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 선교대회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 배에서(요7:37-38) 2006. 6. 25 G.P선교대회개회예배 1
2. 사망은 우리 안에, 생명은 너희 안에(고후4:11-12) 2006.6.26 G.P선교대회개회 저녁설교 11
3. 이름 없는 섬김 (눅7:37-39) 2006.6.26 G.P선교대회개회 새벽설교 25
4. 목숨을 버리는 목양(요10:10-11) 2006.6.26 G.P선교대회개회 오전설교 36
5. 불변하는 선교의 정신(행20:19) 2006.6.27 G.P선교대회개회 새벽설교 48
1. 그 배에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오늘 사회자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 마지막 날에 많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들이 간과하기 쉬운 선교의 원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많이 애쓰지만 항상 선교의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선교에 있어서 많은 열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는 그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열매가 없으면 그 이야기도 별로 그렇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세도 올바르고 열매도 많이 맺혀져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 선교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짧은 시간이지만 선교의 원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선교의 원리
1) 목마른 자를 찾는 것
목마른 자를 찾는 것이 선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이 초청은 새로운 초청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번 선지자들을 통해서 반복하시는 초정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애써서 복음을 전해도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선교의 성공은 예수님께서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지만 그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서 반감이 생긴 사람들과 감화를 받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이것은 사람들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든지 목마른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절실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목마르게 필요로 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 선교사님들은 현장에 계시니까 아마 그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반드시 소수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목마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목마름이 어떻게 해결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부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작년에 6개국, 9개 팀, 약 180명 정도가 나가서 해외 outreach를 했고 국내에서는 약 550명의 지체들이 나가서 국내 outreach를 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젊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많은 농촌 지역에 가서 우리들이 봉사를 하면서 일주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간증들이 각 팀마다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팀이 복음을 전하러 갔더니 할머니가 마당을 쓸다가 빗자루를 집어 던지면서 ‘재수 없는 예수쟁이들 꺼지라구. 여기 왜 와 가지고 떠드느냐구’ 이렇게 몇 번을 했지만 사람들이 사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말을 붙이고 뜸도 뜨고 안마도 해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엇인데 여기에 와서 이야기를 하냐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어요.”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펑펑 울면서 손을 붙들고 “왜 그 좋은 하나님을 이제야 와서 나에게 가르쳐 주는 거야. 진작 가르쳐주지.” 이렇게 이 세상에는 목마른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 눈빛들을 올해도 잊을 수 없어서 우리들이 또 다시 떠납니다. 이런 일들은 해외에서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곳에 있을 때에는 흘릴 수 없었던 눈물들을 그 지체들과 함께 흘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온 세상에 흩어져서 이 복음을 전하고 목마른 자를 찾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너희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초청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는 제자들을 그 목마른 사람들이 있는 천하 만민에게로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으나 우리들은 “목마른 자들이 있는 그곳으로 우리를 보내소서”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많이 애쓰고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가서 목마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선교적인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 예수로 이미 배부르지만 예수의 목마른 사람들의 이 목마름을 내가 대신 느끼는 것, 그 목마름 때문에 예수를 전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정신이고 원리입니다.
가끔 저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기적입니다.” “왜 그럽니까?” “설교를 이번 주에도 105분이나 하셨는데 요즘 그렇게 설교를 해서 붙어나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목사님들이 설교를 길게 하면 담임목사들이 야단을 친다고 합니다. 교인 다 쫓아내려고 결심을 했냐구? 하면서 야단을 친다고 합니다. 전 그때마다 항상 이야기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전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기력이 남아 있는 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난 한 번도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설교 한 적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도 관심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지. 안 듣는 사람들은 30분이 아니라 5분을 해도 깁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계속 격려를 받으면서 더 많이 원하는구나.” 그러면서 설교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마른 사람들을 찾는 원리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니까 모든 사람이 만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설교 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만약에 그런 설교가 있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목마른 사람들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평생 동안 불교 믿던 사람이 처음으로 손들고 이끌려서 교회 나와서 주님 영접하고 등록카드 쓰고 교재 사가면서 ‘나 예수 믿을 테니까 나 좀 잘 도와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생전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도 그렇게 오래 계속 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데 무엇 때문에 듣지도 않는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비유를 맞추면서 설교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신앙 사람을 더 잘 합니다. 원래 예배가 긴 줄 알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대 환영입니다.
선교의 원리는 목마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기도하고 사랑해 주어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목매이지 말고 더 넓혀서 목마른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들이 목마른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느 선교사가 중국에 갔더니 밤 11시에 모이는데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는데 부탁이 있다고 하면서 말씀이 그리워서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니 길게만 해주면 합격이라고 해서 6시간 20분을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내 기록이 5시간 30분 밖에 안 되는데 이 사람이 깼습니다. 목마르니까 간절히 원합니다.
목마른 자를 찾는 것이 선교의 원리입니다.
2) 예수를 가르치는 것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마름은 돈으로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재미있게 데리고 놀면서 인간적으로 친근해지고 어느 정도는 채워질지 모르지만 영혼에 있는 진정한 목마름은 예수 자신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면서 복을 가르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이 세상적인 축복과 번영을 가르치고 그것을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인간에게는 모두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각각 주셨습니다. 이것들이 가득 찼을 때에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환희에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충만하게 넘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미친 듯이 쾌락을 향해 줄달음치고 병적일 정도로 인간이 향락에 빠지고 물질의 부에 대해서 병적으로 탐닉하는 이 미친 세상의 궁극적인 원인은 가슴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아니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 함께 사랑하는 것,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 교육받지 못한 자를 교육시키는 것, 모두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한 준비여야 합니다. 그것은 그 목마른 자들을 모두 데리고 영생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 샘이신 그 분에게 직접 다가가서 그분을 마시고 그분으로 자신이 충만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선교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생명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교사님들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아무리 서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선교하기 위해서 간접 선교의 방식으로 많이 애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곳에서는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강력한 부흥,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사람들의 심령을 깨뜨리고 복음의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이 터져서 그들이 모두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게 될 때에 그들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복음의 맛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의 선교 역사가 바로 이렇게 이런 것들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피비린내 나는 핍박 속에서 일사각오의 정신, 죽으면 다시 산다는 일사 즉 재생의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1907년 평양 대부흥 그 이후로 이어지는 강력한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고 자기가 본질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강에서 그 영생물이신 예수를 벌컥벌컥 마신 사람, 복음 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진정한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만이 그 복음에 사로잡혀서 그 모든 것 위에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였고 그 사람들의 심령이 터져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시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생명물이신 예수, 그분께로 목마른 영혼들을 데려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선교의 정신입니다.
3) 생수의 강이 그에게서 흘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그 사람은 목마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이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자신 안에 있었더라면 그 사람은 목마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짝 마른 강바닥처럼 물기 하나도 없는 완전한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고 살 수가 없어서 목마른 자를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생명물이신 예수 자신을 주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배에 생수의 강이 가득 고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의문을 갖습니다. 생명물은 오직 예수이신데 어떻게 사람의 배속에 또 다시 생명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그게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입니다. 그 생명물이 그 사람 안에 가득하게 되어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이번에는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원리입니다.
이 선교의 원리는 선교사 자신을 터뜨리는 원리입니다. 그 곳에서 선교사 자신의 배가 터트려져서 그 배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도 똑같습니다.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를 너무 강조하지 마세요. 영혼을 다루는 원리는 너무나 유사합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원리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 배에서 탁 하고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목회하는 것입니다.
목양이 무엇이냐고 선교사들이 많이 묻고 3번 째 선교대회의 주제로 택했는데 그 목양의 원리는 자기 안에 예수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생수가 터져 나와서 수많은 영혼들이 거기에 와서 그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 물은 목회자 자신의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목회자를 통해서 터쳐 주신 당신 자신의 물입니다. 그 물을 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물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을 합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겹고 괴로워서 찾아옵니다. 아무리 머리를 들이대며 선교사의 배를 뒤져도 물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잠시는 머물러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갈급함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은 다시 유리하는 사람이 되고, 급기야는 그런 갈급함 조차도 잠시 있다가는 나중에는 갈급함 조차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떠나는 겁니다. 물이 넘쳐흘러야 합니다. 물이 점점 더, 점점 더, 점점 더, 계속 넘쳐흘러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 물을 마시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선교사를 존경하게 되고, 목회자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왜? 그 생명물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 피할 때 예수 밖에 없으니 홀로 있게 마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생명물은 예수니 마실 허락 하시고 강물처럼 내 마음에 흘러나게 하소서♬
다른 것 가지고 안 됩니다. 영혼들은 예수에 목마릅니다.
선교사님이 해 준 이야기인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티벳에 가면 라마 불교승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가 고행을 하며 순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걸어가다가 엎드려 절하고 걸어가다가는 엎드려 절하는 것이 우리로 말하면 삼보 일배를 하는 것인가 봐요. 오래 가는 사람은 2년씩 하고 짧게 가는 사람들은 6개월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선교 여행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같이 이야기 하자고 하니까 갈 길이 바쁘고 절하면서 가야 하니까 자꾸 말 시키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몇 번을 이야기 하다가 왜 그렇게 절을 하면서 무릎이 까지도록 그러면서 어디로 가는 거냐고 하니 어디어디로 간다고 하는데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선교 나간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찬찬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거기서 회심을 하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 그것으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기만 하면 목회가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난 목회를 하면서 피곤이 풀릴 때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휴가를 가도 피곤이 안 풀립니다. 너무 피곤하여 며칠을 쉬면 더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픕니다. 쉼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쉼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안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정한 안식은 없습니다.
리챠드 벡스터 목사님은 “이 땅에서는 성도의 안식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만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도 위로를 받을 때는 딱 한 경우입니다.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때입니다. 교인들이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설교를 열심히 했는데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목회의 힘이 안 납니다.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 동안 시무룩해서 사는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리는 것 보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이 회심 했다더라, 누군가는 복사기 고치러 왔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펑펑 울고 신자가 되었다더라, 누군가는 말씀을 열심히 전했더니 어른들은 회개 하지 않고 말똥말똥한데 초등학교 4학년이 어른 예배에 몰래 들어왔다가 은혜를 받고 변화 되었다더라 등등의 이야기들, 말씀을 듣고 나서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못 되게 굴었는데 회개하고 효부가 되기로 결심 했다더라, 부부가 이혼하려고 작심을 했는데 설교를 듣고 다시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용서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힘이 솟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배에서 예수의 물이 넘쳐나는 목회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방황하다가 내 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펑펑 울고 회심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어요? 선교지에서 그런 일이 늘 일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수많은 선교사들이 거쳐 갔지만 결코 거듭나지 않고 완악한 원주민이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그를 어루만지면서 기도해줄 때 펑펑 울고 변화가 되어 회심하고 예수님만 따르는 충성스런 일군이 되었다,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아마 안식년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안 갈지 모릅니다. 그 재미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그 기쁨과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하시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르는 또 다른 양식이 내게는 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목회가 잘 되고 선교가 잘 되니까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 아니에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자신의 배에서 예수의 생수 강이 넘쳐나는 그런 식의 선교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 현장에 가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선교사와 가까이 있는 영혼들이 곤고할 이유가 없고, 목마른 모든 사람들은 다 해갈함을 얻어서 본국에서도 수많은 영혼들이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강은 그 사람 자신을 죽이고 솟아나는 생수의 강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한 선교사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강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수많은 영혼들의 갈증,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사역을 한다는 사람은 날마다 죽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이 생수의 강을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사역에 있어서 이 성령이 빠진 사역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이 성령의 강력한 사역, 성령의 강력한 생수의 강이 선교하는 우리 마음속에서, 배속에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배라고 하는 것이 이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이 창자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심장입니다. 이 영혼이 있는 좌소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난다고 하는 것은 생수가 솟아나게 하는 성령이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그 사람 자신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어 성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살이 빠져도 중요한 부위는 안 빠지고 살이 그곳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먹는 것, 잠자는 것, 운동, 화장품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적용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배에서 끊임없이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 같은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교훈하고 그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일 때 넘치는 이 성령의 생명력으로 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부패한 본성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날 수 없습니다.
패배할 사람들은 항상 환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자신이 낙담 속에서 패배의식 속에서 일평생을 삽니다. 그러나 승리 할 사람의 마음에서는 항상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목회하고 선교할 때 가장 중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인격, 이런 나부랭이 가지고 우리들이 영혼들을 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옹달샘처럼 푹 파여진 사람이고 우리의 배 안에 예수의 생명이 가득 고이고 더 가득 고이고 더 가득 고여서 철철 넘쳐나게 될 때 그 배에서 그 예수의 생명으로 목회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의 배에서 이렇게 넘쳐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을 죽어라고 마음속에서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명을 다 바치는 헌신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깨뜨리고자 하는 철저한 헌신이 없고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자 하는 철저한 자기 복종이 없고 자기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럽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야박할 정도로 인색한 이런 식의 삶의 가치와 태도를 견지해서는 결코 그 사람 안의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그곳에 생수의 강이 넘칠 리가 없습니다. 넘치는 성령의 생명력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고매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매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패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서 승리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과 신자의 순종 안에서 성령과 은혜의 말씀으로 이 모든 자기를 이기며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리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배에서 넘쳐나는 생명의 물, 그것을 먹으면서 수많은 사람, 어떤 때는 이 배에서 너무 많은 물이 흘러 넘쳐서 누가 먹고 마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배에서 넘쳐난 그 물이 넘치고, 넘치고, 넘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먹으면서 예수의 생명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가장 먼저 선교되고 그 선교사의 선교됨이 또 다른 선교됨을 낳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해서 낳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고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썩으니까 밀눈이 나와서 활짝 꽃피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 안입니다. 선교의 원리는 자기 죽음의 원리입니다.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은 선교사, 그 배속에서 생명의 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그 물을 먹고 배부른 것입니다. 목회하고 선교하는 우리는 따라서 우리가 고갈된 사람이 되면 우리의 사역도 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생명의 넘쳐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것보다 더 고귀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메마른 세상에 우리의 배를 터뜨리고 수많은 생수의 물이 흘러서 아직까지 흘러 들어가지 않은 모든 지역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그 물을 먹은 우리의 제자들이 또 다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서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곳에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우리들이 그 영혼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그 배가 터져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쏟아 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내게 가장 중요합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소서.
그래서 예수의 강물이 되게 하소서.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마시우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원리입니다.
2. 사망은 우리 안에, 생명은 너희 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1-12)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쓸 때 고린도교회가 사도가 쓴 첫 번째 편지에서 책망을 많이 받고 회개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이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4장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가르침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변화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똑바로 이것을 전해야겠다는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4장 앞부분을 보면 우리가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처하며 혼잡함으로 하지 아니하고 순전하게 복음을 전하고 올바르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정말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사역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렇게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두 그 복음을 듣는 것은 아닌데 복음을 듣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피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들어있는 단락의 안에서 자신들을 우리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바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인데 그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길이 되는 지를 오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위대한 본문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설교한다는 것 자체가 본문에 중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늘 하는 소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지만 모든 성경구절이 담고 있는 계시의 깊이가 한결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본문이 짧은데 심오한 깊이의 계시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본문이 길어도 계시의 깊이가 옅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10-12절은 심오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보면 상세하게 이 문제를 풀지 못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중요한 교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관한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대한 교리입니다. 난 이것이 선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선교란 무엇이냐? 선교의 길이란 무엇이냐? 목회의 길이든, 선교의 길이든 그 복음을 전하는 이 선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원리는 오늘 우리가 낮에 들었던 설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결국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선교의 원리로 똑같은 원리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선교의 원리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 길입니다.
많은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답답하게도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그런 고통스런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선교사는 예수 죽음을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다고 되어있는데 희랍어 본문에는 예수 죽음을 짊어진다고 나옵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다고 하면 예수님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는 것이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 죽음,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죽으시는 그 죽음을 우리가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음은 예수의 죽음인데 짊어지는 것은 사실은 내 몸에 그것을 짊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에 있어서 자기 죽음, 자기 깨어짐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본 받는다’는 말이 수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라는 희랍어인데 틀 속에다가 넣고 찍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동일하게 찍어내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을 본받든지 그리스도를 본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 사역에 들어서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사역의 크기를 가지고 재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사역을 했고 이것은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재는 것입니다. 몇 나라에서 섬겼고 이것은 양을 가지고 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것도 크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고 몇 개의 교회를 세웠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의 성공을 개량화 하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축복 속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수량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눈에 띄는 괄목할 만한 업적들을 남겨놓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좀 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 있는 성취의 많은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오히려 올바르게 하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예가 드물기는 하지만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하나는 그 사람이 일구어 놓은 업적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반드시 확인해야 될 것이 있는데 사역을 모두 끝내고 난 다음에 그 선교사의 영혼과 인격의 상태가 정말 그 사역이 성공한 것 같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름져진 상태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역의 많은 복들이 하나님으로 온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사역을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은 사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많아서 열매를 많이 거두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똑같이 부름을 받아서 선교사로서 10년, 20년 사역을 하고 혹은 30년 사역을 하고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어떤 선교사의 인격은 고매하고 사역이 끝났는데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뜨거워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 시작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과 소명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물러날 때 쯤 되어서는 영혼이 재고품처럼 방치된 채 곤고하기 짝이 없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매우 빈궁하고 고통 받는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차이는 무엇이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오늘 답을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교사 모임을 갔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모여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개인적인 석상에서 자신들의 영적인 침체와 곤고함을 하소연 하면서 이것이 바로 선교활동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답답한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우리가 질그릇과 같아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고 너무나 괴로운데 오히려 예수의 생명은 우리 몸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 원리가 바로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빚어 나가시는 그 성화의 작용에 있어서 우리를 그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감에 있어서 하나님이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이야기와 밀접하게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지만 고난 자체에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작용과 힘이 없습니다. 고난을 많이 당하는 선교사가 마음에 울분과 분노로 가득 차고 원망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 것,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는 우리를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화시키고 거룩한 인격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정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난 그 자체는 객관적인 것인데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신앙에 의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도 하고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성격 파탄인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많이 만납니다. 고난을 만나서 수없이 시달립니다. 그 고난은 다양하게 올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통해서도 올 수 있고 간증한 필리핀 선교사님의 말처럼 자신의 건강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교인들과의 갈등, 박해를 받는 것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자신은 선교지에서 고생을 해도 소명이라고 하지만 아이들까지 소명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점점 선교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서 빗나가는 것을 보는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도 우리를 충분히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돈 없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사실 가난하고 배고파서 이 길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적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평판이 떨어지고 사람들로부터 악의적인 모함에 직면하게 되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고통이 생겨나게 될 때 소명이고 뭐고 다 접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듭니다. 그것이 솔직한 심경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하는 사람 가운데 한번쯤은 접어볼까? 최소한 그게 아니면 이 사역지 아니면 내가 사역할 때가 없을까? 한번 옮겨볼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뛰어나게 성인과 같이 사역을 한 사람이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최근에도 50대 중반에 들어가는 동료목회자를 만났는데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온지 15년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너무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젊은 아내와 같습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자신이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섰을 때 깊이 가슴에 품었던 하나님을 향한 선한 소원들을 구현할 수 없다라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리 좋은 밥 먹여주고 사례금 많이 주고 좋은 사택 주어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 원하지 않습니다.
누가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그래서 목회란 무엇이냐? 그럴 때 아침에 제가 목회란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목회자는 누구냐라고 말하면 난 매일 밤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편지를 쓰는 사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깊이 고통스럽습니다.
언젠가 어느 목회자를 만났는데 나를 너무 부러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도 짜증이 나서 “내가 뭐가 부럽냐?” 고 했더니 “너무 부럽다.”고 합니다. “너도 목회를 하는데 뭐가 부럽냐?”고 했더니 자기는 목회를 하는 게 아니라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을 가지고 교인들과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은 본질적인 일에 전념하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놀고 있네. 그런 게 어디 있냐?” “뭐가 그렇게 부럽냐?” “부럽지요, 책도 쓰시지요. 독자도 많지요. 교인들도 모이지요. 장로님들 목사님 보필해주지요. 본질적인 것에 몰두하지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당신이 내 자리에 있으면 일주일 만에 사표 낼 걸.”
열린교회 13년 목회를 하면서 오늘 저녁에 눈을 감고 내일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을 때가 여러 날 있었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힘든 일이 많은데 참아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편안히 살게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왜?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온전하게 만드시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 온전한 사역자들이 너무 소수이니까 그래도 당신 손에 들어와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눈에 당신의 사랑 앞에서 깨뜨려질 수 있는 사람, 사람이 보기에는 아직까지도 형편없고 더러워 보여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에 깨뜨려지지 않는 잘난 사람보다는 당신의 깨뜨려지는 못난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가 너무 행복하다고 하는데 난 그런 선배들 앞에 가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습니다. 하나도 좋지 않습니다.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 왜 기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고통입니다. 남에게는 어떤지 난 아직 모르겠지만 내 신앙으로는 목회는 아직까지는 당하기를 원하지 않은 가슴앓이고 설교는 영원히 이국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내가 위로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안일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시면 우리가 선교사가 되었건 목회자가 되었건 상관없이 세상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다.
어떤 식으로 당하게 하시냐면 괴로움을 겪게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인해서 혹독하게 괴로움을 겪습니다.
저는 인간이 태어나서 당할 수 있는 연단은 거의 다 겪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신학교 다닐 때는 몇 번을 우리집 사람에게도 이야기 안 했지만 영양실조에 걸려서 공부를 하다가 핑 돌아서 문을 붙들고 주저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에 일년에 한번씩 밥 사주러 갑니다. 금년에는 총신에 가서 하얀 앞치마까지 두르고 열심히 돼지고기를 퍼 주었습니다. 뒤에서 너무 많이 퍼 준다고 구박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런데 왜 그러나? 그러는데 사실 저는 한이 맺혔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교인을 보면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것에서 해방이 되고 나니까 그것과는 상관없는 또 다른 연단이 치열하게 시작이 됩니다. 난 그래서 앞날에 대해서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기대는 없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또 다음, 또 다음,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나를 밖에서 보기에는 평안하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삶 같아도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고난이 올 때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길은 원래 그렇게 상처받고 찔리고 할큄을 당하고 멸시로 짓밟히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교사님들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그렇게 괴로울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원래 우리 사역자의 길이 그래요. 선교지에서 사람들이 물고 뜯으려고 할 때 그래서 많이 핍박을 당하고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배신을 당해서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동료들이 나를 배반하고 내가 외롭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쓸만한 나무를 조각하는 사람이 다듬지, 썩은 나무 다듬는 것 보았습니까? 그냥 불 속에 던져 버리고 말지. 밖에 내던지고 말지. 다듬지 않아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여러분들을 연단하시는 겁니다.
깊은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은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깎으셔도 우리는 싫어요. 고난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남이 당하는 고난은 아름답지만 자기가 당하면 견디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은 영혼에 깊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정말로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 제가 오늘 저녁에 눈을 감는데 눈을 떴을 땐 빛이 있는 하늘나라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깊이 영혼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졸렬한 목회자는 고난을 당할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사람 원망하고, 교인들이 자기를 깎아 내릴 때 죽일 놈의 자식들하고 욕을 하고 이빨을 갈기 시작합니다. 그것과 함께 영혼은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때 주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이 길을 가셨나? 일생동안을 당신 자신은 이 세상에 불쌍한 영혼들,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 인간들을 사랑하신 것 이외에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너무 사랑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영혼들을 사랑하신 것 밖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일평생을 인간들에게 씹히면서 사셨습니다. 당신이 위해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시고 먹였던 주린 자들에게 핍박을 받으시고 병 고쳐준 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일생을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갔습니다. 그 주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제공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그들, 그 환경 내게 있는 모든 상황은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왜 내가 이 일을 당하고 이 고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앓이를 해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선교지에서 생명을 다 바친 목회지에서 양떼들에게 이렇게 미움을 당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고난을 당할 때 절대로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까 제가 아픈 소리 할까요?
선교사님들 마음속에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섭섭한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섭섭한 것이 없어야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자기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당하게 될 때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겁니다. 주님이 이러한 고난을 당하셨는데, 주님으로 하여금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고난을 당하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당한 그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예수 죽음의 기운이 내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은 곧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 스며들어서 죄를 지으려는 욕망, 하나님을 거스려 살려는 욕망,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욕망, 이것들을 우리 안에서 죽이기 시작하고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우리 안에서 서서히 죽여 갈 때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오늘 나의 심령 안에서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깊이 자기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가 깊이 죽게 될 때, 그 전까지는 억울해서, 분해서, 사람들에게 섭섭해서 울었는데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내 안에 있는 그릇된 부패한 나의 자아가 예수 죽음의 기운에 삼킨바 되어 그 속에서 육체의 힘을 잃어버리고 부패한 죄의 힘을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갈 때 내가 깊이 통곡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에 대해서 설교 하면 남의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고난에 대해서 설교 하면 설교도 듣기 전에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 고난의 불길을 통과하고 자기가 부숴 진 사람, 어떤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설교 할 때는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고 마음 안에서 반감이 생기는데 어떤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설교 하면 깊이 마음이 무너지고 흐느끼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기 시작합니다. 설교가 무엇입니까? 설교는 자신의 배가 터져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설교입니다. 배가 터질 때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창자가 너덜하게 뜯어지고 거기에서 맑은 생수가 쏟아져 나올 때 생수로 고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그 생수가 쏟아져 나기 위해서 창자가 너덜하게 터져 버린 죽음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항상 그런 behind story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옵니다. 거기서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의 비밀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설교할 때 그것은 진실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지 않고 설교할 때에는 지식이 훌륭하면 논리적으로 설교할 수 있지만 자기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교와 목회의 길은 그것이 아닙니다. follow me! 나를 따르라! 내가 걸어가는 길을 따르라.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고 하였습니다. 내가 간 길로 걸어 오너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열린교회를 13년 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130년 쯤 목회한 것 같습니다.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비밀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강대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깨뜨려져서 내가 나를 너무 싫어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나를 좋아하십니다. 그 아픔 속에서 교인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설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앞날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평생을 내가 가 보지 않은 진리의 세계를 누비고 교인들이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은혜의 비밀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설교자로서의 소박한 꿈이 아니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야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끊임없는 자기 복종의 길, 자기 죽음의 길, 이기심과 자아의 창자가 터지고 그 안에서 더러운 오물들이 쏟아지고 생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물이 솟아나는 것,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수많은 성도들에게는 생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자에게는 죽음의 길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삶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 고난을 많이 당해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누군가 비교하면서 나는 더 많이 십자가를 지는데 더 고생을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주님 한 분 앞에서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 계속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을 때 못 박히는 방식이 그런 방식으로 못 박힌 것입니다.
목회가 잘 되는 비결, 선교가 잘 되는 비결, 오직 하나입니다. 매일 통곡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저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내 안에 있는 많은 불결, 더러운 것, 위선, 거짓, 자기가 깨뜨려진 채 바쳐지지 않는 허위의 삶,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선교지에 매일 엎드려서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강대에서 흘린 눈물이 선교지 속으로 스며듭니다. 주님이 심어 놓은 곡식들은 그 눈물을 먹고 자라고 가라지는 그 눈물 때문에 제거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한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 장렬하게 죽는 그 순교를 꿈꾸지 말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런 고백으로 모든 우리의 고통을 예수의 죽음에 대입시켜서 그 고난이 무엇을 통해 왔던지 간에 나를 성숙시키고 예수 닮게 하는 도구가 되도록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깊이 스며들어서 거기에서 엎드려지는 겁니다.
둘째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겁니다.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 하느니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이 애잔해지잖아요?
나는 노회에 가면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목사 안수식입니다. 사람들이 그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결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지 꽃다발을 손에손에 들고 하얀 봉투까지 들고 나타나서 선물 보따리 들고 와서 손을 흔들고....
우리 개신교는 왜 그렇게 경박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안수 받을 때 일입니다. 안수위원이 죽 서서 안수하는데 그 중에 어느 연세 드신 목사님이 울라고 등을 때리면서 말을 합니다.
이 길이 어떤 길입니까?
예수님도 눈물로 걸어가신 길입니다.
마지막 십자가 지는 길에서는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길 아닙니까?
그러니 이 길을 걸어갈 때 고단하고 슬프고 멸시받고 고난에 넘치고 괴로움과 시련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외롭고 혼자 있는 것 같은 것도 너무 당연하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걸어가신 길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주님이 그렇게 가신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잘 죽는 사역자에게 돌봄을 받는 양떼들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길을 하나님께서 아무나 부르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불러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기 전에 물어보신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렇게 다가오는 이 깊은 고난과 끊임없는 도전, 견디기 힘든 고통, 핍박과 박해, 외로움과 결핍, 고난과 정신적인 고통, 견디기 힘든 시련의 아픔들 이런 것들은 인간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슬픔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 변전하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 속에서 전능하신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이 없으면 극복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만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걸어갈 때 우리들 양떼들 안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테니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진실한 사람 가운데 고난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생명을 주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안락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설교자가 있습니까?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모본이 무엇인지를 온 삶으로 보여주는 목회자가 시련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말입니다.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수많은 사역의 성공과 번영을 주셔도 그들은 죽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자신들의 진정한 소망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생명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역자들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역의 최대의 고민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영혼들은 살고 내가 못 박혀 죽어야만 생명의 풍성한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본성은 죽기 싫어합니다.
하다못해 지렁이 한 마리도 죽이려고 밟아 보세요.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부쩍 벌레 한 마리도 죽이기가 싫어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정말 죽이기가 싫어요. 생명이란 것 자체가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입니다. 우리의 옛 본성도 부패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 죽음의 기운이 파고 들어올 때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깊은 고통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죽음의 기운에 삼킨바 되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들으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요한복음 3장 16절 때문에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정하게 해석을 안 해 주었더니 모든 인간들이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는 금시발복을 한 것처럼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그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더랍니다. 너무 괴로워서 목 놓아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 장로님 좀 바꿔주십시오. 나이 드신 장로님이 이 교회를 자기처럼 생각하면서 젊은 목회자이 나를 저렇게 괴롭히는데 하나님 저 사람 좀 바꿔주십시오.’ 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얘야, 그 사람은 나도 못 바꿨다 네가 바꿔라 그것이 빠르겠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얼마나 그 말이 가슴에 파고 들어오는 이야기입니까?
선교와 목회는 잔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잘 빚어낸 설교와 떡이라면 그렇게 잘 빚어낸 하얀 떡을 성도들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피에 튀겨 달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갑니까? 네가 산 것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에 대해서 당신이 죽고 사는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훌륭한 선교는 많이 영혼들을 살리는 선교인데 영혼들을 살리는 그 일은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다고만 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도 해야겠지만 동시에 선교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 한번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기도하지요?
언제쯤 우리가 가슴을 깊이 두드리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이고 나도 어찌 할 수 없는 무거운 변화되지 않은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나도 괴로워서 내 자신을 미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면서 기도하는 경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선교지의 옹달샘입니다.
거기에 선교사가 있으면 그 배의 창자가 다 터져서 그 자기 안에 있는 더러운 욕망과 오물들이 예수의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모두 삼켜져 빠져 나오고 그리고 거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을 때에는 교만해질 수 있지만 내가 아는 목회지를 들여다보면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밖에 못 삽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절대로 이 영혼들이 강퍅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똑똑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사망은 자기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 하느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수천 명을 목회하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죄 많은 세상에서 그만큼도 고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목회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너부터 먼저 선교를 당해봐라’ 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깊이 공감했습니다. 선교 당한다는 의미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깃발을 꺾는 항복이 없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깊이 꺾여 집니다.
성도들은 다 압니다. 물로 개중에는 아주 강퍅한 사람들이 있어서 주님의 마음으로 설교를 해도 비웃고 안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혼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로 교만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혼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놀랍게 압니다.
저 외침이 배에서 창자를 가르고 쏟아져 나오는 외침인지 머릿속에서 잔머리를 굴려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말인지 모두 압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선교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그 고생이 내년에는 없을까요?
살아있는 날 동안 언젠들 그 고생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토마스 아켐피스처럼 까치발을 뜬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난이 내년에도 있을 것이고 살아있는 동안 늘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모른 체 금년이 지나고 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문제는 고난의 크기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소화하는 것, 그래서 그 고난을 선물로 알고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는 것, 그 고난 때문에 죽을 수 없는 내가 죽고, 못 박히지 못하고 펄펄 살았던 내가 못 박히는 것, 그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우리의 배를 터트리고 거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것이 선교요, 목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지 않아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불결한 사람이 되겠죠? 맨 처음 선교에 길에 들어설 때에는 청순한 마음으로 소명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우리는 더러운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의 보시기에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선교지의 양떼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겠죠? 그러나 우리가 죽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물론 많은 고통이 따르고 인간적인 대접을 기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처럼 묵묵히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외로울 때도 입술을 깨물고 이 외로운 길에서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날 사랑하시는 주님도 가셨으니까 나도 감사하므로 이 길을 갑니다. 사도들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인해 기뻐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갑니다. 어려운 일이 있고 배고플 때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고단한 이 몸을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주님의 손을 어린아이처럼 꼭 붙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를 버리고 우리의 우리를 멸시해도 주님만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분의 손을 꼭 붙들고, 그분을 유일한 위로를 삼으며 우리의 남은 날들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죽으면 예수의 죽음을 많이 짊어지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진실해 질까요? 포악하던 우리의 성품이 죽어서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 온화한 사람이 되겠죠? 마음 깊이 있던 패역한 정욕들이 죽게 되겠죠? 시시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되겠죠?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죽어도 그 대신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들이 삽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을 우리들이 봅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알처럼 서서히 썩어져서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기억 속에 완전히 잊혀져서 사라지고 예수만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맨 처음 ‘날 보내소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고 고백했던 것이 이런 삶을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생각이 납니까?
여러분들에게는 첫 고백이 있어서 선교지로 갔고 전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가는 겁니다.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잠간이면 지나갑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날마다 못 박히고 날마다 나는 죽고 영혼들은 살아나게 하는 예수의 노예가 되었다면 주님을 다시 뵈올 그날에 얼마나 사랑을 받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충성스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선교 사역, 자기 깨어짐이 없는 목회 사역은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회가 없이 짐승의 목을 꺾는 것과 꼭 같은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13년의 목회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목회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세상적인 성공을 가슴에 품지 않고 세상의 부와 명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주님이 사실 수 있을까?
오늘 아침도 새벽에 눈을 떠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몸이 주님이 거하시기에 즐겁지 않은 성전이라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내 몸은 주님의 성전인데 이 성전이 주님이 거하기에 편하지 않으시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삶으로는 하나님을 학대하는 것이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좋은 것, 모든 영혼의 생명, 완악한 영혼들의 가슴을 찌르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의 전달, 이 모든 것들은 선교사, 목회자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전에 자기를 죽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나의 참된 위로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요, 나의 영광이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주님을 꼭 붙들고 평생 동행해야 합니다.
3. 이름 없는 섬김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7:37-39)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를 간밤에도 지켜주시고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우리를 주님 앞에 모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도 말씀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본문 배경
주님을 섬기는 어떤 여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셨을까?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이런 식사의 자리에 초청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을까? 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문으로 남습니다.
병행기사라고도 생각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병행기사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라고 했으니까 아마 이 두기사가 병행기사라면 틀림없이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는데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므로 예수님을 초청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마 예수님의 치유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식사 자리에 한 여자가 향유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섬기게 되는데 이 여자가 성경에서 거듭해서 죄인이라고 기록이 됩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한 평범한 의미의 죄인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죄인이라고 반복되는 표현이 그 당시 여자로서 죄인으로 지목되었던 창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 식사하시는 그 자리에 나와서 주님을 섬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2. 이 여자의 섬김
이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우선 이 여자의 섬김의 특징을 더 많이 말할 수도 있지만 특징적으로 본다면 4가지 정도의 특징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째는 말없는 섬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여자의 행동에 대한 묘사만 나오지 이 여자의 대사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섬겼지만 단 한마디도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의 예수를 향한 섬김은 무언의 섬김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잘 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고 흩어졌던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도 해 주고 분열하기 직전의 공동체를 다시 한 마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말에 있습니다. 말을 잘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결국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도 말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섬기고 특별히 복음 사역을 위해서 헌신할 때 우리가 말을 잘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고, 시의 적절한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서로 사랑으로 맺어주는 일들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 여자의 섬김이 빛날 수 있는 것은 말이 없었기 때문에 빛났습니다. 말이 없기 때문에 섬김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섬김의 수단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섬기는 과정에서 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하는 그런 종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사역을 하다보면 정말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인격이 있어서 많이 섬기지만 일체 말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을 시키면 일을 조금 하기는 하는데 일이 끝난 다음에 많은 말을 만들어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지도자를 돕는 평신도 일군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에게는 더 많이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도자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큰일을 해나갈 때 마음이 군자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는 곤경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곤경을 통해서 사람들을 세우지만 그러나 소인배 같은 지도자는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을 사분오열 마음을 찢어지게 만듭니다. 이 모든 일들이 대부분 말을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유능하게 섬기기는 하는데 마음에 울분이 가득한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마음속에 억제되지 않은 수많은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분노와 미움과 외로움에서 오는 고통, 이런 언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이 안에 많은 말이 있게 되면 그 말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지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결국은 말이 많은 섬김이 되는데 이렇게 섬기다보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동료들이 모아지고 일군들이 규합되고 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세워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섬기면서 많은 상처들을 주고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섬김은 말이 없는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바로 그런 종류의 섬김이었습니다. 당신이 지실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은 말이 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말씀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그런 섬김이었습니다.
섬기면서 보면 결국은 섬기다가 고난을 많이 당하고 섬기면서 어려움을 많이 당하다 보면 결국은 우리 안에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할 말이 별로 없고 기도를 안 하면 그렇게 소비되지 않은 수많은 언어들이 사람을 향하여 화살이 되어 날라 갑니다. 그러면 집니다.
누구든지 고난을 많이 당하면 가슴 속에 수많은 언어가 생겨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고통을 당하면 수많은 언어들이 생겨납니다. 그 언어가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보면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 사람들은 식사하실 때 긴 소파 같은 곳에 비스듬히 누워 했습니다. 그 발 뒤로 다가와서 예수 그리스도 발 곁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눈물의 의미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에 감격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가 분수를 잘 알지 않으면 섬김에 있어서 성공하면 교만해지게 되고 실패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원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알게 되면 성공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실패해서 사역이 잘 열매를 맺지 못해 고통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 일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보기도도 받고 또 많은 사람이 기대도 걸어주는 선교사요, 목회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가운데 제가 깊이 존경하는 인물이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입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존경스럽지만 그분은 일평생을 선교사역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본국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배우고 싶을 정도로 깊이 있는 말씀의 세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청교도 신앙과 개혁신학이 어우러져서 만난 그의 놀라운 말씀의 세계는 오늘도 읽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책을 거의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자기의 겸손이라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죄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의인이 죄인에게 나아가서 무엇을 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런 구원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 그 사랑에 감격해서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용서를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정말 3천 층의 비밀을 본 사람이었고 수많은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불러일으켰고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대 저술가였습니다. 그 사상을 통해서 우리들이 복음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리 세계에 대해서 대를 물리며 전파할 수 있는 지적인 유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탁월한 인물은 아직까지도 그 이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었는데도 사도 바울의 자기 인식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나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그의 자기 인식은 항상 종이었습니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노예입니다. 오늘날은 종님, 주의 종, 이렇게 불리지만 사실은 다 쓸데없는 소리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노예입니다.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노비입니다. 천하디 천한 노예, 노비입니다. 이 일생을 헌신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 이제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그때에 디모데서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라’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섬김은 참회의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잊지 맙시다.
우리의 목회가 아무리 성공을 해도, 우리의 선교사역이 아무리 많은 열매를 거두어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용서받아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여전히 죄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구요, 매일매일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그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모든 능력 있는 영적인 삶은 진실한 참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회가 없는 섬김은 예수의 향기가 없는 섬김입니다. 참회가 없는 섬김은 주님을 높일 수 없는 섬김이고 선교사의 눈에서 참회의 눈물이 사라질 때 결국은 자기 성취의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정욕과 자기 자랑, 자기 성취, 자기중심적으로 살려는 동물적인 본능, 이런 것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끊임없는 내적인 장애물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섬기되 항상 참회의 눈물이 있는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그 눈물의 우리의 눈이 씻기게 되면 세상의 정욕과 육체의 자랑을 주목하지 아니하고 그 씻겨진 눈물이 우리의 마음눈에 유리창을 닦아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과 잠시 있는 것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만들어주고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육욕을 따라 사는 대신 영원한 하늘나라를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참회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런 깊은 참회가 필요합니다. 자기 죽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자기 죽음의 길, 그래서 자신은 죽고 자신이 돌보는 영혼은 살아나는 이 기쁘고 놀라운 변화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은 선교사 자신의 죽음을 동반하게 되고 그 자기 죽음의 핵심은 자기가 걸었던 길에 대한 진실한 참회, 거기서부터 돌아서는 일과 다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는 정향된 삶이 바로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목회 사역을 해도 언제나 합니다. 못하거나 그런 적 없고 언제나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설교를 해도 퍼석퍼석하고 심방을 하고 행사를 해도 퍼석퍼석해서 뭐 아무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데 사실은 또 되는 것도 없는 것 같은 그런 건조한 목회의 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없고 성령의 윤기가 흐르지 않은 그런 목회를 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13년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퍼석퍼석해 지는 때를 한 서너 번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윤기가 없는 목회를 하게 되면 하나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교인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그렇게 교인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할 때 목회자가 무슨 실수라도 하게 되면 벌 떼처럼 덤벼듭니다. 그리고 고난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렇게 사역이 퍼석퍼석해질 때 그 사역이 다시 물기가 흐르고 기름이 떨어지는 그런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비결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새로운 방법을 가져다가 들이대도 윤기가 사라진 목회의 다시 그 윤기가 흐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 비결은 오직 단 하나뿐입니다. 설교자 자신의 자기 죽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뜨려져 깊이 통회할 때, 눈물을 흘리게 될 때, 그때에 그렇게 윤기 없는 교회를 바라보시는 아픔이 내 마음에 느껴지게 됩니다. 그때 주님의 그 아픔을 짊어지고 많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때에 다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솟아나게 됩니다.
우리들이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바뀐 선교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고 세월이 흘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제도나 방법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방법들은 주님의 그 성령의 기름에 부음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 사용될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선교에 있어서 많은 지혜를 동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헌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런 많은 지혜와 헌신 못지않게 선교사 자신이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그 참회 그 속에서 느끼는 십자가의 감격, 이것이 더 필수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날마다 아침에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가 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성공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대신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선교지에 있게 했던 그 맨 처음의 동기, 선교의 큰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고단하기 이를 때 없는 목회의 길에 큰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여기로 보낸 것은 우리의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에 우리들이 감격을 했습니다. 그 사랑이 점점 크게 우리의 마음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한번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원래는 죄인이었다는 것,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 그분이 당하신 그 비참한 고난이 사실은 우리가 당해야 했던 고난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늘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죄인이었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사랑 때문에 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했고 그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원히 간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를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겨도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끼와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고백하고 나면 억울한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순간을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 기회로 삼고 그렇게 예수 짊어짐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고 이런 고백을 하는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눈물입니다.
잊지 맙시다.
우리는 본래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받은 용서 때문에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좋은 대접 받으려고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멸시 천대 당하신 예수의 십자가, 그 뒤를 따라가려고 우리가 여기에 들어섰습니다. 많이 눈물을 흘리는 섬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이 여자의 섬김은 사랑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인간의 신체의 부위 중 가장 하찮은 발에다가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여자의 사랑이 얼마나 겸비한 사랑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본적 사랑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항상 나 자신의 자존감과 자만심들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은 사랑이 참다운 주의 사랑이 아닐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사랑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 신본주의적인 사랑은 사랑의 동기 자체가 사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통합이 되는 것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것이 있으니까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받은 것이 무엇이냐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입니다. 그 용서하시는 자비의 은총을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나의 마음속에서 나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고 잘 한 날보다는 잘못한 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게도 13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을 용서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잘못하고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 진통하는 시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실패를 딛고 오히려 세월이 흐르면서 제 곁에서 저를 끝까지 지켜봐주는 훌륭한 일군으로 변화되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우리 목회자, 선교사의 삶이 무엇입니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자의 섬김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용서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같이 너도 또한 용서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들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이 한 공동체의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나누어야 할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사랑, 하나는 용서입니다.
끊임없는 죄의 용서와 끊임없는 사랑, 이것을 통해서 공동체는 연약한 인간으로 인해서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망가지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여자의 섬김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여러분, 선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 때문에 사실은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기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저께 보니까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러한 감명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생각해보라.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그 자신도 결국은 자신을 배반하고 만다. 왜냐하면 자신은 공간 속에 주어졌으나 자신이 사랑하는 그 자기는 그 공간 속에 주어져서 자신에게 사랑을 받지만 시간 속에서 자신도 소멸되어가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의 비참함은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선교사, 목회자의 영혼이 매일매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지체들이 자주 질문하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잘 그래요. “목사님, 우리는 곤고하고 힘들면 목사님 설교도 듣고, 상담도 듣고, 격려도 받는데 목사님이 외롭고 힘들면 누구를 찾아가세요?” “없다, 그것이 문제다. 그게 목회자의 가장 큰 어려움이란다.”
그래서 나는 목회를 하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두 대상을 생각해요.
우선 첫째는 사람을 생각해요. 사람 중에서 누구를 생각 하냐면 선생님을 생각해요. 제가 마음에 깊이 존경하던 선생님을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는 2년 전에 돌아가신 저를 가르쳐 주셨던 김희보 교수님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 분의 고매한 인격과 성경에 대한 사랑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 있을 때 우리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리고 얼굴을 한번 본적은 없지만 내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청교도 신학자 오웬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그 박학한 천재, 17세기의 복음주의에 신탁이라고 불리었던 그 박학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큰 종이 오늘 내 상황에 있다면 그 탁월한 지혜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어떻게 판단을 하셨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의 모든 공통점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골목에서 형들하고 친구들하고 놀다가 구박을 당하고 혹은 한대 얻어맞기라도 해서 눈물을 흘리면 저 먼 발치에서 나의 우는소리를 듣고 이제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나오십니다. 그러면 막 달려가서 그 치마폭에 쌓여서 눈물을 흘리면 그 어른들이 우리의 역성을 들어줍니다. 그런 것입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많이 와서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그때가 있습니다. 친구도 없고 열심히 사역을 하다 보면 친구가 없습니다. 맨 날 친구 만나러 다니는 사역자들은 사역지가 부실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외로워지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마음 둘 곳이 없을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눈물을 뿌리며 사역을 해도 이 사역지를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 두고 갑니다. 세월이 좀더 흐르면 우리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의 사역지에서 우리의 사역을 계승할 것입니다.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하늘나라에서 재회하겠지만 결국은 이 땅의 모두 두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전심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혁혁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 사역이 모두 끝날 때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그 사역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역을 끝나는 그 날이 우리의 생애 중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에 깊이 심취해서 궁창에까지 이르는 그의 신실하심,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그것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우리들이 사역을 접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될 유일한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것은 지상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만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소망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 끊임없는 사랑,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선교사, 목회자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니 그 사람 자신이 이렇게 예수의 발에 입 맞추는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그 나라를 세우는 일군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 아픈 것이 목회 사역 중에 많이 있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가 더욱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이 어디에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이 여자의 섬김은 최선의 것을 드리는 섬김이었습니다.
당시의 이 향유는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기사가 병행기자라면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표현이 되어있으니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오늘날 돈으로 계산한다면 약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까요? 그 향유가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그것을 부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니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친다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은 최선의 것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그것이 우리가 선교사역을 하며 목회를 하며 감당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는 자가,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하는 인식, 그 속에서 어찌하든지 주님은 최상의 것을 받으셔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섬길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섬김은 우리들을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바로 이렇게 최선을 것을 하나님께 드린 섬김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의 노고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다 버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사셨고 사시는 동안에 그분이 자신의 최선을 것을 바치고 마지막에는 당신 자시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최선을 다한 그 섬김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구원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처럼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꿍쳐 놓은 것 없고, 아무것도 남겨 놓은 것 없이, 우리의 생명까지 주님께 다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 목회자가 언젠가는 그 사역을 끝내고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도 그가 섬겼던 섬김의 그 흔적, 그 향기는 계속 남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향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바는 우리들이 섬기는 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섬기고 간 다음에 향기를 남기는 그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다 버리는 그런 섬김의 길로 우리들이 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최선의 것으로 최상의 섬김을 주님께 드리다가 주님께 갈 때 그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안식처가 되겠습니까?
매 순간 주님을 섬기면서 이 섬김이 끝나고 나면 주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섬김이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섬겨야 되겠습니다.
4. 목숨을 버리는 목양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0-11)
제가 중국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최근에 중국 쪽에 있는 중국 선교에 종사하고 있는 중국인 지도자들로부터 의미심장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선교할 사람이 아니라 목회할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하면 중국에서 전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한국 교회도 그랬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낙찰이 되는데 그곳에서는 예수를 믿었다 하면 선교 가는 것으로 낙찰이 됩니다.
17, 18세 정도 된 소년 소녀들이 예수님을 알고 나서 복음에 불붙어서 전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기가 막히게 잘 정리된 설교를 10편정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거의 달달 외웁니다. 그것 밖에는 사실 모릅니다. 이 아이들이 예수 믿은 지 불과 2달 정도 되었는데 파송을 합니다. 파송을 하면 여비정도 주어서 사도행전적으로 전도를 하는데 목마른 영혼들이 많으니까 전하면 사람들이 그것에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지까지 복음이 많이 전해졌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 가 버립니다. 아주 안 돌보는 것은 아니지만 1년에 여름, 겨울에 한번씩 정도 가서 돌아보아 주는데 이것으로 신앙생활이 잘 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히 여기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목자 없이 모여서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하면서 은혜생활을 합니다. 불행하기 짝이 없고 불안합니다. 중국 전역에서 발동하고 있는 이단의 세력에 대해서 밥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적용들이 잘 안됩니다. 그 안에서 예수는 믿었지만 도덕적인 기준들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서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이 죄를 짓고 죄를 짓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게 되고 적절하게 그들을 돌보고 치리하는 사람들이 없고 이렇게 하니까 전에는 교회 바깥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함께 모여서 유리하고 고생하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 이야기가 목회하는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서 이들과 함께 죽겠다고 할 그런 종류의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사실은 목회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전부가 다 1세대들이라서 목회를 받아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예수를 믿고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목회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목회를 받아 보면서 목회에 대한 사상과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그러면서 자기도 목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을 그 지도자에게 이야기 듣기 전에 여러 해전에 중국에서 지도자들을 만날 적마다 목회하는 선교를 하지 않으면 중국은 희망이 없다고 제가 늘 강조한 이야기였습니다.
중국에 가보면 이미 서해안 쪽으로는 5,000$ 이상의 소득을 누리는 도시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강남이 85,000$ 수준의 소비를 누리며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물질주의들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쉽게 말하면 목양을 잘 안 받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목양을 잘 안 받습니다. 그런 식으로 중국이 발전해가면 저는 전망을 어둡게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었고 구원은 받았는데 물질주의들이 밀려오면서 목양을 안 받게 되면 기독교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습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전에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너희들 중국 안에서도 삼지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선교사들만 만들지 말고 한 곳에 가만히 있어서 양떼들을 데리고 목양하는 그런 사람들도 길러 내면서 돌아다니는 선교사를 만들어야지 그렇게 하면 되느냐 하는 것이 저의 지론이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두 가지였는데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또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중의 목적인데 하나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또 하나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굳이 구분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생명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풍성한 삶은 그렇게 얻은 생명이 더 생명력 있게 풍성하게 나타나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생명은 풍성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식물인간이 생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를 운영되는 형태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눈다면 관리형 교회와 사역형 교회, 목양형 교회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1. 관리형 교회는 층층시하의 관리적인 체계가 엄격해서 무엇인가 교회가 사고가 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일에 급급해서 안전망을 설치하는 식의 교회 운영입니다. 이름만 대면 거의 알 수 있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어느 지체 이야기가 주일학교에서 무엇을 하나 하려고 하면 도장을 16개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은 한 달 전에 그 행사를 하려고 발동을 걸어도 16명을 한 달 동안 다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고 합니다. 행사를 기획하고 도장을 받다가 볼 일을 다 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전하고 좋은 것은 있겠지만 요즘 같이 복잡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세대에 어떻게 감당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그렇게 관리형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얼 의미하냐면 교인들 관리함에 있어서도 목양이라는 개념보다는 관리의 개념입니다.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교인들을 점조직으로 관리하게 합니다. 부교역자들이 심방을 하는데 그것도 보면 목양형 심방, 정치적 심방, 관리형 심방이 있는데 관리형입니다.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묶어 놓으면서 관리합니다.
2. 사역형 교회는 예수 믿고 나면 즉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밀어붙여서 무엇이든지 바쁘게 정신 못 차리게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은혜도 받으면서 교회에 나름대로 붙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성경적으로 불 때 가장 바람직하고 올바른 교회의 모습은 목양형 교회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종교 개혁자인 칼빈도 교회론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교회는 어머니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품에 안고 잘 먹이고 기르는 그런 종류의 어머니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고 이런 사상이 에베소서 교회론에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목양형 교회라고 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성경에서 생각과 얼개는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가게 된 다음에 신분이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쁨이 밀려옵니다. 충만한 은혜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구원받은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찬송하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그 사람의 즉각적인 구원으로 인한 참된 기쁨은 점진적인 성화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적인 기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죄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됩니다. 그때 근본적으로 이 인간은 타락과 함께 두 가지의 결과를 자신 속에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죄책과 오염입니다. 죄책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여기에 대해선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오염은 그렇게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를 지으므로 인간 밖에 있던 죄가 인간 본성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그 죄 안에 갇히게 된 존재입니다. 그렇게 된 인간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두 측면이 있는데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의는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이 그 죄의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시면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이 지은 사법적인 책임이라고 하는 죄책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염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일단 우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면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나기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영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을 창조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실효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지시적 법과 실효적 법으로 나뉩니다. 지시적 법은 이런이런 것 하지마라 이렇게이렇게 하면 넌 죽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이런 것들입니다. 실효적 법은 지시가 아니라 실제 힘이 있어서 나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술 먹지 마라’ 이것은 지시적 법이고 저녁때만 되면 술에 끌립니다.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억압을 느낍니다. 이런 것이 실효적 힘입니다. 그런 실효적 힘을 예전에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그 법을 하나님이 폐기하시고 중생과 함께 신자 안에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과 성령의 법이 마음속에 심겨져서 이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생명과 성령이라는 실효적 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에 의해서 다스립니다. 비중생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으로 다스리시고 중생자들은 은혜로서 다스립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구원받은 신자 안에도 오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했는데 오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아버지가 다 용서해주셔서 깨끗이 씻고 새 옷을 갈아입었지만 만약에 그 친구가 돌아다니면서 바람을 피웠으면 성병 같은 것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차츰차츰 고쳐질 문제입니다. 술을 퍼 먹으면서 위가 구멍이 나고 몸이 망신창이로 상한 것은 아버지가 한번 안아 줄 때 금방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즉각적으로 다시 구원받으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즉시에 그 사람은 성화의 길에 서게 됩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신자 안에 남아있는 부패한 오염이 성령의 정결하게 하시는 작용으로 순결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오염이 본성과 관련해서는 선천성을 갖게 되고 성격적으로 부패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부패성이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전적타락과 전적무능입니다. 본성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고 선한 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선교지에 적용시켜보면 굉장히 염려스럽습니다.
제가 가본 선교지가 그렇게 많지 않고 크게 선교하는 체계가 갖추어진 선교지를 많이 다니진 못했지만 일부 선교지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물론 현지인들에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심각한 문제를 느꼈습니다. 메시지가 너무 간단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원어에 대한 미숙함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위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기초적인 복음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미 중생한 신자들의 경우에는 영적인 영양 결핍증에 걸립니다. 실제로 제가 어느 선교지에 갔는데 선교사님이 너무 칭찬을 합니다. 이 자매가 자기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 우리 교회 오른팔 같은 지도자라고 합니다. 제가 가서 어눌한 영어로 설교를 하고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뜻밖에도 그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고 하는 그 원주민이 15년 동안 남편과 별거 중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것이 신앙생활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것과 도덕적으로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관 관계를 모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혼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떠오릅니다. 요구되는 것이 사역을 목양적인 형태로 가져가야 합니다. 목양이 잘 되어야지만 전도도 잘 됩니다.
목회자나 선교사가 직접 전도 하는 것 아니잖아요? 물론 초창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역들이 많이 떠오르게 되면서 사실은 원리상으로 볼 때 평신도들이 나가 전도하게 됩니다. 평신도들이 전도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뒤편을 보면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5절) 그 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양떼들입니다. 목양을 잘 해야지만 양떼들이 나아가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열린교회 성장의 역사가 잘 증명해 줍니다.
우린 초창기부터 전도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동네에서 우리 교회가 제일 큰지 알았다고 동네주민이 이야기 할 정도로 전도를 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 교역자들이 전부 일주일에 한번 목사들까지 전부 나가서 가가호호 전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전통이 계속 내려오고 교역자가 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C.C.C.에 가서 지옥 전도 훈련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전도대원들을 묶어서 전도자를 양성시키는 코스까지 3-4달 받게 합니다. 이렇게 전도 mind로 모두 바꾸는데 초창기에 발동을 걸었습니다. 3년 정도 걸려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한다고 할 때 결국 마지막엔 평신도들이 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 전도 방식은 몇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합니다. 병원을 통한 전도, 호스피스 사역을 통한 전도, 교도소를 향한 전도 등 이런 것으로 사역 부서들끼리 열심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과 함께 열린교회의 성장의 주축이 되었던 것들은 열린교회에 와서 목양을 받으면서 말씀에 은혜를 깊이 받은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교회를 다니다가 쉬고 있지만 어쨌든 말씀의 빛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한 견디기 힘든 고통, 이것이 사실은 열린교회 성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자기 형제 친척 친구들에게 자기 돈을 들여 tape을 사서 보내주고 책을 사서 보내주고 자기가 은혜 받은 시리즈는 tape을 몇 시리즈씩 사서 전부 우표를 붙여 보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주 열렬한 전도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목양을 받으면서 자신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목양이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원받고 난 사람들은 이 교회에서 메시지의 거의 전부가 성화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 안에 교회 나오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1년에 한차례 정도는 강력하게 회심과 중생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그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인 줄 알고 덜렁덜렁 다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 받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많은 시기들이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죄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이탈되지 않을 수 있고 어떠한 죄와 우리의 심리의 작용들이 우리를 은혜의 자리에서 부패하게 만드는가?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리가 필요합니다.
열린교회에서는 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열린교회에서는 교리에 대해 무식하면 거의 왕따 수준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면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그 설교가 마음속에 쌓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지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해야 될 일이 이 일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전도하고 전도해서 이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할 그때에 교리를 가르쳐야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가르쳐야 합니다. 열린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강조가 됩니다. 처음에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믿고 수평이동한 사람들이 있고 처음 나와서 예수 믿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게 되면 오는 날 바로 면담을 해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눕니다. 그 기준은 이 사람이 정말 구원받았는가? 그리고 이 사람이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보면 빨리 복음을 전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하고 구원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워낙 머리가 텅 비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뭔가를 아는 사람들 이 두부류로 나눕니다. 아는 것이 없거나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새신자반으로 보냅니다. 거기에서 교회에서 만들어진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됩니다. 7주 정도 공부하면서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 정도가 아닌 사람들, 대개 수평이동한 사람들은 새가족반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12주 동안 네 가지 주제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읽은 목자와 양, 죄와 구원, 예배, 십자가 이 네 가지 주제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두 가지 주제는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고 두 가지 주제는 tape을 들으면서 sharing 하면서 소화를 하게 되어 12-13주 동안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와 학습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세례문답 교육을 실시하고 학습 받는 사람이나 세례 받는 사람이나 공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중심으로 만든 교단에서 나온 교리문답집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절대 세례 주지 않습니다. 외운다고 하는 것은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외우라고 해도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뇨?” 라고 물으면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은 그를 기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불합격을 시키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 전 쯤 그렇게 하고 불합격을 시킵니다. 일주일 후에 한 번 더 재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래도 화합하지 않으면 절대로 세례를 안 줍니다. 세례를 줄 때에는 거듭난 것에 대한 확인, 이 사람이 교리를 완전히 외우고 있는가? 그 짧은 책이 기독교 신앙의 뼈대에 대한 모든 이해를 주고 있습니다. 외우게 하고 그 다음 해에 세례를 받을 때 다시 외우게 합니다. 청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청년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서류를 내고 예비 교육을 받은 다음에 반드시 교리문답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빌려주고 주례를 해 줍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유아세례를 받을 때 부부가 와서 다시 그 교리문답을 외워야 됩니다. 교육은 한번만 받으면 되는데 유아세례 문답은 반드시 부부가 모두 외워야 됩니다. 외우지 못하면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제직이 될 때에도 시험을 통해서 문답을 다시하고 집사가 됩니다. 평생 동안에 여러 번에 걸쳐서 그 교리문답을 외웁니다. 구역장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리학교에 들어와야 합니다. 12-14주 동안 기독교 교리 조직신학 전체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종교 계시 성경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천년 왕국 영원무궁 세계에 이르기까지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을 가지고 공부하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를 읽도록 권장하는데 5천 페이지 정도 됩니다. 이런 것들을 소화해 내고 그 정도 되면 놀랍게 설교를 듣는 귀들이 열리게 됩니다. 상당히 지식들을 갖추게 됩니다. 탄탄하게 됩니다. 설교를 할 때에는 절대로 일상적인 예화나 드는 슬슬 흘러가는 설교가 아니라 훨씬 조직적인 설교를 하게 됩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몇 번한 그런 설교가 아니라 탄탄하게 조직을 갖추어서 한편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를 깨끗이 적어서 옮기면 거의 논문이 될 수 있는 수준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귀들이 열리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그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설교를 통해서 개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선교지에서 작년에 우리가 보내 드린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그 책이 교회에서 22번 걸쳐서 설교한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하고 설교된 것들이 다시 녹취가 되어서 그것들을 구역장들이 공부하고 공부한 것들을 가정에 보내서 다시 학습하고 수련회에 가서 공부하고 마지막에 그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엔 그 책을 놓고 구역 공부를 해야 되는데 너무 두꺼워서 공부는 하지 못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 정도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탄탄한 신학적인 지식을 갖게 됩니다. 종교, 계시, 이성, 이성의 한계, 조명, 자기 깨어짐, 죄에 대한 확신, 중생, 중생의 교리, 신자가 죄를 짓는 것, 견인 등등의 묵직묵직한 기독교 교리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설교를 깊이 있게 해 나가도록 합니다. 깊은 설교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의 목표는 담임목사를 졸졸 따라 다니는 그런 사람을 만드는 것은 기독교 사역의 목표가 아닙니다. 진리를 잘 가르쳐서 이 사람들을 christian thinker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역사와 교회, 신앙, 인생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가 사상화 되고 사상이 종교화 되고 그 둘이 기독교 안에서 하나의 틀을 이룰 때에 그것이 최고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묵직한 설교들, 요번에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려고 제작을 하라고 했습니다. 지난해에 이루어졌던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이번 연초에 이루어졌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같은 시리즈들은 지금 제가 책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보다 훨씬 더 묵직한 철학적인 내용들이 담긴 책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성도들에게 쉬운 언어로 설교를 해서 충분히 이해시켜서 사상의 집을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macro analysis와 micro analysis 다시 말해서 총체적이고 대 우주적인 기독교 사상과 죄인들의 마음과 상황을 분석해 들어가는 미시분석적인 설교 두개가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주적이고 거시적인 구도를 짜주는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를 가르치는 설교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해부하고 삶의 상황들을 다루어주는 미시적인 설교가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자만 있고 후자가 없게 되면 적용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후자만 있고 전자가 없게 되면 사상의 큰 틀을 이탈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고난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은 것 가지고는 설교가 안 됩니다. 끊임없이 연구해야 됩니다. 비근한 예로 연초에 제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이란 설교를 했는데 교인들이 엄청나게 깨졌습니다. 물론 그 설교를 할 때에 기본적으로는 제가 성경을 보고 그 속에서 전할 메시지를 찾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만들었지만 그 설교를 완성하기 위해서 참고로 제가 읽은 자료가 2003-2006년도에 나온 교회론에 관한 박사논문 7개를 미국에서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모든 열린교회 교인들은 신학적인 충격이 있는 설교를 원합니다.
오늘날의 설교를 보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전체적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아침마당 분위기입니다.
당장은 인스턴트식품 같아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삶을 바꾸는 위대한 힘은 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힘이 없습니다. 사상이 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내용, 사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승부를 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교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고민과 분투하는 내용은 그것입니다. 심방, 기도하고 사역 회의를 하는 시간과 집회 가는 이외에는 항상 서재에 있습니다. 제가 항상 제 자신을 비유하기를 ‘나는 매일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광부가 막장에 들어가서 탄을 캐 와서 얼굴이 시커먼하여 목숨을 걸고 탄을 캐오고 구루마를 끌고 와서 밖에 쏟아놓으면서 일당을 받아서 먹고 살 듯이 나는 그런 사람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것도 별로 없고 공부를 옳게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남들이 놀 때 광부 옷 입고 컴컴한 지하갱도를 들어가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도 있습니다. 항상 내가 게을러질 때마다 ‘나는 고3이다. 고3은 캠핑도 대학 들어간 다음에 하고 연애도 대학 들어간 다음에 하고 신나고 좋은 일은 모두 대학 입학 후로 미룹니다.’ 고3이 언제 끝날까? 죽으면 끝나겠죠.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목양적인 교회를 유지하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것은 목양의 구조를 갖추려면 여기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관계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목양을 잘 지속할 수 있는 관계만 잘 만들어도 교회가 꽤 잘 유지됩니다. 오늘날 보면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지혜롭게 잘 도입하는 교회들이 나름대로 건강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고 그 위에 아주 깊은 진리의 내용들이 거기에 담겨야 합니다. 그것들이 깊이 담겨져서 담겨진 그것들이 성도들에게 깊이 흘러들어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교하고 설교한 이것들이 교회에서 계속해서 가르침으로 활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내용을 함의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13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제까지 약 2,800 편 정도의 설교를 했습니다. 앞으로 13년은 그렇게 많이 설교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벌써 예배의 순서도 많이 줄어들었고 아마 체력이나 모든 것들이 그때만 못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항상 시리즈로 이루어집니다. 길 때에는 한 33주, 거의 8-9개월까지 이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7주 정도에 끝나는 경우도 있고 보통 10주 정도 계속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이 거의 모든 시리즈들이 리바이블 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비치해 놓고 기도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리즈를 들어보라고 처방해 주고 시험에 들어서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을 이기는 길을 주고 가족들 간에 미워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움과 용서를 이런 식으로 처방을 하면서 목회를 해 왔습니다. 도서관에 완벽하게 그런 것들이 비치가 되어 있어서 계속해서 볼 수 있고 목회에 활용하면서 살아갑니다.
2003년에 저희들이 전교인 건강 진단을 했습니다. 영적 건장 진단을 최신 통계 기법을 활용해서 전교인에게 앙케이드를 받아서 돌렸습니다. 그 때 나온 통계에 의하면 교인들 중에 15% 정도가 지금 나는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있다고 고백을 했고, 74% 정도가 나는 은혜를 받고 있다고 대답을 했고, 8% 정도가 나는 은혜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전교인의 65% 사람이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고 매주 한개 이상의 TAPE을 따로 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건강관리 하듯이 정확한 통계에 의해서 교인들의 영적인 생활을 살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공급해 주는 그런 종류의 책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시스템과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함께 전부 가치 자체를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는데 거기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온 교인들이 정말 놀랍게 은혜 생활을 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투자를 아끼지 않고 교회가 고비형의 체계가 되기는 하는데 교역자의 수를 늘려서 교구의 size를 줄이고 사람들이 교역자와 접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교회에서 다양한 말씀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그런 중심의 시스템들을 우리들이 가져가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흘러갈 수 있게끔 교회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을 담을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든 것이 바로 이 교회당입니다. 지금은 이 교회당이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듭니다.
여러분들이 공간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게 되면 제가 이야기한 영혼들을 잘 돌봐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는 생각들이 이 하드웨어 속에 녹아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시면서 우리 교회는 이미 벌써 size가 어느 정도 있는 선교지에서 도입하기에는 어렵겠지만 거기서 원리들을 채집하여서 선교지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 setting되어 있는 새가족반 같은 것은 이미 우리 교인 30명 모일 때부터 시작된 새가족반입니다. 저는 최고의 새가족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역들을 후원하기 위해 교회 안에 줄판부가 있습니다. 출판하는 직원들이 있고 디자인 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보급하기 위해 서점이 있고 tape을 만드는 제작실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의 이런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연구 자료실이 있고 신학연구실이 있습니다. 서재라든지 이런 시스템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지육하기 위하여 도서관이 존재해서 도서관에서 성도들이 계속 책을 빌리고 성경을 읽고 토요일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서 교인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성경공부반 준비도 하고 교리반 숙제도 합니다.
그런 시스템들을 갖추고 아이들을 데리고 온 대부분의 교회에서 보면 아이를 낳게 되면 거의 10년 동안 영적이 침체에 걸립니다. 애를 셋 낳으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우리들이 교회를 와 보니까 동네가 수준은 떨어집니다. 와 보니까 젊은 부부들이 많은 지역입니다. 아이들이 이 속에 와서 뛰어 놀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될 때 부모들이 교회 나오기 좋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도 부모가 원하기만 하면 아주 갓난아기를 제외하고 모두 맡아줍니다.
우리 교회는 태아부부터 시작합니다. 아이를 임신하면 교회에서 편지가 갑니다. 태아부로 들어오게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기도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279일 인가 동안 아이를 기다리면서 같이 성경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특강을 들으면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출산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이길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모든 교회가 기다리는 가운데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그 날 교회에서 꽃바구니가 갑니다. 아이의 출생을 축하합니다. 태어난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영아부에 소속이 됩니다. 돌 될 때까지는 잘 못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엄마를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을 지나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되면 영아부로 들어가게 합니다. 영아부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가 둘이나 있습니다. 영아부에서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사역을 합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킵니다. 철저하게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시키고 그 아이들을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헌금을 합니다. 이것이 끝나면 유아부로 유아부 끝나면 유치1부(6살)로, 유치2부(7살)로,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로 올라가게 됩니다. 예배실에 보면 자모가 아이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당 뒤에 유리창을 막고 마루를 깔아 크게 만들어 놓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집어던지고 과자 먹고 합니다. 한마디로 개판이 되어 예배를 못 드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모든 예배 시간에는 항상 어린이 교육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거기에 baby sitting으로 맡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듭니다. 수요예배 때는 어떻게 하나요? 수요예배 때 교인들에게 아이를 보라고 하면 교인들이 짜증이 납니다. 외부의 사람들이 와서 아이들을 돌봅니다. 교역자가 돌아가면서 그 사람들을 교육시켜서 외부에 있는 신학생들이 봉사 활동을 옵니다. 그 신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교육 교재 모든 것들을 만들어서 돌봅니다. 사경회가 이루어지게 되면 장년들은 사경회 참석하고 동시에 kids bible camp가 함께 열립니다. 항상 장년부를 위한 사경회 계획과 어린이 bible camp계획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봉사를 하고 실제로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어린이 선교 단체에서 초청해서 오게 하고 helper들도 신학생들을 부르고 그 돈이 꽤 들어갑니다. 어떤 때는 500만원씩도 들어갑니다. 엄마 아빠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다 와서 어린이는 어린이 사경회 들어가고 어른은 어른 사경회 들어갑니다. 거기서 어린이들은 나름대로 주제를 가지고 공부하고 은혜를 받고 장년 사경회 끝나면 같이 만나서 집에 갑니다. 온 집안이 함께 신앙교육이 이루어집니다. 수요일은 수요일대로 baby sitting을 해주고요, 주일이나 수요일 같은 경우에 어린이를 직접 데리고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있는 자매들은 2층에 올라가보면 그 아이들이 개월 수대로 들어가는 방이 있습니다. 아이를 섞어놓으면 기어 다니는 아이들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건드리므로 굉장히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냥 엄마 젖만 먹고 아무소리도 못 내는 아이들끼리 있어야 소리가 안 납니다. 빽빽거리고 기어 다니는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잠도 못 자고 예배를 방해합니다. 1-2개월, 3-4개월, 5-6개월, 9-12개월 이런 식으로 방이 다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수유를 하는데 요즘 거의 모유를 먹이므로 어린아이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버지가 보는 사람들은 문제가 됩니다. 위에 올라가면 자부실이 따로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후예배가 있을 때에는 오전예배에는 아빠가 본당에서 은혜를 받고 오후예배에는 아빠가 자부실로 들어가고 엄마가 본당에 내려가서 은혜를 받고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 설교는 대개 빨라야 70분, 길면 100분 이상 지속되는 설교이기 때문에 의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00분 이상 지속되는 설교이므로 집중하지 않으면 은혜받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돌보면서 예배드리기 힘듭니다. 아이들을 떼어 놓고 예배드리도록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모든 것들 속에 목양의 정신들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접하고 편안하게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시스템이 되어있는 곳이 열린교회입니다.
이 공간에 여러분들이 지금은 쾌적하지요? 2부 예배에는 여기에 꽉 차서 지지난 주에는 1,300명이 드렸습니다. 교육관에서 170명이 예배를 드렸지만 로비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의자를 놓고 앉게 됩니다. 예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천장은 낮고 이산화탄소를 뽑아내기 때문입니다. 몇 명을 데리고 산소가 예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체적을 계산했습니다. 사람들이 토해내는 이산화탄소가스와 필요한 산소의 양이 어떻게 되는가를 계산했습니다. 산소를 추가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산소는 무엇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면 집중과 기억에 큰 영향을 줍니다. 산소가 타 들어가면서 에너지가 나오고 에너지를 태우면서 머릿속에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공부를 해도 이런 곳에서 기억에 잘 안 남는데 숲 속에 바람이 잘 불고 좋은 장소에서 아침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면 머리에 속속 들어갑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산소의 양입니다. 보통 도시 공기 중에 있는 산소의 용적량이 19.7%이구요, 숲 속이 20.3% 정도 되고 설악산 아침이 21.3%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계산해보니 18%대로 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까짓 것 몇%가 무슨 문제가 되냐고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고 13% 이하로 내려가면 구역질이 나기 시작하고 8%이하로 내려가면 토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이 고개를 들어보면 스피커와 스피커 사이에 수도꼭지 같은 것이 보입니다. 한 라인에 2개씩 들어있습니다. 100개 이상이 들어있습니다. 산소가 공급되는 시스템입니다. 저쪽에서 산소를 틀면 산소가 휙하고 내려옵니다. 산소는 무겁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이것이 목양적 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쾌적하고 편안하게 드려야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를 아무리 참석하고 가도 성도들이 그 마음속에 진리가 기억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예배당을 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본당 길이가 72m입니다. 예배당으로 말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어서 우리가 이러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탁 터진 곳에서 목사의 얼굴을 모두 집중하는 가운데 위에 큰 스크린이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교회가 너무 그립습니다. 성도들이 훨씬 더 은혜를 받았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 뒤에서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목양적 발상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두 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에 의해서 목양이 이루어집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실질적인 적용의 문제에는 많은 여러 가지 것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파고 들어가면서 목양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5. 불변하는 선교의 정신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복음 사역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역의 방법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예전에 행했던 많은 사역들, 그리고 예전에 우리들이 경험하고 알고 있었던 많은 일들은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대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들을 연구하고 새로운 선교의 모델들을 만들고 목회를 위한 방법들을 개발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나 선교지나 반드시 뒤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목회의 방법들이 개발되어야 하고 목회자나 선교사 자신부터 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하고 무엇인가 제대로 하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사람들의 가슴에는 와 닿는 것이 없는 종류의 사역을 하게 됩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새로운 목회의 방법과 선교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백번 이야기해도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다고 해도 역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섬김의 정신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동일하게 사실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섬김의 정신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정신이 없이 새로운 시대니까 새로운 방법들을 연구하자는 쪽으로만 기운다면 그것이 세속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속화라고 하는 것은 세속화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방법과 그 시대에 맞는 전략들은 짰지만 그 속에 어느 시대이든지 시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시대에 영합한 것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불변하는 섬김의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에베소 지방에서의 이 사도 바울의 사역은 19장에서 큰 부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부흥을 에베소에 내리시고 그 부흥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개심한 수많은 사람들이 마술하던 책을 도심 한복판에서 불사르던 것과 함께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고 바울에 대해서도 같은 인상을 가졌습니다. 사도바울이 거기에 머물면서 정말 드물게 3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시아에 와서 목회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서 사도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자신이 그 예루살렘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증거 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많은 핍박이 기다린다는 것만을 증거 해 주셨을 따름입니다. 그때에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이 오자 그들에게 유언적인 고별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부분이 오늘 사회자가 읽어준 바로 그 본문입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줄을 너희도 아는 바니’ 그의 불변하는 섬김의 정신이 무엇인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진정한 목회, 참된 선교가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줄을 너희도 아는 바니 사도바울의 선교와 목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인 그런 종류의 섬김이었습니다. 마치 그의 삶은 유리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투명한 삶이었습니다. 드러난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의 구별이 없이 마치 유리로 지은 집속에서 산 사람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섬김은 내면과 외면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과 선교의 사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큰 능력과 위대한 헌신 이런 일 이전에 영웅주의적인 헌신 이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회사역이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진실하지 않고는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거짓과 허위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정말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항상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훌륭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훌륭한 그 덕에 거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합치시키고자 노력하는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한참 전하다보면 우리가 예수의 분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요, 우리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우리는 그 복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가 되었고 선교사가 되었는데 우리의 영적인 침체를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면서 우리는 거짓과 가식 적당한 위선에 쌓여서 우리의 사역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니 그것은 반쪽 헌신 일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무엇을 하든지 그 대상을 통해 사랑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한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면 그는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이 넘는 동안, 목회를 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들 가운데 섬긴 것을 그들도 모두 알게끔 자신을 다 바치면서 그렇게 섬겼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의 섬기는 현장에 간역자도 없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모든 사람 앞에 진실한 섬김을 감당하도록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때까지 좋은 선교의 여건 속에서 사역을 계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후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누구에게서든지 거리낌이 없이 전한 것이며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 그의 사역은 쉬임없는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투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투명하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 위대하고 놀라운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간역자도 없었고 감독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마 선교지에서는 특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내 목회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지만 때로는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때도 있고 내가 너무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접어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그 있는 모든 지체들이 선교사에게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지만 국내 목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감독자도 없고 눈치 보는 사람도 없을 때에 그때에 내가 너희 가운데 있으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사역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자신이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일이 우리의 몸에 깊이 배이지 않고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는 기쁨만으로는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선교 그 자체는 에이든 토저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예배자들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넘치는 사역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게 되고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면 섬길수록 그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영적인 쇄신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가 앞뒤가 구별되지 않는, 안팎이 나누어지지 않는 투명하고 진실한 선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교훈이 그렇게 많은 것 같아도 요약을 하고 다시 요약을 하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개의 계명은 분리되거나 나누어지는 계명이 아니니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께 바치는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까리따스의 사랑이라면 이미 그 사랑 안에 이웃을 향한 네 몸처럼 사랑하고자하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충분히 사랑했으니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진술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설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목회사역을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목회를 받아야하고 선교사역의 진정한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교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께 설복당하는 선교사, 완고함과 자신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목양의 손길에 복종되는 목회자, 그 사람이 안팎이 똑같은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항상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항상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항상 만족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진실해 진다라고 하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조차도 그것을 숨기거나 감추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 주님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고쳐서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그런 말할 수 없는 그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진실해지는 사람, 더 깊이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한 삶을 사는 사람, 이런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을 통해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듯이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지금에 있는 나의 세계가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눈이 열리면 그 찢어진 마음의 창을 통하여 또 다른 은혜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설교할 때에 교인들은 이제껏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부패함이 본성적인 것이라서 그렇게 새로운 눈의 세계를 보면 잠시 깨어나고 기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그들은 뒤로 물러가고 마음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때에도 깊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또 다른 은혜의 세계를 알기 원하면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자신에 대한 깨어짐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가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께 목양을 받지 않는 사람이 다른 지체들을 목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깨어진 자신의 세계의 고통을 뒤로 하고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은혜의 세계, 고난이 없었더라면 볼 수 없었을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썩을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의 껍질을 찢고 보좌에 계신 지존하신 중보자를 만나게 되는 이런 욥과 같은 경험이 우리에게 계속 반복될 때 우리의 사역 전체는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깨어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이 분주하고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고 우리의 사역 속에 진실이 결핍되게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사역은 진실했습니다. 그의 능력으로 위대한 일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진실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의 사역지에 엎드려서 위대한 성공보다는 진실한 선교,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큰 업적보다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려는 무명의 사역의 정신, 그렇게 진실해지고자 하는 그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항상 누구를 많이 흉내 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가 성령 운동을 하면 모두 조용기 목사님처럼 되겠습니까? 제자 훈련을 하면 사랑의 교회가 될까요? 찬양집회를 하면 온누리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분들은 그분인 것으로 충분하고 나는 나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실해져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 자신의 이 거짓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간이건 선교사역을 한 후에 언젠가는 그 지체들에게 고별 설교를 할 때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제껏 이 선교지에 들어온 이래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겠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라고 말합니다.
그는 제일 먼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혈기 충천하고 마음에 교만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단호하고 전승에 의하면 아주 무자비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본질적으로야 변화가 되었지만 그 혈기 충천한 옛 성품이 그를 만만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껏 너희에게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하면서 제일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어찌하든지 겸손하게 너희를 섬겼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직접 보고 그 사람의 어떤 특성 때문에 굴복이 되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비굴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겸손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잊지 않은 데서 비롯된 낮아짐입니다. 그 겸비함이 바로 겸손한 사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지도자가 단호함의 덕목을 갖추고 ‘지도력을 행사 한다’라고 하는 것과 ‘그 사람이 겸손하다’라고 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밟히고 무능하고 무엇하나 단호함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은 두려워하지만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자기를 끊임없이 낮출 수 있지만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을 위해서 단호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낮아짐의 사람입니다.
목회의 사역, 선교의 사역은 끊임없는 자기 낮아짐의 사역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출발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무엇인가 중요한 사람들이고 매우 쓸모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로 이 고난이 많은 목회의 사역, 시련과 고통이 많은 선교의 사역에 발을 들여놓게 만든 것은 우리의 목회지나 선교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만난 하나님, 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십자가의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만물의 찌끼와 같고 이 세상에 버려진 버러지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러한 선교와 목회의 소명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일평생 섬기는 정신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양떼들은 살고 나는 주님 앞에 끊임없이 버린 자처럼 여김을 받고 지체들은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고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그는 연한 순 같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우리도 멸시하였다’고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고백이 우리를 소명으로 부른 정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존귀와 영광을 기대했습니까? 우리가 섬김의 현장에 들어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했습니까? 우리가 수고하면 사람들이 우리의 수고를 알아주고 우리로 하여금 박수갈채를 받게 할 것이라는 그런 기대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선교사역의 길에, 목회사역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형제로서 여러분들이 밟은 그 모든 과정을 밟아서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되어야겠다’ 결심했을 때 일주일을 울었습니다. 나는 정말 그 길을 가기 싫은데 그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꿈꾸었습니다.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 서 있는 어린양같이 주님의 쓰시기를 기대하면서 제 인생에 대한 모든 꿈을 버렸습니다. 목회자가 되라고 하시니 되어야 되겠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가야 될 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직장을 끝내고 계단을 내려오는 깊은 밤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때로는 계단에 앉아서 울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어떻게 할까? 찾아가는 이 없는 외로운 농촌도 좋고 섬마을도 좋고 그야말로 모든 꿈을 포기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그들에게 아버지같이 복음을 전하고 그러다가 죽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대로 저를 보내지 않으시고 이렇게 번잡하고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유해질 때마다 항상 그때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러한 과거가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올 때 선교지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이 있을 때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하고 더 이상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것같이 느껴질 때 사람을 원망하게 되고 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사가 사라질 때마다 그 처음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때, 그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던 때 그 마음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선교사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유능하게 행하는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금 용서받은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살아온 모든 날들은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가슴에 못 박은 날들이었고 섬기겠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지만 우리는 아무 자원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주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 없이 천국의 정원을 걷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을 지나기를 더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전부였고 우리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꼭 붙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 인정해주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버려도 주님이 인정해주실 수 있다면 그 길이 무엇이든지 행하고 싶었고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그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3년이 넘는 세월을 지체들을 선교지에서 섬긴 그 목양의 정신이 바로 이런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다짐해야 합니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없습니다. 나는 사라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고 나는 없어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 스며들고 더 스며들어서 액체와 같이 녹아서 나의 목회지에서 물이 되어 교회 밑에 흐르고 나는 사라지고 지체들은 살아나고, 나는 없어지고 주님은 지체들 마음 가운데 사시옵소서.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이게 십자가 목회입니다. 우리들이 이 겸비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세상을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섬김의 정신은 눈물이 있는 섬김의 정신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매우 이기적이고 아주 차가운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사랑의 사람, 눈물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자기를 모두 보여주는 목회를 했는데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섬김을 보면서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가 지도자로서 무엇 하나 결핍한 것이 있었습니까?
탁월한 지성, 말씀에 대한 해박한 이해, 자신의 삶을 거기에 합치시키는 헌신, 선교에 대한 비젼, 그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능력, 단호함, 용기, 결단, 추진력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아시아에서의 선교 사역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사도의 눈에서 늘 흐르는 눈물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의 자신의 사역이 눈물의 사역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나는 이 눈물의 의미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고난에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고통에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여기에 이 시험이 복수로 나옵니다. 유대인의 간계들을 인하여 시험들을 많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어디 고통이 그것뿐이겠습니까? 이러한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였기에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걸아가신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고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될 때 걸어가겠노라고 다짐했던 길이 존귀와 영광을 받은 길이 아니라 멸시와 천대를 받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그 길이 우리의 선교사역 앞에, 목회사역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그러나 그 길이 또한 우리가 걸아가기로 다짐했던 그 길이니 우리가 거기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언정 주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이 고달프고 시련과 고난이 많이 겹칠 때, 사역지에서 혼자 버려진 것처럼 외롭기 짝이 없을 때, 그때 사람 원망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시작하면 영역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우십시오. 실컷 우십시오.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우십시오. 한없이 우십시오. 그 눈물이 오직 사람 앞에서 흘리는 비참한 눈물이 아니라 기도의 눈물이 되게 하십시오. 온전히 눈물을 흘리고 우십시오. 이것이 사실은 저의 목회의 과정에서 받는 위로의 비결입니다.
고난이 겹칠 때, 시련이 밀려올 때,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더 이상 뜨고 싶지 않을 때, 그때에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을 꼭 붙듭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뒤따라갑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설움과 괴로움도 고통도 주님께 다 쏟아놓습니다. 한참을 웁니다. 울 때는 어쩌면 예외 없이 주님이 떠오르는지 모릅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던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아파서 울었는데 한참 울다 보면 주님이 당하신 고난 때문에 울게 됩니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고난이 이렇게 겹치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눈도 뜨기 싫은 시련의 계곡을 통과할 때 나는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나의 많은 실패와 나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역시 제가 아직도 주님의 것이군요. 주님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눈물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이외에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회지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서 거기에 섰고, 주님의 사랑 의지해서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처음 이 길 들어설 때 우리가 좋은 것 바라고 여기 들어선 것 아닙니다. 존귀 영광 권세는 주님 혼자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는 인내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객까지 풀었습니다. 그런 나쁜놈 들에게 에워 쌓여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또 참고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고린도후서를 읽다가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사도가 아니라고 했더니 사도가 “나 진짜 사도야” 하면서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의 사도 된 표는 오래 참음과 기사와 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사와 이적은 뒤로 가고 오래 참음을 말했으니 내가 만약에 정말 예수님이 세워지는 사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참을 수가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목회자로 부른 소명이 진실합니까? 선교사로 불러 주신 소명이 예수께로부터 온 것 틀림없습니까? 그러면 참는 것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참고 또 참고 견디고 또 견디고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목회자를 만났는데 교회에 대한 울분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람들이 너무 나쁩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목회자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결국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목회자가 커다란 죄를 짓지 않는 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지만 목회의 사역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저라도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못 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 울분이 가득합니다. 지금이라도 길이 열리면 당장 목회지를 떠나고 싶어하는 울분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교인들이 어쩜 그렇게 못 되었어요. 그렇게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슨 목회를 받으려고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눈물이 났습니다. 사모님도 너무 어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부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참아라. 왜? 주님이 그 길을 가셨고 교인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교회를 버리면 교인 때문에 목회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 때문에 목회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파도 참고 교인들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도 용서하고 참고 또 참고 사모님하고 많이 웁니다. 참자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노래했습니다.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가다가 끝 날에 주가 오라 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리 하고 노래했습니다.
참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런 긴 인내의 세월을 보내며 선교지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참고 두 번째도 참고 세 번째도 참고 이 고통을 참다보면 마음에 깊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때에도 상처 준 교인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 죄를 짓게 됩니다. 고통이 깊이 밀려와서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 때 주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 바로 이런 길이었군요. 그 사랑 앞에 제가 감격하며 걸어가겠다고 한 그 길이 바로 이 길이었군요.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계속해서 참으십시오. 눈길을 끄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참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랬습니다. 우리가 참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분노와 미움으로 그렇게 엉클어지기만 하면 그것이 정말 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참고 견디기만 하고 목회지, 선교지는 병들어 간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섬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모든 시험을 참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마음의 괴로움과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으면서도 우리들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 손으로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도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심령이 괴로울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 우리는 죽고 우리는 사라져도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은 정지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말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설교하기 직전에 견디기 괴로울 정도로 마음 상한일이 있어도 신기하게 강대에 올라가서 말씀을 펴면 잠시 전에 있었던 그 괴로운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도 맨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약하고 외로움도 많이 타고 무엇인가 괴로운 일이 있으면 밤잠을 못 이루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목회 정신을 흉내 내려고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그런 영적인 순발력을 주셨습니다. 강대에 올라가기 전에 너무 괴로워서 죽을 듯이 눈물을 흘리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펴면 자유함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더더욱 교인들은 내 마음에 있는 깊은 고통을 모르면서 13년을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해도 고난을 당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궁극의 목표일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게 하신 것은 우리로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를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괴롭고 아프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잠간입니다. 고난이 겹칠 때 눈을 지그시 감고 시련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것처럼 아플 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렇게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면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이 고단한 사역의 날개를 접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끝 날에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피 묻은 전투복을 벗고 세마포에 고운 옷을 갈아입고 다시는 눈물로 없고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고 시기와 미움도 없고 형제가 형제를 서로 미워하고 물로 뜯는 그런 더러운 일들도 없는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그렇게 알고 싶었던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껏 알아가며 행복하게 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은 주님께 얼마나 칭찬을 받을까요? 네가 괴롬과 시련이 많은 가시밭길 같은 목회의 길을, 선교의 길을 오래도 걸었구나. 이제는 내 곁에서 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아직 이 길을 더 걸어가야 합니다.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고난의 길을 더 걸어가야 합니다.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기며 주님이 불러주시는 소명의 푯대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그 길을 걸어갈 때까지 이렇게 함께 만난 공동체를 뜨겁게 사랑하고 지체들을 피붙이처럼 여기며 나를 깨뜨려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섬기므로 위로를 받으며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영생의 길이고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G.P 선교대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