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8~11)
녹취자: 김경애
그러면 우리가 배운 것을 편안하게 복습해 보면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를 선교 그리고 목회로 부르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도는 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목양은 이 사랑이 ‘말론카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두 개의 장작이 필요했는데 하나는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즉 지식과 모든 총명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지식과 총명 안에서 사랑이 혼연일체가 되어 활활 타오르게 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는데 첫째는 분별함이었고 두 번째는 진실함이고 그래서 진실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과 신학적인 설명을 했습니다. 분별과 진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제 이 ‘헤아가페’가 아무 사랑이 아니라 바로 온 인류를 한 살과 한 뼈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고 목회자가 된 것은 자기 비전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이 ‘헤아가페’ 그것 하나 때문에 우리가 거기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사와 목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 ‘헤아가페’를 알았으나 그 ‘헤아가페’가 계속 자신 속에 타오르지 않으면 처음에는 참 놀랍도록 순수했던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오르게 하는 이 분별이 바로 ‘디아페론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선한 것을 분별함이라고 했는데 그 선한 것이라는 것은 원래 의역이고 원래는 다른 것입니다. ‘다른 것을 분별하며’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보다 더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별하며’ 그렇게 분별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그 진리 때문에 진실한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식과 사랑이 처음부터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이야기한 것이 하다가 내일 하겠다고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허물없이’ 입니다. 여기에서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하시며’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허물이 없다는 것은 흠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때 끝날 때 쯤 되어서 2,000원짜리 사과와 12,000원짜리 사과의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흠이 없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흠이 없다는 것은 뭐가 흠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적인 흠이 없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흠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좀 있은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사과를 보면 사과가 흠집이 없어 보이지만 아마 돋보기로 보면 아마 흠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가지고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죄를 적당히 용납하고 남 볼 때에 흠 없어 보이면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덕적인 흠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거룩한 선교사역, 목회사역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흠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이렇게 ‘헤아가페’로 타오릅니다. 그리고 사물을 보면서 에피그노시스를 계속 쌓아가고 그 에피그노시스가 자신 안에서 현저하게 움직이며 역사합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면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만물 속에 깃들여 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엑세시스’ 탁월함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이스데시스가 살아있어서 쉽게 이야기하면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납니다. 새로운 계시 속에 담겨져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날마다 주님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은 정말로 분별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이 속에 이미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내가 그 사랑으로 돌아갔고 그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속에 충만히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말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분별을 원할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진정으로 이 ‘헤아가페’와 이 지식으로 돌아가서 ‘그노시스 크리스투’ 이것을 가진 사람은 간절한 소원이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바꿀 수 있는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조건의 ‘헤아가페’와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 속에서 타오르는 이것은 현자의 완벽한 조건입니다. 현자를 아십니까? 현자의 완벽한 조건입니다. 완전한 현자라는 뜻이 아니라 현자가 될 수 있는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의 조건입니다.
18세기에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일어납니다. 두 번이 일어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운동이라고 합니다. 저는 운동이라는 말을 반대합니다만 어쨌든 The Great Awakening 이 일어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지만 그 일화에 나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생한 사역을 펼쳤습니다. 펼치면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들은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 이라든지 아니면 그의 Memoir 라든지 그런 책들 속에 광범위하게 묻어나 있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피비 바틀렛이라는 정확하게 4년 2개월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 부흥의 시대에 살았던 아이인데 매일 일정한 시간에 없어집니다. 엄마가 너무 이상해서 이 아이를 찾았더니 헛간에서 거의 비슷한 시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한편을 끝까지 읽어보신 분들도 아마 계실 것입니다. 모르시면 인터넷에 예일대학으로 들어가면 원문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만 읽어보십시오. 어떤 설교는 거의 3시간 이상을 했을 것이라고 믿어질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아이가 월요일부터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엄마, 교회 언제가?’ ‘왜? 어제 갔다 왔으니까 6일을 기다려야지.’ 잉 아이가 매일 물어봅니다. ‘왜?’ ‘엄마,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그 아이가 어느 날 헛간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엄마가 뛰어가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죄에 대해서 회개하다가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통성기도를 한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실 것입니다. 일어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선교사는 후원이 많고, 부동산이 많고, 교인이 늘어나는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다 소용없느냐 하면 아주 소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있어야 합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그런 것이 다 있어도 만약 내 설교 내 가르침을 받고 회심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 사역은 아무나 갖다놓아도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질러 그가 죄에 대해서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심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얘가 그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옆집에서 과일 나무가 담장을 넘어옵니다. 그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를 이 아이가 주워서 먹었습니다. 이 아이보다 몇 살 더 많은 누나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야, 우리 집에 떨어졌지만 그 사과는 옆집에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너는 남의 것을 훔친 것이야.’ 누나가 가르쳐 주자마자 이 아이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 앞에 그 4년 몇 개월 된 아이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싶은데 분별력이 없어서 남의 것을 먹은 것입니다. 웬만한 애들에게 그것이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그까짓 거 담장 넘어서도 가지고 가는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법적으로 지상권을 침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별입니다. 분별하기를 바라는 것의 동기가 ‘헤아가페’가 아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8장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니’ 배운 것을 가지고 그 배운 지식의 칼을 자기 동료의 목에 겨누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그 아가페로 타오르게 될 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나 하고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무엇을 받아내고 하는 거래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사모님께 목사님께 잘해드리라고 그러니까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자체로 이것이 가장 큰 선물인데 무엇을 더 바라느냐?’ 그 이야기는 목사님이 하셔야지 사모님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여보 무엇을 해줄까?’ ‘아니 당신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어서 더 이상의 선물이 필요 없어.’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자기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선물인지 애물인지는 살아본 사람만 압니다. 여러분 선교사님들도 그래도 언젠가는 사랑을 해보셨을 것 아닙니까? 그분이 지금 사시는 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진짜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가장 원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심지어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존재 자체가 저 사람에게 그리움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아프리카가 이렇게 문화적으로 척박한 곳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여보, 이번에 내 생일인데 당신은 뭐 해줄 거야?’ ‘여보 내 머리에 리본을 달아서 줄게!’ 우리 집사람은 ‘당신 필요 없어. 선물을 줘!’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잘 들어보십시오.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나의 어느 부분이 싫다면 칼로 살을 도려내고 톱으로 내 뼈를 깎아서라도 그 사람 마음에 들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정도의 사랑을 안 해보셨습니까? 이야기가 안 통합니다. 그것이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사람들이 점점 부부가 외롭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왜 하나님한테만 가능한 것을 구하십니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한테나 가능한 것을 사람에게 구합니까? 만약에 그 사람이 못 채워 주기 때문에 고통하고 악악거리고 싸우고 만약에 그러니까 다행이지 그러니까 인간은 희망이 없구나! 하고 하나님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인간이 그것을 착각으로나마 채워준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항상 실패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의지할 분이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니 그러면 지난 시간에는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한테 좀 해주다가 너무 힘들 때는 I am nothing. ‘나는 없다.’ 그러면 그렇게 매일매일 희생하고 사는 남편이나 매일 매일 희생하며 남편을 위해 사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보, 내가 당신한테 사역에 바빠서 잘못해주고 미안해!’ 그러면 아내는 ‘아니야 충분해! 이미 주님께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충분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아내를 자기의 시녀나 하녀 혹은 비서 심지어 자기가 고용한 사람처럼 조수처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아내도 남편을 향해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굉장히 소중한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혐오해야 합니다. 남편한테 완전히 죽어서 살고 거기에 맞춰버린 사람, 아내의 기에 눌려서 아예 포기하고 거기에 맞춰버린 사람, 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헤아가페’의 사랑은 날마다 부부가 깨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서 우리가 비록 성향이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의 한 사랑으로 매일 매일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선택해서 추구해야할 여러 가지 덕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싶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합치된 사람으로서 노예와 같이 하루를 사는 것을 그 진리에서 어긋난 상태에서 황제로 100년을 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왜?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그런 깊은 인격으로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님들 정말 그러셔야 합니다.
주일날 설교를 했습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부부가 가면서 남편이 계속 씩씩 거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목사님은 가정시리즈를 설교하더니 왜 막판에 가서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가 무엇이야? 성도들이 가득 모였는데 우리 중에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그렇게 하냐?’ 부인이 굉장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씩씩 거리는 부인은 웃지도 않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여보, 내가 여러 번 생각했거든’ 그 이야기는 그런 사실을 자기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내를 사랑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영혼들을 사랑하라.’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할 때 순교모드입니다. 개척할 때도 ‘목숨을 내놓았다.’ 선교할 때도 ‘나와 우리 자녀들을 여기에 묻기로 했다.’ 아니 자기는 묻는데 왜 자녀들까지 묻습니까? 물론 주님 앞에 죽기 살기로 하는 정신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런 과정 자체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나란히 같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제 아침에 목사님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엄마, 아빠 제발 싸우지 마!’ 그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있던 분들에게 퀴즈를 냈습니다. 그러면 그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첫째, 일평생 자녀가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가책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두 번째 안 그랬을 것이다. 정답은 없습니다. 1번 일수도 있고 2번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헤아가페’ 속에서 인류가 출발하면서 진행하게 될 때 그때에 인류번식의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자녀가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그 자녀가 태어나면서 엄마, 아빠의 품에서 특히 엄마의 품에서 삽니다. 처음에는 엄마의 세계가 전부입니다. 아빠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이렇게 기어 다니고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겨우 아빠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선과 악, 인간이 누구인지,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그것을 논리의 형태가 아니라 엄마의 표정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되는구나!’ ‘잘했어. 예뻐!’ ‘이것은 좋은 것이구나!’ ‘안 돼!’ ‘이것은 안 되는 것이구나!’ ‘그래그래.’ ‘이것은 되는 것이구나!’ 이것을 배우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밖에 나가서 인생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엄마를 보면서 ‘절대 저 인간 같은 사람을 되고 싶지 않다.’ 아빠를 보면서 저런 인간은 되고 싶지 않고 저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고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부터 모든 윤리적인 균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사상적인 균열들이 일어나면서 찢어져서 이것이 가운데에 컴퍼스 축을 놔야지 그려지는데 가운데 딱 놓고 이렇게 그리면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리를 넓히면 원이 큰 원이 되고 줄이면 작은 원이 되면서 수천 개의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시로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는데 마지막에 이리 왔다 저리 왔다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의 교육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하나님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후손은 천대가 잘 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삼, 사 대에 저주가 임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하나 콕콕 집어서 ‘너는 저주, 너는 축복’ 이렇게 안하셔도 그냥 그렇게 가정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그것이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딸이 엄마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행복해 하는가 하는 인간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보면서 어떤 남편을 만나야할지 아들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할지 그것을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표정 속에서 배우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앞에서 배우지만 크면 뒤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앞뒤가 똑같으려면 이것은 단순히 행위의 문제가 아니가 인격의 문제이고 진실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허물없이 되는데 이 허물없는 것이 첫째가 도덕적인 흠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결국 기독교의 윤리에서 보면 도덕은 거룩함의 한 요소입니다. 그럼 거룩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기우스’ 혹은 ‘카도쉬’라는 이 거룩함이라는 것은 간략하게 설명하면 두 개입니다.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존재적 초월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높고 위대한 분입니다. 너무 높고 위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한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거기에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주 미천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무한한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나도 살면서 이 도덕은 사실은 신학적으로 공유적 성품입니다. 공유적 속성입니다. 나도 의롭게 살았습니다. 진짜 나쁜 놈들이고 나는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여태까지 했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때 자신이 더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더러워 보이냐 하면 도저히 하나님의 시선에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룩함의 두 요소입니다. 그중에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은 시작되는 것이 이 ‘헤아가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와서 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정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되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그분의 기쁨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을 따라서 흘러나온 것이 도덕적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면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Programmatic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서 배를 탑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하인에게 하는 말이 ‘너는 노를 저어라.’ ‘주인님 어디로 갈까요?’ ‘아무아무 항구로 가자.’ ‘거기는 어떻게 가죠?’ ‘저기 북극성을 봐라. 계속 노를 저으면 한 3시간 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노를 저어라.’ 그리고 밤에 노를 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인의 의도는 이 사공이 계속 노를 저어서 빠른 속도로 노를 저어서 배를 바다 표면위에 띄워서 하늘을 날아서 북극성에 안착시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처럼 허황된 이야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받을 수 없을 것처럼 살면 엉망진창의 삶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스나이퍼들을 아시죠? 장거리에서 숨어서 저격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오면서 저격수가 궁금해서 유투브를 보았더니 기록이 1.5㎞에서 명중시킨다고 합니다. 1.5㎞면 사실은 사람이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거리인데 그것도 정확하게 어깨나 다리가 아니라. 머리통을 날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오랫동안 그 사람들이 그 정도의 거리에서 표적사격을 연습한 것입니다. 어떻게? 절대로 완벽하게 맞출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속에는 완벽하게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삼각형을 그릴 때 우리는 어차피 정확한 삼각형을 그릴 수 없고 논리적으로 논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면위에 그린 삼각형은 절대로 합이 180° 인 삼각형을 될 수 없습니다. 왜? 지구는 둥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삼각형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각형을 손으로 그릴 때에는 이 사람의 머릿속에 그리면서 완벽하게 그것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삼각형을 그립니다. 그러면 그 삼각형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덕적으로 허물없음입니다. 또 그렇게 살면 조금씩 조금씩 그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신경질을 내거나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든지 등등 그런 것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저녁때 회개하고 다음날 아침에 맛있는 것을 해주고 꽃이라고 한 송이 꺾어주면서 어깨라도 주물러주면 또 풀리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났다고 해서 선교사에서 퇴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도덕적 허물없음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허물이 없어야합니다. 선교지를 휩쓸고 있는 오류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신실한 사람들인데 신사도 운동들이 들어와서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이단도 물론이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학적인 판단력이 없으니까 자신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잘못하려는 의도는 없는데 결국은 일을 망쳐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집요하게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의 삶은 물론이고 인격, 사역이 지향하는 바가 이것이 정말 신학적으로 흠이 없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사역을 만들어갈 때 그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이 되어서 그러면 그것이 어떤 궁극적인 결과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와’ 그 다음에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 는 것입니다. 여기도 상당히 깊은 의미가 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의가 ‘디카이오쉬네’입니다. 이것은 ‘디카이오오’ 의롭게 하다에서 온 명사입니다. 그러면 이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의 열매라고 했으니까 어쨌든 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설명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의는 무엇이냐 하면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 의가 하나님의 성품인데 어떤 성품이냐 하면 자신의 거룩성을 해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거룩하심을 보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의라고 하면 굉장히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속성이 그런 실제는 인간의 과실과 혹은 죄와 만나게 될 때 거기에서 마치 두 개의 금속이 부딪히면서 불꽃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한 의의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죄 된 본성인데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진노를 퍼부으시는데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그 거룩성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할 때 마르틴 루터는 절규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복음에 의의 칼을 두셨나이까? 나중에 그 고민 속에서 이 사람이 거의 정신적으로 황폐해져가다가 그러다가 그 유명한 비텐베르크의 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에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다니던 수도원이 에르푸르트 수도원이었습니다. 그 수도원이 어거스틴 수도회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의 신학입니다. 제가 설명을 이틀 동안 드린 것은 어거스틴을 절대로 베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저에게 가장 큰 감화를 주었던 4명의 신학자중 한사람입니다. 그래서 저의 말로 풀어냈지만 어거스틴의 신학은 전부 설명하면 사랑의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 말하자면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벼락이 떨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극단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도저히 그것으로 해결을 못 봅니다. 스타피치하고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에게 지도를 받았지만 그러나 끝가지 해결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탑의 경험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비텐베르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시편,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 사람의 영혼이 복음에 대해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자연스럽게 이 의의 개념은 구약에 나타난 의는 사실은 어떤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성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수시로 넘보고 침해하는 인간이 만났기 때문에 드러난 그 겉모습이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가 의라고 공식을 우리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그것이 의의 전부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거룩성을 끊임없이 인간이 침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 위에 머무는데 동정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도저히 그 일을 안 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잠시 두려워서 움츠렸다가 다시 끝나고 나면 다시 그 일을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는 하나님이 원래의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목적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그것을 운명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또 다른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이 수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했고 그래서 그 율법이 무서운 것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 인도하는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참된 야훼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제사를 통해서 수시로 그 죄가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되는 것을 리얼 플레이 방식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래서 우리 모두를 내포적 대신의 방식을 끌어안으시고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지불하지 않은 대가로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그 의가 교회에 부어짐으로써 그 의가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의가 통치되는 방식이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치되는 방식이 된 것입니다.
못난 부부는 서로를……. 왜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맨 처음 종자 씨가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도 있지만 쭉 가면 교회와 몸입니다. 마지막에는 세상과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데 이것입니다. 못난 부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내가 막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시집식구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번 추석 때도 봐! 시누이는 그림처럼 앉아서 혼자 잡지보고 있었잖아! 그리고 나는 죽어라하고 일했잖아! 그런데도 어머니가 끝나고 갈 때 모든 음식은 다 시누와 동서들 싸주고 나는 맏며느리로 고생한 것뿐이야.’ 남편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잖아! 누가 하래? 다음부터는 떳떳하게 못하겠다고 해! 그리고 콘도로 가자! 인터넷에 주문하면 추석 상 다 차려주니 카드로 긁고 먹고 오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막 A부터 Z까지 막 폭격기처럼 늘어놓았는데 마지막에 무엇이냐 하면 ‘그랬어? 힘들었지! 이리와 내가 안마해 줄게! 정말 나 같은 남편한테 시집와서 진짜 고생이 많다. 유산도 못 받고 의무만 물려받았구나! 어떻게 해? 여보 정말 미안해! 내 존재 자체가 죄송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진짜 한바탕해서 끝장을 보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도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저도 아내의 말하는 방식과 남편의 말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슬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한번 꼭 안아주면서 ‘정말 힘들었지! 미안해! 나한테 시집온 것이 십자가가 크구나! 정말 미안해!’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네가……. 참 우리는 존재 자체가 유치 그 자체입니다. 그게 20대 때 그러면 이해가 가는데 60을 바라보면서 똑같이 그러면 안 됩니다. 도저히 안 되니까 그리스도가 그냥 그것을 다 끌어안고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한 것입니다. ‘야, 네 마누라 좀 가르치고 살아라.’ ‘왜요?’ ‘며느리가 되어서 이것도 못하고 이것도 못하고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지 않느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배워먹지 못했냐?’ ‘어머니 그 중의 대부분은 제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뜯어 고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살아야지 고치지 않겠습니까? 물러가십시오. 내 가정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렇게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박수소리에 한이 서렸습니다.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공의를 이야기하실 필요가 없게끔 당신이 끌어안고 ‘이 새끼들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끌어안고 나를 죽이십시오!’ 하면서 당신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볼 때 우리는 아무 허물이 없기 때문에 혹은 조건으로 내가 이렇게 해주면‘ 다음에 너희들은 반드시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딴청 안 부리고 진짜 죽도록 충성하다가 가는 것이다.’ 이런 다짐을 받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그것이 우리가 입은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열매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 그럽니다. 식물을 잘 아는 사람들은 ‘저것은 사과나무네. 배나무네. 복숭아나무야. 감나무야.’ 잘 압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을 대부분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딱 맺으면 이파리를 볼 필요도 없고 너무 또렷합니다. 그것 하나면 답이 다 됩니다. 그것이 열매의 개념입니다. 카르포스의 개념입니다.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의를 덧입어서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런 의를 입었기 때문에 이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양심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이 의를 덧입은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신자가 죄안에 있는 위험한 징후가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납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너무 부자연스럽다. 왜?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느껴야 합니다. 그런 의를 내가 입었기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의 열매가 있습니다. 선교사 하시는 것 솔직히 말하면 힘드시죠? 왜 그렇게 부정직합니까? 선교사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 힘드십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남편은 대답하면 안 됩니다. 선교사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힘드십니까? 회사원 아내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서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구름타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선교사로 사는 것이 힘드십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힘듭니다. 그래도 선교사하는 사람들은 선교사역이 안된다고 자살은 안합니다. 투옥이 되지는 않습니다. 아니 핍박을 받아서 투옥은 되지만 선교사역이 잘 안되었다고 투옥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감옥에 갑니다. 전과 3범, 4범 착한 사람이지만 빚에 몰려서 몇 번씩 회사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 가족을 생각하며 내려온다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습니다. 사장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어떻습니까? 저에게 힘드냐고 물어보십시오. 힘듭니다. 정말 힘듭니다. 이렇게 열린 교회를 한 것만 25년이 지났고 그전에 교역자생활을 하면 약 38년의 세월을 섬겼는데 양심에 손을 얹고 단 하루도 내가 이 일에 진짜 맞춤형으로 태어났다고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이 옷이 내 옷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러면 목회자만 그렇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느냐 하면 결국 이것은 외부적인 조건을 우리에게 맞추어서 이것이 진짜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즉시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전선을 넘나들던 사람이 돈을 비롯해서 명예, 심지어 또 다른 일에 연루되어서 추문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는데 이쪽도 팩트고 이쪽도 팩트입니다. 왜? 한때는 생사는 넘나들고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고 싶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반대의 삶을 사는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왜입니까? 그리스도의 의를 생각하면 자신은 그렇게 불평하고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 의에서. 그 의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아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자기 확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아 나의 정과 욕심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구나!’ 를 깊이 자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그런 소욕들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우울합니다. 누가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도 목회를 할 만큼 했습니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교회를 개척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목회란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엄청난 가르침을 기대했나 봅니다. ‘목회란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결국 그 주님께로부터 내가 그 의를 받았다는 것 그 의가 내 안에서 은혜로 넘치고 있음으로써 나는 다른 존재가 되고 다른 존재로 이행하고 더 쉬운 말로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완전하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더 온전해가는 그런 삶을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삶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열매 카르포스입니다. 열매는 결국 무엇이냐 하면 구별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가지고 나누어 먹으면 어떻고 하는 것은 적용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알레고리칼할 부분이 있고 열매는 무엇이냐 하면 보는 것입니다. 그 나무를 판별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보면서 ‘아 저것은 사과나무다.’ 판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열매를 보면서 열매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예수가 누구일까?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사람은 기뻐할 수 없는 속에서 기뻐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즐거워하고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데도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면서 자신 안에는 뭐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자신들은 보지 못한 하나님을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갖게 해주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것이 카르포스입니다.
그런 의의 열매가 한두 개 맺는 것이 아니라 가득 맺게 되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한 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 방면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은 너무 잘하는데 그런데 모든 선교사역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구제사역만 잘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 자녀에게 좋은 아빠가 아닙니다. 오직 그것 딱 하나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열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좀 이렇게 표현하면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사과를 갖다가 사과 아닌 나무에 실로 묶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이렇게 생명이 뿌리로부터 해서 그 자연의 원리에 의해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행위와 사역이 그 사람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고 그 다음에 그 인격이 열매와 또 나눠지지 않는 하나가 된 것이 삶의 전 방면에 나타난 것이 열매가 가득하다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를 했는데 자기는 특별히 교인에게 욕심을 내지 않았는데 100명, 200명, 500명, 1000명, 2000명, 4000명, 5000명, 6000명 모였는데 도저히 교회에 사람이 들어올 수 없게 되었는데도 제발 한번만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좋겠습니까? 싫겠습니까?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운동을 하면 그 교회가 전부 순복음 교회가 되겠습니까? 원주민 옷을 입고 원주민 언어 책을 손에 들면 모두 허드슨 테일러가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 나는 나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습니다. 전 인류역사에 남은 마지막 종자의 마지막 개체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로서 하나님 앞에 빛나는 것입니다. 나로 빛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나라는 사실, 내가 일만 명 목회를 못하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선교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이 섞여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선교역사에서 아도니아 저드슨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보스턴신학교의 수재였습니다. 수많은 유력한 교회에서 그를 부목사 청빙했습니다. 다 거절하고 버마, 오늘날의 미얀마의 선교사로 갑니다. 한 사람의 세례자를 얻을 때까지 6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 선교비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볼 때 그 선교사가 성공한 선교사입니까? 실패한 선교사입니까? 아도니아 저드슨이 그러면 태만했을까요? 매주 토요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만 했습니다. 눈물로 매달렸는데 한 사람의 회심 자를 얻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누가 그 선교사역이 실패라고 돌을 던지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너무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복음사역을 비즈니스 적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왔습니다. 이 잡지사가 기독교잡지사가 아니라 일반잡지사입니다. 그래서 나를 표지인물로 해서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제 얼굴이 책이나 신문에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래도 나오기는 나오지만 저를 보시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일반잡지에 나온다니 더 싫어서 싫다고 하려고 했는데 선교적인 차원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내부적으로 그런 조언을 받고 하기로 했습니다. 왜 나를 하냐고 하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가다가 종교계가 왔는데 불교, 천주교 다 돌았고 이제 기독교 차례라고 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쭉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1시간 20분 정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해서 쭉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하는 이야기가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 지금 이야기했던 것보다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뷰하는 기자는 당연히 불신자입니다. ‘목사님, 제가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그럼 뭐 같습니까?’ ‘스님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고승 같으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닳고 닳은 사람이 불교, 기독교, 천주교 사이를 막 오가면서 이 사람 머릿속에 정리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들은 사회사업가이고, 불교의 승려들은 철학자이고, 기독교 목사는 비즈니스맨이다. 아니 나에게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비즈니스맨 같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마음이 깊이 무너지는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사역의 결과인가? 과연 이런 것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선교하는 것인가? 한국에서의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에 선교사역을 모두 끝내고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두고 가려고 하면 그것도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 두고 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한 사람의 선교사역에서의 퇴장은 자기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의 망각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망각이 두려운 것은 이렇게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 그 삶의 여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자기가 선교한 대로 살고 그렇게 되고 싶었던 자신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주셨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것 하나가 남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헤아가페’의 삶을 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선교하고 목양하면서 살면 굳이 마지막에 내가 어떠해야겠다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남을 때는 모든 것이 다 떠나고 자기를 홀로 두는 것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나의 젊음과 모든 것을 바치고 불태우고 그리고 마지막에 살아있는데 스쳤던 것은 다 없어졌지만 변함없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그 그리스도가 여전히 계시고 선교 사역을 시작할 때는 분별력도 없고 그렇게 진실하지도 않았고 흠도 너무나 많았었는데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선교의 열정으로 이 땅을 밟았던 자신이 너무 죄송했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한 영혼, 사랑하는 아내도 불행히도 먼저 혹은 암으로 혹은 교통사고로 혹은 이름 모를 질병으로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갔습니다. 나 혼자 남았고 아이들은 다 흩어져서 자기 일에 몰두하고 살고 나 혼자 남아있습니다. 선교지도 이제 내가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때에 자기 자신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정말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그날 저녁에 조용히 누웠는데 하나님이 돌연사로 불러가셨습니다. 그런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질병에 시달리고 암으로 판명되고 심지어는 중증 치매가 와서 그래서 별로 요양원비 낼 돈도 없어서 이름 없는 비위생적인 허름한 요양소에 가서 그것도 한쪽 팔목에 수갑을 채인 채 왔다 갔다 하는 정신을 가누면서 죽음의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 정말 행복하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비록 허드슨 테일러만큼 사역을 못했어도 그리고 한 번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을 회심시키는 부흥가처럼 살지 못했어도 주님의 사랑이 내안에 역사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쓰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흘리고 있는 이 눈물의 의미를 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사람들이 보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모습은 그냥 노쇠해가는 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한 사역의 마지막입니다.
그런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영혼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찬송이라는 말씀이 ‘독사’입니다. ‘독사’는 그냥 문자 그대로 영광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광이냐 하면 원래 영광이라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중요하지만 특히 그 단어의 신학적인 의미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맥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의 한 단어가 ‘독사’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Doxology’라는 영어가 오는데 ‘독사’는 뭐냐 하면 이것은 원래 구약을 배경으로 합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카보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카보드’는 원래 무겁다는 상태 동사 ‘카베드’에서 옵니다. ‘무거운’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그냥 Important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사람들이 막 들어옵니다. 그런데 옷을 잘 입은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닌데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가방을 들고 영접하고 카펫 깔린 길로 인도합니다. 누구입니까? VIP입니다. Very Important Person입니다. 무엇 때문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그는 비중 있고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신학적으로 저는 세 부류로 나눕니다. 첫 번째가 Essential Glory입니다. ‘본체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이 자신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무가치해 보이는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영광을 보았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회사를 잘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아프리카선교를 가겠다는 것입니다. 다닐 때에는 회사에서 부장도 되고, 차장도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더 예쁜 자매를 만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그 다음에 돈을 벌어서 더 큰집도 사고 등등의 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젊어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꿈이 다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한 그 영광을 보게 되니까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나머지 것들은 다 시시해 보이고 가치가 없어 보이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영광의 효과입니다. 그것이 본체적 영광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두 번째는 Radiately Glory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제가 붙인 용어인데 ‘발산적 영광’입니다. 발산적 영광은 구약에서 ‘쉐키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쉐키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샤칸’이 거주하다 이니까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서 아주 찬란하도록 거룩하신 분인데 종종 하나님이 어느 장소에 계신 것처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장소적 임재입니다. 그런데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데 만약에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하면 다른 곳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신을 압도하는 당신의 존재의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 임재를 주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세의 소명이 있었던 타지 않는 불 붙는 가시나무떨기 같은 것입니다. 거기서만 있는 것입니다. 온 광야 모두가 불 붙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만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성령강림사건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나는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Effective Glory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하면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 세 가지 용례 중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이 세 번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왜 이것을 청교도들이 Effective Glory 라고 불렀느냐 하면 효과적 영광 혹은 유효적 영광입니다. 무엇이 유효하다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영광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인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어의 표현에 I 어도우 you. 하면 나는 당신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깊은 곳에서 너를 진심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Effective Glory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영광이 세 번째 범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선교사나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든지, 어떤 대가를 받게 되었다든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역이 그의 인격에서 흘러나왔으니까 그의 존재와 인격, 이 모든 현존, 현존과 그 현존에서 나오는 모든 그의 섬김과 삶 모든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영광을 돌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인정은 말의 인정이 아닙니다. 요새 부부도 막 싸우다가 코너에 몰려서 도저히 답변할 수 없을 때는 한국에서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인정!’ 그러고 딱 끝냅니다. 뭐라고 뭐라고 막 그러는데 아내가 듣고 보니까 도저히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인정!’ 하고 끝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 종류의 인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인정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정이라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영향력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그 사람을 ‘헤아가페’로 돌아가게 해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듣던 사람과 똑같은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온 인격과 존재, 자신의 삶과 모든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본을 보인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참된 동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 본을 보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그 진정한 동기는 본을 보이는 것이 그 동기의 궁극적인 출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신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에서 제가 읽은 일화입니다. 중국선교의 대부입니다. 젊은 선교사들이 그 전설적인 선교사를 꼭 한번 면담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도 나도 신청을 해서 이분이 노년에 만나주셨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비전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나는 내 한 몸을 다 던져서 이 영혼들을 살려내고 싶습니다.’ 등등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최초로 여기에 신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별 이야기가 다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허드슨 테일러가 ‘그것은 선교의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선교의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흔히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선교의 목표가 우리를 Drive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누렸던 누리고 있는 충만한 예수의 생명이 내안에 역사할 때 이 생명은 나의 영혼과 살아있는 한 사람의 존재의 영적인 메타골리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살아있을 때 그 피가 돌면서 찌꺼기는 회개로 토해 내고 영양분은 빨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데 그것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은 이것을 누구에게 보여주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또 그 사람들도 나처럼 되어서 많은 사람이 우리의 선교사역에 인증을 해주면 좋겠다는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바보 같은 이야기가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결혼을 했습니까? 만약에 무엇을 바라고 결혼을 했으면 두 가지가 모순입니다. 첫째는 무엇이 모순이냐 하면 사랑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박애적인 사랑이 아니라 목적적 사랑입니다. 유용합니다. 쓸모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주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동기에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품 때문에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여태까지 남편에게 그렇게 희생하고 한 것은 남편이라는 인간을 위해서 했다면 하나님 앞에 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네가 나 위해서 했니? 예수 위해서 했지! 미안하면 예수님이 너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야 해! 내가 너에게 빚진 것이 무엇이 있니?’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안 됩니다. ‘해준 게 뭐가 있어?’ 그렇게 물어볼 때 그렇게 말한 아내는 깊이 회개하고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 남자하고 결혼을 했나? 물어보아야 합니다. 바랬으면 그것은 옳은 마음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무엇을 해준 것이 있느냐고 하는데 다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무엇을 받으려고? 그러니까 두 가지 점에서 모순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산 동기가 주님이 아니었고 남편도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주님을 너무 사랑하면 그렇게 오늘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사랑이 내안에 있으면 죽어가는 영혼을 그냥 볼 수 없습니다. 정 안되면 가서 그렇게 살지말라고라도 말하고 싶고 그럴 용기도 없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사랑이 시켜서 하나님 앞에 나는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든지 인정해 주지 않든지 그것은 각자 개인의 문제고 나는 적어도 주님이 받으시라고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그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 그래서 그냥 자존심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옛사람의 것입니다. 그렇다고 비굴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특별한 의의 선물을 열매로 드러내면 사람들이 효과적인 인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연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은 그 티끌 같은 인간을 통해서 때로는 온 땅과 하늘위에 가득한 이 우주 전체가 돌릴 수 없는 영광을 그렇게 지푸라기 와같이 연약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욕되게 하는 삶도 끝이 없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사는 삶도 끊임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성공은 규모의 문제나 혹은 성취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나 자신이 목회가 끝난 후에 선교가 끝난 후에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정말 리본을 달아드리면 좋을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교회를 개척해서 5,000편이 넘는 설교를 했습니다. 다행히 이제껏 설교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만날 같은 소리다.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습니다. 책도 어렵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뭐 얼마 후면 저도 어느 날 ‘이 설교가 담임목사님이 열린 교회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입니다.’ 사회자가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원하는 것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6,000번을 넘게 설교했는데도 그 설교를 모두 들은 교인들이 성경을 펴고 본문을 낭독했을 때 무슨 설교가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를 하는 것이고 그리고 6,000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여전히 오늘 찾아오실 주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살아온 날 중에서는 그날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날이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 중에 주님을 가장 조금 사랑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에 모든 각오를 다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가능성, 사랑받던 지체들에게서 떠나 홀로 외롭게 될 것, 극복할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거나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할 가능성, 모든 것에 대해서 열어놓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에 갔습니다. 제 앞에는 중국의 어느 가장 큰 도시에서 6,000명 이상을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와 마주 앉았습니다. 이분이 지금은 교회의 지도자인데 그분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인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젊어서 예수를 만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탔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가는데 그때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납니다. 끝까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안하니까 감옥소에 집어넣어서 20년 가까운 생활을 노동교화소에서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얼마나 잔혹했는지 건강을 모두 잃어버렸고 가족들하고 연락을 다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어떻게 어떻게 자기 살던 고향을 찾아온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한 아들은 아편쟁이로 살다가 자살했고, 부인은 그 자식들을 보다가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던 집터에는 아무도 안 살고 폐가로 있는 것입니다. 동네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다 듣고 그 집 앞에 가 있는 순간에 선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얘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에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드렸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마당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찬양)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렇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훌륭한 인격을 보여준 그 훌륭한 선교적 삶을 살아낸 선교사를 그 훌륭한 목회적인 삶을 견뎌온 목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끝난 것 같습니까?
그 앞을 보면 도입부가 나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하노라.’ 라고 나옵니다. 뒤부터 해석하면 우리가 물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목회철학을 이야기하라면 입에 거품을 뭅니다. 그리고 당신의 선교의 비전을 이야기하라면 침이 튑니다. 그런데 그것이 눈물에 배인 기도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장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비전이 여기에서 나와서 저리로 쏘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디어 제공입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속에 들어가서 이 안에서 폭발을 일으키고 내 살과 피가 되어서 내가 그 비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세상에서 금마차를 타고 다니기 보다는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뒷골목에서 깡통을 차고 다니겠다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 비전입니다.
원래 이 비전이 두 가지입니다. 자기 암시적인 비전과 계시적인 비전입니다. 원래 계시적인 비전은 구약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우리 옛날 성경에 ‘이상을 보니라.’ ‘이상이 나타 나니라.’ 그렇게 이상하게 번역한 그 단어인데 ‘하존’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환상도 아니고 실제도 아닌 그 중간입니다. 그래서 없다고도 말할 수 없고 절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면에서는 보이게 있는 것처럼 보다 더 확실하고 어떤 면에서는 만져지지 않기 때문에 없지만 그러나 아주 분명해서 오히려 눈에 보이는 실제가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하존’이 그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추진력이 되는 그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웃깁니다. 선교의 비전을 이야기하면 침이 튑니다. 왜 그렇게 선교사와 목사들은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학생이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미국에서 신학교총장이 되신 분이 한국분이 총장이 되셨습니다. 찾아와서 교제를 하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젊으신 분이었습니다. 차를 다 마시고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목사님 제가 어떤 총장이 되어야 할지 충고해주십시오.’ ‘나는 그럴 말을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더 많이 배우고 더 훌륭하니까 하십시오.’ 두 번인가 세 번을 거절하는데 극구 청합니다. 그래서 입을 열었습니다. 첫째는 겸손하십시오. 둘째도 겸손하십시오. 셋째도 겸손하십시오. 나는 전 세계 수많은 나라를 다녀보고 무식한 사람부터 유식한 사람까지 세계에서 얼굴을 내로라하는 위대한 학자들도 만나보았습니다. 흑인도 만나고 백인도 만나고 그리고 동남아사람도 만났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그 사람들을 피부와 지위, 학문의 높낮이를 초월해서 교통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왜? 보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갑자기 누가 튀어 들어왔는데 사랑이 울컥울컥 솟아납니까? 사귀어봐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유럽 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중국 지도자나 베트남의 지도자들이나 ‘제가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르쳐줄까?’ 할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장하는 선교비전, 목회의 철학. 나는 그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나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그 용어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는 어투로 말하자면 어쨌든 자기의 목회철학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을 이야기할 때는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고 얼굴이 붉어지면서 갑자기 선지자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자신의 최고의 기도제목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장사꾼 같은 스타일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열변을 토할 목회철학과 선교비전이 가슴속에서 거의 한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자 죽으러 갑시다. 가자.’ ‘주님 제가 이 땅이 복음화 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굳이 데려가신다면 저는 두 눈을 뜨고 죽겠습니다.’ 이럴 정도의 결기는 이속에서 혹은 여기에서 토닥거리고 뛰는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자신 속에 용해되어 흐르는 그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1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맨 처음에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비뻬르’ 말씀하셨다. 호세아에게 이 단어가 Into입니다. 호세아가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니까 이쪽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니까 이 말씀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여기를 휘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속에서 이 사람을 형성한 것이 말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에는 언제나 깊이와 감동이 있습니다. 짧은데 자꾸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해보면 한없이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알듯알듯하면서 모르겠고 모르는 것 같은 이야기인데 빛이 들어오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녹아내린 사람의 사상화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깊은 기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눈물에 젖은 기도가 되지 않은 선교비전은 아이디어 제공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도 있다. 나도 모르지만 한번 해보지. 그래서 자신의 선교비전을 사람에게 많이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비전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토해놓는 것만큼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잘잘한 선교 Organizer들은 사람을 모으고, 아주 위대한 선교운동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을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제 심금을 울렸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입니다. 그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를 하셨습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전통과 영국 청교도의 정신을 두 나라에 함께 살면서 종합해서 깊이 있는 설교를 선교지에서 쏟아놓았습니다. 그분이 말년에 조셉 발로우라는 사람이 노년에 앤드류 머레이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굉장히 키가 작으셨답니다. 157㎝밖에 안 되셨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체구의 거인이 앉아 있었다. 우리를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함께 기도합시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그분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이런 이야기가 끝났을 때 환호성을 질러야지 그냥 영양가 없는 예화에는 환호성을 치고 박수를 쳐서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10년, 20년 젊으신 분들은 30년 후에 다 그렇게 앉아서 후배들이 왔을 때 ‘그분이 기도해 주셨을 때 우리는 하늘로 올라갔다.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라고 말하는데 희랍어로 ‘스피링크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심장이 아니라 창자입니다. ‘스프링크나’ 라는 명사가 복수가 될 때 창자입니다. 창자인데 특정한 창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내장 중에서도 특별히 창자인데 소장, 대장 그런 구분 없이 창자를 가리킵니다. 그 단어가 쓰인 것이 있는데 ‘그는 나의 심복이라.’ 할 때도 ‘그는 내 창자라’ 그렇게 나옵니다. 이것이 동사로 쓰이면 이게 데포넌트동사가 되어서 수동태처럼 쓰이는데 그 단어가 마태복음 9장에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우리 번역에는 ‘불쌍히 여기시니’ 라고 나오는데 ‘에스프랑크니스데’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창자가 떨리기까지 감동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우리 Korean Context에서는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대개 심장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콩고 같은 데서는 영혼이 있는 자리가 간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디아민이 우간다 사람이었는데 콩고와 우간다 사람들은 영혼이 간에 있다고 봅니다. 이디아민이 정적을 죽인 다음에 배를 갈라서 간을 씹어버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이 그냥 미치광이 행동이 아니라 자기에게 복수할 수 있는 명분의 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어버린 것입니다. 잔인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창자에 좌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두루마리를 받는데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먹었더니 입에서는 너무 달콤한데 배에서는 쓰더라. 할 때 이 배가 창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의 Context를 위한 하나의 등가번역이지 원래 의미는 창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슨 의미냐 하면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그 영혼의 내밀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사랑이 이 모든 선교의 경륜에 대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니’ 하는 그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니’ 그런 뜻입니다. 혹은 ‘가슴이 에이도록 아팠으니’ 아니면 ‘가슴이 저민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쓰라렸으니’ 그런 뜻입니다. 상처가 나도 쓰라린데 상처를 포 뜨듯이 도려내고 또 하나를 뜨고 또 하나를 떠서 한 갈피 한 갈피 놓으면서 굵은 소금을 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거기가 심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교사의 소명이나 목회자의 소명에서 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한 경험은 항상 극단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어떻게 동반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뼛속 깊이 파고들면서 이 모든 인간들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면서 이 사랑이 들어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눈물입니다. 그 눈물과 고통이 얼마나 극적인지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정상적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리고 정상적으로 직업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제자의 삶을 살고 선교사의 삶을 택하고 목회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변함없이 그 정신을 유지하면서 사느냐 그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선교사는 자기의 사역을 똑바로 보면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역의 현장은 하나님과의 수많은 대화의 창입니다. 그 자신의 사역지를 보면서 병들어가는 영혼들, 영적인 성장이 없는 지체들, 그리고 건설적인 발전이 없는 쇠퇴하는 선교의 현장을 보면서 거기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나님께 큰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일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밖에 없는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나의 인생을 어떻게 나를 위해서 자기를 모두 버리셨던 그 그리스도 예수를 만족시켜 드리면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맨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를 불러주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결국 여기서 이야기하는 ‘스프링크나’가 결국은 창자 속에서 그 속에서 그런 자기가 그 창자로써 더 이상 간절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이 나의 선교와 목양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왜? 그 ‘스프링크나’에 ‘헤아가페’가 불붙었으니까 그런 꿈을 갖는 것입니다. 그 스프링크나 그 창자에 그 아가페가 불붙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회이고 선교의 비전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훌륭한 선교사들로 살다가 새 예루살렘에서 만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