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녹취자: 김정호
우리 교회는 여름수련회가 굉장히 큰 행사입니다. 그래서 많이 갑니다. 사랑의 교회를 통째로 빌려서 숙박시설이 모자랄 정도로 텐트까지 쳐야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이 가는데 그 전에 제가 뭔가 아주 그 중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한 편의 작은 논문도 썼고 그것을 목회자들을 향해서 대해서 강의를 하기도 했고 그것을 다시 평신도들에게 설교로 해서 그 사경회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깨달음이 너무나 커서 그걸 여러분들에게 같이 나누면 여러분들에게 손해나는 시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으시고 우리 1시간 하다가 약간 브레이크하고 한 50분 하고 약간 브레이크하고 한 번 더 하도록 하고 다음에 한 20분 시간 남으면 질문하고 응답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What is pastoral ministry? 목회라는 게 뭐냐? 사실은 목회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사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목이라고 말을 해도 그것은 그래도 목회보다는 약간 좀 구체적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영어로 pastoral ministry라고 하면 저는 네이티브가 아니니까 모르겠는데 영어권 사람에게는 훨씬 더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페스트로링, pastoral 등등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도 여기 우리나라에는 양을 볼 수 없지만 여기는 가축을 많이 키우니까 패스트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겠는가 생각되어서 그 주제를 가지고 지금 우리가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리스어의 성경이 있으신 분들은 그리스어 성경을 보시고 없으신 분들은 폰으로 보시고 같이 읽읍시다. 빌립보서 1장 8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본문의 구조를 이렇게 봅시다. 이제 8절에서는 그다음에 하려는 바울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보증하려고 하는 글귀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지금 감옥에 갇혀서 그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그것을 여기서 설명을 하고 9절에서 내가 기도하노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노라라고 말하는데 뭘 기도하느냐라는 내용이 9절 너희 사랑부터 시작해서 원하노라까지가 모두 기도의 내용입니다. 근데 이것이 제가 발견하기에는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 66권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적인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좀 더 본문을 관찰해 봅시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 수단은 지식과 모든 총명입니다. 그 다음 10절로 넘어가면 그렇게 해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뭐냐면 그 사람들에게 목회하지 않았더라면 안 됐을 그 무엇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첫째가 분별하는 것. 그 다음에 진실한 것. 허물없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잠시 하다 그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하는 것 그게 목표입니다. 그렇게 하는 목표도 더 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한 단계입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있는 게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사도 바울이 내가 기도하노라고 하는 이 내용이 결국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기 전까지 빌립보 교회와 관련을 맺으면서 빌립보 교회에 했던 목양입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그 수단은 지식과 총명으로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목표는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고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 그 목표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제가 강의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기도합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이 아침 시간에 모였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여기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되게 해주시고 지식의 자랑과 세상의 명예를 위해 애쓰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한순간 주님을 위해 제물로 바쳐질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 자신을 갈고 닦으며 예수를 닮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여기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에 주님을 점점 더 사랑하도록 도와주시고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받는 순간이 여태까지 살아온 순간 중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 되게 해주시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 가운데서는 주님을 제일 덜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짧은 시간 부족한 종이 주님이 주신 은혜의 말씀으로 교제를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오늘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목회가 무엇인가 할 때 그림이 참 애매합니다. 제가 목회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사실 개척교회를 하고 5년 뒤쯤 되어서야 비로소 목회라고 하는 게 이렇게 테두리가 그려지는구나 하는 게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다시 한 20년을 지나고 보니까 그 테두리도 정확한 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윤곽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목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심지어 전도를 하고 심방을 하고 설교를 하고 회의를 하고 교회가 커질수록 회의가 많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렇게 돌보는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고 심지어는 교회 빌딩을 지어야 되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와야 되고 직원을 채용해야 되고 목회자를 청빙해야 하고 말 안 듣는 사람은 또 혼내야 되고 징계해야 되고 뭐 수많은 일들이 다 목회 속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공사, 디자인, 식음료까지 호텔 하는 것, 호텔 총지배인하고 목사하고 약간 비슷합니다. 종합 예술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하나씩 하나씩 목회와 연관된 것과 목회 자체를 하나씩 양파 껍질 까듯이 목회와 밀접하게 관계됐지만 그게 목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는 심방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하나의 캐치 프레이즈입니다. 나는 열심히 심방을 하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본다고 하지만 사실 목회는 심방이다. 공식이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하나씩 하나씩 비본질적인 것을 이렇게 벗겨서 옆에 놓고 더 비본질주의적인 것은 저 바깥으로 보내고 마지막에 계속 양파 껍질처럼 까 들어갈 때 그것 없으면 목회라고 말할 수 없는 마지막 남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겠나? 짧게 대답해 보세요. 무엇일 것 같습니까?
답변 : 좀 넓은 얘기일 수 있는데 영혼은 돌보는 목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말씀드리자면 제가 말하는 것은 다시 이렇게 순환어법으로 돌아왔습니다. 돌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개념이 아주 애매합니다. 뭐가 돌보는 거죠? 밥도 먹어야 되고 아프다면 따라가야 되고 굶는다면 담임 목사 사례금이라도 갖다 줘야 되고 이런 게 돌보는 건데 그게 돌보는 게 또 뭐냐고 하면 목양이라고 했는데 목회와 목양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본질이 뭐냐?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할 때 그것이 목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라고 그렇게까지 얘기합니다. 근데 저는 거기다 보태어서 목회란 무엇인가 그걸 말하기 전에 신학적으로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뭐냐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근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초자연적으로 심으시는 것이 regeneration, 중생입니다. 그러니까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성이 이미 하늘로부터 그 사람 속에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걸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게 conversion, 콤베르지오, 회심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계속 북돋는 것,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열매는 결국 사랑입니다. 그걸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 어렵게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차리티 앤드 이스프로스’라는 책에서 그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에서 얘기하는 게 뭐냐면 신령한 은혜가 진실한 증거는 마지막에 사랑이다. 그게 얘기하면 굉장히 복잡한데 어쨌든 그렇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이런 논법을 제시합니다. ‘크레데레’, 믿다의 부정사입니다. ‘크르데레 대운’ 하나님을 목적어로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근데 탈격으로 들어가면 ‘크레데레 대호가들’ 그러면 하나님 때문에 믿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실제로 분리가 되느냐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표적인 게 성경입니다. 성경을 지금 현재 신학자들 중에 아주 일부분만 이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성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거스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박윤선 박사님이 어거스틴의 사상이 어떻게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와 일치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성서관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극찬을 했던 이유가 그의 지독한 ‘스캔티즘’ 회의주의의 그걸 종식시키는 방식이 바로 그 ‘크레데레’의 논리를 가지고 이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얘기하면 훨씬 더 긴데 그러면 똑같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냐면 이제 사랑이라는 주제로 들어갑시다.
목회는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러는데 오늘날 이루어지는 사랑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보면 되게 웃기는 것입니다. 뭐냐면 무슨 사랑이든지 사랑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목회에서 증진해야 할 사랑은 아닙니다. 물론 존오웬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 예수를 믿고 새로 부여된 새로운 본성, 이 두 가지를 칼날처럼 나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본성이 인간 속에서 작동할 때에는 그게 혼재된 가운데 작동하지 여기서 여기까지는 자연 본성이 한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신령한 본성이 한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이론을 먼저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지만 목회의 목표가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될 것이냐 이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아가파오, 아가페로 되어 있습니다. 해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엘레오스라고도 나오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사랑을 나누는데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 에피투미아 이런 식으로 희랍 철학에서 4개로 나누면서 사랑을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이해하시죠? 좀 더 설명할까요? 아가페는 신의 인간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 스토르게는 부모와 자식의 숙명적인 사랑, 에피투미아는 욕망적인 사랑, 필리아는 형제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걸 이틀 하려고 그랬는데 그냥 오늘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 온 러브를 여러분들에게 강의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PT까지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런 식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아가페의 사랑은 그리스어 성경에서 아가파오라고 이야기를 하고 아가페테스 등등 다 이야기하지만 사랑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의 해석을 따르면 어거스틴만이 그런 게 아니라 당대의 교부들이 대부분 그런 논리를 따랐습니다. 그게 뭐냐면 그 사람들은 훨씬 더 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의 교리를 세우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렇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원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스 문학에서는 특히 ‘코이네그릭’에서는 이게 섞여서 쓰이지만 원래는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자기애라고 self love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페의 사랑을 인간이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이 너무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근데 그 동기 자체를 어거스틴은 에로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자기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역시 사랑입니다. 근데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때 이 에로스가 아가페와 지평 융합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에로스로 출발을 했는데 아가페를 만나고 나니까 이 에로스의 사랑을 지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을 만나게 됐는데 그게 아주 흡사한 에로스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랑하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아가페의 사랑과는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부들은 ‘까리따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에서 영어의 charity가 온 것입니다. 라틴어 본문에서 까리따스를 쓸 때 caritisas 이렇게 쓰기도 하고 charitas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어디서는 이렇게 나오고 어디서는 이렇게 나오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까리따스입니다. 카리따스를 개신교회에서는 잘 안 씁니다. 그런데 까리따스를 엄청나게 쓰는 데가 카톨릭입니다. 까리따스 수녀회 등등. 그걸 여러 사람이 번역을 하는데 저는 ‘지순애’라고 번역을 합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사랑. 인간이 하는 사랑 중에서는.
아까 크레데레의 논리를 가지고 얘기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까리따스의 사랑을 갖게 되면 인간은 에로스 사랑이 그 안에 통합돼 버립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하나님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는 말은 말이 나오는데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서 어긋난 사랑이면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을 등져야 됩니다. 아베르지오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자기 사랑이 그 사랑과 일치된 것이라면 굳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미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굳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하나님 보고 ‘하나님 우리 너무 사랑하지 마시고 당신 자신을 먼저 사랑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아마레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다음에 ‘아마레데우’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 사랑 안에 있는 사랑의 두 방향성입니다. 그것이 교부가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받은 게 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은 처음부터 두 개의 사랑이 아니라 까리따스 하나의 사랑 자체가 이미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아마레데움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서 아마레데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뭐냐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까리따스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럼 진도가 안 나가니까 이 정도에서 끊고 그건 여러분들이 사랑 이론에 대해서 따로 공부를 좀 하셔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성경 신학자들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불안함이 뭐냐면 역사 신학을 너무 모릅니다. 그러니까 성경 신학을 하는데 이게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역사신학 하는 사람은 또 성경신학을 또 모릅니다. 그게 한계겠죠. 근데 가능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인터디시플리너리 스터디를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브로드하고 컴프렌시브하고 크리에이티브한 학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할 때의 그 사랑이 뭔지를 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서 그러면 결국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하늘의 자원으로 삼아서 자기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겁니다. 그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뭐겠어요? 그렇게 놓고 본다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러니까 소명을 받은 게 아니라 소명 받았다는 건 얼마든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도 소명 받았다고 자기가 생각하고 오랫동안 목회하던 사람이 이제 그만두고 일반 직업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근데 그건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명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를 맡기시려고 지금 부르시는 거잖아요. 요한복음 21장이. 근데 세 번 똑같이 물은 질문이 뭐였어요? 그리스어에서 각각 다르게 나오는데 그걸 가지고 고전 그리스어의 의미를 가지고 그걸 분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말을 반복하면 호소력이 떨어집니다. 너 나 사랑해? 그 다음에 또 묻고 싶은 것은 좋아해? 없이 못 살겠어? 이렇게 물어봐야지 너 사랑해? 사랑해? 세 번 얘기하면 놀리는 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의미를 주목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었던 질문이 뭐냐면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네가 나 배신한 거, 그건 문제 안 된다. 네가 정규 교육을 못 받은 거 문제 안 돼. 그러나 이제 도날트 거스리 같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정규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가 무식했다는 증거는 아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중 가장 유려한 문장으로 쓰인 게 베드로전서입니다. 우리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헬라어 전공한 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의문이죠. 근데 어쨌든 그런 건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건 Do you love me? 니가 Did you love me?가 아니고 Will you love me?가 아니고 Do you love me? 현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싶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가 이것을 기가 막히게 연결시키면서 소명이 뭐냐고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소명은 그 사랑 때문에 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그 비참함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일반 어떤 일도 자신에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게 그게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동기가 되어서 신학을 하고 그게 동기가 되어서 개척을 하고 그게 동기가 되어서 찬양 인도를 하고 그게 동기가 되어서 이중직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게 동기가 돼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개인의 성화 문제와도 또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신학 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라고 하는 챕터1에서 상세하게 다룬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게 목회자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말로, 카이 말로. 그리스어에서는 양적으로 점점 더 증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다가 맥주 같은 것을 부으면 거품이 일어나잖아요. 거품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납니다. 말론 카이 말론입니다. 빵이 부푼다든지 멈춤이 없이 계속해서 커지는 것. 그게 말론 카이 말론입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정도 사랑하면 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끝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점점 더 성도들이 너희 사랑이 풍성케 되고 할 때 나온 게 그 사랑의 해 아가페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페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까리따스라는 겁니다. 그 까리따스가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것은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는 까리따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비중생자에게는 파서블리티가 있고 그 까리따스의 파서블리티가 있고 신자에게는 리얼리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 사람이 은혜 안에서 기도 많이 하고 순종하고 그렇게 좋은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면 그 까리따스가 크고 죄 가운데서 살면 거의 없는 것처럼 뭉개지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커지고 작아지냐를 갖다가 제가 420페이지로 쓴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유장한 가르침들이 완전히 단절됐습니다. 그러니까 ‘야, 우리 같이 셰어하자. 불쌍하지 않냐. 도와줘라’ 그게 모두 까리따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휴메니테리안 러브와 휴메니테리안리즘과 까리따스가 혼돈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동성애도 용납하고 불의도 용납하고 이러면서 굉장히 정체성 자체를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사랑이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그 사랑을 일으켜주마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그 사랑이 너희 사랑이. 너희 사랑이라는 것은 소유를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까리따스를 점점 더 풍성하게 하며 카이 말론 카이 말론. 그 다음에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페리슈 에세라고 얘기합니다. 근데 여기 레스 알랜드 판에 보면 페리슈에라고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페리는 주변이잖아요. 쉐에는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려드리면 샘이 있는데 이렇게 우물처럼 만들어놨습니다. 근데 이게 계속 물이 떠가는 사람이 없어서 물이 계속 펑펑펑펑 솟아 나가지고 가장자리에 이렇게 넘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이렇게. 그 그림이 페리슈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이렇게 아구까지 꽉 차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계속해서 부어져서 이게 계속 흘러넘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이 뭐와 똑같았냐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넘쳐서 그것이 흘러넘쳐서 흘러가는 것. 그게 말하자면 종말론적인 사랑의 비전이고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게 하는 하나의 내적인 자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원이 어떻게 이 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가를 생각하면서 삶을 지도하는 게 두 개 같이 가야 되는데 이 삶이 없이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하면 신비주의 쪽으로 가기가 쉽고 이거는 아예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내버려 두고 어떻게 목사가 그따위로 살 수 있냐. 그 따위로 살 수 있습니다. 엉망인 사람들 많습니다.
미국 유학을 가는데 갈 때 아내와 올 때 아내가 다릅니다. 그리고 둘이 친구가 유학을 갔는데 아내가 바뀌어 가지고 돌아옵니다.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이름만 대면 다 하는 모 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모 둘이 한 사람이 너무 남편 때문에 괴로우니까 기숙사에 가서 자기 친구 사모를 만나서 괴롭다고 얘기를 하고 며칠 후에 둘이 동반 자살했습니다. 우리 아들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지식이 없어서?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사명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계속 넘쳐야 합니다. 하나의 명제에 도달했습니다. 목회는 사랑을 넘치게 만드는 것이다. 전도는 사랑을 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전도된 사람은 목회를 잘 해서 사랑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한번 따라서 찬송해 봅시다. 큰 은혜를 주신 예수시니. 할 수 있겠죠?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다음이 중요한데 그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 사랑을 증진시킬 것이냐? 그래서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서 자기 견해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저는 이것이 신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탐구의 주제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그럼 사랑이 계속해서 이렇게 막 흘러넘치기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이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물인데 이 물을 불로 바꿔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물이 옹달샘에서 넘쳐서 주변의 울타리를 주변의 가장자리를 넘어서 이렇게 쏟아져 흐르는 것 같은 그림을 불길로 가져가 봅시다. 목회는 무엇이냐면 사랑의 불씨 자체가 없는 사람을 불씨를 지펴서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게 전도고 사랑의 불씨가 모든 신자 안에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은 불씨로만 남아 있고 어떤 사람은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근데 그 불꽃을 계속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모든 관심은 오직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지금 하나님을 작년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걸 가지고 자신의 목회를 평가를 해야 합니다. 칼빈이 말합니다. 교회의 의미는 모이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에 달려있다. 그 불이 진짜 불이냐? 온 세상이 어두워도 바다가 어두워도 항구를 수천 개의 조명탄을 쏴야지만 배가 겨우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등이 하나만, 불꽃 하나만. 옛날에는 거기다가 고래 기름을 태워가지고 이렇게 등불을 했습니다. 그거 하나를 보면서 수많은 배들이 폭풍 속에 안전하게 들어왔습니다. 그 불꽃이 계속 다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걸 타오르게 하는 수단은 뭐냐? 하나님이 하시겠지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일만 하고 목회가 잘 되냐? 넌센스입니다.
미국을 갔는데 특이한 목사를 만났습니다. 엄청 큰 교회였습니다. 근데 문제가 생겨서 목사님이 쫓겨나고 후임자가 왔는데...아침에 새벽기도 와서 아침에 한 9시쯤 와서 기도하고 여섯 시에 퇴근한다는 (겁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심방도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목회입니까? 아니 그러면 산속에 들어가서 수도사를 하지. 넌센스입니다. 두 개가 필요합니다. 자기는 기도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기도가 사람의 진심의 원인이 아니라 다른 게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두 개를 듭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 딱 두 개를 듭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뭐라고 나오냐면 에피그노시스라고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신학하신 분들 많으니까 그노시스가 얼마나 심오한 단어인지 아시죠? 아마 저의 판단으로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딥 미닝을 가지고 있는 단어 10개를 꽂으라고 하면 상위 5개 안에 들어갈 단어가 그노시스입니다. 그래서 기노스코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뭔지 아세요? 야다입니다. 역시 야다라는 단어도 구약에서 딥 미닝을 가지고 있는 단어 리스트 10개를 꼽으라고 하면 거기에 들어갈 동사가 동사 중에서는 거의 첫 번째라고 말할 수 있고 전체 단어를 동명사, 명사 다 통틀어서 형용사까지 통틀어서 10개를 꼽으라고 해도 상위에 들어갈 때 단어가 야다입니다. 야다가 처음 쓰여진 곳이 어딘지 아세요? ‘아담이 하와와 동침을 하니’ 그래서 영어 사전 옛날 것을 찾아보면 옥스퍼드 대사전을 보면 세기별로 나옵니다. 그런데 세기를 위로 올라가면 이게 헤브 어 섹슈얼 인터코스라고 나옵니다. 섹스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심오한 단어입니다. 이것도 얘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거두절미하고 얘기하자면 그노시스라고 하는 단어 그 자체가 그리스어인데 그리스어가 쓰여 질 때에는 여기에 쓰여 질 때에는 사실은 그리크 마인드보다는 그리스어는 도구였고 이걸 사용할 때의 이 마음과 생각은 굉장히 히브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재해석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약을 해석하면서 고전 헬라어 사전을 참고는 할 수 있는데 그걸 완벽하게 따르면 거기서 뭔가 디퍼런스가 생겨납니다. 그걸 조심해서 신학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해야 됩니다. 저보다 더 성서 신학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저는 목회자로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노시스는 경험을 동반하지 않은 지식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경험을 동반한 지식입니다. 두 개가 같이 인격화된 그런 지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피그노시스라는 것은 뭐냐? 에피라는 전치사는 여러분들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래서 결국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하고 완전한 지식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뭘 이야기하고 싶었냐면 시간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에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이 생겨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지성 안에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관념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전개가 된 거고 그 전개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참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렇게 놓고 본다면 하나님 안에 사물에 대한 관념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물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는 이 사물 하나하나를 완전하게 창조하시는 앎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전부 다 연관시켜서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 하는 그 연관에 대한 지식이 있으신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그걸 그리스 철학에서 메덱시스라고 부릅니다. 목적 연관이라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있는 컴퓨터는 자료를 보기 위한 것이고 이것은 차를 담기 위한 것이고 여기 마이크, 책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이 방 자체가 강의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곳입니다. 모든 물건은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기여를 하는 방식으로 목적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날의 학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냐면 파편성입니다. 로마서 7장 전공자는 8장을 모릅니다. 그리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오퍼리티입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7장 전공자로서 8장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요새는 절까지로 갑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인테그리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학문의 독창성이 안 나옵니다.
엔트라이트의 그 견해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엔티라이트를 만날 때 옥스포드 출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책을 쓰세요? 그러니까 나는 어떤 주제가 주어지면 한나절 반의 한 권을 완성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단 다 쓴 다음에 각주를 찾는데 한 한나절 반이나 이틀 정도 걸린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못 쓰지만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결국 통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뭔 주제를 이야기를 해도 창의성이 나와서 원래 목사들이 그런 에피그노시스를 가진 사람들이 목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면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오릅니다. 그런데 밑에 그 불길이 계속 타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질량이 있는 그 땔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지푸라기라면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마자 2, 3초 안에 훅 타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근데 거기에 만약에 통나무가 들어가 있다면 오래 탈 것입니다. 잘 마른 통나무가 있다면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 통나무 중 두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식입니다. 그게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미안한데 여러분들이 전공을 막 공부하는 것은 에피그노시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어떤 정보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것이 어떻게 내 인생과 목적 연관을 이루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목적 연관을 이루고 세계와 목적 연관을 이루고 심지어는 자연 사물들과 목적 연관을 이루면서 이 창조 세계를 찬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가 그것에 관한 지식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생수 하나를 연구하는 지식도 필요하지만 생수와 다른 물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같이 공부하면서 그렇게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학자조차도 전문의 하기 전에 2개월씩 6개 과를 다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외과 할 사람도 정신과, 내과, 내분비과부터 해서 다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다 이해를 하고 그 다음에 그 중에 하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에피그노시스라는 건 뭐냐면 바로 그렇게 그 지식 하나하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함께 연관된다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면 모든 사물이 이렇게 감각으로 볼 때는 따로따로 있지만 그것을 에피그노시스를 가지고 볼 때에는 그 모든 사물들이 목적 연관을 이루면서 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지식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개별적 사실에 대한 지식과 보편 개별적 사물들의 보편적 질서에 대한 지식이 하나가 된 형태의 지식인 것입니다. 시편이 얘기하잖아요.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니’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메섹의 체험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역사도 알고 유대주의도 알고 로마니즘도 알고 헬레니즘도 알던 사람에게 한순간에 불이 들어오면서 그것들이 다 연결이 되면서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는데 되게 출렁거리는 비단처럼 온 우주 끝까지 펼쳐졌는데 그게 하나님의 역사의 전개의 드라마였고 그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구속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 깨달은 건 아닙니다. 우선 스데반이 이야기를 했고 구약에서도 이미 에스겔이나 요엘 같은 똑똑한 사람들은 계시를 받아서 자기는 다 몰라도 다 예언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 에피그노시스 그것을 추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 공부를 했을 때 성경, 어떤 책을 읽었을 때 거기에 발견된 신학적인 사실이 나에 대해서 뭘 말해주고 있는가. 내 인생에 대해서 이웃의 삶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찾을 때 결국 거기서 그리스도가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의 에피그노시스를 전달해 주는 것. 그래서 무엇을 말하든지 그렇게 전달해 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한 2년 전, 제가 한신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기장 측에서 한다고 그래서 기장 측에서 합동 측을 부르는 것이 약간 어색한 것인데 그 목사님이 저를 좋아해서 불렀습니다. 설명을 하는데 그때 그 사도바울이 1장에서 이스트 다이 이스트 데이라고 얘기하잖아요.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유익함이라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도 나는 내게 유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감동을 안 받습니다. 그때 제가 세포 생물학과 천문학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세포의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보프토시스 죽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 세포의 죽음을 통해서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그림과 7800만 광년 떨어진 독수리 성운에서 어떻게 별들이 부서지고 부서진 별 때문에 별들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제가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감동 받았던 대목이라서 그것을 그 필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는데 엄청 감동을 받아서 거의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그렇게 지식이 연관 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니까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높은 산에 올라서 산과 강을 바라다보면서 이 속에 침전시켜는 겁니다. 그래서 에피크스시스가 증대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을 한 사람은 철학자가 되야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안 읽으면 안 됩니다. 근데 그런 방식으로 철학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소화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더 할 얘기가 많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라고 그랬습니다. 지식과 총명을 수단으로 해서 ‘으로’가 ‘엔’으로 나옵니다. 아내라는 뜻도 있지만 기구, 수단의 뜻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이것은 아이스 다노마이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놀라다’입니다. 그리고 아이스데시스도 굉장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아이스데시스. 그런데 이것을 라틴 벌게이트 역에서 센수스라고 번역을 합니다. 센수스가 무엇입니까? 센스. 감각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재미있습니다. 뭐가 재미있냐면 감각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오감을 가지고 있는 거잖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혓바닥으로 맛을 보고 살갗으로 느낌을 받고 귀로 들리는 거잖아. 논리적입니까? 직관적입니까? 내가 이렇게 딱 볼 때 보이면 그냥 바로 들어오는 거지 여기에서 이렇게 눈에서 뭔가가 출발할 때 이렇게 논리 쪽으로 계속 이렇게 출발해서 들어와 가지고 그다음에 이렇게 해서 논리 쪽으로 들어와서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칸트 이후에는 그걸 오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칸트 이전에는 우리가 초월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아주 고상하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칸트를 중심으로 이 오성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현실적이고 육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아이스데시스라는 것이 정체가 뭐냐. 이게 모든 총명이라고 합니다. 그걸 영어 성경에서는 언더스탠딩이라고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존 노크가 쓴 온 휴먼 언더스탠딩이라는 책 기억하죠? 그래서 그걸 어떻게 번역을 합니까? 여러 가지로 번역을 하는데 고전적으로 번역해 ‘인간 오성에 관하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사실 그게 읽는 사람이 볼 때는 헷갈리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로 그걸 오성이라고 했는지를 잘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 오성론입니다. 이해론입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뭐냐면 얘기하면 깁니다. 합리주의와 관념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그게 칸트에서 통합이 되는데 어쨌든 아이스데시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어떤 통찰입니다. 인사이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센스인데 이게 어떻게 보면 내일 강의하려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야기하는 뉴센스 같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에 의하면 중생할 때 뉴 엔 심플 센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플 아이디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신령한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감지 능력이 들어오는 겁니다. 비중생자였더라도 그게 없지는 않은데 중생과 함께 확실하게 심겨서 그걸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중생자는 찬송 부르면서 딴 생각을 합니다. 이 종이가 참 좋네. 악보를 왜 이따위를 그렸어. 이렇게 생각하는데 신령한 사람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터치를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스데시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랑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두 개가 필요한데 그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겉모습을 가리키는 것은 목사가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그게 생물이면 생물학자가 해야 될 일이고 그것이 만약에 미술이면 미술학자가 할 일인데 그것이 총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목사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성경 진리에 대해서. 지저스 다이드 포 어스. 네 단어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그걸 완전한 지식으로 설명을 해줘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면 그런 어떤 영적인 통찰, 쉽게 얘기하면 믿음이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장 뛰어난 아이스데시스입니다. 누가? 믿음의 저자는 성령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된 지식과 성령. 그러니까 그 참된 지식은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은 결국 하나님으로 수렴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념으로 수렴하고 하나님의 관념이 세계 속에서 전개될 때 결국 그 전개되는 나타남의 정점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 세계 창조에 대한 지혜가 펼쳐져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 모든 존재에 대한 확고한, 완전한 지식을 전달하고 성령이 역사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물을 능가하는 통찰을 갖게 될 때 그때 이 사랑은 계속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이라는 말로 거의 짝으로 쓰는 단어, 용어가 된 것입니다. 브레드 엔 버터처럼 지식만 따로 다니지 않습니다.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 사랑과 지식, 사랑과 지식이 똑같이 따라다닙니다. 그게 베드로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은혜는 사랑이고 지식은 결국은 지혜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양대 기둥입니다.
그럼 여기까지 얘기한 걸 정리를 합시다. 결국 결론은 목회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근데 그 사랑을 어느 정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물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불길에 비유한다면 그 불길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두 개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그것이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다. 에피그노시스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물의 총체적인 지식이고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과 보편적 질서에 대한 지식이다. 그다음에 아이스데시스는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믿으려고 끊임없이 하고 성령이 그에게 믿음을 주실 때 그 두 가지가 믿음이 점점 성장하고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거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확 (일어난다). 그래서 알리기에리 단테가 자기의 신곡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참된 것을 보는 즉시 선을 향한 사랑의 불길은 타오르나니. 이게 뭔가 통찰을 가지고 있는 건데 그걸 보면서 사랑 같은 참된 것을 딱 발견할 때 이게 참되구나. 그게 나하고 뭔 상관이 있나 이렇게 되지 않고 참된 것을 딱 발견할 때 선을 향한 사랑의 불길이 확 타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지식과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랬는데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점점 더 풍성해지는지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기 신학 대전에서 아주 재미있는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냐면 다섯 단계로 설명을 하는데 첫째가 뭐냐면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요 그러니까 성령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 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지식과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 해준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것 같은 에피그노시스는 공부도 많이 해야 되지만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그것이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첫 번째 성령은 진리를 주신다. 그다음에 그런데 두 번째 논리 근데 성령은 사랑이시다. 당연히 성령은 사랑. 근데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그래서 사랑이신 성령은 최고의 애정의 표현이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거다. 네 번째가 뭐냐면 사랑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심는다. 사랑은 올바른 성향입니다. 아까 얘기한 그 비극적으로 그 신학 공부를 마치고 있는 그런 사람은 한국에 돌아와 가지고 무서워서 활동을 못합니다. 저 시골구석에 꽁꽁 숨어있는 겁니다. 유명해지면 큰일 납니다. 왜? 가족 구성원이 옛날에 유학 갈 때 가족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뭡니까? 박사학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사람 자체가 디스포지션이고 그다음에 텐던씨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깨끗하게 정리를 해서 영혼의 텐던씨, 마음의 디스포지션, 프로포지션.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성향입니다. 그래서 한 번 사랑에 빠지게 되면 쉽게 철회가 안 됩니다 철회가 안 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 사람들도 철회가 안 돼서 지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데 올바른 성향을 이어야지만 참된 사람입니다. 올바른 성향을 심는데 다섯 번째가 뭐냐면 그렇게 되고 나면 신자는 그 올바른 성향 때문에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해되죠? 성령은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근데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성령은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은 성향을 싣고 그 올바른 성향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게 만들어서 이 다섯 개가 계속 순환관계로 돌아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입니까?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빨리 해서 끝내겠습니다.
목회의 목표입니다. 목표가 여기서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그리고 마지막에 의의 열매가 풍성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분별한다는 도키 마조입니다. 시험하는 것입니다. 진짜 처음에 나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헷갈렸습니다. 이게 진짜 나무인가, 플라스틱인가. 얼마나 기술이 발달했는지 호텔에 들어가도 구분이 안 됩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열쇠를 긁어봅니다. 긁었는데 속에도 똑같으면 그건 진짜 원목입니다. 긁었는데 겉하고 속이 다른데 둘 다 나무면 스키다를 붙인 것입니다. 나무를 껍질을 깎아가지고 다른 나무에 살짝 붙인 것입니다. 근데 긁었는데 비닐이 뜯기면서 속에서 딴 게 나오면 이것은 프린트한 것입니다. 프린트 해가지고 나무에 합판에 접착시킨 것입니다. 그게 도키 마조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피터 오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이 많은 것들 중에서 클루셜한 것,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 그러니까 이럴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는데 이건 양보해도 되는 것과 절대로 그걸 양보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분별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벵겔 같은 사람은 더 가슴에 와 닿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좋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감각으로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모두 다 예쁘게 보이는데 진짜 좋은 자매가 누구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게 바로 분별입니다. 분별을 잘못해서 그런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의 목회를 하는 첫 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뭔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면서 자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인들을 자기 몸종 소처럼 삼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무한대로 의존하게 하는 목회자들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할수록 강대에서 설교를 듣는 것이면 충분한 교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님, 할까요?” “기다려 봐. 기도해 보고.” 그리고 대박이 터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굳게 믿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왔다고. 그런데 그렇게 막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고해서 망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입을 닫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게 목사가 할 일이라는 겁니다. 뭐냐면 그렇게 안 하면 분별을 못하면 주체적으로 못 삽니다. 그 정도로 더 할 얘기가 많은데 끝내고요.
두 번째 진실입니다. ‘진실하여’라고 했는데 이게 재밌는 단어입니다. 에일리 크리니스입니다. 에일리 크리니스는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노라는 단어를 합성한 것입니다. 크리노는 판단하다고 에일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두 개입니다. 에일리가 일반적인 해석이 있고 또 특별한 해석이 있습니다. 근데 저는 둘 다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은 에일리가 햇빛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의 진품과 가품을 가려내기 위해서 로마 시대 때에 했던 아주 흔한 방법 중에 하나가 햇빛을 비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돈 받으면 시장에서 항상 햇빛에 비춰 봤습니다. 홀로그램 나오면 진짜인데 홀로그램 없으면 그게 복사한 것입니다. 근데 햇빛에 비쳐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는 적은 수의 학자이기는 하지만 훨씬 설득력 있는 의견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원래 에일리가 그리스 고전 그리스어에서 드물게 쓰는 단어인데 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체는 곡식을 막 빻아지고 확 집어넣고 그걸 이렇게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멍보다 작은 것은 다 빠져나오고 굵은 거는 안 빠져 나옵니다. 그게 이렇게 쌓였을 때 그 하나하나를 골라낼 수 없어서 체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게 진짜와 가짜가 가려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검증 과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걸 택하나 저걸 택하나 결론은 똑같습니다. 에일리 크리니스라고 하는 그 말은 결국 햇빛에 비춰서 사실인 것이 입증된, 체질을 통해서 통과한 검증된 그런 뜻입니다. 어쨌든 검증되었다, 확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진실함입니다. 그게 라틴어에서 이야기하는 웨룬입니다. 라틴어에서의 웨룬은 베르타스와 관계가 있고 결국 베리타스는 객관적으로 있는 겁니다. 내가 요즘은 생각이 다릅니다. 요즘 칸트가 그걸 제공을 했습니다. 진리가 바깥에 있다고 믿었던 저 플라톤부터 정신 나간 작자들 때문에 이 학문이 다 개판이 된 거다. 그리고 너희는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내려오는 그런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이런 사람들이 전통 속에서 내려오는 대륙의 합리주의를 가지고는 안 된다. 저기 독일에서 합리주의가 나왔지만 이걸 가지고는 사물을 설명을 못한다. 이거 틀렸다. 그다음에 이제 영국의 경험론은 존 로크부터 시작해서 경험론자들이 나오는데 그걸 가지고 세계관로 삼으려고 그러는데 그것도 틀렸다. 그리고 두 개를 비판하면서 기가 막히게 두 개를 비판을 하면서 제3의 길을 갑니다. 그걸 한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요새 깊이 빠져 있는데 그것을 보면 오늘날 왜 이 세계에서 세계관을 가지고 사나 볼 수 있습니다.(79:22)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대륙의 합리주의와 고국의 경험담이 두 개울이 흘러서 와서 칸트에게서 호수를 이루고 칸트에게서 그 호수가 다시 그 이후의 세대로 흘러갑니다. 칸트가 그걸 종합해내니까 이걸 비판하는 세력들이 생겼납니다. 그래서 우파적 비판자들이 이제 케르케고르, 니체 같은 사람이 보편 현상학입니다. 이렇게 보편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개별적인 개념이 나오고 그다음에 정신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좌파로 물질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느냐고 하면서 공격을 한 사람들이 마르크스로부터 시작을 해서 포이에르바하 이런 사람들이 이어지면서 나와서 결국 뭘 공부하든지 간에 그냥 근대 철학에 있어서는 그냥 칸트가 바이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걸 왜 읽느냐고 묻지 않고 그냥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전부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왜 그러지? 나훈아가 테스형이라는 노래에서 얘기한 게 그것입니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제가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멀리는 칸트 때문에 그렇고 가깝게는 프랑스의 68혁명 때문에 그렇게 됐단다. 공부를 좀 더 하거라. 나훈아. 그래서 남준형이라고 물어봤으면 대답을 하는데 테스형이라고 물어봐서 대답을...여러분 68혁명하고 칸트는 꼭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난 8개월 동안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산책하고 같이 대화하고 놀고 그랬습니다. 최근에 니체를 통해서 기독교의 새로운 것을 굉장히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몇 시간짜리 간증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허물없음’입니다. 아프로스코포스인데 흠이 없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인데 신학적 흠과 윤리적 흠입니다. 이해하시죠? 신학적 흠과 윤리적인 흠이 없어야 합니다. 마지막 완성은 윤리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윤리가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지식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신학적인 흐름이 있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삶은 가짜 열매입니다. 참된 지식에서 참된 사랑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칸트가 이야기하는 그 사랑의 열매는 우리가 얘기하는 것과 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냐면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그랬습니다. 디카이오 슈네입니다. 여기 성서 신학하신 분들이 많은데 평생 연구해도 못할 개념 중에 하나가 디카이오 슈네입니다. 구약의 제데카에 대한 개념일 것입니다. 그것도 아마 텐 리스트 안에 들어갈 엄청나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의의 개념을 연구할 때에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게 뭐냐면 의가 결국은 정의라는 것입니다. 디카이오 슈네가 결국은 정의입니다. 정의가 어떻게 사랑과 조화가 되느냐 그것을 기가 막히게 완성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지난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를 다섯 달에 걸쳐서 라틴어를 대조에 가면서 두 번을 읽었는데 생애적인 감동을 받았습니다. 책을 쓰다가 지금 멈췄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첫 서문에서 ‘하나님이시여 제가 젊어서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완성되었습니다’ 13년 정도.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성서 신학적으로 디카이오 슈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 없는 상태가 디카이오 슈네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면 율법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의롭다고 할 때 사회적 정의도 다 나오는데 하도 기니까 그냥 간단하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 이게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뭘 통해서 보여주냐?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상태에 딱 맞는 게 의입니다. 그런데 그게 딱 맞으면 그게 율법적인 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 자체를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그 율법 앞에서 결국은 디카이오 슈네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결국 디카이오 슈네의 개념 자체가 뒤로 나오면서 그 성경 구약 속에서 이 디카이오 슈네의 개념이 부여된 디카이오 슈네의 개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대표적인 제사 제도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서 이런 명언을 남깁니다. 뭐냐면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함으로 지혜로워진다. 동의 되죠?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에 참여함으로 지혜로워지시는 것이 아니다. 동의 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으니까 우리는 모르는 게 있으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함으로써 ‘아, 이런 거구나. 내가 잘못 생각하는구나’ 이러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달으면서 또 다른 자기가 완성되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반복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함으로 지혜롭게 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런 식으로 지혜로워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러신데 거꾸로 사랑의 정의에 관해서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올바른 것이 정의지만 그걸 하나님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 준 것도 디카이오 슈네다. 하나님에겐 그럴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거기서 유장한 그리스도의, 그 하나님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 그다음에 개혁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개념, 인퓨테이션 그다음에 인퓨테이션 오브 신과 인퓨테이션 오브 라이시스네스의 유비 관계 이런 것들이 다 그 유장한 신앙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뭘 얘기하고 싶은 거냐면 같은 이야기를 삼위일체에서 또 얘기하는데 그게 뭐냐면 사랑이 정의를 완성합니다. 그러니까 아가페가 디카이오 슈네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완성하냐면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이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는 그 하나의 표현에 그런 방대한 신학적인 사유를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교 1학년이 썼으면 그걸 다 못 담습니다. 그런데 이걸 쓴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를 이 안에 구약사부터 모든 개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가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득해질 때에 많은 사람이 사람을 향해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결국 그 사람 안에 그 의의 열매의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독사입니다. 그게 글로리파이입니다. 이상 끝입니다. 자, 질문? 아니면 자기 의견을 얘기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