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적 회복에 관한 연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녹취자: 김경애
종교개혁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의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는 방식대로 예배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박해를 받았고 그리고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예배를 재건하기 위해서 신대륙으로 갔습니다. 개혁주의의 위대한 힘은 예배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마가톨릭은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종류의 예배 속에서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예배 자체가 성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구원과 그리고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교회적 특권을 강조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로마가톨릭에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권한을 따라서 교회가 교회의 예배에 모이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비롯한 심지어 칭의와 성화의 은혜까지도 분여한다고 생각했고 급기야는 이 미사형태의 예배에 참석하기만하면 사람들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주입된다는 교리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교회와 사제의 계급과 평신도의 계급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리고 예배에 있어서 모든 성도들의 피동적인 위치 그리고 그들이 예배 속에서 교회를 통해 분여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받을 때에 그 모든 권한을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들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바로 이러한 예배의 형태의 고수야말로 교회를 질식시키는 것이었고 교회 속에서 진리의 요소가 사라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이 예배를 회복한 것이 종교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예배학적인 관점에서 본 종교개혁의 의의인 것입니다.
자, 개신교의 이 위대하고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엄청난 커다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이 박해받은 개신교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 속에서 이 놀라운 힘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인 예배를 우리들이 오늘날 잃어버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지극히 세속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현상적으로 말하자면 타락하고 죄를 짓는 것이 세속주의지만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지 말고 본질적으로 본다면 이 세속주의는 하나님이 계셔야할 그 중심자리에 인간을 둔 것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할 때의 세속주의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지만 저는 주변에서 동료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만나면 정말 경건하신 분들인데 목회는 세속적으로 하시는 분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무슨 목회를 통해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도 없고 정말 세속적인 욕심은 없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그런데 목회는 세속적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오늘날 보십시오. 오늘날 이러한 세속적인 교회의 사정은 드디어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기독교에 있어서 고전적인 선포라고 할 수 있는 이 중생과 회심의 교리를 앗아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가톨릭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차이점입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그 차이점도 사실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이 본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인간에 대해서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즉, 로마가톨릭이 이야기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높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존재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을 지극히 높은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들 위에 천사들보다도 더 뛰어나게 하나님이 두 개의 세상을 창조하신 가운데 지상의 세계의 모든 통치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한 사람입니다. 그런 인간의 높은 가치, 그리고 존엄성, 이런 것들을 깊이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또 하나 인정했던 이중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본래에 창조된 그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 그 자체는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어떠한 식으로도 인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당신을 찾아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어떤 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 창조된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에 대한 뛰어난 찬사와 그리고 타락 이후에 인간의 전적으로 비참한 상태를 메워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을 바라보는 이 관점 자체가 결국은 인간은 전적인 돌이킴이 필요한 존재이고 그렇게 돌아서지 않는 한 그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창조주 하나님을 배역하면서 사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18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던 영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있었던 교회의 연합운동을 바라보면 그 모든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보느냐하는 문제가 핵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하지 않는 모든 교회의 연합은 마지막에 교회로 하여금 세속주의를 향하여 치닫게 하는 그런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복음의 비밀을 경험하고 바뀐 사람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짚지 않고 교회를 연합하고 그리고 이런 기준들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이루어진 영국 성공회와 그리고 다른 복음주의자들의 연합, 그 이후에 이어지는 가톨릭과의 연합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 덮어놓고 그리고 이루어진 연합 속에서 교회는 세속화가 촉진되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가 인간 중심으로 사는 것은 그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어떤 내적인 강력한 변화 이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교회가 그렇게 어떤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을 집요하게 물을 때 그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하고 회심한 이후에도 그가 자기 결심으로 성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해감으로써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입니다. 이 기독교의 진리들을 요약하고 축소하고 축약하고 너무나 축약해서 마지막에는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Context 자체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축소하고 축약하고 축약한 것이 핵심으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머지 모든 복음적 진리들은 이것들을 확대 재생산해낸 것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역시 오늘날 우리도 이 세상을 향해 기독교가 자기의 정체성을 말할 때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라고 외치는 것이 축소되고 축소된 그 핵심이냐고 제가 묻는 것입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예배자로서 혹은 설교자로서 지내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십자가 설교가 울려 퍼지고 온 교인이 목회자와 함께 흐느껴 운적이 언제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하는 Repent or perish! 라고 외쳤던 청교도들의 고고한 외침들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기에도 꿈이 있고 저기에도 꿈이 있다. 우리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교회다.’ 여기에도 오다가 보니까 어느 교회에 커다란 간판을 붙이고 ‘우리교회에 오면 행복합니다.’ 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디트리트 보네프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함께 죽으러가자.’ 라고 말입니다. 어디 그런 복음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놓고 성도들은 교회에 수십 년의 세월을 다닌 동안 단 한 번도 자기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영혼이라는 진지한 선포를 들어본 경험도 없이 그렇게 인생이 끝나는데 이것은 교회가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은 바벨론의 후예들입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의 후예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동기 자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과 바벨론적인 세상의 가치는 크게, 많이, 높이, 강하게 이것이 가치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을 본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세계사 속에서 두 줄밖에 안 나오는 나라입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한 단어밖에 안 나오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로 선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세계 역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을 택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인가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리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바벨론의 가치는 보편적이 되는 것이고, 크게 되는 것이고, 많게 되는 것이지만 예루살렘의 가치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생각해보십시오. 폭풍이 일 때 배는 안전한 항구에 피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배가 안전하게 항구로 피하기 위해서 수천발의 조명탄을 쏘아서 부둣가의 모래알까지 환하게 밝혀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두움은 칠흑 같고 등대의 빛은 하나밖에 없어도 그 불빛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왜 이런 식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누군가 설교를 해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그럽니까? 워낙 개혁주의만을 설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신학을 빼어버렸습니다. ‘착하게 삽시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기도 많이 합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복 받습니다. 할렐루야!’ 무슨 신학적인 문제점이 거기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다음세대의 교회는 망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잘못된 일의 주범이 누구냐? 예배입니다. 예배입니다. 그러면 이 예배가 왜 주범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자,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극장구경을 가도 15분전에 가서 표를 사고 기다리는 인간들이 예배당에는 5분전에 나옵니다. 그것도 5분전에만 나오면 괜찮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도떼기시장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니 한 15분전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밀려들어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은 아직 못 들어오고 아직 밖에 있습니다. 왜 또 기도 시간에는 못 들어오게 하고 찬송시간에는 들어와도 되는지 그것은 또 무슨 근거입니까? 그리고 우르르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됩니다. 저희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가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게 성도인줄 알아!’ 그렇게 야단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느 교회가 두 시간이나 예배를 드립니까? 한 시간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다니던 그 교회는 교인이 그렇게 많이 모이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만 정확하게 예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똑같은 시간에 끝납니다. 12시 5분에 끝납니다. 놀랍게도 순서는 24가지입니다. 그러니 이제 줄어들 수 있는 것은 설교시간 밖에 없습니다. 급기야 설교시간이 30분, 25분으로 줄다가 이제는 10분대로 진입한 교회도 있고 심지어는 5분 설교하는 교회도 있고 심지어 이제는 ‘설교가 예배에 꼭 필요합니까?’ 묻는 교회까지 생겨났습니다. 자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예배시간에 앉았다 일어섰다 온갖 복잡한 순서를 따라서 별것을 다하고 그리고 또 목사님들은 올라올 때마다 철철이 어디서 배웠는지 하얀 가운, 까만 가운, 무슨 가운, 별의별 색깔의 옷을 입고 올라오는데 전기불은 환한데 촛불은 왜 그렇게 켜놓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들어온 것일까요? 헌금위원들까지 가운을 입히고 온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까만 가운을 입었던 것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일 뿐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줄도 끼고 무슨 장식도 붙이고 십자가도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 그렇게 해서 예배는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설교 원고에 코를 박고 설교를 시작하고 성가대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교인들은 이제 드디어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무슨 시간인지 분별이 안갑니다. 절반이 그 교회에서 제가 2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⅔가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도 고개를 숙이고 빛나는 것은 머리에 반짝이는 빛밖에 안보입니다. 그리고는 교인들의 예배 견디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나온 주보를 그것을 들여다보고 읽어댑니다. 드디어 빨간 펜을 꺼내서 틀린 글자를 찾아냅니다. 그리고는 헌금을 들여다봅니다. 감사헌금이 3,800,000원이 나왔는데 위의 이름을 세어봅니다. 가로로 몇 명, 세로로 몇 명 곱해보고 나누어보고 주보의 광고란을 읽으면서 ‘아무개가 벌써 시집을 가네, 장가를 가네!’ 그러다가 드디어 옆에 사람하고 필담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주보에 써서 왔다 갔다 편지가 오고가고 그리고 드디어 그것도 지치면 졸기 시작하고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하늘보다 높은 어디에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뛰는 사람, 저는 확신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만약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는 가시라고 그러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오셔서 모욕을 받으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거기에 없습니다. 절대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올 때에 했던 똑같은 태도를 나갈 때에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니 예배를 드려서 은혜를 받았으면 눈물을 흘리며 참회를 할 것이고 자기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못 만났으면 거기서 회개를 하느라고 누구는 빨리 가고 누구는 늦게 가게 될 것 아닙니까? 이게 무슨 극장도 아니고 한꺼번에 나가겠다고 사람들을 밀치면서 쏟아져내려옵니다.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보면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확 돌계단 위로 쏟아져 내려옵니다. 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그렇게 우울해보이던 사람들이 끝나고 나자 그렇게 행복해보일수가 없습니다.
(찬양)
험악할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예배를 드리고 회개의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내려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어느 잡지사에서 문 앞에서 앙케트 조사를 했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100명을 붙들고 물었는데 95명이 오늘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본문을 모른답니다. 그중의 반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 생각이 안 난답니다. 5명 남은 사람은 다시 3일 뒤에 전화로 확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3명은 3일 동안 잊어버리고 2명만 기억하고 있더랍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바뀔 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오늘날의 교회가 심각하게 분쟁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도 평안한 교회가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교회에서 다툽니다. 목사님들이 모이면 저는 그런 목사님들만 만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이면 대화가 재미없습니다. 교회가 땅을 산 이야기, 아니면 말 안 듣는 장로 혼내준 이야기, 그 다음에 자기가 교회에서 목사대접 못 받고 핍박받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교회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불화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배에서 나옵니다. 예배에서 한 하나님을 모두 같은 장소에서 함께 만나는 것이 언약 백성의 현실적인 공동체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되다 보니까 교인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서 찬양은 아무개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성경공부는 다른 교회로 가고 선교활동은 또 다른 교회를 가고 또 설교는 인터넷으로 다른 교회의 설교를 듣고 그리고 자기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교회와 자신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목회자를 향한 진정한 존경, 교회에 대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언제든지 개신교에서는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팽개치고 나갈 수 있는 이러한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과 언약적인 연합을 유지하시는데 그 언약적인 연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원리적인 언약의 연합과 실제적인 언약의 연합입니다. 원리적인 언약의 연합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태어나면 누구든지 원리적으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심지어는 그 언약을 나중에 배신하고 떠날 사람들도 일단은 언약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이나 미가의 고고한 부르짖음을 들어보십시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리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적인 연합관계에 없었습니까? 원리적인 언약의 기초는 우리의 신실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때문에 이 원리적인 언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것은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관계는 껍질만 남고 실제 이스라엘 삶은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가득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실제적인 언약의 연합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이때에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엄격하게 복종하는 그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서울시민 모두가 일어나서 예수를 안 믿으면 왕따가 될 것 같아서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어떤 한 사람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그가 나보다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믿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 질적으로 믿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수십만이 모이니까 ‘기독교는 수백만이 광장에서 모이자.’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팽배해있는 세속적인 가치관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목회자와 장로들로서 이 모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되묻는 가운데 예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를 우리가 다룰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하고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의 시작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이야기하다가 여자가 드디어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마리아가 갈라진 다음부터는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모세가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심 산은 저주를 선포했던 에발 산을 마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리심 산을 새로운 성지로 정하고 거기서 예배를 하는데 항상 사마리아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이게 예루살렘이 아니고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콤플렉스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런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세속적으로 예배드리지 말고 거룩하게,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희랍어 원문에 보면 이 신령과 진정이라는 것은 ‘그 영과 그 진리 안에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고 했으니 이렇게 예배하지 않고 저렇게 예배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예배는 그 자체가 피조물로서 그리고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녀로서 자신의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를 드리며 그분을 찬송할 때에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께 기도할 때에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어 사는 힘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축복하심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진 채로 우리는 하나님의 처분 하에서 그분의 축복 아래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좁은 의미의 예배가 예배의 전부가 아닙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도 좁은 의미의 예배 못지않고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이제 이 11시에 모이는 이 예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이 삶의 예배가 훨씬 중요하다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도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사람이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그 정신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예배시간에 실컷 졸다가 구약을 설교했는지 신약을 설교했는지도 모르고 행복한 표정으로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이 성도들의 일주일의 삶은 살아보나 살아보지 않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자기가 깨뜨려지는 진실한 체험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세속은 세상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속을 세속적인 세상이 이끌어낼 뿐이지 우리 안에 없는 세속을 세상이 주입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밖에 있는 세속은 우리가 산속에라도 들어가고 상대를 하지 않으면 세속과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나를 벗어날 수 있겠으며 내가 어찌 나 아닌 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세속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옛 성품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가 목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목회의 본질은 오직 두 가지이니 한 가지는 회심치 못한 죄인을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이미 회심에 이른 성도들이 그 은혜를 보존하게 하며 사는 것이다. 이 목회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하다.’ 고 말입니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있어야 되겠지요?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른 죄인이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목회하시는 교회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교인이 늘었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회에 자부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거듭나셨습니까? 얼마나 회심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가 진실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참회하며 깨뜨려진 사람이 얼마입니까?’ 그뿐입니까? 예배 안에서 6개월만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가 그쳐보십시오. 교인들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자,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자기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얼마나 비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이 역사가 없이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가운데 한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기를 자신의 책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의 청년부가 점점 줄어들어서 100여명 나오던 청년부가 이제는 20명도 안 나오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청년부 사역자를 불러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그랬더니 ‘장로님들처럼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해서는 청년들이 안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자율권을 많이 주시고 시설을 개선하고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는 예배 시설을 해주십시오.’ 장로님들이 파격적으로 ‘이제 너희들은 오전예배에 안 들어와도 되고 오후예배에 안 들어와도 된다. 너희들끼리 예배를 드려도 된다.’ 그렇게 하고 일억 가까운 돈을 들여서 청년부실을 기가 막히게 초현대식으로 구조 변경을 해주었습니다. 원하는 모든 악기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청빙했답니다. 2, 30명모이던 청년부 1년 동안 그 새 시설에서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10명으로 줄어들었답니다. 제가 갔을 때 큰일 났다고 한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생각이 이렇게 세속적입니까? 우리가 정직한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서 드럼을 치고 기타를 도입하고 예배 시설을 청년들이 좋아하는 신세대 감각으로 해놓으면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는 생각은 누가 가르쳐준 생각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데 인테리어가 예뻐서 회개했습니까? 당회에서 자율권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뉘우치고 신자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진리가 중심이 된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배당 속에서 예배시간에 예배다운 진리가 울려 퍼져야할 그 중차대한 시간에 일리가 울려 퍼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 세상에서 듣던 이야기가 교회에도 있네! 아, 그렇구나! 여기도 한번 믿어볼만한 곳이구나!’
조엘 오스틴의 책이 130만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제에게 자꾸 조엘 오스틴이 누구냐고 그 사람의 신학이 무엇이냐고 심각하게 질문하는 목회자들도 있고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신학이 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공공연하게 읽고 우리들이 예배를 정말 예배답게 못 드리는 동안에 성도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독초들을 먹고 이상한 독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합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중대한 제안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장로님들이 교회로 돌아가시면 한번 무기명으로 앙케트를 해보십시오. 오래전 일이긴 합니다만 그것도 서울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앙케트 조사를 했는데 전교인의 76%가 예배와 나의 신앙과는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 하여야할 중차대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라고 하는 상과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교회 속에서 목회자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진리를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우리의 많은 생활 중 종교의 영역을 서비스해주는 사람으로 개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가 되면 땅을 사고 거대한 교회당을 짓고 조직을 구축하고 그리고 이런 저런 계획들을 세우고 자금을 동원하고 그리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세상에 호감을 줄 수 있는 교회로 바뀌어가고 하면서 목회자의 Identity는 이제는 진리를 소유하고 그 진리를 외치는 피어린 선지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커다란 기업의 CEO같은 인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성경적인 목회자 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의 청교도들은 목회자가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 언제나 명료한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라고 말입니다. 목회의 전정한 가치는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성공은 또 무엇입니까? 큰 교회가 성공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의 사택의 크기나 타고 다니는 차의 질, 이런 정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큰 교회의 목회자가 좀 더 넓은 집에서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그렇게 여건을 갖추어줘서 연구와 그리고 목회에 몰두하게 한들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행복일수 있겠으며 만약에 목회자나 장로들이 그런 것에서 목회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잘못된 곳에서 행복의 원천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시대에 태어나서 목회자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진리가 울려 퍼지는 이 세상의 유일한 기관인 것입니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고뇌하고 그리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세상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그것을 이 예배당에서 듣는구나!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이런 것으로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 교회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이 교회에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오류이고 심리적으로도 오류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사람들인 줄 알았으면 저는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예배당 나 같은 죄인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고고함 거기에 마음이 끌려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신학적으로도 잘못입니다. 왜? 교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차별성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아까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고 개신교 누가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지만 들려오는 교회의 야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2세가 그 당시에 경건하기로 이름난 수도사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교황청에 들어왔을 때 교황청의 금고를 열어 보여주었답니다. 엄청난 금은보화가 거기에 가득했습니다. ‘이보게,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러자 경건한 수도사는 교황에게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거짓된 사상과 세속주의, 인간의 모든 정신을 혼란케 하는 이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그래도 교회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로서 그들에게 진리를 들려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 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배부른 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요 행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이 어두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며 살아야하는 그것이 우리의 소명의 본질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들려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시간에 바로 이 진리가 울려 퍼져야하는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 라고 하는 독일의 복음적인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서 외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다. 단 일주일동안 그 목사가 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고뇌하며 몸부림치며 살아온 6일이 있을 때 7일째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찔려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선 설교자, 그리고 그 강단의 외침을 통해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참회하고 새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장로, 그리고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본받는 교인들, 그 수많은 예배 속에서 무슨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울려 퍼져야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탄 진리가 아닌 순수한 성경의 진리, 우리가 스스로 성경을 대면해도 사람마다 제각기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갔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뒤를 이었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안에서 우리는 이 장로교 신앙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신학자건 목회자건 이 뿌리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시중 든 종, 이것이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자리매김했습니다. 위대한 청교도 오웬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복음의 노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목회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그래서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설교자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종아리를 맞고 때로는 거기에서 어루만지시는 위로를 받고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큰 사랑을 느끼고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 청교도들의 예배당은 독특했습니다. 이 뒤에 창문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강대는 아주 높고 아래 성찬 단이 있고 그리고 성도들은 고개를 곧추들고 그리고 목회자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자와 같이 설교했습니다. 실내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설교자 뒤에서 들어오는 이 빛은 빵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역광을 자아내기 때문에 설교자의 얼굴을 어둡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 예배당의 양식을 고수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두 개의 창문은 진리의 창문입니다. 구약의 빛, 신약의 빛이었습니다. 창문의 크기가 두 개가 똑같습니다. 그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 뒤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을 보면서 이 교회는 저기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말미암아 사는 교회라는 인식을 예배시간마다 성도들이 되새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개혁주의의 정신입니다.
목회자의 존재의 가치는 진리를 외치다가 죽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한테 버림을 받아도 주님께 인정을 받으면 환영을 받은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아도 주님이 고개를 돌리시는 설교를 했다면 그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살아야합니다. 루터는 자신의 제자인 멜란히톤에게 설교에 관해서 이렇게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대는 설교할 적에 그대 자신에 대해 화가 나든지 아니면 회중들이 그대에 대해 화가 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게 하라.’ 진리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참되게 외치면 싫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고 와서 붙잡힌 사람도 있고 설교자를 핍박한 사람도 있고 사랑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애를 살았습니다. 교회와 목회자의 가치는 어제 주님이 그 옛날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그 진리, 온천지는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그 진리를 변하는 세상의 일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선포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목사와 장로의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목사와 장로의 사명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적으로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그것이 번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라가 성장하는 그것입니다. 저희를 가르쳐주셨던 스승님가운데 고 김희보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제자한테 전화를 받으셨답니다. ‘선생님 저 아무개 목사입니다.’ ‘아 그래 자네인가?’ ‘스승님 안녕하셨습니까? 못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아냐 그래 목회하느라고 고생이 많지? 교회를 건축한다더니?’ ‘예 목사님 그렇지 않아도 큰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리고 봉헌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구나!’ ‘그런데 선생님!’ ‘왜?’ ‘제가 이제 교회를 사임하려고 합니다.’ ‘왜?’ ‘이제 교인이 1700명이나 모이고 예배당도 다 지었는데 제가 이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좋은 목사님에게 물려주고 저는 다시 개척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야단을 치셨습니다. ‘야, 이 사람아! 자네는 전공이 신학이냐? 건축학이냐? 네가 예배당을 크게 짓고 교인을 2000명 가까이 모아놓았기 때문에 할 것이 없다고? 누가 네게 그렇게 가르쳐주더냐? 그러면 보이는 교회는 번듯하게 건축했지만 그 교회 안에 있는 안 보이는 교회도 그렇게 번듯하니? 너 목사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자기의 교만을 깊이 회개하고 다시 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을 위해 매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예배를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뭐 내용은 있는데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조금만 일찍 끝내달라고 그래서 5분을 남겨놓고 마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더 제 강의를 정리하고 싶으시면 강의안이 그 속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는데 읽으시면 성령과 진리 이 두 요소가 예배 속에 회복되어지는 것이 예배의 개혁주의적인 전환이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예배의 이 모든 세속주의적인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만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 회심과 중생에 이르는 수많은 성도들을 낳고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끊임없는 회개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의 순수성은 보존되고 개혁주의적인 가치는 교회 안에서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부족한 강의는 여러분들이 보충해서 들으시기를 바라고 두서없는 강의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