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요일3:14) 2006.3.5 주일오전 1
2. 복음의 증거, 사랑(요13;34-35) 2006.3.12 주일오전 18
3. 사랑의 뿌리, 겸손(빌2:3) 2006.3.19 주일오전 33
4. 서로 존경함(고전 3:16) 2006.3.26 주일오전 46
5. 나눔의 정신(행 4:32) 2006.4.2 주일오전 60
6. 함께 드리는 기도(행4:24) 2006.4.9 주일오전 77
7.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1)(마18:15) 2006.4.30 주일오전 90
8.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2)(마18:15) 2006.7.12 주일오전 107
9.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3)(눅6:41) 2006.7.9 주일오전 127
10. 공동생활과 교회봉사(롬12:10-11) 2006.7.16 주일오전 138
11. 공동생활과 화해(요일3:15) 2006.7.23 주일오전 154
12. 공동생활과 복종(히13:17) 2006.7.30 주일오전 177
성도의 공동생활 1
I. 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 (06/03/05)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1. 들어가는 말
A. 본문해설
B. 성도의 공동생활
2. 기독교적 생활의 핵심
A. 그 사랑의 시작
B. 신자의 일생-애덕의 삶
3. 영원히 남을 사랑이 시작되는 곳
A. 교회와 공동생할
B.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함
1)하나님을 사랑함
2)이웃을 사랑함
4. 극복해야 할 것들
A. 자기본위의 교만-참회
B. 성찰이 없는 생활-정사
C. 이기적 자기 사랑-희생
5. 결론과 적용-영원히 남을 사랑
II. 복음의 증거, 사랑 (06/03/1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1.본문해설
2. 복음의 보이는 증거
A. 성도의 공동생활
1)공동체의 혼: 예수 정신
2)성도의 교통: 수단이 아님
B. 서로 사랑함
1)좋아함
2)희생함
3)헌신함
3. 성도간의 사랑
A. 자연적 선의가 아님
B. 하나님께 전심함
1)모든 섬김의 뿌리
2)여럿이 한 삶을 살게 됨
4. 결론과 적용
III. 사랑의 뿌리, 겸손 (06/03/19)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1. 본문해설
2. 교만: 타락의 원인
A. 죄와 교만
1)원죄에서
2)실행죄에서
B. 공동체적 삶의 파괴
3. 겸손: 구원의 방법
A. 그리스도의 성육신
B. 공동체를 세우심
4. 사랑의 뿌리: 겸손
A. 존재의 질서를 숙고함
1)존재의 질서
2)인간의 타락
B.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
C. 은혜를 받음
5. 결론과 적용
IV. 서로 존경함 (06/03/2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1. 본문해설
2. 성도의 몸이 성전임
A. 성결한 삶
B. 서로를 존귀하게 여김
3. 상호 존경의 정신
A. 자연적 이점이 아님
B.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봄
C. 야망과 경쟁 대신 사랑과 존경을
4.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들로 살아 감
V. 나눔의 정신 (06/04/0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1. 본문해설
2. 성도의 공동생활과 물질
A. 물질을 경멸치 않음
B. 누림과 절제 사이에서
C. 참된 가난함
1)소유하지 않음이 아님
2)나눔으로 가난해짐
3. 청결한 마음과 공동생활
A. 탐욕을 버림
B.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 됨
4. 결론과 적용
VI. 함께 드리는 기도 (06/04/09)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행 4:24)
1. 본문 배경
2. 성도의 공동생활과 기도
A. 하나님을 바라봄
B. 기도와 일치
1)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2)공동체의 관심사를 품음
C.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3. 결론과 적용
VII.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 교정 1 (06/04/30)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1. 본문 배경
2.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A. 성도의 잘못
1)윤리적 잘못
2)교훈적 잘못
B. 형제교정의 필요성
1)형제 자신을 위해서
2)세상을 위해서
3)교회를 위해서
C. 형제교정의 원리
1)명예를 보존함
2)사랑과 용서의 정신
3)견책 받지 않을 때(마 18:16-17)
3. 치유와 일치를 이룸
4. 결론과 적용
VIII.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 교정 2 (06/07/02)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1. 형제 교정의 정신
A. 깨우침
B. 고치게 함
1)인격적 신앙
2)은혜의 필요
2. 형제로부터 권고 받을 때
A. 들음- 자기를 성찰함
B. 돌이킴- 죄를 회개함
1)개별적 죄에 대해
2)총체적 죄에 대해
3. 온전해지길 사모하라-그리스도의 마음으로
4. 결론과 적용
IX.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 교정 3 (06/07/09)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1. 본문 해설
2. 형제를 교정하는 자의 위험
A. 다른 사람의 결점을 봄
B. 사랑을 유지하기 어려움
C. 자신의 처지를 잊게 됨
3. 형제를 교정하며 온전해지는 길
A. 자신을 돌아 봄
1)교정하기 전
2)교정하는 도중
3)교정한 후
B. 자신에 대해 공정해짐
C. 교정의 동기가 사랑이게 함: 은혜의 필요
4. 결론과 적용
X. 성도의 공동생활과 교회 봉사 (06/07/16)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1. 본문 해설
2. 교회의 존재 이유: 하나님, 세상, 교회 자신
3. 교회 자신이 섬김을 필요로 함
4. 섬김으로 입증되는 까리따스
A. 형제들 안에서 하나님을 봄
B. 사랑과 목표의 일치
C. 사랑과 희생의 욕구
5. 결론과 적용
XI. 성도의 공동생활과 화해 (06/07/23)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1. 본문 해설
2. 미움과 영혼의 상태
A. 미움의 감정
B. 미워하는 자의 영혼
1)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함
2)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부함
3. 공동생활과 미움
A. 공동생활과 일치
B. 말: 다툼과 미움
C. 화해의 필요
1)분노와 증오
2)미움과 기도
4. 화해와 관용의 삶
5. 결론과 적용
XII. 성도의 공동생활과 복종 (06/07/30)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1. 본문 해설
2. 공동생활과 하나님의 통치
A. 하나님의 두 통치
1)자연적 통치
2)도덕적 통치
B.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
C. 하나님이 통치하심
1)진리를 통해
2)질서를 통해
3. 통치 질서의 본질: 하나님의 의지
A. 신자 각 사람에 대해
B. 교회 전체에 대해
C. 세상에 대해
4. 교회의 질서와 목양
A. 목양하는 사람을 세우심
1)영혼을 돌봄
2)연약한 인간임
B. 양들로 복종케 하심
C.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5. 결론과 적용
성도의 공동생활 1
1. 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랑에서 사망으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에 거하느니라”(요일3:14)
I. 들어가는 말
A.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요한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속에서 그는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사랑이 바로 우리가 진실로 영혼이 구원받은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영지주의라고 하는 초대교회의 최대의 이단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신비사상이 만나 어우러진 특이한 이단 영지주의는 구원을 영적인 깊은 지식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영육사이에 뚜렷한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고 인간의 참된 구원은 고상한 영혼의 지식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두 토막으로 삶을 나누었으니 영혼의 삶과 육체의 삶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게 되었고 이것은 물질 잊고 사는 육신의 삶을 아주 하찮게 평가하여 비윤리적인 삶을 아랑곳하지 않는 도덕적 허무주의를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참으로 자신의 육신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이 육신을 가지고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런 정신들이 현저히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원론적인 신앙은 언제든지 우리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이것이 균형 잡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중요한 교리적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줄을 아나니” 무엇을 통해서? 성도를 사랑함으로서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아나니, 두 번째 나오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은 영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개인적인 신앙이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예수를 더 잘 믿으려면 사랑을 베풀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꾸로 만약에 너희에게 형제를 향한 참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영혼은 아직까지 사망 중에 머물러있는 것이라고 아주 명증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발언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 하는 말씀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즉, 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면 그 나무를 알게 되듯이 그가 참으로 영혼이 구원을 이룬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교회이고 이 공동체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동시에 전도도 하고, 그리고 병자도 고치고 이렇게 하기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그것은 제자들을 일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를 이루고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이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B. 성도의 공동생활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셔서 이루신 삶이 공동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또 한 번 모상으로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당신이 가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하신 그 일들을 제자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한 원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오시자 제자들은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공동생활을 했던 것처럼 그 성령님과 함께 그 공동생활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특별히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들로 인하여 믿게 된 사람들 중에 상당수 사람들이 그렇게 사도들의 발 앞에 소유를 두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자기의 소유가 없이 함께 철저히 나누며 공동생활을 하게 하셔습니다.
이후로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그런 종류의 공동생활들이 어느 정도 재현된 것은 사실이고 이런 것들이 가장 본격적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4세기경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던 말하자면 수도원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한 장소에서 함께 먹고 자며 사는 이 공동생활의 방식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구현되어야 할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생활의 원리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을 통해서 이 사실이 모두 입증되는데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창조명령 중에서 특별히 문화명령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명령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인간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에 충만하도록 말씀하셨으니 그들에게 가리키는 바는 함께 모여서 사는 공동생활이 아니라 흩어져 정복함으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이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우리들에게 주신 대위임령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쳐 또한 그들로 지키게 하라는 분부의 말씀을 그들에게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신약의 교회가 모이던 교회에서 이제는 흩어지는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8장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흩어지지 않은 성도들을 큰 핍박을 통해 사면에 흩으심으로 사도들 이외에는 모든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사면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는 위임명령을 완수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여러분들이 비록 함께 모여서 사는 이 물리적인 한 공간을 사용하는 공동생활이 아니고 이렇게 예배를 드린 후에 모두 흩어져서 한 가정을 이루고 한 가정에 소속되어서 사는 이런 교회생활 자체가 절대로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고요한 교회의 공동생활의 차원을 비껴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비록 물리적인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생활은 영구히 불변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법칙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원래의 공동생활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정신들이 유지되어야하며 그것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참으로 교회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모이는 교회의 공동체의 중심이 무엇일까요? 이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며 그리스도 예수의 그 정신이 그 바로 공동체를 참으로 예수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혼이요,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사랑의 중심축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서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 자신이 예수의 정신으로 충만해져서 그 공동체 속에서 예수 죽음의 정신을 구현해 나아갈 수 있을 때 그 공동체는 비로소 그 회원 각자 각자의 지체 의식을 통해서 지체의 유대와 연결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과 동일한 공동체의 예수의 혼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은 철저하게 신자들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 교회에 다니고 또 봉사도 하지만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뱉어버리고 다른 교회를 찾습니다. 또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기에게 요구하는 희생보다 그 교회에서 얻는 것이 작다고 느껴질 때 그때 요구받는 희생을 거절하고 그리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는 환경으로 떠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생각과 다를 때 자기의 주관에 맞는 교회를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매춘행위에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에 개인의 영혼은 파괴되고 교회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은 잃어버리는 것이 그는 바로 이 공동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지체로서의 혼과 정신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공동체여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었고 그것은 여러분들을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 때도 가족이고 흩어져 살 때도 가족인 것처럼 또한 교회는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도 한 교회이며 흩어져있을 때도 한 교회이고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 죽는 그 순간, 아니 더 엄밀하게 얘기해서 죽은 그 순간 영원이 끝이 나지 않는 그 영원과 영원 속에 이르기까지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공동체 속에서의 일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정신을 자신의 교회생활에 바로 새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리하는 양떼와 같이 곤고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이따금씩 은혜를 받고 또 여러분들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연초에 여러분도 아다 시피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12월 달마다 불만이 있는 교회를 연말에 옮기고 싶어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겨울 사경회에 집중적으로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은혜를 받으면 등록을 하는데 그때가 열린 교회의 대목입니다. 제일 많이 등록을 합니다. 사경회가 끝나면 교인이 한 1-200명 정도 늘어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러분 제가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를 다니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집어치우고 고개를 빼고 기웃기웃 다른 교회나 찾고 그따위로 신앙생활을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이 되겠는가. 들은 바대로 여러분들이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열린 교회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고 듣는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게 이 교회를 좋아하기까지 싫어하는 교회가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나를 존경하고 좋아하기까지 미워하던 목사님이 계셨을 터인데 그 교회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 목사님은 얼마나 늘 괴로웠을까? 그래서 늘 마음에 항상 고통이 됩니다. 그랬더니 그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첫날 설교 듣고 응답받았다고 다 자기네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열심히 전도한 교인들은 썰렁했습니다. 방황하기에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은혜를 받으라고 그랬더니 첫날 나오고 나서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그러고 자기들의 교회로 다 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 그랬습니다. 끝까지,
물론 하나님이 옮기게 하실 때도 있지만 교회의 상처를 입히는 자들이 되지 말라고 그랬더니 문제는 이번에는 열린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와야지 되는가봐. 옛날에 그 교회에 엄청 상처를 주고 왔는데. 그러면 대답이 가면 이 교회는 또 상처를 또 줍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가면 또 오려고, 그런데 언제 오려고 하는가 하면 그 교회에 가서 좋을 때 다시 오려고 하는 게 아니라 힘들고 괴로울 때 내가 이 교회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열린 교회에 상처주고 왔는데 다시 가서 고쳐야지 되나봐. 그러면서 떠나면 그 교회에 또 왔다가 또 가면 또 상처를 입습니다. 그게 뭡니까? 한번만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하니까 결혼을 하고도 아주 쉽게 이혼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렇게 진지하고 생각 있고 신중해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무지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진 실패에 대한 최고의 숙제는 다시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말고 이곳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불러주시지 않는 한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담임목사의 품에서 눈을 감겠다. 말이 안 되지, 여러분들의 나이가 몇인데 그렇지요? 말이 안 되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게 바로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야 할 교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본받으면 안 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설교를 듣고 한참 은혜를 받다가 요즘은 그 설교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보따리를 싸는 것이 이게 미친 짓이지 그게 저 같은 죄인의 마음에 항상 달콤한 설교면 그게 설교입니까? 그게 똥이지. 그런 게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싫어할 때가 되면 수많은 교회에 흠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은 교만이 되고 봉사한 것들은 자기의 의가 되고 그리고 지체들을 섬긴 것은 자신의 과거의 화려한 전력이 되어서 주님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교만의 장벽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방황하고 인생을 사는데 너무나 추루한 인생입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교회가 아니어도, 목사님이 학위서가 없어서 뛰어난 지성을 소유하지 못하셨어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목사님 아래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그 모든 지체들의 부족함을 자신의 넘치는 것으로 채우면서 사랑하고, 존경하고, 우애하고, 헌신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II. 기독교적 생활의 핵심
A. 그 사랑의 시작
설교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한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독교 적인 생활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생활에 핵심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사랑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전에도 가졌던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래도 사랑했는데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좋아서 한 사랑이었으니 여러분들의 자기 사랑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랑했는데요. 그럼 묻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할수록 기쁜 사람 말고 사랑할수록 아픈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가시엉겅퀴를 깊이 끌어안을수록 온 몸에 피 자국이 나고 가시에 찔려 선혈이 흐르는데 그래도 끌어안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중에 사랑은 육신의 사랑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생활의 핵심으로서의 사랑은 휴머니즘적인, 이중적인, 인도주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획득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예수 믿을 이유가 없으면 절대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는 인생들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혼자 살려고 하지 주님과 함께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한계가 오게 됩니다. 이제 이 어두운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갈 수 없어서 이제 누군가를 의지하기로 결심하는데 복음을 듣고 그렇게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보다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혼자 살수 없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나아갈 때 그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깊이 참회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아가폐의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본 적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죄인 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 앞에서 이제는 내가 주님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까지는 자기 사랑 때문에 나왔지만 이제 이 아가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내 마음에는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에서 나오는 위대한 고백이 여기에서 언급되어집니다. 오! 영원한 빛이시여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며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시며 자신에게 알려주시며 자신이 사랑이시나이다. 아멘,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아가페의 반응으로서의 또 다른 사랑의 모상이 이 가슴속에 새겨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지순의 사랑, 혹은 온전한 사랑, 즉 온애의 사랑이라고 번역될 수 있으니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가득 생기게 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인데 그 사랑이 가슴에 콱 차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거듭나지 않은 인간,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공동생활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그 진정한 공동생활의 사랑에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B. 신자의 일생-애덕의 삶
그래서 성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애덕의 삶입니다. 애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목표를 일치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일치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향해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가 창조의 목적에 득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렇게 창조의 목적에 덕을 이루는 삶을 가리켜서 애덕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삶, 이것을 가리켜서 애덕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애덕의 삶을 향해서 인간은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해질 수 있고 또 그 행복이 인간의 일생으로부터 끝나는 한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모든 표상과 변천하는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영원을 향하여 잇대어 지는 행복이며 그런 행복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이웃을 그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애덕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사랑의 싸움입니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것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바로 이런 사랑을 소유하고 받은 바 그 사랑을 증진시키고 그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덕성스러운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목적을 자신의 존재의 가치로 합일시키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도록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애덕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런 애덕의 삶을 최초로 실천하고 이루어가는 공간이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공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지체들을 열심히 섬기다보면 우리 핏줄들에게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에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교회에 와서만 이렇게 하는 것을 보니 제가 위선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맺어진 이 핏줄은 아버지의 피를 받아 이루어진 육신의 핏줄보다 소중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혈육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헌신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 즉시 예수의 몸에 연합되어서 이런 공동생활을 이어가게 되는데 물리적으로 공간적으로 헤어져있을 때도 여러분들은 하나의 공동체이니 주일은 모여서 공동생활을 이루고 평일에는 흩어져서 공동생활을 이루는 것이니 그 공동생활의 정신은 시종일관 흩어있을 때나 모여 있을 때나 동일하게 여러분의 영혼의 마음 안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III. 영원히 남을 사랑이 시작되는 곳
A. 교회와 공동생활
1. 교회
그래서 이 교회는 영원히 남을 사랑이 실현되는 최초의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남을 사랑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모두 표상에 매인 사랑이니 사물들이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듯이 그 사랑도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합니다. 이런 사랑은 영원을 향해 의미를 가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은 시간 안에 공간 안에 매이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계속될 영원에 속한 그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 그 영원한 사랑이 이 교회라고 하는 인간 속에 심겨지는 것이니 그 사랑을 따라 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사람으로 산 사람들이며 그 사랑을 따라 살게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사람답게 산 사람이 아니니 그들이 각자 어떻게 살았든지 그 살아온 결과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각인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2. 공동생활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범위를 좀 더 좁혀서 교회와 공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공동생활의 정신 속에서 공동생활이 구현되는 것이니 이 공동생활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지체가 된 사람들로서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여러분들을 구워내 놓으신 목적입니다.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니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여서 이렇게 자기네들만 즐거워하는 것이 다냐고 반문하지만 그래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반론입니다. 물론 이 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즐거워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섬김이고 잘못된 교제이고 이미 그런 공동체가 나눈 이 교제는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적인 교제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성도가 성도를 깊이 사랑하며 이렇게 화목하게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동생활은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교제를 이용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 자체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동일한 공동생활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았으니 이것을 잘하면 여러분들이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합당하게 사는 것이요, 이것을 못하면 못하는 것만큼 여러분들이 망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공동생활의 정신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공동생활을 해나가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늘날과 같이 개인주의화된 시대에는 가슴에 깊이 칼로 새겨야 합니다. 칼로 새겨서 여러분의 가슴속에 아로새겨 넣어서 지워지지 않게 만들어야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교회의 상처를 입히고 떠나 자신의 영혼도 쓸모없이 버려진 채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핏기 잃은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오늘 새벽에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났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잘못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미숙한 지체들의 분별없는 행동 때문에, 때로는 목회자인 저의 인격적인 결함과 한없는 부족 때문에 상처를 입고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우리들이 너무나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들입니다. 두 번을 반복하겠으니 가슴에 새기든지 기록을 하든지 하십시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만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한 영원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되는데 너무 무분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을 열어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더러운 언어들, 말이 아니라 차라리 변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그 잘못된 말들이 배설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말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말에 의해서 시험을 불러일으키고 그 작은 혀가 수많은 형제들의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난 성격, 그리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인격, 회사 같은 곳에서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단칼에 그 교제 권에서 소외당했을 그 행동들을 강제력이 없는 교회라고 생각하면서 서슴없이 행동하고 반성하지 않는 그 후한 무치함과 뻔뻔함, 그리고 조잡하기 이를 때 없는 그 인격들, 심지어는 성도들의 사랑과 교회의 은혜를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 하고 그리고 순진한 성도들에게 악을 행하는 그 야비한 행동들은 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한 악이고 하나님은 그런 악을 행하는 각자를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지켜보시지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다루실 것입니다.
* 인칭적인 악과 비인칭적인 선 그러나 그대들의 가슴에 새기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사실입니다. 그러한 하나하나가 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런 지체들이 교회에 있다고 하는 것은 선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철학적인 용어로는 인친적인 악이 비인칭적으로는 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명제를 구상합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15년 전에 WHO가 지구상에는 천연두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지 않습니다만 저희 어렸을 때만해도 천연두 예방주사를 꼭 맞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리에 나아가면 곰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가 많았습니다. 천연두 예방주사는 굉장히 무서운 예방주사입니다. 한번 맞으면 3-4일씩 앓고 심지어는 일주일 넘게 신열이 나고 어떤 아이는 그것을 맞고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이 그것을 맞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맞추지 않으면 천연두에 노출이 됩니다. 그때 많았으니까 아프더라도 그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멀쩡한 아이에게 천연두 균을 젖소에서 뽑아서 그 생균을 집어넣으려 합니다. 그 균은 그 아이에게 악입니까, 선입니까? 한국말로 물어보는데 왜 말을 못합니까? 악입니까, 선입니까? 선이면 많이 맞으십시오. 아니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까? 아니 그 멀쩡한 아이에게 균을 집어넣는데 그 균이 선이냐고 악이지, 악입니다. 그런데 그 균이 그 몸에 들어가면 온 몸에 백혈구를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백혈구가 총출동을 합니다. 그래서 들어온 균하고 집요하게 맞붙어 싸우다가 장렬하게 수많은 군사들이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 시체가 고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깁니다. 이기고 나면 온 몸에 세포들이 이 균에 대한 저항력이 생깁니다. 일평생동안, 그러면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그 아이에게 균이 들어온 것이 선입니까, 악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자는 인칭적으로는 악이다. 그러나 후자는 인칭적으로는 선이라고 하는 명제를 불러옵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에게 교회 안에는 그런 조잡하고 야비한 인격을 가진 심지어는 범죄 하는 지체들이 있는 것이 어떻게 비인칭적으로 선이 되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논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런 설명을 들면서 여러분들에게 조금 지각이 있다면 아마 이런 질문을 논리적으로 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잘못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에 상처를 주는데 그것은 악이지만 나의 이런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 교회에 선이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내가 그 선을 위해서 기여하는데 왜 하나님 앞에 개별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비겨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칭적인 악을 비인칭적으로 선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렇게 된 것이지 자기가 모난 인격과 야비한 신앙생활의 태도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할 때 이 교회의 성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가 악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도에 비추어볼 때 그 사람은 상 받을 일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이 점을 못 박고, 그러면 입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내 주위에 나를 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를 즐겁게 하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함께 사랑하고 함께 좋아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아까운 것이 없으니 혹시 나에게 장기가 필요하다면 나누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성화에 있어서 이 사랑을 완성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도 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니 감히 그렇게 단언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내심으로서는 사랑에 상당한 경지에 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언젠가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교회 안에서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묻히거니와 교회밖에 세상에서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그 사람은 심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주의 영광은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여태까지 내가 상대해온 모든 지체들과는 틀린 매우 유별난 인간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이 인간은 사랑받지 않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하는 짓마다 사랑을 못 받을 짓을 골라합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기 힘듭니다. 사랑을 못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저 사람에게 잘못된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사랑하려고 애썼던 나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를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생각이 없는 성도라면 그냥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 잘났다, 네 인간 없는 것으로 치고 내가 뭐 너 하나 보고 교회에 다니냐? 너 말고 성도는 많다. 나만 널 싫다는 것이 아니라 다 싫다고 해. 임마. 누가 잘못했는지 가서물어봐, 임마. 어디 거지같은 게 와서 닫힌 교회로 가든지 말이지. 그렇게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랑할 수 없는 지체를 만날 때 깨닫게 됩니다. 아! 내 사랑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이 형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구나. 내 사랑이 여기까지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그도 사랑하라. 성경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그가 원수는 아니잖아요. 그도 사랑하라고 하는데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에게 고착되어서 그를 즐거워하려는 마음과 정신이 사랑이라고 그랬는데 그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즐거운 게 아니라 고통스럽습니다, 끌어안으면 끌어안을수록 괴롭고 아픕니다. 그런데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지점에서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이제껏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많이 희생하지만 알고 보니까 그것은 희생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좋아하는 보람을 따라서 한 것이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도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제 앞에서 자신에게는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을 사랑한 과거의 경험이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자기는 내심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그가 나타나서 자기의 사랑의 가식 밑에 깔려있는 미움과 질투 원한과 복수심, 야비함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들이 모두 떠오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서 한없이 아파합니다. 예전에는 사랑할 수 없는 못된 지체 때문에 마음 아파했는데 지금은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안에서 사랑 없음을 인해서 아파합니다. 이게 성화를 위한 보약입니다. 아주 놀라운 보약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그동안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지체들에 의해서도 드러나지 않은 자기 안에 있는 잔인함, 무정한 마음,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 희생하기를 싫어하는 교만 이런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그런 것들이 많은 성도들이 각자각자 그런 경험을 하면서 자기의 사랑 없음을 회개한다면 그런 형제가 교회에 있는 것이 선입니까, 악입니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일수록 그런 사람들을 반드시 두십니다. 여러분들의 구역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사랑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은 아프지만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다른 구역에서 안 주시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오늘 저녁에 모두 한사람을 찾아가서 네가 선물이래, 그러지 말고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그 형제는 감동을 안 받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오늘은 그 형제가 선물이지만 어제는 내일은 그 형제에게 여러분들이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구역장에게 요즘 어때요? 그러니까 목사님, 그 형제가 옛날에 내가 하던 것과 똑같이 합니다. 그러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종류의 사랑의 아픔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바다에서 진주조개를 잡습니다. 진주조개를 열어보면 그 속에 작은 알갱이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몇 번 그 조개를 열어봤습니다. 그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자연 진주가 귀한 이유는 모든 그것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금 팔이 같은 작은 것이 들어가서 살을 찢고 그것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호르몬 같은 체액을 분비해내면 그 결정들이 자라면서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형제가 있는 것은 찌르는 가시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계속 은혜를 만들어내면서 진주처럼 영글어갑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지체가 잇는 것이 아프기는 하는데 역설적으로 그 아픔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그 큰 백합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터키에 가서 보니까 백합은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꽃입니다. 키가 아주 낮고 그저 아주 작은 새끼 장미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풀에 붙어서 피어납니다. 그리고 옆에 가시들이 자랍니다. 겨울이면 그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엄청난 바람이 몰아칩니다. 그 바람에 막 휘둘리면서 가시에 찔립니다. 그럴수록 거기에서 향기가 진동하며 납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의 성화에 그렇게 도움이 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아프게 한 사람, 충분히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었지만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한번 해보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해서 그런 형제가 있는 것이, 그런 자매가 있는 것이 교회에는 말할 수 없이 귀한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계속 선물로 남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의 지적인 성장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성숙해져도 또 다른 선물은 교회에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B.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함-하나님을 사랑함, 이웃을 사랑함
1. 사랑과 정의의 조화
이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지성적으로 혼란을 경험하는 대목이 나타납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조화를 시킬까 하는 문제입니다. 자, 그런 형제가 악을 가지고 있어서 악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을 판단하고 그로 인해서 교회가 상처받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정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의는 판단을 하고 조치하라고 그리고 사랑은 베풀어주고 감싸주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완성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별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그 정의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역사에 길이 남을 아주 명언을 이 점에 대해서 남깁니다. “한사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신이 만약에 한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 다음에 네 마음대로 해도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설교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마음 안에 하나님 이외에 그 누가 있을지 대답해보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회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성경을 읽다가 횡제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그 약속을 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인데 정말 모든지 구하면 다 들어주는 거야. 그런데 앞에 부분이 우울하게 만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그 조건이 얼마나 어려운지 뒤에는 있으나 마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사실 또 그렇게 어려운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 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연합을 가리키고 그 연합이 실제적인 연합을 사랑을 통해 완성합니다.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종해야겠다는 영혼의 온전한 복종이 그 사람의 마음에 꽉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 그렇게 된 사람들은 절대로 허튼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비유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아까 2부 시간에, 부인과 남편이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남편이 돈이 많습니다. 부인이 묻는 게 여보, 나 사랑해? 사랑하지, 마누라가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당신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어. 정말 나를 그렇게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그럼 어떻게 보여줄까? 아! 좋아. 당신 모든지 말해. 내가 모든지 다해줄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지 내가 말하기만 하면 내 소원을 들어준단 말이지. 그럼, 그러면 내가 그전에 당신에게 확인할 게 있어. 그게 뭔데.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한단 말이야. 그럼, 저는 당신밖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말해.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게. 그렇게 물어볼 때 부인이 유산만 남기고 빨리 죽어줄래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한다면 그렇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2.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
이런 식으로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어갑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정의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죄에 대해서 불변하는 말씀의 척도를 정확하게 재야합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고쳐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 형제적 교정입니다. 이것은 다른 시간에 별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미루더라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죄들을 치열하게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죄에 대한 판단이 아주 뛰어난 정의의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은 올바른 정의 있는 판단을 하는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정의 모두 둘 다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죄를 정확히 판단한 다음에 그 죄는 치열하게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비난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죄와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오히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그가 그 죄의 피해자라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깊이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IV. 극복해야 할 것들
A. 자기 본위의 교만-참회
그러면 이제 이런 온전한 사랑으로 애덕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이 가장 시급히 극복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 본위의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자신이 판단하는 사물들의 질서의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은 필연적으로 자기 본위의 생활태도를 갖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모든 것 중심에 자신이 서있고 자신의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이루어지고 그 질서에 굴복하지 않은 것들은 미워하거나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공동체의 일치를 깨트리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치가 이런 식으로 깨트려지게 됨으로서 그는 공동체에 상처를 입히게 되고 그로 인해서 몸 전체를 상하게 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한 지체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고통을 느끼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범죄입니다.그래서 교회에서 보면 정의를 앞세우고 자기의 본위의 태도를 가지고 교만하다가 자기가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커다란 죄를 짓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깊이 참회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자기 본위의 소망이 교회에 상처를 더하고 공동생활에 일치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데 이것은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니 깊이 회개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절대로 이 교회의 본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기는 타인 본위의 삶을 성취하고 그 타인 본인의 삶이 그리스도 본위의 삶에 기여하도록 그렇게 바꾸어진 질서 속에서 생활하게 됨으로서 이런 교만의 해학들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라고 하는 샘물은 자기를 끊임없이 꺾는 아픔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일 수가 없고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 속에 혹시 사랑의 인격이 솟아난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샘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B. 성찰이 없는 생활-정사
두 번째는 성찰이 없는 생활입니다. 이 성찰이 없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만 사랑에 원리를 따라 살지 못한 굽은 삶은 기억에서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애써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오랜 세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의 경건생활에 경험으로는 사유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과 거의 같은 길이가 되면 좋겠다, 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잘 살필 때 올바른 것을 구함으로 기도생활의 효율을 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할 때 자기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에 그것을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분주하게 살지만 항상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셔야 됩니다.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혹은 묵상을 하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지혜자적인 사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 없는 사람인가를 깨닫고 다시 자신의 삶에 칼을 대는 것입니다. 치료의 칼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찰 없는 삶은 자기의 생활에 꼼꼼히 살피는 정사의 실천을 통해서 극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C. 이기적 자기사랑-희생
마지막 세 번째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온전히 지체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희생의 정신입니다. 이 희생의 정신은 우리 자신의 용력으로서 발휘하는 희생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없이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희생은 그 못된 지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희생의 근원은 예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저렇게 내가 사랑하기에 힘들어 보이는 저 지체를 위해서도 예수 생명을 주셨기에 그 구원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영혼의 가치를 깊이 인정하는 가운데 발휘하는 희생이니 이 희생은 사람 앞에 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 하는 희생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기는 죽이고 지체는 살리고, 자신은 깨트려지고 지체들에게는 그 깨트려짐으로 유익을 얻고 지체들이 자신의 명예는 더럽혀도 자신은 그들은 존중하게 되는 그런 철저한 섬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잠시 살다가 가는 이 세상에 구간에서 보면 그렇게 사는 삶이 어리석은 삶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영원히 남을 사랑이 이곳에 실현되는 것이니 그 사람이 모난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의 골방에서 홀로 삼킨 그 많은 흘린 눈물과 끌어안을수록 아픈 그 순간들을 주님께서는 낱낱이 생명책에 기록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상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의 모습을 본받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가는 가운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여러분 안에 예수의 인격을 품은 사람들로 성숙하게 되어서 결국은 그 악한 형제와 자매들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주님의 사람들로 빚어질 것이니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칭적인 악을 비인칭적인 선으로 사용하셔서 결국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까리따스를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사랑 안에서 승리하게 하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것을 훈련하는 기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사랑을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면서 빈민들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 가서는 장엄한 사랑의 삶을 살고 싶은 결심에 들뜨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사랑에 관한 유치한 감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상이나 판타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이고 그리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깊이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희생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은혜 그 자체의 정체가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스스로 놀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참을 수 있지. 어떻게 내가 이 고통 가운데 용서하고 참을 수 있지.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서 뼈 빠지게 고생할 때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끌어안고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은 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끌어안을수록 아프고 사랑할수록 미움의 메아리가 들려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심으로 이루어진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러면서 사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큰 은혜의 만져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루만지십니다. 그래. 네 마음속에 내 사랑이 있구나. 너 혼자였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런 사랑이 네 안에 있었구나. 내가 너를 안다. 네게는 없는 내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많은 날 골방에서 혼자 울고 끌어안을수록 가시같이 아픈 사람을 생명처럼 여기며 그 아이를 예전에 누구도 그렇게 사랑해준 사람이 없었단다. 네가 나의 분신이 되었구나. 네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사랑으로 참여했구나. 이런 음성을 듣게 해주십니다. 그런 사랑을 그 못된 지체가 어디에서 받아볼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는 쫓겨났을 것이고 회사에서는 잘렸을 것입니다. 가족에게는 가족들이 버렸을 것입니다. 동기간은 의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는 사람의 피보다 진하고 그 피는 물보다 더 진합니다. 사람의 피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맺어진 교회 안에서 세상에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마지막 지점에 있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는 아파도 그 지체는 편안하게 해주고, 나는 모욕을 받아도 그의 명예는 보호해주고 그런 사랑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을 구현하면서 사는 것이 이 공동생활의 목표입니다. 수단이 아니라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를 끌고 자꾸 어디로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훌륭한 목표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나아가 그렇게 고쳐지지 않았더라면 용서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을 우리들이 매일매일 이 세상에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핍절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사랑을 받을만한 이점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새처럼 날아서 가시와 같은 그들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홀로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시대에 우리의 공간에 계시다면 제일먼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살았겠습니까?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환경을 지내오면서 그들 안에 박힌 수많은 방어의 기재들이 그들을 그렇게 망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악함도 있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 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더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한 번씩 사랑하려고 날아왔다가 가시에 찔리듯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신 생애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서 희망이 없던 여인에게 예수님 찾아가셨습니다. 가족들도 버리고 쇠줄에 묶여서 무덤 가운데서 귀신처럼 살던 거라사의 광인에게 찾아가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세상이 버린 사람들, 사랑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자기들이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낙인찍힌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린 가시와 같은 사람을 끌어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는 고통이 없었을까요? 만약에 고통이 아니었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그분이 왜 번민으로 괴로워하셨을까요? 자신이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시와 같은 그들을 끌어안고 가슴에 박힌 사랑할 수 없는 가시들을 빼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도록 부름 받은 일입니다. 눈부신 진리, 열렬한 기도, 가슴 벅찬 은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위한 희생의 삶을 온전히 이루어가고자 주님이 주신 선물들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그래서 세상이 사랑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깊이 끌어안으십시오. 사랑을 미움으로 갚아도 끌어안으시고, 따뜻한 정을 원수로 갚아도 끌어안으시고, 지체들을 세우기 위한 희생을 비웃음으로 되돌려주어도 꼭 끌어안으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와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서 한번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이런 사랑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도 아직 이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그런 사랑을 배웠고 알았으니 이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던 죄를 깊이 참회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개인의 경건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공동체의 삶에 지평 위에서만 입증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껴도 이런 공동체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영원히 남을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그대들 옆에 있는 지체들을 피붙이처럼 여기고 사랑하십시오. 그에게 부족을 발견할 때 나를 죽여서 그 부족을 채우라고 그 지체를 내게 보냈나보다.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대들 각 사람 지체들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십시오.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지체들은 세워지고 주님의 이름은 드높여지도록 그런 온전한 애덕의 삶을 살 때 사실은 그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행복한 것이니 이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사는 동안 그대들에게서는 사랑하는 지체들을 향한 단 한마디의 원망이나 미움의 말, 깎아내린 그런 비난의 언사가 없게 하고 마음속에서 사랑하기 힘든 어느 지체를 사랑의 수첩에서 지워버리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주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아도 뛰어난 재능이 없어도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각자 하나님이 세워주신 삶의 터전에서 이 온전한 사랑으로 애덕을 이루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꽃보다 더 귀한 예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이 온 세상이 맛볼 수 있도록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잘 썩어서 세상을 위해 유익한 존재들이 되는 연습을 이 교회에서 하십시오. 기도합시다.
2. 복음의 증거, 사랑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I. 본문해설
오늘 이 본문에는 기독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수님의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생애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광범위까지 펼쳐져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이 가르침은 예수님이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가 가까워올 때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입니다.
오늘 나오는 이 요한복음 13장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도 예수님의 생애에 마지막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는 대부분이 이 땅에 남겨두고 가는 당신의 제자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린 기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옛 계명을 염두에 두신 것인데 옛 계명이 모세의 율법이었다면 새 계명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옛 계명인 율법의 원리도 사랑이었으니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옛 계명인 구약과 새 계명인 신약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에 계명은 인간 속에 어찌할 수 없이 솟아나는 자기 사랑과 정욕,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고 그래서 그 율법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주어진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 계명은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진 사랑을 경험하는 그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너희는 서로 사랑을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의 계명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대신 내가 하나님 때문에 형제들에게 행하여야 할 신령한 본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종교,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평과 불만은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임무를 생각하는데서 오는 모든 부조화입니다. 분명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으니 무엇인가 사랑이 부족하여 갈등을 일으킬 때 내가 이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를 않고 ‘그것 봐, 사랑하라고 그랬잖아.’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랑의 계명을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정죄하는 계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생명에 이르지 못할 비 신앙적인 행동이오, 공동체의 정신을 파괴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II. 복음의 보이는 증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보이는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말보다는 영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구태의연한 방법이고 오늘날에는 보다 사람들을 시각으로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그런 수많은 영상물들을 복음전파에 이용해야지 된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을 오늘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런 것들을 이행해서 우리들이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접하게끔 해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비근한 일례로 예수라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상영되어서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은 좋은 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말의 가치는 아주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영상시대에 자란 아이들이 재능과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장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런 영상이 없어서 엄마나 아빠, 혹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구연동화를 들으면서 자랐던 시대의 아이들보다 상상력이나 이런 것들은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말로만 들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속에서 수많은 연상들을 캐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연상하는 것이 다르게 되고 이러면서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키워지게 됩니다. 이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서 이 말의 가치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A. 성도의 공동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는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쉽고, 듣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말로 전달되는 감명 깊은 복음전파 이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복음의 대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바로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공동생활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타협 없이 정직하게 말로 선포되는 복음은 영화의 자막과 같고 그리고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은 그 화면에 담긴 영상과 같습니다. 자막이 없고 영상만 움직여도 이해가 떨어질 것이고 자막은 또렷해도 화면이 아무 영상도 없다면 감동이 덜할 것입니다. 놀라운 감동과 정확한 지식이 함께 어우러지는 복음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타협이 없는 정직한 복음과 함께 그 복음에 담긴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랑과 일치의 삶이 교회의 공동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게 되면 그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이는 성도의 공동생활의 사랑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도의 공동생활이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수많은 집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인 사람의 집단이 한결같게 예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공동생활 속에서는 자막도 흐릿해서 보이지 않고 그림도 흐릿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생활 속에서는 자막은 또렷한데 그림이 자막하고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자막이 나오는데 그 자막 속에 있는 그림 속에서는 성도가 교회를 향하여 고소하고, 교회가 성도를 향하여 고소하고, 성도가 성도끼리 미워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모함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연합을 이루어서 또 다른 뜻을 가진 지체들과 다투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하는 그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화면은 현대 시트콤인데 자막에는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런 식의 코미디가 됩니다.
1. 공동체의 혼-예수정신
그러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지만 사람이 모인 이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보이지 않으신 예수님이 나타내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혼의 문제입니다. 공동체의 혼이 예수의 혼일 때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사람의 몸이지만 구현되고 나타나는 것은 예수의 정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공동체 속에 흐르는 그 공동체의 혼이 곧 예수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점에 있어서 시작서부터 이미 이런 조건을 갖추면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회자가 서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목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여러분들이 불쌍해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고 또 내가 목회하게 될 때 여러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고 목회의 소명을 받았으며 여러분보다 더 나쁜 사람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등의 불편할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네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는가, 지순의 사랑이 있는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목회자가 교회에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그 일은 교회와 불쌍한 교인과의 만남으로서 그런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짐을 지고 혼자 살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랑을 너무나 크게 경험하고 나니까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내가 너희에게 줄 어린양들을 먹여줄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예수 사랑 없이 살아가는 그 인간들이 아직 누군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너무나 불쌍한 나머지 다른 직업에 종사해서는 도저히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 divine enforcement를 느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 앞에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어서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혼으로 삼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성도의 교통-수단이 아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예배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목회자를 만날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목회자가 했지만, 돌보아주는 것은 지체들이 했지만 그것은 모두 수단일 뿐이었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만난 대상은 목회자도 아니오, 지체들이 아니오, 일차적으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너를 내 피로 구원하였으니 너는 이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어라, 그리고 목회자의 목양을 잘 받으면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많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복음을 전해서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여라. 그렇게 말씀하셨더니 여러분들이 주여, 제가 그렇게 하겠나이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도 예수의 혼을 정신으로 가진 사람이 되었고 교인들도 그렇게 해서 예수의 정신을 혼으로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각자 주님을 만난 계기와 과정은 다르지만 그래서 성도와 성도, 성도와 목회자 모두가 그 공동생활의 혼을 예수께로부터 공급 받게 되었습니다. 모양은 다르나 흐르고 있는 그 혼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면서 살면 그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수많은 세월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들을 모아놓은 100명의 군대가 있고 오늘 장사하는 사람, 회사에 다니는 사람, 서양사람, 동양사람 이렇게 수많은 관계도 없는 사람들 100명을 갖다놓고 똑같이 군복을 입혀났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만 그들과 생활해보면 어느 집단이 군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복을 입고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지만 후자의 집단에는 군인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동체가 모양은 달라도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이는 사랑의 삶 속에서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의 정신을 자신의 인생의 혼으로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점점 더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그 교회 안에 살아계신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안에서는 우리들이 깊이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의 구절 앞에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새 계명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주님의 그 사랑은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생애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을 타인을 위해 모두 주신 생애였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 생명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 생애였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하는 이 말씀이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무한히” 라는 의미입니다. 그 혼을 우리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을 때 그때에만 이 공동체는 서로 잘 사랑할 수 있고 그런 공동체여야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의 참된 사랑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렇게 예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될 때 그들이 전하는 명료한 힘찬 복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뜻이 무엇인지가 이해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세기 복음전파의 가장 커다란 방해꾼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꾼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복음이 없기도 하고 있을 때도 삶으로 그 복음의 정신이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 서로 사랑함
1. 좋아함
또 한 가지 여기서 지적할 것은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함의 첫 번째 특성입니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은 그런 점에서 절대로 수단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 성도가 이렇게 함께 공동생활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중간단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두 가지 목적으로 부르셨는데 하나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또 하나는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두 가지는 하나가 어느 하나의 위에 군림하는 목표가 아니라 대등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성도로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24시간 함께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어야지만 공동생활이 아니라 가족이 출장을 가도 가족인 것처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가 끝나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여러분들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가서 이 공동체 속에서 보여주었던 정신으로 가족들을 대하고 직장의 동료들을 대하고 살아가다가 다시 또 한 공간 안에서 이처럼 만납니다. 이 공동생활의 유익은 바로 우리가 흐트러지기 쉽고 혼자이기 때문에 잊어버리기 쉬운 예수의 정신, 그 공동체의 혼을 이 속에 와서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많이 미끄러져서 내 삶의 혼이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이탈되었지만 여기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전심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고 자기를 죽여 사랑을 완성하고자하는 공동체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그런 예수의 혼을 예배를 통해 함께 모이는 교제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이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목표이지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 그 부모님을 여위고 있어 슬픔에 잠겨있을 가족들을 문상 갔을 때 제가 남기는 두 마디가 있습니다. 이제 아버님, 어머님은 가셨고 이제 여러분들만 이 세상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할지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대들 동기간이 이제는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가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고 서로우애하고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말고 형제들과 나누고 그래서 동기간이 더 우애하면서 살아라. 부모님이 다시 살아오셔서 두 가지만 부탁하라고 한다면 아마 바로 이것 너희는 하나님을 잘 믿어라. 그리고 너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사랑하고 화목하여라. 이렇게 일러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꼭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예수님의 사실상의 유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두고 이제 가는데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희는 이 교회에서 한 몸을 이루며 성령 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너희들이 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너희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도 너희 안에 있는 그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그리고 너희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를 믿고 1-20년 혹은 5년, 1년을 성화의 신앙생활을 해오셨는데 여러분들의 신앙의 성적표가 얼마큼쯤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데 내가 예수의 모습을 얼마나 닮았을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였을 때 나에게 기대하셨던 나의 모습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을까?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줍니다. 그 후한 점수를 줄 때 기억하는 것은 옛날에 낸 건축헌금, 그리고 요즘 하고 있는 식당봉사, 또 요즘 하고 있는 구역장, 요즘 하고 있는 이런 저런 구제활동, 요즘에 섬기고 있는 교회의 이런저런 직분.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참 어떤 사람인지 훌륭하게 정확하게 입증되지 않습니다. 그것과 함께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이 공동생활의 지평 속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성도로서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 공동생활이 기쁘고 그리고 지체들 속에서 여러분들이 참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면 그렇게 드러나는 것만큼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주소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렇게 성도의 공동생활을 해나가기에 매우 부족하고나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의 정확한 성화의 성적표입니다. 큰 헌금을 하거나 뼈 빠지는 봉사,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성화가 입증되지만 공동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의 화목과 일치를 이루면서 용납할 수 없는 지체들을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성화의 성적표를 받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면서 부족한 지체를 용납하고 어려움을 참으면서 교회의 일치와 화해를 이루며 나아가는 이 길이 짜증나고 있는 중이라면 그대들의 신앙의 성적표도 하나님께 짜증나는 성적표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공동생활은 이 자체가 목표입니다.
가끔 부모나 가족에 대해서 큰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가족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그때마다 타이릅니다. 보십시오. 가족은 무엇을 해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가족입니다. 그가 존재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바로 선물입니다. 주고받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 운명처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게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제거될 것처럼 생각하는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헤치고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가족입니다. 하늘 가족이고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함께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의 구원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십시오. 정말 그 교회를 예수의 몸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그 교회에서 지체의 부족을 위해 나의 남은 것을 보태고 죽어가는 지체를 살리기 위해서 살아있는 내가 죽고 가난한 지체를 부요케 하기 위해 부요한 내가 가난해집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의 화목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은 교회를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에 드는 교회를 계속 찾아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동안에 그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양이 되었고 자신은 좋은 교회를 찾아서 떠돌아다니지만 주님은 당신을 떠난 그 사람을 찾아서 산 넘고 물 건너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긴 세월동안 설교를 듣고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공동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가려고 생각하십니까? 일생을 살아오는 길이 예수의 몸인 교회에 칼 긋고 다닌 피 묻은 칼 한 자루 손에 들고 성경도 버리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마지막 날에 어떻게 주님을 만나시렵니까? 그 칼에 묻은 피가 예수의 피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난 두렵습니다. 이 순간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어쩌면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 그 긴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마지막에 주님을 못 만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절로 좋아하기 되지만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데 그를 좋아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면 사랑이 아니겠네요. 아마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 설교에서 그런 문제점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치를 여러분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은 사랑할 수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직접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고 못하면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이것은 사랑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없을 때도 사랑합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참 사랑하기 좋고 쉽고 그리고 집에 가면 만나고 싶고 교회에 와서 마주하면 그렇게 기쁘고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면 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때에 만약에 사람 대 사람의 사랑이라면 거기에서 끝납니다.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사랑을 들려주었는데 저쪽에서 화살이 날아옵니다. 나는 사랑했으나 저는 나를 원수로 여깁니다. 이때 더 이상 사랑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이 여기까지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사랑해야지 된다는 사실인 것은 명제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그때에 사랑해야지 하는 당이 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내 앞에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자기가 철저히 무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은혜는 바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확 받고 나니까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다시 그 사랑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 그렇지 않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내 마음에 좋아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의 가시를 남겨두십니다. 좋아합니다.
2. 희생함
두 번째로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은 침만 튀기면 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을 말로 하는 것은 침만 튀면 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나의 못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피가 흘러야 합니다. 우리들이 바로 사랑을 위해서는 바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은 상급이 적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을 모르는 사람, 그리고 사랑해도 그 사랑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것은 많은 상급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은 예수께 대한 희생입니다.
3. 헌신함
세 번째는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랑의 헌신 하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광경 같은 그런 헌신적인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희생하고 지극히 작은 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지체의 편리함을 위해 내가 잠시 불편을 감수하고 그리고 나는 상처를 받아서 모욕을 받았지만 그러나 지체의 명예는 보존해주고 그리고 내가 조금 가난하게 되어도 지체들을 부요하게 하는 것, 그것이 작은 배려와 희생,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들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옆에 있는 지체를 위해 대신 죽는 순간은 꿈꾸지 않아도 괜찮으니 지금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십시오. 내가 불편함으로 지체를 편하게 하고 내가 수고해서 좀더 많이 누리도록 지체는 나의 명예를 깎아내렸으나 나는 그의 명예를 보존하고 존귀하게 해주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공동체 속에 흐르고 있는 예수의 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과 혼속에서 교회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은 나 중심으로 살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이 생명도 달라시면 바치겠습니다. 하고 뛰어나가는 그런 신파조의 순교가 아니라 그 순교의 죽음의 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종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는 일은 순교할래, 배교할래. 이런 순간을 통해서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네가 좀 불편하고 지체에게 편하게 해주라. 네가 조금 더 희생하고 지체가 조금 덜 희생하게 하라. 네가 수고를 해서 지체가 그 수고의 결과를 누려도 조금 더 마음상하지 말거라. 이런 끊임없는 작은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 죽음의 엄청난 효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을 엄청난 희생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깎고 양보하는 과정 자체는 큰 칼을 맞는 것이나 작은 칼을 맞는 것이나 상처 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여태까지 일생을 살아오면서 여러분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게도 살아봤고 여러분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자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가난하게는 살아봤습니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공부를 한참 하고 일어나면 갑자기 바닥이 휙 돌았습니다.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입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그런 것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자존심을 건드릴 때 그때는 며칠 밤 동안 잠을 못 이룹니다.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도 월급이 적거나 지위가 낮거나 일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한번도 안 했습니다. 누군가 나의 자존감을 건드릴 때 그랬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똑같습니다. 가난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나있으니까 절대 하나님이 돈줄을 잡아당겨서는 이놈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내성이 생겨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리고 안 아픈 부분으로는 훈련을 안 시키시고 아픈 부분으로 훈련을 시키십니다. 어떤 때는 너무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여러분들은 참 너무 좋은 사람들입니다. 진짜 하늘이 낸 사람들입니다. 진짜 일부로 조직해도 이런 교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여러분을 이렇게 대하면서 정말 마음이 아파서, 이것은 신령한 그런 아픔이 아니라 그냥 내가 아직 안 죽어서 당하는 아픔입니다. 저 사람 왜 나를 저렇게 대할까? 내가 자기들을 위해서 내가 안 한 게 뭐가 있나. 정말 저렇게 내 마음을 모를까? 이런 것을 아프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죽일 놈의 아픔입니다. 여러 날 동안은 울고 아픕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격언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목회자의 삶은 평안하다고해서 행복한 삶이 아니고 또 고요하다고 해서 또 모두 고요한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평안해도 가슴속에 이런 자기 투쟁과 죽음의 시간들이 있으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그렇게 고통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다 바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아를 죽여가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업이 망하고 교회가 파탄되고 이런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죽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지체를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하려고 할 때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체를 용납하려고 할 때, 한번 만나서 대거리를 하면서 다 퍼붓고 싶은 그 지체를 그냥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의 사랑 없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시와 같은 그를 가슴에 끌어안아주는 그 아픔 과정을 통해서 자기죽음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III. 성도간의 사랑
A. 자연적 선의가 아님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도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첫째는 이런 성도들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구현해가야 할 사랑은 자연적인 선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선의, 선한 뜻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선의와 하나님 안에 있는 지순의 사랑의 차이는 자연적 선의는 인간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겨냥된 선의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선의는 도덕적 결심을 통해서 촉구되는 그런 종류의 선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처럼 보이지만 공동체에서 예수를 보여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든지 어째든 사랑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렇게 하면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너희가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은 사랑이 아니면 그것으로서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도덕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결국은 자기 사랑의 중심축을 이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해 확장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그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 선의에 기초한 사랑은 절대로 영원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불변하지도 않은 그런 사랑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자식들도 많지만 새끼들에게 상처를 받은 부모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질문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부모가 두 부류의 부모 중 어떤 부모일까요? 첫 번째 자식밖에 모르고 자식을 애지중지하며 길러온 부모, 이 사람들이 상처를 자녀들로부터 받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자식보고 내가 왜 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해야지 되나. 네 인생의 행복이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나. 네 인생의 행복은 네 인생의 행복이고 내 인생의 행복은 내 인생의 행복이기 때문에 난 너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으로 다했지. 나를 희생해서 너를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라고 나에게 요구하지 마라.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두 부류의 부모 중에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까요? 첫째입니다. 둘째는 아예 처음부터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안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상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관계없는 사람을 통해서는 상처가 안 일어납니다.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상처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자녀를 목숨까지 다 버릴 정도로 그렇게 자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할 때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이 지금 죽어 가는데 당신의 심장을 떼면 애가 살 수 있다면 부모가 줄까요, 안 줄까요? 그런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그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때도 자식이 뭔가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지금 실망을 해서 상처를 받는 것인데 그때도 사랑하면 안 됩니까? 아니 심장까지 떼어줄 수 있는데 그때도 사랑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이상한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니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라고 내어주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심장을 떼어준다. 그 애 엄마. 죽어도 제 자식 사랑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심장을 떼어주더라.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자연적 선의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자연적 선의로서의 사랑이 있어서 그래서 자식을 애지중지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자식을 위해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은 자기 중심축을 옮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그렇게 그 목숨을 버리기까지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런가?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남편이 간경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 놀랍게도 간경화에 걸려서 거의 죽어가는 그런 시점이 되었는데 그런데 놀랍게 부인이 간이 건강한데 이 체질이 딱 맞아서 장기를 떼어서 남편에게 이식했는데 그것은 거의 목숨을 건 수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혼했습니다. 왜 그럴까? 아니 그렇게 목숨을 건 정도로 사랑했는데 왜 그러면 그렇게 될까? 그게 바로 자연적 선의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인간적 사랑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목회자들의 사이에서 오가는 속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부임할 때 신발 벗고 맨발로 부임하는 목회자의 짐을 받으러 뛰어나오는 교인이 바로 몇 년 후에 그 목사를 쫓아내는 교인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연적 선의가 얼마나 불안전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 오늘 회개하고 그리고 이 시점부터는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몰랐으니까 조금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밝히 알게 되니 그러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상처받았다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자기는 피해자이고 교회가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입증하는가 하면 그 사람이 예전에 교회를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라 자연적 선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교회를 수없이 교회를 수없이 상처를 낸 사람들입니다. 100%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가 가해자이고 자신이 그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 마땅히 깃들여야 할 그 사랑으로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부모나 간을 절반을 떼어서 남편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혼소송을 하고 헤어진 그 여자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물론 그는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이 모두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는 아닙니다.
그러면 도덕적 선의, 자연적인 선의로서의 인간적 사랑과 까리따스의 사랑의 차이를 설명을 하면 비교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교회에서 살아가는데 함께 공동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뭔가 지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이 자연적 선의로서의 인간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프고 상처를 받았을 때 교회가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고 그 지체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성도는 틀립니다.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뭔가 부족한 지체나 심지어는 죄를 짓는 지체를 인해서 자신이 악을 당하고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이 까리따스를 가지고 있는 지체는 생각을 이렇게 합니다. 아! 이 교회 안에 이런 것이 부족하구나. 그것이 이렇게 나타나서 지금 나에게 아픔을 주는구나. 내가 이렇게 느끼는 이 아픔은 내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아픔을 느끼시겠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그 많은 사랑의 감화인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이 교회 안에 이런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채우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마치 백혈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어느 한부분에 상처가 났을 때 온몸에 백혈구 총동원령이 내려서 그쪽으로 내려가서 그 균과 함께 맞붙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처럼 자기가 그 교회의 결점과 지체들의 약점을 알게 되었고 그 약점이 교회의 몸에 고통이 된다는 것을 내가 경험했으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서 나를 희생함으로 이것을 고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까리따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불변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도덕적 선의로서의 사랑은 가변적이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일시적인 불안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남아야 할 사랑이 실현되는 곳인 이곳에서 구현되어야 할 사랑은 따라서 도덕적 선의로서의 그런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그런 종류의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이 교회와 지체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도덕적 선의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바로 그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며 살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자기는 상처를 받았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인해서 교회는 더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2-30년을 이 교회, 저 교회 영적인 거렁뱅이처럼 빌어먹으며 신앙생활에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피 묻은 칼밖에 없습니다. 수없이 교회를 찔러서 자기는 수많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교회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백혈구 역할을 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인정해주는 목회자 아래서 헌금 많이 하고 봉사하고 인정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교회에 뜰 준비를 하며 보따리 싸고 지체들과 부딪히게 되면 그 인간들하고 마주보는 것이 싫어서 환멸을 느끼면서 자기를 잘 받아줄 수 있는 맞는 교회로 보따리 싸고 이렇게 하면서 긴 세월을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생 살아온 길이 끊임없이 예수의 몸을 조각내며 살아온 인생길인데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께서 너희가 사랑받은 것처럼 너희는 서로에게 사랑을 받아라.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을 제자들이 인정이나 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다 배반하고 떠났을 때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정의를 빙자해서 지체들의 약점을 드러내고 수치를 까발려서 그래서 부끄러움에 떨어트리고 지체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게 하는 그 잔악무도한 일을 예수님이 행하셨습니까? 안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순간에도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떠오르면서 제 마음은 너무 아픕니다. 어쩜 그렇게 어릴 수 있을까요? 이 복음의 진리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자기 상처받았노라고 말합니다. 내가 묻고 싶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귀합니까? 자기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예수보다 귀하고 지체들보다 소중합니까? 바로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여러분들이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그렇게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던 옛 삶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사는 그 원주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여기 지금 여기에 주님이 주신 이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희생하면 되잖아요. 내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자신이 상처받은 것이 그렇게 엄청난 사건입니까? 그래서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공포하고 거기에 대해서 복수하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상처를 좀 덜기 위해서 예수의 몸에 창칼을 찌르는 것이 그것이 가합니까? 주님이 크신 사랑이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에 얼마 남이 않은 우리의 날들 동안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양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의 진액을 다 쏟아도 얼마 섬길 시간이 없습니다. 이 교회 가서 피 흘리게 하고 저 교회로 도망가고 저 교회에 가서 좀 만만한 사람을 만나면 또 찔러서 피 흘리게 하고 저 교회 다니고 그 영혼에 피곤함과 비참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녀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B. 하나님께 전심함
그러면 성도간의 사랑이 자연적 선이 아니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전심함을 통해서 그런 사랑을 얻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이 각자 삶에 이치는 다르고 지체로서의 자리는 각각 틀리지만 그러나 그가 손의 이치에 있던 발의 이치에 있던 가슴에 이치에 있든지 간에 전심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섬김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교회에서 만난 그 인간이 너무 밉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자기를 죽이며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다 쏟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속에 느껴집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지체들로부터 받은 작은 상처는 소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아픔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나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 내 앞에서 똑같은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수많은 지체들이 바로 내가 하려는 행동, 쓴물을 머금고 지체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칼을 휘두르고 교회를 떠나거나 공동체를 찢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교회의 상처는 덧나서 자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줍니다. 그때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뿌리치는 것입니다. 한번 옮긴 교회를 두 번을 못 옮기겠습니까?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납니까? 한번 교회에 상처를 내고 나왔는데 두 번은 못 나오고 세 번은 못 나오겠습니까? 전과 2범이나 3범이나 같은 사람인데. 왜 못하겠습니까. 설교 쪽은 후지다고 보따리는 쌌는데 가서 설교가 또 후지면 더 좋은 설교를 하는 곳으로 보따리는 싸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못하겠습니까? 살아온 삶의 방식이 그런데.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이 있어서 힘들어서 보따리 싸서 왔는데 그런 인간들이 또 있습니다. 또 보따리 쌀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인데 언제 그런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교회를 떠나는 것 봤습니까? 그냥 자기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응답은 얼어 죽을 응답입니까. 이미 그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응답이 있습니까? 신령하고 화목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충만한 가운데서 응답이 있는 것이지 무릎 꿇고 앉아서 머리 굴리는 것이지 무슨 응답입니까? 그리고 일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일 수 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 회심할 그때 말씀을 전해줄 목회자도 없고, 그리고 나를 거기에 인도한 전도자도 없고, 그리고 나를 거기에 데려간 지나온 내 인생의 과정도 없고 오로지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예수님만 거기에 계십니다.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인생의 환난이 닥치고 교회 생활의 고난이 올 때 누군들 모든 관계를 끊고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것이 상처를 덜 받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피를 흘립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피를 흘리고 교회는 지켜야 되고 자신이 아파도 지체들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양보하지 말아야할 예수의 사람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이를 깨물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고 생겨났다 없어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진짜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평신도가 도전적인 책을 썼습니다. 한 10년 전의 일인데 나도 교회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굉장히 많이 팔렸습니다. 그랬더니 몇 년 있다가 도전적인 책을 목회자가 썼습니다. 목사도 목회자를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사로잡힌 그 순간 우리는 끊임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을 때도 해야지 되고 싫을 때도 해야지 되고 할 수 있을 때는 물론 해야지 되고 할 수 없을 때도 해야지 됩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모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자기 안에 아무 사랑이 없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의 감화가 아니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섬김의 뿌리가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섬김의 뿌리가 됩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잘 섬기는 것이고 그렇게 잘 섬기게 될 때 거기에서 자기 자신은 괄목하리만치 아주 놀랍게 예수를 닮아갑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당신을 향하여 분산되기 쉬운지를 알기 때문에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섭리의 경륜 속에서 지체들에게 실망하게 하시고 또 때로는 상처라고 하는 것들을 받게 하셔서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구현해가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영원한 우리의 인생에 목표일 수 없고 그리고 불변하는 하나님만이 변함없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언젠가 제 마음에 깊은 고통이 있어서 정말 더 이상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마당에 앉아서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내 것이라
저희 아버님이 굉장히 건강하셨습니다. 어제 제가 중환자실에 가서 우리 가족들이 모두 밤을 새웠습니다. 임종할 것 같아서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를 하고 웃고 그러셨는데 의식이 없어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아주 급히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버님의 얼굴을 뵈면서 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이렇게 며칠 전에 사택에 올라오셨는데 안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에 그렇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날 안아드릴걸…’
그렇게 다 지나갑니다. 욕망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분노, 미움, 열정, 시기, 다툼, 좌절, 슬픔, 고뇌, 이별, 아픔, 설음 다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는데 애들아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란다. 믿음도 언젠가는 필요 없는 때가 오고 그래서 마주대하며 보는 때가 오고 소망도 모두 성취되어서 이제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는 때가 온단다. 그러나 사랑은 그때도 떨어지지 않고 영원하단다.’라고 말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모두 지나갑니다. 분노, 미움, 상처, 속 좁음, 시기, 원망 다 지나갑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이니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의 공동체의 이 사랑은 하늘에서나 맛볼 수 있는 복락을 미리 당겨서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들의 부족을 보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전심하십시오. 사람을 보면 계속 넘어집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떻게 내가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으며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인생이 어떤 골짜기를 하나님이 휘돌아도 주님이 나의 손을 붙들고 신실하신 방법으로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없고, 미워해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리고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특별히 이 교회를 나오는 동안에 후회 없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사랑의 뿌리, 겸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3)
I. 본문해설
말로 전하는 복음이 참으로 사람들에게 믿어지기 위해서는 보이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것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이 성도들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생명이라면 이 생명의 뿌리는 바로 오늘 말씀드리려는 겸손입니다.
오늘 사도가 이 편지를 쓴 것은 옥 속에 갇혀있을 때였습니다. 옥밖에 많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다툼들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교회공동체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실려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만물로 그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고 기록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빌립보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기록문은 신학사상을 전수해주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사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가르치다가 예수의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의 마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독론이 이 빌립보서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바는 교회 공동체가 사람이 모여서 한 지붕아래 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회심하여 접붙여진 사람들이 되고 그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을 공동체의 혼으로 삼으며 살아갈 때 그때 진정으로 성도의 공동생활을 사랑으로 복음을 보여줄 수 있는 공동생활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신이 바로 겸손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이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낮아지신 마음이니 그 겸손의 마음 안에서 성도의 사랑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참으로 복음에 입각한 공동체임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사는가, 이것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참으로 이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가, 그리고 얼마나 여러분 자신이 낮아져서 이 공동체 안에 있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교회의 공동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뿌리인 이 겸손의 정신을 지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깊이 굴복하여 그분이 낮아진 정신을 자신의 정신으로 합치하여야지만 이 공동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II. 교만: 타락의 원인
A. 죄와 교만
우리는 먼저 이런 겸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인간 타락의 원인이 교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죄는 교만이라고 하는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사랑은 겸손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가장 최종적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완전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었는데 하나는 첫 사람 아담이었고, 또 한분은 둘째 사람 예수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교만으로 범죄 하여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함으로 자기를 바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창조하셔서 모든 사물과 인간들이 뒤엉켜 살도록 만들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혜를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에 만물들을 창조하셨을 때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그 질서 안에서 각각의 영광을 가지고 만물들이 힘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덩그러니 창조하셔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더위에 피해를 받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에 큰 별들로부터 시작해서 지구 위에 있는 작은 풀잎파리, 그리고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작은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피조물들은 각각 나누어진 장소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함께 이 땅에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섞여있는 존재들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첫 번째 피조물은 존재하기만 할뿐 미생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피조물들은 바로 살아있는 식물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피조물들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또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지각할 수 있는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존재는 존재할 뿐 아니라 살아있고 지각할 뿐 아니라 또한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이 각각의 질서는 각각 자신의 질서 안에서 피조물들이 머물게 하셨고 하위에 있는 질서의 피조물들은 상위에 질서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섬기고 이바지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게끔 만드셨습니다. 수많은 미생물들은 식물이 자라는데 기여하고 식물들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그리고 동물들은 여러모로 인간을 섬기며 또한 음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자기 아래 존재하는 많은 피조물들이 이렇게 질서 있게 자기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모든 것들 위에 자신이 존재하며 자기 위에는 창조의 목적을 설정해놓으시고 자신에게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보이는 피조물에 정점에는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은 오직 모든 것을 다스리고 누리면서 한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인간은 창조되었고 인간은 바로 그 위치에서 가장 행복하고 쉼을 얻을 수 있고 편안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1. 원죄에서
이런 질서를 인간의 이성이 항상 인식하고 따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인간은 자신이 그 지위에 있는 것이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했으니 사실 하나님처럼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등해진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자신의 밑에 두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나 자신이 하나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그 교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하였고 그 하나님을 명령을 어긴 불순종 때문에 죄는 강물과 같이 이 세상에 밀려들어와서 홍수와 같이 범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온 땅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으니 이로서 모든 인류는 이 죄를 물려받게 되었고 이것을 우리들이 원죄라고 부릅니다.
2. 실행 죄에서
이런 원죄는 인간의 영혼 깊이 죄에 대한 책임과 그 죄 때문에 생겨나게 된 많은 악한 본성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본래에 가지고 있던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라는 망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끊임없는 파괴와 고통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원죄의 뿌리는 끊임없는 실행 죄를 불러서 마음으로 범죄하고 행위로 범죄하고 보는 것으로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비참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그런 죄의 대가로 돌아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 어두워 보지 못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분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고통 하는 이 세상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B. 공동체적 삶의 파괴
이런 최초의 인간의 교만은 최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씨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우리의 교만은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들의 질서를 고집하게 하고 그래서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불순종하며 살게 합니다. 이로서 인간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교만은 공동체적인 삶의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만들어놓으셨을 때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천체로부터 시작해서 작은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들은 없는데서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함께 영적인 끈으로 연결되어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이 가득 차게 되었고 이로서 모든 피조물들은 찬란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누군가 혼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적인 연결 속에서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모든 연결의 마지막 부분에는 인간이 있었고 인간 바로 그 위에는 모든 창조물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성자의 영광은 다시 삼위일체의 영광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삼위의 아름다운 영광이 성자를 통해 인간을 통해 그리고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속에 연결되어 있어서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창조된 것은 피조물이었으나 드러난 것은 삼위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영광 속에서 각자 각자는 자신의 위치와 작용과 역할이 있었고 그 자신의 위치와 역할, 그 작용 속에서 그 모든 개개의 피조물들은 가장 아름다울 수 있었으며 가장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게 되었고 범죄 하자 인간을 통해서 그 쓰고 더러운 죄의 물들이 영적인 연결을 타고 흘러들면서 그 관계를 모두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갈등하고 물고 뜯고 죽이는 무서운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런 영적인 연결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식물들은 광합성 작용을 통해 남은 기체인 산소를 토해내고 쓸모없어서 식물이 버린 산소가 동물에게는 생존을 위한 꼭 필요한 기체가 됩니다. 동물들이 그 산소를 먹고 토해놓은 필요 없는 이산화탄소가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에 꼭 필요하게 되고 수많은 미생물들의 도움으로 식물들은 성장하며 그 성장한 식물들이 다시 그 미생물들의 좋은 삶의 터전이 됩니다. 그것들에 의해 곤충이 서식하게 되고 그 곤충들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들짐승들의 배설물은 다시 미생물의 거처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만물들이 아직까지도 희미한 상호 공생의 연결을 가지고 있지만 본래적인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연결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연결의 파괴, 이것은 한 인간의 교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교만 때문에 이 공동체의 아름다운 관계가 파괴된 것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처음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이는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지만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그 여자가 이 땅에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의 동침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또한 그 몸에서 태어난 자신의 형상을 닮은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 자행되었으니 살인자가 가인이요, 살해당한 자가 아벨이었습니다. 함께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그래서 가장 행복했을 때 가정 공동체가, 그때 가정 공동체는 또한 교회 공동체이기도 했는데 그 가정 공동체이자 교회 공동체인 그 최초의 인류의 공동체가 이 교만의 죄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고통과 불행 속으로 휘몰려 가는 광경을 우리는 창세기의 우울한 보도 속에서 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한 일이고 그 죄의 뿌리는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한 교회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한 지체가 되었는데도 지체끼리 물고 뜯고 싸우고 말로 비방하고 서로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험담하고 그를 아주 더럽고 추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 불결하기 짝이 없는 분쟁들이 거룩한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교만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오늘 말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다고 여기고 한 마음 한뜻을 품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이 바로 이 교회 속에서 정신으로서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를 비롯한 자기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판단하는 자기의 판단이 가장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판단이 됩니다. 그래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인생관, 그리고 하나님의 뜻 대신 자기의 감정이 개입이 되어서 서로를 정죄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그래서 미워하고 가치 없게 여기고 하는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서 교회의 지체들 간에 심한 분쟁과 미움, 그리고 분냄과 그리고 서로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당 짓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강단에서는 복음이 열심히 선포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연합이 보여주는 삶은 끊임없이 외칩니다. 이 복음이 다 쓸데없는 소리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 엉터리다. 그것을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여서 함께 예배는 드리고 기도하지만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전한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떨어질 때 사랑이 없는 악한 행실로서 그들 속에 있는 말씀의 씨들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역할들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솔직히 말해서 세상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까, 교회를 볼 때 마음이 아픕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의 도덕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열한 삶들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감히 하지 못하는 야비한 모략과 계략들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통용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점잖은 사람들은 결코 하지 않을 그런 더럽고 추잡한 말과 상대방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야비한 언사들이 거침없이 토해져 나오고 아주 상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말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토해져 나오니 입에서 나오는 설사요, 똥들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신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받은 지체이고, 교회에 소소된 지체라고 또 떠들고 다니니 이 부끄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만의 뿌리에서 솟아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여러분 사이를 지나다녀도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헐뜯고 하찮게 여기고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성도들을 서로 깔보는 그런 일들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섬긴 것은 아주 티끌보다 작은 섬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인간은 희망이 없어 하고 포기해버리는 언사들, 이게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그런 언사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그 인간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계시고 그래도 말씀으로 먹이고 은혜로 그를 고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포기합니다. 교만이 시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모든 사람들이 포기할 때도 끝까지 희망을 갖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병적일 정도로 그 아들을 향해 기대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III. 겸손: 구원의 방법
A.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런데 이런 교만으로 인해서 모두 파괴된 공동체를 인간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었으니 그 구원 방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는 스스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해서 신성을 모두 다 비워버리셨고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인성만 취하셔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아니셨고 단순한 사람으로 사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이신 자신을 퍼내서 그래서 아무 것도 없게끔 비우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오신 후에도 하나님이셨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인 신성을 저 밑에 묻어두시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 위해 사용하시지 않고 묻어두신 것을 가리켜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는데 이 사람의 몸은 불멸한 육체가 아니라 사라질 그런 육체였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영원하신 분인데 사라질 육체를 입으셨으니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주리시면 배고프셨고, 기온이 내려가면 추우셨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면 슬프셨고, 목이 갈하면 목마르셨습니다. 그런 삶을 안 사실 수도 있으셨지만 교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그 죄에서 인간을 구원내기 위해서는 교만과 정 반대인 겸손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언제나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시고 낮아지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이 사람의 썩을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결국은 당신 자신의 몸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바쳐질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그야말로 종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노예처럼 우리를 섬기고 사시다가 마치 살인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을 당하셨으니 어찌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가 낮아짐의 생애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그분이 철저히 낮아지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33해 동안 온갖 결핍과 고난에 사시면서도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신 자기를 해하려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을 만났고 거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극히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을 섬기셨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인간들만 골라서 존귀히 여기시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만 선택해서 사랑해주신 것이 아니라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들,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박해하는 사람들, 나아가서 당신을 그리스도인지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원수들까지도 긍휼히 여기시면서 섬기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참된 겸손은 남을 보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낮춤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의 사람 안드레이 머류의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죄인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종류의 죄인은 용서받은 죄인이고, 또 한 종류의 죄인은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우리가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체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는 우리가 단지 용서받은 죄인들뿐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거스르고 원수처럼 살아가는 타락하고 더러운 죄인들, 그리고 교회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어서 정말 가치 없어 보이는 지체들을 대할 때도 자기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저들과 똑같은 죄인인데 나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또 저들과는 달리 요즘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내가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셨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자기를 비운 철저한 헌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신 그 일은 아담의 죄를 통해 무너진 이 모든 피조세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들로부터 이 땅의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피조세계가 다 관계가 깨트려졌고 사람들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다시 한번 아름답게 연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미래에 다시 한번 창조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연결을 모든 피조물 세계에 이룩하시고 그것을 통해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나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니 그 모든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샘플 케이스로 하나님이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만물의 머리이신 그분이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던 모든 각 사람들과의 관계를 교회 안에서 일체를 이루게 하셨고 성도가 함께 모여 사는 이와 같은 공동생활은 그 정신을 구현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인간을 넘어서서 모든 피조물들이 회복하게 될 창조의 지극한 아름다움의 완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바로 그런 계획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고 그리고 온 성도들이 그의 몸의 지체가 되어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B. 공동체를 세우심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주셨지만 여전히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에 붙어있는 영적인 몸의 이 교회는 완전히 떨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몸 안에는 또한 각각 어느 정도의 죄가 남아있어서 그 죄의 감염된 몸의 일부분들이 덧나기도 하고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와 덧남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은혜 떨어진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죄와 성화되지 못한 성품, 행동, 올바르지 못한 타락한 행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덧남과 상처입니다. 그러나 덧남과 상처가 예수의 몸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해야 할 일은 누군가 부족한 지체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 나고 덧날 때 그것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그 일이 바로 교회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피를 타고 백혈구들이 집결합니다. 그 피는 상처 난 그 장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핀데 상처가 나면 혈액동원령이 내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상처 난 그곳으로 집결을 하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 온 몸에 흩어져있던 백혈구들이 파송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몸 자체를 썩게 하고 망가트리게 하는 악한 병균들과 함께 피 흘리기까지 싸우다가 죽어갑니다. 이게 고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온 몸은 면역력을 가지고 상처와 부분적인 덧남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여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치유의 작용들이 불가능해진 사람이 후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면역성이 없기 때문에 상처가 덧나면 온몸에 있는 피들이 백혈구를 보내서 그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염 되어서 몸 전체를 다 죽이면서 그가 사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렇게 사랑으로 서로를 치유하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한번 보십시오. 교회 안에 온전하지 못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은혜가 떨어질 때 그랬습니다. 주님을 태어날 때부터 만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한참 살아왔으니 그 세상에서 잡인들처럼 살던 사람이 왕의 궁전과 같은 교회에 들어와서 지존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에는 아직까지 야비한 행실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그러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치료해서 한 몸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공동생활이 가지고 있는 이익이고 또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생은 교회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세우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최근에 야구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보니까 감독에 대한 용병술 내지는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감독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랬더니 기다려주는 것이 그 감독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기다려준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랬더니 그 감독의 이야기는 선수생활을 하다가보면 누구든지 슬럼프에 빠지는 적이 있는데 그때에 적절한 도움을 주어서 극복하면 그 슬럼프 때문에 훨씬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지만 그때에 잘 다루어주지 못하면 그게 계기가 되어서 결국은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일들이나 화합하지 못하는 팀에서 상처를 받고 야구선수로서 막창까지 내려갔던 사람들의 명단을 대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 감독의 휘하에서 회복되어서 최상의 선수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믿고 참으면서 기다려준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기다려줄 때 해택을 받는 선수들은 정말 감동이지만 그 말도 되지 않는 상태의 선수들을 기다려주는 감독의 마음은 썩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썩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시인 롱 펠로우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모두 외울 수는 없지만 기억을 더듬으면서 암송할 터이니 원문과 다르더라도 나중에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오래 전에 하늘을 향해 화살하나 쏘아 올렸네. 그리고는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발견했네. 어떤 큰 나무에 그 화살이 박혀있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나는 하늘을 향해 노래 한 곡조 불렀지.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나는 알았네. 그때 부른 내 노래가 내 친구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흔히 나는 그래도 뒤끝은 없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에 내가 모시던 목사님이 그 말씀을 잘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항상 앞 끝도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는 악의가 없으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뒤끝이 없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뒤끝이 없는데 이 사람 속에는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해서 한 기억도 안 나지만 독한 말을 화살처럼 날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보니까 친구의 가슴속에 나무에 박힌 화살처럼 아직까지도 지나가지 않고 깊이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어려움에 처한 친구, 과오를 행한 친구가 있었는데 사랑으로 따뜻하게 위로를 해서 노래처럼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렸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났더니 아직까지도 그때에 따뜻한 사랑의 언어가 친구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쳐 돌고 있었다는 그게 시의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체들에게 사랑 없이 행한 것을 여러분들은 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체들은 모두 기억하고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십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게 선천적으로 눈이 나빠서 선배들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눈이 아주 나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공부도 많이 못했지만 어째든 그리고 책보고 이런다고 하면서 눈이 더 나빠졌습니다. 선배들이 가끔 부르면 잘 아는 선배가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태도가 틀렸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선배를 보고 뻔히 쳐다보고 인사를 안 할 수가 있는가. 그때는 이미 벌써 내가 변명을 하기에는 늦은 때입니다. 제가 어느 정도 눈이 나쁜가 하면 내 방에서 한참 뭘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 집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가정일로 찾아왔습니다. 성도들이 가끔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목사님은 인사를 해도 안 받으신다고, 그래서 서있을 때 때로는 그게 사람인지 나무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데 인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인사를 하려면 바짝 와서 인사를 하십시오. 시야 안에 들어와서,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오는데 누군가 낯선 분이 오셔서 귀속 말로 물어봤습니다. 야, 저 사람 아니? 아무도 모른데. 우리 집 사람이 와서 여보, 저분이 누구십니까? 와서 열심히 기도하시는데 누구십니까?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리고 이제 나갈 때 인사를 해야지 되는데 뭐라고 인사를 해야지 되는지. 그래서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계속 뒤를 돌아봅니다. 우리 집 사람이 가서 저 죄송하지만 어디서 오셨나요. 알고 보니까 내가 아주 잘 아는 교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 자기를 멸시를 당하는 것 같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행한 일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기회 있을 때마다 얼마나 많이 교회를 아프게 하고 지체들을 상처 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일주일만 여러분들 가까이 있어도 아주 단호한 태도로 지체들을 하찮게 여기는 발언, 쥐꼬리만치 사랑하고 바위덩이만큼 판단하는 그 무서운 판결, 아주 조금 사랑해보고 그 인간이 희망이 없다고 하는 단정, 이런 것들을 많이 봅니다. 떡이 없고 물이 없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V. 사랑의 뿌리: 겸손
A. 존재의 질서를 숙고함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런 겸손의 삶, 사랑의 뿌리인 겸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세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는 질서를 생각하십시오. 그 질서는 다름이 아닌 우리는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고 그분은 지존하고 거룩하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나, 특히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인 나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사라지고 말 소멸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님을 일주일도 채 안 되는 불과 한 삼일동안에 여위었습니다. 목요일까지도 아버님이 곧 퇴원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주일날 싸늘한 시신을 맞이했습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사택에 올라갔는데 가자마자 거기에 있는 작은 의자에 털썩 앉았는데 그 자리는 아버님이 주일마다 예배가 끝나면 올라오셔서 앉아계시던 자리였습니다. 억제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아버님을 화장하고 국립묘지로 모시기 전에 1시간 40분만에 다 태워져서 유골만 남았을 때 일보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뼈, 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갈아서 가져가시겠습니까? 기계에 한 30초 갈아서 한줌의 가루가 되어서 보자기에 싸진 그 순간 제 마음속에 아! 이게 인간이구나. 불길로 한두 시간 열을 가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참으로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아마 더 열을 가하면 그 뼈마저 모두 사라지고 기체가 되어서 흩어질 것이고 또 더 변화가 오면 그 기체마저 없어질 것이니 결국은 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입니다. 분초마다 다투며 서로 물고 뜯고 해도 두 시간의 불길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육체의 본질입니다. 만약에 아버님의 영혼이 그 육체는 남겨두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그 슬픔이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만물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두 시간의 열을 가하면 기체로 사라지고 말 육신을 입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물고 뜯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망상하며 하나님 앞에 대들고 반항하며 살아가갑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개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못 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사람을 무는 개가 있습니다. 이 개는 어떤 계기에 인간을 공격해서 한번 인간을 물고 그렇게 인간을 깨물어서 인간이 울고 공포에 질려서 자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인간에 대한 승리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사람을 물고 굴복시키려고 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 개의 마지막은 타살입니다. 결국은 그 개를 죽입니다. 현행법상으로도 여러분들이 지나가다가 개가 위협적으로 짓거나 할 때 그 개를 때려죽여버려도 전혀 여러분들에게 규칙사유가 없습니다. 주인이 방임한 개는 소유권을 포기한 개입니다. 법적으로 그러니까 죽여도 됩니다. 오히려 행인을 위협한 것에 대해서 정신적인 보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도 한번 범죄 하는 순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 하나님을 무는 것입니다. 한번 죄를 지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교만해집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치시고 본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다만 죽을 몸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그 질서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
두 번째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무슨 권면이나 위로나 칭찬이나 이런 것이 있다면 한 마음, 한 뜻을 품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이 예수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철저한 겸손의 정신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랑하면 반드시 실망할 때가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 때문에 존경하게 되면 언젠가는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을 존경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서 실망할 이유가 없으니 사랑의 시작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떤 때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할 때는 우리는 또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깊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들이 예수의 정신을 가진 삶을 살게 되고 우리 각자 각자가 예수의 정신을 가진고 있을 때 공동체가 한 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한 혼 안에서 공동체는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일치단결 하여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지체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한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C. 은혜를 받음
마지막 세 번째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몸에 지체된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예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죄인이고 너무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했던 사람이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깊이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와서 나는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고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 정신이 순종하는 삶을 살게 했던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들을 내가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이 사랑하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내가 아파도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하며 살기로 한 것이 회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자꾸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모든 지체들을 늘 한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래서 성도는 사랑할 수 있을 때는 은혜가 남아있으니 사랑해야지 되고, 사랑할 수 없을 때는 은혜를 받아야 하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는 남아 있는 은혜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을 때는 은혜를 받아야 하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려고 애를 써야지만 그 선한 의지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로서 그를 사랑의 감화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은혜 그 자체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다가 열심이 교회 생활을 하는 어느 지체가 지체를 비방하거나 혹은 비방하지 않아도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단점을 서슴없이 말하거나 그의 사실이라도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수치를 말해서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보거든 그가 은혜가 떨어진 성도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은혜를 받도록 위해서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씩씩하고 단호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도 그것은 껍질일 뿐이고 속에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에 사랑은 고갈되었고 그래서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지체의 단점을 보는 것이니 그것은 뛰어난 지혜가 시켰다기보다는 사랑 없음이 발견하게 된 단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사실 회심하고 사년동안 저희 아버님을 철저히 미워했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은 아버지와 원수 맺고 있었습니다. 회심한 후 사년동안 그런 일은 내 마음속에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적도 본적이 없고 나도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를 가기 위해서 결정을 해야지 되는데 신학교를 가겠다고 그랬을 때 아버님이 심하게 말씀하시면서 호적을 파가지고 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때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습니다. 했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 때문에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기를 거절하신다면 내가 평소에 바라던 바입니다. 하는 이 못된 심정이 이 안에서 발동을 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제가 파가지고 가겠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단호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세월이 지난 후에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한없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진짜로 제 마음속에 들렸습니다. 애야, 너희 아버지가 너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너를 많이 사랑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만약에 내가 너에게 비추어준 것 같은 복음의 빛이 있었다면 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만약에 이런 복음의 빛을 받지 않았다면 너희 아버지보다 더 나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낮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은 아버지가 내게 준 상처 때문에 내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안에 사랑 없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였구나. 저의 제 이의 회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안에 있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사랑의 싸움은 21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평생 가정과 부모에 대해서 설교할 때 눈물 없이 설교할 수 없는 그런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아픔이었지만 그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저는 내 자신에 무릎을 꿇는 수많은 기도의 시간들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그 많은 탐구의 시간들이 준 것보다도 더 많은 성화의 길로 저를 인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깊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은혜 안에서 정말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28년에 매이플라워를 타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프린스라고 하는 그 당시의 목사님이 아주 어린나이에 신대륙에서 살았는데 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프린스 목사님에게 이야기를 해준 것을 그 목사님이 전했습니다. 매이플라워를 타고 온 이 할아버지는 후일 자기의 손자에게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가 매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정착해서 개척생활을 하며 7년을 함께 성도들과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함께 생활한 성도들 중에 누구도 형제를 비방하거나 뒤에서 그를 미워하는 말을 하거나 혹은 은근이라도 사람들에게 그를 깎아내리는 언사를 하는 것을 7년 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단다. 하고 그에게 회고하였습니다. 결핍으로 가득 차고 시시각각으로 사랑하는 아들, 딸이 그리고 부모와 형제가 죽어가는 그 처절한 죽음과의 싸움 속에서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 힘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V. 결론과 적용
그래서 성도는 이 은혜를 받지 않고는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 없음이 발견될 때마다 지체들의 결함과 그리고 부족함이 보여서 그를 미워함이 생길 때마다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얼마나 많은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보좌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나에게는 없는 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나는 갖지 못한 사랑을 소유할 수 있도록 감화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유언과 같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아프더라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어도 용서하고, 허물이 보이더라도 덮어주고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남을 존귀하게 여기며 형제의 결함을 볼 적마다 그 결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결점이 많은 지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더 온전해져서 사랑으로 가득 차서 예수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서로 존경함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I. 본문해설
오늘은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특별히 서로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편지를 받을 때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고린도 시는 항구도시고 매우 발달한 무역도시였습니다. 아덴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는 심히 약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복음을 증거 했고 그 복음의 미련한 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고린도 1장에서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 고린도 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세워주셨지만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기보다는 도시의 정신에 의해서 교회가 오염이 되는 불행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를 지배하던 정신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물질적인 이기적 정신이었습니다. 항구도시였고 그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산에 매우 밝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은 계산이 적고 인심이 후하지만 도시는 각박한 곳이 늘 우리 인간의 경험입니다. 거기에는 아고라라고 불리는 굉장히 커다란 시장이 있고 거기에서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배들이 물건들을 사고팔았던 도시입니다. 이미 주전 3-4세기 헬라시대 때부터 거기에 도시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부터는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빠져 물질주의에 흐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런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는데 그만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타락하게 되니까 이런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교회에 스며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의 장을 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안에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정신은 파당의 정신이었습니다. 당시 이 고린도뿐만 아니라 모든 로마에 있는 도시들은 항상 도시가 있는 곳에는 말 잘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미 희랍시대에, 그리스도 시대에 폴리스 시대부터 이 도시는 이런 유명한 철학자들이 모여서 자기의 의견들을 설파할 수 있는 자리를 가졌고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언쟁하고 논증하는 그런 정신들이 도시에 있었으니 그런 주의 주장을 따라서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런 파당의 정신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이 하락하게 되자 이런 세상의 논쟁하는 파당의 정신이 교회 속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에 있는 신자들이 나는 아볼로 파요, 나는 바울파요, 나는 게바파요, 심지어는 나는 예수파라고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으니 결국은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야 변혁의 물결 대신에 세상에 오염된 물결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도덕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이 도덕적인 타락은 특히 성적인 문란함으로 나타났는데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자행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린도에 가보면 고린도 시의 유적이 있고 거기에서 산 쪽으로 한 100미터 높이 위에 신전이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 신전에는 지금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지만 거기에 신전이 높이 서있어서 거기에서 사람들은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 신을 섬기는 제의 안에 풍년을 빌고 그리고 번영을 비는 그런 제사를 드리는 제의 안에 성적인 교접이 있었습니다. 예배 행위 속에 그런 것이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많은 신전에 창녀들이 있어서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신들을 섬기는 예배 행위 가운데 서로 돈을 주고 교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덕적인 문란은 이제 그 아프로디테 신전에만 유일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시대 때부터 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많은 도시 속에서 이런 도덕적인 불결들이 자행이 되었고 특별히 그곳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항해 생활로 금욕했던 뱃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래서 공공연하게 몸을 파는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갖는 이런 것이 도시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도시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런 도덕적 불결함을 제하고 성결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우셨지만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나빠지고 나니까 도시의 이런 정신이 오히려 교회 속에 스며 들어와서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문득 “너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하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II. 성도의 몸이 성전임
A. 성결한 삶
그래서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최소한 이 문맥에서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결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예전에는 우리 안에 복음의 광채도 없고 성령도 계시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만들어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두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 안에 그 보증으로서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그 성령님은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고 신자 안에 오래도록 계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고 또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작은 성전이 되게 하셔서 그 작은 성전이 합해져서 큰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육체는 이제 더럽고 경멸받아야 할 육체가 아니라 거룩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훌륭한 예배당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오면 예배당이 아닌 곳에 있을 때와 다르게 우리의 행동거지를 주의하고 삼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건물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건물과 다름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 예배당 건물 안에서는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예배당의 건물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시니 그런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삶을 우리의 육신으로 살도록 그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호주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시드니에 들려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제게 아주 신비하고 묘한 장소가 있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그리고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호주 이민의 역사가 약 200년 정도가 된다고 하고 처음에는 영국에서 흉악한 죄수들을 격리시킨 장소로 호주가 시작되었고 시드나라는 사람이 이제 거기에 총독으로 오면서 시드니라는 도시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그 초창기의 지어진 큰 건물들은 교회가 아니면 공공기관이었습니다. 그 건물들은 이제 주인이 바뀌어도 함부로 헐지 못하도록 국가에서 문화재나 사적지 비슷하게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큰데 아마 최소한 예배당에 6백 명 이상 들어갈 수 있는 큰 예배당이었는데 그 예배당이 아마도 교인이 점점 줄어서 도저히 교회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건물이 팔렸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이 건물이 교회에 팔렸으면 그냥 교회가 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술집 하는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헐지 못하게 되었으니 십자가만을 떼어버리고 그것을 그대로 술집으로 만들었습니다. 별로 개조도 하지 않고 의자만 모두 치워버리고 강대만 치워버리고 그렇게 가벼운 식사를 겸한 술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서 그렇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공간이 네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길 밖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마시는 곳이고 이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회중석에서 먹을 수도 있고 성가대석에서 먹을 수 있고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강대에서도 먹을 수 있는데 똑같은 음식을 시켜도 회중석에서 먹는 게 제일 싸고 그리고 두 번째 성가대 석에서 먹는 것이고 제일 비싼 곳이 강대에 식탁을 펴놓고 술을 먹는 것이 제일 비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하는 것을 마음이 많이 아파서 내가 뭐 할일이 없어서 여기에서 밥을 먹겠는가 하고 갑시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곳을 보면서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는데 우선 첫째는 한국 교회도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서 내게 세우시게 한 교회가 1-200년 후에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천국에서라도 얼마나 슬플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 내게 돈이 있다면 당장 이곳을 사서 술집을 다 헐어버리고 그리고 다만 10명이 모이더라도 다시 십자가를 세우고 여기를 교회를 삼았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애절하였습니다. 우리가 건물 그 자체는 성전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 예배당이 되지만 술을 팔면 술집이 되고 그리고 거기에서 오락을 하면 오락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항상 똑같은 정도로 능력 있게 살아계신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서 세우신 존귀하고 아름다운 교회임은 틀림없지만 교회가 모두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모여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교회를 다니면 다 신자입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은혜를 받아서 열심이 있는 기도생활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성령님이 그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신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즘 매우 마음이 강퍅해지고 모질어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독한 반감을 품고 제 멋대로 사는 짐승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성도임에는 틀림없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은 천국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만 요즘 두 사람은 한사람은 아름다운 성전이고 한사람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성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는 성도도 많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은혜의 감격, 죄인의 가슴을 깊이 찔러 그 죄악 된 피를 쏟게 만들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도 적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의 없어서 핍절한 영혼이 공연히 모였다가 핍절하게 흩어지는 그런 병든 교회도 있습니다. 둘 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 그래서 우리들이 사랑할 교회임에는 틀림없지만 현재적으로 보면 그 두 교회의 상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주님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시는 진짜 아름다운 성전으로서의 성도의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성령께서 충만하게 거하셔서 그래서 아름다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성전이 작은 성전들로서 하나하나 모일 때 그리스도의 몸의 원래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게 하고 그럴 때 그 교회 안에는 성령이 충만히 거하셔서 능력과 지혜, 그리고 사랑으로 예수 하시던 그 일의 뒤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성전 됨에 어울리는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B. 서로를 존귀하게 여김
둘째는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 각 사람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각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아주 귀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삼가며 대하여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바로 아래는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더럽힌다고 하는 이 말이 번역이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파괴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하리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우리들이 작은 성전을 파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 자범죄에 빠짐으로서 우리 몸을 막 굴려서 우리의 작은 성전인 이 몸을 파괴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됩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거나 멸시하거나 혹은 그를 경멸하거나 비난하거나 이유 없이 그에게 모욕을 주거나 하는 이 모든 행동들은 작게는 자기가 비난하는 개인을 그 작은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이고 크게는 그 사람이 함께 붙어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큰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성령의 전이라는 이 사실은 누구 한사람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지체가 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작은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만 이렇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전인 것이 아니라 요즘 은혜가 떨어져서 실족하고 있는 지체들도 아름다운 성전이고 심지어는 죄를 지어서 아주 나쁜 영혼의 상태가 되어있는 사람, 스스로는 자기를 막 굴려서 성전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도 역시 우리 앞에서는 여전히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그를 존귀하고 존중하게 대해주는 그 정신과 자세에 의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이런 정신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봉사를 잘하고 성령 충만하고 헌금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존귀하게 대하고 그리고 은혜가 떨어지고 실족한 사람들은 교회가 함께 일해 나가는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것은 이런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주님의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유의 부족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돈 많고 세상의 지위 높은 사람들은 매우 특별하게 대접하고 하찮고 지위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대우하는 이런 것들은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인데 이미 이런 일들은 초대교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배당에 잘 차려입고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이 방문하면 예배위원, 안내위원들이 호들갑을 떨고 그를 인도해서 교역자에게 소개하고 편안한 자리에 앉혔던 모양입니다.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서서 예배를 드리던지 아무 곳에나 가서 앉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신랄하게 탄핵하면서 그렇게 성도를 대하는 태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이런 지적은 고린도 시에서와 같이 오늘날 물질주의적인 풍조,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더 많이 받아야 할 경고이고 반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이 사람들이 이런 도시 속에 숨쉬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깨어있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적인 도시의 정신에 자신도 물들게 되어서 세상에 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에 와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 성도의 공동생활이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렇게 모일 때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이 무리들이 함께 하는 이 공동생활 안에서 세상에서 통용될 수 없는 또 다른 하늘나라의 가치가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생활의 유익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교회는 실패한 교회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주고라도 그것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저에게 매우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매우 가슴이 아팠습니다. 성도들이 한 150명 이상 덜 나왔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야구경기를 보느라고 덜 나왔습니다. 웃음이 지금 나옵니까? 그런 태도들이 잘못된 태도들입니다. 왜 주일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합니까? 자신의 신앙의 결점을 왜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진실하지 않고, 그게 어떻게 웃을 일입니까? 물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집 가까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리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다른 일정에 의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이 일이 어떤 식으로든지 변형되거나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의심했습니다.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게 정말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맞나. 몇 번을 확인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래서 졌습니다. 6대 0이 뭡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다 세상의 정신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온 것입니다. 정말 우울한 주일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이런 세상의 정신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이 성도의 공동생활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정말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종처럼 섬기고 이 세상에서는 정말 하찮은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는 정말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서 주님 앞에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또 스스로 낮아져서 사람들을 섬기는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맛보고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교만하거나 높아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일체의 겸손하게 행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본받고 그리고 이런 정신으로 이 세상을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성전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를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존경하고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의 교부들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작은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모두 그 하나님 때문에 작은 신들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성전 개념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III. 상호 존경의 정신
A. 자연적 이점이 아님
그러면 이런 상호 존중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뭘 가르치는 것일까? 우선 첫째는 자연적인 이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 나보다 뛰어난 학식, 오래된 교회 생활의 경력 이런 것들 때문에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를 존경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함께 존중해주는 것이 쉽지만 우리를 존중하기는커녕 멸시하고 모욕하고 하찮게 여기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평판을 깎아내리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래서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 사람을 깊이 존중하는 것, 존경하는 것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런 깊은 존경심이 자연적인 이점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 안에 있는 돈 없는 사람들, 세상에서 하찮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 학식이 없어서 무지한 사람들, 성격이 유별나서 이리저리 튀기 때문에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받은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의 자연적 이점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자연적인 그 이점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자연적인 나쁜 사실들이 발견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동도의 공동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함께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는 그것은 이런 자연적인 이점 때문이 아닙니다.
B.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봄
그럼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유지되어야 할 상호존중의 정신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제일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예절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가,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뛰어난 지도자가 되는가, 아닌가, 이런 것들은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 한 사람이 태어나서 교육을 받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의 존재를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게 바로 교양입니다. 제가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뛰어난 설교의 능력, 하늘의 불을 불러 내리는 기도의 영성,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수사력, 그리고 불세출의 지도력 이런 것들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별한 가치의 그야말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물이다. 그런 특별한 가치는 보편가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보편가치는 교양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있는 설교자가 되려고 먼저 애쓰지 말고 교양 있는 신자가 되려고 애를 써라. 그래서 많은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저를 비롯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양 없음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상식이하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정말 교회에 와서 주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으면 제 버릇 개줍니까? 옛날에 교회 밖에서 교양 없고 그리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던 그 조잡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단박에 거룩하고 교양 있는 처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까? 그렇게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교육 자체가 전형적인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육이 맨 처음에 어떻게 생긴지 아십니까? 성경 가르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애들 생활을 고쳐주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코 닦는 법, 손 닦는 법, 인사하는 법, 식사하는 예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예의를 표하는 것, 글을 읽는 것 이런 것을 가르쳐주다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주일학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을 합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이 공동생활 속에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성도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책하면서 여러분들의 삶을 공동체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상호 사람과 존경의 정신이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으로부터 도무지 나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편함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먹고 일어난 자리에 지저분한 것이 떨어져있으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왜 나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칩니까? 깨끗하게 정돈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휴지가 떨어져 지저분하니까 목사님이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애들아, 빗자루 가지고 와서 좀 쓸어라, 그랬더니 싫어요. 목사님, 우리가 월급 주는 사찰이 있는데 우리가 왜 합니까? 그것은 자기의 엄마 아빠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 애들이 어디서 그런 태도를 배웠겠습니까. 엄마 아빠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을 엄마 아빠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자신을 삼가는 것, 이것이 모든 덕성스러운 생활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이렇게 보면 마음에 안타까움을 주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 사람이 성도니까 교회 안에서 저렇게 붙어있지 여기가 직장이었으면 벌써 도태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인격이 조잡합니까. 그러고 어쩜 그렇게 약합니까? 아마 그 사람은 가정에 가면 아내나 아이들에게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규모가 있고 정상적인 직장 속에서 결코 직장생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가 사장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영업을 한다면 아마 똑똑하고 사리분별이 있는 직원들은 아무리 월급을 많이 주어도 그 사람 밑에 못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 밖에 모르는 그 오만불손함, 아무데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똥물 쏟아지듯이 나오는 그 혈기, 자기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자리가 누구의 존전인지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그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는 그 대변과 같은 더러운 논변들, 그렇게 해서 사회 속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사려 깊은 사람들은 한두 번 만나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사업과 모든 비즈니스, 거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절차를 따라서 사람들의 상식선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리고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얘기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우리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다.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에서 창 들고 칼 들고 교회를 불 지르며 핍박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그리고 공동생활의 저해를 가져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교회에 들어오는 이 순간부터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삼위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생각을 하고 우리들이 행동하고 어려워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의회 가운데 가장 예의바르게 의사가 진행되는 나라가 정치사에서 영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전문적으로 영국의 정치사에 대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에 갔을 때 누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한 사람이 아무리 이치에 닿지 않는 엉터리 행동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반박하는 의견이 나와서 할 수 있는 격렬한 표현의 최고는 매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것입니다. 그 속에는 저 자식, 개자식. 이런 영어가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이런 후진국에서 가서 멱살을 붙들고 집어던지고 개자식, 소 자식 하는 그런 원색적인 욕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그 나라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점잖게 표현이 될 수 있는가? 원래의 그 영국 사람들의 태생이 켈트족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앵글론 색슨족이 넘어갑니다. 굉장히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나중에 로마가 지배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예절을 철저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의회 안에서도 초창기에는 그랬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속에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가장 품위 있는 절제가 있는 그런 의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뭐 어느 정도 사실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 모인 그 국회만도 못한 그런 수준에 회의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저같이 불안전한 인간도 그런 속에서 그렇게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성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호존경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당구공과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혈기와 분을 참지 못하고 누구를 모욕하거나 비난합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그 다음에 자신도 혈기와 분노를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고 토해냅니다. 그러면 그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서 막 움직이면서 당구 판에 수많은 구슬들이 함께 맞으면서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손해가 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 후배 목사님들에게 항상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교회 안에서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리고 심히 모욕을 당하는데 그래서 결국 의견이 갈려져서 교회가 자네 때문에 찢어져야 할 상황이 된다면 떠나라. 가라.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이 있다고 교회에서 그러고 사나. 상처와 아픔을 혼자 다 짊어지고 교회 망가트린 목회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일평생 낙인찍혀도 교회가 아픔을 겪는 것보다 낫다. 사람은 당신을 불명예 목회자로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신다.
실제로 최근에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교회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목사님이 뭔가 사립초등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그래서 미래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잘 교육을 시키려고 그렇게 비전을 가지고 추진을 했습니다. 일부는 따라갔는데 일부는 왜 돈만 없애고 그런 허황된 일을 하는가 하고 반대를 해서 결국은 교회가 둘로 나누어져서 아주 치열하게 대치를 이루었습니다. 아마 평범한 사람 같으면 옳은 일 하려고 하는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뭐 교회 반 갈라서 나가서 하든지 아니면 다 무시하고 하든지 그런데 목사님이 다 털고 혼자 사표를 내고 나가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내가 없어지면 된다. 그러면 내가 다 뒤집어쓰고 상처를 받고 내가 떠나도 교회는 상처를 받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그게 성전을 아끼는 정신입니다. 그랬더니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목사님이 그러고 떠나가니까 그 교회의 교인도 아닌 사람이 그 목사님께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도 있구나. 그래서 사제 40억을 털어서 교회를 지어주었습니다. 그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런 복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정신을 그 목회자뿐만 아니라 여러분 각자 모두가 받아야 합니다.
자, 나에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을 근거도 없는 비난으로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고 회개할 것이고, 사실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시니 그 인간이 원래 그렇게 너절해서 세상에 살던 그대로 교회에 와서 은혜가 떨어져서 그 짓을 하는데 그것을 받아서 똑같이 행동을 해서 받아쳐서 그를 진흙 판에서 개 싸우듯이 싸워서 교회에 상처를 주어야지 그게 성도의 도리겠습니까? 그냥 혼자 뒤집어쓰십시오. 그리고 그냥 다 받으십시오. 그럼 거기서 끝납니다. 수없이 공이 날아오는데 내게서 멈춥니다. 그래서 다른 당구공들은 안 움직입니다. 그럼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해야지 됩니까? 그게 교회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보면 정말 힘든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인격이 조잡합니까? 그런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아내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겠으며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 가면 직장에 있는 상사에게 인정 못 받고 동료들에게 배척받고 후배들에게 멸시를 당할 그러기에 적합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교회는 망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고 같이 멸시하고 진흙탕에서 개 싸우듯이 싸우고 이런 것은 세상에서 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어느 한사람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자기를 낮추어야합니다.
언젠가도 어느 동료목사님이 자기가 너무 목회가 괴롭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 그렇게 생각하고 사십시오. 언제까지? 그러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는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순간부터 그분은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을 포기하시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영광과 존귀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이익과 부요함은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멸시와 천대는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공생애 3년을 사시는 동안에 짐승 같은 수많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아주 더러운 추잡한 죄인들을 수없이 만나셨는데 어느 한순간도 그 인간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너무나 무지해서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용납하셨고 심지어는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간음하다 잡혀온 그 여인도 일으켜 세워주시면서 주님이 그를 용서하시고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돌멩이 대신에 사랑의 언어로 어루만지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터이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나무에 못 박는 그 흉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한번도 비난을 복수로 갚으신 적이 없고 멸시와 모욕을 비방으로 갚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나갔더라면 정말 왕따 당하기에 적합했을 인간들을 왜 용납해야지 됩니까? 그 사람이 잘나서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의 믿음의 눈이 보기 때문에 그를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렵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자기 비하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온전해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곳이 여기 이 교회입니다. 정말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 행했던 일들을 파노라마처럼 모두 스쳐가듯이 우리가 보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하찮게 생각했던 우리의 많은 행실들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도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 있는 경멸의 마음, 하찮게 여기는 멸시의 마음, 이런 것들로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지체들이 보이지 않는 뒤에서 험담하고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 근거도 없는 말로 지체들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이 모든 행동들은 결국은 하나님께 매우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직접적으로는 그 작은 성전인 성도를 파괴하는 행위이고 크게는 그리스도의 몸인 큰 성전 그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인데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과 자신이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제 살을 파먹으면서 자기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어리석음을 어찌 다 그 피곤함을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삶으로부터 돌이켜서야 합니다. 서로를 깊이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사랑이 안 가고 미운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귀어보면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이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교제를 하다가 보니까 아름다운 것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어서 사랑이 가더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의무중 하나는 가장 야비해 보이는 성도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맞지 않은 것이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자신에게는 없는 아름다운 것이 꼭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사랑의 의지입니다. 그런 사랑의 선한 의지를 발휘하는 가운데 진짜 사랑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동안에 결점은 눈에 띄지 않게 되고 장점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인식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사랑하며 상호간에 깊이 존중하며 예의바른 삶을 살아가며 이렇게 하는 이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공동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 이로 인해서 그는 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게 됩니다.
C. 야망과 경쟁 대신 사랑과 존경
마지막 세 번째 상호존중의 정신은 경쟁과 야망이 아닌 그야말로 존경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에 시대에 살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적수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을 훈련받습니다. 얼마 전 잡지에 보니까 일본에서는 5세 때 좋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3세 때부터 과외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치원에 가서 입학시험을 볼 때 면접을 잘하는 것을 가르치는 학원까지 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게 모두 다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결국은 경쟁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정신은 야망과 경쟁의 정신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의 정신입니다. 내가 이겼어도 쓰러진 사람을 쓰러진 채 내버려두고 열광하는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손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는 것이 아니라 그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쓰러진 자신의 적수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먼저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은 나중에 배워도 되니까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우리들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 떨어진 사람들을 용납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주셔서 그 물질을 유지하게 하신 것은 그 돈 좀 나누어주어서 다른 사람들 쓰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부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공평하게 처신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기피고 살기 위해서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지 배우고, 소유하고 갖고 있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 남 주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는 함께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존중과 사랑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경쟁과 시기심이 가득한 가운데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아시다시피 남전도회도 없고 여전도회도 없습니다. 제가 어려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심 있는 여전도 회장은 있는데 그 회장이 그 임기가 끝난 다음에 열심이 있는 회원 되는 여전도 전직 회장을 본적이 없습니다. 남전도 회장을 할 때는 펄펄 뛰고 봉사하고 사람들이 열심을 안 낸다고 탄식을 하는데 임기 끝난 다음에도 열심이 있는 회원이 되어서 그 회장을 돕는 전직 회장은 본적이 없습니다. 구역장 할 때는 구역원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하는데 구역장 그만둔 가운데 구역장을 겸손히 섬기는 열심이 있고 구역장을 이해해주는 전직 구역장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 그렀습니까? 그게 예수의 마음을 품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꼭 무슨 감투를 씌어주어야지만 겨우 열심을 내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안에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상호존중의 정신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혈기에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항상 부족하지만 예수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참을 수 있을 때 물론 참고 참기 매우 힘들 때도 견디고 그리고 멸시와 모욕은 자신이 당해도 교회는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해도 그것으로서 모든 갈등을 멈추게 하게 하는 십자가를 지는 자세, 이것이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만드는 그런 덕스러운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영적인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IV. 결론과 적용-그리스도의 영적 가족들로 살아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세상에서 배운 정신이 언제 우리 부모님에게서 ‘약한 자 앞에 무릎을 꿇고 강한 자 앞에는 굴복하지 마라. 네가 승리해도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 승리에 심취하는 일보다 먼저 해라. 너 자신을 깨트려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네가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라’ 언제 우리 부모가 가르쳐주었습니까? 그 시대에 태어나서 우리는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요즘에 얼마나 막 기르는지 보십시오. 음식점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애가 갈비 집에서 밥상에 올라가서 막 뛰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밥 먹다 애야, 좀 시끄럽다. 좀 조용히 해라. 그랬더니 그 자리에 있던 그 애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멱살을 잡고 네 자식이 뭔데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을 기죽이냐고 하면서 마음대로 뛰어.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애가 군대에 가면 그럼 고달픈 것입니다. 아들 많은 집에 우리처럼 태어나서 형한테 치어보기도 하고 얻어맞아보기도 하고 동생에게 고자질당해서 아빠에게 맞아보기도 하고 이러던 애들은 군대에 가면 잘 적응합니다. 원래 별로 대접을 못 받았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버지가 대신 나와서 멱살잡이를 하고 야, 마음대로 뛰어. 이렇게 배운 애들이 거기에 가서 그런 애들이 탈영하고 자살하고 싶어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 애들은 군대 6개월 더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꺾는 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좀 희생하는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꺾는 것을 가르쳐주어야지 되겠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를 꺾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내가 요즘 그래서 자유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내가 생각하는 틀에 벗어나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제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제가 주례사를 하는데 매일 창세기 2장을 하는데 아니 유례없이 설교를 하고 나갔는데 사람들이 막 쭉 서서 인사를 하면서 오늘 주례의 말씀에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그래서 매일 똑같은 것을 하는데 뭘 은혜를 받는가 하고 그렇게 좋으면 다시 한 번 결혼해보라고 그랬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우리 집사람 보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도 은혜를 받았다고 그래서 아니 그게 뭐 수백 번 더 한 설교인데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데 뭐가 그렇게 은혜가 되는가, 그랬더니 특별히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평소에 안 하던 것을 조금 했습니다. 효도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뭘 이야기했는가 하면 부모를 고치려고 그러지 마라. 네가 시집가서 시부모 마음에 안 들고 네가 장가가서 처갓집 장인 장모는 왜 저러고 살까? 그러지 말고 고치려고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괜히 불난 만 일어나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사시게 내버려두고 그게 죄악이 아닌 한 놔두고 네가 적응을 하라. 그게 그렇게 은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에게 인사한 사람들이 아직 며느리 볼 나이는 안 되었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요즘도 우리 집사람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으면 나를 좀 꺾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고 싶다고 하는 대로 하게 나두라. 나는 아이가 지금쯤 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애야, 아빠는 사실 그게 마음에 안 들거든. 그렇지만 네가 꼭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한번 해봐라. 이렇게 양보하십시오. 내가 싫어도 그게 죄가 아니면 좀 꺾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어나는 샛별처럼 그렇게 좀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그렇게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좀 불편해지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너무 행복한 그런 공동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 각 사람은 죽고 주님을 충만하게 살아계셔야 합니다.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영적인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 두 번을 반복하겠으니 가슴에 새기시든지 적으시든지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과가 없이 용서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것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 가족이라는 두 글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가족이라는 말 속에서 그것을 못 느꼈다면 미성숙한 인간입니다. 가족은 용서 없이, 사과 없이 용서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가족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애야, 가족은 뭘 해주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그냥 가족이란다. 그 안에서 가족 밖에서는 따돌림을 받았을 사람들이 가족에게 사랑을 받고 가족 밖에서는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것을 가족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고 가족 밖이었으면 기다려줄 리가 없는 그 사람을 가족이기 때문에 돌아설 때까지 기다려주고 기뻐하고 이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벌어오고 큰소리 칠 지금은 아내가 꼼짝 못하지만 돈 떨어지고 늙으면 이제 멸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녀인 여러분들이 힘 있고 권력 있을 때 마구 행사하면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년에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가족 속에서 제일먼저 자기를 깨트리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고 이해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고 자기를 깨트려서 다른 가족들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하고 내가 조금 불편하고 희생해도 가족들이 하고 싶은 대로 배려하고 이런 삶을 살 때 열매들을 노년에 다 거두게 됩니다. 이런 가족의 정신이 이 교회 공동체 속에 그대로 구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이용해서 그것을 짓밟으면서 그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사는 막된 성도가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자기를 용납해주지만 주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젠가 한번 하나님이 혼내실 것입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살면서 교회에 수없는 상처를 주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칼을 댄 그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준엄하게 판단하고 심판하십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은 성도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배교한 자입니다. 수치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사랑해서 명예를 보존해주고 나를 멸시하는 사람을 내가 높이기 위해서 낮아지는 것은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우리들이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때문에 그를 깊이 존중하고 그리고 사랑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그렇게 하면서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프기도 하고 어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일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 생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예뻐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나눔의 정신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I. 본문해설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위해서 나눔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일어났던 성령강림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만 우선 이 성령강림 사건이 선교적으로 보면 교회공동체를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켜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선교적 사건이었습니다.
또 설교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성령강림 사건은 설교자를 만들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교훈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험하게 하심으로서 그들 모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깃들인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외칠 수 있는 선포의 제목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외치고 논리 있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지를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론적으로 본다면 이 성령강림 사건은 공동체로 하여금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각 신자는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한순간에 물 붓듯 교회에 부어졌고 그때에 성도들은 공동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교회는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완전한 공동성의 모습을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이미 몇 주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성도의 완전한 문자 그대로의 공동생활은 영원히 유지되어야 할 공동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시대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가정을 버리고 하나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진정으로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허락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도들이 완전한 문자 그대로의 공동생활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교회의 영적 수준이 심각하게 하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흩어져 만민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공동생활의 정신을 가지고 흩어질 삶을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흩어져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초대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이 완벽한 성도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도의 공동생활의 표준을 제공해주고 그 정신을 우리에게 표준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랑 강림 사건이라고 하는 성령 강림사건 이후에 교회가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완벽한 상호유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제 그렇게 성령 강림을 경험한 성도들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사도들이 강한 핍박을 받게 되었을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런 위기 앞에서 저들은 더욱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경험할 때 똑같이 성도들은 복음을 경험하고 사랑에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그리고 그들은 공동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II. 성도의 공동생활과 물질
A. 물질을 경멸치 않음
그러면 이런 성도의 공동생활과 물질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물질을 경멸하는 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의 물질관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 역사에 보면 물질을 경멸하는 것이 영혼의 놀라운 덕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가난을 택하고 물질을 경멸하고 미워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올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견해는 물질을 경멸함으로서 영혼이 고양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물질은 오히려 선한 것이고 이 선한 것을 인간이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가, 이것이 정말 성도의 공동생활의 아름다운 정신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이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선한 것이지만 물질 자체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이 물질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질서에 놓고 그것을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가에 의해서 이 물질은 악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선을 이루는데 기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선함과 악함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물질은 그 자체를 경멸하는 것이 신앙의 높은 덕성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물질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부도덕한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이 물질을 사용하는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가 더욱 타락하고 망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명은 물질을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물질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적극적으로 소유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그렇게 쓰일 수 없었을 물질들을 하나님이 경외하는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에 가장 합당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물질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모든 물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이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법적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소유들은 불법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점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정에서 우리들이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할 수 없이 그들과 경쟁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경쟁 속에서 이 물질들을 우리들이 찾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차지하고 있고 누리고 있고 그것들을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도록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서 빼앗아야 합니다.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빼앗아서 그래서 그 모든 물질세계 위에 자기의 깃발을 꽂았던 그 사람들의 깃발을 꺾고 하나님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도록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 물질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사용하셨을 그런 방식으로 그런 물질들을 사용함으로 그 물질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물질관입니다.
공동생활은 바로 이런 물질을 공동적으로 사용해서 그래서 집단적으로 힘을 합해서 이 땅에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개인적인 탐욕을 버린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 물질을 되찾아야지 되겠다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성도들의 기업을 방문하러 갔는데 목사님, 저는 아무 욕심도 없습니다. 그저 이 사업해서 밥이나 먹으면 되지 제가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정말 낙심이 됩니다. 왜 그럴까? 사업을 하면 마음에 꿈을 가지고 이 사업을 잘해야지 되겠다는 꿈을 가져야지 밥이나 먹으면 된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상에 보냈을 때 그 사람은 밥벌이나 하라고 보낸 사람밖에 더 됩니까? 아니 밥이야 뭐 꼭 그 사업을 해야지 먹겠습니까. 어디에 가든지 먹지. 교회에 와도 먹여주는데. 아니 왜 그러는지.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은근히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자기는 그런 욕심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욕심이 없으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막 열심히 벌어서 신나게 쾌락을 즐겨봐야지, 이러면서 사업하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왜 바보같이 그런 사람하고 비교를 합니까? 아니 자기가 그렇게 밥이나 먹으면 되지 하는 동안에 경쟁사는 그 사람의 밥그릇까지 빼앗아가려고 하는데 그래서 경쟁사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정치인들에게 바치고 그래서 나라를 부패하게 하고, 그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하며 쾌락을 즐기고, 그 돈을 가지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이 땅을 자꾸 망가트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직업전선에 갔으면 그러면 남들이 그렇게 하고 살 때 치열하게 노력해서 그것을 빼앗아서 그것을 못하게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밥이나 먹으면 되지요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나쁜 삶을 수수방관하는 그런 부지중의 그 사람들과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밥이나 먹고 살 바에야 길거리에서 깡통을 들고 있는 것이 낫습니다. 왜 그렇게 사업을 합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꿈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렇게 해서 목사님, 성도들이 전도를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럼 아! 저는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밥이나 먹으면 되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저를 목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럼 목사의 소명과 이 세상에 파송 받은 성도의 사명이 틀립니까? 항상 오늘 이 예화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러분들이 학교 선생님이면 밥이나 먹으면 되지. 그럼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삯군이지. 그럼 똑같이 기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삯군 신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사업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5시간을 잘 때 1시간 덜 자고, 다른 사람이 3시간 고민하면 4시간 고민하고, 다른 사람이 1시간 연구하면 2시간 연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열심히 사업을 해야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어느 성도가 있었는데 화장품 가게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늘 가게를 하면서 늘 섬겼다기에 어떻게 섬겼는가, 했더니 전도사 사모님 오시면 크림 하나 드리고, 선교사 사모님 오시면 영양크림 하나 드리고, 목사님 사모님 오시면 클린징 크림 하나 드리고 그래서 내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 당연히 망하지. 그리고 열심히 섬겼다고 합니다. 기업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헌신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 대신 부정한 방법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정정당당하게 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마음의 정신이 돈에 대한 탐욕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다 벌어서 그것을 올바른 질서대로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기도생활을 못합니다. 하면 그것은 지금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물질이 많이 들어오게 될 때 그때 흔들림이 없이 올바른 정신을 그 사람이 안 가지고 있으면 그 물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쓸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누구입니까? 일생동안 마음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마음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타락합니다. 자기가 다윗보다 낫습니까? 뭐가 낫긴 낫습니까? 신앙 없고 돈 많이 섬기고 사람들이 와서 굽실거리면서 그 사람이 뭐가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라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업에 빠져서 기도도 안하고 심지어는 주일도 범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커봐야 아무 희망을 못 느낍니다. 또 다른 종류의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그 물질을 자기의 질서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십일조는 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탬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망가진 방법으로 또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불신자의 삶에 의해서 망가지던 세상에 이번에는 물질을 많이 주신 신자에 의해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전자가 낫습니다. 왜 사업을 한다고 기도생활도 안하고, 말씀생활도 안하고 그렇게 해서 기업을 성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한다고 해도 성공한 그날이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은 패배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 물질의 정신입니다.
B. 누림과 절제 사이
이제 이렇게 놓고 보면 물질을 보며 누리는 것과 절제 사이를 우리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구약을 정직하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실 때 이 물질의 복이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이 물질의 복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물질의 축복이 축복 속에서 빠지지 않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 믿는 대가로 내게 주시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으니까 이번에는 그 대가로 주는 그 물질을 가지고 이번에는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하면서 살아야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의 근원이 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그 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복의 복사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복은 우선은 그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언약백성을 삼으심으로 베풀어주셨던 그 놀라운 계시를 통한 영혼의 복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때 똑같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이 베풀어지고 하나님께 받았던 사랑이 그들에게 베풀어지는데 그래서 그 물질이 함께 따라 들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물질은 언약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소명을 이루어 가는데 꼭 필요한 자원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게 바뀌었다고 생각해서 이제 물질은 하찮은 것이 되고 영혼의 축복만이 강조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도 똑같이 이 두 가지가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예의적으로 물질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고난 받는 사도들이라든지 선지자들이든지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 주실 때 그들에게는 동시에 똑같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오는 영혼의 축복, 눈부신 진리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런 물질들의 공급을 통해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흘러가게 해서 그들의 고통을 면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함께 전해지게 한 것,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성도들에게 함께 부어져서 또 지식과 사랑이 되어서 이 세상 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전달하는 중요한 물질적인 통로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돈, 제물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사도행전의 공동체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성도들이 모두 주님을 믿고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이 물질은 더럽다고 그러면서 재산을 다 버려두고 맨 몸만 교회에 홀딱 들어와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갖다놓고 그리고 그것을 성도들에 의해서 모두 나누게 하고 자기는 그곳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원이 되기로 그렇게 자기가 헌신한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이번에는 우리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구약에서든지 신약에서든지 이 물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는 전혀 이것들을 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셨는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물질을 위탁받은 사람들은 자녀가 아니라 노예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돈을 한 푼도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실 때 주신 것은 노예의 관계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로 그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은 사람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그것을 사용해야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십 원 하나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쓸 수 없고 내가 쓸 것은 내가 따로 노동을 해서 써야지 된다고 하는 정신 나간 상속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복을 받을 때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길들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열심히 직업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돈을 법니다. 그 버는 것들을 성도들이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번 물질들을 자기를 위해서 다소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들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그 물질을 누리는 그 삶을 살아도 괜찮습니다. 가난하고 거처가 간데없던 사람들이 좀더 나은 주거를 마련해서 생활하는 것, 그리고 자녀들을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게끔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 또 음식이나 의복을 가난한 시절에는 조악한 것들을 가지고 살았지만 조금 나은 음식을 건강을 위해 베풀고, 육체의 품위를 위해서 좀 더 나은 의복을 입고,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들은 정죄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점에 있어서 좀 더 지체들을 너그럽게 대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차피 물질의 소유의 수준이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돈을 버는 방법만 가르치면 안 되고 돈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사업을 해서 저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이겨서 저 사람이 쓰러져서 비틀거리고 있는데 가서 목을 밟아버리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 그래서 도와주어서 다시 또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아름다운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이런 것들이 유지되지 않는 한 이 국가의 공동체성은 파괴되고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가야 할 국가의 공동체적 성격은 산산이 파괴되어서 서로를 원수 보듯이 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경쟁자들이 모두 파괴되면 자신이 늘 승리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생리입니다. 자본주의는 항상 경쟁관계를 통해서 발전되어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같이 성도들이 되었지만 어떤 사람은 물질의 여유,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소유를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는 저 사람이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굉장히 죄악시하고 그리고 그들의 물질생활을 획일적으로 판단해서 ‘아! 저 사람이 사는 집을 팔면 우리같이 사는 사람의 집은 열채를 살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저 사람의 한 끼 식사면 우리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대도 돈을 버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래서 물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어느 정도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을 누리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고 어거스틴도 반문을 했습니다. 누가 그것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분복이지만 이 물질에 대한 누림에서 얻는 행복이 너무 뛰어나고 놀랍기 때문에 이 물질을 통해 최종적으로 누려야 할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제해야할 의무를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하고 싶은데 안하는 모든 것이 절제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그러셨을 때 따먹고 싶은데 그것을 따먹지 않기 위해서 아주 분투하고 애를 쓰고 자기 자신을 누르는 것, 이것도 절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좁은 의미에서의 절제는 그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더 좋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삼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이 둘 사이는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금하셨는데 나는 절제하면서 그것을 안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못 참고 하나님의 계명을 깨트립니다. 그럴 경우에는 내가 계명을 깨트리지 않은 사람이 깨트린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유로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절제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 최대한 욕망을 뻗칩니다. 그때에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너는 왜 나처럼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 않는가 하고 정죄하거나, 그리고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아주 고도의 고양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증거라는 식으로 우월감을 갖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 보면 아주 내핍 생활이 깊이 몸에 배인 그런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경건한 삶을 살게 되기에 아주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자체가 널리 펼쳐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분수에 만족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비록 내핍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이 깊이 변화되어서 그렇게 보다 나은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내핍 생활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철저한 내핍 생활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본성적으로 내핍하는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핍한다기보다는 그래서 내핍생활 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생활에 본성이 되었고 그래서 낭비하는 사람을 굉장히 미워하게 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지금도 아마 그렇게 사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화장지를 사용하는데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고 항상 신문지를 사용합니다. 신문지 위에 화장지를 한 장씩 얹어서 사용합니다. 아껴 사용하기 위해서, 그것도 맨 처음에는 신문지만 쓰다가 이제 화장지가 많이 풍부해지니까 하나씩 얹어서 사용합니다. 그 자녀들도 철저히 그렇게 가르칩니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식구가 혼자 오줌을 누고 물을 내리면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5식구가 오줌을 다 누고 마지막 사람이 물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목욕한 물을 버렸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목욕한 물은 수건을 빨고 걸레를 빨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허드레 물로 베란다에 갖다 부어서 먼지들을 씻어내는데 사용합니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산다는 점에서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한 삶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우리나라 같이 아직까지 잘 살아야 할 나라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혼자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을 안사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까리따스를 통해 나온 삶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런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화장지를 한번에 두 번 세 번 말아서 쓰는 사람들을 경멸하게 미워합니다.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신문지로 뒤처리를 하면 큰일 납니다. 잉크 속에 묻어있는 독소들이 몸속에 들어갑니다. 그렇게휴지를 조금씩 아껴서 신문에 독소가 들어간 다음에 마지막에 대장암으로, 직장암으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는 일평생 태어나서 5천 원 이상 먹어본 적이 없다든지 하면서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식으로 생활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 하나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칭찬받을 만한 덕목으로서의 이 절제는 사실은 그렇게 타고난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는데 보다 나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을 스스로 마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그리고 그 절제는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절제는 가장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기 때문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도 맨 끝에 옵니다. 그만큼 절제는 어려운 덕목이고 주님을 향한 정말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이루기 어려운 덕목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성으로 그것들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에서 느끼는 아주 커다란 혼란이 이런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결점이 무엇인가 하면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렇게 봅니다. 또 정직하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덕목입니까? 그런데 한번만 거짓말을 한다든지 거짓말하는 것으로 오해된다든지 하면 그는 인간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신과 거리가 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내핍생활에 젖은 사람은 자기가 볼 때 상당히 과하다시피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 속에서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모든 덕목을 다 갖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약속은 기가 막히게 지키는데 낭비벽이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고 낭비벽은 없는데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얽히고설키면서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그것을 최대한 의로 여기며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될 때 공동체는 모두 그 칼에 맞은 상처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을 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생활을 하고 여러분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그것을 여러분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 정말 그렇구나. 돈 많이 벌고 사업에 있어서 성공한 그런 형제들을 보면서 너 왜 아씨시의 프란시스처럼 안사나. 그 사람은 옷도 벗어서 나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고 그러는데,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또 한 번 죄를 짓는 행동이 됩니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존중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하고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유의해야 할 것은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하고 물질로 고통 받을 때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물질에 복을 주시고 여유 있고 근심이 없어지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방탕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실컷 두들겨 맞고 다시 또 다 털어먹고 나서야 손들고 오는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라는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족함이 없이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있지 않으면 그 많은 물질에 대해서 우리들이 중립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물질 자체는 우리들을 타락시키지 않는데 그 물질에서 오는 기쁨을 능가하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데서 오는 그 행복이 그것들을 능가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반드시 물질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은 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물질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 싶어서 사랑에 빠집니다. 가난한 모든 사람이 물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부요한 사람이 물질을 탐욕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의 소유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중국에 일인분 식사가 한 끼에 4.980만 원 짜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먹는 게 아니라 두 시간 정도 식사시간이 걸리고 15번의 요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한 사람 먹을 만큼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 식사가 맨 처음 시작할 때 작은 만두 두개와 녹차 한잔으로 시작한다고 하는데 그게 25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요리 저 요리 나오다가 마지막에 그 요리에 가장 중요한 주 요리가 나오는데 한 사람 앞에 120마리의 잉어를 잡는다고 합니다. 잉어를 잡아서 잉어를 요리하는 게 아니라 양쪽에 붙은 수염 두개를 떼어서 240개를 한 접시에 놓고 요리를 해서 갖다 주는데 그게 요리의 절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누가 4980만원을 주고 그 요리를 먹나. 그럴 것입니다. 몇 년 전에 12명이 그 집에서 회식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다행히 아닙니다. 12명이 회식을 하고 6억을 내고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생각할 때 미쳤다. 그럴 것입니다. 미쳤습니다.
이번에 그리스에 갔을 때 나를 자기 아파트에서 묶게 해준 성도가 있는데 미국에 집회를 갔을 때 은혜를 받은 성도가 내가 거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파트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는데 함께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의 물질생활이 얼마나 한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기친구가 호텔 소유주인데 호텔에 놀러갔더니 호텔 방 하나를 보여주면서 이런 방이 몇 개가 우리 호텔에 있는데 이 방이 하루에 숙박료가 2.500만원이라고 합니다. 250만원인줄 알았다가 다시 이야기를 해보니 오두막처럼 하나 지었는데 거기에 이제 하루 묶는데 2.500만원이라고 해서 왜 그렇게 비싼가, 그랬더니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5명의 하녀가 배정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리를 해주는 사람, 타이프를 쳐주는 사람, 신발 닦아주는 사람 하여튼 너절하게 많은 일들을 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누가 여기에 와서 2.500만원을 주고 머물겠는가, 그랬더니 친구가 말도 마, 지난주에도 한 사람이 와서 혼자 일주일을 묶고 갔다고 합니다. 일주일을 묶고 2억 정도 쓰고 갔다고 합니다. 한해 5명이 뭐하고 있었을지 나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경고 받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들이 경계해야지 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질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괜찮은데 거기에서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 면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질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분복들을 정당하게 누리며 사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물질을 거두어 가버리면 그냥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누리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안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집착했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기보다는 이미 벌써 흔들린 것입니다.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즐거움을 얻는 즐거움의 감각을 물질을 써서 비싼 음식, 고가의 옷, 그 다음에 희귀한 보석, 그 다음에 화려한 여행 이런 것들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것들은 덜 발달시키고 어차피 발달하게 되어 있으니까 덜 발달시키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성도를 섬기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내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교통을 경험하고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이러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감각들은 계속 발달시켜야 됩니다.
장로님 한분이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사랑하다가 돌아가시니까 실의에 빠져서 1년 반 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거의 폐인이 되어 가십니다. 돈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보다 못해서 어느 교수님이 그분을 데리고 중국 여행을 가자고 하니까 갑갑하고 그러니까 중국 여행을 가면서 중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주님을 믿는 오지에 있는 중국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2주간 동안 있으면서 이 사람이 완전히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돌아와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내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돌아다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이런 것만 익숙해져서 살다가 그것이 없어지고 나니까 자기가 살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중국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찾고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발달된 감각이 자신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물질이 있어도 그것들을 낭비하고 그것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그리고 또 누리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죄악시하지 않지만 우리들이 정말 발달해야지 될 것이 그런 것들에게서 오는 감각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이번에도 선교 여행을 가서 많이 자면 한 4시간 적게 자면 2시간 반밖에 잠을 못 잤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는 길에 어느 선교사님 한분이 잘못하신 것이라고 자기는 목사님이 오시면 쉬고 가시게 한다고 그래서 그것도 참 좋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하다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가면 두 사람의 마음이 합쳐집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은 이제 목사님이 여기에 오셨으니 한국에서 바쁜 사람이 여기에 왔으니 언제 또 오랴, 그리고 확실하게 부려먹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은 잠깐이고 유익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새벽에도 합시다. 밤에도 합시다. 1시간 더 합시다. 점심먹지 말고 합시다. 이러면서 합니다. 그런 생각이 또 듭니다. 두 번 올 것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신나게 하고 가서 한번 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은 누리지만 즐거움을 어디서 찾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선교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가서 관광이나 하고 맛있는 것이나 먹고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이나 만나서 교제하고 그런 즐거움 속에서 온다고 하면 선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지만 기쁨으로 스스로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덜 좋은 것은 절제하면서 살 때 그 안에서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의사가 커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안 먹고 못 배기겠습니다. 하루에 3-4잔씩 먹던 사람인데 정말 보통 불편한 게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은 기름에 바짝 튀겨서 꿀에 버무린 닭 강정입니다. 지금도 너무 간절합니다. 그런데 못 먹습니다. 제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같은 데서 파는 그 치킨 하딩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한 자리에서 15개까지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먹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먹고 싶습니다. 먹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뻔합니다. 그래서 못 먹습니다. 커피도 그래서 안 먹으려고 그러는데 너무 먹고 싶어서 원칙을 정했습니다. 이틀에 한잔 정도만 마시자. 그러면 그렇게 먹는 게 무슨 나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안 합니다. 안 좋은 결과를 나중에 가져옵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일찍 죽는 것이야 겁날 것 없지만 제가 여러분들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프더라도 은퇴한 다음에 아파야지, 설교하는 동안에는 성실하고 열렬하게 설교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문 앞에서 사라져야지 여러분들이 좋다고 그러지 매일 반신불수나 되어서 지팡이를 짚고 생활이 어려워서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고 있지도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어영부영하고 있다면 여러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후배 동역자들에게 내가 항상 이야기를 합니다. 목회자는 건강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건강해야지 됩니다. 진짜 조심해라. 나는 지금에 와서 3-40대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는데 문제는 일밖에 가치가 없는데 십을 쏟아 부은 적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 것입니다. 지혜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안 살았을 텐데 가치가 조금밖에 없는 일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허비하고 살았는데 그게 그때 쓴 수포가 되어서 지금 막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지금 한참 투자를 했는데 빚을 갚으면서 투자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내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치료를 받는 자리에 이렇게 정기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 마음속에서 눈물이 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러나 그나마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막 설탕 잔뜩 들어있는 커피를 막 마시고 닭 강정 먹다가 어느 날 반신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렇게 안 하면 반드시 불행한 결과가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목사들에게 가서 정말 건강 조심해라. 건강 때문에 빌미를 삼아서 나태한 삶을 살 위험이 우리에게 항상 있지만 항상 조심하자. 만나면 매일 묻는 이야기가 건강 괜찮은가. 하고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한달쯤 병원에 입원해봐. 성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습니다. 닭죽을 끓여온다. 전복죽을 끓여온다. 자라를 삶아온다. 난리가 납니다. 입원비는 내가 내겠습니다. 별 사람이 다 나타납니다.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합니다. 6개월 아프면 성도들이 그냥 철야기도를 한다. 연속 금식기도를 한다. 목사님 휴가를 보낸다고 그러다가 1년만 아프면 언제쯤 후임자가 오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해도 되는 모든 것이 정죄와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서 필요한 것이 지각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렇게 하면 됩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경계선상에서 불순종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이게 죕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 그러지 말고 반대로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지요? 하고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그게 유익이 되겠는가? 정말 자신의 영혼의 유익이 되겠는가. 음식을 먹을 때도 어떤 사람하고 식사를 하면 정말 걱정이 됩니다. 그래봐야 나도 건강하지는 않지만 어쩜 그렇게 몸에 좋은 것은 다 골라놓고 절대 먹으면 안 될 것들만 골라서 먹습니다. 내가 항상 간섭을 합니다. 그러지 말라고, 시범을 보여주면서 보라고 말이지. 그러면서 먹고 싶어도 먹어서 안 될 것들은 절제하고 먹기 싫어도 좋은 것들은 먹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를 이기면서 살아야 됩니다.
C. 참된 가난함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의 참된 가난함이 무엇인가 하면 물질을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게 아닙니다. 물질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것,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의 가난함이 아닙니다. 또 더군다나 능력이 없어서 못 벌었기 때문에 가난한 것, 그게 더더욱 성도의 가난함이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서 결국은 계속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머리가 좀 나쁘고 순발력이 떨어진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제를 받으면서 또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 적정한 일거리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 자체를 엄청난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자기가 못나서 소유를 못했는데 그게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으며 얻고 싶은 욕망은 많이 있지만 결국은 능력이 모자라서 손에 넣지 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물질을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더 덕성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받아야지 됩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의 진정한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데서 오는 가난이 아니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오는 가난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욕심이 없어서 사업에서 돈을 안 번다는 그런 이야기 말고 사업에 꿈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여전히 가난하더라.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니까 한 사람이 물질을 소유하면 영적인 은사를 소유했을 때 성도의 교통을 통해서 모두 자기의 것으로 공유하며 살 수 있게 되듯이 물질도 성도의 영적인 연결을 타고 함께 그것이 흘러서 부요한 사람의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또 여유 있는 사람의 것은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가서 그들이 최소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성도의 진실한 삶을 찾아가는 데는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가야지 됩니다.
몇 주 전에도 보면 지금 몇 주째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누구, 누구 이름을 써서 이름을 올라오는 지목 헌금들이 있습니다. 낸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받은 사람만 누군가가 주었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의 정신입니까? 이름을 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감추어서 자신에게 있는 물질들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어 성도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끔 해주는 이런 섬김은 날을 정해놓고 해야지 되는 섬김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몸에 배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일생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인생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유학을 하던 어느 교수님에게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살림에 유학을 가서 책을 살 돈도 없고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던 차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집에 와서 책가방을 열어서 보니까 자기의 수업시간에 공부하던 책 속에서 봉투하나가 떨어져서 보니까 영국 파운더화가 이만큼 들어있다고 합니다. 꽤 큰돈인데 그때 돈으로 한 30만원이 되었는데 그때가 한 3-4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했다고 합니다. 누가 주었는지 아직도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자기도 떠나오기 전에 꼭 한번 그 일을 하고 떠나왔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런 메아리와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본 사람들이 사랑을 받을 줄 알지 그것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는데아들을 장가를 보내면서 친구 목사님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을 당하거나 그럴 때 또 이렇게 찾아오고 그러면 얼마나 부담을 느낄까. 해서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친구 목사님들이 만나서 매우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친구라고 하는 것은 부담을 지워줄 때에 애정을 느끼는 것이 친구다. 부담을 지워주었는데 이 자식이 나를 힘들게 하네, 그러면 어차피 그 사람은 친구도 아닙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지만 이것이 진정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우리 아들이 누워서 앓았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그러니까 목이 아프다고 합니다. 목이 아픈데 네 발은 왜 거기 같이 누워있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만 거기에 누워있어야지 멀쩡한 네 발은 왜 거기에 함께 누워있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한 몸이니까.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함께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몸의 일생동안 다 베어야 됩니다. 적게 있는 사람은 적은 한도 내에서 베풀고, 많은 사람은 많은 한도 내에서 베풀고 이만큼 모을 때까지는 일절 없다. 그리고 수전노가 되는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삶이 되지 못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갈 때 그 삶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눔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선교사님이 저를 만나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몇 번을 연락을 합니다. 뭐가 그렇게 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어렵게 시간을 내어서 단둘이 독대를 했더니 나오는 이야기가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자기의 자녀 하나가 이번에 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결국은 한국에서 공부를 해야지 되는데 자기가 받는 선교비의 거의 대부분을 이 아이에게 보내도 한국에서는 공부가 안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쉽니다. 파송한 교회는 뭐하고 있는가, 그랬더니 파송한 교회하고 그렇게 긴밀한 협조가 없고 30만원씩 보내주고 끝이라고 그래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연결을 하고 늘 교제를 해서 어려운 일이 있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게 해야지, 그 교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선교사가 나누고, 선교사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가 나누고 이렇게 해서 한 몸이 되어서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상의해야지 되지 않겠는가. 그랬더니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래서 이제 몇 개의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우울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줄 것입니다. 내가 옆에서 말한 방법대로 전혀 안된다면 그러면 나와 열린 교회가 책임을 지겠으니까 이제는 마음을 놓고 선교사의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렇게 위로를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섬길 일이 많이 있습니다. 돈 없이 섬기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이 돈 없으면 섬기는 일이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에 중국에 몇 번을 드나들면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시간에 낭비가 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6시간을 강의를 해도 한국말로 하는 것은 3시간밖에 안되고 한마디 하고 기다리고, 한마디 하고 기다리고 통역하는 사람이 신통치 않으면 이게 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우스운 이야기를 했는데 인상 쓰고 있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웃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에게 그랬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번 알아나 보라. 휴대용 동시통역시설을 한번 알아봐라. 그래서 한 30명이 헤드셋을 쓰고 그리고 나는 한국말로 작은 소리로 하고 그리고 저쪽 방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지금 예배를 통역하듯이 통역을 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한군데서 집회할 것 두 군데서 집회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지 않은가. 6시간 할 것을 3시간으로 줄어드니까. 그렇게 해서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와라, 그러면 그것을 들고 당신 통역제하고 뛰어오면 되지 않은가. 한국에서 내가 볼 때 그것을 하려면 최소한 1500만 원 이상 든다. 2천만 원 들지도 모른다. 그런 돈이 지금 교회도 없고 나도 없으니까 중국은 워낙 싸니까. 한번 알아봐라. 할지는 모르지만 한번 알아보라. 그리고 왔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항상 정말, 언젠가는 제가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지금 이 설교를 그분이 듣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안에 새 돈을 거기에 넣었습니다. 목사님이 쓰시고 싶은데 쓰십시오. 그리고 돈을 넣어서 내 이름 앞으로 지목 헌금을 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이웃도 아닌데 뭐 이렇게까지 배려를 하나. 그런데 사실 돈보다도 쪽지에 시가 하나 써있었습니다. 시의 제목은 ‘내게 돈이 많다면’ 시에 내가 돈이 많다면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겠고, 목사님 내게 돈이 많다면 주차장도 사서 바치겠고, 내게 돈이 많다면 목사님 허리도 고쳐드리고 싶고, 내게 돈이 많다면 목사님 책도 많이 사드리고 싶고, 내게 돈이 많다면… 그리고 한 페이지에 가득 썼습니다. 내 마음속으로 여러 번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이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베풀며 받으면서 일생을 빚지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들은 그분께 빚진 날들이고 사실은 갚은 날이 별로 없습니다. 섬기느라고 애를 쓰면서 살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진 그 사랑의 빚을 어떻게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졌습니다. 내게 돈이 많다면, 그래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에게 제가 볼 때는 이 사람에게는 많이 주셔도 진짜 물질이 하나님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이 마음이 되어서 주시면 주실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정말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목회자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니까 절대로 내 이야기를 따라 주기를 나는 부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니까.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여러분 가운데는 돈을 꾸고 빌리는 개인적인 대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 그 사이에 이자까지 오간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런 것들은 거의 없으리라 보는데 그런 이야기가 저에게 들립니다.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동기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 지체는 그것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위험부담은 있지만 이 지체를 정말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돈거래를 해서 몇 케이스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하면 도와준 성도의 그런 애틋한 마음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지만 형편이 문제가 되어서 그 사람이 돈을 떼어서 교회를 떠나거나 떼어먹은 상태로 갚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얽혀서 30년을 두고 두 집안이 대를 물려가며 싸우는 교회도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누가 돈을 빌리러오면 오늘이 설교를 인용하면서 거절해야지 됩니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그 사람이 갚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최대의 액수를 그 사람에게 빌려주어야 합니다. 물론 줄 때는 안 갚아도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까지 갚으십시오. 그러나 내심 속에서는 갚기를 포기하십시오. 저 사람이 저 돈을 떼어먹어도 나는 저 사람과의 관계에 조금도 문제가 안 생기고 저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으면 한시라도 찾아가서 무기한 연장을 주겠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를 주십시오. 그래서 사실상은 주십시오. 주라는 표현이 억울하면 ‘영구 임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2백만 원을 영구 임대해주마. 당신의 대에 못 갚으면 자식 대에라도 갚아라.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것을 안 갚기 때문에 나에게 고통스럽고 관계를 깨트리는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교회는 때로 그렇게 금융기관에서 빌리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인 여러분들은 성도끼리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마음고생을 하고 고통하고 그리고 결국 지체를 미워하고 이러는 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의 원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탐욕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나누어야지 됩니다. 정말 나누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많은 것들을 그것들이 흘러가게끔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그것을 빼앗아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이것들이 누려지도록 그래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이런 성도들이 이 세상에 없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물질로 돕고 우리가 좀 더 잘사는 나라가 되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 땅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우리는 도와야합니다. 많이 원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그런 물질로 인해서 그런 고통이 사라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III. 청결한 마음과 공동생활
A. 탐욕을 버림
결국 이런 생활들이 그렇게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청결한 마음이 바로 이런 물질생활에 있어서 이런 물질생활이 아니면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청결한 마음과 공동생활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청결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빈 마음이 아닙니다.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주님께 달라붙어있는 주님께 집착된 사랑(Attached love) 주님께 온전히 붙어있는 그 사랑, 그리고 의지의 올곧음, 그리고 충만한 사랑의 정신 이런 것들이 순결한 마음의 특징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물질에 마음이 붙어있는 그 사람이 예수께 달라붙어있는 그 사랑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하나에만 달라붙어있지 둘에 달라붙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에만 그 마음이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에 마음에 달라붙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는 끊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달라붙어있는 사람들은 제물을 누리면서 살지언정 거기에 마음이 달라붙어있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그래서 결국은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지나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B.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 됨
오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해결하고 나면 그것을 통해서 쾌락을 그것을 충족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오랜 세월동안 심지어는 우리 자손도 이렇게 하면서 인간의 물질의 욕망은 끝없이 팽창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마음은 하나님께 붙어있는 연합된 마음의 사랑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탐욕으로 가득 찬 삶 때문에 영혼의 파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질에 대한 탐욕이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많은 불화의 80-90%이상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을 아십니까? 부부간의 갈등의 상당부분이 물질부분인 것을 아십니까? 부모가 자식을 고소하고, 자식이 부모와 재판정에 서려고 하는 일들이 물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나에게 한대 때렸습니다. 하고 아버지를 폭력행위로 고발 하는 자식은 없어도 재산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고소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이래서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관계들이 이 세상에서 막 파괴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기는 하지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는 하지만 한사람, 한사람이 보이는 이 세상 위해서 세상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 이런 물질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게 될 때 공동체의 화목과 사랑이 깨트려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치열하게 싸우고 그렇게 더럽게 진창에서 성도와 성도가 그렇게 싸우는 그런 비참한 것들은 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어째든 당회하고 제직들하고 의논해서 교회를 옮기기로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옮겼는데 그 결정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 멀리 이사를 간 것입니다. 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교인들이 여기에 예배 처소라도 마련해달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못 따라오는 교인이니까 그 교회에서 예배처소라도 하나 마련해주면 좋을 텐데 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거기다 예배 처소를 만들어놓으면 올수 있는데도 너희들이 안 올 것이 아닌가 하고 싫다고 그랬다고 합니다. 남아 있는 성도들이 저쪽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교회 재산을 놓고 반을 떼어 달라, 못 주겠다고 그러고 재판장에서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목사와 교인들이 싸움질을 하고 교인들이 목사를 욕하고 멱살을 잡아당기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이런 교회를 보실 때 얼마나 가슴 아프실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까짓 게 뭔데, 그것 때문에 교회의 공동체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그러고 살아가는지.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물질에 대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생각이 잘못되어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아주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한다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낸 헌금가지고 교회가 그 딴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야단을 쳤습니다. 언제 교회가 당신들이 낸 돈 가지고 그런 일을 했는지, 이 사람은 헌금을 했는데 그것을 교회에 바쳤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이 헌금의 원리는 여러분들이 물질을 바칠 때는 교회에 바친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 물질은 돌아오지 않는 물질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로 들어갔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친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면 바쳤을 때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들어간 물질이 하늘창고를 통해서 교회에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운영하는 데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낸 헌금은 헌금 행위를 통해서 하늘창고로 들어갔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창고에서 부어주는 하나님의 물질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어갈 때는 여러분 자신의 돈으로 하나님께 바쳐졌지만 나올 때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세탁해서 새 돈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용된 물질을 보면서 ‘이게 내가 낸 돈인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여러분들이 낸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헌금의 정신을 심지어는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까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모두 물질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낸 돈은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설령 그 돈이 잘못 쓰인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 잘못 쓰인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바친 사랑과 믿음으로 드린 그 헌금의 정신과 공로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몫입니다. 하나님께로 갔고 하나님이 물질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물질을 사용할 때는 성도들이 가난하고 물질을 바친 성도들을 생각하고 사용하지 말고 하늘을 생각하면서 그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물질도 함께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명한 설교자 요한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대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들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의 첫 걸음은 물질에 대한 사랑에서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는 그 다음에 자기에게 있는 무엇이라도 바쳐서 그래서 남을 유익하게 하고 싶고 교회에 유익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바칩니다. 그래서 강물처럼 그 물을 안고 거친 대지를 흘러갑니다. 땅이 그것을 빨아들이려고 할 때 언제든지 기쁘게 빨아들이게 하면서 흘러갑니다. 그래서 그 강물이 흘러간 곳에는 꽃피고 새가 노래하고 풀밭이 형성되고 나무들이 자라고 그렇습니다.
성도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생에 달려온 길이 물 없이 땅을 파고지나간 그런 인생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한없이 흘러가서 그래서 땅을 한없이 적시며 생태계를 형성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주신 많은 물들이 여러분들의 그 일생의 강물 위에 보태어지고 그래서 작은 개천이 큰 개울을 개울이 하천을 하천이 큰 강을 이루면서 흘러갑니다. 여러분들이 흘러가는 인생 전체가 이 거친 땅을 고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축복을 누리면서 함께 한 공동체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함께 드리는 기도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제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행4:24)
I. 본문배경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오늘은 공동생활과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의 배경을 보면 큰 박해가 있고 난 후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통해 충만함을 입은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되었고 그래서 그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4장에 와서 급속하게 전파되는 복음 때문에 염려하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이 끌려가서 심한 문초를 당하고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복음에 사로잡힌 그들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박해하는 그들을 향해서 사도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하여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겠는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는가? 조금도 굽힘이 없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담대히 외쳤을 때 그들은 더 심하게 구타하여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아마 그 과정을 겪으면서 사도들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교회로 돌아갔고 거기서 공동체의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든 교회에 말했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든 지체들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박해받은 사도들의 표정을 보면서 공동체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이런 경우에 핍박을 대항할 무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의 이 고난을 통해서 일치한 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소리를 높여 믿음으로 주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에 간절한 제목은 더 큰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 복음을 담대히 말하게 하시고 종들이 이 복음을 전달할 때 성령의 역사와 기적이 나타나서 저렇게 완악한 자들을 꺾고 굴복시킬 수 있게 해달라는 부흥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있고 나서 빌기를 마치매 성령의 충만함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동일하게 그들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뜨거운 공동체가 되었고 오히려 그 핍박 때문에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겁 없이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이 담긴 사건의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부르셔서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것은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수많은 성도들로 이루어져있고 성도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개별적인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개별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 없이는 아무리 모여서 먹고 마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들이 공동생존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공동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II. 성도의 공동생활과 기도
A. 하나님을 바라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지체들 사이에 마음과 뜻에 일치를 이루셔서 하나님 앞에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중요한 방편이 기도라고 한 사실을 오늘 우리들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일까? 이 기도는 핵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기도할 때 영혼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면 기도를 강조할수록 하나님은 구두쇠라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잘 안 들어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꾸 졸라서 뭔가 자꾸 하나님께로부터 뜯어내려고 하는 그런 끈질긴 심성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되기 일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매우 편안하셔서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시는데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의 빈도수를 따라서, 열심에 따라서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시기도 하는 그런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래의 정신은 그런 것이 아닌데 그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깊이를 잘 모르는 유아기 상태에 있는 우리를 우리의 수준에 맞게 대우해주시기 위해서 이해시키려고 우리에게 기도를 그렇게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입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과부가 하도 가서 귀찮게 하니까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괴로움을 당할까봐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설명 중 가장 유아기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깊어질수록 이제 우리의 이 기도생활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굴복시킴으로 얻어내는 것이 기도의 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기도는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잠잠히 응시하는 그 상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서 우리의 온 영혼이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유한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거나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속에서 잠잠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개방함으로 주님이 우리의 방해 없이 마음껏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가운데 드리는 몇 마디의 기도는 그렇지 못한 영혼의 상태에서 쏟아져 나온 수만 마디의 말보다 우리의 삶과 환경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하늘에 기름으로 부어진 한마디의 기도는 인간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만 마디의 언어보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황을 바꾸어놓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 후배가 하나 있었는데 일찍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부인이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 집에 아이가 3살짜리 하나 1살짜리 하나를 남겨놓고 자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갔습니다. 그때 자매의 나이 겨우 27살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이 형제가 하나님이 나에게 분명히 목회를 하라고 소명을 주셨고 그것도 함께 이 길을 가라고 아내를 주셨는데 어린아이 둘만 남겨놓고 아내를 먼저 데려가시면 내가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많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형제가 원래 뜨거운 열심이 별로 없는 형제였는데 자매가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젊은 날에 아이 둘을 낳고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있을 때 이 형제는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제목이 워낙 크고 절실하니까 일반적으로 기도해서는 하나님이 쳐다보실 것 같지도 않아서 그래서 결심하기를 밤 12시에 뒷산으로 올라가서 숲 속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6개월 이상 실천을 했습니다. 그러니 캄캄한 밤에 밤 11시 40분쯤에 집에서 떠나서 캄캄한 숲 속에 들어가서 거기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때 처음 시작은 기도를 그렇게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그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기도할 수 있게끔 힘을 주시니까 온 몸에 땀이 흐르도록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6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하나님이 그 자매를 하늘나라로 데려갔습니다. 형제 혼자 남아서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지만 깨달은 사실 하나는 그것은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놀랍게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해서 기도를 하지 않는 자기를 열렬한 기도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으시고 목숨을 건 기도의 투쟁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시고 그렇게 깨닫게 되니까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체험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기도하니까 주의 말씀에 민감하게 하셔서 성경의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린아이 둘을 남겨놓고 그 아내가 먼저 간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내가 변화되지 않은 채 목회를 하는 것보다는 변화된 나 혼자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훨씬 쉬울 것 같아서 하나님이 아내를 나를 위한 교제로 사용하셔서 데려가셨고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이게 기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하고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들이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만큼 복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고통이 있다는 것인데 기도제목이 있어서 마음을 찢는다고 하는 것은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보더라도 마음 한쪽 구석을 에이는 아픔이 남긴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했습니다.
역사의 한 연구라는 작품을 쓴 아놀드 토인비가 즐겨 들던 비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영국 북해도에서 나는 유명한 생선 둘이 있는데 하나는 연어이고 또 하나는 청어입니다. 이 청어는 아주 신경질적인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아십니까? 고기의 얕은맛은 신경질적인 고기들이 얕은맛이 있습니다. 꽁치, 갈치, 이런 것들은 수족관에 오래 보관을 못합니다. 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신경질적이기 때문에 가두어놓으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어버립니다. 잘은 잘 모르지만 동태 같은 것은 생긴 것을 보더라도 성질이 느긋한 물고기가 아닐까요? 그게 뭐 그렇게 맛이 있습니까? 이 좋은 맛이 있는 고기들은 가시가 많습니다. 준치, 청어, 꽁치, 갈치 가시가 많고 아주 잔가시들 때문에 먹기 힘든 생선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선이 맛있습니다.
영국 사람들도 이 청어를 herring이라고 하는데 참 좋아합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 생선 중에 하나입니다. 잘 안 해주어서 그렇지요. 그것을 북쪽에서 잡아서 아래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는데 거기나 여기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싱싱한 것을 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족관에서 살아서 펄펄 뛰는 청어는 값이 비쌉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신경질적이어서 늘 이게 그렇게 하다가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도착해보면 전부 누워서 배를 하늘로 올리고 죽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산물 유통업자 한 사람은 이상하게 그 사람이 운반해오는 청어는 안 죽고 싱싱하게 살아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봐도 사업상의 비밀인데 가르쳐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동료가 조르니까 가르쳐주었더니 그것은 청어를 잔뜩 실고 올 때 나는 거기에 메기를 같이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메기는 그것을 거기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청어를 다잡아먹을 것인데 물론 메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렇지만 제 놈이 밤새도록 잡아먹어봤자 두 마리 밖에 못 먹는다고, 그래서 청어를 잔뜩 실고 거기에다 그 메기 두세 마리를 넣어서 오면 그러면 메기는 눈을 딱 떠보니까 도시락 통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사면에 밥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신이 나서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청어를 쫓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잡아서 우선 먹고 그리고 계속 쫓아다닙니다. 이 청어는 밤새도록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긴장을 풀지 않고 수족관을 헤엄치면서 돌아다닙니다. 결국 아침에 와서 보면 도망 다니던 청어들은 생생하고 쫓아다니던 메기들은 지쳐서 누워있습니다. 그래서 싱싱하고 펄쩍펄쩍 뛰는 청어를 매일 신선하게 먼 거리를 배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개인의 생활도 이렇게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항상 기도의 제목을 주십니다. 그러면 기도의 제목을 주신 사람은 항상 생기에 넘치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의 제목은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지만 믿음으로 화합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면 이렇게 생기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기도제목 때문에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고 기도제목이 주어졌는데도 게으름을 피우고 하나님 앞에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면 그 상황과 함께 자신의 영혼이 부패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이 항상 메기를 몇 마리씩 주십니다. 그래서 못된 교인이 그냥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게 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 메기가 입을 벌리고 흉측하게 생긴 놈이 돌아다니면 물론 몇몇 교인은 잡아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가 맛이 간 사람과 아주 절친하게 교제를 하게 되면 그러면 같이 부패됩니다. 그러니까 영향력을 자신이 미치지 않으면 그 나쁜 영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은혜에 있던 사람이 시들먹해서 떨어져서 그래서 아주 영혼의 상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두 명은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모든 교인이 다 그 메기와 같은 교인에게 먹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 있는 많은 교인들은 각성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지 될 때구나. 진짜 기도해야지 될 때구나. 우리가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는구나. 그리고 자기를 단속하면서 오히려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지체들로 하여금 살아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제일 안 좋은 교회가 문제가 없는 교회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은 교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기력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 전체가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까 2부 시간에도 아이들 유아세례를 주었는데 어쩜 그렇게 아이들이 잘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더 많이 태어나야지 되겠는데, 그래서 아이들이 막 태어납니다. 어느 자매는 시집가서 분명히 아이를 가졌는데 배가 꺼지지 않습니다. 저 자매는 왜 아기를 안 낳는가? 그리고 물어보면 하나는 벌써 낳고 두 번째 애라고 합니다. 야, 이게 참 요즘 같은 때에 정말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구나. 그래서 많이 낳아서 그래서 그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변화시켜서 인해전술로 이 세상을 뒤덮어야지 됩니다. 북한선교도 애 많이 낳아서 주님의 사람으로 잘 키우면 그 아이 안에 북한선교도 있고, 세계선교도 있고, 우주선교까지 다 있습니다. 그 아이 때 되면 달나라에 가서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는 세계선교가 아니라 우주선교입니다. 그것도 가능해집니다. 다음부터는 셋을 안 낳는다고 그러면 주례를 안 서줄까 봐. 최소한 셋을 낳겠다고 서약을 하고 힘닿는 대로 넷까지 낳겠노라고 약속을 하면 주례를 서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태어나서 그렇게 삽니다. 아이들이 그 잠깐 유아세례를 받는 동안에도 그냥 벌써 회개하고 웁니다. 엄마 아빠가 회개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대신 중보 회개 합니다. 어떤 애는 소리소리 지르고 자기 엄마 아빠가 전도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대신 선포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열심히 제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는데 애는 코를 골고 잡니다. 총천연색입니다. 왜 살아있으니까. 죽으면 천만 명을 한군데 모아놓아도 숨소리 하나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수시로 깨트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사람이 처음 회심할 때는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고 손들고 예수님 앞에 와서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입니다. 나는 죽고 주님은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랑의 동심원을 그려나갑니다. 함께 그려나갑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거기에서 뛰쳐나와서 자기 깃발을 또 꼽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 동심원을 그립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일을 하게 되면 그려진 동심원은 결국은 어느 순간에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거기에서 교만과 다툼, 분쟁과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미움과 시기들이 거기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는 코이노니아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는데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부종하여 그분의 뜻을 받드는 그분의 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그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을 회개시키셔서 각기 자기의 깃발을 꺾고 십자가 깃발 아래 다시 모이게 하는 공동체적 자기 깨어짐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개개인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면 이것보다도 훌륭한 교회를 위한 섬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자기 깨어짐은 어려운 말로 그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서 성내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깨어짐이 되고 교회의 깨어짐은 그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서 성내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봉헌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깨트려지는 이 사건은 교회론적 사건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깨트려짐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깃발 아래 돌아가게 되고 여러분들의 사랑의 동심원과 교회의 동심원이 하나가 일치가 되고 이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가장 잘 수종들 수 있는 그분의 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한사람, 한사람의 자기 깨어짐 이외에도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께서 깨트리시는 공동체적 자기 깨트림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결론이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B. 기도와 일치
개개인이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형식적인 신자가 되듯이 교회가 제도와 그리고 목회의 방법에 있어서 아무리 뛰어난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참된 영광은 생명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체적인 자기 깨어짐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합일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는 일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적인 일치는 곧 꼰꼬르디아 아모리스 사랑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깨트려진 그곳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지순의 사랑이 생겨나게 되고 그 같은 사랑을 품음으로서 그들이 일치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기도와 일치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개개인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개인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간절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모여서 공동체적인 기도회를 갖는다고 할지라도 모인 개개인의 기도의 골방이 정말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골방일 때 그 모여서 드리는 그 기도에 하나님의 비범한 능력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잠자는 모든 신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그 기도는 잠든 기도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개인의 기도생활 속에서 승리하는 기도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거기에는 위대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흩어진 삶 속에서 개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골방을 훌륭하게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생명의 교통이 있을 때 여러분들이 개개인이 건강한 영혼을 소유하게 되고 그 건강한 영혼들이 함께 연결을 이룰 때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개인의 기도생활이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 흩어져있을 때도 우리가 각자의 기도의 골방에서 성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살아있는 심령을 가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이것은 성도로서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이것을 태만히 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의 영혼만을 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기상하려는 교회에 날개에 돌멩이를 매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한 비록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영혼이 둔탁해진 사람도 이렇게 살아있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그 기도의 일체 속에 참여하게 될 때 혼자 기도하려고 할 때보다는 훨씬 더 놀랍게 뜨거운 기도의 영에 불붙여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조선기술이 세계에서 아주 뛰어나게 발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항공모함까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 항공모함이 미국이나 소련에서 운영하는 대형 항공모함은 아니지만 약 20여대의 공격용 헬기를 싣고 바다를 항해하면서 작전을 펼 수 있는 그런 소형 항공모함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이나 이런 강대국에서 가지고 있는 항공모함을 보면 신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면 최소한 몇 킬로미터의 활주로를 비행기가 그냥 달려야지 떠오르는데 아무리 큰 항공모함의 길이도 330미터의 길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짧은 활주로에서 어떻게 그렇게 육중한 쇳덩이의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아마 여러분도 한번쯤은 궁금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뜰 수 있을까요? 아무리 비행기가 발달해도 그 비행기가 300미터의 활주로를 가지고는 뜰 수 없습니다. 물론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제규어 같은 비행기는 앉은 자리에서 헬리콥터처럼 수직상승을 해서 작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비행기들은 활주로를 여전히 필요로 합니다. 이때 항공모함은 전속력으로 이륙하고자 하는 같은 방향으로 선채가 움직이고 그리고 비행기는 엔진의 출력을 최대로 해서 그래서 발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330미터로는 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뗄까요?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배 밑창에서 공기 대포를 쏩니다. 이 공기 대포는 초속 300킬로미터로 바람을 날려버릴 수 있는 속도의 공기대포입니다. 그것을 최대의 엔진출력을 걸고 활주로를 달린 비행기가 되고 밑에서 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으로 그 함재기를 공중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비행기가 상승된 엔진 출력을 이용해서 이제 이륙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기도는 바로 이런 공기대포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도저히 기도의 이륙을 할 수 없는데 기도의 영이 살아있는 많은 지체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공기대포 같은 효과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혼자는 도저히 이륙할 수 없었는데 공동체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기도가 획! 하고 하늘로 상승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그들이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 알고 그 하나의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정신을 모으고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서 그들 모두 함께 같은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간절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데 그때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게 될 때 마치 우리 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음이 모아지는 그 모아진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그 마음을 깨트리듯이 공동체의 마음도 그렇게 하나로 모아질 때 하나님이 깨Em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뉘우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삶의 상황과 여건, 관심사가 다 달랐는데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같은 기도의 제목들을 우리의 마음과 정신 안에 공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전에는 달라도 삶의 상황은 각각 틀려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제목이 워낙 소중하고 간절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 우리끼리의 다툼과 분열과 분쟁과 미움과 시기 갈등 원망 이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게 만드십니다. 이게 바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것이 제일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미워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원한이 맺힌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그보다 훨씬 중요한 기도제목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 이것보다 그게 더 중요하니까. 내려놓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빨리 판단을 해야지 됩니다. 양쪽에 계란 두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이렇게 하고 거실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귀중한 도자기가 흔들거리기 시작하면서 떨어지려고 합니다. 어어! 빨리 판단하고 이것을 버려야 합니다. 계란 그까짓 것 깨져도 뭔 상관이 있습니까. 이 도자기를 붙들어야지. 그게 바로 내려놓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라크 전이 있을 때 초기에 황당한 일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포격기가 있는데 스텔스 폭격기입니다. 그 폭격기는 이제까지 인류가 만든 폭격기 중에 가장 완벽한 폭격기라고 합니다. 생긴 것부터가 아주 특수하게 생겼습니다. 그 폭격기의 최대의 장점은 레이더에 포착이 안 됩니다. 20킬로까지 접근을 해야지 레이더에 포착이 되는데 제가 알기로 그 스텔스 전폭기의 속도가 마하 투 정도가 나옵니다. 그러면 초속 780미터 속도로 날아가니까 거의 1킬로고 그러면 20킬로 안에 만약에 발견이 되면 15-20초 안에 비행기가 나타나는 것이니 이미 벌써 폭탄이 떨어지고 난 다음입니다. 그 비행기 한대의 가격이 2조원에서 2조 5천억이라는 고가의 비행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라크 군인들에 의해서 격추되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그 다음인데 어떻게 그것을 격추했는가, 했더니 총으로 싸서 잡았다고 합니다. 무슨 스텔스기가 무슨 제비도 아니고 참새도 아니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창피했습니다.
이북 애들이 잠수함을 몰고 내려왔습니다. 그게 그물에 걸렸습니다. 고래 잡는 그물, 상어를 잡는 그물도 아니고 멸치 잡는 그물에 걸렸습니다. 멸치가 그렇게 큰 멸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도 창피해서 어떻게 얘기하겠습니까. 최신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든지 최신의 잠수함을 만나서 격침되었다든지 그러면 동정이나 했겠지만 그물에 걸려서 잡혔다. 그것도 어부들이 멸치인줄 알고 잡았는데 좀 크더라. 이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랫동안 군 생활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비행기가 미사일이나 아니면 대공포가 아닌 총에 맞아서 떨어지는 게 우리 생각에도 많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러냐고 그러니까 비행기가 날아가면 수백 명의 군인들이 있는데 비행기가 나타나면 이제 일제히 사격자세로 들어갑니다. 비행기가 지나가면 이 비행기에 종류에 따라서 하나 둘 반, 그 앞에 대고 거리는 비행기 속도에 따라서 틀립니다. 그래서 하나 둘 반 그 정도에 대고 총을 수백 명이 정신없이 갈깁니다. 그러면 소위 이야기하는 화망이 구성이 됩니다. 비행기는 가다가 이렇게 꺾을 수는 없으니까 화망을 지나게 됩니다. 그때에 수천발이면 그 중에 몇 발이라도 맞는다고 합니다. 그게 연료통 같은데 맞으면 집방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비행기는 날개 전체와 몸통이 유류 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투기 하나가 약 5드럼 반의 기름을 싣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그 전투기에 5드럼 반의 기름을 넣으려니까 날개 아래쪽 전체가 기름통입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그것을 맞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백명이서 화망을 구성하면서 수천 발, 수만 발의 총을 난사하면 거기에 걸려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그렇게 하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2. 공동체의 관심사를 품음
이처럼 일치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교회에 어떤 일이 생기고 교회에 큰 사명이 주어지고 하면 어떤 영웅적인 사람이 그냥 기도해서 해결을 받는 그런 것을 보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 기도를 하기도 바쁜데 공동체를 위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쓰레기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이신 그분께 붙어있는 한 지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약하지만 우리의 듣는 모든 기도가 화망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자의 힘으로는 떨어트리기 어려운 기도의 제목들을 격추시킵니다. 그래서 꿈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사경회를 한다든지, 세계 선교를 앞두고 있다든지, 교회에 중요한 영적인 갱신을 위해 기도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누구 한 사람이 짊어지고 기도해야 할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으로 그 고난에 참여해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렇게 간절히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강조하는 눈부신 진리, 마음을 쏟는 기도, 불붙는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말 이 세상에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그 교회 안에서 참다운 신자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게 하는데 여러분 자신이 무엇에 기여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이제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다시 들을 이유도 없겠지만 어려서 우리 아버님이 6.25에 참전하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린시절에는 큰 자랑거리였고 기쁨이었습니다. 어째든 열심히 싸우신 것 같고 당신 자신의 손으로 북한군도 2명이나 포로로 잡았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무공훈장 받은 이야기에 밤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영화에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에 보면 대장이 맨 앞에서 총을 들고 총이 막 날아오는데 대장은 절대 안 맞습니다. 돌격! 그러면 졸병들이 뒤에서 용기백배해서 그 지휘관을 따라오게 되어있는데 그것은 다 거짓말이고 진짜 전쟁에서는 절대 지휘관이 앞에 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휘관이 앞에 서면 옛날 칼싸움 하던 시절에야 멋있을지 모르지만 한방만 맞으면 나머지 모든 대원들은 지휘관을 잃어버리니까 지휘관은 항상 맨 뒤에 선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돌격! 앞으로 그러고 지휘관은 달려갔는데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면 뒤에 있는 졸병들은 가자 집으로, 그러고 흩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쟁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뒤에 지휘관이 있어서 몇 분대 적진을 향하여, 고지를 향하여! 하고 지시를 내리면 그 사람들이 적진을 향해 한번에 돌격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니까 숨을 장소를 각자 찾아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리는데 어쩜 그렇게 총알에 절대 안 맞을 기가 막힌 자리를 각자 찾아내서 바위 뒤에 딱 붙어있어서 아무리 돌격하라고 외쳐도 절대 돌격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딱 붙어 앉아서 주머니에서 건빵을 꺼내 먹기 시작합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총알이 막 날아오는데 나도 배고픈데 좀 달라고 그러면 줄 것 같습니까, 안 줄 것 같습니까? 일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지휘관이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자기 대원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곳에 위협사격을 합니다. 빨리 일어나서 돌격하지 않으면 너희들 죽여 버린다고 쏩니다. 그때 건빵을 달라던 친구가 살짝 일어나서 가려고 하는데 그 총알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순식간에 머리통이고 뭐고 다 부서져서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이때부터 우리들이 아는 전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진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맨 정신으로 못합니다. 그렇게 놓고 진짜로 돌격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두 사람이 생명을 건 기도로 교회를 움직이게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공동체가 모두 참여해서 애달픈 마음이 되게 하시고 가슴 저리게 하시고 자기를 찢게 하시고 그래서 한마음으로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가운데 서로를 용서하게 하십니다. 서로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간에 화합하며 살지 못한 모든 것들이 이렇게 일치를 이루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1907년에 일어난 평양의 대부흥도 역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그 은둔의 땅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는 그런 나라에 그 사람들이 왔는데 그 선교사의 외로움들을 대게 사냥으로 많이 달랬다고 합니다. 내가 보니까 참 신령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냥을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여튼 무지하게 사냥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모여서 부흥회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때에 성령의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대부흥회가 일어났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설교였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가 무슨 설교를 했는가 하면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교회의 지체됨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교사가 얼마 전에 사냥을 하다가 오발 사고가 나서 손가락 마디 하나가 날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사분오열 마음이 찢겨 있었고 선교사와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교인과 교인들이 대립하고 하여튼 마음이 다 나누어진 가운데 그때 그 선교사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손가락을 보이며 얼마 전에 사냥을 하다가 오발사고가 나서 이 손가락을 다쳤는데 다친 곳은 손가락 끝이었는데 내 온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오르고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중에 작은 고통이 있으면 우리 몸 전체가 이렇게 아파하는구나. 그러니 그게 바로 예수님의 아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내용들을 설교했을 때 불이 내리는 것 같은 크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이들을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목표, 1907년에 모인 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인도 카시 지방이나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또 선교사 하드가 경험한 그런 놀라운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이 한국교회에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일치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열의 죄를 이야기하니까 그 일치한 목표가 더욱 간절해지게 되자 자신들이 일치하게 살아가게 만들었던 많은 이유들이 정말 사소한 자기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버리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가 하나를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교회는 개인의 기도의 제목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기도의 제목을 공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유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흔히 있는 경험입니다. 기도하러 올라갈 때는 기도제목을 자기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 기도제목을 실컷 적어서 올라갔는데 정작 기도하려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것 때문에 마음을 다 녹이시고 결국은 자신의 기도는 그 안에서 저절로 응답되거나 아니면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만들어버리시는 경우가 우리에게 흔히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일치의 기도와 개인의 생각에만 순수하게 의지하는 욕망적인 기도의 차이입니다.
C.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이 공동체를 향해서 우리가 한마음으로 마음을 모으고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확실히 이것은 이 지점에서 우리 공동체로 하여금 마음을 품게 하는 기도의 제목이고 나 개인의 사사로운 기도의 제목은 이 아래로 굴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교회에 이런 기도의 제목들을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일어나는 일이나 특별히 하나님의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고 설교를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한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그 기도 속에서 그 기도의 성취를 방해하는 많은 헛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적고 있습니다.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이 기도할 때 상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교회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사도행전 2장에 성령강림이 있게 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다시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 일심으로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자 핍박을 이겨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런 식의 증거들이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선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고 그 역사는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지극히 어린아이 같은 기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욕망에만 매여서 공동체의 기도에 헌신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사람들의 몫이고 나는 그 혜택을 받으면서 나 개인의 문제만 해결하면서 교회를 다니면 그게 덕 보는 것이라고 하는 이 소아적인 생각들이 결국은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의 생명과 공동체의 기도의 영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있고 여러분들의 생명은 다른 지체들의 생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한마음이 없다면 그것 없이 개인이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단일한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반드시 기도해야지 됩니다.
이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본이 되셨습니다. 잠시 후에 다가올 그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를 앞두고도 주님이 땀이 피가 되어 흐르기까지 기도하신 제목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로 하나 되게 하시고 저희들이 그 진리 안에서 서로 교통함으로 사랑으로 하나 되고 그 사랑과 진리를 소유하는 공동체로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그 하나 됨을 기도 속에서 유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주님의 그런 희망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사로운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지 않았다면 한번 그 기도의 제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성령 안에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개인보다 공동체를 끌어안고 나보다도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끌어안고 교회 전체를 향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매달려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의 기도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문을 활짝 여시고 여러분들의 기도의 영을 부으시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도록 무장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모두 일치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미움과 원망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 욕망과 헛된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접고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공동체 전체가 일체의 마음으로 깨트려지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보다도 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쉽고 대중적이어야지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진실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 말처럼 위험한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모든 위대한 경험은 불신자들이 회개함으로 부흥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래 믿은 신자들이 심오하게 회개하고 각성을 하고 공동체가 일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짐으로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에 혜택들을 불신자들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는 진정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갈수록 깊어지고, 기도에 있어서 점점 깊어지고, 상담과 모든 교육에 있어서 점점 깊어지고,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도 매우 진리 안에서 깊어진 공동체가 될 때 그것이 바로 이 복음의 영향력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만약에 하나의 강이 있는데 강폭은 매우 좁지만 그러나 깊이는 심오하게 깊습니다. 그런 강물을 좀 더 넓게 만들어서 많은 땅에 혜택을 누리게 하고 싶다면 강 주변을 더 많이 수로로 파서 강의 나비를 두 배, 세배 넓힐 것입니다. 여전히 풍부한 물이 흘러가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진리와 모든 사역들이 대중화되어서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넓은 강은 되었지만 깊이는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강이 되었다고 칩시다. 아마 얼마 흐르지 못해서 그 강물들은 모두 마른 땅에 빼앗기고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 곧 무수천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철저하게 먼저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깨트려지고 그 속에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일체를 이루는 것이 성결을 보증한다고 하는 것이 평범한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교회에 복음과 예배와 가르침을 저 믿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아주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안일한 믿음주의, 곧 신앙주의(Belivism)가 판칠 것이고 결국은 교회에서 오래 믿는 사람들이 참다운 회심이 없이 형식적으로 교회에 남아 있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사나흘 만에 보따리를 싸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서 좋은 교회와 목자를 만나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삶은 불신자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우리는 더욱 더 한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더 깊이, 더 높이, 더 맑게, 더 올곧게 신앙과 영적인 역사가 교회 한복판을 지나가도록 그렇게 될 때 땅 끝까지 흘러갈 수 있는 강물과 같은 교회, 강물과 같은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선교지에 자주 나갔습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삶은 교회 가만히 그림같이 있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규칙적으로 열린 공간 앞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독서하고 꼭 필요한 곳에 심방하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에 바치고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너무너무 척박하고 비참합니다. 누군가가 가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인 제가 갑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러고 한 일주일이나 일주일반, 이주일 있은 적도 거의 없습니다. 개척하고 나서 아직까지도 두 번 이상 교회를 비워본 적이 없습니다. 휴가한번 그렇게 간 적이 없습니다. 목이 터져서 피가 나와서 이주 동안 강단을 비운 적은 있어도 제가 두주 이상 강단을 계속 비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열흘 사이, 일주일 사이를 못 참아서 새벽기도 인구가 푹 줄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럼 내가 지킬게 여러분이 가셔서 내가 하는 일을 하십시오. 담임 목사가 그렇게 떠났으니까 우리가 더 기도해야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담임 목사가 새벽기도를 안 지키니까 새벽기도의 인구가 푹 줄어서 기도할 의욕이 없는 공동체인 것처럼 새벽에 비칠 때 진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럼 제가 열심히 새벽마다 교회에서 은혜의 불을 지피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가서 내가 하는 일을 하고 오십시오. 내가 보내겠으니까. 둘 중에 하나를 하십시오. 둘 다 안 하겠다고 그러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주님이 사신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렇게 기도를 안 해서 어떻게 사시려고 하십니까? 순례자의 길은 운동화신고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교회에서 정말 뜨겁게 기도하면 밖에 나가서도 그게 느껴집니다. 진짜 항공모함에서 비행기를 하늘을 향해 띄우는 공기대포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피곤하고 말씀을 받을 준비가 안 된 곳에 일어나는 특이한 성령의 역사 대부분 기도의 힘을 입습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에도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밖에 목회를 못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사셨던 삶의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공동체의 아픔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는 기도는 십자가에서 흐르는 주님의 이마에 땀을 씻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피를 닦아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1)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
I. 본문해설
성도의 공동생활 중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형제적 교정의 교리입니다. 형제적 교정이란 성도의 공동생활 가운데서 잘못하거나 죄에 빠진 형제를 형제들이 고쳐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야지 될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상세하게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그들이 섬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함께 모인 이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잘못된 것을 고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특별한 교훈을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입니다. 이런 형제의 교정의 필요성은 형제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참된 신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렇게 잘못되었을 때 그들을 고쳐서 건강한 예수의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의 교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A. 영적 자선
이런 형제적 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 중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많은 교부들은 이 형제적 교정을 가리켜서 영적자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육적자선은 육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이 쓸 것을 희생해서 다른 지체를 돕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육적자선이라면 영적자선은 그들이 잘못에 빠졌을 때 그 잘못에서 그들을 건져주고 교정해주는 것이 영적자선입니다. 육적자선의 과정에서 말하자면 성경이 우리에게 이 의무를 매우 강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그것들로 우리가 살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물질을 우리 혼자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요, 그 물질을 가지고 많은 지체들을 섬겨서 그 지체들을 돕고 결핍에서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헌금했으니까 이제는 교회가 구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육적자선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헌금을 사용하고 그 속에 지체들을 향한 구제가 들어가는 것은 성경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몇 푼 낸 헌금에 자신의 의무도 교회에 떠넘겼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육적구제의 정신은 자신에게 주신 그 모든 물질을 가지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을 사는 것에 일부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행사와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물질을 인생을 살면서 그 물질이 없어서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지체들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이것이야말로 육적자선의 정신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아름다운 지순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 물질을 흘러가게 해서 그래서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물질이 들어갔더라면 고여 있을 그 물질을 탐욕의 제방을 허물고 그 물질을 필요로 하는 모든 지체들에게 흘려보냄으로 그들의 구겨진 삶들을 펼쳐주고 치료받게 하는 그것이 바로 육적자선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육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이루어져있고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육적자선 위에 영적자선이 필요한 것이니 이 영적자선이 바로 형제들이 잘못되었을 때 그들을 올바로 교정하여 신앙의 교정을 회복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회복함으로 교회전체가 영적으로 건강하도록 회복하는 그 일을 위해서 기여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B. 사랑의 공동체
우선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이것은 바로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일 수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구성하는 각자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깊이 감복하여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아가페 사랑에 감복한 사람들이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이번에는 이 세상의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제 이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는 지체들을 돌보고 사랑하며 또 교회밖에 있는 불신세계를 향해서 주님이 섬기셨던 것처럼 그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이런 섬김과 사랑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교정의 교리는 바로 교회가 이런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 문맥 안에서 형제교정의 교리가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공동체 자체가 교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 지체들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자원들이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 연합을 통해서 내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흘러가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자원, 은사들도 함께 이 교통적 사랑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도록 돕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사랑의 공동체의 교회의 설립과 그리고 운영의 정신입니다. 이런 문맥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가 잘못하였을 때 어떻게 그 형제를 고치고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II.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A. 성도의 잘못
그러면 이제 공동생활과 형제교정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형제가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형제가 범죄하거든”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형제는 정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형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도 역시 범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참된 신자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이 교회 안에서 참된 신자로서 참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들이 진실로 거듭나서 성화의 과정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여러 가지 잘못 때문에 오류에 빠져서 이렇게 올무에 걸린 사람처럼 갇혀있을 수 있는데 이때에 이들을 풀어주고 회복시켜줄 사명이 교회에 있고 그것이 우리 모든 지체들이 그 사명을 함께 나누어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윤리적인 잘못
이렇게 형제가 빠질 수 있는 잘못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는데 하나는 윤리적인 잘못이고 또 하나는 교훈적인 잘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윤리적인 잘못은 자신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형제가 어떤 죄에 빠지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움이라든지 혹은 도적질이라든지 혹은 기타 정욕으로 짓는 죄라든지 어떤 마음에 있든 혹은 밖으로 나타났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어떻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닌 죄에 빠진 상태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리적인 문제를 끼고 있을 때는 윤리적인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에 빠졌을 때 그 지체는 형제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의 죄와 잘못을 교정 받고 다시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복귀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형제들이 이 사람을 교정해주어야 하는데 형제들이 이런 윤리적인 잘못에 빠진 지체를 교정해주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윤리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도 계속해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도적질을 하고 있는 형제를 책망하고 그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정욕에 지고 있는 사람이 정욕에 빠져서 범죄 한 지체를 돌아오도록 잘 권면하고 잘 돌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실은 형제가 윤리적인 잘못에 빠졌을 때마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그리고 자기 정화의 계기로 활용을 해야지 됩니다.
2. 교훈적인 잘못
또 교훈적인 잘못에 형제가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윤리적인 문제는 없지만 진리가 아닌 거짓된 교훈을 참된 신앙을 위한 길이라고 확신하는 잘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사람을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되고 그 형제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그릇된 길에 들어선 그 형제를 설득하여 참된 진리로 교훈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잘못에 빠졌을 때는 윤리적인 잘못이든지 교훈적인 잘못이든지 간에 어째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키더 민스터의 리차드 백스터가 말하듯이 그 모든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건강한 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윤리적인 잘못에 빠진 형제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때는 자신도 윤리적으로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그 오류에 빠진 지체들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성경적으로 보여주고 타이를 수 있어야 됩니다. 더욱이 그가 윤리적인 잘못이 없이 오류인 교훈적 잘못에 빠졌을 경우에는 더더욱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이 사람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선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영적자선을 제대로 베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풍부한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풍부한 진리와 은혜의 지식을 가지고 형제들을 계속 돌아오게 하는 이 사역은 다니엘에서 말한바와 같이 형제를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이 밝게 비추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처럼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 되고 장군이 되어서 역사를 주름잡는 사람보다 도탄에 빠진 형제 한사람, 한사람을 건져 참되신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하고 주님을 배향하던 그 삶을 돌이켜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영적 자산이며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지체들이 부분적인 오류와 윤리적인 잘못에 빠졌을 때 풍부한 은혜의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서 그들에게 참으로 행하여야 할 바가 무엇이고 걸어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이 영적자선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훌륭한 섬김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도록 많이 애를 써야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지나온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교훈적인 잘못에 빠져서 이단적인 신앙을 추종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꾸짖고 혹은 바른 길로 돌아오기 위해서 접근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르친 잘못된 교훈에 미혹하여서 오히려 자신의 참 신앙을 저버리고 오류에 떨어지게 된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은 지식이 없는 사랑으로도 부족하고 그 다음에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이런 잘못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들을 정말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고쳐주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B. 형제교정의 필요성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형제가 오류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교정해주어야 할 형제교정의 필요성은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그를 교정해주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참된 형제이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잘못하게 됩니다. 죄에 빠지게 됩니다. 윤리적인 잘못에 빠지거나 교훈적인 오류에 빠져서 그릇된 확신에 붙잡게 됩니다. 처음 그 순간에 그를 빨리 고쳐주지 않으면 그런 오류 속에서 그 사람의 영혼은 점점 병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영혼이 병들어갈수록 그의 심령은 더욱 피폐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결국은 병들게 됩니다. 이런 지체들이 많이 있으면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섬길 수 있는 교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영혼은 고쳐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영혼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잘못에 빠져있는 그 지체를 섬겨서 그 지체로 하여금 올바른 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교훈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의도이고 또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지체가 잘못하고 있을 때 그 잘못된 지체들을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고쳐주어야 하는데 만약에 빨리 고쳐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의 영혼이 점점 더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류에 빠졌을 때 즉시 건져내지 않으면 그 오류가 그 사람의 지성과 심지어는 그 사람의 모든 사고의 기능까지 점령해서 그래서 그릇된 것을 그릇 되다 고 판단하는 그 지성의 판단조차도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철저하게 방치되기 때문에 빨리 그 형제를 그 형제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교정해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을 위해서라도 선교적인 차원에서 형제가 잘못되었을 때는 빨리 고쳐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주님께 대한 깊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장시간 시간을 내어서 우리가 가르쳐주는 이 교훈의 교리 그 다음에 우리들이 가르쳐주는 이 하나님과의 화목의 교리 같은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고 그러한 판단들이 이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지 않기 위해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못 볼 일들을 보았고 깊이 실망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강한 의도적인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그릇된 모본을 끼쳐진 사람들도 그 사람의 영혼이 실족한 것에 대해서 일정 부분은 죄를 감당해야지 된다는 것이 성경의 판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빛 된 자녀로서의 모본을 보이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실제 중국의 북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화: 중국에 사스가 일어나면서 병원까지 문을 닫을 정도로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사스를 두려워 피한 상황에서 북경 시장이 TV를 보는데 어떤 사람들이 사스가 감염되어있는 위험한 그 지역에 들어가 시민들에게 물과 약과 먹을 것을 주는 모습을 며칠 동안 보고 그들을 알아보니 허가받지 않은 곳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 시장이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자신들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물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인 것이라고 하니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해서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달라고 하자 몇 천 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방법이라는 이야기)
한해 전에 우리 지체들이 아프카니스탄에 선교여행을 갔습니다. 아직까지도 아프카니스탄은 그렇게 마음대로 예수를 못 믿게 합니다. 그리고 정말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곳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해서 두 형제가 예수를 믿었는데 둘이 같은 집안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서로 숨깁니다. 같은 교회에 나오면서,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곳도 없고 예배당에 모이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니까 서로 예수 믿는 신앙을 고백했다는 사실을 마음 놓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서로 믿는데도. 그럴 정도로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 곳에 지체들이 가서 고아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열심히 돕고 섬기고 신체검사도 해주고 사랑으로 함께 돌보면서 뛰놀았습니다. 원래 이 사람이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아이들과 웃고 뛰놀고 막 놀아주니까 마지막 헤어질 때 그 도시에서 만찬을 베풀면서 거기에 있는 지도자급에 있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동리에 외국인이 이렇게 와서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는데 나는 도대체 너무 놀랍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는 너무 궁금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다 그 자리에서 그 사랑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류에 빠진 지체를 내버려두게 되면 그 지체가 계속 망가진 채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을 향해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들이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위해서라도 그 지체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교회를 위해서라도 그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한 지체이니 그가 오류에 계속 빠져있을 경우에는 그 죄가 계속해서 번성해서 다른 지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래서 교회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형제를 고쳐야합니다. 그러니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오류와 잘못이 사실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잘못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자신에게 충고하려고하면 우리는 흔히 내 프라이버시야, 내 개인적인 생활이니까 이야기하지 마. 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런 것은 성경적인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윤리적인 삶도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느 형제가 주님을 위해서 정말 아름다운 은사를 받았으면 그 모두 우리의 것이고 그 형제가 죄악에 빠졌으면 그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부끄러움이니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우리들이 서로를 고쳐 온전하게 되라고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 속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주신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간구하도록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를 고쳐주어야지만 교회가 전체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교회에 계속 출석하면서 이런 죄를 짓게 될 경우에는 더욱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죄 가운데 빠졌다가 교회를 떠나가면 그가 예수의 몸인데 교회를 떠나갔으니 그의 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을 교회가 함께 느끼게 될 것이고 교회에 남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형제의 잘못된 삶을 모든 형제들이 함께 보게 됨으로서 그의 그릇된 표양을 보면서 다른 모든 지체들이 오류에 빠질 담대함을 가지게 되니 이 또한 교회를 위해서 속히 그 형제의 오류를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사역자가 외국에 있는 교회에 나갔는데 한인교회에 나가서 부교역자로 섬기는데 청년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청년 중에 여러 커플이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청년들에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교회의 분위기는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느냐는 식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충격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릇된 표양이 가져다주는 위험입니다.
(예화: 미국에 가셨을 때 어느 자매의 간증: 그 자매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훤칠하게 생긴 그림처럼 멋있는 청년들이 손을 잡고 가기에 둘이 친하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청년이 뽀뽀를 하기에 충격에 놀랐는데 또 여자 애들이 전철에서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그것이 종종 있는 일이기에 잘못된 표양을 보면서 만성이 되어간다는 이야기)
이번에 그 도시에 갔더니 어느 한 교회에서 성도 한사람이 교회를 걸어서 재판을 청구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하는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말하는데 자기는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당장 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 예가 한국에는 없는데 외국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언젠가 한번은 성도 한사람이 법원에 재소를 했습니다. 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무엇인가 하면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십일조를 열심히 바쳤는데 복커녕 비슷한 것도 안 오더라. 그러니 이것은 교회가 사기를 친 것이다. 부당이득 반환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목사님에게 그랬습니다. 돌려주지 마십시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님은 돌려줄 권한이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소송을 하다니 진짜 하나님이 한번 본보기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왜 돌려주면 안 되는지 설명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헌금을 바쳤을 때 그 돈이 교회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이 교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교회가 교인이 낸 헌금을 가지고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러는데 그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순간, 여러분이 헌금을 해야지 되겠다고 돈을 구별해서 떼어놓는 순간 그 돈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돈이고 그 헌금을 헌금함에 넣는 그 순간 그 돈은 여러분의 손을 떠나서 하나님께 바쳐진 돈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 헌금이 잘못 쓰여 지든, 도둑을 맞던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물질을 바칠 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대로 하나님이 축복해주십니다. 그러니까 돈은 바쳤고 그것으로 하늘창고에 들어가서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에 쓰는 돈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박 집사가 낸 돈으로 선교하는 게 아니고 최 집사의 십일조로 목사들이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김 권사의 감사헌금을 가지고 주일학교 학생들이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교지에서 선교비를 받은 선교사는 이 헌금이 박 집사가 낸 십일조가, 최 집사가 낸 감사헌금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교회에서 보내주었는지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창고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에 헌금을 바치고는 그 헌금이 모두 돌아서 쓰여 질 때까지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바친 돈이 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재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돈이 아직 그 교회의 통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멍텅구리, 천치 바보 깡통이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을 성도들이 다 봅니다. 어떤 형제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지켜보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의 영적수준은 다 다릅니다. 어떤 지체들은 형제가 아무리 죄를 범하고 잘못해도 그것을 보면서 실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가 죄를 범했구나. 나는 저러면 안 되는데. 기도해야지 되겠구나. 이렇게 하고 자기가 더 올바로 살아가는 지체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 사람의 경우 그렇게 헌금 1억을 되찾겠다고 교회를 걸어서 세상법정에 재판을 걸었습니다. 자식들이 그것을 보면서 뭘 배울까? 난 걱정입니다. 뭘 배울까? 아! 이래도 되는구나. 그것을 배울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교회를 욕하고 말이지. 사실 예배시간에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한곳에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자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그 일을 행합니다. 그것이 그릇된 표양입니다.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그 자식들이 뭘 배우게 됩니까?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 앞에서 배우지만 아이가 좀 머리가 크면 부모 뒷모습을 보면서 배웁니다. 뭘 배우겠습니까? 그러니 그는 그 한 가지만 범죄 한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지 범죄 한 것을 방치하면 자기는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죄들을 범하면서 그러면서 그 죄가 진척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계산을 하면 어마어마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제의 교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III. 형제 교정의 원리
A. 명예를 보존함
그러면 그 형제를 교정하는 원리가 무엇일까? 첫째는 명예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짐승같이 죄를 지어서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예수님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 지체의 무슨 명예를 보존해준단 말인가? 이렇게 얘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오직 그에게로 가서 오직 그만 상대하여 그를 권고하라. 그의 뜻을 그가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어떤 잘못을 발견하게 되면 혼자서 그 형제를 찾아가서 은밀한 중에 단 둘이 있을 때 그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누가 잘못을 하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가 너 이런 잘못을 한 것 같은데, 너 어떻게 생각하니. 고쳐야 되지 않겠니.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나면 그 사람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람에게는 안 가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가서 막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말은 불어나고 불어나서 두 세 사람이 돌고 돌아서 그 사람 빼놓고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만듭니다. 오히려 범죄 한 한 형제가 지금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다니는 지체들이 교회를 위태롭게 하면서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정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범죄에 대해서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자유로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형제의 잘못을 보았을 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의 영혼을 위해서 진실하게 장시간 기도하고 오직 그 사람만 대면해본 적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그 지체와 그런 친분이 없습니다. 여기서 “친구가 범죄 하거든” 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네 친한 친구가 죄를 짓거든” 그 친한 한도 내에서 찾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범죄 하거든 이게 교회의 공동체성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다 평소에 그 죄에 빠진 형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형제였으면 본 것 플러스, 알파 해서 악 소문을 퍼뜨려서 인간을 매장시켜버립니다. 사실은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염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감염되지 않으면 아뭅니다. 그런데 감염됩니다. 그러면 상처를 내는 사람도 나쁘겠지만 그것을 감염시켜서 온 몸을 위태롭게 한 사람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 자기 생각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작당을 해서 당을 만들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그렇게 남을 비난하고 소문을 퍼뜨려서 범죄 한 형제의 범죄를 빌미삼아서 그의 명예를 먹칠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회심조차도 안 한 사람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한사람에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교회를 떠나게 하고 실망을 하게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제를 바르게 해줄 용기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어떤 것, 괜히 내가 얘기했다가 네가 뭔데 이렇게 면박을 주면 나는 어떻게 하나. 아니면 또 그 형제가 내 약점을 알고 너도 이랬잖아. 대들면 어떻게 하나. 이런 등등의 이야기. 또 내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괜히 휘말려 들어서 내 평안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이것은 모두 다 예수님 사랑일까요, 자기 사랑일까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공동체성이 현저하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실들은 오늘날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표준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환경들을 내가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타의 신앙적인 행동인지를 여러분들이 오늘 분명히 알고 고쳐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를 지은 형제는 조금 야단을 치시고 그것을 그냥 입으로 토해내서 모든 지체들에게 옮겨가서 교회를 더럽힌 여러분들 중에 한 사람, 그 말을 옮긴 그 한사람의 죄를 준엄하게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왜 그 형제가 죄를 범하는 그 순간 그것은 개인적인 범죄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그런 무분별한 말의 옮겨서 형제교정이 아닌 형제 악담, 형제 교정이 아닌 형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감염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당뇨가 왜 그렇게 무서운지 아십니까? 당뇨가 아무리 심하게 걸려도 인슐린을 제때 맞고 당을 조절하면 절대 안 죽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됩니까? 합병증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이 상처가 나면 아물지 않습니다. 수술을 하면 피가 멎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감염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많이 감염시켰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소문에 휘말려서 형제의 명예를 보존해주지 못하고 실추시키는 그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아주 심각하게 자기를 성찰해야지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명예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범죄 한 형제인데도 은밀히 찾아가서 그에게만 말하라고 하는 것으로 형제교정을 시작하신 이유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범죄 한 형제지만 그의 명예를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는 복음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 죄를 지었을 때는 다른 사람 누구에게 알려지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 자신이 이미 깊이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실은 양심에 가책보다도 중요한 복음으로 그를 감동시켜서 그 길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명예를 보존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돌아올 때 보면 율법 때문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복음 때문에 감동해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형제를 돌이키는 원리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복음적인 배려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배려까지 포함되어있습니다. 사람은 명예를 매우 생명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기가 승복을 하게 되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이것을 굴복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열의 잘못을 했는데 다섯이나 여섯 일곱의 야단을 맞을 때는 정말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열밖에 잘못을 안 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열다섯 개로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들면서 그래. 나 죄지었다. 어쩔래. 너희들은 좀 낫냐. 너 나보고 죄를 지었다고 그러는데 너도 옛날에 보니까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 너는 이런 죄는 안 지었지만 너 뇌물 먹는다고 소문났더라. 너 공무원이잖아. 너 직장에서 다 그러더라. 너 돈 밝힌다고, 너 지금은 나를 뭐라고 그러지만 너 네 마누라가 바람을 펴서 온 교인이 다 아는데 네가 낫니, 그래 나 더럽다. 네들 중에 깨끗한 놈이 어디에 있냐. 쓰레기 같은 놈들, 그러고 사태가 확장이 됩니다. 그래 나 죄 지었다. 어쩔래. 그래. 나 막간다. 어쩔래. 너희들이 뭔데. 경찰에서 가만히 있는데 너희들이 뭐야. 이런 반응이 심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만한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예를 보존해주는 그것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배려하신 것입니다. 찾아가서 그 형제만 독대하라. 그리고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이야기해주고 돌이킬 수 있도록 얘기하라.
제가 대학에 9년 동안 있었습니다. 후반부에는 내가 약간 온순해지기는 했지만 초반부에는 정말 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검찰총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말 잘못합니다. 이해가 안 되게끔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정말 달구었습니다. 이 교수에게는 리포터를 보는 직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수백 개의 리포터를 읽어도 어 이거 어디서 봤는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찾아내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분명히 깨끗하게 쓰여진 것인데 어디서 분명히 본 것입니다. 이상하네, 이거 어디서 읽었는데 그래서 그것을 전부다 교수실 바닥에 펼쳐놓고 조교하고 둘이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딱 하나를 찾았는데 똑같은 컴퓨터에 써서 한사람은 명조체로 한사람은 필기체로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더 지능적인 놈은 이 사람 리포터에서 삼분의 일씩 합쳐서 합니다. 그것까지 다 찾아서 마지막에 교수실 앞에 방을 붙였습니다. 몇 번 리포터는 몇 번하고 같고 몇 번은 몇 번 플러스 몇 번이니까 배낀 사람과 배낌을 당한 사람이 함께 와서 해명하지 않으면 다 낙제다. 그러고 방을 써서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들어옵니다. 정말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놈들 중에 아주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애들이 있습니다. 번질번질한 게 머리를 극적 극적 하면서 들어와서 교수실의 의자에 앉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있다가 리포트를 한줌 쥐어서 화가 좀 안 나도 그를 경우에 학생들에게 기선을 확 제압해야지 4년 동안 편안하지 첫 번 만남에서 말려들기 시작하면 고달픕니다. 그래서 리포트를 한줌 가지고 있다가 앉으려고 하면 확 집어던집니다. 너 이놈의 자식, 너 같은 놈이 무슨 신학교를 오냐고 나는 너 같은 인간하고 상대할 일이 없으니까 너 신학교 가도 된다고 도장을 찍어준 너희 담임목사님 이름하고 전화번호 적으라고, 너하고는 대화할 가치도 없다. 내가 물어보려고 그런다. 도대체 목사님이 뭘 보고 이런 애를 신학교를 가서 앞으로 목사가 되라고 도장을 찍어주었는지 내가 직접 통화해서 물어보겠다. 그러고 봉변을 당하고 뛰어나갑니다. 언제까지 내는지 묻지도 않고 뛰어나갑니다.
그 다음 학생이 들어옵니다. 어땠니? 말하지 마. 너는 이제 죽었다. 들어오는데 이 애는 의외의 애입니다. 애는 진짜 양순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애인데 왜 리포트를 이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들어오면서 앉지도 못하고 스스로 부끄러운 좌괴감에 얼굴을 못 듭니다. 앉아라. 그래서 이제 앉아서 앞에 나간 학생하고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애들이 그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우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결국은 졸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애는 집어치워, 그러면 당장 가다가 그냥 자퇴 원서를 써버립니다. 그러니까 이제 앉아서 네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으니까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 공부한다며, 네. 세차장에서 일한다고 하는데 정말이냐. 네, 네 부인은 아이가 있으면서 또 공장에 다닌다면, 네, 그러면서 물어봅니다. 커피, 홍차, 녹차, 물 이렇게 있는데 뭘 먹을래? 예외 없이 아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아무 것이나 주십시오. 아무래도 그런 애에게는 냉수가 적합할 것 같아서 물을 줍니다. 다 마실 때쯤 되어서 어깨에 손을 얹고 힘들지 그러면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나도 그렇게 힘든 전도사 생활을 보냈단다. 지금도 전도사야. 그런데 너희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네 아내가 그 공장에 가서 힘들게 일하는데 마지막 희망이 너 좋은 목사가 되는 것 말고 뭐가 있겠니. 그럼 막 엉엉 웁니다. 누구든지 그런 실수 한번쯤 하지 않겠니. 다음 주까지 다시 써서 내라. 그리고 보냅니다. “문을 열고 눈물을 씻고 나가면 친구들이 야 너 혼났지. 몰라
어둡고 캄캄한 길에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B. 사랑과 용서의 원리
그래서 아무리 잘못하고 있는 형제들이라도 명예를 보존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명예는 실추시킨 예수님의 명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명예를 보존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의 원리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이 용서와 사랑은 그의 죄를 자기 모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고 있다고 하는 바디로서의 연대의식에서 오는 용서와 사랑의 정신입니다. 에스라가 이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스라는 경건한 지도자였는데 어느 날 보니까 포로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때 이 에스라는 제일 먼저 성전 앞에 가서 엎드려서 자기의 죄인 것처럼 흐느껴 울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게 바로 공동체의 정신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가 저 형제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포기되어서는 안 될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너무 현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들을 낳는데 계속 가서 맞고 옵니다. 그럼 여러분이 열 받아서 말하고 싶은 게 너는 병신이냐. 너도 한대 때려, 그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어느 집안에서는 애가 계속 맞고 오니까 엄마가 속상하니까 몇 대 맞았니. 그래서 세대를 맞았다고 그러면 다섯 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가 완전히 얻어맞고만 다니던 아이가 싸움꾼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집에 가도 맞으니까 여기서 해결을 봅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중학교 2학년을 기왓장으로 머리를 날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는지, 그렇게 엄마가 그 애를 담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집안에서 그렇게 가르치면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자신의 윤리적인 행동 앞에서 특별히 이 사랑과 용서의 행동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복음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느끼게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적인 사람이 되게 해야지 됩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워갑니다.
그러니 제 논리를 잘 들어보십시오. 성경의 논리를. 어떤 형제가 잘못합니다. 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어. 나쁜 자식, 그리고 계속 쪼아대기 시작합니다. 온 교회당에 더러운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떠든 모든 지체들이 하나도 용서를 비는 사람이 없고 발설한 사람도 아님 말고 신문을 볼 때 제가 제일 분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하는데 오보입니다. 그리고 어느 회사나 집단을 심각하게 실추시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며칠 있다가 신문에 그때 그 기사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안경을 써도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일단의 기사로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으면 그 다음에 잘못된 판단이 나왔을 경우에는 일단에 똑같이 내야지 됩니다. 그래서 그날 신문은 일단의 기사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매장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오늘날 사회가 계속됩니다.
몇 년 전 교계에서 꽤 알려진 어느 목사님의 교회에 어느 지체가 우리 목사님이 1억 2천 8십 4만원의 연봉을 받아간다고 인터넷에 터트렸습니다. 그 인터넷의 소문에 소문을 타고 신문에까지 완전히 번져서 목사님을 거의 매장시키려고 했습니다. 뭐 그게 다 목사님의 월급인지 다른 것 까지 합쳐졌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많은가, 적은가 하는 것도 그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동입니다. 어떻게 비열하게 그렇게 하는지, 교회 안에 회의도 있고 다 있는데 자기가 집사면 제직회 가서 이야기하면 될 것이고 그것도 아니고 성도면 공동회의 시간에 목사님이 너무 월급을 많이 받습니다. 좀 깎읍시다. 얘기할 수 있는데 아마 정 답답하면 재정위원장을 찾아가서 존경하는 목사님 너무 월급을 많이 주어서 제가 마음이 아프다고 얘기하든지 그럼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인터넷에 터트려서 중대한 범죄행위가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다 보도록 일간신문에까지 보도가 나게 그따위로 합니다.
현대에서 지금 검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혀를 내두릅니다. 검찰에서 수사를 나왔는데 비밀문고 번호까지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수사해서 나오겠습니까? 그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밀고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가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나는 편들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같이 피를 묻히고 더러운 일을 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자기를 섭섭하게 한다고 그런 식으로 자기가 다니던 회사를 헐뜯고 그렇게 폭로해서 그렇게 더럽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아주 더러운 행동입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책을 썼는데 정말 과자를 절대 먹지 말라고 과자가 얼마나 더러운 환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모르니까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데 하니까 우리 집 사람이 전직 제과회사의 임직원이라고 해서 그놈도 나쁜 놈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는지 아니 현직에 있을 때 써야지, 나 어느 제과회사 전무인데 어느 날 내가 눈뜨고 보니까 우리 회사가 진짜 더러운 창고에서 불량한 재료로 만들어서 그럴 듯하게 만들어서 몇 배로 붙여서 팔아먹는다. 나는 이 순간을 빌어서 나의 모든 지은 죄에 대해서 소비자에게 진짜 백배 사죄하고 나는 양심상 가서 포장마차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시민의 양심을 거슬려서 이 회사에 몸담을 수 없다. 내가 이 사표와 내가 책을 낸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 그때는 못하고 잘린 다음에 그다음에 어떻게 하면 저 회사를 씹어 먹을까! 해서 비열하게 자기가 다 불량하게 환경을 만들어놓고 실컷 소비자들에게 과자를 먹게 해놓고 이제 와서 너희들이 먹은 과자를 만든 회사는 제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거기 임원으로 있으면서 만들었으면서, 쓰레기 같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지,
이렇게 잘못된 세대를 올바른 복음의 정신으로 꾸짖어야지 될 사회의 목소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교회에서 그런 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똑같이 그렇게 자기도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게 교회 담장 사이 하나를 두고 교회 속에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지 뭐이겠습니까? 그런 비열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위선을 떨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끝나서 나가 또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는 교회 밖에 있는 쓰레기고 하나는 교회에 있는 쓰레기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이 익명이 가지고 있는 유익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익명성이 있기 때문에 사실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폭로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가 정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까지 그렇게 되어야겠는지,
여러분들은 한번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지체들 가운데 죄를 지어서 회개하는 지체는 봤지만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잘못알고 잘못된 소문을 내어서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이 세상에서도 생명보다 명예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수치스럽게 살기보다는 명예롭게 기꺼이 죽을 사람들 많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이야기를 한다면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 구차하고 불명예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명예스럽게 죽어버리는 것을 저는 택할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라도 말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그것을 못하게 하는데 심지어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합니까? 그들은 흔히 자신들이 올바로 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뭐가 올바른 것인데?
제가 한 10년 넘게 무좀에 시달렸습니다.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하는 이 무좀이 무슨 약을 발라도 안 낫습니다. 처음에는 낫는 것 같다가 약에 내성이 생기면 그 약을 바르나마나입니다. 또 다른 약을 바르고 또 다른 약을 바르고 그래서 하다가 해도 안 낫습니다. 낫는가 하면 그 이듬해 또 번지고 또 번지고 그 다음에는 면양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 신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여름에도 두툼한 면양말을 신습니다. 나도 더워서 싫은데 그게 제일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치료해도 자꾸 옆의 발가락으로 무좀을 번지게 만드는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리는 것이 무좀에 대한 대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무좀에 걸린 다섯 발가락이라도 정상적으로 가지고 살고 싶지 그것을 잘라버리고 네 발가락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잘라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게 남의 발가락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이지,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정신이 우리 모두의 죄를 당신의 죄라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형벌을 당할 때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형제를 돕기 위해서 고난을 참는 일은 가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 빠진 형제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지체들의 고난이 필요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게 예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도 없이 행동하며 사는 동안에 예수의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깊이 뉘우치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같은 일을 행하지 아니하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룰 때 고깃덩이처럼 다루지 말고 인체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래도 그런 사랑과 용서의 원리를 가지고 행하면서 죄는 미워하고 죄인은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파해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무엇인가를 비판하려거든 먼저 그 비판하려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유사한 이야기를 어거스틴이 남겼습니다. “먼저 그대의 지체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런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어떤 죄에 빠진 지체도 그 형제를 더럽다고 여기지 말고 그것을 회복시켜 건강한 몸으로 만들어주는 그것이 정말 그를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를 그렇게 고치지 않으면 결국은 찢어지는 열교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 남아서 교회를 부패시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형제들 속에서 수많은 교정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몸이 건강해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형제를 찾아가서 형제의 죄를 먼저 발견하고 그를 눈물로 기도하니까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셔서 그래서 다가가서 내가 너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 못한 것은 정말 잘못했는데 너 이런 잘못했는데 너 어떻게 생각하니? 정말 돌이켰으면 좋겠다. 그랬을 때 형제가 정말 나도 너무나 괴로웠었는데 네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니 너무나 고맙구나. 내가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데 네가 나를 도와줄래. 그러고 치료의 길에서 일어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그 형제의 죄가 얼마나 교회를 건강하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C. 견책 받지 않을 때
하나님의 그 놀라운 가슴 저미는 사랑은 모두 죄에 빠졌던 사람들에 의해서 경험됩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경험하면서 공동체가 커간다고 생각하면 형제 가운데 남아있는 죄들이 올바로 그것을 다루기만 하면 은혜의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바꾸어놓으십니다. 그런 것을 결국은 악이 되게끔 공동체 자체의 존립마저 위협하게끔 그렇게 만드는 그 감염시키는 사람들이 너무나 교회에 많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두 세 사람이 찾아가서 함께 권하라. 경고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 그래서 치리하면 잘라낸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죄지은 형제를 잘라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형제를,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잘라내라. 죄지은 형제를 잘라내라는 말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잘라내라. 어떤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형제는 잘라낼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잘라내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화해와 일치
결국 형제교정의 이 가르침은 교회가 잘못한 것을 고치면서도 일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잘못된 것을 고치면서도 화해와 일치를 유지하는 복음적인 비결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런 교리들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무지하거나 더 근본적으로 사랑과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한 형제를 정죄하는 동안에 예전에 자신도 그런 죄에 빠졌던 인간이라는 사실은 까마귀고기를 먹은 것처럼 새카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십자가의 정신이 유지되고 현재적으로 십자가가 경험되는 곳에서만 이 형제 교정의 교리가 실행이 가능하지 십자가에 대한 감각이 없는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자기가 어떤 죄 가운데 용서받은 죄인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최근에 어느 후배 목회자가 교회의 어려움이 있는 것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관두라. 떠나라. 왜요? 교인들이 원하지 않잖아. 목사님은 교인이 가라고 그러면 가야지 되는 사람입니까? 아니다. 목사는 교인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시면 가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교회가 상처를 받잖아. 당신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면 결국은 당신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입증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교회는 누가 고치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 중 누가 상처를 받는 것이 낫지,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목회를 하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예화: 교인도 적은 어느 교회의 목사님의 사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상처를 하신 가운데 혼자 사시는데 교회의 어느 자매가 계속 배가 불러오는데 충격적으로 어느 날이 자매가 고백한 내용은 배속의 아이가 목사님의 애라고 말하자 교회가 발칵 뒤집어졌는데 목사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이 자매가 종종 목사님 사택에 가서 밥을 해드리며 수종을 들었기에 모든 교인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목사님은 노회에서 목사 지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면서 그 아기를 목사님의 품에 안겨 내보냈는데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 교회의 부흥회를 통해 이 자매가 은혜를 받고 그 아이가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어느 유부남 집사의 아이였다고 고백하자 온 성도들이 목사님을 내쫓은 장로들을 향하여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내쫓은 사실을 질타했다는 내용)
결국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 실화를 들은 것이 20년 전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내가 그 목사님의 상황에 간다면 그럴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목사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냥 오래 참으니까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사필귀정이구나. 처음에는 그것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12-3년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드는 느낌이 이제 그 목사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후배에게 그렇게 충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옳은 것이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이 밝혀지는 것을 통해서 명에를 회복하게 되는 것은 몇몇 사람이지만 그것을 밝히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은 안 고쳐집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소송을 하고 그다음에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고 그 다음에 이쪽에서 찬송하면 이쪽에서 설교하고 이쪽에서 설교하면 저쪽에서 기도하고 이렇게 교회가 찢어지고 갈라져서 교인들이 물고 뜯고 싸우는 동안에 교인들의 영혼은 전부다 병들어버립니다. 그것은 그 다음에 누가와도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굉장히 지혜로우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그냥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수소문해서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저 강원도에 있는 사북 어느 탄광에서 그 아이를 기르면서 광부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5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낸 것입니다. 마침 그 교회에 있는 목사님이 다른 곳에 임지가 있어서 가셔서 그 자리에 비게 되어서 가서 석고대죄를 하고 그 목사님을 모셔왔습니다. 마지막에 그 목사님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성자 대접을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깊이 깨닫게 된 것이 무어인가 하면 아! 그렇구나. 나보다는 지체가 소중하고 지체보다는 주님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가 당신의 상황이라면 떠날 것이라고, 왜 그게 교회가 안 아픈 비결입니다. 누가 옳았는지 그른지는 이 세상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입증이 될 것이고 입증이 안 되면 뭔 상관이 있는가. 교회의 역사가 결국은 밝혀지지 않아서 교회의 역사가 우리를 죽일 놈이라고 매도해도 주님이 안 그렇다고 그러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는 아프지 말아야 됩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 찢어놓고 상처를 받게끔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마지막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치료하고 고치고 싸매고 작은 흠집 하나에도 가슴 저미는 것처럼 슬퍼하면서 싸안고 고쳐서 온전하게 만들어도 우리의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쥐꼬리만치 섬기고 어느 날 말할 수 없이 교회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것 봐, 내가 이겼지. 그게 무슨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V. 결론과 적용
저는 이 시간에도 상처 난 이 땅의 수많은 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작은 교회도 예수의 몸이고 성도 두 세 사람밖에 안 모이는 개척교회도 우리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살인데, 지체인데 그냥 희생하면 되는데, 누명 좀 쓰면 안 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고난이 충족했지 남은 고난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가 남은 고난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충족하게 고난을 받고 죽으셨지만 아직 교회의 몸은 아픕니다. 그게 예수의 고난입니다. 교회의 몸은 불안전함으로 아직도 아픕니다. 그게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 속에 채워서 나는 아프고 교회는 안 아프게, 그렇게 일생동안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연약한 자에게 믿음 주고 슬픔에 싸인 자 위로하며
길 잃은 자들을 친절히 이끌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 땅에 있는 많은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모두 예수의 몸인데 고통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에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너무 없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미래의 조국교회에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악하고 잘못된 형제라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를 잘라낼 생각부터 하지 말고 회개하여 주님을 배향하였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전향하도록 돕고 그래서 그 형제가 마음이 강퍅해서 회개할 수 없을 때는 여러분들이 대신 회개해주고 그래서 결국은 예수의 몸이 건강하게 그렇게 되도록 어려울 때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나도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고 마음을 갖고 그렇게 희생하고 낮추면서 형제들 모두를 뜨겁게 피붙이처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잘해줄 때만 사랑하지 말고 성령 충만할 때만 사랑하지 말고 죄 가운데 있을 때 미끄러졌을 때 실족했을 때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손을 이끌고 빛 가운데 함께 살기를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8.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2)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
I. 형제 교정의 정신
벌써 여러 주가 지났습니다만, 지난주에 형제 교정의 첫 번째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있는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제 이 교회를 온전케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강단의 목회자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 여러분들을 목양함으로 온전케 하지만 또 성도들은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스스로 온전케 하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교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A. 깨우침
그러면 형제 교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이 형제 교정의 정신은 우리에게 특별히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는 형제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행동들, 이것들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허리가 많이 아파서 치료하러 갔는데 엎드리라고 그래서 웃통을 벗고 이제 엎드렸더니 치료하는 분이 내 등을 이렇게 보면서 하는 말이 왼쪽으로 칼잠을 주무시는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래서 왼쪽으로 칼잠을 하도 잤기 때문에 이 어깨가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허리와 등이 아픈 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생겨났는지 저는 모르겠는데, 지금도 이렇게 대자로 누워서 자는 것보다는 이렇게 오그리고 한쪽으로 칼잠을 자는 것이 참 편안해집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우리의 가정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옛날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님이 사업을 크게 하시고 집안이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사업에 망하고 이런 뒤에 아주 콧구멍만한 조그만 방에서 여덟 식구가 자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온 가족의 의무상황이 칼잠입니다. 왜냐하면 퍼질러 자서는 도저히 그 여덟 식구가 작은 방에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는 똑바로 누워서 잔 것이 아니라 아랫목을 향해서 발을 뻗고 모두 부채꼴로 잤습니다. 칼잠을 각기 자게 되었는데, 이제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서 밖에 나와서 소변을 보고 들어가면 옆에 누워 자던 식구가 칼잠에서 똑바로 잠을 자기 시작하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얼마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생겨난 습관이 아닐까 생각하고 좀 똑바로 누워서 자면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침대 끝에서 오그리고 칼잠을 왼쪽으로 자야지만 편한데 그런 잠버릇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이 몸 전체가 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은 우연히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이 모두 그 본성에 깊이 배어서 그래서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아름다운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이 변하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그런 잘못된 행동이 나오게 되었던 그의 본성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입니다. 이게 본성에 대한 철학적 정의입니다.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연입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원래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자연이라는 말이 말도 안 됩니다. 원래 그렇게 있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만드신 것인데, 그런데 어째든 자연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연입니다. 자연은 원래 그렇게 스스로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성격이 자연입니다. 그리고 일관성입니다. 이런 게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성이 바뀌기 전에는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과연 우리 잘못된 형제의 본성을 이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없습니다. 목회자도 그것을 못하는데 어떻게 여러분이 감히 형제에게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도 여러분이 못 고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무능한지 알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자연적인 본성은 어떻게 바뀌는가? 자연적인 본성이 또 다른 종류의 자연적인 본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경우에, 이런 경우에는 자연적인 본성이 또 다른 본성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역시 뭔가 지식의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불신자인데 늘 낭비하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집안이 망해서 거렁뱅이가 되다시피 되었는데 믿고 누군가 찾아갔더니 심한 모욕을 주어서 이를 악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러다 그 다음에 지독한 짠돌이가 되는 이런 본성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경우에 지식의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원리하고 자연적인 원리하고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본성의 빛도 결국은 성령의 빛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본성의 변화가 단순한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본성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던 본성이 변화되어서 죄를 미워하고 거짓을 좋아하던 본성이 변화하여서 진리를 사랑하는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진리를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렇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이렇게 자연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죄 된 본성을 신령한 본성으로 변화시킬 때 그때 형제가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본성이 변화되면 죄보다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런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본성의 신령한 변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본성의 신령한 변화는 성령님이 저자입니다. 성령님만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바꾸어서 신령한 본성으로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령한 본성으로 사람을 고치실 때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진리의 말씀으로 고치신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말씀으로 고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경을 베고 잠을 많이 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머리 속에 성경이 들어가지 않고 성경으로 도배를 한 방바닥에서 여러분들이 이불을 덮고 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절대로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신령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 있어야 하고 깨닫는 그 일은 누군가가 그를 깨우쳐줄 때 깨닫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일어나는 형제 교정의 정신이 형제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국 내가 형제의 죄를 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이것은 잘못되었으니 고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사랑으로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공개적인 석상에서가 아니라 은밀히 그를 만나서 이렇게 찬찬히 가르쳐주는 그것은 그를 직접적으로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참된 것으로 그에게 가르쳐주어서 그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하나님께 깨우침을 받게 하는 그것이 형제 교정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런 형제 교정이 안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올바로 형제를 교정하기만 한다면 형제가 잘 모르고 범죄 했을 때 은밀히 찾아가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은 잘못되어서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니 네가 이 죄에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자. 이번에는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다음에는 저 사람이 이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작용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얼마나 빨리 하나가 되어 갈지 그래서 점점 더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해져서 그래서 교회의 몸이 온전하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오늘날은 사실 이런 성경적 형제 교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누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면 깊이 아파하며 기도하다가 그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기도하기는커녕 옆에 있는 지체를 찾아가서 이것을 하나의 가시거리로 삼습니다. 아무 아무개 집사가 인간도 아니야. 그러고 씹기 시작합니다. 어, 그랬다. 그래서 말에 말을 보탭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잘못된 사실들이 말에 말을 붙어서 부풀어갑니다. 화제 거리가 되어서 그것들이 막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더럽힙니다. 마지막 날에 모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경우에는 이해관계에 관련될 경우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형제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형제에 대한 아주 깊은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감히 그에게 찾아가서 네가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하는 마음이나 혹은 용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형제가 잘못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제일 나중에 소문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형편이 아닙니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교회의 분열과 성도들과의 다툼,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교회에서 정죄를 당하고 용서를 받아야할 교회에서 오히려 미움을 당하면서 그렇게 자기 회복의 길로부터 멀어지는 이 교회의 비참한 형편들은 바로 이런 참된 성경적 형제 교정을 통해서 필요한 지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교정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교정해주는 사람 자신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는 개차반으로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딱 보니까 어느 형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서 너 그렇지 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 이미 벌써 자신 속에 우월감과 자기 의가 꽉 찬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해주는데 이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그리고 그 형제가 진리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 되어가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신도 무엇인가 온전해지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면 형제의 죄를 보고 열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자신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모함이 없는데 그 형제의 잘못을 보고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가서 똑바로 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허위고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차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 자체는 나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형제에게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깊이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로 하여금 깨우침을 받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형제를 내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 세워서 나의 깨우침은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 그리고 그를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 세워서 그래서 결국은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의 본성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변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래서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이 형제 교정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다음에 형제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나서지 말자. 잘 들으십시오. 오늘 이 말씀을, 특별히 말씀에 은혜 꽤나 받았다는 사람들이 오늘 큰 찔림을 받으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서지 말자. 뭔가 그래도 잘해보려고 교회에서 그러면 늘 상처를 받더라. 이번에는 너나 잘하세요. 가 아니라 나나 잘할게요.’ 이것은 현저한 사랑의 결핍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들이 오류에 빠지고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자기의 신앙만 보존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는데 일체 다른 사람에게 말을 들을 수 있는 직분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들을 염려가 있는 직분, 이런 것들은 전혀 맡으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영광과 박수를 받는 그런 것이나 맡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교회에 와서 나 필요한 것이나 얻어가지고 나가겠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정신적으로 이 교회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정직하게 그대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십시오. 교회를 부패 식당처럼 생각하고 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먹고 떠나는 그 사람의 신앙이 정말 건강할 수 있겠는지 그 속에 정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느낌이지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보이는 형제들의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만 확인됩니다. 보이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없는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자부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실제 있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형제가 죄를 범했는데 오류에 빠졌는데, 지식의 빛이 없어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데 그런데 그 형제를 보고 그 형제의 영혼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그 형제를 뭔가 도와주었다가 싫은 소리를 들으면 나는 나서지 않겠다면서 자기를 보존하는데, 그게 자기 사랑이지 공동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이 교회를 아는 사람인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랑은 느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실제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월드컵 축구를 할 때 애국자가 아닌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대한민국 할 때 그때만 애국자지, 감정적 애국자입니다. 진짜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을 하는 사람은 탈세도 하지 말고 축구 경기를 할 때만 가서 대한민국하고 지면 소주병이고 콜라병이고 집어던지고 오는 그런 사람이 무슨 애국자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잘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랑이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교회를 향한 사랑과 지체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저게 없는 것이지 저게 있다고 느낌이 오는데 이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한 성경의 증언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공개석상에서 집단적으로 교회를 비난하고 어느 특정한 형제를 지목해서 모욕을 주고 하는데 쓰레기입니다. 성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참고 인내해준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러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날에 그대들의 그 지각없는 행동과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하나님 앞에 무신론적인 행동들이 모두 기록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을 가두어둘 유치장도 없고 창과 칼도 없습니다. 교회에 있는 무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 사랑에 굴복하지 않아서 교회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면 목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는 그대들이 찔리면 찔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그대들의 영혼에 갚으십니다. 이미 그대들의 영혼에 고통이 시작되었으니 왜냐하면 그대들이 찔리는 그 찔림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찔림이 아니라 그대들의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나는 단 한번이라도 성령님께서 그대들의 마음에 오셔서 여러분들의 그런 행동을 통해서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시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기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 교만과 가식,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에는 매우 인색하거나 형식적인 말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하나님도 행하시지 않는 엄격함으로 정죄하고 미워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끊임없이 생채기를 내는 사람입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찌르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무거운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모든 영적인 악화된 상황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이 아름다운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은혜의 도구인 형제 교정의 유산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것들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겸손하고 일체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마음으로 형제의 오류와 죄악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정죄하고 미워하기 전에 그것 때문에 아파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고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깨우치는 것입니다.
B. 고치게 함
두 번째 정신은 고치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은 자신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을 통해서 그에게 감화를 주시는 성령님이 그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이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구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폭압과 비인격적인 압제로 그 형제를 고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들이고 그렇게 해서 그 형제가 교정되지 않을 것이며 교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상의 교정일 뿐이지 그 형제의 본성을 그런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고쳐놓지 못합니다.
1. 인격적 신앙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에게서 이런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제 이 여인을 두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아니다. 용서해주어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이면 평소에 예수님이 가르치던 사랑과 용서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은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둘 사이에 기가 막힌 조화점을 찾아냈습니다. 돌로 쳐라. 율법을 지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사람들이 양심에 깊이 찔림을 받으면서 돌멩이를 내려놓고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완악한 사람인가. 그 여인이 비록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주어야지 어떻게 돌을 들고 나타날까?’ 그런데 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그 완악한 유대인들이 훨씬 순한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돌을 버리고 양심에 깊은 찔림을 받으며 돌을 버리고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그러면 던지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다 가고 예수님 혼자 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로 치실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무슨 뜻입니까? 그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함께 접붙여진 형제들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지 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교회 안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접붙여진 신자들은 그 신분 자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선언을 받은 사람들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선언을 받은 사람입니다. 형제 교정의 목적은 형제를 참으로 영생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참으로 돌이켜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형제 교정의 목표이지 그를 정죄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형제 교정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를 그의 죄가 이런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를 징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징계이고, 그를 모욕하는 징계이고,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정당한 징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그 형제가 못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형제는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사람이지만 그가 선택한 죄는 매우 악한 것이라고 하는 모든 성도들 앞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로 하여금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는 대신 그 죄로 말미암아서 고통을 얻게 되는 그 형제는 용서하고 회복해서 교회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 다시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고치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교정하는 그 방식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이 인격적이라는 말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스스로 깨닫게 하여 계기는 제공해주지만 스스로 깨닫게 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돌이키게 하는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격적인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안에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지식이 있어도 형제를 교정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모든 형제의 교정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이 되어서 그래서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쉬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릇 행하는 지체들을 참고 견디면서 고쳐주다가 국가의 권력 같은 것들이 들어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릇 행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그를 제재할 수 있는 세속적인 권력이나 수단을 교회에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주신 권한은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방법으로 그를 고치려고 하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그를 돌이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인내와 고난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지체가 잘못 행하고 있는데 완력으로 제압해버리고 교회에서 쫓아내버리면 단숨에 해결이 되는데 그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 형제의 잘못과 오류에서 돌이켜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온 교회가 인내하며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고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자기는 예전에 그렇게 더러운 죄에 빠져서 허덕이면서 살다가 주님 붙들고 일어났는데 자기보다 훨씬 나은 사람인데도 그의 죄를 보고 진노하며 부르르 떱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표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의 허물을 덮고 용서해서 그를 세우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우유부단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탁월한 사모함이 없다는 비난거리로 삼습니다. 교만입니다. 육적 의협심에 넘치는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오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깊이 권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체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받을 때 자신이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교회를 아프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보기에 그 사람이 무력해보일 수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혈기를 부릴 때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여러분들의 지각없고 육적인 행동, 타락한 본성에 따르는 혈기 충만한 행동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에 똥을 끼얹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주셔서 그 피로 사신 교회,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때로는 오류에 빠지고 그릇된 태도는 지니고 때로 심지어 죄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와 성령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고치고 사랑하고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빛으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눈꺼풀이 벗겨져서 우리의 그런 혈기적인 행동, 그리고 형제의 죄나 오류를 보면서 자신의 오류와 죄는 새카맣게 잊어버리는 그리고 충만한 육적인 혈기로 그를 정죄하고 공개적인 석상에서 모욕을 하고 소문에 소문을 내면서 그의 평판을 깎아내려서 그로 하여금 교회에서 많은 지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하는 그런 일들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의 죄가 형제를 향한 죄가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똥을 끼얹는 행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나 합니까?
정말 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형제 한사람, 한사람의 형상이 있고 여러분들이 쓰레기같이 여기는 형제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 안에 예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여러분의 욕설과 모욕, 평판을 깎아내리는 무모함과 그에 대한 지각없는 비이성적인 비난은 곧 그리스도예수의 존엄한 얼굴에 똥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깊은 영적이 어두움이 내려있고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절벽에 선 것 같은 기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내 안에 사랑이 사라질 때 그분과 교통도 끊어지고 하나님이 성도를 묶어주신 본질이 사랑이니 그 사랑이 사라질 때 나에게는 형제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때쯤이면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지각이 생겨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점의 살이 된 것을 그렇게 기뻐하고 한마디의 뼈가 된 것을 그렇게 좋아하며 형제들의 오류와 잘못을 보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형제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2. 인격적인 사랑(까리따스)를 가지고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지식이 좀 모자라도 학식이 좀 부족해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전달을 받게 될 때 우리의 이 지성과 마음 안에는 잊힐 수 없는 불망의 감화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가 비록 지식이 좀 부족하고 아는 것이 모자라고 훈련이 덜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형제를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하는 동안 여러분들의 소중한 인생은 빠른 살같이 흘러갑니다. 일생을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도 예수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긴 적이 없습니다. 원망과 미움, 질타와 분노 이런 것들로 가득 차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으로 뛰쳐나갔다가 통회하고 돌아오는 탕자가 훨씬 더 빨리 성화될 것입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가 오류와 죄악에 빠질 때도 그 형제에 대해서 인격적인 사랑을 가지고 그를 돌이키게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사랑이 계속 생겨납니다. 그리고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될 때 혐오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될 때와 추한 것을 발견해서 미워하게 될 때 이 두 가지 사랑과 미움이라는 극단적인 감정, 중간 대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싫증과 권태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지성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면 그 형제를 계속 사랑하게 됩니다. 부족한 것과 잘못된 것들이 보여도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불변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것입니까? 실제로 어느 선교사님이 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되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과의 대화는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조금 더 이성적인 사랑은 한 번 더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면 내가 목사님께 여쭙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잠시 사랑한다면 그래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니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떤 사랑? 영원한 사랑인데 그러면 그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영원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어야지 된다는 결론이 아닙니까?” 그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목사님은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대답을 하겠습니다. 넓게는 인간 안에 좁게는 구원받은 신자 안에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지적인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락하고 매일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더니 어떻게 인간 안에 그런 하나님도 심취하실만한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 들으십시오. -우리 성도를 보면서 어떤 아름다움을 영원히 발견하시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렇게 사랑하실 수밖에 없도록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그 영원한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커뮤니케이션의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점점 신이 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더러운 것에 묻는 것입니다. 묻어도 그것은 표상입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영원한 것처럼 당신의 형상도 영원합니다.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 삼위와 함께 바라보시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것처럼 성도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이 왜 형제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류와 죄를 우리가 잘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잘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들이 형제에게서 발견하는 죄와 오류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는 훨씬 더 오래전에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죄를 짓고 오류에 빠졌는데도 여전히 그 사랑 안에 나의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형제 속에 있는 그 하나님도 바라보시는 명백한 아름다움이 안 보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지만 사람의 눈으로 봐야지만 그 아름다움이 또 보이는 것이니 아름다움과 사랑은 서로를 불러일으킵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은 사랑하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더욱 더 찾게 될 것이니 아름다움은 사랑을 부르고 사랑은 아름다움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3.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
여기에서 우리는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에 관한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형제를 반드시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도 죄 때문에 그 형제가 싫어지거나 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신기하게도 그 죄와 죄의 주인인 형제가 사실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서 돈 내놔. 그랬더니 은행 직원들이 벌벌 떨면서 돈을 싸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손에 들고 뛰어나왔습니다. 자기가 그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은행 강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혀 그럴 의지가 없는데 뒤에다가 칼을 대면서 은행으로 들어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는 은행의 문을 열라고 해서 타의에 의해서 열었습니다. 돈을 훔쳐가라고 그랬더니 나는 싫다,
나는 이런 도둑질하기 싫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금고에서 돈을 꺼내서 이 사람 손에다 테이프로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칼을 겨누면서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은행을 뛰어나가서 돈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 현상을 볼 때는 돈을 가지고 몸에 지니고 은행에서 뛰어나온 것은 아까 이야기한 그 강도나 이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의지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의지로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누구도 그를 징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는 그 사람이 선택해서 그 사람과 한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인 본성만을 가지고는 사람들이 어떤 죄와 오류에 빠지게 될 때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좋다고 결혼한 아내가 지겹게 미워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있고 그 사람이 잘못 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옛날에 사랑했던 아내와 분리가 안 됩니다. 자연적인 사랑에는 이런 분리가 힘듭니다. 심지어는 자기 배속으로 나은 자식도 미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게으르고 말을 안 듣는가. 말을 안 듣고 게으른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지. 그렇게 안 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데 나에게 상처를 준 부모의 죄는 밉지만 우리 부모님은 너무 사랑스러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정이 이렇게 깨트려지고 고통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압니다. 아내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아는데 싫습니다. 왜냐하면 분리가 안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런데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엄마가 나에게 고통을 준 것이 엄마 아빠가 분리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만 미워하고 눈에 보이는 엄마 아빠는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정에 상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리현상이 본성적인 사랑 속에서는 안 일어납니다. 더 좀 하고 싶지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이미 몇 년 전에 한번 설교한 예화이기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예로 들어드리겠습니다. 이것보다 적합한 예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예화: 서로 사랑에 깊이 빠진 남녀가 둘이 만나기로 약속한 고속도로 길가에서 남자가 멋있는 양복을 입고 나무랄 데 없는 깨끗한 모습, 사랑스런 모습으로 여자를 기다리는데 보니까 차에 치어 처참하게 죽은 토끼를 들고 서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그 토끼만 버리면 가까이 가서 예전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내용이것이 죄의 객관화 현상이라는 비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어도 사람이 싫으면 형제 안에 있는 죄와 형제 자신이 분리가 안 되어 보입니다. 자기도 쓰레기 같은 죄인이면서 쓰레기라고 정죄를 합니다. 소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그게 분리가 되어서 보이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손으로 잘 가리키시고 훈련시키신 제자들을 이제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로 파송하십니다. 파송하실 때 예수님의 심경에 대해서 그것이 열린 교회의 설립의 정신이 되었는데 9장에서 뭐라고 표현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것을 희랍어 단어의 뜻으로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는 것입니다. 못 볼 것을 보고 민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번역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혹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유리하고 고생한다고 번역된 것이 우리말로는 다 능동태입니다. 사실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두 가지가 하나는 괴롭힘을 당하며 또 내동댕이쳐지며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이 문법상으로 현재 완료 분사 남성 복수형태입니다. 수동태입니다. 현재 완료 남성 분사 수동태 복수형태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중이고 자신이 스스로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내동댕이치고 누군가가 그를 찌르고 괴롭게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그냥 당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수동태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진실입니까? 나는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그러는데 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죄와 죄의 결과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보내면서 병든 것과 연약한 것들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 성령의 능력과 말씀, 진리 그 두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두개의 도구를 가지고 그들을 죄의 억압에서 끌러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선교이고 이게 바로 교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때에 그 사도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면 목자 잃은 양같이 내동댕이쳐지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생각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보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죄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곤고하게 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곤고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곤고하게 사는데 자신이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꽉 차시니까 그들의 죄와 그들이 비록 죄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영혼들이 분리되어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당하고 있는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듯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나뉘어져 보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도들이 그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와 깨트려짐으로 아가페의 사랑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화를 받습니다. 이것에 깨트려집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삼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자신의 이런 절망적인 죄를 용서하고 고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자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앞에서 자신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러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하게 자기 안에 깃듭니다. 그때 형제를 다 품습니다. 절대 미워지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기는 합니다. 자기도 인간이니까. 그러나 미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이렇게 분리되어서 보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미워해야 할 자기와 사랑해야 할 자기가 뚜렷이 구분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니라.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합하려는 옛 자아는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새로운 본성은 사랑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하게 되면 형제와 죄와 오류가 분명히 있고 그것을 향해서는 미움과 적개심에 불타는데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 지체는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여전히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의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형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류를 짓고 죄 가운데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람 안에 있는 그 사람 자신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저의 경험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살아온 지난날들이 짐승처럼 여겨졌습니다. 얼마나 내가 긴 세월동안 교회를 섬기는 목자로 살면서도 사실은 교회를 아프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거나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내가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그 사이에 목자인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많이 생채기를 내었을까? 그리고 긴 참회의 시간을 지났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먼 길인가. 나에게 고통이 없었더라면 이런 진리의 깊은 사실들을 그 진리들을 내가 숙고했을 리가 없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깨달을 수 없었는데 그리고 나서 눈을 들어보니까 예전에 나처럼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이성적인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러면 그렇게 형제의 죄와 형제 자신이 분리되어가지 않으면 진짜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만 시간상 여러분들의 피부에 와 닿는 한 가지 증거를 대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형제에게서 오류와 잘못을 발견합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의 아름다움이 발견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은 것도 의지의 선택입니다. 있는데도 발견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죄와 오류가 형제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형제를 그 죄 때문에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뭐 그런다고 하지만 다 개소리고 진짜로 마음속으로 그 사람이 그것 때문에 형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증명을 해볼까요?
그렇게 형제의 오류를 발견하게 될 때 그 오류와 죄가 형제 사랑을 가로막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감격이 함께 사라집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사랑의 감화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신앙의 감화가 살아있으면 잠시 그 형제를 바라보면서 죄와 그 형제가 분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그 형제를 미워하고 정죄하다가도 그 십자가의 감격이 만약에 있다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언젠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똑같은 위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교리를 다 깨닫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리를 깊이 깨닫고 나서 모든 진리의 효과가 그러하듯이 오랜 세월동안 언제나 그 줄에 얽매이던 내 영혼에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나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이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의심이 될 정도로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절대로 밉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오류에 대해서는 정말 싫습니다. 아주 뚜렷한 분리현상이 생겨나면서 사실은 마태복음 9장도 내가 새로운 각도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 마음이었구나. 그리고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몰라도 살면서 늘 경험해왔던 것입니다. 어느 청년 지체가 이번에 가정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청년들이 여기서 설교를 들으면서 남편에 대해서 복종하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펑펑 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랑도 없는데, 이해가 안 갑니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 몇 주 후입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를 설교했습니다. 시집도 안 간 애들에게 그런데 또 펑펑 웁니다. 아니 결혼도 안한 애들이 이혼에 대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웁니다.
여러분, 무슨 소리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설교할 때 엄마 생각하면서 운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렇게 안 되었을 것인데. 그래서 운 것입니다. 이혼에 대해서 설교하니까 자기 엄마 아빠 생각하면서 이렇게 길이 있는데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살았을까! 그렇게 뼈저리게 우는 것입니다. 그게 다 그 부모들이 만들어낸 상처입니다. 이혼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그렇게 이혼하고 갈라섰기 때문에 엄마도 아빠도 다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은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순간에 무슨 마음이 떠오르는가 하면 우리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에 이런 지식의 빛 가운데 살았더라면 죄인은 용서하시고 우리 가정은 사랑하시고 그리고 실패한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어두운 영혼에 빛을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우리부모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지 않았을 것인데, 하고 생각하니까 이번에는 나에게 상처를 준 엄마 아빠가 미운 것이 아니라 그 빛 아래 살지 못했던 엄마 아빠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불쌍한 마음이 들 때 그때 이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형제를 보면서 이 오류와 잘못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가 옳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형제와 분리되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태도를 고치지 않을 때 이미 죄를 지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이 회심하고 그리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구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내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그 이전의 삶은 무지와 오류로 가득 차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삶에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화의 시기였다고 말해도 이미 18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왔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우리는 매일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펑펑 울고 또 한편으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펑펑 우는 그 끊임없는 참회와 그리고 부활의 감격 그것 없이는 우리가 참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대들이 교회를 대하며 살아왔던 회심 이후의 날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형제를 향해서 대했던 여러분들의 많은 태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교회에 오류가 있을 때 지체들에게 죄가 있을 때 여러분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어서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분리되어보였는가? 그래서 죄는 미워하고 오류는 싫어했으나 함께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은 뜨겁게 사랑했는가? 그들의 오류와 죄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리만치 그렇게 사랑했는가. 또 그렇게 사랑하려고 최소한 애를 쓰며 그렇게 살아왔는가를 봐야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형제를 교정하려고하는 사람은 교정을 받으려는 사람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자신이 사랑의 감화를 깊이 받아서 그 사랑 때문에 형제의 죄가 형제 자신과 분리되어서 죄는 미워하고 혐오해서 교회를 정결케 하지만 형제는 뜨겁게 사랑하고 오히려 오류가 있고 죄가 있기 때문에 그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의 세계를 여러분도 경험해야 합니다.
II. 형제로부터 권고 받을 때
그러면 이제 형제로부터 이런 교정을 위한 권고를 받을 때 그 권고를 받는 형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 들음
우선 첫째는 그렇게 형제가 자기를 불러내어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줄 때 그는 그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는 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람직한 것은 죄를 지은 나를 교정해주기 위해서 다가오는 형제가 나보다 신앙이 뛰어나고 나와 죄를 분리해서 생각할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고 자신도 이미 이런 것을 극복하며 살아간 신앙의 선배, 어느 모로 보나 존경할만하고 그리고 말로 자기를 설득하는데 논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해서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를 교정해준다면 행복하겠지만 이런 일들은 일생을 살면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십시오.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가와서 나를 권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추호의 사랑도 없이 네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그러고도 네가 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빨리 잘못했다고 빌지 않으면 내가 폭로해버리겠다고 공갈도 칩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우리 앞에서 형제가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다 아는데 이번에는 자기 의에 꽉 차서 기회라고 생각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그때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모욕적인 순간에 그것을 듣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섭리를 믿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반란을 당해서 도망갈 때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라는 인간이 그 다윗에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사울의 집안을 망하게 하더니 네가 행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보복을 당하는구나. 그러면서 쓰레기 같은 욕을 퍼붓습니다. 그때 스레아의 아들 장군 아비새가 왕에게 얘기했습니다. 저 같은 놈을 가만히 두지 않고 제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다윗이 하지 마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욕하도록 하나님이 저를 내버려두셨는데 내가 왜 저를 막겠는가. 내버려두라. 그리고 당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 다윗이 그렇게 당한 것입니까? 언제 다윗이 왕이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지. 언제 사울을 망하게 해달라고 그랬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사울과 함께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자객을 풀었지만 자기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사울을 살려주고 그 아들까지도 사랑해서 그 은혜를 주었습니다. 언제 그랬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간의 그런 잘못된 비난 속에서 뭔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진실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여러분들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여러분들의 결점에 대해서 눈이 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결점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콩꺼풀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사실을 정확하게 발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 악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의적인 해석은 개의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게 하신다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이것도 깨닫고 나니까 정말 살아온 날들이 짐승과 같았습니다. 나는 누가 나를 비난한 것을 정말 견디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참 약합니다. 며칠씩 잠을 못 잡니다. 그런데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비난이 100% 맞을 가능성은 99%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난하는 과정을 통해서 깊이 숙고해보면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한 번도 충고해주지 않았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나의 오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괴롭고 굉장히 힘든데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 그가 나에게 전달해주는 나의 한 부분들은 진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버릇없게 행동하고 나를 모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려서 내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를 향한 사랑이 일체 없이 나에게 칼을 겨누었던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면 형제가 우리를 교정해주려고 할 때 그의 미성숙으로 인해서 아주 불손하고 오만한 태도로 우리에게 도전하며 우리를 고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태도를 문제 삼지 말고 그를 통해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진실의 실체에 우리가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보호받고 그런 무례한 태도로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오만한 우리의 지체들을 보존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단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면 흥분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조용히 객관적으로 들으십시오. 그것도 보통의 절제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지금 막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그러나 참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그쪽에서 미워하고 교만한 마음이 있으니까 그 입에서 똥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구슬이 가끔 들어있습니다. 진실이라는 구슬이, 똥물을 개의치 말고 다 들으십시오. 그리고 물을 부으면 그 속에서 진실의 구슬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맞다. 저 형제의 비난은 과장되었고 의도는 잘못되었고 나를 세우려는 사랑의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이것은 정말 사실이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때 분노하면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펄펄 뛰는 것도 그렇게 만들지 못하고 그 사람을 향한 미움만 촉발시킵니다. 또 누가 이야기를 했을 때 손발에 힘이 다 풀어지면서 이제 나는 끝났다. 진짜 나는 그런 인간인가 봐. 하는 것도 그것도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 비난을 듣고 조용히 들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지 마십시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조용히 들으십시오. 흥분하지 말고 그리고는 보좌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쏟아놓고 이번에는 하나님 앞에 직접 물어보십시오. 다 이야기를 하십시오. 아무 아무개가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들은 잘못한 것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 비난이 수긍이 안 되는데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잘못이 있기는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니까 아니면 그 형제가 나에게 지적해준 것은 약과고 그 형제도 알지 못하는 죄의 뿌리가 나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진실하게 물으면 100% 응답이 옵니다.
자, 예외적인 경우가 없습니다. 자기가 기도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쏟아 붓고 기도하면 모두 응답이 옵니다. 확실하게 응답이 옵니다. 그 응답이 때로는 그 형제가 다 맞다. 그러면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를 건져준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하나도 안 맞다. 그래도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분별력이 없는 형제가 내 형제니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옳다고 하는데 자기가 나를 비난하며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를 비난거리가 되게 한들 나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인데, 세 번째가 가장 가능성이 많은데 깊이 기도해보면 형제가 똥물처럼 퍼부었는데 그 속에서 유리구슬 같은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못 봤고 그리고 또 내 마음이 상할 까봐 차마 이야기를 못해주었는데 그 형제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대담하게 똥물 속에 구슬을 섞어서 토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 맑은 물로 똥을 씻어내고 유리구슬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쳐보는 것입니다. 모든 비난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아! 나에게 이런 잘못이 있기 때문에 저들에게 비난의 근거를 제공했구나.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 산 것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면 그 형제가 자기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그 은밀한 오류에서 나를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그래도 용서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십자가의 감격이 옵니다. 그러면 그 형제가 나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취했던 아주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를 보면서도 그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 형제의 나를 향한 불손하고 더러운 태도를 나누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며 누군가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에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께 달려가려고 애쓰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두발에 착고에 묶고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달음질할 수 있겠습니까? 미움의 줄을 묶고 원망의 줄을 묶고 어떻게 우리가 교회를 치료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끌어안고 눈물로 적셔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불러들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못 걷는 사람을 우리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진리는 그것을 따라서 살고 실천해볼 때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잘 듣는 것입니다.
B. 돌이킴
두 번째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비난을 퍼붓고 무례하게 행했을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를 비추어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개별적 죄에 대해
자신을 성찰할 때 만약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내 안에 어떤 죄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개별적인 죄에 대서해 성찰해야합니다.
2. 총체적 죄에 대해
그 개별적인 죄를 가능하게 했던 뿌리가 되는 총체적인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받지만 사람 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지체도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미워하고 반감을 품은 지체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미움을 복수로 갚고 원망을 미움으로 보복한다면 교회의 공동체는 다 찢어지고 마지막에 상처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고 또 우리 자신의 영혼일 것입니다. 형제가 오류에 빠져서 우리를 미워하고 비난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들이 사랑으로 인내하면 그 형제의 오물은 우리 안에 모두 갖추어져버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오물 속에서 진실의 유리 구술을 찾아내는 것도 일단락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더 이상 그 오물과 더러운 것들이 점차 되어지지 아니하고 공동체는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게 됩니다.
III. 온전해지길 사모하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고통을 받던 더럽혀지든 말든 자신의 육체의 혈기대로 이에 대해서 대응하면서 교회는 큰 소동에 휩싸이게 되고 나중에는 두 사람이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없이 교회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나중에 누가 진실인지 발견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교회가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커서 진실을 규명하기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온전하여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고 온전케 될 뿐만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도 온전케 되고 나만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내 지체들도 자기 사랑을 꺾고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우리 모두가 그 예수의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될 때 머리이신 교회는 우리같이 쓰레기와 방불한 인간들을 그 피로 용서하셔서 당신의 접붙여진 것처럼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온전함을 사모하셔서 당신을 다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깨트려지고 지체들은 세워지고, 나는 주님 앞에 죽임을 당하고 예수는 우리 지체 안에 사시고 그래서 나는 깨어지고 지체들에게는 유익이 돌아가서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고난을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잘 감당하면서 걸어가는 그 길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IV. 결론과 적용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아름다울 것은 하나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 쓰레기 같은 죄인들의 영혼 속에서 찾아내서 그들도 싫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들을 영원히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그 사랑이 구해서 그 수많은 죄악의 길에서 불러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되어 있을 때는 이 사랑 때문에 너무 울었고 이 사랑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고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서 살았고 그래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며 그분의 손을 꼭 잡고 핍박도 견디고 시련도 인내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의 아는 진리의 빛도 함께 자라왔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자라왔습니다.
나만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 눈에 쓰레기같이 보이는 내 지체들, 아무리 사랑하려고 권해도 돌이키지 않고 자기들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도 하나님이 지금도 그렇게 그 아름다움을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좌 우편에서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이 버리지 않는 지체를 우리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우리가 어떻게 더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마음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합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고 그리고 보응을 은혜로 갚습니다. 비난을 칭찬으로 되돌려주고 우리를 향한 박해를 기도로 갚을 때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삶과 살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부패한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고통을 매일매일 당한다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게 하셔서 우리의 포악한 성품이 죽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에게서 당신 자신이 충만히 사셔서 그래서 우리도 몰랐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모습 속에 예수의 형상이 보이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이 일체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체들이 생겨납니다. 고난의 형벌 같은 것 괴로움을 지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성화가 성내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연합되기 위해서 지체의 성화를 위해서 또한 애써온 우리의 고난 받은 날들이 우리를 점점 순결한 신자로 만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매일매일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방의 언어처럼 낯선 눈빛으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수많은 여러분 곁에 있는 지체를 보십시오. 그들이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그렇게 가식이 판치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안서니까 자기의 결점과 죄를 감히 성도들 앞에 고백을 못합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성내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주님을 만난 그 놀라운 감격을 자랑합니다. 왜 그런 것을 주셨습니까? 왜 남이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셔서 남들이 받지 못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해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그것을 밤 깊도록 동산 안에서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사랑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나아가 너희는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에 나아가 나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 되어라. 그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고난을 당하고 더 많이 참고 그리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당한 형제의 비난을 받으며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골방에서 밤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저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미련하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의 본을 따르기 위해 지녔던 밤을 새운 수많은 날들, 고통을 받으면서도 보복을 하기 전에 교회가 당할 상처를 생각하면서 그를 무조건 용서하게 해달라고 가슴 아파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붙들고 울던 그 모든 괴로움, 사람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마음에는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옳은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입니다. 사랑 없이 옳은 사람이 아니라 그릇되었다고 하더라도 참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돌이킨 죄인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교만한 의인보다 훨씬 기뻐할 것이며 결국은 그런 교정을 통해서 자신을 고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 위로를 삼으십시오. 제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술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아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은 영원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향해 불변하는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 오류에서 고쳐져서 온전한 예수의 몸에 한 지체가 되어서 사모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 피하는 사람들, 그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 숨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6:41)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속해 있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천국백성의 삶과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하늘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삶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얼핏 보기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높은 삶의 표준도 이 가르침 속에 많이 등장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이 가르침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모든 삶의 표준들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표준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처럼 높은 삶의 표준을 가르쳐주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또 이 표준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우리 인간들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표준을 따라 살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오히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공급해주시는 은혜와 그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높은 삶의 표준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계명 속에서 오늘 형제 교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진 사람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의 작은 결점을 보는 대신에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제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형제 교정에 있어서 아주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를 교정하는 것, 이것이 영적자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잘 하기만 하면 서로가 서로를 교정해줌으로서 우리가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서 오는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점점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개개인이 온전케 되는 성래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전체적으로 예수의 몸을 온전케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II. 형제를 교정하는 자의 위험
그러나 이렇게 형제를 교정하는 사람은 여전히 형제를 교정하는 자에게 위험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를 교정하는 자의 위험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A. 다른 사람의 결점을 봄
우선 첫째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게 됩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결점을 발견하고 혹은 죄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형제를 교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째든 그는 형제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죄나 혹은 결점을 보았기 때문에 이 형제가 그 다른 형제를 교정해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단 형제의 결점을 주목하고 나면 사람은 아주 쉽게 편견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견에 휩싸일 때 그 다음에는 사실들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대신에 그 편견에 의해서 좌우되어 그 일에 판단을 그르치게 되기가 십상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몇 해 전에 병원에서 검진을 했더니 시력이 이렇게 안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정밀검진을 하라고 저를 보냈습니다. 날짜를 받아서 안과에 정밀검진을 하고자 했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 주사가 매우 고약한 주사인데 맞으면 굉장히 힘들고 토할 것 같은데 그래도 참으셔야지 됩니다. 그러면서 혈관에다 작은 주사 한방을 놨습니다. 이게 무슨 주사인지 그 주사바늘을 꽂자마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쓰레기통에서 몇 번을 토했습니다. 이윽고 주위가 끝나고 나서 2-3분쯤 흐르고 나니까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일들이 내 몸에서 일어났습니다. 계속 구토할 것 같은 증세와 함께 눈이 갑자기 색깔이 들어오면서 사물이 모두 새빨갛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얀 것은 발갛게 보이고 파란 것을 보라색으로 보이고 그리고 빨간 것은 까만색으로 보이고 하여튼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방을 다 보니까 사람들 얼굴이 술 취한 것처럼 새빨갛게 보이고 벽도 빨갛고 내 손톱도 빨갛게 보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눈에다 기계를 갖다 대고 검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 주사를 맞으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주사액처럼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마음의 혈관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온통 우리의 몸에 퍼지는데 그렇게 퍼지게 될 때 우리는 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이 싫어지고 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싫고 일단 그 사람이 좋아지고 나면 그 사람의 결점 때문에 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이런 공정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가 죄를 지었거나 잘못했을 때 그를 교정해주기 위해서는 잘못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결점을 주목하는 동안에 우리는 형제를 싫어하거나 혹은 형제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점들은 무시해버리고 그리고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히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그 아름다운 형상을 가지고 있는 데도 그것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그 결점 때문에, 혹은 그 죄 때문에 그 형제 전체를 미워하게 되는 이런 일들,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교정하는 자들이 빠지게 되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옳은 일을 위해서 나서서 투쟁하고 그것들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옳은 일을 위해서 투쟁하고 애쓰는 사람들 가운데 따뜻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입니다. 대게 옳은 일을 위해서 분투하는 의로운 사람들은 대게 단호하고 그리고 독선적이기 쉽습니다. 이런 인간 본성에 이치는 형제 교정의 과정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B. 사랑을 유지하기 어려움
우리가 형제의 결점을 교정해주는 일은 영적 자선일 수 있지만 그렇게 교정하는 자가 위험한 이유는 그가 형제의 결점과 죄를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는 편견에 휩싸여서 형제를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는 그런 위험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형제를 교정하는 사람의 빠지기 쉬운 위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랑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사랑이 생겨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진실하게 바로 바라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육욕과 더러움에 꽉 차게 되면 아름답지 않은데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 일어나는 세상 사랑과 부패한 자기에 대한 사랑이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순결해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명정하게 되고 지성은 예리하게 되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들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을 많이 바라보게 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특별히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임산부들은 더러운 자리에는 앉지도 않고, 예쁜 것이 아니면 보지도 않고 그리고 좋은 음악이 아니면 듣지도 않고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태아가 좋은 심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인데 어느 정도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똑같이 우리도 영혼이 맑고 순수할 때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되면 될 수록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더 이상 그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을 때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아름다운 것이 계속 발견될 때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계속 내 마음속에서 자라갑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아름다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형제에게 바로잡아주어야 할 죄가 있거나 고쳐야 할 잘못된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까, 추한 것입니까? 추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만약에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된다면 반대로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사랑하던 인간의 감정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미움이나 싫어함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하고 추한 것을 하나 둘 계속 발견해가면 갈수록 계속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데 이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계속해서 자라나지만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때 즉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것과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된 중간점에 오게 될 때 우리의 감정에 상태는 권태감 내지는 싫증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될 때는 사람의 마음이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권태감이 그것을 지나쳐서 추한 것을 발견할 때는 당연히 싫어하는 마음이나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있는 이런 죄나 혹은 잘못된 태도, 자신을 괴롭게 하는 그런 잘못된 특성은 모두 이 형제에게는 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추한 것을 계속 발견하면서도 사랑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고쳐주기 위한 동기가 교회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은 쉽고 그리고 결점과 그 죄에 대한 미움이 그 사람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꽉 차서 그래서 결국은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고쳐주려고 하다가 자기 자신이 형제를 미워하고 공동체를 해치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이유가 바로 이유 때문입니다.
C. 자신의 처지를 잊게 됨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형제의 죄를 보게 되면 형제를 교정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형제를 교정해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또 하나의 위험은 자신의 처지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면 우리가 예수님이 된 것처럼 착각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만이 간증하다가보면 지금 내가 은혜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 방어기질 가운데 훌륭한 것 하나가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는 그 자체가 죄의 특성이고 그리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어버리지 말라고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 은혜, 그리고 자신들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에 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을 잊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기 전에 이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실과를 따고 그리고 너희가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될 터인데 그때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네가 의로워서 이 땅을 얻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너무나 타락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 땅을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된 너희를 이 가나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III. 형제를 교정하며 온전해지는 길
형제를 자꾸 교정하다가 보면 자신이 자기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형제를 교정하려고 하는 자신이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 형제를 대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삶을 살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형제를 교정하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이것은 형제를 교정하면서 그 형제를 온전케 할 뿐 아니라 형제를 교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온전해지는 것이 바로 영적인 자선인 형제의 교정을 올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A. 자신을 돌아 봄
그러면 형제를 교정하면서 온전해지는 길이 무엇인가? 우선 교정하기 전에 첫째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형제에게서 어떤 죄가 발견되거나 결점이 발견되면 그는 즉시 그런 동일한 결점과 죄가 자신에게는 없는지 자기를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 같은 종류는 아니더라도 모든 과오와 죄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같은 뿌리에서 종류는 다르지만 다른 죄와 결점들이 내게는 없는지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형제 교정하기 전에 형제의 죄나 결점을 보면서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가 얼마나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게 되고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가 죄를 지었는데도 혹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형제를 무자비하게 정죄하는 대신 이 형제를 예수 안에 붙어있는 생명처럼 생각하며 그 죄를 다룰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정하는 중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깊이 생각할 때 이 형제를 다룰 때도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다루어서 죄는 제거하고 오류는 벗어나게 하고 형제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아름답고 복스러운 변화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다루어 오신 방법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살아온 신앙생활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끊임없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죄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발자국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양심은 여러분들이 살아온 길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혹은 이 양심 자체가 의식 속에 붙어서 주님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기능인 양심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들이 지은 죄가 사라졌으면 여러분들 스스로 지난날에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어떻게 용서해주셨는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할 것입니다.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살아온 모든 날들은 끝없는 하나님의 은총, 그분의 긍휼과 은혜 때문에 살아온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밟아버리는 대신에 거기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고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보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 결과가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깊은 상처와 비참을 가져다주었으며 또 우리가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들을 회고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고 걸어온 우리의 날들이 많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잘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날은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영혼에 깊은 침체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깊은 영혼의 침체가 내 마음 속에 한동안 찾아오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도해도 기도가 잘 안되고 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이제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내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깊이 밀려오고 그리고 나니까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아니면 이렇게 저렇게 마주하는 현실들이 모두 나를 슬프게 하고 이제는 내가 정말 희망이 별로 없는 것 같은 그런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특별히 그렇게 침체에 빠진 시간이 있었는데 기도는 오직 할 말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영혼을 맡겨주셨지만 그러나 나는 내 영혼 하나도 간수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연약해서 마치 블레셋 백성들과 싸우다가 나귀에 턱뼈를 던져버리고 쓰러진 삼손처럼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면 깊은 고독이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의 이 침체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매우 위험한 때에 이르게 됩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고 혹은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도 영혼이 살아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어나지 않고 평안해도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면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그런 가운데 우울하게 몇 주를 보냈는데 마침 목사님들이 모인 어느 모임에서 설교를 해야 할 그런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하게 먼 길을 가서 밤에 자고 새벽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그리고 내 마음 한구석에서 양심의 송사가 들려왔습니다. 네 영혼도 그러면서 무슨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그러는가. 그래도 이제 나에게 임무가 주어졌으니까 어째든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해야지 되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나가서 단에 올라가서 성경구절을 읽는 순간서부터 저는 일생에 별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아주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나는 오히려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서 이탈해서 그래서 내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나는 내 속에서 빠져나와서 이 예배당 한가운데 앉아서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원고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설교를 하면서 설교하는 순간 본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차마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 자신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제게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나는 침체에 빠졌습니다. 내 안에는 죄가 많습니다. 나는 무기력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많이 기도했는데 그 많은 기도와 불평에 대해서는 대꾸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래서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울면서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히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침체에 빠졌을 때 나를 만난 사람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충만했을 때 나를 만난 사람들은 존경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살던 날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나로 인해 불쾌했을 것입니다. 좋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때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내가 죄에 빠졌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혐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어떤 때는 나를 버리고, 어떤 때는 존경하고, 어떤 때는 혐오하고, 어떤 때는 기대를 걸고, 어떤 때는 실망해서 나를 떠나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이서 나를 잘 알고 사랑하던 사람들도 그렇게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새벽에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리고는 그 순간 나의 많은 불결을 보면서 회개하고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결심했습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가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이 어떻게 죄와 오류 속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다루셨는지를 생각하게 되면 이 형제도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형제를 교정하다가 오히려 더 큰 미움의 죄를 짓고 정죄의 죄를 짓는 그런데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정하는 도중뿐만 아니라 또한 교정한 후에도 끊임없이 그 형제를 교정한 후에도 교정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형제를 올바르게 잘 교정하기 위해서 훌륭하게 섬기고 자신은 형제를 교정해준 그 죄에 빠져버리는 경우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형제를 고친 후에도 형제가 올바르게 살다가 계속 기도하고 돌보는 가운데도 우리 자신 또한 그런 허물과 죄를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형제에게는 본성 속에서 그것이 흘러나와서 문제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잠재되어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형제 교정하면서도 자기도 또한 온전하게 되는 비결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B. 자신에 대해 공정해짐
형제를 교정하면서 또한 온전해지는 또 하나의 길은 자신에 대해서 공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다 버려도 끝가지 자기편을 드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정말 영원한 친구이고 영원히 하나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배반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아니면, 진리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를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교정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자기 사랑에 꽉 찬 사람이라면 형제를 교정해주는 그 가운데서도 이런 자기 사랑의 정신이 교정의 과정에 개입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제를 교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고 형제의 영혼을 교정해주는 가운데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의를 세우게 되고 형제를 정죄하게 되고 그래서 형제에게 있는 죄보다도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교정해주어야 할 죄가 티끌이라면 그 형제를 미워하고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하는데서 오는 죄는 들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제의 교정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요?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는 이것은 가장 높은 영성의 표지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우선 첫째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빛에 의해서 자신을 객관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리의 빛이 우리의 총명을 비춤으로서 우리들이 볼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죄, 그리고 우리의 결함, 그리고 우리의 모든 부패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교정해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형제를 모두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형제에게 부족하고 허물 많은 것들을 보게 해서 그 형제로 하여금 그 진리로 돌아가게 하고 그 빛의 조명을 받아서 자신이 혼자 생활했더라면 보지 못했을 죄와 부패한 악들, 더러움들을 보게 해서 그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추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 진리의 빛 앞에서 공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때 우리를 공정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진리의 빛은 찾아가는 가치가 진, 참됨입니다. 참됨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의 빛이 비추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 진리의 빛 앞에 비추어서 참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려는 자신이 어떻게 부족한 존재인지 이것을 알게끔 만들어주는데 그것이 참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이제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렇게 참되지 않은 우리가 참된 존재로 바뀌고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것은 실천과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 자신이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선한 지향입니다. 선한 것, 좋은 곳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빛을 받는 명정한 지성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꽉 찬 우리의 애성은 우리를 고쳐서 선한대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정을 통해서 혹은 교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형제를 모두 진리로 돌아가고 선한 곳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서 우리 자신이 예전에 누추함과 더러움을 버리고 탁월하고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는 유익입니다.
C. 교정의 동기가 사랑이게 함: 은혜의 필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형제를 교정하면서도 자신이 온전함을 유지하기위해서 이 두 가지보다 더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형제 교정의 동기가 늘 사랑이게끔 유지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형제 혼자 따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로 붙어있는 형제이니 그 형제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그 형제가 생명적으로 붙어있는 유기체적인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되고 이 교회의 영적인 유기체인 교회에 대한 사랑은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대한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지순한 사랑이 신자 안에 계속 살아있어야지만 죄를 지은 그 형제를 보면서 그 죄는 미워하되 그 형제는 사랑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의 잘못된 죄를 잘 고치고 새롭게 하여서 예수의 몸에 아름다운 지체로 접붙여지게 유지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 형제를 고친 과정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형제의 올바른 교정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사랑은 자연적인 선의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자연적인 선이라면 형제에게 육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자연적인 선의는 유지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더 이상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그가 지은 죄나 잘못된 태도나 허물 때문에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과 그리고 싫어하는 혐오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하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그 형제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사랑이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그 형제를 교정하는 동기가 교정해주는 내내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 안에 생래적으로 존재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랑이 있기는커녕 사랑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살아온 날들 중에 이 사랑에 감화를 받으며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성령님의 감화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행해야 하지만 스스로는 행할 수 없는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우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받으면서 살아가야지만 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사랑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다면 그러면 그 은혜는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니 숙명처럼 주시면 주시고 말면 말고 우리 자신이 자기를 방임한 채 그냥 천수답을 개간해놓고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이어야 됩니까? 하는 반문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과오와 죄 가운데 있는 형제를 끝까지 사랑하게 하는 이 사랑의 감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데 이런 은혜가 계속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은혜를 주시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랑을 따라 행하는 어떤 것들을 선택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선택해도 선택할 힘이 없지만 그렇게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감화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갈림길에 있어서 미끄러져 침륜에 빠질 것인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설 것인가 이 기로에 놓이게 되었을 때 도저히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의 감동이 옵니다. 그래서 내가 힘들지만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리라.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은혜를 불러오는 도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의지가 선한 것을 택할 때 하나님께서 능히 그것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십니다. 넓은 의미의 은혜에서는 바로 우리가 그런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지만 그런 넓은 의미의 은혜는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선한 것을 택하도록 강제하는 그런 은혜가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엇에 의해서도 강제될 수 없습니다. 이 의지는 인간의 영혼에 기능이기 때문에 만약에 무엇인가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강요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파괴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옳은 것을 택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의 의지를 강제하는 그런 종류의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압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것을 그 은혜의 덕분에 선택하게 되면 그러면 선택을 해도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의지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선택할 때 그 선택을 시행할 수 있는 놀라운 선한 의지를 우리 안에서 성령의 사람의 감화를 통해서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사랑할 수 없는 형제를 사랑하는 그리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어느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미워하는 형제가 있고 그리고 그의 결점과 죄를 보았기 때문에 그를 추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그가 싫어하고 혐오하게 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만약에 여러분 안에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그를 위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하게 이 사람도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가장 신기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예화: 울산의 어느 교회에 새로운 신자가 등록했는데 그는 미신을 믿어 늘 굿을 하면서 점치러 다니던 사람인데 자신을 보호해주는 영적인 어머니와 같은 무당에게 그렇게 다녀봤자 잘되는 일이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전화를 하니 무엇을 믿던지 잘 믿으라고 하면서 끊었는데 주일날만 나와 예배를 드리기에 별 신통한 것을 느끼지 못하자 다시 무당에게 전화해서 교회를 다녀 봐도 효험이 없어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니까 무당이 하는 말이 너는 이제 예수를 믿으니 계속 믿어야지 그렇게 주일만 교회에 간다고 그게 믿는 것인가 열심히 믿어야지 예수를 꽉 붙들라고 열심이 마음을 바쳐 믿어야 네 인생에 효험이 있다면서 충고를 하기에 다시교회에 와서 새롭게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
비록 무당의 입을 빌어서 그런 변화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정말 하나님께 있는 진리의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일요일 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이런 사랑의 감화를 받습니까?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런 사랑의 감화를 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감화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열렬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날마다 의지하고 주님을 꼭 붙들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화, 은혜가 생겨나게 되고 그 은혜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지체를 용서하고 혈육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지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가 죄를 지었는데도 그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대신 죄는 미워하되 그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찢어지고 나누어진 하나의 지체가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한 살 한 뼈 그리고 한 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께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그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는 지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때로는 죄만 짓고 공동체의 아픔을 주는 지체 같아도 무례하기 짝이 없고 자신에게 명예를 깎아내리고 평판을 떨어트리는 그런 죄를 지을 때조차도 주님께서는 그가 꼭 필요하십니다. 한번도 그를 구원하여 당신의 몸에 접붙여 당신의 몸에 일부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시는 사람을 우리가 어찌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주님이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신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더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결점과 약점을 가진 인간들인데 우리들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사랑으로 매일같이 주님을 의지하며 매순간 우리를 주님 앞에 세우면서 나도 온전해가고 형제도 온전해져가고 그래서 우리의 온전해져가는 것이 성내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봉헌되며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형제들이 교정이 되고 고쳐지고 그래서 우리 모두 빛 가운데서 살면 고통의 빠진 형제들을 긍휼히 여기고 죄에 빠진 형제의 눈물을 씻겨주는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강하게 다시 태어나도록 고쳐줄 수 있는 것, 이 세상에서 교회 이외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버리면 이제 기다리는 곳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별히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고 모인 우리들에게 그렇게 유언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형제의 허물과 죄를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끝까지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형제를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긍휼히 여기십시오. 오늘 이 시간에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십시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하고 기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살아온 모든 날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날밖에 없는데 살아온 모든 날들은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다시 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받은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목회자를 부름을 받았으니 온전하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떠나갔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을 생각했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많은 지체들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겨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려고 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서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그러면서 진리 안에서 온전해져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나를 위해 늘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깊은 사랑과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저항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길을 버리고 목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생각해도 제가 싫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깨트려져야 할 부인의 대상입니다. 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있게 하시는 동안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완전한 인간인지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인지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살아있는 목자는 아닙니다. 이 교회를 잘 부흥시켜서 큰 교회로 만드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지체들을 긍휼히 여김 속에서 돌봄을 받으면서 이만한 믿음으로 자라는 것처럼 저도 13년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목양을 받으면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강대에 엎드려서 종종 기도할 때에 하나님 나는 이 교회의 목자가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그 모든 은혜를 나를 도구로만 사용해서 베풀지 마시고 내게도 베풀어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하시고 특별히 여러분의 지체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시면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주셨던 진리를 버리지 말고 그것을 높게 붙들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존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믿은 우리를 광야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그래서 추운 날에 서로 목을 비비며 끌어안고 살아가는 양떼들처럼 우리를 한곳에 모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는 우리 형제들에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위로가 되어야 하고 또 우리들도 그 형제들에게서 그렇게 위로를 받으면서 사는 것, 그래서 죄는 미워하고 날마다 주님의 그 위로와 은혜 속에서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한 교회로 부르셔서 한 목자 아래서 함께 붙들어주고 넘어진 곳에서 다시 진리를 붙들고 일어서며 앞으로 걸어가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꿈꾸는 교회가 있습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그러나 흙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 순간에도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꿈꾸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면서 날마다 깨어져 부패하기 이를 때 없는 죄인이지만 날마다 영혼들을 섬기면서 온전의 길로 가는 그런 목회자가 있는 교회, 그리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가장 가시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는 교인들, 세상에서는 벌써 버림받았을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을 먼저 안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으로 용서를 받으며 긍휼과 자비를 얻으며 모든 편견과 교만들을 극복하고 그렇게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래서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 사랑을 이루며 함께 한 몸으로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의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런 주님의 은혜의 감화를 힘입어서 그 사랑 안에서 매일매일 이 교회를 온전케 해가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들로 살아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같이 기도하십시다.
10. 공동생활과 교회봉사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I. 본문해설
성도의 공동생활 10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공동생활과 교회 봉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로마서의 후반부에 들어있는 본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를 쓰면서 맨 앞에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고 여기에서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복음의 뿌리를 둔 복음의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전편에서 기독교 사상의 뼈대가 되는 중요한 교리를 진술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후반부에 오면서 12장에서 그러므로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대야 될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문맥을 끌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에 각 지체된 사람들이 다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신자의 삶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현실 속에서 신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제 교회를 이루게 되는데 함께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그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고 그리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놓인 문맥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고 열심을 품고 서로 섬기라고 말합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는 것 따로 있고 주를 섬기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고 교회는 그렇게 성도들을 섬기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생활을 매우 자기중심적으로 편의 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한 교회를 찾아가고 그 교회가 자신에게 만족을 줄 때까지, 혹은 자신이 스스로 거기에 만족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 교회에 몸담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더 이상 그 교회를 통해서 자신이 취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로 옮기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론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더 좋은 교회를 찾아가고 더 좋은 교회를 찾아가고 그리고 그 교회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유익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고 하는 그런 생활을 통해서 이 사람이 영적으로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데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과 교회의 비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훤히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고 자신이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교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지 가운데 스스로 있다고 누리는 생명이라는 것은 정말 참 생명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는 지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소유할 때 우리들이 참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받은 순간서부터 공동체의 삶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그는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모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지체들과 함께 한 몸을 이루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공동체의 삶은 가히 숙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바로 그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은 것이라면 그 공동체 안에서 그는 영적으로 성숙해가고 그리고 성숙해간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 다른 공동체의 지체들과 함께 구원을 완성하고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워하고 꿈꾸는 나라도 공동체의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혼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하늘가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리고 있는 성도의 공동체적인 특성입니다. 그런 하늘나라의 모형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개를 주셨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속에서 그런 공동체의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그렇게 소속된 공동체도 없고 사랑할 공동체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가히 정말 쓸모가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사실을 오늘 기억해야 합니다.
II. 교회의 존재 이유: 하나님, 세상, 교회자신
그러면 이렇게 구원이 공동체적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각자의 구원을 교회론적으로 통합시켜서 그래서 이 세상에 교회로 존재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서고, 둘째는 세상을 위해서고, 셋째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먼저 교회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을 필요를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이루고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는 일들을 위해서 주님이 진리와 사랑을 위탁하신 기관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삼위 안에 있는 그 사랑을 가지고 역사하는 당신의 지혜를 실행해가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진 이 세상에 다시 한번 창조주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사랑을 통하여 펼쳐지도록 만드신 것이 하나님께 원하고 바라시는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비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경배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만족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상 때문에 만족하시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모든 삶과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두 번째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도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상태에서 회복될 수 없고 그리고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인간의 허무한 그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도움은 특별히 빛과 사랑이니 곧 지식과 사랑입니다. 삼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이루는데 사용하심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셨습니다. 신자의 모든 삶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찾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을 허락하신 것은 이 지혜의 빛과 사랑을 우리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고치시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와 사랑에 대해서 눈멀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이고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바로 그런 지혜의 빛과 사랑의 뜨거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사랑한 지난날들을 회개하고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예전에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함으로 불행해졌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해야 할 참된 대상으로 돌아가서 영원하고 불변한 것들에 자신의 사랑을 바치는 것, 이것이 인간 구원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늘 흐려지기 쉬운 이 지혜의 빛을 순결한 계시의 말씀으로 밝혀 그 본성이 변화되게 하는 것이고 또 타고난 부패성 때문에 마땅히 사랑해야 될 것 대신에 사랑하면 불행해지는 것들을 사랑하기 쉬운 인간들의 마음을 깨트려서 참된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성화입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이 지혜와 사랑이 완전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천국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혜의 빛과 부어지는 사랑의 연속성 속에서 점점 더 증대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생활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인간은 모든 타락한 세상에서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합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성화의 단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식과 빛을 이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지성을 주셨지만 그러나 타고난 부패성과 그리고 여러 가지 악습들 때문에 지성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빛이 있다고 가르쳐주어야 하고 그 빛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렬히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허무한 가운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즐거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끊임없는 상실에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빛과 그리고 사랑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지식의 빛과 사랑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이 사랑과 지식의 빛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기관이 바로 교회이고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그 빛과 사랑을 먼저 누리고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때에만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의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현자로서의 빛을 전해줄 수 있고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참된 사랑의 대상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신문을 보니까 오늘날 강남 한복판에서 누리고 있는 소비생활이 국민소득 86천불의 소비수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을 많이 받기 위한 기복신앙이었지만 지금은 기복신앙이 좀 다르게 변형이 되어서 갖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기복신앙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천국에 관해서 열렬히 어느 목사님이 설교했더니 강남에 있는 어느 교인이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너무 열 내며 천국생활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병만 안 나면 이 땅도 상당히 살만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물질적인 부요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부요하던 때에 사람들이 일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때는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가 언제나 증거 하는 것입니다. 풍요 속에는 항상 영적인 그런 빈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잘살면 잘살게 될 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교회에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라파에 잠들어있는 교회의 역사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이제 우리들이 현실적인 먹고 사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해결되기 시작할 때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깊은 공허와 그리고 정신적인 병리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비참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곤고함은 이제 더더욱 기독교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교회는 점점 필요가 없어지는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는 점점 더 필요성이 증대되는 시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금과 은은 교회에도 있거니와 이런 식으로의 선교를 가지고는 미래의 변화되는 사회를 부흥할 수 없습니다. 세계가 바뀌고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좀더 세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세상과 비슷한 것들을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소위 정황 하라는 미명하에 압류화 시키지만 사실은 그렇게 될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없는 그 무엇을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합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줍니다. 더 이상 그들이 그런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살고 난 다음에 그들이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의 빛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미래의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교회 자신이 이 진리의 빛과 그리고 사랑을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섬김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항상 이 교회가 어느 시대든지 똑같은 말씀의 빛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지혜의 빛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공급받았지만 그러나 당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므로 선조들이 물려준 그 지혜의 빛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심한 무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바로 더욱더 찬란하게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이 빛과 이 사랑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을 가득 덮게 하는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목회자와 그리고 이 학문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지성을 다해서 이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불철주야 노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색하고 진리의 세계를 공부함으로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많은 진리의 빛들을 더욱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이 시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지혜의 빛을 비추어주어서 참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고 이것을 게으르게 한 교회와 목회자는 하나님께 결코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다 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는 악하고 게으른 종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목회자와 함께 깨달아 이 빛을 더욱더 찬란하게 발하여 후손들을 교육하고 그리고 오고 오는 이 시대에 진리들을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며 자신들은 이 진리의 빛 아래서 자신들은 끊임없이 진리에 부합하도록 합치시키는 가운데 이 진리에 빛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일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심오한 진리들을 자신의 온 삶을 걸기에 부합하게 함으로서 심오한 진리의 본질들을 깨닫고 그 깨달은 진리의 본질의 빛들을 한 시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더욱 찬란하게 빛으로 발하여 모든 세대에 그 빛을 전해주고 오고 오는 이 세대에 이 진리의 빛을 나누어가질 수 있도록 헌신하는 그것, 그래서 이전에 우리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그 진리의 불꽃과 지혜의 불씨를 더욱 찬란하게 밝혀서 그래서 그 빛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이 시대가 아무리 타락하고 어둡다고 하더라도 그 찬란한 빛 아래서 우리 후손들이 진리와 함께 진리 안에 거하며 진리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타고난 역사적인 사명이고 교회사적인 소명입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는 모든 세대는 자기의 후손들의 무너져가는 그 불신앙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청년들이 정선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밥을 주면 먹고 안 주면 굶으면서 그렇게 한 주간을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데 복음을 전했지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사람들, 복음을 누군가가 전해주었더라면 믿었을 사람들, 그 복음을 전해주었더라면 그 복음을 꼭 붙들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이어갔을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는데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진력과 싫증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마음은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그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가슴아파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온전한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몇 년 뒤에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채 무기력한 신자로 변해있을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변화를 받던 수많은 신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뒤로 미끄러지고 침륜에 빠져서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추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많은 돌봄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이치를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이 빛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흐느끼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예수의 사랑과 복음을 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이미 믿은 신자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교회가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합니다.
또 교회에 와서 출석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영적으로 보면 사실은 불신자인 그렇게 그리스도와 아직 접붙여지지 못한 비 회심자들이 교회에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들이 교회의 출석이 계속될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에 교회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비밀을 알려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그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들이 항상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항상 진리의 빛 아래서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지식의 빛을 좇아 그 빛 때문에 사랑도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주님의 사람들로 날마다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한때는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듯이 한때는 쓸모없는 신자였지만 그러나 진리의 빛을 받고 변화되어가면서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이 일은 신자들이 교회 한구석에서 혼자 저절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신하고 그들을 위해 돕고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그 일을 잘 돕기 위해서 또 돕고 돕는 그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 모든 섬김의 연결 속에서 교회는 이 세 가지 목적을 구현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건강한 교회로 자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다하며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이 땅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에게도 행복이요, 다행이며 또 이미 주님을 믿고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주신 이유입니다.
핍박과 고난, 시련 그런 속에서도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부족한 것이 많은 허물 많은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서 함께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시면서 부딪힘과 고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딪힘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도우심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고 그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을 통하여 모든 교회에 속한 지체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어지고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의존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불안전한 교회를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자,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신자, 이 빛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서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끌어안고 눈물로 이 진리의 빛을 전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신자들을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꽃피게 만들어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밖에 미혹에 붙잡혀 살던 사람들에 주님이 없어 고통 받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지 가운데 있는 그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학자의 혀로 말해줄 수 있는 지식의 빛을 소유한 사람들로 변화시켜주어야 하는데 이 일들은 교회 자신을 위한 많은 헌신이 없이는 이런 헌신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III. 교회 자신이 섬김을 필요로 함
뿐만 아니라 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종과 같이 섬겨준 이 일들을 위해서는 보다 더 많은 섬김이 필요한데 이 섬김은 실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기대하고 있으니 그런 속에서 훌륭하게 교회가 자기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 교회는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의 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를 섬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불신자들이며, 두 번째 불행한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가 없고 사랑할 수 있는 교회도 없고 섬길 수 있는 지체들이 없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소속되어있지 않고 어느 교회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으며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든지 자신이 그 목회자를 사랑하고 목회자와 함께 진리를 찾고 성도들을 섬기고 그리고 자신이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은 그 교회를 통해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고 있다고 하는 그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가지만 그들의 영혼은 매우 곤고하고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았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소유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런 교회에서 영혼들을 위하여 섬기고 그런 교회에서 목양을 받으며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진리의 빛으로 자신들에게 전해주는 누군가 신앙의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자신의 그 삶 속에서 그 깨달은 진리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길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교회에서 풍성히 보게 되면서 자신의 죄와 악함을 깨닫고 뉘우치게 되며 진리의 빛을 찾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유익은 그 안에서 수많은 구도자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의 눈빛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 진리를 찾기 위해서 그 눈이 열려있는 사람, 마음을 열고 진리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찾기 위해서 갈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이 현실은 보는 사람 없이 듣기만 하는 그 모든 복음의 진리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그 불안전한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실로 수많은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우중에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 결점 없이 여러분들은 편안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편안한 누림 속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멀리는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이 있었고, 그것보다 좀 더 가깝게 이 황량한 공장 부지에 교회 설립에 꿈을 안고 그리고 많은 물질로 헌신했던 성도들의 이름 모를 헌신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여러분들을 세우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영혼을 이 교회에 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의 집을 주님께 드리고 자신의 모든 땀과 그리고 피, 노후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많은 물질을 바친 분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희생의 순간도 결코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던 야비한 신자들도 있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힘에 넘치게 수고해서 하나님 앞에 부요할 수 있는데도 가난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가깝게는 이 교회를 짓고 그리고 이 교회를 짓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이 있었고 그보다 가깝게는 이제 하루 전에 이 교회에 나와서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쓸고 닦고 헌신한 수많은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어눌하지만 오늘의 예배를 위해 기도하며 설교를 준비한 목회자가 있었고 목회자가 그렇게 유능한 설교로 준비할 수 있도록 원고를 도운 그런 일꾼들이 있습니다. 이 원고를 돕고 그리고 이 원고를 통해서 성도들이 편안한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곧바로 자신에게 선포된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길 수 있도록 정리 본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고 애쓴 성도들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런 헌신들을 통해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한순간 예배에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의 희생에 터 위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잘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믿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넘어져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기도하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때 여러분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애쓰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을 자신이 회개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고뇌하던 돌보는 목양자들이 있었고 그 일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물질적인 헌신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는 그 희생의 피 위에 오늘 여러분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계속될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전에 있던 성도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섰고 앞으로 올 성도들은 오늘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앞으로 올 성도들이 이전에 있었던 성도들처럼 다가올 성도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가고 오는 세대에 이 섬김은 계속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교회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다 바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 속에서 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을 희생한 적이 없이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했지만 그런 야비한 삶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은 일일이 기억할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사랑할 교회가 있고 내가 사랑할 하나님이 있고 그리고 나와 함께 그 선하신 하나님을 알아갈 구도의 동지들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위탁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아! 기쁘다. 지혜의 부요함이요 라고 말했습니까? 바로 이 복음의 비밀, 교회의 비밀을 말하다가 깊도다. 지혜의 부요함이여.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영적으로 만지면서 이곳이 예수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책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 가득히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이 시류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오늘날 이 시류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비밀을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마치 무슨 동호인의 클럽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유익을 주는 한도 내에서 교회에 빨대를 꽂고 빨아먹다가 진력이 나면 뱉어버리고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하찮게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좀 달라도 그 교회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사람이고 그 교회에 몸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교회 자신이 많은 섬김을 필요로 합니다.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성도들이 희생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로 이루신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의 부요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큰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 은혜 안에는 이미 소명이 내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신 이유는 반드시 소명을 주신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이유는 반드시 소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람을 쓰시고 싶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그런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소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특히 이런 교회의 비밀을 아는 복음의 정신이 여러분과 같은 청년들에게 아주 심각하게 넘쳐나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에 있는 이 개인주의적인 정신에 물든 청년들에게 이런 편의주의적인 정신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미래에 그런 사람들은 조국교회에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기의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사랑을 깨닫고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부르셨고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세우셨다고 하는 소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소명을 느끼면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섬겨서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섬김과 연합을 이루어서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로 하여금 내가 갈수 없는 곳까지 가서 이 복음, 이 진리를 전하게 하고 또 이제 이렇게 교회 안에서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헌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신의 섬김을 보태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맡고 있는 사명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자기의 성찰 없이 교회에 무임승차하고 교회에 생활 그 자체가 무의도식 하는 삶이 되려면 오늘은 여러분들의 혀끝에 달게 느껴지는 진리의 말씀도 언젠가는 매우 쓰디쓰고 맛없는 음식처럼 느껴집니다. 결국은 진리를 향한 싫증으로 미끄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에 추구를 우리의 전 지성과 온 마음, 그리고 온 뜻과 온 삶을 다 바친 총체적인 추구입니다. 그 추구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온전케 나아가는 이런 성도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은사는 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은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갖추게 해주지만 은혜는 우리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켜서 우리를 그 사랑에 감화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에서는 은사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은사라기보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의 가치는 은사의 가치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가치요, 비밀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항상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이 지순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은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지 없는지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명을 맡았는데 조금 그 일을 하다가 힘드니까 집어치우고 그리고 제 멋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인내로 그것을 극복합니다. 하나님께 지혜와 슬기를 구하면서 그것들을 극복해나갑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일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굿 크리스천입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통해 입증되는 것입니까? 앞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일을 했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최소한 한때는 사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변질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앞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 사랑 안에서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섬기려고 하는데 힘들게 합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데 우리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뭐 등등의 이야기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 사랑의 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도 교만도 하지 않으니라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만 술을 전혀 못 드시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의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가정이 힘들었기 때문에 뜻을 세우고 술을 안 마셨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체질적으로 아버지는 술이 받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대낮에 택시에 실려 오셨습니다. 누가 아버님을 환자를 부축하듯이 모시고 왔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우이동에 아는 분들과 야유회를 가셨는데 맥주 반 컵을 드시고 실신하셔서 실려 오셨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술을 먹고 만취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사실은 맥주 반 컵밖에 안 드셨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는 우리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을 많이 합니다. 이 사랑은 검증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섬김 속에서 이 사랑은 진짜 있는지 없는지가 입증됩니다. 교회에서 대게 직분을 맡겨주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부담스러워하고 그런 것을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만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일을 맡겨주면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일의 적임자입니다. 당신이 이 일을 해서 리더가 되십시오. 하면 대부분 기분 좋게 받아들입니다. 그때까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위가가 닥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사랑해주고 존경하고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데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28살에 한 교회에 5년 뒤에 담임목사가 되기로 하고 부목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300명 모이는 교회에 부임을 하셔서 5년 뒤에는 32살에 그 교회에 당회장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신앙이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제 부목사로 가지만 어째든 교회가 이제 내가 목회할 교회이니 내가 남은 모든 인생과 내 가족의 생계까지도 나는 하나님께 맡긴다. 그렇게 하고 자기에게 있던 아버지께 받은 유산이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정리해서 상당한 부분을 교회에 다 바치고 자기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목사가 얼마나 돈이 많으면 저렇게 엄청나게 감사헌금을 하는가. 분명히 저 사람 뒤에 뭐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결국은 그 교회를 떠나셨습니다만 그때까지도 이분의 마음속에는 상처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말하실 때마다 분노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위해 애쓴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선한 일을 위해 애쓸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거나 나를 괴롭게 할 때 하나님이 언제나 그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복수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을 견디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그때 견뎌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미끄러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유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나간 사람들은 항상 대답하는 말이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맡겨주어도 항상 충성하지 못하고 그 사명의 길에서 이탈하고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변명과 핑계가 넘쳐납니다.
IV. 섬김으로 입증되는 까리따스
A. 형제 안에서 하나님을 봄
이렇게 자기 자신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찼을 때 자기를 다 드리는 이런 섬김이 가능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형제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지난 시간에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왜 그렇게 불변하시는 사랑으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라고 질문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불변하는 종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흠과 티, 그리고 불결과 죄악이 발견될 때조차도 그 아름다움이 불결과 악을 능가하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애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랑으로 우리 자신이 꽉 찰 때 우리의 지성은 아주 명료해지는 순수한 지성의 상태가 되어서 그래서 이 육신의 눈에 의한 욕망과 미움에 의해 현혹되지 아니하고 명정한 지식을 가지고 지체들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런 인식 안에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형제의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형제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때는 교회가 온통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하게 될 때 그 지체 한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아름다움이 관상됩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덩어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덩어리처럼 느껴지는데 그것 때문에 더러운 것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발견하지만 그 더러운 것보다도 아름다운 것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러움에 대한 미움을 갖게 되고 더러움에 대한 미움이 결코 영혼과 지체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사랑을 방해하지 않는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죄의 객관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주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 그때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선행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의 효과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고백했을 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기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줄도 모를 때부터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교리 속에서 우리들이 진술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친밀한 사랑이 있으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자기를 격려하고 기대해주면 할 수 있고 그 사람이 자기를 실망시키면 집어치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는 한 자신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신의 불신앙이지 하나님이 자신을 실망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난관과 시련을 극복하며 이겨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 사랑과 목표의 일치
두 번째로는 사랑 안에는 목표의 일치의 효과입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며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따로 있고 주님의 목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목표가 자신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주님께서 답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다음에 물은 질문이 무엇입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는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잘 아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잘 알고 있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내가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까?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이게 바로 회심 안에 있는 자기 깨어짐의 효과입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자신의 행복, 그것을 위해서 예수가 도움이 되니까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 교회가 도움이 되니까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도 버릴 수 있고 교회도 버릴 수 있고 지체들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실망시키면 자기도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게 되면 자신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이 밀려와서 죄 가운데 있는 자기를 설복시키고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이 되게 할 때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목표는 없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목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개별적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인 것으로는 보다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창조의 목적,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교회의 목적, 그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 참으로 교회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목적, 그것을 따라 사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참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무엇입니까? 이렇게 회심을 통해서 목적이 합치되었는데 자꾸 자기만의 또 다른 목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을 뉘우치고 그것을 깨트려서 다시 주님과 합쳐지는 것, 이것이 바로 참회요,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자기만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원을 따라 내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떠나 있으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나의 간절한 소원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그게 소원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소원입니다. 이게 목표의 합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만의 인생의 목표를 예수 밖에서 또 다시 설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이 됩니다. 거기서 지성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명료함을 상실합니다. 마음은 그릇된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서 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의지는 불결한 사랑에 복속되어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지경이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수많은 모순율과 그리고 수많은 혼돈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어떤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 밖에서 행복해보려고 예수 밖에서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많은 사람들의 결국은 마지막에 불행한 그 끝이 오늘 이미 여러분들에게 다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지만 그러나 막상 자유를 얻고 나면 그 자유는 영혼에 대한 속박이 되어 다가옵니다. 그래서 올무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영혼에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들입니다. 이처럼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는 자기의 목표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그 목표와 자기를 합치시키는 놀라운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우리 각자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매일매일 걸어갑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C. 사랑과 희생의 욕구
마지막 세 번째는 그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는 희생의 요구가 있습니다. 희생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간절한 욕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통입니다. 성도들이 정말 영혼이 변화되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희생의 욕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나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니 나만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은데 어떻게 내 힘으로는 그들을 위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 하는 일에 무엇으로 그들을 위해 도울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흘리는 눈물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어제 문서선교부에 가서 요즘 무슨 테입이 잘 팔리는가, 했더니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가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나갔습니다. 그러면 열린 교회 교인은 다 이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인가? 두 번 생각하는 사람은 두개 사가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무엇일까?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는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니까 저렇게 불행해지는 이혼을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눈앞에 수없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청년들도 사서 어디론가 보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무엇인가 하나님의 까리따스의 사랑에 감화되고 나면 이런 사랑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희생의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욕구들이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것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이것은 강요적인 것이나 조직적인 그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헌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신자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무슨 진리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까? 어떤 진리가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그 진리 때문에 눈물이 나고 그 진리 때문에 가슴이 따뜻하고 그 진리 때문에 엎드려졌던 자리에서 용기를 얻고 일어나고 그런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질문할까요?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미어지게 만드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어떤 기도의 제목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사모함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 바치게 하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눈을 감으면 그 일이 잘 되고 있는지 근심이 되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그 일을 잘해야 될 터인데 한낮의 생활을 하다가도 기도를 하면 그 일이 잘 되기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살아있는 신자의 신자임을 점거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만약에 진리의 빛이 무엇인가를 묻는데 대답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이 없으면 요즘 여러분들은 기도를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점을 찾을 수 없는 기도생활은 초점을 잃어버린 삶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여러분들이 고뇌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대답할 일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무의도식 하는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싫증과 그리고 육체적인 게으름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러분은 침대에서 뒹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게으르고 그리고 싫증난 영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정욕의 노예가 되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이 바람같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말 잘 살다가 죽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잘 사는 것일까요? 이렇게 걸어가도 어느 순간에 죽음의 휘장이 우리를 드리울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평생 당신을 향하여 달려왔나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옵니다. 나를 받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나같이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도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지난 주간도 묵상을 하면서 여러 차례 그 영혼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적막감이 감도는 그 농촌 마을에 마치 죽기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숙명적인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도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도 그것이 싫어서 미끄러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하나님이 왜 날 여기에 남겨두셨을까?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그런 동리를 순회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르신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들었던 복음을 그들도 들었더라면 우리보다 훨씬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겼을 사람인데 주님이 조금만 붙잡아주어도 곱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를 따르려고 애썼을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아직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두움 속에 살게 하시고 우리같이 자신을 싫증내고 하나님의 사랑에 면역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권고하시고 사랑하시면서 참된 신앙의 길을 따라 돌아가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가 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알고 계십니까?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눈을 감으면 우리가 아직 가지 못한 곳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진 채로 남아 있는 수많은 영혼들과 병든 교회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지만 주님이 보실 때 잘했다. 그래. 넌 정말 잘했구나. 정말 내가 너에게 주는 은혜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충성스럽게 살았구나. 이런 칭찬을 주님께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여러분들의 섬김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저를 섬기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며칠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 같은 사람도 쓰시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큰데 나는 무엇을 섬겨야 할까요? 하고 여쭈어보면 하나님이 며칠 안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 사람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온전히 드러내며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공동생활과 화해
“그 형제를 미워하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I. 본문해설
아마도 다음 한 시간 정도 더하면 성도의 공동생활을 마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특별히 공동생활과 화해의 문제를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요한의 편지인데 이 편지 속에서 요한은 우리가 쉽게 동요하기 어려운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도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더하지 않는 줄을 너희도 아는 바라, 하는 극단적인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미워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사랑하도록 명령하고 계시는 우리의 가족들을 미워할 때도 우리는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여야 함에도 미워할 때가 종종 있고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더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구원의 문제까지 이 미움의 문제를 확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쉽게 사람들을 미워하는 우리의 현실과 만약에 미워하는 그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살인하는 그 사람 속에는 영생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라는 이 사도 요한의 진술이 교리적으로 어떻게 조화시킬지도 우리에게는 매우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II. 미움과 영혼의 상태
우선 우리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여기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미움이라고 하는 것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이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의지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혐오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를 끊임없이 싫어하고 혐오하고 거부하는 마음과 정신의 의지적인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미움과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사도가 만약에 미워한다면 그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영생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한 영적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A. 미움의 감정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미움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저의 이 설명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미움 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삼각형으로 이렇게 그려봅니다. 여기에는 원이 이렇게 그려지고 정확하게 말하면 부채꼴이 됩니다. 여기에 사람이 서있고 사람의 감정의 폭이 부채꼴로 펼쳐져있다고 칩시다. 이쪽 끝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반대 맨 끝은 혐오의 감정, 혹은 미움의 감정이 됩니다. 그럼 이 사랑의 감정은 무엇인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거기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입니다. 이게 사랑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결국은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그에게 그것을 사랑하는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한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감정은 바로 자기에게는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옵니다.
그러면 사람을 놓고 생각을 해봅시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름다움을 계속 발견하게 될 때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잘 발견이 안 됩니다. 진짜 아름다운 것이 다 떨어져서 발견이 안 될 수도 있고 혹은 아름다움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어째든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마음은 이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됩니다. 사랑이 식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반대편으로 이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익숙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코의 후각은 15초 동안만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합니다. 같은 냄새를 15초 이상 맡게 되면 코가 면역이 되어서 예전과 같이 똑같은 기능으로 그 냄새를 후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가도 잠깐만 참고 있으면 코가 면역이 되어서 냄새를 못 느끼게 되는 것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또 아기 몸에서 나는 냄새도 자기는 잘 모르는 것도 바로 코가 그렇게 익숙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처음에는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추가적인 아름다움이 계속 발견되어야지만 사랑이 유지가 되지 추가적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않을 때는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반대편 쪽으로 이행을 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빗나갈지 모르지만 이렇게 이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때 이제 이 사람은 회고하는 심리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데 옛날에 이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과거를 추억합니다. 그 추억거리가 있으면 회상의 작용을 통해서 지금은 발견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회상하면서 자기는 발견하지 못하지만 저 사람 속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자면 피부에 와 닿게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수준이 뭐와 똑같은가 하면 일 더하기 일은 뭐지? 그러니까 모르는데 빵 두개를 갖다놓고 이것 두개면 얼마지 하면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 부부가 같이 삽니다. 그런데 항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옛날에 연애도 하고 추억이 많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아야 되겠는데 요즘 아름다움이 발견이 안 됩니다. 계속 속을 썩이고 잔소리나 하고 그러는데 사진을 꺼내놓고 보니 옛날에 추억이 참 많습니다. 아! 내 아내가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고양이 같고 여우같지만 옛날에는 참 예뻤는데 나를 참 사랑했는데 하고 생각을 합니다. 회상을 하면 다시 눈꺼풀이 열리면서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더 이상 사랑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회복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추억이 없습니다. 회상을 해보니까 옛날에도 매일 싸움이나 하고 코피 터지게 다툰 기억밖에 안 납니다. 그러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름다움이 계속 발견되면 과거를 회고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 안에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회고합니까? 회고, 뭐가 있습니까. 요즘 사랑이 더 좋은데. 그러니까 항상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사람들은 요즘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느껴지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이 부채꼴에서 이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시간이 많이 흘러서 계속 이동을 합니다. 진력을 하면서 이제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 끝에까지 오면, 이제 무슨 이야기가 되어버리는가 하면 사람에게서 그 잘못된 것을 계속 발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하고 혐오하면 의지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미움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 두개의 극단이 아니라 감정이 중간지대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도 발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혐오하는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닌 그런 이탈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힘의 균형을 이룬 중간지대를 통과할 때 그 마음의 작용이 권태, 혹은 싫증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에 권태기가 오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그 권태기가 지나고 부부가 서로 혐오하게 되는 것처럼 똑같은 것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만약에 영적 침체라고 하는 것과 관련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지니까 뒤로 물러갑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작용이 일평생 동안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지는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는 작용들이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발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없는 곳이 없이 다 펼쳐져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뭐라고 노래했는가 하면.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산과 바다, 들판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있지만 그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 덩어리가 되어서 묻혀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온전한 덩어리가 성경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싫증난 영혼들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에 그렇게 비뚤어져서 방탕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인간인데도 그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다시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영적인 침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뒤로 물러가서 그래서 싫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싫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때 그때 육체는 하나님을 향한 게으름들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 게으름이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게으른 삶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게으른 삶의 영혼이 침체되어서 하나님께 싫증을 내고 있다고 하는 징후로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을 하다가 이상하게 여기 코에서 코피가 납니다. 그럼 아마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코피 나는 일이 고단하면 있게 되니까. 내가 무리를 했구나. 하고 코를 막고 그리고 응급처치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의 눈에서 피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면 내가 될 터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유 없이 눈에서 피가 막 쏟아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겁이 덜컥 날 것입니다. 이것은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굉장히 심각한 징후가 이 피 말고 이 피 속에 있는 눈과 이외에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이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징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게으름은 바로 영혼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싫증을 내고 있다고 하는 징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데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만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삶을 삽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이기 보다는 이 뒤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이탈을 해서 싫증이 난 영혼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모든 일에 있어서 싫증을 내고 있는가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드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신령한 일에 대해서만 게으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치장하고 가꾸고 자기 자신이 먹고 마시는 이런 일에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싫증날 때 열심이 더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침체가 이것에 의해서 설명이 됩니다.
그러면 이 미움의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을 인간에게 대입시켰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싫증나게 됩니다. 그에게 어떤 더러움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를 혐오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가 만약에 너희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경향성 적으로 만약에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너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 틀림이 없다. 사도가 그렇게 판단을 한 것입니다. 영성을 소유했다가 잊어버린다든지, 구원을 받았다가 취소가 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의지를 가지고 형제에게서 추함을 계속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에 집착해서 의지적으로 형제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네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표이다. 라고 말합니다. 네가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섬기고 한때는 은혜에 감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너의 영혼이 예수의 생명이 없는 증거다. 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형제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도리일진대 인간에게 이렇게 끝없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엇 그제도 어느 형제에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시집 장가를 갈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얼굴입니다. 그래서 일단 얼굴이 예쁘게 생긴 자매들은 타의적 독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용모에 의한 타의적 독신이 선택이 안 됩니다. 누군가가 아무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제 동생도 한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레스토랑을 경영하는데 여직원들을 뽑을 때 옥상에서 떨어진 것 같은 그런 여직원들을 뽑아서 음식장사가 되겠습니까? 얼굴도 예쁘고 그런 애를 뽑아놓으면 오래 있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어느 손님이 와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용모에 의해서 타의적 독신을 강요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모에 의해서 독신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이 얼굴이 예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6개월입니다. 그게 장가가고 나면 6개월 정도 좋은 것은 우리 아내가 다른 사람보다 예쁘구나. 그리고 우월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얼굴이 예쁘고 사랑스러우면 성적인 욕망도 더 많이 느낍니다. 그게 콸콸 나오는 게 1년 6개월밖에 안 갑니다. 그 다음에는 용모를 가지고는 내 아내를 사랑할 수 없고 성적인 욕망만을 가지고는 내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계속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되려면 무궁무진하게 발견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만약에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게 있으면 우리가 구원의 대상일 수가 있겠습니까? 한때는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못 볼 인간인 것처럼 돌아서고, 한때는 존경하던 사람도 쓰레기라고 침 뱉고 돌아서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까?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사람에게 발견하는 아름다움 가운데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령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아름다움과 신령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얼굴이 예쁘다든지, 남자라서 키가 훤칠하다든지, 아니면 좋은 학교를 나와서 학벌이 좋다든지, 말 주변이 좋다든지, 돈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든지, 능력이 있다든지 이런 것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것도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이 사람의 자연적인 성품과 관련된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던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뭐라고 딱딱거리고 신경질을 내고 그래도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번만 뭐라고 딱딱거리면 귀 방망이가 올라옵니다. 이런 남자는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한없이 용서해주고 너그럽습니다. 도덕적으로 그렇고 또 그 남자는 착합니다. 그래서 친정식구들이 뭣 좀 도와달라고 그러면 넘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짠돌이를 만나면 우리 쓸 것도 없는데 어떻게 너희 친정을 도와주는가. 그러면서 신경질을 냅니다. 그러면 그것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것들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나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나 모든 것들은 이 인간적인 원래의 자연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항상 끝없는 것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 이외에는 무한이라고 하는 것은 업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깨끗한 마음이 되어서 있는 대로 아름다움을 다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끝이 있는 것이고 내가 항상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그 아름다움이 보기 싫어지는 때도 있으니까 이것을 아주 빨리 아름다움에 대한 이 관찰이 끝나고 그 다음에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령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신령한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한없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인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무한할 수 있는가? 그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무한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성적인 여러분들은 교리를 좀 공부한 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모순을 직접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아름다움이 인간 안에 영원히 있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어떤 사람들을 영원히 심판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심판하십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같이 공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일정한 기간동안 그들이 최후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 동안은 그들에게 더러운 것과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을 계속 주목하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심으로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죽은 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공정하게 모두 보시면서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우리들이 시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우리는 모두 더럽게 타락한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사랑 안에서 회개할 기회를 제공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들이 감격을 해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답변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미움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런 신령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것은 불멸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특히 성도 안에 있는 이 불멸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씻겨진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빛나는 아름다움입니다. 불신자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은 흙이 묻은 보석이라면 우리는 깨끗이 닦아서 생수로 씻어낸 그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람을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 그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추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끊임없이 보고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고착하려고 하는 이 마음의 작용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의지적인 노력이 상당히 많이 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끌리는 것을 그냥 좋아하는 그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자체에 의지적인 성격을 깊이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의무를 생각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하는 결단 속에서 사랑이라는 불꽃이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 끌려가는 데는 자신의 의지가 별로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자발적인 선한 의지가, 행사가 거의 소용이 안 되지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선한 의지를 계속 발휘하는 끊임없는 의지적인 선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서 계속해서 추함과 더러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 있고 혹은 추함이 아직 작은데 미워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추함을 아주 크게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고 어떻든지 간에 더럽고 추한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본질의 아름다움이 형제에게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잘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별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것이 동질의 것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내게 속한 자도 사랑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사람이 어떤 형제를 집요하도록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신령한 아름다움을 더 이상 발견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이 여태까지 좋아했던 그의 외모나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나 도덕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이라는 것에 대한 영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면 이제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자기가 더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의 본성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예수님께서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을 보니까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과 이 꽃이 지금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꽃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면 꽃은 사라졌으나 꽃의 아름다움은 빈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이 꽃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컵에 더러운 오물이 둥둥 떠서 도저히 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이 컵은 더러운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컵을 치워버리면 더러운 것은 여기 그냥 남아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더러움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이고 실제에 더러운 컵이 치워지는 것과 함께 더러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있는데 이 컵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 컵은 그냥 여기에 담겨있는 물을 내 몸에 섭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더러움이 묻어있지만 더러움을 여기서 구별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 자체를 없애버림으로 더러움을 처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이 컵이 굉장히 비싼 돈을 주고 금으로 만든 컵인데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중에서 제일 큰 돈입니다. 그래서 이게 2,800 만원 된 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이 담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컵 밑에 오물이 묻어있습니다. 물을 따라버려도 컵에 여전히 오물이 남아 있습니다. 더러움이 이 존재에 부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컵을 폐기처분해버리고 갖다버리면 그러면 더러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컵이 귀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안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수세미를 가지고 그 더러운 것을 닦아내서 이 존재는 계속 유지하고 존재의 더러움만을 여기에서 빼내려고 하지 더러움 때문에 이 존재를 폐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야, 목욕물이 더럽다고 애까지 버리라는 것인가. 우리들이 흔히 그렇게 얘기합니다. 애를 데려다놓고 씻겼더니 얼마나 목욕을 안 했는지 어린애가 때가 둥둥 뜹니다. 더러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같이 갔다가 하수가에 버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식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에게서 계속 미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사실은 신령한 눈을 가지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사랑하게 되면 이 존재를 치워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존재에 붙어있는 나로 하여금 자꾸 더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것만을 떼어버릴 수 없을까 하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교정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 교정은 형제를 목 쳐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내버려두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몸에는 손상이 없고 예수의 몸에 해가 되는 것들을 떼어내게 하는 것이 이제 형제 교정입니다.
그러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무엇인가? 바로 형제에게 붙어있는 더러움, 그것이 착각일 수 있고 진실일 수도 있고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여튼 형제에게서 발견되는 더러움과 추함 때문에 이 존재 자체가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원하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로 하여금 혐오하게 만드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방법은 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죽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서 선택하는 감정이 살인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싫을 때 나타나는 감정은 살인의 감정이고 내가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이 싫기 때문에 비존재를 택하고자 하는 것이 자살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움의 감정을 절대 과장이 없이 정체를 보여주는데 그게 바로 살인의 감정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B. 미워하는 자의 영혼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미워하는 자의 영혼에 아주 즉각적인 파괴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미워하는 자의 영혼은 첫째는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지인가 하면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으니 여러분들이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답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대답만 하면 됩니다.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교회를 여기에 누가 세우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모이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 끊임없이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데도 내가 떠나지 못하고 여기에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 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질서들이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악도 하나님의 큰 허용의 작정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있게 하셨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로 내가 왜 이 가정에 태어났을까? 백번 얘기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실존철학자들의 말처럼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던져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존재하게된 것입니다. 가족들도 그렇게 해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셔서 우리를 거기에 던져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럼 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께 접붙여졌습니다. 그래서 각자는 믿음이 많던 적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한바가 계셔서 그 많은 교회 중에 여기에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싫다고 하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싫으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든지 나의 존재가 사라지든지 둘 중의 하나고 그런 극단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힘들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서로 부딪히지 않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게 바로 이별입니다. 헤어지는 것입니다.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도록 그래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도록 주신 그 형제가 밉다면 그렇게 그 사람을 내 옆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자신에 의지에 대한 거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 이 거부는 의지적인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그 순간에 즉시 영혼은 더럽혀지게 됩니다. 증거를 대겠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다 몰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를 거절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즉각적으로 지성은 어두워지고 우리의 영혼 전체는 더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케 되어” 반대말로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가 진리를 불순종함으로, 거역함으로 너희의 영혼이 더럽게 되어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앞에서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를 등지고 있으면서도 그림자를 원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과의 화목, 그 은총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자유의 삶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에서 시작됩니다. 잘 몰라도 일단 복종하면 자유가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신자 속에도 그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게 신령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가 여전히 결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십니다. 심지어는 깊은 침륜에 빠져서 타락을 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훨씬 부도덕하고 비교될 수없이 더러운 죄인인 그 인간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거절하고 그의 추함을 붙들고 그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아직까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판단하시는데 자기는 싫다. 밉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이 의지의 끊임없는 선택은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반항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나는 이 사람이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는 이 사람이 밉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판단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사람이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계속 미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판단을 지속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보고 당신은 틀렸다고 계속 외쳐야지만 이 미워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거절의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영혼 자신에 엄청나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문제는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계속 발견하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모순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은 계속 이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데 자신은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어떤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서 있다, 없다 판단할 때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하겠는가, 사람의 판단이 정확하겠는가? 대답해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판단은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류가 있는 판단을 가지고 진실한 하나님의 판단을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적인 지속적인 불순종이 없이는 누군가를 이렇게 집요하게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세 번째로 영혼은 파괴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파괴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영혼이 폭탄입니까? 그게 아니라 잘 들어보십시오. 이 파괴는 기능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겠으니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어떤 예를 들으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할 수 있을까 지금 제가 생각을 하는데 자,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자, 여기에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천 장의 종이로 되어있고 이렇게 한 장씩 원하는 대로 손으로 넘기게 되면 이렇게 넘겨져야 합니다. 이렇게 잘 넘겨질 때 이것이 책으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덮어놓고 관리를 잘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책에 습기가 스며들면서 곰팡이가 생겨서 책이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해서 한 장씩 넘기려고 그랬더니 아까처럼 밑에 장이 달라붙어서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한 장씩 넘기려고 이렇게 했더니 지지직거리면서 찢어졌습니다. 모든 책이 다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책으로서의 기능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파괴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영혼은 영혼 나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은 이렇게 치면 소리가 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 시계는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이렇게 일정하게 초침과 시침이 돌아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는 동력을 공급하면 이렇게 빛을 비추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능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기능이 파괴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은 경향성적인 기능입니다. 경향성적인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어떻게 작동하려고 하는 일관된 성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능성, 경향성입니다. 이런 것들이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파괴가 되면 이것은 종인데 울릴 수가 없고 전구는 켜져 있지만 빛이 비추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경은 있지만 기능이 파괴되고 나면 돋보기나 혹은 졸보기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기능이 파괴되면 가장 심각한 현상은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의 사령탑이 되어서 이 육체를 어떻게 사용해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끔 이 육체를 살아가게 할까? 아래로는 그것이 영혼의 역할이고 또 한편으로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육체로는 하나님을 감각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눈이 먼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요. 그러니까 눈으로 신령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영혼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의 죄의 추함을 봐서 죄를 미워하고 그래서 영혼 그 자체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우리의 육신을 이끌고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등불과 사령탑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기능이 파괴되면 이 일들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은 그대로 살아있고 침체에 빠져서 더 많이 먹고 살이 쪄서 육신은 더 튼튼해져서 헬스클럽에 다녀서 날씬하게는 되었는데 이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를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해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통제할 수 있는 이 기능을 이 영혼 자체가 상실해버린 것이 그게 영혼의 파괴입니다. 영혼이 침체 속에 들어갔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길로 가면 안 되는데 계속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죽어라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방불한 고통을 경험할 때까지 바보같이 그 어리석은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지혜를 찾아가는 것, 그 지혜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 파괴사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미 미움이 자신 속에 들어와서 영혼 자체를 다 파괴해서 그리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아름다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정의를 했습니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아름다움입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꽃처럼 예쁘다고 그 용모를 자랑하고 수많은 뭇 남성의 프러포즈를 받는 여성도 10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2-30년이 지나고 난 뒤에도 그 육체를 보고 아름답다고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체 자체는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만 점점 사멸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존재가 사라지면 아름다움도 함께 사라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멸할 것들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움은 한시적인 아름다움입니다. 한시적인 아름다운 그것을 영원히 사랑하면 언젠가는 없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허위입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꽃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사랑이지 영원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왜 일주일만 지나면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움도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랑합니다. 헛짓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악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허무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도 공간 속에서 주어지고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점점 사멸하는 것입니다.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저를 보십시오. 39살에 교회를 개척할 때는 그래도 탱탱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기운이 점점 나 자신을 삼키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새벽기도에 안 나오는 목회자는 내가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못 나옵니다. 나올 수는 있는데 화요일 수요일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수시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들어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공간 속에서 주어졌지만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멸되어집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나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육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갑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나는 사랑하는데 공간 속에서 주어져서 시간 속에서 사멸하는 것입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해주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앗아갑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원히 그것이 있는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게 다 허위입니다. 거짓이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보고 네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느니라. 그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육신적으로 늙어가서 나를 후지게 보고 아주 평가절하하고 나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데 그 인간이 지금 진짜 아름다움을 못 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니까 오히려 내가 불쌍한 게 아니라 그렇게 거짓 표상에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그 인간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 인간의 지성이 아름답고 인간의 총명이 빛나서 아름답고 인간의 의지적으로는 선한 의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아주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어거해서 그래서 수평적으로는 이 세상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성경을 공부하고 자기 깨어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로 수평으로 아래로 이 모든 것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 침체에 들고 형제를 미워함으로 다 파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멍청이 같은 인간들이 누구 때문에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따져서 그것을 지금 뭐하겠습니까? 지금 자신의 영혼은 다 파괴되었는데. 그래서 그냥 피가 터지게 싸우면서 결국은 법정까지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누가 옳다는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누가 이긴 것입니까? 이미 진짜 그 사람을 미워하게 한 사람도 영혼이 다 파괴되었고 미워한 사람도 영혼이 다 파괴되었는데 법정에서 네가 옳다고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빛이 쏟아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상이면 미친 상상입니다. 그래서 세상 법정으로 들고 나가는 사람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너희의 영혼에 아름다움이 파괴되지 않겠는가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둔갑이 되어서 그래서 그 형제의 무엇 때문에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 형제를 집요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형제에게서 더러움이 발견되어도 그 형제의 아름다움을 더 먼저 보게 됩니다. 우리가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재수 없는 죄수들은 재판을 받는 그 날이 판사가 부부싸움을 하고 온 날입니다. 판사가 뿔이 나서 온 것입니다. 아주 인생 살기도 싫고 인간들이 보기도 싫어. 부인하고 대판거리 하고 싸우고 왔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재판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똑같은 인간, 그리고 쾅쾅 1년만 해도 될 터인데 3년, 그리고 탕탕 때립니다. 그리고 마음이 좋을 때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정상참작 되었는데 뉘우치지 않고 용서만 해달라고 그래, 3년 아니야. 4년, 탕탕 때립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인이 맛있는 아침도 차려주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선물도 주고 굉장히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왔는데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오죽 했으면 저렇게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을까? 무죄. 그러면서 탕탕 때립니다. 아니! 이게 인간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같이 한번 대입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영혼이 사실 영혼이 파괴되고 사랑하고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신자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영혼이 파괴됩니다. 그럼 아름다운 것을 못 보게 되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지금 형제가 자신에게 심하게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추함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형제가 자기를 모욕하거나 비난을 해도 그에 결정되어 보이지만 그 아름다운 점이 더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게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러운 것은 참 싫은데 형제는 너무 소중하니까 어떻게 하든지 닦아서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이 그러니까 이미 한 형제가 아주 명백하게 잘못해서 자신에게 모욕을 주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를 미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미워하게 되어서 그래서 영혼이 계속 파괴되는 상태까지 들어가기 전에 이미 형제를 그렇게 쉽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최소한 싫증난 영혼의 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미움은 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웁니다. 정욕과 똑같습니다. 불이 붙지 않는 것은 못하지만 불붙는 모든 것은 계속 태웁니다. 그게 미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이 그렇게 추루하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때에 누가 그 원인을 먼저 제공했는가 하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에서 보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인을 이 형제가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네가 나를 사랑하고 영혼의 싫증이 없었더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터인데 이미 하나님께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결함을 보는 것입니다. 죽어라 미워하다가 그 다음에 살인의 감정까지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의 그 안에 영생이 없다고 단언하는 이유입니다.
III. 공동생활과 미움
그러면 이제 이런 것이 공동생활 속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공동생활과 미움의 관계로 들어가서 좀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A. 공동생활과 일치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동생활과 일치의 문제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있는데 우리의 몸을 향한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의 뇌가 지시하는 대로 온 몸을 움직일 수 있어야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을 향해 우리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행히도 이번에도 저는 그런 경고를 받았습니다만 이렇게 작년에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해보니까 뒤에 올라가는 경동맥이 있는데 5년 전에는 안 그랬는데 5년 만에 검사를 해보니까 핏줄이 100이라면 31%가 막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중풍이 잘 일어나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스피린을 계속 먹고 그 혈액에 낀 노폐물을 이미 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더 이상 끼지 않도록 커피도 마시지 말고 뭐도 먹지 말고 다 그렇게 의사가 소상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예를 들면 그렇게 해서 중풍이 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반신불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감각이 마비되었으니까, 손도 움직일 수 없고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남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외다리로 걸어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게 인간의 육체적인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당장 설교를 못하고 글도 못 쓸 것입니다. 입이라도 살아있어야 불러주면 다른 사람이 베껴 쓸 터인데 말도 못해서 발음이 밖으로 샌다고 해보십시오. 어떻게 될까? 요즘 매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커피는 계속 먹고 싶습니다. 이게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틀에 한잔만 먹으려고 합니다. 왜 그럼 딱 끊지 않는가. 묻지 마십시오. 나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교회는 어째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니까 아름답습니다. 더 아름다우려면 몸의 지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달려가고 그 다음에 걸어가고 무릎을 꿇고 섬기고 일어나서 섬기고 허리를 구푸려서 봉사하고 그 다음에 눈을 들어서 위를 쳐다보고 이럴 수 있는 기능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자재로 행할 수 있을 때 그때에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상태가 됩니다. 탁월함을 가진 상태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온전히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을 다 꺾고 그리고 형제를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에 합치되어서 그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으신 것이 우리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다 좋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이 예수님이 싫으신 것이 우리 모두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기 싫은 것은 우리도 하기 싫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교회가 그 마음속에 공동체가 예수의 심장을 품은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이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지상에 있는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 끊임없이 일치를 이루라. 마음을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뜻을 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프로그램적인 명령입니다. 그쪽으로 가라고 지시해주시는 방향적인 명령입니다. 절대 완벽한 일치는 하늘나라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현실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끊임없이 되고자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인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지상에서 같아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은 가능합니까, 안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그쪽 방향으로 계속 감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밤중에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나 나침판이 없던 시절에는 별을 보고 항해를 했습니다. 북두칠성을 향하여 노를 저어갑니다. 그럼 북두칠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표는 북두칠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라서 가다보면 원하는 항로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해지고자 하고 그쪽으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그 길을 올바르게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북두칠성과 같습니다. 도달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제 나는 예수를 완전히 빼닮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는가?
이 교회는, 이 세상은 한 사람이 각자 자기 사랑의 깃발을 하나씩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모아서 이의 있는 사람을 그냥 복종시키고 굴복시켜서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내 사랑의 질서 안에 들어와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너도 좋아하는 것처럼 섬기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너도 미워해야지 된다고 하면서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안 하면 이제 끊어내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보복을 하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빼앗거나.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우리는 부패성을 가지고 지금은 다 자기의 깃발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깃발을 다 꺾고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의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그렇게 현재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울며 회개하면서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고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인간들은 침체에 빠져서 깃발 들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다시 꽂으러 갑니다. 그것을 꼽았기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들을 보면서도 그게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수께 붙어있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자기 깃발을 다시 들고 자기 깃발을 꽂으러 다시 내려갑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인간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인간들도 버리지 말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성령 충만할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침체에 빠졌을 때 심지어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교회는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니까 그 예수님의 마음을 최대한 구현하는 교회가 이게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아름다움은 의인의 숫자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그 예수의 마음을 지체들이 같이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이면 많은 인간들이 깃발을 버리고 자기 깃발을 꽂기 위해서 내려와도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 교회생활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나와서 가난한 사람들이 돈 많이 벌고 좋은데 취직하고 예쁜 자매 형제를 만나서 시집장가를 가서 애를 5-6씩 낳는 것도 복이지만 그러나 더 본질적인 축복은 교회에서 이 지상에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던 형제 중에도 자기 깃발을 꽂기 위해서 그 언덕에서 내려와서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는 미끄러지는 인간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기 깃발을 꽂고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 그 언덕에서 사랑의 합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목회의 축복이고 교회의행복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형제들의 용서와 사랑과 돌봄을 받으면서 자라는 사람들은 미끄러져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그가 미끄러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영원히 미끄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는 이미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아무리 미끄러져도 영원히 미끄러져서는 살 수 없는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동생활 속에서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미움이라는 감정은 결국은 내려와서 자기의 깃발을 꽂고 자기사랑의 질서에 파문을 그리는데서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예수께 온전히 합치되고 예수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는 금방 떨쳐버리고 예수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지체 안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럼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깃발을 꺾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룸으로서 교회는 예수께 순종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내 중심의 깃발을 꽂고 그리고 그 깃발 아래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집요하게 미워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려고 마음의 작용을 의지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영혼은 파괴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지만 자기 밖에서도 일이 일어납니다.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하면 둘이 함께 사람들끼리 서로 분쟁하게 됩니다.
B. 말: 다툼과 미움
그러면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다툼을 통해서 미움이 증폭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청산하면 그것으로 파문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내세우면서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들게 되면 분노의 감정, 미움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 즉각적으로 마음 자체가 잘 들으십시오. 분노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즉각적으로 이 마음 안에서 언어의 용광로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여기서 수많은 언어가 막 솟아납니다. 이것은 애정과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잠이 안 옵니다. 언어가 막 생겨나게 됩니다. 저희 부부가 잠을 못 이루게 되는 적이 있는데 그때는 주일날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쏟아졌을 때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도 잠이 안 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예배 중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즉각적인 언어의 용광로를 만들어냅니다. 용광로에서 막 온갖 종류의 언어들이 생겨납니다.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싫증난 사람들은 대게 말이 없습니다. 특별히 매일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합니다. 특히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보면 모른다고 합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졌다고 상담을 왔는데 이런 상태에 빠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모릅니다. 다 모릅니다. 그 대신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분노가 생길 때 이 속에서 극단적인 언어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인간 속에 음란한 마음이 꽉 찬 것과 비슷합니다. 음욕이 꽉 차면 해소하지 않으면 이 속에서 고통스럽듯이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언어가 찰 때 이것을 쏟아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나 억누르면 정신병으로까지 발전하고 막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억압이 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데 다툼의 시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하면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의 말을 계속 쏟아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계속 없었었는데도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말을 쏟아내면 새로운 미움의 감정들이 꼬리를 물고 생성이 됩니다. 그래서 의지로 계속해서 미워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겨납니다.
일본인인데 에마또 마사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물은 알고 있다’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읽었는데 물을 얼렸다가 서서히 녹이면 마이너스 2도시에서 물로 변하면서 한 2-3초 동안만 물의 고유한 결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찍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물 컵을 수십 개를 만들어놓고 사랑해. 평화, 예뻐, 난 네가 참 좋아. 너를 사랑하고 싶어, 내 곁에 있어줘, 이런 말을 붙이고 이쪽에는 죽어버려, 못난이, 난 네가 싫어, 꺼져버려, 나쁜 놈 이런 식으로 욕을 써서 얼립니다. 얼리고 녹여서 동시에 관찰합니다. 신기한 게 결정이 틀리게 나옵니다. 이쪽 그룹과 이쪽 그룹이 다 틀린데 통일성을 가진 상태에서 틀린 것입니다. 이쪽 그룹은 육각형의 상태를 대체적으로 유지하면서 조금씩 틀립니다. 그런데 이쪽은 파상형입니다. 길게 쭉 찢어진 긴 칼 같은 그런 모습으로 날카롭게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꽃잎과 같은 모양이라면 이쪽은 얼음을 막 쪼갠 모양으로 변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미워하는 감정은 제일먼저 이 사람을 망가트립니다. 영혼을 망가트릴 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품으니까 그 사람 자신이 물병이 되어서 거기에 아주 험한 말을 써 붙인 것 같은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이 암에 걸립니다. 그게 물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만히 담아두지 못하고 언어로 발설을 합니다. 그 언어는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관점이 이 언어는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언어가 확 쏟아져 나올 때 이것은 이 자체가 영혼의 영적 작용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확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막 파괴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이기면 되는데 이러면서 미움이 증폭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굉장히 심각하고 그 다음에 그 상처 때문에 자기가 짓게 되는 죄와 영혼의 파괴, 그것을 통해서 그 다음에 다툼과 그 다음에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와서 공동체에 미치는 손해와 영적인 파괴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러니까 영적으로 어두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이 그렇게 자기중심에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이 속에서 수많은 언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때에 그것을 지각이 있으면 막 쏟아져 나올 때 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가 아니라 이런 살인적인 언어들을 토해낸 용광로에 주목하게 됩니다.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원천에 주목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됩니다. 내 안에 어떻게 이런 용광로가 있어서 형제와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모욕하는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런 수만은 언어들이 생겨납니까. 이런 언어들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찬송,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한 존귀와 존영, 그것을 노래하는 그 기쁜 언어, 이런 것들은 다 사라져버립니다. 두 개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 열성들이 마릅니다. 그러면서 이 미움의 언어들까지 마지막에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입을 열고 토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잘 알다시피 사랑할 때도 사람들은 과장하고 어떤 남자가 그러더랍니다. 눈에 콩커플이 씌워서 여자 손을 붙들고 당신의 눈은 정말 호수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저 눈이 너무 나쁜데요, 그러니까 어, 정정하겠습니다. 안개 낀 호수 같습니다.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 속에서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사랑하는 감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들에도 과장이 있고 미움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는 더욱더 비이성적인 광기가 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수많은 조작과 과장, 허언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산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영혼이 계속 파괴되고 지체들을 실족시키고 하나님 앞에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막 쏟아져 나오는 언어들이 무엇인가 하면 사실은 영적인 똥입니다. 그래서 입이 아니라 영적인 항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더러운 똥이 막 수없이 실세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입을 열고 다니는 곳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느 순간에 입을 닫고 그칩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잊어버렸다고 하는데 토해놓은 그 똥들은 여전히 지체들의 온 몸을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히면서 공동체 속에 악취를 풍깁니다. 그런데 사실 그 죄가 맨 처음에 이 형제로 하여금 누군가가 추함을 보여주어서 밉게 만들었던 그 이상을 이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온 몸의 지체 가운데 가장 늦게 성화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안 전하던 사람도 은혜의 물이 잠기고 발목이 은혜의 물에 잠기면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그렇게 교만하던 인간인데 무릎까지 은혜가 차면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게 거만해서 봉사하지 않았는데 허리까지 은혜의 물이 차면 허리를 구부리고 자기보다 낮은 지체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목까지 가득 차게 되면 그 손가지고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은혜의 물에 풍덩 잠겨도 죽을 때까지 물에 잠기지 않겠다고 떠오르는 세치짜리 지체가 있는데 그게 바로 혀입니다. 나는 이것을 목회를 하면서 절실하게 경험합니다. 그 전에는 경험을 못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는데 그 지하실에 냄새나고 일주일이면 몇 번씩 물난리가 나는 교회에서 사연이 없는 사람이 왜 등록을 하겠습니까. 좋은 곳을 내버려두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 교회에서 등록을 해서 예배시간 마다 성도들이 너무 울어서 설교를 계속 하지 못하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라면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고 주님께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쩜 말을 그렇게 막 하는지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해가 되었는데 그것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 절제가 없이 쏟아놓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사랑을 못 받았거나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성화의 길을 제대로 안 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않은 고기로 말하자면 반쯤 삶다가 꺼낸 그래서 수육을 하기 위해서 꺼냈는데 핏물이 흐르는 그런 고기와 같은 영혼의 상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게 말에 절제가 없이 막 쏟아내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허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펑펑 울면서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벌벌 떨고 은혜를 받던 사람들이 일주일이 지나서는 자기들끼리 머리가 터지라고 싸웁니다. 그리고 참 신기한 게 그렇게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웬만해서 화해를 하지 않습니다. 왜 각자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들입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말 가지고 7주를 시리즈로 설교했습니다. 한 7년까지만 해도 필독 시리즈였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미움과 다툼의 80%이상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만 없으면 기름을 끼얹은 집과 같습니다. 기름은 아무리 끼얹어도 불은 안 납니다. 그런데 말이 성냥이라 탁 하고 불을 붙이면 확 타는 것입니다. 기름을 뿌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증발되어서 불이 안 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에 성냥불을 던지는 것입니다. 확 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다 마지막 날에 헤아림을 받습니다. 그렇게 놓고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언어 하나를 가지고 교회를 더럽히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그럼 말에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편으로는 그런 미움의 감정들이 생겨날 때 그때에 아주 단순한 격언을 가져야 합니다. 말을 말고 그 다음에 듣지 말고 보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여자는 아니지만 난 이렇게 하면서 난 시집살이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를 하면서 행복하다고 그러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돌보면 기쁠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길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가슴에 새깁니다. 이 땅에 내 인생을 마름하는 그날까지 시집온 며느리입니다. 참고 벙어리가 되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말고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곳에 갔는데 연세 드신 어느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목사님이 자신을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까 그 목사님은 어느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고 그 원로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은 제가 잘 아는 친구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목사님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목사님 이제 목회를 많이 하셨으니까 저에게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 노인분이 마음이 풀려서 그리고 당신 자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자기 후임 목사가 내 친구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도 굉장히 안 좋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씀을 막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인간이야. 그래서 그에게 야, 네 원로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네가 와서 교회를 다 망가트렸다고 그러더라. 그렇게 얘기했겠습니까? 안 합니다. 너희 교회 원로 목사님을 만났는데 목사님이 정말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그러시더라. 그랬더니 이 젊은 목사가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기에 아! 그럼 정말이지. 두 번이나 그러셨어. 사실이었습니다.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열심히는 하지만 좀 믿음으로 했으면 좋겠어. 그랬습니다. 그래서 뒤는 자르고 열심히 한다고 그러더라.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그러더라, 정말 헌신적으로 목회를 한다고 그러더라. 그러면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서 담임 목사님이 이제 원로 목사님이 오세요. 두 경우를 비교해보십시오. 가서 김남준 목사를 만났는데 저 노인네가 나보고 교회를 다 망가트리는 후임목사라고 그랬다고 그러지. 어떻게 좋은 악수의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 주일에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목사님을 두 손으로 붙들었을 것입니다. 딱 보는 순간에 저 목사님이 김남준 목사를 만나서 정말 우리 후임 목사가 열심히 목회를 합디다. 이렇게 했다지, 내가 정말 열심히 하나봐.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한편으로는 말을 고루어서 그 말을 바꾸어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게끔 그런 역할들을 해야 합니다.
C. 화해의 필요
그러면 이런 화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1. 분노와 증오
이미 화해가 필요한데 이 화해의 필요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또 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분노와 증오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분노하고 미움은 틀립니다. 오늘 성경은 “분노하는 자마다”라고 말하지 않고 분노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입니다. 분노는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거부하는 감정입니다. 미움은 반복해서 의지적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노는 한순간에 확 일어났다가는 일어나는 일들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며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그것을 가슴에 품지 말라. 분노를 품으면 그것이 미움과 혐오의 감정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아주 감동적인 격언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뭐라고 그런가 하면 자주 분노하고 자주 화해하는 사람이 거의 분노하지 않지만 한번 분노한 후에 미워하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늘 신경질 내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으면 안 됩니다. 항상 그런 사람들은 뒤끝이 없다고 그러는데 앞 끝도 없어야지 뒤끝만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잘 분노하지 않는데 어쩌다 한번 분노하면 그것을 가슴에 콱 끌어안고 누구하고도 화해하지 않고 이 속에서 미움의 감정으로 발전시키는 그 사람보다는 분노할지라도 즉시 후회하고 형제와 화해하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람의 영혼이 훨씬 건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물을 드리러 왔다가 형제와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그러면 가서 먼저 화해하고 제물을 드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을 두면 둘수록 그것이 미움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빨리 그 문제를 풀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미움과 기도
여기 생각해볼 수 있는 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미움과 기도의 문제입니다. 일단 미워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 심판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마음이 지금 생겨도 교회를 못 나가거나, 하던 일을 할 수 없거나, 갑자기 사업에 부도가 나거나, 가족이 누가 죽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가 안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기도의 문이 열려있어야지만 내가 혹시 잘못했더라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가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 사랑의 감화를 받아서 나도 미워하고 자기도 부인하고 십자가도 지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데 하늘에 문이 딱 막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하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한번 미워한 감정을 중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하늘 문이 막히고 그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안에서 마치 햇빛이 차단되었을 때 수많은 곰팡이와 벌레들이 자라듯이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제 막 융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자기를 삼켜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자기가 왜 처음에 그를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 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에 빠져서 육욕에 흐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파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를 파멸시키기 위한 사단의 고전적인 수법은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하면 순교자들의 피가 핍박에 주먹을 맞으면서 튀면서 튄 곳에서 다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핍박 가지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분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게 합니다. 오해와 불신이 가득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동안에 성도 각 사람 각 사람을 향하여 열리고 있던 하늘 문들이 하나씩 닫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여러분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천장에 수천 개의 창문이 나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문이 다 열려있습니다. 그러면 환한 태양빛이 들어옵니다. 창문을 닫아 그런데 한사람, 한사람 창문이 닫히면서 어두움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절반 이상이 문이 닫혔다고 생각하면 이 예배당은 아마 설교자를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움으로 가득 찬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전체를 막을 수 없으니까 한사람 한사람을 그런 식으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일단 어둡게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진리가 주인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들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영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항상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항상 자신은 피해자라고 말하고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자기의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기도해봐라. 네가 만약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지금 이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기도의 문에 빛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만약에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너도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무엇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의 문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입증해봐라,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기도의 문이 막힌 가운데 거의 기도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들을 무슨 보석이나 되는 것처럼 깊이 간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공동체에 의도하지 않는 죄를 짓고 형제의 영혼을 파괴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몸까지 계속 하나님 앞에 파괴되어가고 선한 의지가 파괴되어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도 막히고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은 영적으로 고사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IV. 화해와 관용의 삶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언어들이 용광로 속에서 자신의 옳음을 강변하는 수많은 언어들, 형제를 정죄하는 수많은 언어들이 솟아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이시며 하나님은 항상 당신을 향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시고 당신의 사랑을 보이신 사람을 향하여는 하늘의 문을 열고 기도로 교통하십니다. 기도의 문이 막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결론적으로 화해와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상처를 안고 혼자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아가페의 사랑 앞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지극히 크심과 위대하심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 사랑의 깃발을 꺾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이 삶,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고 너절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지 모르고 불순종뿐인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이력서 한줄 한 줄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을 동의할 수 없지만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걸은 걸음마다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까? 우리 모두 한사람, 한사람 눈물겨운 대하소설을 쓰면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오늘 이 교회에서 한 목회자에게 목양을 받으며 우리 한 형제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만 그런 눈물나는 사연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다 들어보지 못했지만 내 옆에 있는 내가 미워하는 모든 지체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내 곁에 있는 모든 지체들 속에 있는 소원은 내 안에 있는 소원과 동일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살고 싶은 것,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바라봅니다. 눈물 나는 사연을 안고 살아갑니다. 허물투성이의 사람들, 나는 목회자이지만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용서하는 위치에만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여러분들의 용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지체들에게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너무 부족하고 때로는 허물이 많은 인간인데도 내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형제들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예수의 고난을 배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지체들에게 값없이 용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내가 자아를 꺾으며 내 형제를 용서한 가운데 예수의 고난을 배웁니다. 그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지체를 사랑하면서 그를 미워하고 집요하게 혐오하고 거부하려고 하는 나의 옛 자아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예수의 고난으로 나의 마음에 갑옷을 삼는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지체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을 때마다 자기 사랑에 빠진 나를 발견한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추루한 인간을 위해서 사셨던 지상의 생애를 회상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인들과 한 친구가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생각하면서 형제를 집요하게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 마음에 악한 경향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아가 죽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내 안에 미움의 언어들이 수없이 끌어 오르는데 입을 닫고 예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내 안에 있는 수많은 파괴적인 언어들 쏟아내고 싶어 하는 이 억울한 수많은 언어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나를 깨트려서 지체들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받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 길을 택하는 자기희생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죽지 않으려는 내 안에 수많은 옛 본성을 발견하게 되고 아우성치는 부패한 본성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수많은 외침들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려오시는 예수님의 음성,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다 버리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심장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그 용서와 화해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진멸되지 않고 있는 가나안의 원주민과 같은 수많은 악한 본성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형제의 존재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며 내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 가운데는 아무 것도 까리따스의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없고 오직 내게 필요한 것은 매순간 하늘을 열고 주께서 부어주시는 파멸이 되어 마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다 주시면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으시던 그 예수님의 관용과 용서의 정신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버리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해서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지체들은 살고, 주님은 부요하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위해서 비천하게 되셨던 것처럼 나는 가난해지고 내가 가난해진 것 때문에 지체들은 부요해지고, 내가 버림을 받는 것 때문에 지체들을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래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시고 날마다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걸어갑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불행하게 보이지만 그들에게 행복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싫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멸시받고 고난을 받는 자기 사람들, 선한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자신이 죽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이 깨트려지고 주님의 몸은 치유되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를 공유하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깨트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대화를 꿈꾸는 사람들 곁에 가장 가까이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너무나 긴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수많은 하나님의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면서 그 고난의 길을 오르시기 전에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너희를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00만이던 기독교 인구가 860만으로 삼분의 일로 토막이 났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 어느 교수님을 만났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460만 밖에 안 된다고 하는 확신어린 언어를 나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신학교 교정을 걸으면서 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바로 그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에 등 돌리게 한 그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끝없는 미움과 종식될지 모르는 다툼, 그리고 그 포기하지 않는 그 지독한 이기심과 한번 원한이 맺히면 대를 물려가며 풀지 않는 이 기독교인의 옹졸함과 집요함, 증오, 이것들이 교회 분열의 역사였고 이것들이 옮고 그름을 빙자해서 수많은 교회에 상처를 내고 예수의 불구된 몸을 이 세상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 이 분열과 다툼, 종식되지 않은 증오의 감정들에 대해서 우리가 마지막 심판 날에 이것으로서 교회를 더럽힌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피를 발라 교회를 흠 없게 하셨는데 우리는 똥을 발라 교회를 더럽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예수 때문에 그 알량한 신앙의 도구로 이 세상에서 번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신앙인지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가슴에 깊이 눈을 감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예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들리지 않는 사람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귀를 열어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불신과 미움, 그리고 원망과 그리고 저주, 그리고 가슴에 담긴 그 악한 말과 그 모든 독들을 버리고 그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지체들을 용서하는 어려움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신 고난을 마음에 갑옷으로 삼아 수많은 미움과 유혹의 화살을 이기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회심하지 않았던 영혼들은 회심하게 될 것이고, 미끄러졌던 영혼들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핍절하고 하나님을 등지며 거역했던 영혼들은 참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다시금 하나의 사랑의 질서로 통합되는 하나님의 교회의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 공동생활과 복종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게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I. 본문해설
성도의 공동생활 중 오늘은 마지막으로 공동생활과 복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핍박을 앞두고 있는 히브리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사도의 편지입니다. 핍박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제 사도는 11장에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했는지를 묘사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렇게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본을 통해서 핍박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어서 12장에 오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자신들을 몸을 드리도록 권면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핍박이 눈앞에 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로서 살아야 할 애덕의 삶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13장에 넘어오면서 같은 어조를 가지고 이번에는 교회의 공동체를 주목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핍박과 고난의 날이 다가올 때 성도들은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며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좋은 목양의 관계를 누리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새 힘을 얻도록 성도들을 권면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위해서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동생활 속에서 요구되는 복종이었습니다.
II. 공동생활과 하나님의 통치
이런 복종은 오늘날과 같은 자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케케묵은 옛날의 관념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시대가 성경과는 달라졌어도 성경의 필요성은 더욱더 증대되고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할 필요성도 증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정신이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시대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진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공동생활이 어떻게 해서 복종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게 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과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 하나님의 두 통치
하나님의 통치는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연적 통치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 통치입니다.
1. 자연적 통치
먼저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자연적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없는데서 태어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생겨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동물과 식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을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은 이 모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생겨난 것들을 소멸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흘러가게 하셔서 마지막에 사멸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질서를 통치로 가꾸어 가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연적 통치가 자연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육체는 바로 이런 자연적 통치에 복종됩니다. 그래서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자연의 모든 법칙을 따라서 우리의 육체도 또한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2. 도덕적 통치
이런 하나님의 자연적인 통치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도덕적인 통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국민윤리적인 도덕적 통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놓은 도덕적인 기준일 뿐이고 그것들은 보다 더 높은 도덕의 아래 존재하게 되는데 그 높은 도덕이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의 기준으로 하는 도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그 위에 또한 인간을 두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는 하늘나라를 창조하셔서 천사들로 수종을 들게 하시고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하나님 대신하는 대리자로 두셔서 그래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 다스림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여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일은 모든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이성과 영혼을 가진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의 지위 면에 있어서 천사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 있는데 그 본래의 목적에 구현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원들이 요구되었는데 그런 자원들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동물을 비롯한 식물과 삼라만상을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연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에 즐거워해야 할 분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 한분이고 자기는 바로 그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거기에 부합하면서 사는 것은 덕스러운 삶이고 거기에 거스르면서 악한 삶이 되는데 바로 그런 덕스러운 삶으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가꾸고 다스려서 창조의 영광이 땅에 가득하게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B.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덕적인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고 자의적으로 범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이 이 온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 다음으로 범죄 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의 세계를 가꾸고 돌봐야 할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제쳐놓고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었고 범죄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에게 주셨던 그 모든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앗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늘 복종하며 순종해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자기를 사용하도록 허락하던 자연의 모든 질서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조차 깨어져서 그래서 결국은 이런 모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영혼을 소유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으로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영혼의 고귀함에 있었는데 그 진리에 대한 기억들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두움에 갇혀서 인간은 육욕을 따라 사는 비참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다스릴 수 있었던 지위를 버리고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복종되며 자연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생존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거절하고 산 모든 죄를 아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셔서 그 아들을 죄 있는 제물로 삼으시고 그 위에 형벌이라는 도덕적 통치를 행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전에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이제는 이행할 수 없는 그 의 말고 다른 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으니 이는 바로 우리에게 행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도덕적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들에 의해서 더렵혀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고 그분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고 예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욕심을 따르는 모든 옛 사람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전에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거절하고 육욕을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며 인생에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은 자기 욕망에 종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들은 모두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하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것을 기뻐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면서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뜻을 이루고자 하셨던 그 통치를 이루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바로 이 땅에서 건설해야 할 그런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선취적으로 먼저 맛본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이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이 통치하심
하나님이 교회를 직접 통치하신다고 할 때 이 통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통치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둘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또 하나는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 진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진리를 통해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물리적인 권세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옥에 가둔다든지 아니면 형벌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진리로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을 통치하도록 그 통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 가심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진리를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이 진리 말고 다른 어떤 권세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악한 사람을 여러모로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징계를 한다든지 심하면 이제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못하도록 그를 출교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교회의 권세로 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징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찬, 그것 평생 안 받으면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언제 포도주와 빵을 먹고 살았나. 하고 만약에 배짱을 내민다면 그 사람을 통제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쫓아내도 너희들이 무슨 권세로 나를 내쫓는가 하며 교회에 와서 마냥 고통을 주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 사람을 제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주신 권세 자체가 물리적인 권세가 아니라 영적인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교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패역한 죄인들이 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고통스럽게 해도 교회는 잠잠히 참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 진리에 붙잡힌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얼마나 훌륭하게 시행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트려집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렇게 은혜 안에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보다 훌륭하게 순종하며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힘이 창칼의 힘보다도 훨씬 큰 것입니다. 무엇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 똑같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둘 다 저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설교하는 적은 없습니다. 설교자가 뭐 할일이 없어서 설교할 때 한사람을 겨냥해서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불러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뭐가 두려워서 한사람을 생각하면서 한사람을 겨냥해서 설교하겠습니까. 그런 일들은 없습니다. 만약에 설교자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설교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아, 저 말씀은 나 한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한사람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회개합니다. 어쩜 이렇게 설교자가 나 한사람의 모든 사정을 아는 것처럼 그렇게 설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깊이 깨트려집니다. 오늘 이 말씀이 바로 내 자녀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한 나를 향한 말씀이야.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야, 그러면서 깊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가서 자녀들을 다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합니다.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시 화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그 사람의 목에 칼을 갖다가 들이댄다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외적인 의무는 행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것을 섬기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은 개인적으로 찔림을 받아서 회개했는데 한사람은 저게 분명히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누가 또 고자질했구나. 그리고 삐졌습니다. 똑같이 개인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해도 저 사람은 말씀에 진리의 영향을 받으니까 그 진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한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가 저희의 마음을 더 굳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비슷하게 살아갔을 것인데 진리의 말씀으로 도전하니까 대들고 그리고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봄날에 내리는 단비는 살아있는 식물들에게는 생명을 움트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죽어있는 나무에게는 겨울 동안 멈추었던 부패의 현상이 산화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똑같이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생명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죽어가도록 만드는 부패함을 촉진하고 하나님님 앞에 살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단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심으로 자기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가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자기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고 오늘 살아가는 이 삶이 어떻게 자기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에 부합하고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기여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으로 자기의 개인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에 합치시키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가운데 증폭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드시려고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에 교회의 진리를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 교회 안에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 진리의 빛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지만 행복한지 이 속에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상의 영광이 주는 표상들에 매어서 인간이 방탕하고 정욕을 따라 사는 옛 삶을 되풀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표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에 의해서 그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매주일 세상에서 없는 새로운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 교회 안에서 바로 그런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일생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사라지지 않는 구원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사는 공동체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변천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붙들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진리의 빛을 충만하게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뿜어내어서 성도들이 그 빛을 누리게 하고 그 빛을 성도들이 담아가지고 가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의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오, 거룩한 나라이니 이는 너희를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두움에서 찬란한 빛으로 너희를 데려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면서 남겨주신 말씀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 바로 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교회에 찬란한 빛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현자입니까? 정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와서 형제여, 내 인생을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지 인생을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소, 말할 때 여러분들은 그에게 이렇게 살면 됩니다. 하고 들려줄 수 있는 빛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일러준 이 진리대로 산 삶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너무 교회 안에 갇혀졌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영광스런 광휘, 그리고 우주적 특성에 그 장엄함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혼자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해서 종교를 도피한 사람들의 그런 모임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엇 그제도 어느 한 지체를 상담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죽은 사람이다. 그는 결코 좋은 신자가 될 수 없다. 집요하게 사유해아 합니다. 사색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만큼 사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 영혼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과 잠세적인 것이 어떤 것들이며, 그 차이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집요하게 탐구하고 그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장 훌륭한 지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이 택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셨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인류 역사의 최고의 철학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삶의 진리를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 없이 흔들거리며 살면 안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탐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찬란한 등불을 세 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 안에 진리의 빛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뚜껑을 열어야지만 빛을 뿜어내는 그런 빛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경책을 수십 권을 쌓아둔 방속에서 여러분들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쌓아둔 성경책 때문에 여러분들이 결코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베고 자더라도 여러분들의 머리속에 성경이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자도 여러분들이 성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등불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등불을 주셔서 그 등불로 진리의 참된 빛으로 마음에 비추게 할 때 여러분의 내면의 어둠이 물러가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영원한 것들을 사랑하며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표상에 매이지 않는 초월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십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이고 그리고 사랑해야하지 않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것도 마음에 있는 이 진리의 등불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지성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달은 것을 사색을 통해서 끊임없이 마음에 흘려보내어 그 마음에 진리의 등불을 밝힌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지혜로운 현자로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그 통치를 기뻐하고 그 통치 받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서 선교하는 사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통치를 즐거워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있는 이 등불과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등불, 이 두개를 연결시켜서 하나님이 또 하나의 등불을 예비하셨는데 이게 바로 목회 사역 안에 있는 진리의 등불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이미 구약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들었고 부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이들의 마음은 근심과 염려로 휩싸여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으며 다시 살아나셔서 증거 한 구약의 성경말씀을 잘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그 빛을 예수님이 목회사역을 통해서 담아서 제자들의 마음에 불을 켰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들이 성령강림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강림 사건 후에 제일먼저 한 일이 구약의 성경의 빛을 퍼내어서 사람들의 마음의 등불을 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말씀을 목회사역을 통해서 잘 풀어서 해설할 때 이 성경 안에 있던 찬란한 성경의 빛은 목회사역의 등불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 안에 등불로 밝혀졌고 그들이 그 진리의 등불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면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지 되는가. 나와 이웃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생활해야 하는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기준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도들의 선교는 바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어두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복음전파 운동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오늘도 우리들이 지체들을 파송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나 목회사역을 통해서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목회자는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회 사역에서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밝혀낸 등불들을 그 불빛을 보고만 가지 말고 그 불빛을 받아서 자기의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예배드리러 나왔다가 예배를 마치고 침묵하는 얼굴로 돌아가는 삶은 그는 빛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것은 바로 그 등불에 불을 붙여서 자기의 마음 안에 등불을 밝힌 삶입니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나아가서 성도로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밝히 드러내어 성도들의 마음에 불을 밝히는 그 일보다 다른 일이 더 중요하고 앞세우는 교회와 목회자는 결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등불을 밝혀 자신의 마음 안에 불을 키고 그래서 그 진리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고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인 성도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순종하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무가 성도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앞세우지 않고 다른 것을 교회생활에 유익으로 앞세우는 모든 성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래도록 다녀도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예전에는 언젠가 하나님을 만났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서 성도들이 모두 은혜를 받으면 (?)어떤 물리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세상에 권력기관보다 더 강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자기 깨어짐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트려집니다. 일생동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창조주 하나님이 용서하라. 하니까 자존심을 꺾고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그것을 명하노니 해라. 그러니까 죽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겼던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리로 당신의 교회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광경입니다만 옛날에는 엿장수들이 골목에 많이 다녔습니다. 구루마에 엿을 한판 만들어서 신기하게 가위로 소리를 잘 내기에 몰래 한번 해보면 우린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잘 하십니다. 그러면서 온 동리를 다니면 애들이 눈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엿장수가 왔다고 새카맣게 몰려갑니다. 그러면 그 아저씨가 이제 탁탁 잘라서 요만큼씩 진짜 요만큼씩 잘라서 하나씩 입에다 넣어주십니다. 그런데 애들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집에 가서 고물이 없나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할머니 고무신, 냄비 때우는 사람에게 고쳐서 쓰려고 나둔 냄비, 솥, 심지어는 아직 진급도 하지 않은 형의 묶어놓은 책까지 가지고 가서 엿을 바꾸어먹습니다. 왜냐하면 맛보기를 보여주니까 너무 맛있으니까 엿밖에는 생각이 안 납니다. 모든지 엿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샅샅이 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엿장수가 한번 왔다가 지나가면 그날 저녁에 맞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일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세상을 향해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통치, 그것을 보여주는 맛보기입니다.
이번에 우리 열린 교회 아웃리치 팀은 일본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은혜들을 많이 받고 왔는데 저도 몇 년 전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서 이렇게 보면서 뭐 잠깐 갔다 온 것을 가지고 다 말할 수 없겠지만 내가 영적으로 즉시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무기력과 허무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잘 사는데 그러니까 그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조금 그렇게 잘살지 못하면 고민합니다. 취직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하나.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해결되고 나면 인간은 급속도로 허무해지기 시작합니다. 울산시가 국민소득 3만5천불의 수준을 누린다고 합니다. 평균수준이 3만 5천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나 가득합니다. 국민소득 8만6천불 수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될지 창피해서 얘기를 못하겠는데 8만 6천불이라고 합니다. 8만6천불이면 8천 6백만 원이고 4식구가 산다면 벌써 4억원 가까운 돈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나왔는가 하면 성당에 나오면 우유가루를 주었고 교회에 나오면 밀가루를 주었습니다. 선교부에서 갖다가 부으니까 그러니까 가서 우리 어렸을 때는 성탄절에 교회에 꼭 갔습니다. 왜냐하면 과자를 주니까. 봉지에 하나씩 사탕하고 넣어서 십자가 하나 그려서 주었습니다. 그때는 비닐봉지도 없으니까 신문으로 고깔처럼 만들어서 거기다 십자가 그려서 ‘축 성탄’ 그래서 주고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부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강남에서 밀가루 줄 테니 나오라고 그러면 정신병자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유가루를 주겠으니 나오라고 그러면 미친놈이라고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이렇게 교회는 이제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우리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 불러들일 그런 것들이 점점 어려워지게 됩니다.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골 같은 경우에는 지금이라도 떡을 잔뜩 해놓고 오라고 그러면 시골사람들은 와서 먹습니다. 한번 강남에다 떡 해났으니 와서 먹으라고 그러면 너나 잡수세요. 그러고 안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나? 그러나 그런 것들이 교회에는 또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것들이 이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말할 수 없이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삶입니다.
언젠가 한번 얼마 전에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원에서 너무 아픈 어떤 여자가 진통제를 놔달라고 그러니까 의사한테 간호원이 이야기를 하니까 안 된다. 그 사람은 진통제 갖고는 안 된다고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원이 찬찬히 설명하면 되는데 의사선생님이 안된다고 그래요. 하니까 이 여자가 너무 아파서 만나는 간호원마다 붙들고 사정을 하니까 간호원들 하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참으세요. 우리 병원은 그렇게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거의 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각오를 하고 병원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의사오라고 그러니까 의사선생님이 와서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아픈 것은 아는데 진통제를 못 낳아주는 이유는 진통제를 투입하면 이렇게, 이렇게 당신의 몸이 계속 망가져서 못 낳는다. 그래서 더 나빠진다. 그래서 못 놔줍니다. 그래서 한참 설명을 하니까 이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기에 이제 아셨습니까? 네. 그러면서 이 여자 하는 말이 나는 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주사를 안 놔주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주사를 놓을 수 없는 이유를 알았지요? 네 알았습니다. 그럼 됐지요? 아니요. 선생님 주사를 못 놔주시면 나를 한번 안아 라도 주세요. 이게 오늘날 풍요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정신적인 외로움입니다. 말할 수 없이 오늘날의 정신적인 외로움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점점 더 촉진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사람들은 점점 교회에 나와야 할 필요성을안 느낄지 모르지만 이 기독교 신앙의 필요성은 점점 더 증대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그때 우리들이 그들을 그런 불행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는 것이 이제 밀가루 우유가루가 아닙니다. 세상에 어디든지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그들도 가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라,”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성도인데 그런데 그 성도가 그 진리를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살지 않으면 그럼 성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뜻대로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2. 질서를 통해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 은혜를 주심으로 당신의 뜻을 따라 살도록 성도들을 통치하시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질서를 주셔서 그 질서 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질서입니다. 질서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질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각자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즉시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한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렇게 지체가 되어졌을 때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함께 공동체적으로 작용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이런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질서를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시면 목회자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목양하도록 만드시고 또 교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 목회자를 도와서 돌볼 수 있도록 장로들을 세우시고 영혼들을 가르치고 교육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사와 은혜를 따라서 그들을 교사로 세우시고 구역장으로 세우시고 교회에 많은 직분들을 주셔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성도들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질서 있게 작용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어떤 것들은 성경에서 직접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성경에 정신에 의해서 섭리 가운데 세우신 제도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질서들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 가시는 교회 안에서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연합,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성도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연합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 성도의 연합을 가시적인 유기체적인 질서 안에서 이 성도들의 연합을 질서화 시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질서 안에서 도덕적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교회에 이런 질서가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기분 내키면 교회에 와서 은혜생활을 할 것이고 그러다가 기분이 안 내키면 집어치우고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는 받았지만 옳게 살지 못해도 누구도 그것을 교정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 질서 속에서 목양을 받으면서 진리를 알아갑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기 싫을 때도 질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어서 나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미끄러지지 않게 붙들어주도록 만들어줍니다. 내가 올바르지 않는 삶의 태도가 있는데 도저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이런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나를 섬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잘 모르던 나 자신의 잘못된 생활의 태도를 고치고 올바른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게끔 도움을 받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실현해 가시는 방법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세워놓으신 모든 이런 질서들을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종하는 가운데 자신이 더 많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신앙이 침체되었을 때도 그 질서 안에서 자기 자신이 건짐을 받고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들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요즘 그렇게 열심히 예배에 안 나오십니까? 제가 은혜가 떨어졌거든요. 그렇게 구역장을 맡으셨으면 영혼들을 열심히 돌보셔야지 지체들을 이렇게 내버려두시고 제대로 먹여주시지도 않으십니까? 제가 요즘 죄의 지배아래 있거든요. 대단합니다. 그래서 너 열심히 해야지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내가 요즘 마음이,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잘 못해요. 사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질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충만하고 충만하지 않은 상태와는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지키며 살도록 주신 그런 정원적인 명령입니다. 이유를 달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를 창조한 하나님이다. 너는 나를 공경하라. 그것은 충만할 때는 그렇게 하나님을 공경해도 되는데 침체에 빠졌을 때는 아무렇게도 살아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졌던 충만할 때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의 시종일관 경외하면서 살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입니다. 그 의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자기 사정이고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든지 아니면 충만했는데도 부주의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든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았는가, 안 살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의무의 문제가 나옵니다.
좋은 예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자,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교육을 반듯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본분이 무엇인가, 그리고 남편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자매는 아내의 본분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 가정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기가 다 경험을 못했지만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는데 이상하게 사랑이 식습니다. 이 남자가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하는데 난 만족이 안 되고 성격도 너무 이상해. 그래도 아내가 그런 교육을 받았으면 의무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게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러나 내가 기왕 내가 시집와서 저 남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나에게 마땅히 이런 의무가 있지. 그리고 내가 애들에게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의무 된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둘이 만났는데 진짜 막대 먹은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거의 깨트려져본 적이 없는 진짜 육신적인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을 했습니다. 뜨겁게 사랑을 해서 둘이 만났습니다. 사랑하면 사실 안 해주는 게 없습니다. 사랑하면 그냥 남성도 여성화되고 여성도 남성화됩니다. 그래서 남자가 사랑에 푹 빠지게 되면 생전 그런 것을 안 하던 사람들이 걸레질도 하고 밥도 하고 마누라가 예쁜데 뭘 못하겠습니까. 다 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연약하기 짝이 없었는데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남성적이 되어서 남편이 생활능력이 모자라면 자기가 가서 노가다라도 해서 먹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데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에 의무라는 게 없습니다. 아버지도 잘해줄 때는 잘해주지만 수틀리면 때리고 무책임하게 가정을 나가는 어머니. 이런 것만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남편으로서 그럴 수 있나. 난 사랑이 식었거든요. 아내에게 당신 어떻게 아무리 남편이 그렇다고 그럴 수 있나. 제가 사랑을 못 받았거든요. 이렇게 나갑니다. 그게 바로 막대 먹은 사람이라고 이 세상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와서는 막가파 신자들이 바로 그런 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화되었는가 하는 것은 은혜 충만할 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바닥을 긁을 때 나타납니다. 바닥을 긁어도 성화된 사람들은 기본이 남아 있습니다. 의무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하고 들리는 말씀마다 은혜가 되고 교회가 사랑스럽고 지체들을 만나는 것이 기쁘고 감격스럽고 하면 사랑하지 말라고 사랑하고 섬기지 말라고 그래도 섬깁니다. 존경하지 말라고 그래도 존경하고 그런데 그런 것이 잘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된 사람인가.이 성도의 본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그때에 이제 자기가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 앞에 인내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의무에 충실하게 될 때 은혜의 회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집어치워버리고 미끄러진다고 해서 아예 미끄럼을 타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자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엄청난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처음에 시험에 들다가 나중에는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서를 나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의무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미끄러지되 아주 미끄러지지 않은 아주 훌륭한 지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빙벽을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 미끄러지면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피켓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빙벽에 박혀있다면 거기 매달려서 살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박힌 것이 없다면 그대로 미끄러지면 벼랑 아래로 내려 떨어집니다. 의무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에 감격에 빠져라’ 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은 것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이고 나쁜 것은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래. 그럼 나는 어차피 은혜를 못 받으니까 그만두겠어. 그리고 교회 출석하지 않아. 그럼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막본다는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막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려고 하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칼을 빼들고 있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의무에 대한 생각까지 파기해버리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막 보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반역입니다. 이렇게 하는 그 순간 그의 영혼에는 파괴현상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막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형편없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구현해나가십니다.
III. 통치 질서의 본질: 하나님의 의지
그럼 하나님의 통치 질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다. 라고 하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행하시는 게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하는데 거기 대항하고 대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지나 뜻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상주십니다.
A. 신자 각 사람에 대해
그것이 세 가지로 적용되는데 신자 각 개인을 향해서 먼저 적용이 됩니다. 이것은 예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을 등지면서 삽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높이라고 했는데 나를 높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살라고 했는데 육욕을 좇아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관용과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살라고 했는데 혈기와 미움의 정신으로 삽니다. 그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대항했던 삶을 돌이키고 회개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로 전향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생활입니다.
B. 교회 전체에 대해
두 번째는 공동체적으로 적용이 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자신을 그것을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만 해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미끄러져서 곤고한 삶을 살고 있으면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해를 입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 뭔가 이렇게 상처가 나면 잘 안 나는 체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양치질을 하다가 칫솔에 치어서 입 안쪽이 찢어졌습니다. 음식을 먹다가 혀를 깨물었습니다. 그래서 혀가 상처가 나서 피가 나서 닦아내니까 피는 멈추었는데 웬만한 사람의 경우에는 2-3일이 지나면 낫는데 곪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견디기 힘들게 아픕니다. 그래서 약을 바르고 그래도 낫지를 않습니다. 국 한 모금이라도 먹으려면 자지러지게 아픕니다.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런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몸 전체의 면역력이 떨어진 것입니다. 약 바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몸 전체의 면역체계에 이상이 온 것입니다.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요즘 성경도 안 읽습니다. 말씀도 잘 안 듣습니다. 구역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도망 다닙니다. 그리고 큐티도 안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은혜를 받던 사람이 미끄러져서 마음을 패역하게 하고 그리고 지체들과 잘 사귀려고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세상 유혹에 넘어집니다.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지체들이 모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때는 어떤 한 사람이 좀 미끄러지거나 죄를 지어도 그래서 교회에 생채기를 내어도 금방 아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람이 많아져서 교회 전체가 면역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사람이 생채기를 내면 그것 때문에 다른 지체들이 막 곯아 들어가게 됩니다.
더 실감나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충만합니다. 어느 날 친구가 와서 이간질을 합니다. 야, 아무개 지체 있지 너 엄청 갈구더라. 그의 말에 의하면 너는 인간도 아니더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은혜가 충만할 때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마음이 상해서 가서 따져봐.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가서 조용히 취침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낮에 그 지체를 미워했던 마음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아니구나. 그 지체가 뭔가 말을 잘못 옮겼겠지. 그렇지 않을 것이야. 스스로 마음에 위로를 하고 마음속으로 용서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용서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한 죄인인 나를 주님이 용서해주셨는데, 이렇게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영혼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면 그 형제가 상처를 내고 갔는데 아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집니다. 야, 어떤 지체 있지. 사실 말이 그렇지, 그 자식 아니냐. 너 엄청 갈구더라. 내가 옆에서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어, 너 상종도 하지 마라. 네가 없을 때 갈구는데 말이 아니더라. 상처를 내고 갔는데 이 사람이 면역력이 없어. 이 속에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까 진짜 옛날에 그와 비슷한 기미가 보였어, 나쁜 자식, 그러면서 막 이글거리기 시작합니다. 또 만나서 자기는 듣지도 못했으면서 아무개가 그러는데 너도 갈군다고 그러더라. 그 사람도 면역력이 없어. 그러면 이게 함께 곪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비유를 하자면 여기에 좁쌀만큼 곪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커져서 입을 벌려서 거울을 보면 입이 거의 밤톨만 하게 곪은 자국이 밤톨만 하게 나타나서 입이 퉁퉁 부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은혜가 충만하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한두 지체가 미끄러져도 모든 다른 지체들이 모두 불쌍하게 여깁니다. 너희들 내 말 들어봐. 너희 여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어디에 있는 애들이 엄청나게 갈구더라, 그러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은혜가 충만하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짐승 같은 인간이 여기 있으니 저런 짐승을 섬기려고 부름을 받았지. 주여!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저도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해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것들이 교회 전체에 이것들이 연결이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개인적인 신앙생활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유혹을 받거나 죄에 빠질 때마다 교회 전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잘못되는 이 일이 교회 전체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것은 성도의 사명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셔서 예수의 몸에 접붙이신 것은 뭐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처럼 그렇게 행동하면 정 반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함을 점점 해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그 자체가 공동체가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항상 여러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있을 때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지체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C. 세상에 대해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해서 이런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선취적으로 맛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를 교회생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것, 자신이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생활 자체가 아픔도 있고 괴로움도 왜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속에서 하늘기쁨을 늘 맛보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위로,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교제, 그 연합, 용납, 사랑, 용서, 위로, 자비, 은총, 격려, 올바르게 됨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이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해지지 못할 때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혹시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자기가 이 교회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인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행복하게 하면서 살아가는데 작은 만큼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고 많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이는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으면 막 싸웁니다. 그 순간에는 뭔가 눈꺼풀에 뭔가 씌는가 봅니다. 성도의 본분도 잊어버리고 흉악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려 보내는 그런 싸움만이 아니라 개처럼 싸웁니다. 늘 듣는 이야기만 교회가 갈라져서 같은 예배당에서 여기서 다른 파가 예배를 드리고 이쪽에서 다른 파가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찬송 부르면 저쪽에서 통성기도하고 저쪽에서 말씀전하면 이쪽에서 통성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나도 실제로 봤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세상 법정에 끌고 가서 이 자식 저 자식 하면서 싸우고 그러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교회가 이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고 싶으면 세상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해서 한번 훼손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상은 사람들에게 잘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제일 복음을 전하기 힘든 사람이 불신자나 이교도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다가 질린 사람이나 가까이에서 교회에 질리는 광경을 경험한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 믿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은 그 모습 때문에 상처받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오히려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이 온 세상에 함께 구현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 통치 아래 들어오기를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일본이 잘산다고 하지만 우리도 앞으로 잘 살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가 많이 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잘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한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눈떠야 하는가 하면 교회가 찬란한 빛을 가지고 있어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물질생활이 풍성해질수록 인간의 영혼은 아주 곤고하고 비참해집니다. 그 영적인 기갈을 채워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많은 소득을 누리면서 살아도 그런 영적인 기갈이 없는 그런 즐거움의 삶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펼쳐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IV. 교회의 질서와 목양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가 바로 교회 속에서, 교회가 바로 이 세상에 실현될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것에 모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모형으로 이루어진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시고 그리고 질서 아래서 특별히 목양을 받게 하심으로서 이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그 도덕적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면서 이 공동체 전체가 행복해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화현상을 보면 종교현상이라기보다는 문화현상으로 많이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뭔가 현대인의 지친 심신을 교회에 와서까지 막 회개하라고 닦달을 하고 파헤쳐서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교회에 왔을 때라도 편안하게 위로를 받게 해주고 소망을 갖게 해주고 그래서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현대의 기독교 신앙의 한 흐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마당 같은 토크쇼 분위기 같다고나 할까요. 뭔가 사람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런 것들이 미국과 한국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곤고하면 곤고할수록 표피적인 문제를 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지만 그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속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화장품을 발라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될 것이여. 염려하지 마.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배를 갈라야합니다.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뿌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것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말씀으로 하는 것,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신 진리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자기를 치료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께 합치시킵니다. 합치시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A. 목양하는 사람을 세우심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목양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시는 가운데 특별히 이 질서 자체가 사람을 통제하고 계획하고 억압하기 위한 질서가 아니라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성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양육적인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목양의 질서가 이 모든 질서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1. 영혼을 돌봄
그 목회자는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잘 돌보는 그것이 목회자의 하는 일입니다. 그의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그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목회자는 여러분들과 똑같은 형제로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그 일은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과는 틀린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러분과 한 형제이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의 영혼을 주님을 대신해서 직접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점에서 또 여러분들의 형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자에게는 이런 이중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 형제들 이해를 해주십시오. 이렇게 밖에 못 살아도 하나님이 이해를 해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하는 제사장의 마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명백한 음성을 전달해주어야 하는 고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처럼 여러분들을 이해해달라고 여러분들의 모든 잘못을 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지만 어떤 때는 전혀 여러분의 편이 아닌 것처럼 자기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죄를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고 바르게 하는 그 일을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관계가 끊어져도 좋은 사람인 것처럼 아주 아프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고뇌는 여러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고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영혼을 돌보는 이 사명을 목회자에게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 일부 나누어주어서 그래서 성도들을 섬기게 하셨지만그것은 보조적인 역할들이고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사명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위탁하신 고유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린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사도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씀입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는 혼자 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성도들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영혼을 돌보는 책임은 그러나 사도 베드로에게 위탁된 명령이었습니다. 똑같은 구도 속에서 우리들이 이 목양의 정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모든 고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런 목양의 질서 안에 있는 목회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저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사람인 것처럼, 계산을 하고 셈해야 되는 사람인 것처럼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깨어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성경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목회자의 본분이고 바로 그 모습입니다. 만약에 목회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직무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성도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실 것입니다.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인 저에게 그럼 당신은 우리를 향한 최대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딱 두 가지 밖에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회심하고 그리고 회심했지만 다시 미끄러져 다시 회심하고 회심했다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계속 사랑하며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만약에 가장 중요한 목회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그 일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질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자연적인 성의를 따라서 사람들을 좋게 대우해주는 그 일이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아서 변화되지 않는 그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많은 직분을 주어서 높이 띄어주면 그들에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 공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정말로 영적인 일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재능과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가 많이 모이는 것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안일한 삶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교회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이 세상을 향해 선교와 섬김 모든 봉사로서 그 도덕적인 통치를 구현해가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여름성경학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도 있었고 저의 인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마음속으로 몇 년 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교회 학교를 저렇게 밖에 못할까? 나는 옛날에 저렇게 안 했는데 등등의 마음, 심지어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오면 좀 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마음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저 사람들을 참으면서 기대하자. 그리고 한두 달 전서부터 제가 정말 기도하면서 교역자들에게 채근했습니다. 그리고 원리와 방법을 상세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예전에 알려주었지만 이번에는 더 간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회자들이 여름성경 학교를 앞두고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고 뭐 등등의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보니까 정말로 아이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이 고무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죽을 때 그때 영혼들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계를 내보니까 5-6학년들의 경우에는 20%밖에 회심한 아이들밖에 없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경학교를 통해서 아마 40%가 올라갔을 것이라고 보는데 정확한 것은 아닌데. 그러고 나서 우리들이 많이 기뻐했는데 제가 마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 여름방학이 지나가고 나면 이제 저 아이들은 중등부 올라가는데 중등부 올라가면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회심할 가능성은 줄어드는데 올라갈수록 회심의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70살이 된 할아버지가 펑펑 울면서 회심하면서 예수 믿은 것을 최근에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청년들에게는 많이 일어납니다. 주일학교는 더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네가 직접 한번 해봐라. 그래서 8월 달에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회심을 위한 신앙사경회가 열립니다. 1-6학년까지, 함께 모아놓고 그리고 모든 자모들은 금식하고 기도시키고, 저도 한지가 오래되어서 감각은 없지만 그러나 한번 힘주시는 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 되어도 해야지 됩니다. 왜 그게 우리의 사명이니까. 그 아이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 아이들이 회심한 프로테지가 지금 장년들과 청년들이 회심한 프로테지보다 많아야지 이 열린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나이 든 사람들은 한사람씩 죽어 가는데 애들 시대는 더 잘 사는 시대가 될 것인데 더 강력한 신앙이 필요할 것이니까 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관심은 거기에 쏠립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바로 그런 임무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태도는 이 세상의 빛을 통해서도 바뀔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성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대항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런 일들은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고 이 본성은 오직 진리와 성령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바꾸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 일은 너무 막중한 일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목회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절실하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매우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동의안할지 모르지만 나는 한때는 목회하고 5-6년이 지난 다음에 나는 목회에 달란트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상당한 기간동안 믿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짜 오늘 눈을 감아도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정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명이기 때문에 하지 나에게 달란트가 있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우리 아들이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그러는데 나는 마음속으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길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갈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 5년 동안 200명을 신학교에서 내보냈습니다. 가지 마라. 이 길은 너희들이 가는 길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안 갈수 있는 사람은 안 가야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도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신학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다시 생각하십시오. 웬만하면 가지 마십시오. 인간이 태어나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대상이 여러분 자신의 영혼입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존경할만해야 순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우리들이 조심해야지 될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너희의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개인의 임무를 염두에 두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가 목회자를 향한 깊은 존중심과 복종의 정신은 이게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이것이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지금 이런 전통이 카톨릭에는 아직까지 상당부분 남아있습니다. 거기서는 사제가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할 때 아니요. 라고 하는 것이 금지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종이 어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기초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워놓으신 질서에 대한 복종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아마 한국역사 가운데 요즘 노무현 대통령처럼 국민에 의해서 떡이 되도록 씹힌 대통령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분이 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언사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볍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이렇게 국민으로서 불안합니다. 왜 저렇게 경솔할까.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도 너무합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으로서 기본적인 존경심이 남아있습니다. 왜? 법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무현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청와대 유리창 깨고 들어가서 대통령 멱살을 잡으면 감옥에 들어갑니다. 법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가 국법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도가 지금 어떤 존경할만한 임무를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 정도라면 너희들이 순종해야지 된다. 그 사람은 진짜 영혼을 자기 영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복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이야기하다가 하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있는데 그 사람들의 본분은 너희들의 영혼을 위해서 경성하는 자들이다. 고뇌를 많이 하는 자들이다. 순종해라.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보면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림같이 잘 나타난 그 사건이 바로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사울은 정신병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번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자를 내가 어떻게 손댈 수 있겠는가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목회자인 그는 여러분보다 나이가 어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경험이 일천할 수 있고 너무 빨리 신학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세상물정을 몰라서 판단력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공부에 자신을 바치지 못하고 바로 신학에 헌신했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지성적으로 모자랄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처럼 오래도록 말씀을 들으며 목양을 받기도 전에 타오르는 열정으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에 성화가 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함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모자라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복종해야지 됩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목양의 질서에서의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입니다.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어도 청와대 담장을 깨트려서 유리창을 안 깨트리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기보다는 국가의 질서에 대한 존경심 때문입니다. 똑같이 교회의 질서도 바로 그런 질서 안에서 존중해지도록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이 세워놓으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존경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미숙하고 모자라고 어떤 때는 인격적으로도 정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존중하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그 역시 한 사람의 구도자로서 지금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아직은 성화가 덜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의 일원에 대해서 우리 중 누구도 너는 어떻게 성화가 느리냐고 채찍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요, 도덕적인 통치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느 목회자가 있는데 나쁘다. 아무리 성도가 기다려주어도 변화가 안 된다. 그리고 영혼을 향한 뜨거운 눈물과 사랑이 없다. 진리는커녕 세상 이야기만 즐겨한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데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손을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깨트리셔서 변화시키시거나 돌이킬 기회를 주시거나 그래도 대책이 없으면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데려가십니다. 생명을 거두어가십니다. 죽은 모든 목회자가 그렇게 죽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다보다 못해 교회를 보호하시려고 그런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 목양의 질서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에 대해서 반기를 듭니다. 심지어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규합하고 그리고 부축이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무리를 형성하기까지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아주 의도적인 상처를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많은 소송과 분쟁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내가 희생해야지, 한사람만 그렇게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대적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의 광경을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이 선교가 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야지 될 것은 그는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과는 틀린 사람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들의 한 형제였던 사람입니다. 저도 한때는 집사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교회의 청년이었습니다. 더 이전에는 주일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셔서 그래서 목회사역의 길로 접어들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길이 이렇게 어려운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일을 위해서 형제들과는 구별되는 부르심으로 부르셨지만 그러나 그는 아주 연약한 한 형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하면서 뭐가 힘듭니까? 헌금하는 것 힘드십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는 게 너무 벅차십니까? 그래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와서 청소하는 게 힘드십니까? 구역예배를 인도하는 게 힘드십니까? 아닙니다. 힘든 것은 종류는 많아 보이지만 마지막에 하나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게 힘들어서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님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쁨과 은혜의 샘물이 늘 넘칩니다. 뭐가 힘이 들었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들었습니까? 즐거웠습니다. 영혼을 섬기는 게 즐거웠습니까? 행복했습니다. 물질을 바치는 것이 아까웠습니까? 보람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것이 짜증났습니까?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들어서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고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곤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게 해주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목회자는 뭐가 힘들까요? 힘든 것 많습니다. 저는 교회를 경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인들 중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나도 직장생활을 해봤지만 그 무게가 목회자의 무게만큼은 안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자기만 구겨지면 됩니다. 이것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현장입니다.
내 속내를 한번 이야기해볼까요? 한 5년 전서부터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1년만 여러분하고 헤어지는 것, 나도 모든 일에 해방되어서 한번 하나님과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관광, 그런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깊은 숲 속이면 됩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철따라 바람이 있는 곳, 한적하고 새벽이면 일어나면 기도하고 싶고 내 영혼만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만 생각하고 탐구하고 저녁에는 별빛이 쏟아지는 숲 속에서 기도하는 게 평생소원입니다. 직감적으로 그런 호강하는 날이 살아있는 날 동안 안 올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면 돈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직업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물질적으로 가장 고통을 받아본 것은 목회를 하면서였습니다. 살인적으로 밀려드는 많은 일, 어느 날은 세수를 오후 4시에 겨우 세수를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짓는 일, 실족한 성도를 위로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서 보따리를 싸는 교인들을 뒤에서 바라보는 목회자의 마음, 모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이 길을 가지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려워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라면 주님을 사랑하는 일 정도는 이미 마스터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을까요. 말이 안 됩니다.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들이 목회자를 기다려주는데 너무 인색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하나도 잘못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목회자가 경건해, 기도를 많이 해. 그러면 설교는 아무렇게나 해도 용서해줄 수 있겠습니까? 설교도 불꽃이 튀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하면 은혜가 쏟아지면 나머지는 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산속에서 조용히 하나님만 묵상하다가 주일날 와서 폭탄 하나씩 떨어트리고 가면 다 용서해줄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를 다 잘해서 하늘의 사람 같아도 교회일도 잘 처리해야지 됩니다. 열개를 잘 처리하다 하나를 잘못해도 흔들리면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다 받습니다.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의심받는 눈초리 아래 있게 됩니다. 자주 아파하는 목회자도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달 아프면 죽도 써오고 병원도 알아본다고 그러지만 일년을 누우면 얼마주면 나가실까. 후임은 누가 올까? 계산하기 시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우울하고 진지한 목회자는 싫습니다. 강단에 오면 언제나 유쾌하고 제기발랄해서 성도들과 함께 웃고 친구처럼 어우릴 수 있는 시골아저씨 같은 목회자를 원합니다. 그런 제기발랄한 시간이 끝나고 나면 진지하게 피를 토하며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천사들 중에 찾아보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많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영적으로 계속 진부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서 성도들이 볼 때 늘 경탄할 수 있으리만치 순결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자기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 그럴 때가 많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솔직히 말합니다. 그때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끝없이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일이면 삼천 명의 성도들이 예배당에 들끓다가 쫙 나갑니다. 그래서 밤중에 마당에 한복판에 혼자 서있습니다. 그때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이런 목양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하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하게 하지 마라. 그 자체가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만약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근심하기 때문에 해야 할 경우가 못하는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천사에게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해야 되겠다는 분명한 의무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마음이 산란하고 혼돈스럽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로 그렇게 회심과 회심의 보증에 자기를 바치는 이런 집중적인 사역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사도가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목양의 질서 안에 있는 목회자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연약한 인간
처음에는 목회는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매우 뛰어나서 나는 매일 그리고 아침마다 밤마다 나는 이 사역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자기 고백 속에서 삽니다. 정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나는 적합하다. 달란트라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도달하는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런 연약한 인간이 목회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에게 순종하도록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역설적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순종해야지 됩니다.
B. 양들로 복종케 하심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성도를 끌 수 없는데 성도들이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라는 사실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질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까리따스로 이 질서에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연약한 목회자는 그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질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무에 대한 명확한 인식하에서 하나님을 보고 그 질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목회자가 연약할 때 그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연약한 자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정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자리인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여기에 서 있다면 훨씬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성도와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짐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고백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매일매일 생각합니다. 난 적합하지 않다.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런 목회자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저처럼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목회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교역자들, 심지어는 이제 신학을 공부하면서 미래에 목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 사람들에게는 순종하라. 이것이 너무 특별한 길이고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중대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토요일 날 마음이 깊이 상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교회에 나왔지만 마음을 하나님께 안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그런 자유가 허락이 안 됩니다. 토요일은 마음이 많이 상한 일이 있고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일이 있어도 주일날 설교하러 올라올 때는 그를 다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래야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고치라고 그러면 고치겠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바로 바로 고치도록 요구하시기에 그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죽음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탕자는 오랜 세월 동안 다시 돌아와서 감격적인 기쁨을 맛보았지만 목회자는 그런 탕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 같은 감격적인 기쁨을 스스로 맛보아야 합니다. 타락하지도 않았는데 그 타락의 씨를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보면서 자기 깨어짐으로 나가야 합니다. 목회자가 일년 동안 타락의 길을 걷다가 돌아올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년 후에 내가 타락해서 돌아와서 감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겠다고 그럴 때 기다려줄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서 그런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씨들을 발견하면서 실제로는 탕자와 같은 길을 안 갔는데도 그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요소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아파하고 자기 깨어진 길을 걸어가야지 됩니다.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모든 일들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위임을 하겠습니까? 그 모든 짐을 다 짊어지면서 영적인 진보는 진보대로 이루어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트려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는 일들은 매일매일 그 영혼 안에서 쇄신되어서 일어나야지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두 번째는 성도들이 압니다. 설교에 은혜를 안 받습니다. 교인들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설교에서 일단 피 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성도들은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검이 짓밟히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물으셨습니다. 질문하고 싶으신 내용이 얼마나 많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물으신 내용이 단 한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루살렘 교회를 사랑하느냐고 안 물어보시고 양떼를 사랑하는가 하고 물어보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현재형으로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게 최고의 숙제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상처를 받아도 혈기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에 씨름하면서 마음에서 씻어야 합니다. 안 되면 그 다음날, 안 되면 그 다음주, 안되면 그 다음달, 그래서 털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사역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주십니다.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만약에 차별대우하는 것 같은 그런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길을 오늘날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어떤 때는 아주 명백하게 그분이 나를 편애하신다고 느낄 정도로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 혈기를 꺾고 조용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음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이 불처럼 타오를 때 그분 앞에 나아가서 조용히 예수님의 고난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혈기 방자한 청년이었습니다. 주님이 목회의 길에서 수없이 가슴앓이를 하게 하면서 낮추고 또 낮추고 하나님은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하시면서 가혹할 정도로 깎으신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왔는데 지금 그 모습이 여러분 앞에 서있는 이정도의 모습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했다. 설교에 대해서 어떻다고 그럴 때 나는 조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은혜 받은 성도들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고 미끄러진 사람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성도는 목회자에게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해야 할 상대는 아닙니다.
C.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길을 걸어오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정말 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었겠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가슴에 늘 새겨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사실은 목회 안에서만 일어나야 할 마음이 아니라 성도 안에서 일어나야 할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의 목자로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목회자를 사용하셔서 나를 이끄시기는 하지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목회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학식이 있고 능란하게 설교하고 그리고 매일같이 뛰어난 지혜로 그렇게 교회를 다스린다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 모든 자원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교회의 교만으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목회자에게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걸려 넘어지게 하시고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셔서 성도들을 의지하지 못하게끔 만드십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그 기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섬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이 교회가 대충대충 꾸려가는 집단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 도덕적인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정말 온전한 예수의 몸을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것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성도들이 교회에 나왔는데 모두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보기에 흉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너는 그 목회자를 붙들고 있는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좋은 말로 너희들에게 설교를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교자를 의지하는가. 네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설교자를 의지하면 내가 설교자에게 반드시 너를 실망시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까 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탁월한 목마름, 지혜를 모두 짜내어서 좋은 체계를 갖춥니다. 질서를 잘 다듬고 훌륭한 사람을 세우고 온갖 힘을 다해서 교육을 하고 온 마음과 지혜를 동원해서 많이 배워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듭니다. 그 일이 왜 안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간섭하실 때 일어나셨던 고기를 잡는 기적들도 고기가 배위에 뛰어오른 것이 아니라 그물을 가지고 잡았습니다. 그 일이 왜 안 필요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일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가 나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말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갈망하고 예배에 나오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다수는 나는 그런 갈망이 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내가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런 갈망이 크기만큼 묻고 싶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흉물스러운 교회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온전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들을 연단하고 우리를 씻기시고 우리를 고치시고 설교에 능력이 나타나고 교인들이 은혜 가운데 있고 마음에 고통이 없는 날, 목회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오랫동안 연단을 받아서 강해졌기 때문에 이제껏 당해보지 않았던 그런 연단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만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런 원리들이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무엇인가 온전하게 못 해낼 때 그래서 불안하고 무엇인가 자기를 실망시키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의지의 기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하지 않구나.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안전하지 않구나. 그러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제일 미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좋은 교회에 왔다고 혁대를 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혁대를 푸는 순간에 자기 때문에 나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놓으시고 교회를 영원히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주일학교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상당수가 아직 많이 회심을 안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5-60%나 회심했다고 보면 아마 높은 비율일 것입니다. 나머지는 완전히 생짜배기들입니다. 왜 회심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 교회도 시스템을 갖출 만큼 갖추었습니다. 교역자들도 세상에 내놓으라하면 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고 다 석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가도 그만한 사람들 못 구합니다. 그럼 뭐하겠습니까, 난 이것을 갈망으로 봅니다. 진짜 우리가 사랑하는 세대의 회심을 향해서 내 영혼인 것처럼 우리의 미래가 저들에게 있는 것처럼 그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식, 내 새끼들을 향해서 내가 이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언젠가는 하겠지. 그러다가 나중에 다 커서 불신자매를 데리고 와서 예식장에서 결혼하겠다고 그러고 목사의 주례도 필요 없다고 그러고 우리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고 그러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금년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 하며 오늘 저에게 회심의 기회를 주십시오. 이런 눈물이 만약 우리 부모들에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 교사들에게 있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그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갈망, 손으로 지혜를 발휘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도 매순간 그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온전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갈멜산 위에 쌓아올린 장작에 불과합니다. 불을 내리셔서 타오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으십니다. 그 고백이 정말 우리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 한해 수없이 질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아이가 커가면서 얼마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예전에는 말씀에 은혜받기 전에는 이 교회에서 등록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지붕이 예뻐서, 마당이 예뻐서 등록하는 사람들까지 나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등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남아 있는 우리들이 져야 할 그 십자가, 그것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전적이 은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목회자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데, 나도 신뢰하지 않는 나를 여러분들이 나를 신뢰하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야 합니다. 기쁨의 눈물, 그리고 갈망의 눈물, 그리고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이렇게 모아놓으셨고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주님을 만나고 그러지만 사실 이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붙들어주시도록 여러분들의 교역자를 그렇게 붙들어주시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갈망하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눈에 우리 목회자를 향한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부으실 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나 방법위에 부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그 위에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부으십니다. 오늘 설교하는 이순간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더 많이 하나님께 바쳤더라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았을까요? 곤고한 영혼으로 미끄러진 수많은 지체들은 그 영혼들이 살아났을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고 있는 영혼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리스도의 창고에 추수되었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섬김과 그리고 의식이 없는 목양의 관계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큰 갈등으로 변모되어가는 것을 보고 그리고 온전하게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우리 속에서 현저히 감퇴했을 때 우리 안에서 까리따스의 사랑도 함께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목회자를 그 목양의 질서 안에서 주님이 세우신 목양의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너는 나를 의지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아가는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온전함으로 나아가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12주 동안 들었던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인 성도로 부르신 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 공동생활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공동생활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간 후에도 우리의 공동생활을 계속될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불멸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니 그 성도의 교제도 불멸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성화된 정도를 측정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구체화하고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입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어두움 가운데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택하심과 거룩하심 안에서 피 뿌림을 얻고 순종함을 얻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고 아버지의 도덕적인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해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죽음 속에서 자기는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깨트려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를 희생함으로 지체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과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안팎에 우리의 많은 대적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부패한 욕망과 그리고 하늘과 그리고 이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의 공격이 있고 눈만 뜨면 만나는 이 죄악 된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길과 가치로 돌아가서 행복을 찾으라고 유혹합니다. 사면에 적들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들이 다 못 이룬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에 그 결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통치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희생이신 자기 죽으심 앞에서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 교회에 발을 딛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며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힘든 세월들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 진리의 빛으로 멀어진 삶이 가져다준 결과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이 주님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어두움과 흑암에 매어있던 우리 모든 사슬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죄와 불의에 얽매어있던 우리를 해방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전미문에서 일어난 앉은뱅이가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 모든 죄와 미움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밀려드는 감격으로 우리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이렇게 큰데 내가 주님께 무엇을 해드려야지 되겠습니까? 이 교회를 섬겨라.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지체들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로 씻김 받은 형제들입니다.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차지 않고 여전히 허물과 죄가 많고 삶의 태도를 고치지 못하지만 불멸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그 형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향한 사랑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됩니다. 신앙은 바로 그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안에서 그 불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는 것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해를 당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이루어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공동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는 온전히 구현될 것이고 그 속에서 성도들은 행복해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받을 그 영광스러운 기업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과 수고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이 그 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도의 공동생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