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의 중요성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레 24:1-3)
녹취자: 최영순
압력을 가해서 올리브 감람 열매를 누를 때 나오는 기름은 거기에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불순물이 섞이게 마련입니다. 그 불순물이 다름이 아니라 기름이 아닌 올리브 과육이나 함께 섞인 다른 이물질들이 섞여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순결한 기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기름에 이물질이 섞여있다면 불을 붙일 때 순수하게 기름이 타질 않고 이물질이 타면서 그을음과 연기를 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불의 밝기도 현저히 떨어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그을음으로 성소가 그을르게 됩니다.
여러분 연세드신 분들은 옛날에 우리가 호야나 등잔불을 쓰던 시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밝기를 좌우하는 것은 두가지인데 호야의 성능이 좋은 것이어야 하고 두번 째는 기름입니다. 기름도 주유소에 가면, 그 때는 주유소도 별로 없었지만 기름가게에 가면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비싼 기름이 있고 저소득층을 위한 싸구려 기름이 있었습니다. 비싼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번 정제과정을 거쳐서 아주 고급의 등유를 만든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고품질의 백등유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불을 붙이고 호야의 심지를 올려도 검은 그을음이 거의 나지 않고 불빛이 아주 밝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싼기름을 사서 불을 켜게 되면 불을 올리면 하얀 불꽃이 나는 게 아니라 붉은 불꽃이 나면서 그을음이 아주 크게 올라갑니다. 밝기도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압착기에 집어 넣어 프레스 방식으로 짜낸 기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름임에도 불구하고 성소에 사용하는 기름은 그런 방식으로 짜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 입니까? 올리브를 절구같은 데 놓고 쿵쿵쿵 두들겨서 크러쉬되면 자연적으로 기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정성껏 채집하는 것입니다. 누른 것이 아니라 깨뜨려지면서 바로 쏟아지는 기름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섞여있지 않고 올리브 속에 있는 기름 그 자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성껏 채집해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게 깨끗한 기름을 만들어서 그것으로서 성소를 밝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밝혀질 때 찬란한 빛이 하나님의 성소를 밝혔고, 그 빛 때문에 거기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었고 그들이 섬기는 섬김을 통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총체적인 주제는 죄있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정결의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타헤르라고 하는 히트파엘 동사로 사용되는 히트타엘이라는 정결의 동사가 사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까리호이호이카탈로이‘ 하고 카탈로이 혹은 카탈로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적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희랍어이지만 희랍어를 말할 때 마태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히트타엘 혹은 타헤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마까리호이호이카탈로이 할 때 여기에서 영어단어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씻겨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인간의 수도 활동같은 것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깨끗게 한 그래서 인간의 의로서 하나님 앞에 의로서 나아가는 수도자적인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제의에 의해서 씻겨서 정결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했을 때 이것은 팔복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복이고 역설적으로 바리새인과 의로운 율법사들은 소유하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정결함을 오히려 창기와 새리같은 사람들이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제의의 정결의 맥락에서 이 기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주 뛰어난 ? 일관성있는 구속적인 개념들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 찬란한 빛과 그 빛을 발하게 하는 기름을 준비하는 기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신학함에 있어서 성경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그렇게 감람을 깨뜨려서 흘려나온 기름을 채집하여 그것으로서 성소를 환하게 밝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최고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에 대한 생각이 경영을 하고 회사를 맡아서 운영하는 사람같은 퀄리피케이션(qualification)이 많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가 특별하니까 그런 일도 우리에게 필요할 지도 모르지만 윌리엄바크가 말한 것처럼 목사는 행정가일 수도 있고 뛰어난 전략가일 수도 있고 훌륭한 설교가일 수도 있고 아주 탁월한 상담가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성경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 이 등불의 기름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각 사람들에게 부어지지만 그러나 성경은 일관되게 그러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런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미국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욕가운데 이런 욕이 있답니다. 하도 자기를 괴롭히고 원수같은 인간에게 하는 말인데 “야 이 자식아 네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살다니 이 나쁜 놈 성령없이 목회질이나 해 보거라” 이게 실제 미국사람들이 사용하는 욕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불신자들도 이 욕을 사용하는데 그들이 보기에도 목사직을 수행함에 있어 성령의 은혜가 없이 목사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질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목회현장에 가보니까 목회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신학적 입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설교가 교인에게 만족을 못준다는 이유 때문에 목회를 그만둔 목사를 여러분들이 본적이 있습니까? 자기들이 만족 안해도 목회자가 만족하면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몇가지 배운 얼마 안되는 지식을 가지고 해보려고 하다가 목회가 안될 때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 방법중에 하나가 영의 역사를 신학적 지식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신비주의가 나오고 건전하지 못한 종교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전통은 이 두 가지의 절묘한 조화에 있는 것입니다.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라고 하는 17세기 화란의 위대한 신학자는 이 두가지의 관계를 가리켜 말하길 지식이 성령의 은혜와 결혼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칼빈이 부르짖었던 삐에따스가 성령과 관련이 있다면 스키엔디야는 지식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과 학문이 한 사람의 인격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강물처럼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조화를 이룬 신학생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원 다닌다고 하고 연사집회나 따라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합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얼른 유학가서 공부하고 와서 교수자리나 하나 차지하려고 생각하지 그렇게 신학을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말씀속에 동행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자신이 변화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최근에 신학책을 읽던지 혹은 신학지식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을 묵상하던지 무엇이든지간에 어떡하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가운데 영의 역사를 강력하게 느끼고 감동이나 변화를 경험한 것이 언제인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순수한 학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이 학문인 것은 분명하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 철학은 ‘The way of living’ 에 대한 학문이었습니다. 다른 학문은 집을 잘 짓느냐, 그림을 예쁘게 그릴 수 있느냐, 천체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학문의 목표이지만 철학의 목표는 그 모든 학문들의 지식을 독특하게 엮어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데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 푸치노스의 제자이기도 한 마스트리트라는 화란의 17세기의 신학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독트리나 에스트 디벤드디오베르 크리스쿰' 직역을 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때문에 살기 위한 지식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 그 자체는 잘 배워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면 그 지식이 없었을 때보다 더 잘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사람들이 그 지식이 없었더라면 잘 못살았을 사람들을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신학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이런 삶을 살게 할 수 있도록 진리의 저장고를 세 곳에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책이고 또 하나는 신자의 마음이며 이 둘을 연결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창고가 우리의 목회사역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그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영의 역사를 동반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결단코 무엇을 하든지 교회에서 일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목회의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의 중요성들이 과감하게 무시되고 있고 이제는 성공하는 교회의 브랜드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떤 노선을 가진 신학으로 목회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공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상황에 대해서 저항하는 마음이 없다면 다음 세대의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목회의 성공을 말하는데 목사는 처음부터 목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세상적인 성공하고는 인연을 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진리의 말씀이어야 하고 그 진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불을 품은 사람처럼 그것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목회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성공이 마치 자기 밖에 있는 여러가지 환경적인 요인들을 끼워맞추어서 퍼즐처럼 연결해서 어떤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회를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화) 제가 설교에 관한 책을 썼을 때 언젠가 어느 출판사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한편의 설교는 한사람의 피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믿게되는 것을 자신도 어찌하지 않을 수 없는 예레미야의 표현을 빌자면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할라치면 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는 그 마음으로 쏟아놓고야 마는 그것이 바로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철저하게 학문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분들은 찬란한 빛을 품은 진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설교할 때 사람들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그들의 마음에 임하게 되는 것도 오늘 성경에서 본 바와 같이 두가지의 작용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과 말씀을 가르칠 때에 거기에 동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찬란한 빛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그것이 찬란한 빛이 되게 하는 놀라운 역사는 사실 이렇게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배운 지식과 성령께서 단박에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시는 조명의 은혜와 나뉘어질 수 없도록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성령이 그에게 깨닫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수준 안에서 머무는 정도밖에는 깨우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학창에 있는 이때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인 사상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소명을 받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전도자로서 소명되었을 수는 있을 것이고 목회자를 돕는 사람으로 소명되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굳이 신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올바로 소명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에 이 학교 선생님으로서 이렇게 설교를 한다면 여러분은 선생님이니까 할겁니다. 나는 서울도 아닌 서울 변두리에서 목회하는 그저 평범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내리는 결론은 참으로 목회자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자기의 회중들을 올바른 신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학문이 요구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나는 슬픈 사람입니다.
(예화) 언젠가 미국에 가서 프리친이라는 잡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잡지 뒷면에 어느 신학교에서 전면에 자신의 신학교를 광고하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 신학교 이름이 하단에 나오고 그 사진 중앙에는 다 낡은 목회자의 나무와 헝겊으로 만든 낡고 하얗게 색이 바랜 목회자용 의자가 딱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위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That is not an easy chair' 이것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쉬운 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나 공부를 해야합니까라고 묻겠지만 무 자르듯이 잘라서 말할 수 없겠지만 저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7년 정도는 신학공부에 전념하는 시간이 필요한 데 그게 어려우면 5년, 그게 불가능하면 3년이라도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히브리어나 희랍어를 공부하지 못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없는 시도입니다. 바람에 날아가듯이 히브리어 희랍어를 줄줄줄 한글성경보다 자유롭게 읽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 할 수 있으면 아랍어 텍스트까지 읽을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예화) 대전에 갔을 때 길가에서 시주를 하고 있는 중을 만나서 물어보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원전으로 읽으려면 신문정도 읽는 우리같은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해야되겠습니까?” “칠년을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요즘은 안해도 됩니다.” “왜요?” “요즘은 한글로 잘 번역이 돼있습니다”. 돌아서면서 ‘너도 땡중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문이 아니라 산스크리스트어까지 오리지널 텍스트를 읽어야 합니다. 가끔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는데 목사가 목에 핏줄을 세우고 열렬하게 토해놓는데 미안하지만 오리지날 텍스트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혐오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채찍질해서 부지런히 탐구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문제이겠습니까? 신학은 최대한 4개의 기본적인 분과를 공부하지 않고는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역사신학과 실천신학입니다. 학문을 철저히 공부하고 학문의 배경이 되는 현대의 학문까지 두루 공부해야 하는데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람들은 하나님 잘 믿는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필요없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라틴어는 얼마나 중요한 언어입니까? 교회 역사의 모든 진리의 탐구의 흔적들이 라틴어로 기록이 되어있고 부분적으로는 고전 희랍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개신교와 같이 논리적인 전통을 물려받은 사상적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사람들은 더더욱 서방교회의 문헌들에 친근히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신학교 다닐때 라틴어를 배웠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필요한지 우리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십이 넘어 이 언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서 이제야 공부를 하니 그게 무슨 큰 열매를 거두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독서하는 일에 여러분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오늘 집에가서 여러분이 읽은 책, 레포트쓰기 위해 베끼고 한 줄 두 줄 읽다 집어던진 책 말고 커버에서 커버까지 읽은 책들이 입학한 이후에 얼마나 되는지 한번 쌓아보십시오. 최소한 1년에 한 키씩은 책을 읽어내야 합니다. 일반대학에서도 오고서운동을 한답니다. 그 말은 ‘男兒須讀 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라는 고사에서 온 것입니다. 무릇 남자로 태어났으면 일평생 다섯수레의 책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읽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사상이라는 것은 정보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 독서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독서가 결국은 여러분이 성경을 이해하고 기독교의 사상을 섭렵하는데 건전한 사상을 섭렵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필요한데 오늘 보십시오 그 감람이 깨뜨려지면서 순수한 기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자기부정이 없는 신학은 반드시 자유주의적인 신학으로 변합니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특징은 자기부정이 없습니다. 자기깨뜨려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고 신학의 과정을 통해서 불법한 자기 사랑에 대해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끊임없는 자기 참회와 믿음의 갱신이 동반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 그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쓸모없이 신학의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밤이면 2,500만 명 정도의 미국 사람들이 불면증으로 잠을 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때에 탈리벤제리스트라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 텔레비전으로 설교를 하는데 한 번 설교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수표책을 꺼내 사인을 하고서야 잠이 들게 할 정도로 능력있는 여성설교자가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의사의 검진결과 사인은 약물과다 복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잠들게 하고 자신은 불면증에 시달려 끊임없이 수면제를 장기 복용한 것이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목회는 자신 밖에 있는 것을 모아서 다른 사람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것을 받아서 자기가 체득하고 그것을 체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신학공부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감람이 깨뜨려지듯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부서지고 깨뜨려지고 부정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신학적인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와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변화되기를 새로워져가기를 그런 성도들이 신학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