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주일성수 그 평가와 계승
녹취자: 김경애
주일성수와 관련해서 믿음생활이나 고백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고 지금의 상황의 커다란 변화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갈피를 잘 못 잡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성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일 성수와 관련해서 논란은 크게 세 가지로 지적받습니다. 첫째는 ‘날’, 그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에서 이야기하는 일곱째 날이냐 아니면 어느 날이냐 의미적인 날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속성이 있느냐 아니면 불연속적이냐의 문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주일이 어느 날인지는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식교에서는 태양신 숭배하는 날이라고 비판하지만 실은 역사에 보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아우렐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태양신을 섬기도록 하는 제국적인 운동을 벌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안식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양신으로 통합하는 정치적인 작업이라고 하는데 제국을 하나의 정신으로 묶으려고 하는 어떤 사상적인 문화운동이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너무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되고 그렇게 따지면 뭐든지 월요일은 달과 관련된다든지 화요일은 화성과 관련된 날이고, 수요일은 무엇과 관련되고, 목요일에는 토레라는 신과 관련되니까 관련 없는 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교의 주장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뭐냐 하면 안식일과 주일이 연속성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의 문제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의견이 나눠지게 됩니다. 어떻게 나누어지느냐 하면 첫째로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영국의 청교도들입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핫지, 지금 오늘 우리가 XXXX 것처럼 17세기의 신학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쪽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사람들이 층차가 있었는데 표준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폐지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것은 종교개혁사 1, 2세대들의 보편적인 확신이었습니다. 특히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에는 이 사실을 확고하게 믿었고 그래서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에 주일이 안식일과 같이 특별히 거룩한 날이라고 말한다면 자기는 주일날 춤도 추고, 말도 타고, 파티를 하겠다.’고 도전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구약의 안식일의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을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4계명 자체가 이스라엘만을 규율하는 규율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이 사람들은 안식일의 개념과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빈은 4계명 안식일 개념을 도덕적 부분과 의식적인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이런 나누는 전통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12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시작해서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서 여기서 의식적인 부분은 폐지가 되었다고 보았고 그런데 그 안식일제도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써 필요하다는 것들은 칼빈이 인정하게 됩니다.
안식일제도의 연속론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안식일제도의 연속론의 입장을 취했고 우리가 지금 교단에서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된 것이 1643년에서 1647년 사이였습니다. 그때가 바로 영국의 청교도 시절이었고 이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이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국교파도 있었지만 어쨌든 청교도들이 신앙고백이 작성되고 여기서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에 대한 개념들이 그대로 수록되게 됩니다. 이후에 18세기에 가서 조나단 에드워즈, 그 다음에 개혁파 신학자로서 찰스 핫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안식일제도의 연속론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청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주일 성수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그냥 진공상태에서 종교개혁 1,2세대의 고백과 비교하면서 대척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후로 청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일성수 개념은 아주 엄격합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느냐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 배경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1617년에 재위하고 있었던 영국의 왕은 제임스 1세였습니다.
이 사람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이었고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킹 제임스 버전의 영어판을 번역시킨 왕입니다. 이 왕이 1617년에 아주 이상한 포고령을 발표합니다. 그것은 스포츠선언입니다. 스포츠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이 스포츠선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일날 예배를 드린 이후에 각종 스포츠, 운동, 놀이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을 금지하면 안 된다는 포고령이었고 위반하는 사람들은 처벌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어쨌든 그것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족을 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주일 동안 일하던 사람들이 주일날이라도 자유롭게 놀고 체력을 연마해야지만 국가 전체의 체력이 향상되고 혹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잘 방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이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1617년에 포고령이 발표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언약도들이 꼬장꼬장하게 개혁을 주장하면서 부딪친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 영국의 왕으로 와서는 만약에 무엇인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고 체제전복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하게 제압하고자하는 정치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까 그 다음에 일어나는 상황이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왕이 내린 이 칙령을 이유로 해서 기존에 자신들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성수주일에 대한 청교도들의 전통적인 관념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후에 청교도들이 모여서 오후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보고 하는데 꽹과리를 치고 청교도들을 밖으로 나오라고 하면서 예배를 방해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이것이 상당한 충격으로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으로 맞물리니까 만약에 여기서 양보하고 아주 온건한 주일성수 개념을 이야기하면 당시로서는 거의 배교에 가까운 행위가 되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아주 엄격한 주일 성수 개념을 다시 천명하게 됩니다.
당시 제임스 1세의 상황이 청교도들을 아주 더 엄격한 주일성수주의자로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청교도들은 그런 상황에서 제임스 1세가 그런 식으로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주일성수 문제를 들고 나오니까 만약에 거기에 아주 관용적이고 양보적인 태도를 취하면 교회의 대세 자체가 형식적인 신자들로서 왕의 칙령에 호응하는 사람들 편으로 교회가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청교도들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게 됩니다. 반발하게 되어서 그들이 교회에서 보다 더 구체적인 규정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전입니다. 그래서 금지하는 교회의 법을 만들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제임스 1세에 의해서 찰스 1세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법령을 하나 발표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일날 자유를 너무 주니까 논을 놀리고 소를 놀리고 피 흘리는 유혈오락까지 성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을 할 경우에는 벌금을 물리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때는 왜 그랬느냐하면 의회가 대부분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습니다. 그래서 시실은 찰스 1세가 그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개념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면서 엄격한 주일성수의 개념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뭐냐 하면 주일 성수에 대한 엄격한 개념은 종교개혁자들이 만든 게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커다란 줄거리를 잡으면 이렇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맨 처음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성에 의해서 주일을 거의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듯이 그런 개념으로 지킵니다. 그러다가 초대교회의 교부시대로 오면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순교자 저스틴,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런 사람들입니다. 3세기를 지나서 4세기에 와서 시리아의 에피엠 이런 신학자들이 유비적인 설명을 가지고합니다. 유비적인 설명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이 구약에 나오는 것들이 비유적으로 영적으로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그것을 주일에 접목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유연한 태도를 갖다가 주일에 대한 견해가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확인이 된 것이 580년경입니다. 그때 몇 개의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오를레앙회의, 라콤회의 등등에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이후에 상당히 엄격하게 주일성수에 대한 규정들이 내려오는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하자면 중세시대가 어거스틴 이후의 중세입니다. 어거스틴까지만 해도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 들어오면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4계명을 3계명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계명부터 사람에 대한 계명이니까 그러니까 안식을 거룩히 지키는 이것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계명이고 그 다음에 밑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 등등의 도덕적인 명령들은 사람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된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6세기에 어떤 설교자는 뭐라고까지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주일날 일하는 것은 주일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다.’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끼리 일어나는 일인데 주일을 범하는 것은 주일날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그런 엄격한 견해들이 내려오다가 12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라는 큰 신학자가 나타나고 이것을 사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스콜라 철학을 가지고 여기서 안식일을 의식법적인 측면과 도덕적인 측면으로 나눕니다. 이런 부분들이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도 계속해서 계승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일에 대한 개념이 엄격하게 내려오고 사실 이것이 교회가 민중들을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에 마틴 루터나 칼빈 같은 경우는 중세의 폐해를 엄청나게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칼빈 같은 경우는 아까 이상인 교수님은 칼빈을 다음 학기에 비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칼빈 같은 경우는 이 사람은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그 당시의 문맥이 청교도들의 문맥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칼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칼빈의 신학을 가장 많이 계승하고 있는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이 주일 개념에 있어서는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사상과 약간의 찢어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한 주일성수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칼빈은 왜 그렇게 청교도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말했는가? 입니다. 루터를 많이 따라가기는 했지만 루터의 자유로운 입장보다는 훨씬 더 한쪽으로 돌아서서 그래서 균형을 잡게 됩니다. 그러면 루터나 칼빈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하느냐하면 이 칼빈이 사역하던 당시에는 무엇이 문제였느냐 하면 천주교의 중세 말에 미신적인 전통에 따라서 수많은 날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날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주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그렇게 하도록 돕는 역할을 뭐가 했느냐하면 거기에 안식일 개념을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 속에는 율법주의나 중세의 미신적인 것과 율법주의적인 것이 들어오면서 형편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몇째 날인가 하는 것에 즉 날에 집착하는 것은 안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주일과 안식일이 신학적으로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러나 칼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이 몇째 날인가에 대해서 칼빈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 제도에서 칼빈이 배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6일 동안 노동을 하고 하루는 쉬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의 육체의 노동을 쉬고 쉬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번잡한 것들에 대한 심경을 뜨고 그리고 하나님을 우러러 경배할 수 있는 영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아주 엄격하게 이야기하는데 칼빈의 설교와 기독교강요의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양보함이 없이 엄격하게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주변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디아포라로 남겨두고 칼빈 자신이 아디아포라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아디아포라는 신학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칼빈이 순전히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근거가 없이 인간이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속 규율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속박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준 양심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양심을 속박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알수있느냐하면 청교도들이 안식일이 주일과의 연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종교개혁자 칼빈이나 루터가 보는 각도와는 다른 각도에서 안식일을 봅니다. 어떻게 보느냐하면 우리의 표준적인 개혁주의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주일이 있다. 주일이 있는데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구속사건을 중심으로 안식일에 대한 의미가 구속사건을 중심으로 창조에서 구속으로 옮겨간 날이다. 그러니까 주일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의 안식일이라는 것은 주일을 바라보기 위한 그림자이다. 그래서 주일이 실체이고 그 다음에 안식일은 그 실체를 바라보는 그림자이다.’ 이것이 우리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주일과 안식일의 연속론자들의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반대로 봅니다. 저쪽에서 안식일이라는 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종말에 완성된다. 완성되는 그 중간단계가 주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에 와서 안식일이 표방하고 있었던 진정한 신학적인 의미가 말하자면 주일이 안식일의 진정한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표준적인 개혁신학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속사주의를 보는 쪽에서 만약에 명망적으로 안식일을 바라본다면 이제 안식일 연속론자들은 저쪽 안식일 쪽에서 이쪽을 전망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일이 연계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주일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된다고 보고 안식일은 주일을 바라보는 그림자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청교도들이 이런 엄격한 주일성수를 채택했던 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전체적인 상황이 있었고 또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언약신학이 있었습니다. 언약신학은 원래 대륙에서 북아일랜드로 반전하게 되는데 하나는 칼빈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언약의 편무성,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많이 강조했던 신학자들과 고린도처럼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당사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행하여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양쪽의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두 갈래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영국에 들어와서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조합시키는 언약신학의 긴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연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순결의 의무를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독특한 말하자면 열매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청교도들의 엄격한 주일 성수가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는 말씀을 드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사바티스누스와 카타파우시스 의 강조점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개가 나오는데 사바티스누스와 카타파우시스입니다. 사바티스누스는 하나님이 쉬셨다는 히브리어 ‘사바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바티스누스는 희랍어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느냐하면 육체적인 휴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카타파우시스는 무엇이냐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영적인 안식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안식은 육체적인 안식과 함께 영혼의 완전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영적인 안식의 두 개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때에 일방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발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교도들은 여기에서 사바티스누스를 종교개혁자인 칼빈보다 훨씬 더 많이 강조했고 칼빈은 물론 사바티스누스를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카타파우시스를 훨씬 더 많이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칼빈은 스포츠를 싫어했습니다. 루터는 좋아했습니다. 그런 영향도 사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 것이냐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안식일 개념이 나오고 그 다음에 신명기 5장에도 나옵니다. 그 계명의 도입부를 보면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4계명 안식일 계명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출애굽기와 신명기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쉬셨으니까 너희도 쉬어야 된다고 하지만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구속하셨으니까 쉬어야 된다는 개념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개념이 창조의 개념에서 구속의 개념으로 이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행하는 것은 우리들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청교도들은 이제 이런 제임스1세의 박해를 받으면서 안식일의 개념을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서 지키다가 그러다가 심각한 정치적인 핍박에 직면하면서 이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안식일이 종파적 개념의 신학적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사적인 문제라는 것을 착안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청교도들의 안식일에 대한 자연법사상적인 접근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이 일주일을 창조하시고 쉬셨는데 인류가 이것을 따라갈 때에 마치 이것이 구약에서 음식에 금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을 지금은 속박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먹으면 섭생학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단순한 율법을 뛰어넘어서 인류 전체의 민복과 공리를 증진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적인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국가가 그 질서를 따라서 구성되어야한다는 자연법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청교도들의 근거입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럼 현재적인 제안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첫 번째로 우리 교단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350년 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너무나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350년이 지난 지금은 17세기의 이 신앙고백이 작성될 때에는 아직 산업혁명도 일어나기 전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계몽주의가 일어나고 지금은 모더니즘이 지나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지나고 해체주의시대가 되어버렸는데 그러면 여기서 그냥 그 고백을 그냥 우리가 받는다는 고백하는 것 가지고 충분한가? 그러면 우리가 진실하게 고민하고 이 시대에 우리의 언어로써 우리의 신앙고백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참고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말로 다시 하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만들고 이 신앙고백 속에서 그 당시에는 예를 들어서 화력발전소도 없었고 원자력발전소도 없었고 전철도 없었습니다. 소방서는 있었겠지만 지금같이 이런 전력시스템은 없었습니다. 그럼 그런 것들에 대한 신앙고백을 해서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녹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일을 지키려면 그 날이 왜 다른 날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잘 가르쳐주지를 않습니다. 그냥 뭐 사먹지 말라고만 하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을 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율법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남에 있었던 어느 보수적인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똑같은 토론을 했습니다. 심포지엄을 했는데 심포지엄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주일날 무엇을 사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교회 근처에서는 사먹지 말라.’ 이게 뭡니까? 덕이 안 된다고 하는데 무슨 결론을 그렇게 냅니까? 네 번째는 뭐냐 하면 이렇게 청교도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브리크를 이야기하면서 말문을 터놓으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아, 이때다.’ 하는 생각을 가질지 모릅니다. 논문을 발표하면서 조심스러웠던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봐라 청교도들은 너무 치우친 사람들이었다. 다시 칼빈을 잡자.’ 칼빈에게 돌아가봐야 칼빈이 지금 주일을 지키는 상황을 보면 통탄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세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아 주일날은 다른 문제가 아니구나 막 지키자.’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논문을 쓰면서 북미에 있는 교단들의 헌법을 알아봤는데 보수적인 복음주의는 물론이거니와 CRC 같이 Reformed를 주장하는 교단에서도 이미 주일성수에 대한 모든 고백을 다 빼버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현실이 그것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상당부분이 아디아포라로 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입니다. 교회는 그냥 무책임하게 웨스트민스터 고백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고 이것은 도저히 연속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안식일 준수의 계명을 칼빈처럼 확실하게 못 박고 그리고 그것을 교회에서 표준으로 삼고 그리고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디아포라로 두되 내버려두면 사람마다 엉망이 될 테니까 제가 처음 제안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을 갖게 되고 그 아이에게 주일의 개념을 이해시키고 그날이 얼마나 복된 날인가를 가르친 다음에 이런 이런 것들은 주일날 하면 안 되고 꼭 지켜야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친 다음에 거기에 규정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너의 삶의 지침이 무엇이냐? 묻고 그 아이들이 그것을 작성해야하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다시 작성하고, 청년이 되어서 다시 작성하고, 장년이 되어서 직장에 취직했을 때 다시 작성하고, 가장이 되었을 때 다시 작성하고 왜? 생활하는 형편이 다르니까 말입니다. 주일날 쇼핑을 갈 것인가? 그러면 쇼핑의 정의는 무엇인가? 슈퍼에서 생수를 사오는 것이 쇼핑인가? 아니면 옷을 사오는데 런닝이냐? 팬티냐? 아니면 긴 오바냐? 몇 시간 걸리는 것이냐? 그것을 교회가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률적으로 자신들이 삶의 규칙으로 정하고 우리 서로는 각자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리지 말자는 그것이 제가 제안하는 바입니다. 실제로 구라파에 가서 개혁신학자들을 만나서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개혁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주일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차는 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이 떨어지면 기름도 넣는답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전철에 요금을 내는 것과 네 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지키지만 그러나 나처럼 똑같이 따라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자유의 문제와 교회규범의 문제를 확고히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자들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힘써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일이 지켜야할 것이 많은 날이구나!’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평일에는 맛보지 못하는 좋은 것을 많이 맛보아야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그런 것을 해야 할 욕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한 25년 전에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고등부 전도사를 했습니다. 부흥회를 했습니다. 애들이 예배시간마다 펑펑 은혜를 받고 애들이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던 애들이 7시에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6시 반부터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기다립니다. 매일 농구하러 다니고 축구하러 다니고 등산 다니던 애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면 전부 친구를 찾아 심방을 갑니다. 그리고 창고 같은 데에 모여서 아이들이 두 시간씩 간절히 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일날이 복된 날이다.’ 뭐가 복되냐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와서 졸고 그 다음에 지루하게 지내는데 뭐가 복된 날입니까? 이 날 하나님의 생명이 주일예배를 통해서 막 부어지고 그래서 정말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은혜를 받을 때 그때 다른 일을 해야 할 욕구를 못 느낍니다. 주일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주일 오후까지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남의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노스햄턴에서 목회를 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피디 바틀렛이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4년 8개월 된 아이인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집을 한번 보셨습니까? 예일 대에서 나온 것을 읽어보시면 설교가 거의 세 시간을 헤아릴 정도의 분량이고 그리고 굉장히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사람입니다. 그 설교를 신학대학원생들이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4년 8개월 된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깊은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만날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헛간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뛰어가니까 이 아이가 그 헛간에서 혼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뀐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월요일부터 묻는 것입니다. ‘엄마 주일은 몇 밤 자야 되는 거야?’ ‘여섯 밤 더 자야 돼.’ 만날 묻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주일이 오기를 묻는 거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 에드워즈 목사님 설교가 그리워져!’ 그것이 바로 영적인 커다란 변화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회자로서 주일을 거룩하게 하고 싶으면 주일 예배에 목숨을 걸고 주일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데도 아무 일도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교회지도자들이 가슴을 찢으며 통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거룩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주일이 거룩해지겠습니까? 이상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