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신앙과 신학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계몽주의자들이 이성과 신앙 사이의 조화를 시도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유는 윤리적 사회의 실현을 위한 도덕의 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형태의 무신론들(반신론, 무신론, 신무신론 등)이 종교를 논할 수 있는 것인지, 논할 수 있다면 근거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계몽주의자들이 이성과 신앙 사이의 조화를 시도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유는 윤리적 사회의 실현을 위한 도덕의 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에 그렇게 썼습니까? (네.)
이것은 이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계몽주의자들에 와서 생겨난 것은 아니고 이미 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기독교가 시작하면서 이미 벌써 저러한 노력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한 획을 중요하게 그은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어거스틴이 어떤 의미에서 아주 커다랗게 총정리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계몽주의에 와서, 계몽주의도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저 위에 유신론적인 경건한 계몽주의부터 시작해서 저 밑에 무신론적 계몽주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대세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인정하는 계몽주의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거기에서 이성과 신앙 사이의 조화를 시도하고자 하였던 것은 중세시대 때에는 상당히 중세철학자들이 아주 번세한 방식으로 이성적인 탐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당시 새롭게 폭발하고 있는 이성의 힘들, 특히 누가 여기에서 질문자도 말하였는데 오캄이라든지 니콜라스 쿠자 라든지 이러한 새로운 사상, 그동안의 중세의 세계관들을 허무는 새로운 사상들이 발출하고 뛰쳐나오고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이제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그러한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는, 그러한 바뀌어 진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에 여전히 중세시대에는 이성과 맞서는 종교를 주장하고 있고 폭압이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속에서 이성의 입각성을 둔 신앙에 대한 재해석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18세기, 19세기 넘어오면서 여러분들이 지금 오늘날 공화국의 이념을 수립하게 된 존 로크나, 루소, 홉스, 이러한 사람들. 로크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보았고, 그다음에 이제 루소나 홉스 같은 사람은 계약 이론에 의해서 대의제의 길을 열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공화제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사상적 기반을 놓았던 사람들도 모두 결국 이성에 용납되기 어려운 성경의 초월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이성화시켜서 재해석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후에 20세기에 일어났던 볼트만의 비신화의 운동이라든지 이러한 것들도 보면, 결국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자들이 가지고 왔었던 이성과 신학에 대한 관계들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을 때 그 중심점이 이성의 입각점을 둔 신앙의 재해석을 통한 조화, 그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 뉴턴 주의가 나오고 하면서 이신론적으로 기울여지는 사상적인 배경들이 거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자들도 싸잡아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접근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도덕의 근거를 논하는 문제입니다. 체스터턴이 이야기하였듯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한번 붙어볼래?” 확 싸웁니다. 주먹다짐합니다.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이길지 모르지만, 피 터지게 싸울 것이고 상대방이 만만하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자기들이 서로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심각하게 손해를 입고 또한 그것을 지켜봤던 사람들이 ‘저 개자식들이구나.’ 그러한 도덕적인 평판들도 잃어버리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것은 참 안 좋겠구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싸우는 것은 안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사람들 속에 관념으로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심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은 어쨌든 나쁜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이 딱 있게 되었다는 것, 이 자체가 종교적인 관념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반신론, 무신론, 신무신론 등등 그들의 말들이 나오는데, 여러 가지 무신론과 도덕적인 근거를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는데, 그것이 사실 무신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제일 큰 약점입니다. 그것들을 대부분 어떻게 보는가 하면, 두 가지로 보는데, 사회적 합의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사회적인 합의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무슨 정의문제라는 것도 결국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야기하면 길지만, 그런가 하면 그것을 아예 스토아 철학 같은 데서는 아예 인간 본성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라 봅니다. 굳이 종교 이야기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인간 본성 안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면 인간이 행복하고, 악을 행하면 인간 스스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지고 도덕적인 근거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덕철학에 있어서 종교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도덕을 논할 때, 그것이 정말 불변하는 도덕률인가, 그것이 끊임없이 변천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 내가 행하는 부도덕적인 행위는 지금 A라고 규정되어 있는 도덕률들을 사실 B라는 곳으로 옮겨 가고자 하는 자유에 가장 탁월한 표출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를 떠나서 저러한 도덕을 논하는 것이 굉장히 근거적으로 어려운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회적인 협약이라 보는데, 인간 안에 본성이라 하는데 그 본성에 대해서 키케로도 결국 본성이라는 말을 수없이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서로 다 알 수 있는 우리 영혼의 그 무엇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명확합니다. 그래서 이제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유신론을 배제하고 나면 무신론으로 떨어지게 되면 도덕에 대하여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 내가 그 행위를 할 수 없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 근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근거가 진짜 근거인가 묻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것입니다.
최근에 별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1년 되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한 사건이 있었는데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뒷좌석에서 남녀가 성행위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막 손가락질을 하니까, V자를 그리면서 그 행위를 계속한 것입니다.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왜 우리가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피해를 주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그러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부터 시작해서, 국가와 가족과 인간사를 연결하는 많은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다음 문제 하겠습니다.
질문2)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섭리가 다스리는 것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적 주의주의와 비교했을 때,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것은 각각 서로 다른 이야기인데, 위의 것을 설명하면 “인간 의지를 하나님의 섭리가 다스리는 것이라 서술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첫째는 인간이 자기 홀로 무엇을 결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그 일들 안에서 일어나고 인간은 한편으로는 원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자기가 그 행동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은 돈이 생각이 나서 예수를 판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판 그것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는데, 만약에 유다가 예수를 팔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체포되고 심문받고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를 죽게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끔 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합치하는 방식으로 그 뜻을 이루는 것인가, 혹은 악하게 행하는데 하나님께서 더 큰 지혜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가에 따라서 결국 개인에게 돌아가는 응보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굳이 도덕적인 개선이나 변화를 위해 애써야 할 이유가 없구나.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의주의를 이야기하였는데, 주지주의, 그다음에 주정주의, 주의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아퀴나스 같은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라 주지주의적인 전통적인 입장이 매우 강하였고,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의주의는 도덕적인 선택과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엄밀하게 말하면 절충적 주의주의입니다. 어떻게 절충이 되는가 하면, 인간이 선을 행하였을 때는 자신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온전한 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선 작용이 없으면, 선제적으로 주어지는 유효인이 없으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을 행하고 나면 자기가 선을 행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가 그것을 가능하게끔 해 주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에 대해서는 조금 다릅니다. 죄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무 도움 없이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게 자신이 결정해서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충적 주의주의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결국 악을 행하였을 때는 누가 악을 행하게끔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는 마니교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마니교에서는 우리 안에는 성선과 악선 두 가지가 있어서 이 둘이 내 안에서 서로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우리가 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악을 행한다면 나 자신도 지고 있는 성선의 피해자라고 하는 해석을 해서 도덕적인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였고, 이것이 지성인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얻으면서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견해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깨달으면서 내가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 때문인데, 그것도 내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면서 자아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과 공부를 할 때 이야기한 것 가운데 ‘의지의 병’. 의지가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악입니다. 의지가 건강한 것은 무엇인가. 의지는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그냥 있도록 나온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 의지가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질병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핍된 것만큼 결국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죄를 짓는 결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됐습니까? 그다음 3번 하겠습니다.
질문3) 존 프레임은 <서양철학과 신학의 역사>에서 철학과 신학, 국가와 교회, 자연법과 신법,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종합을 추구하는 자는 ‘종합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종합주의가 가지는 위험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3) 종합은 ‘synthesize’이고, 통합은 ‘integrate’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만약에 저 주장을 잘못 이해하면, 철학은 신학과 아무 상관이 없고 국가는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고 자연법과 실법은 아무 상관이 없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고, 문화는 문화라고 이와 같이 이해하기 쉬운데, 존 프레임이 이야기한 저 이야기의 핵심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철학과 신학이 있는데 처음부터 기원 자체가 다릅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시작하고, 철학은 이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로 틀을 세우고 그 사이를 이성의 추론으로 연결해서 성경 자체가 말하는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 신학의 방식이라면, 철학은 순수하게 이성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을 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이미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계시를 떠나서 인간의 이성만으로서 그러한 어떤 완전한 사상을 세울 수 없고,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별고의 성경이나 신학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종합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까 우리들이 계몽주의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종합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이미 관점 자체가 성경의 관점에 서 있는 것을 종합이라 이야기하지 않고, 이미 철학의 관점에 서서 신학을 철학으로 종합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기존에 이성으로 세운 사상에 적합하지 않은 계시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탈각시키는 방식으로 종합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국가와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자연법과 신법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문화를 맞추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먼저 놓고 그리스도를 맞추고, 그래서 대표적인 것이 슈바이처를 비롯해서 계몽주의, 자유주의자들이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속죄는 무슨 얼어 죽을 속죄인가. 예수가 오신 것은 어쨌든 싸우지 말고 너희들이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놓고 그것에 부합하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이고 첨가시키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상반되는 것은 탈각시키고 깎아 내면서 그러면서 인간중심의 문화와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양립할 수 있는 그리스도상을 만들 때, 그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종합이 되면 결국 기독교의 고유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synthesize’가 아니라, 처음부터 ‘synthesize’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integrate’라고 하는 종합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이시고, 당신이 진리이심을 인류 세계와 자연 세계 속에 표출하셨을 것 아니겠습니까. 표출하셨으면, 그렇다면 결국 세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을 가지고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모으는가, 그래서 그것을 수립하는가가 관건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학은 그냥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학문이 되고, 철학은 그냥 자기 갈 길로 가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부들과 종교개혁신학자들이 했던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의 지력이 모자라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진리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진리에 대한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진리는 워낙 높은 수준의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일단은 그 진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초로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은 지혜를 구하면서 찾아가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성경과 계시라는 것을 중심으로 놓고 이성적으로 열심히 탐구해서 이 세상에 있는 철학들이 어느 지점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부분을 이탈하였고, 어떤 점에서는 그래도 그 진리의 일부라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비평적으로 평가해서,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그 작업을 ‘엘렝틱스(elenctics)’라고 이야기합니다. ‘엘렝틱코(elenctico)’, 책망하다라고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인데, 입각점을 성경 계시와 신학에 두고 철학들을 비판함으로써, 심지어 신학까지 비판하고 철학까지 비판함으로써 그러면서 기독교적인 관점을 세우는 것입니다. 학문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폭이 넓어지게 되어서 결국 많은 것들을 비평하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가려내고, 옳은 것들을 인정하고, 그래서 결국 그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철학을 하게 만들고 올바른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도 갖게 만들고, 자연법이 신법을 반영하게 만들고, 그다음에 문화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융성하도록 만들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것을 나는 ‘통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자기가 성경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점을 두고 그렇게 나머지 것들을 해석하고, 그러한 모든 사상과 국가, 인간의 질서를 규정하는 법,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활동의 결과인 문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 소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질문4) 타락 전 최초의 아담과 하와는 지식을 습득하는데 온전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이성과 신앙 사이에 갈등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4) 「신국론」에서 어거스틴이 인간을 상태에 따라서 넷으로 나누는데, 처음에는 인간을 posse peccare-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그다음에 타락한 다음에는 non posse non peccare-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 중생한 다음에는 posse non peccare-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인간, 그리고 천국,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는 non posse peccare-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의 인간, 이렇게 이제 ‘posse’와 ‘peccare’를 가지고 ‘non’을 왔다 갔다 하면서 네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이것은 사람에 대한 유명한 분류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인재론을 깨끗이 인간의 상태와 죄의 관계를 정리한 것입니다.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완전하였습니다. 완전하였는데 그것은 이제 신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안전한 완전이 아니라 불안전한 완전’입니다. ‘unsafe perfection’입니다. 절대로 변동될 수 없는 안전한 완전이 아니라 완전하기는 한데 불안전한, ‘unsafe’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unsafe’하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불완전한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이 이제 인간의 위대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은 절대적인 독립적인 존재이시지만, 인간에게 당신의 그 절대적인 독립성을 닮은 독립성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부여하셨습니다. 그 독립성은 주체성과도 관련이 되는데 그들이 당신을 닮은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 넓게 보면 지성으로 생각하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로 결정하는 그것을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결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존중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제 갈등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었지만 모두 이성으로만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지적인 존재였으므로, 하나님이 눈으로 이렇게 보이시도록 나타나는 분이 아니고, 창세기에 그러한 표현이 있지만, 그것은 ‘언트로 포 모피즘’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어컴모다치오(accommodatio)’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때에도 처음부터 인간에게 하나님이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을 함께 주십니다. 하나가 이성이고, 하나는 신앙입니다. 두 개 다 합쳐서 지성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눈에 보이는 감각할 수 있는 사물은 이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이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형이상학적인 추론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모두 이성에 속합니다. 그런데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 하나님의 존재라든지, 하나님의 신실성이라든지 그 당시에도 이러한 것들은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이 세상에 만드실 때 두 가지 능력을 함께 주셔서 성숙한 상태에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는 갈등이 없고 이성 때문에 신앙이 빛나고, 신앙 때문에 이성이 빛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떠나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논쟁이 많이 되는 게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토탈 디프레비티(total depravity)’ 입장에서 보면 죄인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죄를 선택하게 된다는 이러한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처음에는 죄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죄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그러한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토탈 디프레비티(total depravity)’의 문제를 거의 숙명처럼 강력하게 변증하면 변증할수록 맨 처음에 왜 죄를 짓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는 데 있어서 난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불안전성의 가능성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이 저렇게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조차도 막으실 수 없었겠습니까?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하는 그것을 막으시는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 그 자체를 주체성으로 보고 인간이 그렇게 주체적으로 한다면, 그렇게 하게 놔두자, 그러한 정도로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존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르네상스 때에 피렌체의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냥 학자라고 말하겠습니다. 철학, 역사, 문학, 세계의 모든 사상을 통찰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라는 사람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는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번역도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미리 정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자유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는 다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하나님이 주체적인 행위라고 보고, 그것을 당신이 기뻐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놔두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면일리를 가지고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5) 존 오웬이 말한 ‘마음의 성향’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죄의 경향성과 은혜의 경향성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방향을 정하는 힘’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사랑에 대하여 알아갈수록 사랑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정의인지 궁금합니다.
답변5)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은 성향입니다. 사랑이 무슨 성향이라고 하였습니까?
(김동기 목사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
다른 사람 있습니까? 사랑이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이지연 전도사님: 이끌리는 방향성)
그것도 반쪽짜리이고. 요새 삼위일체 열심히 공부하는 목사님 이야기 해 보십시오.
(김기훈 목사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만족스러운 답 없습니까? 누가 해 보겠습니까?
(대답 : 알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도 다 포함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을 넓게 이야기하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like’입니다. 사랑을 엄밀히 말하면, 영혼을 가진 피조물들끼리만 사랑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면 그냥 ‘like’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침에 신학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사랑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바람이 부는 저녁 시간에 호숫가에서 읽는 한 편의 시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코코를 사랑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개와 인간 사이에는 사랑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피조물들끼리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쨌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사랑을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는 ‘사랑’하면 사랑이 발현되는 모습에 대한 인상이 우리의 뇌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 울고 괴로워하더라. 이렇게 현상적으로 보니까 그러한 노래의 가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또 뭐라고 하였습니까? 옛날에 보면 “Love is ….” 시리즈들이 계속 나왔었습니다. 사랑은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 등등. 그것도 사랑 자체가 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면 무엇인가. 행위로 나타나기 전에 먼저 그 사람 안에서 결국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무엇이라 이야기하였는가 하면,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해됩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의 만족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향이고 그다음에 사랑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없었던 관계는 수립하고 있던 관계는 더욱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관계의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당연히 사랑은 방향을 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어느 방향을 향하여 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을 ‘인크리네이션(inclination)’, ‘프로펜시티(propensity)’, ‘디스포지션(disposition)’ 이러한 말로 설명을 하는데, 모두 다 방향성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음, “사랑에 대해서 갈수록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니까,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정의인지 궁금합니다.” 사랑은 다 설교에서 한 이야기인데, 사랑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없는 관계는 맺고, 있는 관계는 더욱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 사랑의 감성 안에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처럼 여기게 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여기게 되는데, 저 사랑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신데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 그래서 다양한 사랑이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합되는 그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 사랑을 근원으로 삼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비전 오브 러브(Vision of Love)’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읽어보고, 또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번에 하였던 사랑에 대한 것만 잘 이해해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좌절할 정도로 그렇게 절망적인 주제는 아닙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