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롬 1:16)
녹취자: 정윤미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연약한 종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고, 도와주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달을 수 있도록 주께서 역사해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주의 성령으로 말씀이 열리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지난주 까지는 수요일마다 8주에 걸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전도에 관한 말씀을 전할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이 사도는 신약성경 중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가장 유명한 고백가운데 하나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는 그 고백을 오늘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랬습니다. 사도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의 개념을 제외 놓고 보면 그 복음 속에는 부끄러워할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그 복음은 부끄러워할 만한 많은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전에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복음을 부끄러워한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증오하였습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그 복음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처럼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리석은 도가 누룩처럼 온 땅에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속히 저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늘 잘 쓰는 복음이라는 말이 도대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는 복스러운 소리입니다. 영어에서는 좋은 소리입니다. 복스러운 소리, 좋은 소리, 그리고, 헬라어로는 기쁜 소식입니다. 도대체 뭐가 기쁜 소식입니까? 무엇이 기쁜 소식이고, 무엇이 복된 소식이고, 무엇이 복된 소리입니까? 여러분, 오늘 사도가 이 복음에 대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가 읽다가 크게 절망을 한 그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그러다 그 속에서 또한 하나님을 만난 구절이기도 합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그랬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가 무엇인지 모르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항거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 속에 칼을 두셨나이까?’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인식한 것이 정확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야말로 칼입니다. 왜 칼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정죄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가 들어나자 인간이 그 의에 미치지 못한 다는 사실이 들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바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인데, 그러나 그 율법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수없는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 율법을 지키려고 살려고 노력을 한 결과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율법을 지켜서 그 계명에 대해서 내가 의를 이루었다하면 다른 계명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다 살았는데, 마지막에 그 아홉 계명을 지키며 살았는데, 내 마음속에 탐심이 있으면, 그 탐심으로 말미암아 계명을 범하게 되고, 계명을 범하게 되면, 그 탐심을 푸는 죄는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 말씀에 의해서 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가 되어서, 끊임없이 율법에서 멀어지고, 그 율법에 의에 도달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도록 명하신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복음 속에 칼을 숨겨두셨습니까?” 하면서 몸부림쳤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키면 의로 여기시지만, 지키지 못하면 죄로 여기시고, 그 죄의 대가는 형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누구도 그 하나님의 의롭게 되어지는 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죽음아래에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종노릇하고, 그리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죄로부터 죄의 열매를 맺고, 마지막에는 심판에 이르게 되는 그런 죽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말하기를 복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제 이런 것들로 인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런 것을 가지고 절망하지 안 해도 된다는 소식이 온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정죄 받고 사망아래에 놓이게 되었던 사람들로부터 이제 그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예가 별로 없습니다만, 어떤 때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를 안가고 병역을 기피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갑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역을 기피한 죄는 굉장히 엄한 형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필코 잡아내서 색출을 해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제 친구 형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입니다. 집에서 너무 편하게 지내다가 군대를 갔더니, 너무 힘드니까, 군부대에 들어가서 부대에서 부대를 이동하는 사이에 도망을 친 것입니다. 도망을 쳐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훔쳤는지 어쨌는지 중학생 교복을 바꿔 입고, 그때에는 중학생이 머리 깎고 다닐 때니까 중학생교복을 바꿔 입고, 서울까지 올라와 가지고, 그다음에 이제 돌아가고 싶으나 형벌이 무서워서, 수배를 받으면서 계속 도망 다니는 것을 봤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잘 때에도 꼭 방에서 안자고 다락에서 잡니다. 그리고 벨이 울리면, 드러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경찰이 있는데, 저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주민등록이 없습니다. 주민등록을 안주니까, 저 멀리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붙잡혔습니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가지고 붙잡혀서, 대구에 끌려가서 거기에서 3년 동안 옥살이하고 그리고 징역살고 그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범죄하고 그렇게 도망을 다니면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tv 뉴스를 보는데 이상한 소식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병역법이 개정이 되었는데, 이제 잠시 동안 이전에 그 병역을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살려준다는 용서해 준다는 그런 포고령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죄를 묻지 않고, 그리고 일체의 모든 과오를 묻지 않고, 자수해서 광명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기쁨소식일까요? 아닐까요? 엄청나게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엄청나게 기쁜 소식입니다. 바로 그런 소식이 역사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지배하게 된 것처럼, 이번에는 기쁜 소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습니다. 무엇이라고요? 이제는 육신의 정욕대로 먹고 마시는 것 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어찌하던지 영생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예수께 나왔던 돈 많고 젊은 관원의 그 고민처럼, 어찌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던 그 사람처럼, 이렇게 육신대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형벌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이고, 사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믿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펼치면 펼칠수록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어디를 펼쳐도 성경은 항상 너는 죄인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어느 부분을 펼쳐도 너는 정죄되었다 말합니다. 어느 부분을 펼쳐도 네가 어떻게 살던지 너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망이요 죽음뿐이다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기쁜 소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모든 의문을 무효화 시키는, 무효화시킨다기보다 그 모든 율법에 율법 속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효력을 무효화 시키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못 박혀 죽으셔서 이제는 아무 공로 없이 누구든지 와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구약의 사람들이 그런 구원과 하나님과의 샬롬을 얻기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쳤던 그렇게 사모하고 그렇게 애타게 갈구하고 찾고, 누리고 소유하고 싶어 했던 그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소식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죄의식 속에서 깊이 살아가고, 죄에 대해서 몸부림쳤던 사람들이야말로, 이 복음이 얼마나 복된 구원의 소식인지 압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복된 소리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이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운 소식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제는 아무런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기쁜 소식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 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우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원하지만, 그러나 사도가 전한 복음의 방식을 보십시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죄인임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을 비롯한 믿음의 선조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어찌하던지 그에게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고, 그리고 죄인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그리고, 그 죄의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충분히 절망한 사람들은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복된 소식으로 기쁜 소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물론 환경에 의해서 죄를 죄성은 촉진 될 수 있고, 억제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바깥으로 발산되느냐 안 되느냐는 환경도 많이 좌우를 합니다.
(예화) 싱가포르 이야기 입니다. 그 나라에 대한 신문 기사를 죽 읽어보니까, 무엇라고 제목을 붙여 놓았냐하면, 철권아래 파라다이스, 철권아래 낙원이라 제목을 붙였습니다. 써내려간 것을 보니까, 우리는 그런 사회에 숨 막혀서 못살 것 같습니다. 껌 씹다가 걸리면 10만원, 만들다 걸리면 징역, 스프레이로 벽에다 글자, 주차금지 뭐 그런 낙서하면 곤장 4대, 그런데 4대 맞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세게 때리는지, 뭐 주님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그다음에 또 뭐 주차위반 28만원,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그 철권입니다.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껌 왜 못 씹게 하느냐, 길거리가 지저분해진다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 거냐. 우리 같은 사고는 껌 띠는 사람을 고용하자 별의별 생각을 다할 것 아닙니까? 나는 파리에는 안 갔다 왔지만,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누구 말에 의하면, 파리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니까, 그냥 자유롭게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버리기가 무섭게 어디엔가 숨어있던 청소원들이 쏜살같이 나타나서 그것을 치워준다고 합니다. 나는 가보지 않아서 정말인지 아니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사람들 사고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간단합니다. 껌을 누렇게 붙어있는데, 이것이 무엇입니다. 어떻게 해결할까요?? 씹지 못하게 합니다. 간단합니다. 씹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징역, 만들면 징역, 간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법이 강력하게 지배를 하면, 죄성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억제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쉽게 이야기해서 요즘 뭐 뺑소니사고를 친다고 하는데, 그런 곳에 뺑소니사고 일어난다, 만약에 차사고 내고 도망가는 사람, 엊그제도 접촉사고 내고 도망가니까, 왜 그랬냐고 뛰어 들어가서 항의를 하니까, 문을 열고 칼로 찔러죽이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대여섯 사람을 광화문에 놓고 총살을 시키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이북이 그렇습니다. 귀순용사들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나 여기와가지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너무 세상이 무섭다고 합니다. 펼쳐보니까 강간, 살인, 뭐 도망 뭐 강도 그러는데 아 세상이 내가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몇 달 동안 적응이 안 되어서,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그런 것이 없냐고, 없다고 합니다. 그냥 공개적으로 평양시내에서 비참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누구도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는 환경은 죄가 들어내는 데에 억제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법이 물렁물렁해지면, 사람들은 범죄가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회가 모순이 가득차고, 뇌물이 아니면, 통하지 않고 하는 그런 사회가 되면, 인간은 그 죄성과 사회의 구조가 결탁을 해가지고, 죄가 상승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똑바로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죄들을 가지고도 심판을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를 삼으시는 것은 그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인간을 환경의 자극이 없는 곳에서 평화롭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결국은 뭐가 죄성이 솟아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만약에 환경의 문제만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부유하고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도덕적 이여야 하는데, 그러나 범죄가 더 지능적이고 더 야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속에 있는 죄성입니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는데,
(예화) 고양이하고 쥐하고를 새끼 적부터 낳자마자 같이 넣어서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는데, 크고 난 다음에 결국은 그 고양이가 그 쥐를 잡아먹었을까요? 안 잡아먹었을까요? 잡아먹었습니다. 왜 천적이었습니다. 성품 속에 본질적으로 그 쥐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성품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그런 속성이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뺄 수 있을까요? 아무도 뺄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억제를 하면, 물론 밖으로는 들어나지 않습니다. 형법은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을 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그 죄의 뿌리입니다. 무엇으로도 빠지지 않습니다. 뽑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갖다놓아도 그것이 자연 소멸되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역사합니다. 개인가운데에, 모임가운데에, 나락가운데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죄가 법처럼 역사하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이야기 입니까? 법이 무엇입니까? 법은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법이 눈에 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법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보이냐고 하면, 그 법이 다스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참 속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살 때에는 안양학교까지 오는데, 학교 대신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데, 3시간 반이 걸려도 도착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갈 때에는 지금 생각하면 생명을 걸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수인선 산업도로를 달리는데, 길이 험악합니다. 험악하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길은 잘 닦아났는데, 4차선인데 10톤,15톤,20톤, 30톤 되는 차들이 보통 100KM 이상 놓고 달리는데, 차선도 없이 그냥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거기에서 사고 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사고났다하면 그 사고는 대형사고입니다. 차가 승용차는 1차선으로 가게 되어 있고, 그것은 느린 차들이 그 짐차들은 2차선으로 가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지키면서 가면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춤을 추면서 달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밤 같은 경우에는 저쪽에서 라이트 같은 것이 비치면, 비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낮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몰고 가는데, 갑자기 신속하게 앞에 가던 큰 트럭들이 일제히 비켜주는 것입니다. 야, 이거 뭐 사람을 알아보나, 그러고 달렸는데, 차가 그 차만 그러나 했는데, 앞의 갈수록 다 길을 비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내차를 선두로 해서, 뒤차로 콩코드, 쏘나타, 르망, 티코 끝없이 쭉 달리는 것입니다. 야, 이것 웬일인가 그런데 저 앞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쪽 줄에는 짐차가 빼곡히 서가지고, 그냥 꽁무니에 꽁무니를 물고, 그러고, 말하자면 걸음마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이상하다, 달렸더니, 언덕 뒤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교통경찰이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파란 옷을 입은 딱 한사람이 이쪽에 스티커를 들고, 그리고, 이제 속도기하고 이 스티커하고 들고 그리고 지켜 서있는 것입니다. 가다가 보니까, 저쪽에서 오면서 깜박깜박 해주는 것입니다. 일제히 좍 비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뭐가 그 길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까? 법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법입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경찰이 보여요 안보여요. 안보여요? 지금 누가 와서 공갈친 것도 아닌데, 일제히 비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 톤이 되어 가지고 빵빵거려도 소용없고, 앞에서 사람이 손을 흔들어도 소용없이 달리던 차가, 경찰이 권총, 총알도 안 나가는 권총, 속도 재는 권총, 이렇게 들이대고 있으면, 차가 양순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열이 쭉 하고 거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 길로 살짝만 들어서 달리면, 2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이쪽으로 가면, 이 법을 지키면 2시간을 가야되는데, 그래도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 법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법이 인간을 그렇게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수많은 자동차 대열과 같은 우리의 인생의 항로, 또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몰고 사망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수없이 진노의 심판가운데에 불붙는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여전히 그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의 법이 지배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까? 그렇게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몇 푼 번 돈 때문에 즐거워하고 새로 산 차 때문에 좋아하고, 새로 산 집 때문에 기뻐하면서 그렇게 줄줄이 죄의 족쇄에 채워서, 사망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니다. 여러분 영화 같은 데에서 보셨죠? 킬링필드에서 다리에 다 족쇄를 채우고, 그리고 수백 명을 전부 다 줄을 세워서, 말하자면 옷도 다 벗긴 채 그 진흙탕 그 구덩이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셨죠? 도망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습니다. 족쇄가 채워져 있습니다. 벗어 버리고 싶어도 벗어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길로 가선 안 된다는 사실을 가끔은 생각할지라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웃으며 살고, 어떤 사람은 또 그 족쇄를 차고, 오늘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코미디를 보면서 낄낄 거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족쇄를 차고 살아가다가 상여금을 한 번 더 줬다고 길길이 뛰면서 좋아하고 해외여행가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환경도 그들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복음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간 뒤, 인생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은 모습이 그의 죄의 법아래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액면 그대로 믿으셔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향해서, 성경은 정직하게 말하기를 그들을 위해서 치열하게 타오르는 지옥불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던지 말든지, 과학이라는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인정하던지 말든지, 그것은 인간들 마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고, 그 죽음 그 너머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 그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불길 속에 그 영혼들이 그 죄의 법아래 살고, 그 법을 따라 살아가던, 그 도열한 수많은 죄인들이 그 죄의 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결코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튀어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튀어나오면 즉시 걸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쭉 나가다가 트럭하나가 튀어나와봐요? 그러면 경찰의 밥입니다. 경찰은 오히려 그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수를 올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서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바로 첫 번째 심판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자는 장례 집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망이 깃들여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을 느끼며 애통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도다’ 이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망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사람들은 죽은 뒤에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죄의 법아래 에서 살아가다가, 죽은 사람들은 위한 마지막 결국은 죽음이고, 그 죽음 너머에는 사망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어서, 치열하게 타오르는 지옥의 풀무불 속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이 이야기를 농담처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 지옥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오늘 이이야기를 농담처럼 들었던 것들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후회에는 마음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믿던지 믿지 않던지 그것하고는 상관없이 엄연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부인할 수 없는 두 번째 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의 불 가운데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이 자유주의화 되어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옥이 없다면, 천국도 없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거짓말이라면, 그의 인격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의지하고, 그를 증거하시는 성령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려주는 롯의 경고를 농담처럼 여겼던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왜 언제나 신앙이 없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 각성을 주시고, 그리고, 진정한 변화를 주실 때에 그때에 사람들은 지옥의 실체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죽음의 공포를 중학교 3학년 때에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에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잠들 수 없었습니다. 너무 너무 무서웠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끔찍했습니다. 집에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한 10미터 정도 걸어갔어야 되는데, 어두운 밤길에 거기를 걸어가면서, 내가 오늘밤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지배했습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나이가 먹으면, 그 죽음에 대한 무감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서움이 사라지고, 죽음을 기정사실로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믿음이나 지혜가 아니라, 말하자면, 죄로 말미암은 극단적인 무감각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죽은 뒤의 사후의 세계를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복음을 믿고 안 믿은 결과는 죽은 후에나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사도가 오늘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자신이 구원의 위대한 능력,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경력과 혈통과 그리고, 지위와 인생의 목표들을 자랑했고, 그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그렇게 자기의 목표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다메섹에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사울에게 보여주자, 그는 바울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구원의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게되었다기 보다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오늘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오시는 그 순간에 이제껏 까지 살았던 삶이, 열심히 살았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사실은 그것인 생명이 없는 삶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었습니다.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죽음을 앞에 놓고 히틀러는 하루 전에 에바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함께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결혼식을 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일 죽을 사람이 오늘 결혼식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혼여행을 갈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지하 벙커 밑에서 그렇게 초조하게 패전을 순간을 기다리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확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차피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6개월 후에 죽는 것만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1년 후에 죽는 것 시한부 인생입니다. 10년 후에 죽는 것을 시한부 인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 2년, 1년, 6개월 두 달 확실한 병원의 사형선고가 내렸을 때에 우리는 시한부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6개월 시한부 인생이든, 20년 시한부 인생이든 15년 시한부 인생이든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차피 그 앞에는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이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심판의 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후 끔찍한 죄로 말미암는 형벌에 떨어지게 되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발을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그렇게 닥쳐오는 인간의 운명의 심판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랑하고 취하고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오늘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그를 믿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마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전에 보던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즉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보이던 인생의 목표들은 완전히 가치 없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쓰레기가 된 것이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되었고, 똥과 같이 되었고, 오줌과 같이 되었습니다. 더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인생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우주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며 몸부림쳐도 도달할 수 없던 하나님의 영광,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칭찬이 예수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나는 아무런 공로도 없고 나는 아무것도 의로운 것이 없는 그때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노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을 때 하나님의 칭찬이 그에게 미쳤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할 때에 ‘아도레이션 거리’ 이것은 칭찬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칭찬에 이룰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몸부림쳐도 주님이 칭찬할 만한 삶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은 주께서 칭찬하는 자에게만 베푸시는 것입니다. 수도를 하고 도덕적으로 살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써도, 수많은 법아래 자기를 복종시키려고 노력을 하고, 그리고, 금식과 철야와 몸부림 속에 구제하며,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아무런 공로가 없던 그때에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노라, 아멘, 주여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못 박힌 그리스도예수를 믿나이다”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그가 한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공로가 있습니까? 아이고 믿은 공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공로가 아닙니다.
예화) 여기에 50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전도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손을 내미세요. 진짜 주는 것은 아닙니다. 5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만약에 왜 김승기전도사님이 50만원을 받게 되었냐고 물을 때에 그가 손을 내민 공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정신병자입니다. 오직 누구를 봐야 됩니까? 예, 비록 장난이지만, 아낌없이 50만원을 손에 쥐어준 그 김남준 강도사를 봐야지, 어떻게 해서 받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전도사님이 손을 뻗었기 때문에 이 한번 손을 뻗는 데에 칼로리가 몇 칼로리가 드는데, 구원은 똑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은 것은 조금도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소망이 없이 그렇게 지배를 받으며, 살다가 인생의 한을 머금고, 그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가운데에서 영원히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아멘”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종교지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는 종교지도자가 꿈이었는데 그 종교지도자가 되는 것이 이전에는 꿈이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오셔서 그것을 바라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선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그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이제는 이전에 사랑하던 그것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아 내가 저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안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