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덕을 세우는 은혜체험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녹취자 ; 정윤미
개척한 이래로 우리 교회는 할 수 있으면, 예배 분위가 좀 뜨거웠었는데, 수요일 날 몇 주 째 계속해서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그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분별 할 수 있는 그런 참된 지식을 여러분에게 갖게 하고자, 지금 “신앙과 참된 은혜체험”이라는 제목을 죽 지금 다섯 번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간 결산을 하고 오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지난 시간 한 이야기는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러면, 때로는 우리 속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술 취하지 않았느냐 할 정도로 마치 그렇게 그 격렬한 정서가 일어나고, 그 체험이 일어나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해받게 어려울 정도로 심한 격정을 갖게 된다든지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은혜체험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말고 좀 넓게 참된 성령의 체험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 다음에 이야기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의 체험은 인격 안에서 통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사람들이 성령이 자기에게 역사하시면, 자기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그리고 오직 성령만이 혼자 역사하셔서, 자기는 오직 그 도구로만 사용되어서, 자기가 도무지 통제할 수 없고, 그래서 자기의 모든 은혜 체험들이 자기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같은 그래야만 진정한 깊은 체험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격 안에서 통제되어야 된다.
오늘, 그 인격 안에서 통제되고, 또 그러한 아주 커다란 은혜의 체험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하는 그런 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원리를 따라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럼 그 참된 원리가 무엇이냐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을 뒤돌아본다면, 이런 것들에 대한 참된 지식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에 사실은 얼마나 많이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고도, 교회에서 고통을 받고, 또 교회는 지체들이 은혜를 받았는데에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유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성령을 그 사람들이 받았는데도 그것을 통해서 교회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란이 일어나고 하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바위를 태우고, 산을 삼킬 것 같은 뜨거운 불같은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냉정한 그러한 얼음과 같이 차가운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사실 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옳고 그른 것과 참되고 거짓 된 것들을 반짝이는 것들 속에서 진짜 금과 모조품과 그리고, 풍성해 보이는 체험 속에서 참된 은혜 체험과 거짓된 감정의 체험들을 구분해 내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사각지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은혜의 체험을 하라 말은 많이 하지만, 이런 것들은 참된 것이고, 이런 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구획을 그어주는 이러한 지성적인 작업들이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배가 먼저입니까? 참된 지식이 먼저 입니까? 참된 지식 먼저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써놓고 예배한다” 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이 없는 예배는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경건이나, 신앙이나, 믿음이나,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된 지식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말씀을 깨달았는가에 따라서 똑같이 눈물을 흘려도 그것이 참된 은혜의 체험에서 나오는 눈물일수 있고, 그렇지 않은 눈물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참된 지식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있고, 예배가 있고, 경건이 있고, 섬김이 있고, 봉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커다란 많은 문제들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은 잘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을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준비 땅하고 달음박질을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외국에 나갔다 오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 신앙적인 열심은 우리는 이렇게 안에서 들여다보면 한심해 보여도 밖에서 보면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내 커져있는 새 빨간 십자가가 많이 커져있는데, 새벽 4시 반에 다 모여서 대부분의 교회가 새벽기도를 한다고 하면, 몇 명이 나오는지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목회자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강단에 엎드려서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외국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잠도 안잡니까? 한참 잠잘 시간인데, 새벽기도를 나온다는 것입니다. 철야기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이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수요예배, 주일예배 드리는 그 사이에도 또 예배를 못 드려서 구역예배를 드립니다. 가정에 들어가서 자기 집을 오픈하고, 예배를 드리고, 먹을 것을 다 내놓고, 외국 사람들 보기에는 신비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처져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은 제쳐놓고, 고려할 필요 없고, 제쳐놓고, 열심히 살고, 예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그러는 사람들을 잘 보면. 그러면, 꼭 무엇을 발견하게 되냐 하면, 막 달음질을 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애들 장난감 자동차가 딱 놓으면 굴러가다가, 어느 시점까지 굴러가면, 그다음 딱 막혀가지고 가지 못하고, 바퀴만 막 굴러가는 것 같이, 모든 사람이 대개 그 정도 수준에서 서서 헛바퀴가 돌아갑니다. 이제는 받을 만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다합니다. 10단계 성경공부도 띠었습니다. 가서 구역예배를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또 헌신되어있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돈도 척척 내놓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떻습니까? 자기일보다 교회 일을 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허드렛일 교회 가서 팔 걷어 부치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잘합니다. 주일 꼭 꼭 지키고, 그리고 모든 예배시간에 참석합니다. 그러면 되지 않았습니까?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어느 한계까지 딱 간 다음에는 그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이 같은 유사한 일은 말하자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이상 진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여태까지는 진전해온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열심을 내자, 그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새벽기도를 나가자, 수요예배에 빠지지 말자, 아낌없이 헌금을 하자, 그러면 복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교회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갖자, 교회를 사랑하자, 내 교회처럼, 손님처럼 신앙생활하지 말고, 내 교회처럼 믿고, 그렇게 사랑하므로 신앙생활하자, 그리고, 형제를 섬기자, 자매를 섬기자, 교회를 섬기자 그러면서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에는 은혜가 한창 있을 때에는 요만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어머, 저런 거구나, 아 맞아, 저것이 신앙이구나, 저럴 수가 내가 저거 몰랐구나!” 그러고 왔는데, 그런데 이제 아까 말씀드린 그 정도까지 오면, 이제 웬만한 이야기는 다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 집회를 가보면,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설교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성경공부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다 들은 풍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야기가 지식의 문제와 연관되어서 필요 하느냐? 그 한계에 놓여있을 때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가 체험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겠다는 열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령을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열어서, 나로 깨닫게 하여서 주의 진리와 증거의 도를 따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겠느냐 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우선은 그 굳어진 머리를 두드려서, 가슴을 두드리기 전에 머리를 두드려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신앙의 세계가 있다리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넓은 체험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처음들을 때, 스쳐 지날 갈수도 있지만, 그러나, 축복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스치고 지나갈 때, 이미 그런 한계 속에서 자기가 허하기 때문에, 맞아, 이것이 다가 아니야, 이것 말고 뭐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지식의 내용에 역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뜨거워지고 격렬해지고, 체험을 하게 되고, 그 이야기로만 들어 던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고려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보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들이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나쁘게 보면 나쁘지만,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이 교회는 정말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교회의 모본이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어쨋든지간에 은사가 넘쳤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귀신을 내어 쫓는 사람, 영을 분별하는 사람, 지혜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은사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성령이 주셨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사도의 이야기를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많은 은사를 받고, 많은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셔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었는데, 그 성령 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그 성령은사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분명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성령이신데, 어떤 면에서 그런데 그 한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있는 지체들에게 그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셨는데, 어떻게 그것을 통해서 교회가 유익을 받기는커녕, 고통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있을 수가 있다” 입니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거나, 주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은사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받은 것에 비례하는 더 큰 책임과 의무가 그 받은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잘못해서 침체에 빠져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깨달음을 많이 받았던 사람과 또 별로 받지 못했던 사람, 그 두 사람 차이의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별로 안 받고, 예수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참된 신앙이 무엇이진도 잘 모르던 시대에는 좀 잘못해서 침체에 빠지면, 금방 극복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침체랄 것도 별로 없지만, 매일 바닥에 사니까, 침체랄 것도 별로 없지만, 그러나 혹시 침체 같은 비슷한 것 빠져도 어떻게 하다 보면, 쑥쑥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많이 알고, 그다음에 침체에 빠지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루 이틀 금식하면 쑥쑥 일어났는데, 이제 안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은혜, 그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만큼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원칙을 준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는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의 인격입니다.
예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사용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주신 그 은사인 그 지식과 지혜의 놀라운 은사를 가지고 받았는데,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의 그릇이, 주님을 깊이 경외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 은사가 누구를 위해 사용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인격이 아주 신중하고, 그리고, 아주 원칙을 잘 따르고, 그러는 사람이면, 그렇게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항상 원칙을 따라서, 큰 은사를 받았어도, 신중하게 행동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성령이 주셨어도, 사람의 인격자체가 경박하고, 언제나 말을 많이 하고, 그리고, 쓸데없는 참견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은사를 받아도 꼭 그렇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큰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은사 받은 것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그 많은 체험도 하나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주신 체험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활용하고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그 원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인간이 잘못 사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속에서 오히려 그런 은사를 주신 것을 인해서 교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사도바울이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을 때에 악령의 역사도 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찍이 보지 못한 기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자기의 신앙의 경험에 입력된 바가 없는 무엇이 나오면 그러면 우리는 일단 위축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옳지 않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영적인 체험의 폭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거기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너희들에게 그렇게 많은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끼리 충돌을 일으키면서 교회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에 “뚝 그쳐”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이 말했더라면 그가 스스로 이야기한 성령을 소멸케 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은 은사 속에서 그 문제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그 사람들 속에서 문제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것과 잘못된 것들을 갈라서 보여주어야 할 그런 필요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는 말하기를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자인즉,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문제속에서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이것은 지금 긍정적적으로 칭찬을 해주고 있습니까?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에는 둘이 듣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없고, 저 혼자 이야기하고, 자매 혼자, 전도사님 혼자이야기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먹고 대답도 하고, 웃을 때에는 그냥 웃어요. 뭐 눈치보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웃을 때는 웃고, 슬프면 울고, 그래야지만 이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지금 바울이 너희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자인즉,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이것을 비꼬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까 ? 아니면, 긍정적으로 보는 것입니까? 높이 평가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그 끔찍한 일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심지어는 자식이 아비의 아내와 함께 동침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것은 계모와 그 전실 자식 간에 그런 말하자면, 통간이겠지만, 아무튼 교회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이 갈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도덕적인 문제와 당이 갈라지는 문제와 나는 게바파 바울파 아볼로파 하면서 막 그리스파 베드로파 이러면서 나누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바로 사용하지 못한 이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거기에서 딱 판단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할렐루야! 나는 우리 모든 한국교회 교인들이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좀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거의 신령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육체적이고, 쾌락적이고, 세상 적이고, 내 육체의 만족을 주고, 내 눈을 즐겁게 하고, 내 욕심을 채워주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들을 듣기를 원하는 풍조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돈 있고, 넉넉하고, 그리고, 근심 걱정 없이 살고, 승진 쑥쑥 잘되고, 사업해서 돈을 쑥쑥 벌고, 그리고, 점점 더 가세가 부흥하고 있는 그런 집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다는 그 사실 때문에 자기의 그 신앙에 있어서의 짧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요한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졸고, 그리고, 앉아서 돈이나 몇 푼 그까짓 거 얼마 되지도 않는 것 집어넣어주면서, 나는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내가 주님도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저 사람들 헌금도 받아야 되는가? 마음을 드리지 않는 그런 헌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차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십일조 낸 것이 억울하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면, 다 돌려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신령한 것들로 인해서, 도무지 고민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누가 신령해 지는 것들을 위해서 고민을 합니까? 신령한 것들을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사람이 됩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의 눈에 이 고린도교회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교회였습니다. 신령 하는 것을 사모하는 교회였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면서, 전심으로 그 신령한 것을 구하고, 그리고 그 신령한 것을 갖기를 원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열심을 가졌습니까? 벌써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교인들이 모인 그 교회는 예배의 분위기와 집회에 임하는 분위기 자체가 틀립니다. 이 고린도교회는 바로 이러한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간절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에 덕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이것이 말이 좀 어려운데, 원래 성경에는 어떻게 나오나하면, “교회를 세우는 은사들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을 하여라”.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그 모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신앙의 체험들을 통제해 나가는 커다란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주어졌을 때에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보면, 미친 자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 미쳤구나?”, “내가 이렇게 붙잡혀서 결박당한 것 말고는 당신도 나같이 미치기를 원합니다.” 교회에 그러한 뜨거운 감정, 그런 진정한 체험 속에서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는 감격, 그런 것이 없는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교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보면 어떤 때에는 마음이 냉랭해 질 때도 있고, 뜨거워 질 때도, 사모할 때도 있고, 사모 하지 않을 적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일 년, 이년, 삼년 혹은 예수를 믿고 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녹는 것 같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의 마음이 격렬해지고, 그리하여서 내 몸을 모두 그리스도예수 앞에 내어서 제물로 드리고 싶은 이러한 뜨거운 감격과 체험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앙에 깊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죄악된 세상에 대한 철저한 미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그렇게 저항하고 있는 내 이 육체의 사랑, 육체의 소욕, 이런 것들에 대한 격렬한 미움을 소유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하는 은혜를 체험한 이야기 무엇이라고 합니까? 다 같이 우리 한 음성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강사님, 자꾸 그렇게 나한테 통성 기도하라고 하지마세요. 왜요? 전, 묵상체질입니다” 묵상체질, 그런데 어때요? 그러면서 아무소리도 못 내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뭐, 주위에서 사람들이 막 기도하니까, 정신이 혼미해가지고 무슨 기도를 합니까?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들은 그래도 막 기도가 나오고 마음이 뜨거워져도 그래도 오래도록 그런 체험들을 해봤으니까 그런지 모르지만, 스스로 인격 안에서 우리를 통제하면서, 좀 이렇게 남 생각도 하고 말이에요, 코도 너무 많이 흘리면 좀 닦고, 눈물도 좀 많이 흘리면, 좀 닦아내고, 그러면서 이제 자신을 추수 리면서 또 그리고 막 엎드려 퍼져 가지고 기도하는데, 혹시 뒤에서 사람이 내 기도하는 것보다 허리라도 나오는 것 아니가 하며, 그러면서 자기를 좀 추스르면서 그래도 묵상할 것 묵상하고, 그러면서 기도하고 자기를 좀 추스르면서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한번 딱 묵상체질이에요 했던 사람들이 은혜를 딱 받아서 심령이 뜨거워지면. 여자 눈에다가 뭐 새카만 것 바르는데, 울고 나가지고, 사정없이 부비고 울었네, 왜 기도하면, 그냥 마룻바닥이면, 그냥 자기자리에만 가만 앉아서, 그냥 훌쩍훌쩍 울면서 기도하던지 그냥 엉엉 울면서 기도하면 되는데, 머리를 산발을 해서 앞으로 풀어헤치고 그다음에 갈지자로 왜 자꾸 뒤로가, 콧물, 눈물 흘리면서 갈지자로, 여름 같은 데에 또 짧은 치마 입으면, 허리는 또 다 나오고, 그러면서 헤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갑자기 인격이 묵사발이 되었나요? 아니면, 갑자기 상식을 저당 잡혔나요? 지성을 전당포에 맡겼나요? 아니에요, 왜 그래요?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못 느끼던 것을 성령으로 느끼고 신령한 은혜를 받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자기가 그렇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던 그런 벽을 무너지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통제라기보다는 은혜를 거부하던 자기의 자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은혜가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에요. 멋쩍어 진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제일 먼서 통성기도로 크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꼭 어느 교회든지 가면, 그 바람잡이들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까까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묵상체질이라고 하던 그러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그러한 참된 은혜의 체험,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뜨거워지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 안에서 격렬해 질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그때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메어 달리고 간구하게 되는 그런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묵상으로 들어가는 것과 옛날에 묵상으로 들어가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묵상기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틀리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인위적으로 괜히 수선을 떨면서 기도를 하려고 하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나는 기도시간에 제일 싫은 것이 그 북치는 것, 우리 교회에서 북치는 것 들어보셨나요? 좋은 것은 있습니다. 조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도 북을 세게 치니까, 어떤 집회에서는 너무 세게 쳐가지고, 뿌욱하고 북이 찢어졌는데, 찢어졌는데에도 구멍이 나가지고 그곳에 테이프를 붙이고, 또 두들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들이기는 것, 그것은 육체로 그렇게 말하자면, 은혜의 체험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술 취한 것처럼 뛸 수도 있고 그리고 거리를 헤매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헤매고 술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는 것이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이 임하면, 소나무 뿌리를 뽑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주셔서 뽑는 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기도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니까, 이것은 들지마세요. 새벽시간에 와서 그러나 소나무를 뽑으면,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렇게 모두 신령할 것들을 깊이 사모하는 자라고 인정을 받았던, 이 고린도 교회가 그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신령한 모든 은혜를 받고도 교회에 그 신령한 은혜가 교회에 유익을 끼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고, 교회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누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예수 깨서 고통을 받으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 지체들이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면서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덕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정확한 번역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들에 있어서 탁월하게 뛰어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대한 기관차가 나사하나가 딱 빠지니까 그 부품이 해체되면서 분명히 기관에서 물이 끊어 오르고 있고, 김이 솟아나고 있고, 기적소리도 울리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못가고 서있습니다. 그런데, 그 볼트하나를 끼움으로써 모든 것이 힘이 연결되면서 기차가 전진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그 은사를 성령이 주신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그 은사를 받아서 열심히 주를 섬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인데, 문제는 이점에 있어서 전혀 이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상한 그 묘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고통이 안 됩니다. 그 자체가 이미 고통이니까, 그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를 안 일으킵니다. 왜 그래요? 아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럴 때에 살짝 들어왔다가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까? 하기 전에 살짝 나가는 사람이 교회에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밥한 그릇도 안 먹고 가는 사람이, 와가지고 헌금내고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하나님을 안 섬기고 똑바로 신앙생활을 안 한다는 것이 문제지,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교회에 없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 누구이냐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교회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어떤 사람들이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냐하면, 성도들에 대해서 아무 사랑이 없는 사람들,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 네가 누구냐 하고, 와서 헌금 땡 집어넣고 예배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고통을 안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교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겨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교회에 고통을 주고, 성도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목회자가 잘 고통 받는 사람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해주셔서 나는 아직 여러분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다고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고통을 좀 받아야지만,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을 텐데, 어떤 사람은 개척교회 1년하고 나면, 수기를 10권씩 쓴다고 하는데, 나는 수기 쓸 것이 한 페이지도 없습니다. 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그리고 뭐 내 마음에 상처가 줄 정도로 속을 썩인다던지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분량을 보시고 감당 못할 줄 아니까,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넘치는 여러분들을 보내주셔서 그렇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강제로 아멘이 잘나오지요. 띄어도 어느 정도 띄어야지, 너무 띄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의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제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청빈 받은 교회에 갈 때에 유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할 때 보따리를 받기위해 제일 먼저 뛰어나오는 그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들이 그 사람들이 내쫓으니까, 여러분 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세요. 왜 각자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지금 은사를 받아가지고,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아니 교회가 부흥이 되면 무슨 교인들한테 상여금이 나옵니까, 정근수당 줍니까? 아니면, 이익배당 합니까? 한사람 전도하면 얼마씩, 무슨 보상금을 줍니까? 아니면, 무슨 사심이 있겠느냐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사심 없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그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칙이 지금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위해서 뜨겁게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다는 그것 하나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그러냐하면, 역설적으로 교회는 그런 자기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은사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 은사를 받고, 예언하는 은사를 받고, 지식의 은사를 받고, 영분별 하는 은사를 받고,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이 사람들이 다 각자하는 말이, “나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나는 목사가 되어야 되겠어. 아니면, 나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받았으니까, 이제 목사도 필요 없어, 나는 아무래도 감독이 되어야 될 것 같아, 나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으니까, 나 좀 대접 좀 해줘, 나도 예배드릴 때에 올라가서 드릴께”, 이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잘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셨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은사를 받고, 교회에 머물러있지 않고, 배교해 버리든지, 고린도 교회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으면, 무슨 문제가 일어날 일이 있습니까? 그 은사 받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하나도 안 남았다면, 교회가 문제가 될 일이 있습니까? 남아있었습니다. 교회에 왜 남아있었습니까?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은사를 주셨으니까, 그 은사를 가지고, 자기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받은 그 은사 자체도 성령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 그 다음에 그렇게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바깥으로 뛰어 나가면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겠습니까? 정말로 한 달란트 맡은 자와 똑같은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매일 주시옵소서라고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하나님이 주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자꾸 달라고만 그러지 말고, 그 하나님께서 주신 것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남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렇게 교회에 남아도 문제가 안 됩니다. 또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 마음, 교회에서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를 하겠다는 마음,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는 그것이 만약에 문제가 된다면,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문제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이 많은데, 왜 마치 은사를 받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후회를 할 정도,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은사를 받은 것을 고린도교회의 입장에서 후회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45-46) 신령한 은사 자체를 사모하고, 그 위에서 은사 위에 더 뛰어난 은사를 받고, 그 은사의 등급을 매기고, 그 위에 더 뛰어난 은사를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를 놓친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들에 있어서, 뛰어나기를 애쓰라 그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 한사람의 그 은사를 통해서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2장에서 거론하고 있는 수많은 은사들, 바울은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다 성령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나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통역하기를 구하라, 방언이 곧 통역이 없이는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은 성령이 주신 은사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교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과 덜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이 그 속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계급적인 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각자의 분량대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분량대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들이 벽돌처럼 하나의 벽돌로 집어지지 않듯이 그 은사들이 하나씩 둘씩 하나씩 둘씩 이렇게 놓여가면서 지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석가래 에 사용하는 돌은 아주 고급돌입니다. 기초공사에 콘크리트와 함께 비벼서 집어넣는 돌은 잡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계를 갖는 거냐 하면 그 둘은 같이 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떤 이야기성립되냐 하면, 일단 집을 지어지는데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 잡석이 그 서가래의 그것보다도 덜 귀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은사가 뛰어나다, 영들을 분별하는 일이 없다면, 너희들이 많은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언이 없다면, 너희들이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미래의 일들을 어떻게 알겠느냐?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면 너희들이 수많은 재주를 가지고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귀산에게서 계속 눌릴 것이 아니냐? 이러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자 어떤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일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령이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를 가지고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주관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다 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그 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은사를 받았을 때 그것은 분명한 신령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역사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 하나에다가 자기가 그것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신다는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체험,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그 은사도 옳고 그 은사를 행하고 있는 나도 따라서 옳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하자가 없다, 사람들이 속이 좁아서 내게 임한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은사들에 있어서, 탁월하게 되기를 애써라” 이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으니까, 은사가 주어졌는데, 만나고 체험하고 그래서 은사를 받고,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받고, 혹은 권능을 받고, 혹은 귀신을 내어 쫓고 영들을 분별하고 하는 이런 수많은 은사들을 받았는데, 그랬는데, 그들의 관심은 자기의 은사를 백분 발휘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이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무용담처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과시하기를 원했지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령의 은사를 그렇게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오늘 성경에 대한 대답이 “그럴 수 있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터 받은 그 성령의 은사는 주신 그 성령의 은사는 분명했고, 표적이 따랐습니다. 누가 숨길 수 있겠습니까? 입을 열고 기도하면, 외국어가 쏟아져 나오는데 누가 부인 할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통역을 하면, 즉시 할렐루야 통역하기 시작하는데, 방언하면 통역하는데,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들려서 헤매고 있는 그 사람이 사탄아 물러가라, 다른 사람들이 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 사람이 가서 내어 쫓으면, “나가라” 그러면 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부인 할 수 있겠습니까?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증거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만이 그 일을 합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주셨습니다. 또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고, 성령이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체험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백분 발휘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교인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언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많이 예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언의 은사를 주셨는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많이 자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는데, 자꾸 방언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귀신은 내어 쫓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꾸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내어 쫓아야지만,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 아닙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살 때에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충성스럽게 활용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냐. 그것이 만약에 하나님의 책임이었다면, 왜 사도바울이 준엄하게 어조로 꾸짖으면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빠졌던 오류에 오늘 우리도 똑같이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만났는데, 왜 나도 방언을 받았고, 나도 예언을 받았고, 나도 성령에 있어서는 한 가닥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교회에 정착을 못하고 자꾸 떠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기도원 같은데 빙글빙글 돌고, 잘못하다가는 또 이단 같은 집단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아예 자기네 집 지하실에 기도원을 차리고, 교회 안가고 거기에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을 데리고 기도해 주고 그럽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고 주님이 내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계속 나에게 발휘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내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받는 그 고통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성령 체험한 사람 오는 것 싫어합니다. 왜 모든 문제의 근원이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교인 하나 붙잡고, “내가 오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계시를 보여주시는데, 당신이 그 직장을 계속 다니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 내버려두신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방언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 방언을 많이 말하고 기도해야 되겠다, 문제가 있습니까? 예언의 은사를 주셨는데, 예언을 막 해 가지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싶은데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은사를 그대로 믿습니다.
기도원에 21살에 그때에 올라갔는데 신년에 하나님에 자기를 맡기려고, 영하 25도 이렇게 내려가는 삼각산 기 이렇게 침을 바르면 덜컥 얼어붙는 정도 이였는데 그때에 21살 그 정도 밖에 안 된 청년이 그 산꼭대기까지 혼자 밤 10시 반에 2시간 반을 걸어서 올라갔는데, 대단하지 않나요. 거기에서 기도하려고, 이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뭐 아는 것이 있나요, 뭐가 있었나요?그냥 열정하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처음 보는데 아무리 내가 나이도 어리지만 자기는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당신, 올해 두 여자 때문에 시험이 들어”, 그래서 아이고, 할렐루야, 웬 2 여자? 나타나요. 우리 할머니하고 어머님밖에 없는데, 왜들 그래요? 그렇게 하나님께로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려고 애쓴다는 사실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자기은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신 그 은사들이 교회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막 예배가 혼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막, 혼잡해 지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여기도 벌떡 일어나가지고 막 예언하고, 저쪽에 벌떡 일어나가지고 방언하고, 저쪽에서 벌떡 일어나가지고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쏼라쏼라대고 하면서, 왜 내게 계시가 임했다 이것입니다. 나도 임했다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네가 먼저, 온통 예배가 혼잡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주님이 주신 은사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왜 그런 문제에 빠졌느냐?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은사를 믿고, 신뢰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을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나 은사에 있어서 놀라운 전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사에 있어서 놀라운 전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은사에 놀라운 전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금방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이 틀립니까? 거기에 대해서 만약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이상한 논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때로는 통제되지 않은 열심, 통제되지 않은 은사의 활용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었을 그 은사를 주었던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교회에 아픔만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12장에서도 은사이야기를 하고 14장에서도 은사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간에 무엇이 나오냐하면, 사랑장이나오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 나올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가운데 끼어들어 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12장에서 은사 문제를 좌악이야기를 하다가 뚝 건너뛰어서 14장에서 다시이야기 하는데 그때에 13장에 무엇이 나오나 하면, “내가 너희에게 보다 큰 은사를 보이리라”, 왜 작은 은사는 큰 은사에 통제를 받아야 됩니다. 작은 은사는 보다 큰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고 하냐하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지만, 통역이 방언의 통제를 받아야 됩니까? 방언이 통역의 통제를 받아야 됩니까, 방언이 통역의 통제를 받아야 됩니다.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만약에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면, 예배 중에는 한 성령이 은사를 주셔서 방언하게 해도 참아라. 입니다. 성령이 주신 은사를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참을 수 있습니다. 통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그렇게 인격적입니다. 그렇게 통제가 되어야 되는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다 자랑하면서 내새우던 그 은사가 더 큰 은사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크고 완전한 것을 내가 보이리니 하면서 “네가 천사의 말을 하고, 그리고 방언을 하고 그리고,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고, 네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가 놓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의 은사의 통제를 안 받은 속에서 그 나머지 모든 은사들이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된다는 그 열망 하나에 들떠서 그 은사를 마구 사용을 할 때에, 결국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신 그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는 이상한 기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4장 1절을 보면,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앞에 보면 무엇을 따라 구하라는 것이냐 하면 사랑을 따라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신령한 것을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사모함에 있어서는 우리를 뛰어넘는 탁월함이 있었는데, 신령한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우리보다 한배 뛰어나서 두 배 뛰어나서 탁월하다면 그들은 마땅히 사랑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는 3~4배 뛰어나야지만, 우리보다 뛰어난 그 신령한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통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은혜를 많이 체험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많은 사람들, 그것도 짧은 기간에 받은 것이 많은 사람들, 인격적인 정돈이 덜 된 사람들이 똑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 받은 사람들끼리 싸운다고, 그것이 왜 그래요? 사랑의 통제를 못 받기 때문입니다. 함께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 밖에는 영광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싸웁니다.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들의 충성이 연합해서 묶어져서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되어야 될 테데 그것이 아니라, 연합해서 묶어져서 교회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무지가 가득한곳에 사단에 역사는 충만하다”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이 주신 것 아닙니다. 참된 지식이 없이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데, 그 지식을 따라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만약에 성령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고 하면, 아 고린도전서 이 복잡한 것을 무엇이라고 씁니까? 사도바울이 “네가 은사 때문에 그렇게 말이 많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안수기도 해 줄 테니까”.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바울의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너희들이 똑바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아까 한 이야기에서 마주 닿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시간 후에 들어왔다가 끝나기 전에 나가고 교회에 일에 관심도 없고, 십일조도 안내는 사람들은 교회 문제를 안 일으킵니다. 그 자체가 문제였으면 문제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은혜의 체험을 하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문제를 안 일으킵니다.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신기한 것입니다. “아! 신앙이 그런거에요. 아 참 그것 깨달았네요. 아 고맙습니다. 나는 갈 길을 모르니 인도하시옵소서”. 그리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안다 나는 벌써 안다, 신앙에 있어서 내가 도 텄지, 누구 한수 배울사람없나? 이러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보다는 막 자기이야기 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뭔가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자기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 이상으로 예수를 믿어본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던 안 살던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을 위해 살아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세요. 헌신되어졌습니다. 헌신되었습니다. 그때 문제가 많은 교회도 그래도 붙어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 파다, 그것은 신앙적인 무엇이 있으니까, 누구 파다라고 하는 것이지, 바울한테 가면, 바울이 무슨 밥을 줍니까? 베드로한데 가면 떡을 줍니까? 빵을 줍니까? 그것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자기 나름대로 신앙의 주관이 있고, 신앙의 체험이 있으니까 바울은 아니고 아볼로다, 아볼로는 아니고 그리스도 파다, 그리스도 파는 아니고, 베드로는 아니고 바울은 아니고 아볼로다, 아볼로다 그렇게 뭔가 자기입장을 단언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누구 편에 손들겠냐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교회를 세우는 은사들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결핍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로 혼동된 상황에 대헤서 한줄기 빛을 던져주는 지침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은사와 체험을 받은 사람들은 그 체험을 어떠하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래서 자기에게 임한 이 은사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혁혁한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줄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열심을 품지 말고 어떤 열심을 내가 이 은사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교회를 함께 세워갈 것인가? 왜 그런 해석이 가능해요? ‘gifts’ 복수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하나인데 주님이 교회를 세우는데 쓰시는 그 은사는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냐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자기가 받은 것만 최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받은 것만 최고이지, 안 받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방언 다 그것 쓸데없는 것이라고 욕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보면 방언을 안 받은 사람들이 대게 그렇습니다. 그럼 또 무엇입니까? 은혜 체험에 대해서 그것다 씨잘 것 없고, 그것 천박한 거다 그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누구냐 하면 2 종류의 사람인데, 하나는 체험을 해도 신앙에 도움을 별로 못 받았던 사람이고, 그것은 자기가 잘못했던 사람이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하냐하면, 기도 할 때 눈물 흘리신 적 있습니까? 예, 저는 기도할때마다 눈물이 나옵니다. 아 신비주의자시군요? 무슨 소리에요. 체험이 있다는 것이에요 없다는 것이에요. 자기는 그런 체험이 없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무엇만 가장 중요한 것이냐 하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는 이런 것만 자기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각자다 자기가 받은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나만큼 하나님 많이 만난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 나간 생각입니다. 그러다 또 가만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 같아, 딴 사람들이 이상해, 나보고도 샘도 않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다 허망한 생각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좋은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알도다”, 자기에게 귀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신앙의 체험이 있어서, 이제 뭐 조약돌 수준밖에는 안되는데, 아 나는 놀라운 하나님을 만났다 그럽니다. 이렇게 글을 쓴 것을 들여다보면, 아직 멀었어, 설교를 하거나 같이 이야기를 할 때에 풍겨 나오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만났는지를 대개 묻어나오는데, 이야기를 이렇게 보면 유치원 수준밖에 안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나같이 하나님을 크게 만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착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받은 은혜, 자기가 받은 체험이 최고인데, 어떻게 그것 받은 사람은 어때요? 뜨겁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으니까, 체험이 없으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체험이 있으면 뜨겁습니다.
예화)운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 전에 차사기 건에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운전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나는 그냥 가만 앉아서 그냥 듣는 거지, 왜 나는 운전면허도 없으니까, 나는 타본 거라고는 오토바이 밖에 없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뭐 차는 무슨 차가 좋고, 어떻게 하면 딱지를 안 띠고, 막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누군가 하고 보면, 진짜 딱지도 많이 띠고, 차도 몇 번씩 바꾸어보고, 교통사고도 내보고 그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도 언젠가 운전면허 따고 이제 몇 만 킬로 타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 나도 침 튀는 것입니다. 아 그것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침 튀는 것입니다. 그것 왜 그래요. 체험이 있으니까 침튀는 것입니다. 뭐 고스톱에 대한 이야기를 침을 튀면서 자기가 돈딴 이야기를 하면, 나는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왜 나는 민화투밖에 못 치니까, 가만히 가서 듣고만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체험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나는 미국 이야기만 나오면 기죽어요. 왜, 나는 한 번도 못가 봤으니까. 사람들 끔쩍하면 미국에서는 독일에서는 그래. 아 뭐 식당에 가서 밥 먹는데, 미국이야기 할 것 뭐있어, 미국 사람 미국 밥 먹고 조선 사람은 조선 밥 먹으면 돼는 것이지, 아 미국에서는 물 컵 갖다 줄 때에는 이렇게 안 갖다 준다고, 아니 어떻게 갖다 주던지 물만 먹으면 돼지, 아 나는 미국이야기 나오면 주눅이 들어가지고 가만히 앉아가자고 나는 노스웨스트 못타봤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거의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내 친구들이 많았는데, 미국 몇 번 갔다 오더니 침 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래요. 체험이 있으니까, 그 자기의 체험이 있고, 자기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 너무 신나지 않겠습니까? 막 자랑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교회 다닐 때에 “야, 너 이리와 봐. 너무 착해서 야 너는 어쩜 어떻게 기도도 많이 하고 착하냐? 여기 있다”, 책한 권 선물주면, 돌아다니면서 “야, 나 우리 전도사님이 책 선물했다” 그래가지고 아이들이 마음상하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안줘, 왜 그래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왜 그래요, 나만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왜 그래요? 나만 받았다 이야기입니다. 나 같은 은혜체험, 나 같은 은사 나만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받은 사람에게는 전부다 무엇이 있냐하면, 그것을 백분 발휘해가지고, 무언가 광을 내보고 싶은 맛이 있습니다. 그 광을 낸다는 말을 꼭 나쁜 의미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 그래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으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으니까, 막 그것을 활용하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들에 있어서 뛰어난 자가 되라 그렇게 사도가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게 그렇게 솟아오르는 자기의 은사의 탁월성에 대한 그 놀라운 간증,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체험의 간증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세워져야 된다. 내가 이 혁혁한 은사를 가졌지만, 잡석이 되어서 기초공사 하는 데에 필요해서 콘크리트와 비교되어가지고 집어넣어지는 그런 위치에 놓여 져서 평생토록 서까래를 지고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할렐루야다, 왜냐, 그것은 통해서 교회가 지어지니까! 어떻게 그런 기가 막힌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받은 이 예언의 은사가 분명히 방언의 은사를 능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성경을 읽으면서 받는데, 그 놀라운 은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놀라운 은사를 받은 것을 수많은 사람에게 청하고 보여주고 나타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서 쉽게 이야기하면, 깃발을 날리고 싶은데, 내가 고요히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그렇게 깃발을 날리면서 내게 받은 그 은사에 놀라운 활용을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퉁이의 한 돌멩이가 되어서, 수십 년 동안거기 가만히 서있으면서 흔들리지 그대로 않고 모퉁이의 돌이 되어서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그 힘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 우리 모든 사람들의 은사를 하나님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운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이 교회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일에 있어서 기여되지 않는 그런 일에 이바지하지 않는 성령의 체험과 그 성령을 활용하기 위해서 자신을 모두 내어받치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그 좋은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하면서 절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남용되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절제를 이 사람들은 오늘 말씀 이 이야기가 첫째 날 이야기 했던 성령의 은사를 소멸하고, 물리적으로 통제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교회에서 통제를 가하고, 여기도 지금도 바울로 말임임 통제를 받고 있는데, 여기에서 통제는 오히려 그 은사를 부흥케 했습니다. 오늘날 통제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안 돼 딱 끊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방언하면 안돼요, 주일날에는 통성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틀을 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참 올바른 환경의 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무엇을 이야기 했습니까? 그 마지막으로 은사 문제를 정리하기에 앞서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교회가 통제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방언의 은사를 받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내가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마구 발휘되어야 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직선적인 그런 충성 그것 하나에만 매달리는 대신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세울 것인가? 그러면서 어때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방언인데 그것을 막 말하고 싶은 마음이 성령 안에서 드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안 되니까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 안에서 통제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그 사람이 그것을 막 말했다면, 그러면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체가 죄가 되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벌어져서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을 주지 못했다면, 그 자체는 가하나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유익을 주지 못할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얼마나 멋있는 시랍입니까? 우상의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거룩한 분은 하나님뿐이고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지니까 우상의 고기라도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모든 고기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가 그것을 먹는 것을 보고 혹시 어떻게 사도가 저럴 수 있을까 그러면 실족하게 되니까 혹시 그것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합니까? 가서 네가 오해다 그렇게 이야기해주면 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이론이 아니라, 논리입니다. 내가 옳다 네가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의 논리가 아리라, 이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그 자기가 고기를 먹는 것으로 인해서 실족할지도 모르는 그 형제들을 보면서 사도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나는 옳다 그것이 아니라, 내가 옳아도 이것을 보면서 실족하는 형제가 있을 수 있다면, 그 실족하는 영혼의 대한 깊은 애정이었습니다. 그것이 이긴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을 안 한 것입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잠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내 은사를 백분발휘하지 못한 것을 인해서 그래서 시를 가리고 때를 가리지 않고, 그것을 내가 받은 체험과 내가 받은 은혜와 내가 받은 그 모든 은사들을 마음껏 발휘하지 않은 것을 인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랑 안에서 세워져가는 교회를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야말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고, 나는 하나님이 체험을 주셨으므로 나는 내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교회가 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내가 그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하여야 된다는 그러한 생각과 애정, 그러한 생각을 앞에 생각을 꺾고 뒤에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이라는 거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을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것을 인해서 한없이 기뻐하고 가슴 벅차하는 사람들, 내가 무슨 은사를 받은 것이 수많은 교회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나의 이름 없는 섬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 그런 은사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try to excel in gifts that build up the church“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들 속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하라고 하는 것 보니까, 이것은 또 무슨 문제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단번에 해결 할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훈련을 받고, 끊임없이 자기를 절제하고,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꺽고,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고, 자기의 자랑을 포기하고, 나를 높이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내가 모든 것을 다 행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게 되면 나는 만족하다는 끊임없는 자기 극기 그러니까 노력하라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성령을 받아도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까? 잘 안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막 방언을 할 때에 이런 자랑을 가졌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오신다음에 제일 먼저 보여주신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었습니까? 방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방언이 임하였는데, 하지 말라니 도대체 성령이 그 일을 기뻐하시겠느냐, 이런 반감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논리적이에요 논리적이 아닙니까?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보다 더 큰 은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그 작은 은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통제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의 은사를 과도하게 내세우면서 교만해지고 높아지는 모든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갈라지고, 주님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위해 성령을 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일등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가 그 모든 것들을 어거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가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들어나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기를 아무것도 아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데, 어째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닙니까?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닙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어떻게 그런 열정과 그런 놀라운 은사와 이런 것들이 성령이 주시는 것이지만, 보다 더 큰 사랑의 은사에 의해서 통제받지 않을 때, 교회가 얼마나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지를 사도바울은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다 더 뛰어난 은사가 있나니 했을 때에,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 그래요, 사랑 같은 것은 은사 측에 끼지도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 같은 것이 어떻게 신령할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영적이냐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 중에서 진짜 영적인 것이고, 신령한 것 중에서 정말 신령한 것이고, 사모해야 될 것 중에서 가장 사모해야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사랑 안에서 그러니까 어때요? 이 교회하고 대조적인 교회가 어디교회에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아무러면 이 고린도교회만큼 은사가 안 넘쳤을까요? 아닙니다. 집사님이 들고 나가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데 명설교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데반 집사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 교회에서 본업이 무엇이었습니까?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딱 등단하고 서니까 설교자들을 능가하는 장쾌한 구속사적 한편의 설교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면서도 죽어라 하고 그 말씀을 외치다가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평신도들이 그랬습니다. 뛰어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고린도교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소명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 교회는 더 큰 은사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더 큰 은사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진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래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많은 학자들이 방언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방언이 수준이 틀리다고 합니다. 같은 성령이 하신 것이지만, 수준이 틀리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성령의 그 놀라운 역사와 은혜를 한껏 맛보고 교회가 경험을 했는데, 그 교회에서는 문제가 안 일어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정확한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순종하는 수준 높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위에 어때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이름만을 높이고 하나님만을 찬송하는 그러한 사랑이라고 하는 더 큰 은사의 완벽에 가까운 통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통해서 놀랍게 교회가 유익을 얻고, 그리고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고,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루살렘의 교회가 그렇게 든든하게 설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더라, 제사장의 무류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에 허다히 굴복하더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은사가,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기 때문에 큰 성령의 은사의 속에서 더 엄청난 커다란 은사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의 은사의 체험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한테 모두 한수 배워야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 나야말로 교회의 초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내 은사야 말로 교회의 초석에 자리에 앉아야 된다는 이러한 생각들을 모두 다 버린 것입니다. 더 큰 은사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러니까 교회는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깊이 만난사람들, 마지막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13장의 고백이 인생의 종착역에 고백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고 깊은 은사를 받기 전에 사랑 타령하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온갖 신령한 것을 다 경험하고 삼층 천까지 올라갔다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난 영적인 체험을 하고, 그 광대한 하나님을 만난 그 사도의 입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이 고린도교회애서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무엇입니까? 신령한 것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만난 자기의 신앙의 체험과 은혜의 체험과 그리고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서 한없이 활용해야 되겠다는 그 충성심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은사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중심적으로 일하셔야 된다는 그러한 생각을 뛰어넘어서 교회의 한 벽돌이 되게 만드는 그런 유익을 그 성령이 주신 은사를 통해서 끼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하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이라고요, 사랑을 따라 구하라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완전해지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다양한 체험들이 그 큰 은사의 통제를 받으면서 연합되어져 가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