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김명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총론적인 고백이 1절에서 있고,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신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으셨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5절의 풍경은 명백하게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잔치 집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주인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많은 음식으로 사람들을 대접하고, 그 집에서 가장 오래도록 간직했던 최고의 품질의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따라주면서 넘치는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흥겨워하고 있는 잔치집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아침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육체와 영혼을 구성요소로 인간 존재가 되게 하셨는데 그래서 육체는 땅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육체의 삶을 영위해 가는데 영혼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영혼은 무엇인가 영혼의 양식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은 자신의 자비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한 세계로부터 온 영혼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그 무엇이 가슴속에 가득 채워지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영국의 한 철학자가 죽었습니다. 앤서니 플루(Anthony Flew)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영국의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사람이 3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해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전 세계 무신론의 대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일평생 입증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무신론의 대부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기 4년 전에 『There is God』이라는 책을 써서 전 세계 철학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을 주장해서 전 세계 무신론 철학을 이끌던 사람이 어느 날 책을 냈는데 ‘신이 있다.’는 책을 낸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신이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연구해 본 것과 전혀 다른 연구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는 비평과 비판을 통해서 예전에 연구한 방법 그대로 연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계에서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신론의 대부가 드디어 회개하고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처럼 회심한 것이 아닌가 했는데 그렇게 회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가 책을 쓰고 나서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 이제 우리는 밥 먹을 때 기도해야하는 거야?”, “기독교인이 나의 바뀐 생각을 보고 흥분하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란다.” 30여권이 넘는 세계적인 저술을 써서 무신론을 선도하던 세계적인 학자가 왜 죽기 몇 년 전에 하나님이 있다고 했을까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결국은 자신의 영원한 고향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학자는 그것을 몇 대의 강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영혼이 영원한 세계에서 와서 물질세계로 넘어오는데 몇 대의 강을 지납니다. 그것을 망각의 강물이라고 부릅니다. 망각의 강물을 너무 많이 마신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습니다. 현실 사회에 몰두하면서 육체적인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넉넉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강물을 적게 마신 사람의 영혼은 영혼의 고향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는 잘 모르는데 소위 ‘메멘토 모리’라고 하는 죽음에 대한 기억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런 ‘메멘토 모리’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영혼이 눈을 뜹니다. 영혼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이 세상의 어떤 쾌락을 누려도 영혼의 만족이 없고,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몸부림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어디나 할 것 없이 쾌락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쾌락주의는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 가운데 19세기의 인물인데 C.K. 채스터턴이라고 사상가가 있습니다. 다방면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제가 그 사람의 전집을 갖고 있는데 30권정도의 방대한 전집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남자가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 성관계를 갖기 위해서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 왜 그가 창녀촌을 두드리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채스터턴의 날카로운 쾌락의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의 핵심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갈망들이 질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쾌락주의적인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극단의 쾌락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볼 때 쓰레기 같이 더러운 인간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얼마나 질병상태에 있는가를 보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죄를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끝납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드는 느낌은 탐색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의 이야기를 과연 들어도 될까?’ 5일쯤 할 것 같으면 탐색해도 괜찮지만 오늘 끝납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를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한 낮에 반포대교위에 차들이 모두 멈췄습니다. 버스에서, 택시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다리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20년 전이었는데 만 원짜리가 비처럼 떨어집니다. 사람들이 내려서 만 원짜리를 주우려고 하는데 강물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나하면,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가다가 창문을 열고 백만 원짜리 서너 다발을 던졌습니다. 강가의 다리 위에서 빨리 달리는 차에서 뿌리니까 만 원짜리가 공중으로 확 흩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만 원짜리가 유리 위로 떨어지는데 그래도 나는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그래도 나는 몇 장이라도 주워서 점심이라도 사먹을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설교를 하고 나서 우리 교인이 실제로 같은 일을 겪은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를 오고 있는데 하늘에서 만 원 짜리가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사를 해 주고 돈을 조금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술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서 “너나 가져라.”하면서 공중으로 뿌린 것입니다. 머리에 만 원 짜리가 떨어졌습니다. 설교를 듣지 않았으면 주일날 밥이라도 사먹어야지 하면서 주웠을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따라서 기품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 다리위에 뛰어 가서 엎드려서 돈을 줍는 그것을 보고 싶어서 던진 것입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심심하면 그렇게라도 하겠습니까? 그것이 영혼의 빈 잔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 그리스의 선박 왕 재클린 오나시스를 기억합니까? 그 사람의 손자 이야기가 몇 해 전 신문에 실렸습니다. 손자니까 그 할아버지, 아버지의 유산이 그 당시의 돈으로 9천억〜1조원 정도가 자기의 유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는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이 돈을 메린다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못했지만 이 사람이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수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불행한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산 것입니다. 그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기 전에 연인이었던 사람이 마리아 칼라스입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그 일대기를 보면 여러분이 생각하면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파리에서 56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허름한 술집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그 얘기까지 할 수는 없지만 마리아 칼라스를 버리고 재클린 오나시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돈이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지 보면서 결국은 그 돈이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버리는데, 여러분은 그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아이는 그만큼 성숙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육체의 요구와 영혼의 요구가 있는데,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영혼의 요구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육체의 요구에 대해서는 예민해 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전 세계마다 로또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에는 슈퍼볼이라는 로또가 있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 당첨자가 계속 나오지 않아서 당첨 금액이 2천 6백억까지 쌓인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전역을 뒤흔든 사건이 생겼는데 어떤 사람이 2천 6백억에 당첨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열 명이 얼마에 매달 백 달러씩 내서 그 복권을 오랫동안 샀고, 얼마에 당첨되든지 똑같이 나누어 가지기로 하고 오랫동안 복권을 계속 샀고, 그 그룹에서 2천 6백억이 당첨 된 것입니다. 그리고 2백 60억씩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5년 뒤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TV프로그램에서 추적을 했는데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열 사람이 모두 2백 60억의 돈을 받았는데, 미국에서도 그 돈은 큰돈입니다. 열 명의 남자들이 똑같은 수순을 밟습니다. 제일 먼저 직장을 그만 둔 것입니다.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결정을 했는데 모두 같은 결정을 합니다. 두 번째는 제일 좋은 차를 삽니다. 세 번째는 이혼을 합니다. 집을 먼저 사고 이혼을 하면 집을 빼앗기니까 이혼을 먼저 합니다. 네 번째는 젊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미국에서 2백 육십억이 있으면 젊은 여자와 결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는 그 여자에게 이혼을 당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알코올 중독에 빠집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굴러 떨어져서 하층 인간이 된 것입니다. 똑같은 절차를 밟습니다. 작년에 영국에 갔을 때 똑같은 프로그램을 하는데 똑같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로또에서 대박난 사람을 추적을 했는데 모두 불행해 졌습니다. 한 사람은 복권에서 대박이 난 것이 아니라 똥지게를 지고 호박밭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조상대대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신도시 개발을 해서 180억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조상대대로 여기에서 살았는데 자기는 돈도 싫은데 준다고 하니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자기는 이 돈 주고 땅을 사서 조금 더 멀리 나가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는데 자녀들이 허락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 어차피 죽으면 우리에게 물려줄 것인데, 왜 땅을 삽니까? 우리의 권리도 있으니까 아버지 죽었다고 치고 물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맞아 죽고, 조금 물려주면 볶여 죽고, 다 물려주면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려주었더니 형이 더 많이 가졌다, 동생이 더 많이 가졌다고 싸우면서 법정까지 갔습니다. 형제간의 의가 다 끊어 졌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보고 너무 비관해서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으니까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자식들은 그 돈을 나누어 가져셔 아까 이야기 한 순서대로 똑같이 차사고, 이혼하고 집사고, 이혼하고 파멸의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성찰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어느 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색을 통해 신앙의 힘으로 완결이 됩니다.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얽매이지 않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서울에 가면 수유동이라고 하는 변두리 동네가 있습니다. 원래는 경기도였는데 서울이 되었고, 그 후에 서울의 경계가 넓어지면서 지금은 서울의 안쪽이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그 동네의 의사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택시가 서더니 건강한 남자 양복 입은 신사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오면서 방금 쓰러졌는데 이 사람을 봐달라고 했습니다. 봤더니 이미 죽었습니다. 사인은 쇼크사입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죽었으니까 병원에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덮어놨는데 한 시간 쯤 지났는데 가족들이 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의사 생활을 오래했는데, 사람은 태어나면 손을 꽉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죽었는데 의사로서 생전 볼 수 없는 폼으로 죽은 것입니다. 한쪽 손은 쥐고 한 쪽 손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이 사람은 너무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한쪽 손은 꼭 쥐고 한쪽 손은 펴고 죽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가족들이 물러간 다음에 주먹 속에 무엇이 있을지 너무 궁금해서 가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 봤더니 화투 두 장이 떨어진 것입니다. 삼팔광땡 입니다. 사연은 이 사람이 상가 집에 문상을 갔는데 밤새도록 화투를 친 것입니다. 돈을 잃었는데 새벽에 끝 발이 붙은 것입니다. 돈을 잔뜩 쌓이고 패가 들어왔는데 삼팔광땡 입니다. 삼팔광땡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배팅한 돈의 세배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는 뭐 가졌냐? 펴 봐라?”이러니까 배팅을 잔뜩 하고 “나 삼팔광땡이야”하고 쇼크를 먹고 죽은 것입니다. 후손들이 우리 할아버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 아빠 어디에서 죽었냐는 물어봅니다. 어떻게 태어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화투 두 장 때문에 충격을 먹고 쇼크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화투 두 장 때문에 쇼크사 해서 죽었지만 여러분은 그보다 큰 땅문서, 집문서, 대학의 학위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의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자기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는데도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는데도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잃어버리고 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환희, 희열, 벅 차는 기쁨, 이런 단어들을 우리들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몇 몇을 제외하고는 쓰여 있습니다. ‘목사님 사는 것이 정말 피곤해요 우울하고 기쁨이 없어요.’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도 우습지 않는 것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잊고 삽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근원적으로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할 수 있으면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했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것 때문에 만족을 누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영화 한 편을 감명 깊게 봤는데『101세에 창문너머 도망친 노인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101세에 정신병원을 도망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코미디는 아니고 굉장히 부자였던 사람인데 그 작품을 써서 한방에 스타작가가 된 사람입니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는데, 코미디 같은 상황이 아주 많이 연출이 되는데 마지막 결론은 카르페디엠, 오늘을 붙들어라. 너의 인생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매일매일 너에게 일어난 일 속에서 기쁨을 찾고 거기에서 행복해져야 행복한 것이지 그것은 상상 속에 찾고 멀리 있는, 그리고 과거에 있는 것이 되어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너무 측은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카르페디엠이라는 메시지를 받는 그 모든 인간들이 너무 측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기쁨이 없으면 저렇게 해서라도 매 순간을 ‘기쁘다’라는 자기 암시 속에서 살아갈까? 그것이 결국은 인간의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은 순식간에 지납니다. 생각이 없이 인생을 살면 그 사실은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강물에 떠밀려가는 낙엽처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서 가는 것입니다.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행복이 되겠습니까? 어쨌든 이 시인이 느낀 것은 그렇게 자기의 영혼에 가득 차는 환희와 벅찬 기쁨, 그리고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혼의 자유와 행복,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그 광야 속에서 경험하며 산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기쁨의 맛을 본 사건입니다.
그러면 신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이 가득 차는 희열과 벅찬 기쁨을 느꼈다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가슴이 벅 차는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해석해 봐야 ‘정말, 그렇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첫째,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개정개역판이 나오면서 오해가 풀렸는데 많은 사람이 상을 영어로 Prize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학교 졸업할 때, 1등, 2등의 상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상은 히브리말로 ‘쉐칸’이라고 하는 밥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스듬히 소파 같은 데 기대어서 야트막한 큰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대화를 하며 먹었습니다. 그러한 밥을 차리는 밥상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시인이 “밥상을 차려주셨는데 그래서 내 영혼에는 빈 잔이 가득차서 넘치는 기쁨과 환희, 희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안 되고 성경전체에 흐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관습, 그것이 주는 성경적인 의미, 문화적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이 구절이 ‘아. 과연 그랬겠구나.’라는 설득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서양이인 줄 아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많은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에서 동양 문화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구라파에서 꽃을 피웠지만 성경적인 이해를 동양 사람의 심성으로 볼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식사입니다. 이 식사는 우리나라 관습과 유사한데 이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식사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형제가 되었다는 가족적인 의미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반상이 있는 시대에 양반이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민들과 잠을 잘 수는 있으나 밥은 같이 먹지 않습니다. 식탁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밥을 먹는 사람끼리 형제 사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반은 상민과 절대로 형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렇게 비난 받으셨던 이유 중의 하나가 “너희 선생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마시느냐” 그것이 예수님이 비난 받으신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쓸데가 있으니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고, 예수님이 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신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죄인들을 당신의 형제라고 생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인들을 먼저 형제라고 생각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그 교제를 통하여 그들을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이라는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중국에 많이 가보셨습니까? 저는 중국에 가면 제일 발달한 것이 음식 문화입니다. 프랑스 음식도 맛있지만, 중국음식도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습니다. 거기도 동양문화권이라서 예전에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선교를 가는데, 지금은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미리 언어도 배우고, 여행도 자유롭게 가지만 그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야하고,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소명을 느껴서 선교사로 가기로 다짐을 하고 중국 내륙에 들어가서 중국 사람들과 살면서 언어를 익히고, 글자를 배우고, 그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을 만들어주고 이러는 번역 선교 사업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간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지 않습니까? 인간은 언어가 아무리 통하지 않아도 세 시간만 한 공간에 있으면 의사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도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이렇게 먼 미국에서 왔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를 했습니다. 이 파란 눈의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수염이 긴 촌장들이 모였습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이 외국인들을 자기네 한 가족으로 맞아 주기로 했습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가족으로 받아 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디론가 갔습니다. 마침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 물속에 있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 땅에 있는 것 중에는 책상 다리만 빼고 다 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먹습니다. 한 번은 음식점에 갔더니 정말 귀한 것이라고 권하는데 전갈 튀긴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수프를 줘서 먹었는데 다 먹고 나서 냄비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뚜껑을 열어보니까 거북이와 바퀴벌레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기이한 사람들이니까, 요리가 나왔는데 서구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야만적인 치킨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못 먹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고함소리가 나더니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 위쪽에 가면 결혼식을 하면 뱀국을 끓입니다. 그것이 결혼식 음식입니다. 뱀도 조그마한 뱀이 아니라 팔뚝처럼 굵은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가마솥에 푹 끓여서 그것을 먹어야 혼사를 치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음식을 어떻게 먹겠습니까? 그래서 “나 못 먹습니다.” 하니까 죽여 버린 것입니다. 같이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식탁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같이 살고는 싶은데 너희가 주는 음식은 먹지 못하겠다고 하면 스파이입니다. 우리는 스파이가 필요 없다고 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도 똑같은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비난을 받은 커다란 잘못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는데 그것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사건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문밖에 서서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나옵니다. 또 먹는 것의 전통이 잘 남아 있는 것이 성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 생명적인 교통을 의미 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행복해 합니다. 그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식사시간입니다. 문학입니다. 이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하나님이 상을 잔뜩 차려서 구름위에서 밥상을 차리셔서 땅에 내려왔다는 상상을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생명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1100명이 모일 때만해도 등록을 하면 일일이 다 찾아가서 심방을 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포기를 해버렸습니다. 어느 교인의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은 50세 정도 되는 자매였습니다. 저는 자매들이 집에서 밥을 하는 것이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매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느 음식이 제일 맛이 있니?”, “목사님, 제가 하지 않은 모든 밥이 맛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 새로운 아파트가 등장을 하고 있는데 구내식당이 있는 아파트입니다. 자매들한테 정말 인기가 좋습니다. 회사처럼 아파트의 한 층을 식당처럼 꾸며서 일식, 한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밥하기 싫으면 자면서 “저기 찬장에 티켓 있으니까 꺼내서 밥 먹어.” 프랑스에 그런 아파트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기분 내키면 밥해주고, 기분 내키지 않으면 식권 사다가 테이블에 놓고 “가서 먹고 출근 하세요” 그러면 누가 감히 그 여왕님을 건들겠습니까? 그렇게 밥을 하는 것이 저는 너무 싫습니다. 왜냐하면 자매들이 너무 고생을 하니까.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심방이 중요한 것이지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고 들어가서 심방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교역자가 “목사님, 이 자매가 꼭 밥을 하겠다고 합니다.”해서 “하지 말라고 해라. 밥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하지 말라고 해라. 그냥 갈비탕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도 밥을 하겠다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겠다고 하니 내버려 둬라.”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대접을 처음 받아봤습니다. 물론 좋은 식당에서 대접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저는 너무 화려하게 식사의 비용을 많이 지불하는 것을 저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고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점심을 가져오겠습니다.” 음식을 가져오는데 세 사람이 상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커다란 교자상에 음식을 차려서 가져오는 것인데, 요리사를 부른 것이 아닌데, 자기와 두 사람이 도와줘서 했다고 합니다. 한 달 전부터 계획을 하기 시작했고, 열흘 전부터 김치를 담기 시작했고, 일주일 전부터 본격적으로 하고 삼 일 전에 반찬을 해서 상을 차린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 상했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데 그 한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서 이 많은 재료,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런 것 하는 시간에 성경을 한 장 더 보고 기도를 더 하지” “목사님 저 성경도 읽고, 기도도 했거든요.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드세요.” 그 위에 사다가 놓은 반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반찬이 많은지 젓가락을 뻗어도 사정권 안에 들지 않습니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원하는 반찬을 집어서 주었습니다. 그 손님으로 찾아갔을 때 그 사람 앞에 놓인 밥상은 그 손님이 그 가정에서 갖는 중요도와 비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집을 갔는데 엄마아빠가 그렇게 반대를 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인간을 물어 와서 시집을 가려고 하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좋다고 해서 결혼에 골인을 했습니다. 그러고 신혼여행을 갔다가 왔습니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다. 우리 아침 먹자”, “아니야, 잠시 뒤에 우리 집에 갈 건데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자” 하고 친정에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우리 어젯밤에 신혼여행에서 너무 늦게 와서 전화를 못했어.” “그러니?”, “엄마, 우리 인사하러 갈 거야. 엄마, 우리 점심시간에 갈 거야. 점심 차려 줄 거지?”, “그래” 그래서 선물을 사들고 남편하고 같이 처음 친정집에 간 것입니다. 온 가족이 지지고 볶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한 것입니다. 아빠는 어디에 가셨는지 없고, 동생들도 없었습니다. 보니까 엄마 혼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엄마, 우리 인사 온다고 했는데 아빠는?”, “회사 갔어.”,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갔어.” 선물을 주니까 “뭐 이런 것을 가져 왔니?”,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줄 거지?”, “그럼 줘야지” 그러더니 3분 만에 밥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귀퉁이가 떨어진 조그만 밥상에 먹다 만 밥 한 그릇을 올려놓고 거기에 찬물을 잔뜩 붓고 거기에 숟가락을 꽂고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을 올려놓고 “들게” 한다면 그 밥상은 ‘나는 정말 네가 싫어 우리 집에 왜 왔니?’ 그 뜻을 그 밥상이 말해 줍니다.
20년 전에 시편 23편을 읽다가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차려 주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히브리 동사가 ‘아라크’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구약 성경에서 많이 쓰인 곳이 전쟁할 때 많이 쓰인 동사입니다. 수많은 군사들이 옆줄과 앞줄을 맞추어서 정돈한 것을 ‘아라크’라고 했습니다. ‘아라크’라는 동사는 여러 개의 물건이나 어떤 일들을 질서 있게 배치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단촐 하게 차린 간단한 밥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찬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어디가 가장 식문화가 발달했습니까? 리옹? 리옹에서 식당을 한 번 가봤는데 그다지 맛이 없었는데 엄청 비쌌습니다. 친절하기는 했습니다. 이태리에 가서 이태리 사람들에게 프랑스이야기를 했더니 프랑스 음식을 혹평을 했습니다. 왜 혹평을 하냐고 했더니 프랑스 음식이 후지다는 것을 증거가 있는데 소스가 발달해서 그렇답니다. 원재료가 얼마나 후지면 거기에 소스를 뿌려 먹겠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전라도 쪽이 음식 문화가 정말 발달했습니다. 비빔밥을 시켰는데 반찬이 19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하는 말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가서 집회를 인도 했는데 가까이에서 먹었으면 좋겠는데 40~5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서 음식점에 갔습니다. 그렇게 비싼 집은 아니고 15000원 정도 되는 집이었습니다. 무슨 음식이 어디까지 나온다고 고지가 되어야 속도조절을 하면서 먹게 되는데 배고파서 그냥 먹었는데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보니까 절반 정도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팔짱을 끼고 다른 사람들 먹는 것을 구경했는데 그릇 수를 헤아렸습니다. 8명이 갔는데 그릇 수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그러니 그 음식이 얼마나 발달했겠습니까?
이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반찬은 그런 정담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 시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왕이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 정말 곤궁한 세월을 지냈습니다.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에 손을 대고 먹을 정도로 굶주린 세월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하나의 비유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정말 갈급해서 결핍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후대해 주신 사건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의 영혼의 굶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해결해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영혼의 밥상입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지났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시인을 정말 놀랍게 선대해 주셔서 누구에게도 베풀어 주시지 않은 영혼의 밥상을 베풀어 차려 주셨고, 거기에서 그 말씀의 식탁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해 주셨는지를 체험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감격을 한 것입니다. 그 밥상을 누구 앞에서 차려 주셨냐 하면 내 원수의 면전에서 밥상을 차려 주셨다. 원수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어에는 ‘쪼레라이’라고 하는 복수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차려주시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 시인 다윗 사이에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인생의 곤궁한 시기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지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말 메마를 때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중만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일까를 보여줍니다. 인생에 신앙의 진정한 행복은 영혼과 육체 모두를 아우르는 통전적인 행복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지성의 행복입니다. 그 힘으로 고난을 이기고 역경을 이기면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미학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계곡을 따라서 물이 흐르는데 물이 내려오면서 수없이 돌멩이에 부딪힙니다. 그러면서 계곡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물소리가 들리는데 저 아래 물들이 모여서 시퍼런 물이 돌멩이에 수없이 부딪혀서 멍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물빛도 그렇게 부딪쳐서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든 것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얼마나 시시하고 허무하겠습니까? 자기가 정말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도 생기고, 회개하고 반성할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젊은 나이에서부터 그런 성찰을 가지고, 인생을 화려한 욕망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자기 자신에게 복수해 버리고,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가 뭐가 잘 되지 않아도 웃어넘길 수 있고, ‘내 인생의 또 하나의 돌멩이구나’ 그러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 그때에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포용력도 생기고,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렇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것이 바로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어서, 높은 지위에 올라서 서, 그렇게 해서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주님의 기쁨이 내 마음 속에 가득차면서, 그러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인생을 지나가는 삶, 그것이 신앙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는 이런 시간이 있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에서 충만하게 누리면서 그렇게 행복한 시간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 다음에 시인은 무엇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기름 부으신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신전 국가가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를 합니다. 분노하셔서 왕을 주시고 진노하시고 왕을 줬습니다. 왕을 가진 전제국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원해서 하나님이 왕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와 다른 방법으로 통치를 하시는데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통치하는 세 개의 신적인 기관을 주십니다. 그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입니다. 이 세 기관은 솥발처럼 이스라엘 나라를 떠받치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답게 되도록 이바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의 임무는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질서를 나라 속에 구현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왕의 임무였고,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함으로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었다면, 제사장은 반대로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로 나아가 불결한 백성들이 그 제사장의 도움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총의 보좌로 나아가게끔 인도하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다가갔고,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직분,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은 너무나 중요하고 특별한 직무였기 때문에 특별한 하나님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들에게 기름을 붙게 하셨습니다. 하님이 올리브유를 붙는데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고 예식 속에 하나의 실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직무를 위해 기름을 부을 때 하나님이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와 용기, 능력을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부어주실 때 성령을 통해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의 성령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그 성령님이 계셔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보증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입니다. 그의 직무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그 성령의 역할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직무이고,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한 번 우리 마음속에 오신 성령님은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구약에는 좀 다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성령님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오신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무언가 그를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매우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 일에 적합하도록 그 사람을 무장시키기 위해 성령이 오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신 후에는 그 성령이 다시 떠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기름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 생 동안 세 번의 기름부음을 경험했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사무엘로부터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에 기름 부음을 받으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이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 앞에 구별되고, 성결하고, 하나님 을 향한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변해서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입니다. 이 시인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나의 영혼의 빈 잔이 넘치나이다.” 이 고백은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심으로 나의 심령은 터질 듯 환희에 가득 찬 심령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런 것들을 충분히 경험할 수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신비들을 체험하게 하시고, 복음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실재적으로 알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시인이 3천 년 전의 시대를 살면서도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 그분의 성품의 어떠하심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구도 그런 환희와 희열에 가득 찬 기쁨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섭리적인 복과 영적인 복입니다. 섭리적인 복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주시는 복입니다. 우연히 주식을 샀는데 대박이 났다더라. 딸이 하나있는데 얼굴도 별로이고 몸매도 받쳐주지 않는데 그림 같은 형제와 사랑에 빠졌는데 신앙도 좋고, 가문도 좋고, 돈도 많다더라. 이런 것들은 섭리적인 축복입니다.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져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런 하나님의 큰 영적인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물들을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 속에서 영혼이 인침을 받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고, 고난 역경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아이들이라도 주님을 깊이 체험했으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젊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니. 저는 어려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인생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면서부터 수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아픔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교회를 떠났을 때였고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나에게 구하는 시기였습니다. 무엇을 하나 깨닫게 되었냐 하면 이 고민이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나 혼자 이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외로웠는데, 문학작품을 읽어 보면 나와 비슷 고민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문학작품에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문제를 제기할 뿐이지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에 사랑스럽게 사상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사르트르, 니체, 뜻도 잘 모르면서 읽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정말 가슴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나면 가장 매력적인 것이 실존주의입니다. 정말 매력적인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극도의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그 때 교만하기도 했습니다. 잘난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하고 이야기해도 너무 시시한 것입니다. 어느 사람과 이야기해도 너무 시시하고 머릿속에 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처럼 인생에 대해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감각이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문학작품을 보면 저자의 수준이 금방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든 사람이다, 말장난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과는 놀기도 싫었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책속에 구원이 있겠습니까? 한 일 년 가까이 공부를 했는데, 새벽시간이 되면 저 멀리서 종이 뎅그렁 뎅그렁 울립니다. 안개 속에 교회가 있어서 새벽마다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보내다가 결국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스물한 살까지 혼자 방황을 하고 마지막에 신앙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다가 계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작품 두 개를 읽었는데 생전 처음으로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 평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때 두 권의 책이었는데『부활』과 『인생론』이었습니다. 대체 이 평안의 무엇인가? 그러면서 톨스토이를 읽기 시작했고, 그때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었는데 ‘근원이 신앙에 있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에 잇는 작가 몇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갈까?’하며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언덕위에 조그만 교회가 보였습니다. 저 교회에 내 영혼을 실어야겠다고 하고 그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가니까 이곳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작은 방에 시멘트 바닥에 장판을 깔고,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놓고, 삼단 난로가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풍금 압니까? 발로 밟아서 삐그덕 거리면서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삐그덕 삐그덕 하면서 풍금을 치는데
(찬양)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 무슨 하나님을 느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책을 읽으면서 교만하다가 까불던 것도 다 꺾이고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분의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울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많이 있는데 한 가지만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이동하다가 연세가 많이 드셔서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분이 제가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끔한 청년이 매주 예배를 드리러 오니 얼마나 대견스러웠겠습니까? 정말 받기 싫었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니까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고민이 생겼습니다. “내가 교회를 나오는 것 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는데 내가 세례를 받으면 주님과 결혼식을 하고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께 표독스럽고 못되게 사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대들며 살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까?” 매일 밤마다 기도하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집에서 25분 정도 걸어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녁마다 “이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과 결혼을 해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결국 세례 받는 날이 오고 말았습니다. 문답을 치르고, 목사님이 오셔서 물을 떠서 머리에 뿌리시면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서 아래까지 내려오고 나니까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것 같은 모든 무게가 사라진 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구름에 뜬 것 같이 신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얽매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모두 사라지고 전체가 새로운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방황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탕자와 같은 내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도 아니요. 내가 발견했기 때문도 아니요.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마지막 피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 세상에 죄인이 나 한사람밖에 없어도 아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을 것이라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참 있다가 눈을 떠보니까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11월 둘째 주나 셋째 주쯤 되었습니다. 굉장히 추웠습니다.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끼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겨울 날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나의 젊은 날의 꿈이 다 사라지고, 다 필요 없고 주님께 사랑 받는 삶이 라면 나의 삶의 양태가 무엇이든지, 세상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순결한 존재가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나를 바라보실 때 그런 간절한, 그래서 거룩해지고 싶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번에는 나 때문에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꽉 찼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섞인 물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 물도 맛있다고 하지만 진짜 물다운 물을 마셔본 사람은 지금 그런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온 세계 에비앙이 유명한데 비쌉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는 어떤 에비앙을 사먹으면 제주도에서 물을 담은 것이 있습니다. 에비앙인데 취수지는 제주도라고 쓰여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에비앙 생수가 맛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북한을 세 번 갔다가 왔습니다. 한 번은 관광으로, 두 번은 출장으로 갔다 왔습니다. 교인이 북한 금강산 영행을 갔다 오면서 목사님 선물을 사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물 받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 두고 가지.” 했는데 물 두 통을 사온 것입니다.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물이 없어서 뜯어서 먹었습니다.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물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에비앙하고 그 물을 먹어보면 에비앙에 대해서 에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그 물을 드셔보냐고 물어서 극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집에 있는 물을 다 가져왔습니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물이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런 물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한 번 먹고 나니까 나머지 모든 물들이 너무 시시해졌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완전한 그 무엇을 하나 맛보고 나면 나머지는 다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영혼의 만족, 성령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만족을 충만히 누리면 모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해갈할 수 없는 물을 찾고,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것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인양 찾으면서 인생을 허비하면서 사는가,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는데 상처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이 상처를 받으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아프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니까 어떻게 이러한 상처를 극복해서 상처가 나에게 상처로 남지 않고 영광이 되게 할 수 있는가? 이 상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있는가?
제가 목회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가장 혐오하는 직업이 교인들 코 묻은 돈 먹고 사는 목사이었습니다. 도와주어야지 그 헌금주머니 돌려서 걷은 돈을 먹고 사는가, 그러면서 내가 목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되면서 감사했던 것은 그렇게 허무하게 방황하고 살았던 젊은 날들, 그 옛날에 읽었던 그 허무한 책들이 오늘날 나에게 도움을 주는데 영혼의 양식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젊은 시절에 너무 고민했으니까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살 것인지 이런 고뇌는 종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종종 문학에서 비장미가 있지만 이것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이니까 비장하게 보니까 비장미라고 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불행이 일어났을 때 이 불행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소통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가? 참된 우리의 영혼의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가? 설탕물과 같은 이 세상에서 그 진정한 만족은 진정한 만족 속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충만한 삶,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