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 속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녹취자: 이병두
오늘은 예배 때마다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겠습니다만 오늘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시면서 오해하기 쉽고, 혼돈하기 가장 쉬운 문제를 말씀 드려서 좀 명쾌하게 하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의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광경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예수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죽었는데 시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부활 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에게 하자 예수님은 왜 그렇게 믿지를 못하냐고 책망을 하시면서 구약의 예언과 자신에 대해서 성경에 계시된 예언들을 죽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할 때 그들의 눈을 밝히 떠서 보게 하시니까 예수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일 후에 자기네들 끼리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풀어주시고, 성경을 해설해 주신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그러니까 과연 그 분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참 몰랐다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바는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감화를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아수라장처럼 박수를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광경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지금은 옛날의 그런 식의 부흥회가 이제는 유행하지를 않습니다. 옛날에만 해도 우리들이 중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큰 현수막에다가 ‘아무개 목사 신년 부흥회’ 그러면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동네에서 부흥회를 한다 그러면 수요예배 때 그 교회로 다들 몰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서 박수를 치고, 은혜를 받고 통성 기도를 하고 울고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중에는 정말 제대로 은혜를 받아서 견고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법석스러운 집회에 비해서는 그 다음에 살아가는 신앙과 그 다음에 살아가는 삶들이 전혀 그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극히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마음속에 어떤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느냐 하면 “이야! 이것은 뭐 예수를 믿어도 감정적으로 믿는 것은 이게 말짱 헛것이구나!” 그렇게 통성 기도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은혜를 받았다 그러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기리기리 뛰는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오히려 ‘성령 충만 대집회’ 그런 것을 하면 노인네들이나 많이 모이지 이 젊은 사람들은 모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회를 가도 분명히 부흥회인데 오히려 세미나 무슨 강좌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만 사람들이 오는 그러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20년이나 30년 전의 교회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더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이 아니듯이, 뜨거운 모든 것이 신령한 은혜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다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를 체험하고 눈물을 쏟고 이러는 것은 다 천한 일이고, 감정에 치우친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으로 건너 뛰어가게 만듭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심을 잡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자기는 중심을 잡았다고 치지만 항상 이쪽에 크게 데인 사람들은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에 덴 사람들은 이쪽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우리들은 극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고 하는 말입니다. 확실히 20년이나 30년 전에는 성령이 역사하신 집회도 많았지만, 불건전한 집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월이 점점 흘러가다가 지금은 아예 부흥강사가 나와서 성경본문도 읽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간증하면서 원맨쇼를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움직여서 눈물을 짜내는 그러한 것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선포되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눈물을 쏟고 감동을 받았지만, 진리를 향하여서 깨닫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움직여서 깨닫는 일들이 오히려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영혼이 새로워지는 이런 일들을 해주는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눈물을 쏟고, 자기의 영혼 속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무슨 커다란 은혜를 체험한 것과 같은 착각들을 사람들 앞에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신앙에 있어서 이 감정적인 요소는 아주 천박한 것이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경계해야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도가 지나치거나 혹은 그것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게 되니까 이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데로 성령을 소멸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지금 정상적으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흐느껴 울고 기도를 하는데, 사람이 와서 그 사람들을 말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도를 계속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난 다음에 다시 기도를 해 보려고 하는데 이전에 했던 그 기도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올 때도 있지만 안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쪽으로 갔다가 그 다음에 여기선 무엇인가 염증을 느끼면 저쪽으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역사를 봐도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이쪽으로...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비극들이 우리나라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늘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에 있어서 감정적인 것은 천한 것이다.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기도할 때에 마음이 끊어 올라서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든지, 기도할 때 운다든지, 아니면 기도할 때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서 사람이 덜덜 떤다든지, 기도를 하면서 은사를 받는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을 다 천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는 지식으로 아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60년대까지 하나님 앞에 박수를 치던 손들이 나중에 변해서 전부 다 연필을 들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무슨 10단계까지 올라가고, 그 다음에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것 하고 그 다음에 또 따른 것 하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까지 배우는 그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불건전한 신앙에 빠지는 일은 없어졌는데, 이상한 것은 이전에 그렇게 박수를 치고 돌아다니던 시절 보다는 아는 것도 많아졌고, 성경도 많이 알고, 공부도 많이 하고 그래서 말도 잘하고, 어디 가서 논쟁도 잘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교회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과 감화가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 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10단계 성경교재까지 다 마쳤는데 한 번도 눈물 흘리면서 기도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꽤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일은 왜 일어나느냐 하면, 결국 ‘감정 그것이 악한 것이다. 무엇인가 느끼면서 우리가 감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뜨거움을 갖게 되는 것은 잘못하면 큰일 난다.’ 하는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이런 오해가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말합니다. 솥뚜껑이 무늬가 있어서 자라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자라 등을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보고 깜짝 놀라듯이 그렇게 감정으로 흘러서 신앙이 올바르게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을 가져왔던 이러한 것들에 염증을 느끼고 데인 나머지 그 다음에는 일체의 감정적인 것들, 그렇게 열정적인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기억하십시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모든 신앙의 체험들이 다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골라내고 올바르고 성경에 입각한 진리와 지식들을 취해야 합니다. 어느 날 밥을 해 먹으려고 쌀을 죽하고 눌러보니까 주르륵 쏟아지는데 거기에 돌멩이가 몇 개 있고, 뉘가 좀 끼었다고 쌀통을 가져다 쓰레기통에 갔다 부어 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쌀을 먹지 아니하기로 결심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뱀같이 지혜롭게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느낀 대로 판단하지 말고, 옥석을 가려내야 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같이 따라 합시다. “신령한 신앙의 체험은 반드시 은혜로운 감정을 동반한다.” 여러분들이 영원토록 머리에 새겨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령한 영적 체험이 아닌데도 은혜로운 것 같은 감정을 유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한번 해 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 악기를 좍 갖다 놓고, 불을 은은하게 켜고, 좋은 목소리 가진 인도자가 나와서 노래를 좍 부르면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예화) 바이올린리스트 가운데 김영옥씨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이올린을 켜는데 저도 봤습니다. 가서 직접 보지 않고 TV로 봤습니다. 7만원씩 내고 가서 그 것 볼 일이 있습니까? TV로 보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바이올린을 켜는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서 흑흑 거리면서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눈물은 설교자만 흘리게 하는 줄 알았더니, 기타 가지고 켜는 톱질하는 그 사람이
사람들을 울리는 것입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은 가서 코골고 자지만,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안 흘리던 눈물을 거기 가서 흘립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피부에 아주 와 닿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TV를 보면 우리나라 가수들은 정서가 부족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세계적인 가수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들이 젊었을 때 젊다면 이상하고 우리들이 어렸을 때 유명한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흘러내립니다. 보셨죠? 그런 것을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옛날에 탐 존슨이나 엘리스 프레슬리 같은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진짜 돈 줄만합니다. 이것 하나 가지고 노래 부르는데 그냥 혼신의 힘, 진액을 다 뺍니다. 그러면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면서 눈물과 함께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셔츠가 흠뻑 젖으면서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그것이 가식입니까? 참다운 정서입니까? 참다운 정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극단을 항상 뱀같이 예리한 눈을 가지고 판단을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계가 형성된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 집회와 모임에 탁 가서 보면, ‘아 이것은 지금 복음을 조작하고 있다.’ 아니면,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체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 시키고 있다.’ 이런 판단이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공궤한 말로 사람들을 부흥을 일으키려고 해도 안 됩니다.
유명한 부흥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한국에서 보이지 않으니까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전 직감적으로 그것이 조작된 부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합시다’ 그러면서, 우는 소리를 내면서 기도를 하는데 전 기도를 안 하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사가 진짜 우는지 봤는데 자기는 안 울면서 우는 소리를 막 내는데 그렇게 인상을 쓰며 기도하다가 가끔 또 눈을 뜨고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하나 쳐다봅니다. 그러다 저하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눈물을 한 됫박 쏟았어도 그것이 영혼의 눈물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건전한 신앙과 정확한 성경의 진리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눈물을 펑펑 쏟고 난 다음에 ‘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그렇게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그런 조작된 부흥으로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려는 모든 기도들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이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자기의 영이 그것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판단이 서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받으면, 반드시 은혜로운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멘 안합니까? 믿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뜨거워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마음을 뜨겁게 한 그 요인이 정말 성령이 주신 신령한 은혜인가 아니면 사람에 의해서 조작된 것인가? 그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예화) 1987년도에 제가 내수동 교회에 오기 전에 있는 교회에 있을 때 청년들을 열댓 명 데리고 지리산 밑으로 봉사를 갔습니다. 여름 성경학교를 낮에 해주면서 오후에는 전도 하고 밤에는 어른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으니까 어른들의 집회는 그렇게 신통하게 못했는데, 그때부터 어린이 집회는 많이 해봤습니다. 어린이 집회를 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열린 교회 오는 것이 멀다 힘들다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 정말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거기 가서 “얘야! 너 집이 어디냐?” 그러니까, “저요. 집에서 교회 왔다 가는데 세 시간 걸려요.” 그럽니다. “애 인마 나이도 몇 살 안 먹은 놈이 왜 거짓말을 치냐?” 그러니까 “어! 정말이에요.” 그럽니다. “자식! 뻥도 심하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을 나누어서 전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안 오는 것입니다. 네 시간 반 만에 왔습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가는데 한 시간 반, 오는데 한 시간 반, 전도하는데 한 시간, 그래서 어떤 할머니도 그렇게 걸린다고 합니다. “아니, 뭐 버스를 타고 다니시지 그래요?” 그랬더니 “아유! 어디 돈이 어떻게 그렇게 매일 있나요?” 얼마나 창피한지 말입니다. 그 길을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정말 한 시간 반 걸어서 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해서 50명 이상 모였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 가슴을 치면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한 없이 우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막 울면서 같이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숙대 다니는 자매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생짜배기, 천방지축이라 신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기분 내키면 교회 나오고 아니면 안 나오고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야 무엇인가 됐구나! 결국 재가 여기 와서 깨지는구나!” 그랬습니다. 그리고 집회가 끝났습니다. 끝난 다음에 물어 보고 싶어 죽겠는데 체면이 있어서 못 물어 봤습니다. 본인이 자기 발로 걸어와서 ‘전도사님! 지난번 기도회 때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아무리 곁에 가서 밥 먹을 때도 옆에 앉아도 그 이야기를 통 안하는 것입니다. 아니 제가 뭐 무슨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매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좀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안하는 것입니다. 저녁 먹을 때가 되도 안합니다. 제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아까 기도 많이 했느냐고 물으니, 좀 했다고 해서, “그래, 보니까 막 눈물 흘리면서 기도했는데, 예전에도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냐?” 없었다고 합니다. “이야! 이제 뭐가 됐구나!” “너 많이 울면서 기도할 때 무슨 생각이 들었니?” 제가 요구하는 대답은 아이들이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무슨 고초 당하셨네 들으면서 예수님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내 인생 최초로 느끼면서 그냥 감격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야기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니?” 그랬더니, 완전히 뒤통수 때리는 대답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과 버스도 못타고 다니는 돈 없는 집안의 아이들을 보니까 한없이 눈물이 나오더랍니다.
한번 봅시다. 은혜로운 정서는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거듭났다고 말하거나 자신이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속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저런 끔찍한 사태가 온 회중이 회개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는 가운데도 저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거기서 아주 큰 충격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예화) 수 없이 많이 체험했지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수요예배 시간이 됐는데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매 하나가 왔습니다. 한없이 뒤에 앉아서 울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구역 식구니까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래서 좀 보고 가자고 해서 뒤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날 마침 제가 설교를 했었습니다. 옛날에 어린 마음에 더 보고 가자고 했습니다. “오늘 어떻습니까? 은혜 많이 받았습니까?”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르겠다. 참! 겸손하구나! 저렇게 겸손해야지.’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말씀에 은혜를 받고 이어서 기도를 했는데, 이 사람은 그 날 시어머니한테 심히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라, 그러니까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할 때, 빨리 죽고 싶은 생각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설움에 겨워서 한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은혜와는 상관이 없이 그날 그 사람은 교회를 안가고 대포집에 갔어도 울었을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분명히 마음에 정서는 생겨났는데 신령한 체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들은 그렇게 한쪽 극단에서 한쪽 극단으로 가느냐 하면, 이해의 균형이 안 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은혜를 많이 받을 때마다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화) 지금은 죽은 제 친구 가운데 하나가 그 직장 다니는 친구를 강제로 휴가를 내다시피 해서 끌고 한얼산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얼산 기도 올라가자마자 찬송을 부르면서 돌멩이 같은 굳은 그 친구가 울먹울먹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이 찬송을 하는데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왜 그랬냐?” 그랬더니, “다른 찬송가까지는 울먹이면서 참았는데,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것을 부를 때 울음이 속에서 복받쳐 나오는데, 남자가 아무데서나 울어야 되겠니?” 어떻습니까? 명백하게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확인해야 될 사실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뜨겁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만나거나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닌데, 예배를 드려도 아무 느낌도 없고, 말씀을 들어도 한 번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 없고, 기도를 해도 한 번도 눈물도 나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그저 잡지책 읽는 것이나 똑같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주 안에서 만나서 교제를 해도 하나도 마음이 기쁘지 않고 감동도 없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 여러분! 집에 가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발을 씻다가 다음에 뒤에 각질을 만져 보십시오. 나이가 많이 들어서 50년, 60년 걸어 다닌 사람의 각질은 두툼합니다. 어떻습니까? 바늘로 찔러도 바늘이 한참 들어가야 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노인네들은 칼로 그 각질을 깎아낸다고 깎아내도 감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심령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돌같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죄악과 그 모든 인간의 잘못된 사상과 사고에 푹 절어서 완전히 단단한 돌멩이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가도 거기에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자기네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다닙니다.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어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데 영혼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자기 말로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주님 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그런 사람들이 유행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연주회 가서 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나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믿음과 동일시 해 버렸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게 하는 힘도 바로 그런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워하는 감정이 신앙인 것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두려움의 감정, 사랑하는 감정, 이런 모든 감정들이 다 어떻습니까? 열정입니다.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향하여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죄를 혐오할 수 가 없습니다.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 어떤 것인가에 지배를 받으며 감정을 갖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감정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존 오웬이라고 하는 청교도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음에서 많이 일어나므로, 밤에 잠을 못 이루거나 심지어는 나아가서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것뿐만 아니라, 그 분을 천국에서 뵙기를 사모해서 안달하는 마음이 들거나, 심지어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주님을 너무나 많이 사모하므로 상사병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성경이 열리겠는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시편을 가만히 보니까 시편의 기자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존 오웬의 이야기가 아니고 시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모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어떻습니까?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으니까 말하자면 그런 마음의 병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니까 그 사모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진해지니까 그것이 더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주님 만나기를 원하는 이런 소원이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윗필드 같은 사람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항상 정서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정서가 너무나 과해서 우리가 보기에는 열광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만약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옵소서!’ 내 혈육 중에 몇 명이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함에 이룰 수 있게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지옥의 불 속에 떨어져도 난 좋다. 이러한 뜨거운 마음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대적을 풀의 섶과 같이 살라 주시옵소서, 심판하시옵소서! 이러한 불같은 마음들이 속에서 솟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질병은 냉정한 것입니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감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거의 죽은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해 보셨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해보셨습니까? 사랑, 그 감정은 눌러도 누를 수 없는 감정입니다.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물과 같습니다. 꽉 막아놨다가 조금만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 구멍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요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느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것은 깊이 병든 것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것입니다. 그럴 경우는 죄악의 껍데기가 너무 누덕누덕 붙어서 그렸습니다. 그것을 깨뜨려야 됩니다. 뜯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속살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때 그 속살이 비로소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핵심은 하나의 중대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은혜로운 감정, 은혜로운 열정, 은혜로운 정열을 갖게 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뜨거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뜨겁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뜨겁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새벽 기도에 300명씩 나오는데,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휘익” 무슨 소리인지 아시겠습니까? 창문 열어보니까 새벽바람 부는 소리, 그것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까 대략 30분이 지나니까 다 없어졌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새벽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은 동원을 하고 구역장들을 다그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마음에 느끼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으니까 와도 그 기도를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300명이 모였는데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후우 새벽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전에 설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이 뜨거워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육체적인 노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복하겠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노력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진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바닥에다가 데굴데굴 굴리실 수도 있고, 물구나무서게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데굴데굴 구르면 성령이 은혜를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미 시작서 부터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밤새도록 기도할 수 있고,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고, 펄쩍 펄쩍 뛸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슨 조작이 있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손을 얹고, 주여! 그러고 안수기도를 하는데 맨 정신에서 한번 해보라 하면 못할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30센티 40센티 이상 뛰어 오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뛰면 성령이 오실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작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를 빨리 하면은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성령의 은사를 누가 그렇게 교습해 가지고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했는데 방언이 왔다 그러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방언이 온 것이 아니고, 때가 됐으니까 온 것입니다. 오비이락입니다. 까마귀가 나니까 배가 떨어진 것이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고 북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더 커집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더 큰 소리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여 삼창을 하라고 큰 소리로 “주여”를 세 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주여” 하고 부르면 됩니다. 그런데 네 번하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다 그런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다 인위적인 조작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기도할 때도 처음 시작할 때는 정자세로 맨 정신으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떻습니까? 성령이 임하셔서 자기의 죄를 애통하게 하고, 통곡하게 하시면 손이 피가 되고, 부러지도록 땅바닥을 치면서 울 수도 있고, 땅을 막 긁어 파다가 손톱이 다 빠질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앞에 뭐가 있어서 붙잡고 기도를 했더니, 기도를 하고 났더니 소나무가 뽑혔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나무를 뽑으니까 성령이 오신 것입니까? 성령이 오시니까 소나무가 뽑힌 것입니까? 그런데 가서 애꿎은 묘목을 붙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양쪽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진실한 은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한 달도 채 안 걸립니다. 돌아서고 나면 모든 의심들이 생기면서 그 느낌들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오늘 보니까 이 사람들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구를 만나니까 그렇게 됐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의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조금 전까지 뜨거웠습니까, 안 뜨거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뒷집 이야기처럼 하고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로 부터 성경을 풀어서 들려주는 일들이 일어나니까 자기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이 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체험이 은혜로운 열정을 갖다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만나서 차 한 잔 마셔도 기분이 한없이 좋은데, 전능하시고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우리와 교제를 나누고 그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나사가 빠진 사람 아니면, 정신이 돈 사람입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연애하던 시절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장가가겠다고 금식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대면해서 은혜를 주셨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잘 기억을 하십시오.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고 눈물도 없고 마음에 뜨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아니면 전에는 있었는데 요사이 별로 없다 그러면 오늘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가야 됩니다. 얼마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매주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깊어지면 나중에는 웬만한 은혜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정말 무조건 뚝딱하고 부러져야지만 해결이 되는 때가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딱딱함은 계속 자라기 때문입니다. 성장합니다. 계속 딱딱해지고 아주 강하고 단단한 껍질로 변해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그런 돌같이 딱딱한 마음으로 자꾸자꾸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이 흐르면 전에는 내 마음을 움직여 주던 그런 말씀이 이제는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여주지 않고, 교회의 은혜로운 분위기나 말씀의 역사, 이런 것들에 의해서 도무지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슴을 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성도의 삶은 언제나 눈물로 가득한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기쁨으로 가득한 삶, 눈물이 없는 심령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심비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가득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가슴과 그런 정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 사람들은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들이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시니까 그랬습니까? 성경을 그냥 읽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어떠할 때 그렇게 됐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큰 은혜를 받지만, 그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이 혼자 성경을 대하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기이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은 성경 읽는 대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그 말씀 자체에 마음이 녹아지고 심령이 풀어지는 이런 일들을 이미 자기의 성경 읽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설교시간에 졸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푸니까 이전에 읽으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쉽게 풀어서 해석을 해주니까 그 해석해주는 과정 가운데서 마음에 감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신령한 영적 체험을 주실 때 은혜로운 감정과 정열이 생겨난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신령한 영적인 체험을 주시는 방법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성경을 푸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구스 내시가 예수를 믿고 싶은데 이사야서를 보면서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빌립이 가서 성경을 풀어주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은혜를 받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을 풀어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는 결코 좋은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혼자 성경을 열심히 읽을 줄 압니까? 어림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자도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녹아집니까? 그러면 왜 이러고만 있겠습니까?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경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까? 성경을 읽다가 성경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이 좍 갈라지면서 이렇게 풀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23편 같이 에베소서 같이 좍 풀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쏟아져 나와서 설교하기 전에 성경을 읽는 설교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감동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언을 읽어주실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읽지 않고 어떠하셨습니까? 성경을 풀어주셨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쉽게 풀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영적인 체험이 임하게 하였고, 그 신령한 영적인 체험이 임하니까 속사람이 뜨거워지고, 속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까처럼 예수님 죽은 것과 부활하신 것을 뒷집에서 일어난 이야기처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납니까? 말씀을 해석해서 듣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교회에서는 결국 세 가지 박자가 딱 맞아야 됩니다. 그중에 하나만 결핍 되도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을 성경 자체로 읽을 때에는 이해가 되는데, 그 성경을 푸는 설교를 듣고 나니까 더 헷갈리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바르게 푸는 설교자와 마음을 열고 그 설교를 듣는 사람과 풀어지는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쏟아져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어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동반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나올 때 기도제목은 이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모였다고 가슴 들뜨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모여도 이 삼박자가 맞아서 속사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오늘 교회당을 가득 메워도 몇 달 후에는 다 빠져 나갑니다. 믿습니까?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 비록 네다섯 사람이 모여도 하나님의 말씀이 풀려질 때 그것이 올바르게 풀려지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네 명밖에 모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속사람을 뜨겁게 해서 감동과 감화를 받게 만들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신령한 체험을 알게 하시고, 이전에는 뒷집의 이야기처럼 할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로운 신앙의 체험을 하고 그 체험이 우리 속에 신령한 감정, 신령한 정열을 불러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의 진리가 과연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지금은 네 사람이 모였어도 몇 달 후에는 그 네 사람이 400명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스펄젼이 설교할 때 2만 2천명이 모였던 교회가 요즘은 7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제도 아니고 사업도 아니고 심지어는 선교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풀리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주님을 향해서 눈물도 없고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강퍅한 돌덩어리와 같은 사람이 형식적인 신앙의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을 움직여서 속사람이 뜨거워지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해서 그 체험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속사람의 체험이 일어나게 되어야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선교가 이루어지고, 그런 사람들로 모인 사람들이 미워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교인들이 목회자를 못살고 군다고 매일 그러는데 그것은 결국 교인들이 배고파서 그러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나올 때 마다 은혜를 받고 속사람이 뜨거워져서 집에 돌아갈 때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그러면서 돌아가는 사람이 교회 와서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교회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와서 예배드리고 흩어져서 집에 돌아가면 되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 품을 일이 있겠습니까? 속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다른 아무것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속사람이 그렇게 변화 되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뜨겁고 하나님을 향해서 순전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되는 일들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차가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 하셨다는 이야기를 지금 농담처럼 할 수 있습니까? 남의 이야기처럼 할 수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죽고 사는 것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죽고 사느냐는 문제가 달렸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고, 그 성경을 늘 읽으면서 살아왔던 제자들인데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야기를 이렇게 지금 뒷집 아저씨가 교통사고 나서 죽은 것처럼 농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신령한 은혜와 체험이 없으니까 돌멩이처럼 굳어지니까 그렇게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만약에 지성적인 신앙이라고 한다면 전 오늘을 기해서 여러분에게 ‘그런 종류의 지성적인 신앙은 포기하라 그래야만 천국에 간다.’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누구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멍청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 입니까?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야지만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 입니까? 어린아이처럼 신체가 약하고 힘이 없고 판단이 정확하지 않아야지만 천국에 간다는 겁니까? 아이들처럼 그렇게 사리분별이 없어야지만 천국에 간다는 겁니까? 아이들이니까 덜 살아 으니까 죄를 적게 지었는데 그렇게 죄를 적게 지어야지만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어린아이의 특성은 여린 마음입니다.
(예화) 오늘 안 나왔습니다. 김옥분 집사 아들 알지 않습니까? 지금 장가가서 애기 낳았습니다. 제가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매일 업어주고 먹여주고 선물 사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세살 쯤 됐는데 잠 잘 때만 되면,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꼭 형 품으로 오는 것입니다. 제 품으로 와서 “옛날이야기 해조!” 그 때 저는 설교자가 될 꿈을 꾸지는 않았지만 딱 드러누우면 앉아서 제가 고등학교 때지만 누워서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하나 집어가지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자려고 왔던 놈이 흑흑흑 서럽게 우는 것입니다. 펑펑 웁니다. 아마 회개를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쯤 아마 신앙이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펑펑 웁니다. 그 네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런데 “너 우니?” 그러니까 펑펑 웁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그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제는 아이들이 더 크니까 초등학교 쯤 들어가면 품속에 누워서 옛날에 인어공주가 살았는데 그러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가미도 없는데 어떻게 숨을 쉬어!” 이럽니다. 벌써 어떻게 된 것입니다. 변질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심령은 그렇게 연한 살 같은 마치 진흙과 같아서 뭐든지 탁 찍으면 찍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향해서 그렇게 반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대부분 그렇습니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자기의 삶을 맡길 수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체험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진리에 자기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세뇌가 되었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 하나님은 참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것을 내가 체험할 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느냐 하면, 성경 말씀을 풀어줄 때, 그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뜨거워져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이런 마음이 제일 나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의 감정이 전혀 없으면서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한번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보라고 아무리 주문을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런 감정을 갖는 것이 하찮고 천박한 것이라는 생각을 내렸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가서 눈물을 흘릴 수 없고, 마음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자기 속에서 도무지 그런 체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우와 신포도의 비유’가 있습니다. 따 먹으려고 그러는데 결국 여우가 못 따먹으니까 돌아서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까지 것 신포도 먹으면 뭐해?” 그러고 돌아서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체험하고,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체험이 솟아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경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깊이가 없습니다. 깊어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함께 느끼고 사랑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 속에서 깊어져 가는 것인데 갚아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속사람이 뜨거워져야 된다는 마음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가장 상태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하고, 뜨거워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막 끊어 오르는 사랑으로 헌신을 맹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소망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풀리기를 풀어진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를 사모해야 됩니다.
계시록 5장에 보니까 사도요한이 나옵니다. 두루마리가 봉해져서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야지 앞일에 될 일을 알 수 있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하는 말이 ‘누구도 이 땅에나 하늘에나 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엉엉 울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린양이 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도다. 그리스도께서 인봉을 떼시니까 말씀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 가을에 정말 여러분의 인생에서 의미 깊고 제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히 이 1994년 지하실의 열린교회에서 잊어버릴 수 없는 이 가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신나게 야유회를 가서 노래방에 한번 가보면 잊히지 않는 가을이 되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말씀이 풀려지고 그 말씀으로 수십 년 동안 차가웠던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뜨거워지고, 하나님이 신령한 체험을 주시고, 그 신령한 체험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정열을 불러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마음에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과 두려워하는 경건의 심령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될 때, 그 때 이 가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가을이 되겠습니까? 믿습니까? 그래서 크리스마스 성탄절쯤에는 또는 신년예배를 드릴 때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면서 이 94년 가을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찬송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우리가 성경통독을 하기 시작을 하는데 이때 여러분들이 모두 참여해서 마음과 뜻을 다해서 시간이 없는 사람은 잠을 줄이고, 그래도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식사시간을 줄여 가면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말씀을 더 깊이 기울이고, 설교자는 그 말씀을 더 잘 풀리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또 여러분들과 저는 함께 힘을 합해서 성령의 말씀이 풀리는 가운데 함께 하셔서 엠마오로 올라가던 이 두 제자들처럼 마음을 변화시켜서 뜨겁게 만들어서 실망과 절망과 낙심에 처해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 살아났다고 확언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회의와 의문에 사로 잡혀서 낙심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마음이 풀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속사람이 뜨거워지고 속마음이 뜨거워질 때 절망의 기운이 변하여 희망과 소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의문의 소식을 나르는 회의 어린 오솔길이 변하여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는 참다운 감격의 오솔길로 변화되었던 이런 놀라운 신앙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