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구원의 은혜 (엡2:4-5) 2000.10.1 주일오전 1
2. 지식의 은혜 (마16:17) 2000.10.8 주일오전 12
3. 기도 응답의 은혜 (신4:7) 2000.10.15 주일오전 23
4. 교제의 은혜 (빌1:5) 2000.10.22 주일오전 32
5. 공급하시는 은혜 (신29:5-6) 2000.10.29 주일오전 45
6. 영적 회복의 은혜 (시119:25,65) 2000.11.5 주일오전 56
7. 시험에서 건져주신 은혜(고전10:13) 2000.11.12 주일오전 68
8. 섬기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딤전1:12) 2000.11.19 주일오전 79
9. 성화의 은혜(고후2:14) 2000.11.26 주일오전 90
10. 위로의 은혜(고후1:4) 2000.12.3 주일오전 102
11.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욘3:1-2) 2000.12.10 주일오전 115
12. 교회 생활의 은혜(시84:6) 2000.12.17 주일오전 126
13. 아들을 주신 은혜(사9:6) 2000.12.24 주일오전 137
14. 여기까지 도우신 은혜(삼상7:12) 2000.12.31 주일오전 150
1.구원의 은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4-5)
몇주에 걸쳐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특별히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아는데서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심이 깊다는 의미는 단지 기계적으로 종교의 의무에 매여있는 상태의 강도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의미의 지식과 깊이를 이해하고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붙잡힌 성도, 이 사람이야 말로 견고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기본을 갖춘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좋은 것인데 은혜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무엇인고 하니 좋으신 하나님이 가치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그럴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런 호의가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주셔서 누리게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은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은혜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을 우리들이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우리의 신앙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이 구원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자기를 아는 백성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추시고 착한 자와 거짓된 자들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고 그들 모두 이 세상에서 건강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정부를 주관하셔서 죄와 그리고 악의 위협으로부터 각자를 보호하시고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해택을 믿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사람 말고 누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합니까? 누가 이른 봄부터 시를 따라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오늘날 황금물결이 뒤척이며 금빛으로 무르익어가는 그 곡식을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할 자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 중에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이런 풍년과 그리고 이런 축복을 준 그 누군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 일을 이루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누구에게 표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혜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은혜이고 그 구원의 은혜에 의미를 깊이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기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아직까지도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눈을 떠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현주소를 보고 그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이 세상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이 만약에 구원받지 못했더라면 어떤 처지가 되었을지를 금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강력한 욕망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누구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이면 장미빛 꿈을 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지만, 몇일 전 신문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730쌍이 결혼하고 330쌍이 이혼을 하는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두 사람 결혼하면 그 중에 한 사람이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고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는 데도 왜 우리의 인생은 이처럼 시련과 갈등 속에서 아파하는지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안에 갖힌 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맞으며 죽어가는 병사들처럼 그들은 공포 속에 시달리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인구가 평화롭게 지내고자 몸부림을 치는데도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갈등의 소문이 그치지 않고 각자는 자신의 삶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하지만 왜 자신의 그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인생은 망가진 것처럼 나타나는지 사람들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는가 하면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불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요인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그 요인을 극복하고 나면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불행의 요인들이 기다리면서 우리의 인생을 예전과 다름이 없이 만들어갑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는 환자의 병든 상태가 아프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들도 역시 또한 갈등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라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거나 내적인 심각한 갈등으로 아파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런 고통과 갈등의 문제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섭리 가운데서 자신을 이 어려움 속에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하는 정답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믿는 사람들은 영혼이 깨어있는 한 자신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 대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 항거를 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이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숙명으로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이 우리에게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낮에 일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그 시름을 달래기 위해서 한잔의 술, 한 두 곡조의 즐거운 노래에 인생의 시름을 달래보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전날보다 훨씬 더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아침의 창을 열어야 하는 그런 사람들로 아마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은혜의 빛 아래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명백히 압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와 더불어서 싸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죄가 우리의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한 해결책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죄의 문제가 우리의 인생을 곤고하게 할 때에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진실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토하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늘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서 아무 대책도 없이 사망을 향하여 무방비 상태로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으며 유린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과는 얼마나 대조되는 승리의 삶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우리는 종종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어떤 의문들을 풀지 못하고 무지 가운데 있을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책임지지도 못할 인생에 대한 무책임한 조언자들의 조언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들이 시험에 닥치거나 고난이 밀려와서 우리도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지식이 결핍된 상태에서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주님의 가르침을 간절히 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열어서 우리에게 그 시험 중에 어떻게 살고 어떻게 아버지의 뜻대로 생명을 이어가야 할지를 알게 해주는 놀라운 은혜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까?
저는 인류 역사 가운데 사상으로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한 사람들이 공산주의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상가들은 맨 처음에 총칼을 들고 일어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잘못된 지식을 전파함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열렬히 그 공산주의 이념을 추정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지식의 빛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고통하는 인류 세계의 불행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위대한 지식의 빛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따랐습니다. 결과 인류는 행복해지기는커녕 수천만의 사람들이 전쟁과 그 이념의 갈등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망가진 세상, 망가진 나라들에 대해서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들은 단지 인생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견해를 말했을 뿐이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 견해를 붙들고 추종했지만 그렇게 추종한 결과 생겨난 불행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이 고요히 흙 이불을 덮고 무덤 속에 누워있을 따름입니다.
구 소련이 무너질 때에 제일 먼저 두둘겨 맞은 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레닌의 동상입니다. 모가지에다가 줄을 매어서 사람들이 끌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너희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불행하고 모순된 이 세상을 인해서 고통할 때에 이 세상에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지식의 빛이라고 던져준 그 사상대로 우리들이 믿고 살았지만 마지막에 우리에게 준 것은 가난과 전쟁, 고통 그리고 골깊은 미움밖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갈 길을 모르고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를 몰랐을 때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참다운 지식의 빛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인생이 무엇이며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내가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는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 지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짐승같이 태어나서 개처럼 먹고 개처럼 살다가 죽었을 그런 비참한 인간들이었는데 주님을 믿고 아는 사람들에게 이 참된 지식의빛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건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지식의 빛을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이 속에 놀라운 삶의 지혜가 있고 그리고 이것을 모르며 살아가는 삶이 짐승과 다름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인생에 부딪치는 수많은 사건들은 하나님의 추측범위를 벗어나는 뜻밖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더 크고 놀라운 것은 우리를 정죄 아래 있는 진노에 사람들로부터 해방시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시절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사람을 죽여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 다니는 가운데 자신을 찾는 삐라를 보면서 식은땀이 흐르며 생각하기를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 잠이 깨어 꿈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는 이야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이 구원해주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 진노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은혜인지 보십시오. 그것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놀라운 마지막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서 하나님이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 아버지 앞에 진실해지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이 너무 고귀하고 훌륭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참 큽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거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은혜가 아주 메말라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가 메말라 있는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은혜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을 가보면서 그런 것을 느끼는데 아주 굉장히 사람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합리적이고, 그래서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가 되었지만, 그런데 참 은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직장 다니다가 사람을 그만두게 하려면 오래 뜸을 들입니다. 저 사람을 그만두게 해야할텐데, 사장이 눈치를 많이 봅니다. 미국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몇번 늦게 나오면 막 출근하는 사람에게 “너 짤렸어.” “아니 그래도” “아니 짤렸어” “그럼 가방이라도 가지고 갈래” “집에 가 우편으로 부쳐줄테니까” 그러면 끝입니다. 기여하고 노력하는 것만큼 대가를 주지만 은혜는 없습니다.
(예화: 헤밍웨이의 소설에 ‘파코’ 라는 이름은 우리 나라의 철수나 순이처럼 스페인에서 도 흔한 이름인데 그 아이가 자기의 아버지에게 심각한 재산상의 피해를 주고 무 서워 도망을 갔는데 화가난 아버지의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 자식을 찾는 광고 를 내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보니 전국에서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애들이 모 였는데 그 애들은 자기의 아버지가 찾는 것으로 생각하고 온 것인데 뭔가 아버지 로부터 은혜를 받기 위해 온 것이라는 이야기)
치료하시는 주의 은혜임하네
다 인정합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힌 것, 재산을 축낸 것,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모두 인정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하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성도의 삶은 삶 구석구석에 은혜를 베푸는 삶이 배어있습니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도 결국 뭘 베푸는 삶입니까? 은혜를 베푸는 삶입니다. 가치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뭘 베푸는 삶입니까? 은혜를 베푸는 삶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서하고 기회를 주는 것,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은혜를 베푸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명한 대조가 이 가슴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의 대조가 무엇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아주 흉악한 죄인이고 가치가 없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과,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인간들을 향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큰 사랑, 이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설명입니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정말 나는 쓸모없고 흉악한 죄인인데 이 죄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으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넘쳐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정말 하나님 앞에 넘쳐야 합니다.
어제 우리 성도 한분이 공장을 크게 짓는 기공식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가서 사업을 이렇게 돌아보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1년전에 비해서 사업이 규모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회사도 여럿이 되고, 그래서 염려스러운 마음에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공격적으로 사업을 해도 안전합니까?” 그분의 대답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목사님, 맨바닥에서 시작을 했는데 다 망해봐야 맨바닥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고의 폭이 단지 하루하루에 안전에 집착한 사람보다 사고의 폭이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차안에서 조용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그 말이 어떻게 보면 경솔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보면 참 우리의 사고의 틀을 깨트려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목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게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조용히 생각해보니까 ‘아! 그래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이 우리를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덤으로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들을 잘 발전시키고 이 토대위에서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꿈들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에 비참한 죄인이었던 것 외에는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주님의 그 큰 은혜의 감격하면서 열심히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우리는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이거야 말로 정말 땅짚고 헤엄치는 장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우리는 내리는 결론이 그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를 우리들이 만약에 몰랐더라면 우리의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우리의 인생에 무슨 꿈이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짐승과 같았을 것입니다. 짐승도 여러 종류입니다. 보신탕 집에 뒤뜰에 묶여 있는 강아지도 강아지고 저 애견 센타에 드러누워서 머리하고 있는 강아지도 강아지입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남들이 버린 음식 찌꺼기를 주어먹으며 다니는 개도 개고, 외국에 있는 그 유명한 개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갖다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주인의 품에 안겨 있는 개도 개새끼입니다. 결국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다른 곳에서 편안하게 어떻게 어떻게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개같은 삶의 그 질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로서의 삶의 질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두운 눈을 열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게 하시고 주님이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셨는지 그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무엇을 통해서 행복해지는지도 깨닫게 하셨고 삶의 최고의 가치와 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도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럼 우리는 두 번째로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겨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나님과 원수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셨을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에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를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를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비’입니다. 이 자비는 무엇인가 하면 슬픔의 정서가 있는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 자비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 주는 은혜의 성격을 갖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무엇인가 하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열정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불붙는 사랑, 이것이 긍휼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은혜로 구원해주셨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 구원받을 만한 어떤 자격,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어떤 의로움을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 안에서 발견하셨다고 한다면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그 구원이 은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어떤 필연적인 의무도 하나님에게는 없었고 구원할 만한 어떤 가치있는 것도 우리 속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놓은 은혜로운 창조의 세계를 파괴했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돌이킬줄 모르는 개전의 정이 없는 악한 인간들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해 노골적으로 그 왕권에 대적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허무는 것을 마치 우리의 업으로 생각하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하나님을 향한 도전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던 그런 흉악 무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도 발견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긍휼의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가.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발로인데 이 긍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슬픔이 있는 사랑의 열정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정확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설명을 해드리면 여러분들이 아! 그게 긍휼이구나.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누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그림처럼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아들 녀석이 어느 날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보고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당신 죽었다고 치고,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유산을 나눠서 떠났습니다. 자기는 즐거움을 찾아서 떠나버렸지만 그 멀쩡하게 살아있던 자식이 부모가 살아있는데도 놀고 먹더니 유산을 반을 달라고 해서 떼어서 도망갔다더라 할 때에 그 아버지의 명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서 허랑방탕하게 그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고 그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 틀림이 없이 질병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러운 성병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난잡한 생활로 말미암아, 굶주렸습니다. 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모든 아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도 재산을 반을 물려달라고 할 때 느겼던 그 배신감,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모두 써버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에 상실감, 그리고 그 아들이 비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들려올 때에 자신의 회손당하는 명예에서 오는 손실감 이런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비참한 몰골로 거지처럼 고개를 숙인채 터덜터덜 걸어 오고 있는 힘없는 아들의 모습을 그 순간, 하나의 감정이 모든 지식을 스톱시킨 것입니다. 그 하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이는 내 아들이고 불쌍하구나. 하는 이 마음, 이 정서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모든 지식을 스톱시킨 것입니다. 만약에 그 모든 지식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긍휼은 발동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이 너무 불쌍합니다. 순간적으로 긍휼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 세상에 저렇게 몸도 아프고 다 망하고 너무 불쌍해. 저녁은 먹었을까? 그러다가 옛날에 저 녀석이 한 옛날 일이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러고 살았으니 안 망할 리가 있냐. 안 망하면 기적이지. 네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렇지. 어머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잖아. 이것은 긍휼의 마음인데. 평소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박하게 대했는지가 생각이 딱 지식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수십년을 돈 있을 때 인심 사납게 살았으니 너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 그 지식의 작동은 긍휼을 딱 멈추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하나의 묘미입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과 딱 결부시켜 보면 이게 진짜 긍휼히 무엇인지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제가 5월달에 가족에 시리즈를 설교할 때 자녀들에 대해서 두 세시간을 했습니다. 그것을 꼭 들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이 마음이 녹는 뼈저린 후회나 회개, 이런 것들이 깊이 사로잡히게 된 때는 어떤 때입니까? 하나님을 떠났더니 내 인생이 이렇게 곤고하구나. 난 아마 반쯤 죽을거야. 하나님이 날 요절을 내실거야. 이런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직전에는 뭐가 느껴지는가 하면 그런 과거의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모든 지식들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스톱하고 어째든 그 결과로 비참해진 그 순간에 정지된 화면과 같은 그 영상,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느껴질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의 아버지가 그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 탕자를 딱 본 순간, 중요한 것은 그가 재산을 나누어갖고 간 것, 그 다음에 그가 타국에서 살았던 부도덕한 삶,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두 과정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내 아들이고 지금 내 아들이 너무나 주리고 병들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현실, 그것에 대한 슬픔이 있는 사랑의 열정, 이것이 긍휼이었습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큰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아주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큰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불행을 숙명처럼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비참한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죄로 인해서 비참하게 자신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렇게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형벌 받을 인생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과정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생명을 잃어버린 비참한 상태에 되어 있는 그 인간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슬픔을 동반한 사랑의 열정이 공로없이 우리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받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감격과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서 입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를 가슴에 새겨야 하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 다시 말하면 우리 같이 공로없는 죄인들을 구원해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긍휼히 풍성한 사랑을 우리들이 날마다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구원하시고 아무 것도 우리를 위해 행하지 않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용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과거에 지은 모든 죄에서 용서받는다라고 하는 이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 자신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질 때에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실되게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다시 한번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면 주님이 치료와 회복에 은혜를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증인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이것이 은혜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긍휼히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는데 이것이 정말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양면성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 우리에게는 대가 없이 주어진 은혜입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공로없이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줄 때 누가 와서 받아갔다고 해서 손을 내민 것이 공로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우린는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편에서의 이야기고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에게 베풀어준 구원의 은혜는 거저 준 은혜가 아니라 충분히 대가를 지불한 은혜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향해서 끓어오르는 진노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참하게 죽이심으로 자기의 진노를 푸시고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이 형벌의 사실을 우리가 참예하여야 했는데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 죄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사고는 칠 수 있지만 그 사고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서 늘 부모를 부르듯이 우리가 죄는 지을 수 있지만 그 죄에 대한 결과와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끓어오르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실 때에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오늘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보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진노를 십자가에 형벌로 그리스도 예수를 깨트리심으로 푸셨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자비의 풍성한 긍휼만 부어주셔서 우리에게 화해와 용서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오늘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우리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대부분의 모든 문제도 더 이상 고민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이 붙들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렸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원수된 모든 것을 못 박아서 화해와 용서와 구원의 은혜의 길을 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가 없는 시대에 곤비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사도 바울이 가슴벅찬 감격으로 고백했던 그 고백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은사, 곧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들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은혜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할 것 같으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아들보다는 소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서 구원해주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하는 의무는 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을 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빚진 것임을 알고 생명이 있는 동안에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르심이 아닐까요?
우리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살아갈 때마다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한 가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은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하나님과 및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모든 갈등은 우리들이 삶의 목표를 하나님 앞에 바꾸지 않는 한 종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잠시 잊었던 우리 자신의 신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자기를 깨트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생동안 그 사랑에 빚진 사람들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은혜를 증거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동안 이 세상에 있는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우리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뒤돌아보지 않는 정돈된 삶의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을 베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그 피로 사신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자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동안 곤고하거나 유혹받거나 시련이 오거나 뒤로 물러서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살아가기를 힘쓰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지식의 은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도 모르는 채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일생을 살다가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은혜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로 살게 해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모르는 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 큰 구원과 사랑을 받고 주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들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찬송가 404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어찌다 쓸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써도 그 기록한 것을 다 둘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그 사랑, 구원의 은혜는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오늘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기만 하셨을 뿐 그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아마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번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교육을 받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리 늦게 교육을 시작하는 집안이라도 대게 5-6세 정도 되면 정규적인 교육을 시작합니다. 유치원입니다. 불란서 같은 곳은 2년 반 정도 되면 정규적인 교육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여튼 5-6세 정도 되면 교육이 시작되어서 24세쯤 되어야 대학을 졸업하니까 거의 20년 가까운 교육을 받는 셈입니다. 60을 살다가 죽는다고 할 것 같으면 40년을 살기 위해서 20년을 교육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불합리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오래도록 학교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 인간들 중에서도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인생을 정말 가치있게 살아서 한 사람이 자기를 실현하고 이웃에게 보람을 안겨주고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라는 소년처럼 숲속에 버려졌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 사람의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생존한 사람,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해 놓으셨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을 때 우리가 접했던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과 장차 우리를 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가장 단순한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밖에는 우리들이 더 이상 아는 지식에 진전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삶은 마치 구원받았지만 우리의 삶은 전혀 구원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행복, 기쁨 이런 것들을 소유하며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세상은 모글 리가 버려졌던 밀림과 같은 곳입니다. 곳곳에 죄와 유혹이 있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곳 보다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기가 쉬운 곳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 속에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우리에게 지식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삶은 정말 죽은 개처럼 이 세상에서 뒹굴다가 사라질 그런 인생들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가장 역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때가 언젠가 하면 무슨 짐승인지도 모르는 데 길거리에서 차에 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를 수많은 차들이 밟고 지나가서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더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무렇게나 살다가 하나님 원망하고 어느 날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다가오는 자동차와 같은 죽음에 치여서 그렇게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졌을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를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더라면 전에는 교회를 안 나오면서 짐승과 같이 살았을 사람이 이제 구원의 은혜를 주시면 교회를 나오면서 짐승처럼 살 사람들인데, 출석 짐승이 되었을 사람들인데 그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식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지식의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 진리의 빛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할 때는 갈등하고 고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는 마음에 신령한 기쁨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아침의 풀끝에 달린 이슬과 같은 인생에 그 허무함을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비록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고 들풀과 같이 하찮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맺은 그 관계를 인하여 인생에 단조로움과 그리고 인생에 허무함을 뛰어넘을 수 있게 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으며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지난 주간에 구원의 은혜였다면 이번에는 지식의 은혜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던 두 가지 큰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처음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 내가 복음을 듣고 나니까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복음을 들려주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가 보다. 그리고 친구에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저 사람들은 이상하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처럼 감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때 깨닫게 된 것은 ‘아! 구원의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셔도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놀라운 변화를 받게 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들었던 그 의문 가운데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전에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진짜 아무렇게나 살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쭉 깨닫고 나니까 이 놀라운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이전에 나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벌써 이런 신앙을 가졌을텐데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이 참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심히 근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구원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준님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이 지식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이 가이사를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생애에 남을만한 아주 중대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실 이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아니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혹은 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그러든지 간에 그거하고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람들이 사기꾼이라고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선생이라고 그래도 사실은 구세주였고 나사렛의 촌동네에서 온 그 촌에서 온 젊은이라고 그랬어도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구원과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문으로 삼아서 통과합니다. 그게 누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공자가 없어도 유교는 존재합니다. 석가모니가 없어도 불교는 존재합니다. 제가 독실한 불교 신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하고 대하를 해보니까 그 사람의 결론은 다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절에 불상이 있는 것을 반대한다고 합니다. 깨끗이 치워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진정한 부처는 석가모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금을 입히고 쇠덩어리로 형상화할 때 그때 이미 진정으로 자신들이 바라보아야 할 부처는 이미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예수님 이렇게로 돌아서면 진짜 영적인 인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그런데 불교 신자들도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염려스럽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때에 고타마시타르타가 있었든지 없었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호메트 없이도 얼마든지 회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에게 매인 종교입니다.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그분은 죄인으로 태어나셨으며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우리 모두 다 헛된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펼치면 어디를 펼치든지 성경은 동일하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나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면 당신도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도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쓰레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펼쳐서 “그는 살아계신 주는 그리스도시오. 그리고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잘하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 이제 내가 당신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켜 드리겠습니다. 자, 제 손을 잡고 신앙의 세계로 가실까요? 탁 붙들고 지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다 말하게 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심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백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백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인식시켜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세례 요한과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메시지도 기가막히게 일치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그리고 그 근엄함, 그리고 결단력이 있는 아주 청징한 메시지 이런 것들이 세례 요한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가정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핍박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모습, 이런 것들이 세례 요한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저는 들어보니까 엘리야라고 그럽니다. 엘리야는 구약에 아합 왕 때의 선지자였는데 능력의 선지자의 대명사였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고치는 이런 광경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본 일도 없고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일도 없는데 들은 적은 있다. 언제인가, 그 능력의 선지자의 대명사였던 그 걸출한 엘리야라면 이런 일을 했을 것이다. 아마 이 분이 그런 분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요. 예수님이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심판을 예고한 것과 심판받을 그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많이 울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 심판이 다가오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해서 죄악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보며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본 많은 사람들이 전설속에서나 들어왔던 그 예레미야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그냥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러던데요.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이라고 하는 인상을 주는 아주 명징한 복음 선포, 이런 것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에 대한 하찮은 평가입니까, 아니면 굉장한 평가였습니까? 그 당시로 보면 굉장한 평가였습니다. 이런 평가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가르켜서 나사렛이라고 하는 그 시골에서 온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 젊은이를 보면서 그를 가르쳐서 엘리야 하고 감히 비교를 하고 예레미야와 감히 비교를 하고 세례 요한은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세례 요한하고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누릴 수 없는 엄청난 그 시대의 종교적인 평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은 그 모든 평판을 받으시면서도 하나도 기뻐하시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일언방구도 대답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확인하신 다음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청사에 길이 남는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 본문을 보면서 그럼 뭐 당연하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을 해서 그렇게 복을 받았다면 나는 더 받아야지. 난 한번도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냥 단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런데 다릅니다. 왜 다른가 하면 이 당시 문맥에서는 앞에 나온 고백도 힘들었지만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불가능에 가까운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을 한 것을 알게 되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신성모독으로, 그러면 왜 그러는가. “주는 그리스도시오”라고 그랬는데 이 그리스도는 희랍어로 ‘크리스토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메시야라고 하는 그 사상, 그것이 그 시대에 가득히 펼쳐져 있는 상황에서 나사렛이라고 하는 시골에서 온 그 젊은이, 옷도 남루한 그 젊은이, 무슨 무장 세력도 갖추어 있지도 못하고 가문과 문벌같은 것들을 과시할 수도 없는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온 그 젊은이, 이상하게도 다니는 곳이 빈민가, 창녀, 노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안다고 맨 그런 사람을 찾아 다니는 그 젊은이를 가르켜서 메시야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메시야가 무엇인가?
구약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이 메시야 사상은 뿌리가 굉장히 깊습니다. 지금 그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어째든 결론을 내리면 구약 시대에 이 메시야는 굉장히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그래서 율법과 정죄가 가득찬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 속으로 그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갈 어떤 영적인 중보자로서 그런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시대가 끝나고 소위 이야기하는 신약과 구약 사이에 중간사 시대라고 하는 것이 한 4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것이 민간 신앙의 차원에서 변천을 하면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이탈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아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이 땅에 영원한 영적인 왕국을 건설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지자로서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자기들이 가지고 놓여 있는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역사적인 상황하고 연결을 시키면서 구약에 나온 성경적인 메시야의 사상 속에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상을 주입해서 부풀려서 괴상한 메시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메시야는 무엇인가 하면 아주 인간이면서도 신에 가까운 초인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정치적인 큰 권세를 가지고 이적을 일으키는 것도 불사하는 그러니까 좋은 것은 다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매우 특별히 가깝고 인간이면서도 신에 가깝고 그러면서도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고 그러면서 친히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고 강력한 용사로서 전쟁하시는 하나님을 대변하기에 충분한 사람, 그러면서도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런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상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아니 어떻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 이 놀라운 기적이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 사람은 메시야임에 틀림이 없다. 매일 보리떡 5개와 물고가 2마리만 갖다 놓으면 국민 식생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입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을 고치는 장면을 보면서 의료보험이 필요가 없겠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장례식이 필요없겠구나. 이런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상과 일치하는 어느 부분들을 본 것입니다. 전체를 본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막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다. 그래서 열광하던 장면이 무엇인가 하면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호시야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가 무엇인가 하면 호시야 구원해주십시오. ‘나 플리즈’ 그런 것입니다. 제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런데 뭐 호산나 교회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술집 간판이 ‘호산나’라고 붙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 술 먹고 죄 지으면서 간판은 우리를 구원해주시옵소서 그래야지, 교회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호산나 호시아나’ 우리를 구원해주시옵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면서 그들이 꿈꿨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메시야가 와서 이루는 왕국의 모양이 어떤 왕국인가 하는 그것에 대한 전형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윗 왕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주께서 그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그럴 때 그 나라가 바로 무엇인가 하면 다윗 왕국입니다. 그 다윗 시대의 영화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를 점령하고 그 나라를 식민지 삼아서 조공을 가져오고 열방의 왕들이 다윗 앞에 와서 머리 숙여 절하는 그때 그 찬란한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메시야입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메시야와 매일 단벌 옷을 입고 다니면서 그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그 젊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그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시대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와서 그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그분이 참 메시임을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고백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고백을 하면 사실 그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돌로 쳐야만 했습니다. 무엇으로? 신성모독의 죄로,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진짜 혁명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바로 교회가 서는 토대가 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이 신앙의 고백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앙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장면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 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불의에 고백을 하여야만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있고 난 후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내 아버지시니라”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우리 두가지 진리를 배우게 되는데 “복되도다” 또 하나는 “내 아버지시라” 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복되도다”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복되도다” 우리는 이 세상에 정말 많은 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정말 기쁜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성도들이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참 기쁩니다. 지하실에서 매일 가난하게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올 때도 기쁘고 그리고 작은 집에 살다가 크고 넓은 집으로 이사갈 때도 정말 마루에서 뛰고 싶을 정도로 기쁩니다. 우리 마루는 아니지만, 너무 좋습니다. 또 어떤 때 기쁜가 하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기쁩니다. 그러면 또 누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애는 공부도 못해도 몸은 튼튼한데 안 기쁘세요? 그것도 기쁩니다. 그래서 말도 있잖아요.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냥 빚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다가 하나님이 사업에 복을 주셔서 사업이 번창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3,4,5,6순위입니다.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복, 이것을 오늘 여기서 지식의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사실 무엇이 복됩니까? 예수님이 오늘 베드로를 무엇이라고 부르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바’는 무엇인가 하면 아람어로 ‘바르’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나’ 요나의 아들 시몬아입니다. 아니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름을 부르셨을까요? ‘시몬’ 그러면 되지, 시몬 그러면 오늘 날로 말하자면 개똥이처럼 이름이 하도 흔해서 ‘시몬’ 그래서는 사람들이 알지를 못합니다. 그 많은 시몬 중에 누구 하면 왠 시몬, 그러면 ‘요나의 아들 시몬’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그냥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한 골목에 살던 애 이름이 개똥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호적 에 이름을 올릴 때 열릴 개자에다가 동녘 동자를 써서 개동이라는 이름인데 부르 기를 개똥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아무렇게나 지었는가 봅니다. 성경에 시몬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렇게 정말 시골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지내던 무지랭이와 같은 그런 인간을 예수님께서 “복되도다”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복됩니까? 고기나 잡으면서 그냥 촌사람으로 그렇게 지내고 특별히 배운 것도 많지 않고 그렇게 살았던 그런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복되도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진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복 다음으로 가장 커다란 복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지식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소중한 은사는 지식의 은사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이 지식을 선물로 받아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주님이 우리들에게 살아가기 원하시는 길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죄악된 세상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는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지식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너무나 비참한 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그 구원도 구원다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구원은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교회의 출석은 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결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워낙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캄캄한 무지의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삶을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래서 실패와 좌절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셨을까요? 주님의 자비와 인자에 의해서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나님이 내 동생도 아니고 우리 엄마도 아니고 교회에 오래 다닌 우리 아저씨도 아니고 죄악된 길을 방황하던 탕자와 같은 나에게 주님의 그런 사랑을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게 하셨을까요?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지금도 눈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이 전해질 때에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믿어지게 하였을까. 그런 구원의 은혜를 맛보았지만 그 이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데 왜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알게 하셨을까? 그래서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 우리들에게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왜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젖물려서 우리를 먹이시고 두 손을 들어 우리를 걸음마 하게 하셔서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걸어올 때마다 씻기시고 닦으셔서 그래서 주님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이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의 찬란한 진리의 지식의 빛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남다른 삶을, 남다른 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찬란한 지식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뇌하면서 삽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만족한 돼지 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이 정말 내가 이것을 몰랐었더라면 훨씬 자유할 수 있었을텐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거침돌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몰랐더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양심에 가책을 덜 받았을텐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 쓸모없고 아무 가치가 없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랑, 탕자와 같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동구 밖에서 눈이 짖무르도록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그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고 넘어지는 것 같았으나 일어났으며 죽은 자 같으나 살았으며 실패한 자 같으나 다시 싸우는 사람들로 설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비쳤던 그런 놀라운 지식, 남들이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지식, 그런 놀라운 지식의 눈을 뜨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오래 동안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어떻게 이런 찬송을 부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저 개인적인 생애를 생각할 때 항상 그런 아픔이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 저의 인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포구 안에 있는 인생이였습니다. 잔잔한 포구 안에서 닷줄을 내리고 돛도 내리고 갑판에서 음료나 마시면서 밀짚 모자를 쓰고 배머리에 앉아서 포구에 이는 바람이나 즐기던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남이 못 본 진리의 세계를 알게 하신 후에 저의 인생은 바람잘 날이 없었습니다. 광활한 대지와 같은 곳, 혹은 아주 드넓은 바다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폭풍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폭풍이 너무 거세서 난파를 당해서 거의 배가 부서질 것 같은 상황을 지나게도 하셨습니다. 저의 온 몸은 악마의 손톱자국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쉼이 없는 삶을 달려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괴로운 날도 많고 아프고 사실 변화받기 전에는 그렇게 눈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만나고 변화받고 나서 정말 그 많은 눈물과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순수하게 주를 위해서 당한 고통도 있지만 나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당한 고통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은 박해도 있었습니다. 어째든 그런 것들의 대부분은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큰 진리의 세계를 알지 아니하였더라면 당하지 아니하였을 고통이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 육신이 쪼개지는 것과 같고 마치 죄 속에 있어서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는 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한 가지, 제가 수시로 마음 속에 기록한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그 무지의 세계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많은 고난이 있고 더 많은 날들을 그 지식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가 있고 그런 지식으 빛, 많이 받아서 하나님의 지식의 은사에 진 빛, 부채 때문에 하나님이 남보다 더 고난으로 가득찬 길을 걷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힘들고 괴롭고 눈물을 흘리고 원망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싫다. 아무리 평안해도 다시 그 무지의 세계로 돌아가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무덤과 같은 삶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생기도 없고 사랑도 없는 그 무덤과 같은 삶, 그것은 고난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희망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세계로 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몰래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때를 지나면서도 주께서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실 때에 나는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진리의 세계,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배 시간에 대책도 없고 졸다가 가는 사실상 죽어 있는 사람들, 무엇이 선포되든지 그 사람들과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 예의를 지키는 침묵 속에서 단지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비참한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지식의 은혜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은혜입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님 사랑 안에 하나되어
우리 주님 오시길 간절히 원하네
아무리 이 신앙의 세계가 고통스럽고 눈물이 나는 세계라고 하더라도 어두움은 싫습니다. 빛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은 최고로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복된 사람들임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은혜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히 우리를 주님에 대해서 알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외국에 유학까지 가서 공부하고 싶어하고 보따리 싸서 매일 뭐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고 하면 천리를 불허하고 부지런히 가방들고 쫓아다녀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진리의 세계에 눈먼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셔서 남들이 보지 못한 진리의 세계를 알게 하시고 남들이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어두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복음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전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르쳐도 엉뚱한 소리나 계속하는 교인들을 만나면 마음이 상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소리나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이제 다른 것을 들어봐야 되겠다라고 그럴 때 속상합니다. 에이 저걸 가게 내버려둬, 그러다가 이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한 때는 그랬는데. 하나님이 아무리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해도 귀막은 자가 되고 주님이 보여주셔도 눈감은 자가 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팔 내미셔도 그 팔을 잡을 줄 모르는 무감각한 자가 되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까? 다시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전혀 교만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신앙을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의 은사도 구원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저 사람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께 더 많이 은혜 받았다는 것밖에 없는데 그 은혜는 공로없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 사람을 보면서 내가 교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신앙의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아직 까지도 어둠 속을 헤매는 한심한 지체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저러고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도 원래는 그렇게 눈감고 귀먹은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이 복음을 알게 하셨다 이런 신앙의 고백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지식의 빛, 이 놀라운 지식의 은혜 아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많이 맡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기억을 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이제는 착하고 진실되고 충성된 종이 되어서 나를 이런 지식을 받지 못한 사람들 보다 훨씬 진실한 삶을 살고 이런 지식이 없어서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하나님 사랑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기도 응답의 은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바로 앞에 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모세는 이제 더 이상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가나안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이제 고단한 인생의 여정을 끝내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야 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낳은 부모만큼 자식들을 잘 아는 사람이 없듯이 40년 동안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의 길을 걸어온 모세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좋은 성품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쉽게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떠나는 견고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품 또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자신이 죽은 후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모세가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신명기를 볼 때마다 사도 행전에서 바울이 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유언적인 설교를 하는 장면을 생각합니다.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라고 할 때의 이 ‘신’ 자는 우리가 ‘신신당부한다’라고 할 때의 그 신자입니다. 이미 다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듯이 간절히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를 새겨주고 그 진리의 그들을 부탁하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야 할 이유를 기도 응답에 은혜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이렇게 가까히 친근하게 대해주셨는데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민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이 그 백성들을 그렇게 친근하게 대해주고 응답해준 그 신이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너희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고 이런 놀라운 은혜를 너희들이 받았으니 이제 너희들은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변함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따르는 그런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중동은 고대 문화에 발상지이기 때문에 신들의 천지였습니다. 고대 문화에 발상지 그 한복판에 신들이 있었습니다. 예외없이 이 중동 지방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는 이 중동 지방 역시 신들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그 신이 아주 월등하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신이 아니라 아주 야비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탐욕스럽고 변덕이 심한 그런 신들이 바로 그 근동 지방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신관이 우리 조상 전래로 내려오는 이 신관과 아주 유사합니다. 우리들이 보면 그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나 화가 생길 때에 신을 찾지, 복받고 잘 살 때 신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은 늘 인간에게 와서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인간을 괴롭히는 그런 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섬기는 사람의 마음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이라기 보다는 강요받는 식의 섬김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많은 신들을 나라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그 신이 그런 신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이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면서 하나님께 징벌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그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었는가 하면 무엇인가 자신에게 결핍이 있고 그 결핍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그 기도의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광야에서 모세에게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그 지옥과 같은 애굽의 생활에서 탈출하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거기서 너무 혹독하게 노역을 하니까 견딜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부르짖은 것이 정말 정상적인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는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히 부르짖는 것도 기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때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짖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품이 도저히 그것을 묵과할 수 없게 끔 하나님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 그것도 하나님이 부르짖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정상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백성들이 계속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아픔이 되면 이것도 하나님이 부르짖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여튼 그런 부르짖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불러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것을 드러내보여 주시고 그들을 그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해 내어 광야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기는 했지만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살게 하시는 동안에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존속해 남을 수 있었던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목마를 때에, 양식이 없을 때에, 대적들을 만났을 때에, 위기를 만났을 때에 그 때마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지도자는 부르짖었고 부르짖는 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산 것만은 아닙니다. 불순종 하던 때도 있었고 하나님을 거스르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든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부르짖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주셨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이제 가나안 정복을 눈 앞에 두기 가지 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 어린 제 마음에 신비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쩜 저렇게 본 것보다도 더 실감나게 하나님의 대해서 말하고 굳게 믿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저 인간들을 저렇게 홀리게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에 가보니까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막 이렇게 강요하고 주입시키고 의식화 하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교회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상으로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 비밀이 도대체 무엇일까? 나도 어떻게 되면 저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도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결론 때문에 교회를 찾았는데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처음에 주님을 믿을 때는 철야기도회에 나가서 그냥 막 열렬하게 기도를 합니다. 목이 쉬도록 기도를 하고 1부 순서가 끝나고 나면 2층 교회인데 내려와서 저쪽에 판자로 만든 화장실이 있는데 거기를 가서 가만히 볼일을 보면서 담배를 피면서 거기서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아까 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열렬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갑자가 밖에 나와서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게 말짱 거짓말이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가슴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신앙에 성장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과 의심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이제 담배를 다 피고- 저도 참 연구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껌씹고 은단 먹고 그리고 2부 순서로 올라갑니다. 다시 간식을 먹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하나님 사랑없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2부 순서가 끝나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참 이상하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진짜 나도 하나님 본 적이 없는데, 누가 하나님 본 적이 있다면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도 똑같이 그 사람들처럼 본 것보다도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안 살아계신가를 의심하면서 순간적으로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는 연약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이시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기도 응답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가막히게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세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이 있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많은 것들을 주실텐데 한번 생각해보아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 가운데 너희말고 누가 구원을 받았느냐. 그렇게 구원해낸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께서 그 광야의 세월동안 너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먹이시고 살리시고 지키셨는지 생각해보아라. 만나를 내리시고 그리고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고 의복이 낡아 떨어지지 않게 하시면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하셔서 너희들을 살아오게 끔 만들어주시지 않으셨느냐. 그러나 앞으로 너희에게 줄 축복도 크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너희들 만큼 가까히 친근하게 대해주신 민족이 없다. 그리고 너희들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주시는 분이었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인격적으로 가슴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또한 그랬습니다. 거미줄과 같은 믿음으로 이만큼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의 오랜 신앙의 여정 속에서 순간순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며 우리를 인도하신 그 기도 응답의 은혜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인 것처럼 믿을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그 어떤 보증보다도 더 훌륭하게 믿으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 이전의 문제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가끔 저보고 누가, “그러면 앞으로 열린 교회는 그렇게 해서 이사를 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나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질문입니다. 지금 내게 당장 급한 것은 엄동설한이 오는데 우리 이 식구들을 길거리에 쫓겨나지 말고 어딘가 포근한 예배 처소가 있어서 거기서 톱밥 난로라도 때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그때 가서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됩니다. 모릅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속이 편안합니다. 솔직히 신경은 쓰지만 걱정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편안합니다.
(예화: 처음 교수로 학교에 부임하셨을 때 월급을 많이 줄테니까 다른 일을 하지 않는 다는 약속을 하고 교수 생활을 하셨는데 어느 날 밤에 하나님께서 잠을 재우지 않으시고 기도하게 하시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유리하는 영혼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게 해달라는 기도였는데 마음에 그렇게 교회를 하려는 생각이 없으셨는데 자 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기도의 내용에 의아심을 가지며 계속 기도했으나 마음에 영혼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되어 93년 12월 12일에 개척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작은 공간에 많은 영혼들을 불러주시고 그곳이 가득 차니까 하나님께서 전혀 뜻하지 않는 이곳으로 옮기셔서 이곳이 처음은 넓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곳도 이제는 거의 차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옮기시게 하시는 앞으로 의 많은 문제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는 미래를 멀리 바라보는 예리한 판단과 비전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너무 멀리 바라보지 않고 매순간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실제적으로 동행하는 삶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폭이 넓고 얕은 개울을 건너가는 징검다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화: 시골에 가면 폭이 넓고 물이 얕은 개울에 돌로 놓여 있는 징검다리는 비가 오거 나 눈이 오면 미끄러워 때로는 빠지기도 하면 옷을 버리고 때로는 돌덩이가 흔들 려 꼭 넘어질 것 같은 위기가 있기도 하다는 이야기)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하나는 비유하자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캄캄합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껏 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었는데 그런데도 그 경험이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 언제든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머리 새카만 젊을 때만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하얗고 인생을 이제 거의 마무리할 단계로 갔는데도 아! 내가 진짜 인생을 모르는구나. 진짜 인생 길에는 정말 나 혼자서는 인생의 길을 걸을 수가 없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겠구나. 그리고 백발의 할아버지도 인생에 어느 지점에서는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경험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되고 새롭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그런 캄캄한 위기를 만날 때, 그때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대책이 없습니다. 그냥 울부짖으면서 허공을 향해서 몸부림치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용감해져서 낭패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캄캄한 상황 속에서 대안이 있는데 그 대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간절히 기도하면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손을 잡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으면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빛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어디를 딛어야 할지 우리가 건너뛰기를 해야 하는 징검다리가 어딘지 우리는 몰랐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것을 딛으면서 하나하나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들이, 어떤 사람은 전화로, 편지로 저에게 충고를 합니다. 당신이 혹시 큰 교회를 하려는 꿈에 불타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복잡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사치스럽지가 않습니다. 하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내게 맡겨줄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이 세상에서 망가지고 너무 곤고해져서 그래서 이 교회 문을 두드리면서 살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문 앞에 쓰러지는 그 곤고하고 지친 영혼들을 품고 싶다는 소망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외면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때는 교회문 밖에서 진짜 생사의 고비에서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처럼 되어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제 우리의 인생이 막차를 탄 인생이라고 마지막으로 문고리를 붙들고 두둘기면서 그 성전 앞에 엎드려졌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만원버스에 밀고 겨우 탄 다음에 그 다음 정거장에서 그만태우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자기도 타지 말지,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태우지 말라고 그러는데 자기도 사람을 죽일 듯이 밀면서 탔으면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셨고 우리가 여기에 와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고통과 견디기 힘든 아픔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지금 무슨 그런 쓸데없고 사치스러운 그런 생각을 할 그런 계재가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한도 안에서의 비전입니다. 그 한도 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자기 생각이지, 그것 없이는 그런 세심한 기도 응답의 은혜가 없이 다른 모든 인간의 계획들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우리의 걸어온 인생의 길은 정말 징검다리입니다. 징검다리는 친구들 하고 손을 잡고 건너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다리나 그렇게 가는 것이지, 징검다리는 혼자 뛰어서 건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혀 우리의 인생에는 계획이 없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비참한 존재들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제껏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우리의 모든 과정은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응답받은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에 수준이 어리고 바보같았을 때는 기도하는 것도 바보같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가 바보같이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슬기로운 자처럼 알아들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기도 응답의 징검다리 하나하나를 밟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서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을 돌아보니까 어쩜 그렇게 아득하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걸어온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나온 신앙, 우리의 그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 일컬게 하셨는가.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가’ 다 생각해볼 때 결국은 우리가 은혜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는 인간들에게 기도할 마음을 주시고 그 응답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들에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신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우리들이 믿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전에 어린 저처럼 주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 경계선상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하는 그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는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나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세계 안에는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들이 있는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비밀을 알지 못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은혜에 비밀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못할 때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은혜를 믿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오늘 모세의 고백을 똑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가까이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친근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그런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사랑, 그런 응답의 은혜를 받았고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체험에 붙들려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 사랑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거기는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이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정복을 위해서 싸우기만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고 또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에게 있어서 걱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들이 가서 승리를 얻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면 이제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모세는 지도자로서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은 모세가 거의 낳다시피한 백성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면서 그들의 성품과 기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승리가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면서 안심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속히 패역해져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될까 하는 깊은 두려움이 이 모세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그 은혜는 너무나 크고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양식으로 살았고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전쟁들을 이기고 원수들을 물리쳐서 유랑하는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선진나라의 백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땅을 공격할 차비를 차리고 있는 왕성한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기도 응답의 은혜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너희들의 그 목소리를 들어서 응답해주시고 그리고 그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너희의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오셔서 너희들을 만지고 주장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인생에 대안이 무엇이냐, 이런 하나님을 너희들이 어떻게 버릴 수가 있으며 이 하나님을 떠나서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제껏 너희들이 하나님과 함께 숨쉬고 먹고 마시며 살아온 것처럼 또한 앞으로 너희도 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없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나도 오늘 모세처럼 여러분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안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사신 우리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최종적인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의 대안입니까? 유일신 신앙이 우리의 인생에 대안이 될 수가 없다면 무엇이 우리의 대안인가 하는 것입니다. 위기와 고난 속에서 인생에 곤고함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든지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의 인생에 대안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신앙이 생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를 죄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소망이 없는 (?)건져주시고 광야의 곤고한 길을 승리하며 이기게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영광스러운 기업을 눈앞에 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그 죄가운데 건져주시고 곤고함 가운데서 살려주시고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빚지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에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 그것 말고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또 다른 인생에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지나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은 후에 새로 태어난 세대들을 중심으로 이제 가나안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들을 지켜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 앞에 받으면서 살아오게 된 그 지난 날들을 회상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광야와 같은 인생 길에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광야의 길을 모두 지나와서 이제는 본향이 눈앞에 보이는 나이에 이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 막 주님을 믿어서 고달픈 광야의 생활, 모험과 그리고 창조의 정신이 어우러진 신앙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광야 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의 인생에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매순간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에게 답변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어둠 속에 빛을, 고난 속에 평안을, 시련 속에 인내를, 고통 속에 믿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에 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믿음의 생활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때에든지 주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고 신실하게 자기를 버려 충성하며 사는 동안에만 주님께서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순종과 어두움 속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기의 백성들의 울부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은혜에 빚지면서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벌써 포기하고 멸망했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거미줄 같은 믿음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와서 주님의 또 다른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온 인생에 여정이 그러하다면 앞으로 남은 우리의 인생에 남은 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빚지면서 산 것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에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껏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곤고할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련, 우리의 지혜로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의 갈림 길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수시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주님 밖에는 우리의 목자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마음을 다해 자기의 이름을 구하고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은혜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예전에도 기도 응답의 은혜에 빚지면서 살았고 앞으로도 그 기도의 응답에 빚지면서 살 계획 밖에는 우리 인생에 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일평생 사는 동안에 기쁘게 주님의 그 은혜에 빚지고 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들이 되는 것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에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외에 무슨 대안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제껏 우리를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뿐이지 우리에게 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종종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의 도움이 다 끊어진 것 같고 주님이 마치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캄캄한 때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신기하게도 이제껏 주님의 기도의 응답에 은혜로 징검다리처럼 우리의 인생을 걸어왔다라고 하는 미래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런 과거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살아왔다.’라는 고백만 있으면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 결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앞에 대해서 믿음이 없으면 걸어온 인생의 길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고백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우리의 약함을 다 고백해도 주님의 강함만을 굳게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손내미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더 많이 살고난 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이렇게 살아온 인생의 모든 길이 기도 응답의 은혜로 살아온 믿음이었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으나 응답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보잘 것 없는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우리 되게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4.교제의 은혜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5)
몇 주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째 주일에는 저희들이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만약에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짐승처럼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령을 아는 지식을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의 삶은 동물보다 조금 나은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거스르고 짐승처럼 살아갔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도 응답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도의 은혜와 그 기도를 응답하시면서 우리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고, 오늘 네 번째 주에는 교제의 은혜의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래 여기서 나오는 ‘교제’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교제’라고 하는 말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후로부터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고 하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원래 희랍어에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이 말은 공동체적인 삶, 혹은 공동체 생활을 가르키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의 삶, 그것을 가르켜서 ‘코이노니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성경 속으로 들어와서 쓰여지게 되면 전혀 다른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로 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그런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의 삶을 가르키는 말은 맞는데 그것은 그냥 함께 모여서 사는 공동체적인 삶이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기초가 된 코이노니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고 하는 단어가 성경에 나타날 때 이것은 단지 사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끼리 함께 사귐을 갖고 그 사람들이 물건을 나누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런 그림이지만 그 동기 자체가 인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 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지체들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코이노니아를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인격의 문을 여는 넓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사석에서 하신 말씀이 요즘 교인들은 등록할 때 심방을 오지 않 기를 바라고 자기 이름은 말해도 직업이나 연락처를 말하기를 꺼리는 베일에 쌓 인 채 교회 생활을 하려는 신자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들은 대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복잡한 게 싫다. 조용히 살고 싶어.’ 무슨 영화제목 같지 않습니까? 조용히 신앙 생활하고 싶다. 그러고 내 할 일은 내가 할 의무는 한다. 그러면서 십일조도 하고 출석도 할테니까 -그 사람은 십일조와 교회 출석을 하면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교회가 뭐 십일조에 굶주렸습니까?- 그렇게 할테니까 자기를 이제 좀 제발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배경을 보면 대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신앙의 맛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예전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도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 관계에서 오는 그 고통스러움들을 이 교회에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도 그 사람들을 잘 알고 싶지 않고 그들에게 나도 자세하게 나를 알리고 싶지 않고 익명의 신자로서 신앙 생활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그러면 그렇게 깊은 상처를 교회 안에서 맛보겠는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깊이 내부에 들어가서 진짜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상처를 받고 그랬을까? 물론 그것은 개인의 문제도 있고 또 그 사람과 만났던 다른 교회의 모든 식구들의 미성숙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가 상처받은 주된 원인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들이 나누었던 교제, 즉 코이노니아의 기초가 뭔가를 결핍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중심되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코이노니아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또 그 상처를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코이노니아의 기초가 되면 상처가 전혀 없고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곤욕스럽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전혀 없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완전한 사람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분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야비한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려고 하는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이기적인 심성 이런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찌끼처럼, 그러니까 그런데서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그런 상처와 고통을 인간 관계 속에서 받는 사람이 자신이 지체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코이노니아에 기초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대한 헌신된 믿음을 토대로 가진 코이노니아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은 상처를 입어도 주님과의 코이노니아 속에서 이것이 치유가 되기 때문에 한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에 한맺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짜 많습니다. 교인들만 한맺힌 게 아니라 교역자들도 그러합니다. 옛날에 아는 목사님은 자기가 교회에서 다시 부목사를 하면 인간이 아니다.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예화: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목회지에 부임을 하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교회에 자기 를 다 드리겠다는 결심으로 자기의 재산을 털어 교회에 바쳤는데 젊은 목사가 무 슨 일을 해서 그렇게 돈을 모을 수가 있었는가 하면서 그것이 문제가 되어 두고 두고 문제가 되어 상처를 받은 목사님이 자기 후배들에게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이야기)
교회 안에 그렇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과의 코이노니아로 그칠 경우에는 그 상처가 그대로 남습니다. 무엇으로도 그 앙금이 가셔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원래 좀 졸졸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좀 이렇게 호방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꽁하고 품고 있고 그럽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뭐 좀 걸리는 것이 있으면 막걸리라도 한잔 먹고 소리 지르고 나면 다 풀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저를 이해해주십시오.” 그러면 꼭 “기도해봅시다.” 뭘 기도해봅니까? 이해하면 되지. 그렇게 꽁하고 있습니다.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은 싫습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코이노니아 자체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코이노니아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그런 교제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는 상처로 문제는 문제로 그대로 남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그는 감옥 속에 갖혀 있습니다.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처지가 되어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자주 장수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바울을 통해서 세우게 하신 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많은 사랑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너희를 위하여 기쁨으로 간구하는 이유는 무엇에 대해서 감사하며 간구하는가 하면 “너희들이 처음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교제함을 임함이라”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복음에서 교제함을 임함이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이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감사한데 그것은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나 또 아니면 교인들이 부자가 된 것이나 그런 것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첫날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준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지금까지 너희들이 복음에서 코이노니아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복음에서 코이노니아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서로 공동체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한데 그 코이노니아는 복음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입니다. 복음에서, 혹은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코이노니아, 에이스톤 요한겔리온’ 직역을 하자면 그 복음 속으로, 혹은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교제라 그런 뜻입니다.
복음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기로 한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곧 기쁜 소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와 형벌 아래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교제는 교제인데 그 복음으로 한 교제, 혹은 교제를 통해서 복음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가는 그런 종류의 교제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제는 무엇으로서 우리에게 온 것인가. 우리는 흔히 결국은 미워하면서도 형제들을 버리지 못하는 정황을 볼 때마다 흔히 쓰는 속담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피보다 더 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혈육의 피보다 더 진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가족들에게 박해를 받아본 사람들은 이런 제목으로 박해를 받아봤을 것입니다. “넌 도대체 교회만 가서 사냐?” 그런 것, 또 “교회에 갖다가 그렇게 바치면서” 심지어는 “교회 다니는 누구한테는 그렇게 껌벅 죽게 잘해주면서 눈에 보이는 네 형제들에게는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사실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형제들이 그런 말을 잘합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와 지체를 함께 걸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런 가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 진짜 내가,
(예화: 전도사로 계실 때 성경공부 모임을 하면서 지체들을 서로 섬기는 모임을 하시면 서 자기가 섬기는 지체들을 위해 하루에 5번씩 기도하게 했는데 한달 후에 어느 지체의 말이 양심에 가책이 드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가족, 형제들을 위해서 그 렇게 기도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떤 때는 신앙이 없는 동기간들하고 마주 앉아서 많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가 아픈 것보다는 함께 믿음을 나누고 살아가는 지체들을 섬기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훨씬 행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책을 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형제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사랑 없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경험이다라는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고 그 은혜를 깊이 경험하니까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누리고 나누는 인격적인 코이노니아가 동기가 되어서 눈에 보이는 지체들을 사랑하고 그 지체들을 돌보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성경적인 코이노니아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교제를 인해서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함께 공동체적인 삶을 서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한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노년에 부모에게 드릴 수 있는 최대의 효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철을 따라 드리는 용돈이나 고기덩어리도 아마 그런 것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 보다도 더 소중한 선물은 무엇인가 하면 형제과 그 부모의 눈앞에서 우애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으로 부모에게 더 큰 효도가 없는 것입니다. 천만금을 갖다 주어도 자식들끼리 서로 고소를 하고 법정에 세우고 부모 앞에서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는 칼부림을 하고 이러는 상황이 남아 있는 한 그 부모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코이노니아는 사람들과의 사교나 교제가 아니라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중심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과 함께 깊은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먼저 있고 비로소 그 사랑을 안 성도들의 코이노니아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날 이 시대 속에 있는 개교회주의의 위험을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거기에 모인 사람에게 자신들의 모임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고 그리고 자신들의 모임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은 신령한 영향없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상징적인 조작을 통해서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불어넣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적인 코이노니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이 코이노니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할 때에 그냥 코이노니아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복음으로 나누는 코이노니아,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라고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참다운 복음이 선포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영혼의 변화,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있을 때에 비로소 성도의 교제가 진심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제 나름대로 믿으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 10-13년 전에 제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깨달았을 때 이제껏까지 내가 배운 기독교, 내가 가르친 기독교가 성경과 다르다고 느끼면서 고민했던 것처럼 그런 고민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아주 많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그런 참다운 복음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복음을 통해서 들어가게 만들어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코이노니아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 거의 황폐한 채 살아가고 있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잃어버린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 그 진수를 깊이 깨달았던 사람들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사모하고 그 교제 속에서 누리게 되는 사랑의 은혜에 깊이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에 코이노니아를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통해서 깊이 보충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러나 영혼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끼리는 어울려서 살아가지만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죄인들의 마음 속에 오셔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 사랑은 이기적인 개교회주의고 그들의 기관 사랑은 기관 이기주의고 그들이 말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그 중심 속에 자기를 변화시켜주신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서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이기적이고 그들의 헌신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복음을 듣기는 들었어도 하나님 참되신 우리 주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 이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도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은데 그것이 어떤 때인가 하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도 많은 사람이 그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맛 본 깊은 사랑의 경험, 그런 경험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첫사랑으로 돌아가자고 그래도 첫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라고 물어도 그런 사랑의 경험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가책을 받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코이노니아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건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회는 바로 복음을 선전하고 기독교를 홍보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바로 말로만 들었던 그런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하나님이 경험하게 해주시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개척교회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도들이 모이니까 교회에 많은 돈이 드는데 제직회를 하는 가운데 휴지 문제까지 거론되어 교회에서 휴지를 대주지 말고 각 자가 갖고 다니게 하자고 말하니까 어느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열린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예배에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 리는데 마침 손수건을 준비하지 못해서 휴지를 찾았으나 없어서 더 기도하지 못 했다고 말하면서 더 좋은 휴지를 사야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형편이 없 어서 질이 안 좋은 휴지를 쓰다보니까 눈물을 닦고 난 후에 눈물샘에 안 좋은 형 광물질의 부작용으로 인해 눈에 염증이 생기니까 더 좋은 휴지를 쓰자고 해서 질 이 좋은 휴지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눈물이 있는 영혼의 변화가 있어서 그래서 휴 지가 필요하니까 좋은 휴지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회개와 영혼에 변화가 교회에 있다라고 하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성도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누구를 섬깁니까? 그런데 사실 솔직히 우리가 주님을 직접 섬길 기회가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대게 주님을 향한 섬김은 사람을 향해서 헌신하는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이렇게 많이 사랑했지만 사실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의 어떤 인간적인 유대관계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헌신적으로 사도 바울을 섬겼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그렇게 부자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어렵다고 그러면서 사도 바울을 향한 선교 부조금을 보내는 것을 다 끊었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바울의 일행을 위해 물질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사도 바울을 섬겼던 이유는 사도 바울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이나 흠모 때문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돈은 바울이 받았지만 사실은 그들은 바울을 섬긴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영혼의 변화가 있고 그리고 그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자신들 각자가 깊이 경험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하는 가장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없는 곳에서의 교회의 연합, 교회의 단합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자체를 어떤 하나의 싸구려 동지 의식으로 묶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싸구려 동아리 의식으로 묶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아주 비복음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복음에 의해서 영혼의 변화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동기가 되어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개교회주의로 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보면서 한없이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런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변화, 이것을 통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그리스도 예수와의 코이노니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맛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존귀한 우리 성령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인들의 용서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른 채 살던 우리들을 어느 날 진리의 복음으로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참사랑이 우리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와서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 아버지, 주 성령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해주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그야말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그 놀라운 사랑을 왜 우리에게 보이셨나요? 아들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주셨지만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제로 감격하며 자신도 사랑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의 반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영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 코이노니아를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인의 이름 석자가 가슴에 서러움이 되도록 그리움으로 맺혀서 자기의 아들을 쪼개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찾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사실만을 알 뿐 그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는 이 코이노니아의 경험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지 나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그 사랑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삶을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며 이 세상에 환영을 받는 삶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은 가장 놀라운 선물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최상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집착하고 애착하는 모든 것들은 세상과 함께 모두 막을 내리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는 삶을 초월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사망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고 고백을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인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놀라운 사랑에 코이노니아를 주셨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도덕적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들이 더 많이 하나님 섬겼나요?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코이노니아를 주셨을까요?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어두움 가운데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이 하며 죄악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같은 죄인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우리같은 인간들을 향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코이노니아 속으로 들어오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 사랑에 코이노니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랑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이 사랑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황폐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들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 속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코이노니아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옛날에 선조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동행해주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맛 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가장 진수가 바로 이런 좋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코이노니아를 누리며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코이노니아에 빚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범죄하였으나 정죄하신 하나님보다는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는 주님을 모르던 때에 어두운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들이 있지만 이 본성에 역사함보다는 우리를 감동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에 코이노니아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봅니다. 일주일 동안 죄 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간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이 죄와 어두움 속에 살아왔지만 역시 주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코이노니아가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효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먼저 이 자랑을 맛보게 하시고 이 코이노니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이 코이노니아는 그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코이노니아를 맛 본 성도들이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그 코이노니아입니다. 자, 이 세상이 모두인 줄 알고 죄악된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도 모른 채, 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욕망에 노예가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았지만 우리들은 사랑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수많은 욕망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 이런 욕망을 갖고 그 욕망을 비전으로 만들어서 인생을 살면 우리의 삶이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욕망이 더하면 더할수록 우리의 욕망은 곤고했고 욕망을 따라 살면 살수록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기 보다는 노예가 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음료수처럼 세상이 우리들에게 준 수많은 소원들이 그러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있던 여인처럼 우리는 헛되고 헛된 것들을 많이 구하며 그 꿈에 미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주님이 창조하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사실은 곤고하고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슬에 매인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와 어두움과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눈을 떠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큰 찔림을 주시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들이 취해서 살던 이 세상의 수많은 꿈들이 우리의 인생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우리를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목매이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생에 많은 자랑거리, 인생에 수많은 꿈, 그리고 생명과도 바꾸고 싶었던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가치관의 놀라운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면서 내가 이제껏 추구하며 사는 모든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빈털털이가 되는 일들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세상 자랑도 버렸습니다. 세상의 명예도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꿈도 접었습니다. 유명해지고 권력을 손에 넣는 일도 접었습니다. 그것들이 분토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다 버리고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얻었다지만 사실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러고 얻은 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 때는 우리 자신의 꿈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채찍질 하게 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욕망들을 소망으로 삼으면서 우리 자신을 추스리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묻은 인생에 모든 가치는 꿈들과 함께 그런 모든 기능들도 모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도들과 나누는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홀로 살아가게 하시지 않고 주님을 만나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렇게 성도들과의 코이노니아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깊이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주님 때문에 성도들의 죄를 용서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섬기고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어 발을 씻기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섬기는 사람들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모두 버림받고 낙인찍혀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서하고 용납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주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코이노니아 속으로 들어가고 성도들과의 코이노니아 속에서 살아야 온전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성도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죄는 배교의 죄입니다. 배교의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되고 그 죄 가운데서 회개하는 영혼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코이노니아가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에게 이런 코이노니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곳에서 만나고 주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노예적인 신앙의 생활과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차이가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좋았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하나님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이 공간을 사랑하고 여기에서 나와 같은 사연들을 안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지체가 된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오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 자신이 이런 코이노니아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목회자가 있고 여러분들을 섬기는 지체들이 있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꾼들이 있는 그 신앙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실한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실 때에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필요하고 거기에서 어떤 때는 내가 지체의 눈물을 씻겨주지만 어떤 때는 내가 씻김을 받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가 그를 용서하고 발을 씻기지만 또 어떤 때는 내가 그들의 용서를 받고 그들의 위로를 받아야 하는 때가 있는 한없이 모자라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지체들을 용서하고 섬길 수 없는 지체들을 섬기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코이노니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우리들은 연약하지만 그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넘치는 하나님 사랑 속에서 온전한 성도로 세워가시는 주님의 자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성도들,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맛보고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코이노니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빛을 우리들이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지체들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서럽도록 중보할 때 우리는 주님의 그 코이노니아가 인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며 섬기는 많은 지체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가는 것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이 교제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한때는 충천하는 화염과 같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런 불길과 같이 솟아나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강한가 하면 어떤 때는 약합니다. 어떤 때는 믿음의 반석위에 굳게 서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침체의 늪 속에서 헤매기도 합니다. 사자처럼 강한 때가 있는가 하면 갈대처럼 약한 때가 있고 돌처럼 굳센가 하고 철처럼 강한가 하면 질그릇 처럼 곧 깨어질 것처럼 연약한 양면성을 가진 것이 이게 인간인 그리스도인들, 인간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홀로 광야에서 신앙 생활하지 않게 하시고 함께 섬기며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곤고할 때에 찾아와 기도할 수 있는 교회당이 있는 곳,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번민 속에서 자신이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지도해줄 목회자가 있는 곳, 슬픔과 괴로움을 만나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때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지체들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광야와 같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그들의 인생이 고속도로처럼 열리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날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에게도 굳은 날이 있습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밤도 있고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시련의 어두운 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넉넉히 확신하는 것은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와 코이노니아를 나누시는 우리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놓여진 형편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사모하며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지체들의 코이노니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범버란트’라고 하는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2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그분이 자기의 글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지체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외롭지 않았습니까? 지하에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감옥 속에서 20년을 지냈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때는 그 외로움이 너무나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감옥 생활 속의 저의 최고의 적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그 외로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지하 교회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나누던 코이노니아를 생각하며 이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 그들과 함께 한 상에 나누던 성찬을 생각하며 엄습하는 외로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고백했습니다.
내 몸은 떠나 있으나 다 함께 드릴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그 몸은 떠나 있으나 다 함께 기도드릴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그러니까 자신은 지하의 차거운 감옥 속에 갖혀서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는 홀로 있으나 그러나 예전에 함께 코이노니아를 나누었던 그 사랑하는 지체들과 지금도 주님의 보좌 앞에 나란히 앉아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쓸모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 교제의 빚을 지면서 섬김을 받으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공로,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코이노니아의 축복을 주셨는지 아직까지도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들과의 사랑이 있는 코이노니아를 모른 채 어두움 속에서 홀로 흐느끼는 지체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불러서 그 교제의 빛, 그 코이노니아의 은혜 아래 살게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만은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불만족했던 우리의 불평과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아! 그렇다. 그렇습니다.’하는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힐 때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고 저것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눈을 떠서 우리의 영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사람이 사람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이며 신자가 신자되는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 때마다 우리는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죽음에서 내어주신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섬겨줄 지체들과의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로 살지 않게 하시고 유리하고 방황하면서 외톨박이로 살게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주님의 사랑에 코이노니아 속에서 성도들과 코이노니아를 나누며 살게 해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보면서 우리에게 없는 것들은 이제 사소한 것들이고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너무나 결정적이고 소중한 것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마지막 한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놀라운 교제, 그리고 성도들 속에서 섬김을 받는 이 놀라운 교제를 우리에게 주셨을까?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 은혜의 계획 속에 있다는데 이런 특별한 코이노니아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이러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버림받은 영혼들, 이렇게 주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성도들로부터 이런 코이노니아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홀로 버려진 존재라고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절망을 벗삼은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어둠가운데로 찾아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이고 그들의 흐르는 땀과 피를 씻기고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혀 손잡고 이 코이노니아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주므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 그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제 잃어버려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부자였던 사람들은 이제 좀 가난하게 되어도 괜찮습니다. 존귀함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제 좀 노예처럼 살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주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의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 그분과의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지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주님의 본을 쫓아 섬기게 하시려고 주님이 남들이 모르는 이 거룩한 교제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큰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고 이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우리처럼 주님의 사랑에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고 지체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통해 생겨나도록 그렇게 자신을 드리며 거룩한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사는 그 일이 이런 코이노니아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살아야 할 유일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5.공급하시는 은혜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5-6)
그동안 우리는 구원의 은혜, 지식의 은혜, 기도 응답의 은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교제하게 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고 그 모든 은혜 하나 하나는 정말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늘 받으면서도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은혜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먹고 입고 쓸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물질적인 공급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살아가기 쉬운 그런 종류의 은혜입니다.
오늘 이 신명기 29장의 무대는 바로 이 모세가 가나안을 앞에 두고 회상하면서 모압의 언약 사건을 회상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호렙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시내산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 바로 시내산이었습니다. 거기에서 11개월 동안 머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 때 지녔던 모든 불신앙의 습속들을 털어버리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주님의 백성들로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었습니다.
언약이라 함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불러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리시고 그들과 어떤 관계임을 알려주셔서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베푸시는 사랑과 함께 그들이 순종해야 할 의무들이 알려지고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누릴 수 있는 은총의 특권들이 명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된 백성으로 깊이 사랑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그분이 명하신 율법을 순종하므로서 표하고 그분을 공경하면서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모압에서 맺은 이 언약은 질적으로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다른 언약이 아니라 같은 언약이었는데 그 언약에 대해서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는 소위 언약 갱신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기회가 있을 적마다 그 언약을 상기시키셔서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알리시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은총받은 백성인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 언약 갱신의 의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서 중요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언약의 갱신의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압에서 언약을 다시 맺으신 것과 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시는 갱신의 역사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두 눈 앞에서 갈라지는 홍해의 물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은 구름기둥 아래서 먹고 마셨으며 불기둥 아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보면서도 그들은 늘 잊기 쉬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자신들의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왜 자신들은 세상에 있는 이방의 백성들과는 다르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감격, 그 갱신이 필요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사람들입니다. 공급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 본 사람들입니다. 죄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셔서 주님의 자녀 되게 하신 놀라운 비밀들을 맛보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를 많이 맛보았다고 하더라도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신앙을 갱신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없이는 우리가 영원히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갱신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 섬기고 사랑하며 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차가운 교회 생활로 대치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감동을 주었던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사라지고 차가운 의무만이 남아서 이런 저런 일들을 섬기면서 살아가기가 쉬운데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요새 교리반을 하는데 은혜가 많습니다. 어제 저녁에 교리반이 모여서 죄와 구원 시리즈 마지막을 들었는데 그것이 십자가 아래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래 제가 이제 거기에 모인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의 아래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고 할 때에 그 성도들에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을 했더니 여러 사람이 대답을 하고 났는데 마지막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의 성도가 십자가 아래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아주 정확한 대답입니다.
한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는데 그것이 머리를 뚫고 가슴으로 내려와서 우리의 가슴에 십자가의 감격을 불러 일으켜야지만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 속에 차가운 인식은 남아 있지만 그러나 예전에 역사하던 우리의 가슴 속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진실한 신자라고 하더라도 일생에 한 두 번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시시때때로 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의 굳어진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발라 그 구원의 감격과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에 우리의 온 영혼을 적게 만드시는 주님의 은혜없이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십자가 아래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에 있어서 시내산의 언약은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빽빽한 구름사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 목소리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때에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지존하신 영광의 임재 앞에 죄인들인 자신들이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온 백성이 그 빽빽한 구름사이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광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영광을 목격했지만 그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주님을 경외하는 감동을 간직한 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부패, 그 다음에 죄악된 세상, 우리의 마음을 훔쳐가는 마귀의 궤계들 이런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갱신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오늘 날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화: 리비아 대수로 건설의 이야기)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의 이유로 건조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물이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의 강물이 우리의 영혼 속에 흘러 들어오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변화되지 않던 사람이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됩니다. 섬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깁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하며 독한 마음으로 피묻은 칼을 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신의 그 칼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심장,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갱신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갱신의 역사가 없이 좋은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 같은 것이 얼마나 훌륭한 계기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딱딱하게 굳은 밭, 그래서 식물을 뿌리내리게 할 수 없는 이 딱딱한 밭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 그 밭을 기경할 수 없습니다. 느린 걸음이기는 하지만 황소 한 마리가 큰 쟁기를 땅에 찔러대고 지나가는 일이 있어야지만 그 밭이 기경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사모함들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껏 까지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만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이 계절에 우리의 굳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딱딱해진 우리의 심령의 밭에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갱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이 가을에 한번 달려가던 삶에 발자취를 멈추고 한번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영혼의 건강함을 다시 한번 점검하면서 말씀의 빛 앞에 자신의 굳어진 심령의 밭에 쟁기를 대고 자신의 심령이 기경되어지는 이 갱신의 역사를 고대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비우고 정말 주님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씀의 은혜 앞에 서서 여러분 자신들이 다시 한번 기경되기를 사모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과 심령이 기경되는 이런 갱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 내 이 굳어진 마음의 밭에 오셔서 주님의 그 회복하시는 갱신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에서의 언약에 갱신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받은 은혜를 자만하는 사람치고 지금 하나님 앞에 풍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금년이 신통치 않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신 은혜입니다. “오늘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쟁기를 대시고 우리를 갱신 시켜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본문을 들어가 전의 배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갱신되는 귀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모세는 이제 이 모압의 언약을 회상하면서 그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두 사람이나 한 가족 두 가족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총포괄하는 언약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물을 깁고 나무를 패는 머슴들을 포함해서 심지어는 아직 이스라엘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자손들까지 그 모든 언약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총포괄적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품꾼들과 심지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가족들까지 이 모압의 언약 갱신의식으로 불러들인 것처럼 또한 오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도 이처럼 총포괄적인 언약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이 없어도 우리의 자녀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에 충실하고 그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살면 우리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아는 은혜 안에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만약에 우리들이 신앙을 잘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내가 다니는 그 회사가 나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보디발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언약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그 종 요셉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이 상관없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잘 의지하고 언약의 관계에 충성하면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에 복을 주시리라는 사실, 우리의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렇게 총포괄적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으로 우리를 불러들이시면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베푸신 은혜를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베푸신 은혜를 말하는 가운데 물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공급해주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음 주에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만, 주님의 우리의 영혼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물질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소중하고 어떤 의미에서 물질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은혜만으로는 우리가 주님의 주님되심을 알 수 없었지만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의 영혼에 공급해주시는 그 회복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그렇다고 해서 먹고 입고 쓰며 살아가는 이 물질의 문제가 하찮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는 몇 일 굶주려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이 육신의 공급하시는 은혜는 하루만 끊어져도 난리가 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다. 몇 주 동안 말씀의 은혜가 없어도 잘 살아가지만 하루만 굶으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말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40여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너희의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또 너희가 떡을 먹지 못하게 하셨고 포도주와 독주도 마시지 못하게 하셨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을 먹지 않았으면 뭘 먹고 살았을까요? 이 이야기는 실제로 떡을 먹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떡을 먹지 않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다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이전에 만나의 사건이 있기 전에 애굽에서 농사를 지어서 가루를 빻아서 그리고 포도를 찧어서 담가서 먹을 떡과 마실 음료를 공급하던 그런 자연적인 방식으로 너희들을 먹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 여기 저기를 유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공급해주신 것은 바로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왔지만 다 얼마 되지 않아서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른 새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머물든지 그 진밖으로 나아가면 하얗게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 가루들을 줏어 모으면서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면 여기에는 다시 만나가 내리지 않고 거기에 만나가 내렸습니다.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에 대한 염려가 없이 살아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예전에 그런 방식으로 먹을 것을 공급받았던 어떤 민족, 어떤 백성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목마를 때에 이웃나라에서 생수를 사먹게 하시는 대신에 반석을 터트려 물이 쏟아지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갈시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복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어떻든 기적적인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었기에 오늘 모세는 자신 있게 너희의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너희의 신발도 그러하였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적인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화: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겨울에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밖에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어떤 애는 눈을 보고 쌀가루이면 담아서 엄마에게 갖다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애는 떡을 만들어서 먹을 것이라며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눈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 그게 가난한 시절에 살았던 동심과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심의 차이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초등학교 때보다 더 가난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300만명이 넘는 사람이 먹는 문제가 얼마나 시급한 문제였을까요? 정말 그 들판에서 무엇을 의지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때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가지를 들고 뛰어나가 보니까 하얗게 눈이 내린 것입니다. 야! 이게 곡식가루다. 그것으로 떡을 해먹은 것입니다. 떡을 아주 안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손으로 떡을 공급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그 떡을 먹고 신령한 방식으로 음료를 먹으면서 40여 년의 광야의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때에는 우리가 스스로 일해서 벌어먹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었어도 주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기 전에는 그저 나 잘나서 돈 잘 벌고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못 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주님이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높고 고차원적인 능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그 공급하시는 은혜 속에서 나타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인격 앞에 승복한 정도와 이 물질 생활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공급되는 은혜라고 하는 이 고백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좀 있다고 해서 교만한 사람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게 되면 마지막에 승복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확실히 인생은 내가 내 재주로 내가 번 물질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구나.’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에 I.M.F라고 하는 이중의 고통스런 시기를 지났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물질이 없어서 고통스러웠다기 보다도 그런 성도들의 삶을 보는 것, 졸지에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퇴출을 당하고 방황하는 아버지, 그래서 노점상으로 길거리를 튀쳐나온 어머니, 방황하는 자식들, 뿔뿔히 흩어진 식구들 우리 모두 그런 고통스런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니까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삶의 동기들, 물질이 좀 있다고 교만해지는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지체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우리에게 성숙함을 갖게 하셨습니다. 더 귀하고 감사한 것은 그렇게 핍절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 속에서도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아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한 사람의 신앙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한 것과 물질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깊이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비단 먹고 사는 것만 아니라 우리는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육받아야 하고 또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면서 생존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여건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적당한 때에 우리는 문화의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적당한 때에 우리는 인간다운 존엄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적절히 공급해주시는 물질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이 아니면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평범한 인간들이 단정한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기 위해서 이런 물질적인 공급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결코 영원히 그가 아무리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유치한 기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신 다음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주님 의지하면서 살았더니 주님께서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얻고 번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열심히 일했고 그 일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물질을 공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공급해주시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것,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여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놀라운 은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질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공급해주시는 의복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인생,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이 매일매일 내려주시는 만나가 없이는 살 수 없고 반석을 터트려서라고 공급해주시는 기적의 한 모금의 물을 마시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었던 백성인 것처럼 오늘도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 수 없는 백성임을 우리들은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고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또 병원에 다니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라고 할지라도 역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들풀과 같은 인생들이고 공중에 나는 한 마리의 참새와 같이 무가치한 인생들이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 그 은혜의 공급함 없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과 이 몸은 정금같게 하시네
우리를 향해서 잊지 않으시고 필요한 때마다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주님이 먹이시는 떡으로 주님이 마시게 하시는 물로 살게 하신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볼 때에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동시에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 얼마나 신실하셨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먹고 입을 것을 공급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뒤로 물러갈 때에도 주님이 우리에게 먹고 입을 것들을 공급해주셨고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할 때에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고 돌이킬 줄 모르고 하나님을 거스릴 때 조차도 주님은 신실하시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은혜로 공급하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포도주를 들고 우상에게로 가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름을 들고 세상으로 가서 세상을 거느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단번에 진노하셔서 더 이상 우리의 입고 마시고 쓸 것을 공급해주시지 않으시지를 않고 아침마다 주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우리의 쓸데없는 많은 욕망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불만을 불러일으킵니다. 헛된 것들에 대한 사모함은 참된 것들을 공급해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잠시 욕망을 향해 치닫던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헛되고 사악한 모든 욕망을 걷어내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이제껏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런 공급하시는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것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적이 얼마나 드물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주님을 대적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주님께서 이제껏 먹고 입고 쓰며 살아오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 신실하심과 우리의 불신실함의 대조를 느끼게 될 때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우리는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 불신실했는 데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불신실한 우리에게 일용할 모든 양식을 내리시고 공급해주셔서 신실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기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이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도 역시 그 은혜에 토대가 우리를 위해 피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함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감사함을 잊고 살았던 우리의 지난 날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한번 여러분들의 그 욕망으로 가득찬 마음을 죽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헛된 욕망들을 마음에서 걷어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하게 하시고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며 살게 하시고 이렇게 주님 섬기며 변함없이 살도록 만들어주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오 은혜의 표입니다.
(예화: 하나님께서 2년 전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교회를 이전하였는데 주위에 사람들은 세를 감당하지 못해 쫓겨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3주의 헌금을 걷어 야 겨우 월세를 내고 마지막 주의 헌금을 걷어야 전기세, 불세를 내면 맞을 정도 여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도 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어느 날 세금으로 많은 돈이 나와서 초긴장 상태에 물, 불을 아끼며 마음을 태우셨는데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 데 깨닫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이곳으로 왔는데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없겠는가 하는 마음의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바꾸어 성도들을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하니 한 해를 살고 난 후에 보니 세웠던 예산에 30%로나 더 많은 물질을 주 신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다는 이야기)
저는 그런 은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가만히 생각하고 보면 인간의 염려와 근심이 다소는 교회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해답은 인간의 염려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있었다라는 정답을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내어 주셔서 이제는 이 건물을 우리 보고 사라고 애원을 해도 싫다고 하면서 뿌리치고 가야될 처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그 은혜가 이제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해답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이곳으로 들어오게 될 때에 거의 8-9억 가까운 돈이 들어갔는데 그때 교인들이 220-40명 출석하고 있었고 한 40명은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200명 정도가 등록교인이었고 그 중에서 건축 헌금을 180명이 헌금을 해서 8억 6천만원 가까운 돈이 나왔습니다. I,M,F때 다 굶는다 놓는다 할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헌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물론 여기에 오셔서 헌금을 많이 하셨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건축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2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다시 성전을 옮기도록 이런 고민을 안겨주신 것은 2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우리들이 지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거룩한 고민을 안겨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고민을 안겨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제껏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교회를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의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미래의 우리의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봅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만 공급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이 아니라 교회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가. 그 마지막이 무엇인가 하면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의지하면서 살면서 돈을 벌고 자기를 위해서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물질이 쌓이면 ‘수지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물질 때문에 정말 다른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이제 물질이 없는 사람들과는 레벨이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받는 백성들에게는 다른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아주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지는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그게 뭐 특별한 것이었습니까?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아주 질렸습니다. 아니 우리도 음식점에 처음 가면 정말 맛이 괜찮다고 하고 다음에 또 가면 그저 괜찮네. 세 번째 가면 조금 괜찮다. 네 번째 가면 조금씩 맛이 덜해갑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도시락을 싸갖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 만만한 게 짜장면이었습니다. 짜장면을 2년 반을 먹었더니 ‘짜장’ 이라는 글자만 봐도 토할 것 같았습니다. 왜 짜장면을 먹었는가 하면 설렁탕 한 그릇 값이면 짜장면을 이틀을 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넘게 먹었더니 새카만 것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지는 물을 마셨다고 하지만 그 물 속에 무슨 인삼이 들었습니까, 녹용이 들었습니까? 물은 물이지, 기적으로 솟아났어도 그것을 먹으면 머리털이 하애진다든지 그런 물이 아니라 먹으면 또 다음 날 목마른 그냥 평범한 물이었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만나를 먹고 또 반석을 터트려 나온 물을 먹고 산 것이 풍족한 생활이었습니까? 애굽의 왕궁에서 산 왕족들이 풍족하게 살았습니까?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는 고기도 있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워하던 것이 그것이 아닙니까? 그곳은 왜도 있고, 마늘도 있고, 또 부추도 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했습니다. 정신나간 친구들입니다. 그것을 자기들이 스스로 지어 먹은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애굽의 중앙 정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먹인 것입니다. 마늘, 부추 이런 것, 왜 그것이 강장제였습니다. 그것을 먹고 벽돌을 많이 찍으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바보같습니다. 그것을 먹고 힘을 얻어서 무엇을 했습니까? 정욕에 좋았는데, 정욕갖고 뭐했습니까? 노동 품을 파는데 다 썼습니다. 그것을 왜 그리워하는 것인지, 바보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객관적으로 보면 그 사람들이 훨씬 잘 먹고 살았습니다. 식탁의 메뉴가 무엇입니까? 만나로 만든 떡과 물, 그것이 뭐 대단합니까? 여러분 보다 잘 사는 사람들 세상에 많습니다. 진짜 돈많은 사람들을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입니다.
(예화: 아시는 분이 글을 썼는데 그분이 쓰신 글에 봉고를 타고 시골을 가는데 어떤 젊 은 사람들이 차를 장난스럽게 몰고 가다가 접촉 사고를 냈는데 내려서 뭐라고 야 단을 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봉투를 주고 가기에 보니까 1500만원이나 되는 돈이 있다는 이야기)
이 세상에는 여러분 월급보다 훨씬 많이 받는 사람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 보다도 더 좋은 음식 먹으면서 더 양질의 삶을 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비유를 하자면 돼지처럼 살아가는데 어느 날 동네에 잔치가 있어서 양질의 뜬물이 그 돼지통에 부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그 사람들처럼 화려한 식탁은 아니고 만나, 그리고 물 한 모금이였을지라도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들에게 좋은 것들이 공급되는 방식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른 떡 한 덩이 그리고 물 한 모금을 놓고도 하나님 앞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사의 기도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사찰겸, 전도사겸 교회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어떤 때는 고기도 놓고 가고 떡도 놓고 가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갖다 났을 것이라고 그것 보다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야!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주셨구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공급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나게 하시려고, 그럼 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군가 하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 곧 너희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우리들이 그런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 줄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고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의 주관자이시다. 그래서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께 어떻게 사랑과 경외의 마음을 바쳐야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렇게 기적의 만나로 기적의 물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그런 은혜를 베풀어 오셨고 지금도 베풀고 계시고 앞으로도 또한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것들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도 우리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물질과 우리의 양식, 우리의 건강 그것을 능가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기에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그런 은혜의 감격을 맛보면서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나의 평생 살아갈 동안에 내가 해야할 일이 우리 하나님만 사랑하고 우리 하나님만 경배하고 우리 하나님만 영화롭게 해야되겠다’라고 하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영적 회복의 은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시119:25,65)
지난 시간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시는 물질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우리된 것이 주님 덕분이구나 하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입고 먹고 누리고 쓰는 이 모든 물질이야 말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리고 당장 하나님께서 공급을 끊으시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인 삶의 진전도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에 빠지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알 때는 물론이거니와 주님을 모를 때에 까지라도 우리가 선인이었을 때나 악인이었을 때나 골고루 햇볕을 비추셔서 우리에게 이런 결실에 덕을 보며 경제적으로 적절히 공급을 받으며 살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오셨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는 이렇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할지 몰랐지만 구원받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난 후에는 이제는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물질의 은혜를 보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 우리의 필요를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아시고 우리에게 공급해주셔서 우리가 의지하며 살 분이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렇게 주님 때문에 먹고 주님 때문에 입고 주님 때문에 쓰며 사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된 도덕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이제껏 먹고 주님의 은혜로 마시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오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결실의 계절이 다가오고 추수 감사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새삼스럽게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이제껏 먹고 쓰면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 우리는 그 은혜도 정말 놀라운 은혜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이 주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물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공급해주시는 것만으로는 우리들이 충분히 살아올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소생케 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저는 생각 정도가 아니라 굳게 확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두 가지 점에서 119편이 다윗의 시임을 우리가 굳게 믿을 수 있는데 첫째는 이렇게 삶 속으로 녹아든 풍부한 영성을 가지고 이렇게 세심한 필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체험과 그 은혜의 영광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다윗밖에 없다고 하는 확신 때문이고 또 하나는 객관적인 문체와 필체가 시편에 흩어져 있는 다윗의 여러 편의 시와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문학적인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이 119편은 다윗의 시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다윗이 이 시를 썼다고 할 것 같다면 저작 시기는 언젠가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119편을 다윗이 쓴 저작의 시기는 아마 후기였을 것이라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119편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사상이나 인격이 아주 농익었습니다. 설익은 것이 아니라 아주 농익은 상태, 그러니까 그것은 다윗이 신앙의 초기이기 보다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많이 겪으면서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은총의 경험들을 풍부히 하고 난 후에 그 모습을 오늘 여기에 기록을 해놓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고백을 하고 있는 이 고백,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그러니까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은 꼭 돈이 없고 가난한 목동에 시절의 상황 때문에만 경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이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이 되고 싸움에서 이기고 승승장구하는 그런 입신양명 하는 출세의 가도에 길을 달리면서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깊은 패배와 절망 좌절을 경험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서 ‘진토’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아파르’라는 단어인데 이 아파르라는 다음이 아니라 ‘먼지, 티끌’ 먼지나 티끌 중에서도 헝겁이나 이런데서 부스러진 먼지가 아니라 흙먼지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 아파르라는 단어, 티끌 혹은 먼지라고 합니다. 흙먼지라고 하는 이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에 비쳐서 보면 가장 가치없는 비천한 것을 말할 때에 대명사처럼 쓰이던 단어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흙으로 사람을 빗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놓으신 주 하나님
이게 잘 들어보십시오. 원래 잘 듣지만 이게 보통 의미심장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는데 그 의미가 없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귀합니까, 안 귀합니까? 그런데 왜 흙으로 만드십니까? 아니 산 밑에 보석이 많았을텐데,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과정이 흙먼지 아무 곳에서나 굴러다니고 훅 바람이 불면 날라 다니는 흙먼지를 통해서 만드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광산에 뭍혀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갖다 놓고 하나님께서 깎으셔서 그래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아 진짜 확실히 인간은 재료부터 다르구나. 그럴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진짜 인간은 다르구나. 그런데 인간도 땅에서 만들고 채소도 땅에 나옵니다. 짐승도 땅에서 나오고 모두 다 땅에서 나옵니다. 땅은 각종 과실과 채소와 이런 것을 내라. 하나님이 그러시니까 나왔습니다. 인간도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 아파르 티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게 참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든 그 티끌을 가지고 재료를 삼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혼을 집어넣으셔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합니까, 안 귀합니까? 그렇게 귀한데 그럼 무엇 때문에 인간이 귀한가 하고 재료를 다시 분해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료는 딱 두 개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흙하고 하나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입니다. 그런데 흙은 무엇의 대명사입니까? 아주 가치가 없고 쓸데없는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귀하다면 무엇 때문에 귀합니까? 그렇지요. 여러분들은 역시 지혜롭습니다. 정말 제가 6년을 헛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어쩜 그렇게 하나를 가르쳐 주면 반을 아는지 모릅니다.
그것입니다. 인간이 귀하다. 하나님이 그 아파르를 가지고, 티끌을 가지고 흙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너희 자신 존재 자체 안에는 아무 것도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실려고 그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필이면 가치없는 것의 대명사인 아파르를 가지고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존귀하고 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자신 속에 영혼을 불어넣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일 경우에는 물질적으로 만족하다고 해서 그냥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 예수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박해하고 핍박했던 마르코스 아올레이스 같은 황제도 스토아 철학에 깊이 빠져서 인간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너의 죽은 시체를 떠매고 장사 지내러 가는 네 친구도 내일은 다른 친구에 의해서 떠매어지고 가리라.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진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소유한 것만이 인생에 참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욕망을 절제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상당히 말하자면 성경이 나타내보여 주고 있는 사상 중에 상당한 부분을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을진데 하물며 주님을 믿고 주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시고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게 해주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완전히 만족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시인이 만약에 제왕으로 위에 있던 시대에 만약에 이 고백을 했다고 할 것 같으면 또 그런 고백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여러 가지 범죄와 닥치는 환난으로 인해서 시인에 영혼이 곤고해진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습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사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엇다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실제로 객관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제 우리들이 흔히 느끼는 느낌으로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주님도 나를 버렸다. 우리들이 영혼에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구원받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옛날에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제 주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이 생활이 내 인생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영혼에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갈 때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라고 고백을 하는데 진토에 붙었다라고 하는 그 말은 자기 자신이 한때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영혼, 내면에 세계에 가치에 대해서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이 비참하리만큼 침체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인의 고백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주님도 모르고 그저 물질적으로 쪼들리면서 날마다 빚에 시달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선상에서 배를 움켜쥐고 잠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압니다. 그래서 배만 부르고 등만 따뜻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옛날에 초등학교 때 보면 동네 골목에 이렇게 서서 보면 저녁 때가 되면 동네 아줌마들이 쌀봉지를 하나 들고 손에 연탄 하나 들고 오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루 벌어서 풀빵이라도 팔아서 저녁 때 그것을 사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연탄이라도 한 200장 사놓고 쌀이라도 한 가마는 고사하고 댓말만 웃목에 있고 김장 해놓으면 진짜 행복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외로움과 침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안 사람들은 이 영혼의 허기짐이 육체의 허기짐보다는 참기가 쉽다라고 하는 말은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자산이 많은 나라는 고도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국가들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단지 먹을 것만 없는 사람들은 정신구조가 간단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있어도 영혼의 허기짐과 곤고함을 면할 수 없는 처지에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정신병자들도 많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라고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먹고 사는 것만 괜찮은 것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느끼는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그 견디기 힘든 통증과 아픔을 우리 자신의 그런 통증과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이 곤고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오늘 이 설교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 한 끼나 두 끼를 굶는 것도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주님 앞에 버림받은 것과 같은 영혼으로 곤고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육신의 굶주림이 영혼의 목마름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살아온 신앙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면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들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경제적인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음식을 타박하기도 하고 음식에 대해서 감사한지 모르기도 하고 먹어도 마셔도 만족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들이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에 80%를 불과 10%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마 그 10%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나머지 20%를 가지고 전 인류의 90%로가 먹고 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육신의 고통 못지않게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고 저녁에 은신할 집이 있어도 여러분 자신의 온 영혼이 하나님 앞에 굶주리고 핍절했을 때에는 집이 있어도 여러분들의 마음은 광야에 홀로 선 것 같았고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드러누웠어도 여러분들은 허기져서 그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쓰러질 것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었고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에 느꼈던 우리의 실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핍절하고도 그것이 핍절한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랑을 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신즉 그들은 기뻐하고 구름이 해를 가리듯이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신즉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는 근심과 좌절이 먹구름처럼 몰려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영혼에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될까요? 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주님의 눈빛 앞에 살았던 복된 신앙의 사람, 이 시인 다윗이 이처럼 영혼에 깊은 침체를 추억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다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시인에게 이유가 따로 있고 우리에게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과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생활의 원리는 항상 그 기초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곤고해지는 이유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순종이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그 위에 무지의 문제, 고통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가세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영혼이 침체에 빠지는 가장 보편적이고 거의 모든 지배적인 원인은 죄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 죄와 불순종 때문에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죄와 불순종, 환경, 사람들과의 관계, 무지, 신앙의 한계 이런 것들이 모두 함께 역사해서 종합적으로 작용을 해서 우리를 곤고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시인이 지금 자신의 죄와 불순종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무가치하게 되어버린 절망과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지만 우리가 늘 순종하면서 삽니까? 우리가 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삽니까? 모든 죄를 미워하고 불순종의 길을 경멸하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신앙의 길만 우리들이 걸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죄가 없어도 고통이 계속되면 우리의 영혼은 곤고해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 아닙니까?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믿음이 순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단을 향해서도 자랑하시고 싶으셨던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였습니다. 죄는 없었지만 고난이 계속되니까 그 영혼은 곤고해졌고 급기야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태를 저주하는 그런 곤고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째든 죄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로는 무지, 때로는 쉽게 끝나지 않는 고통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곤고해지고 우리의 심령은 깊은 침체 속에 접어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셔서 우리를 살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멀리 떠나고 곤고해지고 우리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를 때에 하나님께서 한번도 그 목마름에 쓰러질 것같이 그 굶주림에 죽음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를 놔두신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곤고하고 핍절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영혼에 참된 회복을 주셨기 때문에 죄가운데서도 진멸되지 아니하고 오늘 날까지 살아서 주님을 믿고 의지할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용서를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온 용서받은 한 신자의 삶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했다라는 이야기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던 찬송 가운데 하나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그 찬송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3절에 보면 그런 소망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충만하고 하나님 잘 믿을 때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셨다고 고백을 한다면 우리들이 시험에 빠지고 침체되었을 때는 면목이 없어서 주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참 우리의 신앙의 발자취를 회고해보는 것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찬송하게 만들거나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부자가 되었을 때는 가난하던 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들이 곤고할 때에는 우리들이 영적으로 부요하던 때를 회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제는 버림을 받았다. 우리는 아무 희망도 없다. 우리의 영혼은 진토에 붙은 것과 같고 이제는 하나님도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애. 하는 속삭임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시고 목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은 영혼에 고통에 상태에서 우리 앞에 샘을 터트려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오셨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번이었습니까, 두 번이었습니까? 언제나 언약을 어긴 쪽은 우리였습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누가 시킨 사람이 없어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데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결심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걸레처럼 세상으로 달음질하던 그런 배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쥔 사람은 항상 우리였지만 찾아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던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신 분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언제나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서 우리들이 살아왔습니다. 곤고하고 아파서 울부짖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고 죽어가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영혼이 살만하면 그 다음에는 주께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십니다. 그러면 그 축복을 빌미삼아서 하나님 배신하고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며 타락의 길을 걷기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걷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침체되면 다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목말라하고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내게 돌려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겠다고 흐느끼고 고백을 하며 예외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전과 다름이 없이 다가오셔서 예전에 용서해주셨지만 다시 뒤로 미끄러지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용서해주시면서 영혼에 회복을 주시기를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하시면서 오늘 날까지 우리를 여기에서 서 있게 하셨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그 은혜 못 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그렇기 때문에 잘 들어보십시오. 한 사람의 훌륭한 신앙인이 있다면 그의 그 훌륭한 신앙의 인품은 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증할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그렇게 영혼의 회복을 주셨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오늘 인격적으로 주님 만나고 싶어하고 실패도 많고 죄도 많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그리고 우리에게 미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십만분지의 일이라도 보답을 하며 살고 싶다는 고백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티끌과 우리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이 양심에 화인 맞은 자와 같이 돌덩이와 같이 무디어진 우리의 마음이라도 움직여서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시는 용서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오늘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우리의 죄와 불순종의 더러워졌던 마음에 창들이 닦여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지, 왜 우리들이 보이는 이 세상을 버리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 정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진노 중에 멸망했을 것이고 주님이 친히 우리를 멸망시키시지 않으셨어도 아마 예전에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보다도 더 큰 확신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절망적인 존재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막 살아버렸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인격적인 설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무릎을 꿇기 싫어하는 우리를 발로 차서 무릎의 뼈를 분지르시고 머리털을 잡아당겨서 땅바닦에 쳐박으시면서 경배를 받아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따귀를 갈기시고 이빨을 부러트리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찬송하게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끝없이 무체의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죄와 우리들의 불순종으로 우리는 스스로 택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죄의 길을 걸어갈 때에도 진노하심으로 우리를 징벌하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며 우리가 스스로 택한 불순종과 죄의 길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에 상처와 고통 밖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교제로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스스로 우리의 발로 주님을 떠났고 또 때가 되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우리의 발로 돌아서 하나님 앞에 걸어와서 뉘우치고 회복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주인은 바로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거룩한 성도가 되면 될수록 정말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오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고귀한 사랑과 용서하시는 은혜의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공로도 보이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의로움도 보이지 않고 수시로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웠던 자신의 장한 전투적인 모습도 기억에 남지 않고 오로지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같이 쓸모없는 죄인들, 아무 가치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을 입으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죄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게된 우리의 영혼을 무시로 찾아오셔서 회복의 은혜를 주셨던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밖에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발자취는 주를 영화롭게 하면서 살아온 날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밟고 지나간 고통스러운 흔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의 발자취가 한결같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만 사랑하며 걸어온 순결한 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큰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처럼 순결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다 드려서 살고 싶었던 그 처음 사랑, 최초의 결심을 의지하고 오직 그렇게만 살아왔더라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사람의 인생 속에는 순수한 사랑과 불결한 배반의 발자취가 함께 섞여져 있습니다. 순종의 많은 헌신이 깃들여 있는가 하면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패역의 더러운 물이 우리의 인생에 잔에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수시로 우리에게 뉘우치는 마음을 주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우리의 마음의 죄악과 불결, 우리의 삶의 불순종과 더러움을 포기하게 만드신 분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이 죄인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은총에 증거이며 이제는 하나님께 소망이 없다고 부르짖으며 절망 가운데 낙담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희망의 증거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은 항상 자기를 용서하며 다가오시는 영혼의 회복에 은혜 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고 주님의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느꼈다고 그럴 때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꼈습니까? 그것은 바로 침체에 빠진 여러분들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사죄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 무가치한 자기 자신과 그 무가치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랑 사이에서 진짜 주님의 은혜를 느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발자취가 그렇습니다. 다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모두 드려다볼 수 있다면 아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존경할만한 어떤 그리스도인도 우리의 마음 속에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우리의 죄와 많은 허물들을 용서하시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의 명예를 보존하시고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도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버림받지 않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뼈저린 패배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늘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회복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회상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게 하시옵소서. 소성케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처참하리만치 울부짖는 이 시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뒤에 보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선대하셨나이다” 시인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이 버림받은 자와 같이 좌절하면서 절망할 때에 잠시 절망하고 아파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선하게 대해주셔서, 다시 말하면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므로 땅에 호흡이 있는 모든 자들아 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는 것이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런 영혼의 좌절을 경험했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주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셔서 그래서 오늘 날까지 그런 침체 속에서도 멸망되지 않고 주님 바라보면서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지켜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게 하시옵소서”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당신의 말씀들을 따라서’ 복수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미 이렇게 침체에 빠진 영혼들을 소생시켜주실 하나님의 회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실현시키셔서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하시는 방법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 다시 말하면 한번 구원한 당신의 자녀들의 영혼을 이 세상에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자기의 은혜로운 역사를 통해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좌절을 경험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의 성품 때문에 우리가 아직 뉘우치는 마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느끼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버림받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지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약속을 해주셨는데 물론 우리 자신이 깊이 죄를 뉘우치고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킬 때만 이렇게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경험하고 느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침체된 영혼이 새 생명을 얻게될 때에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일을 다 저질러놓고 사실은 내가 그랬는데 잘못했습니다 밖에 하나님 앞에 한 말이 없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어김없이 사죄의 은혜를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소생함을 주신 것입니다.
시인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습니다. 마른 땅을 건넌 것과 같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럽고 목마른 상황, 그 속에서 어떻게 그 인생의 고통을 이겨보려고자 땅을 팠지만 거기에서 솟아나는 물은 마라에서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험처럼 마실 수 없는 쓴물 밖에는 나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견디기 힘들 때에 여러분들의 그 우묵한 곳을 터트려서 샘물의 곳이 되게 하시고 통곡하는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거기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깨닫게 하셔서 먹이신 그 놀라운 일들을 누가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에게 그런 일들을 행하셔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했다고 했지만 이 세상에는 여러분보다 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변덕스럽지 않게 믿음생활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못지 않은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죄에 깊이 물든 여러분들을 그 임마누엘의 샘물로 씻어서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포기했는데 주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다가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홀로 버려두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소성케 하시는 은혜 때문에 한때는 핍절과 실패, 좌절 속에서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던 우리의 인생이 새소망이 없고 예전에 우리와 같이 좌절하며 살아가는 지체들을 격려하며 함께 끌어안고 이 고통스러운 인생에 광야의 길에서 수시로 내리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 거기에 힘을 얻으며 살 아갈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에서 물질이 있을 때 웃고 고통스러울 때는 울면서 그렇게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웃고 우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환경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한때 묘목과 같이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그런 작은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쓰러질 때마다 비를 내리시고 거름을 주셔서 햇볕이 들게 하셔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무럭무럭 자라가는 나무들이 되게 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들어준 사람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주님의 사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놀라운 사랑과 큰 은혜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멸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런 회복의 은혜를 입으며 살았지만 이제 예전에만 은혜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은혜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주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 누리는 이 거룩한 교제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여기에 모으셔서 이렇게 주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언약대로 우리의 영혼에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간절한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소생시켜주시는 사죄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 앞에 절망과 낙담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버렸다고 확신하던 그때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절망보다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자비를 보이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그 은혜의 감격이 얼마나 놀라웠습니까? 우리는 그 모든 신앙의 경험들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오, 그리고 어떠한 실패 속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딜 가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참 신기한 게 회개하고 나면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쩜 그렇게 분명해보이는지 모릅니다. 걸어온 길도 분명하고 서 있는 지점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가야할 길도 분명합니다. 시로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던 어느 저자의 고백처럼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하실 분도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의 은혜,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좌절하고 버림받은 것과 같은 영혼에 상태에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주님을 등지고 죄와 불순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혼에 고통이 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은혜는 이제 다시는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죄와 불순종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의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처럼 깊은 침체에 빠져서 그렇게 뜨겁게 하나님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와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준미께 버림을 받았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의 증인들이 되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으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영혼에 깊은 어두움 속에서 살아갈 때는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나 복잡하고 생각하여야 할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참된 소생을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이제껏 산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지금 이렇게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여기에 서 있게 된 우리의 우리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하시는 것은 이제 다시는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살지 않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다라고 하는 단순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렇게 여러분들을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정말 주님이 없이 영혼이 버림받은 자와 같이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얼마간의 물질이나 얼마간의 명예 내가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버림받은 영혼이 고통하던 그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죄하시는 은혜로 영혼의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재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눈빛 앞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임재 앞에서 사는 것이 온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치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는 또한 그렇게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하나님 밖에는 없는 것처럼 그 주님의 은혜만 붙들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고 혹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멀어진 것 같아도 한번 눈을 들어서 사도가 우리에게 권고했던 것처럼 위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껏 우리의 영혼에 베푸신 하나님의 그 한량없는 은혜, 핍절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여기에 이렇게 살아서 주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더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시험에서 건져주신 은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감사의 제목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 가운데 도와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가진 채 살아가다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깊고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인격적인 뜨거운 만남을 갖고 주님을 새롭게 알 기회를 우리들이 갖게 되었을 때에 우리들은 대부분의 경우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기분좋게 먹고 마시고 놀고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던 때에는 우리가 별로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많이 배웁니다. 왜냐하면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에 간절히 목마르게 되고 주님은 그렇게 시험 가운데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므로서 예전에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런 은혜를 회상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이제껏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크고 특별히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런 은혜들을 많이 드러내보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유리 그릇과 같아서는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집에는 그런 그릇이 없습니다만 가끔 좀 여유가 있으신 성도 집에 심방을 가거나 뜻밖에 좋은 음식점에 가면 모가지가 기다란 유리 글라스가 있습니다. 붙잡을 때 부서질 것 같은 그런 글라스, 슝늉이라도 그런 데 담아먹으면 기분이 참 좋지 않겠어요? 백화점이 한번 가서 보니까 유리 잔 하나가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하나에 3-4만원 5-6만원씩 했습니다. 가면 그런 그릇에 음료수를 따라 대접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은 아침, 점심, 저녁 그런 유리 그릇을 꺼내놓고 물을 따라 먹고 음료수를 따라 마십니까? 자기네들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손님이나 왔을 때 한번씩 꺼내놓습니다. 왜 예쁘고 깨끗하고 보기는 좋은데 너무나 연약해서 그렇게 설거지 통에 넣고 설거지 할 수도 없고 슝늉을 따라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고 그래도 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연단해서 강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강하게 시험을 통해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험하게 사용하셔도 언제든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될 수 있는 좋은 도구들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온 지난 날의 개인적인 역사를 돌아보아도 주님을 알아온 그 모든 과정 속에는 항상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힘이 없는 존재인 줄 알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키고 돌보시는 그런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도와오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숙하고 강인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견고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신앙의 길은 가시밭을 헤치면서 걸어온 신앙의 길입니다. 시련의 파도가 없이는 결코 우리들이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해변에 밀려오는 수많은 작은 파도들이 조개껍질을 점점 더 단단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변하기 쉬운 우리의 믿음과 유리 그릇처럼 쉽게 깨어지는 우리의 인격도 결국은 이처럼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강하고 그리고 성숙하고 꿋꿋한 경건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시련을 당하고 고생을 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꿋꿋하고 경건해지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을 많이 당하고 시험과 연단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 더욱 향기나는 신앙의 인격, 연단된 꿋꿋한 신앙의 인격, 성숙한 경건을 가진 신앙의 인격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시련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게서 당신의 자녀들을 도우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 시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에 평상시 같으면 자신의 힘으로 그 시험을 이길 수 없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이한 힘을 받아서 그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밀려와도 하나님 보다는 강하지 않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고백을 하면서도 나약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연약할 때에 하나님의 크신 도움이 나타나리라고 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특이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경험을 갖게 됩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이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다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그 길로 피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을 이기게 하십니다. 이 때에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압니다. 분명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어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에게 이 시험을 피해갈 수 있도록 놀랍게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아주 강한 확신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험을 이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재주를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 무한한 삶의 지혜, 시련을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게 하는 피하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이기게 하시고 또 이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이제껏 우리를 움직여온 하나님의 은혜의 원동력이었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 주님을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사업의 위기를 만나거나 혹은 가정의 상처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도 마음의 진정한 평안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서 안식을 발견하고 주님을 만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 방황하며 주님을 만난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노년에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에 주님을 만나고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보고 더 이상 변화될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할 그때에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은 우리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홀로 내버려두신 적이 없고 우리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평상시에 우리들이 기대할 수 없었던 특이한 힘과 은혜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험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성격이 있습니다. 시험이 일어났는데 그시험은 작은 모래더미 같고 그 시험을 당하고 있는 나는 커다란 거인과 같이 느껴진다고 하면 그것은 처음서부터 시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이라고 부를 때는 대게 집채와 같은 큰 파도를 생각합니다. 거기에 떠있는 작은 배,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없는 파도에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하는 작은 배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배는 무엇으로도 그 큰 파도를 필적할 수 없습니다. 시험이라고 할 때는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인간성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결단력이나,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혹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시험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만약에 다른 요인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큰 시련 앞에서 우리는 뭉개지듯이 파산할 것이고 우리의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그 시험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관계들도 파괴되고 우리의 가족의 관계나 교회 안에서의 관계나 이제껏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면서 살아왔던 관계들 조차도 파괴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시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셨다면 우리는 아마 성격파탄자들이 되었을 것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들이 단정한 마음과 정상적인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시련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시련을 당할 때마다 우리들이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커다란 시련을 당했는 데도 예전에 자신의 마음 속에 깃들여본 적이 없는 놀라운 평안을 주시므로서 그 시험의 물결을 헤쳐나올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련을 만나서 고통하며 가슴을 치는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이 시련의 아픔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시련 때문에 가슴을 찢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목놓아 울게 하시는 감격을 주셔서 그 시련을 넉넉히 이기게도 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이 시련 가운데 버려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지켜오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든 자리에 들어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밝힐 수 없는 삶의 현장들이 여러분들에게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절망 중에 있을 때에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절망의 상황에서 파멸되지 않고 오늘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의 능력보다는 훨씬 커다란 힘으로 다가와서 도저히 여러분들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때에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그 시련 속에서도 머리털 끝 하나 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련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깨닫게 하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늘 뜨거운 감격 속에서 우리 주님 사랑하고 늘 가슴저미는 눈물로서 그분을 향한 진실로 우리가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날 동안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넘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주의 손이 저를 붙드심이니라고 고백했던 시인의 고백과 같이 우리들은 넘어졌지만 아주 엎드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넘어지는 시험의때마다 시험을 능가하는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와서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본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삶과 죽음이 간발의 차이이고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발자국 하나밖에는 차이가 나는 것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절망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시련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시련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깊이 느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홀로 두시지 않고 이렇게 큰 시련과 시험을 만났을 때마다 하나님이 그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바람 앞에 나부끼는 촛불같이 연약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렸지만 이제껏 꺼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타오르고 있는 것도 그분이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커다란 경제적인 시험이나 혹은 환경적으로 우리를 삼킬 듯이 우리를 뒤흔드는 위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사업의 큰 위기를 만나서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 간 사람들도 있고 건강에 커다란 위기를 만나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 아무 것도 해당이 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실망시키고 배신하여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인간을 의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경험하고 사랑했던 것만큼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시련과 고통은 물질적인 시련과 고통못지 않게 우리를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속속들이 파헤쳐서 황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수많은 원수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아주 삼킬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큰 능력으로 힘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하시는 보호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 하던 처지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회상하기를 그 길이 얼마나 철저한 고난의 길이었는지를 자주 회상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신작로를 터덜터덜 걸어서 가나안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그들의 가는 길을 가로막았고 그들과 더불어 싸워야 했습니다. 때로는 질병과 그리고 커다란 자연적인 재앙이 그들을 삼킬 듯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어두움이, 때로는 열사에 대지 위에 내려쬐이는 그 뜨거운 햇볕이 그들을 쓰러질 것처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치 악한 원수들은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로 함께 연합한 것처럼 다각도로 그들의 삶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을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른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업어 나르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조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을 증명해서 여러분들에게 보일 수는 없지만 제가 읽은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들이 자기의 새끼를 실어서 나를 때는 대부분 부리로 그들을 나르거나 혹은 발톱으로 그들을 붙잡아서 공중으로 이동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새의 새끼의 생명을 노리는 군사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미를 다치지 않고도 발 아래 붙잡혀서 이동하고 있는 새끼를 맞추어서 떨어트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와는 달리 자기의 새끼를 나를 때에 발톱으로 붙잡고 나르지 않고 두 날개 사이 움직이지 않는 그 어깨죽지 위에 새끼를 놓고 그리고 업어서 나른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련한 군사라고 할지라도 밑에서 독수리 새끼를 아무리 보려고 해도 어미의 날개 밑에 감추어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새끼를 헤치고자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그를 업어 나르고 있는 어미 독수리를 먼저 헤쳐야지만 그 새끼를 떨어트릴 수가 있답니다. 더욱이 독수리는 정면으로 태양을 보며 하늘로 치솟을 수 있는 유일한 날짐승이라고 하는 그들 머리 위에 따겁게 내리쬐이는 눈부신 태양볕에 방해를 이기고서 활을 쏘아서 어미를 맞추지 않고도 그 새끼를 멸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 보호하심에 은혜, 능력주셔서 시련을 이기게 하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그림처럼 묘사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서 하늘로 업어 나르신 그 놀라운 보호하심의 능력은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받은 자기의 자녀들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고 그리고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인생의 길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시련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타오르는 시련의 불이 불과 같이 강렬하여 때로는 우리의 생명이 이제 족하니 우리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감히 기도하는 적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드는 원수 앞에 우리가 삼킨바 된 적이 있었습니까? 악한 사자가, 악한 악마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위를 두루다녔으나 그러나 우리를 정말 아주 삼켰습니까? 시련과 고난을 당했지만 그 시련 속에 우리들이 파멸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련 속에서 우리는 연약한 자가 바로 우리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며 사는 방법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곤고하고 더 고난이 넘치는 때가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힘보다는 시련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아이고, 그 시험 시험 말도 하지 마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사람답게 이 기회에 한번 만들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시면 서양 속담 말따나 비가 오면 소낙비로 오는 것입니다. 시련에 고난이 겹치고 시험에 시련이 겹치면서 삼킬 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밀려올 때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무엇인가 하면 정말 시험이 시험이 되려면 막판에 가서는 항상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 시련을 함께 이겨갈 수 있는 동지가 많다는 생각이 있는 동안에는 사실 시련이 시련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만약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시련을 많이 당해도 우리들이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를 도와줄 사람도 많다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만이 시련에서 나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하며 매달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는 그런 상황에 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 지나면서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믿고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받아서 인생 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진실하시고 하나님만이 변함이 없으신 분이심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를 않네
미친 듯이 시련의 물결이 시험의 파도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그것을 극복할 수있는 사랑의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당하고 우리 주위에 굶주린 사자처럼 울부짖으면서 악한 원수들이 어슬렁 거리고 돌아다녔지만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오늘 이렇게 살아서 우리 주님 찬송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사는 것이 힘겹고 주님의 도움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내 인생이 이제 낙이 없다라고 생각할 그 때마다 항상 저녁에 눈 감으면 아침에 눈뜨기가 싫었던 그런 깊고 고통스러웠던 시련의 때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업어 나른 것과 같이 어떻게 여러분들을 건져내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회상하면 오늘 우리들이 주님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오늘 성경은 “미쁘사”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미쁘사”입니다. 대부분 신약 성경에서 “미쁘사”라고 번역된 이 희랍어는 구약 히브리어로 돌아가면 대부분이 “에매트”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에매트”라는 단어는 시편 같은데서 “신실하심”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신실하다”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성품이 약속의 관계에 적용되었을 때에 신실함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성품이지만 신실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의 관계를 맺으시고 자신이 변함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자신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행동 속에서 보여주신 것이 신실함입니다. 그 신실함을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큰 사랑 안에 살게 하신다는 찬송 고백처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바로 이 신실하신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봅니다. 많은 시련의 파도가 밀려왔고 우는 사자와 같이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쌓지만 상하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있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보여준 그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한번 주의 자녀 삼으신 성실하신 언약을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지난 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시험 속에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날 우리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시험도 우리들이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우리보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우리의 삶에 대한 개입을 통해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을 의지하며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시때때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큰 시련 속에서 우리를 능력으로 보호하고 시시때때로 건져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진멸되었을 것이고 살아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성격파탄자들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여러분의 삶도 이런 하나님의 시험 속에서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의 이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야 인생인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굳게 붙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 속에서 은혜 베푸시는 또 하나의 비결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시험과 맛서 싸우도록만 내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그 시험을 맛서 싸워서 이기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그 시험을 피하게 만드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의 지혜를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절망의 어두움 속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애굽 전역을 뒤흔든 후에 홍해 앞에 이르렀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거를 탄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치고 들어오고 있었고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생각대로 라면 뒤에 다가오고 있는 애굽의 병사들과 싸우게 하시고 이길 수있는 큰 군사력을 주셔서 그들을 제압해 버리는 것이 유일한 길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떤 지혜로운 사람도 생각할 수 없는 제 삼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에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적이 일어날 수 없는 홍해를 가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까지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그 시험을 피하게 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 지혜가 홍해 한복판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바다의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한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은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피할 길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할 길로 도망하고 나니까 창 한번, 칼 한번 쓰지도 않고 애굽의 그 수많은 병사들을 홍해에 수장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의 감격을 안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업에서 위기에 몰려 벼랑 끝에 서 본 사람들은 압니다. 한걸음 나가자니 낭떠러지오 뒤돌아서 도망하자니 상황이 자기를 밀고 들어오는데 피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과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극복하는데 힘은 도무지 없습니다. 그런 인생에 절대절명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점에서 이제껏 자기의 지혜로 살아왔던 교만한 사람들을 벼랑 끝에서 벌벌 떨며 무릎을 꿇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거기서 우리가 나의 교만을 의지하는 사람, 나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이 불신앙들을 깊이 포기하게 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도저히 우리의 지혜로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감격이 사라졌지만 한번 회상해보십시오. 추수 감사절이 다가오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릴 가장 고귀한 열매는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주께서 내 인생을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나의 이 지혜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그 시련의 상황 속에서 주님이 그 벼랑 끝에서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지혜를 보여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오늘 내가 진멸되지 않고 여기에 서서 주님을 찬송하기 때문에 하나님, 내 인생은 모두 주님의 사랑에 부채 덩어리입니다라는 이 감사의 고백,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있는 최고의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하고 주님 많이 섬기고 그냥 거액의 헌금을 할 때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후회스러울 정도로 무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분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리 마음에 원하는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당할 즈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실함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침마다 새롭다고 표현한 주님의 자비하심,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에 성실하신 하나님 그것이 바로 이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사악한 욕심과 우리의 정욕, 인간적인 집착 이런 것들에 눈이 멀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과거가 바로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길이 아닌데도 그것이 길인 중 알고 걸어가며 자신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며 죄악된 길로 달려갔던 대부분의 것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을 살기 보다는 자신의 지혜를 믿음 때문에 그때는 그것이 제일 옳은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렇게 시련 속에서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하면 자신이 시험을 당하던 때를 기억하고 정말 시련과 시험을 너무나 많이 당해서 이제 살아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눈물로 음식을 삼고 자기의 죄와 불순종이 자기를 얽어매어서 아무 소망이 없고 저녁 때 고통 속에 잠들면 아침이 오면 눈뜨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인생에 마지막 벼랑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지혜를 열어주셔서 피할 길을 만들어주셨던 그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을 추스리고 타이르면서 고백을 해야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려도 주님을 잃어버리고 산 그 날들이 얼마나 힘든 날이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주님을 잃어버리고 산 그 날들은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하는 그 고백을 다시 자신에게 상기시켜서 자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우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운 삶,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 숨쉬고 먹고 마시는 이 생존을 위한 모든 작용들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빚덩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 주님의 사랑에 부채를 진 사람,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하셔서 시련 속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누가 나보고 왜 사는가 하고 물으면 내가 사는 것은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살려고 여기에 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산다라고 하는 비결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존귀하신 분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고 우리가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인생이 전적으로 주님의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최고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첫 번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first가 아니라 all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진실한 고백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어느 철학자는 인생의 40은 끝나는 것이오 나머지 생애는 40년 동안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하는 주석을 쓰고 죽는 시간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주님이 시험을 당할 때마다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피할 길을 내셨기 때문에 오늘도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유월절 의식을 치루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되어서 한번 우리가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고 삶에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던 그 인생에 벼랑 끝에 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셔서 여기에 살게 하셨는지,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신실하신 지혜가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복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다시 한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걸어온 신앙의 길을 되돌아볼 때에 이렇게 시험 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없었더라면 아마 오늘 우리는 시험을 당하게 될 때에 우리 자신을 가눌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항상 우리들에게 현재를 보게 만들고 미래를 향한 지혜를 줍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리고 넘어지던 때가 많이 있었지만 아주 엎드려지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 찬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앞으로 남은 인생의 길, 곧 우리의 신앙의 그 길이 과거의 살아온 길보다 훨씬 평탄하고 좋은 길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강한 사람 만드셔서 주님을 위해서 잘 쓸 수있는 순결한 사람 만드시려고 우리를 시험 속에서 연단하시기도 하실 것이고 때로는 아직까지도 진실해보이는 우리의 위선된 우리의 모습 속에 남아 있는 그 더러움의 찌끼들을 몰아내시고 뽑아버리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같은 시련을 당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우리의 살아온 것이 우리의 힘과 우리의 지혜를 의지하며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을 막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은혜였지만 그러나 앞으로 남은 길도 주님의 신세를 지면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달란트나 특징들도 ‘훅’ 주님이 불어버리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지만 여전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보다는 그것을 주신 주님이 소중하다고 고백을 할 수있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나면 그 시련 속에서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나면 그 시련을 이깁니다. 갈 길을 몰라도 하나님 의지하면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1년 전에 여러분의 시험의 때가 여러분에게 기억이 납니까? 2-3년 전에 생애 벼랑 끝에 서서 통곡하며 주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그때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회상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여러분들의 생애에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경험들이 지나가도 마지막에 우리 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 맛보았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알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 우리의 힘을 의지하며 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 아무리 인생이 막판에 이르러서 도저히 살 길이 없어보이는 때라도 기도하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완전히 다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있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은 우리를 살리시고 건져주신 그 시험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그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마음 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떠서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시험 앞에서 하나님 밖에는 내가 붙들고 의지할 분이 아무도 없다는 고백 속에서 벌벌 떨던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앙에 있어서 평범한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섬기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에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물론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시를 따라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핍절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일상적인 양식의 공급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면서 살아갈 그런 사람들이 또 필요합니다. 그런 관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인생은 광야를 홀로 걷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우리 되어서 여기 이렇게 서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많은 은혜는 우리들이 만입이 있어서 다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의 경험을 빌어서 또 우리의 경험을 빌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못지 않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잊을 수 없는 은혜 하나를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일꾼 삼으신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사도가 된지 25-3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였고 감옥 속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무렵에 옥속에 갖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의 신세가 되어서 쓴 편지이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감사의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해서 사도의 마음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오늘 이 글을 쓰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가 오늘 감옥 속에 갖혀있는 죄수의 신세로서 가슴이 터질 듯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죄목 가운데 하나는 “자기에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 수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고백을 우리를 대신해서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전에도 사도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베냐민의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엄격한 히브리인의 규례를 따라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직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인생의 한 삶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그렇게 자신이 선택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삶의 방식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 이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인생에 있어서 생애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애적인 전환점, 그 정중앙에는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그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만나고 그 찬란한 빛 앞에서 엎드려져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이 다 무너진 상태에서 물었습니다. “주여 내가 어찌하리이까,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사도였던 시절에 예수님 앞에 엎어지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이전에 살았던 삶을 계속할 수가 없고 이제껏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이오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사환과 증인이 되게 하려 함이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는 도구가 되게 하고 또 이방의 많은 임금과 권세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를 택하셨노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로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의 직분이었습니다. 그것을 맡은 후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게 되었고 이전에 추구하던 인생의 모든 추구점들이 변하여 이제는 새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알고 보면 처음에는 이 직분이 그렇게 큰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회심했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을 때에 누구도 그 회심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바나바라는 명망이 있는 평신도 지도자가 예루살렘에 모든 교회들 앞에서 사울을 소개하면서 이 젊은이의 회심이 진실된 것이며 실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를 만나주셨다고 그를 변호해주므로서 그를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단지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교회를 박해하던 한 젊은이로서 회심을 하였는데 아직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미심쩍인 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할 수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아라비아로 갔고 거기에서 3년 가까운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마 괄목할만한 사도로서 활동을 하면서 산 그런 시기는 아니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째든 그는 그렇게 이름없이 묻힌 세월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쓰게될 즈음에는 사도가 된지 30년 가까운 세울이 흘렀고 그는 이방인 선교사가 되어서 모든 나라에 복음을 실어 전파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11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벗어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쏟으면서 사역을 했지만 이 사도는 방대한 스케일의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유럽이 복음화되는 초석을 이미 그때 놓았고 마게도니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마게도니아의 그 문화를 타고 온 유럽과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중요한 기초를 사도가 놓았습니다.
쉼없이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훌륭한 성경책들을 기록하므로서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알려주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우리는 오늘 그를 통해서만 비로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과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진리의 초석을 우리 앞에 놓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를 훌륭하게 사용하셔서 위대한 기독교의 역사의 한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섬김의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나 그가 섬기면서 살아간 그 삶은 두고두고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이렇게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겨주셨는데 그 직분을 맡겨주실 만한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인간인데 그 직분을 맡겨주셔서 하나님 섬기며 살게 하신 것을 인해서 사도가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가 이처럼 자기에게 직분을 맡겨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는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직분을 맡은 이후에 살아가는 그 삶과 직분을 맡기 전에 살아갔던 그 삶을 자신이 비교할 때에 그 삶의 차이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에게도 역시 생명을 걸고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고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모든 꿈을 걸고 행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감사했던 이유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사람이었으며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지체들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죽는데 가편투표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었고 예전에 열심이 있었던 모든 삶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삶이었으며 오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살아가는 이 삶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진실한 삶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서 그 감사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재물이 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를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때에 어떤 사람들인지를 우리가 만약에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받고 있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이며 그 이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에 우리들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만나주시기 전에 여러분들 모두 주님을 만나 삶의 정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주님을 향해서 냉담하고 하나님 사랑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었던 여러분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의 사랑에 목매인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지 않고는 인생을 살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무게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간섭받고 사는 것이 싫어서 주님을 멀리 떠나고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어느 순간에 자기 혼자 살아가는 그 인생의 짐이 너무나 무겁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홀로 스스로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혼자서 인생에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누가 강요하고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한다고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을 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파고들어 오는 생각은 바로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옥속에 갖혀있던 바울이 사랑하는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인 빌레몬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네시모라고 하는 종이 있었는데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도망쳤습니다. 당시 노예는 도망치면 예외없이 사형입니다. 그러다가 도망쳐나온 그 노예가 옥속에 갖혀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듣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낳은 바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 살아오는 동안에 그가 단지 도망쳐 나온 죄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오지는 않지만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논조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이 빌레몬의 집에서 뭔가를 훔쳐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가 뭔가 너에게 갚은 것이 있다면 내게 계산을 하라. 내가 대신 갚아주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에게는 더말할 필요도 없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옥중에서 나은 아들이며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 내게는 나의 심복이라고 부르기까지 그렇게 아주 쓸모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익한 종이 아니라 아주 유익한 종이 되었고 사도 바울과 하나님에게 모두 아주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하자면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주님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까 주님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들어주셨는데 우리가 정말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내가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쓸모있게 된 것은 모두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주님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가 만약에 아직도 하나님을 모른 채, 복음을 모른 채 살아가게 되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죄를 물먹듯이 마시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의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 훼방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도망나온 오네시모와 같이 쫓는 사람은 없어도 쫓기는 감정 속에서 두려워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을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고 고통 때문에 흐느끼는 울음은 있지만 그것이 참된 회개가 아니기 때문에 슬픈 눈물이 지나가고 나도 역시 우리의 삶의 죄로 말미암은 고통을 종식시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절망을 잊기 위해서 더 많이 세상에 탐닉하고 이 세상의 즐거움에 빠졌을 것이며 그런 삶의 추구는 점점 하나님 앞에 우리를 죄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로 묶어두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만약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인생은 가장 절망적인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왜 우리의 이웃이 아니고 우리의 친구가 아니고 하필이면 나를 만나주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긍휼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히 원인이 되어서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돌같은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그 큰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고 쇠덩어리와 같이 굳어진 우리의 뺨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눈물의 감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 더러워진 창을 씻어내자 우리는 비로소 인생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왜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어야 되는지 이 사실을 깨달은 그 깨달음에서 진실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참회의 눈물이 흐르고 나니까 우리의 마음에 탐욕과 죄악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더러운 것들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의 창문들이 깨끗이 닦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인생에 진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사실과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가장 쓸모없는 죄인인 우리들을 고결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일꾼 삼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님이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일꾼 삼으셔서 우리를 통해 자기의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교회에서 주는 직함이 있는 명칭을 가진 직분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원어상으로 볼 때에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지만 주님이 아무 쓸모없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애의 진실을 보게 하시고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직분, 이러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슬픈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아니고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생에 자존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 피로 속죄하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복음의 참된 진리가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실 때에는 단지 우리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복음과 인생에 대한 진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지만 오래 동안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우리의 참된 직분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나같은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수많은 죄인들 가운데 짐승처럼 먹고 마시다가 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남이 못 본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셔서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통해서 꼭 받으시고 싶으셨던 섬김이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다른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달은 사람들은 더 많이 빚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이 맡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이 구하시기 때문에 더 많이 그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만나주신 그 이후로 주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를 살게 하셨고 그리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심지도 않고 씨뿌리지도 않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면서 이제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 때에도 우리의 생명을 거두지 않고 연장시키셔서 오늘날 여기까지 살아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이 우리를 생각해도 싫기 짝이 없는 우리들인데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한번 두 번 뿐만 아니라 수없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 수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곤궁함과 궁핍함 속에서 고통할 때는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의 손길을 펼쳐 우리의 궁핍함을 면하게 해주셨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흐느껴 울 때에는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가 홀로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음으로 영혼이 곤고해졌을 때에 죄를 지은 것은 우리인데도 찾아오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박힌 그 고통의 못을 빼어주시고 말씀의 포도주를 우리에게 부어서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주셔서 다시 죄인이지만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인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어떤 한 삶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우리에게 공급해주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이 직분을 주십니다. 그것이 이름을 가진 직분일 수도 있고 이름없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받은 사명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 그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으로 여기고 그 자리는 나만이 설 수있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주님이 나를 불러서 세워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떠날 수없이 내가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감당해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해나갈 때 그를 점점 더 큰 사람으로 큰 직분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시니” 그랬을 때에 이 직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로서의 직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는 후일 자신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도된 자라고 고백을 했지만 그러나 처음에 회심조차도 믿어지지 않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가 할 수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점점 더 큰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제는 열 한 사도 위에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하셔서 기독교의 선교의 초석을 놓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로 쓰임받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이 사명과 직분을 맡고 살아가는 삶이 충성된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점점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실 때에 그 직분을 맡고, 다시 말하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태도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명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도 사명감에 불타있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감격 속에서 감당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시시때때로 그 사명과 직분이 자신에게는 너무 버거운 것과 같고 벅찬 것 같아서 그만 두고 싶고 그리고 사명을 저버리고 싶은 유혹을 이기면서라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 직분을 감당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고 가슴이 타오르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집사입니까? 혹은 장로입니까? 혹은 구역장입니까? 혹은 교사입니까? 혹은 여러분들이 하여튼 무엇인가로 섬기는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에 감격에 가득차서 그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 나간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이 직분을 맡았지만 힘겨울 때가 있었고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직분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고, 혹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과 사명이 너무나 막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숨쉬기도 힘들다는 생각을 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때때로는 의무감 속에서 때때로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충성심으로 이 직분을 감당해 나가지 못해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그 자리에 서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직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변호의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고백을 우리들이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이 직분을 이러한 직분과 사명없이 살았던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무거운 의무감, 하나님 앞에 사명이 있다라고 하는 떨쳐버릴 수 없는 영적인 부담감이 없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에는 우리들이 모두 사명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사명이 주는 무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무게가 우리들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입니다. 죄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무게입니다.
사명의 짐이야 끝까지 지고 나면 주께로부터 쉼을 얻을 수있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사명의 짐을 잘 진 사람에게는 상급이 있지만 죄짐을 짊어지고 일평생 살고난 후에 그 짐을 지느라고 어깨가 벗어졌어도 그에게는 상급이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받은 그 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너무나 크고 그 사명 때문에 종종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삶이 그리스도 밖에서 가장 행복할 때보다도 훨씬 쉽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종종 청소년들이 가출을 합니다. 그럼 제가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집에서 사는 것이 참 힘들지, 성격 못된 엄마, 그리고 마구잡이로 자기 자식들을 패는 아빠, 이해 해주지 않는 형, 누나들 밑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그러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면 더 힘들다. 우리들이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직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과 직분을 따라 살 때에 비로소 행복할 수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에게 무거운 사명,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절제하게 만드는 직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 나가게 하는 그런 직분과 사명이 우리에게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아마 인격적인 예수님과의 만남도 우리에게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명만 없는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까지는 취소하고 싶지 않고 주님과의 만남, 죄사함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은 다 받되 다만 무겁게 짊어져야 할 사명의 직분은 없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하나님의 직분,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감이라 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이지 저절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사람에게 큰 직분을 주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갈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하물며 사람들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은 자기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만약에 사명감이 없고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직분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섬기며 살 수 있는 그 기회가 우리에게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도들 위에 뛰어난 일꾼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에 빛으로 인도하고 결국은 가이사 앞에까지 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변호했던 사도 바울이 만약에 그런 사명과 직분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음성에 귀를 막은 채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며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사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고백이 어찌 사도 바울에게만 있습니까? 주님이 만약에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셨더라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맡겨진 이 직분이 너무나 무거워서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내게 맡겨주신 이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때로는 내 짐이 너무나 무겁고 내 십자가가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에게 이 십자가, 이 짐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짐승처럼 이 세상에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 참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중보기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동물과 같은 삶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직분을 맡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서 고통받기도 하고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모함을 당하거나 혹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고 마음에 아픔을 겪기도 했고 혹은 우리의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고통도 있었지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만약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삶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을 만나는 만남도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 가운데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살았던 그 삶이고 그 삶이 너무나 염증이 나고 지겨웠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 피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직분을 맡기시고 우리를 일꾼 삼으셔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큰 은혜요 하나님의 귀한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직분을 맡기시고 사명을 맡기셔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곤고하고 하나님 앞에 차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나보다 더 곤고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들인 줄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도 역시 하나님의 참된 복음에 진리를 다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죄와 어두움 속에서도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면서 나같은 죄인에게 이 진리의 빛을 주신 주님께 빚진 사람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있는 그곳에 반드시 직분이 있고 사명이 있으니 ‘내게 이처럼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 것은 이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니이다’ 하는 신앙의 고백을 우리들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아서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살아왔습니다. 변함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충성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 중에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직분을 거두시거나 우리의 사명을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여전히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오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저는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말할 때마다 저 자신이 아주 웅변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생각합니다.
(예화: 22살에 주님을 만나 잠시 사랑에 빠졌으나 마음에 패역과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화 받은지 얼마 안 되어 교회는 다니셨으나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져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하셨는데 작은 교회라 형편이 어려워 전도사를 둘 형편이 안 된 가운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주일 학교를 섬기라는 말씀에 마지못해 하는 상황이 되어서 자신이 아니면 누군가에게도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그 직분 에 코가 꿰어 하다가 보니까 여름 성경 학교를 맡게 되어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일주일의 금식기도를 하면서 직장을 다니시는 가운데 닷세째 되는 날에 주님이 만나주셔서 주의 길을 가라고 하신 말씀에 지금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며,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320명의 어린이들이 참 석하였다는 이야기)
난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그때에 내가 부족한 모습이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냥 자기의 부족한 모습과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의무감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이 괴로워서 다 집어치우고 도망갔더라면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항상 충만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분,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충만할 때만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 우리의 본분인데 우리가 충만할 때에만 하나님 사랑하면서 살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에 본분이듯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실 때에 기쁨이 넘칠 때는 기쁨이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괴롭고 시련이 많을 때는 시련이 많고 괴로움이 많기 때문에 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 직분을 받은 사람들에는 항상 그 선 자리에 맡은 자리에 서있지 못하게 끔 흔드는 세상의 풍파가 있습니다. 마귀의 강력한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를 요동하게 해서 그 직분과 사명으로부터 도망쳐서 요나와 같은 사람되게 만들려고 하는 강력한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불같은 시련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그런 시련과 시험도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직분을 맡기시고 또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면 감당해나갈 수 없는 독특한 사명의 그 자리는 여러분들이 거기에서 도망치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오는 자리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자리는 여러분들이 도망치고 나면 비어있는 자리입니다.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부르신 그 사명의 자리를 여러분들이 도망치고 나면 누가 그 자리에 대신 서줄까요? 틀림없이 그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그렇게 불러서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신 것은 먼저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사명을 받아서 살아온 이후로 이제껏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을 고백했을 때, 그 은혜를 받은 후에 그래도 나는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용서하셔서 그 피로 구속하셔서 일꾼을 삼으셔서 나를 주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다라고 하는 사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알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쓰시려고 하시는 동안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하시는 동안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기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이런 은혜를 우리들이 생각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추수 감사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열매 중에서 특별히 섬김의 열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나같이 만물의 찌끼와 같고 쓸모없는 죄인을 사용하셔서 주님이 섬김을 받으시고 주님의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인데 만물의 찌끼와 같고 형벌받아 마땅할 쓰레기와 같은 인간인데도 주님이 사용하셔서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래서 여러분들을 곤궁함을 면하게 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훨씬 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우리를 불러내셔서 우리를 일꾼 삼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는 주님이 우리를 일꾼 삼으셔서 직분을 맡기셔서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고유한 자리에 세우신 것에 감사하며 이제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참된 기쁨이 무엇 보다도 귀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사도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섬기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남이 못 본 하나님 보게 하셨고 남이 알지 못하는 지식 갖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이 붙어 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장 기쁨으로 알고, 나같은 사람 사용하셔서 직분 맡기시고 주의 일꾼 삼으시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며 주님 섬기는 재미로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성화의 은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학교에 다닐 때 어버이 날 쯤 되면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어버이의 은혜에 대해서 글짓기를 하라고 숙제를 내주거나 과제 시간을 갖습니다. 평소에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라오던 아이들이니까 그 시간만 되면 뭐 좀 고마운 것이 없나 찾으면서 주섬주섬 어버이의 은혜에 대해서 글짓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시집 장가를 가고 아이들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고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들 때문에 걱정도 많이 하고 그런 결혼 생활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글짓기 시키는 선생님이 없고 과제를 주는 사람이 없어도 부모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부모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많은 부분들은 사실 글로 표현할 수도 없고 눈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는 것들을 존재 자체로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어렸을 때는 그저 주님이 우리에게 먹여주시고 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이것 저것 주시는 것 때문에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님의 인격이 무엇인지를 알고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은혜가 먹고 마시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것만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돌아볼 때에 우리들이 늘 잊기 쉬운 그 은혜 하나에 대해서 오늘 사도가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들의 성화에 대한 감사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가 거룩해져간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하고 그리고 순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의 첫 조상들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는 크게 두 가지의 결과를 인간 속에 가져다 주었고 그 결과는 자연적 출생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 첫째가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고 지은 그 죄책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원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만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요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 그 원리는 곧 예수님 한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십자가 근처도 가본적이 없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믿을 때에 의인이 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죄는 우리 각자에게 죄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의식 속에서 아무 범죄를 하지 않아도 엄마 배 속에서 나오는 그 순간 그 인간은 죄인으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죄책의 문제와 함께 또 하나는 부패성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관점은 성선설도 아니고 성학설도 아닙니다. 시점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서 타락하기 전에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성선설이 맞겠지만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성학설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서 죄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원죄의 죄책과 그리고 죄된 본성에 부패성, 죄책과 부패성 두 가지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원죄의 죄책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서 우리는 원죄에서 자유로움을 얻게 됩니다. 이제 그 죄책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옛사람의 죄악된 부패성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마음 속에 새 새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새 본성을 심으십니다. 그리고 그 새 본성은 옛 본성보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일정한 영적 생활의 도리를 따라서 살면 넉넉히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고 자신의 부패성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성령에 의해 지속적인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하고 적절히 목양을 받으면서 영적 생활의 원리를 터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옛 본성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옛 본성은 생각보다도 강하게 자라나서 우리를 점점 부패한 본성 속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내면의 세계에 있는 이 부패한 본성은 내면의 세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있는 유혹들과 만나서 구체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고 불순종하게 하며 반복되는 불순종과 범죄는 우리 안에 더욱 더 굳어진 죄악된 경향성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들이 죄와 불순종을 스스로 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자신이 그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화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본성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신자 속에 남아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신자를 하나님 성품 따라서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 성화의 노력은 성령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순종하는 성도들의 진실한 참여를 통해서 성화의 진전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장 신앙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의 독특한 신앙의 정체성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을 빼놓으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사람들, 공식적인 예배의 생활의 정신이 삶으로서의 예배 속에 흘러들어가지 못하는 이중구조적인 생활들, 종교적으로는 뜨거운 열심히 있지만 언제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그치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삶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는 단절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것들은 참된 의미에서 신앙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화를 위한 진실한 노력이 없이는 누구도 이와같이 외식하는 종교인으로서의 삶과 결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은 반쪽 자리의 구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실하게 또 다른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그 구원이 바로 성화의 구원입니다. 끊임없이 자신 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자기 성품데로 맘대로 살려고 하는 부패한 본성과 더불어서 싸우고 이기는 성령의 은혜로 이것들을 정복해 나가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성장할 수 없으며 본인은 행복할 수 없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능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싸워서 성화되어 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막대먹은 삶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능멸하고 십자가를 조롱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광경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시대였습니다. 로마는 세계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엄청난 제국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잘 해결해야 됐었는데 하나는 그 넓은 제국에 영토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민족들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하는 것과 그리고 외적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거나 혹은 외적들을 점령하여 제국의 영토를 넓혀 나가서 제국에 대한 외부적인 위협의 요인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군인들이 동원되어야 했고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군인들의 최고의 영예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되어서 황제가 베푸는 개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수많은 군인들이 개선문을 통과하여 로마 시민들이 가득 움집해 있는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황제가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커다란 향단이 있습니다. 거기에 여러 가지의 향재료를 넣어서 태웁니다. 그러면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그 개선 행사를 알리는 독특한 향기가 온 경기장 안에 가득합니다. 그때 쯤 되면 이제 개선문을 통과한 개선 용사들이 돌아옵니다. 전쟁을 진두 지휘했던 장수와 그 휘하의 막료 지휘관들을 앞세우고 뒤로는 전쟁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던 늠름한 군인들이 따라 입장하고 그 뒤에는 로마의 제국에 대항했던 전범자들과 그리고 포로로 끌려온 군인들이 드디어 뒤에 밧줄에 묶인 채 입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두 가지의 일이 행해지는데 하나는 군인들이 싸워 이긴 승리에 대해서 공적을 따라서 상을 주는 일과 감히 로마를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항거하였던 전범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탈취해온 토지와 그리고 그 병사들에 대해서 노비로서 개선한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시상식이 행해지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믿는 사람들을 가르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냄새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개선 행사장에 타오르는 그 향내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겉과 속이 동일한 삶을 살게 되면 그의 신앙적인 삶, 그의 성화된 인격을 통해서 그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자신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살았지만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가 너무나 부패하고 어둡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전반적으로 너무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를 거스려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적절히 이 세상과 타협하고 야합을 하는 것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에서 세상도 잃지 않고 주님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가치는 이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한 사람만이라도 똑바로 살아가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빛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변화되어서 진실한 신앙을 갖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의 노력을 게을리하던 사람들은 항상 수자에 집착했습니다. ‘저들은 너무나 많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다, 막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이고 소금과 빛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이 소수로 어찌 그 다수를 감당하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하셨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을 비유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어둡지 않고야 빛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야 소금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어둡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오 부패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신선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들을 이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신앙적으로 깊이 침체하거나 마음의 쓴뿌리를 이기지 못해서 지금 이 순간도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참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돌이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난 한 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성화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건들지마. 나 만지면 터져” 이러고 살아가던 막대먹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 비슷하게 닮은 사람들로 변해가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래 동안 가슴에 부둥켜 안고 살았던 폭탄 같은 상처들이 사실은 더러운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보석처럼 푹고 살아왔던 날들을 후회하는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에 가치를 알고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버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에는 이 성화의 진전이 눈부실 정도로 빨라서 일년 전에 그의 모습과 오늘 날의 그의 모습을 비교할 때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는 그 진전이 매우 미미하여 그저 하나님 앞에 죄송하다라는 말밖에 기도할 것이 없는 그런 미미한 진전밖에 못보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째든 하나님께서는 지난 한 해 동안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셔서 성화의 길을 걸어오게 하셨고 그래서 절망적인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정말 희망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변화되지 않는 존재들인지는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동안에 내 마음대로 자기의 성질데로 살아오던 본성을 따라서 살던 짐승과 같은 삶에 수십년 세월동안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동안 신고 다녔던 신발처럼 옛 본성을 따라서 하고 싶은 말 하고 부릴 성질 부리면서 자신의 부패한 욕심에 승복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옛 성품대로의 삶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습니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거기에는 실패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독특한 주님과의 행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짐승과 같은 우리들을 자극하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도 바꿀 수 없던 우리 자신들을 몇 달 사이에 혹은 몇 년 사이에 우리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환난과 그 많은 시련의 징벌을 받으면서도 고칠 수 없었던 우리의 부패한 삶의 경향성들을 주님께서 성화의 은혜로 고쳐 주님 앞에 새사람의 길을 걸어갈 소망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성화시키셨는데 우리는 자칫하면 이런 성화를 위해서 자신이 애쓴 것을 많이 생각한 나머지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가 힘써서 얻은 모행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성화되어온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에도 무슨 전쟁에서 이긴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그런 자기 자랑에 빠지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 없이 살아가던 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상관없던 때에 우리들이 얼마나 우리를 고칠 수 없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힘쓰고 애써서 그 노력이 우리를 고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 일을 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하기까지 “그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상전이 노예를 채찍으로 쳐서 복종시키듯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법에 복종시키는 삶의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 자기를 성화시키고 자신의 일행들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예수 믿는 사람의 냄새가 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따라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지만 그러나 주님 홀로 이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반응이 필요하고 우리의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열렬한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열렬히 기도하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사람, 말씀을 많이 깨닫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쳐지지 않는 성품,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의 일을 많이 수종들지만 그 일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가 하고 있는 거룩한 일에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신앙의 인격들, 그리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옛 사람의 본성과 부패한 욕망들을 봅니다. 그때 우리는 신앙 생활 자체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갖게 됩니다. 한 사람의 성화되지 못한 모습이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미친 듯이 열렬하게 기도원에 쫓아다니고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기도가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도 그 자체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이 있는 사람들이 성화되지 못한 모습을 보게될 때에 ‘말씀을 만나고 그 말씀 앞에서 깨트려진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도 말이나 행동이나 사고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그 막대먹은 성품에 표출을 보면서 ‘주의 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주님의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들을 갖게 되는데 그 세 가지의 생각이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심어주어서 그로 하여금 마땅히 자신이 힘써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게 만들어주는 웅변적인 역할을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키는데 있어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틀에 박힌 종교 생활로서는 우리가 결코 성화될 수가 없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일도 우리를 저절로 성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때가 되어서 세례를 받고 권찰이 되고 집사가 됩니다. 그리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럽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줍니까? 몇 일은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를,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그럴 수 있습니다. 몇 일이 갑니까? 그것 말고 우리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거룩한 사람되게 하시려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소원이 얼마나 애절한 소원인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깨트려지는 이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은혜의 생활이 겉돌고 그 은혜의 생활과는 상관이 없이 성하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당연하다라는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보십시오. 열심만 있을 뿐 열심히 기도해서 예수님의 팔이라도 꺾어서 항복이라도 받아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이런 심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열렬한 기도는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자신은 결코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깨어짐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주 형상 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욕하는 사람없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 없어도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소망없는 죄인을 그 큰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마음 속에 우리를 거룩한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절망하고 그래서 가슴을 두드리며 아파하는 성도의 기도, 이것이 그를 놀랍게 새 사람 되도록 만들어 갑니다. 성령께서 그런 사람의 깨트려짐 마음 속에 새로운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막대먹은 짐승 같아도 그 짐승의 마음에 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큰 사랑과 이 큰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이 짐승 같은 이 모습으로 살면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겸비한 마음, 그래서 오늘도 어찌할 수 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다듬어지지 못한 그 죄악되고 거칠고 부패한 인격을 보면서 너무 아파하는 고통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주님 앞에 드리는 전적인 승복이 있는 기도 이것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많은 지식은 우리에게 갈길을 가르쳐 주지만 우리를 그 갈길대로 살게 하는 것은 단순히 그 지식만이 아닙니다. 열심히 배우지만 그 진리의 내용을 경험하고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서 그분 앞에 철저히 엎드려지는 자기 깨어짐이 없는 지식은 머리 속에 쌓여서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지식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들리어진 칼자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라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주셨는데 그 칼로 형제의 목을 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들어도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의 결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요구하는 자신의 존재와 자기가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현제의 존재 그 사이에 현격한 격차를 느끼고 자신의 힘으로서는 그 갭을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깨트려진 마음, ‘주여, 이 속까지 속속들이 부패한 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회개하며 흐르는 눈물과 통곡이 가슴을 저리게 하여 그 통증을 완하시키기 위해서 가슴을 두드리는 이 자세, 이 마음이 그를 놀랍게 새 사람되게 만듭니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밑바닥까지 뚫고 내려가서 우리를 새롭게 한 그 진리가 우리를 성화된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시지만 그러나 성령은 돌같은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본격적으로 일하시는 때는 그 돌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시대에 교회의 모습, 심지어는 여러분들 자신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회개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성화되지 못한 자신의 인격을 인해서 고뇌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이런 저런 모습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거기서 겨우 실낙같은 하나님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신앙 생활로 영적 생활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강퍅해 가고 그들의 뺨은 무쇠로 만든 뺨과 같이 차갑게 굳어갑니다. 그들의 뺨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특별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모두 내어주셨던 그 사랑,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받고도 성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참회의 눈물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낯선지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성화의 고뇌가 없는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가고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모이지만 썩는 세상의 냄새밖에는 나는 것이 없고 어두운 세상에 또한 어두움을 보탤 뿐이고 부패해가는 세상에 부패에 또한 부분을 보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아버지 앞에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지만 교회에서도 버림받지 않고 세상에서도 환영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지를 터득해가는 영악함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오늘 날 우리들에게 너무나 그리워지는 것은 진실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말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의 존재가 무엇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고치고 지나가시는 사람들의 인격과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는 더더욱 필요합니다. 세상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지만 그러나 오늘 날은 교회 안에서 오히려 이런 사람들의 필요성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참된 신앙의 실체를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통해서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이 시대는 깨어짐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깨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늘 깨트려지는 삶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죽은 자의 삶입니다. 깨트려지는 삶이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욕되게는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자기를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가슴절인 기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작은 죄악을 인해서 티끌과 같은 불순종을 인해서 아버지 앞에 녹는 가슴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거늘 우리는 커다란 죄, 괄목할 만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교리로 얼버무리며 뻔뻔스럽기가 그지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참회가 없는 삶이 여러분들의 가슴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성화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서 참된 신자의 행복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쫓긴 것처럼 강요에 의한 신앙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서 주께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나같은 죄인 구원하셔서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통해 티끌과 같은 일로서라도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너무나 감사해서 감격 속에서 주님을 믿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도무지 이 시대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깨트려진 사람들을 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말씀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바꾸어놓았습니까? 그 많은 지식들이 여러분들을 교만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안 행하고 저것도 안 행하고, 나는 이러지 않아 저러지 않아 그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배워갔지만 남들에게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비참한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우리들은 너무나 불쌍해서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찬란한 복음의 빛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비결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익숙해진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 쉽사리 굴복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의 말씀은 깨닫지만 그 말씀에 합당한 순종하는 삶이 없고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고 말씀을 듣고 삶을 돌이키는 것이 이변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전이 없는 자신의 성화의 삶을 합리화시키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깨트려짐이 없는 신앙 생활을 마치 고도의 성숙한 신앙 생활인 것처럼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저는 이 시간도 이러한 우리의 후한 무지의 삶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우리 주님의 아픔을 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의 피로 건져내시고 쓸모없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다 찢어 그 피로 우리를 닦아서 새사람 되게 하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분들 보고 부자가 되라고 명하셨나요,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습니까, 나를 위해서 죽어버리는 순교자가 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같은 권면을 한 사도가 다른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 피로 건지신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에 가장 크신 소원은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본 받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가치를 알고 그 좋으신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주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 그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서 거룩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 이것이 주님에게 있어서 가장 값지고 커다란 선물입니다.
가끔 교인들이 선물을 가져옵니다. 어그제도 누가 생일이라고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랬습니다. 선물이 약소해서 죄송합니다. 그대의 영혼에 목자인 내게 그대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그대가 잘 사는 것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도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부패한 자의 마음보다 완전한 마음이니까 주님의 그 기대는 어쩔지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깨트려짐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구원의 은혜, 그 큰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인해서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저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얻을 때가 있는가 하면 잃을 때가 있습니다. 가질 때가 있는가 하면 남에게 줄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는가 하면 건강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었다가는 잃어버리고 잃어버렸다가는 얻어도 괜찮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영원히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성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제가 늘 고백하듯이 저에게 알게 하시는 진리, 제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먹은 채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이 뻔뻔스러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자신의 그 가슴 아픈 탄식이 죽는 날까지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 신앙 생활에 참된 승리는 젊은 시절 한때 피끓는 젊음으로 처음 은혜받은 한때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주님 앞에 분주하게 신앙 생활 하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노년에 그대들의 주름살진 그 얼굴, 백발이 성성한 그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그 길고 오랜 세월을 성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더러운 찌끼들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을 때 그가 진정으로 성도의 신앙의 길에서 마지막 승리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집요하게 성화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할까? 왜 그렇게 하시려고 하실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이 세상을 향한 목적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목적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그렇게 성화되어야지 만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자체가 선교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렇게 우리를 성화시키려고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 자신을 향해서인데 이것은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성화된 신자와 더 잘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믿으면서 잘 살아가려고 애를 쓰다가 한번 자기의 본성대로 확 쏟아놔버리고 불순종하면 금방 표가 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기도가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대가가 없다고 하는 게 그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내가 무슨 대가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의 신비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수많은 세월을 정말 탁월한 기도 속에서 살아왔더라도 한순간 성화되지 못한 성품에서 오물을 쏟아놓듯이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더럽게 살면 당장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오랜 기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이 그런 면에 있어서 엄격하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사는 것이 당장 막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의해서 자극을 받으며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처절한 삶의 실천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이미 불순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된 맛들을 걷어가십니다. 말씀을 듣는데 정보로서는 축척될 뿐이지 그 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과의 교통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도 지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들어서 익숙해지면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과 더불어서 성령이 우리를 성화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려고 할 때에 끊임없이 기도 속에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깊이 마음이 상하고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자기를 향해 걸고 있는 성화에 기대를 보면서 깊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깨트려진 마음이 되고 성령의 역사를 향해서 간절히 그 은혜의 역사를 필요로 하는 그런 마음이 될 때에 우리들은 놀랍게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화가 될수록 아주 깊고 풍부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기쁨은 여러분과 나누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운 그 관계입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가장 강력한 소원입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당장에는 우리에게 깊은 고통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되 왜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됩니까? 얼마든지 안락하게 살 수 있고 고통이 없는 삶을 택할 수 있는데 왜 우리가 그렇게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왜 가책을 느껴야 합니까? 왜 우리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부패한 본성까지 들여다보고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괴로워해야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모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과의 깊고 풍부한 행복의 교제를 가장 많이 누렸던 때가 언제인가 돌아보면 자기의 부족을 알고 많이 아파하던 때입니다. 그때 항상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게 내 자신에 변화되지 않는 모습, 그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막대먹은 나의 성품을 보면서 절망하고 ‘하나님 나같은 인간이 살아서 하나님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애통할 때에 항상 이 세상에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왜 너는 아직까지 공사 중이란다. 내가 너를 빚어가고 있다. 내가 너를 새로운 사람 만들어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빚어가시고 만들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수확의 계절에 추수된 알곡들이 이제는 창고에 드리워진 이 때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걷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열매는 성화의 열매인데 얼마나 추수하셨습니까? 물론 주님이 우리에게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성화의 은혜가 참 큽니다. 짐승과 같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친 짐승과 같은 우리들을 주님께서 많이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나마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바른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 아파하고 그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그런 이성이 있는 주님의 자녀로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그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 우리가 더 많이 애썼더라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거칠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삶과 인격을 보면서 주님의 기대를 헤아리며 주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우리들이 더 많이 간구했더라면 어떻게 죄와 불순종을 이기고 순간의 불순종이 패역으로 흐르지 않고 회개로 이어져서 우리를 고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지 비밀들을 터득하며 살아갔더라면 주님의 은혜는 더 크게 역사하여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성화의 은혜에 대해서 한편으로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 성실하게 우리들이 주님 닮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오늘 깊이 뉘우치면서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고쳐서 사용해주시기를 오늘도 우리들이 탄원하면서 정말 진실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다짐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이러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지만 그러나 이후에는 우리들이 더 성결한 사람,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주님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존재들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우리들이 간절히 희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위로의 은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특별히 위로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신앙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우리가 제법 강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잘 알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에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끔씩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마음은 참된 신앙이 깃들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 깃들일 수 있는 마음은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을 자기 혼자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절대의존의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씩씩하게 하나님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주체성이 있고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이런 사람들이 은혜 받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상한 자의 하나님이시고 마음이 깨트려진 사람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고난 받아서 낮아진 마음이 있는 곳에 내려오셔서 보좌에 앉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없이 살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표현이 좀 나쁜 표현일지 모르지만 위로의 중독이된다고 할까요. 어째든 주님의 위로 없이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많이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도 위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영웅은 없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 앞에 한 마리의 어린 양에 불과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해서 세운 교회였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 보면 1장을 펼치자마자 감사의 이야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던 목회자의 아픈 마음이 실려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은 교회가 그 도시에 정신을 변화시키기는커녕 고린도 도시의 정신을 따라서 교회에 파당이 나뉘어지고 분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타락의 문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이기적인 물질생활에 문제, 교회 질서의 문제 이런 것들이 목회자 사도 바울의 마음에 많이 아프게 했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사도 바울의 권위에 대해서 의심하고 도전하는 일부 세력들이 바울의 마음을 개인적으로 더 아프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마 이 고린도 전서 7장에 나오는 기록에 미루어볼 때에 아마도 이 편지를 쓸 쯤에 아시아 지방에서 열심히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에도 보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던 차에 디도가 와서 고린도 교회의 그 이후의 형편을 바울에게 보고해 주었는데 그때에 고린도 교회가 많이 변화되어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서 서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1장 서두에서 위로를 이야기한 다음에 자신과 자신의 일행이 왜 그런 하나님의 위로가 어떤 상황에서 넘쳤으며 또 왜 그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는지를 8절 이하에서 상세히 말하는데 여기에는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고난에 기록들이 실려져 있습니다.
사도 행전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좀더 구체적인 정황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중에 몇가지만 예를 들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배신자라고 비난을 받으면서 돌로 맞아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이야기가 사도 행전 14장에 나오고 귀신 들려서 불쌍한 여종 하나를 치료해주었더니 귀신이 들린 그 아이를 사용해서 점을 쳐서 먹고 살던 주인이 그를 고소해서 핍박을 받고 감옥 속에 투옥되는 기록이 16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거기에서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되던 은감실을 만드는 은장색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그 업이 천해지는 것에 대해서 서로 규합을 해서 사도 바울을 박해하는 폭동의 이야기가 사도 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환난을 당했기 때문에 살 소망까지 거의 끊어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가 받는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로서, 목회자로서 또 선교사로서 받는 그런 환난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어지는 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신들이 지체로 있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유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당하는 그 고난을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위해서 환난을 당하고 당신 나라에 의를 이루기 위해서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상하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시련과 환난을 당한 사람들만을 위로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 혹은 이런 고상한 복음 전파는 아니더라도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직장에서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만나고 환난을 당해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따라서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을 위해서 사선을 넘나드는 큰 고난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비록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장엄한 선교사의 삶, 사지를 오고가고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을 오고가는 그런 헌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로라고 말할 때 가치없는 자들조차도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그 만져주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위로가 때로는 죄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에게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불순종 가운데서 곤고한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해주시는 이유는 그들의 죄와 불순종을 합당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로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보다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죄와 불순종 가운데서도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들은 빚지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항상 우리의 삶에 발자취가 그러했습니다. 일은 우리가 벌려놓고 수습은 항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가슴에 상처는 우리 스스로 칼로 우리의 마음에 내고 그 칼 빼앗아 우리의 마음에 치유의 포도주를 부으셔서 고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쁜 일은 우리가 주도권을 늘 쥐었지만 선한 일은 항상 그분에게 주도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진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 가운데 사도 바울이 경험한 이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주님을 위해서 사선을 넘어봤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투옥되어 본 적이 있습니까,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 광주리에 실려서 도시 밖으로 내동댕이쳐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위해서 가족들과 결별해야 했던 적이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준비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제 이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아서 이제는 확실한 것은 남은 날들이 지나온 날보다 확실히 적은 것은 분명한데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산 날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참 우울해집니다. 여러분도 소수의 사람들을 빼놓고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선을 넘나들고 고난을 받던 사도가 받은 그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를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가 말할 때 할 말이 있습니다. 비록 사선을 넘나들고 복음을 위해서 죽을 고비를 지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심령이 곤고한 사람들은 악한 죄의 길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애타는 곤고가 있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면 확실히 위로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맛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우리가 벌여놓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환난을 당하고 깨달은 후에 손들고 나아가서 주님 앞에 환경을 통해 연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면 주님께서 그 환경 속에서 우리들이 받은 많은 고통과 상처들을 위로하심으로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비록 주님 앞에 부족한 모습은 많지만 주님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아직까지도 다듬어지지 못한 우리의 성격, 그리고 성화되지 못한 우리의 조잡한 인격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준 많은 상처는 별로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우리가 받은 상처는 생각이 나게 마련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주님이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그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고 기도 속에서 우리들이 성령의 은혜로 자신을 깨트려 주님 형상 만드는 그 성화의 일에 게을렀기 때문에 우리들의 조잡한 신앙의 인격이 그대로 있게 되었고 우리들이 경험한 많은 고통이 우리 자신의 부족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생겨먹기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살아라 그렇게 버려두셨더라면 아마 우리는 주님 붙들고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친구들은 내가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신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우리를 고쳐서 주님의 사람 만드시려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면 언젠가는 우리를 고치셔서 새사람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과 기대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길러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넘치는 위로의 은혜를 우리들이 받고 그 위로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할만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장기간 동안에 인격적인 만남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마치 밖에 나가서 뛰어놀다가 재미있게 뛰어놀 때는 엄마 생각도 하지 않다가 어디 넘어져서 코피라도 나든지 부딪쳐서 깨지기라도 하든지 동네 애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면 엄마가 생각이 나서 그 품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처럼 환난을 만나면 주님의 품으로 피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산성이시며 요새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이렇게 경험적으로 배워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용서의 은혜, 위로의 사랑,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택해주신 이 놀라운 선택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단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 그분의 사랑 받는 아들 딸들로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생활이 간절해지기를 원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까?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갈망하는 데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사랑의 비밀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쌓이게 하시고 그래서 남이 못 본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보게 해주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들이 자랑하는 영적인 생활과 깊은 경건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주님 자신을 위해서 섬기며 살게 하시려고 주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늘 좋아하는 찬송가 499장에 보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에 비밀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그 청아한 주님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받은 그 사랑의 비밀이 얼마나 큰지 다른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가장 감명깊은 것은 3절입니다. 그런 사랑을 왜 주셨을까?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남이 못 본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보게 하셨을까? 남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셨을까?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그렇습니다. 괴로운 세상에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일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오늘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삶에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가슴 저려하고 그것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의 인생에 분명한 섬김의 목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직까지도 악한 원수들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세상일진데 그들 중에 어떤 은혜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분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셨을 때에 악한 원수들이 그를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게 합니다. 목표를 가진 인생은 고뇌하는 인생입니다. 성취의 기쁨과 목표를 향해 찾아가는 보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방해하는 수많은 여건들과의 싸움이고 자신과의 싸움이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일을 방해하는 악한 원수들과의 싸움이며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일에 어울리지 않는 죄악된 자기의 옛 성품과의 피나는 투쟁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시련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아니었다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미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복음이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이 지금 이렇게 수많은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도적들의 위험과 그리고 살고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을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위기에 까지 도달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똑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너무나 안일하다를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우리가 왜 살아있습니까? 누군가 우리를 보고 왜 사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아무 희망이 없이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을 백성들을 구원해주셔서 넘치는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이 어두움에서 불러내어서 복음의 빛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구원의 덕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구원해주셔서 당신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그 피로 속죄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능히 자신의 옛 본성과 싸워 이기게 해주십니다. 마귀 원수들이 힘이 있다고는 하나 자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들을 통해서 그들을 하찮은 미물들처럼 꺾어버리게 만드시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 섬기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런 승리와 기쁨들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에 의해서 받은 선택과 구원 말고도 주님께서 이제껏 설교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주님이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환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겪는 시련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고린도 후서를 펼치면서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렇게 고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능욕과 환난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넘쳤다고 고백을 하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에 모습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미물들도 사랑하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는데 우리들의 삶은 너무나 안일합니다. 누가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우리를 불러주면 몸둘 바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압니다. 비록 우리가 이 사도처럼 사선을 넘나들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이런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고난의 삶은 살지 못하지만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어떻게 하든지 미력이나마 주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고 싶어하는 여러분들에게 비록 부피에 있어서는 이들의 필적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고난이 왜 없겠습니까? 사실 그런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받는 아픔들은 누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비밀이듯이 역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받은 고난도 비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깊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깊이와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에 아픔 때문에만 울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깊이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곧 그분의 고난을 아는 것과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의 이런 장엄한 고백, 생사를 오가는 이 영웅적인 선교사의 삶에 필적하는 그런 고난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 동안에 우리에게도 역시 환난은 있었고 견디기 힘들 때도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물질로 섬겼던 사람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주님을 위해서 쓰고 싶었던 사람들, 능력은 없고 자신도 아직까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이 영혼을 가르치고 섬기는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역시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분투할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고난의 양은 달라도 그 질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전기를 쓸 정도로 영웅적인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한편으로는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옛 성품과 패역한 자아와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한발 한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섬김도 모두 모두어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하나의 발자국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고난을 받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비록 그 장소가 교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를 섬기고 주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하고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기억을 하지 못해도 주님은 모두 기억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데 위로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위로로서 라고 말합니다. 위로는 위로인데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위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난과 시련을 당한 성도의 진정한 위로의 주체가 누군가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한 성도를 위로해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값싼 위로는 우리를 점점 더 나약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 하게 만들고 자신이 받는 고통과 아픔의 진정한 원인을 외면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순결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죄를 합리화 하거나 불순종을 합리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죄와 불순종을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눈뜨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우리를 야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령하고 순결한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약해본 사람들이 사람 앞에 강합니다. 원래 성질이 강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많이 약해져 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강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의 주체라고 하실 때 실제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주님이 위로하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도 바로 이런 두 가지의 방법으로 자기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섬기다가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은 주님께서 그 일에 있어서 진전을 보게 하심으로서 그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는 다소 우울하게 시작을 했는데 고린도 후서에서는 이렇게 큰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위로에 넘친 사랑에 대해서 고백을 하며 써내려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접적인 동기는 사도 바울이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가 놀랍게 변화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고 자기들을 향한 사랑이 다시 복구되고 있다라고 하는 그들의 변화, 하나님의 일에 진전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이 고난에 넘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렇게 넉넉히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준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 일을 하나님이 복을 주셔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은 꿈과 소망과 그리고 모든 기쁨이 하나님의 일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사랑에 사무쳐서 주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진전이 없을 때 마음 아파하는 것은 성공을 못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진전이 없는 그 상황을 통해서 자기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계신 외면하신 하나님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살다가 낙담하다가 환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을 주님이 다시 그 일에 복을 주셔서 그 일에 놀라운 성취와 진보가 있게 만들어 주실 때 주를 위해서 살던 그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한없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일이 성공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많은 나의 결점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셔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알리신다라고 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신다고 하는 기쁨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개척교회를 1년을 하고 나면 전기를 쓴다고 하는데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도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내가 정말 고난을 받았나’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 진짜 고난이 넘쳤다 그러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돌아보면 뭐 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6-7년의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에 정말 뼈저리게 고난을 받아서 그래도 이 시기 만큼은 주님을 위해서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진짜 그리스도의 고난만이 내 몸에서 새로워졌다 그럴 때가 있는가 그런데 그런 것이 별로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월은 이렇게 흘러가고 주를 위해서 산 날은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해서 고생하러 어디로 갈 수도 없고, 뭐 한 게 없습니다. 물론 또 여러분들이 저보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 뭐 한 것도 없고, 고난을 뭘 당한 게 있냐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나는 여러분 앞에서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말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러니까 제가 의미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왜 고생이 없겠습니까? 고생은 있는데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비교를 해보면 고생이랄 것이 정말 있는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진짜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사선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 하여튼 그렇습니다. 전도사 때는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때 가불을 해서 나은 것인지,
(예화: 13년의 전도사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은 중등부를 맡아 섬길 때인데 애들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애들을 이끌어 가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
(예화: 사역을 하시다가 잠시 쉴 기회가 있었는데 형편이 어려운데 존경하는 목사님의 제의를 받고 그 교회의 중등부를 맡아 섬기게 되셨을 때 74명의 학생들을 인계 받았는데 점점 학생들이 줄어 마음이 아파 그만 두시려고 하신 가운데 꿈을 통하 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교사들과 함께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학교에 가서 방과 후에 나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한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주일에 96명의 학생들이 모여 앉을 곳이 제대로 없는 가운 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교사들과 함께 울었는데 애들이 많이 나와서 운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성취를 위해서 위로해주신 것을 감사한 이야기)
주님을 위해서 영혼들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에 하나는 우리가 애타하고 있는 그 일에 있어서 성취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그런 심정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구역장을 맡게 되었다고 칩시다. 연말에 담임목사가 불러서 “어이, 8구역장 박집사 9구역 하고 합치지 다 털어먹었는데 이제 뭐하겠어. 매일 둘이 구역예배 드리지 말고 합쳐. 그래도 연초에는 7-8명 모여서 예배를 드리더니 이제는 1명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냥 합쳐” 그럴 때 구역장을 할 용의는 있는데 식구가 없어서 남의 구역 구역원이 될 때, 웃는 사람들은 혐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을 영혼들을 맡겨주었는데 어느 날 교회에 가니까 자기만 나와있는 것입니다. 8-9명 되던 애들이 하나, 둘 다 떨어졌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이유가 없는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지막 자기 혼자 남았을 때 그렇게 구역이 합쳐지고 섬기던 영혼들이 하나 없어서 남들은 공과 공부 하는 시간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성경을 읽어도 마음이 편하다는 사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얼마나 지옥같고 괴롭겠습니까? 그것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 일에 있어서 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넘치도록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방면으로는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렇게 교회를 이루시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셔서 주님의 일을 성취해가시는 방법이 기가막히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우리 자신은 밑도 끝도 없는 죄악의 덩어리,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부패의 덩어리들이 남아 있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사선을 넘나들며 주를 위해서는 가슴 저미는 헌신의 생애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따금 보시는 우리의 눈물과 수고를 사용하셔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들을 봅니다. 마치 온갖 쓰레기와 더러운 것들이 땅에 들어가서 묻혔지만 그 땅에서 솟아나오는 나무는 쓰레기 색깔의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독특한 빛과 색깔을 내면서 줄기 가지 잎이 뻗어 나옵니다.
연꽃은 맑은 물에 잘 살지 않습니다. 흙탕물 처럼 밑이 들여다 보이지 않습니다. 부패한 찌꺼기들이 밑에 많이 있는 그 연못 속에서 삽니다. 30센티도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런 흙탕물과 같은 그 연못에 흙탕물을 뿌려도 데구르르 굴러버리는 아름다운 연꽃,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일구어 가시고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우리는 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위로해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넘치는 위로도 그런 식으로 받은 위로였습니다. 자신은 옥에 갖혔지만 옥에 갖혔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자신은 옥에 갖혔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자기가 옥에 갖힌 것을 인해서 오히려 더 복음이 역사하고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옥 속에 갖혀서도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기쁨의 서신을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얼마나 미력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섬겼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 것들이었습니까? 위대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고 사도처럼 사선을 넘나드는 생명을 건 헌신이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헌신은 보잘 것 없었지만 넘치는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야! 이렇게 조금밖에 헌신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넘치도록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진전을 이루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만약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사명을 위해서 희생적인 정신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폭발적인 위대한 역사를 일으켜주실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위로를 거울 삼으면서 우리는 이런 작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에 커다란 진전을 보게 하셔서 베풀어주신 이 위로의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우리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들이 더 정결해지고 더 우리의 모든 것을 실어서 주를 위해서 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고난과 시련이 아무리 값지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련과 고난만 있고 위로가 없는 생애를 산다면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망가집니다. 저는 가끔 사상적으로 한맺힌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은 옳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념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관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절한 투쟁만 있고 위로가 없기 때문에 이 속에서는 처음에는 악과 더불어 싸웠는데 나중에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어떤 위로를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우리 역시 고상한 것을 추구하면서 속으로 망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풍성한 위로를 경험하고 그 감격의 눈물이 없으면 아주 강포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이렇게 일에 진전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더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서 시련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시는 방법은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친교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시련을 당할 때 잠시 보면 즉시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시지 않는 적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위로의 독특한 세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옥에 갖히기도 많이 갖히고 시련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개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옥 속에 갖혀 있으면 옥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위로하셨습니다. 동족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찾아오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간절히 위해서 기도할 때 믿었던 세 제자들 조차도 퍼질러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고난은 지금 시시각각으로 앞에 다가오는데 그 영혼의 외로움과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도움을 구했을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버릴 것을 예고라도 하는듯이 주님의 그 기도에 동참해주지 않고 깨어있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도와주셨습니다. 사자를 보내셔서 예수님의 기도를 돕게 하셨습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 모두 상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시련과 아픔을 거의 안 당한 사람들이 모두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 시련과 고난이 이처럼 많아도 위로가 넘치고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터치가 있을 때, 그때 그 고난과 시련이 결코 그를 온전하게 망가트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해지고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자녀다워진다라고 하는 것은 불멸하는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까? 그것은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고난 그 자체에 그런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장으로 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위로를 통해서 주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부족한 것이 없이 넘치도록 누리고 살 때에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할 때는 그런 경험을 우리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런 고백을 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게 호의호식하고 막 주위에 친구들도 많고 그럴 때가 아니라 모두 떠나고 환경조차도 나를 버린 것 같고 옆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난과 시련밖에는 없는 것 같은,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단독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그때 하나님의 큰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결국은 마지막에 주님이 얼마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배신을 당하고 나면 주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공급하는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나면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위로가 있는 성도들은 환난을 이깁니다. 시련을 이깁니다. 넉넉히 이기고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련 때문에 넘어졌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일으켜주시는 것을 거기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부분적으로는 주님 섬긴 것이 현저히 부족해도 다시 일어서서 주님 섬기며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느라고 애를 쓴 사람들은 주님께서 일에 있어서 진전이 별로 없었어도 여러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주님 위해서 살도록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오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주셔야 할 무슨 의무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합당하게 산다고 말할 수 없어도 앞으로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이 소원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때로는 우리의 환경과 상황이 우리를 죽여버릴 것처럼 삼켜버릴 듯이 우리를 에워쌓아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시련은 컸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나마도 주님 섬기면서 살 결심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럼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우리의 충성된 삶이 일관성이 없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불붙는 마음이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넘치는 위로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우리가 삶의 동기를 더 정화하고 주님을 위해서 순결한 마음으로 내 꿈과 소원, 그리고 내 모든 희망을 날 구원하신 우리 주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라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때 그렇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 때, 그때 우리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을 그 위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위로를 경험하고 그런 위로 속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처럼 살다가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성도의 마지막 인생은 결국은 사람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섬기는섬김으로 나타난다는 것, 그것을 성경이 여러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향해서 섬긴 그것이 주님을 향해 섬긴 것이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주께 하듯이 주인을 섬기라는 권면을 비롯해서 부모의 공경과 하여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을 향한 그것에 늘 강조되는 것에 늘 주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한 섬김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많은 슬픔 속에서 위로를 필요로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위로가 낙담해서 막 살아버릴 것 같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바꾸어서 주님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한쪽에는 칼을 들고 한쪽에는 수건을 들어야 합니다. 한쪽에는 칼을 들고 이 세상의 불의와 악한 원수들과 용감한 군인으로서 싸우고 또 한편으로는 수건을 들고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살다가 혹은 살고 싶어서 낙담하고 좌절해서 눈물 흘리는 아파하는 사람들의 그눈의 눈물을 씻기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심으로서 우리를 주의 자녀 되게 하시고 이나마도 주를 위해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수건을 들고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인생에 좌절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들의 눈물을 씻겨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위로자가 우리들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에 은혜가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와 사랑,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살 때에 우리들 속에 그런 에너지가 넘쳐서 곤고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그런 주님의 메신저들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생애는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남은 우리의 생애가 이런 생애가 되어서 정말 주님의 도구가 되어 손과 발이 되어서 고통이 있는 곳에 기쁨이 되고 그리고 위로를 베풀어서 결국 그들이 흐르는 눈물을 닦이고 우리의 소망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를 볼 수 있는 그런 세상 만들려고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11.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한이 없지만 오늘 또 우리들이 보고 싶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람이었고 때는 주전 8세기였습니다. 그때는 여러보암 2세라고 하는 신앙은 없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 영명한 군주가 나타나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황금 시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솔로몬 임금과 비교할 수 있었을 정도로 지혜롭고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국토의 판도를 최대한으로 넓히고 그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경제에도 아주 능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계속 괴롭힘을 주는 나라가 하나 있었는데 앗수르, 여러분들이 역사 시간에 배운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워낙 강대국이었고 그리고 수시로 이제 이스라엘을 치고 내려와서 남쪽으로 남하 하려는 정책과 이스라엘이 충돌을 빚었습니다. 수시로 침공을 받고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앗수르는 아주 철천지 원수와 같이 생각되는 그런 민족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주 커다란 섭리 가운데 요나라고 하는 한 선지자를 그 앗수르에 보내시려고 작정을 하십니다. 선지자인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인데 그 니느웨를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인 요나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뭔가 일을 행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앗수르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들에게는 복음과 같이 기쁜 것이었지만 하시려면 그냥 슬며시 하시지 이것을 이미 말씀하시고 또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아주 싫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서 1장에 제목은 불순종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바다로 던지운 바 되고 물 속에 큰 고기를 예비하셨던 하나님이 그를 삼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학작들은 이게 진짜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다면 소화되서 아마 다 녹아버렸을텐데 그게 진짜 물고기 배 속이 아니라 밥먹다가 우리가 밥풀이 들어가는 ‘후실’ 거기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큰 고래나 아니면 상어같은 경우에 자그만 방 크기 정도가 되는 후실이 나온다고 하니까 그 후실에 이 선지자가 3일 동안이나 혹은 공기도 마시지만 물, 해초 이런 것들을 함께 뒤집어쓰면서 거기서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2장에 주제가 회개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이제 3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리고 3장에 다시 가는 선지자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이 3장이 시작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3장1절에그리고 라고 하는 접속사가 하나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2장까지의 모든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고”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3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돌아볼 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하나는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인간은 늘 잊기를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아무 희망이 없고 철저히 실패해서 주저앉은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시작하게 해주신느 거듭되는 은혜로 오늘 처럼 살아간다라고 하는 이것을 늘 잊습니다. 잊지만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아주 없을 때에는 죄인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신도 부러워합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나면 이제 죄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나면 이제 그 죄는 미워하지만 죄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연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에 진실한 성숙은 그가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적인 성숙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거룩의 척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은혜를 힘입으면서 거기에 빚지면서 인생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을 인간같지 않게 생각하는 (?)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바둑 이야기-어린 시절 동네 형과 동네에서 바둑판을 놓고 두는데 늘 지는 쪽인 데 세월이 흘러 직장에 다니실 때 목사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원이 입사해서 사람 들이 두 사람을 헷갈릴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학교 후배이기도 한 그 사람은 바 둑을 잘 두는 실력으로 윗 상사와 바둑을 두는 모습을 많은 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사가 두는 모습을 미리 앞에 어떻게 둘 것인지를 파악하며 가르치면서 두며 마지막에 간신히 이긴 것처럼 하는 후배가 나중에 하는 말이 자꾸 지면서 상대방의 기를 살리다가 끝에는 가까스로 이긴 것처럼 하는 상대방을 생각하며 바둑을 둔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세월이 벌써 25년 이상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저에게 신앙을 배우시는데 그때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형한테서 내가 하나도 바둑을 배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역시 나는 저 인간에게는 안돼, 그것 밖에는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고보자. 내가 어디에 가서든지 배워서 콧대를 꺾고야 말리라. 그런데 결국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배웠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저 인간 왜 저러고 살까. 나같으면 죽지 저러고 안 살아. 그럽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배울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을 보면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희망을 주어서 다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을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을 주저앉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다시 용기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신앙을 전수해주는 사람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그런 식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주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주님의 거룩의 세계를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입니다. 주님이 진리를 위탁하셨을 때 그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할 수 있는 말씀에 능력을 주신 사람입니다. 그 특별한 소명을 받은 선지자가 실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의로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시는 것을 거절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다에 나를 던져라’ 그랬을 때 선지자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바다 속에라도 들어가서 회개를 해야되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순종할 바에야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이런 못되먹은 심보를 가진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삼켰다라고 그러지 말고 그냥 씹어먹었다고 그래도 종말로서 아주 어울리는 종말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거기에 살려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때가되매 하나님께서 그를 바닷가에 토해놓으셨습니다. 토해놓았다고 그러기 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재채기를 해서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뭐 어떻게 나왔든지 간에 나온 게 중요합니다. 탁 토해났습니다. 그 해변에 떨어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물고기 속에 있었으니까 온갖 채액이나 더러운 것들을 다 뒤집어썼을 것입니다. 3일밤 3일 낮을 3일을 그 물고기 속에 있었으니 그 바다물에 쩔고 아마 옷은 다 찢겨 떠내려갔을 것이고 벌거벗은 채로 바다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내동댕이쳤을 때에 거기서 선지자의 위엄을 볼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에 어떤 권위를 볼 수가 있나요? 그저 그는 실패한 사람에 불과했고 자기 스스로의 일어설 수 있는 힘조차 없이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내동댕이쳐진 버림받은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사명도 없고 꿈도 없고 힘도 없고 눈뜰 기운도 없어서 바닷가에 엎어져 있는 실패한 한 죄인을 볼 뿐입니다. 그런데 그 2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듯이 3장에서 히브리 성경에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토해놓았는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 우리의 인생, 우리의 영혼을 송두리채 무너트리려고 하는 강력한 위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의 시험이나 죄나 불순종이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아버리고 우리의 속사람을 뼈속까지 말려버리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좌절입니다. 좌절과 낙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주저앉아서 이제는 끝이다. 내가 이제 무슨 희망이 있으랴 하고 주저 앉아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절망, 죽음, 미움 이런 것들이 모두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친근한 단어가 됩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인생에 결국은 이런 것들을 가져오지만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든지 불순종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은 그것이 궁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서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은 훨씬 후이고 또 모든 죄가 우리를 완전한 파멸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개선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뉘우친다. 돌이킨다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좌절과 낙담의 감정은 순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 파괴적인 상태로 가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는 훌륭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의 일생은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온 생애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힘도 있고 결심도 있지만 늘 약합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실패한 자로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실패한 날들보다 다시 시작하는 날들이 하루만 더 많으면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칠전 팔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7번을 넘어졌는데 8번을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7기 7전이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7번을 일어났는데 7번 다 넘어졌다. 마지막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7기 7전은 7번은 일어섰는데 마지막에 결과가 넘어진 상태고 7전 8기는 7번을 넘어졌는데 마지막에 8번째의 상태가 일어서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우리들을 인도해오셨는데 실패없이 여기까지 당당하게 걸어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희망의 증거입니다. 왜 희망의 증거인가 하면 그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생명을 찾았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명을 얻었다는 것은 보지 못해서 소경가 같이 눈멀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서서 주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보여주는 희망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공로는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가슴에 깊이 새겨져서 잊어버리지를 않고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잊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기 때문에 이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답답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 저러고 살까, 저 이간이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언젠가는 그보다도 더 비참한 상황 속에서 희망이 없이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떻게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충만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렇게 못사는 사람들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정당화해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수많은 그런 무거운 짐들과 그리고 그들의 발을 묶고 있는 착고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서 이만큼 쓰러지고 넘어지는 가운데서 이만큼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어떤 꿈과 생각을 가지고 이 예배에 나와 있는지 저는 다 알지 못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외없이 여러분들은 예전에 요나와 같이 실패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차이가 있다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여전히 그 실패 속에 있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실패를 이기고 새롭게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차이입니다. 만약에 여전히 실패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며 그 실패를 딛고 새롭게 시작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그 뼈저린 실패 가운데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참 필요합니다.
수학 문제를 막 풀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을 때에 이상하게 새 시험지를 갖다 놓고 다시 풀면 풀릴 것 같습니다. 12월쯤 되면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삽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읽던 성경 말고 새 성경을 보면 새해에는 좀 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쌓아둔 성경이 7-9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보십시오. 그들은 너무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에게 그것봐, 너의 지나온 과거가 너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그래 보십시오. 그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람의 기대에서 출발한 희망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새롭게 하시고 다시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거기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영적으로 곤고한 가운데 살고 심지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삶이 짐승과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았던 우리들, 자신의 죄와 불순종 그리고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서 고통받고 자신의 영혼이 곤고하던 사람들을 주님이 은혜 베푸셔서 다시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희망,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 의지하며 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시로 우리의 살아온 옛 과거는 살아나서 우리를 정죄하기도 합니다. ‘네가 옛날에 이렇게 산 사람이고 이렇게 하나님 거스르던 인간인데 너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양심이 혹은 율법이 우리를 송사해서 오늘 진실하게 주님 의지하며 사는 이 진실한 생활이 위선이라고 고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한 것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오 우리에게 과거의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에게 가게 하셨던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는 믿음으로 그 수많은 정죄의 사슬들을 끊고 그리고 자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우리의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실패하고 희망이 없는 선지자를 다시 그 사명의 자리로 늠름하게 돌아가게 하시는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것은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첫째 요소가 바로 2장입니다. 1장에서 불순종하던 선지자가 3장에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늠름한 복귀가 있기 전에 2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장에서는 이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힌 선지자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회개가 잇고 나서 하나님께서 회개를 통해서 그에게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그 방법에 대해서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날 그릇 행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 거스르고 살기를 주님 섬기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악한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어두움과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을 주님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를 회개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생각하게 됩니다. 곤고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곤고함에서 벗어나야 할지 알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행하던 데로 죄와 불순종의 습관을 따라서 무지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회개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불결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뉘우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라는 말 속에는 자기 혼자 그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용서하신다는 개념이 진실한 회개 속에는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후회한다고 해서 거기에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비근한 예가 가롯 유다가 아닙니까? 그는 은 30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습니다. 미쳤습니다. 당시 은 30은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은 30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습니다. 돈을 손에 쥐고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누가 자기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 없어도 자기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하는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 때에는 돈을 받아서 쓸 재미로 예수님을 팔았지만 그래서 결국은 그 돈을 썼습니까? 도로 갖다가 제사장들 앞에서 던져 놓고 그리고 자기는 자기가 행한 그 잘못에 대해서 뼈저린 후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회개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뼈저리게 후회했고 가슴 아파했지만 마지막 결국은 절망 속에서 목매달아 죽고 떨어질 때에 배가 터져서 창자가 흘러나오는 것으로서 불행한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났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살아온 인생, 우리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서 아무리 후회하고 뼈저리게 가슴 아파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 동안 가슴에 응어리지고 원망과 한을 품고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지은 죄가 우리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린 불순종이었으며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고통스러운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신 것도 바로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회개할 계획표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이곳에서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어도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마음에 역사했을 때 우리들은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았던 많은 날들과 하나님 앞에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 싫어서 불순종했기 때문에 지은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 속에 역사하지 않을 때는 단지 실패한 것이 분하고 가슴 아프고 그리고 원망스럽고 죽어버리고 싶고 많은 사람들에 대한 미움밖에는 없었지만 우리를 이렇게 실패 속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때 우리는 비로소 눈을 떠서 우리가 이 실패와 죄 가운데서 아파하고 고통하며 잘못 실 때 진정으로 피해를 보신 분이 사실 우리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렇게 고통을 받거니와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밖기까지 우리들을 위해 내어주시고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주신 그 자비밖에는 없는데도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사명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실패한 우리들 때문에 고통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돌이킨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많은 죄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죄로 말미암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서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합니다. 그들보다도 훨씬 악하고 더럽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가던 우리들을 더군다나 주님의 사랑을 알고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실 때 우리에게 주셨던 사명의 자리를 저버리고 실패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을 회개시키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곤고한 인간들과 이런 회개의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더 깨끗합니까, 우리가 더 의롭습니까, 우리가 더 주님 사랑했습니까, 우리가 더 아버지 앞에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 물러간 사람들이었고, 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더 소망이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실패 가운데서 낙망해야 미움과 원망의 칼을 품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인격적으로 그 실패 속에서 주님을 만나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불순종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자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비참한 몰골에 우리들이 너무나 가엽으셔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회개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린 교회를 7년 동안 목회를 하는 동안에 저는 그런 확신을 갖었습니다. 나는 정말 감사한데 왜 감사한가 하면 목회를 하므로서 비로소 신자가 되어가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제 스승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기분 좋아하지 마십시오. 좋은 뜻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여러분과 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밑도 끝도 없는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하게 살려는 노력 뒤에 아직까지도 감추어진 끝도 없는 패역들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것만 보여 주었다면 아마 오래 전에 낙담했을텐데 그러한 죄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하되 자기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고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 중에 괴수였던 것을 그렇게 뼈저리게 다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기에서 자신의 뼈저린 이 죄인됨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만약에 회개하게 해서 다시 이곳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여러분들 지금 어디쯤 있을까요? 인생의 어두운 골목에서 서러움과 고통을 곱씹으며 주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자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성령의 은혜까지 주셨는 데도 주님이 없는 사람처럼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여러분이 있는 삶의 그 자리로 주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 사랑의 감화를 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징계를 받고 얻어 맞으면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차돌같이 돌이킬 수 없었던 여러분들의 마음을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회개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죄인들과 충만한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성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회개시켜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돌이키지 않고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돌이키게 만들어 주셔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도 역시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셨다면 나도 저렇게 살았을텐데 주님이 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개의 은혜를 주셔서 이 길을 걷게 하셨다.’ 또 하나는 ‘저 사람도 돌이켜 회개의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고백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그렇게 수없이 핍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에 그 사람이 이 땅에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그런 훌륭한 도구로 쓰여질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그 사람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셔서 주님의 나라를 위한 요긴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죄와 불순종 가운데 살아서 곤고한 사람들에게 오늘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개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셔서 새 길을 걷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두 번째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2장 마지막 절에서 만신창이가 되어서 기절한 채 해변에 쓰러져 있습니다. 3장 3절에서 그는 늠름하게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지인 니느웨로 다시 선지자가 되어서 돌아갑니다. 완전히 실패해서 졸도한 모습과 늠름하게 자신의 사명지로 돌아가는 사명자의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사람이 죽는 것도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은 아닙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니까, 그런데 더 마음 아픈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한때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그 은혜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서 떠나고 그리고 강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보다도 좀더 작게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맛을 잃어버리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주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마음 아픕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큰 빛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 희망을 가집니다. 그 이후로부터 여태까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만 하면서 살아왔습니까?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같이 달고 송이꿀 보다도 더 달아서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는 그 신앙의 고백 속에서 시종일관 살아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어떤 때는 성경이 꿀과 같이 달아서 그 속에서 1시간 2시간 성경을 읽으면 6개월치 설교가 나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몇일씩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 반드시 우리에게 주시는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맛을 되찾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던 설교가 어느 한순간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도 없고 심지어는 설교자도 눈에 보이지 않고 망망한 벌판에 자기만 세워놓으시고 훨훨 붙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 혼자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그렇게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힘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시인할 수 없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그릇된 인생관과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이 가증한 철학들을(?)허구 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래 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각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오래 동안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참 사랑을 다시 맛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에 오셔서 우리의 말씀에 미각을 회복시키시고 어느 순간에 닫쳤던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부어주시므로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 때에 주의 보좌로부터 들려오던 그 아름다운 주님의 음성에 우리의 마음도 녹고 우리의 영혼도 녹아서 그분과 하나된 사랑에 삶을 살던 때로 돌아가게 하시는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10월달 새가족 환영회를 했습니다. 48명 등록했는데 40명이 왔습니다. 3명이 방송 설교를 듣고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그 중에 몇 사람이 이제 저희 교회에 와서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의 하나님의 말씀, 한권의 책 그리고 한마디의 따뜻하고 정확한 신앙적인 충고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죄가운데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한 인격을 마주하게 하실 그때에 우리들에게 감화를 주시고 변화를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좌절과 죽음과 절망의 어두움을 딛고 우리의 실패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진짜 우리를 실패 속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 그 말씀의 경험을 보면 참 신기한 게 예배가 끝나도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움직입니다. 그게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한 응답을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받아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가 완전히 실패한 사람으로 바닷가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습니다. 얼마 후 그가 다시 일어선 사람으로서 니느웨이를 향해 늠름히 걸어갑니다. 선지자의 용기나 결단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 사명을 버리고 니느웨이를 안 가고 다시스로 도망가고 풍랑이는 바다에서 그 고생을 하고 바다에 내던지고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에 그 몸을 가지고 사명지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회복된 영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그렇게 엎드려져 있는 선지자에게 떡과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에 완전히 다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 있는 이 충성된 마음으로 가득차도록 하나님이 영혼에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실패 속에 있어서 다시 이전에 실패한 모든 인생에 반을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인생에 한 갈림길, 실패한 벌판에서 여러분들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희망을 걸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시도록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임할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도록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볼 수 있는 요소는 순종입니다. 3절에 보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다”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과거의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의 길로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주님을 거스르던 자가 주께 충성하는 사람들로, 세상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그렇게 변모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요나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새롭게 임함과 함께 그들의 순종하는 반응을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과거의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여 그래서 예전에 실패보다도 더 뛰어난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마지막 방법이 여러분들의 순종하는 반응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지나가면서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죽을 날이 가까우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한 해가 지나는 것이 무거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해가 지나가는 이즘에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제 주님을 위해서 잘 살 수 있는 날들이 한 해가 영원히 기억에 뒷편으로 떠나가고 남은 우리의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많은 세월을 흘려보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큰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자기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들이 거스릴 때나 순종할 때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신 은혜로 그의 자비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실들을 생각할 때 살아온 지난 날들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에 세월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먹고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산 날들은 너무나 적고 초라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이제 어떻게 남은 날들이라도 좀 잘 살아서 주님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가끔 푸념처럼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난 날 저의 인생 때문에 너무 가슴 아프시고 마음에 고통을 많이 받으셨지요. 하나님, 다시 한번 내게 은혜를 주셔서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이 주님의 고통이 위로로 바뀌고 마음 아파하시던 주님이 나 때문에 아주 기뻐서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제게 남은 인생을 좀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이 어찌 저만의 기도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은혜를 필요로 하고 또 이런 은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실패한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고 그리고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내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던 때에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실패한 죄인들을 어떻게 하든지 부르셔서 충성된 일꾼 삼고 싶어하시고 죄로 더러워진 오염된 자기의 자녀들을 깨끗이 씻겨서 어째든 성결한 주의 성도 만들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에게 역사했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털 같은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 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우리를 이렇게 대우해주십니까? 한번과 두 번의 실수로 낙인을 찍으시는 대신에 실패한 자들을 끝없이 모으셔서 요나와 같이 사명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 오늘도 실패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에게서 새 출발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어디서 새로운 출발을 하시겠습니까? 이전에도 우리를 그렇게 해오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 안에서 소망을 갖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교회 생활의 은혜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6)
지난 시간에는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제목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회 생활의 은혜입니다. 특별히 목양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적인 소생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을 믿기 시작한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이제 이렇게 주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의 인생은 아무 염려가 없다 하는 안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인생을 사는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들었었는데 우리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제일 먼저 오는 변화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이제 난 염려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면 내가 진짜 남은 나의 인생이 진짜 행복하고 기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난 여러분들도 모두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모두 주님을 믿고 난 후에 행복의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전히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 데도 우리는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는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는 커다란 이유는 아마 세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선 첫째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영원히 그 첫사랑을 간직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열린 교회 초창기에는 예배 시간마다 펑펑 우는 감격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6년 전에 은혜 받은 사람들 중에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은혜의 감격이 무엇인지를 알았어도 여전히 죄지을 수 있고 불순종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와 불순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가 당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사망의 골짜기,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비록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우리의 모난 인격을 다듬고 성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과 같이 불같은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곡하면서 연단의 계곡을 지나게도 합니다. 또 그렇지 않을 정도로 온전하게 은혜를 의지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도 역시 고난의 골짜기는 있습니다. 무슨 고난의 골짜기일까요? 죄와 불순종도 없고 인격적으로도 온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 그는 아마 남보다도 더 뛰어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사명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명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남다른 고난의 길을 지나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충성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방탕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본 적도 없는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동안에 겪었던 고난과 충성스러운 삶에 와중에서 경험했던 시련들을 고린도 후서 1장에서 말합니다.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도적들의 위험과 하여튼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것도 그에게 죄나 혹은 불순종이 있어서 당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명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이오 시련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만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이 이런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인도 오늘 이런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많은 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합니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눈물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말로 “애메크 박카”라는 것인데 “박카”는 우는 것인데 우는 것 중에서도 통곡하며 우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장에 벧엘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거기에서 야곱이 유모 드보라를 장사 지낸 다음에 상수리 나무 밑에 이름을 짖기를 “알론바굿”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곡함의 상수리라는 뜻입니다. 바굿은 박카의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통곡의 상수리 나무라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쓰여진 게 그런 뜻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라고 그랬는데 눈물이 아니라 통곡입니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많은 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많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이런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사랑해도 이 세상이 영원한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하시려고 적당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사명 때문에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다듬어지지 않은 우리의 신앙의 편견과 성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이 갈고 닦으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시련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골짜기를 예외없이 지나게 하십니다. 지난 사람도 있고 앞두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지금 지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지체들이 지난 그 골짜기를 과거에 우리들도 지냈고 또 지금도 지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골짜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한없이 고통받게 됩니다. 시련의 골짜기에서 통곡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홀로 버려졌다라고 하는 고독의 마음이요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라고 하는 무조력의 마음이며 이제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낙망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탄식을 넘어서서 흐느낌을 넘어서 통곡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받은 은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통곡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특별한 위로가 없이 분투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옵니다. 그런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오고 났는데 어떻게 극복하고 통과는 했는데 그렇게 통과하다가 보니까 이제는 ‘자기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지 못합니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받아보는 것이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가 특별히 사랑하고 가까히 옆에서 있어주고 그를 염려하고 사랑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광야에 외롭게 돌아 다니는 이리처럼 그렇게 살아온 나날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구속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에도 우리가 그럼 주님 몰랐을 때에는 시련을 통과를 못하고 거기서 죽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다 살았습니다. 지금도 주님 모르는 사람들, 인생에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서 자살하고 목숨을 끊고 가족들과 결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 I.M.F시대에도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살아남은 것이 우리의 인생에 목표라면 우리의 인생에 목표는 너무 동물적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처음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만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자신의 형상이 파괴되고 깨트려진 이후에는 이런 필요성이 더 증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거듭되는 불순종과 죄악, 그리고 완고한 성품으로 인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고통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갈줄 모르는 막대먹은 인간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없어서 목말라 아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서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버리고 도망치는 이율 배반적인 존재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통곡하는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시련을 지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시련을 지날 때에 그들이 그 시련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속사람은 점점 더 망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녀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도 혹은 내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람, 혹은 얼굴은 알수 없지만 어째든 존재하고 있을 그 수많은 사람,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제게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시련의 골짜기 속에서 회복되지 못한채 살아가는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눈물을 봅니다. 그들의 고통을 봅니다. 그들 중에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보다는 하나님 의지하면서 밤에는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통곡해도 새벽에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흐느끼며 기도하는 훌륭한 지체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점 때문에 혹독할 정도로 고통스런 연단을 받으면서도 연단보다 하나님 앞에 아직까지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을 인해서 더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착한 마음을 가진 지체들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수없이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고통과 아픔에 짖눌려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주님께 나아갈지 모르는 무지한 지체들도 봅니다. 혹은 이전에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큰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은 싸늘하게 식은 가슴이 되어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품고 강퍅하게 살아가는 지극히 소수의 지체들로 봅니다.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어째든지 간에 제 마음에 여러분들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기도에 제목입니다.
죄가 많고 사랑도 없는 강퍅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나같은 사람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것을 느낀다면 완전한 사랑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을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무지와 고통, 혹은 죄악을 인해서 혹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한없는 아픔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끝나지 않은 또 하나의 사역을 보좌 우편에서 계속하고 계실 것입니다. 중보 기도의 사역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런 시련의 골짜기, 눈물 흘리는 골짜기를 지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래도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신 주님께 대한 사랑과 기대를 간직하면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 싶다라는 소원을 갖게 하시기까지 우리는 아마 수없는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했을 것입니다. 그런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통곡하는 골짜기를 통과하고 날 때에 공통적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찾아오는 것은 곤고함과 메마름입니다. 특히 죄와 불순종을 인해서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통곡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는 신기하게 하늘의 문도 닫히고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잘 되던 기도의 문도 막히고 그렇게 행복하고 기뻤던 성도들 사이에 교제도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메마른 상황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받은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메마른 시련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혼자 있지 않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 앞에 샘물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이 울고 나면 항상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혈관이 약하거나 혈압이 있으신 분은 많이 울고 나면 큰일나니까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의사들 설명에 의하면 신경을 많이 쓰거나 눈물을 많이 흘리거나 땀을 흘리고 나면 그게 다 피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가 진해지는 것입니다.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혈관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울고 나면 여지없이 목이 마릅니다. 옛날 어른들이 열받는 일을 경험하고 나면 뒷골이 댕기면서 물을 찾습니다. 그게 아주 정상적인 육체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열받은 일이 많을 때에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이 열을 받는 것입니다. 감동과 감화가 없이 회개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열기가 우리에게 미칠 때에 그때 우리의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혹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남모른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견디기 힘들 정도로 통곡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은혜의 생수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우리의 영혼의 은혜입니다. 실패한 사람, 요나와 같이 망가진 사람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앞에서 샘물을 터트리셔서 그래서 그 영혼들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은혜를 주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신앙생활을 10년 5년, 혹은 20년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 데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주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 아직까지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눈물 흘리는 우리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정수에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이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그 사랑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 통곡의 골짜기를 수시로 지나야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것을 힘입어서 그런 골짜기를 지나는지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는 고통이 없고 시련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많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우리 보다도 더 많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고통스러운 계곡들을 지납니다.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더 잘살았나요? 더 의롭습니까? 주님 더 많이 섬겼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그런 전설적인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나보다 선한 사람들이 많고 나보다 더 진실하게 주님 섬기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상하게 그들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곤고하게 살아가는데 나처럼 이렇게 죄많은 인생 앞에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하나님이 샘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래서 핍절한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고 갈하여 쓰러질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던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때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변화되어야 하고 만나야 된다’라고 하는 결단 속에서 교회를 찾으신 분들도 있지만 놀러왔다가 주님 만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 기대감 없이 예배나 빨리 끝나고 집에 가고 싶어서 안식구에게 들볶이다가 어쩌다 사경회 하루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기하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주님, 겨냥하듯이 나를 계획하듯이 그 자리에 불러내시고 그리고 얼음처럼 얼어붙도록 마치 나 한 사람을 위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셔서 결국은 시련과 환난으로도 열수 없었던 내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로 열게 하셔서 누가 부수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오 사랑에 예수님 내 마음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바위보다도 더 육중하고 단단했던 우리의 마음, 무엇에 의해서도 깨트려지고 흔들리지 않은 우리의 마음이 마치 모세의 지팡이 하나에 쪼개진 바위처럼 깨트려지고 나니까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던 우리들을 죽지 않고 이제껏 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오래동안 잃어버렸던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고 거짓말 같이 기도의 세계가 열리며 오래동안 묶었던 우리의 죄악과 불순종의 찌끼들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끝나고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머리 속에서만 돌던 복음의 개념들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곤고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 앞에 만남의 샘들을 터트려 주셨습니다.
한번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어둠 속에 살 수밖에 없었노라고 고백을 하다가 주님의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도 여전히 그릇 행하기를 좋아하던 우리들이었는 데도 두 번, 세 번, 네 번 쉼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우리의 옛 성품을 따라서 불순종하는 우리들을 다시 마시게 하셔서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 소생시키셔서 주님 앞에 이 외로운 순례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그러셨을까요? 아직까지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주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왜 우리에게는 우리의 인생 굽이굽이마다 시련보다도 더 큰 이런 하나님의 소생의 은혜를 주셔서 그 샘에서 마시고 다시 회복의 기회를 얻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한번 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서 모두 답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 주위에 보면 제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할 정도로 아주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마음에 큰 부끄러움과 자극을 받습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노심초사 하면서 나는 주님 섬기는 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고통하고 자식들 양육의 문제 때문에 아파하면서 손을 내밀어야 하는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말 분골쇄신 하면서 섬기는 동역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뭔가 답답합니다. 삶은 훌륭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없습니다. 그때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저렇게 주님을 위해서 분골쇄신하며 살아가는 저런 지체들에게 만나주시지 않은 특별한 만남을 제게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들이 볼 수 없는 은혜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셨는데 왜 그런지 답이 안 나옵니다. 그저 고백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의 은혜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직도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지체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 앞에서 샘을 터쳐서 주님의 은혜의 물을 마시고 소생된 영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수시로 주셨으니까 끼에 대해서는 아마 영구히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답이라고 찾았는데 ‘그것은 내가 그 사람들보다 잘났기 때문이다’라면 그것은 답을 정말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 은혜가 내게 임했는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저 사람이 아니고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까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을 듣는 것은 차후로 미루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다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급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왜 내게만 이런 하나님과의 놀라운 만남을 주셔서 통곡하던 골짜기에서 생수를 마시고 통곡의 골짜기에서 경험한 슬픔보다도 더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는지 내게 무슨 자격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무엇 하실려고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 떠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과 그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소생시키시는 사랑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물이 없고 목마르던 때에는 가끔 흙먼지가 섞여 나오는 펌푸물도 가라 앉혀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수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누구도 석유 냄새가 나는 펌푸물을 먹지 않습니다. 정수기의 맑은 물을 받아 먹어본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염소 화학제품 냄새가 나는 하얗게 아침이면 쏟아져 나오는 그 수돗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것 보다도 더 좋은 천연 약수터에서 생수를 먹고 거기에서 해갈함을 맛본 사람들은 그 무미건조한 증류수와 같은 정수기의 물을 더 이상 마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님을 모르고 살 때에는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향락에 빠지거나 환락에 빠져서 잠시 인생의 괴로움을 잊어보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달랬습니다. 목마를 때에 기름냄새나는 펌푸물을 먹으면서 해갈했던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이런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우리 앞에 샘을 터트리셔서 우리로 해갈하게 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소생의 은혜를 맛본 다음부터는 우리는 다시 그리로 돌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우리는 그런 마취제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 인생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견딜 수 없는 인생에 막다른 골목길에서 통곡하며 울어야 하고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인생에 막다른 상황에서 주님 인격적으로 만나고,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그것을 꼭 들으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골짜기에서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 앞에 생수를 터트리셔서 우리를 해갈시켜주신 것은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 안에서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소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므로서 지속적으로 우리들이 그런 은혜 안에서 살기를 집착하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곤고한 골짜기를 지날 때 생수의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들이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골짜기에서 혼자 울고 있나요? 여러분, 고난과 시련의 때에 우리 좋으신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 무엇 때문에 이 신앙을 계속 유지하고 계십니까? 마음에도 없는 교회 출석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친구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낳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우리에게 진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고 시련의 계곡을 통과할 그 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망하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우리들이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번영 속에서도 눈물에 얼룩진 마음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우리 하나님 사랑하며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태생이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형통할 때는 주님 잃어버리기가 일쑤이고 고난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 원망하기가 일쑤입니다.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통곡의 골짜기에 들어가고도 하나님 원망할 때가 많고 주님의 은혜로 그런 골짜기에서 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랑거리로 삼을 적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통곡과 시련에 골짜기를 지나면서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시련을 당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핍박의 칼날이 번뜩이는 계곡을 지나는 사람들과만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자기의 길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서 불순종했던 사람들,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먼 길로 가서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계곡의 벼랑 끝에 서있는 양떼들,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곤고한 영혼으로 견딜 수 없이 목말라한 사람들, 사실 우리는 성공의 탄탄대로에서 주님을 만날 때보다는 실패의 골짜기에서 흐느끼면서 주님을 만날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요나와 같이 실패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우리 발로 들어가게 된 골짜기인 데도 주님이 그 골짜기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왜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치열한 고난의 계곡을 지났던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의 놀라운 은혜를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견디기 힘든 단절의 계곡을 지날 때에 사망의 위협이 그 골짜기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풍랑이는 바다에 떠있는 하나의 조각배와 같은 처지가 되어 있습니까? 환경이라는 바람 앞에 나부끼는 갸냘픈 호롱불 같은 신세가 되어 있습니까? 이때가 바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통곡의 계곡을 지나는 바로 이때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이때가 바로 이제껏 형통할 때에도 여러분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여러분들 앞에 마른 땅을 터트리시고 샘물을 맛보게 하시는 솟구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지체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그 때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눈물의 계곡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신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그렇게 우리를 만나주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소생함의 은혜를 주님이 누리며 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진멸되지 않고 이제껏 살아서 주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그래도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얻은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포기했던 것들을 돌아보지 말고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소생함의 은혜들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런 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른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원래의 뜻은 “이른 비도 넉넉히 내립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비를 통해서 씨를 뿌리기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하나님 깊이 의지하는 마음으로 매달려 그 앞에 생수의 샘을 터트리셔서 영혼을 소생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운 때입니다. 실직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직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I.M.F는 멋도 모르고 뛰어놀다가 한 대 얻어 맞았습니다. 얻어맞고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대 얻어 맞고 나니까 이제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게 안 온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신문에 떠들어도 하여튼 우리는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생이 처음 I.M.F를 당할 때보다 지금 마음 고생이 훨씬 더 심합니다. 제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사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나도 믿지만 또 그러기를 원하지만 그런데 하여튼 떨리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넉넉히 우리에게 비를 주셔서 우리의 인생에 수확들을 거둬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요새는 진짜 마음 속으로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좀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기를 비는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전 별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앙도 없는데 돈만 많으면 은혜고 뭐고 다 팽개치고 또 옛 기질이 발동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누구를 놓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 모습들을 볼 때 왜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야단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믿음이 그만큼 밖에 되고 싶지 않아서 그만큼 밖에 안 된 것이 아니잖아요. 그거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마음에 그런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 너무 곤고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는 것은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돈주세요.”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돈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자식들 정말 불쌍하구나’ 그런 마음이 생기면 주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긍휼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골짜기를 지나면서 통곡을 하는 데도 그 통곡하고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면 그 아픈 인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도와달라고 이 세상에서 너무 찢기고 상처를 받아서 제가 요새 눈물로 세월을 지낸다고 어떻게 좀 도와달라고 매달려야지, 그 세상 살아가면서 고통 때문에 견디기 힘들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시지 재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가엽어라. 그렇게 눈물 씻고 난 다음에 술집에 가서 실컷 퍼마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서라도 잊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인간을 축복해주셔 봐야 술집 장사만 잘되는 것밖에 일이 없는데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돌아서고 하나님게서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에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우리 집안이 밥이라도 먹게 된 것이 제가 예수 잘 믿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왜 그런가 하면 나만 잘 산다고 해서 잘 사는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조금 잘 살아도 동기간들이 굶네 먹네 하면 내가 잘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 퍼주어야 합니다. 안 퍼주면 이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관계를 갖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져서 ‘주님, 곤고합니다.’ 난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아픕니다.’ 주님 밖에 의지할 때가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면서 도와달라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생수의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샘을 터트리셔서 새 삶을 우리에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I.M.F니 실직이니 어려운 게 많이 있는데 내가 뭐 실직하거나 실직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어요. 왜 그런 위기를 만나면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면서 먼저 영혼에 참된 회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사가 날 짜르면 회사는 최고의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나 직장에서 쫒겨나면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왜 그렇게 믿음이 없이 웃습니까? ‘아들을 낳겠노라’고 예언을 하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은 사래처럼 왜 그렇게 웃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간이 콩알만해진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담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까, 진짜 내가 하나님 의지하며 사나, 내 영혼이 갈급한데 하나님이 나에게 생수의 샘을 터쳐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 주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 끝나도 사나운 풍랑일 때 날지켜 주시고 주없이 내가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콩알만해지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담대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날 짤라. 그러면 난 자유다. 월급 몇 푼 받아먹고 내가 살았는데 봐라. 내가 너희들이 그 동안에 보배와 같은 사람을 그동안에 월급 몇푼으로 묶어두었는지 내가 보여주마.’ 그렇게 인생에 새 승부를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뿌리기만 했는데 거둬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아닙니까?
(예화: 중국에 가셨을 때 그 곳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한국인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생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뜻밖에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환차로 인해 떼돈을 벌게 되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많은 아픔을 당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를 갖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방법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죄인들을 망하게 하시는 방법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악인이 막 도처에서 흥황할 때에 우리들이 도저히 저들이 무너지리라고 우리는 기대도 하지 못하는데 그러나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보면 성경에 보면 벤 풀과 같이 사라졌습니다. 여름에 막 풀을 베어서 널어 놓으면 햇볕이 나서 마르고 나면 지푸라기가 되어버립니다. 성한 것 같은데 어느 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도 그렇게 불가사의합니다. 저렇게 인생에 막장에 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살리실까? 저런 인생에게도 희망이 있는가? 그야말로 정말 저렇게 철저히 유린당하고 빼앗긴 들판과 같은 저 인생에게도 봄이 올 수가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를 축복하십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은혜, 다른 사람의 간증을 필요로 합니까?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은혜 경험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오직 여러분들이 신경써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아! 이렇게 나를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 헛되게 하지 말고 내가 살아야 되겠다’
여러분, 반듯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우리의 삶에 비를 내리셔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인생의 이 시기를 평강 가운데 지나게 하실 것이다 그런 소망과 은혜를 붙들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3.아들을 주신 은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가운데 오늘은 아들을 주신 은혜를 생각함으로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9장은 메시야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을 담고 있는 장 가운데 또 한 장입니다. 특별히 9장에서는 이제 늘 이방에게 박해를 당하고 군사적인 공격을 받아서 약소국가에 서러움을 면치 못하던 이스라엘의 굴복하는 역사가 끝나고 그리고 미디안의 때와 같이 즉,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을 제압하던 그 기적적이고 위대한 승리를 경험했던 역사가 이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제현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주의를 요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은 이스라엘의 눈에 보이는 역사 가운데서 행해졌지만 그 예언이 바라보고 전망하는 나라는 이제 육신적인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나타나는 파죽지세로 적군들을 이기는 승전의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교회와 영적 왕국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악의 세력들을 쳐부수고 확장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예고하는 가운데 오늘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아이가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기묘자고, 모사이며,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평강의 왕이라 일컫게 되는 예언입니다. 우선 오늘 우리들이 다루어 볼 메시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여기에 나와 있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어 보이는 설명들을 대충이라도 이해해보는 것이 요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 그랬습니다. 이 ‘정사’라고 하는 말이 골로새서를 비롯한 신약에 몇 구절에서는 악한 영들의 영적인 세계에 악한 영들의 이름을 가르키는 것으로 암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이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정사’라고 하는 것에 가장 정확한 번역은 영어에 governent입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입니다. 그것을 어깨 위에 메었다고 했으니까 어떤 주석가들은 왕의 복장 위에 어깨에 새겨진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어째든 "어깨 위에 정사가 메어졌다"라고 하는 의미는 "어깨 위에 메어졌다"는 의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무’와 ‘짐’ 그래서 메시야이신 그분이 오셨는데 그분의 의무는 governent 즉 통치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한 의무와 권한이 그분의 어깨 위에 주어졌다라고 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온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고 통치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또 하나 주고 있는 묘사는 ‘기묘자’라는 것입니다. 이 기묘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이 분명히 하나님 자신인 것을 의미하는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묘사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또 하나는 ‘모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왕 가까히 있어서 왕에게 계책을 알려주고 싸움에 있어서 정치에 있어서 지략을 가르켜 주는 그런 카운슬러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지혜의 주님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게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분은 ‘지혜’ 자체이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또 그분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가르치는 자로서 일생을 사셨는데 그분 안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떠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창조시의 하나님과 맺었던 그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모든 답을 홀로 가지신 구원의 지혜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식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의롭게 하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이 세상에 아기 예수로 오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가 마음 먹은대로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집행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집행하는 힘이 없을 때에는 감성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단지 감성적인 사랑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자기가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집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앞에서는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라고 말하므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아들인 동시에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묘사하므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혼돈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삼위일체의 관계를 분명하게 묘사하는 증거의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누이신 것은 특정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분명히 보이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 이전에 영원 전부터 이미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이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로 볼 때에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그 사실은 곧 우리 눈에는 아기로 보이고 우리 눈에는 불완전한 사람처럼 보이시는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이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함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으로 이 짧은 구절에 대한 가벼운 설명을 마치고 이제 우리가 이 구절에 한 아기의 출생, 메시야가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실 것에 대한 이 장엄한 예언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교리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여기에서 두 가지 교리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오 하나님이셨다라는 소위 양성의 교리와 그리고 두 번째로는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했는가 하는 이 화해의 교리, 두 가지를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들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상고해보고자 하는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라는 소위 양성의 교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참 사람의 성품인 인성과 참 하나님의 성품인 신성, 이 두 개의 양성이 함께 공존했다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들이 이 메시야의 예언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사를 어깨에 메신 분이며, 기묘자이며, 모사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라는 이 묘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아기가 태어나리니 한 아기가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하는 것은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간의 어린아이의 출생을 예고하는 것이니 이것은 신성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인성에 대한 예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교리를 놓고 사람들은 쉽게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잘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시대에 ‘도케티즘’이라고 하는 이단에 속한 종파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모두 가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히랍의 철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 속에는 악이 모두 배어있기 때문에 신령하고 거룩한 것은 모두 영적인 것이고 그리고 그 영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의 세계로 내려올수록 그것은 죄와 악에 오염되어 있는 피조물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그 영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그리고 물질적인 하층의 물질 세계는 서로 공존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람이시라는 사실과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이 그 시대에 사상적 구조에서는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사”라고 할 때 그 육신은 희랍어로 “싸르크스”라고 하는데 고깃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해놓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하는 그 교리를 사람들은 그 시대에 철학의 구조를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런 식의 교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전파하는데 방해가 된다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이것은 모두 허위이고 가짜이며 실제로 인간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는 가현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므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심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동기가 어떻든지 간에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므로서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또 한쪽에서 보여준 극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단지 참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에 집착하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많았고 오늘날에 현대 자유주의자들과 심지어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줄을 몰랐을 때에도 우리들은 이런 견해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시며 단지 인간이실 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래 하나님이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의 몸을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에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전적으로 신성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신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식으로 빌립보서 2장을 이해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님이셨는데 그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면서 스스로 신성을 완전히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시기를 스스로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참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현대 자유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처녀 마리아가 부정한 관계를 통해서 혼외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따라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이 아니셨다라는 주장과 하나님이셨는데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어째든지 간에 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면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백과사전에 항목 가운데 가장 긴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석가모니, 공자, 마호멧과 함께 인류의 정신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 가운데 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이렇게 철저하게 그 종교를 창시한 사람과 연결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독실한 불교 신자를 만나 대화를 하는데 그분의 이야기가 법당에 있는 불 상들을 다 없애야 한다며 부처는 모양으로 만들어서 존재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 며 진짜 참 해탈을 위해서는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욕망 자체도 버려야지만 참 해 탈이 되는 것이라며 석가모니가 불교가 불교로 존재하는데 필수적이냐고 물을 때 자기는 아니다고 말한다며 석가모니가 없이도 얼마든지 불교가 존재할 수가 있다 고 한 이야기) 공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유교의 가르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호멧이 없이도 얼마든지 회교가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사 속에 한 사람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 라는 이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묻는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당신은 예수를 어떤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한마디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도 있고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사망의 자녀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금생과 내생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성경이 내게 묻고 있지만 내게 급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너도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고 우리의 영생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 고백을 통해서만 인류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고백했던 아름다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속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성품에 대한 고백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바로 베드로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복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그분이 참 사람이셔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커다란 이유는 예수님의 고백 속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인간의 죄를 위해서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셨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셔야 했는데 그렇게 죽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흠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죄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단지 인간의 모습일 따름입니다.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아기가 잉태된 것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일이지만 시집가지도 않은 처녀의 배가 불러오는 것은 누구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핏덩어리 아기로 태어나셔서 거친 보자기에 쌓여서 구유에 누인 것은 누구도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아기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성품은 믿음의 눈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인간이 흠없는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셨다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런 오해와 걸림돌이 될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전설에 보면 하늘에 찬란한 빛이 내려오면서 한 나라의 군주가 된 이야기도 나오고 짐승이나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건국신하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찬란한 빛줄기를 타고 이미 만들어진 사람으로서 그 빛을 따라 걸어내려오는 장엄한 광경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도록 그런 놀라운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더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처럼 친밀하신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의 가족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그렇게 오셨더라면 우리는 이전에 구약의 백성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던 것 같은 신적인 공포 속에서 그분을 멀리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완전한 제물이 되게 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순종을 배워 그리스도를 위해서 범죄한 인간들의 모든 슬픔을 이해하고 한결같이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게 하신 후에 우리를 향한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으셔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참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는 당연히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는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참 사람이 흠없고 죄가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들의 자연적인 생식의 방법에 의해서 태어나시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부모의 죄, 부모의 부패한 본성을 선천적으로 물려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만, 예전에 어떤 성병 같은 것들은 아이가 성병에 감염된 가운데 부모가 낳으면 그 아이가 이미 태내에서 균에 감염되어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에 대한 책임과 부패한 본성들은 이런 식으로 이미 태내에서부터 유전되어서 오염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그렇게 오염된 인간의 몸으로서는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가 없었기에 인간의 몸을 입고 마리아의 태를 빌어 오시면서도 그 아이가 태어나는 방식은 성령의 기적적인 잉태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의 수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로 아담 이래로 흠없고 죄없는 범죄하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와 같은 참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이후로 지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 오셔야 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젖가슴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수시로 기저기를 갈아차는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의 모습, 한 평범한 젊은이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거들던 힘없고 비천한 한 청년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참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그런 오해를 받으실 것도 충분히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위대한 53장에서 예고하기를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우울한 예언으로 시작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고 대신 죽으시기 위한 완전한 제물이 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제물을 삼으시는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시는데 너무 흔한 것입니다. 늘 눈에 보이는 양, 그때 많은 것이 양이었습니다. 아니면 염소, 기껏해야 소,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게 얼마나 쉬웠겠어요? 양이 저기에 있으니까 잡아다가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제물이 이런 것들이었다면 인간들이 진짜 죄를 짓고 제사를 드리려고 그러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호랑이, 사자, 표범 그런 것을 잡아다가 바치라고 그러면 인간들이 죄를 더 안 짓지 않았을까요? 호랑이를 어떻게 잡습니까? ‘야, 죄 짓지마. 제물을 마련하려면 보통 고달픈 게 아니다. 야, 그거 하지마, 조심해. 안 짓는 게 낫지 사자, 뒷집에 있는 개도 제물을 잡는다고 갔다가 사자한테 먹혔잖아.’ 새도 또 이런 비둘기 그런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공작같이 화려한 새라든지 아니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독수리 같은 것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그랬더라면, 공작을 구하려면 인도까지 갔어야 했고 그리고 독수리를 어떻게 잡아요. 그러야 했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하나님이 그런 제물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아! 그거야 잡기가 하도 힘드니까 그랬죠.’ 사실 그게 아니라 그 속에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양 하나 가지고 나올 때 사람들이 그 양을 보면서 ‘와! 세상에 제물을 가지고 오다니’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뒤뜰에 가면 많고 많은 게 양입니다. 그게 제사장에게 끌려와서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 양이 특별한 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모든 사람 위에 특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없는 평범한 인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우리의 죄를 위함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아픔과 슬픔, 죄를 빼놓고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분이 바로 참 사람이셨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때리면 맞고 찔르면 찔림을 당하고 못박으면 못박히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또 생각해볼 사실은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예수님이 영존하시는 아버지 곧 하나님이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그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신성을,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를 위해서 행사하지 않도록 감추신 것을 의미합니다. 감추어진 것과 버린 것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감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모여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다가 기진한 것을 보면서 그들을 먹여야 되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셔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시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또 어떤 것이 있었지요? 나사로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리셨습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오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딱딱한 땅위도 날라다니실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행로에 곤하셨다” 즉 길을 한참 걸으셔서 지치셔서 길 가에 잠시 앉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리고 돈통을 맡은 사람이 갸롯 유다였는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었습니까? 필요하면 예수님이 직접 만드시면 되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었습니까? 떡이 필요하면 “있을지어다” 하고 잡수시면 되지, 아니 그것도 복잡합니다. “배고프지 말지어다” 하시면 되지. ‘내가 기도해주는 너희는 영원히 안 먹고 안 마시고도 살 수 있을지어다’ 하면 전능하신 그분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아니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그런 식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감추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끔 드러내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 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성품을 입으시고 멸시와 치욕 속에서 생애를 사셨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행로에 곤하시고 여인에게 한모금의 물을 구하시고 그리고 지치신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힘없는 모습을 뵈오면서 우리는 한번도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이신 신성을 자신의 인성 속에 감추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섬겼고 그 섬김을 받은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사람이 되셨을까? 무엇 때문에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시고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신이 아닌 것처럼 사시다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마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물의 가치는 그것이 죽을 때에 비로소 제물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흠없는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하도라도 그 제물을 통해서 속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제물이 피를 흘리고 완전히 죽는 일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은 죽음에 복종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흠없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에 복종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소망이 없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의 문을 여셨다는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 날이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시면서도 그 찬란한 신성을 그 누추한 인성 밑에 감추시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일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슬픔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악함이 하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분을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으로 내려오도록 끌어 내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의 외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셨습니다. 천군과 천사의 경배를 홀로 받으시고 죄가 무엇이고 슬픔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분이 초라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배고픔과 추위, 굶주림과 소외됨, 육신적인 아픔과 고통이 무엇인지를 모두 경험하시고 자기가 창조한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가해지는 채찍과 모진 매질들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인간들과 똑같은 극심한 고통을 그분이 온 몸으로 경험하셨습니다.
순결한 그분이 죄가 있는 세상에 내려오신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이오, 그리고 아픔이었는데 단지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 그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하나님의 축복들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형벌에 가까운 단절도 경험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탄식어린 울부짖음은 바로 우리들이 경험했어야 했을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 그 고귀한 아들을 이렇게 비참한 인간의 몸을 입혀 말구유에 뉘여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한 지체로 살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압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나타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으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성탄 가까운 날에 눈을 들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초라하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한 구속의 주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가 매를 맞은 것은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고 그가 상하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 나은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그저 힘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고 그저 사람들이 그를 그 착하고 순전한 그분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으로 그가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성탄절에 많은 사람들은 기뻐하고 세속적인 들뜸과 그리고 환영의 분위기 속에서 마치 이 날이 타락과 방종을 위해서 면허를 받은 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신 그분, 자기의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께서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가 왜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슬퍼할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면서도 창조적인 인간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혀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자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 공간에 동행하며, 동거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한 식구처럼, 한 지체처럼 함께 계신 그분이 되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예언이 지향하는 바이었습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죽임을 당하는 그 지극한 영광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에 가득찬 두려운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끌어안고 인간과 함께 우시고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도성인신의 교리 즉, 하나님이시면서도 참 인간이셨다는 이 양성의 교리를 대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들이시면서도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까요? 그리고 오셔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아들, 한 사람의 생명보다 우리 모든 사람의 생명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됩니까? 바로 지금 말씀들은 이 진리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적인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면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어제 감격이 어제 삶을 살게 했고 오늘은 오늘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 도성인신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들이 가슴저미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분이 만약에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영광과 존귀만 받으시고 왕처럼 대접을 받으셨다가 승천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도성인신을 그렇게 가슴 저미는, 그렇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도성인신, 그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가슴저며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것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그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지고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교리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고 싶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심각한 재앙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그리고 어디엔가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게 우리로 보면 준엄하게 꾸짖으시는 도입부처럼 보이는데 사실 히브리어로 보면 아주 친근한 그 아버지의 말씀하는 방법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때 아담의 대답이 “내가 벗었음으로 숨었나이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던 사람이었는데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기 전에 자신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애들을 키우면서 보면 뭐 잘못했을 때 부모를 슬슬 피합니다. 예를 들자면 시험지 40점 맞은 것 가방에 감추고 계속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성적표 도장 몰래 찍었을 때 피해 다닙니다. 피해 다니는 구실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죄가 부모와의 단절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트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평화가 깨지고서는 하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인간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비델” 히브리 말로 “있어라” 그러면 그냥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있었으면 하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은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어떻게? 흙으로 사람을 빗으셨습니다. ‘훅’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 코에 생기, 곧 영혼을 불어넣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창조하심으로서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게 하시고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교류가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가족으로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죄가 그것을 다 깨트렸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 날이 우리에게 기쁜 성탄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가까히 볼 때에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그것이 육신이 깨트려지고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고난이지만 더 멀리 보면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서 다시 죄와 불순종으로 깨트려졌고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았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길이 열렸기 때문에 아기 예수 오신 이 날이 우리에게 참 기쁜 날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제발 기쁜 성탄절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셨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여기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평강의 왕이오” 여기서 평강이 “샬롬”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왕이라는 것은 “샤하르 샬롬”이라는 것인데 직역하면 “샬롬의 왕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왕자가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으니까 평강의 왕으로서, 왕자로서, 통치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셨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읽은 선교 역사에 관한 책 내용: 어느 선교사가 대만에 선교를 가서 열심히 선교를 하는데 그곳에는 조상대대로 이상한 풍습이 내려오는데 그것은 다 른 동리로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 가야 하는데 그 산을 넘기 위해서는 해마다 연초에 한 사람이 재물이 되어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어느 해에 또다시 처음으로 산을 넘어오는 사람을 잡아 죽여 예식을 치루려고 하니 뜻밖에 그 선교 사여서 그 부족 사람들이 후회를 하며 그를 묻으며 평화의 아들이라고 썼는데 그 것은 자신들에게 당할 재앙을 담당하게 하려고 모르는 첫 번째 사람을 죽였는데 선교사가 남모르는 행인들과 자기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었다는 뜻의 이야기)
비유하자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으신 것이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주께서 오신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인성에 감추고 오셔야 됐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죄악 세상 사람 주 오심 모르나 주 믿는 사람 마음에
그 마음에 주 믿는 사람, 그 마음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생활로 우리의 전 삶으로 바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메신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은 하나님과 등져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화해의 평화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쏟아부어지는 사랑과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로부터 올려지는 사랑과 경배의 마음으로 집약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래서 그 평화를 유지하면서 우리가 가진 이 체험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도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멍에를 풀러주고 우리처럼 눈멀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을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 오심의 의미를 알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4.여기까지 도우신 은혜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
성경에 보면 기념비를 세우는 일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돌을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여기서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난 다음에 돌을 세우는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늘 커다란 사건이 있어도 잊기 쉬운 존재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기념이 될만한 것을 남겨 놓아서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인 회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으로 돌을 세워놓는 장면들을 우리에게 여러 차례 보여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이라고 하는 이 족속들은 원래 가나안에 살던 주민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리잡은 그 아래쪽 남부쪽 해안을 연하면서 살고 있는 그런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 족속은 이미 아브라함 시대부터 시작을 해서 이스라엘 왕국이 모두 멸망한 후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존재했던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족속입니다.
이 블레셋 족속은 일찍이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족속이었고 발달한 문명과 함께 강력한 기동력을 가진 기마부대를 가지고 있는 족속들이었습니다. 농사나 산업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위에 있는 나라를 약탈해서 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고 다루시는데 있어서 이 블레셋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읽은 이 7장 이전에 보면 충격적인,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간 법궤를 아벡의 전투에서 빼앗기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이 법궤를 들고 나가면 마치 다른 나라에서 왕이 친히 전쟁에 참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가면 반드시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슨 일인지 아벡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패배를 하고 법궤까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커다란 충격적인 교훈은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궤가 무슨 신통력을 발휘해서 이길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는 덮어두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는 그 믿음이 전혀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궤를 빼앗아서 간 블레셋 사람들 편에서는 그 법궤를 뺏아가고 난 후에 계속해서 불길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붙들려서 전쟁터에 나갈 때는 역사하지 않던 법궤가 홀로 블레셋 땅에 들어갔을 때는 역사하여 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그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이스라엘에게로 돌려보낼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법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그 법궤가 돌아온 후 한 20년 동안 이제 평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기사는 바로 그후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으나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을 실로 오래간만에 퇴치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전쟁에서의 승리의 경험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그 돌맹이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그랬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돌이라고 그랬는데 한돌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러개의 돌맹이가 아니라 큰돌 하나를 취해서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그랬습니다. ‘에베’는 돌이라는 뜻이고 ‘에셀’은 ‘도움, 응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돌의 이름은 에벤에셀이었는데 그것은 곧 ‘그 도움이 돌’ 그런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기념석’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이 그 돌맹이에 묻어 있었는데 그 신앙의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거기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2000년의 마지막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면서 마치 우리가 이 돌맹이가 서 있던 미스바와 센사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20세기는 끝나고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는 게 2001년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해동안 2000년대 새 밀레니엄, 그런 것은 가불한 것이고 이제 진정한 밀레니엄이 이제 새천년이 내일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천년 동안 우리들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지난 1년, 혹은 10년, 혹은 20년, 30년 이 1900년대를 20세기 말을 쭉 살아온 그 날들과 그리고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2001년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1000년이 지나는 이 수문과 같은 곳이 바로 이번 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옛 것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문과 같은 날, 그 시기가 바로 ‘오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실적으로 또 우리의 신앙생활 면에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모든 면에서 볼 때에 우리에게 이렇게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한 때이고, 또 그 신앙의 고백을 붙들고 불안한 미래를 믿음으로 떨쳐버리고 살아야 할 그런 시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실 우리도 가만히 보면 지난 한해 보내고 새해 한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이 이제 금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의 마음보다 덜 무겁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1년 전에 여기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새로운 한해를 맞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국가적으로도 희망적인 일들보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많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유례에 없는 환난을 맞이하고 많은 동포들이 거리에 실직자로 내몰리는 상황이 별로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그리고 어째든 2000년 새롭게 다가오는 한해가 어떤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그런 가운데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년 동안 어렵게 어렵게 새롭게 이사온 이곳에서 살림을 꾸려나가고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을 보내어 주셨지만 이제 또 1년을 우리가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도 역시 있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도 역시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한해를 출발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또한 생업에 있어서, 혹은 사업에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작년과 마찬가지로 작년에도 실직의 위협, 사업의 어려움, 경제적인 고통 이런 속에서 인간이 늘 안고 사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째든 환경적으로 특별히 압박을 받으면서 우리가 한해를 보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또 한해를 맞이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믿음을 갖자고 격려하고 우리의 앞에 있는 날들이 아무리 어둡고 추워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라고 하는 신앙 하나로 우리들이 새해를 맞이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한해를 이렇게 돌아보고 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적으로 아직까지도 어려움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특별히 작년 한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제 한반도에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많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그런 복된 한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우리들이 떨쳐버릴 수 없게 끔 주님께서 이런 남북의 군사적인 긴장과 대결들을 많이 해소시켜주셨습니다. 모두 끝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남북의 화해와 동족의 평화를 위해서 이제 우리들이 무엇인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들을 하나님이 많이 보여주신 한해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작년 보다는 훨씬 고통스러운 위기의 상황들을 많이 넘기게 되었고 그리고 목회자로서 이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I.M,F의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많이 성숙해진 것을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엄연한 경제의 현실들을 보고 거품이 많이 빠져나가고 허세에서 근검절약하는 삶으로 사람들이 많이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민정신이 성숙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우리에게는 기도의 제목이지만 커다란 별란이나 폭동이 없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 의지하면서 이어오는 이런 상황들을 우리에게 보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교회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작년 한해에 새해에 들어서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한 한해를 주셔서 잘 감당하고 싶었는데, 주님께서 금년 한해도 우리에게 많은 성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도록 적어도 교회가 재정이 없기 때문에 주님 앞에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감당해나가지 못한 적이 없도록 주님께서 이모저모로 충성된 여러분들을 통해서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족할 때쯤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특별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모양 저모양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예배드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시면 1년 전부터 만난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나 1년 전이었으면 만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앉아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지난 한해에 우리의 교회에 곤고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보내셔서 새로운 삶을 찾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겨울에 신년 사경회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십자가 사경회와 여름 수련회에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부어주시고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옛 길로 돌아가는 신앙생활의 회복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분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고 특별히 (?)관심사던 이제 2년이 지나면 여기가 계약이 끝나는데 그후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로 가야될까? 아는 사람들은 모두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셔서 그래서 우리에게 대지를 주시고 또 건물이 있는 것까지 허락해주시고, 그것을 찾았어도 우리들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우리의 것으로 취할 수 없었을 것인데 이 어려운 시대에 성도들이 넘치도록 헌신하게 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산지들을 취할 수 있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월 말경으로 예정했던 교회 이전이 한 두달 정도 늦어질 것 같은 그런 변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사놓은 땅이 어디에 가겠어요. 그래서 어째든 가게 되었고 이제는 집주인이 우리를 보고 나가라고 그래도 그저 마음 탁 놓고 걱정마라. 돈이나 준비해라. 우리 집으로 갈 때가 곧 다가온다. 이렇게 마음을 갖을 수도록 편안한 마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큰 교회의 일을 하면서도 아주 제가 단언하건데 거의 모든 성도들 중에 거의 이 일로 인해서 시험에 들어가 마음의 과중한 부담을 느껴서 신앙에 손해를 본 교인이 거의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있는 사람들에게는 헌신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이모양 저모양으로 주셔서 이 일이 있고 나서 저도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이 더 많이 사랑스러워졌고 그리고 여러분도 이 일이 있고 나서 교회가 정말 사랑스러워지게 되었고 저와 여러분들은 이 일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런 성숙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고 더욱이 여러분들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목회자를 만나서 만약에 제가 저의 능력이나 저의 생긴대로의 모습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광야에서 찔레와 엉겅퀴를 먹으며 생고생을 해야지만 정상인데 하나님이 저의 못생긴대로 여러분들을 대접하지 않으시고 저 자신의 결점을 능가하는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베푸셔서 그래서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게 해주시고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습니다.
오늘도 교회마당에 서서 교회당을 들어오는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폭풍이 막 치고 비바람이 쏟아지는 벌판에서 커다란 천막 하나를 쳐놓으니까 그 비와 번개와 천둥과 우레를 피하기 위해서 급히 뛰어들어서 다 떨어진 천막인데도 그 속에 들어와서 함께 옹기종기 모여서 두려움을 이기고 삶의 용기를 갖는 그런 그림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의 능력이요 저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 몇사람의 헌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위해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정말 우리들이 거스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오셨고 그리고 목회자로서 제가 또 느끼는 감사의 조건 하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보니까 교회의 살림살이가 상사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는데, 저도 병원에 종합진찰을 하려고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진단을 쭉 하면서 하는 말이 ‘간이 굉장히 크시네요’ 보통 사람들보다 30%정도나 크다고 합니다. 과장을 하자면 배 전체가 간입니다. 그렇게 간이 큽니다. 그렇게 제가 간이 작은 사람이 아닌데도 한주 한주 교회 살림을 결제할 때는 떨릴 때가 많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지출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누가 교회의 돈을 낭비하고 허투르게 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야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헌금을 해주지 않으면 교회가 이 일들을 해나갈 수가 없는데 그런데 참 놀랍게 떨어질만 하면 채워주시고 또 떨어질만 하면 주님이 보태주시고 하셔서 금년 한해에- 오늘 오후에도 결산을 해보면 알겠지만 -주님이 넉넉하게 그렇게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는 한해 동안에 거의 배가했습니다. 거의 80% 정도의 성장을 한해 동안 해올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또 하나 감사 제목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도 이게 은혜를 받고 변화되지 않고 이상하게 비비꼬인 교인이 되어서 꼬챙이로 찌르고 다니면 목회하는 것이 괴롭기가 한이 없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어둠가운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1년 동안 와서 주님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런 변화를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가 힘들다든지 고통을 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특별히 우리 자신의 부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2000년 12월 마지막 주, 예배 드리는 이 시간과 공간이 미스바와 센사이에 있는 지역과 같아서 바로 여기에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기념비를 세우고 이후로 우리가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곤고하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2000년도에도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이기게 하셨으니 지금이 그때보다 낫지 않겠는가 말할 수 있는 기념비로 삼고 싶은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이 제 마음 속에서 솟구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감사의 제목들을 제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감사는 누가 누구에게 쥐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쳐보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도록 내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넓은 사랑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은혜가 은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 사무엘 선지자가 큰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이렇게 감격 속에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도다” 여기까지 도우셨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 데도 여기에서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났다. 그래서 더 큰 환난과 어려움을 만났어도 그 돌맹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가운데서도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려고 주님이 이 돌맹이를 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도 그런 돌맹이를 세울 만큼 그런 큰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는데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오늘 그 앞에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법궤가 들어온 이후로 마음이 비교적 순수해져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다시 고질적인 패역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질적인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스다롯과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습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고 났을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가나안에 거하는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그 우상을 만든 그 장본인, 그 가나안 원주민들을 모두 진멸하였더라면 괜찮았을 터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완전히 순종하지를 못했습니다. 산으로 도망쳤던 가나안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계심이 약화되면서 문화적인 접촉들을 통해서 살금살금 그들 가운데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경문화 가운데는 그들이 배울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풍요한 농경생활 뒤편에는 항상 우상숭배가 도사리고 있었고 아스다롯이나, 혹은 다곤이나, 아세라나, 바알 이런 모든 우상숭배들이 농경문화와 관계가 있는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그런 신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도 섬기지만 우상도 섬기는 그런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주전 11세기 경인데 하나님께서 그때에 그 이스라엘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주님께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는데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아무 일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평안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속속들이 썩어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정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결단을 선포하면서 이례적으로 ‘미스바’라고 하는 곳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기 위해서 그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원래 선지자의 고유한 직무가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설교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백성들을 모이게 했고 모였을 때에 이 사무엘 선지자는 아주 독특한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도 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며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니 참된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희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그 분만을 사랑하고 그 분만을 위한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일신 신앙이라고 하는 선포였는데 이것은 바로 그 당시로부터 약 250-300년 가까운 세월 이전에 가나안 정복 후에 뒤로 미끄러져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의 비탈길에서 유일신 신앙을 청아하게 외치던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의 음성 속에 담긴 그 신앙을 전수받은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각성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에서 본다면 그들의 일년의 계획 속에는 회개할 계획이라는 것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주님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라는 계획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각성을 통한 진실한 회개가 그들의 시간의 계획표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벤에셀의 축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미스바에 모여서 깊이 회개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은혜가 에벤에셀의 은혜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런 도움, 저런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물질적으로 좀 심히 피게 되는 축복도 우리가 기대하는 축복이었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기대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려서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던 사람들은 그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금 건강을 찾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고 그런 소망도 가졌던 한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회개할 소원을 마음에 품고 그것이 금년 한해에 인생에 좌우명이 되고 목표가 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다듬으시는 손길 아래 자기를 복종시키고 깎이고 고쳐져 나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겠다라는 진실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시키시는 은혜는 우리의 시간에 계획표와는 상관이 없이 다가오게 하셨습니다. 이게 마치 우리의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는 것과 같습니다.
왜 시골에 보면 문전옥답이 있습니다. ‘문전옥답’ 늘 집 가까히 있으니까 사람들이 가서 거름도 주고 가꾸는 그런 기름진 밭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문전옥답일수록 농사짓기를 포기하면 막 쑥대밭이 됩니다. 왜냐하면 땅이 기름지니까 막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막 온갖 더러운 풀들과 잡초 이런 것들이 자라서 가득 메워서 졸지에 그 복스럽던 집을 흉가처럼 만들어버리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늘나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취한바 된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는 항상 세상에 대한 달콤한 기억들이 있고 그 세상이 바로 우리가 자라난 고향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가 사라지고 나서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면 더 악하고 악랄하고 더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동안 주님을 믿으면서 주렸던 세상에 맛을 알고 나면 더 급속하게 빨려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장로님의 이야기가 제게 영원히 두고두고 교훈이 됩니다. 햇볕이 확 쏟아질 때에는 일주일이면 염전에서 소금이 나오는데 그 소금을 물에 풀려고 하면 잘 안 풀립니다. 겨울에 김장을 해보면 알지만 잘 안 풀어집니다. 그런데 소금을 해서 배에 싣다가 후크를 잘못 집어서 물에 빠트렸습니다. 그것이 아까우니까 그것을 건져 보면 불과 한 2-3분 안에 건져내는 데도 가마니 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이야기가 원래 성도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니라 소금과 같이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취해졌기 때문에 한번만 들어가면 다시 다 녹아서 본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소금과 같은 그런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런 속성들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남아 있어서 시시때때로 우리들이 곁길로 가는 데도 불구하고 이만큼 이제 신앙으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맞이할 수 있게 된 가장 커다란 축복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래도 지난 한해동안 주님께서 수시로 우리를 시시때때로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서 거미줄과 같은 신앙이나마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주님의 은혜 앞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밖에 인생에 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그 신앙으로 일로매진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시로 세상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주님이 만약에 그 버스의 가는 길을 막으시고 우리를 색출해 내셔서 헌병들이 간첩을 잡아내는 것처럼, 교통이 음주운전을 측정해서 차에서 끌어내리는 것처럼 수시로 우리를 이렇게 내리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느 정거장에 가서 있을지 기약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수시로 내리게 하시고 그래도 뻗댕기면서 안 내린다고 하면 교통사고라도 나게 하셔서 더 이상 운전을 하고 차가 갈 수 없게 끔 해서 할 수 없이 내려올라치면 교회에서 가서 낚아채서 여기에 와서 앉혀났으니까 그러니까 이나마 신앙 생활이라도 하면서 살아갔던 것이 아닙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수시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수시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변화를 주셔서 회개할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그런 간증을 보았습니다. 자기밖에 없는 줄 알고 살던 사람이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억지로 교회에 한번 나왔다가 바로 그날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 커다란 회개를 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일년 동안 변화된 지체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몸이 아파서 우연히 동네 교회를 나온다고 왔다가 사경회 때 붙잡혀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혀 주님을 믿지 않거나 오래 동안 쉬고 있었는데 집 앞에 붙여있는 십자가 사경회 쪽지를 보고 교회에 왔다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간섭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을때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았지만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 그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 어리고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한심해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탄식하심, 그 아버지의 마음의 아픔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큼 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망가져도 아주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넘어질지언정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충만하지 못하게 살 때도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짐승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비결은 주님이 시간의 계획표와는 상관이 없이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는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시는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동안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불결과 그리고 죄악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는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 버린 것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강퍅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회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더욱이 그런 돌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패역과 함께 그 패역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간의 계획표와는 상관이 없이 또 우리의 시간의 계획표로 짤 수 없는 그런 회개를 우리에게 끝없이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노예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앙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안 믿으면 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종의 영을 가지고 신앙생활 했던 일들을 청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우리 자신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쓸모가 없는 데도 완전하신 하나님은 이 불안전한 죄인들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들을 돌보시는 그런 사랑과 은혜 때문에 살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구석구석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이 은혜는 1년에 한번으로 족하지가 않습니다. 일생에 한번으로 족하지가 않습니다. 매일매일, 매주매주 예배의 시간마다, 기도할 때마다 모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시고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우리에게 깊이 배여있는 내멋대로 살려고 하는 이 패역, 그리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자동적인 죄악과 그리고 불순종, 이것들을 주님이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하나님을 대항하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에 우리의 회개가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강퍅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시시때때로 베푸시는 회개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많이 망가지지 않고 조금 망가졌고 그리고 은혜에서 떨어지되 아주 미끄러지지 않고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갈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천로역정과 같습니다.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오랜 길을 걸어가는 그런 순례자의 여정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으며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충만합니까? 항상 승리합니까? 항상 하나님 편에 있습니까? 항상 순종합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회개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지난 한해도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자기의 좌석을 적시며 회개하는 광경들을 보아왔습니다. 우리가 그런 회개가 우리 자신의 힘이나 혹은 교회의 어떤 프로그램에서 왔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한해 동안에 신앙 생활이, 한해 동안의 예배 생활이, 한해 동안에 기도의 생활이 늘 뉘우침이 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생활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와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아파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에 그들의 눈물을 씻기고 그들의 고통하는 마음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늘 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베푸시면서 지난 한해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당하지는 않지만 지난 일년의 신앙에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영혼의 곤고함을 토하며 말씀의 빛 앞에서 참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상처받은 영혼들을 우리 주님은 거두신다라고 하는 평범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이제 내년에 다가오는 한해에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더 의지하면서 살 그런 소망과 결심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회개의 과정들을 통해서 주님이 회개하는 것만큼 주님의 선하심을 보시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오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그렇게 불안전하고 옛 삶과 결별하는 우리의 결단이 그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도 주님이 이렇게 큰 은혜를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우리 개인적으로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아마 우리들이 더 정결하고 더 순수하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온 인생이 오직 그 분의 소유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다 닦아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정신도, 심지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제물도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온전히 바치고 또 그렇지 못한 자신을 인해서 더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우리들이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지금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잘못된 것들은 주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허물과 우리 자신의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주 얼굴 구할 때 자유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자유와 영혼을 얽어맨 것들을 푸는 해방케 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회개할 때마다 늘 있었습니다.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진실히 뉘우치며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랬을때에 너희의 죄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많고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집을 나간 자식을 동구밖에서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압도하며 다가오는 놀라운 진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가 가고 한해가 또 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어떻고 새해가 어떻고,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달력을 찢어도 우리들이 변하지 않게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라고 하는 아주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해가 저물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을 때에 제 마음에 간절히 파고 들어오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을 향한 소원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을 향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다 더 완전한 친교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랜 우리의 죄를 뉘우칠 때에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도움을 보았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그렇게 회개할 때에 회복했던 주님과의 그 친밀한 사귐을 우리들이 항상 갖으면서 일생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상한 꿈이며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절실한 목표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여러분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저와 여러분이 내년 한해에는 이런 철저한 회개와 뉘우침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꼼꼼한 정사 속에서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들을 뉘우치고 보다 순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주님이 쓰시고 싶어하실 때에 깨끗한 그릇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쓰시려고 하시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이 놓고 싶어하는 곳에 주님이 담고 싶어하는 것을 담아서 거기에 기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참된 보람은 일에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내년 한해에도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이 만나고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고향처럼 이곳에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복된 역사가 있기 위해서 주님이 지난 한해 우리에게 회개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조금 회개할 때 하나님은 많이 기뻐하시고 그리고 조금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 감격해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만약에 우리들의 회개가 완전하고 우리들의 순종이 보다 더 완벽하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그 에벤에셀의 은혜는 지금 우리들이 받은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계획 속에 있겠구나 하는 것들을 많이 깨닫고 또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의 교회가 예배의 은혜가 넘치지 않을 때도 마음이 아프지만 예배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은혜가 넘칠 때에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도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만약에 내가 그리고 여러분들이 더 정결해지고 더 순수해져서 흠없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쏟아부으신 주님의 그 보혈이 그 분의 순결함 때문에 더 소중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클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에벤에셀의 복을 맛 본 여러분, 내년에 이런 은혜가 더 크게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승리하게 하신 은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앞에 나오는 회개케하시는 은혜와 별도의 은혜가 아니라 회개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결과가 바로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였습니다. 블레셋을 이렇게 철저하게 이긴 적이 많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블레셋을 철저하게 퇴치하고 격멸하고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승리의 기념비는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될 것이요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표징이 될 기념비였습니다. 그랬습니다. 늘 블레셋에게 지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숙명처럼 생각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예상에 없었던 큰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무력으로 보나 병사의 수나 병기로 볼 때 군사학적으로는 거둘 수 없는 승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상황 속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해주셔서 우수한 병기와 많은 군사를 가진 오래동안 승리의 경험을 쌓아온 블레셋을 꺾으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이 미스바와 센사이에 기념비를 세우게 한 이 전쟁에 혁혁한 승리는 아벡에서의 뼈져린 패배, 법궤까지 빼앗긴 이스라엘의 수치와 수모를 단숨에 쓸어버린 위대한 쾌거였습니다. 그리고 이 쾌거의 한복판에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법궤마저 빼앗기고 치욕적인 설음을 당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일전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유일신 신앙을 불러일으킨 아주 혁혁한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장쾌한 복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으면 우리들이 그동안 숙명처럼 여겨왔던 악한 대적들을 무찌르고 격파할 수 있다라고 하는 신명을(?) 이들에게 심어주신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일생동안을 이길 수 없었고 패배하며 짓눌러 살았던 인생의 문제와 가정의 문제와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모든 경험이 미래에 삶을 결정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우리 스스로를 불러일으킨 이면적인 희망이 아니라 계시적인 희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같은 희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결단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오래동안 익숙해왔던 이 패배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오래동안 숙명처럼 여겨왔던 우리의 삶의 상황들을 격파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뒤집어 엎어서 우리의 삶의 상황들을 새롭게 개척해 나아가기 위해서 이 은혜와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벡에서의 전투뿐만 아니라 오랜 경험들을 통틀어볼 때 블레셋을 이렇게 장쾌하게 무찌르고 승리의 깃발, 에벤에셀의 돌맹이를 세워서 기념비를 건립한다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겼던 그런 불순종한 삶들을 모두 뉘우치며 주님 앞에 정결해졌을 때 주님께서는 오래동안 숙명처럼 짓눌려 왔던 그 블레셋을 단숨에 격파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 백성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내년 한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이 있다고 하는데 근거가 있습니까? 해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실증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눈에 보이는 희망의 증거를 찾기가 용의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거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실직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대학원생들은 졸업과 함께 실직자가 되거나 직업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인 우리들이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방식은 세상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그 희망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과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데도 그런 논리를 초월해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평화, 내년의 계획에 대해서 무엇이 희망적인 증거인지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우리 앞에 놓여진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하늘에 악한 영들과 어두움의 세력들과 이 세상이 결탁을 하여 우리를 온통 에워쌓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 진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순수해지고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인간의 논리를 초월한 이적적인 승리를 내년에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강한 성이십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에 불렀던 것처럼 :내 주는 강한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라: 문제는 위대한 승리를 방해하게 하는 것은 사실은 상황이 아니라, 환경에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 거짓된 신앙, 부패한 본성,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킬 줄 모르는 노예적인 신앙생활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서 그것이 새로운 승리를 우리들이 맛보면서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어려운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도우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어려움은 주님이 도우시지 않을 때에는 재앙의 신호가 되지만 주님이 도우시면 오히려 더 높고 큰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울 기회가 될 뿐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훌륭한 선전의 기회가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해 돌아오지 않을 영원한 시간의 세계 속으로 떠나 보내면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한해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내년 한해에는 하나님 안에서 승리를 맛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블레셋과 같은 상황, 죄악, 환경에 의해서 밟히고 눌리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앙을 통해서 에벤에셀의 복을 받고 간증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