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주일성수, 그 평가와 계승
녹취자: 이경순
순서는 들어가는 말 그리고 안식일과 주일 그리고 주일의 규정 영속성 그담에 안식일제도 폐지론 영속 론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역사적 배경 이런 순서로 진행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일 지킴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첫째는 편애적 자유주의입니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것 가지고 따지냐,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이게 오늘날 이미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치우친 일원론입니다. 그래서 선과 속의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 없지 않으냐 그러니까 이 시대는 우리들이 삶의 전 방면에서 주님을 위해 살면 되지 특별히 주일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특별히 주일을 지켜야 될 이유가 어떤 것이냐 이런 반문을 합니다. 실제로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하나님 앞에 예배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실제 청년들이 주일 예배를 안 드리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돕는 일을 위해서 봉사를 하러갔습니다. 이런 것들도 좀 문제입니다. 치우침 일원론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치우친 이원론입니다. 이것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날들은 세속적인 날이고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고 일주일동안 세상에 사는 것은 죄짓는 것이고 주일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날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네 번째는 경험적 축복론입니다.
여기에 보면 에릭 리들(Eric Liddell) 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파리 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게 됩니다. <불의 전차>라고 영화로도 나왔고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주 종목이 100미터였습니다. 파리에서 올림픽을 했는데 하필이면 자기 주 종목인 100미터 달리기 경기가 주일날 3시하고 5시에 잡힌 것입니다. 온 세계가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금메달을 딸게 너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나는 주일에는 뛰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에서 사람들이 저 편협한 종교인 예수의 이름으로 영국을 욕보이는 인간이다 그리고 굴러온 금메달을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따지 않고 포기한 사람이라고 욕을 막 했는데 이 젊은이는 그 시간에 예배당에서 고요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미터에 출전합니다. 주 종목이 아니니까 동메달을 땁니다. 400미터와 100미터는 전공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 사람은 100미터만 뛰면 체력이 다 떨어지는 사람이었는데 의외로 400미터에 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해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험적 축복론입니다.
그럼 신학적으로는 이 견해가 어떠냐 하면 ‘이것도 옳은 견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럼 주일을 지킨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결과가 오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설교하신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기다려 보면 될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가 아니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겠는가? 이렇게 이것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도 아니고 네 번째도 아니라면 그럼 우리의 견해는 무엇인가? 그러면 주일 성수문제를 가지고 이미 한 3년 전인가 총회 신학교에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발표를 했고 총회에서 나중에 연락이 와서 목사님이 논문을 발표한 것을 우리 총회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삼고 싶으니 A4용지 3매로 요약을 해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면 주일 성수 문제와 관련된 논쟁점이 무엇이냐? 첫째는 일요일이 주일이라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것이 제일 첫 번째 쟁점입니다. 두 번째는 구약에 안식일이 나오는데 신약에 우리들이 지키는 주일과 연속성이 있는 것인가 상관없는 것인가? 마지막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되는가. 이 세 가지가 쟁점입니다. 이 이외에는 특별한 쟁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제일 먼저 안식일과 주일이 어떤 관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일의 규정에 주일이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안식교 같은 데서는 이것을 대표적인 기독교역사의 배교의 한 예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데이(Sunday)’라고 하는 말 자체가 ‘선(Sun)’이 ‘태양’입니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었는데 로마시대에 그것과 종교적인 융합을 이룬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본래적인 정체성 있는 안식일을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먼데이(Monday)’ ‘투스데이(Tuesday)’ ‘웬스데이(Wednesday)’ ‘서스데이(Thursday)’ ‘프라이데이(Friday)’ ‘세터데이(Saturday)’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따지면 다 신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먼데이(Monday)’는 달과 관련이 있고 ‘프라이데이(Friday)’는 ‘프레야(Freya)’라는 신과 관련이 있고 ‘세터데이’는 ‘사르트누스(Saturnus)’라는 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의 날들이 모두 그랬기 때문에 일요일을 주일로 선택한 것이 오히려 로마의 문화를 이용해서 기독교가 그것을 극복한 것이지 그렇게 야합하고 배교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보면 사실은 로마시대에는 선데이를 따르기 위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즉, 구약에서는 안식일이었는데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으로 해서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다 마태복음 11장 8절입니다. 그리고 이날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있는 날이기도 하고 요한복음 20장 그리고 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부활 후 첫날에 이미 모임을 갖게 되었던 기록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근거는 신약성경의 기독론적인 예수부활의 사건과 깊은 뿌리를 갖고 있고 그 것을 따라서 초대교회가 주일을 지켰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제도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안식일제도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폐지가 되었다.’라고 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 안식일 제도의 기본적인 사상은 신약시대에 왔다고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하는 것이다.’ 이런 두 주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루터와 칼빈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폐지론 쪽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청교도들과 그담에 유명한 신학자 찰스 핫지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은 영속론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과 영속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안식일 제도의 폐지론은 이미 벌써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제기가 됩니다. 독일의 종교 개혁가 이었고 사실상 개신교를 연 사람입니다. 95개 조항을 발표를 하고 개신교의 중요한 뿌리가 되는 이신 칭의 사상을 교부들을 통해서 성경에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심오한 영향을 준 두 원천이 있는데 하나는 그 시대의 기독교 입문주의였고 또 하나는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이 수도생활을 했던 에르푸르트 수도원이 어거스틴회에 소속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광범위하게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초대교회 교부들로 들어가면서 그 초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과 신약성경은 놀라운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중세교회시대의 가르침이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때부터 복음을 통해서 참 기독교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 테이블 토크라고 하는 이 사람이 쓴 『탁상담화』라는 책 이 있습니다. 비텐 베르그에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사랑방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면서 편안하게 대화를 가졌던 그것들을 제자들이 정리를 해서 낸 책입니다. 거기에서 주일에 대해서 이런 언급이 나옵니다. “만약 어디서든지 그날 주일이 단순히 그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면 나는 그날에 일도하고 말도타고 춤도 추고 잔치도 벌이겠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침해를 제거하는 어떤 일이든지 나는 반대로 하라고 교인들에게 명령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마르틴 루터가 얼마나 이 주일을 안식일의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설교할 때 조심해야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학적으로 이렇게 확고하게 정리가 안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설교했다가 이렇게 설교했다고 하고 또 말하는 것과 그 담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교인들이 실제 살아가는 주일성수의 생활들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나눠드린 그 책은 절반은 100일 포럼 본부에서 기증을 하는 것이고 절반은 저희 열린 교회에서 기증을 하는 것입니다. 강의를 다 들으신 후 집에 가셔서 불과 한 4시간이면 다 읽으실 수 있습니다. 천천히 읽으시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셔서 주일에 대해서 저렇게 에릭 리들 같은 영화를 온 교인을 데리고 가서 관람을 시켜서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칼빈은 주일에 대한 견해에 관해서 날들의 차별을 반대합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로, ‘주일이 나머지 6일과 매우 특별하게 다른 날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주일날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이었습니다. 청교도들하고는 아주 미묘한 견해차이가 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 주일에 관한 우리 합동 측의 입장은 웨스트민스터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는 칼빈편 보다는 영국 청교도들 편에 서있는 전통입니다. 다른 많은 점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는 전통이 탁월하지만 주일에 대한 것은 이후에 말씀드리겠지만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미묘한 차이들을 잘 분별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세 번째는 ‘주일은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날이다.’ 그리고 당시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의 당시의 문맥에서 이 칼빈의 주일성수의 개념을 이해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안식일 제도의 영속 론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이 사람은 안식일 제도의 영속성을 주장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면 청교도 사상을 올 곧게 물려받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설교자이자 목회자이자 교육가이자 부흥 가이자 철학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찰스 핫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찰스 핫지는 후에 사람입니다. 안식일 제도의 영속성을 주장하고 주일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금지사항들을 상세하게 규정을 합니다. 그럼 청교도들은 주일성수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먼저 청교도들이 주일성수의 개념을 확정할 때에 그 때의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합니다.
1617년의 사진에 나오는 제임스 1세라고하는 영국 왕이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나 하게 됩니다. 그 이름이 놀랍게도 스포츠 선언입니다. 제임스 1세의 ‘스포츠선언’ 이라고 하는 것이 오전에 주일예배를 마쳤다면 오후에는 막 곰 같은 것들을 괴롭히고 피를 흘리고 하는 이러는 스포츠가 아니면 모든 체육 활동을 해도 좋다. 이게 나중에는 술잔치 가면무도회 등으로 까지 확대가 되게 됩니다. 그럼 왜 뜬금없이 제임스 1세가 이런 선언을 하게 되었는가?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당시 청교도들과 국교도 들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보다 더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그 청교도들의 지도를 받는 교인들이 생활을 하는데 왕에게 탄원서를 냅니다. 무슨 탄원서냐면 우리는 딱 쉬는 날이 주일날 밖에 없는데 청교도 목사들은 주일날 성경 읽고 경건서적을 읽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날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그러니 우리가 운동도 하고 오락 활동을 좀할 수 있게 해 달라 하고 청원을 낸 것입니다. 이 당시의 제임스 1세하고 청교도는 어떤 관계였냐면 당연히 청교도들은 그중에 비 국교도파들이 주일을 지키는데 매우 엄격했습니다. 이 비 국교도파 들은 오직 성경과 말하자면 칼빈주의적인 신념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국가와 교회의 구분을 강조했습니다. 봉사해야할 영역이 다르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왕권에 국교도처럼 고분고분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청교도들이 제임스 1세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탄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청교도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키려는 심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명목으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이냐면 운동을 해야 된다. 운동을 안 하면 젊은이들이 체력을 기를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나면 무슨 힘으로 싸우겠는가? 이런 논리를 내놓으면서 주일날 스포츠를 해도 좋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국교도교인들에게 국교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사람들에게 그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별 무리가 없이 주일을 엄격하게 지켜오던 사람들에게 저런 타격이 가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격주의적인 주일성수는 사실은 이미 중세시대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게 표리부동이었습니다. 내세우는 것은 아주 엄격한 주일의 개념인데 실제의 사제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방종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사뭇 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하고 비슷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옆에 나오는 사진이 『우신예찬』이라는 유명한 책입니다. 『우신예찬』의 224페이지에서 이 사람이 중세시대의 주일 성수개념을 비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주일에 단 한번 신발을 수선하는 것은 천명을 죽이는 것 보다 더 큰 죄다.” 왜 이런 논리가 나오느냐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본 것입니다. 십계명에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부터 마지막 탐욕을 금하는 10계명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관계에서의 작은 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큰 죄보다 훨씬 더 크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중세시대의 주일성수의 개념이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에라스무스가 그 당시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면서 『우신예찬』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엄격주의적 주일 성수 개념에 있어서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니라 교부들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교부’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은 중세의 교부라는 말을 사용을 안 합니다. 교부라는 말은 초대교회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을 기준으로 어거스틴이 딱 초대교부의 마지막이고 중세로 넘어가는 시점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기준점이 되어서 어거스틴 이전은 초대교회의 교부 그담에는 이쪽은 중세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국교화되었고 아무튼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부들을 통해서 성경의 해석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의 개념을 안식일 엄수주의에서 가져옵니다. 그것은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 같은 이런 것들 아래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담에 주일의 신학적 의미가 이 종교개혁자들은 특별은총의 측면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특별은총 뿐만 아니라 일반은총의 빛 아래에서도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언약신학 안에 있는 긴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계약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두 전통이 있는데 이 언약의 편무성. 편무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에 의해서 주도되는 언약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그들을 불러내어서 언약을 맺으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편무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에 비해서 쌍무성은 하나님과 인간이 계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실 의무가 있고 은총을 주시지만 인간은 인간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 의무를 어길 때에는 언약관계가 깨진다고 하는 것이 쌍무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문제와 관련해서 언약신학 안에 있는 긴장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그 당시의 주일성수를 그런 식으로 스포츠선언같이 변화를 주어서 주일성수의 개념을 변경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은 감정적으로 보더라도 청교도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기본적으로 영국국교회와는 달리 청교도들은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왕실의 입장에서는 이 기독교가 말하자면 우파정권에 있어서 좌파세력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가시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임스 1세가 스포츠 선언을 내릴 때에 교회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그래서 기존의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주일성수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배교로 인식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청교도들 언약 신학 안에 있는 긴장과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지만 실제로 신자들이 그 삶을 살아갈 때에는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았지만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에서 불충성하고 이 관계를 깨뜨려 불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서 내가 어쩌면 이 언약을 깨뜨린 파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된다. 핵심적인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더욱 엄격한 주일성수 개념을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제임스 1세의 스포츠선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의 전통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차이점입니다. 안식일제도가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에는 폐지되었다고 보고 청교도들에게는 영속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도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칼빈은 기본적인 입장에서는 안식일은 구약으로 끝났고 그리고 주일은 안식일과 다른 것이라는 안식일제도의 폐지론을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일치했습니다. 일치했는데 둘 다 그리스도인의 폭넓은 자유를 주장했고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에 동의를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대요리 문답과 소요리 문답이 있는데 요리문답이 나온 배경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합니다. 한 20년쯤 세월이 지났을 때 교회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에 마르틴 루터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서 뭐라고 표현 하냐면 “무지한 돼지새끼들이 교회에 가득하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 가톨릭에 반대를 하기는 했지만 개신교가 어떻게 다른 것이고 종교개혁의 대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이 다 신앙적인 일 때문에만 개신교편에 선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읽어 보면 특히 독일의 제후들은 영토문제와 종교개혁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앙을 고백 하면 자기 영지 안에 있는 수도원 땅의 모든 것들이 면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오는 헌금과 모든 수입은 교황청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살다 죽을 때에 왜 그런지 그렇게 하면 천당에 갈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에다 돈을 바칩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정말 개신교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가톨릭을 반대하고 개신교편에 선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일단은 개신교 측에 깃발을 들고 종교개혁을 했지만 무엇인지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에 너무 충격 받고 마르틴 루터가 요리문답서를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신앙은 무엇을 믿는 신앙인가 이것을 교리문답을 통해서 규정하게 됩니다. 대요리 문답 속에서 안식일과 관련되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의미에 의하면 이 계명은 그리스도인과 관계없다, 그것은 관습, 사람, 시간, 장소와 관련된 구약에 다른 율례들처럼 전적으로 외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함을 받았다.” 해서 우리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가지고 구약을 넘나들 때 에는 조심해서 구약을 넘나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너희가 지금도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것은 가져오고 어떤 것은 내버려두고 이래서도 안 되고 신학적인 기독문적인 전환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정신들을 해석해서 신약 속에 나오는 정신들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칼빈은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언약적인 관점을 유지했고 루터보다는 좀 더 엄격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을 보면 루터가 이쪽으로 너무 갔다면 청교도들이 너무 이쪽으로 갔다면 칼빈은 여기 어딘 가쯤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총회가 주일에 관한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교리문답 속에 집어넣을 때에는 칼빈의 견해를 따르지를 않고 청교도들의 견해를 따르게 됩니다.
기독교 각료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세 번째 부분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으로 아디아포라고 하는 것인데 어떤 외적인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사물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앙적으로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게 있습니다. 우리 아이를 사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공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 아이에게 예능을 가리킬 것인가 아니면 철학을 가리킬 것인가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강대를 플렉스 그라스로 할 것인가 나무로 할 것인가 돌멩이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아디아포라고 합니다. 이런 중립적인 것들을 어떤 때는 이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고 넘어가기도 하는 일들이 허용이 된다. 그러면서 주일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에 청교도들처럼 엄격하게 주일날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새까맣게 나열해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옭아매는 것 자체를 칼빈은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경건을 실천하는 어떤 사람들을 세워놓고 신자들이 자유로운 양심을 가지고 이것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어떤 법을 만들어서 양심의 덫에 옭아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경에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이렇게 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고 저렇게 하는 사람을 비판해서도 안 되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인데 이걸 가리켜서 ‘아디아포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아디아포라’는 주일성수에 있어서 한쪽으로 가면 율법주의가 되고 한쪽으로 가면 방종주의가 됩니다. 이쪽으로 기울어지면 율법주의가 되고 이게 올라가 버리고나면 방종주의가 됩니다. 그러면 주일에 관한 칼빈의 세 가지 엄명은 이것입니다. 자 구원이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충분히 성경을 통해서 주셨다. 성경 이외에 또 다른 구원을 얻기 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구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다 계시하셨다. 그러나 예배에 관한한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시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천을 도입해서 그것을 발전시키고 여태까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해오던 것들을 폐지할 때에는 함부로 하면 안 되고 어떤 세심함을 가지고 이 일을 해야 된다. 제네바 교회 신앙 문답서입니다. 이것은 칼빈을 포함해서 세 명의 목회자들이 함께 만들어서 의회에 승인을 받은 초기문답서입니다. 168문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7일 중에서 하루는 모든 일을 금하셨습니까? 그 답은 이 계명에는 특별히 고려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제7일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옛 율법의식의 일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것은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제네바교회의 신앙문답서를 통해서 엿보는 칼빈의 견해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안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일이 영적인 안식을 누리는 날인데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영적으로 역사하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육신의 일을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빈과 청교도들을 비교하면 청교도들은 굉장히 엄격한 입장에 서 있고 칼빈은 이들에 비해서 좀 자유스러운 입장에 서있습니다. 주일성수는 안식일에 노동을 금했기 때문에 노동을 금하는 것이 주일성수의 본질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주일날 일을 해도 좋고 영업을 해도 좋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한 것 같은 정신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제 4계명은 예수 오시므로 폐지되었다. 주일에 노동을 중지하고 휴식해야하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명령 하셨기 때문에 주일날 모든 노동을 쉬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이 이유는 무엇이냐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소홀해지기 쉬운 영혼의 필요를 주일날 충분히 채우는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과 교제를 통해서 하늘의 자원을 가득 채우는 날이 주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안식일 제도는 영속적이어서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안식일 제도는 옛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고 주일의 제도는 새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에드워즈가 안식일의 영속성과 변화라는 논문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옛창조 와 새창조를 나란히 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에서 안식하셨던 것과 하나님과 창조사역에서 안식하셨던 것을 대등한 것으로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날 하루를 지켜야 되는데 그 날에 대한 것 한주의 마지막 날인가 하루인가 그담에 계기적인 날인가 정해진 날인가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쭉 따라오는 이 날이냐 아니면 이렇게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내려오는 것 이것을 절대적으로 정하신 것이냐? 아니면 일곱 개의 날들 중 하나를 그냥 정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냐 이것이 그날에 대한 중점적인 쟁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그냥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하나님이 창조하고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한주간의 마지막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날이 첫 번째 날이 되고 그 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새 창조의 정신에 따라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날 주일은 한주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 한주의 첫 번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안식교에서는 토요일이 안식이라고 보고 그러니까 날자 자체를 잘못 정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안식일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에 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쉬신 날은 동그란 지구에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요? 여기가 낮 인데 저쪽 지구 반대편은 밤입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6개월 동안 낮, 6개월 동안은 밤이 계속됩니다. 그럼 어떻게 이것을 정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창세기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둘째 날이라 한 것은 엄밀하게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면 그 하루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따르는 개혁신학에서는 그런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교회가 한 날을 정하면 교회는 그 날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십 명 모이는 교회에서 우리는 공동의회에서 화요일을 주일로 지키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공회를 통해서 결정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놀랍게 융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집착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 차원의 안식인데 첫째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와 자연법적인 질서의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위해서 좀 더 살펴보면 안식에 대한 개념을 종교개혁자들은 주일성수는 쉼을 포함한다. 이렇게 보았고 쉼을 포함한다. 핵심이 구약의 안식일제도와는 무관하다 영혼의 유익을 누리기 위하여 하루를 떼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주일은 안식일의 완성이다. 구약의 노동 휴식이 주일에 적용된 것이다 노동 휴식은 자연법칙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다 이것을 신약에서 계승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작지 않습니다.
이 지도는 17세기의 잉글랜드입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 두 개를 합쳐서 브리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600년에 잉글랜드의 인구가 410만 명이었고 이것이 1650년에는 530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브리튼의 인구는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600만 명인데 770만 명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주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면 들어보십시오. 재미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세계역사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왓슨의 증기기관 풀턴의 증기기선 이런 것들이 발견이 되면서 산업혁명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동력을 자기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산업혁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던 것입니다. 영국이 먼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촌에서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오게 됩니다. 도시에는 노동력 공급이 과잉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임금을 아주 조금만 줘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일자리 하나에 열 명씩 덤벼들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노동력을 가지고 하루에 16시간이상 노동을 시키면서 쉬는 날도 없이 이 사람들을 계속 돌리면서 그 노동력을 이용해서 물건을 만들어서 자기네들도 싸게 쓰고 해외수출하면서 대량생산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는 것입니다. ‘키더민스터’는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했던 곳입니다. 리처드 백스터 역시 똑같이 매우 엄격한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구약과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들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맨 처음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유휴 노동 인력들이 도시로 몰려와서 공장계수공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증기기관들이 발명이 되면서부터 산업혁명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이 착취되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담에 안식일 제도의 신학적인 의미가 십계명에 두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한 번 나오고 신명기 5장에 나오는데 20장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창조입니다. 일곱째 날에 쉬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주어졌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입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서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이고 이 신명기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주는 십계명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급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이끌어내셨다 그러니까 주일을 지켜라 이말 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안식을 지키는 동기가 창조였는데 신명기 5장에서는 구속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안식일의 동기가 바뀔 것을 이미 보여주는 것입니다.
칼빈은 신명기 설교에서 주일을 지켜야할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주일을 주시는 이유는 연약한 우리를 신앙으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노동으로부터 쉬는 게 주일의 목적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는 세속적인 생각으로 일주일동안 살아가면서 영혼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신앙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일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백성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방백성들은 죽도록 일하는데 우리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하루를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자기봉헌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주일을 지켜야할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자유를 강조하면 방종에 빠지게 되고 율법을 강조하면 바리새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청교도들의 유산의 가치를 인식하고 주일을 성수하되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율법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 됩니다. 제임스 패커라는 인물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와 함께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다면 제4계명의 적용을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율법주의를 늘리고 영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미 만들어진 적용을 물려받으라는 유혹에 저항하고 율법을 현실성 있게 시대의 상황 속에 재 적용하려고 애쓴다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인도해줄 비할 데 없이 풍성하고 의미심장한 긍정적 원리들이 청교도의 해석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은 받아들이되 그들이 했던 것을 그대로 추종해서는 안 되고 그 대신 원리를 받아들여서 그것들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아주 풍성한 원리들을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분도 청교도 연구의 대가지만 주일성수의 개념에 있어서 청교도들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성수에 대해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 첫째는 우리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에 대한 것은 16세기에 기록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따른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그때는 거의 농경사회였고 지금은 이러한 첨단시대를 살고 있는데 문화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면 교단은 최소한 30년에 한번 정도씩은 신앙고백을 새롭게 독일이나 이런 유럽에 있는 교회들처럼 신앙고백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환경문제 같은 것 16세기에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는 그만두고 우리의 1900년도 초만 해도 환경문제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70년도까지만 해도 환경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중반 들어오면서부터 이것이 본격적인 문제가 되어서 지금 여러분 여기도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쓰고 다니라고 예보 나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고백에 반영이 안 되어 있습니다. 컴퓨터 시대 저작권 문제 그담에 정치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백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교인들에게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가르쳐야한다. 세 번째는 율법적인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 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었던 교회에서 실제 경험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주일을 엄청 강조 하셨습니다. 주일날 텔레비전도 보지 말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토요일 날 밤인데 “김전도사. 탁자를 좀 사놔.”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 주일날 오후에 오시더니 “야. 왜 탁자 없냐?” 그래서 “아니 목사님이 밤에 지시를 하셨고 가게 문은 닫았고 그리고 지금 주일인데 어떻게 삽니까?” 하니까 “넌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그 사람들보고 주일날 가져오라고 하고 돈을 월요일 날 주면 되잖아.” 그러십니다. 그런 게 바리새적 율법주의입니다.
그담에 네 번째는 자유쥬의적인 방종을 경계해야 됩니다. 온 가족이 와서 일찌감치 7시에 예배드리고 그담에 휴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그런 거는 자유주의적인 방종입니다. 주일날 예배는 간단하게 드리고 온통 야유회를 가거나 아니면 쇼핑을 돌아다니는 것 이런 것들은 자유주의적인 방종입니다. 그 담에 신자들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애써야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영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 주일은 저절로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도록 기도해야 하고 체계적으로 교리교육을 시켜야하고 그담에 진정한 부흥을 경험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이날이 너무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성도들이 느낄 수 있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며 당부 드린다면 목사님들이 기분에 따라서 갑자기 구약을 들먹이면서 안식일에 뭐도 하지마라 뭐도 하지마라 뭐도 하지마라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그래서 신학적으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그런 식으로 엮어서 구약에 나오는 내용가지고 신약시대에 지키라고 그렇게 설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의 제도를 신약에 적용을 하려고하면 신학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심사숙고해서 이해를 하고 통일된 생각을 가지고 설교도 하고 교인의 생활도지도하고 자기 자신의 생활도 거기에 맞추고 이렇게 해야지만 주일에 대한 논란이 사라지고 더욱이 주일날 성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서 행복해지기만 하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예배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1)의 답
우리의 신앙고백이 잘못되었다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도 보면 한 30년마다 다시 번역합니다. 사람들은 그거 다 돈 벌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나면 어휘도 바뀌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옛날 개혁한글 성경 지금 집에서 자라나는 십대 아이들보고 읽어보라고 하세요. 참람히 여기는 도다 무슨 소린지 모릅니다. 곤비하지 아니하며 그거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 그 시대의 언어로 다시 해석을 해서 성경을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역은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원어의 학계에서도 30년이면 희랍어 나나나 히브리어 단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다 반영을 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것처럼 여태껏 우리가 신앙고백이 잘못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시대와는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 졌으니까 이렇게 문화가 바뀌고 사람들 사고방식이고 생활양식이 바뀌고 우리 30년 전까지만 해도 저작권 같은 것들이 50년 전에는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막 복사해서 팔고 쓰고 해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큰일 납니다. 그런 문제 그 담에 오늘날에 있는 컴퓨터 문제 중독의 문제 이런 특히 환경의 문제 이런 것들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 목회하셔보면 알지만 우리 40년 전만 해도 암환자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이게 환경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다 통활 해서 우리의 시대의 언어와 우리 시대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신앙고백을 최소한 독일의 경우에는 30마다 한번 합니다. 30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신앙고백을 내놓고 자라나는 세대를 가르쳐서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고민하는 문제가 이 안에 다 답이 들어있구나 느낄 수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어야 합니다.
(질문2)의 답
주일날 행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좀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좀 반성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예배와 예식을 구분을 잘 못합니다. 예배는 워십이고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행위이고 예식은 세레모니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묶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두 개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예배시간에 사람 나오라고 해서 상장도 주고 기념패도 주고 박수를 치고 이렇게 합니다. 그담에 그 사람에 대해서 찬사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예배와 예식의 구별이 분명히 구별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주일날 행사를 하지 말라 하는 그런 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것이 임직 식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일날 임직 식을 하면 참 편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옵니다. 사실은 토요일 날 장로 임직 식을 해도 교인이 천명이면 한 200명도 올까말까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불편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 보면 만약에 예식을 허락하게끔 내버려두면 어디 임직 식만 들어오겠습니까? 별의별 행사가 다 들어옵니다. 주일에서 아까 종교개혁자들과 이런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주일날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말씀을 공급받으며 우리의 영혼을 보양하는 날이라고 하는 그 정신이 무색해지고 오히려 그런 행사 같은 것들이 예배를 밀어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조심해서 판단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