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7과
녹취자: 김경애
오늘은 제7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오늘 내용은 여러분들이 꼼꼼하게 읽으셔야하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잘 정리하고 계시는 것이 이번 여름수련회의 말씀을 듣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세 가지 이유를 말해 봅시다. 그리고 그중에서 어떤 것들이 신자들이 계승해야 할 것들인지 말해 봅시다.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이유를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우선 첫째로 우리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셔야하는데 죽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지만 죽으실 수 있고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중국어입니다. 중국어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육신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을 이루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이루어서 이런 몸의 형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성육신이라고 번역을 하고 영어로는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원래 Carnation은 ‘까르’ 고기, 살이라는 뜻이고 ‘인’은 고기, 살을 입었다는 의미로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카네이션 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드러나야 되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우리 인간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과 함께 인간이 한 것처럼 똑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아파하고 하는 이 희로애락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예수의 인격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참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림을 그리자면 예수님은 여기 이렇게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보여주시고 싶으셨고 그 다음에 모든 인간들은 아무도 인간답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참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하면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이런 모습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런 참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인간들이 진짜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잊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속죄함.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보여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세 번째 참 사람을 보여줌.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확실한 길이 열렸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청년이었을 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고 되게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왔는데 성경은 너무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왜 하나님을 믿으려고 왔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가?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 아까 이미 설명을 다했지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인간이 죄인이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속함이 있어야합니다. 속해야합니다. 그런데 속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A라는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사람이 받아야할 형벌을 B라는 사람이 대신 갚아주는 것 이것을 우리가 대속이라고 부릅니다. 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학자가 이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대가를 우리가 지불하지 않고 예수가 지불하셨을 뿐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학자의 이야기는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거저 받았다는 것만 너무 강조하지 말고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사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희생의 죽음으로 자신을 바치셨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의 사실을 생각하면 항상 예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인을 속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바로 이렇게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인데 똑같은 뜻입니다. 속죄와 화목제물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면 속죄는 죄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화목이라는 것은 그러한 속죄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불화해진 우리와 하나님과 다시 화목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결되어야하는데 그것이 죄이고 우리 자신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아까 설명했는데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혹은 이것을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자 이런 속성, 혹은 성품과 두 번째는 시행방식입니다. 이것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다고 지나 시간에 가르쳐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존재하시지 않는지 더군다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세상에서 인간과 함께 어울려 사는 그 모든 직접적인 삶과 교훈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야할 인간의 본분을 교회에서 배우도록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 보아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보이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가르쳐주어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죽기 전까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고 사람에 의해서 양육되고 교육받고 성장의 과정을 모두 거치면서 예수님은 참 사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와 관계를 맺고 친구와 이웃과 형제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몸소 다 배우셨습니다. 이것을 순종을 배우는 것이라고 히브리서가 이야기합니다. 순종할 줄을 몰랐는데 배우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정말 인간이 순종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체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있는데 이 인간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기를 기대하시는데 항상 이런 인간이 못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확실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 사람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우리가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은 우리가 본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그렇지만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참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하는지를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목표를 계승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2) 도열과 도애의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살아야할 기쁨의 삶과 슬픔의 삶에 대해서 나누어봅시다.
이것은 질문을 어떻게 유도하느냐하면 우선 이 도라는 것은 우리들이 공자, 맹자 할 때 그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할 때의 길입니다. 이것이 영어 성경에 The Way 라고 나옵니다. 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묘사하셨습니까? 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길은 이렇게 되어있어서 어떤 사람이 이 길은 분명히 누구를 데려가려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길 위에 서있는 사람은 도상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수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그가 믿으라는 대로 믿고, 그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예수님은 정신병자처럼 우리를 아무데나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도 계획하시고 일정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 이것이 마치 길을 따라 인간이 가는 것 같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The Truth 진리라고 부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일리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이 결정적인 절대적인 기준으로써의 진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Life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인간 영혼이 온전히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의 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내 책을 읽고 비평을 했습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중국 철학에서의 도를 혼동한다고 했습니다.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은 그냥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적을 가지고 당신을 믿는 우리들을 어디론가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에서 신앙은 곧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인생의 길과 믿지 않는 사람이 생각하는 인생의 길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길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도가 설명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열(悅)입니다. 이것은 기쁠 열자입니다. 희열, 열락 즉 기쁘다는 뜻입니다. 애(哀)이것은 무엇입니까? 슬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도열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제가 어디서 한번 들었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법열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불법을 깨달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어떤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어떤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도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도를 깨닫고 성경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슬픔은 무엇입니까?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서 오는 기쁨이라면 이 슬픔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보거나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슬픔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좌절과 비탄의 슬픔이 아니라 경건한 기대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경건한 슬픔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교만하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얼마나 크고 넓은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슬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슬픔은 우리를 좌절하고, 낙담시키고,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종류의 슬픔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만들었느냐하면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고 보니까 너무 좋고 멋있습니다. 도열의 기쁨은 예수와 함께하는 기쁨이라면 도애의 슬픔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 그 사랑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슬픔입니다. 이 두 개는 한 인격 안에 항상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넘칠 때 이런 경건한 슬픔도 넘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위로입니까?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그 슬픔을 기쁨으로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세상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기쁨을 보여주고 그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향해 관용하며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도이신 그리스도 성경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길을 이야기합니다. 자, 그래서 도열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도애는 진리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진리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고 도에 관심이 없는 목양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람이 목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냥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참 진리인 도를 올바르게 깨닫고 지금보다 훨씬 더 진리에 부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목표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부터 25년 전이니까 열렬했습니다. 의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데 원고에도 없었는데 오버를 좀 한 것 같습니다. 당신들이 만약에 환자를 그냥 치료만 한다면 어쩌면 당신들이 가장 나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의사들이 뜨악해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뭐냐 하면 그중에는 진짜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잘 치료해서 살려놓으면 이 사회의 악이 얼마나 증폭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썰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핵심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렇게 육신이 연약해서 온 사람들을 육신의 질병만 고치는데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변화되도록 이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힘쓰는 의사들이 되라는 말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끝맺음은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중간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도에 관심이 없는 목양입니다. 목양은 영혼들을 돌보는 것인데 목양을 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영혼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 때문에 기뻐하고 진리 때문에 아파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3) 인간이 존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구원받은 신자들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무도한 자라도 이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들을 교역자가 정리해 준 도표를 통해 명쾌하게 이해합시다. 그리고 이 형상 중 가장 고귀한 기능이 지성이라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봅시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괜히 가서 더듬거리고 망신당하지 마시고 7장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부분을 꼼꼼히 읽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옆에 메모를 해서 가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두 시간 강의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강의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가르쳐주면 여러분들의 머리가 뻐근해지실 것 같아 요약을 한 것입니다. 읽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프린트해서 나누어준다든지 조금 성의 있게 보이려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연필로 그려서 복사해서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 ‘이마고데이’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라틴어로 ‘하나님의’ 라는 뜻이고 ‘이마고’는 영어로 Image라는 뜻입니다.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들이 형상이라고 할 때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는 이런 형상입니다. 이것은 우상 혹은 돈에 찍힌 사람의 모습, 짐승들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할 때 이 형상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것은 그리스 철학에서 질료, 매터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질료는 물질에 속한 것이고 형상은 그 질료를 어떤 사물이 되게 하는 이데아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말로 형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쓰고자 하는 형상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할 때 바로 그 형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을 닮은 정신적인, 영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러면 이런 개념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진전되어 오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레마이우스라는 2세기의 그분은 중세 스콜라주의까지 형상과 모양 그러니까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할 때 이 형상과 모양, 히브리어로 ‘첼렘’과 ‘데무트’ 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단어라고 보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형상은 인간이 이렇게 이치에 맞게끔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구조, 이것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합리성 같은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모양은 아담에게 주신 거룩함의 옷, 이것을 모양이라고 부른다고 해석했습니다.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은 형상은 이성, 자유 같은 지성적인 능력을 포함하는 자연적인 은사,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사람마다 각기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자연적인 특성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특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형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비해서 모양은 ‘원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 없이 아주 의로운 사람으로 아주 순결한 사람으로 창조하셨는데 바로 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처럼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과 함께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셨습니다. 그렇게 형상과 모양을 서로 구별해서 나누어서 형상은 이성, 자유 같은 자연적인 능력, 자연적인 은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인간에게 주어주셨기 때문에 학문, 과학, 문화, 이런 것들이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타락했을 때에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지 이것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타락했어도 학문 같은 것은 계속 발전해갈 수 있었고 인간은 나름대로 그런대로 희망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변의 천재이고 이 사람에게 와서는 좀 더 구체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통들을 종교개혁자들이 개선하는데 그리고 그것을 이성과 지성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가 있는데 인간의 본성적인 자질, 그 다음에 실제적으로 성향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단계인데 불완전합니다.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영화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상태라면 이것은 구원받은 인간의 상태이고 이것은 성화를 거쳐서 인간이 완전하게 구원이 성취된 영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된 형상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로써 덧붙여진 은사의 개념을 더합니다. 그래서 타락과 함께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어버렸고 구속과 함께 초자연적인 은사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입니다.
여기는 참고이고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대표적으로 루터와 칼빈으로 두 양측의 견해를 본 것입니다.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혼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일치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있느냐하면 루터는 하나님의 형상을 ‘원의’라고 보고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칼빈은 창조 시에 분여받은 인간으로서의 순전함이고 전인적인 영역에까지 형상은 확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개혁신학자들이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고 이것이 영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여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떤 배경이 있느냐 하면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너무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만 국한하여 생각하다 보니까 그 다음에는 어떤 결과가 오느냐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학대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육체를 학대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그러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가 심각한 잘못이고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라고 하는 그런 설득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 형상의 개념을 육체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개혁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관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우리의 몸을 질그릇에 표현하고 바로 이 질그릇과 같은 영혼의 거듭난 예수의 생명을 주셨는데 이것을 보배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느냐하면 이렇게 이해해야합니다. 뭐냐 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처럼 크기와 부피와 색깔과 면적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신성모독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닮았다고 할 때 이것은 이런 모양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게끔 생각하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추론하고, 직관하고, 무엇을 깨닫고, 통치하고, 관할하고,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만들고 나를 만드셨는지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구현해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인데 다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인간이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물질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몸 자체가 그런 물질과 공간 속에 묶여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존귀하고 존엄하다는 사실이 육체에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런 인류, 혹은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들까지도 두려움으로 대해야할 그런 마음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개혁자들이 형상의 개념을 인간의 육체에까지 연장시키는 그런 고민의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들은 20세기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억압을 받고 아주 비참한 살육이 일어난 인류의 세기였습니다. 더욱이 1차, 2차 세계대전과 발달한 과학과 병기, 무기의 발달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체주의 국가, 독재 그런 것들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받고 죽어갔습니다. 오늘도 북한에서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에 대한 것을 보다가 왔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함에 북한 동포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보면서 이렇게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육체에까지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사람으로 태어난 한 다른 사람들의 육체를 함부로 짓밟고 억압하고 고통을 주어서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심성이 구겨지고 존엄성이 짓밟히는 그런 일들을 우리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이 이 형상의 교리를 가지고 적용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알고 그를 일체의 존중심을 가지고 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설명이 있으나 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중세 스콜라주의에서는 존재론적인 특성을 강조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Image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존재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파에서는 이렇게 보지 않고 오히려 관계적인 특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관계를 강조하게 됨으로써 그 관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좋았는데 그리고 믿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들을 설명하는 것은 좋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하면 관계를 강조할 때 그것은 타락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 이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끊어졌을 때 어떻게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자, 그래서 마지막에 개혁신학자들이 도달하는 결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그 형상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고 이야기할 때 중세 스콜라주의에서는 존재론적인 특성, 인간 안에 무엇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이 담겨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루터파는 관계를 강조했다면 우리는 그러한 존재론적인 측면과 관계론적인 측면을 동시에 강조해야한다는 것이 개혁신학자들의 중심사상입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을 지냈던 분이고 아마 개신교역사에서 가장 유식한 신학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아주 대단히 정밀한 논증을 펼쳤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시대 때도 벵상 빼레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센트라고도 하는데 벵상이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해석했느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후’ 하고 숨을 불어넣으실 때 마치 커다란 인간의 폐 속에서 작은 고무풍선에 ‘휘’ 하고 불 때에 인간 속에 있었던 숨의 일부가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은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 과정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존재의 일부를 인간에게 부여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을 이 프란시스 튜레틴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본질은 하나님 이외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 존재의 본질 자체의 일부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다. 이것은 프란시스 튜레틴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주 잘 설명해야합니다.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질에 관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이고, 지성과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며 형상적으로 말한다면 형상적으로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매일 예를 드는 것으로 어떤 제빵사가 빵을 만듭니다. 그러면 여기에 밀가루반죽 덩어리가 질료라면 어떤 빵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이 안에 있습니다. 그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에 품고 손끝을 움직이면서 어떤 모양의 빵을 만듭니다. 그리고 어떤 재료를 더 넣을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올곧음과 순전함입니다.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인 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인간의 영혼, 올곧고 순전한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세상 만물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으면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변하신 것처럼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이 불멸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프란시스 튜레틴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설명이고 개혁파 신학의 역사 속에서 가장 잘된 설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다음, 지루해지기 시작하십니까? 계속 짜증나십니까? 그렇지만 이 나이에 어디에서 이런 공부를 하겠습니까? 신학생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꼼꼼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성입니다. 지성은 인간의 영혼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크게 둘로 나눠집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맨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이성입니다. 그 다음에 오성입니다. 이성은 설교시간에 수없이 설명을 해서 지루할 정도입니다. 어려운 내용 같지만 만날 들었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성이 무엇이냐 하면 사물은 전건과 후건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당구를 치십니까? 여기에 있고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큐대를 때리면 여기에 맞고 튕기면서 여기에 맞을 것입니다. 여기에 때리는 큐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움직인 것인데 이것은 전건이고 이것은 후건입니다. 이것이 이것을 때렸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이것은 전건이고 이것은 후건입니다. 때렸더니 이것이 맞고 이쪽으로 튀었습니다. 이것이 맞았다는 사실은 전건이고 이것은 후건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연결, 연결, 연결되는 것입니다. 도미노 놀이 같은 것을 보시면 일주일에 걸쳐서 쓰러지는 것을 물결치듯이 놓고 일주일 동안 땀 흘려서 쌓아놓고 탁 건드립니다. 하나가 넘어지면서 물결치듯이 돌면서 쓰러뜨립니다. 그러한 것들 하나하나가 전건과 후건이 되면서 그 다음 결과를 계속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아는 것이 이성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이야기했는지 언제 이야기했는데 93년도에 자기 자식들에게 이동통신 주식을 천만 원어치를 사놓았더니 20년 후에 20억씩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중에 사놓을 것을 그랬습니다. 그런데 돈 버는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압니다. 직관이 아니라 우리가 안 보이는 전후 관계를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리 아니까 딱 결정하고 하는데 우리는 항상 남들이 하면 뒷북을 치고 ‘아 그것이 그런 것이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하게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태까지 살았고 이것을 추론기능이라고 미루어서 추측하면서 탐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뛰어나면 애들이 공부를 아주 잘합니다. 그래서 이런 능력이 뛰어나기를 자녀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오성은 무엇이냐 하면 직관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논리를 넘어서면서 인식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변증기능이라고도 합니다. 어느 한순간에 이것을 직관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능 중의 하나가 믿음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진리일 경우에는 다행이지만 오늘 3부 예배를 드리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꽤 많으십니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교회에 계속 이단이 나타나면 이단연구가로 취임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면 됩니다. 진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일단 설교시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는 척 하거나 안 듣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이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합니다. 항상 오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진짜입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쪽에서 촬영한 영상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도 이 오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진리를 받아들이는 오성이 아니라 빗나가면서 어디엔가 꽉 꽂히면서 거기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미혹의 영, 혹은 미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의 영혼을 온전하게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이라고 우리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넘어가겠습니다.
자,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아주 유명한 구절이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10세기 때 사람인데 그 사람이 쓴 최초의 교리학 책이 ‘명제집’이라는 것입니다. 그 명제 집에 대해서 주석을 쓰는 것이 그것이 신학자로서 데뷔하거나 능력을 평가받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마다 거의 다 예외 없이 그 명제집에 대한 해설을 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해설을 씁니다.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인간의 누림은 인간의 최상의 활동에 있는데 그 즐거움이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에 따르면 행복은 성향에 있지 않고 활동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최상의 활동은 그의 높은 수준의 능력, 말하자면 가장 고귀한 대상이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지성의 활동에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성의 활동에 있다. 그래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리고 권력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영혼이 한 인간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가 가진 어마어마한 재산과 권력은 무서운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가난하게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도 참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그리고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가족들을 사랑하고 이웃과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 그런 돈 많은 사람들보다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닙니까? 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아우라를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누림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성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진리에 눈을 뜨게 만들고 그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거기서 인간이 겪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지성의 단련 속에서 녹여내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지성 속에서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덕이란 무엇입니까? 신자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덕스러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덕이라는 것은 ‘아레테’라고 부릅니다. 덕입니다 덕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힙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힘이 아주 강하면 어떻습니까? 자기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그 관계를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덕의 힘이 완전히 떨어질 때 어떻게 됩니까? 나에게 요만한 상처를 입히면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라멕이 타락한 후에 라멕이 선언했던 것입니다. ‘요만큼만 나에게 상처를 입히면 죽여 버리겠다.’ 중국의 측천무후가 그랬답니다.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지마라.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하면 나는 너를 영원히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아레테의 힘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 안에 사랑의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을 가지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데 관계를 맺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소매치기나 조폭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 주장하는 관계는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자, 참된 덕에 대한 정의입니다.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참된 덕은 절대자이시고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하는 마음의 성향과 정신의 능력이다.’ 외워야합니다. 동그라미를 쳐 놓으십시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형상을 회복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이렇게 해서 자신도 행복해지는 것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운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많은 문제들에 둘러싸여있고 목회와 영혼을 돌보는 일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섬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하는 것 그것이 전도라면 이것이 바로 목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형상이 회복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5) 바람직한 늙음과 죽음에 대해 가장 나이가 어린 순서대로 자신의 견해를 나누어봅시다. 어린사람들이 부담스럽겠습니다. 그래서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이 권위 없이 먼저 이야기를 하고 나이가 많아서 곧 죽을 사람들은 상당히 권위가 많아서 마지막 최연장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권위 있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5번 문제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자 이번 주 기도제목입니다. 제가 영국을 갔다 돌아오면 수련회가 시작되는데 청년수련회, 장년수련회 그 수련회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도록 두 번째는 지체들이 사모함으로 수련회에 참여하도록 세 번째는 열렬한 기도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수련회, 참여, 기도, 이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