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건강한 구역에 대하여
녹취자: 박지성
별은 하나님이 태초에 “있어라”해서 만드셨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합니다. 물론 말로는 쉽게 태어나고 사라지고 태어나고 사라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보통 몇 억년이 걸립니다. 천체를 탁 찍어서 별을 보면 별은 우주 공간에 골고루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모여 있습니다. 별들이 아주 많이 모여 있으면 우윳빛이 됩니다. 그게 은하수입니다. 하나의 은하계 안에 약 10억 개 정도의 별이 있습니다. 그 별 속에 지구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 지구 같은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구가 여기니까 보이는 것이고 달 같은 것도 안 보입니다. 하늘에 찬란하게 떠있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별들은 모두 행성이 아니라 항성이니,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불빛을 가진 별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은하계 안에 별이 10억 개라고 이야기할 때 그 별은 모두 태양 같은 자격이 있는 것만 모은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할 때 “별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휙 가서 별에 한번 내려 볼까?”하는데 타서 죽습니다. 별은 이글거리는 기체덩어리입니다. 그래서 만약 불에 타지 않는 로켓이 있어서 그 별을 향해서 돌진을 하면 이쪽으로 뚫고 나와서 저쪽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런 별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우유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은하수입니다. 그 별의 수가 십억 개 정도이고 항성만 십억 개니까 지구처럼 딸린 것이 그곳에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고 학설로도 몇 개라고 나온 것은 없지만 제가 보기엔 최소한 곱하기 8이상 10정도 될 것입니다. 태양 주위에 아홉 개가 딸려있으니 이렇게 계산하면 10억 개 약 그런 별까지 다 합치면 약 110억 개가 되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다 빼고 10억 개 정도의 별이 있는데 얼마나 그것이 멀리 있는지 그 별이 다닥다닥 모여 있어서 별 떨기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별들은 보통 빛이 몇 년 달려가야 되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은 달을 별이라고 하지 않으니까 태양처럼 빛나는 별이 지구에서 4년을 빛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동전 50원짜리에 들어간다고 보면 태양 말고 또 다른 별과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정도 됩니다. 그런 별들이 얼마나 멀리 있으면 그것들이 함께 다닥다닥 붙어서 은하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러한 은하계가 잘은 모르지만 10억 개 정도 가진 은하계가 10억 개 이상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우주입니다.
그런데 별이 재미있는 것이 골고루 쭉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비슷합니다. 전 세계 인구가 지금 폭발 직전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자우로 벌려서 체조대형으로 서면 충청북도 정도면 다 좌우로 벌려 체조대형으로 설수 있다고 합니다. 육십 몇 억이라고 해 봐야 그것 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넓은 땅 덩어리에 사람들이 없는 데는 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가도 한 사람도 없고 있는 곳은 발에 치일 정도로 특히 전철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별도 똑같이 그렇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별이 태어나는지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이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껏 있다고 해도 수소분자 정도이고 90%의 다른 기체들이 있는데 이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뭉칩니다. 분자기체들이 아주 많이 뭉쳐있게 되면 이것이 굉장히 빨리 다른 물체가 됩니다. 고체도 되고, 예를 들자면 지구가 그렇다고 합니다. 분명히 공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온이 딱 떨어지면 액체로 변합니다. 이슬이 맺히고 날이 추워지면 서리가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그런 현상들이 이렇게 우주 공간에 어떤 이유로 모입니다. 기체들이 모이는데 이것이 모여서 이뤄지는 것을 분자운이라고 합니다. 분자기체들이 모여서 밀도가 높아지면 마치 뜨거운 공기 같은 것이 올라갈 때 아지랑이가 보이듯이 이런 것들이 완전히 진공상태에서 뭉치면서 구름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 이것들이 잔뜩 뭉치는데 이 뭉친 것의 어느 부분이 밀도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높아지게 되면 이 안에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휘도는 작용을 하면서 핵반응이 일어나고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그 폭발이 모여서 불덩어리가 되고 여기서 항성풍이 생겨납니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면 당연히 이리로 밀고 저리로 밀고 합니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서 또 어느 지점에 가서 이런 식으로 모이고 또 폭발이 일어납니다. 또, 또 폭발이 일어납니다. 계속 폭발이 일어나고 폭발이 일어 난 별은 다시 폭발이 일어나면서 뭉쳐 계속 이글거리면서 태양처럼 타오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굉장히 강한 바람이 일어납니다. 분자운에서 바람이 막 부니까 모여 있던 분자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흩어져 버리고 공간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점점 사라지게 되면 이것이 공중에 떠 있는 완전한 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며칠이나 걸려서 만들어지냐면 분자가 이렇게 뭉쳐서 충분한 밀도가 되는데 태양과 밀도를 비교해서 A등급의 경우에는 아직 별이 안 된 상태로 모여 있는 것이 보통 10만년 정도 그다음에 밀도가 낮아지면서 점점 400만년 500만년으로 늘어납니다. 이렇게 별이 태어납니다. 이렇게 완전히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계속 폭발하는데 폭발하면 분자가 계속 폭발하면서 에너지로 변합니다. 빛이 발산하면서 계속해서 질량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밀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거대한 별이 됩니다. 어마어마한 거성이 됩니다. 붉은빛을 확 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얀 백색외성이 됐다가 기체만 남아서 허공중에 흩어져 별의 일생이 끝납니다.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렇게 별들이 태어나는데 같은 크기의 별, 똑 같은 모양의 별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별을 창조하실 때에도 이렇게 모든 것들이 각각 다르게 생겨났습니다. 지구 같은 것도 뜨거운 별이었다가 서서히 식으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이렇게 생겨난 것인데 폭발을 독자적으로 일으켜서 태양처럼 빛나는 별이 되기에는 질량이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작용을 못 일으켰기 때문에 지구 같은 행성들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에는 그 모든 별들을 한꺼번에 만드셨고 만들어 진 별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그 자연법칙 속에서 생성되고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나는 모든 별들이 하나도 같은 별이 없습니다.
오늘날 시사에서 유행하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똘레랑스’입니다. 이것은 불어인데 영어의 “탈라란스”로 관용을 의미합니다. “똘레랑스”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성경적 사상이라는 것을 오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 이것이 성경적 사상이냐면 우리는 무엇이든지간에 이렇게 다를 때 아주 불편해 합니다. 다를 때, 특히 우리는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안 되어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면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에 와서 느끼는 불편이 뭐냐고 물으니 자꾸 쳐다본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요즘은 덜합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한 10년 전만 해도 너무 쳐다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은 굉장히 기분나빠했습니다. “넌 왜 그렇게 생겼냐?”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나라에 왔으니까 그 사람이 특이해 보이는 것이지 그 사람 눈에도 동양 사람은 눈도 별로 보이지 않는 새우 눈을 하고 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선교사 한 사람이 파라과이에 있는데 한국 사람을 그들끼리 놀립니다. “눈이 새우처럼 옆으로 찢어진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다”라면서 한국 사람들을 절대 구분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코도 높이가 거의 같고 눈도 옆으로 찢어지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을 눈여겨보냐면 다름에 대한 인정이 너무 힘들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전부다 획일화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봉건사회는 더더욱 그랬고 군사정권 시대에는 더더욱. 북한을 보십시오. 아주 기가 막히게 일치가 잘 되어있습니다. 그 이전에 일본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일본사람들보다 더한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아예 종족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머리가 나쁘거나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실험실에서 사람을 만들어서 머리 좋은 사람만 계속해서 양산해 내고자하는 생각을 그 오랜 시절에 벌써 했다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렇고 독재정권에서는 더더욱 그랬고 또 군대도 이런 것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등도 하지 말고 꼴등도 하지 말고 줄을 잘 서야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어서 그대로 특징도 없이 그냥 평균으로 가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대단한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을 오늘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놀라움은 이러한 달라 보이고 때로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다 결합시켜서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제가 영혼의 아름다음을 묵상하던 시기였는데 이 지점에 가서 눈이 확 떠지면서 엄청난 회개가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내가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미명하에 행했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했고 나 자신은 또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니 이게 정말 얼마나 큰 무지였는가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마음이 쏠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그럼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운데 그 거부감이 정당한 거부감이 아닐 경우에는 결국 사실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편견이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외국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식사를 모시고 나가면서 고기를 먹자고 이야기하고 “Beef or dog?”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목사님은 “소고기를 먹겠느냐? 오리고기를 먹겠느냐?”라는 것으로 듣고 “Duck”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OK!”하고는 보신탕집에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잔뜩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헤어질 쯤이 되어서 당신 먹은 것이 사실은 개고기였다고 했더니 “Oh! Wonderful!”하면서 다음 해에 와서는 “dog 먹으러 갑시다. duck 말고 dog 먹으러 갑시다.” 했답니다. 또 한 경우는 같이 있던 독일 교수님인데 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진짜 보신탕집에 간 것입니다. 다 먹인 다음에 두 달 후에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이 먹은 것은 개고기였습니다.” 그 사람이 두 달 후에 편지를 받았는데 토하고 난리를 쳤답니다.
앞의 분은 아주 쉽게 다름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각에는 못 먹는 것인데 한국 사람은 이것을 먹을 수도 있구나. 내가 이 문화에서 태어났다면 먹을 수 있었을 거야.”하며 다름을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독일 교수님은 “어떻게 그것을 먹나”하며 생각을 못 깨트린 것입니다. 똑같이 예를 들자면 유럽에 가보면 우리가 볼 때 “저걸 어떻게 먹나?”하는 요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생겼는데 그 거부감이 정당한 근거가 있는 거부감일 경우에는 사랑으로 극복하면 되지만 이것이 정당한 거부감이 아닐 때에는 그것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은 그것이 사랑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견해에 대한 잘못됨 때문에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없이 사람을 만날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성으로 사랑하려고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쪽 보면서 심지어 그럽니다. “나는 걔 싫어”, “왜 싫은데?”, “몰라 난 주는 것 없이 미워.”라고 말입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사실은 너무나 많은 신앙의 힘을 낭비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해서 오히려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다름인데 어리석게도 그 다름 속에다가 옳고 그름을 가져와서 갈라내며 “저 사람은 나쁜 사람, 나는 좋은 사람”, “누가 옳은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가르고 했던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아무것도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다른 사물들을 하나님께서 제자리에 배치하셨을 때 아름다운 우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배치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지혜와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 나왔습니다.
건축을 할 때에도 전문가는 아무것도 시설을 안 해놓은 상태에서 천정과 벽에 뭘 붙이고 바닥에 뭘 붙이면 어떤 모습이 될지를 미리 잘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물건을 하나 가져다 두면 전체를 디자인하려는 계획에 따라 “이 물건은 안 맞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은 실재하고 나머지는 머릿속에만 있는데 머릿속에 그 물건을 집어넣어서 맞춰보면 색깔과 빛깔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사물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 다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하늘의 모든 별들의 별빛의 크기가 다릅니다. 불게 타는 별들은 늙은 별입니다. 파랗고 빛나는 것은 새로 시작되는 별입니다. 하얀 별은 막 사라지는 별입니다. 별의 색깔이 다르고 똑같은 크기의 별이 하나도 없어서 하늘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만약 하늘에 똑같은 구슬을 박아놓은 듯이 똑같은 별들이 똑같은 밝기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시시하겠습니까? 네별 내별 할 것도 없이 그별이 그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밝고 파랗게 빛나는 별이 있는가 하면 붉게 타는 별이 있고, 작은 별이 있는가하면 큰 별이 있고, 물론 크고 작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이 우주가 아름다운데 그 모상이 그대로 교회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안에 있는 교통이 성도들의 교재의 모상이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존재는 우주의 모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별들이 있지만 똑같이 생긴 별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도 성질도 다르고 신앙도 다르고 모든 것들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양한 본성을 가지는 인간들로 창조하셨습니다.
교회의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에 들어오려면 모두 중생해야합니다.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믿든지 저 사람이든지 모두 주님을 만나고 깨트려져야하고 거듭나야합니다. 똑같습니다. 그 사람 속에 똑같은 것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축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의 종류와 상관없이 모두 그렇게 됨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속의 일원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로 묶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로 함께 사랑하며 연계를 이루고 살 때 이 다른 것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냥 확 기도하면서 “한번 합시다.”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신중론자입니다. “기도해봅시다.”, “했는데요.”, “그것 말고 좀 더….” 이렇게 다른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만약에 그런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이 중생시켜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집어넣을 때 성질도 통일을 시키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쫙 통일됐다면 목회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합시다!” 그러면 모두 일어나서 “하자! 하자!”하며 전부다 뜨거워지고 무엇을 해도 전부다 같은 성향으로 움직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그대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 중에서 그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났는데 다 죄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의 조상이 되고, 어떤 사람은 악기를 다루는 사람의 조상이 되고, 이렇게 직업에 따라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똑같이 하나님이 교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 통일되도록 만드셨지만 나머지는 각각 다르게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도록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롱다롱 많은 사람들이 이 속에서 섞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와는 다른 저 사람 때문에 아름답다.’ 왜? 나는 굉장히 신중한데 아주 추진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음으로서 내가 오히려 그들에게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내가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도 똑같지 않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문화가 이루어 질 때 군사 한 방향만 발전한 게 아니라 선진 국가일수록 모든 사회의 분야가 다 함께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처럼 전쟁에서 무기가 없어서 진 것에 한이 맺혀서 중공업에만 매달리면 산업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것도 다 무너집니다. 쇳물을 녹이는 사람이 나오면 기타 치는 사람도 나오고, 기타 줄 만드는 사람도 나오고, 보기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일에 까지도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나오면서 사회가 함께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을 섬기고자 할 때 하시는 일들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필요합니다. 경제, 사회, 문화, 재정, 음악, 예술, 과학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야지만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니까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에 의해서 사람마다 각각 다르고 다른 것입니다.
(예화) 어제 집사람에게 오랜만에 꾸중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꾸중을 듣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집사람에게 나무람을 받은 것 중에 뭐가 있냐면, 그 때는 제가 생각해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대공원에 늘 산책을 가니까 “당신하고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 같이 가자.”해서 같이 갔는데 두 번 세 번을 따라간 후에 아내가 이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으니 같이 가자고 하고서는 당신 혼자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냥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산책을 하는 것 자체가 명상을 하는 것이니 거기서 투덜투덜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낭비적이고 음악을 듣고 나도 명상을 하고 아내도 명상을 하고 같이 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또 꾸지람을 들었던 것은 네댓 사람이 같이 갈 때 제가 한 사람과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 진짜 내가 그렇다는 것을 어제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냥 가서 “잘 있었니?”, “응.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지.” 이런 대화는 재미가 없습니다. 목사님들과 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든지 기도원을 간다든지 하면 이야기를 하는데 “잘 있었어?”, “잘 지냈어.”, “교회 잘 돼가?”, “잘 돼가”, “기도제목 있어?” 이러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내가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예를 들자면 “요즘 특별히 쓰는 책 있어요?”라고 물어본다든지 하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그러면 요새 무슨 책을 봤는데 아름다음에 대해서 꽂혔을 때니까 둘이 같이 이야기하다가 나에게 이야기 순서가 오면 쭉 이야기합니다. 이야기 하다가 같이 밥을 먹고 식사 후에 같이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거기서…”이러면서 다시 시작합니다. 화장실 다녀와서 그 사람을 만나면 또 얘기하고 “그게 결국은 두 가지로 생각이 나뉘는데…” 그러면서 1박 2일까지 그런 경향이 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자고 일어나서 또 “그게 결국은 말이지…”하면서 어저께 저녁의 대화를 다시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편 쓰고 와야지만 됩니다. 내 성향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기 굉장히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이런 점을 고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향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삼일동안 기도원 가있었는데 엄청난 기도제목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지금을 말씀 드릴 수 없지만 주제 딱 하나가 스파크가 됐는데 이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게 무엇이고 이게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디로 가고 그리고 이것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스파크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스터디도하고 할 것은 많은데 다 취소를 하고 산을 3시간동안 헤맸습니다. 아직까지도 정리가 안됐습니다. 더 헤매야 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떠오르면 그것이 계속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마무리되면 사경회 때 한 시리즈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아내도 같이 왔으니 손을 주머니에 넣고 명상하고, 나도 명상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게 결국 불편하고 했습니다. 그런 다름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남들이 잘 안 하려고하는 것을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고쳐야 할 것이지만 그런 것도 하나의 다른 기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한권 써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쭉 읽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은 좋다고 하는데 싫어하는 사람은 첫째로, 그 밑에 첫째로, 첫째로부터 첫째로, 맨 처음에, 나중에… 어디로 들어가는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는지 가닥을 못 잡겠다고 불평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한꺼번에 싹싹 그림 비추듯이 쓸 수 없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못쓰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숲속을 들어가듯이 파고들어서 “세계를 찾았다!”하는 것이 내 적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저 인간이 저런 식으로 살아서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인간이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못하는 것을 이 인간이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나하고는 정반대입니다. 뭐든지 보면 한 십여 권의 책을 읽고도 간단하게 딱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못하겠고 안 됩니다. 나는 캐고 들어가서 그냥 파고듭니다. 항상 하고나면 만족이 안 되고 ‘더 팔 수 있는데. 여기서 끝났구나.’합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은 그럽니다. “당신은 아무리 아름다운 시리즈 제목을 창조해도 내 영혼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그래서 뭐 엄청나게 행복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더니 “깨져. 부셔져야 돼.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기쁨 그러는데 “환란이 와. 시련이 와. 그래도 기뻐.”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쉬운 것을 얘기해도 다시 또 첫째로는 둘째로는 셋째로는…. 나에게는 이런 성향이지만 다른 지체들에게는 각각 다른 성향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놀라운 게 뭐냐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죄악들은 빼내고 자기에게 주신 그 은사와 같은 자기됨을 훼손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각각은 달라 보이지만 그것들을 하나님이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치를 해서 하나님이 전체를 아름답게 하시는데 각각이 이 등이 칠판을 보고 “너는 왜 빛이 나지 않니?” 의자가 바닥을 보고 “너는 왜 이렇게 색깔이 거무튀튀하니?”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닥이 이렇게 거무튀튀하니까 노란 의자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노란 의자가 있으니 바닥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만약 바닥과 똑 같은 가구를 집어넣으면 아마 관속에 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항상 저 사람이 나와 다르면 ‘그것 때문에 내가 받을 유익이 무엇인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참 아름다워 보이겠구나.’ 그러면서 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우열이 아니고 내가 저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없는 그것을 내가 채워주고 또 저 사람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 다름으로 내가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다름으로 내가 채워져서 내가 나 혼자였다면 아름답지 않았을 부분이 이 사람 때문에 아름다워지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볼 때 영혼들이 사랑스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역에 가보면 지성은 좀 모자라도 많이 사랑해주면 그 진심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뭐라고 말해도 쉽게 수긍을 안 하고 계속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자기가 너무 확신이 생겨서 이야기하는데 꼭 제동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 제동을 거는 사람 때문에 신중해 질 수 있습니다.
어느 만화를 봤는데 한 사람이 벼랑에 서서 줄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이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반대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잡아당기니까 뒤에 벼랑이 있는데도 원수 보듯이 바라봅니다. 저 사람이 잡아당기고 있으니까 내가 힘을 주면서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섞이면서 아름다움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역을 맡아보면 구역장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무엇을 가르쳐주든지 아멘하고 늘 뭔가 좋은 것을 이야기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함께 헌신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안 그런 사람을 항상 그 다른 것을 도덕적으로 연관지어 판단을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내 얘기에 토를 다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나눕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에서 아량이 생겨나고 도덕적인 잘못도 참아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한지체가 되는 사람들의 의무일진데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각자의 본성을 따라서 아롱다롱하게 창조하신 사람들의 다름을 불편해하는 것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을 같게 하려고 뭔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름으로 인해 자기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행복하듯이 그 사람의 다른 것을 깊이 인정해 줘야합니다.
(예화) 제가 직접 설교를 들어보지는 못했는데 설교집을 읽던 중에 굉장히 감탄을 한 설교자가 한사람 있습니다. 빌 하이블스 목사님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고 교회의 모습도 열린교회와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설교집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쉽게 하는지 그리고 내가 불신자라도 한번 이야기에 혹 하고 빠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내 설교집을 펴봤습니다. 어쩌면 같은 이야기기를 해도 이렇게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이런 분들은 드라마처럼 스쳐지나가도 할 이야기를 다 합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 들어와서 급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위로하듯이 말합니다. “목사님 설교로 이정도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설교를 못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고 그 사람 표현에 의하면 자기가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 자체가 참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교자들에게 권면하기를 “당신의 설교를 믿어라” 이것은 교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낚는 그물의 종류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설교스타일에 걸릴 사람들은 빌 하이블스 목사님의 설교에는 절대는 안 걸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반대도 그렇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그물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설교 사역을 시작하고 좀 교만했을 때는 세상에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를 쥐어짜면 한 10분짜리도 안 되는 것을 늘려가지고 내용도 없이 고추장도 타고, 간장도 타고, 양념을 타서 예화 여러 개 집어넣어서 저렇게 해서 되겠는가하는 교만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모든 설교자들을 깊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부러워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많이 사용해 주시길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도 더 좋은 것은 내용이 있고 깊은 고매한 설교자들의 설교가 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다름이라는 시각에서 보니까 이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실 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게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 사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다름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하찮게 여기시거나 다른 그것 때문에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깃들여 있는 도덕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 자체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그 다름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합니다.
구역의 식구들도 보면 다양합니다. 그것이 굉장히 아름답게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을 가진 목자입니다. 다양해서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아야합니다. 같은 구역의 식구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대개 보면 “내가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면 다른 사람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핀트가 하나도 안 맞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난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 “난 안 힘들어”, “난 그 사람 아니라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 “난 안 힘들어” 이렇게 의견이 완전히 갈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럴 때 지도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입으로만 말고 실재로 그 사람의 다른 것이 우리구역에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이야기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면 구역에 끼치는 좋은 영향이 반드시 있습니다. 다 못 봐서 그렇지 반드시 좋은 영향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영향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덤벙대서 실수를 하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 사람에게 새가족위원을 시켜놓으면 참 잘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입니다. “이이고, 오랜만입니다. 형님”하면서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그런 것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역을 배울 수 있지만 “당신은 왜 그 사람처럼 안하느냐?”고 물어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 자신들을 쓰십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어서 구역의 식구들 중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우리와 다름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고 우리들이 아름다워 보이게 되는지를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가르쳐 줄 때 눈이 뜨여지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에서 보면 ‘이런 시간과 이런 날들이 왜 내게 있을까? 나는 너무 싫다.’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달라지고 눈이 바뀌고 나니까 전에는 내게 아프고 괴로웠던 것이 보석과 같이 빛나게 되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신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예전 같았으면 버렸을 것들을 지금이기 때문에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그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다름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 다른 것들을 지체들이 충분히 누리며 살게 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깃발 하나에 모두 모여서 각각의 다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때 다르지 않았더라면 모자랐을 그 섬김들이 온전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사를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다고 할 때 방언은 개포동 교회에 지혜의 말씀은 평촌의 교회에 몰아주신다면 교회가 온전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주셔서 그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하셨고 서로서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 가치를 옛날의 나처럼 무시하지 말고, 힘들어하지 말고 그것을 아주 가치 있게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런 다름을 우리가운데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역의 식구들을 볼 때 하늘의 별 보듯이 그렇게 쳐다봐야 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별, 냉담한 사람은 밝게 이제 태어나서 빛나는 샛별. 그렇게 보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다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총회장 목사님이 두 분 계셨는데 총회는 회의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극도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이 들어옵니다. 잘못하면 치리당에서 노회가 책벌도 받고 하니까 이해관계가 얽히고 그랬을 때는 서로 잘해보자는 것이지만 큰소리가나고 그랬습니다. 내가 직접 몬 것은 아니지만 고신의 학장을 지내신 한상동 목사님이 총회를 진행하시는데 “의장! 그 따위로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큰 소리의 고함이 오갔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시며 “머리 좀 식혀가면서 합시다. 우리 찬송 한 장 부르고 계속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투다가도 이내 조용해집니다. 또 10년 전 총회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둘이 막 싸우다가 “총회장 당신 뭐하는 거야!”하니까 그 총회장님이 명패를 던지면서 “에잇!”했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그러므로 다름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러면서 그 다름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다워지고 저 사람이 나와 같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존재의 가치가 빛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