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녹취자: 백지영
지난 한 주간 동안 주일 오후에 무슨 시리즈를 할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결심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후에는 이 사도행전 21장의 말씀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로마서 1장의 가장 영광스러운 본문가운데 하나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말 다수에 의해서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왔습니다.
가끔 시장에 가보면 여러분들은 의외로 값이 싼 닭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다들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저 가난하던 시절에 시장에 나가면, 고기를 먹고 싶은데 소고기는 너무 비싸고 돼지고기도 사 먹을 형편이 못되는데 그런데 꽤 큰 닭이 살아 있는 닭이 아니라 죽어서 털을 다 벗겼는데 1500원밖에 안 하는 것입니다. 돼지고기 한 근 값도 안합니다. 그때도 돼지고기 한 근에 1800원씩 했는데 큰 닭이 1500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 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잘라가지고 양념을 해서 프라이팬에 볶았습니다. 침을 삼키면서 펼쳐 놓고 혼자 먹는데, 이것이 절약형 고기인 것입니다. 절약형고기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귀가 아프도록 씹어도 씹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닭치고는 참 희한하다 닭이 얼마나 운동을 했기에 근육이 이렇게 튼튼할까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닭이 정상적인 닭이 아니라 양계장에서 나오는 폐계(廢鷄)였습니다. 그러니까 알을 낳을 때는 닭이 닭으로써 쓸모가 있었는데 알을 못 낳게 되니까 사료만 들어가고 그래서 다 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갔다가 싸게 떨이로 팔아버리는 그런 닭입니다. 요즘들은 아마 그런 닭들 아무도 안 먹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래도 한 번 더 사다가 닭곰탕을 해먹어보았는데 닭곰탕을 하려면 실같이 고기를 찢어야 하는데 찢기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찢어가지고 씹어봤는데 찔깃찔깃한 것이 뭐 같나 하면 옛날에 다이아 잘라서 만든 고무줄 같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폐계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료만 축낸다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폐계와 같이 알도 못 낳는 그러한 닭들이 가득한 것이 교회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커지지 않고 그리고 영혼들이 구원되는 은혜로운 복음 전파의 역사가 멎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의 위대한 역사는 정말 소수의 그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으로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남겨 주셨던 그 가장 큰 교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과 같은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만 최대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최대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최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명령 가운데 가장 커다란 명령이 너희는 만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명령이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큰 명령이 없다는 의미에서 지상(至上)명령입니다.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복음 전파에 대한 다급한 부담감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이런 복음 전파의 부담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헌신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 전파에 대한 부채의식들이 없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바로 사도 바울, 지난 수요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그 사도의 마지막 선교 장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가고 싶었던 것은 성지순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말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 행동예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바울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풀러가지고 그것으로 자기 손을 묶으면서 말하기를, 내게 성령이 이르시기를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되리라 하였는데, 체포되어서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모든 교우들이 힘을 합해서 바울을 말렸습니다. “절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그랬더니 사도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양떼들이 울면서 이 바울에게 가지마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간청한 모양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기다리는 것이 죽음의 위협, 핍박 그것 밖에 없는데 가지 말라고 모든 사람이 말렸습니다.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령이 그곳에서 나를 유대인들로 인하여 체포되게 하시고 심문을 받게 하시고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말씀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이 거기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사도는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환란과 결박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거기서 환란과 핍박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성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사도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20장에서 언급한 동일한 마음과 함께,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동일한 고백을 여기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는다고 네가 예언을 했는데,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나는 각오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환란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증거하는 명백한 성령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 예루살렘으로 가야되겠다고 사도바울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순교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오랫동안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예루살렘에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야 할 부담을 사도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부운 바 되어서 거기로부터 오늘날의 교회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복음이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된 그곳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방언과 예언을 하는 능력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편견에 가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예루살렘의 본토박이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구원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도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게 만들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핍박이 기다려서 거기서 예수를 위해서 죽어야 되겠다고 하는 이것이 목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로 하여금 거기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는 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부담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영혼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구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과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적인 도시인 이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가 누구시고 구원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증거하고 전함으로 그 영혼들, 자기 혈육 중 몇을 예수 믿게 만들기 위해서 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그리고 자기가 믿고 있는 이 신앙, 이렇게 믿는 것이 과연 참다운 복음에 입각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교회 나와서 교적부에 등록이 되고 인사를 하고 집사로 승진을 하고 이러는 것들이 곧 구원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안에서 참답게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의 넓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혜에 붙잡힌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들어 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설교로,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물건을 팔면서 손님들을 만나며,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배달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친척과 만나면서, 방법은 다양하고 행할 수 있는 실천의 길은 무한하게 많지만, 어쨌든 그가 어디에 살아가든지 의식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의 마음을 지금 움직이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이었습니다.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도시,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 구속의 놀라운 역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으시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들을 다른 도시보다 먼저 보았던 그 예루살렘, 그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종교적이었고 신앙의 껍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영혼들에 대한 뼈저린 부담이 오늘 사도로 하여금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힌 사람들로 변하기 전에는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슴 아프도록 만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특히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에서 부르실 때에 바울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 영혼들, 이방에 있는 영혼들, 그가 예루살렘에 있든지 이방에 있든지 바울은 그런 게 문제가 안 됐습니다.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타락한 죄인으로 창기와 같이 세리와 같이 살아가든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든지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 하늘로부터 좇아 내려와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경문을 차고 율법을 읽고 율법을 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인생의 모두이고 소명인 것처럼 다른 모든 세상의 일을 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바울은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살았지만 나중에 깨닫고 본 것은 그 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는 의가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경건치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불신앙의 사람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바울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성령이 말리셔도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놀랍게 무장되어야 할 필요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무장되기 위해서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홉 주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묻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권능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 가운데 사랑을 주셔서 모든 성도들이 교회 나올 적마다 놀라운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 지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는 성령의 권능이 필요 없습니다. 육신을 위해서 사는 일에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게 하는 데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 자신 속에 부패한 죄성을 의지하고 살면 그는 얼마든지 타락하고 육신을 위한 삶을 살고 정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생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고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필요합니까? 왜 신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직업도 포기하고 집안으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 성경책을 끼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밤늦도록 공부하고 기도하고 리포트를 쓰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또 그렇게 공부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공부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만드셨습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어주시지 않는 놀라운 기도의 응답들을 들어주셔서 하나님이야말로 살아 계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살아계셔서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1년이면 150번 이상의 설교를 열린교회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우리는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았고 그리고 들었고 배웠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가끔은 거저 나누어주는 테이프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 열린 하늘도 우리는 네 번이나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푸시지 않은 그런 은혜로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 마음에 알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 복음 전파에 기여하지 않으면 참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저께 우리학교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생들보고 대답해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가장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더니 전부 다 하는 말이 ‘우리요.’, 신학생들입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복음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고 예수의 넓은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의 넓은 사랑을 가슴에 안고 전하는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아주 경건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주의 사상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통쾌하게 메시지를 전했던 분입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아주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학교에서 2 ,3년을 다니고 나서 그가 방학 때 휴가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답니다. 이제 가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향에 돌아갔는데 고향에서 모두 그를 축복하고 반겼습니다. 왜냐하면 이 형제가 바로 옛날에 우리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이제는 복음 전도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신학교에 간 그 형제가 3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그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형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여러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다 최근에 자기가 예수를 만난 은혜의 체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신학생이 점잖게 팔짱을 끼고 얘기했습니다. “형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분히 경건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자매가 이야기한 것은 정통주의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고, 자매가 오늘 그 성경을 보면서 깨달았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옛날에 오시안더라는 신학자도 이미 말한 바가 있는데, 형제가 깨달은바 성경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라고 말하지.” 졸지에 성경공부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골교회에서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하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람들은 압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형제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으니 형제가 이제 이 자리에 앉아서 성경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앉고 나니까 그는 거만하게 마치 선사하듯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은 신학적으로 어떻고 이것은 무슨 적으로 어떻고 이것은 요즘 어떻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옛날에도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옛날에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이 청년이 그 시골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공부 해 나갈 때 그는 남보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그 무슨 적(的), 무슨 적(的)은 몰라도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체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진리가 있고 감격이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고 나서 그는 사람들이 성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붙잡게 되고 성경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개념을 포착하는 대신에 성경이 자기에게 전해주는 생생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들을, 말하자면 체험적으로 아는 이런 영(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에 관해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속에 깨달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절박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허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잘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무디어졌네.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의심이 없습니다. 편견이 적습니다. 잘 받아들입니다. 잘 감격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또 잘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랑입니다. 누가 요만한 것 선물해 주면 돌아다니면서 이거 누가 사줬다고 막 자랑하는 것입니다. 장난감이 다 망가져서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직전이 됐는데도 그것 쳐들면서 할아버지가 사줬다고 잊어먹지 않고 자랑합니다. 이런 순수 함들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교회를 맡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의 다급함, 복음전파의 다급함에 불타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신학을 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나가서 무엇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 불이 뜨거워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해서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기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제외해 놓으면 교회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속에 이제는 복음을 전하고 죄인을 깨닫게 하고 그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렇게 깨닫게 하는 요소들이 점점 사라지고 모인 사람들이 즐기는 요소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니다.
사도를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선생님(혹은 아버지), 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우리의 목회자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거기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너희들을 향한 그 사랑도 가로막을 수 없는 사명이 나에게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예루살렘에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을 위해서 나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어나고 있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교회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입니다. 옛날만 해도 우리나라 교회에는 사찰이 없었습니다. 사찰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이 오면 누구나 청소합니다. 그리고 끝나고 돌아가면 누구나 청소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쉬지 않았습니다. 사찰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찰이라는 제도가 생기고 나서 이제 사람들은 떨어진 휴지하나 거의 줍지 않습니다. 옛날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막 더럽혀져 있어서 형제자매들에게 너희가 청소 좀 하라고 했습니다. 막 청소하는데 어느 어른이, “내버려두어라. 저녁 때 사찰이 다 치운다.” 이런 편의주의가 이제는 교회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고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뜨거운 여름에 자기 몸으로 뛰어다니면서 축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레슬링을 하고 씨름을 하는 것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보고만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람자적인 심리가 교회에도 들어오게 되어서 이제 헌신적인 사람들, 복음 전파할 수 있도록 훈련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돈을 내는 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말하자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자기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극히 타락한 교회의 형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 사도들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폭탄이 터지면 그리고 나서 수많은 특공대들이 그 도시를 휩쓸고 다니면서 각계전투를 하면서 하나씩 처치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메어왔습니다. 누구들이었습니까? 수다히 복음 전하는, 사도행전이 그 이름을 기록하기도 잊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속에 있었던 열망은 이름을 내고 그리고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 그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 이것들이 바로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정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정말 그 영혼에 대한 복음전파의 뜨거운 사명이 그 마음을 한번 휘젓고 지나가야지만 영혼을 움직이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들이 가슴에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소쩍새가 우는 고통의 밤이 없이 국화꽃은 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모두 큰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이러한 경영가적인 야망만 가득 차 있지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그리고 그 영혼에 얽매인 사슬들을 풀어주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려고 하는 복음전파에 대한 사무치는 열정들이 멎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러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또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 놀라운 구원을 깊이 느끼고 이 구원의 복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도는 그 복음을 전하면서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으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습니까가? 우선은 그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말하자면 사명입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것은 사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자기의 편견과 자기의 모든 잘못알고 있었던 구약의 모든 지식들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심으로 바울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 만드셨던 것이 아니라, 은혜를 그에게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죄인 중의 괴수요 그리고 포악자요 핍박자였던 사람을 사도로 만드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로만 다가오지 않고 그 은혜는 사명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난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 내가 네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난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를 유대인들에게 구원하여 내가 너를 이스라엘 사람과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너를 보낼 텐데 거기서 네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 일들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로 보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도 하지 않던 그 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사울과 만나주신 이 놀라운 것이 단순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주실 때 그에게는 구원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 바울을 거기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서부터 마음속에 불이 있었습니다. 무슨 불입니까?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는 불이었습니다. 간절한 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구령의 불길은 놀랍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구령의 불길을 주시는데 이 불은 아주 정결한 환경에서 타오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정결한 환경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공기가 연기로 가득차고 습기가 가득 찬 곳에서는 불이 자꾸 꺼집니다. 그러나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곳에서는 불이 잘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구령의 불길, 가슴 속에 있는 이 불길은 사도로 하여금 순수한 삶을 살게 했고 그리고 사심이 없으니까 이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한두 번쯤 사영리를 전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도 또 이상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그 불길을 거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그 영혼을... (중간에 끊김 46:00)
우리가 무슨 결론을 하나 얻게 되느냐 하면, 가슴 속에 영혼을 향한 그 구령의 뜨거운 갈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혼탁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만났고 그리고 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서바나도 마다하지 않고 그리고 로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고 그 넘치는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같이 절망하고 낙담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절망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위로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한 사명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밋밋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다고 하는데. 뭐가 위기입니까? 사업에서 위기를 만나고 자기 잘못해서 시련을 당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상 받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망과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마음속에 타오르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그런 갈망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이 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확실히 느껴보고 싶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복음전파의 삶을 살 때,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우리가 아닙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것들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만천하를 다니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삶,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 이 모든 일들이 복음 전파 현장에 우리를 둘 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가 왜 이 놀라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 거기 이외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유대교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우상과 버러지와 금수의 형상과 썩어질 것들에게 바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르고 죽어가는 그 사실을 사도는 깊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커다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사도는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예수의 넓은 사랑을 안고 그는 믿음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은혜의 체험에서 자라갔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거치는 방해돌이 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이 아니라 예수를 알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형식적인 신자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는 발견하고 개달았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동일한 심령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유일한 구원을 전파할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고 찾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고 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고 주저앉는 것 같을 때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자랑할 때 새 힘이 생깁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어떤 때는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래도 그것은 좀 낳습니다. 집회 같은 것 갈 때 약속은 해 놓았지만 그러나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불같은 마음이 없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근심에 쌓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설교의 영이 메마르는 것 같은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주 말씀을 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가슴 속에서 혼자 있을 때 없었던 그 감격과 기쁨을 새롭게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그 예수의 넓은 사랑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속에 주셨던 그 동일한 기쁨을 아울러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오해와 편견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한다고 살지만 그러나 사실은 멸망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기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은 사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고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지식들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이 감격할 수 없는 그 말씀을 인해서 우리는 감격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문득 문득 하나님이 분명하게 이 교회를 세우셨지만 그러나 교회는 서 있어도 하나님이 맨 처음 이 교회를 세우실 때 원하셨던 모습으로 되어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 교회를 여기 세우고 토요일마다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인이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교인이 나와서 예수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1년 흘렀습니다. 그러나 요즘 토요일 날 나와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네 명, 다섯 명 미만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반성을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는 여기 왜 서 있는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도가 바울이 그렇게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닫혔던 구약이 열렸습니다. 성령을 받고 그리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수많은 서신서들을 쓰면서 결국은 그 사도 바울 거의 한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형태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먹을수록 복음의 깊이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갔습니다. 연로해질수록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영적인 세계와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더 예리해졌습니다. 그의 판단은 더욱 정확해졌습니다. 그는 점점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욱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대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그러나 나이가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그는 더욱더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감격에 넘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와 같이 더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다메섹에서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나를 모태로부터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나를 사도로 세우신 것은 만세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은 더 크게 보였고 자기는 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복음의 깊이와 예수의 넓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점점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자기에게는 조금도 자랑할 게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겸손과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식의 지평, 그리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간해 낼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깊이들이 산속에서 얻어진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거의 도시를 떠난 적이 없을 정도로 혹은 아테네에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혹은 안디옥에서 혹은 에베소에서 혹은 고린도에서 혹은 골로새서에서 수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매 맞고 옥에 갇히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은혜 받아서 그래서 그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그 은혜를 받아서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고 교회 제도 속에 묶여서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상급들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통 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과 특별히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동행하십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오늘 우리야말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사도는 칼과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는 곳을 지났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없습니다. 이전에는 문화의 벽을 넘어야했고 언어의 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혹은 인종의 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을 때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이 얼마나 놀랍고 그리고 그 고난에 깔려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모슬렘 중에 지하드라고 있습니다. 가끔 서구세계에다 폭탄 던지고 테러하는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이 군대 조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헌신된 모하메드 교회, 마호메드 교회 평신도들입니다. 나라는 잊어버렸는데 미군 대사관을 폭파해서 몇 십 명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폭탄테러에 참가했던 사람이 체포가 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가운데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어렸을 때 와서 잘 살았습니다. 돈도 제법 모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불법 체류를 하다가 합법적인 영주권을 받고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사람들이 누리는 그 이상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치 않은 기회에 모하메드 교도들이, 그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외에서 알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는지에 대해서 수기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큰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족이 안 되어서 여름에는 일을 쉬고 단기로 가서 참가했습니다. 지하드라는 조직에 모여서, 군대조직입니다. 완전히. 그리고 그 부대들이 훈련을 받고 그리고는 수시로 각처에 퍼져서 알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그리고 알라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입니다. 그것이 구호입니다. 자비,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알라의 뜻을 거역하는 놈들은 다 죽이는 게 알라에 대한 충성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 서방에 있는 기자들이 취재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비량하고 와서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그리고 사선을 넘나드는 투쟁을 하는데 한 사람도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거기에 가서 파트타임으로 헌신하고 그러다 나중에는 여름에만 가다 겨울에도 가고 이렇게 계속해서 살다가 나중에는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되니까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거기에 던져버리고 말하자면 생명을 건 모험에 자기를 던져서 결국은 체포되었고 사형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기 속에서 점점 이 사람의 마음속에 알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헌신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생생하게 일 해보니까 속에서 정말 이렇게 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좋은 시설 해놓고 거기서 편안하게 먹고 살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생을 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형제를 위해서 헌금 몇 푼 보내는 것 가지고는 이것은 자기기만이라고 하는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을 거기에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 드렸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그것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절망했다. 이 사람은 알라를 위해서 그렇게 믿음이 자라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다 불사르게 내어주었는데, 우리는 과연 복음을 위해서 이런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오엠에프 선교사들의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도 선교지에 도착하면 짐 풀기 전에 그날 밤에 편지지 펴놓고 유서를 쓰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서를.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고 있는 삶입니다. 가난한 교회에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지 몇 달 되지 않아서 그가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광고시간에 울먹이시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성도들이 헌금을 해서 얼마 전에 아프리카로 파송한 아무개 선교사가 어제 밤에 토인들에게 피살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가 그렇게 피살당하고 순교한 그 선교사의 뒤를 이을 사람 없습니까?" 그 교회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한 사람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다가 죽으니까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신령한 감화를 끼치고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그렇게 피에 피를 잇대고 시체가 시체를 넘으면서 그렇게 복음이 전파되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책의 모서리가 왜 빨간 색으로 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금박지를 하고 다니는데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빨간 칠이 성경에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어간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금박이 아닙니다. 온통 성경 속에 금박을 발라놓은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니까 복음 전파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선교사들을 성경을 펼 때마다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 선조들이 이 성경을 빨간 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에든지 순교가 있었고 그 순교의 시체의 피를 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 곳에 나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내 마음에 있어서 어디든지 그 복음을 들고 외치러 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런 선교사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조국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미래에 할 수 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키더민스터의 리처드 백스터는 말했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떠한 의식을 거쳐서 어디로 가든지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받고 이곳에 있는 것, 이곳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우리들은 비로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런 고백을 가슴에 안고, 주께서 우리의 혀가 굳어지게 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고 우리 심장의 피가 멎을 때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삶에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