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
2021-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1년 11월 07일 – 01월 02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03월 03일
목 차
1.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요 4:24하) 2021.11.07. 주일오전 6
2.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요 4:23) 2021.11.14. 주일오전 20
3. 영으로 예배합니까?(요 4:24) 2021.11.28. 주일오전 31
4. 진리로 예배합니까?(요 4:24) 2021.12.05. 주일오전 42
5. 설교자는 누구인가?(눅 20:9-15) 2021.12.12. 주일오전 54
6. 자신을 드리는 예배(고후 8:1-5) 2021.12.19. 주일오전 65
7. 마음으로 드린 찬송(출 15:1-2) 2021.12.26. 주일오전 74
8..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시 51:17) 2022.01.02. 주일오전 86
<설교 프레임>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1 2021. 11. 7 주일 낮 예배
<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 >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하)
I. 본문해설
II.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
A. 예배란 무엇인가?
1. 하나님과의 만남
2. 영혼의 힘을 얻음
B.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1. 예배하는 자
2. 새로운 방식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2 2021. 11. 14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A. 예배하는 자를 찾으심
1. “찾는다”의 뜻
2.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
B. 이렇게 예배하는 자
- 새로운 방식의 예배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3 2021. 11. 28 주일 낮 예배
< 영으로 예배합니까?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I. 본문해설
II. 영으로 예배합니까?
A. 예배와 성령
B. 성령과 영혼
C. 영혼과 마음
1. 온 마음으로 구함
2. 순종하는 자에게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4 2021. 12. 5 주일 낮 예배
< 진리로 예배합니까?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I. 본문해설
II. 진리로 예배합니까?
A. 말씀과 만남
1. 예배와 마음의 굳어짐
2. 말씀으로 찾아와 주심
3. 나의 가장 놀라운 체험
B. 만남과 설교
1. 루터와 칼빈의 견해
2. 선포하는 설교자
- 말씀 사역에 전무하게 해줌
3. 깨달으려는 청중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5 2021. 12. 12 주일 낮 예배
< 설교자는 누구인가? >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눅 20:9-15)
I. 본문해설
신자가 일생동안 신앙생활하며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목회자다.
수없이 많은 목회 활동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 일에 우선적으로 충실하도록 부름을 받은 설교자여야 한다.
II. 설교자는 누구인가?
A. 설교자의 사명
포도원을 세(貰)로 내어준 주인은 인정 많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마 21:33)
“때가 이르자” 주인은 포도원에 대한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공평과 의로움을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설교자들을 보내셨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그분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 설교자를 보내셨다.
B. 하나님의 사랑
세 명의 종들이 나온다. (1)“심히 때려서” (2)“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3)“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 그리고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죽임 당하는 종과 더 많은 능욕 받는 종들이 나온다.
무엇 때문인가? 매 맞고 능욕 당하고 죽임 당해도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아들까지 죽게 하시는 이유는 사랑이다.
C. 설교자와 말씀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심판을 보여준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8)
설교자는 전하는 일에, 청취자는 말씀을 듣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된다.
III. 적용과 결론
설교자의 소망은 심령이 변화되고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한 마리의 양(羊)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기대하라. 새로운 삶을 살기를 기대하라.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6 2021. 12. 19 주일 낮 예배
< 자신을 드리는 예배 >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I. 본문해설
II. 자신을 드리는 예배
A. 가난한 교회
B. 풍성한 헌금
C. 신령한 기쁨
1. 넘치는 헌신(고후 8: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2. 자원한 마음(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3. 자신을 드림(고후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7 2021. 12. 26 주일 낮 예배
< 마음으로 드린 찬송 >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I. 본문해설
II. 마음으로 드린 찬양
찬송은 은혜 받은 성도의 노래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과 홍해 사건을 보라.
찬송다운 찬송이 되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야 한다.
*대장간의 풍경
A. 하나님의 창조
B. 하나님의 구원
C. 하나님의 은혜
III. 적용과 결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8 2022. 1. 2 주일 낮 예배
<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I. 본문해설
II.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
A. 다윗의 제사
B. 말씀의 능력
C. 참회의 은혜
III. 적용과 결론
마음이 가난한 자를 찾으심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1 (2021.11.07._주일오전)
1.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下)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예배에 모일 수 없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드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며 이제 우리들이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한 번쯤은 우리가 약 2년 동안 겪었던 팬데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할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수많은 실직자들과 사업체를 하는 사람들이 문을 닫아야 했고, 고용된 사람들은 해고되어야 했습니다. 수출은 줄어들고, 산업은 곤두박질을 치고, 국가의 재정도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겪은 고통과 이것이 남겨준 삶의 흔적들은 일일이 매거(枚擧)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팬데믹의 모든 상황을 반성하고, 또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자로서 한번은 팬데믹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일찍이 없었던 이 팬데믹 사태를 경험하면서 예전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적도 없을 것입니다. 2년 동안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에서 오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공식 집계일 뿐이고, 집계되지 않은 채 죽어간 사람을 계산한다면 칠백만 명, 팔백만 명 이상의 사람이 아마 이 코로나로 죽어갔을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제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까지 희생자로 친다면 어쩌면 천만 명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가져다준 충격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충격을 겪으면서 우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한 가지 반성하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고, 한 번도 중지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예배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코로나 팬데믹 사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예배에 대해서 한번 경종을 울려주신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고, 신앙의 자유에 감사할 줄 모르고, 특히 예배의 자유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한번 커다란 충격을 받게 하심으로써 예배드리지 못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비참한 삶인지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에 어떻게 불안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는지를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도 이 상황을 겪으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고, 남아있는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예배에 관해서 우리에게 한번 경종을 울려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한 날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진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이 코로나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뚫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예배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주일을 지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비록 인간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우리 신앙인의 의무는 그렇게 발생한 불행에 대해서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아니하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고치고, 팬데믹 사태가 일어나기 전과는 다른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들이 깊이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는 오래전 우리는 이런 하나님 예배의 자유,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 감사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수많은 예배의 기회들을 우리의 태만과 나태 속에서 흘려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 아직 코로나가 종식되진 않았지만 다시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우리의 방만했던 예배 생활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코로나 상황 동안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던 우리의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II.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
신앙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면, 그 경외심은 예배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특별한 형식의 예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워낙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침에 눈뜨고 생활하고 밤에 눕는 모든 것, 심지어는 잠들어 있는 시간까지도 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사는 예배의 순간순간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형식이 있는 예배를 제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흩날리는 나뭇잎의 반짝임과 흐르는 물의 소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만치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일체 불화의 담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별도로 예배 시간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하는 날을 정하자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가 타락하자마자 즉시 제사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도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후손이었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인류 첫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축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진심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자였고 악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습니다. 거짓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사가 받아들여졌을 때, 제사드린 아벨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도 하나님 앞에 거절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 혹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거절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온 인류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보실 수가 없어서 싹 쓸어 심판을 해 버리셔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아벨의 분신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렸더라면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만큼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돌이킬 기회를 많이 주셨고, 노아라는 의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게 됩니다.
온 땅이 물에 잠기고, 모든 사람이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살아서 기식(氣息)이 있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들이 모두 죽어 버렸습니다. 오직 노아의 방주에 있던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홍수가 끝난 후 방주 바깥으로 나와서 드린 첫 번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온 인류가 다 멸망당했는데도 노아의 가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그 작은 예배를 아주 기쁘게 흠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악할지라도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노라는 은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해와 달과 모든 계절이 일정하게 움직여 농사를 하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번성하며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이 약속을 하나님이 확실히 지키실 증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는데, 그것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순간에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성전에 나왔지만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며 오히려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몸은 예배당에 나오고, 발걸음은 성막을 드나들지만,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에 대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미움 거리였고, 성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피 흘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의 회복을 외쳤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진정한 산제사를 드리도록 그의 모든 삶의 방면에 대해서 탄핵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다 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이방인처럼 살다 왔으니 어찌 그 예배가 하나님께 응답되겠습니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짐승만 죽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짐승 같은 본성을 죽여서 자기 깨어짐 속에 제물로 바쳐야만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은혜를 주실 텐데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그런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제사를 드렸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중요성은 구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자들도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자 제자들의 마음은 불타는 마음이 되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본받아 살고 섬겼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꿈꿨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나라가 될 때에 그 나라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10시, 12시에만 모이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 모든 영역에 있어서 숨 쉬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사랑에 감격하는 예배가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아직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에서 성화의 도상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모든 거짓과 죄로부터 성화되어 완전한 단계에 이르게 될 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먹고 마시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 후까지 끊임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경배할 때,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상태가 천국 생활입니다. 그러니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며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예배드리는 삶이 지루하고, 예배 생활이 재미가 없는 사람들은 천국이 아주 지긋지긋한 곳이 될 것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교회는 급속하게 예배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위대하고 큰일을 듣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선교의 장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때도 예배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세상의 즐거움에 시간을 쓰는 것이 모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벌써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경고하면서 경종을 울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고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엄중히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와 신앙의 관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최고의 예배자였을 때였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교회에 예배드리기 위해 오는 발걸음은 행복으로 가벼운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예배당에 떠밀려 온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앞자리를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너무 사랑하는 연인 앞에 마주앉아 교제를 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렸습니다. 여러분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훌륭한 예수 향기 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예배자로서 그리스도 예수가 충만히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아직까지도 두렵기 때문에 예배당에 못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기저 질환이 있으신 분,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시는 분들, 이해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도 영원히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사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는 주일을 안 지킬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주일을 못 지켰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 사정사정해서 외출증을 끊고, 건너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더 심했다면, 의식이 없었다면 주일을 못 지킬 수 있습니다.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에 예배를 드릴 때 정말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예배드리는 정신들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 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고 생각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나올 수 있는데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보다는 자기의 편한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비디오를 켠 것처럼 여러분의 예배가 다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분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무릎까지 꿇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열 명에 한 명도 안 됩니다. 대부분은 평상복 차림으로 아니면 심지어 파자마 바람으로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서 예배를 드리실 것입니다. ‘딩동' 택배가 왔습니다. 가서 받을 것입니다.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차를 빼 주십시오.'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옵니다. 오줌이 마렵습니다. 화장실을 갈 것입니다. 목이 마릅니다. 물도 마실 것입니다. 애쓰지 마십시오. 거기 하나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왜 계십니까? 그것을 예배드렸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한 회사의 높은 회장이고 말단 사원이 여러분하고 면담을 하는데, 그런 태도로 화장실 들락날락하고, 물 마시면서 파자마 바람으로 여러분 만나면 여러분 그 만남을 만남이라고 인정해 주겠습니까? 도대체 거기에서 경외의 눈빛을 추호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예배드릴 수밖에 없으면 화재가 나지 않는 한 방해받지 않을 정도로 문 걸어 놓고 흐트러지는 자세가 없이 정확하게 예배를 드리며, 이 예배당에 나와서 설교자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절대 못하지 않는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그것은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와 모자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바보가 아닙니까? 누구는 어리석습니까? 아니 핸드폰만 켜고 소파에 앉으면 드릴 수 있는 예배인데, 왜 어떤 사람은 한 시간 반을 차를 타고 와서 여기서 예배를 드립니까?? 아픈 몸을 이끌고 주위의 부축을 받고 휠체어를 타고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여러분만큼 그렇게 편리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생각이 모자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홀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를 보아서 남겨준 글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몇 번이나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만 그렇습니까? 이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텅 빈 예배당에서 매주 설교해야 했던 목회자의 심정을 여러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성도들이 가득 모여 설교해도 은혜 받지 못하는 성도들이 눈에 들어와서 예배시간에 나갈 때는 눈물이 흐르는데, 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는 그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결국 우리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예배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마음 다해서 드리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이런 경종을 울리셔서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셔야 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변화된 예배자가 되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도저히 예배당에 나오실 수 없는 분은 생각하십시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가슴에 손을 얹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 물어보십시오. 확신이 서지 않으면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지금보다도 갑절이나 더 예배다운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홀로 예배를 드리다 주님 만난 사람들의 많은 간증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매주 교회에 찾아서 등록을 합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코로나 이전에 우리가 진짜 예배자였는지 깊이 반성하고,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 예배자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과 뜻과 성품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울려주신 경종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겸손이 신앙인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의미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그 의미를 묻고, 그래서 예전보다는 더 나은 나 자신이 되고, 예전보다는 더 훌륭한 신앙을 갖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A. 예배란 무엇인가?
1. 하나님과의 만남
그러면 도대체 예배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란 무엇입니까? 만나는 것은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이웃 사람들과 얼굴을 알고 지낸다고 할지라도 길거리를 스치다 지나가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만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음식점에서 밥 먹다가 저 건너편에서 돈 계산하는 뒷집 아줌마를 봤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만남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만남이란 인격과 인격을 가진 주체가 함께 인격적인 교통을 가지고 저 사람 안에 있는 걸 내가 느끼고, 내 안에 있는 것을 저 사람이 느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그래서 피해 다니던 빚쟁이와의 만남은 이런 의미에서 만남은 아닙니다. 걸린 것입니다. 도망 다니다가 걸린 것이지 만남이 아닙니다. 만남은 인격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만남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당에 나와 있으면서도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못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날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화 구경을 가도 15분 전에 가서 매표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예배당에는 15분 전에 미리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손으로 뽑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5분 전에 도떼기시장처럼 밀려 들어옵니다. 그렇게 와서 예배를 시작합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 들어오질 않고, 천천히 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모기만한 소리입니다. 처음부터 그 사람 마음속에는 찬양을 부를 의지가 없습니다. 찬양이라는 것은 입놀림이 아니라 마음 울림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깊이 찬송해서 내 안의 심정에서 펌프질이 일어나서 쓰레기 같은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찬송할 의지가 없습니다. 모기만 한 소리, 심지어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마스크까지 썼으니까 이제 떠드는지 안 떠드는지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성의 없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실어서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습니다. 눈을 감고 모든 기도 순서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설교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려고 가방을 다 쌓아 놨는데 나이 많은 담임선생님이 와서 종례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목표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이 납니다.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이 오고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갑니다. 그 중에 절반은 구약을 설교했는지 신약을 설교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저 건너편에서 보면 올 때는 늦게 온 사람들이 갈 때는 왜 그렇게 빨리 갑니까? 저 건너편 건물에서 보면 알록달록한 구슬이 쏟아지듯이 사람들이 계단을 와 쏟아져 나옵니다. 빨리 나가는 걸 보면 굉장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식당 아니면, 놀러 가지 않으면, 주차장으로 뛰는 것입니다. 뛴 다음에는 집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급하십니까? 아니, 음악회나 오페라 같은 데를 가도 끝나고 나면 군데군데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으며, 연주회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하나님 만나는 예배가 그까짓 연주회만 못하고 오페라만 못합니까?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어도 그래도 몇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 아닙니까?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드리기 싫은 예배를 한번 못 드리는 상황이 되어 봐라.", “너희들의 심령이 어떻게 되나 한번 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예배생활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감히 이런 코로나 팬데믹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그 위에 더 짓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목표는 목적이 있습니다. 제일 큰 것이 목적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뭔가 돌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세 가지입니다. 성경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가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보태지지도 않고 감소될 수도 없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욕을 욕을 해도, 그 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소시키지 못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같이 찬란한 영광을 발휘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 세계를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신앙이 없고 대역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욕 몇 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던 길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장소와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신 분이지만 특정한 장소에 당신이 계신 것 같은 효과를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공간에 계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 때,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 경험했던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타지 않는 불같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인데 거기에 특별히 계시다는 걸 보여주심으로 믿음이 연약한 이 모세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끔 하나님이 충격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는 이 두 가지 의미의 영광이 아닙니다. 세 번째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효과적 영광이라고 하는 건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신앙의 훌륭한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나를 보며 “네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을 보니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게 믿어지는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인정을 해줄 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이냐면 훌륭한 장점이나 아주 탁월성이 있을 때 그게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빛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 이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거는 불신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신자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일날 예배 시간 말고는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사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래서 주일 전체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날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일을 주신 이유는 주일날 만난 하나님을 일주일 동안 생각하면서 살라고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들이 하나님 생각 안하고 거의 살다가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런 생각 안 할 때 하나님은 가장 작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통해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을 받으려고 하니,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대적하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하니, 그런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예배는 올 때는 세상 생각이 가득했는데, 갈 때는 하나님 생각이 꽉 차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예배의 목적입니다.
근데 그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을 위해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지만 알게 될 것이고, 알아야지만 감동을 받을 것이고, 감동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존귀하신 분입니다."라는 무릎을 꿇는 고백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한 나라와 한 나라가 전쟁을 한다고 치겠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이라면, 전투에서 많이 이겨야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서 승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속 전투에서 패배하면 전쟁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라면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결국은 보십시오. 만남의 감격은 보고 싶음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고 보기도 싫었던 사람은 만났을 때 일도 반갑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미워했던 사람은 만났을 때, 미워했던 것만큼 고통의 크기가 커지는 것입니다. 결국 만남의 감격은 보고 싶음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배의 감격이 없이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주님을 못 만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하나님이 일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전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일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달콤한 분인지를 깨달아서, 일주일 동안 잊지 못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이 그런 주일이 되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주일이 저절로 그걸 주는 게 아닙니다. 주일날 저녁 때 집에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면서 넷플릭스를 계속 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주일의 중심이 예배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젊었을 때 자기는 죽어도 싫은데, 부모님의 사진을 보여주실 때부터 이 남자 진짜 싫었습니다. 근데 엄마 아빠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꼭 한번 선을 보러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앉아 있었던 자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는데, 만났는데도 더 맘에 안 듭니다. 그리고 자꾸 분식집이나 가자고 합니다. 가장 바라는 건 뭐냐면 이 남자하고 빨리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뭔지 아십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거에 대해서 하나님이 경종을 울려 주신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영혼과 삶 전체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이 팬데믹 사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신 것입니다. “봐라! 이게 너의 모습이니라." 하고 팬데믹이라는 거울을 우리에게 비춰주신 것입니다. 그 거울에 비춰보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6일 동안 그리워한 적도 없고, 첫 번째 날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보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사니까 예배의 감격이 없고, 예배의 감격이 없으니까 하나님 보고 싶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면서 사는 동안에 예배는 아주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의무가 되어버리고, 얼씨구나 신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핸드폰으로 찾아보면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서로 만나고, 만나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전보다 나를 더 많이 알아주신다는 마음이 내 안에 꽉 차면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감동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6일 동안을 하나님 그리워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그리움의 정신이 이웃에게 파고들면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얼마나 외로울까?"를 생각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해도 듣지 않으니까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해 주는 것이 섬김 기도의 동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예배의 정신이 펼쳐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사를 읽어보시면 무시무시한 핍박들이 가해졌습니다. 그중에 오래전에 읽은 것 가운데 기억나는 거 하나는 뭐냐면, 예배는 숨어서 드릴 수 있는데, 세례는 숨어서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자체를 그 당시에 강이나 호수 같은 데 가서 물에 첨벙 들어가면서 드리는 세례였습니다. 공개적인 장소니까 사람들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하고 나만 가서 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 증인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공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한다"는 “호몰로게오”(homologeo)라는 그리스 단어가 혼자 중얼거리는 고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세례의 전제조건입니다. 근데 이것을 밀고자들이 밀고를 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군인들이 추적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가면서 추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예식을 존중해줘서 기다려주는 때도 있다고 합니다. 세례받고 즉시 체포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사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순간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세례받는 것을 예수와 결혼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와 동거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난 예수와 죽더라도 결혼해야 되겠다는 사람들이 초신자들입니다. 그거를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핍박 속에서도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두운 시기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죽음보다도 자기 신앙을 파수(把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거울에 한번 비춰보면 오늘날 팬데믹이 있기 전에 우리의 예배 생활에 대해서 깊이 반성을 해야 됩니다.
저는 사람입니다. 허물이 많고,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매일매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 열 번을 예배를 드리면 세 번은 울면서 나갔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예배시간에 주님 못 만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현장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잘못 살고, 설령 자기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처음 믿은 순간 아닙니까? 우리가 예전부터 하나님 믿으려고 교회에 나왔습니까? 하나님 사랑하려고 우리가 예수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나 사랑하려고 예수 믿었습니다. 나 좀 행복해보려고, 뭐 해도 되는 게 없으니까, 나 좀 어떻게 살아보려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거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나만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래서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한순간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면서 펑펑 울며 회개하고, 그때 비로소 내가 있지도 않은 것들을 사랑했으며, 좋지도 않은 것들을 예쁘게 여겼으며, 옳지도 않은 것들을 그렇게 갖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멘.
여기서 깨달아지는 것이 뭐냐면 예배의 목적이 영광을 돌리는 거고, 목표가 하나님을 만나는 거라면 만나게 해주는 수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빛이 비치기 전에는 우리 모두 다 캄캄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니 무슨 대장동인지 뭔지 개발을 해서 한 사람이 천억, 몇천 억씩 가져갔다고 합니다. 근데 묻고 싶은 게, 그 돈은 무엇에다 쓰겠습니까? 그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쓸모도 없는 돈 아닙니까? 근데 왜 그렇게 사람들은 미친 듯이 탐욕을 부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그들을 강탈하면서까지 탐욕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 왜 돈이 있으면서도 미친 듯이 써도 일생 못 쓸 돈인데, 더, 더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게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 없으면 죽을 자신의 운명을 생각 안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걸로 먹고 마시고 더 좋은걸 소비하고 장소를 이동하고 없는 물건들을 갖고 이러면서 정신을 계속 빼앗기는 동안에 죽음의 공포를 잊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게서 가장 불행한 모습이고, 결국은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결국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정신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데 진리의 말씀이 비쳤습니다. 어둠 속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면서, 캄캄했던 공간이 다시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하나님 만나게 해 주는 수단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코로나 나기 이전에 여기에서도 우리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소홀이 설교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듣고 싶어 했습니까? 그랬더니 결국은 하나님이 아예 못 듣게 하셨습니다. 육성으로 들을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권사님들, 연세 드신 분들, 눈물을 흘리기까지 예배당에 들어오고 싶어 했지만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성으로 그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깨달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속삭임이라고 존오웬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책임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도하려고 할 때, 이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싶어 하는 성도의 마음, 그 둘을 축복해 주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을 때, 그때의 예배는 특별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조건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려서 변화시키고 역사하시는 일이 일어날 때, 그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 앞에 안 드린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 아니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더 쌓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여러분을 아는 사람이 여러분 앞에 공손히 절하며 여러분을 아주 높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명하신 두 분을 저희집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고 엄숙하게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거기에 만약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여러분 당연히 감동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잘 차려 입고 약속한 날 갔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대궐 같은 한옥집입니다. 대문이 삼중으로 달려있는 대갓집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하인들이 있었는지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첫 번째 문부터 세 번째 문까지 양쪽으로 도열해서 여러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여러분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연회가 펼쳐질 큰 환영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이 끝에서 저 끝도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커다란 교자상이 놓여있습니다. 두 부부가 정 가운데에 모셔졌고, 양쪽 주인은 그 옆에 앉았고, 시중드는 하인들이 양쪽에 서서 무엇이든지 분부하면 거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은한 불빛이 연회장에 가득하고 특별히 조직된 국악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가락으로 연주까지 울려 퍼질 때 활짝 열린 마당에는 예쁜 꽃들이 가득 피었습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반짝이는 아주 훌륭한 그릇에 모든 음식이 담겨져 있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같이 잔치를 하시지요." “먼저 드시지요." 그래서 손님이 기대감을 가지고 뭘 먹어볼까 하고 앞에 있는 그릇의 뚜껑을 열었더니 똥이었습니다. 옆에 뚜껑을 열었더니 묽은 똥입니다. 뒤에 그릇을 열어보니까 마른 똥입니다. 옆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물똥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상을 엎어버리고 똥은 너희나 먹어라 그리고 나는 집에 가서 눌은밥을 먹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깨끗이 청소된 문 세 개를 가진 거대한 저택, 도열하고 서 있는 예쁜 차림의 하인들, 그리고 아름다운 꽃밭과 아름다운 음악 소리, 이것이 격조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식탁은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형식보다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을 바친 적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는 죄가 하나 있습니다. 예배를 잘못 드리는 죄에 대해서는 거의 회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은혜를 못 받은 것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로 찬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한 적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십시오. 나는 확신합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하루에 한 번씩만 주일 예배를 위해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게 해달라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내놓는 음식은 똥 같은 예배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마음을 찢으며 기도한다면 여기에는 사뭇 다른 예배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 한 사람에게 위탁된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거룩한 의무입니다.
죽는 그 순간 여러분에게 마지막 15분이 남았다면 뭐 하시겠습니까? 유언도 다 끝났습니다. 마지막 15분 남았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예배드려 달라고 하겠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고요히 주기도문과 함께 눈을 감고 하나님께 미끄러지듯이 가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입니다. 나의 예배를 나의 인생에 드리는 마지막 순간의 예배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의 강조점 가운데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2. 영혼의 힘을 얻음
결국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영혼의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배에 올 때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찾아오고, 정말 삶의 희망이 없었는데,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이 언제 막을 내리든지 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그 품 안에 있기 때문에 예배 속에 만난 그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어려움을 만나도 이 어려움보다 더 큰 하나님과의 교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의 힘을 못 얻으니까, 집에 가서 성경 읽을 기운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육체의 기운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영적인 미각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독감에 걸리면 밥을 못 먹겠다고 합니다. 밥을 도대체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숟가락을 들 힘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이빨이 망가졌습니까? 아니면 먹으면 토합니까? 그게 아니라 일체의 곡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들어서 미각이 모두 죽어서 먹는 것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세상없는 좋은 음식을 갖다 놔도 먹고 싶지도 않고, 그럴 때 누가 좋은 뷔페라도 가자고 하면 고역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시간에 와서 그런 영혼이 말씀으로 일깨워지고,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서, 영적인 욕구가 생겨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꿀같이 단 것입니다.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그때만의 일은 아니지만, 어느 한 지체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지체인데, “목사님 저는 예배드리는 유익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시체들과 교제를 나누고 밤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갈 때면 성경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불길처럼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게 아니라 성경을 알고 싶다, 지체들에 비해서 나는 성경을 너무 모른다는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좋아하겠습니까? 그렇게 좋아하겠습니까? 다윗도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 감동을 받으면서, 다시 성경을 읽을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힘이 생겨나니까 기도할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혼자 있고 싶은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새벽기도 못 나오는 사람은 그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안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 자기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힘을 우리에게 넣어주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냥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영광을 돌리는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도 예배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을 힘겹게 살다가 누군가의 따뜻한 이야기 들으면 잠깐은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하나님 만나야 바뀌는 것입니다. 허약해진 영혼 뒤에는 사라진 예배의 감격이 있고, 사라진 예배의 감격이 있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삶의 모든 허무와 시련을 이기고, 그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고,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구나." “나도 정말 저렇게 살고 싶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2 (2021.11.14._주일오전)
2.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삶은 예배입니다. 성경은 예배를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 제사가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며 사는 것이라고 로마서 12장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 예배라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우리들이 생활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좁은 의미의 예배를 말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훌륭한 예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적인 예배입니다. 가정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공적인 예배입니다. 공적 예배들 중 특별히 주일에 드리는 이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장 중요한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를 올바로 드리므로 주일은 거룩하게 되고, 그 주일이 충만한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게 될 때 나머지 모든 날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는 헐몬산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 지역입니다. 헐몬산 아래 가면 아주 풍부한 물이 넘치게 흐릅니다. 헐몬산에 쌓인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며 그 아래의 모든 땅들을 비옥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예배가 헐몬산의 꼭대기라면, 그때 받은 은혜가 쌓이는 눈이라면, 일주일 동안에 우리의 삶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거기로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물의 공급을 받으며 모든 식물이 아름답게 결실을 맺으며 자라가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넓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잘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영혼의 무게를 가지고 나온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혼에 마치 무거운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예배시간에 주님을 만나러 하늘로 오르려고 하니 어찌 그 날갯짓이 그를 하늘로 올려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일주일 동안 하나님 없이 살기 때문에 예배자로 적합하지 않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를 그렇게 드리고 하나님을 못 만나니 그 병들고 무거운 영혼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느라고 또다시 하나님 앞에 죄짓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니 넓은 의미에서의 예배의 실패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의 실패로 이어지고,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의 비극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넓은 의미의 예배로 이어지니, 이 황폐한 삶의 악순환을 어디서 끊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II.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오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당신이 만나 주고 싶으신 사람, 복을 주시고 싶은 사람, 은혜를 주고 싶으신 사람, 사명을 주시고 싶은 사람, 능력을 주시고 싶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찾으셔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은 아낌없이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한 분이시니,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도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은혜와 사랑, 진리와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인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고, 그 행복의 근원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도 알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간절히 찾으시니, 주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A. 예배하는 자를 찾으심
오늘 성경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합니다.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라고 말씀하십니다.
1. “찾는다”의 뜻
여기에서 “찾으시느니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제테이(zētei)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뭔가 간절히 추구하는 것, 요청하는 것, 그리고 간절히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것,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찾는 마음속에는 항상 간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땅에서 어떤 사람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이 찾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하나님에게 발견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를 너무나 너무나 찾으셨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복을 내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찾으시지만,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또한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주님을 깊이 만났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요즘이 그런 때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말할 수 없는 은혜와 행복 속에 살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냉랭하고 건조한 삶을 힘겹게 살았습니다. 모래와 먼지가 가득한 메마른 땅을, 풀 한 포기도 없는 그 길을 걸으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은 핍절했습니다. 그러다 오아시스와 같은 하나님 은혜의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 샘에서 임마누엘의 피로 씻고, 생명의 샘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몸과 마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던 때,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렇게 성령 충만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같은 세상이 천국처럼 변했고, 메마른 벌판과 같은 인생길이 오아시스 옆에 있는 풀밭 같이 되었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에 그맘때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예외 없이 이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찾은 나는 잊어버리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이니, 매우 잘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시간이 있었고, 그런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고, 은혜가 여러분의 죄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25년 전의 일입니다. 성남의 변두리에 있는 어느 아주 가난해 보이는 교회에 설교하도록 부탁을 받고 같습니다. 교회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의 박해가 아주 심했고, 유난히 그 골목은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설교하러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목사님은 잠시 피신한 채 부교역자의 안내를 받으며 제가 설교해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눈치 보느라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찬양을 드렸고, 드디어 제가 설교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십여 명 남짓한 교인이 장판 깐 맨바닥에서 방석을 놓고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러 올라가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교인은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어느 소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교 1학년 학생이라고 하는데, 머리를 박박 깎고, 비쩍 마른 소년이었습니다. 체구로 보자면 그저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도 채 돼 보이지 않는 아주 왜소한 체구였습니다. 그 학생이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교하는 내내 간절한 눈빛으로 설교하는 저를 지켜보며 말씀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내내 종종 입술을 움직여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은혜를 달라고 순간순간 기도하는 입술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하나님은 큰 은혜를 부어 주셨고, 그 소년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던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앞이 깊이 팬 옷을 입고 있던 이 소년은 고개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때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었는지 목과 얼굴 사이에 핏줄이 아주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안타깝게 주님을 부르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칭 의로운 사람은 안 만나 주셔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죄인은 만나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도 죄밖에 지은 것이 없어서 가슴을 두드리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들이 못 만난 하나님을 그 죄인이 만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더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시는데, 여러분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까? 간절히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까? 찬양 시간에는 하기 싫은 찬송을 부르듯이 입만 벙긋거리고, 모기 소리 같은 소리를 내고, 심지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마음이 과연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까? 사람들이 기도할 때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하나님 찾는 마음입니까? 설교시간에 설교자는 사력을 다하여 말씀을 외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찾는 사람 아닙니다. 그래서 옆에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생애적인 감격을 누려도 자신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드리며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주님을 못 만났으니 일주일의 삶은 사나 마나 그것은 마귀에게 바쳐진 삶이고, 육신에게 드려진 삶입니다. 그렇게 사느라고 영혼이 얼마나 피곤해졌겠습니까? 제아무리 날개를 펼치면 2m가 넘는 독수리라도 그 어깨 위에 백키로짜리 배낭을 메고 하늘로 올라갈 독수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일주일 동안 살다온 영혼의 무게가 죄의 무게와 일치하는데, 어떻게 예배 시간에 갑자기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가니 일주일 동안의 삶이 또 죄짓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하나님 안 믿는 삶을 살다가 옵니다. 예배는 그 사람의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삶은 예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예배는 삶에 갇히고, 삶은 예배에 묶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을 하니 예수를 믿어도 여러분은 전혀 행복한 것 같지 않고, 예수님을 정말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인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던 사람, 절대로 만나기 싫던 사람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관심이 없던 사람을 만나면 심드렁합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길거리에서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기뻐합니다.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일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자로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주일 동안 거의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만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낯설고, 아니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고 싶은 갈망도 없고, 설령 옆에 사람에게 나타나셔도 그분의 품에 안길 의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묻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왜 예배드리러 오십니까? 왜 주일을 지킵니까? 여러분이 먼 길을 걸어 주일 예배에 나올 때, 여러분의 마음에 기대하던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돌아갈 때 반성은 해보셨습니까? 내가 예배당으로 걸어갈 때 내 마음에 간절히 원하던 것이 예배를 통해서 성취되었는가? 되었다면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이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반성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오래도록 조상들께 제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항상 우리를 나무라셨습니다. “똑바로 서 있어라.” “잡담하지 마라.” “생각을 제사에 집중해라.” “조상님들이 보고 계시다.” 솔직히 오늘날 예배는 내가 어렸을 때 드린 제사만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간절히 주님을 찾으시는 예배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며, 영혼의 질병인 것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 때는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어져 보면 압니다. 그립고 보고 싶으면 그때 사랑한 것이고, 생각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고, 너무 편하면 미워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미워하십니까? 무관심해 하십니까? 아니면 보고 싶어 하십니까?
2.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은 우리를 간절히 찾으십니다. 모든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下) 두 가지 조건입니다. 첫째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에게”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자기”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예배에 나와서 앉았다가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마음의 부담을 종교적으로 덜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겠습니까? 예배하는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다잡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따라 왜 나의 이 찬양이 이렇게 건조할까?” 찬양을 부르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버지! 내 찬양이 당신께 올리는 꽃다발 같게 하옵소서.” “내 마음을 울리게 하옵소서.” “이 찬양이 당신 귀에 들리게 해주옵소서.” “기도시간에 왜 이렇게 마음이 건조할까? 아버지.” 여러분은 예배시간 내내 하나님께 집중하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찾아간 교회는 예배가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3분의 1 이상의 교인이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참 이상합니다. 예배시간에 교회 와서 왜 땅바닥을 쳐다보는 것입니까? 보아야 콘크리트 바닥인데, 거기 뭐가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까? 졸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목사님 안 쳐다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회심하고 얼마 안 되서 집사가 되었습니다. 총각 집사였습니다. “김집사, 요즘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정말 없지 않아?” “뭔가 변했어.” 그런데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매주일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목사님 설교가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집중하고 들어 보려고 해도 뭔 소린지 모르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다는 몰라도 그 설교 속에 한 문장 두 문장을 사용하셔서 제 마음을 찌르셨고, 그래서 눈물로 예배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권사님, 저는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이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간절히 찾느냐에 의해서 그 예배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을 피해 가듯이 특정한 사람들만 골라서 은혜를 물 붓듯 부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연히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달아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보시며 하나님이 은혜 줄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피해갈 사람에게 피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그 예배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를 위해 예배를 드리거나, 혹은 자신의 교회에서 체면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배의 감격을 언제 맛보셨습니까? 환희, 희열, 넘치는 기쁨, 감격, 눈물, 눈물, 눈물, 이런 단어들을 여러분은 언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아뢰어 보셨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제일 큰 문제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이 여러분에게 그저 예배드리는 무거운 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의 감격에 사로잡혔던 처음 사랑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배드림이 기쁨이었고, 주님의 은혜는 여러분의 마음에 사랑의 눈물을 가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감격으로 일주일 동안 하나님 보고 싶어 하며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주일 예배는 일주일 동안 쌓였던 그리움을 하나님 앞에 푸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왜 이것이 과거사가 된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아 하나님을 다시 찾게끔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왜 없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루해하는 예배를 어떤 사람은 눈물로 드리게 만들어주시고, 여러분이 졸고 있는 예배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격을 누리는 예배로 삼아 주셔서, 일생 동안 그리워할 첫사랑의 추억으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께 예배하는 사람,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예배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예배의 실패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의 실패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니, 어디선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한 가지만 실천하시면 다음 주 예배는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새롭게 기도하기 시작하고, 이제껏 기도를 하셨던 분들은 모든 기도 제목 위에 첫 번째 자리에 예배를 놓으십시오. 주일 예배에 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지난주처럼 예배드리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내가 예배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일주일을 기도하다가 예배당에 와 보십시오. 시간을 정하고 마음을 쏟아서 간절히 기도한 후 일주일 동안 매달려 보고 예배당에 나와 보십시오. 예배당에서 느끼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고, 그 찬송소리가 여러분에게 다르게 느껴질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는 주님의 음성인 것처럼 들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있고, 하나님께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해갈을 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만나는 은혜의 감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여러분에게 하나님 보고 싶은 마음에 갈망을 더해주고, 그 갈망으로 예배할 때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관심 갖지 않고 오직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 예배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을 부어 주셔서 넉넉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돈을 좇으면서 살면 불행해진다는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착하게 살아야지만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불신자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매주 고백합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온 백성 찬송드린다고 시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 하나님 이외에 누구에게서 복을 받고 싶어 합니까? 그리고 그분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여러분 중에는 행복할 사람이 없고, 그분께서 복을 주시면 여러분 중에는 불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충만한 은혜에서 살아갈 때 돈이 많아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는 주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갑자기 인생의 무게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로 끌어올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무게는 깃털 같이 가벼워졌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가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림자를 넘어 실체이신 하나님을 더욱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 그리움은 우리의 마음에 불붙는 갈망이 되어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영적인 기갈이 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 너처럼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없구나.” 하시며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서 그 추억을 가지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붙들며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시고,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셨고,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삶의 상황도 하나님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할 때, 그분이 들으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가슴이 저미도록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물어볼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때문으로 알았기에, 우리는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낮추고 예수는 높여 드리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예배가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평생 이렇게 예배드리는 시간이 영원히 멈추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은혜 안에 살아갈 때 여러분의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성도다웠고,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 뜻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기꺼이 드렸기에 하나님도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의 추억을 안고 우리 인생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의 감격이 없었더라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없었더라면,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영광에 눈 뜨는 회심의 은혜가 예배 속에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 왔겠습니까? 오래 전에 메마른 땅에 엎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제껏 여러분을 붙드셨으니, 이제라도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이렇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요 4:23上)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를 못 만날 것이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下) 이 말씀을 뒤집으면 “아버지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찾지 아니 하시느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오래 예배를 드렸어도 주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내리는 봄비는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에게 다른 작용을 합니다. 살아있는 나무에게 봄비는 더욱 생명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여름을 향해 달려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나무에 내리는 봄비는 그 나무를 겨울보다 더 빨리 썩어 들어가게 만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은 죽은 심령입니까? 살아있는 심령입니까?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주님도 못 만나고 가면 본전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 예배당을 나아갈 때 무슨 기쁜 일이 있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의 하나님이 오늘 예배 시간에 당신의 얼굴을 내게 보여 주시지 않으셨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알고 싶지 않습니까? 어떻게든지 고쳐서 다음 주에는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만약에 생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처음부터 예배드리러 올 때 아무 기대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저 기대하는 바라면 오늘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은혜를 덜 주셔서 설교가 일찍 끝나고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 예배를 도대체 누구를 위해 드리는 것입니까?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교회에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는 더더욱 영광을 드릴 수 없는 예배인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예배입니다. 의례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이 조회 시간에 머리 벗어진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를 운동장에서 들으면서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그 예배는 “이렇게 예배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렇게”의 예배는 예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요 4:23上) 하나님께 참되게 즉, 진리의 규범에 맞게끔 예배를 드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예배의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문에 매인 예배도 아니고,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드리는 예배도 아닙니다. 그런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은 이미 주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성전에서 사람들은 예배를 드렸고, 제사를 드렸고, 제물을 실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예배드리러 오는 자들이 마당만 밟는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것이 수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탄식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데, 왜 우리는 주님과 만나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일도 하나님 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까? 만나고 싶지도 않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마음입니까? 수많은 의문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신앙의 발전은 질문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에는 하등한 기능과 고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낮은 기능과 고상한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맛을 보고, 색깔과 크기와 모양을 구별하고, 귀에 소리가 들리는 것, 이것은 하등한 기능이니 영혼이 없는 짐승도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이런 기능이 언제나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살아있는 영혼이 아닙니다. 영혼의 가장 고상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가장 고상한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일주일을 보내고,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지만 여러분 영혼의 고상한 부분들은 움직임도 없이 죽어 있는 것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예배 끝난 후 도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 시간에 무슨 색깔이나, 인테리어, 목회자의 복장이나 혹은 예배 분위기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영혼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영혼으로 와서 죽은 영혼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이 죽은 상태가 예배시간에 졸고, 딴생각하고, 잡담하고, 지루해하고, 아무것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며, 참고 견디다가 가는 예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등한 기능이 아무리 움직여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먹고, 입고, 마시고,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고, 배설하는 정도의 기능입니다. 그것들에서 발견한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깨달으며 영혼의 고등한 기능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우리의 인생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입니까? 그렇게 영혼의 고상한 기능이 활발하게 예배시간에 움직여서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느껴보고,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불타오르게 만든 예배의 시간이 언제입니까? 어린아이도 만나는 예배를 여러분이 못 만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눈먼 자들도 만나는 하나님을 눈뜬 여러분이 못 만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그토록 소경으로 만들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회의를 가져보십시오. 결국 이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전의 번역은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많은 웃지 못할 해석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는 세속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령한 방식으로 드려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는 건성이 아니라 진정심 있게 드려야 한다는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뜻은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이 예배 시간에 우리가 거룩한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한없이 이 땅에 붙어 있는 우리 마음의 고개를 들어 거룩한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기쁨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이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하시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육체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으로 하나님을 찾기에 이르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영혼의 예배자들을 성령께서 만나 주시고, 그 성령께서 은혜를 부어 주실 때 여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 쓰레기처럼 느껴지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찾고 싶은 것이 없을 정도의 마음이 되게 해주시는데, 이게 바로 순결한 성도의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마음, 외도하지 않는 성도의 올곧은 마음, 순결하게 그분께만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되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기에서 지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때 여러분이 진정 주님을 만나는 주일이 될 것이고, 주일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주일에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을 것이고, 예배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간절히 찾으시고, 만나 주시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주일이 거룩하게 될 때 나머지 6일 동안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생명수 샘물을 머금은 그 산 아래 옥토처럼 그 물이 충분히 공급되어 곡식이 무르익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 앞에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으며 형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양보할 수 없는 특징은 기쁨입니다. 기쁨, 기쁨, 기쁨. 가슴을 가득 채우는 희열과 행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떻게 이 슬픈 세상에 살면서 저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걸 보면서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당신은 기쁘고 행복합니까?” 묻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 우리를 구원받은 자녀 삼아주신 선교적인 목적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두 주에 걸쳐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다음다음 주부터 설교하려고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까지의 예배는 이미 하나님 만나지 못하는 예배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제 그 예배의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간절한 영의 간구가 없는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성이 활발하게 진리를 사랑하며 그리워하지 않는 예배였기에 예배는 드리나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없이 여러분끼리 드리는 여러분만의 예배였고, 그 예배는 견디는 예배였습니다. 이제 이런 방식의 예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다가 온 예배자는 예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온 예배는 예배자들이 모인 예배가 아닙니다. 구경꾼들이 모인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거의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예배시간에 은혜받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한 설교자의 재주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어눌하기 짝이 없는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일주일 동안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갈망이 없다면 이제 그것부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고, 무엇 때문에 지은 바 되었습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여러분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도 없는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해야 할 일이 예배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기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 예배 속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것을 거기서 영원토록 해야 하는데, 그 나라가 너무너무 여러분이 가기에는 지긋지긋한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말도 되지 않고, 논리도 통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마음의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게 예배드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대가로 어떤 만족을 얻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우리들이 승리하며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III. 적용과 결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을 만나고자, 당신을 그리워하며, 당신을 애타하며, 당신을 찾는, 그 예배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큰 뜻을 펼쳐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자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모든 성공은 하나님이 주신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이 모든 것을 주신들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금 여러분의 예배 생활을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예배자들이 되셔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을 누리며 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영으로 예배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유사하게 닮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이 무엇인지를 알 때는 그와 비슷한 물건을 유추해 보면서 그 물건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공간의 부피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無限)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매여 있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나, 창조한 그것들을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무한(無限)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배 중에 성령님이 오실 때 비로소 유한(有限)한 인간과 무한(無限)한 하나님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한 사건을 기대하며 드리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 한 사건은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 만남의 사건입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無限)한 하나님을 만나고, 무한(無限)한 하나님이 유한(有限)한 인간을 만나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를 통하여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예배의 본질적인 두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영(靈)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영(靈)으로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다고 미리 예고하였습니다. 그 예고를 따라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 물길러 나온 이 여자는 아주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고,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인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배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여자의 불행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아마 이 여자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했으니, 얼마나 험한 세월을 살아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생이 꼬였겠습니까? 그녀가 우리보다 악했기 때문입니까? 그녀에게 하나님이 더 큰 벌을 내리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여자에게 예배에 관해 말씀하심으로써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영(靈)이신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샘물과 같은 영생의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고,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이 여인이 어떻게 만나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영(靈)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II. 영으로 예배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외심이 가득 찰 때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를 드립니다. 그들이 자신이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짐승을 향하여 기도를 하고 헌재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도살장 옆에 살았습니다. 주인을 따라 나선 소는 처음에는 도살장 가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왕방울을 쩔렁거리며 주인을 따라가는데, 피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 소들은 이미 자신이 죽을 곳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서 음매 음매 소리를 내며 억지로 끌려갑니다. 전 초등학생 때 또렷이 보았습니다. 그 소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과 흘러내리는 눈물 자국들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임을 당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자기가 기른 소 혹은 양을 데리고 왔을 때, 죽임을 당하기 직전 아마 이 짐승들은 주인을 알아보기에 구제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고 그들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죄 없는 짐승이 자신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지가 찢어지고, 그리고 불에 태워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 제사 드리러 온 사람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가?" 통회하며 연기와 타는 불길 곁에서 하염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을 태운 향기가 하나님을 감동시킨 게 아니라, 그 제물과 함께 불타고 있는 죄인의 악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식었습니다. 물질주의로 변하고,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신앙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에도 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친답시고 드립니다. 제사장은 그것도 모르고 엄숙하게 그의 죄를 전가시키고 죽입니다. 현대판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짐승이 죽어 가는데도 범죄한 이 죄인은 껌을 씹으며, 슬리퍼를 끌며, 놀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마음에도 없는 제사를 왜 드리는 것입니까? 이건 뇌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뇌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서 이런 사상을 배웠겠습니까? 고대 근동에 있는 이방 종교에서 배운 것입니다. 거기는 다신(多神)사회였습니다. 수없이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신들이 많습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걸근거리며 제사의 음식을 탐하고, 자기 마음대로 잘 섬겨 주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신들이었지, 도덕적인 신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들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받으면 됐지, 네가 이 제물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따위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뇌물이었습니다. 이런 뇌물의 개념을 가지고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에 적용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그런 식의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의 진노는 쌓여 갔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제사 때문에 모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누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라고 여러분에게 강요를 했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누가 여러분을 처벌합니까? 교회 지하실에 감옥이 있습니까? 옛날처럼 고문을 당합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오고 싶어 하지 않으면 누구도 여러분에게 그것을 강요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주일날 꼬박꼬박 나오십니까? 그리고 하나님도 만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고, 올 때 돌 같이 무거웠던 가슴을 갈 때 쇳덩어리만큼 무거워진 채로 돌아갑니다. 누구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뇌물입니다. 혹시 한 주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참, 지난주 예배를 안 드렸더니 하나님이 나를 혼내시나보다." 이런 부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뭐가 유익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 심령으로 뻔뻔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런 여러분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목회자들은 예배가 끝나면 대문 앞에 서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전 개척할 때부터 그런 인사 안 했습니다. 장로님들에게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뭐가 감사합니까?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 나오는 것인데, 도대체 뭐가 감사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무슨 그 따위 똥 같은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그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 교장 선생님의 정신훈화를 듣는 태도만도 못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아무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예배당에 나와서 앉았다가 졸거나 딴생각하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고 공상을 하거나,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겨우 예배가 끝나고 뛰어나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광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좋은 예배자가 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나쁜 교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귀만 높아지고, 마음은 교만해지고, 심령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A. 예배와 성령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배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유한(有限)한 인간을 만나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우리의 마음 하나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실 때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분입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여기에 오셔서 당신이 만나 주시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오늘 내 눈앞에 현재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당했던 그 고난이 오늘 나의 몸과 마음속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 짓던 내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겪고, 내가 충분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예수가 부활하신 것처럼 내 안에 예수와 함께 새 사람이 다시 사는 부활의 경험이 바로 주일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인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치르신 그 희생의 고귀함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시는 모든 구원과 사랑의 은총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靈)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크기나 모양, 색깔, 부피, 위치, 장소, 크기, 면적, 이런 따위를 가진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준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까? 언젠가 신학교 다닐 때 전철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불붙어서 밤 11시쯤 전철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열심히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당신 하나님 봤어?" 그리고 삿대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못 봤다고 하면 너도 못 본 하나님을 왜 전하냐고 말할 것이고, 봤다고 하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봤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외 없이 모두 자기(自己)를 사랑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자기(自己)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목숨 바쳐서 사랑하는 자기(自己)는 크기가 있습니까? 모양이 있습니까? 설마 외모를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늙고, 후패하고, 마지막에 죽어가기 직전까지 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自己)를 사랑합니다. 자기가 어디 있길래 자기를 사랑합니까? 측정할 수도 없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분명하다면,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이상합니까? 이성에만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도 논리가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논리를 뛰어넘어서, 이성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도 일종의 빗나간 신앙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끔찍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에 함께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던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자,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사로잡으실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사람이 하는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사람을 통해 선포됩니다. 성령께서 그 회중을 사로잡을 때, 마치 자기 혼자만을 세워놓고 하나님이 외치시는 것처럼 마음이 자신의 가슴을 찌릅니다. 창이 되어서 자신의 가슴을 찌르며 들어오고, 피를 쏟듯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 창을 다시 뽑을 때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만, 하나님 치료의 생명이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 역사하게 됩니다.
어느 선교사가 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삼분의 이쯤 한 다음에 그냥 대충 덮어버리고, 원고를 주섬주섬 싸들고 걸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통로에 있는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내가 차라리 망부석한테 설교하고 말지." 무슨 뜻입니까? 얼마나 냉담했는지 아무리 힘껏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은 이를 앙다물고 듣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배당에 무엇 하러 나왔습니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왜 드립니까? 자기가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는 것이고,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억지로 들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믿든지 말든지 자기 맘대로 하고, 자신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에 안 믿기로 했다면 예배를 안 드리면 될 것이고, 믿기로 했다면 제대로 예배를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서로 이율배반이 아닌 일치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 '나는 예배한다.' '그러므로 내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러면 나는 옳게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예배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예배는 사람들끼리 모인 사교 모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배에 오면 갈 시간을 기다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기 성령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성령님이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 마냥 지루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설교라도 짧아서 일찍 끝나는 날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고, 특송이라도 하고, 광고라도 길어지는 날이면 아주 재수없는 날입니다. 이런 식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난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예배 속에서 성령이 여러분을 만나 주신 적이 있습니까? 성령이 여러분을 만나 주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나기를 사모하는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배시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면, 만난 표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저렇게 거룩하신데, 나는 이렇게 더럽구나.' '하나님은 저렇게 높으신 데, 나는 이렇게 약하구나.'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았구나.' 이런 회개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죽은 자와 같은 예배를 간신히 드리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믿길래 그렇게 자만심에 가득 차서, '예배에 한번쯤 은혜를 못 받은들 어떠랴?' 그리고, '도대체 신앙이라는 게 별것 있단 말인가?' '주일에 가서 목회자에게 눈도장 찍고, 헌금하고 오면 돼지, 내가 뭘 더 하라는 것인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적선하는 것처럼 예수 믿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니고,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배 속에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예배가 예배되는 것입니다.
B. 성령과 영혼
예배 속에서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영혼을 변화시키십니다. 영혼은 다양한 경향성과 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자기의 고유한 영혼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영혼은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이 죄들이 자연적인 특징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미운 네 살이라는 나이가 되면, 아이가 벌써 고집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자기의 뜻대로 안 되면 막 난리를 치면서 부모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일곱 살이 되면 더 심해지고, 사춘기가 되면 완전히 주인과 종의 관계로 바뀐 것처럼 눈치를 보게 만듭니다. 더 커지면 아예 부모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혼은 자연적인 특질과 함께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경향성과 힘들을 도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교육을 잘 받고, 어려서부터 신앙이 들어간 사람들은 악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억제되고 선한 방향으로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이 발전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이들이 그렇게 성장해 가는데 결국 그 방향을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늦게 잠자던 아이들이 좀 일찍 일어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어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요즘은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군대 가서 늦게 일어나면 죽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 자기만 맞는 게 아니라 온 내무반이 단체기합입니다. 이십 년 동안 늦잠 자는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데 이틀도 안 걸립니다. 그런데 그런 방향 말고 하나님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도록 바뀌는 것은 몽둥이 가지고 안 됩니다. 성령님이 그 마음에 오셔서 역사해서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을 바꿔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세속적인 것만 좋아하던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세속적인 것들을 싫어하고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은 인간이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만나 주시고, 그들의 영혼을 바꾸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성령이야말로 믿음의 창조자이십니다. 보십시오. 성령께서 한 사람의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시면 어제까지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이 오늘 믿어집니다. 어제까지 대적하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물한 살 때 저는 교회로 돌아와 회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 즉시 모든 기독교의 진리가 한꺼번에 믿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님을 멀리 떠나고 무신론자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졌고, 그분의 품 안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새벽기도, 금요철야기도회, 수요예배, 빠짐없이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노(老)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 그대는 하나님이 은혜를 참 많이 주셨구나." "목사님, 제가요?" "그래. 너는 성격이 조용하니 하나님이 너에게 이슬과 같은 은혜를 주신 것 같구나." 그리고 얼마 후에 성경을 읽는데, 모든 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꿀처럼 달게 빨려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엔 어떤 결론에 도달했냐면 누군가가 와서 성경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이라고 아무리 유능하게 증명해 보여도 나는 성경의 모든 것을 믿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이 생겼습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이슬 같은 믿음이 아니라 불같은 믿음을 받았구나." "그게 불이다."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며칠 전까지 그렇게 안 믿어지던 성경이 온전히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묻습니다. 예배당 오기 전에 안 믿어지던 것이 예배드리고 가는 길에 믿어진 것이 있습니까? 예배당 올 때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예배 끝나고 가는 길에 멀리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당신으로 느껴지셨습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이게 바로 성령이 역사하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예배 중에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변화되는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렇게 설교자가 되어서 예배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삶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구약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인정도 제법 받았습니다. 재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교수님이 저한테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여기서 이렇게 허송세월하지 말고 빨리 유학을 가라." "내가 졸업한 학교에 저명한 세계적인 학자들이 있는데, 내가 너를 최고의 추천사를 써서 보내줄 테니까 지금 빨리 가서 공부에 매진해라 ." "그리고 돌아와서 후학들을 키워라." 나도 그걸 너무 바랬습니다. 교수라는 직분이 어마어마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일이 내가 가장 타고난 일이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 계획에 없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비밀스러운 일들을 겪었는지는 그저 사랑의 비밀로 묻어두고 싶지, 여러분에게 밝혀 드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성경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설교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3년 동안을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명을 엄중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변화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고 단 앞에 섰습니다. 고등학생들이 한 80명, 선생들이 한 20명 모이는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애들이 우는 통에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하시오." 설교가 끝났을 때는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하게 절반 정도의 선생님과 아이들이 의자에서 내려와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고, 절반은 망부석처럼 버티고 앉아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게 설교자로서 저의 데뷔였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를 하고, 여기저기서 귀신이 나가고, 또 어떤 아이들은 회개를 하다가 하다가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때 그렇게 회개했던 사람들이 살아있는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여태까지도 그런 회중을 못 만나봤습니다. 40분, 길면 80분까지 계속되는 설교에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 같이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모두 지붕이 무너질 것 같은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목이 쉬다시피 목 놓아 울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 정신이 열린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일을 위해서 나 자신을 바쳐 왔습니다.
여러분도 맨 처음 이 교회당을 찾았을 때는 눈물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통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변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설교자를 사로잡으실 때 연약한 설교자의 말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는 창이 됩니다. 설교 듣는 여러분을 성령께서 사로잡으실 때 여러분은 벌거벗은 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義)의 신발을 모두 벗어버리고, 때 묻은 더러운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칭의(稱義)의 세마포를 입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의해 신발을 벗어버리고 보좌를 향해 새롭게 난 핏길을 걸어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예배드리기를 너무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시간은 여러분에게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찬양)
주 앞에 나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이 세상에서 서럽던 마음을 예배 속에서 주님께 모두 쏟아놓고, 상처 입은 한 마리 어린 양으로서 목자이신 그분의 품에 발견되어, 그분의 오른팔에 이끌리어 벼랑 끝에서 건져 올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품으로 피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착한 예배자들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밖에 서면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라고 목회자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일주일은 예배를 기다리는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주님을 만나는 날이었고, 이어지는 6일 동안은 그 추억을 간직하고 사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주님을 만났고, 넓은 의미의 예배는 오곡백화가 무르익은 벌판처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었고, 여러분은 하나님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감동이 있었고, 감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바꾸어 놓으실 때에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C. 영혼과 마음
그게 바로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경험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마음속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희열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물질로 얻을 수 있는 그런 희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희열이었고, 가슴이 벅차는 환희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예배 중에 만나 주시는 사람의 마음속에 는 죄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도 옳지 않은 것을 행할 때 노(no)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집사님."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 일을 하려는 것에 반대합니다." "옳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감화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르려고 하는 불의와 죄를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도 미워할 마음이 생겨나는데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향한 찢어지는 애절함이 있습니다. 변하려고 애를 써도 변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가슴을 찢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돌아오고 나면 하나님이 놀아운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예배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예배가 될 수 있겠는가?
1. 온 마음으로 구함
가장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하나님은 그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커다란 감화를 받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성령 체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는데 공통점은 세상 모든 것을 주어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성령의 은혜를 갈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갈망은 제일 먼저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찬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배의 모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찬양을 하는 거 보니까 지난주와는 달랐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칭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전에 어떻게 예배드렸는지 아십니까? 예배당에 왔는데 처음부터 찬양 할 의지가 일(一)도 없습니다. 마스크까지 썼고 호흡도 힘드니까 입술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마음을 다하여 찾는 이를 통하여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왜 주일날 한 번밖에 안 드리는 예배를 그렇게 드립니까? 마음을 다해서 우렁찬 소리로 온 마음에 정신을 모아서 우리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내 앞에서 들으시는 것처럼 찬양을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속에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지지난 주에 총신대 총장을 지내시던 김인환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저와 너무 친했습니다. 얼마나 건강하신지 다들 구십은 넉넉히 사실 거라고 했습니다. 일 년 동안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콜록콜록 거리시더니, "김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왜요?" "제가 폐암 4기랍니다." 3개월밖에 못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년 반 넘게, 2년 가까이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형님 목사님에게 새벽 3시에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형님, 제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형님, 요한복음 아무데라도 좋으니까 좀 읽어 주십시오," 새벽 3시에 형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형님 목사님이 요한복음을 읽어주셨습니다. 다 읽고 나니까,"형님, 날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를 받고 그리고는 잠시 후에 두 손을 높이 드셨습니다.
(찬양)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그 찬송 끝내고 돌아가셨습니다. 인생,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정에 죽을 날 적어놓고 계획에 따라 죽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주님이 여러분 부르실 수 있고, 다음 주에 여러분 제 설교 못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생 예수 믿었는데, 죽는 그 순간에 두려워서 덜덜 떠는 사람들이 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담대하게 우리도 두 팔을 벌리며,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죽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일생 동안 몇 번이나 주일 예배드리고 죽을 것 같습니까? 십 년 살 사람은 오백 번 남았습니다. 오 년 살 사람은 삼백 번 남았습니다. 이십 년을 산다고 해도 천 번 밖에 안 남았습니다. 천 번, 곶감 빼먹듯이 한 주 한 주 빼먹으면 그깟 천 번 금방입니다. 20년 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딱 20년 전에 우리가 여기 오던 때 쯤 될 것입니다. 바람같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그게 인생입니다. 오늘 주님을 못 만나면 어느 예배에 주님을 만나시렵니까? 그렇게 흘려버린 세월들이 아깝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고, 자기도 행복하지 않고, 목회자도 기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어린아이일지라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 그들의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찬송 부를 때, 혹은 대표기도를 함께 드릴 때, 혹은 통성으로 기도할 때, 혹은 예배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흐느낄 때, 성령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만나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동안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서 구원의 은혜가 이 비천한 여인에게 임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하나님 못 만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에 못 만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의 지리멸렬한 예배 생활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금식하며 기도해 보자." "그러면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시지 않을까?" 도대체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주일을 굶자는 것도 아니고, 아침마다 금식하며 매달리자는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밤에 나와서 매일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오직 예배에서 나를 만나 주기만을 간절히 빌자." 누가 못하게 합니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예배를 통해서 당신이 나와 만나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으며,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인생은 사나, 안 사나, 마찬가지옵나이다." "나를 만나주든지 나를 데려가시든지, 양당 간에 하나 내려주시옵소서." "나도 임종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결단하고 기도함으로써 손해날 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잃어버릴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마음으로 간절히 예배를 위해 빌고, 예배 속에서 당신의 얼굴 뵈옵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예배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천상의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함으로 시선을 하늘을 향해 돌리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천상의 향취를 맛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 32절에서 말했습니다. "···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성령을 주셔야 순종할 수 있고, 또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껴야 합니다. 도대체 기쁨도 없고, 충만한 은혜도 없고, 믿음의 감격도 없고, 하나님을 만나는 신령한 기쁨도 없고, 마음에 거룩한 희로애락도 없이 살아가는 무미건조한 삶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무엇으로도 나의 빈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가 주님의 얼굴을 갈망하오니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하고, 아무리 많은 교육을 하고,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치겠습니다. 그 아이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 아이가 그 모든 것으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 아이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여러분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흘릴 눈물이 남아 있기는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흘립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그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펑펑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왜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여러분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는 흐르지 않는 것입니까? 주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그 마음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마음이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십니다. 내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서 갈 바에야 주일을 범하십시오. 그리고 밤에 오셔서 통곡으로 회개하시는 분이 오히려 주님 빨리 만납니다.
보십시오.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정서를 동반합니다. 그 정서는 사랑의 정서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내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들이 일주일 동안에 모두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뉘우치게 됩니다. 그렇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이 되면 될수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그 사모하는 심령에게 만나 주십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졸다가 예배당을 떠나도 나는 만나 주십니다. 은혜에 빗줄기를 쏟아 부어 주시고, 나에게 거룩한 은혜를 부어 주셔서,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마음과 용기와 힘을 얻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제발 이 지긋지긋한 형식적인 예배를 끝내십시오. 위선자의 거짓된 얼굴로 드리는 이 예배를 정리하고, 이제 정말 나의 참 모습으로 주님을 예배하십시오. 죄가 있으면 그 죄를 고백하고, 고난이 있으면 그 고난을 주 앞에 아뢰며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진리로 예배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매우 피곤하게 오전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칼칼하고 얼큰하게, 그리고 고기를 먹고 싶었습니다. 한식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제육볶음을 시켰습니다. 보리차로 속을 달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음식이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육볶음인데 아무리 고기를 찾아봐도 고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맨 양배추 껍질과 파, 마늘 같은 것만 잔뜩 들어있고, 맵기는 또 왜 이렇게 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먹다가 수저를 내려놓고 나오면서, "내가 이 집에 다시 오나 봐라." 그랬습니다. 설교가 제육볶음이라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의 말씀은 고기 덩어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 속에 들어있을 때, 그 설교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배의 본질적 요소인 성령 혹은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그 두 번째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진리입니다.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II. 진리로 예배합니까
자, 그러면 우리가 과연 진리로 예배를 하고 있습니까? 진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자연세계에서는 자연의 법칙으로 나타나고, 도덕 세계에서는 도덕에 관한 법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이 있다 없다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선하고 올바르게 살면 그가 행복하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진리입니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자연 속에 있는 진리들을 잘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응용하고 연결함으로써 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사물들을 만들어냈고, 이로써 우리들이 편리한 물질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수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균 83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니, 인간의 평균 수명이 그저 25세밖에 되지 않던 지지난 세기에 비추어 볼 때 장족(長足)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곧 의학의 발전임을 지난 세기에서야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여 1억 명의 인구가 죽어가고 있을 때도 사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후에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의학이 곧 과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생명을 이렇게 연장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자연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진리이며, 영적인 진리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결국 인간사 속에도 희미하게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바로 이 모든 도덕적인 진리의 정수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이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엑기스(extract)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진리로 예배합니까?"라는 이 질문은 곧 "성경 진리가 예배 속에서 선포되고, 깨달아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A. 말씀과 만남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배의 목표는 성취되고, 인간은 감격하게 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배와 마음의 굳어짐
이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예배의 유익을 못 누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단지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성경은 돌 같은 마음 혹은 강퍅한 마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강퍅하다"는 것은 아주 말라서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이 말을 풀자면 북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짝 말라서 완전히 딱딱하게 돌처럼 되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리하겠다고 방망이로 두드리면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어머님들은 북어로 내일 요리를 할 계획이 생기면 저녁때 물에 넣어서 꽉 짠 베보자기로 북어를 감싸고 하루 저녁 재웁니다. 그러면 습기가 천천히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 다듬잇돌 같은 것 위에 놓고 두드리면 북어가 얇게 펴지면서 포(脯)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걸 뜯어서 요리를 했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못 만나는 예배가 계속되면 그 사람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점점 돌처럼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말씀을 향하여, 주님의 신령한 교제를 향해서는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반항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런 마음이 될수록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것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세상 유혹의 씨가 마음에 떨어지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악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에 고통을 가져다주고, 마음을 점점 더 강퍅하게 하여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해 줍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 생각을 거의 안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생각 안 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리가 없습니다. 많은 죄들을 짓고, 유혹에 빠지고, 마음은 정욕에 더럽혀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니, 예배의 분위기 자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낯선 환경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을 또 못 만나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은 그렇게 잘못 살았으면, 하나님 생각도 안하고 잘못 살아왔으면,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뉘우쳐야 할 텐데, 그럴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또한 때우듯이 한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살아본들 지난주와 다른 그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신령한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마음이 굳게 굳어졌으니, 이제 신경 쓸 것은 세상 밖에 없고 육신 밖에 없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새로운 것을 보고, 즐거움을 찾는 일에 몰두하지만, 막상 그 일이 모두 이루어지고 나면 마음은 더 깊은 공허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던 불신자 시절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삶이 지긋지긋해서, 이런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어 부끄럽다고 여기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못 박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마음이 굳어지게 되니까 우리가 똑같이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깊이 뉘우치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에 위기를 알리는 신호등은 예배 속에서 깜빡거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나와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무감각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마음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받은 감동도 없이, 무지무각(無知無覺)하게 예배당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다면, 여러분의 남은 생애도 계속 그렇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내버려두면 마음이 굳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하지만,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상하고 썩어서 나중에 거기서 곰팡이가 하얗게 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을 못 만나고 돌아가는 그 사람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2. 말씀으로 찾아와 주심
하나님은 이 예배시간에 말씀으로 찾아와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장을 열어 보십시오. 하나님과 만남의 사건이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아이를 가질 것을 알리는 고지입니다. 그 수태고지를 전해준 천사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그녀를 덮을 것이고, 그녀가 잉태할 것이고, 그에게서 구세주가 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천사의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생애에 들어가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표인데 죄 없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으니, 이는 의미가 죄인들의 세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죄인인 형제들과 하나가 되고, 또 하나님이 그를 친히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하신 증표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죄 있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그때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큰 능력이 임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일평생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그러면서 그에게 이방인의 선교를 위하여 임금과 이 세상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는 거룩한 그릇이 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거기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로 인생의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신비한 체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을 만날 때 그들의 인생이 바뀌고 놀랍게 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예배 중에 있는 이유도 그것 아닙니까?
예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굳어진 채로 살던 불신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는 사실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못 만난 채 소경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깨달아졌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씀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갈라놓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 자신이 이 세상의,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아주 작은 별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깨달으면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이제 그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다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고, 날마다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드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분과 만남의 감격을 누리던 때가 언제입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는 은혜를 체험한 것이 언제입니까?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집회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습니다.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이라는 청교도가 쓴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번역되지 않은 원서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삶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나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조금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을 깊이 반성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평양은 건너오는 내내 혼자서 그 책을 가지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어쩜 얼굴이 하나도 피곤해 보이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매일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른 아침 눈 뜰 때부터 밤까지 모두 기록을 했는데, 그 앞부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리고 언젠가는 이렇게 눈을 뜬 것이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일 것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보고 계심을 기억하라."(루이스 베일리/ Lewis Bayly) 눈을 뜨자마자, "오! 하나님, 제가 오늘 아침 눈을 떴습니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이렇게 눈을 뜨게 되겠지요?" 라고 시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옷은 입으라는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아무 의로운 것이 없어서 벌거벗은 자처럼 부끄러운 인간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의로 옷 입혀 칭의(稱義)의 옷을 둘러 나의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셨사오니, 나의 입는 이 옷은 성도의 거룩한 흰 옷이 되게 해 주옵소서. 거룩한 행실로 오늘도 부끄러움을 가리고 정결하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루이스 베일리/ Lewis Bayly) 옷을 입고, 세수하는 것부터 모든 순간,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어나는 사건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면서 살라는 것이 그 책의 핵심이었습니다. 정말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건생활이 겠구나"라는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칼빈(J. Calvin)의 제자였던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같은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 기독교 역사상 모든 인물보다도 가장 탁월한 경건생활을 했다고 할 때, 그 핵심은 그냥 성경을 읽고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연결 지으며 생각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같은 사람,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쓴 고전 작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발뒤꿈치를 들고 일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언제든지 하늘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은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 것만큼 여러분의 예배는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한 남자가 여성에게 자기의 진심어린 사랑을 최초로 고백하고 싶어 합니다. 그 자리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고, 가슴 설레었고, 떨었겠습니까? 드디어 분위기를 잡고 시간이 되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 여자가 계속 딴 짓을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는 순간 끊어버리고, 쉼 없이 걸려오는 핸드폰을 잡고 통화를 하면서 자리를 이탈합니다. 그때 여러분이 남자라면 사랑을 고백하겠습니까? 다른 날짜를 잡든지, 아니면 그만두어 버릴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멍한 정신으로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예배자가 과연 그런 말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성령으로 역사하시면서 찾아오십니다. 그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예배 속에 만나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매 순간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늘 계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이 시험을 이기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공적인 예배에서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일주일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드리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짧게나마 드리며, 주님을 매 순간 찾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예배시간은 여러분에게 간절히 사모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그렇게 그리던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나의 가장 놀라운 체험
사람들은 종종 저에게 이메일로 혹은 편지로 저의 체험에 대해 듣고 싶어 합니다. 간증을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글로 쓰여진 책 말고 남에게 밝히지 않은 특별한 체험에 대해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아주 비밀스럽게 만난 놀라운 체험이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고귀한 사랑의 기억이기에 다른 사람한테 떠들고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혼자 비밀로 간직하고 살다가 죽고 싶다고 말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받아 봤고, 방언도 받아 봤고, 능력도 받아 보았고, 많은 은사를 경험했지만, 제 인생을 바꿔놓은 가장 놀라운 체험은 말씀 체험이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저는 무지한 불신자, 아니 완강한 무신론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말씀이 나를 움직이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었고, 설교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가장 놀라운 체험은 어떤 신비의 체험이 아닙니다. 어떤 신기한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깜짝 놀랄 놀라운 체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며 내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 그 말씀 때문에 내가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놀라운 체험입니다.
여러분이 예배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일어난 어떤 기적도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으니, 예배시간에 온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지성은 활발하게 움직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 하고, 마음이 흩어질 때마다 간절한 기도로 주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 말씀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을 뵙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만남과 설교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과 설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도 직접 나타나시고.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보이는 사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들을 매개체로 사용하여 당신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불과 구름과 그리고 놀라운 자연의 이적적인 현상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약 안에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나타남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하시고, 그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깨우십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을 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포함으로 율법을 그들에게 설파했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1. 루터와 칼빈의 견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인간의 설교가 연속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는 이것입니다.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분의 왕국을 증거하는 두 증인이 있다. 하나는 성경 곧 글자로 이해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음성 곧 입술로 선포되는 말씀인데, 바울과 베드로는 이 말씀을 빛과 등불이라고 불렀다. 빛이 비치지 않고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즉, 설교는 빛이 되어서 진리의 빛으로써 성경을 밝혀,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 진리를 이해해주게 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칼빈을 연구한 대가였던 파커(T. H. L. Parker)는 이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빈에 따르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의 지위를 성경으로부터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시간에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성경을 사랑하며 산다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설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성경을 읽고 싶을 것이며,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을 설교하는 설교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니, 예배시간에 설교에 은혜를 받는 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며 감격을 하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송이라는 심리적인 현상이 그런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더 설교를 듣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해도 어떤 사람은 재미있게 듣지만, 자신은 시들먹해집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즐거운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역하며 사는 자에게는 채찍입니다. 그리고 냉담한 자에게는 불길이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는 몽둥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얻어 돋아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은혜의 빗줄기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눈병든 사람에게 비치는 아침 햇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입안이 덧나서 헐어버린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는 맛있는 반찬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영혼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쓰디쓰고 무미건조한 모래알 같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설교는 거부해야 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합치하는 설교는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영혼에 진정한 변화를 꾀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생활 없이는 신앙생활 없습니다. 예배생활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메마른 인생의 대지 전체를 가르고 지나가는 한 줄기 강물입니다. 아무리 메마른 들판이라도 큰 강물이 한복판을 흘러가면 그 땅은 옥토로 변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올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거친 광야에 메마른 강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물도 없이 언젠가 물이 흘러 간 흔적이 있는 그 강에 자취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광야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딴생각을 하고, 하찮은 일에 시간을 쓰면서 낭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거만을 떨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예배 속에서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선포하는 설교자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이 성경의 말씀이 성령으로 역사할 때 우리의 영혼을 죽음에서 살려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헌신된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설교는 고기가 거의 없는 제육볶음 같은 설교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요리해야 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섭취해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영양가 있는 음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우 고기가 아무리 비싸고 맛있은들 도축장에서 바로 떼어 내어 뜨끈뜨끈하게 가지고 온 그 살코기를 여러분 앞에 내놓을 때, 여러분 중 그것을 뜯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모든 고기는 적절한 요리를 필요로 합니다. 최고의 원재료가 최고의 요리사를 만났을 때 최고의 음식이 되고, 그 최고의 음식을 먹음으로 우리는 육체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능력 있는 설교자가 그 말씀을 잘 떼어서 여러분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줄 때 여러분은 영혼의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거기에서 고기 맛을 본 사람들이 원래 살코기인 성경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는,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못 먹는 사람이 될래? 아니면 실컷 먹고 죽는 사람이 될래?"라고 말할 때,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양식을 먹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죽음 같은지는 이미 불신자 시절에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말씀 사역에 전무(專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말씀을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것을 다시 그의 마음 속에서 꺼내어 성도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고, 유혹을 받고, 시험에 들고, 낙심하고, 상처를 받고, 때로는 죄를 짓기까지 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 선포하는 그 설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까?
전후 독일에서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라는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사람이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해 주었습니다. "연약한 한 인간의 설교가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나머지 6일 동안 그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 분투하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고, 그 말씀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려 탐구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이 일을 제쳐 놓은 사람은 결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고, 그 교회는 결코 기름진 목장이 될 수가 없고, 실한 포도들이 매달린 포도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설교자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그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에 후고(後顧)의 염려가 없이 마음이 나뉘지 아니하고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의무이고, 교회의 책임이며, 교회가 생명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오셔서 교회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보다 흠이 훨씬 적은, 실수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천사들을 보내어 목회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한 형제 중 한 사람을 택하여 목회자로 부르시고, 설교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셔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 일을 위해 전념하여야 하고, 교회는 이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에게 편안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專務)하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열린교회를 세우고 22년 만에 처음 6개월 안식 반년 휴가를 갔습니다. 그전까지는 한 주일도 교회를 빠진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한 두어 번 한 달씩 쉰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주일에는 올라왔습니다. 저는 한 주 교회를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편도선 수술을 하고 의사가 2주 동안 설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안 듣고 1주 지난 다음에 못 참고 설교단에 올라와서 설교를 하다가 수술한 실밥이 후드득 터지면서 피가 한 컵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곤 2주 동안을 아주 정말 고생을 했습니다. 그 일 이외에는 2주 이상 교회를 비운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회 초창기였을 때 네 분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염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쉬고 오십시오." "쉬고 오십시오." "쉬셔야 됩니다." 저는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이 분들이 말로만 자꾸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장로님, 아니 말로만 하지 말고,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 쉬십시오." "어디에 숙소를 얻어 놓고, 비행기 표를 끊어 놨으니 가서 쉬시다 오십시오." "이렇게 말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표를 끊어 준다 그래서 됐다고 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목사님 쉬셔야 됩니다." "아. 그래요." "제가 생각해도 지금 쉬어야 될 정도로 너무 숨 쉴 기운도 없습니다." "우선 쉬셔야 됩니다." "얼마나 쉴까요?" "한 달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십시오." 지금도 처음 모인 열린교회 1회 당회록에 보면 담임목사를 한 달 쉬게 해 준다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꼭 애들 버려두고 집 떠나는 엄마의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쉬십시오." "한 달 좀 쉬십시오." "네, 그럼 제가 한 달 좀 쉬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주일은 올라 오실 거죠?" 일주일 내내 설교 준비를 해야 되는데, 무슨 휴식이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자로서의 가장 큰 기쁨은 이 설교 시간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값진 음식, 좋은 선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회자와의 친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외로워도 괜찮습니다. 혼자 내버려 두어도 괜찮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설교가 선포되고, 여러분이 그 설교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이 있고, 눈물로 예배당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주님이 부르셨고, 그 일을 위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증거를 여러분이 보여주고 있는 한, 설교자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의 이름을 높이고 영원이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그렇게 설교를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통곡하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찬양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을 높이고, 그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 수 있다면, 나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목이 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래서 이 설교는 일종의 중독과 같습니다. 삶의 희망이 모두 끊어진 것 같고, "이렇게 연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말씀 사역을 감당할까?" "내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좌절에 휩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의 설교를 통해 죽은 영혼들을 살려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다시 한 번 소명감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지금도 사람을 살리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며 아버지 앞에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님에게 사춘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춘기 때는 질풍(疾風)과 노도(怒濤)의 시기를 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 하고 어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에 와서 우연히 아빠가 나에게 받아온 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며 읽기 시작하더니, 한 달 동안 서재에 쌓여있는 제 책을 모두 꺼내 읽으면서 혼자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책을 덮으면서 아빠에게 말하기를, "아빠, 나는 그동안 내가 많이 방황하고 힘들었었는데, 내 인생의 모든 의문과 숙제가 다 풀렸어."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자만심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습니다.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인간을 통해서 글로, 말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준다는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독과 같아서 다시 지쳤다가는 새 힘을 얻게 만들고, 다시 지쳤다가는 새 마음을 갖게 만들어 설교자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 설교자를 만나든지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잊지 마십시오. 그가 진심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가 그 진심을 지고 이기는 것만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더 큰 능력으로, 더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해 주시길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깨달으려는 청중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청중은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오는 성도들이 있는 예배가 하나님 만나는 예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하루 중 시간을 내어 오직 예배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비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달콤하게 깨닫도록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러분의 심령에 박힌 못과 같이 되도록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반복해서 들으며, 반복해서 깨닫고, 반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어느 한 남성이 여성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사랑을 고백하리라 마음을 먹고 주춤주춤하는 사이에 바로 그 여성이 다가와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당신을 더 알고 싶고,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이 남성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여성이 와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까지 하자고 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고 서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 다음 고백한 그 여성도 잠드는 순간까지 자신의 고백을 되뇌일 것이며, 고백을 들은 그 남성도 꿈결에서 듣는 것처럼 그 여인의 고백을 되새기지 않겠습니까?
말씀은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불꽃처럼 여러분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그 고백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 고백에 상응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설교를 한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어느 정도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들은 말씀을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들으며, 오늘 받은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박힌 못과 같이 되도록 기도해 보십시오. 첫 번째 설교를 들었을 때 놓쳤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고, 그때 새로운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말려도 여러분은 하루종일 주님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 생각에 여러분의 마음은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더욱 더 기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나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진리로 예배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삶으로 답하십시오. "주님 내가 이제까지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렸으나 주님을 못 만났고, 예배를 드릴수록 내 마음은 더욱 강퍅해져 갔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은혜를 내려 주시고, 나의 심령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며 다음 예배를 기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설교자는 누구인가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눅 20:9-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신자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는 동안에 결코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목회자일 것입니다. 신자라면 교회에 다닐 것이고, 그 교회에는 목회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라는 활동은 너무나 범위가 넓어서 한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교육부터 설교, 심방, 그리고 행정, 심지어는 교회 건축과 교회를 경영하고, 인사를 하고, 운영을 하는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목회자가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아무리 교회가 작아도 모두 다 바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목회활동 중 가장 핵심적인 그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 일에 우선적으로 충실하도록 부름 받은 설교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설교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될 소명에 사로잡힌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그는 반드시 그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우리들이 비정상적인 교회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고, 인간의 상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배하려 드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일들이 교회에서도 다반사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지위는 점점 떨어져서 사람들은 예배를 위한 한 순서 정도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복음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과 그분의 설교를 모아 놓은 것이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이 사명을 따라 사셨습니다. 한두 사람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상담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고치시고, 시간이 나면 가르치셨지만,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성령이 오셨을 때 결국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겁쟁이에 불과했지만 이 성령을 체험하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될 소명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설교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제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하게 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선포할 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으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고, 로마제국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급기야 국교로까지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선포할 소명을 잃어버리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예수를 믿게 된 두려움이 없는 세대에 신앙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형식에 흐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길고 긴 로마카톨릭의 침체기가 오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복식과 복잡한 예식이 설교를 대신했을 때 영적인 어두움은 교회 가득해졌습니다. 입으로는 거룩을 외치지만 개혁이 필요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설교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같은 종교 개혁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 이전에 이미 틴데일(William Tyndale), 그리고 이외 종교개혁 이전에 수많은 종교 개혁가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혹은 얀 후스(Jan Hus)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이기 시작했고, 이른 아침부터 예배당에 들어오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역사는 이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설교가 교회 안에서 부흥할 때 교회는 영적으로 부흥했고, 설교단이 잠들었을 때 교회는 타락하고 형식에 흐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II. 설교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설교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설교자의 사명
우선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본문에는 아름다운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을 어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貰)를 주고 간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을 세(貰)로 준 주인은 마음이 매우 명민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넓은 땅덩어리 하나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세(貰)나 많이 받아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에 이 포도원에 오게 되면 무엇이 필요할지를 헤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33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마 21:33)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특히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포도원을 어떤 농부들에게 세(貰)로 주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처럼 배려심이 깊고 너그러운 주인이었으니, 가혹할 정도로 가렴주구(苛斂誅求)할 정도의 소작료를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습니다. 포도원의 열매가 두루 익어 추수하고 수확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때 주인은 당연히 포도원에 대한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바로 이것은 아주 오래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원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포도나무를 가나안 땅에 두루두루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열매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패역과 강포로 물든 모든 타락한 원주민들을 싹 쓸어버리시고 거기에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옮겨 심은 것은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영의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장 7절에는 이 비유에 대한 근거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공평하게 행하고 의롭게 행하는 삶이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면서 열방 사람들이, "인간의 참 행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구나." "저 백성들은 어쩌면 저렇게 선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백성인가?"라고 깨닫게 만들어서 그들을 마음속에 시기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하셨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하나님 사랑과 공평과 의로움의 열매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 일을 하여야 했습니다. 만약에 그 열매가 가득하지 않았을 경우에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책망했습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설교자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당연히 설교자는 그런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으로서 그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외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외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불행의 정체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 더러운 삶을 버리고 하나님 경외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자신의 삶이 의미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그래서 이 사명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이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음의 불을 그 뼈 속 깊이 간직한 사람이 바로 설교자로 소명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설교의 소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이 설교의 소명에 불타는 설교자가 교회를 어거(馭車)해 나갈 때 교회는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고, 영적인 많은 사람들이 변화가 되어 새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993년도 9월 말경에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이후 최초로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깊이 잠이 들어 코를 골고 있는데, 저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잠을 청하려고 애쓰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발 끝에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열렬한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밤을 거의 꼬박 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열렬하게 기도하다 보니 제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밤새도록 드렸습니다. 평소에 개척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런 기도를 당연하게 했을 거라고 여겼을 텐데 평소에 저는 그런 꿈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만약에 신학교를 그만두고 목회를 한다면 백 명이나 이백 명쯤 모이는 평화로운 교회에 가서 설교자로서 봉사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날 밤의 체험은 이상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저는 다시 학교에 가서 하루를 평소처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똑같이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침대에서 내려가서 그렇게 꼬박 새우진 않았지만 거의 이른 새벽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도 역시 똑같이 교회를 개척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그만두려고 하면 기도가 되지 않았고, 기도를 다시 하려고 하면 그 기도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새벽까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에 다시 잠을 잔 다음 그다음 날 다시 학교에 가서 생활을 하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마도 내가 너무나 열심을 품은 나머지 내 기도가 오버(over)를 했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일이 두 번이나 되풀이될 수 있지?" "그러면 오늘 한 번만 더 기도를 해보자." "삼세판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다시 누웠습니다. 어김없이 이틀 동안 잠을 많이 못 잤는데도 그날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아내는 잠들었고, 저는 다시 발끝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밤을 다시 새우며 기도를 하고, 비로소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시는 것 같애." 저희 집사람이 "할렐루야" 했습니다. "교회 이름은 이미 지어놨으니 개척을 시작하시오." "이름이 뭐요?" "열린교회라고 합시다." "내가 이미 지어놨소." "그러면 좋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고 난지 한 달 반이 채 안 된 때에 열린교회가 저 빼고 여섯 명, 저 포함해서 제 아내까지 일곱 명이 열린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이 1993년, 놀랍게도 12월 12일, 동일하게 오늘처럼 12일로써 두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하나 틀린 것은 그 해에는 그날이 바로 음력으로 제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렬히 설교하면서 열린교회가 두 번 이사하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교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괴롭고 힘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천국에서 뜨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주신 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 놓을 교회가 있었고, 그리고 들어주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저를 도구로 사용하여 여러분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기도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전도하지 않을 때는 이 세상에 있는 죽어가는 영혼들의 그 신음소리를 들려주는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가슴에 불타는 전도자로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잠들고 이 세상의 정신으로 물들어 여러분이 병들어 있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의 칼로 여러분을 고쳐주셨습니다. 배고프고 굶주릴 때에는 이 말씀을 떡이 되어 여러분을 먹여 기진한 여러분의 목숨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나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모든 된 일은 나로 말미암아 된 일이 아닙니다. 나 같이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땅이 아직까지도 이런 하나님 설교의 사명에 불타는 종들이 수없이 구름 떼처럼 많이 일어나야 할 터인데 점점 이런 사람들의 일어남이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편안해지고 나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세대가 생겨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되, 여러분은 바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을 주님이 만나 주시고, 그들을 능력 있는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 세워 주시도록 간절히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세상에 영광이나 이 땅에서의 대접과 영화와 모든 것들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무 후고(後顧)의 염려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니라도 괴로운 일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마음 놓고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후고(後顧)의 염려 없이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청중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러한 대접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보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방탕했던 이 세상의 길을 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고 신령한 것에 아무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에 무관심하던 사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고, 고난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돈으로 도와주지 못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가슴을 파고들게 만들어 주는 일이 설교자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바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헌신한, 모든 교회와 함께 이 일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것이고, 여러분은 주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설교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하늘을 가르고 모든 대적들을 예배시간에 불에 섶과 같이 사르고, 수많은 사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이 예배시간에 하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도록, 우리는 그렇게 빌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활활 타오르는 횃불과 같이 뜨겁게 타오르게 될 때 설교단은 불타오를 것입니다. 이때 가장 완악하고 곤고한 사람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돌 같은 그의 가슴이 물같이 녹을 것이며, 쇠같이 굳어진 그의 얼굴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는 눈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꿈꾸는 부흥의 때가 바로 이 설교를 통해 오는 것이니 여러분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고, 이 설교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사랑
이 성경구절을 읽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여기에 보면 세 명의 종들이 나옵니다. 심히 때려서 보낸 종이 있고, 두 번째는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보낸 종이 있고, 또 마지막 세 번째 종은 상하게 하고 내어 쫓긴 종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 주인은 안되겠다 싶어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종들은 그 주인을 사랑하는 종이었을 것이고, 주인에게 인정받는 종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작료를 가지고 오다가 도망가면 어떡할 것입니까? 주인이 신뢰하는 종이었고, 주인을 오랫동안 섬긴 사랑하는 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믿고 소작료를 받으러 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종이 심히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인자한 주인이라면 그다음에는 "내가 가리라."하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요절을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종을 놔두고 다음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창 한 자루, 칼 한 자루 안 들려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더 심히 두들겨 맞고, 피를 흘리고, 더욱 더 능욕까지 받고, 거의 실려오다시피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군대를 데려가질 않습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 종을 또 보냅니다. 그랬더니 죽도록 두들겨 맞아서 거의 송장이 되다시피, 실려오다시피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다음에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내 아들을 보내면 저들이 내 아들을 공경하고 소작료를 낼 것이다."라고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의 생각은 주인의 생각과 판연히 달랐습니다. "야, 저거 아들이 아니냐?" "아, 저놈이 바로 이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니 저놈을 죽여버리면 누가 상속을 받겠느냐?" "영원히 우리의 땅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죽여버렸습니다.
아들이 죽은 것은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세 살 아이가 보더라도 여기서 나오는 죽임 당하는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차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했고, 그렇게 죽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이 세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죽임을 당하는 더 많은 종들과 능욕받는 더 많은 종들이 나옵니다. 한 둘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은 뭘 잘못했나?" 그 농부들은 악해서 그랬다고 치고, 종들은 평생을 주인의 집에서 충성하고, 주인의 집에서 주인을 사랑하고 공경했을 뿐입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는데 때리면 맞고, 지르면 찔림을 당하고, 피를 쏟도록 두들겨 패면 피 쏟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려서 나오듯이 그렇게 나와야 됐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했습니다. 그 대답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그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종들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피 흘려 죽임을 당해도 계속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쉼 없이 보내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서 보내셨습니다. 할 말이 없을 때는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할 말이 있을 때만 선지자를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길러 그에게 말씀을 주신 후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신으로서는 자신의 형제들을 눈물 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보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치는 돌이었고, 쓸리는 가시떨기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담대하게 선포했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정당하고 공정하게 선포했습니다.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설교를 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설교에 귀를 막았고, 더 완악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쫓아가 선지자들을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고, 순교하였던 이유입니다. 바로 이 일을 선지자들이 이미 당하였고, 그 선지자들이(에게) 했던 그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했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에 친구가 되어주신 것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일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그랬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셨더라면 결코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진리의 말씀을 높은 사람에게나 낮은 사람에게나, 죄인에게나 종교 지도자들에게나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달콤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었지만,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었습니다. 찌르는 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죽인 바라바는 살려주고, 자기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죽여 버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하나님 말씀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온밤을 새워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싫다고 안 들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개소리만도 못한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하면 설교자는 욕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면 싫은 바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자를 버리고 떠나면 설교자는 버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실패의 넝쿨에 뒤엉켜 도저히 갈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시험에 빠진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그때 설교자는 그 사람에게 대통령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고, 임금보다도 높은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께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런 때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없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던 때, 회개하지 않고는 설교를 들을 수 없던 때, 매 주일마다 어쩌면 나의 삶을 모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저렇게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나 하며 감탄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왕년의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허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수십 년 전에 자기가 받았던 은혜나 자랑하고 간증하는 사람입니다. 그때는 그걸로 살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만나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왜 오늘 얘기를 간증하지 않고 수십년 전에 이야기만 하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만나는 하나님은 그렇게 시시합니까? 그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옛날 일이나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애통하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시는 내가 주를 위하여 사는 것 이외에 어떤 인생도 선택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던 그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의 불을 받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이제 모든 죄를 내가 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겠다고 고백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제가 마지막 설교하는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설교자를 보내시고, 그 설교자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거짓 목자는 여러분에게 요리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준비하지만, 선한 목자는 약을 처방하는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설교를 준비합니다. 거짓 목자는 여러분에게 입맛을 달콤하게 할 모양으로 수많은 조미료를 쳐서 이 세상의 지식과 육체의 자랑으로 설교를 전하지만, 하나님의 참 종은 여러분을 수술대 위에 눕히고 사랑하는 여러분의 배에 칼을 대고 복부를 가르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고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배 순서 중 하나일 수 없습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예배의 반주를 들으며 예배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그 산을 오를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을 듣고,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그 산으로 올라가고, 마지막 설교 속에서 그 빽빽한 구름 가운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감사의 찬송과 눈물의 기도로 하산하고,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배 속에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일 없이는 절대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모양으로는 제법 그럴듯하게 다듬어진 사람이고, 교회에서 이런저런 직분을 받게 될지 모르나, 그는 그저 늙어가는 인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결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그의 마음속에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거듭난 것처럼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영생을 얻게 되나니, 그 말씀으로 여러분을 돌이키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설교자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분투하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교 시간이 지겹습니까? 하나님도 여러분이 지겨우실 것입니다. 이 설교시간이 지루합니까? 하나님도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지루하실 것입니다. 빨리 끝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차라리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을 더 기뻐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에, 찬송에, 기도에, 헌금에, 축도에, 모든 예배의 순서 어느 하나에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습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악 된 삶을 살았으면서도 회개하는 심령이 없는데, 어느 한 부분이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시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예배입니까? 드리면 될수록 하나님께 모욕이 될 것이고, 모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분에게는 지겨운 모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가 지겨운 것처럼 말입니다.
단 한 시간도 그 설교시간에 깨어서 그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의 간절함이 여러분에게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취급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설교자를 보내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시니, 그 말씀으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말고 이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깨어나십시오. 각성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손끝 아래 달린 한 점의 티끌에 불과한 것입니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의 손 끝에 붙어 있는 거미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싫어서 털어 버리면 불 속에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의 신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사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생명을 어떻게 이어가겠으며, 어떻게 호흡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잠들었던 사람이 아침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이렇게 살려 두신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나온 자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설교자와 말씀
설교자와 말씀입니다. 설교자는 설교할 것이고, 그리고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에게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책임을 영원히 져야 할 것입니다. 들은 사람들은 자기가 그 말씀을 들은 것에 대해서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위기 때마다 침묵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가 장난치고 놀다가, 천길 쯤 되는 벼랑 끝까지 걸어가서 그걸 알지 못하고 떨어질 위기에 있다면, 조용히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가을 풍광을 즐길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낳은 자식이 아닐지라도 아이가 그렇게 위험한 곳에 있으면, "얘야, 안된다." "거기 가면 안된다." "떨어진다." "위험하다." "얘야, 안 돼."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고, 인생의 갈림길 가운데 있을 때, 왜 하나님이 아무 말도 안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왜 말씀을 안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을 싫어하시고 염려하시는데, 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갈 때까지 여러분 마음대로 가보고,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포악하게 행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육체의 열매를 맺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훼방하고, 주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치 멸망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거짓된 길로 걸어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과 번개처럼 울릴 때도 있지만, 세미한 음성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수풀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아무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처럼, 그렇게 내리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순종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면,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8) 결국 "돌 위에 사람이 떨어진다."라는 뜻은 예수님이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걸림이 되어서 넘어지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주님이 친히 돌처럼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기가 전한 일에 영원히 책임져야 하고, 청취자는 설교를 들은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고 없이 고난이 닥치는 법이 없고,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시련을 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간 동안 경고하고, 경고하고, 알리시고, 알리셨지만, 그것들을 모두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시련을 만나게 되고, 죽음과 같은 위협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일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전하는 일의 엄중함을, 듣는 회중은 귀를 기울이는 청취의 엄중함에 대해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를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러이러한 때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믿고, 저렇게 저렇게 살도록 내가 이렇게 이렇게 수없이 일러주었거늘 그때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을 때, 여러분은 그 설교도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III. 적용과 결론
설교자의 소망은 여러분의 심령이 변화되고,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그도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고, 아프고, 외로우면 괴롭습니다. 그리고 좋고, 즐거우면 행복합니다. 비난받을 때 괴롭고, 홀로 있을 때 외롭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유혹을 받는 연약한 형제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한 마리의 가엾은 양으로, 더 가엾은 양떼들에게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은 아주 얄궂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천사가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설교자로 세우신 것은 여러분이 설교자를 믿지 말고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한 마리의 어린양입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고, 불쌍히 여기고, 연약한 부분을 용납하십시오. 그러나 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울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인생의 난관에 처해도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거기에서 살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자신을 드리는 예배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꾸짖는 편지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고린도 교회가 그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이고 뉘우치며 슬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번에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위로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헌금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 교정되어야 할 잘못된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힘에 넘치는 헌금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교회였습니다. 큰 흉년이 일어났고, 예루살렘 교회는 큰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근에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교회들은 십시일반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많은 소식을 들은 교회 중 사도 바울의 눈길을 끈 것은 마게도냐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가 많은 헌금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II. 자신을 드리는 예배
A. 가난한 교회
그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고후 8:2)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한 교회일 뿐만 아니라 극심할 정도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는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에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거기는 특히 로마시대 때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성행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해서 고생을 많이 하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바로 거기서 주님을 믿던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하게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정말 평범한 사람이 보기 어려운 달동네 같은 곳에 위치한 교회였다고 보면 됩니다. 가난하기만 해도 어떻게 헌금을 할 수 있을 텐데, 이 교회는 그저 가난할 뿐만이 아니라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복수(複數)로 나옵니다. 환란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시련을 당했는데, 한두 번의 시련이 아니라 많은 시련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로마시대에 이 지역을 향한 고도의 핍박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종교적인 박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밖으로는 시련과 핍박, 환란이 그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무슨 헌금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헌금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헌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는 극도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B. 풍성한 헌금
그런데 놀랍게 이 교회에서 풍성한 헌금이 나왔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연보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연보를 드렸고, 그것은 넘치도록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마게도냐 교회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하기로 유명한 교회였고, 환란과 시련을 끊임없이 당한 고통 받는 교회였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기근이 들어서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이 교회는 넘치도록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충만하게 헌금해서 풍성한 연보를 드렸고,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 놀라운 헌금을 하게 하였겠습니까? 심히 가난한 교회였고, 환란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C. 신령한 기쁨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고후 8:1) 아! 그렇습니다. 은혜였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극심하게 가난하고, 환란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고난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남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가난하고, 극심하게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그들만의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고후 8:2)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갑자기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진다 할지라도 욕망을 줄이지 않는 한 여러분은 계속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기쁨이 없다면 더 더욱 증가하는 욕망은 여러분을 점점 돈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평안해도 여러분이 여전히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끊임없는 불만족과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는 세상이 모르는 참된 신령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 앞에 헌금하게 만들었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아낌없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3절부터 5절 사이에서 헌금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1. 넘치는 헌신
첫째는 넘치는 헌신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힘대로 할 뿐 아니라" 즉, 그냥 적당한 정도로 했을 뿐 아니라, 그거보다 더 지나치도록 자원하여 헌금했다는 뜻입니다. 넘치는 헌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소중한 헌금을 바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극심하게 가난했지만, 넘치도록 헌신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을 당한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들로 하여금 가난하지만 넘치는 헌신을 하게 하여 능력껏 한 것이 아니라, 그 능력에 지나도록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주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자신이 줌으로써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더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낌없이 주는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결혼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녀를 낳아 보십시오. 이제 드디어 다 커서 결혼을 해서 시집 장가를 갔습니다. 각기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잘 삽니다. 그런데도 부모 마음은 계속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식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자꾸 주고 싶고, 주면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녀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작은 이익을 가지고도 양보하지 않고 다투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그렇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헌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반지 하나도 새 것으로 사서 비싼 걸 끼워 보십시오. 왜 그런지 쳐다도 안 보던 손가락에 계속 눈이 갑니다. 노트북 하나만 새 걸로 바꿔 보십시오. 옛날의 노트북은 처박아 놓고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는데, 맨날 꺼내서 걸레로 닦고, 휴지로 닦으면서 아껴서 씁니다. 물론 몇 주 안 가겠지만, 한참 동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넘치도록 헌금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내가 가진 것을 흘려보냄으로써 이 땅의 구겨지고 주름진 곳을 펼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본 적도 없고,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를 보며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꺼이 헌금하고, 그를 돕고 싶어 하는 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헌금에 인색하다면 여러분의 신앙이 그 정도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고, 하나님 사랑이 그 정도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몸도, 마음도 병든 청년으로 그리스도께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고 매일매일의 생활이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가서 기도했고, 금요일이면 꼬박 교회에서 밤을 새우며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괴로운 것은 바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직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수하고 있었던 시절이니까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집은 너무 가난하고, 주님께 받은 은혜는 너무 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이 생닭 한 마리 아주 좋은 거를 사주면서, "너 몸도 많이 약해졌으니까 집에 가서 꼭 끓여 먹거라.", 그랬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누런 봉투에 든 그 닭을 들고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돈이 없어서 헌금은 못하는데 생닭이 하나 생겼는데, 상하기 전에 이거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목사님이 전해주십시오." 교회가 조그마했으니까, 목사님은 즉시 연락해서 심방 일정을 잡고 병들어서 누워있는 가난한 자매의 집을 심방해서 제가 건네 드린 닭을 그 자매에게 끓여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근데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엇이라도 주님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습니다. "이것이 사랑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람을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받으려고만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받기를 싫어하고, 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받은 그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주었기 때문에 적은 것을 갖게 된 자기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2)고 하셨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이처럼 신령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넘치도록 헌신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고 일생 사는 날 동안 강물처럼 흘러가 메마른 많은 대지를 적시듯이 많은 사람에게 베풀며 나누어 주도록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원한 마음
두 번째는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누가 구했습니까? 마케도니아 교회입니다. 즉, 마게도냐가 거액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기꺼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 사도가 명하노니 너희는 이 만큼 이만큼을 거두어서 우리에게 보내거라.', 그렇게 압박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어디에서 들었는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그 교회가 사도의 일행에 대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헌금이었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다가 아까운 느낌이 들면 하지 마십시오.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은 헌금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차라리 나중에 하나님 앞에 인색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개를 하십시오. 그게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훌륭한 헌금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부터 13절에 보면 식사하시는 예수께 조용히 다가와서 향유를 부어 버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이 여인이 부은 향유는 지금 임금(賃金)으로 환산하자면, 약 5천만 원 정도 되는 거액의 향유였습니다. 당시 이 향유는 단순히 향품이 아니라 오늘날의 주식이나 비트코인처럼 재산 축적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들고나가면 시장에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유동성 재화였습니다. 이 여자가 누구였는지, 무슨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자', '죄 많은 여자'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볼 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향유를 모았습니다. 매일매일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는 향료를 모았으니, 어쩌면 일정액이 모이고 나면 이것을 현금화하여 이제껏 살지 못했던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려고 했던 자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인생이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를 평생 괴롭힌 것은 죄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 이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 자기가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께 바치고 싶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는 분께 바침으로써 자신은 더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이 간직했던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깨뜨려 그분께 부어버렸습니다. 식사하시던 장소가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옥합이 깨졌을 때 그 향기는 온 방에 진동했고, 옥합이 깨졌을 때 사실은 세상을 사랑하던 그녀의 마음도 함께 깨진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보고 불평불만을 토로했지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즉,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깨닫는 마음이 있는 그곳에서는 똑같이 이렇게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어 버리는 헌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언제 예수님이 조건부로 용서해 주셨습니까? "내가 이 죄를 용서해 주면, 넌 나한테 뭘 줄래?", 주님이 거래를 하자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쌍한 이 여자를 보시고 용서해 주셨고, 진리의 말씀이 여자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자, 자원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이 이제껏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그것을 깨뜨려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회의 마음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모아서 보낸 헌금은 그냥 단순한 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그 가난한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참된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고, 환란을 겪고, 핍박을 받으며,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어도, 그들의 영혼은 부요하였습니다. 항구에 있어서 온갖 부를 누리던 고린도 교회, 헌금에는 인색했던 이 교회와는 정반대로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으나 마음은 부요했고, 영혼은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는 헌금을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개척교회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갔는데, 무슨 일인지 아침에 기도하러 교회에 들렀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 강대 위에 뭐가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강대에 가보았습니다. 가난한 교회 시절이었는데, 손으로 움켜쥐어도 꽉 찰 정도의 지폐가 놓여 있었습니다. '헌금'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주님께 드립니다.' 이름은 안 썼습니다. 잡아보니까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백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교수로 있으면서 받는 월급이 될 정도로 그렇게 큰돈이었습니다. 그게 있으면 가지고 있다가 주일날 내면 될 텐데 왜 그 사이를 못 참아서 교회에 그걸 갖다 놓았겠습니까? 만약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그냥 슬며시 집어 갔으면 어떡할 뻔했겠습니까? 제가 마침 들어왔으니까 그것을 재정부에 주었지, 어떡할 뻔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성도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일날까지 참을 수 있었으면 참았을 것입니다. 그 돈이 아까웠으면 그걸 갖다가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놓고 갔겠습니까? 교회에 내야지 하고 주일날 가지고 왔거나, 아니면 계좌번호를 물어봤을 것입니다.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시 달려와서 그거를 거기다 놓고 돌아갔습니다. 목회자인 내가 그 헌금을 받을 때 기뻤지만, 그걸 놓고 간 무명의 그 성도의 마음에는 활자 꽃이 핀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께 그 소중한 물질을 바치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주님께 드렸다는 그 기쁨 때문에 이 성도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이게 바로 은혜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게도냐 교회의 마음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를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린도 교회에 알리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보아라, 돈이 많다고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줄 때 그들은 넘치도록, 아무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무엇을 주는 것이 고통스럽겠습니까?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고통스럽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사랑하면 모든 것을 주고 싶고,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전부를 바치고 싶고, 그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 되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는 자원하는 마음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넘치도록 헌신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착한 헌신으로 말미암아 굶주렸던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새 희망을 갖게 되었고,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은혜의 강물을 흘려보내어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 속에 표현된 것이 바로 헌금 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께로부터 받은 많은 것을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흘려보내어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자신을 드림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고후 8:5 上) '바라던 것', 이것은 바로 연보였습니다. "···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고후 8:5 中) 헌금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한 일이 있었는데,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下) 마케도냐 교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 교인들이 가여워서 헌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헌금한 것을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가 기억하고 보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헌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헌금하기 전에 한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극심하도록 가난한 교회가 넘치는 연보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친 헌금은 사도를 위한 것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도,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목회자와 직원들은 교인이 주는 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헌금의 원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헌금하기 전,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상태에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전제 조건이 없이 그냥 돈을 교회에 내는 것이라면 그건 기부지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부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크고 작은 헌금을 모두 드립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치면 그 물질은 신앙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곳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닌, 주님의 곳간에 있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당신이 세운 일꾼들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목적에 맞게끔, 하늘 창고를 열고 그걸 다시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헌금한 사람도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받는 사람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금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기 전 마음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헌금을 못합니까?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거의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목상의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께 바쳐진 사람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 그것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헌금입니다. 바로 마게도냐 교회가 그랬습니다. 헌금을 모으기 전 그들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리자,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었습니다. 지긋지긋하도록 가난한 교회였지만,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연보를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눈물로 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감춰 놓은 돈이 많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속에 크게 역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헌금,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큰 헌금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1억 원도 적은 돈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10만 원도 큰 돈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원했던 마게도냐 교회는 거액의 헌금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받치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헌금을 요즘 (헌금)주머니에 합니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잠자리채 같은 데다가 헌금을 했습니다. 그래서 헌금 위원이 대(臺)를 들고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하고, 쭉 뻗어서 헌금을 거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뒤로 시계를 돌리면 쟁반 같이 생긴 데다가 헌금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쟁반이나 깊지 않은 바구니 같은데 헌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서도 역시 쟁반을 가지고 헌금을 했습니다. 근데 헌신예배 시간에 강사님이 오셔서 선교의 헌신에 대해 열렬히 설교를 하고, 선교지를 돕는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금 위원이 쟁반을 돌리니까 웬 아이가 앞에 앉았다가 쟁반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빼앗더니 땅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고 합니다. 헌금 위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랬더니, "나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돈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을 주님께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아이는 그 헌금 쟁반 위에 올라갔고,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 아이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빚덩어리인 부채자(負責者)로서 여기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원래 우리의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우리의 고유한 것이 없다.'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니, 그것은 죄다.' 죄만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고, 나머지 좋은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 빚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한없는 부채(負債)를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부채 의식(負債意識)을 느끼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부채 의식(負債意識)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부채 의식(負債意識)을 느끼기 때문에 오늘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흘러가서 구겨진 곳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달란트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물질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은혜받은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거액의 헌금을 드리기 전 먼저 자신을 다 드렸습니다. 자신을 드리고 나니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후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주님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있고, 주님 때문에 살아왔습니다. 또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우리 일생은 영원히 그렇게 주님께 빚지면서 살 것입니다. 눈을 들어 보십시오. 개인에게만 국한하지 마시고, 눈을 높이 들어 고통받는 이웃과 형제자매들과 선교지와 구겨진 세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이 헌신을 통해서 지금도 온 땅에 구긴 곳을 펴십니다. 그리고 모자라는 곳을 보충하시며, 핍절한 곳을 넉넉히 채워서 그들로 삶의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헌금을 드리기 전 자신을 먼저 드리기를 원합니다. 목회하면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는 자세로 말씀을 들으며 집중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어려울 때마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많은 연보를 통해서 교회를 어려움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성도들이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어디 물질뿐이겠습니까? 재능으로 섬기는 것, 시간을 내어서 섬기는 것, 자기를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바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섬김으로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두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하고 시련과 환란을 많이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 굶주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교회가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신령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신령한 기쁨의 저자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넘치도록 헌신했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원은 마음으로 바쳤습니다. 모든 물질을 놀랍게 많이 드렸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모두 드렸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회를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를 본받으라고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비록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마게도냐 교회 앞에 무릎을 꿇고 배워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중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지켜보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손을 얹고 주님 앞에 무엇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혜 앞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했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찬양)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주 나를 위해 자기를 주셨지만, 나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인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했고, 넘치도록 바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처음 사랑을 간직하십시오. 착하게 사십시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배에서 헌금 시간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 물질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으니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두고 사는 성도들임을 예배 속에서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마음으로 드린 찬송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1995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있는 한 교도소의 죄수들에게 설교를 부탁받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200여 명 모인 죄수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교정위원 한 사람이 저에게 교도소 안에서 발행되고 있는 소식지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펼쳐보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거기에 기고를 했는데, 그 사람은 1990년대 유명한 지존파 살인범 중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섯 명의 20대 청년이 모여서 부자들을 응징한다는 미명하에 범죄 단체를 조직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습니다. 그 글을 쓴 주인공은 바로 그 조직 폭력배의 행동 대장이었던 김현양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이 약간 지난 이 청년은 엽기적인 살인행각에 동참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심문하고 취조하는 과정에서도 실실 웃으면서 자신의 범죄사실을 토로했습니다. 그 가운데 온 국민이 경악한 것은 이 얘기였습니다. "한 여자를 죽였죠." "가슴을 도려냈습니다." "제가 다 씹어 먹었거든요." 온 나라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완고하게 예수 믿기를 거절했는데, 어느 한 집사님의 열렬한 전도 끝에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형이 확정된 죄수로서 다음과 같은 글을 소식지에 썼습니다. "집사님,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제 눈에 무엇이 씌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제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매일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적어 놓은 가사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였습니다. 그는 1995년 11월 2일 병든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씹어 먹었던 흉악한 살인마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은혜가 가득 차니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이 가득 찰 때 찬양은 가득 찬 샘물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배생활 속에서 찬양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목회자인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 중 일부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은 예배당 들어올 때부터 찬송할 의지가 없습니다. 찬송할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면 모기만 한 소리로 조그맣게 따라 부르거나, 아니면 입만 벙긋거립니다. 아니면 도대체 무슨 심사인지 입을 굳게 다물고 남의 찬송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사연이야 많을지 모르지만 공통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찬송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니 찬송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찬송하며 예배드린 사람,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래방에 가도 그렇게 부르면 20점이 안 나옵니다. 노래방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고래고래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어떻게 예배 시간에는 그렇게 성의 없이 찬송을 부릅니까? 북한에서 방송되고 있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김일성 부자(父子) 혹은 지금은 김정은이 나타나면 그들이 성의없이 박스를 칩니까? 삼족(三族)을 멸할 것입니다. 미친 듯이 열렬하게 박수를 치고, 늙은이들이 목에 힘줄이 서도록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김정일 만세를 외칩니다. 심지어는 젊은 사람들이 눈물까지 뚝뚝 흘립니다. 도대체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의 찬송이 그만 못한 돼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찬송을 드리다가 간 사람들 마음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II. 마음으로 드린 찬송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운 목소리든, 그렇지 않은 목소리든, 성악을 훈련받은 사람이든, 안 그런 사람이든,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변덕이 심한 바로는 놓아준다고 했다가, 안 놓아준다고 했다가, 반복하고, 반복하고,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결국은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왕국이 모두 무너질 것 같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빨리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다 생각하고 모든 재물을 이끌고, 짐승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굽 사람들로부터 건네받은 패물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열심히 달렸습니다. 한참 갔을 때 바로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렇게 많은 노예들을 돌려 보내고 나서 애굽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그 많은 공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는 다시 장수들에게 명하여 병거 600승을 끌고 달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훈련이 잘된 애굽의 병사들은 600승의 병거로 질풍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습니다. 그까짓 것 따라잡는 것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불길로써 그들을 가로 막으시며, 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도망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으니, 바로 앞에는 검푸른 홍해가 물결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이스라엘 백성은 벌써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고, 잘 있는 사람을 왜 이끌고 여기 홍해 바다에 우리를 수장시키려고 하느냐고 모세에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했고, 아침에 바람이 불면서 바다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밀물과 썰물이 아니었습니다. 바닷물이 갈라지면서 양쪽에 벽 같이 서고, 가운데로 마른 땅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 마른 땅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얍바솨(יַבָּשָׁ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딱딱한 마른 땅입니다. 바다가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거기가 물에 질퍽거리는 땅이었다면 200만 명이 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 많은 짐승과 마차가 지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른 땅이 났습니다. 그러니 기적이었습니다. 바닷물을 양쪽에 벽 같이 세우시는 하나님이 그까짓 마른 땅 하나 만드시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길들은 사라지고, 애굽의 병과는 다시 추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이 물 한가운데 완전히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두 물이 다시 만나게 하셨습니다. 병거는 부서져 물 위에 떠오르고, 병사들은 수장되었고, 그들은 물 위에 떠오르며 살려 달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그 아비규환의 파도소리가 홍해에 가득한 그때 모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혼자 부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획에도 없는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미리암은 아론의 누이였습니다. 성령에 감동이 되어 손에 작은 북을 잡고 나와서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여인이 그녀를 따라 나오며 함께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자기들을 구원하신 위대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말씀 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찬송다운 찬송이 되려면 마음속에 하나님이 꽉 차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시간에 나와서 찬송을 그렇게 힘없이 매가리 없이 부르고, 입으로는 찬송을 부르며 정신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은 부르지 아니함만 못하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찬송이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다 갔으니 일주일 동안 승리할 리가 없고, 일주일 동안 죄에 지고 욕심에 지다가 살았으니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마음속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감상을 하는 것, 훌륭한 일이고 정서에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우리는 중시해야 합니다. 유명한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도 좋지만 더 훌륭한 것은, 여러분 마음의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고, 길어 올린 그물에 여러분의 신앙의 고백을 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어서 퍼붓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찬양입니다.
설거지 하면서, 집안일 하면서, 직장인 하면서, 그리고 운전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부릅니다. 저 깊은 내 마음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고 거기에서 사랑의 물을 길어 우리 하나님을 향한 나의 고백을 거기에 탑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길어 올려서 내 입술로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울림은 메아리가 쳐 주님께 다다르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되돌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낙심하고 좌절하는 마음에 희망과 소망을 주고, 지루하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 불타는 심정을 줍니다. 그리고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게끔 만들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찬송하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께 붙어 있는 마음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찬송하라 명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한없이 기뻐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찬송하라는 명령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 탕, 탕'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일장이 선 시골의 풍경입니다. 오일장 서면 아이들은 신이 납니다. 평소의 시장보다 2배 3배 정도는 많은 가게가 즐비하게 서게 되고, 평일에는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사물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갓 낳아서 데리고 온 오물오물거리는 시골 강아지 새끼들, 고양이 새끼들, 그리고 심지어 땅꾼이 잡아온 뱀, 바닷가에서 잡아온 생선 소금에 절인 것, 서울에서 바로 부쳐온 새로 나온 점퍼, 양말, 셔츠, 내복 등등이 눈길을 끕니다. 여기저기서 엿을 잘라서 파는 소리, 강냉이를 튀기는 소리들이 가득한 축제의 날입니다. 그때 대장간도 그날은 대목을 보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농부들이 그날을 기다렸다가 나와서 여러 가지 기구를 사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풍구를 돌립니다. '쉿, 쉿' 소리와 함께 역청탄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자른 쇳덩어리 하나를 집게로 집어서 역청탄 속에 깊이 쑤셔 넣습니다. 한참 있으면 빨갛게 되다 못해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이 납니다. 그때 굵은 팔뚝의 아버지는 모루 위에 그 쇠를 올려놓고 망치로 힘차게 아주 재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렇게나 생겼던 쇳조각들이 변해서 칼이 되고, 낫이 되고, 호미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농부들은 거기에서 필요한 기구들을 사 가지고 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여러분에게 주어지지만 그 말씀이 여러분을 가장 잘 변화시킬 때는 여러분의 마음이 역청탄 속에서 하얀색이 나도록 불에 달궈졌을 그때 말씀의 망치를 맞을 때에 가장 훌륭하게 빨리빨리 새로운 여러분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충분히 자신을 두드리도록,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나를 새롭게 빚어달라는 마음을 갖게끔 해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받아들이게 만들고, 깨달은 대로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정확하게 적용하게 만들어서 모루 위에서 두드림질을 당하는 달궈진 쇠붙이처럼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마음을 새 마음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일평생 나쁜 생각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끔찍하게 살해했으니, 김현양이라는 청년의 마음은 거의 마귀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인육까지 먹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은혜를 받고 나니 그렇게 단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며 마지막 형장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렇게 놀랍게 바꿔 놓습니다. 그러니 예배당에 발을 들여놨을 때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렇게 찬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하나님의 성품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마음을 고정시킨 채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온 정신과 마음에 꽉 차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여러 날 동안 가슴앓이를 할 정도로 짝사랑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성탄절을 맞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갑니다.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 적도 없고 그냥 무조건 집에 가서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어느 방인지는 아니까 불이 켜졌으면,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이입니다. 가서 무조건 기다리고 있으면 슈퍼라도 갈 것이라고 달달 떨면서 나옵니다. 창가에 그녀가 어른거립니다. 그때 이 형제의 마음속에 누구만 있습니까? 그 자매만 있습니다. 꽃을 들고 핸드폰 켜고 게임하고 있으면, 고백하러 온 녀석도 아닙니다. 당연히 학교 갈 때는 학교 생각하며 가고, 직장갈 때는 일 생각하면서 가고, 가정 생각할 때는 가족 생각하면서 가고, 데이트하러 갈 때는 애인 생각하면서 갈 것 아닙니까? 그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러면 교회에 올 땐 누구를 생각하면서 와야 됩니까? 하나님 생각하면서 와야 합니다.
'부우웅, 덜컹', 버스가 떠났습니다. 저는 버스 맨 뒤에 탔습니다. 전도사할 때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시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탔습니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 정거장에서 두 아줌마가 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잘 사시는 분인지 화장도 곱게 하시고, 밍크코트, 한 분은 진짜인 것 같고, 한 분 것은 가짜인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밍크코트 비스름한 것을 입고 두 분이 타셨는데, 괜찮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커다란 가죽 성경, 찬송가를 들고 있었습니다. 타자마자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탄 사람이라고는 운전기사 하고, 나하고, 자기 둘 밖에 없으니까 조용조용 해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큰 소리로 기사까지 들릴 정도로 내 바로 앞에 있는 좌석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압구정동의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아냐?' '잠실의 논밭이 지금 완전히 수표를 깔아도 못 살 정도가 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를 우리가 샀다는거아냐.'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부동산 아저씨의 직접 화법(話法)까지 동원해가면서 끊이지 않고 말이 이어지길 명동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자매가 '야야, 큰일 났다. 지나갈 뻔했다. 여기 우리 교회다. 빨리 빨리 내리자.' 나는 확신합니다. 차에 내려서 그 이야기를 계속 이으면서 예배당 앞까지 갔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틀림이 없습니다. 중고등부 선생입니다. 예배장소 가기까지 그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 앞에 무슨 찬양이 나오겠습니까? 머릿속에는 압구정동 땅과 잠실의 논밭, 수표 얘기가 가득한데 도대체 무슨 찬양이 그 속에서 나오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살기 때문에 주일날 찬양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생각 안 했으면 최소한 토요일부터라도 내일 하나님 만나러 갈 테니까 예의상으로라도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하다가 주일날 와야 합니다. 그런데 토요일은 명화극장 보고, 게임하고, 노느라고 정신없고, 금요일 날은 어차피 주(酒)의 날입니다. 술 마시는 날입니다. 토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노는 날인데, 예배드리고 노는 날입니다. 이러니 최소한 집에서 출발할 때라도 하나님 생각을 하면서 출발해야 되는데, 무슨 하나님의 생각을 합니까? 온갖 잡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교회 문턱에 들어서서라도 하나님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러기에는 예배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불쑥 들어와서 찬양을 부릅니다.
(찬양)
전능왕 오셔서 우리로 찬송케 하옵소서
입에서는 나오는데 정신에 있는 것들은 입에서 나오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힘차게 부를 의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뜻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뜻이라는 것은 감정의 물결이 흘러가는 게 뜻입니다. 그런데 감정의 물결이 절로 세속으로 흘러가는데, 어떻게 입을 벙긋거린다고 갑자기 신령한 세계로 흘러 힘차게 흐르는 강물이 되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를 때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냐면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단상에 올라 특송을 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마음 전부를 실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중심을 드리는 찬송을 부름으로써 그 힘찬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마음의 더러운 죄의 찌꺼기와 쓸데없는 공상이 찌꺼기들이 확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과 조수미에게 당신은 노래 부를 때 어떤 마음이냐고 물었습니다. 수천 명의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나의 목표는 내 노래로 저 사람들은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해야지만 그 찬송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날 매가리 없이, 성의도 없이, 솔직히 뉘 집에 가서 동냥해도 그런 식으로 각설이 타령을 하면 밥을 안 줍니다. 그만도 못한 노래를 부르면서 그걸 하나님 앞에 예배라고 드리고 있다고 하니,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도도 똑같습니다. 다함께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뒤적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눈을 감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졸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다같이 기도합시다."하면, 여러분 혼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마음으로 또렷또렷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구하는 바를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의 의무입니다. 그걸 큰소리로 할 수도 있고, 작은 소리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모두 언어여야 합니다. 말이 되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소원의 간구여야 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만 이렇게 찬송의 변혁을 가져와 보십시오. 삶이 달라지고,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간 살면서 찬양을 부르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안 부르면 안 부를수록 마음이 건조해지거나 세속의 노래에 찌들게 되고, 일부러 찬양을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속에서 새 마음이 솟아납니다. 찬송은 가사를 외우는 것이 너무 유익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가 교역자 생활 초창기 때는 아이들에게 찬송가 외우기 대회를 했습니다. 유익한 점이 뭐냐면 걔네들은 은혜를 받은 애들이라서 찬송을 부를 때 외우면 눈을 감고 찬송을 부릅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다 외우면서 눈을 감고 자신이 그 속에 깊이 빠져들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1학년 2학년 밖에 안된 아이들이 손을 들고 지하실에서 다 가사를 외우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 찬송을 부르는 광경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했으면 어른이 와서 애들 기도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집사님이 얼굴에 곰보가 잔뜩 있는 집사님이었습니다. 문을 쿵 닫으면서 나중에 얘기하면서 막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애들만도 못하다고, 애들은 저렇게 울면서 찬양하는데, 우리에게 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애도 그런 찬양을 마음속에서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생각하십시오. 좋은 복음성가나 찬송가를 들으면서 여러분 스스로 부르려고, 마음으로 따라 부르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리고 부르는 그 노래에 여러분의 마음을 잠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찬송하십시오.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 겹칩니다. 울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도 없습니다. 아무데서나 기도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비우고 찬양을 합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아버지." "제가 당신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마음에 아주 놀라운 순발력을 주는 것이 사실 말씀보다도 찬송입니다. 찬송이 침체되어 있던 마음에 생기를, 낙담했던 마음에 희망을, 유혹받는 마음에 용기를 줍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마르틴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그렇게 판을 크게 벌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밀어붙이셨습니다. 그리고 들불처럼 번져 갔습니다. 그러니 왕권에 위협을 받는 제후들이 얼마나 무서워했겠습니까? 군사들을 모두 일으키고 신교도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의 살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연히 종교개혁을 따르고 싶지만 마음에 목숨이 아까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두려운 사람들의 마음에 들불처럼 번져갔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찬양)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은 모든 사람이 함께 찬양했습니다. 이게 가수들을 위해서 지은 노래가 아닙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민중가요입니다. 모든 교인이, 모든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 아니 모든 성경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열화와 같이 따르게 하기 위해서 부른 민중의 노래였다는 말입니다. 이 찬송이 울려 퍼지는 사람들 속에 용기가 생겨나고, 진리를 파수할 담대한 힘이 생겨났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와 같은 순교자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게 찬송의 힘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유산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 힘겹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의무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 150:6)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 찬송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이 있는데, 기관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경고를 했습니다. 당신이 소리를 지르거나, 찬송을 많이 부르면 많이 부를수록 결국은 점점 기관지가 응축되어서 나중에는 당신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내 목소리를 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니,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도 영광이라고, 더 힘차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찬양을 많이 부른다고 목소리를 잃어버릴 염려, 시한부 인생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많이 찬송하면 찬송이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면 찬송은 저절로 우러나오게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 은혜의 불길에 타오르도록 만들어주는 정말 정말 소중한 수단이 바로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의 노래를 더 많이 달고 살수록 마음은 세상으로 차게 될 것이고, 주님을 향한 찬송으로 가득 찰수록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찬송할 이유가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찬송해야 되겠습니까?
A. 하나님의 창조
첫째,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서부터 제일 먼저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이 땅에 있구나.' 대만에 갔을 때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화석을 팔길래 그중에 조그만 조각 하나가 맘에 들어서 구입을 했습니다. 나무 이파리들이 화석으로 들어있는 돌이었습니다. 판매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이게 사실 얼마나 됐을까요?" 인터넷을 한참 써치(search)하던 점원은," Five million years ago." 5백만 년 전의 화석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5백만 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만큼의 시간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파크에 있는 규화석은 1억 2천만 년 전의 화석이라니, 도대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목숨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입니까? 그런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존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낮고 낮은 존재가 높으신 하나님을, 들풀의 이슬처럼 하찮은 존재가 놀랍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으니, 그 찬송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바친 찬송이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나는 믿습니다. 하루에 세 번 눈물 흘리며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세상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노래가 메아리 쳐야 되는데, 그 첫 번째 제목이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와서 배우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장소다."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고, 나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들으며, 그 분은 명하시고 나는 순종한다." 그분은 뜻하시고 나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순명(順命)의 맹세가 이루어져야 되는 곳이 바로 이 예배당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인생은 잠시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곳이고, 곧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설 때가 다가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시(Assisi)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12세기에 말했듯이 "저 하늘을 나는 새들이여, 그대들도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대들을 낳으셨고, 또한 여러분을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 하나님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광스러운 찬양을 돌릴 것을 꿈꾸면서 그 열망에 사무친 채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찬송 순서입니다.
B. 하나님의 구원
두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우리와 오리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와 개구리, 우리와 돌멩이, 우리와 흐르는 시냇물 옆에 핀 한 포기 풀이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시간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이 그렇게 힘차게 터져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이 일주일 동안을 살다 왔기 때문에 구원의 주를 예배하는 이 시간이 전혀 마음에 감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에 감격할 수 있었다면 이 예배는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찬송이 마음에 메아리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살지 않았고, 구원의 은혜보다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는 이 무게를 느끼며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결국 얼마나, 어떻게 살았느냐에 의해 예배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예배의 수준을 얼마큼 높이 드렸느냐에 의해서 다음 주 삶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삶은 예배 안에 묶이고, 예배는 삶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예배할 때 그 예배자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자이면 여러분은 사회적인 지위와 재물의 소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쓰시려는 그 시대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은 매우 소중하게 빛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내가 그 사람들이 삼성의 이병철씨 같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보증은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사람보다 더 모든 사람에게 기억될 훌륭한 사람으로 쓰여질 것이라는 사실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감격이 예배 속에서 묻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만 펑펑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좋은 성도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를 모르는 내 가족과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펑펑 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배의 감격이 없는 주일을 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바로 그렇게 일주일 동안 구원의 감격을 간직하고 살아왔던 내가 그 하나님을 대면하여 뵙는 날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주간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 구르고 저기 굴러서 때 묻고 더러운 오염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하면 주님은 그를 번쩍 들어다가 임마누엘 피의 호수에 깊이 적셔 그 피로 온몸을 다시 칠하여 눈과 같이 희게 해주십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진 사람은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끌어안은 핏자국이 온몸에 가득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관련해서 예배의 의미를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죽는 경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경험까지 함께하며, 예수가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나도 오늘 절망 같은 죽음을 이기고 시련 같은 고난을 이기며 예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 주일입니다. 그 태어나는 감격이 예배의 감격입니다. 그 예배의 감격 한복판에 찬송의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처음 경험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왜 못 박히셨을까?" "늘 울어도 눈물로는 다 갚을 수 없는 이 은혜를 나에게 왜 베푸셨을까?" "왜 날 사랑할까?" 그러니 구원의 은혜가 예배시간에 최고의 찬송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예수 이외에 다른 것을 붙들고, 십자가를 배신하고 세상의 영광을 붙잡으려고 했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우는 것이 예배의 감격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죽었으니 그와 함께 살리로다'라는 소망을 가진 찬송을 많이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C. 하나님의 은혜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초월적인 영혼의 은혜가 있고, 하나는 내재적으로 우리의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섭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대우를 받게 해 주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를 들었던 플라톤주의자의 회심 같은 것은 초월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초월적인 은혜는 언제나 내용이고, 그 초월적인 은혜는 언제나 외적인 섭리의 은혜로 나타납니다.
조용히 한 해를 돌아봅니다. 너무 불경기에 어렵게 어렵게 고생을 했는데, 돌아보면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시발복(今時發福)하게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이사 가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시고, 혹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해주셨습니다. 한번 직장을 잃으면 다시 구할 수 없다고 했는데 더 좋은 직장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결혼 상대를 허락해 주시고, 새로운 사업을 하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학을 하게 해주시고, 모두들 어려워서 학업을 그만두고 알바 현장으로 내몰리는데, 마지막까지 졸업을 하게 해 주시는 등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코로나의 위중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는 것입니다. 회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보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 막아 주시고,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나를 폭풍 속에서, 어둠 속에서 한 걸음씩 발자국을 떼어 놓으시는 그 감동이 내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연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였고,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쩌다가 운이 좋았는지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그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느끼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선물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 손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선물인데, 누군가에게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뜯어보니 60억 짜리 다이아몬드나, 아니면 집문서나, 아니면 벤츠(자동차) 교환권이 들어있는 건 아닙니다. 펴 보니까 그냥 내가 맘만 먹으면 가서 살 수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 하나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쿵'하고 감동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이 선물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발품을 팔고 그리고 같은 값에 더 좋은 걸 사기 위해서 여기저기 애쓰고, 그걸 사 가지고 또 백화점 지하에 내려가서 돈은 많이 주고 예쁘게 포장을 해서 그것을 예쁜 쇼핑백에 넣어 가지고 여기까지 구겨지지 않게 들고 와서 나에게 전해 주기까지 그 마음이 나를 심쿵하게 만드는 거지 그 가격이 나를 '쿵'하고 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이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말과 현재라는 말, present라는 말이 똑같습니다. 오늘 자체가 선물이고, 선물 그 자체가 바로 오늘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에잇, 그까짓 것 얼마짜리." 선물 받으면 요즘 사람들은 그걸 찍어서 가격부터 검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거는 마음을 받은 거지, 가격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것을 뭐 하러 검색을 합니까? 궁금하겠지만 뭐 하러 검색을 합니까? 그걸 받아서 가격을 모르고 가격을 무시하는 것 자체가 선물한 사람의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가격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간직하십시오. 어차피 남에게 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렇게 하십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외적인 작은 섭리의 일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진 선물을 준비하기까지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 사랑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그 물질 자체에 감격을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기억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결국은 섭리적인 은혜가 영적인 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사랑의 밀어가 오고 가는 사이에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이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의 세 번째 중요한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자기를 후대해주신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하게 살았어도 더할 수 없이 선하게 대우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격하고, 그 은혜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양)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자기를 다 묶어 한 송이의 꽃다발처럼 예배를 통해 아름다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 이게 예배에서의 찬양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 모두가 이제까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말씀과 함께 끊어 버리고 새로운 찬송의 삶을 살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시 51:1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예배의 위기는 신앙의 위기입니다. 결국 예배드린 것만큼 살 수 있고, 사는 것만큼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삶이 계속 실패하는 것은 예배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기 때문에 삶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기록한 시편입니다. 그는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장군이요, 정치가인 동시에 선지자였으며, 또한 문학가였고, 악기를 연주하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뚜렷한 두 개의 큰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 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 자체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동기가 문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구 조사를 하는 이유는 사실상 전쟁이 날 때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의 숫자를 헤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인구 조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런 병사들의 숫자나 창과 칼로 지켜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는 나라임을 다윗이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징계를 받고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이 지은 더 심각한 범죄가 있었습니다.
II.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은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의 마음은 말라붙어버렸고 마치 샘이 마른 우물처럼 아무것도 길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율동하던 그의 육체는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찬란하게 눈앞에 빛나는 모든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던 다윗의 마음에 울려 퍼진 아름다운 가락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지혜의 빛 대신 혼란의 어두움이 그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경처럼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고, 아무것도 찬송할 수 없는 입이 붙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이것은 다윗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과의 단절, 그 관계의 깨어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영혼의 깊은 어두운 밤을 지냈습니다. 잠시 맛보았던 쾌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혼의 가혹하리만큼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그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고, 그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지은 죄를 통해 하나님 성품의 더 깊은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의 결들을 읽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그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제사에 관한 것이었고, 또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다윗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의 기쁨을 모두 거두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어 세우실 때 부으셨던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얼마나 비참한 사람이 되는지는 전임자인 사울을 통해 그는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두려웠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죄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이 그의 마음을 찔렀고,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A. 다윗의 제사
그때 택한 것이 바로 다윗의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제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제사를 늘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기쁜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고, 그를 위해 제사를 드려 줄 제사장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칠 예물은 얼마든지 그의 창고에 넉넉하였습니다. 아마 다윗은 최고의 제물을 준비하고, 최고의 제사장에게 요청하여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도 모두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니, 자기가 지은 죄가 제사의 행위를 통해서 깨끗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수없이 제사를 드리고 정성껏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는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그 제사의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오는 응답은 매우 차가운 거절감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커다란 신학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제사가 예전의 제사 같이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드리는 제물이 달랐습니까? 드리는 제사장이 바뀌었습니까? 제사의 예법을 어겼습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 진중한 가운데 제사는 드려졌고, 최고의 예물은 선택되어져, 최고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제사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가 바뀌었습니다. 옛날의 다윗이 아닙니다. 순결하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던 제사의 감격이 있는 그 다윗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범죄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썩었고 곪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죄의 정욕을 품고 있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는 죄와 결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철저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는 거절되었고, 돌아온 그 제사에 대한 대가는 철저하고 차가운 하나님의 거절감뿐이었습니다.
오랜 실패 끝에 다윗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 제사가 아무 쓸모없는 것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6절에서 노래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51:16)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추측이 아닙니다. 단언합니다. "주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다윗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제사를, 모든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그 이후에 제사의 제도가 그쳤습니까? 아닙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이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 제사에 응답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난 후에 이 모든 것들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두 잊혀진 옛 일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던 사람이 죄를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의 율법을 따르던 사람이 정욕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정한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싫어하셨고, 다윗의 제사도 함께 싫어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거절하셨기에 제사도 함께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를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다윗의 이러한 선언은 놀라운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제사 제도가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제사 때문이 아니라, 제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의례적인 제사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고, 오히려 그의 영혼은 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의례적입니까? 형식적입니까? 그렇다면 그 속에서 여러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의례적인 제사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제물이 바쳐졌어도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제물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례적인 예배로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도움이 됩니까? 매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주일 예배를 순서에 따라 드리지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여러분이 진정한 영적인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했고, 오늘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은 번번이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거절당하는 차가운 거절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B. 말씀의 능력
그것은 바로 다윗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였고, 다윗은 이것이 오직 그녀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발설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아무에게도 말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비밀에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에게 다윗의 모든 범죄를 샅샅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나단 선지자는 다윗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양의 비유를 들면서 다윗의 탐욕과 정욕을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51편 표제어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바로 그때 다윗이 이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이 한마디는 다윗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든지 그것을 부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한 명쯤 죽이는 것은 왕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깊이 찌르고, 그의 설교가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버렸습니다. 엎드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보는 앞에서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지만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제사로 가려보려고 할 때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부터 죄의 지적을 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는 새로운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서 다윗의 부패한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거짓과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다윗의 모든 죄를 토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가 발각 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고 살아야 하는 어두운 날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죄를 알게 되더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자신의 죄가 알려지더라도 하나님 앞에 다시 회개하는 자신이 알려져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다윗을 바꿔 놓았습니다. 제사가 바꿔 놓은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선과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말씀의 빛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어디에서 옵니까? 예배의 감격은 아픔 없이 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는 예배의 감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기쁨 위에 기쁨을 더하는 것이 예배의 감격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기쁨을 내려놓고, 그것이 아픈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예배의 감격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체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감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감격, 이 세상의 기쁨, 육체의 즐거움은 모두 세상과 육체를 통하여 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감격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 앞에 깊이 깨어짐으로써 그는 이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적당히 해보려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철저히 근본까지 파헤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변화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기를 원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생명의 물줄기를 타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가득했던 정원과 같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았고, 언제나 마음은 꽃밭이었고, 그 꽃밭 위에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옛날 일로 끝났습니다. 이제 변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은 황폐한 들판이 되어버렸고, 모두 병들어 쓰러진 잡초들이 우거진 무서운 정원이 되었습니다. 어떤 생명의 기운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양심의 가책으로 느낀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 있었던 직후에 이미 그의 양심은 요동쳤을 것이고, 괴로움은 그를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괴롭힘이었고, 그것은 양심의 가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심령을 찔렀고, 그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지없이 깨뜨려졌습니다. 심장은 찢어졌고, 죄의 정욕의 붉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이 다윗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감추고, 가리고, 뒤집어쓴 채 산 것이 아니라, 이제껏 죄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실패의 삶을 종식하고자 하는 놀라운 결단과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한 일이었습니다.
예배의 감격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는 감격이 예배의 감격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자신을 새롭게 진리의 말씀에 비춰보는 놀라운 각성이 없다면 결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 앞에 새로워질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를 비유하자면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맨 처음 예배당에 와서 "묵도합시다."라는 선언을 시작으로 예배의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있습니다. 세상에 붙었던 마음을 찬송을 통해 세상에서 떼어놓고,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참된 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그런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헌금을 드리고, 말씀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래서 예배의 산꼭대기 정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 감격으로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의례적인 제사, 형식적인 제사를 통해 자기의 죄를 가리고, 양심의 가책을 모면해 보려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칼에 의해 자기가 철저하게 수술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수술했고 변화시켜서 새롭게 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릴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그 예물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C. 참회의 은혜
그것이 바로 참회의 은혜였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 사람이 구약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 중에는 다윗보다 망령된 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이율배반(二律背反),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회복시키셔서 이스라엘 역사에 위대한 한 전범(典範)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면 그에 대해서 역사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가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모든 선한 임금의 기준이 다윗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본받으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다윗의 길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죄로 소문난 사람, 아마 여러분 중에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저지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참회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영혼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죄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회개로 더 널리 소문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라 할 때 범죄하고 있는 다윗이 아니라, 회개하고 있는 다윗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결국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후로 자신의 자신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참회가 그에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더욱더 촉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죄를 지었던 다윗은 커다란 두 개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이었고, 또 하나는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전임자인 사울이 경험한 바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이 두려움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처절한 끝없는 참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였던지, 그는 밤마다 자신의 눈물로 요를 적시고, 자신의 눈물로 침상이 둥둥 떠다닌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자신의 몸은 뼈만 남아서 수척한 몸이 되었다고 고백을 할 정도로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왕국의 영광도, 왕의 부귀와 권세와 영광도, 모두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열렬히 원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실 다윗은 이해할 만한 딱한 성장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가 별로 나오질 않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왜 그런지 이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업신여기고, 지독하게 형들을 편애했습니다. 그리고 형들은 이 가엾은 다윗을 자신의 살붙이처럼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늘 그는 외톨이가 되어 소외된 채 살아야 했고, 그는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애로 가득 찬 외로운 삶을 살다가 한 여자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사랑했으나, 그녀는 다윗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결국 정신적인 연합을 이룰 수가 없었고, 결국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결혼한 후 받아보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텐데, 자기를 죽이려고 자객을 풀어 버린 사람은 바로 자신의 장인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생애는 일생이 배신과 미움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를 사랑한 대가로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영혼의 어둠 속으로 몰려 들어가게 되고, 수많은 죄의 칼날이 그의 마음과 심령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그런 고통의 시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으로는 동정할만한 성장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죄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고,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의 세계를 너무나 많이 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계시에 대한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그렇게 가혹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어둠의 터널을 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깨웠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다시 살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잘못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곤 철저하게 참회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비참한 결과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용서의 은혜를 어린아이처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철저한 참회와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충분히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후에야 하나님이 다시금 그와의 교통의 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어두운 눈이 떠지는 개안(開眼)의 경험을 했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보며 주님을 다시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몸은 다시 거룩하고 존귀하신, 인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찬송할 수 있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참회의 은혜가 그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 앞에 바칠 가장 훌륭한 제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 앞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오직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이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는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짐승들의 죽음으로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상하고"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니쉬바르(נִשְׁבָּ֥ר)라고 합니다. "깨졌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은 "짓이겨졌다", 이런 뜻입니다. 뼈와 고기를 함께 넣고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패서 고기와 뼈가 함께 으깨어져 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라고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없이 흐물흐물하게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자신의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그의 마음은 깨뜨려졌고, 짓이겨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일곱 마리의 황소보다 더 아름다운 제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믿음 생활하고, 예배 생활할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런 예물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는 항상 눈물이 있었고, 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흐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를 통하여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못한 채 살았던 날들은 주님 앞에 용서를 빌며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았을 때는 베풀어 주신 하나님 은혜의 감격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못 살았을 때는 그렇게 못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자신에 대한 미움의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지나가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용서의 감격, 은혜의 감격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림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고, 그 시간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이 노래 부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봄날이었고, 우리 마음의 장날이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었고, 천국으로부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한껏 부여받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회가 있는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참회에 하나님이 예배의 감격을 주셨던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상처 입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최고의 예물이 바로 상처받은 마음, 깨뜨려진 심령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그것이 다윗과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높은 담장을 단번에 무너뜨려, 그 무너진 담장 위에서 하나님과 다윗이 함께 끌어안고 감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다윗을 미워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를 미워했지만, 다윗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다윗이라고 새겨진 그 이름은 지워질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는 정욕에 눈이 멀어, 외로움에 눈이 멀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운명같이 새겨진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형상의 기억을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나서도 죄가 주는 즐거움과 비교될 수도 없는 신령한 기쁨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원망할 대상은 자신 하나였습니다. 자신이 그 죄를 선택하고, 자신이 그 죄를 지어, 스스로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구렁텅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짓이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말씀으로 으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깨뜨려질 뿐만 아니라 모두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뜨려지고 보니 하나님께 드릴 선물은 죄를 사랑하던 자신의 심장이 깨뜨려지고, 상하고, 짓이겨지고, 모두 으깨어진 그 마음 밖에는 하나님 앞에 드릴 최고의 예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죄로 소문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소문난 사람으로 알려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존귀한 하나님 자녀의 이름을 그에게 다시 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한 모본(模本)으로서 오늘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다윗은 다시 한 번 이 죄를 통해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붙들기로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찾으십니다. 마음에 파산선고를 받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 속에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듣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놀라운 능력을 주셔서 자신도 깨뜨릴 수 없었던 마음을 깨뜨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막혀서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던 현실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도 바로 상한 심령과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찾으십니다. 지금도 이렇게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주를 찾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의 기도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들이 예배할 때 그에게 나타납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삶은 새로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고, 새로운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예배를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실패와 시련으로 가득 찼던 과거는 지난해로 넘겨 버리고, 이제 새해가 밝았으니 새 마음으로, 새 예배자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