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능력
(2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설교모음)
설교기간|2019년 10월 16-1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02월 03일
목 차
1. 여호와를 찬송할 때(시 117:1) 2019.10.16.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2. 인자하심이 크도다(시 117:2 상) 2019.10.17.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6
3. 진실하심이 크도다(시 117:2 하) 2019.10.18.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0
찬양의 능력 (2019.10.16.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참으로 살고 싶은 그대에게(2019.1.21.새해말씀사경회1)
1. 여호와를 찬송할 때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시 117:1)
녹취자: 김세나
시편 117편은 언제 작시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라 모든 민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격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두 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절이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성도들이 자신이 찬양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열방을 향해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도록 격려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첫 번째 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라고 하는 이 구절을 오늘 아침에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점에서는 두 문장이 차이나는 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를 살펴보면 찬양하도록 부르는 대상자들이 첫 번째는 ‘너희 모든 나라’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나라는 그냥 아무렇게나 갈라놓은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개념입니다. 국가를 단위로 할 때 그렇게 세워진 한 국가를 나라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고엠’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세워진 나라들에 대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마치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부르는 후렴 가사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래 여호와라는 분은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맺으신 분으로 성경에서 계시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 높고 위대하고 모든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도 물론 생각하였지만, 그와 함께 이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오는 여호와의 이름이 주는 감화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너희 모든 나라들아’ 찬양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여호와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분으로부터 놀라운 은혜와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아무 것도 없는 우리를 능력으로 인도하사 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고 여기서 기라성 같은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며 살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누리게 하셨다. 그러한 크고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행하신 분이 여호와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분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모든 세계 위에 계셔서 너희들이 자랑하는 나라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당연히 이방의 모든 나라들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외치는 나라는 이방의 나라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우주적인 초청을 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감격은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때문에 감격하는지를 보면서 그 정도가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행복이라면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행복은 이 세상 사람들도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들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행복이 돈이나 물질에서, 또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세상 것들을 구하지 못해서 안달복달하며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일을 기뻐하며 찬송할 때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선교적인 충격을 추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찬양하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할 대 쓰이는 단어입니다. ‘할렐루야’ 할 때에 ‘할렐루’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정적이고 고유한 찬양의 가장 높은 수준의 동작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니 노래와 악기뿐만 아니라 삶의 행실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 찬양이 정상적인 찬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신이 원하고 고대하는 뜻대로 이루어져서 사람들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찬양이 아니겠습니까? 평소에 당연하다 생각하거나 하찮게 여기던 것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거나 가슴 벅차는 기쁨을 누리거나, 아니면 가슴이 전율할 것 같은 희열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던 이 사람은 적어도 이스라엘이 먼저 어떻게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입니다. 마음이 요동칠 때,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삶이 전개되지 않을 때, 악한 일에 에워싸여 괴로울 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인생을 살아갈 힘이 없다고 느낄 때, 그때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은 깊은 찬양 속에서 내 마음에 내려오시고,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슬픔과 근심, 괴로움과 많은 번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게 되는 것이 찬양의 비밀입니다. 순간순간 즐거움이 있다가도 흩어지듯이 미끄러지고, 어려운 일이 생겨 비상하리만치 마음이 모아져서 정신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썰물과 밀물과 같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우리의 정동의 변화들을 막아주는 가장 좋은 것이 찬양입니다. 그것도 긴 찬양이 아니라 제가 지금 부른 것처럼 짧게라도 그리고 잠시만이라도, 또 어디에서든지 눈을 감고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소서.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짧은 기도들로 마음에 밀려오는 우수(憂愁) 사례들을 씻어냅니다. 그러면 순간순간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멀리멀리 떠났던 하나님의 사랑에 줄에 묶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짧은 찬송, 짧은 기도, 그러나 간절하고 아주 깊어서 순식간에 그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게 되는 그런 경건의 기술을 반드시 익히라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혹은 잠시 책상에 앉았을 때에도 자신의 마음의 상태는 자신이 느낍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기에 최상의 마음인가? 아침에 집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 마음 상하는 일, 근심스러운 일 등은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이것은 서로 결합을 이루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새그물처럼 넓혀갑니다. 그러지 말고 그러한 일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올 때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 곡을 다 부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지만 남의 찬양을 듣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못 부른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제 귀가 높으니까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썩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물론 그래도 듣고 싶을 때에는 그러한 고전 성가들을 성악가들의 아리아나 연주 같은 것을 들으며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차를 타고 집회를 가면서 눈을 감고 ‘주여.’라고 기도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인생의 많은 일들 중 가슴 시리도록 남지 않은 추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은 세상에 붙어 있던 우리의 눈을 떼어서 하늘을 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땅을 쳐다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길이 없었는데, 내가 찾는 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실망하고 낙심하였는데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 희망을 갖게 됩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구나 라고 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너무 힘겹고 해결의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고 염려하는 대신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찬양해 보십시오. 기도해 보십시오.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찬양의 힘은 이 한 마디가 끝나기 전에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래도 요동치면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있지도 않은 허깨비 같은 것들이 내 마음을 감히 흔들고 있나이다. 예수여 물리쳐 주시옵소서.’ 다시 찬양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난리를 쳐도 잠잠한 가운데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찬양의 힘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나라들까지도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찬양 속에서 산다면 인간으로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가르쳐 줍니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두 번째는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라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나라가 아니라 민족들의 개념으로 내려옵니다. 나라를 크게 보고 백성을 작게 보아서 온 세상에 있는 나라들에게 먼저 말한 다음에 온 세계 안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에게 말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이스라엘이 아닌 이 땅의 많은 열방을 향해서 외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스라엘 안에도 다양한 민족이 있었는데 그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자는 대외용이고, 후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대내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찬송할지어다’라고 할 때에 사용한 단어가 앞서 나온 ‘찬양하라’라고 할 때에 사용하였던 단어와 다릅니다. 찬양하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할랄’이 ‘찬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할렐루’는 ‘너희는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야’는 여호와를 지칭하는 축약형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단어는 앞의 단어와 다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그냥 노래하고 찬송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찬양하는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찬양의 두 번째 기술이 나옵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곡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갈 길이 막막하고 아무도 돕는 자가 없고 심령은 갈갈이 찢기어 죽을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에 따라 마음이 기억하는 것도 움직이게 됩니다. 내가 지금 (무언가를) 먹고 있는 것에 몰두하면 옛날에 잘 먹고 잘 입었던 기억이 소환되듯이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예전에 말씀을 깨닫던 기억들이 소환되고, 오늘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옛날에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건져주셨던 기억들이 소환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찬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찬양은 일반적으로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경외하고 높이며 부르는 것이지만 두 번째 말씀에서 나타난 찬송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연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기술입니다.
찬양은 주님을 사랑하는 표지
그렇다면 세 번째로 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고 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기 전에도 당신은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신데도 왜 이 당연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기쁨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입으로 말할 때에 비로소 우리 마음에 그 영광스러움이 제일 순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일상생활 중에도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입으로 이야기할 때에 우리 마음속에서 10순위, 20순위 정도로 밀렸던 화제가 제일 우선순위로 올라오게 되듯이 우리의 마음을 실어 주님을 찬양할 때에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은 우리 머릿속에 제일된 것으로 올라와 다시 가슴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이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주님이 보태주신 돈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돈을 보내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병 때문에 죽어 간 것이 아니라 병 걸렸었는데 그 병상에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인간은 급속하게 정신적인 질병까지 걸려 죽음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기적을 보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돌아보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보면서 감격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찬송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분을 붙들고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겠다는 감정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떤 현실 문제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오늘 나의 상황에 맞는 말씀을 만나서 그것이 우리를 깨뜨린다는 보장이 있는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나 스스로도 어떻게 추스르기 힘들 때에 조용히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고 하나님이 이보다 더 어려울 때에도 나에게 나타나셔서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셨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이 드넓은 세계와 우주 공간에 하나님과 나 홀로 있다고 생각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그분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찬양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들을 위해 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 여러분들을 감동시켰던 그 일들을 진술하십시오. 그 자체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찬송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는 것보다 더욱 더 예기치 못할 하나님을 은혜를 만납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는 살만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인자하심이 크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시 117:2 상)
녹취자: 김세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찬양이 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부르는 찬양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우리가 이렇게 모여 찬송하니 우리가 모두 한 하나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개인의 찬송은 또 다른 유익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한 순간도 사물을 맞대고 살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매 순간 우리 앞에 비친 현실들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고 그 인상은 우리에게 기쁨이나 분노, 혹은 안타까움이나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마음의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거기에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마음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뛰고 그렇게 정동이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의해서 하위의 사물들이 다스려 질 때 덕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들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 인해서 감동하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정신생활을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찬양은 바로 이 생활의 유익을 줍니다.
여러 가지 욕심의 고개를 들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은 그 사이에서 이것을 따를지 버려야 할지 피곤합니다. 신앙으로는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육신은 그것을 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갈등에 시달립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사랑으로 묶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찬양)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마음에 분탕질치는 많은 생각으로는 정리되지 않다가 마음 깊은 속에서 울려 나오는 한 마디의 찬양으로 눈에는 눈물이 젖고 마음에는 모든 헛된 욕망들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찬양은 절대로 하나님만을 위한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찬송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유익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다. 마음을 다해 찬양한 그 결과는 언제나 순전한 마음과 은혜로운 정신입니다. 그래서 삶의 동기를 순화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의 깊은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자, 이제 오늘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무엇이 그 찬양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오늘과 내일로 나누어 하나씩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행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짝을 이루고, 크다와 영원하다는 것이 짝을 이룹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이 시인의 마음속에 가슴을 울렸던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좋은 찬송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생각나게 하기 보다는 어떠한 출발하였던지 간에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찬양이 훌륭한 찬양입니다. 이 찬송의 제목, 곧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시편 전체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제목이고 압도적인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그러면 시인은 이 노래를 틀림없이 혼자만 부른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불렀을 텐데, 이때 찬송의 가장 큰 제목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인자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베풀어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인자는 특별히 당신의 언약 백성과 관련되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쓰레기같이 여기고 이스라엘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보여주시는 순서에 있어서 먼저 한 민족, 한 나라를 택하여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주 확실하고 진실하게 보여주심으로써 다른 모든 인류가 미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혜택을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은 성함 중 여호와는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다른 이름들은 이방에 계시되어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해 주신 이름이었고, 이 여호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중에서도 경건한 사람들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시고 온 땅과 세계를 창조하셔서 드높이 계시면서도 꼭 집어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여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시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찬송합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경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생사를 함께 해 오며 애굽에서 탈출하고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 땅을 도착하고 그 수많은 역사의 고비들을 넘기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향하셨고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는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나타났다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인자하심은 누구를 사랑하되 사랑받는 사람에게 장점에 있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되 그 사람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마음에 가지고 계신 사랑의 성령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관성을 가진 그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인자’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선택된 후 마지막 멸망의 길에 들어가기까지, 정확하게 말해서 멸망하고 난 뒤에 그 뒤에도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말씀은 너무 무기력해서 우리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그 마음이 어떤 사람을 향하고 좋아하지만 능력이 닿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힘든 일을 만날 때 마음으로만 안쓰러워하며 그냥 견디고 있어야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능력을 가진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뒤에 쳐지신 채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눈물만 지으시며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더욱이 이 헤세드는 헤세드를 베푼 사람의 완전한 도덕적 사랑에 의해서 사람들이 혜택을 입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덕들의 아버지라고 말하여도 좋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왜 그러하셨습니까?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죄를 짓고 또 반복하고 그 죄에서 쉽게 돌아오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완전히 끊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인자하심이 시키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 비참한 영혼이 될 때 하나님은 당연히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지만, 동시에 그 죄를 짓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고단해진 그 인간의 영혼을 보며 가슴 아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원천으로 하여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 인자하심의 극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갈 때는 자기 마음대로 멀리멀리 떠났지만,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 절정이 바로 범죄 한 인류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 흔히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사과를 해야지 용서를 해 주죠.” 그런데 예수님은 사과를 빌지도 않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 용서해 주시냐고 사람들이 오히려 물으면 무엇 때문에 용서해 주시는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시면서까지 이해시키면서까지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 자신이 사랑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기쁘게 우리 인류를 구원하여 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는 이스라엘의 찬송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날 줄은 아직 몰랐겠으나 그들이 살아온 모든 삶이 하나님께 빚진 삶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음과 긍휼에 기대어 사는 그러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찬송의 주제를 제압하고 가장 높이 올려야 할 찬송의 제목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찬양)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시련과 고난, 결핍을 만나는 매 순간마다 언약 백성들은 마음이 상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힘입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은 높아보이던 자신을 하찮게 만들어주고, 의식에 없던 하나님을 우리의 의식의 전면에 불러 모시며, 그 하나님이 나의 삶 전체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 아래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 그 자비와 긍휼, 은택을 거기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눈을 뜨면 펼쳐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길가에 들꽃이 아름답게 피었지만 얼마 후 서리가 내리고 나면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있다고 하는 것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그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 위에 계셔서 우리가 어느 때에든지 항상 붙잡혀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봅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그분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살았고,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시련을 만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때에도 우리는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맡길 의욕이 생깁니다. 그분이 나의 인생을 당신의 손에 맡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과 같아서 촛불 앞에는 밝게 환하게 보이지만 촛불에서 멀어질수록 그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불이 우리 앞에 있으니 이 순간은 의심할 것 없이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이 년 후, 오 년 후, 십 년 후, 이십 년 후, 그리고 이 지구의 종말이 올 때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누구라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눈앞에 흘러가는 시간은 볼 수 없고, 또 앞으로 전개될 우리의 미래도 확신할 수 없으나 그보다 더 확실히 믿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여호와께 맡기면 하나님이 나의 의지가 되실 것이요.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돌보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대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분이 내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안에, 그분의 품안에 안겨서 이제껏 계속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내가 이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 때문에 살아 숨 쉬고 기동하고 소망을 갖는다고 찬송해 보십시오. 그리고 남은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주님의 손에 맡기며 그분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실 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내 마음에 좋을 때는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찬송을 돌리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다고 하는 감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 순간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음속에서 찬양을 해 보십시오.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의 따뜻한 손이 순간순간 외로운 인생의 길에서 여러분들의 뺨으로 내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포옹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맹세입니다. 그 따뜻한 사랑과 접촉으로 우리의 마음이 묶일 때 우리의 삶은 요동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진실하심이 크도다
“ …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하)
녹취자: 김세나
성경 중 가장 짧은 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 두 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인자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로 끝을 냅니다. 당연히 앞에 나오는 우리에게 향하신 이라는 구절은 인자하심에도 해당되고 진실하심에도 같이 연결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할렐루’는 복수명령형입니다. “너희는 찬양하라.”라는 뜻이고, ‘야’는 여호와의 단축형으로서 ‘여호와를’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 사용하는 ‘여호와의 진실하심’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단어는 ‘에메트’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아만’이라는 동사는 ‘굳건하다’ 그것이 형태를 바꾸게 되면 ‘굳건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구약성경에서는 의외로 ‘양육하다’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악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기를 “내가 이들의 유모입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쓰인 단어가 놀랍게도 이 단어의 동사에서 온 분사형입니다. 이 단어가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메트’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인데도 우리말 성경에서 ‘진리’로 많이 번역되었고 ‘신실’, 혹은 ‘진실’이라고도 번역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주의 진리는 하늘위에 가득하고…”할 때에 ‘진리’에 쓰인 단어이며, 시편에서 수없이 나오는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고…” 혹은 “진리가 나에게 힘을 주었나이다.” 등등 묘사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들이 한결같이 ‘에메트’라는 히브리어입니다. 거기에 각종 소유격이 붙으면서, ‘나의 진리’, ‘당신의 진리’ 등등으로 사용됩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단어입니다.
한 문장에서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문맥에 따라서 ‘에메트’가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여럿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한 나무인 것처럼 ‘에메트’라는 이 단어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 문맥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진실하심”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번역에 대해서는 저는 아주 썩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진리에 합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에게 이 ‘진실’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우리 개혁파 교의학에서도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실함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론을 합니다. 그래서 진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언제나 진리에 합치하게끔 계시고 행동하시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보다 더 큰 것이 없다면,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진리에 어긋나게 생각하시거나 행동하시거나 혹은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자기모순입니다. 자기모순은 불완전성이고, 이러한 불완전성을 가지고 계시면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완전하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성품입니다.
한편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신실함은 진실한 성품, 진실한 존재에 기초해서 그것을 관계에 적용했을 때에 나타난 변함없음이 바로 신실함입니다. 그 관계는 언약관계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노래할 때에는 그것은 반드시 언약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이라든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라든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라든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백성들과 맺으신 새 언약이라든지 언약관계를 전제로 하여 신실함이라는 단어가 성립됩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하다고 할 때 그 기준으로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있고 진리에 합치된 상태를 진실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니까 진리에서 이탈하기도 하지만 즉시 회개하거나 깨닫고 다시 진리에 합치하였을 때 그것이 이 사람의 본래의 모습처럼 가장 편안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처럼 되어가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것만큼 신실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진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결국 결론을 말씀드리면 여호와의 진실하심이라는 이 번역도 좋지만, 문맥에서 볼 때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시인은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양하라.”하면서 사실은 인류 전체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들어오는데 마지막에 이스라엘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진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신실함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충성스럽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충성스럽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엊그제 제가 설교하였습니다. 충성도 변하면 아부가 되고, 아부도 일관이 되면 충성이 된다고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일단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제목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주님을 반역하고 주님을 떠나고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 다시 돌아오고 또 다시는 떠나는 일들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의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복을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하나님이 징계하고, 징계하면 다시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다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끊임없는 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신앙을 가진 이 시인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찬양합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신실한 자들에게만 보입니다.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깊이 감명 받고 마음이 무너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확실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화) 식당에 들어가 앉아서 설렁탕 하나를 시켰는데 다 뒤져보는데 돈이 없습니다. 카드도 없습니다. 설렁탕이 7천원 쯤 되는데 천 원짜리 두 장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통장에 700만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인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신뢰합니까? 신뢰하지 않습니까? 신뢰합니다. 그러면 이 신뢰성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은행이 많이 있지만 외국 사람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도 우리나라 은행에 돈을 많이 넣어두지 않습니다. 은행마다 신용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몰리는 은행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모이고, 없는 은행은 다른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 가난합니다. 이것이 바로 확실성의 문제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의 이 돈이 사라지지 않고 아무 데나 인출되지 않는다고 하는 확실성 말입니다.
이것은 신실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신실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볼 수 있습니까?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명백하다고 한다면 신실함을 믿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대로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게 신실함을 믿을 수 없게끔 끊임없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사실 믿음 없이 보면 의심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본성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변하는 수많은 삶의 사태, 현실을 뛰어넘어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고 하는 신실하심을 믿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는 객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끊임없이 염려가 밀려오고 근심이 끝없이 솟아납니다. 도대체 이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없이 성경을 읽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라고 읽고 있으나 그것은 머리에만 말이 들어올 뿐 진짜 나를 움직이고 있는 마음에는 끊임없는 불안과 걱정, 염려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신실함을 보이시는데,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수없이 빌립보서를 읽어도 그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은 말씀이고, 내 마음에는 염려는 염려이니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직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인식능력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지배해서 모든 것을 그 아래 굴복시킨다는 뜻이 아닙니까? 지배하는 것이란 마음대로 배치되고 움직이고 그 아래 가만히 있는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해서 그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놀라운 평안이 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평안의 근거는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단서를 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근심, 걱정, 염려, 해야 할 많은 삶의 사태들이 눈앞에 전개되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러합니까? 어디에서 그러한 평안과 완전한 행복이 옵니까? 이렇게 우리들이 묻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다시 객관적인 계시로 돌아갑니다.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나를 평강으로 지켜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지금 나는 그것을 지금 누리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함과 신실함, 진리와 같은 모든 것들이 별도의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한 하나님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 시인에게 찬송의 제목이 될 정도였겠습니까? 두 개의 찬송의 제목을 드는데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여호와의 진실하심입니다. 이 진실하심 혹은 신실하심이 찬송의 이유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자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자는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베푸셔서 그 위에 하나님은 그러한 사랑 속에서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헤세드, 곧 인자하심,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사랑이 변덕 많은 사람의 사랑처럼 끊임없이 주어졌다가도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하는 식의 아주 불규칙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면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이 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신실하심을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리고 나 때문에 안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에 결코 변치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신실하시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신실하심을 내가 느끼면서 살아가야지만 그분에게 나를 넉넉히 마음 놓고 맡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고 그 신뢰를 토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우리의 인생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들을 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길로 수없이 변하면서 이리저리로 다녔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었고 또한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불신실함을 대조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이 변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면 그것이 인격적인 사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방식으로는 조폭들도 사랑을 합니다. 사랑해서 돈도 주고 차도 주고 하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회의하다가 대부에서 나오는 것처럼 야구 방망이로 뒤통수를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사랑은 신실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또 주님의 인자하심을 말할 때 언제나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태양은 끊임없이 빛을 발하고 우리는 그 태양의 빛을 받듯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불신앙에 마음속에 가득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방황하고 의심하면서 살아갑니다. 신실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렇게 탄핵을 당하면서 책망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일단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신실하지 않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인간은 간사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실패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믿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