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
2020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0년 4월 26일 – 6월 21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7월 24일
목 차
1. 성도의 신령한 행복(시 65:3-4) 2020.04.26. 주일오전 11
2.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시 65:4 하) 2020.05.03. 주일오전 18
3.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함(시 42:2-4) 2020.05.10. 주일오전 26
4.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시 42:5) 2020.05.17. 주일오전 33
5. 예루살렘에서 기뻐할 때(시 122:1-3) 2020.05.31. 주일오전 40
6. 주의 집에 사는 행복(시 84:4-6) 2020.06.07. 주일오전 47
7. 경건한 상도의 소원(시 84:10-11) 2020.06.14. 주일오전 55
8.. 참으로 복 있는 자(시 84:12) 2020.06.21. 주일오전 61
<설교 프레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1 2020. 4. 26 주일 낮 예배
< 성도의 신령한 행복 >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3-4)
I. 본문해설
다윗의 시(詩)로서 풍성한 수확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찬송시다.
죄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되었던 땅이 다시 축복을 받아 풍성하게 되었다(시 65:3, 9-10).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죄(罪)에 대해 경고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II. 성도의 신령한 행복
먼저 성도가 무엇을 참된 만족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신령(神靈)한 복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사람은 복(福)이 있나이다” 여기서 ‘복’(asher)은 신령한 복으로서 영적인 복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인 복(beraka)과는 구별된다.
본문에서 시인은 이러한 행복의 경험을 세 가지 제목으로 찬송한다.
A. 하나님의 선택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주께서 택하시고…”(시 65:4). 많은 민족들 중 언약 백성으로 뽑힌 것인데 이는 오직 그분의 은혜로써 된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과 장점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써 된 것이다. 이는 신약 백성들이 받을 은혜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신 9:4)
하나님의 선택은 은총적 선택으로서 실제적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기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백성들이 복(福)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롬 8:33-34)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을 깊이 생각하라. 그 선택은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제물로 드려진 희생을 통한 것이다(롬 3:23-24).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백성임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
B. 하나님과의 친교
둘째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주신 것이다. “가까이 오게 하사(teqareb)” (시편 65:4). 여기서 “천사들”(cherubim)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이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리킨다.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복으로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정동(情動)을 가져오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이는 모세가 죽음을 앞둔 유언적 설교에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에게 강조한 말씀에서도 나타났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7)
이 땅에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다. 모두 당신과 가깝게 있도록 부르셨으나, 마음을 다해 당신을 찾는 자를 가까이 있게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8)
불결한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된 백성들은 제사와 회개를 통해 용서 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것은 놀라운 특권이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세상과 현실을 이길 힘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나온다. 하나님에 대해 깨달을 때 사랑의 힘을 주신다. 영혼은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친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C. 공동체로 살게 하심
셋째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하신 것이다.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편 65:4).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공동체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다윗 시대에는 아마도 두 개의 성막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오기 전, 거기에 성막을 세웠다(대상 13:6, 삼하 6:11-12).
또한 기브온에 성막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까지 있었다(대하 1:3,13)
성막 울타리 안의 넓이가 약 306평이었고, 약 19평의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장소와 좌우와 후면을 제한 곳이 성막뜰이다.
여기에는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과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갈 때 손과 발을 씻는 놋쇠로 만든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여기서 제사장들과 만나고 함께 제사를 드리러 온 성도들을 만나는 곳이다. 이 성막을 가운데 두고 백성들의 진(陣)이 펼쳐진다. 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게 하신 복이다.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며,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임을 확인하였다.
III. 적용과 결론
성소에서 백성들은 자신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며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심을 깨달았다. 용서의 은혜로 이웃을 섬기며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이 은혜와 사랑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큰 사랑이 성령으로 임하셨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라. 신령한 복을 누리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2 2020. 5. 3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
“…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하)
I. 본문해설
시인은 성도(聖徒)만 누릴 수 있는 세가지 신령한 복을 말했다. 하나님의 선택, 친교,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었다.
이어서 시인은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만족을 말한다.
이는 성도인 우리가 참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집의 가치였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A. 하나님의 집
“주의 집”(beteika)은 히브리어 성경에 “당신의 집”이라고 되어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에 머무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기도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대하 6:18)
제단이 성막으로 발전하고, 그 후에 성전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성막과 이후에 건축된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통치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다.
B. 성전의 아름다움
1. 성전의 아름다움
“성전의 아름다움”이라는 번역에서 “아름다움”은 히브리어로 “토브(tob)”인데, 이는 “선(善)”, “선함”, 혹은 “선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아름다움”으로 번역했던 것을 개역개정성경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러나 권위 있는 KJV을 비롯해서, NIV, ASV, 심지어 구약 그리스어 성경인 Septuagint에서도 “선한 것들”(agathois)와 라틴어 Vulgata까지 “당신의 집의 선”(bonis domus tuae)으로 번역한다.
중국어 성경이 이것을 “메이푸(美福)”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복” 혹은 “아름다움의 복”을 뜻한다.
2. 성전의 선함
따라서 “성전(聖殿)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언약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좋은 것”(good things)들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다.
이것들의 원천(源泉)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온다. 이것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언약적 사랑에서 나오는 신령한 혜택이다. 이것을 성전에서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르치셨다.
이러한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의 낙성식에서 올렸던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에서 잘 나타난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대하 7:12)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대하 7:15-16)
본문에서 다윗이 성전(聖殿)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머무시는 공간을 가리킨다. 비록 그것은 이동식 텐트(tent)였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다른 장소와 구별되었다.
후일 솔로몬의 성전이 화려하였으나 그것은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a. 선택과 하나님과의 친교
b. 성도들의 공동체적 생활
c. 제사를 통한 용서와 간구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의 선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신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이처럼 영적인 좋은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가 있고, 그 교회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인생의 방황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사랑하는 교회에서 마침표를 찍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이바지하여 이러한 선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C. 성도의 만족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는 원어적으로 다음과 같다. “나는 주의 성전의 좋음(혹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겠나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궁극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더욱이 신자는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행복(幸福)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이다. 사랑의 경험은 더욱 깊은 사랑(love)을 갈구하며, 이는 곧 지식을 찾는 열심(熱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불행은 만족을 하나님 아닌 욕망의 성취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끊임없는 지성의 속임과 욕망의 강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족(滿足)을 누리지 못한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 1:8)
아직 갖지 못한 세상 것을 바라보며 좌절하지 말고 이미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고 있음에 즐거워하라.
성도의 고백은 이것이야 한다. “하나님만이 저의 만족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시나,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만족을 주신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우리가” 이것은 나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적 고백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행복과 지체들의 행복이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많은 시련과 고난을 만났으나 이러한 믿음과 신령한 은혜가 그것들을 헤치며 살아올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았으며, 거기서 죄를 용서 받고 진리를 깨달아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성도가 되라. 모든 것을 가져도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고,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3 2020. 5. 10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함 >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 42:2-4)
I.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禮拜)할 수 없게 된 처지에 있었다. 탄식하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백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시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을 떠났을 때에 쓰여진 시(詩)라고 생각한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말은 고라 자손의 지혜롭게 하는 시, 곧 교훈시(敎訓詩)를 뜻한다.
고라는 레위 집안의 사람인데, 모세의 사촌으로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다. 레위인들을 충동하여 반역하게 하였고, 땅이 열리며 그들이 삼켜지고, 불에 타는 심판을 받았다(민 26:10).
그 남은 후손들은 후일 다윗 왕국의 건국을 도운 공로로 성전에서 찬양하는 섬김이들이 되었다(대상 9:19, 26:1).
II.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함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詩人)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났다. 갈망함과 슬퍼함이 그것이다.
A. 갈망함
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된 처지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혼(靈魂)의 갈망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갈망하나니”(chameah napshi lelohim)의 원어상 의미는 “나의 영혼이 하나님에 대해 목이 마르니”다.
이것은 성소의 중앙화(中央化)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오직 성막(聖幕)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었다.
이는 시인(詩人)이 이전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누렸던 영적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현재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커다란 고통(苦痛)이 되고 있다.
그 영적 기쁨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님 자신은 생명(生命)이시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신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leel chai)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살아있는 영적 경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얼굴”(pene elohim)은 그분의 임재(臨在)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으로서, 비할 데 없는 지복(至福)의 기쁨을 가리킨다(창 33:10, 욥 33:26).
시인은 이 거룩한 경험을 성전(聖殿)과 연결시켰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지만 당신의 임재를 성전에서 보여주시길 기뻐하셨다.
거기서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과 희열(憘悅)을 경험한 형제들을 보았던 기억들을 반추하고 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 42:4)
시인이 지난날 성전에서 기쁨과 감사(感謝)로 하나님을 경배하던 경건한 기억들은 지금 그의 마음을 상(傷)하게 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敎會)에서 우리들을 만나 주신다. 말씀과 성령(聖靈)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갈망하라.
B. 슬퍼함
시인은 이중적으로 슬픔을 겪었다. 안으로는 하나님을 뵙지 못한 영혼의 슬픔과, 밖으로는 그치지 않는 이방인들의 조롱이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3)
선택된 백성으로서, 같은 동족들에게 반역(反逆)을 당하고 왕궁과 성전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 도망 오게 된 것에 대한 조롱이었다.
시인은 단지 자기의 처지가 비참해서가 아니라, 이방인(異邦人)들의 땅에서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더욱 큰 슬픔을 겪었다.
쏟아지는 수치스러운 조롱에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이는 그가 식음(食飮)을 전폐했음을 암시한다. 금식기도를 드린 것일까?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커다란 갈망 때문이었다.
망명한 처지에서 시인은, 두고 온 왕궁(王宮)과 성전(聖殿)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罪)로 인해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날마다 울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love)이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시인은 지금 그 사랑 때문에 모욕(侮辱)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울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당신을 찾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행복(幸福)과 성전에서 멀리 추방된 자신의 처지가 대조되었기에 그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에서 “내 마음이 상하다”라는 구절은 히브리어(Hebrew) 성경에서 “… 그리고 내가나의 영혼을 나에게 쏟아버렸으니”(weeshppekah alai napsi)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자기를 의지(依支)하던 굳은 마음이 녹아내려 물같이 쏟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이 된 것을 보여준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 22:14)
그의 마음은 한 가지 간절한 소망(所望)에 녹아내렸다. 그것은 다시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경배(敬拜)하는 것이었다.
경건한 성도의 마음에는 거룩한 슬픔이 있다. 그 슬픔의 깊이가 곧 은혜로운 기쁨의 크기에 비례한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라. 은혜 안에서 살던 지난날의 행복과 그분을 떠난 현재의 비참을 대조하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그 간절함을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기도로 표현하라.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의 참된 기쁨은 세상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아니라 모든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거룩한 성일(聖日)에 무리들과 동행하며 성전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집을 사랑한다. 그는 거기에 있는 형제(兄弟)들을 사랑한다.
거기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함께 만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갈망하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4 2020. 5. 17 주일 낮 예배
<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I. 본문해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자신 안에 있는 두 마음을 본다.
하나는 눈앞의 현실 때문에 낙심(落心)하는 인간적인 마음이고, 또 하나는 현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마음이다.
이는 하나의 자아(自我) 안에 있는 두 마음의 대화이며, 결국 시인이 믿음으로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II.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
이방의 땅에서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시인은 그 속에서 마음으로 영혼과의 대화(對話)를 시도한다.
여기서 불안해하는 영혼(nepesh)은 시인의 낙심(落心)하는 마음이며, 말하는 자아는 신앙(信仰)하는 마음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A. 불안해하지 말라
지금 시인은 위기에 처했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눈을 떼어 고요히 자신의 영혼(靈魂)을 돌아본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의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나의 영혼아 어찌하여 너는 내던져졌으며 내 안에서 혼란스러워하는가”. (시편 42:5상, KNJ 私譯)
환경의 어려움은 눈에 보이지만, 신앙의 구원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때 흔들리는 외적 삶의 질서는 마음에 두려움을 준다.
고난을 당할 때 겪는 마음의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토록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섬겼던 시인에게도 망명(亡命)이라는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향할 때는 혼란(混亂)스럽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할 때 그 마음은 안정을 찾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렇게 연약하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만 현실을 능가하는 신앙으로 살 수 있다.
더욱이 마음이 불안해하는 이때는 시험(試驗)의 시기다. 죄(罪)는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자신의 정체(正體)를 숨기며 기회를 노린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신앙으로 이기고자 자신(自身)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감각적 이성(理性)과 초월적 신앙(信仰)과의 대화였다.
경건한 묵상(默想) 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에, 현실은 더욱 혹독하게 느껴졌으니 마음 한편으로는 이미 낙심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 내던져진 것처럼 되었고 생각은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았고 홀로 버려진 듯하였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 43:2)
신앙은 해석(解釋)의 능력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절망과 슬픔에 휘둘리지 않고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꼭 필요하다.
다행히 시인에게는 자신의 영혼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앙(信仰)이 있었다.
비록 마음은 시련과 고난으로 상했으나,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했다.
신앙하는 자아와 불신(不信)하는 마음이 대화하면서 그 마음을 꾸짖는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이 말은 정반대의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신앙적인 요청이다. “너는 결코 버림받듯 내던져지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서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왜소함을 생각하라.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소망을 두라”(hochili)라고 번역한 동사의 원뜻은 전치사(le)와 합쳐져서 “기다리다”라는 의미다(왕하 6:33, 미 7:7, 시 38:15).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한다.
눈앞에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무질서(無秩序)보다는 내 인생을 당신의 계획 속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해서 높아진 마음으로는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가장 낮아진 겸손의 마음 안에서 기억함으로써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quia non ex altitudine superbiae Deus quaeritur, sed memoria eius in humilitatibus modicis inuenitur”)
F. M.. A.. Cassiodorus,「시편 해설」(Expositio Psalmorum), p.384.
시련의 날에는 두 가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선(善)하시다는 사실과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말씀(word)으로 건지신다는 사실이다.
B.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인은 요동치는 마음을 타이른다.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
악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며 기다리는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은 끊임없이 떠도는 부유물(浮流物)과 같아서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매려고 해서는 안정을 찾을 수 없다.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모든 일들을 선한 질서로 되돌리시며 우리를 지켜주심을 확신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때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긴다. 고집이 사라지며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맡기는 마음이 된다.
이런 의존(依存)의 마음 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대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비록 현실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나 시인은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실 것을 확신하였다. 불안한 영혼을 잠재웠다.
III. 적용과 결론
커다란 시련 속에서 가장 큰 위로(慰勞)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시인의 소원(所願)은 오직 한 가지였다.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형제들과 함께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생(一生)은 날아가듯이 빠르게 흐르고 모든 것은 변전(變轉)한다.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를 만나주셨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으라. 거기서 하나님을 기다리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5 2020. 5. 31 주일 낮 예배
< 예루살렘에서 기뻐할 때 >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시 122:1-3)
I. 본문해설
다윗이 지은 시(詩)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shir lamaolot)라는 표제는 원어적으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자들을 위한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이었다. 이때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성소(聖所)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여기서 “여호와의 집”은 당시 성막을 가리킨다. 솔로몬의 성전이 봉헌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자체가 순례(巡禮)의 목적지였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이 부른 찬송시(讚頌詩)다.
II. 예루살렘에서 기뻐할 때
고대에 예루살렘은 “샬렘”(shalem)으로 불리웠으며 이는 히브리어의 샬롬(shalom)과 같은 어원으로서 평안(平安)이라는 뜻이었다(창 14:18).
아브라함 시대 이 지역의 왕은 멜기세덱(Mechizedek)이었다. 그 후로 150년 쯤 뒤에는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 사람들이 정복하여 그 성읍을 “여부스”라고 불렀다(대상 11:4).
현재의 예루살렘(yerushalem)과 유사한 옛 명칭인 “우루살림”(urusalim)은 주전 12세기와 15세기의 이집트 문헌에서도 발견되며, 가나안 정복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원주민 왕이 있었다(수 10:1, 12:10).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이 성읍(城邑)을 점령하고 이곳을 “시온산성” 곧 “다윗성”이라고 불렀다(삼하 5:7). 그 후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A. 성도의 참된 기쁨
시인의 기쁨은 “여호와의 집”(bet Yaweh)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思慕)하였기 때문이다. 속죄와 감사, 위로와 헌신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다윗시대에 아직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는, 성막(聖幕)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城邑) 자체가 순례의 목적지였다. 그들은 성문 앞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뵈옵는 특권으로 여겼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시편 122:2)
이는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 형태로 표현된 것인데,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의 감격을 표현한 것이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집과 연결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님은 안 계신 곳 없으신 분이시지만, 성전에서 당신의 임재(臨在)를 보여주시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왕권(王權)을 펼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열방에 하나님의 왕권의 통치(統治)를 본보기로 보여주어야 했고, 여호와의 집에서는 그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恩惠)를 받아야 했다.
성도(聖徒)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다. 그들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이며 신앙을 갖는 것은 그분을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다.
성도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데 있다.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지식과 사랑을 얻는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소명(召命)을 발견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교회(敎會)를 사랑한다.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닮아가는 것이다.
B. 잘 짜여진 성읍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고 했을 때, 시인(詩人)이 기뻐한 것은 예루살렘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시편 122:3)
“잘 짜여진 성읍같이”(keyir shechubbera lah yachdahu). 원래의 뜻은 “서로 모여 조밀하게 하나가 된 성읍같이”라는 의미다.
다윗 시대 예루살렘의 크기는 약 12,0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후 솔로몬(B.C. 930년경, 약 4만평), 히스기야(B.C. 700년경, 약 15만평,) 느헤미야, 에스라(B.C. 333년경, 약 12만 평), 하스모니안 왕조(B.C. 2세기, 약 20만 평), 헤롯 대왕(B.C. 4년경, 약 28만 평)으로 확장을 거듭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운 성읍(城邑)이었다. 거기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감동을 받은 것은 그 성의 크기가 아니라, 잘 짜여진 조화(調和)와 질서(秩序) 때문이었다.
이로써 예루살렘이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지를 보여주었고, 또한 미래에는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인지를 예표(豫表)해 주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 of God)을 보여주는 곳이다. 교회는 진리와 사랑(love)으로 이뤄진 사회(社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세워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운 짜임새의 근원은 질서(秩序)다. 세상과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질서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온다. 신자의 삶이 진리에 의해 짜여질 때 아름답다.
하나님께서 성경과 세계를 주셨다. 성경(聖經)은 영감으로 주어졌고, 세계(世界)는 창조되어 우리 앞에 있다. 이는 모두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보이는 교회(敎會)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며, 이는 성도들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나타난다. 신약에서 그 아름다움의 모본은 성육신(聖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교회를 바라보았다면, 그 이후에는 세워진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의 가치와 인간의 행복(幸福)을 보여주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의 도리(道理)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아감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에 교회(敎會)가 아름답고, 인간이 타락했기에 세상이 추루(醜陋)하다. 교회가 그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세상이 변화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진리로 이 일을 행하신다.
죄(罪)는 이 아름다움의 질서를 거스르고 은혜(恩惠)는 그것을 이룬다.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를 주신다. 죄인이 용서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질서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힘을 얻으라.
III. 적용과 결론
성도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人生)을 해석한다. 성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를 더욱 사랑한다.
이로써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한다. 이 모든 깨달음과 은혜(恩惠)를 하나님의 집에서 받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기쁨의 삶을 살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6 2020. 6. 7 주일 낮 예배
< 주의 집에 사는 행복 >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 84:4-6)
I. 본문해설
“고라 자손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이 시(詩)도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을 위한 찬송시(讚頌詩)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사모(思慕)의 정과 그 집에 사는 행복(幸福)을 노래하는 최고의 시들 중 하나다.
아마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시기이거나, 그것이 평정될 즈음에 저작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에는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한 간구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위기를 겪고 있는 다윗왕을 위한 간구로 여겨진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 84:9)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을 너무 사랑하여 병이 나서 “쇠약해”지기까지 그리워하였다(시 84:2).
II. 주의 집에 사는 행복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떠나야 했던 망명(亡命)의 시절을 경험하면서 주의 성전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 집에서 누리는 성도의 행복에 대해 선언한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84:4)
여기서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은 “행복이여”(aher)라는 의미다. 이는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spiritual blessing)을 가리킨다.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주님을 찬송한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찬송한다.
그들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yoshebe)이다. 이 단어는 일시적 체류(滯留)나 의례적 방문(訪問)이 아니라 거주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A. 하나님께 힘을 얻음
원문의 정확한 해석은 “당신 안에서 힘을 둔 자의 행복이여”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영적이고 육체적인 힘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시인과 경건한 사람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았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의인(義人)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지만, 악인(惡人)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자기를 힘으로 삼는다(시 52:7). 그래서 경건한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것이었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시 86:16)
하나님은 마음을 당신의 집에 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그들에게 신비한 방식으로 힘을 주신다. 신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힘을 얻는다.
B. 시온의 대로가 있음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의역(意譯)이다. 여기서 “시온의 대로”(mesillot)는 “대로(大路)”라는 뜻을 가진 “마스를”(maslul)의 복수형이다.
이 대로(大路)들이 예루살렘과 시온을 향하고 있으므로, NIV 영어성경이 “순례의 길”(pilgrimage)라고 번역했고, ASV가 “시온에 이르는 대로”(the highways to Zion)이라고 번역했다.
당시 순례자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시온”은 좁은 의미로는 예루살렘의 남쪽 끝에 있는 산지(山地)이고 넓은 의미로는 예루살렘이 속한 전체 도시를 가리키기도 했다(사 1:8, 렘 8:19).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마음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경배하고자 하는 자가 신령한 복을 누린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언제든지 무슨 일에 대해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복(福)이 있다.
비록 왕궁을 떠나 망명길에 있어도 시인(詩人)의 마음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인생길에서 어찌 시련과 고통이 없겠는가? 순경(順境)이 있으면 역경(逆境)이 있게 마련이다. 믿음의 사람은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뵙고자 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신자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사람이다. 기도(祈禱)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수시로 마음을 지키며 거룩한 하나님을 향하라. 시인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교회와 은혜의 보좌를 사모하라. 거기서 세상을 이길 신비한 힘을 주신다.
C. 시련을 이기게 하심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에서 “눈물 골짜기”(emek habbaka)는 지명(地名)인 듯하다.
어떤 학자들은 북부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정류지라고 본다. 오디 열매 때문에 검은색의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를 가리킨다고 추정한다(삼하 5:24).
“울다”(baka)라는 동사와 비슷한 철자와 발음을 가지고 있다. 라틴 vulgate 성경이 “눈물, 흐느낌, 탄식”(fletus)이라고 번역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하는 순례의 길이 험난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영혼에 생수(生水)를 주신다.
어떤 처지에서 인생길을 가든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지라도 거기서 생명(生命)의 물을 마신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샘물, 생수”는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통과 만족”을 의미한다(삿 15:19).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려고 오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비록 성전을 떠나 망명의 길에 있었으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에 은혜(恩惠)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른 비”는 파종(播種)을 위해, “늦은 비”는 마지막 결실(結實)을 위해 꼭 필요한 비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셔서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신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회(敎會)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보다도 더 큰 특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거기서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집에서 경배(敬拜)하기를 갈망하는 자녀들을 버리지 않고 영혼과 육체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그리워하는 자에게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살리시고 특별한 생명의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7 2020. 6. 14 주일 낮 예배
< 경건한 성도의 소원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I.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사는 행복을 노래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이었다.
그들은 신령한 복을 누린다. 하나님께 힘을 얻고, 마음은 시온(Zion)을 향하고 있으며, 슬픔의 계곡에서도 기쁨을 누린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靈魂)에 주시는 생명(生命)의 능력이며, 시인은 일찍이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의 집에서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경험적으로 노래하면서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으로 타오른다.
II. 경건한 성도의 소원
그는 경건한 성도의 소원에 대한 고백(告白)과 함께 믿음을 표명한다.
A. 성전에서 살아감
그는 성도의 행복을 하나님의 집에서의 시간과 장소와 관련짓는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주의 궁정에서(bahachereika)”라고 번역된 본문의 “궁정(宮庭)”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뜰, 마당”등을 의미했다(출 8:13, 출 27:9)
당시는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다. 다른 장소(場所)와 구별되도록 하나님의 성막에 쳐진 울타리 안쪽 뜰을 가리킨다.
그 장소는 “악인의 장막(ohore resha)”과 대조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집이 장막(帳幕)인데 이렇게 묘사한 것은, 악인의 번영이 영원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집은 초라해도 궁정(宮庭)이며, 악인의 집은 화려해도 장막(tent)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나 악인은 잠시 있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2)
시인은 악인의 궁궐(宮闕)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천막(天幕)에 있기를 사모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의 성막과 악인의 집에서의 시간(時間)을 대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보내는 하루가 악인의 집에서 보내는 천(千) 날보다 낫다”(10절).
이는 추측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은혜(恩惠)의 기쁨이 세상 즐거움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聖徒)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思慕)하게 했나? 무엇이 그 집에서 거하는 시간을 그토록 기뻐하게 했나?
하나님의 집은 천막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행복(幸福)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진리(眞理)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그 은혜(恩惠)를 간직한 사람이 교회를 사랑한다.
거기서 만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사랑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 또한 모든 자연 만물을 선의(善意)로 대한다.
신자가 신령한 은혜 아래 살아갈 때는 언제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같은 교회(敎會)의 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恩惠)를 받으라. 형제들을 사랑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라. 이것이 성도의 행복이다.
B. 은혜와 영광을 주심
이어서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 찬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마음을 고백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해”(shemesh)는 모든 생물을 살아있게 하고, 그 빛으로써 다른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빛인 진리(眞理)”를 가리킨다.
또한 “방패(防牌)”는 적들의 창칼과 화살로부터 생명을 보호해주는 무기로서, “하나님의 보호(保護)”를 뜻한다.
일찍이 가나안의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고,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했으나 보복에 두려워하던 아브람에게 말씀이 임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시인의 이 고백(告白)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위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제사장(祭司長)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거기서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겪는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생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은혜와 영화(hen wekabod)”를 주신다. 은혜(恩惠)를 주셔서 우리를 의미 있고 중요(重要)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선(善)한 뜻을 이루는 데 쓰임 받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와 지위에 의해 세상(世上)의 영광을 받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며 삶으로써 하늘의 영광을 받는다.
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 어차피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며 사라지지 않는가? 성도로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라.
III. 적용과 결론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백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하)
눈에 보이는 현실에 요동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라. 결국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라.
모든 좋은 것이 오직 그분에게로부터 옴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라.
단지 몸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에 살라. 거기서 참된 성도가 되어 가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8-끝 2020. 6. 21 주일 낮 예배
< 참으로 복 있는 자 >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12)
I. 본문해설
시인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복(福)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 이 시(詩)를 끝맺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집을 사랑하는 자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몸소 체험적으로 입증한 진리(眞理)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人生) 중 얼마나 많은 날들이 거짓된 행복의 추구 속에서 낭비되어 가는가?
때로는 고난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인생길을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끝맺는다.
II. 참으로 복 있는 자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복(福)은 잠세적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그것은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시인은 행복한 인생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자가 하나님 때문에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임을 노래한다.
A. 만군의 여호와
첫째로, 그러한 행복의 근원(根源)이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다.
“만군의 여호와여(Yaweh zebaot)” 이를 직역하면 “군대들의 야훼”다.
이는 하나님을 수많은 하늘 군대를 거느린 왕(王)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는 소위 “여호와의 용사되심”(Yaweh as Warrior)이다.
사단(Satan)의 유혹에 의해 발생한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어난 반역(反逆)이다. 하나님은 즉시 이 반역을 처벌하시는 엄위(嚴威)로우신 왕으로 제시된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끔찍이 사랑하시기에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慈悲)를 베풀어 구원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악(惡)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심으로 당신의 살아계심과 선(善)하심을 드러내신다.
야곱은 일찍이 천사(天使)들을 만나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다(창 32:2). 또한 성경은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칭했으며(출 12:41),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신다고 묘사한다(사 13:4).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8)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 끝날에 최후의 우주적(宇宙的) 승리를 얻게 될 성도(聖徒)들의 무리를 지칭하였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3-14)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을 이끄시는 “만왕의 왕”(King of kings)으로 불리운다(계 19:16).
압살롬의 반역을 인하여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시인이 고난(苦難)의 길을 헤쳐 오며 깨달은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다.
당신 자신의 영광(榮光)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때문에 신자(信者)들은 승리한다. 만군(萬軍)의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는 한,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
시인의 시대에도 반역하던 악인(惡人)들은 잠시 득세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신 위대한 왕(王)이시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집을 사모(思慕)하는 자들을 위해 싸우신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그들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이며 멸망(滅亡)을 자초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군사(軍士)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위해 싸워 이기는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3-4)
예수 그리스도는 악(惡)의 반란을 진압할 하나님의 사령관(司令官)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그는 먼저 모든 죄(罪)와 마귀(魔鬼)의 세력을 이기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勝利)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만군의 여호와”시니, 그와 함께하여 항상 승리하는 자가 되라.
B. 주께 의지하는 자
이런 하나님, 곧 만군(萬軍)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을 누린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 하)
“… 당신 속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의 행복이여”(KNJ 私譯)
1. 많은 행복(幸福)
“행복들이여(ashre)” 혹은 “복됨들이여(blessednesses)”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복수의 표현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자들이 누리게 될 행복(幸福)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를 보여준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하나님의 소원은 인류의 행복(幸福)이니, 이를 위해 우리를 당신 품으로 불러들이시려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恩惠)를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의지(依支)하는 자
하나님은 이런 행복을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주셔서 충만히 누리게 하신다.
우리말 성경에 “당신을” 이라고 번역된 구절이 원문에는 “당신 속으로(bak)”라고 되어 있다. 이는 참으로 복 있는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依存)의 상태가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악인(惡人)은 자신의 육신과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7)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는 가슴 깊이 하나님을 파고들어 절대적(絶對的) 의존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자기(自己)의 힘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의 마음(heart) 안에서 그분께 대항하는 모든 욕망과 의지는 사라지며 온전한 영적 교통이 이뤄진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구속의 지혜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이는 구속 받은 자들이 그분을 절대적으로 총체적으로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J. Edwards, God Glorified in Man's Dependence, p.202.
“의지하는 자(boteah)”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성경(聖經)에서 의미심장한 단어다.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다.
“의지하다”(batah)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걱정하지 않다, 의심하지 않다”라는 의미(意味)인데,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일어나는 어떤 일로 인해 하나님을 향(向)하여 사는 그의 삶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단어는 “평화로운 백성”(am boteah), “평화롭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삿 18:10).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라.
III. 적용과 결론
신앙(信仰)의 유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依支)함으로써 평화(平和)를 누리는 것이다. 아무 것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거나 인생을 뿌리째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마음을 두어 물결치게 하지 말라. 세상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복된 자가 되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1 (2020.4.26._주일오전)
성도의 신령한 행복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것은 다윗의 시(時)입니다. 풍성한 수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시입니다. 문맥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가뭄이 들었던, 재해가 있어서 황폐하게 되었던 땅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풍성하게 된 상황인 듯합니다. 특히 본문 3절, 그리고 9절에서 10절이 이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했으나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에 이 같은 은혜를 베푸신 것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이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罪)에 대해 경고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의지하게 하셨는데 어쩜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과 매우 흡사하지 않습니까?
II. 성도의 신령한 행복
그러면서 이 믿음의 사람은 오늘 성도의 신령(神靈)한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도가 무엇을 참된 만족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오늘 본문 65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이렇게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라고 되어있는 구절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신 사람의 행복이여 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복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쉐르’(asher)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돈 많이 벌고, 부자가 되고, 모든 사업이 원하는 대로 되고, 자손들이 잘 성장해주고 하는 그런 일반 섭리의 복(beraka)과 구별됩니다. 즉, 이 ‘아쉐르’의 복은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영적인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시인이 이러한 행복의 경험을 세 가지 제목으로 찬송하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선택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택하신 사람의 행복이여’(시 65:4)라고 말입니다.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언약 백성으로 뽑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뒤 가장 후회했던 것은 내가 왜 이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까하는 탄식 아닌 탄식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국 선택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이고, 선택받지 아니한 사람들의 불행과 선택된 자신의 행복이 비교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영원 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어두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모르고, 그것도 행복하지 않게 살다가 죽는데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셨으니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으로 선택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영적인 행복인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로움과 어떤 장점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내가 왜 너를 구원하여야 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우리도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우리를 향해서 너보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그 사람들은 여전히 불신 상태에 있는데 왜 너만 선택해서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어도 우리는 역시 입을 가지고 있으나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아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이 또한 나를 기억하셔서 그 무한한 자비로 아무 공로 없는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것만 우리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땅이 없어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고, 또 나그네처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우쭐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인생에 달려갈 길을 마칠 때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이 이 큰 이을 행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은 너희가 훌륭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신명기 9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공로로 여기셔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받고, 매일매일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라고 생각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때 구원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즉,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도 교회에 와서 잠깐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말 가슴 깊이 솟아나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요? 설령 내가 원하는 대로 대학 교수가 되고, 작가가 되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그렇게 되지 아니하였다면 거기에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면서 과연 내가 내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벌써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까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선택해 주신 것, 왜 그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나였는지는 설명할 수도 없고, 내세울 수도 없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총적인 선택이고, 실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시는 기초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온전히 박혔던 성도들은 가장 가슴 벅찬 찬송 제목이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들이나 신약의 백성들이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형벌 받을 죄에서 구원해주고 죄를 사멸해준 것뿐만 아니라 그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혜택을 받으며 살게 하신 것, 그리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신을 돌아온 탕자를 품어 준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찬송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33편 12절에서는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또 로마서 8장 33절에서 34절에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전적인 그분의 은총으로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하는 중심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선택해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자녀 삼으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던 제임스 페커 박사는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지는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비례한다. 그가 다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의미를 잘 모른다면 그는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아주 짧은 순간 아주 드문 경우에만 기가 막히게 우리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됩니다. 대부분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현실은 전개되지 않습니다. 그때 당연히 사람은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 속에 휘둘리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은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 그래서 내 신체 중 머리카락 하나도 그분의 손안에 있고, 나의 인생의 일 분, 일 초조차도 당신의 섭리 계획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설령 의지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의지할 때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가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시련을 만나고, 죽을 것 같은 때는 주님을 찾던 사람이 기도의 응답이 되어서 모든 것이 평안해질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성도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희생을 통해 얻게 된 것이라고 로마서 3장 23-24절은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백성임을 기억하는 것이 성도의 정상적인 생활입니다. 시련 당할 때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에 힘이 솟아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혹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헛된 욕심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하루에 10번씩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에 가슴이 떨린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없던 힘은 생겨나고, 사라진 지혜는 돌아올 것이고, 그리고 실종되었던 용기는 다시 발견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의 친교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사”라고 말입니다(시 65:4). 히브리말로 ‘테카레브’(teqareb)라고 되어있는데 ‘카라브’(cherubim)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가깝다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서 천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오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나누고 계시는 친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투자했는데 주가가 많이 올랐다든지, 특히 마스크 만드는 공장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겠죠. 그리고 기타, 건강하고 사람들의 덕을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성경은 이 복이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복의 그림자로 묘사합니다. 그 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심으로써 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이 복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정을 가져오고, 그래서 결국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이 사랑의 정서를 많이 가지고 살 때 우리가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그에게 말하여 그도 깨닫도록 만들고, 혼자 있을 때에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를 묵상하면서 거기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친교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늘 있습니다. 그때 가슴에 손을 모으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찬송해 보세요.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러면 근심의 구름 때문에 멀리 있어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음을 앞둔 유언적인 설교 속에서 끝없이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눈물로 타일렀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신 4:7). 일평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던 지도자, 너무 오랫동안 그들의 충성과 반역을 보아왔기 때문에 뼛속까지도 알 수 있는 이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마음을 녹이고 싶었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우리를 가까이하셔서 친근히 해주셨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신이 어떤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눈물겨운 사랑으로 친근히 해 준 큰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러니 언제나 부르면 거기 계셔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서 부르지 않지만, 우리 오래전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말입니다. 고난과 역경, 핍박과 시련, 모든 혼란과 죽음의 위협을 앞둔 위기에서도 최고의 해결책은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과 가까이 있도록 선택하여 부르셨으나 마음을 다해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당신의 가까움을 더욱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145편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불결한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두셨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회개하고 잠시 죄를 용서 받아 하나님과 다시 친밀해질 수 있게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근히 하고 싶어하시는 당신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혹은 심지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아버지 그분의 친교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당신께 다가올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현실을 이길 힘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해 깨달을 때 하나님은 사랑의 힘을 주십니다. 사랑은 반드시 깨달음에서 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시련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고, 또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의 힘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가까이 있는 분으로 경험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 신령한 친교의 힘으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해 나가며 사는 것이 신앙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고난 속에서도 하늘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눈앞에 있지만 나를 가까이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나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든지 문제는 여러분과 세상이 만들지만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더 친근히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구체적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도록 실천하고, 두 번째로는 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아마 오늘도 당회를 하겠지만 당장 다음주부터 3200명, 300명되는 교인들이 모두 모일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까지 4700명정도 되는 교인이 모두 모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기도할 수는 있잖아요. 얼마나 많은 성도가 그렇게 깊은 밤 혹은 낮에 교회가 텅 비어있습니다. 거기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제 코로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코로나를 핑계 삼아서 나태한 신앙이 습관화되는 것, 정당화되는 것, 이것이 더 두렵지 않습니까? 마음에 뜻을 굳게 정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개인기도 생활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C. 공동체로 살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공동체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 즉,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의 신령한 행복이여’ 라는 뜻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아마도 두 개의 성막이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측을 합니다. 하나는 오벳 에돔의 집에 머물고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오기 전 거기에 임시 성막을 세웠습니다. 역대상 13장 6졀, 사무엘하 6장 11절에서 12절이 이 사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성막이 기브온에 있었는데 이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을 이제 설치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고유한 성막이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짓기 전까지 거기 있었다고 역대하 1장 3절과 13절이 말합니다.
성막은 울타리 안에 넓이가 약 306평쯤 되었고, 그리고 약 19평의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장소, 좌우와 후면을 제한 곳이 성막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직사각형으로 된 성막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면 성막들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텐트가 나오는데 그게 19평쯤 되는 텐트로서 2/3, 1/3 크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앞에 있는 것이 성소였고, 뒤에 있는 것이 지성소였습니다. 그 앞마당을 성막 뜰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과 제사장들이 헌제자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그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들이 정결하게 하기 위해 손과 발을 씻는 놋쇠로 만든 물두멍이 있었다고 출애굽기 30장 17-21절이 증언합니다. 결국 이 성막들은 제사장들과 성도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또 함께 제사를 드리러 온 성도들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이 성막을 가운데 두고 12지파의 진(陣)이 사방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막 위에 바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게 될 공동체적인 생활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믿고 나서 결국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만나야 될 절박함이 없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빠서 동창회 모임이라든지 친교 모임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세상에 있었더 많은 인연을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끊어버리게 되었고, 그리고 만난 사람들이 바로 이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이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각기 구원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지체로 삼으시고, 나도 그 지체 중 일부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그렇게 거미줄처럼 여리기 짝이 없던 신앙이 이만큼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묘목이 아니었던 큰 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씨앗에 불과했고 작은 싹에 불과했지만 물론 하나님이 때마다 햇빛과 그리고 비를 주셨으나 하나님 사랑으로 그렇게 교회의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며 섬겼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여기에 남아서 주님의 교회에 한 기둥이 된 것입니다. 거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허무한 이 세상의 낙을 버리게 되었고, 거기서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인생의 참된 목적을 깨달으며 허무하게 살았던 날이 후회스러운 것만큼 주님을 섬기며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추운 날 사슴처럼 함께 기대며 살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의 한 지체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 이유였습니다.
한때는 백성들이 범죄하여 그리고 그 범죄가 매우 커서 그래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의 죄악도 자기를 이겼다고까지 말했으니 나도 이 죄 가운데서 어찌할 수 없나이다 라는 상황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땅에 재앙이 물러가고, 결국은 그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이 시인의 감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농부들이 풍성한 수확을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 기쁨은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불러주신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 거기서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나같이 모자라는 인간이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고 그에게 보탬이 되는 섬김을 다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소에서 백성들은 자신의 비참함과 거룩함을 경험하며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은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으며 용서와 은혜로 이웃을 섬기며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와 사랑은 그림자에 불과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당신의 피와 살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이어 임하신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를 이 사랑으로 데려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때에 마음의 눈을 들어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사랑과 그의 친교, 그의 선택과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모든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령한 복을 누리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2 (2020.05.03._주일오전)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성도(聖徒)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신령한 복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로 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만족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성도인 우리가 어디서 참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
그는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고난과 시련을 거치며 그가 새삼 깨달았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하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A. 하나님의 집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의 집(beteika)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너의 집’, 혹은 ‘당신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2인칭에는 ‘우리가’의 높임말이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에 2인칭 소유격 접미사가 들어간 것을 한글 성경에서 모두 ‘주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에 머무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도 동물도 심지어 날아다니는 짐승과 곤충들까지도 각기 자기의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안전하며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나그네이실 수 없으며 어떠한 장소도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 표현은 어린애와 같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신 묘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물리적인 한정된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역대하 6장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고 말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성전을 하나님께 지어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에서 자기들을 만나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전보다 훨씬 무한히 크고, 위대하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족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단이 성막으로 발전하고, 모세 시대에 이 성막이 예루살렘 이후에 성전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성막과 이후에 건축된 성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바로 시인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새롭게 붙잡은 가치는 하나님의 집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나주시는 곳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B. 성전의 아름다움
1.성전의 아름다움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있는 제목은 바로 이 성전의 아름다움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이라는 번역에서 아름다움은 히브리어로 ‘토브’(tob)인데 이는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선(善), 선함, 혹은 선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 있던 우리말 개혁 성경에서 아름다움으로 번역했는데 개혁 개정 성경에서 그것을 고치지 않고 그냥 이어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권위 있는 King james version을 비롯해서 NIV, ASV, 심지어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까지 이것을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 번역한 성경은 없고 ‘선한 것’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혹은 선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심지어 라틴어 성경까지 당신의 집의 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중국어 성경이 바로 이 ‘토브’를 ‘메이푸’(美福)라고 번역을 했는데 우리말로 하면 미복이고, 이는 아름다운 복 혹은 아름다운 복을 뜻하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옛날 성경이 중국 번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2.성전의 선함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이 성전(聖殿)의 아름다움은 결국 성전이 선함, 혹은 성도들이 성전에서 받게 되는 선한 것들, 좋은 것들(good things)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전에서 언약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교회에서 받는 모든 좋은 것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좋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나쁜 모든 것들은 인간의 악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오는데 교회가 사람이 모인 곳이고, 모두 신령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서 인간으로부터 오는 어떤 나쁜 것들을 겪게 될 때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경험하는 대신 나쁜 것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서 나오는 신령한 혜택들입니다. 이것을 성전에서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백성들을 당신의 성전에서 만나주십니다. 나라가 전쟁에 처해 위협을 느낄 때 왕들은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사로 고통을 받았던 여인, 한나가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찾아온 곳도 성막이었습니다. 아들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소원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아뢰었을 때 응답을 받고 모든 근심을 내려놓게 된 것도 성소 혹은 성전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짐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법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바라보며 기도한 곳도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 고난과 모든 아픔까지도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풀어가며 거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만나주실 장소로 성전을 택하십니다.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특별히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공동체인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의 낙성식에서 올렸던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역대하 7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다른 곳에서는 안되고 바로 여기서 당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헌신을 받아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7장 15절과 16절에서 더 자세히 말합니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이 구약의 성전이라고 하는 그 그림자는 하나의 실체를 향하는 것이었으니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시고,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을 그 머리에 접붙이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아들에게, 그 사랑이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게, 그리고 신부인 교회의 몸을 이루는 우리에게 그 사랑이 부어지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단지 악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슬픔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야 했지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집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힘, 그곳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세상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두 단어는 거룩한 왕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왕으로서 모든 세계를 통치하는 중심이 바로 성전(聖殿)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왕권을 성전을 통해 행사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 아직 성전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궁전이라고까지 말하는 이 성전은 기껏해야 이동식 텐트(tent)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보다 훌륭한 다른 모든 장소와 구별되는 곳이었습니다.
후일 솔로몬은 어마어마한 재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으나 이것은 땅에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성전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영광은 바로 그 교회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영광입니다. 건물의 크기와 모이는 교인들의 숫자나 혹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유의 크고 작음에 교회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모이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친교를 누립니다. 주의 뜰에서 살게 하신 성도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죄를 짓고 악을 행했어도 거기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용서와 은혜를 받습니다. 인생에서 어떠한 시련과 괴로움을 만나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성도의 행복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선한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신령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좋은 것들을 교회에게 부어주시고, 그것들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불행의 끝자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자신의 온 영혼과 마음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34장 8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좋은 것들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교회가 있고, 또 그 교회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이 깃들여도 자신을 의탁할 교회가 없는 사람은 인생에서 어떤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기독교 신앙 아래서 이미 끝났고, 따라서 신앙의 방황은 사랑하는 교회를 만남으로써 마침표를 찍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또 좋은 일이 일어나서 오늘 원하는 바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아니할 것이니 하룻밤 사이에 또 다른 욕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또 다시 원하는 것과 현재에 있는 것 사이의 격차가 생길 것이고,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에 불안과 불만족으로 혹은 고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며 울고 웃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분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거기에 성도의 독특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행복 때문에 욕망 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 행복 때문에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일을 통하여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교회 생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섬김은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이바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림으로써 만족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성도의 만족
마지막 세 번째는 성도의 만족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을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나는 당신의 성전의 좋은 것으로 배부르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 배부를 것이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무엇인가 욕구하던 것이 충분히 만족되어서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배가 고팠을 때 음식에 욕구가 생깁니다. 실컷 먹고 나면 더이상 어떤 음식이라도 먹고 싶은 의욕이 사라집니다. 이런 상태를 바로 배부르다 라는 이 히브리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목이 마를 때는 당연히 마실 것을 간구하게 됩니다. 실컷 마신 후에는 더이상 마실 욕구가 사라지게 됩니다. 더이상 마실 것에 대한 욕망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이런 만족의 상태가 바로 배부르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두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의 빈 공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먹고 마시고 소비하고 향락을 누리는 것으로는 잠시 잊을 수는 있으나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지극한 복을 받기까지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자는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행복(幸福)이 무엇인지를 온 영혼과 마음으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경험은 더욱 깊은 사랑(love)의 관계를 갈구하고, 이는 곧 하나님이 누구신지 지식을 찾는 열심(熱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곧 사랑과 하나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이렇게 하나님 아니면 만족(滿足)할 수 없는 영혼의 허기짐을 결코 그것을 채울 수 없는 육체의 욕망의 성취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끊임없는 지성의 속임과 욕망의 강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아무 사람이라도 거기에서 영원한 만족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았던 전도자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인간의 마음은 그 모든 욕망으로도 결코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습니다. 전도서 1장 8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입니다. 아직 갖지 못한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좌절하지 말고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고 있음에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성도의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저의 완전한 만족이시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시편 42편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올랐던 다윗, 아마도 그를 수행하였던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쓴 시일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을 뿐 이 시의 원저자는 다윗임이 분명하다라고까지 말합니다. 하긴 그 문체가 다윗의 다른 시편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추측을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먼 남의 나라 땅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그렇게 목 말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화려한 왕궁, 아니면 거기서 누린 호화스러운 연회,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던 비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 거기서 그리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주님을 뵙는 기쁨이었습니다. 성전도 두고 떠났고, 법궤조차도 거기에 두고 왔으니 이제 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할 수 없고,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 속에 있는 굶주림과 갈망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4살에 제가 교수가 되고, 35살 되던 해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설교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에 자주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그 어느 해 저는 자신과 그리고 나 자신이 돌보고 있는 지체들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리고 일주일 금식 기도를 하기로 하나님 앞에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시작은 했지만 한 이틀 지나면서부터 눈만 감으면 먹을 것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젊고 체력도 왕성했고, 소화력도 좋았으니 아마 음식에 대한 욕구가 더 컸을 것입니다. 이틀이 지나가고 만 3일이 채 되지 않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노릇노릇하게 튀긴 탕수육이 생각이 났습니다. 방금 튀겨서 아삭아삭한 그 맛과 그리고 한쪽에 뿌려진 달콤한 소스, 그리고 꽉 깨물 때 흘러나오는 신선한 돼지고기의 육즙까지 어쩌면 그렇게 직접 먹는 것처럼 명료하게 느껴지는지 하나님을 그렇게 느낀 적은 많지 않은데 왜 그 음식이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저는 뛰쳐나가서 시내에 가서 결국은 그 탕수육을 먹고 금식기도를 파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이틀 더 있다가 내려왔습니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나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 이것이 바로 주린다는 뜻이구나. 이것이 바로 갈급하다는 뜻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먹고 싶을 때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십니까?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 권세를 주겠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말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를 보고, 그와 함께 있는 것 이상의 행복이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I need you.’ 당신 자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자의 굶주린 갈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서 결국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부족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기는 했으나 하나님께 굶주린 마음으로 간절히 찾다보면 원하는 것이 그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사는 아니고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랍니다. 경건한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퀴나스야 나의 사랑 아들, 아퀴나스야. 너는 무엇을 원하길래 그렇게 금식하며 고행하며 나를 찾느냐? 내가 무엇을 너에게 주랴?’ 그러자 이 경건한 수도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사옵나이다.’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비밀들을 당신의 교회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시는 것임으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모든 현실을 이길 뿐 아니라 그 완전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하기를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내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자기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적인 고백이 되어야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행복과 지체들의 행복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함께 행복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헛된 것에서 영원한 만족을 찾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모든 여러분들의 삶의 현실에 일어나는 일을 통해 거울처럼 여러분의 영혼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교회에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도의 만족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은 많은 고난과 시련을 만났으나 이러한 믿음과 신령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현실들을 헤치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악인들과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에도 그곳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큰 죄를 지었을 때도 바로 거기서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를 꺾어버리고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심오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사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행복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모든 것을 가져도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이미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충만히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3 (2020.05.10._주일오전)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함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禮拜)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탄식하며 영혼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시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을 떠났을 때에 쓰여진 시(時)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이 표제어 때문에 이 시가 다윗을 가까이 모셨던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하는 것은 마스길은 지혜롭게 하는 것,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반복해서 잘 읽고 깨달으면 지혜로와진다 라는 뜻입니다. 고라는 원래 레위 집안의 사람이었고, 광야 교회 시절 모세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등감 때문인지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레위인들을 충돌질하여 반역을 꾀하였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는데 그들이 사는 진지의 땅이 열리며 삼켜지고 불에 타는 큰 심판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26장 10절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그때 모든 고라의 자손 집안이 죽지 않고 일부가 살아남아서 그 후손들이 반역의 집안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다윗이 나라를 세울 때 건국을 도운 공로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섬김이들이 되었다고 역대상 9장 19절과 26장 1절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가 다윗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던 고라의 자손이 쓴 시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는 다윗이 쓴 것이고, 고라의 집안에 맡겨진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체가 다윗의 문체임을 우리들이 쉽게 눈치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하는 것은 고라 자손이 지었다는 뜻도 맡겼다는 뜻도 아니고 그들에 의해 노래가 불리워지도록 지정되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중 어느 하나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든지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의 시이든지 간에 어쨌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탄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함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커다란 그리움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로 표현하는데 갈망함과 슬퍼함이 그것이었습니다.
A.갈망함
첫째는 갈망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추방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靈魂)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망을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갈망하다라고 하는 것은 원래 히브리어에서 ‘짜메아’라는 단어인데 목이 마르다 라는 뜻입니다. 이미 그는 앞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했습니다.
사슴들은 가을이면 교미기가 되는데 이때 생겨나는 신체의 특징은 타는 듯한 목마름이랍니다. 짝을 찾기 위해 나섰던 수컷들이 커다란 갈증을 느끼면서 물을 찾는데 신기루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달려가보면 시냇물은 없고 건조한 땅뿐입니다. 결국은 물을 찾지 못할 때 사슴은 앞다리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어갑니다. 시인은 그렇게 죽어간 사슴들의 시체를 보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표현법으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목마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성소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었고, 거기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성소로부터 추방되었으니 그는 하나님께 제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시인이 이전에 그 성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누렸던 영적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방의 땅에 추방되어서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영적 기쁨은 다름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leel chai)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병이 들 정도로 그렇게 마음이 아팠고, 식음을 전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두움에 휩싸이게 되듯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그 생생하고 은혜로운 만남이 있는 주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되자 그는 빛으로부터 멀어져 어둠에 깃든 영혼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최고의 숙제는 성전에서 만났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러신 분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어있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기보다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우리의 살아있는 영적 경험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하나님의 얼굴(pene elohim)을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임재(臨在)의 핵심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신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니 얼굴과 손과 발이 있을 수 없으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비할 데 없는 지복(至福)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33장 10절이나, 욥기 33장 26절에서도 입증되는 바입니다.
시인은 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의 경험을 성전(聖殿)과 연결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의 그 거룩한 임재의 진수를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모든 곳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당신의 임재를 당신의 집에서 보여주시기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압도적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수한 날들 동안 시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거기서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고, 자기처럼 주님을 만나 기쁨과 희열을 경험하는 형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기억들을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반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려면 헤어져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헤어져서 그가 없어도 넉넉히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헤어져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작별의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으로써 그의 사랑의 깊이는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으로부터 추방된 처지에서 시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난날을 추억하며 하나님과 만나던 때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던 사람들을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4절에서 그는 이렇게 눈물로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이 지난날 성전에서 기쁨과 감사(感謝)로 하나님을 경배했던 경건한 기억들은 지금 그의 마음을 상(傷)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프게 하고 있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때는 주님을 만나 영혼의 만족을 누렸고, 지금은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敎會)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무지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聖靈)의 은혜로 우리의 지성을 열어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우리의 정신을 하강하게 하셔서 그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 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의 인생을 보고 나를 보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현실에 종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의 얼굴을 뵈었기 때문에 남다른 인생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추방되어 있는 동안 절절한 그리움으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갈망 속에서 입증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갈망이 있는지 한번 새겨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죄의 용서는 무한량으로 약속되어 있으나 문제는 우리가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기쁨과 슬픔,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힘의 공급까지도 바로 그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여러분들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한 상태입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이 여러분들의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얼굴을 뵈올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간절히 당신을 찾는 갈망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슬퍼함
마지막 두 번째는 슬퍼함입니다. 시인은 이중적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안으로는 하나님을 뵙지 못하고 이방의 땅에 떠돌고 있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슬픔과 밖으로는 그치지 않는 이방인들의 조롱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선택된 백성으로서 같은 동족들에게 반역(反逆)을 당하고 왕궁을 버리고 성전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 도망나와 그 땅에 기숙하는 신세가 된 것에 대한 조롱이었습니다. 시인은 단지 이방의 땅으로 축출된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서가 아니라 이방의 땅에서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더욱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쏟아지는 수치스러운 이방인(異邦人)들의 조롱에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나의 음식이 되었나이다” 이는 그가 식음(食飮)을 전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축출되었기 때문에 그는 식음을 계속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주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되었는데 어떻게 그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금식기도를 드린 것일까요? 우리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처지에서 시인이 육신을 위해 먹고 마시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처럼 물 없이 마라와 같은 땅을 지나가는 곤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슬픔을 가지고 있다면 그 영혼은 놀랍게 살아날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한 달 전만해도 산과 들이 모두 앙상한 나뭇가지였는데 어느 순간 싹이 돋기 시작하고 이제 짙푸른 녹음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생명의 힘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을 갈망하며 슬퍼하며 당신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의 충만한 생명을 그들에게 부어주시겠습니까?
고국을 떠나 망명한 처지에서 시인은 두고 온 왕궁(王宮)과 성전(聖殿)에서의 안락한 삶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罪)로 인하여 이방의 땅에서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날마다 울었습니다. 주야로 눈물이 자신의 음식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입술을 타고 입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때 그렇게 자신의 눈물을 주야로 음식으로 삼으며 슬퍼하였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방의 땅에서 빛나도 모자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앞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고 해롭게 되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love)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이름의 영광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래서 시편 20편 7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나님을 자랑하리라는 결심과 동일한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방의 땅에서 모욕(侮辱)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시인의 마음을 타고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야로 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인의 기도를 들으셔서 결국은 다시 두고 온 왕궁으로, 두고 온 성전으로 돌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악인은 잠시 승리한 것 같았으나 하나님이 벤 풀과 같이 마르게 하시고,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시인을 돌보셔서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잠시 이방의 땅에 머물며 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의 말을 들으며 고통을 받았지만 그때 드린 눈물의 기도는 헛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다시 그들을 당신이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간 시인이 맨 처음 그 성전을 찾아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였을 때, 그 법궤를 다시 괴었을 때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 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행복(幸福)과 성전에서 멀리 추방된 자신의 처지를 대조했을 때 그 행복과 불행 사이의 간격을 인하여 시인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에서 내 마음이 상하다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내가 나의 영혼을 나 자신에게 쏟아버렸사오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영혼을 자신에게 물을 쏟듯이 쏟아버린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존의 감정입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자기를 의지하던 굳은 마음이 모두 녹아 내려 물처럼 쏟아져 버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것이라고 고집할 아집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그분만을 의지할 상태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사한 경험을 시편 22편 14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한 가지 소망(所望) 때문에 슬픔으로 녹아내렸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으로 경배(敬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죄옵고 그분의 사랑을 다시 받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성도의 마음에는 거룩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 슬픔의 깊이가 곧 은혜로운 기쁨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 지난날에 은혜 생활을 회고해 보면 하나님 앞에 많이 눈물을 흘렸던 때가 가장 기쁜 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슬픔의 깊이가 곧 은혜로운 기쁨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도 기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룩한 슬픔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자신이 영혼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살던 지난날의 행복과 그분의 임재 앞에서 추방된 현재의 비참을 대조했을 때 시인은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거기서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기쁨을 경험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한 사람들을 섬기며 주님을 만나 기뻐하는 형제들을 보고 싶어하였습니다. 문제는 거룩한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실한 회개도 있을 수 없고, 그 슬픔을 극복하게 만드는 신령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끊임없는 한탄과 이로 말미암는 하나님에 대한 미운 감정들은 결국 우리의 영혼에 파멸을 가져올 뿐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렇게 모든 인생사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때에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이 모든 은혜로 돌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교회 나와 보니까 여러 명이 구석구석에서 아주 간절하게 눈물로 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요.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여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세상에 문제가 아무리 커보이고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서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아도 간절히 주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놀라운 평안과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에 주님의 집에서 그 사람들 중 누가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하겠습니까? 한 구석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주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달라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당신을 찾는 사람들 모른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떠들썩한 행사나 계획 속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깊이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가 어디든지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슬퍼하게 될 것이고, 그 슬픔이 있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위로 손길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인의 참된 기쁨은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 높고 위대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거룩한 성일(聖日)에 무리와 함께 동행하며 성전에서 우리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송(讚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을 사랑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변하여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는 은혜의 경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에 있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거기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간절히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비천한 영혼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시인을 만나주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4 (2020.05.17._주일오전)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고난 받는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 후 자신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자기 안에 있는 두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눈앞에 현실 때문에 낙심(落心)하는 인간적인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 모든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의 자아(自我) 안에 있는 두 마음의 대화이며 결국 시인이 믿음으로 승리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Ⅱ.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
오늘 이 5절에서 다루는 내용은 불안한 영혼과의 대화입니다. 시인은 이방의 땅에서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마음으로 영혼과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여기에서 불안해하는 영혼 히브리어로 ‘네피쉬’(nepesh)는 시인의 낙심(落心)하는 마음이며 말하는 자아는 신앙(信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시 2:5).
A. 불안해하지 말라
이 고백에서 그는 영혼과의 두 가지 대화(對話)를 시도합니다. 첫째는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지금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방의 땅에 망명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태가 하루 바삐 해결될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역의 무리들은 이미 나라를 차지한 것 같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이때 현실에서 눈을 떼어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잠잠히 자신의 영혼(靈魂)을 살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의 원문은 원래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나의 영혼아 어찌하여 너는 내 던져졌으며 네 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입니다. 그 영혼은 스스로를 자신이 던져졌다고 여겨졌으며 그는 커다란 혼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은 눈앞에 가득 펼쳐졌고, 신앙의 구원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에 흔들리는 외적의 삶의 질서는 내면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따라서 요동치는 대신에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성하고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될 때에도 마음을 교만하게 갖지 말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좌절하는 것도 옳은 신앙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번영할 때나 혹은 실패를 경험할 때에나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도록 그렇게 관계 지워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만 신자는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겪는 마음의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살아왔던 이 시인에게도 망명(亡命)이라는 당장의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궁을 버리고 또 성전에서 멀리 추방되어 남의 나라 땅에 있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끊임없이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영혼은 내동댕이쳐졌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그 이방의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사면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던 그 현실 속에서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집에서 나누었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형제들과의 진실한 친목을 생각하면서 그는 더 큰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음이 우리 자신을 향할 때는 혼란(混亂)스럽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시련 속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요동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에 의해서도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고 변하는 분이 아니시니 그분을 찾을 때 마음은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렇게 연약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을 누리고, 모든 형제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즐거움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시인도 그랬습니다. 망명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의 영혼은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 한 마음은 낙심하고, 한 마음은 낙심한 영혼을 타이르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렇게 연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에만 현실을 이기는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이 불안해지는 이런 시험(試驗)의 시기에는 죄(罪)가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자신의 정체(正體)를 숨기고 더 크게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신앙으로 이기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자신에게 숨기기보다는 그대로 노정하면서 자신(自身)과의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흔들리는 감각적인 이성(理性)과 불변하는 하나님을 바라는 초월적인 신앙(信仰)의 대화였습니다. 경건한 묵상(默想) 속에서 떠오르는 그 하나님의 집에서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현실을 더욱 혹독하게 느끼게 만들었고, 결국 시인은 이미 마음 한편에서 낙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은 버림받아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느껴졌고,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이제 끊어진 것 같았고 홀로 버려진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43편 2절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렇게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시인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으니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낙심하는 때가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좌절한 그를 짓밟는 것처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한구석에서 결코 그러한 현실에 꺾이지 않은 희망을 갖는 자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기억하는 자아였고, 그 기억은 하나님의 집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죄인들이 제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던 이 시인의 기억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인 자신을 발견했고, 어디에 비할 수 없는 선하심으로 자기와 자기의 형제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 집에서 하나님을 친근히 느낄 수 있었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는 힘으로 사연 많은 일생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기억이 고난을 당하는 그 날에 시인을 믿음으로 붙들어 주는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 하나님의 집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누리던 기쁨이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영혼은 버림받은 것처럼 내동댕이쳐지고, 생각이 혼란스러워질 때조차도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그의 마음에 한줄기 등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말입니다. 항상 살아있으면 참 좋은데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에 제가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이 뭐냐 하면 진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기쁘게 받아들여지지만 항상 그 마음에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진리는 항상 살아있으나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인 진리는 마치 가라앉기 위해 받아들여진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서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림 같이 평생 잊어버리지 않도록 설명을 드려 볼까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하나의 돌멩이가 수면 위에 떨어집니다. 수면이 출렁거립니다. 이때 막 회개, 기쁨, 은혜, 사랑, 이런 것들이 막 물의 표면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에서 수많은 정동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을 듣는 것도 보통 열심히 아니고, 하나님을 늘 찾아도 부족한 것같은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니다. 얼마나 갈까요? 이게 그것은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가라앉은 진리의 기억들을 우리의 의식의 표면에 소환하는 것입니다. 가라앉은 것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리고 다시 물 위로 솟구치면서 수면을 다시 건드립니다. 그러면 그때 처음 그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우리의 마음의 표면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의 실천이 중요한 이유는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매달려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을 찾는 은혜의 수단들이 우리의 의식을 지나서 가라앉았던 그 진리들을 다시 일깨워서 우리의 마음을 때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런 현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 지금은 시인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제사할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 땅에 피난을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인도하였던 그 모든 것들은 과거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시련 속에서 소환해 내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을 건드리면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나는 버림받았다,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나는 하나님께 잊은바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꾸짖으면서 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무언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을 때에는 그것이 전혀 몰랐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대부분 모두 과거에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으면서 마음의 깊은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서 우리의 정신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처음 하나님 앞에 깨닫는 말씀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우리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창념하라,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경건의 실천이 없을 경우에는 한 번 깨달은 진리의 말씀이 기억의 저 깊은 바다 밑 속에 가라앉아서 그냥 죽은 듯이 누워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전에 깨달은 것은 사실인데 그 기억이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억과는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감동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심하면 짐승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신앙은 해석(解釋)의 능력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절망과 슬픔에 휘둘리지 않고, 저 기억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그 진리를 마음으로 떠올림으로써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림으로써 현실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빛 없이는 사물을 볼 수 없듯이 진리의 말씀 없이는 이 의미를 개달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시인에게는 자신의 영혼의 현재 상태를 진리의 말씀이 없이는 이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시인에게는 자신의 영혼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앙(信仰)이 있었습니다. 비록 마음은 시련과 고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나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하는 자아와 불신(不信)하는 마음이 대화하면서 그 마음을 꾸짖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이 말은 정반대의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신앙적인 요청입니다. “너는 결코 버림받은 적이 없으며 내던져지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밤하늘에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 공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별들이 태어났다 사라지는 것도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는데 하물며 잠시 태어났다 들풀에 이슬처럼 사라지는 우리 왜소한 우리 자신은 과연 그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 그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해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소망을 두라고 번역된 동사는 히브리어로 ‘호일리’(hochili)라는 단어입니다. 이 동사의 원뜻은 전치사(le)와 합쳐져서 ‘기다리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열왕기하 6장 33절, 미가서 7장 7절, 그리고 시편 38편 15절에서도 입증되는 바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시인은 그렇게 신뢰하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에 고요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자고 불신하는 자신의 영혼에게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모든 세계와 개인의 고통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싫어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제자리로 옮기기 위해서 바로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용하십니다. 마음에 갈등과 외로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어떤 사람이 탕자처럼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까? 그런 점에서 고통 한 토막을 끊어놓고 생각해보면 괴로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해서 나와 모든 사람들과 만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시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눈앞에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무질서(無秩序)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당신의 계획 속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실 때 당신을 만나주실 때는 언제입니까?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자신은 내버려두고 상황만을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자기에게 행복한 현실을 만들려고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런 노력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평안할 때 당신을 멀리 멀리 떠난 사람들을 시련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만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경건으로 돌아오라는 회초리요, 이미 경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어루만지시는 당신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것은 외롭고 배고픈 일이고 하나님의 품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 때 가출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들은 여러 명이 가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게 길이를 보면 3박 4일을 못 넘깁니다. 특히 중학교 때 기껏해야 2박 3일입니다. 그런데 1박은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훔쳐온 돈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쓰면서 놀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서 하루 자고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은 돈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집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똑같이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멀리 떠나서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즐거워하며 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낮아진 마음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보다 한 100년 후에 사람인데 485년경부터 585년까지 살았으니까 로마 시대에 100세를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로원의 의원을 지냈고, 후에는 기독교 교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카시오 도로스(F. M.. A..Cassiodorus)라고 하는 사람이 시편 해설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해서 높아진 마음으로는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가장 낮아진 겸손의 마음 안에서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낮아져 겸손한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만났던 기억들을 되새김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의 날에도 두 가지를 잊지 않는다면 헤어 나올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으셔서 나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그렇게 나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하나님은 말씀(word)으로 우리를 건지신다는 사실입니다. 멀어졌던 하나님을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영혼이 자신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깨닫게 하여 우리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불안하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앙으로 마음을 타이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요동치는 영혼에게 타이릅니다.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 악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질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으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끊임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부유물(浮流物)과 같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묶어 놓으려고 해서는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굳건한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우리의 영혼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결국은 당신이 원하시는 상태로 되돌려 놓고야 마시며 그때까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면 당신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지(依支)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당신의 사랑으로 돌보셨는지를 기억하며 나의 인생을 스스로 주장하던 고집을 버리게 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이야기는 자신의 인생을 선하게 결국은 되돌려 놓으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존(依存)의 마음 안에서 시인은 고요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대합니다. 시편 42편 5절 하 반절에서 말하기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비록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어목한 망명의 상황이었고 도처에서 들려오는 조롱 소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추방된 슬픔이 압도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이 기다리는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신앙은 기다리는 것이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동치는 현실에 불안해하는 영혼을 잠재우며 결국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갈급했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은혜로운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중한 현실을 이겨냈고, 결국은 시인의 이 기도를 기억하셔서 악한 무리들을 사람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처단하시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록 연약하고 오류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워하던 왕궁으로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갈망하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다시 처음으로 그 성전을 다시 들어서며 거기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망명의 길은 마치 쓰디쓴 고통과 같았고 그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순간은 사막의 단비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고, 예배하며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된 자신의 처지를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으로 참고 기다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요통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작은 일에 우쭐하거나 우연한 현실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렇기 때문인데 신앙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분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큰 시련 속에서 가장 적합한 위로(慰勞)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시인의 소원은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였습니다. 원수들을 비참하도록 보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며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서 전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형제들과 함께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생(一生)은 날아가듯이 빠르게 흐릅니다. 영원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은 변전(變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젊었을 때도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도 늙은 때에도 죽음을 앞둔 날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찾는 우리를 만나주셨고,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이기며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살 수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집에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남은 생애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벽한 삶을 살아낼 것이라고 자신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낙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경건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지극히 좋으신 하나님과 나누었던 아름다운 교제의 기억들, 그리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 은총의 기억들을 소환함으로써 엄중한 현실을 이겨내며 오히려 고통 받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고,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품으로 파고드는 신앙의 비밀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5 (2020.05.31._주일오전)
예루살렘에서 기뻐할 때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시 122: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다윗이 지은 시(時)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shir lamaolot)라고 한 이 번역은 원어적으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자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은 3대 절기가 있었습니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그리고 맥추절인 칠칠절,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수장절이 있었습니다.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출애굽기 23장 17절에 의하면 이 삼대 절기에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하나님의 성소(聖所)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집은 당시 성막을 가리킵니다. 아직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예루살렘 자체가 순례(巡禮)의 목적지였습니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에 순례 온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贊頌時)시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II. 예루살렘에서 기뻐할 때
오늘 본문에 보면 시인이 가상적인 예루살렘의 순례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고대의 이 예루살렘은 ‘샬렘’(shale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샬롬’과 같은 어원으로 평화, 혹은 안녕이라는 뜻이었습니다(창 14:18). 아브람 시대에 이 지역의 왕은 멜기세덱(Mechizedek)이었고, 그 후 150년쯤 지난 후에 가나안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정복하여 그 성읍을 “여부스”라고 불렀다고 역대상 11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예루살렘(yerushalem)과 유사한 옛 명칭인 우로살렘(urusalim)은 주전 12세기와 15세기 이집트 문헌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여호수아서 10장 1절과 12장 10절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원주민 왕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 위에 오른 뒤 이 성읍(城邑)을 점령하고 이곳을 시온 산성, 혹은 다윗성이라고 불렀다고 사무엘하 5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 학자들은 몇 가지 유력한 의견들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광범위한 설득을 얻는 이론은 이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샬렘’은 평화이고, 그리고 ‘예루’는 성이라는 말의 고어로서 평화의 성, 평화의 도성이라고 불리운다는 의견입니다. 어쨌든 다윗이 이곳을 점령한 후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A. 성도의 참된 기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첫 번째는 성도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 기쁨은 여호와의 집(bet Yawh)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뵙기를 사모(思慕)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소 혹은 성전을 기억해 보십시오. 죄가 있어 곤고한 사람이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었을 때에 경건한 성도는 여호와의 집을 찾아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서원의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 낙심한 성도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성도들은 거기서 헌신을 맹세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시편 122편 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시대에 아직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성막이 성전을 대신하였습니다. 성막은 그다지 화려하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장소에 쳐진 텐트였습니다. 물론 그 속은 화려했지만 겉으로 볼 때는 물돼지 가죽으로 만든 가죽 그저 칙칙하고 햇빛에 그을린 평범한 텐트였습니다. 그때는 이제 예루살렘 성읍 자체가 순례의 목적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예루살렘이 성막이 있는 곳이었고 거기서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뵈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뵙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22편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상 속에 있는 미래의 일을 과거의 형태로 표현한 것인데 이것을 예언자적 과거(prophetic past)라고 말합니다. 즉,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의 감격을 이미 상상 속에서 느끼면서 이런 시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신데 왜 시인이 느끼는 이 매우 특별하고 신령한 기쁨이 하나님의 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당신의 임재(臨在)를 보여주시고, 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당신의 왕권(王權)을 펼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통치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했고, 여호와의 집에서는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신령한 은혜(恩惠)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들어서면 그것은 정말 바로 어디로 들어서던지 코앞에 바로 성막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뵈옵고, 그 임재를 뵈옵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살아갔으니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읍이었던 것입니다.
성도(聖徒)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이며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최고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자신의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참된 기쁨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하고 있는 성도는 이미 영혼이 위험하다는 신호등이 들어온 것입니다. 성도는 참된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찾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그 일은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어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의 만족을 얻으며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받습니다. 거기서 어그러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비록 미끄러졌으나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敎會)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성도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교회를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참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로써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만큼 육적인 자기를 벗어버리며 하나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참된 기쁨을 하나님의 집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우리 함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라고 말할 때 시인의 마음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직 성전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 다른 곳에서는 누릴 수 없던 놀라운 감격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것입니다. 거짓된 성도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을 취하려고 하고, 참된 성도는 세상의 것을 희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그 기쁨이 이 세상의 무엇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남이 모르는 기쁨의 비밀을 찾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는 세상에서 행복을 누렸고, 먹고 입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는 데서 기쁨을 찾았지만 그것이 하찮은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영원한 행복이 되지 못하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많은 사고를 가져오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행복의 욕구가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에 참스러운 행복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참된 기쁨의 근원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사라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길 수 있으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잃어버릴까봐 불안해하게 되지만 그러나 성도가 발견한 참 행복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수 없고, 어떤 인생의 처지를 만나든지 간에 변함없으신 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행복이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기쁨의 비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련의 가시밭길을 지나고 고난의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그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던 것은 어떤 처지에서도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삼으며 살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수에게 박해를 받고, 괴롭히는 자에게 고난을 당할 때도 시인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하는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집에서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고, 그 기억들이 소환되었기 때문에 오늘 누군가가 시인에게 우리 함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꾸나 라고 제안을 하였을 때 그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 뛰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눈 기억의 깊이와 크기만큼 세상을 이기며 자기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참된 기쁨을 하나님의 집에서 온전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잘 짜여진 성읍
마지막 두 번째로 시인이 예루살렘에서 기뻐한 이유는 그 성읍이 “잘 짜여진 성읍”(keyir shechubbera lah yachdahu)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고자 했을 때 시인의 마음은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 가면 예루살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루살렘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깝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과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서로 모여 조밀하게 하나가 된 성읍처럼 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하면 어마어마한 도시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시편이 쓰여지던 주전 10세기에 이 예루살렘의 크기는 만 이천 평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작은 부락과 같은 성읍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세계의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읍도 한없이 작은 성읍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아들인 솔로몬의 시대에 약 930년경에는 약 4만 평 정도의 크기로 확장되고, 주전 700년경인 히스기야 시대에는 약 15만 평으로 약 네 배 가량 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에스라 시절 바벨론에게 패망한 시절에는 약 주전 430년경인데 약 12만 평으로 크기가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주전 2세기 하스모니아 시대에는 다시 20만 평으로 늘어나고, 예수님 태어날 그때 약간 전 주전 4세기경 헤롯 대왕 시절에는 다시 약 28만 평으로 확장을 거듭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고고학적인 발굴들을 통해서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서 종합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당시 예루살렘 크기는 규모가 크지 않은 아주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아름다운 성읍이었습니다. 거기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감동을 받은 것은 그 성의 어마어마한 크기가 아니라 그 성읍이 잘 짜여진 조화(調和)와 질서(秩序)로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예루살렘은 대대적인 발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러한 좋은 건축물들이 자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런 물리적인 건축의 아름다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게 작은 예루살렘 성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이웃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질서였고 사랑이 주는 조화였습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지를 본보기로 보여주었고, 또 미래로는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 of God)을 드러내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회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진리와 사랑(love)으로 이루어진 질서에 있는 것입니다.
옷감을 짤 때 무슨 옷감이든지 그 섬유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직조함으로써 천이 되는 것입니다. 싸구려 옷은 질이 별로 좋지 않은 실을 써서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어 비싸지 않은 천이 되고, 그리고 좋은 옷감은 아주 질이 좋은 실로 씨줄과 날줄을 삼아 직조되므로 값비싼 옷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비록 예루살렘처럼 작을 지라도 얼마나 순수한 진리와 사랑으로 그들이 삶을 엮어가는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씨줄과 사랑의 날줄로 순수한 진리와 순결한 사랑으로 성도들의 인격과 삶이 조직되고 교회의 질서들이 올바로 잡히게 될 때 작지만 그 교회를 통해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잘 짜여진 아름다운 성읍 예루살렘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격했던 것처럼 또한 그런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진리와 사랑(love)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운 짜임새의 근원은 질서(秩序)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질서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오고, 그 진리를 따라 모든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사랑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성경(聖經)과 세계(世界)를 주셨습니다. 성경은 영감으로 주어졌고, 세계는 창조됨으로써 우리의 눈앞에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이것들을 통해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감된 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측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성경과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진리의 질서를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만큼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세게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성경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敎會)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이 인격과 생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학 성경에서 이러한 아름다움의 극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진리로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사셨는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사랑에 불을 붙이고, 사랑에 불붙은 열심은 진리를 갈망하게 만들어 그 속에서 진리와 사랑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보았다면 이후의 사람들은 세워진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또 그 진리를 전심으로 사랑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사람들은 그 교회를 보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幸福)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백성 중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가 얼마나 값진지를 보여주고, 인간이 무엇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만큼 인간은 행복한 것이니 여기를 떠난 어떠한 행복도 우리를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리(道理)는 이렇게 성경과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감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세상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는 데에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교회가 아름답고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가 사랑하는 세상이 추루(醜陋)해졌습니다. 교회가 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세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시고, 진리를 보내셔서 우리가 행복의 질서로 돌아가도록 만드심으로서 이 일을 이루십니다. 죄(罪)는 이 아름다움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은혜(恩惠)는 그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를 버리고 추악한 자신의 질서를 따른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봐라 이놈아 너는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오만 군데 나를 끌고 다녔지만, 그 결과가 겨우 이것이더냐? 나는 참 행복을 떠났고 너를 믿고 너를 의지한 결과는 결국 불행과 고통밖에 없구나.’ 하면서 이제까지 믿었던 자신을 미워하고 처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이렇게 자신은 믿을 바가 못 되고 이제는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과 신뢰를 갖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껏 긴 세월을 나의 욕심과 그리고 나의 자아를 따라 살았으나 그 마지막은 참된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고, 그 무엇도 우리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배부른 만큼 굶주린 바 되었고, 그리고 목을 축인 것만큼 기갈한 바 되었으며 만족을 얻은 것만큼 고통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는 자신의 꾀임에 떨어지지 않겠다고 결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신뢰하지 않겠다.
(찬양)
이젠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갈보리에서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제 신뢰하며 따르겠노라고 돌이켜 서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어느 기록을 보니까 회심 이후의 어거스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젊은 시절에 아주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성적으로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로마서를 읽으며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느 여인이 어거스틴을 불렀습니다. ‘어거스틴, 어거스틴, 저에요.’ 돌아다보니 한때 자신과 정을 통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여자여, 그대는 그대이지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네’ 라고 말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임재를 경험하고 옛 자아와 결별하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만드는 이 일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나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욕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속에서 의욕이 용솟음칠 때 그가 살고 싶은 삶이 어떤 삶일까요? 이게 하나님의 사람의 질서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게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나면 그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만 그렇게 살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질서로 돌아오고 극단적으로 타락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질서로 돌아오게 되는 것, 그것 이상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선생이 되고 제가 한 1년 뒤에 이후의 저의 인생의 갈 길을 확정 짓게 만드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때는 정말 엄밀한 의미에서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 그때 마음을 책에도 표현했는데 어느 날 하루는 기도하는데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애쓰지 마십시오. 저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행복하지 않은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애를 써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하나님의 집에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문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 아름다운 성읍의 모습이 시인과 순례자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도시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사는 경배의 도시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사는 모든 세상이 이렇게 예루살렘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당신의 집에서 주십니다. 이 질서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난 경험으로 자기 인생(人生)을 해석합니다. 성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결국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더러운 세상을 보면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알기 때문에 그분을 꼭 끌어안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면서는 자신이 그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그분을 더 꼭 끌어안습니다. 성도는 이로써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든 깨달음과 사랑을 하나님의 집에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렇게 은혜(恩惠)를 받고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6 (2020.06.07._주일오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 84:4-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고라 자손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시(時)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사모(思慕)의 정과 그 집에 사는 행복(幸福)을 노래한 최고의 시들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이 시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시인과 다윗이 망명(亡命)의 길에 있었던 때이거나 그 난이 평정될 즈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시에는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한 간구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다윗 왕을 위한 간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9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너무나 사랑해서 병이 나서 쇠약해지기까지 그 집을 그리워하였으니 이것은 곧 그 집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져다 준 그리움이었습니다.
II. 주의 집에 사는 행복
시인은 이런 그리움과 함께 한 주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집에서 사는 행복입니다. 시인은 타의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있어야 했고, 그런 망명의 생활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성전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성도의 행복한 삶에 대해 선언합니다. 본문 4절은 말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복이 있나니’ 하는 구절은 ‘행복이여’(aher)라고 하는 원래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행복이라고 한 히브리어의 ‘아쉐르’는 모든 사람이 흔히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복(spiritual blessing)을 가리킵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주님을 찬송합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찬양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은 잘 조율된 현과 같아서 때로는 고난이라는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도 하늘 가락이 울려나고, 평안이라는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도 천국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으로 조율된 그의 마음을 건드리나니 거기에서 모든 상황은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yoshebe)입니다. 사는 사람들, 히브리어로 ‘요쉐베’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야샤브’, 거주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분사입니다. ‘야샤브’는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일시적인 체류(滯留)나 의례적인 방문(訪問)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집이 자신이 영원히 거할 곳이라고 믿고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된 가운데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이렇게 주님의 집에서 사는 사람이 얻는 행복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합니다.
A. 하나님께 힘을 얻음
첫째는 하나님께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당신 안에 힘을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고난 속에서도 그 엄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룩한 힘을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40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던 시인과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유익입니다. 아무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신비한 힘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공급받고 그것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번뇌 속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 모든 상황을 행복한 삶으로 바꾸며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자신이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있고 자기같이 미약한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대한 의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59편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의 가장 방탕한 시대에 핍박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세상을 보면 아무 희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의 위대한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12장 2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義人)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지만 악인(惡人)은 자신을 힘으로 삼는다고 시편 52편 7절이 말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시인의 기도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힘이 그분과의 은밀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교만한 마음보다는 그렇게 은밀히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살 수 있음을 믿었으니 그는 86편 1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조상은 자기를 너무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등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셨으니 처음 조상에게서는 우리가 교만해지는 법을 배웠고, 두 번째 아담으로부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당신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두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 또한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다른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힘을 주시나니 신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시온의 대로가 있음
두 번째는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온의 대로(mesillot)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에 한 단어로 나옵니다. ‘메실로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큰길들이라는 복수형입니다. 큰길, 혹은 대로(大路)라고 한 의미를 가진 이 한 단어가 어떻게 시온의 대로로 번역되었을까 궁금합니다. 그 의미는 간단하게 설명해서 이런 것입니다. 제국 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향하여 큰 길이 났듯이 아마도 당시에 모든 이름을 가진 대로들은 예루살렘과 시온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은 이 길들을 순례의 길(pilgrimage)이라고 번역했고, American Standard Bible은 시온에 이르게 하는 대로(the highways to Zion)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시 순례자의 길은 당연히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시온이라는 이 말은 좁은 의미로는 예루살렘 남쪽 끝에 있는 산지(山地)를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예루살렘이 속한 전체 도시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1장 8절과 예레미야 8장 19절이 증언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마음이 하나님의 집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경배하고자 하는 자들은 신령한 복을 누린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단지 화목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또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복(福)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복을 당신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부어주시나니 이 주시는 복으로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비록 왕궁으로부터 쫓겨나고,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되었어도 낯선 망명길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처지에 있었어도 시인의 마음은 한결같았나니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길에 어찌 시련과 고통이 없겠습니까? 불완전한 세상에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 인간에게 어찌 고난과 슬픔이 없겠습니까? 인생에는 순경(順境)이 있으면 역경(逆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들은 순경 속에서는 자기를 평안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하나님의 집을 찾고, 역경 속에서는 고난을 이길 힘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은총을 구하고자 하나님의 집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을 스스로 힘을 삼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순경을 만나면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고 역경을 만나면 모든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은 나쁜 일을 만나도 좋은 것이요, 좋은 일을 만난 것이라도 좋은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쁜 일을 만나면 그냥 나쁜 것이요, 좋은 일을 만나도 결국은 나쁜 일이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신자가 누구입니까? 시련을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던 하나님의 집에서 이 시인의 소원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고, 그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이겼고, 자신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나 이방의 땅에 피난을 와서 사람들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다운 시가 그의 마음에서 울려 퍼졌을 리가 있겠습니까? 흐느껴 울고 때로는 피를 흘리지만 그 시련이 없었더라면 결코 생산될 수 없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하늘의 가락들이 오늘 약 3000년의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의 현을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련을 만난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을 만나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기울어지고 그분을 기도(祈禱)로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나라가 망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남의 나라 땅으로 끌려가 그 나라를 위해 봉사하여야 했던 믿음의 사람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나라 땅에 끌려와 그 나라를 위해 부끄럽게 일하면서 그가 가진 유일한 위로는 거기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간악한 자들은 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왕이 세운 금신상 이외에 어느 신에게 기도하는 자도 사자 굴에 집어넣기로 그릇된 법령을 만들었고, 어리석은 왕은 이 조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6장 10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감사한 것일까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 중 기뻐할 만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시온에 대로에 있었습니다. 남의 나라 땅에 포로로 끌려와 마음에 없이 그 나라를 섬겨야 했지만 그가 섬긴 것은 그 나라의 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시온의 대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는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음을 지키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에 모두 헤프게 내어주어 버리고 이 속세의 정신이 자신의 마음을 짓밟고 지나가게 하면서 경건의 불길이 타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럴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시인이 그러면 그럴수록 예루살렘과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은혜에 보좌를 사모하십시오. 고요한 시간에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거기에서 고요히 무릎을 꿇고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놓으십시오. 사람들 앞에 눈먼 자로, 귀머거리로, 그리고 벙어리로 살아야 했던 사연을 그분 앞에 모두 쏟아놓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십시오. 그가 바로 마음의 시온의 대로를 가진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거기서 세상을 이길 비밀스러운 힘을 하나님의 은혜의 장막에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고요한 곳을 찾으십시오. 거기에서 마음을 쏟으십시오. 하나님의 집을 찾으십시오. 거기서 조용히 마음을 기울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거기서 세상을 이길 신비한 힘을 갖도록 마음의 시온의 대로를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시련을 이기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로는 시련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눈물 골짜기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에멕 하바카’(emek habbak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눈물 골짜기가 아니라 고유 명사인 박하골짜기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르낭이라고 하는 학자는 예수의 생애라고 불어로 저술된 책에서 이 부분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 박하계곡은 북부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머무는 곳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검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오디 열매가 풍성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 오디에 물든 개울물이 검은색을 띠고 흘렀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사무엘하 5장 24절에서 이 박하라고 하는 이 단어가 그런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어느 장소인지 단언할 수 없으며 박하계곡이라는 고유 명사를 가지고 있는 장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교롭게 이 박하는 마지막에 스펠 하나만 바꾸면 ‘울다’(baka)라는 동사가 됩니다. 그 철자와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구약 성경의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vulgate)역은 이 단어를 ‘플래투스’(fletus)라고 번역했는데 눈물 흐느낌, 탄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느 이론인지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확실히 이곳은 특정한 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고 그 길은 아마도 매우 험한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거기를 지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집으로 경배하기 위해 가는 순례의 길 중에 그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집을 향하는 순례의 길이 매우 험난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즉, 그 험한 박하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도 그곳에 많은 샘이 있게 하실 것이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집을 향하여 시온의 대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항상 쉬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지만 좁고 협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 때 놀랍게도 거기에서 생명의 샘물을 넉넉히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거기서도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없이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종 모세에게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물을 공급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옥체를 깨뜨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고, 거기에서 우리의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생명의 물이 솟아날 것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샘물, 생수(生水)는 한결같이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통과 그로 인한 만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생명의 물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배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영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끊임없는 기쁨과 만족, 행복과 평화, 무한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가 솟아난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비록 성전을 떠나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 있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조롱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시인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시인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체험한 바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에 마음을 품고 있었던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그곳에서 많은 샘물을 만나 목말라 쓰러지지 않게 하셨던 것을 기억했으니 이것이 어찌 실제의 물리적인 물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곤고한 영혼을 두루 적셔주시던 하나님의 영적인 은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왕에게 은혜를 구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은 것도 아니고, 부자에게 도움을 구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거기서 사랑하신 하나님을 바랐던 모든 사람들, 그분에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고백하며 그분이 공급해주시는 은혜의 힘이 없이 살 수 없다고 울부짖었던 모든 사람들은 시련을 이길 넉넉한 힘을 그분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짓밟힐 것 같았으나 살아남았고, 쓰러질 것 같았으나 일어났고, 무명할 것 같았으나 유명한 사람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성심으로 자신을 찾는 사람들,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뵈옵기를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제가 회심을 경험한 것은 21살 때였고, 그때 제가 처음 다닌 교회는 아주 황량한 벌판에 서있는 조그만 2층에 세 들어 사는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이 한 3-40명 되는 예배당이었습니다. 회심하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종종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그 교회 주변에는 중량천 뚝방에 무허가 판자촌이 가득했고 대부분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교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중량천에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야 되는 시절이었으니 그때 가난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고구마를 구워 팔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풀빵을 구워서 팔던 그 연세 드신 아주머니들이 그 늦게 일을 끝내고 고단하게 한숨자고는 그 눈보라 치는 겨울에 몸빼 옷에 얇은 스웨터 하나를 걸치고, 목도리를 한 채 눈길을 걸어서 새벽 4시 반에 기도하러 교회에 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가난하고 보잘 없이 살지만 주님은 나의 힘이시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나이다라는 고백이 거기에 묻어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시거나 심지어는 우리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집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였기 때문에 쇠약해지기까지 하였고, 그 마음과 육체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에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30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시인과 우리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의 진실성 때문이고, 거기에 우리를 비추어볼 때 우리의 마음이 병들고 부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시련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근심하고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놓으며 그분 앞에 눈물을 흘리십시오. 주님은 그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때에 여러분들에게 수많은 샘들을 터트려 여러분들의 메마른 영혼을 두루 적셔 눈물 골짜기가 기쁨의 계곡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는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이른 비는 파종을 위해, 늦은 비는 마지막 결실을 위해 곡 필요한 비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집을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실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만남으로 시련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회(敎會)에서 그분을 의지하고 사는 것보다 더 큰 특권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거기서 모든 상황을 능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당신께 마음을 쏟는 사람들, 당신을 사랑하기에 모든 시련 속에서 당신에게 피하며 당신의 집에서 경배(敬拜)하고 싶어하는 모든 자녀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영혼과 육체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집을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살려주시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셨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특별한 생명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행복7 (2020.06.14._주일오전)
경건한 성도의 소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0-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를 받고 신령한 복을 누립니다. 그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고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그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시온(Zion)을 향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슬픔의 계곡에서도 행복의 샘을 발견합니다. 이 비밀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서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靈魂)에게 주시는 생명(生命)의 능력이며 시인은 일찍이 이러한 비밀스러운 은혜를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체험적으로 노래하면서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II. 경건한 성도의 소원
이 은혜로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절정을 이루면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한 가지 주제, 경건한 성도의 소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성도의 소원에 대한 고백(告白)과 함께 주님을 향한 믿음을 표명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A. 성전에서 살아감
첫째는 성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행복을 시간과 장소와 관련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배하체레이카’(bahachereika)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궁정(宮庭)은 출애굽기 27장 9절과 출애굽기 8장 13절에 의하면 울타리에 둘러싸인 뜰 혹은 마당을 의미했습니다. 당시에는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습니다. 다른 장소(場所)와 구별되도록 하나님의 성막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쪽 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장소는 악인의 장막(ohore resha)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집이 장막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집은 주의 궁정이라고 묘사하고, 악인의 화려한 집은 장막이라고 묘사한 것은 악인의 번영이 영원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비록 텐트에 불과했지만 궁정(宮庭)이었으며 악인의 집은 궁궐과 같았으나 장막(tent)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장막이 아니라 그 장막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장막은 비록 장막에 불과하나 궁정과 같았으며 그 왕권은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잠시 있다 사라진 것과 같기 때문에 그 집이 궁궐(宮闕)과 같다 할지라도 사실 그것은 장막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고 악인은 잠시 번성하는 것 같지만 사라진다는 사실을 시편 37편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악인의 궁궐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천막(天幕)에 있기를 사모하였습니다. 천막이 궁궐보다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천막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의 성막과 악인의 집에서의 시간(時間)을 대조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보내는 하루가 악인의 집에서 보내는 천(千) 날 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인의 추측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궁궐과 같은 세상 사람의 집에서 누리는 기쁨은 시간과 함께 소멸되는 기쁨이지만 천막과 같은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은혜(恩惠)의 기쁨이 세상의 즐거움을 능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聖徒)가 하나님의 집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나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진실성은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경험했습니다. 물질이 아니기에 만질 수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쳐다볼 수도 없는 그분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당신의 살아계심과 복되심을 알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지혜롭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을 그들만 못한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시고, 이후로부터 이 모든 세계는 아주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의 마음에 증거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은혜의 비밀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를 아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어떤 값진 음식과 좋은 의복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이황 퇴계 선생의 글을 읽다가 보니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참된 도리를 깨닫는 기쁨은 돼지고기를 먹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돼지고기였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게 매우 귀한 음식이었고, 그리고 그것이 주는 미각의 즐거움이 선비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거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이 기쁨을 모르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은 억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니 결국 하나님의 그 달콤함에 이끌리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스스로 진리를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思慕)하게 했을까요?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 집에서 거하는 그때를 그토록 기뻐하게 했을까요? 외관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집은 그 당시 천막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특히 지붕은 물돼지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온갖 바람에 풍상에 쩔고 쩔어 그저 거무튀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을 그리워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뜰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엄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자들이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세계를 깨닫고 어리석은 삶에서 돌이켜 지혜로운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진리의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그 은혜를 간직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敎會)를 사랑합니다. 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만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지체들을 사랑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자연 만물에 대한 폭력을 멈추고 그 모든 자연 만물을 선의(善意)로 대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恩惠) 아래서 살아갈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교회를 위해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온 인류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일 종자씨로 삼으셨습니다. 그를 교회의 머리 삼아 우리 모두를 그의 몸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교회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같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양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 같은 교회의 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거기서 모든 세속적인 가치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묻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자기로 말미암아 티끌만큼이라도 이루어지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성도의 행복(幸福)입니다.
B. 은혜와 영광을 주심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은혜와 영광을 주십니다. 이어서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찬 현실에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자신의 마음을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 해, 히브리어로 ‘쉐메시’(shemesh)라고 하는 이 해는 문자 그대로 태양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이 태양은 크게 두 의미로 사용되는데 모든 생물을 살아있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빛으로서 모든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을 보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해라고 하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진리(眞理)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백성들을 돌보시는 은총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있기에 우리는 그 빛 때문에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결국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볼 수 있게 우리의 안목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자신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분의 은총은 당신 자신의 불변하심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들에게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 앞에 어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결국 방패(防牌)라는 단어로 이어집니다. 아시다시피 방패는 싸움에서 적들의 창칼과 화살로부터 생명을 보호(保護)해주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이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뜻합니다. 일찍이 가나안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고,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했지만 보복에 두려워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입니다. 조카 롯은 자신을 배신하여 무력을 좇아 떠났지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나안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그를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그 가나안 원주민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그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도 큰 방패 뒤에 바짝 숨어 있어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은 맞힐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빗살처럼 쏟아지는 그 화살과 같은 시련 속에서도 이 아브라함을 홀로두시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입니다. 상급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래본 적이 있습니까? 수백 명, 수천 명이 보는 사람 앞에 상을 타본 경험 말입니다. 아마 그 기쁨과 그 설레임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냥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급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하나님이 큰 상급을 계획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이미 상급과 같은 존재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람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 되갚아 주실 것을 계획하고 계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의 고백(告白)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으로부터 친히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때에는 우리의 방패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제사장(祭司長)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에서 워낙 유명한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목사님들은 예배시간에 축도로 이 구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민수기 6장 24절과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말입니다. 그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원래의 번역을 하면 나는 이렇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가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항상 심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너에게 복을 주며 나는 너를 지키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복주시고 모든 환란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거기서 영구히 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 흥왕한 악인의 궁권보다 여호와의 천막의 문지기라도 하루라도 살다가 죽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복을 내려 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시켜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은혜와 영광(hen wekabod)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카보드’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를 영화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영광입니다. 구약에서 영광은 중요하고 무게감이 있어서 그것이 거기에 있으면 다른 것들이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그게 바로 영광입니다. 영광의 본체는 하나님이시지만 당신 때문에 또한 그렇게 영광스럽게 하셔서 중요(重要)하고 의미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전에 주님을 모를 때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때문에 의미있고 중요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목적도 없이 자신의 욕심을 따라 방황하며 살다가 죽을 사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선(善)한 뜻을 이루는데 쓰임을 받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인 소유와 지위에 의해 세상(世上)의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그를 소중하게 하심으로 하늘의 영광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며 구름처럼 나타났다가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시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도로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소중하게 쓰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빛나는 그 모든 곳에서 그의 사랑도 기억하게 하시나니 하나님 때문에 지키심을 받고 은혜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같은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시 84:11 하). 이것은 하나의 법칙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그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난 거룩하고 은혜로운 추억을 간직한 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바라며 살 것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요동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한가한 날이 어디에 있었겠으며 파도가 치지 않는 현실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신앙이 있을 때에는 그 파도 속에서 그 파도를 인하여 하나님의 항구에 더 가까이 가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모든 좋은 것이 오직 그분에게로부터 옴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단지 여러분의 몸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며 여러분 자신이 참된 성도가 되어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해요, 방패가 되실 것이며 모든 은혜와 영광을 더하여 여러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복 있는 자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복(福)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 이 위대한 시(時)의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집을 사랑했던 시인이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며 몸소 체험한 진리(眞理)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人生) 중 얼마나 많은 날들이 거짓된 행복의 추구 속에서 낭비되어 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고난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인생길을 우리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 시는 끝이 납니다. 그것은 바로 참으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II. 참으로 복 있는 자
그는 누구입니까? 참으로 복(福)이 있는 사람은 현세적인 행복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며 이 복은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던 시인은 행복한 인생에 대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그 전망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 때문에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전망입니다.
A. 만군의 여호와
오늘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러한 행복의 근원(根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인데 그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이 만군의 여호와는 히브리어 성경에 ‘야웨쩨바우트’(Yaweh zebaot)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군대들의 여호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수많은 하늘 군대를 거느리신 왕(王)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용사로서(Yaweh as Warrior) 묘사합니다.
사단(Satan)의 유혹에 의해 발생한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행복하여야 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한편으로는 불쌍한 인간들을 용서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반역(反逆)을 끝내기 위해서 용사로 등장하시는 엄위(嚴威)로우신 분으로 제시됩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끔찍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용서하고 자비(慈悲)를 베풀어 구원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악(惡)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심으로 당신이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선(善)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인간은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때 행복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반역은 진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의 죄와 세상의 악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결국은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만군의 하나님, 곧 군대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32장 2절에서 천사(天使)들을 만났고,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1절에서는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군대라고 칭했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13장 4절에서 여호와는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시는 분이시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시편을 쓴 시인들에게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향하여서는 강하고 능한 전사이셨습니다. 반란을 늘 토벌하고 평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며 언약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에서는 세상 끝 날에 최후의 우주적(宇宙的) 승리를 얻게 될 성도(聖徒)의 무리를 군대로 묘사했습니다. 계시록 19장 13절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했으니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계시록 19장 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을 이끄시는 만왕의 왕, ‘king of kings’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왕들의 왕은 모든 왕들과 모든 왕들을 굴복시킨 최고의 왕이며 따라서 그 왕권에 도전하는 왕들은 정복하여 즉시 그 반란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있는 왕으로서의 우주적인 임금이신 것입니다.
이 시인은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인하여 망명의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야 했고, 이방의 땅에서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을 목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기를 갈망했으며 이방인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할 때에 시인의 이러한 소원은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고난(苦難)의 길을 헤쳐오면서 시인이 깨달은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영광(榮光)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신자는 승리합니다. 만군(萬軍)의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는 한 패배는 없습니다. 반드시 그들은 강하신 하나님, 용사이신 하나님 때문에 반드시 이깁니다. 짧은 시간을 놓고 보면 악인(惡人)이 이긴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였을 때 지혜로운 다윗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면밀 주도한 계획 속에 자신의 부하들을 포섭하고 변절된 자들과 함께 뜻밖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재(죄)를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그렇게 비참한 자가 되어 왕궁을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고 왕궁을 차지했을 때 악이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어떤 백성들은 다윗이 도망갈 때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도망을 간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악인을 징벌하고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들을 다시 세우시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잠시 혹시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때는 승리한 악보다는 오히려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선이 위대한 것입니다. 악인들이 잠시 득세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신 위대한 왕이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집을 사모(思慕)하는 자들을 위해서 용사가 되어 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그들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이며 이는 곧 스스로 멸망(滅亡)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무엇이 내 뜻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기의 뜻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위대한 전사로서 반역하는 무리를 진압하고, 이 땅에 평화를 주시는데 하늘에 있는 천사들로 하늘 군대를 삼으시고 땅에 있는 자기의 자녀들로 지상의 군대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신약에 와서도 그대로 연속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용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참여하는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사의 관심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했을 때는 물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승리했을 때도 자기의 힘으로 이긴 것처럼 우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약한 것은 모두 자신 때문에 약하고, 강한 것은 모두 주님 때문에 강한 자가 약하여 졌어도 자신의 낮아짐을 인하여 주님을 자랑할 것이며 또 약한 자가 강하여졌어도 하나님이 강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자랑할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지만 종종 승리의 소식도 전해드려야 되잖아요. ‘오늘 하루, 지난 한 주간 동안, 아니 지난 1년 동안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이렇게, 이렇게 싸워서 승리하고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오니 나에게 이런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패배할 때에는 좀처럼 내가 패배했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 승리했을 때에는 아주 분명하게 ‘아, 내가 이 시험을 이겼구나’라는 의식이 생깁니다. 언제 그러셨습니까? 이러이러한 시련이 있었는데 그게 꼭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아, 내가 이겼구나. 결국은 이 시험을 내가 이겨냈구나. 하나님이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구나. 이제 그 시험은 나에게 더이상 두렵지 않다.’ 마지막 그런 승리의 개가를 부른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신앙의 활기와 원기는 바로 이렇게 비록 작더라도 승리하는 경험 속에서 신앙의 원기는 북돋아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惡)의 반란을 진압할 사령관(司令官)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사령관으로 삼아 이 세상에서 일어난 반란을 완벽하게 진압하고, 토벌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때 그렇게 모질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반기를 들고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려던 반란군들이었습니다. 결국 그 삶을 살았으나 마지막에 추호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복을 한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軍士)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죄(罪)와 마귀(魔鬼)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승리(勝利)를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승리에 참여시킴으로 이기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와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을 보장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살지 않고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한 그는 늘 승리하면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서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둠 주관자들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응원하시되 하늘의 천군 천사들로 우리를 옹위하여 우리를 호위하고 지키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인 형제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이 모든 반란을 토벌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만군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련을 이겼고,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때에도 기쁨의 샘이 솟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악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또 성전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도 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붙듦으로 그분으로 말미임아 자신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승리의 신앙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에워싸고 있는 전원(적)은 어떻습니까? 어떤 대적들이 여러분들을 에워싸고 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줄을 믿고 어디서든지 만군의 여호와를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께 의지하는 자
마지막 두 번째는 주께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하나님 곧 만군(萬軍)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을 누립니다. 이에 대해서 시편 84편 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옮기면 다음과 같은 번역이 됩니다. “....당신 속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의 행복들이여(KNJ私譯)”라고 말입니다.
많은 행복(幸福)
많은 행복 즉, 행복들(ashre)이여 혹은 복됨들이여(blessednesses)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복수의 표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依支)하는 신자들이 누리게 될 행복(幸福)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옥중에서 쓴 이 편지 속에서 그는 가슴 벅찬 감격으로 이미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복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1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령한 복,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인류가 행복(幸福)하게 사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행복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인간이 당신처럼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지음으로 반역을 일으키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크면 클수록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 마음과 정신, 영혼의 방향을 바꾸지 아니하고는 우리를 고치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반역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돌이키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인간들의 반역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펼치시며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이고자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은혜(恩惠)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행복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께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많은 복이 있으니 그 복의 크기와 그리고 그 복의 충만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클수록 불행해지는 것이니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할 때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던 우리의 지난날의 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그 많고 큰 행복 안에서 복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지(依支)하는 자
자, 그러면 이렇게 많은 행복들을 누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의지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행복을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주셔서 충만히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 ‘당신을’ 이라고 번역된 이 구절이 원문에는 ‘당신 속으로’(bak)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복이 있는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존(依存)해야 될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의존의 상태가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냥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 속으로 파고들어 그분과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묘사이겠지만 이것은 결국은 그분과의 사랑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악인(惡人)은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악인은 그 정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육신과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52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재물에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시편에서 의인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만 만약에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의인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악인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곧 의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絶對的)인 의존의 마음(heart) 안에서 결국 그분께 대항하는 모든 욕망과 의지는 사라지고 온전한 영적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 속으로 의지하는 자라고 하는 이 표현은 결국 하나님의 가슴을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의 의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글, 그의 전집 제11권 202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구속의 지혜안에 영광을 받으시는데, 이는 구속 받은 자들이 그분을 절대적으로 총체적으로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J. Edwards, God Glorified in Man's Dependence, p.202.) 라고 말입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들이 하나님을 최고로 어느 한 방면도 안 그런 부분이 없이 총체적으로 의지할 때 그러한 신자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자, ‘보테아흐’(boteah)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성경(聖經)에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외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신앙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을 때 여러분들은 액체의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눈물이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땀이 흐르고, 그리고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며 희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은혜를 받고 시냇물처럼 흐르는 눈물로 기도하고, 마음은 뜨거운 불 앞에 녹아지는 촛농처럼 흘러내릴 때 여러분 그 모든 정동 한가운데 어떤 결심이 있었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의지해야 할 분은 생사 간에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이 정동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어 놓고, 그리고 기도는 언제나 여러분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샘물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원래 ‘의지하다’라는 ‘바타흐’라는 동사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걱정하지 않다. 의심하지 않다’라는 뜻인데 이게 하나님과 관련되어 신자에게 사용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向)하여 사는 그의 삶이 방향이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 모두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사람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많은 지위와 많은 재물과 그리고 명예를 주십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러한 좋은 것들이 주어질 때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 주는 결과입니다.
반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확정되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련이 옵니다. 그리고 사업에 실패와 큰 역경에 처하게 됩니다. 심지어 가지고 있었던 재물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파괴되고 아끼던 사람들이 불행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던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 되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가 하나님을 어떤 경우에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확정되고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재물이 늘어도 명예가 높아져도, 지위가 올라가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뜻밖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고통이 생기면 그는 괴로워하면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 고통이 없을 때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하고, 겸손하지 않던 사람이 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던 사람이 더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의지한다’라는 이 말은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사는 그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의지한다라는 단어가 사사기 18장 10절에서는 평화롭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곳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결코 평화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칩시다. 한순간은 그것 때문에 마음에 갈등이 없고 편안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것들은 변하거나 혹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추가적인 욕망이 생기니 당연히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이런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속으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많은 영적인 행복들을 당신 속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누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상황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생사 간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앙(信仰)의 유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依支)함으로써 평화(平和)를 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쾌락과 기쁨이라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마음이 불안으로 요동치고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사물과 인간을 하나님의 질서대로 조율해 놓음으로써 모든 인간과 만물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꾸어 여러분에게 맞출 수 없으니 여러분들이 바뀌어 하나님에게 맞춰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마음을 모두 맡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상황은 끊임없이 물결치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맡겨두어서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는 것이니 변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이 어려운 시련의 때에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한없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