, 어떤 신학을, 신학적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자 하는 명료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관건인데 처음에 소명을 받을 때는 뜨겁고 불타고 목표가 분명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마음이 자꾸 변합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여건이 어려워서 야간 신학교를 다녔는데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 공부를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학생들이 눈물바다가 됩니다. 너무 힘겨운 인생을 사는데 하나님 앞에 정말 자신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 2학년, 3학년이 되면서 마음이 변합니다. 그래서 우리 때 유행했던 말이, “1학년 때는 부흥사의 믿음으로 들어왔다가 2학년 때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평신도가 되고 졸업반 때는 무신론자가 되더라.”였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마음을 거룩한 의무에 묶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명이 유지되도록 하는데 그런 소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리와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영위해야만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나중에 유명해지고 돈이 많이 생기고 더 편안해질 때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소명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4학년, 신학대학원 3학년, 이렇게 7년 동안 학교를 다녔고 DH 과정, 박사과정을 공부했지만 유학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를 할 때까지는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저에게 가르쳐주는 공부는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 그만두고 목회에 전념하고 나니까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이 공부하는 것도 한 번도 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냥 변두리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이고 학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7년 동안은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느냐 하면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을 그렇게 웃으면서 들을 대목이 아닙니다. 총신에 수련회를 두 번 갔는데 학생들이 1500명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엄청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까지 공부하자.” 신학교 기숙사가 한 때 불이 안 꺼질 정도로 학생들이 공부를 해서 실제로 그 학기에 여러 학생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내린 결론이, “아, 이거 못할 짓이다. 김남준 목사 혼자 하라고 해라. 우리는 못 하겠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은 항상 물어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공부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세 번 쓰러졌습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말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80세 인생의 절반이 40세라고 하면 계산을 잘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80세 인생의 중간은 30세쯤 되는 것입니다. 그 뒤는 삶의 질이 매우 나빠집니다. 45세가 될 때까지 저의 평생의 소원은 병원에 입원해서 우아하게 가냘픈 몸으로 성도의 문병을 받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0대에 들어서면서 11년 동안 열 번을 입원하고 9번을 수술했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을 더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인생의 시간표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지금이 공부할 수 있는 적기입니다. 이후에는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목회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저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 거기서 삶의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세계가 너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무한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은 살 수 있는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더구나 몸까지 아프니까 깎아 먹는 것은 설교하는 시간을 깎아 먹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시간을 깎아 먹습니다. 너무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가끔 책꽂이 앞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 많은 책들이 있는데 내가 읽은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5만 5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 다 읽는데 얼마나 걸릴까 계산해보니까 340년이 걸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내가 읽은 것이 일부라면 이 세계에 있는 책 중에서 내가 읽은 것은 얼마나 적을 것이며, 인간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 속에 나는 얼마나 작은 부분만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를 조금 한 사람들이 교만해지지 진짜 많이 공부를 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가 정말 비감할 정도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껴도 거기에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순자라는 사람이 “순자”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의 “권학편”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功在不舍” 騏驥는 천리마인데, 천리마가 한 번 크게 뛴다고 할지라도 열 걸음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노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騏驥”라고 생각하지 않고 “駑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읽고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우둔한 사람이라서 배웠다가 잊어버리고 배웠다가 잊어버리는 사람이구나.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을 때 나는 두 번 읽고 다른 사람들이 열 시간 잘 때 나는 여섯 시간 자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데에 시간을 많이 소비할 때 나는 간단하게 먹고 공부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교만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쓴) 이 사람이 천재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칼빈이나 내가 존경해마지않는 존 오웬 목사님도 탁월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어거스틴의 책을 읽으면서는 이 사람이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백록”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백 번을 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백록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라틴어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정말 천재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고백록에 감동을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 어거스틴은 누구인데 저렇게 천재로 만드시고 나는 누군데 열심히 공부해야지만 겨우 저 사람의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이런 사람으로 나를 만드셨습니까?” 6개월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었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런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속성과 그 시행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일부만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높고 위대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다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역량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을 통해 거룩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삼각관계 속에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영혼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만, 이런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목회자들도 한때는 예수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구도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를 깨닫습니다. 눈물로 자신이 깨어지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으로 삼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교회가 성도들이 함께 사랑하고 자신의 현존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말, 글, 삶, 그리고 행동,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그 아름다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목회란 죄와 타락으로 추루하게 된 것, 그리고 창조주가 부여한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별해서 이 세상 속에 있는 더럽게 된 것들과 하나님이 본래 부여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뒤섞지 말고 그것을 잘 나누어서 이런 것들은 미워하고 싫어하고 바꾸지만 하나님이 본래 부여하신 본래적인 선과 아름다움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린아이 때부터 배워나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가 교회에 가면 잘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온 땅과 세계에 가득하지만 인간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신앙과 학문, 지성,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온 몸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고 목회는 그 길을 돕는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 갈 시간입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입니다. 신앙은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고 삶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듭니다. 믿음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자로 서 있는 것이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이고 관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신학 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건축, 법학, 이런 모든 분야들을 함께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창조세계 안에 두신 아름다운 질서들을 배워야 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시 조화롭게 연관 지을 수 있을 때 거기에서 인간의 삶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물려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는 경건이라는 나무를 자라게 하고 이것을 세상에 확산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지식을 전달하시고 인간의 모든 섬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지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갖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결론.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에 신학은 사랑스러운 학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최고의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공부해서 자기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이 세상도 아름답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