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녹취자: 조원정
예수님이 산상수훈가운데서 주신 말씀 가운데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좁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 전체적으로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백성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라가 오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복이어야지 어떻게 커다란 재앙이 굴러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너희들이 망할 수도 있으니까 회개하라는 이미지를 갖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의 차이였습니다. 여전히 다윗의 핏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핏줄을 따라 오는 나라가 아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천적인 나라이고 그 나라의 핵심은 핏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좁은 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5장서부터 시작해서 6장 7장까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윤리적인 수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수준을 제시하는데 그렇게 팔복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진실하게 변화되어서 팔복의 인격을 갖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 외식하지 않고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해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이런 모든 것들이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자격이 너무 놓은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인격과 삶을 가리키는 그 좁은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다. 그것은 특별히 몸부림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런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런 수준 높은 영적인 변화, 거기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그렇게 살 수 없는 인간에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복, 이런 것들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이거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 좁은 길을 과연 갈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거기에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길이 협착하고 찾는 자가 적고 외롭고 고통스러워도 그 길을 간다. 그 생명은 죽은 후에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한번 미운 사람들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생명의 부족이고 가치 있는 일인 줄을 알지만 오래참지 못하는 것도 생명의 부족이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알면서도 열정을 품지 못하는 것도 생명의 부족입니다.
그러한 생명이 자신에게 충만히 살아있지 못할 때, 역사하지 못할 때, 인간의 삶은 비참한 것입니다. 어제도 신문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는데 세월호가 기울 때 소방 호수 가지고 한 열 명을 건져내었습니다. 이 사람이 트라우마에 걸렸습니다. 결국 동맥을 끊고 자살하려 하다가 죽지는 않고 다시 살아났는데 얼굴을 보니 참 선하게 생겼습니다. 50정도 된 남자입니다. 비쩍 말랐는데 존재 자체가 슬픔과 두려움에 우울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자꾸 잊으라고 하는데 자기는 그 애들이 눈에 선해서 잊을 수가 없고 열 명이나 구해 줬으니까 신문에도 칭찬을 많이 해줬고 말로만 칭찬해 준거지 도와준 것은 없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되는데 아이들이 막 잡아당기는데 여자 아이들이 소방 호수를 잡고 올라오는데 힘이 없으니까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니까 물속으로 들어가서 죽는 아이들을 수없이 본 것입니다. 그게 지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평생 안 지워질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전쟁을 한번 치르고 나면 제일 심각한 것이 후유증이랍니다.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 상당수가 정상적인 삶을 전쟁 후에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월남에 갔다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그런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 친구 집안에 누구도 갔다 왔는데 한국 군인들이 잔인하기로 이름났습니다. 수없이 죽이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돌아왔는데 정상적인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인가 하면 사람들이 사람으로 안 보이고 전쟁에서 자기가 상대할 얼마든지 죽여도 좋은 그런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 기사를 이렇게 읽으면서 눈물이 났던 것은 결국은 그것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몇 주 동안 그렇게 설교하면서 인생은 다 그런 거다. 인생은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다. 그것을 터득해야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아이를 칭찬해서 뭐든지 잘 될 거라고 가르쳐 주는 교육이 주는 유익보다는 안 되는 일도 있고 될 때도 있다고 하는 교육이 훨씬 현실적이고 그 아이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아 내 마음대로 안 될 수도 있구나, 그런데 될 때도 있구나, 이런 것을 공정하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것과 같은 확률로 가르쳐 줘야 합니다. 거기서 현실성이 있는 인간의 삶이 도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다 잘될 거라고 교육을 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동생들이 있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사람대접도 못 받고 서로 어울리면서 편도 먹고 사회를 배우고 이러면서 자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영적인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정신적인 힘들을 길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련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다가도 어려운 일이 와도 어렸을 때부터 안 되었는데 나이 커서 안 되는 것, 당연하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힘들은 배양이 안 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부모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을 다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속에서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살해 버립니다. OECD에서 자살률 1위입니다.
결국은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이,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모든 삶을 생명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하셨던 김복남 전도사님, 그분 간증을 참 은혜롭게, 두 번이나 했는데 개척교회 지하실 교회 때 한번 오고 한 7년 쯤 교회가 한번 커진 다음에 오고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원목실에서 근무를 할 때 사지를 전혀 못 쓰는 사람이 있는데 항상 그 병실을 웃게 한다는 것입니다. 활기가 넘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아무리 기준이 높고 우리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몸부림이, 힘듦이, 생명이 없이 인생을 지탱해 나가는 고통보다는 작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게 망각의 동물입니다. 늘 잘 잊어버립니다. 의미 있는 고통, 의미 있는 기쁨, 행복, 이런 것들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그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고 자기를 죽이고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날 열다섯 살 때 내가 인생의 고통을 느끼면서 논두렁에 엎드려 울던 얘기를 했는데 그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만의 것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에게도 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에 생명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든 그 고통스런 경험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것을 회상하고 생각하면 그때에 그 어려움이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분투하는 그 어려움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의미가 있는 견딤입니다. 주님 없을 때는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견딤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잘해서 뭔가를 일궈냈다 이럴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도 안 간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눈물겨울 정도로 그렇게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안 갑니다. 너무 힘든 일이니까 못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도 항상 똑같은 공식을 적용해야 합니다. 아 정말 순종하는 것이 어렵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구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을 협착하게 만드셔서 좁은 문으로 통과하지 않고는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시는가 하면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존, 구원 받기 전이든지, 구원 받을 때든지 구원 받은 이후에든지 심지어는 하늘나라 갔을 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한 의존 속에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참된 신앙입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여러분이 이런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을 배운다면 반드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