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질의응답)
녹취자 : 오희열
질문 1) 열린교회와 김남준 목사의 목회와 관련된 질문이라고 했는데, 깊이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데 주력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반 대중적인 성도들이 즐겨하는 메시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 하신 분 누구십니까? 마이크를 가지고 질문을 해 주십시오.
목사님께서는 깊이 있는 진리를 전하시는 데에 주력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대중적인 성도들이 즐겨하는 메시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목사님께서 도와주시는 접근법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그렇게 해서 깊이 있는 설교가 성도들의 마음에 들어갔을 때 실제적인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목사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답변 1) 나를 청교도적인 것으로 이미지가 많이 굳혀져 있는데 청교도는 내가 영향을 받은 중요한 신학의 배경가운데 하나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 발전을 하니까, 30대 때에 청교도에 깊은 영향을 받고 칼빈, 칼빈의 영향도 받았었지만 이후에 조나단 에드워즈나 존 오웬, 어거스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의 영향이 30대, 40대, 50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청교도와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청교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의 설교나 신학의 폭이 훨씬 넓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중적이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중들의 입맛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설교자가 다 맞춰주는 것이 불가능하고 성도들이 무엇을 듣고 깨달아야할지는 성도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요리사 같은 목사가 될 것이냐, 의사 같은 목사가 될 것이냐, 그리고 나는 청교도들이 전했던 방식대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의 방식대로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구조가 복잡하거나 딱딱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사상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하는 것이고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 되고 진리가 그 사람에게 심겨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를 통해서, 가르침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가장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청교도라는 점에서 우리들이 본받을 점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일곱 명이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여기 나오는 어린이를 포함해서 오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두 내 설교를 좋아하고 열광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리고 내 책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아까 소개받을 때 부교역자 분들의 4대 보험과 세금을 다 내신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렇게 하시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답변 2)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법적으로는 목회자들은 아직 근로자로 분류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소득세 신고를 하고 세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되었습니다. 한 10년 내지12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 한 분이, 우리교회가 굉장히 많은 사례금을 주지는 않지만 그때에는 그래도 서울에서 꽤 많이 사례금을 주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액수를 여기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 부목사님의 자녀들이 기초생활수급자의 자격으로 어린이집을 무료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물었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신이 이만큼 소득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 너희가 그 혜택을 받음으로서 다른 사람은 그만큼 뒤로 밀려나는 것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세금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세무서에서는 그걸 왜 내느냐고 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공무원들이 세무공무원들입니다. 아무튼 그래도 싫다고 하고 낸다고 하고 냈습니다. 첫해에 교역자들에게서 걷은 세금이 8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월급이 깎이게 되었고 그래서 그만큼 월급을 올려주었습니다. 세금이 아니었으면 더 많았을 테니까 어쨌든 깎인 것은 깎인 것입니다. 그 대신 좋은 것이, 전에는 신용카드를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해도 세무서에 소득신고가 되지를 않으니까 불안해서 카드를 만들어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에서 교역자로 석 달만 월급을 받으면 부목사님들의 경우에 약 8천만 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줍니다. 그런 혜택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신 다 돈을 내고 다녀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택분양에서도 후순위로 밀립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그게 정직한 공의이다.” 내가 솔선수범해서 세금을 내는데 많이 나왔습니다.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쁘게 그렇게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저런 카메라 하나를 사도 완벽하게 부가세를 다 냅니다. 그래서 부가세를 낸 영수증이 아니면 우리 교회에서는 재정부에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르간 하나를 2억5천만 원을 주고 샀으면 부가세 2천5백만 원을 따로 내야하는데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탈세입니다. 부가가치세는 마지막에 재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는 돈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담임목사이지만 우리교회는 명확하게, “No list, No payment.” 영수증이 없으면 지출도 없다. 그 영수증이 관인영수증이어야 합니다. 세무서에서 인정해주는 영수증 말입니다. 문방구에서 거래해주는 영수증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목회를 하면서 현금을 만진 적도 없고 만질 일도 없습니다. 만질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쓰고 영수증을 제출하면 예산에 따라서 알맞은 용도에 썼으면 결재해서 지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외부감사를 매년 받고 있습니다. 주식회사처럼 그런 점에서 잘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본받아야 하고, 복사판을 쓰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질문 3) 목회도 하시면서 또 많은 책들을 쓰시고 저술을 하시고 강의를 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구시간까지 있어야 하니까. 그런 입장에서 목사님의 시간관리가 어떻게 되시는지, 그리고 설교준비나 그런 것은 어떻게 하시는지, 마지막으로 사역자를 매년 뽑으실 때는 어떤 기준으로 뽑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3) 우선 첫째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어차피 24시간은 똑같습니다. 나는 잠을 많이 자서 가책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수면을 오래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4시간에서 아주 길면 5, 6시간 정도 잡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잠에서 깨도 계속 누워 있어야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60세라면 30세를 살고 반을 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5분의 3 정도 산 것입니다. 뒤로 갈수록 삶의 질이 안 좋아집니다. 건강의 질이 안 좋아집니다. 그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인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KTX를 타고 오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열심히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서도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구나 하고 자세히 보니까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니까 대합실에서부터 계속 한 것입니다. 좋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학교 다닐 때는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어서 책을 사지 못했는데, 지금은 책은 많지만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눈물이 납니다. 그렇지만 노력을 할 뿐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쓰지 않고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맡깁니다. 그래서 나는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구분이 뚜렷합니다. 어느 바운더리까지는 내가 기억하고 나머지는 남에게 기억을 다 일임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사역자를 어떤 기준으로 쓴고 했는데 내가 기본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인가, 말씀이 심겨진 사람인가, 신학적으로 정리가 잘 된 사람인가, 그리고 열린교회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은 사람인가, 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그리고 신학적으로 깊이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고, 탁월한 재능이나 자기 부서를 부흥시킨 과거의 경력 같은 것은 저는 보질 않습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새로운 교역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턴십을 우리가 가을에도 개교를 하는데 여러분은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신대원부터 들어올 자격이 주어집니다. 들어오면 여기서 한 학기 공부하고, 그러고 나서 나중에 레지던트십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레지던트십에 들어오면 우리교회에서 교역자로 대우를 받으면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인턴십 영상을 한 번 틀어주십시오. 그게 영어밖에 없을 텐데, 지금 없으면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질문 4) 목사님 최근에 있었던 이벤트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답변 4) 지난 27일인가에 강남에 있는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한 35명 정도 기자들이 모여서 제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아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시면 거기에 대한 것들이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몇 가지 이벤트가 있었는데 첫째는 5월 8일 월요일에 여기 서재로 소풍을 옵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인터넷에 신청한 사람들 중에 30명을 뽑아서 나와 대화의 시간을 갖고 두 번째 인터뷰는 기독교작가 최초로 개인 앱이 올해 5월에 출시가 됩니다. 그 인트로덕션을 인터넷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앱에 들어가면 나의 작품에 대한 모든 해설이 나오고 e북을 사서 거기에 모을 수도 있고 검색도 되서 예를 들면 “은혜가 무엇인가?”를 치면 내가 쓴 사전과 연결이 됩니다. 잘 되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서 출판사에서 개발했습니다. 세 번째 이벤트는 유럽종교개혁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신문에 광고가 나면 서평, 독후감을 써서 보내고 그 보낸 것 중에서 아주 성의 없는 것을 빼고 나머지 것을 놓고 추첨을 해서 열 명을 뽑습니다. 다 데려가려면 수백 명을 데려가야 하니까 출판사가 거덜 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7박8일로 종교개혁, 프랑스, 독일, 스위스 3개 나라를 여행하면서 제가 직접해설을 해서 종교개혁 투어를 하게 됩니다. 아마 11월 경에 당첨자가 발표될 것 같고 그 사람들이 내년 5월이나 6월 사이에 여행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됐습니까?
자, 그럼 아까 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레지던트십 영상을 보겠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지만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강의)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신학”에 대해서 잠깐 강의를 하겠습니다. 저쪽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크게 저런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올바른 신학함”, 지식과 사랑이 결합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하나는 자기 부족을 알기 때문에, 두 번째는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별이 빛나던 밤에”. 이렇게 진행됩니다.
이제 “목회의 소명”은, 소명의 체험, 소명의 유지인데, 소명의 체험은 한 순간에 오지만 소명의 유지는 지속적인 성화 속에서 그 소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올바른 신학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 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것이 신학의 목표인데, 하나님은 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인간사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지, 이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이어어야 합니다. 이것을 “심미적 능력”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거듭나기 전에는 세상이 아름답다가 주님을 만나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존 칼빈이 자기의 기독교강요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Cor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기꺼이, 진심으로” 경건과 학문을 추구하는데 그 두 개가 결합된 것이 올바른 신학함 이라는 것입니다.
히스베르투스 피치우스라는 화란의 휘트리스 대학의 17세기의 교수였고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네덜란드의 제2의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고 신앙의 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자.” 이런 것입니다.
이런 엄격주의는 하나님이 엄격하게 당신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국 옥스포드 홀리클럽에서 일으켰던 운동을 “Methodist”라고 하는데, 이것은 “Method”라는 말에서 옵니다. 삶의 방식이 구별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들의 운동에 주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게 할까?”한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 존 웨슬레, 찰스 웨슬레 같은 사람들이 옥스포드 홀리클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은 학문적인 지식과 사랑으로 결합된 가운데 목회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위해서 학문적인 지식과 목회의 실천이 같이 움직이면서 이런 지식과 사랑이 회중들에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면서 지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들에게 같이 계승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설교 자체가 신학을 설교하는 것인데, 단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사상을 전파하는 것인데, 설교가 신학과는 상관이 없이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래 설교를 들어도 사람에게 말씀이 심겨지고 기독교 사상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함”이란 지식과 경건, 그리고 목회가 하나가 되어서 목양이 있고 돌봄이 있는 가운데 교회 속에서 이런 신앙이 북돋아지는 것을 우리들이 올바른 신학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음주의라고 할 때, 사람들은 개혁주의 하나만이 복음주의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개혁주의와 함께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미국의 영적각성 운동에 있었던 부흥주의가 같은 뿌리가 되어서 복음주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흥주의가 사실은 바람직하지 못한 유산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개혁주의가 너무 경건이 결핍되고 사변에 빠지는 것을 어느 정도 남겨주었다면 부흥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열광하는 그런 유산들을 남겨준 것입니다.
부흥주의는 이렇게 목회자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이고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것을 가져왔지만 긍정적으로는 새로운 신학에 대한 갈망, 근대선교에의 이바지, 사회개혁에의 공헌이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18세기 말에,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18세기 말에 켄터키 지방에 있었던 부흥운동의 모습입니다.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주장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않아도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기존의 성직의 질서에 도전하고, 하나님께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안 머레이 같은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이들은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하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교육은 못 받았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로 대표가 되었고 그들은 발언할 기회를 훨씬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게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드와이트 리만 무디 같은 사람은 그런 이성보다는 감정,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적인 경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흥주의와 오순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저러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휫필드와 논쟁하는 가운데 주관적인 충동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에드워즈는 그런 것들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해서 둘의 입장이 서로 갈리게 됩니다. 이분은 휫필드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학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지 마스던은 지금은 은퇴하셔서 역사학자이고 신학자인데, “휫필드가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꾸짖었을 때, 그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무시했다. 두 복음전도자는 협력자로 남았지만 함께 사역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라고 그의 책에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입니다. 다른 데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성경이 그 정수입니다. 복음은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 중에 진수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구속사역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역사 속에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이 이 세계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아까 누가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느냐고 했는데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지만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지성과 의지를 구속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이게 됩니다. 소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눈높이로 우리와 같이 소통할 수 있도록 당신을 계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인식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역사부터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 목회자가 아니라 목회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언어와 인격의 삶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나는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설교하거나 말을 할 때, 너무 재미없게 합니다. 누가 영화 한 편만 재미있는 것을 보고와도 그렇게 재미있게 얘기하고 외국에 여행가서 국수 하나만 맛있게 먹고 와도 그렇게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서 자기도 가서 그것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되게 재미없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바라본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저분과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저분은 조지 마스던 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한 두 시간 동안 미국의 강가에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the preaching is logic on fire, the preaching is eloquent reason. 불 붙은 논리이다. Logic on fire. 감동시키는 추론이다. 설교란 신학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을 유지할 때, 마음과 거룩한 의무가 딱 결합이 되어서 소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은혜는 이 두 개를 결합시켜줍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명은 진리를 탐구하고 그 사랑을 전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복음전하는 사람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합니다. 그러면 그 인식한 것 때문에 마음에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호의 정동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애호의 정동, 추한 것을 보면 오혐의 정동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애호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게 계속 반복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게 되면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습니다.
내가 청년부 목회를 할 때 어느 자매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하는데 만원이 생겼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때 만원이면 큰돈이었습니다. 자기의 기도제목이 ‘이 만원을 어떻게 써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였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우연히 생긴 그 적은 액수의 돈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간섭하시는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정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있는 사람은 점점 더 풍성하게 되고 없는 사람은 점점 더 없어집니다.
그래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에 있어서 무한한 위대한 하심이고 도덕에 있어서 무한한 완전하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느냐 하면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느낍니다. 설교자 중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두 번째, 또 선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온전히 그대로 살았고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설교와 삶의 불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주님께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외국에 공부하러 가서 어느 하나를 미친 듯이 공부해서 그 가느다란 것 하나를 깊이 공부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다고 치며 그것이 학계에서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에서 그런 지식은 가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 삶의 지혜,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많이 공부했어도 자기가 읽은 것은 존재하는 책 중에서, 태산 같은 책에서 한 주먹 모래만큼 읽었을 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국립중앙도서관에 1300만 권의 도서가 있답니다. 여러분이 서가에 이 책들을 조용히 앉아서 읽으려면 약 340년 정도 걸립니다. 1년에 500권씩 읽어도 100년 읽어봐야 5만권입니다. 500권을 읽으려면 하루에 1.5권을 읽어야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루에 0.15권을 읽는다면 6일에 한 권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1천년 걸리는 것입니다. 340년은 아주 짧게 잡은 것입니다. 340년 동안에 이 책을 모두 읽어내려면 1년에 150권씩 읽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달에 열두 권이나 열세 권정도 읽어야 하는데 그러면 부지런한 독서가 아닙니까? 부지런한 독서가입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80%가 영어 원서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한 주에 네 권정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340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다 읽었다고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누가 뭘 아느냐고 할 때, 그걸 모른다고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도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자신만만해지면 안 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 나는 아는 것이 없다,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공부를 계속 해야 합니다. 교만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식도 성경진리만큼의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功在不舍. “천리마가 한 번 뛴다고 할지라도 열 걸음을 나갈 수는 없다. 노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미칠 수 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데에 있다.”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마는 천재를 두고 하는 말이고 노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을 얘기합니다. 나는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되고는 싶지만 그러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노마”라고 생각하니까, 천재가 놀 때 놀지 않고, 천재가 잘 때 공부하고, 천재가 딴 생각할 때 집중하고, 일본말로 “반까이(ばんかい)”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천재도 아니면서 계속 남 노는 대로 다 놀고 쉴 때 다 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채, 의미 없이 인생을 흘려보내기 쉬운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백록의 옛날 판인데, 사실 나는 책을 읽느라고 읽었지만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는데 저 사람이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동안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됩니까? 도대체 어거스틴은 누구고 나는 누구기에 이렇게 차별대우를 하십니까?” 6개월 동안을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는데 내 마음에 이런 응답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도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천재가 아닌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러워하지도 않고 저 사람은 하루에 천리를 가고 나는 그냥 부지런히 갈 뿐이다. 죽을 때까지도 저 사람이 쓴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주일에 너무 아파서 설교를 못하고 딱 한 번 설교한 것을 영상으로 돌리고 집에 와서 링거를 맞고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월요일 날은 내가 공부하러 가는 날이라서 공부하러 나오는데 아내가 나에게 제발 가지 말고 쉬라고 했습니다. “당신 공부 많이 했으니까 쉬세요.”, “아니야, 난 아무것도 없어. 여보, 나는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서 그날 쓸 땔감을 캐다가 그날 하루 가족을 위해 불을 피워 살게 하는 광부와 같을 뿐이오. 오늘 가서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그런 날라리 같은 사람이오.”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거룩한 진리를 취급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서가에 보면 5만5천 권의 책들이 있는데 서가에 들어가면 그 책들이 막 소리를 칩니다. “목사님, 나도 좀 읽어주세요!”, “나도 여기 있어요!”, “나도 방금 들어왔어요!” 합니다. 여기에 보면 프레드릭 빌렘 흐로샤이데라는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신약학 교수가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에 보면 흐로샤이데가 많이 인용됩니다. 내 서가에 이 흐로샤이데의 서가에 있다가 온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뒤에 그 소유자의 딱지가 붙어 있는데 흐로샤이데의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니우스의 신학전집’이라는 책인데 그의 서가에서 왔습니다. 그런 책까지 많은 책들이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저 애쓰고 힘써서 할 뿐이지 가끔 좌절을 합니다. 해야 할 공부는 많은데 자꾸 가르쳐야하고 설교해야하고 글을 써야하고, 사실 제일 좋은 시간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시간과 글을 쓰는 시간이 주는 즐거움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이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교회를 섬겨야하니까 나 혼자 조용히 공부할 여건이 자꾸 어려워집니다. 슬프지 않습니까? 은퇴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데 그때는 누가 또 알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오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숙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대한 감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이렇게 대비가 되는데, 영혼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사랑을 하면, 그런 것을 가지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육체가 그러하면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탐미자, 혹은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구도의 정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마다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된다. 진리에 합치시킴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세상 사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의 지식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것, 이것이 신학이 하는 일입니다. 목회란 추루하게 된 것과 창조주가 부여한 본래의 아름다운 것을 구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두 번의 저의 지성적인 개안이 있었는데 30대 중반에는 신학의 모든 분과들이 어떻게 통합을 이루어지는지를 보았고, 40대에는, 30대 때에도 주님을 깊이 만났고, 40대 중후반에도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학문이 어떻게 연관을 이루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 읽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무엇을 읽든지 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광주의 광림기도원, 여기가 수도원인데, 요새는 너무 바빠서 못가지만 예전에는 금요일마다 갔습니다. 거기서 설교 준비를 하고 묵상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했습니다.
좋은 신앙이 중요한데, 은혜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신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고 삶을 부합하게 만들어 행복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으며 다른 사람에게 사랑하도록 권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의존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구도자로 사는 것이 신학함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전도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수학, 법학, 이런 것들 다 공부하며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시 연관 지을 수 있을 때 여러분도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위대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교회, 성경을 알고 교회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경건을 배워가고 이것을 이 세상에 끊임없이 펼치며 사는 것이 결국은 신앙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라.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만물이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하는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구속의 중심자,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속의 여부는 지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세속적인 지식도 성경을 이해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온 세계가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받는 일에 소명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소명 받은 사람들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다 같이 읽음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하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