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S 강남지역선교대회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5-8)
녹취자: 박미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위대한 선지자 였습니다. 저는 이선지자를 매우 좋아하고 그래서 이 선지자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라고 그렇게 불러봅니다. 이때는 북쪽에서는 앗수르라는 신흥제국이 일어나서 판도를 넓혀가고 있었고 대항하기 위해서 주변의 국가들이 연합을 이루어 도전했으나 그러나 모두 무너져서 이제 왕국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이 융성하고 있었고 이제 이 유다를 두고 이제 이두나라 충돌할 국제적인 정세였던 것입니다.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조정에서는 옛 세력인 애굽을 의존해서 국가의 운명을 지켜야 한다는 애굽파와 그리고 신흥왕국과 함께 연대를 이루어서 이제 이 나라의 안녕을 보존해야 한다라고 하는 앗수르 파로 나뉘어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도탄에 빠져 이제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사야 선지자를 세우십니다. 오늘 이 6장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절망적이고 혼탁한 시대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바꿀 준비를 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을 봅니다.
잠시 성경에서 나와서 한번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 그리고 선교하고자 하는 이 세계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동안에 격동치는 역사를 경험했고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그리고 커다란 세계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은 백 년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눈에 보이는 변화 뒤에 있는 정신을 한 번 읽어보십시다. 이제 이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신학교 졸업생이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교회를 개척하라 그래서 이제 교회를 개척했는데 비유를 하자면 믿습니다 하고 문을 확 열고 나가보니까 벼랑이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한 7, 8년 하신 다음에 소회를 여쭤보았더니 그 분 하는 말이 나는 예전에 교회가 안되는게 이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개척교회를 몇 년 해보니까 교회는 원래 안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되는 교회만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된다 라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우리에게 우울한 그림자를 던져 줍니다.
여러분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무신론입니다. 예전에 무신론은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무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있을까 하는 회의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에 찬 무신론입니다. 지금도 영국에 가보면은 영국에 이층버스에 막대한 돈을 들여서 광고를 붙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광고를 내겠다고 하니까 잠깐 사이에 몇 억원의 돈이 모금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 무신론은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고 그리고 국제무역을 통해서 제화들이 흘러가고 무역이 이루어지는 그 통로를 통해서 함께 이 무신론이 무서운 속도로 잠식해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은 중국 선교에 관여하고 계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알 것입니다. 이미 연안 지역에 있는 중국의 사람들은 이미 이십년 전에 만났던 중국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물질주의가 심각하게 들어와 있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신은 물론이고 고전적인 가치들까지도 모두 버렸습니다. 이러한 무신론이 우리들의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발전하는 개발도상국가를 포함해서 철저하게 사람중심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 속에 신의 존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주체라고 생각하는 이 인본주의 사상이 엄청난 확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기독교 뿐 만 아니라 많은 종교들 특별히 인간을 신에게 복종 시켜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는 아주 냉소적인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가 다시 각광을 받고 티베트의 종교를 비롯해서 이렇게 제 3세계에 있는 종교들 심지어 힌두교를 비롯한 신비주의 종교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기독교의 선교 전망은 매우 어둡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기독교 사상 자체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사상의 코드와는 정반대의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1962년 이미 카톨릭에서는 다가올 이런 시대의 코드를 읽고 종교 다원주의로 과감하게 전환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반드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가 방법과 길이 다를 뿐이지 그 모든 종교는 참되게 믿기만 한다면 모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이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상이 아주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반감을 받지 않고 수용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자기 주장 자기 종교의 독특한 교리 자기 종교의 독특한 사상들을 모두 포기하고 그리고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이러한 평균적인 사상이 되어야지만 그나마 세상에 손가락질 받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나라만을 생각해봅시다. 오늘 장로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이 경제적인 성장을 기이하게 생각합니다. 폐역뿐인 나라에서 이제 무역 십대국 안에 드는 나라가 되었고 EU와의 FTA가 체결되면서 앞으로 5년 내에 무역 교역액이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일본 4위 독일 그 다음 5위가 한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잘 살게 됐습니다. 부의 불균형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많이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이제 가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사이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이런 사상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현대인의 마음 속에 이 기독교 사상을 싫어하는 앙심같은 것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남을 위해 베풀 줄 모르고 그리고 도덕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한 행태를 보이고 하는 이런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시민들의 도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이 눈치 없는 행동들 이 모든 것들이 싸잡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고 이제 이러한 세계적인 정신이 우리들이 나아가서 선교하는 이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우리들이 선교하는 남미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발전이 되면서 이 모든 사상들이 밀물처럼 함께 쓸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옛날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박한 정신으로 그저 사람들에게 가서 열심히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는 순박한 정신 가지고는 충분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대답을 오늘 우린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에서 이 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은 이제 성전에 들어가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언약 백성이었기 때문에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거기에서 두려움 속에 떨며 엎드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는 비로소 고백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중에 있으면서 만군의 여호와를 뵈옵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화로다 나여 망하였도다 라고 하는 이 망하다 라는 히브리 단어가 아바다 라는 단어인데 박살을 파괴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 나에게는 이 커다란 재앙이 임하였구나 나는 이제 산산히 부서져 박살이 나서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렀습니까? 아니 요즘 말로 하면 이 사람은 성전에 가서 지금 전례 없는 은혜를 받은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저 들락거리는 그 성전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고 스랍 천사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할렐루야 라고 해야지 왜 이제 나는 재앙이로구나 나는 이제 커다란 화를 당하는구나 나는 이제 박살이 나서 산산이 부서지겠구나 라고 울부짖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바로 구약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이 선지자들의 소명체험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 한 시대에 태어나면 모두 그 시대에 자식들일 뿐인데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영광 온 땅과 만군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온 땅과 이 모든 세계 위에 가득한 충만한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일과 함께 소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이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이라고도 말하고 혹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체험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두 가지 의미를 함의 합니다.
첫째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셔서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인간은 자기가 이 모든 세계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주 티끌과 같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아주 하찮은 그런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자연세계 속에서도 겪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발 앞에 펼쳐진 수천 미터의 만년설이 덮인 영공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거기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미미하고 티끌 같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느낌들을 무한대로 확장한 그것이 거룩함의 한 국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자신감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높고 뛰어난 존재이시고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이 피조물들은 그 분을 덕 입어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그 티끌 같은 존재가 하나님이 불면 날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죽어서 뼈를 갈아서 모두 화학 비료로 바꾸면 980원어치 밖에 되지 않는 그 것이 인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교만과 그리고 자기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자기가 자신의 존재가 티끌 같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룩함의 또 다른 국면은 도덕적인 것과 관련이 됩니다. 하나님도 사람이 있으시고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고 우리에게도 의로운 것이라는게 있고 하나님도 의로운 분이시지만은 그러나 이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을 통해서 이 선지자는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불결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선지자는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인데 이 입술이 자기가 부정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입술은 모두 자신의 마음과 영혼 속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그런 입술이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존재가 얼마나 더럽고 죄악으로 가득찬 존재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그는 오히려 남들이 박수 칠 그곳에서 두려워 떨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났으나 그 시대의 사상과 결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한 사람이었으나 그 시대의 가치와 결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무친 그리움으로 그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추게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구약의 선지자를 세우는 공식은 놀랍게도 신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신약 속에 이어질 때에는 놀랍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기독론적인 전환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그 완전하심 앞에 자기가 더러운 죄인일 뿐이라는 이 모든 종교적인 체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길을 갑니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이상하게 신학교는 미어집니다. 정말로 이 나라의 있으면서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미친 듯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생명을 드리는 청년들은 적은데 선교사 지망생들은 미어집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명 그리고 선교의 이 놀라운 일들을 이 세상의 비즈니스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 그런 가벼움들이 신학교마다 그리고 선교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위험할 정도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준근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선교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지 선교를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조국에서 먼저 보여주어라 백명을 너희들이 전도해서 그 백 명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에 헌신해보지 않은 사람은 선교 나가지 마라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고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믿지만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교의 길을 떠나겠느냐고 말입니다.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선교대회에 무슨 차가운 물을 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받은 소명을 가슴에 새기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힘든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대접도 받지도 못하는 선교사의 길에 우리들이 왜 들어서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영혼과 그리고 인간의 자랑을 위해 이 길에 들어섰습니까? 우리에게 미래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세상에서의 보상의 기대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선교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이 세상 사람들 중에 한사람이었고 이 세상에서 번영과 성공을 꿈꾸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이 세상의 마귀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2000년에 죽은 그 나사렛에서의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그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그 세계 창조로부터 시작된 위대한 역사가 오직 한 가지 사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미래의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비천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너무나 깊이 찔렀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고통의 원인이 물질 때문이고 질병 때문이고 가난 때문이고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고통 하는 뿌리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별할 수 없는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사실 이 세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가 그들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바꾸어 놓을 수 없고 그 사실에서 그들을 풀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단단하던 우리의 그 사슬들을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풀어주셨고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얽매였던 영혼의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이 세상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것으로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가 2000년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저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셨다 라고 하는 사실을 전파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아서 삼만 사천가지의 직업이 우리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회자가 되었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였고 그 십자가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이 우리를 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맨 처음 소명 받을 때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때는 소명에 탔던 사람들이 한 때에는 타락한 사람들이 됩니다. 어떻게 그 열렬한 소명의 사람이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묻지만 그러나 둘 다 진실입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받고 소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매순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만 겨우 하나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도 더 큰 능력을 받았고 그리고 지성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상 초대 교회의 이 모든 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사도바울이 자기는 매일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까지 말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소명의 체험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내 마음을 움직였던 그 놀라운 소명의 체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 인줄을 알고 이제 나의 남은 인생을 예수를 위해 온전히 불사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 은혜와 감격이 매일매일 그리고 매일매일 그 소외된 선교지에서 그리고 알아주는 사람 없이 매일매일 희생의 길을 가야하는 우리의 고단한 목회지에서 매일매일 반복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매일같이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었는지를 깨닫고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매일매일 감흡함으로써 사역에 대한 우리의 불만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앞에서 영광스럽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불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한 번 밖에 없고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 일분이라도 일초라도 주님을 위해 쓰여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전설적인 18세기의 설교자 조지 위필드의 고백처럼 썩어져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사라지길 원한다고 하는 고백처럼 우리에게 매일있는 한 순간 순간을 이 세상에서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우리들이 온전히 죽어서 한 알의 밀알로 어떤 사람들은 조국교회에 남아서 죽고 어떤 사람들은 선교지에 묻히는 우리들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선교지에 우리의 목회지에 찬란하게 꽃 피어 우리는 잊혀져도 주님의 이름은 기억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