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신학과 존재의 울림
녹취자 : 김세나
[선별질문]
질문1) 신데레시스(synderesis)란 보편 가치에 대한 공통 감각이라고 설명해 주시며, 호메로스(Homeros)가 사용한 테레오(τηρεο)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심하게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테레오(τηρεο)가 어떻게 ‘보편 가치에 대한 공통 감각’이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신’(syn)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입니다. 그리고 ‘신데시스’(syndesis)는 ‘종합’입니다. ‘애널리시스’(analysis)는 ‘분석’입니다. ‘신’(syn)이 들어간 것은 많습니다. ‘신에스트로마이’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부터 시작을 해서 ‘신아고개’-‘아고’는 ‘인도하다’, ‘신’은 ‘함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심하게 지키다’, 어떤 규칙이 있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이 다 공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데레시스’라는 말이 나중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신데레시스’라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사용하였는지 추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지금이야 별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지만, 옛날 근대가 열리면서 인간 이성을 종교에서 해방시킨다고 하는 기치 하에 인간 이성에 대한 가치를 높이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규율할 수 있는 것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것이 신, 하나님이었는데 그것을 제외해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신데레시스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데레시스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이 없어도, 신을 상정하지 않아도 능히 그 신데레시스의 합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결국 이성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보면서 사실은 근본적으로 인본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실존주의나 다다이즘 같은 것들이 나오면서 그것조차도 허물어지지만,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듯이 이성이 있고 그 위에 은총,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이성이 있고, 신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고, 인간 위에 ‘신데레시스’가 있고, 그 다음에 ‘신데레시스’가 무엇인가 하면서 저항하고 해방하는 운동이 일어나서 결국 인간은 하나의 단자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결국 각자 자신의 이익에 맞게끔 사회의 합일을 이루면서 가는 것이고 진리는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적인 사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목에 서 있는 단어입니다.
질문2) 플로티누스가 자신의 책 「엔네아데스」에서 “…따라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선과 함께 추함과 악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아름다움과 함께 추함과 악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2) 지연 전도사, 여자가 얼굴이 참 예쁘다고 말하려면 무슨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까? 대충 말해 보십시오. 여성이 얼굴을 볼 때 ‘저 여자 참 예쁘다!’라고 할 때 생각나는 대로 조건을 말해 보십시오.
(지연 전도사님 : 조화가 잘 이루어졌을 때.)
한 명씩 이야기해 보십시오. 어떤 여자가 예쁩니까?
(균형이 잘 맞는 여성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균형. 잘 이야기 했습니다.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3cm만 높았어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못생기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무질서….)
그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조건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철학적으로 없음이 없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없음이 없다.’라는 국어적으로 보면 무슨 뜻이 됩니까? 국어적으로, 논리적으로는 되는데 철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없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없음이 꼭 있기 때문에 없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없음이라는 말에는 없는 것은 또 없다는 이야기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쁜 것은 조건이 필요하지만, 못생긴 것은 조건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조건에서 멀어지고 이탈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추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추한 것이 아니라 미의 결핍이 추함입니다.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설교 듣고 강의를 들어서 다 알지만, 악은 선의 결핍입니다. 플라톤이 이야기 한 것인데, 그것으로써 일자 사상을 설명합니다.
「엔네아데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로티누스는 신플라톤 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추함과 악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아름다움과 선은 실체가 있지만 추함과 악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탐구하고 나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을 때, 그것을 은혜의 결핍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속에는 다 죄만 있겠네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신데레시스’도 그 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살인하면 안 된다고 하는 공통적인 감각을 주셨습니다. 누가 그것을 설득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체스트턴이 이야기하였듯이 “우리 서로 이렇게 하자.” 이것이 도덕이 아니라 신 앞에 깨달은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살인하면 안 되는구나!’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신데레시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전혀 없을 때에는 인간사회도 동물사회와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은혜와 특별한 은혜가 함께 작용하는데, 안 믿는 사람에게는 일반은혜가 작동해서 ‘신데레시스’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좌·우파의 치열한 갈등이나 모순 같은 것을 보면서도 우리들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정의당 국회의원 한 명이 나와서 신금을 울리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누구 사람 욕하는 것도 아니고 일갈을 하였습니다. 사람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공평과 정의를 위해서 사람답게 존엄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순국의 길도 마지않던 그 뜨거운 신념은 어디 갔는가? 어디로 갔겠습니까? 어디로 가긴, 그 심장이 다른 심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순교하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한 3년 동안을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갔습니까. 가긴 어딜 갑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진 것만큼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이 추함과 악을 탐구하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탐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많이 알고 선을 탐구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추함과 악에 대한 지식을 저절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죄를 알게 되는 것이지, 죄를 탐구한 사람이 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래서 그런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지폐 감별기가 다 있습니다. 이제 굉장히 고도화되어서 그것을 통과하는 것들이 북한 같은 데서 나오고 있습니다. 옛날에 직장 다닐 때 한국은행에 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직원들이 서로 이야기하면서 돈을 셉니다. 그런데 쫙하고 위조지폐를 잡아냅니다. 위폐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정폐를 하도 일평생 만지니까 이야기하면서 만지기만 하여도 그것이 위조지폐인지를 단번에 아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질문3) 신학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세상 학문의 언어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진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코딩 교육,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같은 다양한 방법론을 도입하게 될 때,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3) 이번에 내가 쓴 책은 내 인생을 바꾼 어거스틴의 여덟 문장인데, 여태까지 내 책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다른 필체로 썼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SNS 방식의 소통과 실질적인 소통을 결합을 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저러한 접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가르치는 사람이 종합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면 부분을 가르쳐도 종합으로 연결을 할 수 있는 힘이 가르침 안에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그러한 종합의 능력이 없을 때에는 종합적으로 가르쳐도 파편화가 됩니다. 참 신기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해체주의자들이 de-constructor인데, 해체주의자들이 미셸 푸코나 쟈크 데리다나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 놀랍게 어거스틴에 대한 출전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종합을 아는 사람들이 해체를 하는 것입니다. 종합을 배운 사람이 아니면 해체를 못 하고, 해체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종합을 하지 못하는 극과 극이 서로 통한다는 원리를 거기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저러한 방법이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저러한 방법에 심취하면서 점점 더 체계적인 사상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학문은 서사입니다. 그리고 지식의 힘, 사상의 힘은 서사의 힘입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어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하는 말하자면 남한에서 수신하는 북한의 단파방송의 지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난수표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 이야기도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백과사전과 살았다고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어렸을 때, 백과사전과 가까이. 누구입니까?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히려, 백과사전이 영어로 무엇입니까?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안 가르쳐 줍니다. 다음 문제 하겠습니다.
질문4)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신 성경 읽기와 묵상은 신학적 성경 읽기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먼저 통독을 하다가 특별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서 멈춰 그 부분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묵상하고 삶의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묵상의 실력과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성도들의 경우, 통독과 QT 책을 활용한 묵상을 각기 따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타 교회에 비해 QT에 대한 강조를 상대적으로 덜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QT에 대한 담임목사님의 생각이 어떠하신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답변4)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그나마 성도들이 QT 하려면 성경을 읽어야 하니까, 성경을 읽고 거기에서 자기가 생각을 한다고 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것이라 봅니다. 그러한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은 신학의 훈련이 안 된 성도들이 성경을 펴고 상상의 나라를 펴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컬한 해석으로 가고, 심지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거기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목회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학생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을 읽다가 자기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데, 그물을 던져서 153마리가 잡혔는데 자기가 밤새도록 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험번호가 153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붙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비장한 말씀이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책은 뭐냐 하면, 성경공부와 기본적인 신학공부들을 성도들에게 잘 시켜서 그러한 해석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ESV성경만이라도 다 통독을 해도 사실은 얼토당토않은 해석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교육을 잘 시키는 방법이 있고, 사실은 QT집이 있다고 하는데 QT집은 남이 QT한 것이지, 자신이 QT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QT를 한 3년 동안 기고를 하였습니다. 목회자들을 위한 QT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란노에 나오는 책이었는데, 그것을 단골 저자로 성경 여러 군데를 왔다 갔다 하면서 3년 이상 썼습니다. 결국 자기가 읽으면서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강조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성경은 성경대로 열심히 읽으면서 ‘아, 하나님이 오늘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배워나가고 설교를 들으면서 구체적으로 깨달은 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적용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야 할 시리즈 50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따라가면서 듣고, 실제로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해 보니까 성도들에게 QT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보다, 그렇게 설교 테이프를 듣고 함께 모여서 나누고,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르쳐주고 하면서 신앙이 자라는 성도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많이 안 하지만, 여러분들 선배들은 일주일에 두 클래스씩 운영을 하였습니다. 15명에서 20명 모아놓고 고린도전서 13장을 비롯해서, 옛날 설교들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 듣고 오게 하고 한 사람만 발표하게 하고, 다 들은 다음에 교역자가 코멘트해주고, 그 다음에 같이 기도하고, 그러는 것이었는데 설교를 듣는 자체에서 놀라운 믿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열린교회를 일구어온 한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들은 이제 주일설교 듣는 것만으로 간신히 따라오는 분들이니까, 그런데 그러한 영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있으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잘 찾아내서 계속해서 교육하고 자극하고 하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신학적인 질문들을 하지 않습니까. 참, 오늘 뭐 하지 않았습니까?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뭐였습니까?
(빛의 절대성과 가변성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가변적이고,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세상 학문과 절대적인 신앙과 신학 사이에서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보일 수 있으나 그것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한 절대성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안셀무스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차원의 하나님이십니다.” 1차원은 점과 선입니다. 2차원은 평면입니다. 3차원은 입체이고, 4차원은 시간입니다. 거기까지 밝혀진 것입니다. 5차원서부터는 식으로는 나오는데, 그게 진짜 어떤 공간인지 인간이 예측을 못 합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 그러한 것입니다. 수식으로는 풀리는데, 실제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경험치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 인터스텔라 같은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서 어떤 규칙을 발견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규칙이 일정하고 항시 통용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진리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학문적인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것들을 이때까지 있었던 가운데, 늘 있었지만 가장 집대성하고 종합적으로 해서 자연의 모든 현상을 수학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뉴턴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린키피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루크레티우스 같은 경우를 보면, 그때 벌써 그의 기록에 보면 전염병이 세균에 의해서 옮겨진다고 하는 통찰이 나옵니다. 그리고 원자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모든 물체가 아주 작은 물체로 이루어졌고, 당시 페스트가 전파될 때 “아무개 동네 사람들이 와서 그 병의 씨앗을 뿌리고 갔다.” 놀라울 정도로! 벌써 이러한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사람들이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벌써 알렉산드리아 시기이니까, 주전 250년경에, 놀라지 마십시오. 주전 250년경에 지구의 둘레와 직경, 크기, 모양을 완벽하게 계산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위험한 지식이었기 때문에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동그란 것까지는 확인하였는데 왜 이것이 안 떨어지고 붙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했는지 아십니까? 알렉산드리아를 기준으로 해서 각 지방마다 관측소 같은 것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관측소를 세워 놓고 몇 시를 기준으로 몇 미터의 막대기를 세워 놓았을 때 몇 센티미터의 그림자가 생기는지 다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다 받아가지고 학자들을 모아놓고 자기들의 각 제국의 자료들을 모아놓고 볼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같을 줄 알았는데 다 길이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을 비율을 다 재서 시간을 다 맞춰보니까 결론은 지구가 동그랗다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안 쏟아지는가? 무시무시한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소수의 사람들만 딱 간직하고 발표를 못 하였던 것입니다. 피타고라스 같은 경우도 역시 수를 하나의 종교화하였습니다. 수학을 아는 것은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물건이라고 보았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의 비밀들이 간직되었습니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아직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사람들에게는 아주 신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빛의 재발견에 의해서 룰이 깨지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엎치락뒤치락하긴 하였지만, 빛이 중력에 의해서 휜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시간의 개념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을 때 사람들은 안 믿었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천문학적인 실험의 결과가 나오면서 정확하게 사실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무슨 뜻이 나오는가 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진 한도 안에서의 통용되는 법칙인데 결국 위의 거시세계로 가든지, 그 이외의 미시세계로 가든지 할 경우에 위로 올라갈 경우에는 천문학적인 세계가 되는 것이고, 아래로 내려갈 때에는 서보아토믹, 원자 이하의 세계가 되는데 적용되는 법칙들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면서 사실은 그 과학적인 발견이 윤리와 철학에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것을 1900년대에 발견이 되면서부터 사실은 도덕적 회의주의 같은 것들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사실 그 책에서 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들이 절대시하고 있는 그밖에 또 다른 하나님의 법칙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실은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법칙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과 신의 세계가 인간보다 훨씬 더 무한하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변증하는데 그게 거기에서 나오듯이 보면 제일 처음에 과학은 파동에서 시작이 되지만, 그게 문학으로, 철학으로, 제일 먼저 과학에서 발견되고, 예술로, 문학으로, 철학으로, 온갖 사조로 번져가면서 큰 파동을 일으키면서 하나의 장대한 변화를 가지고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는가에 따라서 나는 오히려 그러한 상대주의를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성에 대한 심오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도시 미학이나 조경학 같은 데에서도 그렇게 나와서 라빌레뜨의 퐁테(Porte de la Villette) 이야기도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