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보내심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중기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삼중의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본문 바로 뒤에는 마태복음 10장이 등장하고, 그 첫머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파송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당신의 품에서 양육 받던 제자들이 이제는 당신의 대리자로서 당신이 하셨던 삼중의 사역을 계승하며 세상으로 파송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II. 제자들을 보내신 마음
A. 무리를 보심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삼중 사역을 계승하도록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실까요?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가 왜 세상으로 파송되었고,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제일 먼저 무리를 보셨습니다.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이돈’이라는 현재 분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분사의 원형인 ‘오라오’는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특히 ‘어떤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통찰하는 바라봄’, 이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많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에 외관상으로는 그냥 대부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의 대부분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오거나 혹은 병이 나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의료의 도움이나 혹은 물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적인 통찰로 그들을 바라보실 때에 단순히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시하실 때에 그들의 마음을 보셨을 때에 그 영적인 상태는 훨씬 더 심각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고 또 인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에 있어서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확한 영적인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또 인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고 그들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인지를 헤아려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을 때 그냥 병들고 가난한 자들로 보였으면 그냥 기적을 일으키시고 먹을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시면 해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헤아릴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B. 불쌍히 여기심
두 번째는 불쌍히 여기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즉, 영적인 통찰로 백성들을 직시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불쌍하다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에스크프랑크니스떼’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직역을 하자면 이 단어는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어떤 움직임이 창자에까지 도달하게 되다 이런 뜻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결국 우리말로 등가번역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하셨으니”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단어인데 ‘고생하며’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에스퀴엘노이’는 단어인데 ‘스퀼로’라는 동사에서 온 완료 수동태의 분사입니다. ‘수퀼로’라는 단어는 ‘괴롭히다, 고문하다, 혹은 고생하게 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수동태이니까 ‘고통을 당하며’ 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나오는 ‘기진하며’는 원래 ‘에리메노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역시 수동태의 분사 남성 복수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의 원형은 ‘립토’인데 ‘내팽겨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번역을 하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그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내동댕이쳐진 상태였기 때문이다.”라는 번역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이 ‘기진하며’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이들은 그렇게 무엇인가에 의하여 큰 고통을 끊임없이 당하고 또 누군가에 의해서 내동댕이쳐져서 버림받은 것처럼 되어버렸을까요? 그 당시에는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가면 유대인은 그 회당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좀 과장을 하자면 시내에 다방수보다 더 많은 것이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당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디 가든지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이 있었는데 왜 이들은 이렇게 오늘 묘사하기를 목자 없는 양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정리를 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고생하며 버려져 있기 때문이었고, 그 이유는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 오시기 이미 오래 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탄식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에스겔서 3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그림처럼 그려냄으로써 당시 목축 문화에 익숙했던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온 목자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목자가 어떤 목자여야 할지는 이미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목자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세상으로 나누지만 예수님은 교회 안에만 당신의 양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무리들조차 당신의 양떼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진정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당신의 삼중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이스라엘을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을 양, 혹은 양떼라고 부르셨을까요?
아프리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짐승은 임팔라라는 짐승입니다. 크기가 큰 개보다는 좀 크고 그리고 큰 염소나 사슴보다는 작은 그저 몸무게가 20kg에서 한 40kg 정도 나갈 크기의 몸집에 그저 몸의 길이가 1m 남짓 될까 그것보다 좀 더 큰 것도 있을까 하는 짐승입니다. 얼마나 깔끔한지 비가 와도 몸에 빗방울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자태를 하고 있는 정갈한 짐승입니다. 물론 초식동물입니다. 사자에게는 이 짐승이 아주 좋은 먹잇감입니다. 사자가 달려갑니다. 도망을 가다가 도저히 사자의 추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 임팔라는 고개를 돌려 사자와 충돌을 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뿔은 사자의 겨드랑이로 들어가서 등 뒤쪽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두 달 후 사자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짐승에게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본 유튜브 동영상에는 들소를 사냥하러 갔던 사자가 들소의 뿔에 받혀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는 동영상이 올라와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동물의 왕이라고 부르는 사자와 호랑이도 생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먹잇감이 각기 자기를 보호할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은 자신을 보호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나 빨리 달릴 수 있는 발, 그리고 뛰어난 귀나 혹은 인간의 250배의 후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개와 같은 그런 후각도 없고, 어둠 속에서 먼 곳을 궤뚫어 볼 수 있는 특이한 눈도 없습니다. 걸음은 느리고 그리고 먼 거리의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근시안입니다. 뿔이 있지만 우리가 생각해도 왜 그 뿔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만두처럼 생긴 게 두 개 있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야생에 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생의 양이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의 동물입니다. 산 아래서 포식자들을 피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올라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안전하기는 하지만 먹을 것이 없습니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많은 양들이 벼랑에서 추락사를 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양에 비유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양은 처음부터 그렇게 독립해서 살지 아니하고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도움과 돌봄을 받으며 살도록 창조된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타락한 후에 무서운 약육강식의 갈등이 자연계 속에 침투한 후에는 양은 더더욱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 의도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새벽에 잠을 깨어서 밖에 나오니까 우리 코코가 밖에 기다렸다가 달려와서 막 꼬리를 치며 안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쩍 안아서 가슴에 품었더니 얘가 밤새 마루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는지 평소 같았으면 막 까불 텐데 내 겨드랑이 속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을 가만히 있습니다. 주인의 품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요새 강아지를, 개를 어떻게 잡아서 보신탕 만드시는지 아십니까? 예전에는 목메어 죽었는데 지금은 전기로 지져버립니다. 그래서 순간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토치로 그을려서 세탁기 같은데 돌려버리면 털이 깨끗이 빠지고 안 빠진 것은 한 번 더 토치로 구운 다음에 도끼로 내리쳐서 1kg에 4000원씩 팔리는 것입니다. 얘를 안고 있을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본 성남 모란 시장의 그 개와 비교가 됩니다. 그 철창에 갇혀서 동료들의 죽음소리와 피 냄새를 맡으면서 공포에 쩔어 있는 개와 주인의 품에서 밤새 외로웠다고 안겨있는 개 사이의 운명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요? 그래서 내가 코코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선택의 행복에 대해서 아는바가 있니?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제 나이 서른아홉이었던 해,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때였습니다. 온 가족이 잠자리에 들었고 나도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기도가 점점 깊어지니까 앉아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침대 머리에 내려와서 엎드려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마태복음 9장 35절과 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한 적은 단 하루도 없지만 그날 유난히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마치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내 몸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하고 싶은 기도를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얼마를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에 나는 기도하는 제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게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개척교회를 위한 기도가 내 속에서 간절히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신학교에서 교수로서 보람을 느끼며 사역을 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28살이 되던 해 어느 날 하나님은 나에게 분명한 소명을 주셨는데 너는 신학교에 가서 선생이 되어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종이 되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부르심에 따라서 헌신해 왔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잠깐 쉬고 아침이 되었을 때 저는 사뭇 나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뭐지? 무슨 일이 내게 간밤에 일어난 거지? 아마 들뜬 열정에 내가 좀 오버한 것이 아닐까? 그날 밤 다시 기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잠든 시간을 기다려 거의 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보다 더 통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보내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오랜 동안 눈물로 기도했고 동일한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개척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내게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예전에는 그런 가능성과 생각에 대해서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 기도가 당황스럽지 않았을 텐데 처음이었습니다. 다시 좀 쉬고 그 다음날을 맞이하였는데 또 아침에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시간은 앞의 두 날보다 짧았지만 그 마음은 똑같이 열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쓰시겠다고 부른다면 ‘주여, 내가 여기있나이다. 아멘’ 저는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하고 막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가 한 번도 목회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더욱이 개척교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주 후에 교회를 할 수 있는 자리를 기도하며 찾았습니다. 언제 사람이 살고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거의 폐가 수준의 지하실 공간이었고, 곰팡이로 꽉 차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자리에서 예전에 두 번 교회가 세워졌고, 모두 안 되서 문을 닫고 떠나간 자리였습니다. 거기에서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열린 교회는 시작되었고, 그날이 1993년 12월 12일, 공교롭게 저의 38회 생일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때에 주신 마음은 바로 이 마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통을 당하고 내팽개쳐져 버림 받았음이러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언제나 은혜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끄러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이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고생하며 방황하는 양떼를 건져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신 것처럼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처럼 생각됐고, 영혼을 위해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고통을 받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꾸밈없는 헌신과 그리고 순결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제껏 지탱해 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양떼로 표현하신 이유는 이렇게 우리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한때 전국을 휩쓸었던 사랑받는 가스펠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의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이 사랑을 사람에게 대입하면 인생은 실망의 연속입니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좋아하던 한국 배우 중 한 사람이 이은주 씨였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였습니다.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갖지만 그 노래처럼 그렇게 우리가 사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원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썼든지 간에 이것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맞습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깊은 산속을 차로 달리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산 너머에 지금도 보이지만 이름 없는 풀꽃들이 수없이 피고 질 텐데 저것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 있는 것들은 여행객이라도 보면서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럴 때 섬광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도 그 꽃이 충분히 아름다울 가치가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아보려는 데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으니 자신의 가는 길을 보여줄 사람이 없고, 그 진리를 알아도 그렇게 살 힘이 없으니 행복해질 수가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벤담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열심히 외웠던 한 마디 널리 알려진 말을 남깁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소위 철학사적으로 ‘공리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것이 선이다.”라고 말입니다.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스승을 비판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짐으로써 우리의 사고의 지평을 열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그 역시 공리주의자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이 한 마디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나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되고 싶다.” 스승이 양적인 공리주의를 주장했다면 이 사람은 질적인 공리주의를 추구한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과학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0년쯤 전에 어느 책을 읽어보니까 그 당시 중산층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17세기에 거의 왕족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떨까요? 그것을 이미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점점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이 일이 힘겹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휴머니즘은 인간주의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인문주의라고 말합니다. 모든 가치와 사고, 판단의 기준이 사람이 된다는 뜻에서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전까지는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설명이 달랐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이라고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제는 기계와 인간의 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에 나왔던 육백 만 불의 사나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로보캅을 거쳐서 이제는 공각기동대에 메이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뇌에까지 무엇인가 기술이 들어와서 인간을 바꾸는데 거기에는 이미 인간과 기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이런 것 사이에 겹겹들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다시 대두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뇌에 어느 특정 부분을 빼내서 고통스러워하고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그 모든 나쁜 기억을 모두 제거하고 그 대신 생각하면 기분 좋고 유쾌한 기억들을 집어넣었을 때 내가 살아온 이력이라고 믿는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사실은 아주 작은 크기의 컴퓨터 칩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그때 나는 누구일까? 인간이라고 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확정해야 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을 19세기 18세기에 이야기하던 그 인간을 규정할 필요가 없고 사이보그와 합쳐져서 혹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심성과 기능을 갖고 있는 로봇이 발견되면 그것도 휴먼이라고 보아야 되지 않나, 그러면 이제 휴머니즘에 의해서 짜여진 판도는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되지 않겠는가? 과연 인간만이 존엄할까? 인간처럼 거의 유사하게 사유할 수 있는 로봇에게도 존엄권을 인정해야 될 것인가? 로봇과 인간 사이에도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봐야하지 않는가? 이런 수많은 철학적이고 인간학적인 질문들이 남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고 과학 기술의 힘을 빌어 인간 개조에 나서서 인간이 스스로 진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내가 만약에 공부를 못한다면 뚜껑을 열고 거기에다가 천명이 일생을 공부해도 다 못할 정도의 지식의 양을 넣어서 아는 것이 없다는 너의 결점을 극복해라 그리고 내가 만약에 사람과 사귈 수 있는 사교의 기술이 모자란다면 적합하게 개발한 프로그램을 끼워 넣어서 그래서 사교성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 주체가 하도 많이 바꿔서 네가 될지, 저 기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겠는가? 중요한 것은 기계든, 인간이든 그 행복을 얼마나 느끼는가가 아니겠느냐? 이런 논리로 개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잘못된 본성과 눈물로 투쟁하며 싸우고 자기를 꺾고 끊임없이 그 교육을 받고, 그래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성의 삶을 살고 하는 것은 트랙터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호미로 파는 것 같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그렇게 해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원래 행복이라는 그 자체가 완전히 객관적인 단어도, 완전히 주관적인 단어도 아닙니다. 그래서 근원이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그 객관성을 이미 그 안에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행복하다고 느껴야지만 행복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어떠한 가책도 받지 않아서 기분이 최고조로 좋은 사람의 그 상태를 우리는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런 행위가 사회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이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옳은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고 빨리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 사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이 모두 함께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데 그 객관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제가 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그리고 놀라운 진보를 이루어도 인간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깊은 소외를 경험하고 그리고 인간은 결국은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 시대에는 자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굶주리고 그리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예수님이 영적인 통찰로 보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셨던 것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었다면 오늘날 현대인을 보면서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리고 현대인들을 바라보신다면 아마 이때보다도 훨씬 더 치열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시기까지 마음이 아프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생명은 연장했지만 물질적인 부요는 누리지만, 기계의 발전에 의해서 이제는 인간의 자기의 정체성까지 양보해야 될 정도의 시기에 이르러서까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격벽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사람이 행복을 찾아보지만 그러나 그들의 목자 잃은 것과 같은 영혼의 상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달된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열매들을 우리도 함께 어느 정도 누리며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모든 물질적인 풍요와 폭발적인 기술의 발전이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고통을 당하고 내팽개쳐진 것과 같은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셨던 이 마음은 오늘 우리에게 필히 전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리를 보며 가슴 아파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그런 영혼의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구원의 혜택을 그들에게 베풀어 주는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마음은 목회자와 신자의 부르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옳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렇게 고통 하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너무 자신의 영혼을 압도한 나머지 도저히 다른 생업에는 죽어도 종사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의 소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소명은 평신도의 소명과 동일한 종류의 소명인데 깊이가 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신자들은 한 마음이 되어서 영혼을 향해 녹는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기진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자의 모든 삶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찢어지는 것 같은 이 마음의 전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이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마음을 회복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처음 구원 받았을 때에 받았던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일꾼을 부르심
마지막으로 일꾼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옵소서 하라 하시니라” 결국은 하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당신이 직접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통해서 특히 당신의 사랑을 안 사람들의 사무치는 그 가슴 찢어지는 마음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이니 너희는 주인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곧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추수가 어떠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추수는 적기에 빨리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곡식에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날이 화창하게 밝은 날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뛰어들어 벼를 벱니다. 그리고 탈곡을 하고 그리고 말려서 재빨리 창고에 거둬들여야 손실이 없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인데 지금 빨리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다 떨어져 망가질 텐데, 그렇게 희어진 밭을 보며 예수께서 탄식하고 계신 장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초기 총신에서 구약학 교수를 하셨고 후에 대신 대학교를 설립하신 김치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 교회가 낳은 훌륭한 목사님들 중 한분이었습니다. 채플 시간마다 늘 눈물로 설교하셨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 분을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설교를 하든지 그의 설교를 들은 모든 선배들은 증언합니다. 항상 결론은 한 가지, 너희는 이만 팔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당시 행정구역상의 동네가 이만 팔천 개였기 때문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기를 마치 물이 없어서 빈들을 헤매다가 죽어갈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목사님은 우물을 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거기에 교회를 세워 생수와 같은 말씀으로 그렇게 진리가 없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마음을 품은 당신의 일꾼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아주 많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섬김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불쌍하거나 우리 하나님이 불쌍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때 그 속에서 피폐해져 가는 그 본인의 영혼이 가엾습니다. 그에게 무슨 좋은 날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이미 우리의 마음의 판이 바뀌었습니다. 세상 자랑, 세상의 영광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보아도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은 도시에 가서 제일 먼저 맛 집을 찾을 것이고, 역사에 관심 있는 자는 유적지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가지고 그 도시를 바라보면 신음하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곳에 우물을 파고 예수께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셨던 그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긴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텐데, 하나님이 그 일을 정말 기뻐하실 텐데 가야할 곳에는 사람이 없고 없어도 될 곳에는 사람들이 피터지게 모여서 경쟁합니다.
(찬양)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나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생에 의미 있는 일을 못 찾은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선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가 외국에 나가도 돈 버는 게 아니고, 학교 선생님이 되도 봉투 받는 게 아니고, 그리고 온전히 영혼을 위해서 내게 주신 재능, 명예, 그리고 지위, 권력, 모든 것을 사용해서 이렇게 예수님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아파하셨던 그런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으로 복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동자에 불을 켜고 그리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두 눈에 빛나게 하십시오. 방황을 끝내고 어리석은 모든 탐심을 묻어버리고, 두 눈이 별빛처럼 빛나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불꽃처럼 산화해야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 “내 인생이 행복했사옵나이다. 아멘. 주 예수여 나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온 세계가 여러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 않는 곳곳에서 지금도 주님은 이렇게 찢어지는 마음으로 통곡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나누어 갖지 못하고 그래서 거기에 못 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한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무엇을 한들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누릴까요? 손은 가져도 끝이 없고 눈은 보아도 차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무위도식했던 삶을 혐오하십시오. 그리고 이전에 그러한 모든 태만한 자화상들을, 옛 사람을 불살라 화형 시키십시오. 그리고 잠깐 이슬처럼 있다가 살아가는 날 동안 참 영원한 가치라고 믿는 것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모두 쏟아 붓고 살아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