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도의 참된 행복(시65:4) 2010.3.29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언약 백성으로 선택됨(시65:4) 2010.3.30 십자가사경회(새벽) 7
3. 하나님과 친교를 누림(시65:4) 2010.3.31 십자가사경회(새벽) 15
4. 하나님의 집에 있음(시65:4) 2010.3.31 십자가사경회(수요) 24
5. 성도의 참된 만족(시65:4) 2010.4.1 십자가사경회(새벽) 34
6.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시65:4) 2010.4.2 십자가사경회(새벽) 41
7. 복음적 교회의 아름다움의 본질(시65:4) 2010.4.2 십자가사경회(금요) 49
1. 성도의 참된 행복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본문해설
II. 참된 행복
A. ירשׁא의 복
-הכרב의 복보다 영적이고 본질적인 복
B. 성도가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복
1. 하나님 자신이 만물의 행복이심.
2. 행복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3. 올바르게 행복할 수 없는 인간들
C.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짐
1.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2. 구원의 은혜 안에서
3. 교회를 통하여 주어진 복
III. 결론
2. 언약 백성으로 선택됨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성도의 참 행복1: 하나님의 선택
A. 원리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선택됨
a.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복임
b. 언약관계의 두 측면
1) 의무: 경외와 순종
2) 특권: 용서와 은혜
c. 언약관계에서의 축복의 본질: 생명
B.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 받음
a. 용서의 중요성: 관계의 지속
b. 친교를 통하여 하나님을 누림
III. 결론
3. 하나님과 친교를 누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성도의 참 행복2: 하나님과의 친교
-가까이 오게 하심
A. ברקת가 복인 이유
1.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서
a.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
b. 인간이 죄로써 본래의 지위와 상태를 상실함
2. 본질상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B. 죄악이 이길 때에도
1. ‘죄악’-יננוע ירבד
2. 하나님이 רפכ하심
-제사 안에서 계시하심
-예배 안에서 죄를 해결하심
-짐승의 희생을 통하여 속하심
1) 속죄의 목적을 보여줌; 관계 지속과 경배
2) 속죄의 방법을 보여줌: 그리스도의 희생
3) 속죄의 동기를 보여줌: 하나님의 사랑
-개인적 죄의 용서는 교회를 통하여 분여된 복임
a) 교회가 죄 사함의 중보자는 아님
b) 교회에 분여된 은혜적 수단을 통해 죄를 용서해 주심
c) 교회에 분여된 언약적 특권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음
III. 결론
4. 하나님의 집에 있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성도의 참 행복3: 교회 안에 있음
-하나님의 집 뜰에 있는 사람
A. ןכשׁי의 행복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1. ןכשׁי의 의미
2. בשׁי가 아님- 일시적 거주
a. 눈에 보이는 장막은 참 하늘집의 모형일 뿐임
b. 지상에서의 하나님과의 친교는 완전한 동거를 바라봄
c. 지상에서의 성도들과의 친교는 완전한 사랑을 바라봄
- 용서를 통한 관계의 계속
-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함께 누림
B. ךירצח의 축복
1. ךירצח의 의미
2. 행복과 하나님의 רצח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복수 형태로 등장함
a. 하나님의 모든 집의 장소를 의미함
b. 당시의 성전은 이동식 성막이었음
c. 장소가 중요치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함
d. “이스라엘 중 거하시는 하나님”
3. 성도의 참 행복
a. 교회 안에 있음
- 하나님과의 친교, 성도들과의 친교 안에 있음
- 대제사장, 제사장, 백성들 모두 뜰에 있음으로 복됨
- 그 뜰을 지남으로써 성소도 지성소도 드나듦
b.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을 가리킴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 그 안에서 죄 사함과 은혜를 누림으로써
- 개별적 소명은 의미를 가짐
- 이 행복을 하나님이 아들에게, 아들을 통해 교회에 주심
- 아들 안에 있는 자가 이 행복을 누림.
III. 결론:
5. 성도의 참된 만족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성전에서 누리는 행복의 진수
A. העבשׂנ의 의미
1. ‘택하신 자, 가까이 오게 한 자’는 단수임
2. ‘만족하다’의 주어는 1인칭 복수임: 공동체성을 보여줌
- העבשׂנ: ‘배부르다’
1) 이는 ירשׁא의 복이 공동체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보여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2) 공동체가 함께 이것을 누림은 언약관계 때문임
3) 성도의 참된 만족은 공동체의 만족과 분리되지 않음
4) 교회의 모든 분쟁: 영원에 대한 무관심, 개인의 이기심 때문임
5) 이것은 성도가 참된 만족 대신 거짓 만족을 누리고자 함임
B. 성도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
1. ךתיב בוטב ‘당신의 집의 선함 때문에’
2. ‘선함’과 ‘아름다움’의 일치:
3. 성경이 진수임: 그리스도를 통한 현시
3. 성도의 허기짐의 궁극적 원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함
6.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ךלכיה שׁדק ךתיב בוטב : ‘거룩한 궁전 곧 당신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A. 하나님의 아름다움
1.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속성의 아름다움임
2. 하나님 자신을 직관하여 알도록 허락되지 않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B. 하나님의 속성은 관계를 맺으심으로 드러남
1. 자연적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과 관계의 아름다움
2. 지성적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 관계의 아름다움
3. 구원적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원 관계의 아름다움
-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의 정수: 물질적 실체가 아님
- 교회는 그것이 가장 풍부하고 충심적 realization임
III. 결론
7. 복음적 교회의 아름다움의 본질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
A. 구속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드러남
B.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두 측면
1. 내재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a. 성도들 자신이 선을 드러내는 구속의 증거이기에
b. 성도들 자신이 선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영혼들이기에
c. 성도들 자신이 선이신 하나님을 행하여 살기에
2. 외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보여주는 모임이기에
I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그 집의 아름다움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심
A. 근원적으로: 교회 존재의 아름다움
B. 파생적으로: 교회 작용의 아름다움
1. 제도의 아름다움
2. 기능의 아름다움
a.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1) 죄악을 용서 받음
2) 은혜를 공급 받음
b.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1) 서로를 용서함
2) 서로를 고쳐줌
3) 가진 바를 나눔
3.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들의 아름다움
a. 배향한 죄인들을 회심케 하심
b. 성도들을 정향하여 살게 하심
IV. 교회의 아름다움: 말씀과 성령의 일하심
A.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두 손: 진리와 성령
B. 세상 속에서 교회의 아름다움은 성도의 아름다움
1. 진실한 신앙
2. 순결한 마음
3. 의로운 생활
C. 그리스도의 신부의 의무: 아름다움
V. 결론: 영원히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1.성도의 참된 행복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본문해설
65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하는 것은 표제에 나와 있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느냐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명확히 다윗의 저작 시기를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속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와 모든 것을 볼 때에는 아마도 왕이 된 후에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높이면서 쓴 찬송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4절은 우리말 성경에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이것이 뒤바뀌어서 ‘이러이러한 사람의 행복이여’ 그러고 나옵니다. 그래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의 행복이여’ 그러고 나오는데 그 행복이라는 말이 제일 앞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4절에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II. 참된 행복
거기에서 나오는 ‘복이 있도다’ 라고 번역한 그 부분이 아슬레 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A. ירשׁא의 복 - הכרב의 복보다 영적이고 본질적인 복
그래서 아슬레의 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을 가리키는 두개의 대표적인 단어가 있는데 베라카 라는 것과 에세르 라고 하는 복입니다. 그런데 이 베라카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말하자면 행복해지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아주 넓은 의미의 복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베라카는 구약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데 특히 창세기뿐만 아니라 역사서에도 아주 광범위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외적인 축복들을 지시하는 말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에세르의 복은 이런 복보다 훨씬 더 영적이며 본질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 속에 쓰여진 예가 시편 1편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그러고 나오잖아요. ‘복 있는 사람은~’ 그러면서 나오는 시편 1편,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 그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음과 같은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그런 것도 역시 ‘행복이여~’ 라고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때에 쓰여진 것이 바로 에세르의 복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보다 영적이고 아주 본질적인 복을 가리키는 건데 이런 에세르라는 단어를 희랍어로 옮겨놓은 것을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제일 먼저 사용하시는데 그게 바로 팔복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있나니~’ 그렇게 나오죠. 그때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복의 구약적인 그림이 바로 이 에세르의 복입니다.
B. 성도가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복
따라서 이 에세르의 복은 성도가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행복의 근원이셔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그 태양을 의지하여 살고 기동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과 모든 만물들이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 한분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제일 앞부분에 나와 있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 이라는 이 찬송은 굉장히 위대한 찬송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만복의 근원이셔요. 그리고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거기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데 이 시작이 결국은 삼위일체 안에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복되다’ 라고 하는 이 상태는 뭐냐 하면 완전한 만족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기 밖의 있는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 그래서 완전한 만족과 그리고 완전한 기쁨 속에 있는 것이 이 행복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행복하다고 할 때는 거기에는 슬픔이나 결핍, 고통 이런 것들이 없이 무엇인가 더 갖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래서 괴로운 상태는 행복한 상태가 아닙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기쁘지 않은 상태는 행복한 상태가 아닙니다. 결국이 이 행복은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기쁨, 이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그럼 모든 만물이 존재한 다음에 하나님이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이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 행복의 근원이 삼위의 교통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그 각 위는 서로의 존재와 아름다움 때문에 행복하시므로 완전한 기쁨 속에서 복되신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만물들은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완전한 기쁨과 그리고 완전한 만족이 하나님 밖으로 표출돼서 나온 것이 이 모든 세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마음속에 아주 큰 기쁨이 있고 그 다음에 무엇으로 깊이 만족을 누릴 때에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성경의 진리를 훼손하려는 철학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것의 결핍이 없이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 자신이 복되시다면 그러면 이 세계는 창조될 필요가 없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필요하셔서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그 창조세계를 통해서 채워지지 않으면 가득할 수 없는 어떤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쁨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도 모자라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계와 함께 하나님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굉장히 도전적이고 그리고 배교적인 언급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냐면 여러분이 오히려 삶의 의욕도 없고 기쁨도 없을 때에는 뭘 쓰기도 싫고 그리기도 싫을 때에는 사람들을 만나서 뭘 표현하기도 싫어요. 그렇죠? 그런데 큰 기쁨이 있을 때에 그리고 완전한 만족이 있어서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고백이 마음속에 가득 있을 때에는 오히려 막 글을 쓰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고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완전한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기쁨을 바깥으로 발산하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복되시고 만족하신 분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 세계는 창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완전한 기쁨과 만족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이 세상의 모든 세계들을 마치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시나 노래로 그림으로 조각으로 표현하듯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관계를 맺으려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은 모든 만물들을 당신 안에 두셔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행복으로부터 소외된 것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들을 당신 안에서 행복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이런 행복을 누림에 있어서 모든 인간을 제외한 지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행복에 있어서 수동적입니다. 그러니까 햇빛이 비취면 빛의 비췸을 입게 되고 자기 자신이 그 햇빛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에서 이런 하나님의 행복에 대해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천사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천사는 자연 모든 만물들에 비해서 하나님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매우 특이하게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행복을 적극적으로 떠날 능력을 가진,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의미에서 능력을 가진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인간들이 각각 삶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심지어는 선인과 마지막에 인간 말종과 같은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배웠길래 행복해지기를 그렇게 갈망하는 존재들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었길래 인간이 그렇게 간절히 행복지기 위해서 목말라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디서 배우지 않았더라면 행복해지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 ‘아, 내가 행복하다. 나는 행복해.’ 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행복한 적이 없었다면 어떻게 행복해지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가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영혼의 때인지, 혹은 하나님이 행복하게 하신 첫 사람 아담 안에서 그가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행복했던 때가 있고 그 행복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와 닮은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 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복해지고자하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우리가 뭐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과 관계를 맺고 복되신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함께 누리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의 이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타락한 다음에는 올바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완전한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복되게 사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수 삼는 방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화)제가 십자가를 경험하는 책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시골 사람이 올라와가지고 참기름을 사 먹어 보니까 깜짝 놀랐대요. ‘야, 이것을 기름이라고 먹나.’ 왜냐하면 참기름은 참깨를 짜서 내려야지만 그게 참기름인데 그게 워낙 비싸니까 양을 늘리기 위해서 이제 참기름을 짤 때에 뭘 섞는 것입니다.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알아요. 근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기름을 짤 때에 다른 기름을 짠 깻묵을 기름을 상당부분 남겨놓은 다음에 그 다음에 참기름하고 같이 짜면 섞인 기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짜기도 하고 아예 다른 기름을 섞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점에서 주는 참기름, 참기름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슈퍼에 갔을 때에 한번 사왔는데 참기름 냄새가 아주 강하게 금방 짠 것처럼 나는 것 있잖아요? 향료입니다. 그것 보면 참깨 맛 기름이 있고, 진짜 참기름이 있어요. 음식점 같은 곳에 갔을 때에 콩나물을 무쳤는데 냄새가 강하게 나잖아요? 향료입니다. 참깨가 하나도 안 들어가도 옥수수로 짜서 그렇게 강한 참깨 맛을 색소와 함께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는 것을 보니까 인간들 틀렸구나 하고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시골서 참깨를 짜다가 그래서 작은 기름집을 내고 참깨 기름을 팔았어요. 그래서 그 집이 어떻게 되었냐면 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짜 참기름 맛에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익숙해져서 진짜 참기름을 짜 놓으니까 너무 못 먹겠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안에만 있는데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악을 행하며 행복을 찾아가려고 했고 그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진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데려가서 그 안에서 참다운 행복을 느꼈을 그때에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감각들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악한 것이라고는 하신 적이 없으신 그분을 핍박하고 멸시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악을 행하고 그에게 도전함으로서 자기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하였으니 이중, 삼중으로 이 제안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는데 불행하게도 이 에세르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입니다.
C.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짐
결국은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행복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스스로 그 행복을 찾아갈 수 없고 행복의 근원으로 이끌어주어도 그것이 자기를 불행하게 할 것인 것처럼 몸서리치는 그런 인간들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사시면서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될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이 세상에서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을 구하며 모질고 악하게 하나님께 도전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분이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도 우리를 다시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렇게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행복하려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었음에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절하고 도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었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 당신 안에서 행복하라고 보내신 그리스도를 그렇게 핍박하고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죽인 그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큰 구원의 은혜를 흘려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주님이 주신 행복을 거절하고 하나님 없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복되신 그분을 죽였습니다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구원의 지혜안에서 인간들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 담당시켜 대신 고난을 당하고 죽게 하시고 그리고 그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그 모든 충만한 복을 이 땅에 부어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모든 인간들의 연합을 향하여 주신 것인데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이 모든 경건한 행복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그 참된 행복의 진수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먼저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충만한 복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도전한 인간들을 보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흉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래서 하나님 바깥에서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여 복되신 하나님께 도전하였던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담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베푸시려고 하는 복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거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겠죠. 그러나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 때에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소유를 빼앗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심지어는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자 할 때에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원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육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없는 자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아주 치열한 경쟁으로 나타나요. 그런 큰 고통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하면 행복해질수록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불태우며 사악한 존재가 되어가서 하나님 때문에 누리게 되는 이 에세르의 복으로부터는 훨씬 멀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는 포기할 때에 오히려 행복해지는 비밀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때에 그때에 오히려 신자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기쁨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만족, 예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겨우 맛보고 맛본 후에는 여름날에 설탕물을 먹은 것처럼 더 큰 것에 대한 욕망에 붙들렸는데 주님을 알고 난 후에는 깊이 들어가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하는 그러면서 주님의 그 깊은 만족과 참된 기쁨을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정말 완전한 행복은 세상에 있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충만한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극히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고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까지 주셔서 당신 안에서 당신을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큰 복을 우리 모든 성도들은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복의 진수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담당하고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화해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기를 죽이기까지 우리를 행복의 근원으로 불러들이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양자를 화목케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이 교회를 향하여 아들에게 부어지는 그 기쁨과 같은 그 충만한 그 복을 아들의 신부인 이 교회에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참된 만족을 당신 때문에만 누릴 수 있는 참된 만족을 아들을 통해서 주시고 당신 때문에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아들 안에 주셔서 아들과 한 몸을 이룬 이 신부인 교회 안에 진정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섭리 속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충만한 복을 영원 전에도 성육신 속에서도 그 다음에 성육신 하신 후 다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가운데도 완전히 하나님 안에 함께 있는 자신도 복의 근원이신 분이시지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접붙여진 모든 성도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있다는 점에서 떨어질 수없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여전히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는 예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기 이전에 자기의 육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려고 했던 성향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수시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의 충만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는 복을 충분히 깨닫지를 못하면서 살아가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III. 결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이렇게 고난의 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주님 바깥에서 헛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친 인간의 죄의 결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우리의 완전한 기쁨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다시 그 추루한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있는 순전한 신자가 되고 그러는 것만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충만한 복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는 완전한 만족과 기쁨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몸의 일부로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행복을 주기 위해서 오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2.언약 백성으로 선택됨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65편 4절인데 제가 3절부터 읽겠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절 “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II. 성도의 참 행복 1 : 하나님의 선택
4절에서 시인은 성도의 진정한 행복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누릴 수 있는 그 큰 행복을 최소한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주께서 택하시고’, 성도의 참 행복의 첫 번째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들어 온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지으셨지만 그렇게 시간의 펼쳐짐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영적으로 하나의 가족처럼 묶어 당신과 관계를 맺게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지만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들이 그렇게 한 몸을 이루며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가족 관계를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였습니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점에서는 사실 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서 죄가 들어오지 않고 인류가 번성했을 때에 어떤 사람은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저런 적합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각각 사용하셨을 것이고 또 그것들도 어떻게 보면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선택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도록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연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단절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갔던 것입니다. 떠날 때에는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지만 돌아올 때에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렇게 당신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인간들을 그냥 살아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이 새로운 언약을 주셔서 그들을 불러들이셨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A. 원리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선택됨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들이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타락한 후에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살고 기동하고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 알고 또 세계가 어떤 세계인줄 알고 자기가 누구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성의 힘이 남아 있어서 사물들을 만들고 이용하는 점에서는 모든 동물에 비할 데 없이 탁월했지만 자신이 만드는 그 사물이 어디로부터 왔고 그 사물을 만들고 있는 자신의 존재는 무엇이고 이 주신 모든 만물들을 무엇을 위함인지를 철저히 몰랐기 때문에 사실은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언약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특별한 언약관계이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아주 생생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됨으로서 이후에 성경을 통해서 신앙을 갖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표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주실 때에 항상 계시를 받을 백성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의 문화와 정황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던 집안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모든 언약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를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일방적으로 은총적인 약속을 주신 후에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바치게 하셨고 그 쪼갠 짐승 사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셔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근동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 신들은 항상 인간에게 무슨 섬김을 받고 싶어서 걸근되는 그런 탐욕적인 신들이었고 진실성이라든지 무슨 신실함이라든지 찾아볼 수 없는 이기적인 신들이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그런 신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행해지던 언약의 관습을 따라서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어요. 그래서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봉신조약 같은데서 온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예화) 고대 근동에서 왕이 이제 넒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혼자 다 다스리지 않고 땅을 떼어서 평소 자신에게 충성스럽게 일하던 사람에게 그 땅을 줍니다. 줄때에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여기까지 왔고 너의 의무는 무엇이고 내가 너에게 베푸는 것은 무엇이고 너는 나에게 무슨 의무를 진다는 약속의 문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황소 같은 짐승을 죽여요. 죽여서 이 머리부터 시작을 해서 절반으로 쪼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한 500킬로 되는 소가 말이죠, 가운데 갈라져 벌어져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뭐 몇 양동이나 되는 피가 막 두 쪼갠 고기 사이를 흐를 것 아닙니다. 거기를 천지신명이 모두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 언약을 맺은 왕과 그 왕에게 책봉을 받은 봉신이 함께 언약의 문서를 들고 그리고 그 핏 길을 걸어서 그 쪼갠 짐승 사이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둘 중 누가 언약을 배신하면 이런 신의 커다란 징벌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고 그것을 낭독하고 세장을 만들어서 하나는 왕이, 하나는 봉신이, 하나는 신당에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 의식이 아주 엄숙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죽기까지 목숨을 걸고 맹세한 언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처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 범죄 했을 때에 그것은 결국은 이러한 형벌에 해당한다고 하는 그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짐승이 쪼개진 것처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고 나면 인류가 모두 멸절될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형벌의 진노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시고 우리는 다시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 하나님과 약속의 관계를 맺도록 불러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간 사이에 특별히 은혜로 맺어진 언약관계 사이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그분을 힘입어서 살아가는 생명의 친교가 있기 때문이고, 사랑의 교통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언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로 불러들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당신의 뜻에 합당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아주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면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총으로 모든 멸망 받을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주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그래서 당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시는데 이렇게 맺게 하신 영원한 언약의 관계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면서 어떤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에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주님을 믿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선택하신 그 큰 언약 안에서의 부르심이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주님이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그 언약관계 안에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파트 대문 앞에서 경비원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벨을 누르고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때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귀한 일이고 그리고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이 언약관계 속으로 모두 불리움을 받을 때까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무와 특권의 측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언약관계로 불러들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특권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특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지식과 은혜입니다. 그래서 언약관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지식이 있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언약백성으로 불러들이시면 그 언약백성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바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의 공동체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로운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 언약의 말씀 속에는 지식이 있어요. 타락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모든 무지를 극복하게 해주는 지식이 있어요. 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당하게 알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자연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의 총체가 바로 성경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언약백성들 안에 있어서 그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유익을 얻으면서 인간의 참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외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명이 뭐냐 하면 그 지식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가득 쌓인 양식의 창고처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똑같은 정도로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넒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불러진 사람들이 넒은 의미에서는 교회였잖아요. 그런 구약적 의미에서의 교회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참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때는 없어요. 언약백성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어떤 때는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심으로, 또 어떤 때는 기적을 행하시므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마지막에는 성경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이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엑기스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항상 똑같은 정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대는 아주 열심히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더 경배하고 더 사랑하고 더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함께 탐구하고 배우고 그리고 더 상세하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해서 그것들을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글로 남기고 말로 가르쳐주고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서 교회 안에 말씀이 가득 쌓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면 자기에게 적합한 말씀을 먹으면서 새 힘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는 아주 게을러서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 그 일에 헌신하지 않고 그리고 함께 있는 백성들은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배부르기보다는 세상의 헛된 구정물과 같은 지식과 그리고 세상 행복에 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먹어야 할 이 지식의 말씀에 그 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모든 것들이 쇠퇴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창고에 먹을 것이 거의 없는 그런 사람처럼 그렇게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도 하나님이 그 지식을 완전히 거두어 가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대치할 수 없는 사명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을 교회 안에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만 먹을 것이 아니라 후손들도 그것을 먹게 해주고 그것을 해외에 수출하는 게 선교입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선교사의 준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그 교회 안에서 말씀의 지식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길 무엇인가 깊이 터득하고 심령이 부요하게 된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훌륭한 선교의 준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기 평촌에 있는 열린 교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역에 있는 교회는 영원하지 않아요. 발전할 수도 있지만 쇠퇴할 수도 있고 심지어 무너져버리고 망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어요. 그게 교회의 역사잖아요. 찬란하게 빛나던 교회들이 있던 땅들이 지금 다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잖아요. 얼마든지 이 개별 교회는 무너질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보편교회는 영원합니다. 결코 무너질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교회의 사랑은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전 세계의 교회를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머리되시고 교황 같은 사람이 통치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가 되셔서 인종과 피부 색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고 신실하게 그 지식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이 된 지체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른 가난한 교회에 나눠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 피를 염통에서 팔, 다리로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곳에 해외에 나눠주고, 해외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돕고, 그곳에서 목회하는 사람들의 곤고한 것을 위해서 우리가 말씀을 나누어 주고 무엇인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때에 그것은 심장에서 피를 펌프질해서 피를 머리끝으로 보내고 발끝으로 보내고 손끝으로 보내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개별교회를 이 지상 세계에 많이 두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대치할 수 없는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시편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훌륭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그리고 기록으로 남길 때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적은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이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이것들을 써 나간 것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유익을 얻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이런 하나님을 아는 학문을 연구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그것이 언약관계에서 우리가 받는 최대의 특권이 이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뭐냐 하면 그 은혜 자체가 힘입니다. 무슨 힘입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가며 살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힘이 때문입니다. 은혜가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거를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바가 뭐냐 하면 당신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를 무제한으로 공급하시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용서입니다. 언약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가 있잖아요. 그때에 하나님은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언제든지 그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백성들이 끝없는 죄의 용서와 한량없는 은혜의 공급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의 자원들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언약백성들의 특권입니다. 그 대신 의무도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와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존재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다만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고 또한 그분이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 앞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복이 그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큰 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관계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거친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하게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마음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나면 맨 처음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에게는 물론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백성의 의무인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했을 때에는 언제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잘못을 고하고 또 순종하며 살아갈 힘이 없을 때에도 아주 정직하게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신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나에게 먼저 명령하시는 바 그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리고 이어서 나에게 그 계명을 주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있는 힘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언약관계를 누리면서 살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그 하나님이 언약관계 안에서 주시는 축복의 본질이 뭐냐 하면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은 죽은 것과 같은 모든 사물들을 다시 살아나게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다른 것입니다. 숨밖에는 쉬지 못해도 생명이 있으면 온몸이 멀쩡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딱 끊어지면 세 시간만 지나면 이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몸이 썩어들어 가요. 이러한 생명을 우리의 영혼 안에 끊임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렵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지나던 우리의 인생의 때가 있어요. 저도 가끔 어떤 음악을 듣거나 또 어떤 장소에 가거나 하면 옛날에 일어났던 일과 연관이 되는 적이 있어요. 그래서 회심하고 몇 교회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많이 힘들었던 교회 그 근처를 지나가면 밀물처럼 확 밀려와요. 잊혔던 기억들이 막 생각이 나요. 그러한 시련들, 시련에 대한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런 시련들을 이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힘인데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입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들에 항거하는 것, 그래서 그 속에서 생명이 넘쳐나는데 이 생명이 넘쳐날 때에 신자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아래로는 인간들을 사랑하면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사람과 하나님을 화해시키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을 토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언약의 관계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언약백성으로 선택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진리를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그 진리를 알 수 있게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조명을 주시고 그 많은 은혜의 지식 속에 살게 하신 이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순종할 수 없을 때에 우리를 다시 순종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워요. 인간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맨 처음에 그렇게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통해 깨닫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삶은 삶의 새로운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그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죄 때문에 잠시 잊혔던 그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장 큰 사명은 이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도입해주신 이 충만한 생명의 은혜를 지식과 함께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으로 선택받은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B.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 받음
성도의 참 행복은 실제적으로는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라고 점을 하나 더 찍어야 됩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사하시리이다. 이게 히브리어로 “까파르” 인데 “구속해주실 것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원래 “까파르” 라는 단어는 “덮는다.” 그런 뜻이고 배 같은 것을 칠을 해서 속에 것을 가려버리고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까파르” 라고 합니다. 구속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무슨 뜻이죠? 죄악이 나를 이겼다는 것은 이 시인이 언젠가 경험하기를 은혜 생활을 잘못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신앙의 경향은 약화되고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자하는 정욕의 경향은 강해졌는데 그것이 아주 우세해져서 그래서 자기 속에서 넉넉히 이기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렇게 작은 일에 분노하고 그렇게 왜 이렇게 폭발하고 내가 왜 나 자신이 이럴까?’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가책할 때가 있죠? 죄악이 자기를 이긴 상황입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는데 참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무례히 행하고 그리고 헛된 욕망들이 내 안에서 막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도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뭐라고 고백 하냐면 ‘죄악이 나를 이겼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솔직히 얘기해서 정욕이 우리 안에서 솟구치고 죄를 짓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분발하여 일어나고 분노가 폭발하고 할 때에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주님이 친히 우리를 어루만져 주셔야지 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찌그러질 때에 분노로 우리의 마음이 솟구칠 때에 우리의 욕망으로 우리의 심장이 흔들릴 때에 그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의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놀랍게 확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어떻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사랑하는 이 죄와 불순종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인데 그러면서 솟구치던 분노와 마음의 욕망, 불순종하고자 하던 의지들이 확 꺾어지는 것입니다. 눈이 많이 왔지만 비가 쏟아지니까 확 녹아버리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 이 안에 있는데 사랑이 자기에게 죄 지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에 나타나는 사랑의 빛깔입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과 사이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게 하고 다시 사랑물이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집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돈을 주시고 사업이 잘 되게 하시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에 비하면 희미한 것입니다. 그런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친교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끊어져서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충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확 다시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고 고난을 참고 인내하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III. 결론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택된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으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도의 참된 행복인 것입니다. 미끄러졌던 성도들은 오늘 이 말씀을 굳게 붙들어보십시오. 왜 죽으셨습니까?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감당하시고 짓이겨지듯이 찢기시고 피 흘리심으로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용서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한 번이 아니라 은혜 언약 안에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은혜를 입은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럼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불순종하고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우리의 잘못들을 용서해달라고 빌며 다시 그 언약관계 속에서 주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3.하나님과 친교를 누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65편 3절과 4절인데 3절부터 읽겠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는 성도들의 행복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선택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두 번째는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는 것이 성도의 두 번째 행복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II. 성도의 참 행복 2 : 하나님과의 친교 - 가까이 오게 하심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도의 참된 두 번째가 하나님과 친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가까이 오게 하사’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말이 히브리어로 “택카레브” 라는 단어입니다. “까레브” 라는 단어는 ‘가까이 다가가다.’ 그런 뜻이고 여러분이 잘 아는 천사의 이름, 그룹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 가까이 있다는 뜻에서 히브리말로 “케롭”, 우리말 성경에 “그룹”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가까이 오게 하심으로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간이 끊임없이 수행하고 애를 써서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있고, 또 하나는 그 분이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그래서 친교를 누리게 하시는 종교가 있어요. 많은 대부분의 종교는 전자에 해당되지만 우리 기독교는 두 번째 종교입니다. 인간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갈 능력이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그 인간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친교를 나누심으로서 인간에게 행복을 분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간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오긴 했지만 그 마음을 때리고 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서 당신이 가까이 오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가까이 있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오게 하신 복인 이유가 있습니다.
A. ברקת가 복인 이유
그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범죄하고 더러워진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께 도전하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 불결하고 더러워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을 싫어하시고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도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당신 가까이 오게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여름이 되어도 그런 차림을 보기 어려운데 예전에는 한복들을 많이 입었습니다. 여름에 하얀 모시 한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얀 모시를 깨끗이 세탁을 해서 풀까지 먹여서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얀 옷을 입고 그리고 차려 나섰는데 그 할머니가 손자를 너무 예뻐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손자가 어디서 놀다왔는지 온통 흙 천지를 했습니다. 얘는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할머니를 보고 자기가 이렇게 더럽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하고 할머니 그러고 막 달려와서 안기려고 합니다. 할머니는 여전히 이 아이를 향한 사랑은 가지고 있지만 너무 하얗고 깨끗한 옷을 차려 입었기 때문에 안아 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외출의 계획도 틀어지고 애써서 세탁한 옷도 다 바꿔야 되니까 그렇잖아요? 사랑이 변했다기보다는 그 할머니가 차려 입은 차림새와 모든 것이 아이가 와서 덥석 만지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순전한 차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그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그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친교를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인간을 당신 가까이 오게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결국 인간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지극히 겸비해질 것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지극히 온전해질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나신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가장 위대하고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당신 앞에 나오는 인간은 자기의 위치를 알고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져 자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대어 살아가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지극히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사랑과 자비와 용기와 정의와 이런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것은 무한히 완전하고 인간의 그것은 있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옳지 않은 동기들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 완전하신 하나님을 뵈면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비천한 인간들을 가까이 오게 하셔서 하나님과 친교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과 가까이 사귀며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지위와 상태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과 함께 깊은 친교 속에서 살게 하시고 당신 자신과 교제함으로서 인간을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만약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예술의 정신이 있어서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거나 혹은 조각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봅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몇 푼어치 가치가 없는 것일지는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매우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책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몰라도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을 향해서는 마음이 열려요. 왜? 그 책이 나에 또 다른 분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은 나와의 만남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도시에 갔더니 주차장에 차에서 내리는데 어떤 사람들이 막 달려와요. 그러더니 생전 처음 나를 본 것입니다. 책도 많이 읽고 이제 테이프도 들은 사람들입니다. 손을 잡고 펑펑 울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나는 만난 적이 없지만 나의 글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쓴 글과 작품은 나의 연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역시 똑같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당신 자신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술 작품처럼 당신의 생각과 사상의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변하지 않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로서 본래의 지위와 상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오히려 선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즉시로부터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방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두 가지로 제시가 된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죄 때문에 방금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제사의 제도를 주셔서 비록 한시적이나마 하나님 앞에 잠시라도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가까이 친교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지만 일정한 수명을 연장 받아 살면서 자손들을 번식시키시고 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한시적으로나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용서받은 후에는 잠시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했고 그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말씀의 깨달음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선한 의지의 불러일으킴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죄가 밀려오면 다시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제사를 드려 다시 하나님의 용서를 입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심으로서 결국 자신들의 죄가 한시적인 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방식으로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교 속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갖도록 만들어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대요,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 다윗도 바로 그런 은혜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믿어지는 인물,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순전한 신앙으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믿음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역시 모친이 죄 중에서 잉태한 그런 수많은 죄인들 가운데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입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수시로 죄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그리고 비교적 온전한 사람이었지만 죄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단절되고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소외된 채 몸부림치는 그런 시련의 시기들도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선대해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기를 주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그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오직 선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진실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노래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이 기필코 자기 자신을 추적하고 자기를 승복시키고야 말았던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그 은혜를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누구도 부럽지 않는 나라를 거느리고 수많은 군대를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는 위대한 군주, 강력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편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은 주님이 언약 안에서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신 언약 백성으로서의 그 아름다운 특권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굳어짐으로 인하여 상실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자의 복된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그렇게 가까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이 갈망으로 가득차고 우리의 기도의 자리가 눈물로 적셔지고 있습니까? 주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의 행위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중생의 씻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순결하게 당신 가까이 오도록 만들어 주셨을 때에 우리들이 그 하나님과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가난하고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의 자리, 사랑의 자리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 깊이 몸부림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습니까? 시인이 자기가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며 그 행복 속에서 살아가게 될 수 있었던 그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은총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누리게 된 이 복을 그렇게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B. 죄악이 이길 때에도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은 오히려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죄의 많은 일들이 나를 이기었지만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1. ‘죄악’-יננוע ירבד
여기에 죄악이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말로 “디브레 아오니” 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나의 죄의 일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나의 죄가 많은 악한 일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의 많은 일들이 자기를 엄습해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자기의 죄에 항거할 수 없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상황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외면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내적인 상황은 다른 곳에서 시인이 ‘죄가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확 솟아오르는 정욕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자 하는 죄의 경향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고자 하는 이 착한 신앙심과 은혜의 힘을 이겨버린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종종 발견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욕망이 솟구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정욕에 흐르게 되는 상황이거나, 또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솟구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고 기도할 수도 없고 또 머리로는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뼛속까지 사무쳐 쓴 물이 솟아나오는 그 극한 미움 같은 것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나 혹은 정욕, 이런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제할 수 없도록 이런 것들이 막 솟구치는 이런 욕망이 바로 내면적으로 죄가 자기를 이긴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에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은 은혜가 내 안에서 죄를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가 유혹 받지 않습니까? 왜 유혹을 안 받겠습니까? 유혹은 누구에게나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이깁니다. 정욕이 우리 안에 확 솟구칠 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인턴쉽 하던 어느 학생이 이제 우리 책들을 읽고 공부하면서 그런 간증을 합니다. 예전에는 확 정욕이 솟구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보니까 확 솟구치는 유혹은 언제나 있는데 그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기게 만들어주신다고. 유혹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떠한 성자에게도 유혹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가 죄를 이긴 상태, 그런데 시인은 그 반대를 경험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 그렇게 순결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송축하던 이 시인이 정욕에 가득차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정욕에 휘둘렸을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앞에 무용하던 아름다운 이 시인의 육체는 고깃덩어리처럼 변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던 그의 내면의 세계는 쓴물이 솟아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들려 보내던 아름다운 찬송의 가락을 뿜어내던 아름다운 화연은 줄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런 상태가 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죄악이 자기를 이긴 상황은 환경과 관련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가 행한 죄 때문에 벌어진 많은 일들이 그것이 자기를 엄습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다윗의 집안에서 왜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까? 자식들이 지들끼리 서로 죽이고 그리고 자기 동생을 겁탈하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식들이 못 됐기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이 큰 섭리의 구도에서 보면 다윗이 행한 죄의 씨앗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디브레 아오니” 나의 죄악의 일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확 엄습하며 시인이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그는 벗은 발로 황망히 도망을 쳐야했습니다. 자기 죄악의 일들이 자기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이 רפכ하심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서는 ‘죄악이 나를 이기었으나 당신은 나를 구속하실 것입니다.’ “카파르”라는 단어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그때에도 주님은 나를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 라는 단어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시인을 속죄해주시는 것,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죄에서 그를 건져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그 백성 된 다윗과 관계를 지속하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있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친교 속에서 살게 하신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송축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 말씀을 청취하는 여러분 중에서는 지금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기도 많이 하고 은혜 생활 잘한 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친밀한 은총을 경험하면서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수없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 여러분을 속죄하셔서 당신께 가까이 오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편애하신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내가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을 때조차도 마치 내가 상처 입은 양인 것처럼 생각하시고 그리고 다가오셔서 나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많은 죄들을 때리셔서 징벌하시기보다는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마음에 묶여진 그 죄의 사슬에서 나를 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때리셨을 때는 회개하지 않았는데 어루만지실 때에 오히려 회개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의 속죄하시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죄는 이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진리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그렇게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리고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나에게 잘못을 빌 때에 어찌하리이까? 제자가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당신께 나아가 우리의 죄와 그리고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고 충심으로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은혜를 누리고 그분과의 아름다운 친교 속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불변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죄를 용서받을 때에 그는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무한히 크고 신비한 섭리 속에서 여러분을 막으실 수도 있는데 죄를 짓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도록 버려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친교를 잃어버렸을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가까이 하면서 살아가는 그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당신께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대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때에 진실한 회개는 막혔던 기도의 문을 열고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게 하신 이 축복을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까불고 거짓과 허위에 가득차고 허풍으로 가득 찬 기도와 신앙생활은 주님의 마음을 두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만한 화려한 수식어구가 없어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을 때에 주님은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친교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과의 친교의 길을 다시 열수 있는 이유는 또 다른 두 번째 커다란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범죄한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는 단번에 영원히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이 세 가지 속죄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짓는 모든 죄와 그리고 악한 허물들이 결국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용서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만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회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속죄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회개가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이며 우리의 뉘우치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 안팎에 있는 우리의 죄의 일들을 종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였을 때에 주님은 아들의 그 속죄의 피를 보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용서하신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때에 그 죄도 이미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자자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의 경향성이 남아있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는 여러분이 어느 시점 어느 때가 되면 또 다시 범죄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영원히 단번에 완전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로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이루신 그 속죄를 각각 개별적인 죄를 지을 때마다 의식 속에서 그것을 버리고 회개하는 참회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용서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이미 용서한 죄인데도 우리의 불순종과 악으로 펼쳐지고 이미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데도 우리의 회개와 뉘우침을 통해서 시공간 안에서 다시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단번에 완전히 용서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할지라도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 그 불화한 모습을 덮어두고 살아가는 것은 현저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능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신 그 죽음을 당신이 죽으시면 서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한 친교가 있기 위하여 주님이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희생의 고난이 큰 것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사명은 크고 위대한 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5장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절 속에서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이 있어요. 3절을 보세요. 죄악이 누구를 이겼죠?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이게 공동체의 문제에요? 개인의 문제에요? 개인의 문제죠. 나의 죄의 일들이 내면적으로 환경적으로 나를 엄습해서 항거할 수 없도록 만들어 나는 그 죄에 졌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뒷부분을 보세요. 그렇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누구의 죄과에요? 이상하잖아요. 죄악은 나를 이겼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우리 개개인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용서받는 이 탁월한 은혜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사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적합한 비유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예화)자, 여러분의 몸의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건강을 회복해야겠는데 그런데 아픈 부위가 심장입니다. 간입니다. 콩팥입니다. 만약에 아픈 부위가 그런 곳이 아니라면 떼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심장을 떼어내고 살 사람이 어디에 있고 간을 잘라내고도 생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내 몸 전체를 살려야 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천천히 고치더라도 약을 먹으면서 심장을 고치는 것입니다. 약을 먹을 때도 생각을 합니다. 이 약을 많이 먹으면 심장을 고칠 수 있어도 이 약 때문에 콩팥이 상하면 이 약의 양을 줄이면서 심장을 천천히 고치더라도 콩팥을 망가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몸 전체를 고치기 위해서 병든 우리의 몸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용납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할 실 때에 모든 인류를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셔서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다 깨진 인간들 중 얼마를 구원하여 다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선택하셔서 그들을 고치고자할 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역시 하나님께서 그 몸 전체를 하나의 몸이라고 보시고 그 속에서 누가 병들었으면 그거 하나하나를 잘라내고 뽑아내어서 그 몸을 온전케 하는 대신 약을 투입하고 그리고 약물을 투입하고 치료를 해서 망가진 부분들을 고치기 위해서 온몸 전체를 하나님께서 보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이 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몰라요. 이것에 대해서 눈뜨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평촌에 있는 이 한 교회가 아니라 온 세계의 가득 있는 보편교회로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된 모든 교회들, 피부와 그리고 문화, 언어, 관습, 그리고 심지어는 교리조차 조금씩 견해가 달라도 참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모든 보편교회들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그 보편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미래의 이루어질 보편교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부활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형태로 서서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몸을 이루시기 영원히, 단번에,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모든 구성원들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지체들로서 주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일 천 년 전에 이렇게 죄악이 자기를 이겼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이루실 그 속죄 때문에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깊이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에 뉘우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깊이 고백하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밀려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나님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용서해주시는구나 할 때에 그게 자기만 그런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베풀어주신 그 속죄의 은혜가 나 자신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지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다 모두 편애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편애하신 사람,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통해서 쫙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분여된 언약적 특권 안에서 우리는 개별적인 성도들로서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셔서 다시 친교를 누리게 하심은 그것은 교회로 돌아와서 그래서 그 교회에서 그런 친교를 누리며 사는 성도들과 더불어 살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III. 결론
죄 가운데 있다가 용서를 받으면 마치 자신의 위대한 회개가 용서를 쟁취한 것처럼 무용담을 말하는 것은 모두 헛된 자랑입니다. 그럼으로 죄악이 나를 이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오늘도 당신과의 교제 속으로 돌아와 친교를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털어놓으십시오. 고백하십시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미 용서해주신 그 속죄의 은혜가 오늘 내 마음속에 미치도록 은혜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4.하나님의 집에 있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Ⅰ. 들어가는 말
시인은 언약백성의 행복을 이미 앞에서 두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탁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불러들여 주신 그 선택의 은혜와 또 죄와 오염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존재들을 그 분께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그를 정결케 하시고 또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가까이 오게 하시는 친교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성도의 큰 행복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Ⅱ. 성도의 참 행복 3 : 교회 안에 있음
시인은 이어서 세 번째로 성도의 참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A.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행복
그는 이 세 번째 큰 행복을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행복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ןכשׁי의 의미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거하게 하신다는 의미와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집이 가지고 있는 언약 백성을 위한 공동체적 성격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할 때에 이 거하는 사람이라 하는 것, 거한다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말로 이스콘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샤카니라는 단어에서 온 동사의 활용입니다.
2. בשׁי가 아님- 일시적 거주
구약 성경에서 거하다라고 하는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야샤브라는 단어와 샤카니라는 단어입니다. 야샤브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터를 닦고 거기에 영원히 거주하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거기에 그렇게 사는 것, 뿌리를 내딛고 살고 주저 앉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이스콘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뜻이라기보다는 잠시 있는 일시적인 거주,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켜서 이 샤카니에서 온 명사형인 쉐키나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안 계신 데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에게 고유한 장소는 하늘의 보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이 특정하게 지명하시는 어느 한 곳에 당신의 충만한 임재를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쉐키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성도의 참된 행복이 바로 그렇게 교회 안에 그러한 방식으로 있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곳에 살아가는 이것 자체가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커다란 행복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다만 이 세상에 보이는 이 교회는 우리가 있을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 시를 썼을 때에, 그가 ‘주의 뜰’이라고 했을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뜰을 염두 해 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의 시대까지는 고정된 건물로 지어진 성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윗이 많이 헌신하여 건축 재료와 그리고 금은보석들을 모으기는 하였지만, 그 성전을 실제로 건축하고 지은 때는 그의 아들 솔로몬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때에 성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해주신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텐트처럼 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천막형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속은 각양의 많은 보석들과 실들로 짜여져 있는 아름다운 것이기는 했습니다만 성도의 겉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웅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얀 천들로 울타리를 치고 그리고 불과 18평의 작은 천막이 쳐진 것이었습니다. 겉은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으니 오랫동안 비 맞고 햇볕에 찌들면서 그것은 거무 칙칙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막,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만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자리였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웠던 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건축의 양식이나 혹은 건축의 재료들의 소중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초라한 성막위에 찾아 오셔서 당신의 임재를 보이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은 특별한 집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집에는 오직 언약백성들만 드나들 수 있는 집이었고, 이방의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장막의 뜰에 그렇게 거하는 사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 성막 속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 속에서 노동을 하고 돈을 벌고 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에 나아오는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리는 제사는 대부분 자신의 죄와 언약백성 전체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묶어 바치는 헌신의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갈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삶, 죄로부터 멀리 떠난 순결하고 정결한 삶의 정수가 그 제사와 헌신의 형태로 성막 속에서 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하나님 앞에 이를 정도로 훌륭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 장막은 참 하늘 집의 모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러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바 됩니다. 온 세계에 퍼져있는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인 한 보편 교회의 일부가 되었고, 그리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지역에 있는 한 교회에서 그 보편교회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신자로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이 교회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곳에 우리의 회심의 흔적이 있고, 이곳에 주님을 만나 변화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한없는 힘과 은혜를 공급받았고, 알지 못하는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막혔을 때에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죄의 용서를 경험했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자기를 받치는 섬김과 목양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왔고,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자라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에 모든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는 이 세계 어느 공간에서보다 바로 이 교회 안에서 가장 잘 깨닫게 되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하나님의 복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속된 교회를 가지고 이 세상에 모든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에 속해 있으나 우선적으로 모든 교회를 위하여 다 봉사할 수 없으니, 우리는 함께 손을 맞잡고 이곳에서 주님을 배워가며 그리스도의 온 몸을 위해 봉사할 길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대신할 선교사들을 세우고 그들을 돕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돕고,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도운 사람이 우리를 돕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디든 흩어져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그것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렇게 자신이 소속되고 자신이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고임을 받고 자신도 무릎을 꿇고 섬길 지체들이 있고 함께 기쁨과 설움을 함께하며 살 수 있는 사랑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고 이것 없이는 아마 오래전에 이 험한 세상에서 엎드러진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 장막은 영원히 있게 될 하늘 집의 모형일 뿐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친교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그 친교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일을 만날 때, 사람의 위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이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애쓸 때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주님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가혹하니만치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고 치셨으나 여전히 우리를 싸매시고 부르시는 분임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그 주님의 성품을 알아가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될 때, 다시 물밀 듯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때 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편애의 착각을 갖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은 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과의 아름다운 친교 속에서 우리는 비록 거미줄 같은 믿음이지만,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의 강인함으로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작은 쪽배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아도, 그 배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 때문에 교회는 안전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경험합니다. 마라와 같은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지나면서도 그래서 우리는 여유 있게 주님을 찬송할 수 있고,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삼키려 할 때, 조차도 우리는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지상에서의 하나님과의 친교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면서 누리게 될 무한하고 완전한 축복에 비하면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친교는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니체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혼자다’라고 말했습니다.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고통과 누구와도 사귈 수 없는 단절 속에서 아파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닫게 되자, 그들은 오랫동안 자기를 어두움 속에 가두었던 자아의 껍질을 깨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나아오게 되었을 때,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 보이던 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별처럼 빛나는 많은 진실한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찬란한 별처럼 이미 진실하게 살고 있지만, 또 어떠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이제 방금 태어난 아기 별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며 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가며 참 진리를 따라 성령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친교는 정말 어두운 밤하늘, 추운 광야에서 함께 모닥불을 쬐는 것 같은 위로이고 그리고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 성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장 연약해졌을 때 주님께서 당신의 강함을 보여주시는 것, 엎드려 쓰러진 자와 같이 되었을 때 주님이 거기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우리도 알지 못하는 땅에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결합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이 맛보는 어두운 세상에서 맛보는 가장 축복된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교제조차도 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이 누리게 될 완전한 사랑에 비하면 이것도 역시 맛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경험한 용서를 통한 관계의 지속은 하늘나라에서 쇠하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 될 그 영광의 그림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함께 알아가고 누려가는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볼 아름다운 성도의 완전한 교통과 사랑의 모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종 서로 마음이 찢어지고 갈등을 일으키고 급기하는 눈에 보이는 이 지상의 지역교회들이 깨뜨려지고 심지어는 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교회는 절대 망하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교회와 함께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행복과 그 복락의 그림자들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동시에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진리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이 교회 너머에 있는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 교회에 대한 사모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교회의 한 일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이것은 바로 이러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과정 속에 우리들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완전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한편으로 맛보면서 또한 아직 몸담고 있지만 곧 떠나게 될 이 세상에서의 모순과 불합리 그리고 죄악과 심지어는 찢는 갈등 같은 것들을 이 교회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이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저 하늘나라의 영원하고 완전한 복락이 이미 스며 들어와서 우리들이 그 하늘나라의 맛보기를 누리며 하늘나라의 기쁨들을 미리 선취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패성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힐 때에 결별했던 이 세상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교회 속에 남아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두신 것이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사람들을 당신의 몸의 지체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 각자 각자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섭리와 경륜 속에서 마치 신자가 성화될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 성화로 멀어갈수록 육체의 욕망으로 흘러서 그래서 우리가 두 사이에 끼어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또한 교회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고 주님의 은혜와 진리에서 멀어지니까, 우리에게 부패성이 있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방해가 되지 만약 우리에게 선명한 진리가 있고 그리고 성령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려고 하는 선한 의지가 우리안에 가득 있다면 우리의 죄와 남아있는 부패성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는 놀라운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자신만만하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했던 사람이 겸손해질 때가 언제입니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자신의 편견과 오류를 발견하게 될 때 얼핏얼핏 이 세상에서 밀려오는 굴복하고 싶은 욕망을 느낄 때, 그것을 성경의 진리로 보여주고 성령이 책망하실 때, 우리는 잘 쌓아 올라가던 믿음이 사실은 우리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는 아직까지도 먼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제껏 많은 진리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진리로부터 멀어진 어두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객관적인 진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우리의 죄와 유혹과 그리고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빛도 흐려지는 주관적인 어두움 속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강팍함을 물리치셔서 우리 마음안에 주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시고 우리가 열열히 주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주의 진리를 배우는 일에 헌신하지 아니함으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객관적인 어두움을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날마다 발견하는 죄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것 때문에 더 주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을 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실수록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더 많은 진리의 빛을 깨닫게 하실수록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마음은 교회 전체를 붙들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어서 남의 영혼을 위하여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그리고 많은 지도자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헌신하자고 그렇게 외쳐도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찬란한 진리의 빛을 구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만 진리에서 멀어져 사람들을 보며 가슴아파하고 그들의 지친 잎에 진리의 떡을 떼어 나눠주고 싶은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하늘 사람으로 부르시는 그 은혜에 의해 이끌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끌리시는 하나님을 따라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붙은 더럽고 헛된 욕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사이에 끼었을 때마다 그는 오직 자기를 이 모든 고통과 그리고 갈등에서 구원하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나를 함께 하시네
그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때는 은혜를 받았으나 짐승처럼 미끄러져 살지 아니하고 매일매일 연약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붙들고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행복은 우리로 하늘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우리를 찢어 놓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몸 된 교회 안에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두 흩어진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지체된 모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 어느 끝에서 일어난 교회의 아픔이라도 그것을 내 아픔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언젠가 여러해 전에 누가 와서 나에게 나는 가본적도 없는 교회에 그 일어난 아주 어려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뭐 말할 수 없는 추문이 그 교회를 뒤덮었습니다. 그러면서 막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개 목사,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우리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 응.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큰 부끄러움을 이 세상에 끼쳤지만 그러나 그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냐.
저는 이번에 외국을 몇 번 다녀오면서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을 주시는 것을 아주 의심할 수 없이 명료하게 경험했습니다. 마치 우리보고 그러시는 것 같았어요.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많은 자원을 줄 테니 내가 너희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 너희는 이 세상의 보편 교회를 품은 자들이 되거라. 이 땅에 있는 나의 교회는 아픈 곳이 너무 많구나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 평촌에 있는 이 교회뿐만 아니라 지구 끝에 있는 교회까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교리가 좀 다르고 생각이 우리와 같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망가지고 병든 어느 부분을 우리는 고칠 수 있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기쁘게 그리하여야 할 것이니 왜냐 하면 주님이 지금 살아계시다면 우리 교회뿐 만아니라 그 교회도 찾아가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닿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집 안에 거하며 이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세상의 찌꺼기들을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 끊임없이 서로를 격려하며 성도의 사랑의 교통안에서 하늘 교회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이곳에서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것입니다.
B. 주의 뜰의 축복성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집들에 있는 축복성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랬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것이 당신의 뜰들에 있는 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뜰들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복수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냐 하면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의 성소의 모든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성전이 이동식 성막이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뜰은 오늘은 여기이지만, 내일은 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저기였던 그곳이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떠나면 또 다른 곳이 하나님의 또 성전의 뜰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고 그 약속을 따라서 그 교회의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성막 그 안에서 그 성막들은 각각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성막 뜰과 그리고 성전, 성소, 그리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구분들에도 불구하고 일단 하나님의 집 뜰 안에 있는 것,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참된 행복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그것을 따라서 참 행복을 누리는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건강하게 그 몸에 붙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얼마전에 선교사들이 모인 수련회에 갔을 때에, 그 곳에서 한국 목사 한분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훨씬 저보다 많으신 분이 이제 집회가 끝난 후에 마당에 모여 앉아서 서로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왜 목사가 되었느냐는 이야기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에 그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만드신 것은 집사 못되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 같애. 나는 목사의 소명의 간증에 대해 다양한 간증을 들어봤지만 그러한 종류의 간증은 처음 들어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랬더니,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열심히 봉사하는데, 내가 집사 같았으면 그렇게 안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내 성격에 집사가 되었으면, 목회자 꾀나 갈구었을 껄.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예 나를 목사로 만들어서 갈구는 집사가 되지 말고 갈굼을 당하는 사람이 되어 보라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집사되지 못하게 방지하시려고 목사로 만드셔 놓았으니 내 신앙이 이만큼이나 되었지 그것이 그분의 간증의 요지였습니다. 누가 행복할까요? 목사가 더 행복할까요? 행복은 직분 순이 아닙니다.
나는 진짜 말로만 들었던 이야기를 목격자 아니, 경험자에게 직접 들었네요. 외국에 있는 큰 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다 오신 부분을 만났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 우리가 그 교회에 있을 때 그때에도 그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목사님이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너무 우리 장로님들한테는 죄송한데, 교회가 싸움이 일어나면서 담임 목사를 반대하는 장로님이 강목으로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은 이야기 아니라 자기가 직접 두들겨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 한쪽에서 설교하면 저쪽에서 찬송 부르고 저쪽에서 찬송 부르면 여기에서 기도하고 그러니 그 안에서 훼손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루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정말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요.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성도들이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행복은 직분 순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우울하게 신앙 생활할 때, 오늘 회심하고 은혜 받은 사람이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에게서는 멀리계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성도에게 매우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참 행복은 바로 그렇게 직분의 크기나 혹은 높이나 지위,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에서 주님과 더불어 누리는 이 사귐 안에 바로 그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어느 교회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그 교회 안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 그것이 바로 성도의 행복입니다. 성경적으로 원래 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1장 찬송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찬양)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복 그 자체는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만족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러한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뭔가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항하면서 그러한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 하는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는 뭐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마약을 한 사람들의 경험을 하면, 왜 웃어요. 그런데 그렇게 좋답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마약을 하는데, 5번 정도만 맞으면 중독이 된대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대요. 그 기쁨은. 깊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 환락, 그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럼 뭐 하긴 자신들,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사 맞고 마약에 취한 사람이나, 눈을 감고 황홀해 하면서 예수 사랑을 노래하는 우리들이나 병자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우리도 마약은 아니지만, 약을 늘 먹잖아요. 구약과 신약을,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것이잖아요. 성경의 맛을 들여봐요. 그것 없이 살수가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카트라이터라는 영국의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성경을 안 읽으니까 어느날 설교하러 올라가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원맨쇼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성경을 주었다. 너희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구나. 이제 내가 성경을 빼앗아 가겠다. 다시 또 백성들에게로 돌아와서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원맨쇼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 순간에 성령이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다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성경을 소홀히 하였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온 성도들이 우리를 빼앗아가지만 말아달라고 통곡하며 회개했다는 역사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것입니다. 마약보다도 더 하죠. 그러한게 말할 수 없답니다. 거기에서 맛보고자 하는 것이 뭐예요?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기쁨을 맛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 밖에서 얻어보려고 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특별한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참된 행복이고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 모든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잇는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거짓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주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장을 허무는 것만이 우리가 그 하나님의 무한한 복락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아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바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참된 행복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는 동안 완전한 기쁨과 만족 속에서 사셨어요. 다만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고통과 괴로움은 자신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살리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그 큰 사랑과 행복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것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사람이 아니고는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행복을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을 통해 교회에 주셨으니 이제 아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휘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안에서 완전한 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Ⅲ.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깨달으면서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들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이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그리워하고 주님을 떠나고 대적하는 방식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하는 우리의 옛 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 안에서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갈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교회 안에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 때문에 이 교회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행복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 모든 그리스도의 몸인 주님이 충만히 계시게끔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5.성도의 참된 만족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65편 제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받는 성도의 참 행복을 선택하심, 친교를 누리게 하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심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나오는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라고 한 이 부분은 네 번째 복이라고 보다는 오히려 이런 세 가지 커다란 성도의 참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진정한 만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행복의 본질은 다시 한 번 종합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성전에서 누리는 행복의 진수
그 성전에서 누리는 행복의 진수를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말 성경이 조금 부족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A. העבשׂנ의 의미
여기에 보면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랬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3인칭 단수죠.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바로 그 앞에 있는 번역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한 것에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놀랍게도 이 부분은 1인칭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혹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택하신 자, 가까이 오게 하신 자,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자는 단수인데 ‘만족하다’ 라고 하는 주어는 1인칭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는데 우리가 만족할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족을 누리는 그 주체가 개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아슬레의 복 이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지만 성도로 누리는 이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교회인 공동체에게 주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언약 백성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한 몸으로 여기시고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마지막 가나안 정복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율법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그 언약을 들려주면서 그는 말하기를 이 언약은 여기 함께 있는 우리와만 맺은 것이 아니요, 여기 있지 아니한 우리의 후손들과도 함께 맺은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이지만 그 후에 태어날 모든 사람들도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그들도 하나님과 부분적으로 언약을 맺었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에 그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과의 언약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그 구원의 은총은 그 언약 관계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을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그 죄의 값을 치룬 것을 우리에게까지 적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형벌 받은 것으로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용서와 그리고 구원의 유익만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관계의 특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들은 복이 있는데 그러한 성도의 참된 복을 통해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것은 우리 모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맛보지만 그러나 그 모든 만족과 기쁨과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부여하신 것을 우리들이 그 교회의 한 몸이 됨으로서 누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이렇게 각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의 참된 행복이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고 내가 그 하나님의 행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옳지 않는 상황이 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몸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몸에 손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 손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온몸이 손의 봉사를 통해서 유익을 얻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을 집어 들고 필요한 것을 입에 넣기도 하고 또 코에 대보기도 하고 몸 중 어느 부분이 가려우면 그 손을 이용해서 긁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손이 심하게 불에 데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붕대로 모두 감았다고 칩시다. 그것은 아프고 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몸입니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을 위해서 거의 봉사하지 못하는 몸인 지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바 되면 그러며 여러분이 잘 믿고 충만할 때만 주님의 몸이 아니라 병들어서 거의 죄 가운데서 쓰러지고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답게 봉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생하고 회심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최초의 경험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병든 지체가 되지 않고 언제든지 우리의 몸 전체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어야지만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손이 온전하고 건강하다면 그래서 우리의 발이 우리의 귀와 코가 모든 것이 온전하다면 그러면 그 모든 각 지체의 온전함을 통해서 누리는 만족은 각 지체의 것이 아니라 온몸의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 기적처럼 눈을 수술하고 이렇게 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경을 벗어도 여러분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눈이 나빴을 때에는 안경을 끼어도 신호등이 여섯 개, 일곱 개로 보이고 그래서 이제 이야기지만 교통사고도 여러 번 났습니다. 차를 몰고 인도로 튀어 올라가고 안 보이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이 잘 지켜주셨죠. 지금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안경을 벗고도 아쉬운 대로 대낮에는 운전을 할 수 있을 만큼 좋아졌어요. 그런데 항상 두통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집중해서 볼 때에는 항상 두통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우리 집사람에 물어보는 말이 “오늘도 날이 흐렸네.” “아니야, 여보. 날 맑아.” 내 눈에는 항상 흐렸어요. 그런데 수술하고 나서 일주일 뒤에 이것을 다 풀고 보니까 눈부시도록 세상이 밝은 것입니다. 제일 잊히지 않는 감격이 달에 진짜 토끼가 있더라고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아주 또렷하게 진짜 토끼가 있더라고요. 그때에 누리는 만족이 눈의 것이 아니라 온몸의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데 마음이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소화도 잘 됩니다. 지금이야 그 기쁨이 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새로울 수 없어요.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늙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기뻤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저는 이것을 기도원에서 묵상하면서 ‘야, 이거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힐 수 있을까?’ 하나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단수인데 그들을 통해서 그들이 누리게 되는 만족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주신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끔 심방을 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목사님 제가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에 봉사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는데 물론 교회 봉사도 많이 해야겠죠. 그런데 모든 봉사 중에 최고의 봉사는 은혜를 받아서 건강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실은 교회를 위해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이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는 각각 사람마다 달라도 결국은 그 기쁨과 만족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사실은 만족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도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 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진액을 짜서 바치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창에 허리 상하고 물과 피를 흘리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혼신을 다해 기도하시기를 마치 그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기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매어 달리셨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튿날 십자가에서 경험하게 될 그 무서운 영적인 형벌을 앞당겨서 자신의 정신과 마음 안에서 영혼 속에서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예수님의 생애를 살아오시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당신은 죄가 없으시면 서도 죄인처럼 통곡하고 당신은 허물이 없으면서도 당신 자신이 무슨 커다란 잘못이나 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통곡하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이 추호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은 죄가 마치 당신이 지은 죄 인 것처럼, 우리 영혼의 곤고함이 자신의 곤고함인 것처럼 우리의 믿음 없음이 당신 자신의 불신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그렇게 눈물로 아파하시고 통곡하시고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사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영혼의 곤고함과 괴로움을 당신의 것과 나누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죄하시지만 죄 있는 자들 때문에 우셨고 당신은 부족한 것이 없으셨지만 우리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 앞에 탄식하시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언약관계 안에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참된 만족은 공동체의 만족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그 몸의 지체들로 몸 전체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만족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것이 되게 할 때에 그 안에서 지체인 우리들은 또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안에 행복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타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누리게 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공동체에 행복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주어요.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비결이기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이 땅에 잠시 있을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분쟁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영원을 아는 것이니 영원과 하나님의 사랑은 일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을 덜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그 영원한 사랑을 모르면 모를수록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을 더 많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된 행복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교회는 분쟁이 적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로 하여금 끊임없는 분쟁에 빠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영원을 향해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하고 실제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교제와 친교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성도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고 영원히 있는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이 지상의 나라를 보고 영원한 영혼의 관점에서 물질을 보고 영원히 누릴 하나님과 하늘 교회에서의 완전한 성도의 교통에 비추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족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지상 교회에서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영원한 세계의 아름다운 것들을 이 세상에 투영시키면서 시간적으로는 잠시 있다 사라져가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그 영원한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의 모상들을 발견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영원에 대한 관점 안에서 진정한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에 눈을 뜨게 만들지만 욕망과 그리고 부패함은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세상에 집착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회가 영원에 대해 끊임없는 사랑과 성찰과 관심을 갖게 해주는 그것이야말로 교회가 모든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개인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 안에 모든 만물을 끌어안고 계시며 그리고 휘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십니다. 모든 만물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안에서 인간은 복되신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기심은 좋은 것이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사랑을 거스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만족과 기쁨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참된 만족대신 거짓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서 자기 개인의 마음과 정신은 찢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상처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진리의 영원한 말씀을 통해 영원에 대해서 눈을 뜨고 날마다 잠시 있는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려고 할 때마다 은혜를 받아서 영원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나의 이기심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주님을 붙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만족을 누리게 하고 우리 자신도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만족도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로부터 떠나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공간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할 것을 끊임없이 제공해주지만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욕망은 있으나 실제 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직 없기 때문에 만족을 누릴 수 없고 이미 그것을 얻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다음에 겪게 될 고통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느라고 마음에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아무리 많이 먹고 마시고 누리고 소유할지라도 누구의 것을 빼앗는 법이 없고 아무리 많이 이웃이 그것을 가지고 누릴지라도 내게서 그것을 빼앗아 갈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만족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이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속죄를 통하여 이루어놓은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샘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피의 자신의 더러움을 씻고 그리고 샘물과 같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은혜를 먹고 마시기를 원하시지만 아직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헛된 만족을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된 만족을 저버리고 양식이 아닌 것들로 배부르기 위해서 은을 달아주고 그리고 애쓰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 마음 아픈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교회에 주셔서 그래서 참된 만족이 오직 하나님에게로부터 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누리는 이 모든 만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만족을 이미 치르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우리는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한 몸의 교회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신 이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성도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렇게 성도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성도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의 집은 아름다울 것이 별로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당시는 아직 이 땅에 견고한 건축물로서 지어진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광야의 메고 다니던 그 성막이 성전을 대신 하던 때였습니다. 거무칙칙한 해달의 가죽과 주위에 둘러쳐 있는 그런 하얀 천막으로 만든 그 울타리가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물질 때문에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전의 아름다움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히브리말로 투부인데 이것은 바로 선이라는 뜻입니다. 토브 혹은 투부로 불리는 선함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자면 ‘주의 집 곧 성전의 선함 때문에 만족할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사실 이 선하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윤리적인 기준과 미학적인 기준이 다를 때에 예쁘지만 좋지 않고 좋지만 예쁘지 않은 것이지 이것이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면 그 아름다움과 선함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냥 예쁘고 우리에게 육체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점에서의 예쁨이라면 아름다움과 선함은 분리되겠죠. 그렇지 않아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세요. 늘 경험하면서 살잖아요. 여자들의 경우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잖아요. 텔레비전에 영화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죠. 그러면 자기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도 많이 벌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같이 한번 얼굴을 쳐다보고 그저 그냥 더 깊은 교제 없이 그 사람하고 만나서 이렇게 예쁜 얼굴을 쳐다보는 행복감을 느끼고자 한다면 아름다운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만약에 평생을 같이 산다고 하면 얼굴을 어차피 유효기간 6개월이니까 그러면 그 사람하고 같이 산다면 예쁘다는 그 기준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면 만약에 그 예쁘다는 기준과 좋다는 기준이 합치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냥 잠시 사귀다가 그저 적당히 즐기다가 헤어질 사람이라면 예쁜 사람도 좋은 사람이지만 일평생을 같이 살려고 마음먹으면 예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고 좋은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주님의 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주님의 집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전은 모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당은 허름한 집일 수도 있고 우리처럼 공장을 개조한 집일 수도 있고 이층 집일수도 있고 지하실에 물이 새는 예배당일 수도 있지만 그 외모 때문에 교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안에 있는 것,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들, 그 교회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모두 보여주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릴 그 아름다운 모든 유익들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주심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또한 교회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이러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핍절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허기짐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 끊임없는 갈등과 채원지지 않는 영혼의 배고픔이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영혼의 배고픔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은 이렇게 허기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영혼의 배고픔과 허기짐은 밖에 있는 이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있는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밥을 많이 먹고 배부른 다음에 30분밖에 지나지 않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을 본다고 해서 우리들이 허기짐을 느끼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영혼의 허기짐과 굶주림,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혼과 직접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배부름이요, 우리의 죄와 우리와 하나님을 향하여 등 돌리고 살아가는 이 모든 것 때문에 주어지는 허기짐이며 배고픔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허기짐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핍절하고 배고프던 성도들이 다시 배부르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자원들 때문이 아닙니다.
(찬양) 예수의 넒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III. 결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세상에 우리들이 우리의 온 몸이 찢기는 것 같은 그 큰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그 곳에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한 배부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눈을 주신 것은 사물을 보게 하심이요, 혀를 주신 것은 물질의 맛을 보게 하시고 코를 주게 하신 것은 냄새를 귀를 주신 것은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함이요 살갗을 주신 것은 부드럽고 무르고 단단하고 차갑고 더운 것을 느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주님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날마다 알아가는 것, 아름다움의 진수인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이 세우신 영혼들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발견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도 이기고 슬픔과 견디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큰 힘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고난 주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름다움의 진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많이 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은 주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그로 말미암아 무한한 배부름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6.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65편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다시 한 번,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의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만족하지 않은 우리를 우리의 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시 길이 열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때문에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이 참된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하고 그것을 위해서 심지어는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터진 웅덩이에 물을 담는 것과 같고 큰 고통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 십자가를 어떤 감상적인 슬픔에 잠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이유가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얻어 보려고 했던 것이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이유는 참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심으로 복되게 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 신앙만이 참된 휴먼이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그것만이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인간이 행복해지는 삶은 갈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조화와 합일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 속에서 살 때에 인간은 행복해지고 인간이 참다운 방법으로 가장 행복해지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영광을 인간으로부터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결코 나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반성해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과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고 그리고 그 사이에 큰 고통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모든 것, 주님을 위해 살기에 쓰라리고 자기 마음에 원하지 않는 어떤 괴로운 갈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던 모든 것들은 우리가 괴롭고 아픈 만큼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죽이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밝은 말씀으로 우리 속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하시고 또 성령님의 은혜로 그것들을 죽이는 일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리고 만족가운데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꺾으실 때에 아프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를 때리실 때에 그것은 쓰라린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고 아프게 하신 것 때문에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고난주간이라서 제가 심방을 하고 있거든요. 특별히 환자를 심방을 하고 있어요. 보면 인간으로 생각할 때는 몸이 사형선고를 받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수족이 불편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럴 텐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때려주시니까 그 고난 속에서도 천사처럼 얼굴이 빛나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때려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환자들을 심방하면서 믿음의 필요성을 새삼 느껴요. 믿음이 없으면 좌절하고 죽음 밖에는 생각을 안 할 텐데 믿음이 있으니까
(찬양)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II. ךלכיה שׁדק ךתיב בוטב : ‘거룩한 궁전 곧 당신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렇게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여기에서는 그 만족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럽니다. 특별히 잘못된 번역은 아닌데 히브리 성경에서 직접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거룩한 왕궁, 거룩한 궁전 곧 당신의 집의 선함 때문에 만족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 성전이라는 말이 성경에 자주 나오잖아요. 그게 원래 히브리말로 헤칼이라는 단어인데 왕궁입니다. 왕궁. 그러니까 왕궁은 집은 집인데 왕이 사는 집입니다. 그래서 왕이 사는 집은 매우 커요. 거기서 왕이 먹고 자고 생활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일을 보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왕궁은 매우 커요. 그 왕궁에서 바로 자기의 나라의 전부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의 권한이 흘러나와요. 그래서 비록 그 왕궁이 나라 전체로 따지면 지극히 작은 크기에 불과하지만 온 땅에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힘과 통치의 영향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왕권을 행사하는 중심부입니다. 그러면 잘 보세요. 한 나라는 한 나라의 군사와 정치와 모든 것들은 이 세상 임금이 있는 왕의 집인 왕의 궁전으로부터 그 모든 통치하는 권력과 힘이 흘러나와요. 그러면 언약 백성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영토가 있어야지만 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유리할 때에는 영토가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역시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영토하나 없었지만 그러나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궁 하나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하고 계셨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성막이었습니다. 거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로 제사 드리러 나오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용서 받은 죄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의 감화를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끔 그들을 통치하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또 언약 백성들을 헤치고자 하는 무리들을 격퇴시키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통치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성전’ 할 때, 그 전입니다. 궁전입니다. 그런데 그 궁전이 이 세상에 임금들의 궁전은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 만든 궁전이지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궁전이기에 오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곧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이 바로 맨 처음에는 성막으로 그 후에는 성전으로 그 후에는 그리스도로 그 후에는 신약시대의 교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교회가 완성되어서 이 땅 모두가 하나의 교회가 되고 천상도 하나의 교회가 되어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합을 이루는 이것이 바로 성전의 전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에서 아름다운 솔로몬의 성전으로 이렇게 이어가다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인 당신 자신의 몸을 허물자 여기로부터 신약의 교회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아름다움
1.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속성의 아름다움임
이쪽으로 이렇게 달려와서 그리스도 예수 당신이 당신 자신의 성전을 우리를 위해 허물자 여기로 다시 신약의 아름다운 교회들이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구약의 성전의 아름다움은 신약의 오실 성육신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고, 신약시대의 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나타났던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다시 드러내게 하는 것이 신약시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된 이것은 토브 혹은 튜브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인데 원래는 선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한 것이 사실은 히브리말에서 예쁜 것이기도 하고 좋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 적합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목적에 적합한 그것이야말로 히브리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고 예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는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한 사람이고 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은 인간의 외면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은 육체의 미모가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 당신 자신에게 적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 자신에게 적합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 존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속성내지 성품의 아름다움입니다.
2. 하나님 자신을 직관하여 알도록 허락되지 않음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살갗으로 이렇게 만져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분이 되시려면 하나님은 물질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것은 인간의 육체일 뿐이고 진짜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인 본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류 중에 예수님이 가장 탑 스타처럼 예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육체에 있는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은혜 받은 순서대로 하나님이 얼굴도 예쁘게 성형수술 해주셔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셔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육체는 그 하나님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도구일 뿐이었고 그분의 아름다움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신성, 그리고 인성과의 결합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물질을 보면서 감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끔 허락하지를 않으셨어요. 그래서 자꾸 하나님을 명상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지 하나님을 그 속에서 뵙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이러한 물질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물질이 아름답다고 할 때에는 대부분 크기, 모양, 비율, 빛깔 혹은 만약에 그것이 음악일 때에는 가락과 곡조, 그리고 장단, 고저, 화성 그리고 대위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아름답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그것이 냄새를 맡는 것일 경우에는 어차피 색깔이나 크기, 모양 같은 것들이 없으니까 냄새를 맡을 때에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우리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기억들에 부합하는 향취가 날 때에 그 냄새를 우리들은 그것을 좋다, 혹은 참 아름답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혀로 말하자면 쓰고 시고 짜고 달고 한 맛을 봄으로써 그것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였을 때에 우리의 혀가 전체적으로 그것을 맛보고 우리의 뇌 속에 맛의 자료들과 어울리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야, 이 음식 참 좋다, 그리고 맛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음식을 보면서 야 먹기 아름다울 정도로 예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미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각에 관한 것이겠죠. 또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사람들의 손을 붙들고 악수를 할 때에도 거칠고 투박한 손보다 부드럽고 살결 고운 사람의 손을 만지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우리 살의 감각이 거칠고 딱딱한 이런 것들보다는 사람의 손을 만질 때에는 부드럽고 매끄럽고 그리고 아주 감각이 부드러운 것이 좋다는 기준이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손을 만지면서 우리는 참 손이 예쁘다, 부드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아름답다, 선한다, 좋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혀로 맛 볼 수 있고 살갗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당신 자신을 직접 바라보고 알도록 허락하지를 않으셨어요.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이 어디 계신 줄 몰라요.
B. 하나님의 속성은 관계를 맺으심으로 드러남
1. 자연적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과 관계의 아름다움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살아계신 그 효과를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당신이 사물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햇빛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제 봄이 오면 새순이 돋기 위해서 봉우리가 맺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햇빛이 있다는 것,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디에도 물질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아무데도 없으신 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모든 자연만물들에게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이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은 관계를 맺으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안 보이지만 자연의 모든 만물들은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시지만 겨울에 바짝 마르고 다 죽었던 것 같았던 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작은 꽃망울들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자연의 모든 세계는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면 알수록 이 자연의 모든 세계는 너무나 신비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비한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자연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고 신비롭기까지 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연에 관한 지식을 올바로 갖게 되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3세기경으로 기억하는데 요한 네슬러 케플러 라고 하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천문학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이 우주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현대에 와서 망원경이나 이런 것들이 발달하면서 우주에 대해서, 별자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아주 옛날부터 천문에 대해서 아주 방대한 지식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태양이 있고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혜, 명 이런 것들이 행성이 서로 돌아가잖아요. 돌아가는 주기를 다 연구를 해가지고 측정을 해서 오선지에다 옮겼어요. 오선지에다 그것이 운행하는 거에 맞춰서 오선지에 음표로 표시를 해서 악기를 탁 쳐보니까 환상적인 화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런 비밀들이 이 세계와 우주 안에는 한 없이 많아요. 그래서 올바르게 무슨 학문이든지 올바르게만 해서 이치를 터득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학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 주이신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이런 것까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자연 사물들 안에 있는 원인과 결과를 공부하는 학문이 자연학입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들을 인간 사회 속에서 찾아내는 것인 인문학입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들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신학입니다. 이런 세 가지 학문이 인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커다란 지식의 체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모든 만물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속에서 인과관계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이 그 모든 세계를 지혜와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에도 노래하지 않습니까?
(찬양) 하늘에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래서 기도원에 가 있을 때에 밤중에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다가 쾅 하고 천둥이 치잖아요. 칙 하면서 번개가 벼락이 내리잖아요. 어떻게 보면 무섭지만 어떻게 보면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 모든 세계를 향해 호령하십니다. 비가 막 쏟아지거나 햇빛이 찬란하고 눈부시게 쏟아져 내릴 때에, 온 땅에 봄을 맞이하여 꽃들이 확 피어날 때에 우리는 그 곳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이 모든 피조만물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그리고 풀숲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 한 송이, 들풀 하나에도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서 아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가다가 한 번 만져 봐요.
2. 지성적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 관계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죠. 지성적인 인간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요. 요번에도 심방을 하다보니까 마음이 굳어지고 근심걱정이 많아서 세상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언젠가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살이는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라고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물건들을 옮기는 것은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면 되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 힘은 이 세상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은 어떤 때에는 마음의 주인이 우린데도 우리도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서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바꾸기도 하시고 변화시키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당신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세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 구원적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원 관계의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인 교회와 맺은 구원관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심으로서 당신 성품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영적관계를 통해서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을 거기에서 건져내시고 건져낸 인간들을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은혜 준 인간들을 계속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이 모든 돌보심 안에서 결국은 자연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게 그리고 인간 개개인을 일반적으로 돌보시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탁월한 방법으로 당신의 몸인 전체를 이루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의 비밀을 알게 되면 자신의 영혼의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의 구원과 영혼의 비밀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모든 지식이 하나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이 성도들이 바로 추구해야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약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지금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열심히 기록한 복음서를 우리들이 착념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 하나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구원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도록 전달해주신 아주 소중한 정보이고 이것들은 후에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에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운 색깔들을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만약에 물감이셨다면 이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는 옷감에 물을 들인 것처럼 더 아주 놀라운 색깔로 그렇게 역사 속에서 물들여져서 아름답게 나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이 바로 이 교회 속에 아주 충심적으로 실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당신의 거룩한 궁전의 아름다움, 곧 당신의 집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가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노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이 하나님의 집은 도구일 뿐이고 이 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뿜어내 보여주시는 당신 자신의 성품의 선하고 아름다움과 그것이 시행되는 방식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런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입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III. 결론
그런데 문제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인류들에게 이 눈을 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 영의 눈이 뜨여지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인간사 속에 역사 속에 자연 속에 그리고는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묻어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아름다움을 인하여 감격할 수 있는 눈들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장님에게 아름다운 그림이 쓸모가 없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가락을 들려주어야 그가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는 당신의 그런 아름다움을 이 모든 교회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자연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통해 보여주시지만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 상대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거듭났으나 죄 때문에 감염이 되어서 그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시력을 후천적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약을 먹을 때에 그 눈이 뜨여져서 다시 자기의 추함도 발견하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가 모르던 때조차도 자기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눈 감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안약을 바르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그 눈을 지져서 그래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그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은혜 생활을 잘 할 때에는 중생과 함께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눈이 항상 뜨여서 보게 되잖아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백내장이나 녹내장이 들어 봐요. 그러면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눈뜬장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고 나면 다시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못 보던 사람이 아니라 예전 보던 사람인데 병들어서 눈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고 한때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 뛰고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감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눈이 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 아름다움에 혹하여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런 안질 환자들을 고쳐주기 위해서 기도해서 그 눈물로 그들에게 발라주고 약을 이겨서 그 눈에 발라주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뜨였습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이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가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집에서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매일매일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래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하는 것,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 (2010/3/29,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2 (2010/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3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4 (2010/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수요예배))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5 (2010/4/01,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6 (2010/4/02, 새벽 십자가 사경회)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7 (2010/4/03, 새벽 십자가 사경회(금요예배))
7.복음적 교회의 아름다움의 본질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저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I. 들어가는 말
시인은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에서 만족한다는 히브리어단어는 배부르다 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사람이 허기지고 그리고 지쳤을 때에 음식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허겁저겁 음식을 퍼먹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는 더 맛난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더 이상 먹고 싶지 않고 충분히 만족한 상태가 됩니다. 아이들이 칭얼대다가 엄마의 품에 품어들어 젖을 한껏 빤 다음에는 새근새근 잠이 들고 이제는 입에서 그 젖을 노아 버립니다. 완전한 평화속에서 잠들어있는 그 어린아이의 표정은 그것이 바로 만족한 표정인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만족은 이처럼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얻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삼은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으로 배부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만족이 오직 하나님을 통해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러한 이치를 따라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이 충분히 만족한다고 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서 복음적 교회의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
우선 이것은 하나님의 집, 그것과 동격으로 놓은 당신의 왕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신의 거룩한 궁전 곧 당신의 성전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배부를 것입니다라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제일 먼저 구속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A. 구속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드러남
그래서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그것에서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이 당시에 하나님의 집은 초라한 성막이었습니다. 그저 해달의 가죽으로 18평짜리 집을 짓고 그것을 12평과 6평으로 나누어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였고, 성막에 뜰이 있고 그리고 번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고 기타 기구들이 있고, 주위를 이렇게 하얀 천으로 친 그러한 이동식 성전인 천막 성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집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부르시는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막대 먹은 인간들이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신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이 한 언약을 맺어주신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큰 특권, 선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와 친교를 누리는 특권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다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를 통해 참회하고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사랑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 제사의 풍경은 결국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타락하였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품으로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구속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멸망하는 인간들이 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암탉이 자기의 새끼를 병아리들을 모으는 것처럼 애타게 불러도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뜻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계급과 신분, 지위와 나위, 성별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거룩한 작정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와 구원을 얻는 것이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온 세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제일 먼저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나가기 시작하셨고, 그리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사람들이 모두 주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죄에서 씻어 제사로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 잠시나마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는 미래에 온 세계 안에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던 것입니다. 캄캄한 인간의 죄로 어두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는 더욱더 돋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통해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고 악을 행하는 죄인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한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미에 있지 아니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한 존재의 지위의 높음과 소유의 많고 적음, 외모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많이 품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창조의 목적에 어울리는 마음의 의지의 경향성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가치 있는 사람이고, 반대의 경우일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꽃으로 꾸며 쓴 이 세상 임금의 면류관은 그 사람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은 외모를 취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존재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여러분이 살고 있을 때, 그렇게 영혼의 아름다움, 선한 의지의 크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미모와 젊음에 박수를 보내지만 하나님은 어차피 죽음의 기운에 삼킨바 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의 젊음을 높이 평가하거나 부러워하시는 분이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넉넉히 가지고 모자람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소유를 보고 인간을 평가하실 리가 없습니다. 필요하면 주님이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셔서라도 하나님이 필요하면 부요한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두 순간이 있어요. 첫 번째를 들자면 그것이 뭐냐 하면, 마음 깊이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물론 그것은 완전히 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사랑에는 항상 거기에 부패와 허물이 있고, 또 양적으로도 하나님처럼 무한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무한히 작은 크기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온전한 사람도 이야기하고, 선한 사람도 이야기하고, 경건한 사람도 이야기합니다. 또 의인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래서 적어도 나의 자의식속에 주님 말고 사랑하는 다른 것들이 있어서 무엇인가 감추는 것이 전혀 없이 내가 알고 이해하는 의식의 한도에서는 주님을, 주님이 나의 전부인 순간, 주님이 나의 전부인 순간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요, 그리고 선한 순간입니다. 두 번째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깊이 회개하며 주님 앞에 깨뜨려질 때, 그때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두 번째 순간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신다면, 사실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 고마워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게 하신, 그 일을 하게 만들어준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방탕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기며 죄악을 행하며 악한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날 때, 거기에서 매달려 죽으신 주님의 고난이 사실은 자기가 당하여야 할 고난이며 형벌이요, 그리고 거기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이 자기 같은 죄인이 감당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이제껏 주님을 거스르며 살아왔던 죄악 된 날들에 대해서 아프게 회개하며 자기를 미워하게 될 때, 그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바라보실 때 주님의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요새 고난주간에 위중한 병에 걸린 성도들을 한 가정 한 가정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불치의 질병이 걸리고 죽음 문턱까지 가 있으면 어떻게 보면 모든 마음이 갈갈이 찢어 지옥과 같을 것 같은데, 하나님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지옥에 문턱까지 간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셔서 그래서 오히려 큰 질병 속에서 그의 영혼을 어린아이같이 예쁘고 아름답게 만드시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구속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그 선하심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집을 보실 때에, 정말 아름다운 집이요,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의 두 측면
이제 이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에는 두 측면이 있어요.
1. 내재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첫째는 내적으로는 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육체로는 이렇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시오, 우리 성도는 성도들이지만 영적으로는 우리 모두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어서 그리스도와 관계적인 면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성도의 연합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개체적으로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볼 때에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많은 성도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고, 이러한 몸은 평촌에 있는 교회나, 어느 지역에 있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지역 교회가 아니라 우주적으로 온 세계 안에 펼쳐진 교회요, 장소적으로는 온 나라와 온 지구를 포함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영적인 하나의 몸으로 묶는 그러한 성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래서 당신과 접붙여 한 몸을 만드신 영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 몸을 사랑하는 자는 그 머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머리를 사랑하는 자는 그 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화) 제가 어렸을 때 아이를 기를 때, 어디 갔다오면 항상 곤란한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딸내미한테, 아빠 보고 싶었니 그러면 4살 5살 될 때, 응 그래요. 아빠 어디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그러면 이마부터 눈, 코입, 다 찔러요. 그게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어느 한부분만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 전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뜻입니다. 그게 정상이지, 눈만 보고 싶었다든지, 손만 보고 싶었다든지, 호주머니만 보고 싶었다든지 비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몸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성도들로서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고, 아름다우실 수 밖에 없었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 공생에 처음 등장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이 놀라운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표현 하셨고, 이러한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인치듯이 성령께서 그 위에 비둘기같이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자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져 교회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화)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다. 여러분 부분 모델이라는 것 알아요? 모르시죠? 뭐냐 하면, 키도 이상적이고, 몸매도 예쁘면 그냥 모델입니다. 그런데 손만 예뻐. 그러면 광고를 찍을 때, 막 좋아하는 표정을 짓고 손을 내밀면서 뭘 만드는데,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 이 손은 다른 사람 것을 찍어서 넣는 것입니다. 그게 부분 모델입니다. 그래서 또 어떤 사람은 또 쭉 찍고 다리를 확대해서 보여줄 때에는 다른 사람의 다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분 모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부분 모델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한번 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람을 보았는데, 부분 모델이 아니라 전체가 아주 아름다워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입술이 너무 예뻐요.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로 입술이 너무 예뻐요. 다른 데는 입술처럼 그렇게 이쁘지 않아요. 그래서 입술을 보면서 항상 빨간점에 있어서는 앵두를 생각하고 등등 아주 아주 예뻐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라서 손에 쥐어 준들 그것을 집에 가지고 가면 예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기가 막힌 비유가 나왔네. 그래서 가져다가 집에다가 두 개를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붙여놨어. 그런데 진짜 예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거야. 그런데 그것은 입술만큼 예쁘지 않아도 이렇게 덜 생긴 이목구비에 붙어있을 때 예쁜 것이지, 이게 잘라서 옥수수가 드러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남은 것은 또 예쁘겠냐는 거야. 한번 생각을 해봐요. 그런데 어떠한 사람은 손이 그렇게 곱고 이쁜 사람이 있잖아요. 너무 예뻐서 너무 자기 손을 예뻐하니까 이 여자가 잘라서 선물로 줬어요. 집에 가져다 놨어요. 이 사람은 뚝 잘라서 갈고리를 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지고 가서 볼 때에 그 몸에 붙었을 때의 아름다운 같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붙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기에 붙어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제일 웃기는 게 그것 아닙니다. 나는 자동차가 나오면,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타고 다니는 게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대우차에다가 BMW마크를 탁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참 딱해 보입니다. 분명히 3.0 차인데, 5.0 이라고 탁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심방가면서 보니까 분명히 삼성에서 나온 차인데, 이사한 앙드레 김 마크를 딱 붙이고 가요. 이렇게 보면서 저 사람도 약간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산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그냥 그대로 그대로 그저 공장에서 출고된 대로. 그런데 이제 어쨌든 그러한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 아름답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그러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실은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는 증거야, 증거. 왜냐 하면, 여러분 노래하잖아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렇게 노래를 불러야지,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이유는 자기 같은 죄인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렇게 주님의 구원의 힘을 힘입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살아있는 이것 자체가 한없는 감격이고 기쁨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남이 어떠한지는 모르고 나 자신이 하나님이 구속하신 선하심의 증거야. 그리고 또한 지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도바울이 죄인중의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 괴수라는 말이 희랍어로 프로토스인데, 영어로 first입니다. 대지를 따라 인간이 쭉 늘어서면 내가 제일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자기는 바울보다 의롭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그 사람은 죄인중의 괴수고 나는 차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뭐냐 하면 절대적인 고백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 자기의 죄가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거야. 다른 사람 하고 비교된다든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거야. 절대적으로 자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이 느껴지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되어지지 않은 사람의 죄에 대한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모두다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죄인중의 괴수니라 하면 아닙니다, 내가 괴수다, 내가 괴수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도 절대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시기가 난다든가 하는 그러한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욕적인 사랑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의 특징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내가 받은 이러한 사랑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 사람이 똑같은 이같 은 사랑을 받았다고 할 때, 한없이 기쁜 것입니다. 그러니까 괴수와 같은 죄인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그러잖아요. 죄가 많은 사람들은 나를 보십시오. 나 같은 사람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결국은 그 사람들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을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울려 연합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이 집이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더욱이 성도들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는 영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거듭나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은 월등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결코 사라지지 않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을 마음에 품고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살지 않고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의 구조가 허락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성도들이 선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영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들 자신이 함께 성도의 연합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때문에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이 교회는 내적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교회인 것입니다.
2. 외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보여주는 모임이기에
또한 외적으로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인 바 되어 한 몸을 이룬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구속을 보여주는 모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간직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외적으로는 그 성도들이 함께 연합을 하여 끊임없이, 끊임없이 밖으로 뻗어나가고 끊임없이 밖으로 뻗어나가서 행하는 모든 섬김과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주시는, 구속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히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하나님이 구속하시면서 우리를 우리에게 선함을 보여주시는데 어울리게끔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원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이신 교회를 마치 땅위의 콘크리트로 건물을 세우고 나서는 돌아보지 않는 건축주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분께 우리 모두를 한 몸으로 접붙이신 후에 우리가 우리의 몸을 보양하고 돌보듯이 또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그렇게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보면, 이렇게 생활하고 이러한 저러한 좋은 계획을 짜다가도 자기의 몸이 이상이 오거나 아프면 그 계획을 중단하고 자기의 몸을 돌보는 일에 전념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모자라면 의사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기의 몸을 돌보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신부인 교회를 아들과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후에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몸을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잘 보살핌과 돌보시는 것을 받으면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간직하게 하신 그 선을 잘 간직하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으로 그들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고 주님의 그 자비로우심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외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보여주는 모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선한 삶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희미한 것이요, 더 밝고 찬란한 것은 그들이 그러한 행실과 함께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또 다시 접붙여지게 될 때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들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을 구속하시고 자기 같은 인간을 속죄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오래전의 일이지만, 직장에 다닐 때에 신우회 모임을 인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가 잘 인도를 했었는데, 디스크에 걸렸다고 하고 직장을 1년 가까이 쉬는 바람에 엉겹 결에 그 모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 같아요. 점심시간마다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나누는데, 하나님도 참, 교회에서도 회심을 안 하던 사람들이 그 창고에 와서 쭈구리고 앉아서 컴컴한데서 공부를 하는 그 속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그리고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회심하는 역사를 그 창고에서 하나님이 참 많이 주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보니까 무엇인가 봉사하고 싶어 하고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본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층이 있었는데 화장실이 22개입니다. 지하까지 치면 화장실이 24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사람들이 손을 씻고 나면 지금처럼 핸드타월 그러한 것 없었습니다. 드라이타월 같은 것도 없고. 손을 씻은 다음 이렇게 하고 나오거나 화장실을 열고 화장지를 풀어서 손을 닦는데, 닦이는 게 아니라 막 휴지껍질들이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털고 항상 지저분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자매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합시다. 그리고 수건을 하나씩 놓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건을 하나씩 비치했습니다. 근무하는 직원이 천명쯤 됐는데, 그러니 그 사람들이 24개의 화장실을 이용하니까 저녁때가 되니까 수권이 완전히 때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불평이 들어오는데 뭐냐 하면, 그 더러운 수권은 왜 걸어놨냐고. 아침에 걸어놓은 것을 본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을 안 하는데, 그 더러운 수권은 왜 걸어놨냐고. 어떤 사람은 아예 꺼내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우리가 하려면 바로 해야지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그래서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8시반 쯤 걸고 그리고 점심 먹는 시간에 하나를 걸고 두 개를 계속 걸었으니 화장실이 24개, 2층까지 있었으니까 26개였으니까 그러니 수권이 오전에 26개가 나오고, 오후에 26개 나오는데 55개입니다. 그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간단하지만, 그것을 빨래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빨아야 하는데, 세탁기가 어딨어요. 그 시절에 가정에 세탁기도 많지 않던 그 시절에. 그것을 직원들이 퇴근시간을 미루고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해서 말려놔도 오전밖에 못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뭐라 했는가 하면, 얼마나 하는가 두고 보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니까 그 일을 서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권을 수백 개 사서 항상 깨끗하게 걸어두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우리 신우회 마크를 넣어서 이렇게 주 예수를 믿으라 광고를 해서 쭉 걸어놔요. 일년쯤 계속되니까 사람들이 감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뭘 했는가 하면, 우산을 수십 개를 사서 올 때는 멀쩡이 직장에 왔는데, 폭우가 쏟아질 때 양심을 담보로 우산을 빌려드립니다. 그런데 놀랍게 거의 다 회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 보자 그랬는데 이 분들이 말씀을 공부하며 은혜를 받으니까 이 사람이 발령되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은혜를 받고 봉사하고, 봉사하고, 봉사하고, 쭉 그것을 걸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말하자면 최고 사장이 어느 날 발령이 나서 전근을 가면서 저는 그때 이미 승진을 해서 다른 곳에 갔을 때인데, 온 직원이 모여서 이임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뭐라 그랬냐 하면, 나는 이 직장에서 근무하는 여러 모든 분들이 이곳 신우회 있는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신자였어요. 그들은 착합니다. 그리고 한결 같습니다. 그리고 피아노 한 대와 세탁기 한 대를 사놓고 갔어요. 그다음서부터 세탁기에 집어넣고 빨았어요. 나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전통이. 굉장히 아름답죠. 그러나 그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도 볼 때에 참 아름다운 것이고, 오죽했으면 그 직장에서 명세기 관공서인데, 거기에서 최초로 부흥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그렇게 멀리서 성도의 행실의 행실을 본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와서 함께 성경을 회심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발견한 우리의 모임의 그 아름다움은 잘 빨아놓은 수권을 보면서 착하다고 생각하는 그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안 되는 종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고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이 세상에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구나. 그리고 이곳에서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접붙여진 사람들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한없이 감격하는 아름다운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감동을 줄 때에 그것이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 못지않게 큰 것은 성도들이 자기와 똑같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주님과 올바른 관계속에서 생활하는 성도들을 볼 때에, 아 이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강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완전하고 아름답고 선한 성도들이 되는 것은 이웃을 위한 최고의 봉사입니다. 최고의 봉사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I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결국 하나님의 집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원천은 따라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참 예뻐집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은혜를 받으면 참 예뻐져요.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얼굴 외모가 청년처럼 변하는 것 아닙니다. 뭐 만나서 말로는 젊어지셨습니다. 십년은 젊어 보입니다 그러지만, 뭐 말하는데 돈 들어가겠어요? 그런 거라도 인심을 써주면 듣기 좋죠. 그렇지만 늙은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늙은 그대로 있고, 얼굴의 질서가 없어서 못생긴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여전히 얼굴은 못생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원판을 바꾸시지는 않지만, 은혜를 받으면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 의미에서 아름답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함입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얼굴에는 매우 많은 수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넘칠 때에는 이 근육이 뭉치지 않고 엔돌핀이 돌면서 쭉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화사해보이고 그리고 얼굴이 아주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 얼굴에 악의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원망하고 맺힌 것을 풀지 않고 복수심에 불탈 때는 여기에 있는 근육들이 전부다 뭉쳐지면서 그렇게 온화하던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교회의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입니다.
A. 근원적으로: 교회 존재의 아름다움
그 집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알록달록한 수많은 전구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바랄 때, 아주 아름답고 예쁘지만 그것은 하나의 전기로부터 전기가 와서 모든 개별적인 전구의 불이 켜져서 아름다운 것처럼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리고 하나님자신이 그리스도의 하나의 몸인 교회의 존재를 맺으심으로써 교회의 존재가 그렇게 아름답게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존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는 이렇게 열린 교회, 무슨 교회, 무슨 교회도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주 전체를 휘도는 그 하나님의 보편교회,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를 망라해 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거기에 접붙여져 있는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이 각 교회 속에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에게 있는 것들을 없는 곳에 나누어 주고,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원들을 다른 교회에 보내주어서 그래서 평균케 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깨달은바 진리들을 어둠 가운데 교회에 나누어 주고, 물질을 나누어 주고 해서, 부족함으로 찌그러진 모습을 펼침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가 아름다움을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교회 전체를 그리스도의 전체의 몸의 어떠한 부분으로 부르시고 그 개개인은 부분의 또한 부분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통해 교회 속으로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강같이 흘러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분이 눈물과 피와 땀으로 당신 자신을 소진하시며 낭비, 허비하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을 때 그분이 그렇게 흘러가고 빼앗기심으로써 온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이 서게 되었었던 것처럼 이제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가지고 이 세상에 흘러가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교회는 나눠지지만, 세상 속에도 교회가 있고 교회 속에도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도 한 때 교회를 안 나오던 사람이었고, 세상 속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음의 물이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왔어요. 그리고 믿을 수 없었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들려주었고 믿을 수 없었던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을 통해서 받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것, 교회가 교회 속으로 흘러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이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이 교회의 존재의 아름다움이지만, 파생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용의 아름다움입니다.
B. 파생적으로: 교회 작용의 아름다움
1. 제도의 아름다움
제일 먼저 제도의 아름다움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교회 안에는 어떠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하는 제도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또한 질서의 제도가 있어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와, 교사와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있고, 그들이 각각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그들의 봉사를 통해 세상에 봉사하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 주는 제도의 질서가 있어요. 이 자체가 아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도를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영원한 복음 교회들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제도는 아주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에 이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작용들은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계신지 몰랐던 사람들도 그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혹은 치리를 받으면서 까지도 혹은 그 속에서 집사로, 권사로, 목사로 세워져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이 모든 제도 속에서 아주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기능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작용 안에 있는 기능의 아름다움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어디 가서 살아도 경험한적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용서해주지 않을 끔찍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하셔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와 놀라운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자비와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인생은 끝났고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우리의 인생의 날개를 스스로 접어버리려 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의 날개를 펴고 절망의 언덕에서 가로질러 나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입니다. 어디에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교회 와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속죄의 속죄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신 은혜를 찬송하며 드리는 교회 안에서의 기도는 매우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조지 휫필드가 마음에 주님 사랑이 식을 적마다 자기가 회심한 교회를 찾아가서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그 의자에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입 맞출 의자가 있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지체들과 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세상이었으면 당장 법정에서 세워서 고발을 해서 감옥에 쳐 넣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신 사랑 때문에 지체들을 용서합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평생을 원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품어주고 그래서 갖은 바를 나누기까지 합니다. 영적인 선행이 또 있으니 형제가 오류에 빠질 때, 겸손하게 진리로 그를 바로 잡아주고, 형제가 악에 빠질 때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그 형제를 하나님 거스른 그 길에서 돌아와 주님 앞에 다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용들 속에서 지체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주는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은혜를 받으면 다른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체들이 도움을 받게 되고, 또 그 도움을 받은 지체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면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 또 다른 도움을 줍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들끼리 살았다면 결코 흐르지 않았을 까리따스의 놀라운 사랑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눈을 뜨게 될 때, 그들이 이기심을 깨뜨리고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을 섬기며 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아랑곳없이 연약한 지체의 발을 씻기고 죄인들을 손가락질 하는 대신, 그들의 죄가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대신 간구합니다. 이 놀라운 것이 모두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입니다.
3.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들의 아름다움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들 또한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 벌레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원망하던 그 악한 강도처럼 하나님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주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해주신 위대한 힘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교만하던 자신이 얼마나 추루하고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 무엇을 통해서였습니까. 놀랍게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무지하기 이를 때 없는 인간이 진리의 말씀을 접할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는 밝은 빛을 보게 되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나님이 진리의 주인이시고 참으로 선하신 분이시며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처음에는 함께 원망했으나, 회개하던 한 죄인이 고백한 것 같이 이 분은 잘못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다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IV. 교회의 아름다움: 말씀과 성령의 일하심
하나님의 진리가 이처럼 아름답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처럼 달콤한 줄은 몰랐는데, 주님이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이 진리가 아름다운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셨고 하나님은 그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위탁하셨기에 교회는 그 진리를 통해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눈뜨는 곳입니다. 눈뜨는 곳입니다.
(예화) 그래서 제가 아는 맹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매일 하는 일이 있어요. 뭔지 아세요? 책상 서랍에서 고운 샌드빼빠,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고운 모래 알갱이가 붙은 빼빠있죠? 빼빠. 그것을 가지고 지문을 지우는 것입니다. 왜 지장이라도 찍으려면 있어야 하는데 왜 지우냐. 이것을 계속 지워서 어린아이 볼처럼, 입술처럼 아주 말랑말랑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렇게 읽으면서 점차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만 안하면 두툼해져서 점자를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맹인들도요 5천 원짜리 만 원짜리 정확하게 구분을 합니다. 왜냐하면 만질 수 있는 표식이 찍혀 있어요.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비늘을 벗겨 회심과 같이 깨어나게 하실 때에는 초롱초롱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늘 회개의 눈물로 끊임없이 그 눈에다가 안약을 넣어야해. 이 쪽 눈에는 신약을 이 쪽 눈에는 구약을. 그래서 그 약을 통해서 계속 연고를 바르고 해서 눈을 건강하게 간직을 해야지만 하는데, 백태가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를 멸시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추루하고 더러운 인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보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갈 길이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릎을 꿇고 주 앞에 오직 사람을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흔들리던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확신이 없던 마음에 불같은 확신을 주시고, 비겁해서 하나님 앞에서 미끄러질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셔요. 그래서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방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그 받는 은혜는 얼마나 커요? 저는 회심하고 나서 그 성찬을 1년에 두 번씩 하는 게 그렇게 섭섭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운데, 이렇게 은혜로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성찬이 있는데, 우리 아들을 앉고 유아세례를 받는 날인데, 돌쯤 되었나, 돌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게 하려고 안고 성찬을 받는데,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요한복음 3장 16절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더라고요. 아, 이 아이가 내 품에서 독생자인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을 받으시는 독생자이셨는데 나에게 이러한 질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너는 이 아이를 그렇게 내어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례, 성찬 안에서 재연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축사와 함께 그분의 떡을 찢을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자기의 살을 찢으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 잔을 마실 때,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성찬과 함께 드러나요. 그래 내일 모레 성찬 하잖아요. 깜빡 잊었죠? 내일 모레 성찬 합니다. 성찬 할 때에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십자가 사랑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깊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도 그러한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를 장사지내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놀라운 세례를 통해서 감격하게 됩니다. 세례를 줄 때, 이렇게 기도를 해주면 견딜 수 없이 억제할 수 없이 흐느끼는 지체들이 있어요. 이 쓸모없는 인간이 과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하면서도 구원하실 필요가 있는 인간이었을까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셔서 미끄러진 나를 다시 이끄시고 쓰러진 나를 다시 세우시고 더러워진 나를 다시 씻기셔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몸의 한 부분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머리이시기도 신랑이시기도 하신 그분의 아름다운 신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동안 우리들이 마음에 간직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는 우리가 주의 순전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몸의 순결을 결혼의 최고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중에는 과거에 죄인이었던 사람도 있고, 전과자였던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매춘부였던 사람도 있어요. 회개는 그들을 깨끗케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정결케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예수의 몸으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시 아름답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를 그렇게 깨끗케 씻겨 주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살도록 날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우리가 옳게 믿음생활을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깨끗케 하셔서 다시 주의 몸에 아름다운 한 신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의 남편은 한때 우리의 부정을 용서한다 할지라도 잊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으셔서 용서하시고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V. 결론: 영원히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래서 주님께서는 결국 영원히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때로는 많이 부족한대도 용납해주시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혼내 주셔야 할 시간인대도 오히려 주님이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셔서 위로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에 부어주신 한량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에 접붙여진 지체이기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소중히 여기며 거기에 붙어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사랑과 영적 교통의 축복,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고난과 시련의 광야를 지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디에서 노래했습니까. 그들은 그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노래했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베푸시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이스라엘의 전체를 향한 구속의 은혜에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 접붙여진 지체들이 사랑으로 깊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나의 사랑이 그에게로 흘러들어가 우리 모두 각기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는 나, 너의 구별 없는 한 몸인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복음적 교회의 아름다움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자기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은혜의 정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다운 영혼으로 선한 의지로 그리스도의 건강한 한 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름다워 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아름다움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용서, 자원들의 공급을 통해 이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인하여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 여러분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지금도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인간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우리 같은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셔서 남에게 모르는 복음을 일러주셨을까요. 돌처럼 굳어져 녹아내릴 수 없는 우리의 마음에 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녹여 결국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께서 날 위해 큰 고난을 당하셨도다라고 노래하게 만드셨을까요. 아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 우리가 없었더라면 덜 아름다울 교회를 우리로 말미암아 더 아름답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또한 지체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신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읍시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합시다. 마치 그분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인생 전부의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수난의 주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 주의 신부로써 다짐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