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2
녹취자: 김명진
저는 지난 산상세미나에서 에드워즈를 제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신학을 그의 사상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상의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내가 얼마나 기쁨을 누렸는지에 대해서 아주 작은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을 기준으로 25권까지의 전집을 냈고 전체 페이지의 수로 따지자면 18000페이지에서 2만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읽기 못한 책은 설교집 몇 권을 포함해서 5~6권정도 됩니다. 나머지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고 중요한 책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걸어온 길이 나에게는 커다란 위로였고, 행복이었고, 어떻게 보면 저의 40대 후반에서, 길게 보면 사십대 초반부터이지만, 중간에 솔직히 말해서 5~6년 정도는 에드워즈를 읽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목회 사역에 시달렸습니다. 그 후로 목회사역이 가벼워 진 것은 아니지만 결심을 품게 하고 에드워즈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학교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즐거워서 하는 공부였기 때문에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었고, 참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거나 세상을 살면서 인생의 무게에 시달릴 때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의 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나의 순례의 길에 친절한 벗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에드워즈와 함께 살 때 항상 좋은 날만 있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연애를 하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가끔 갈등할 때도 있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에드워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있고 그리고 특히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가 유행하고 무신론적인 사상들이 팽배해져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에는 에드워즈의 사상이 상당히 적실성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전 삼백 여년이 훨씬 넘는 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 세계에서 다시 연구되고 있고 선진국부터 저 개발도상국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엄격한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신학자들에게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모든 것들 속에서 과연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 중 어떤 것들은 정말 이 사람들의 비판처럼 성경과 개혁 신학에서 벗어난 것인가 고민하는 갈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천지창조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나친 플라톤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에 대한 해석은 플라톤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12세기에 북유럽에서 널리 유행했던 까발리즘이라고 하는 (까발리즘은 유대주의의 성경 해석학입니다.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해석들이 곁들여진 해석이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상을 까발리즘이라고 하고, 그렇게 해석한 결과들 혹은 해석을 까발라라고 합니다.) 그런 까발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까발리즘의 해석도 플라톤주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천지 창조라기보다는 이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비판을 받은 것은 신의 일자의 신성이 꽉 차서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넘쳐흘러서 밖으로 나온 것이 천지 창조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어떤 물통에 물을 가득 집어넣으면 꽉 찹니다. 꽉 차면 넘칩니다. 은혜롭지는 않지만 맥주를 잔에 가득 채우면 거품이 확 넘칩니다. 그래서 ‘원래 신은 영적인 존재인데 그 신이 정도를 넘어서 밖으로 유출되어 생긴 것이 이 세상이다’라는 것이 플라톤주의의 유출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기에 에마네이션, 리마네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에마네이션은 에마네이트 발산하다, 뿜어내다 라는 뜻이고, 리마네이션은 다시 환원되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명백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에 대한 설명이 너무 플라톤주의 철학에 의해서 오염 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 그리고 인간이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그의 견해가 너무 지나친 결정론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설명이 개혁주의에서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났고, 그래서 인간은 마치 당구공처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에 의해서 때리면 그것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의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의지의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론은 우리 개혁주의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그런 비판을 심각하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25권, 권수로 쓴 것이 27권이고 이제 출판이 종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타에 들어가면 책을 사지 않아도 텍스트로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권 자유의지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두 번을 읽어 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학자들과 대화를 해보아도 똑같은 텍스트를 놓고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마크 트웨인이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도 잘 이해를 못하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학문이 더 깊어지면 제가 이해를 할 수 있을것입니다. 혹시 내가 영어 때문에 이해를 못 하는가 해서 번역본을 읽어 봤는데도 이것은 더 심오합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다면 제가 1권을 제대로 이해했다하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깊이 심취해 있는 것을 보면서 제 주위에 동료 학자들 중 몇이 “목사님이 에드워즈에 심취해 있는 것이 우려가 됩니다.”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학문들을 공부해 나가게 되었는데 그 후로 여러 해가 흐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문을 품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한 어떤 공정한 해석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런 갈등들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이, 그때의 갈등이 풀렸고 그러자 저의 사랑은 더욱더 뜨거워 졌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다른 학문들의 도움이 어떤 깊이 있는 어떤 깊이 있는 사상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공부할 때는 항상 그것 하나만 공부해서는 올바른 해석에 도달할 수 없고, 다양한 많은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서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원자료들 혹은 원저자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보다 균형 있는 해석에 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에게는 네 명의 유명한 스승이 있는데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와 5세기에 살았던 인물이고, 기독교의 사상을 모두 집대성해서 서양의 사상으로 나가는 바다의 수문의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고, 기독교 신학은 어거스틴의 작품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후 기독교에서 다루게 될 모든 문제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이 강이나 호수라면 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거대한 대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존 칼빈은 16세기의 인물이었고. 존 오웬은 개혁주의 신학이 만개했던 17세기 개혁파 전통주의자이자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였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놀랍게도 이 세 사람 모두 어거스틴의 충실한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작품들을 할 수만 있으면 다 읽으려고 노력하였고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중세의 신학자들, 17세기 개혁파 전통주의와 계몽주의, 18세기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독설을 할수록 에드워즈에 대한 이해, 에드워즈만 읽었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용들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아우구스티누스와 존 캘빈, 존 오웬, 그리고 16세기 개혁파 전통주의자들, 최근에 와서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에 대한 나의 관심이 증진되면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빛 아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어낼 때 또 다른 빛깔들이 발견되는 것을 제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존 칼빈과 존 오웬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데 부분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데 거의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아주 탁월한 사상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영원히 그는 어거스틴주의자의 테두리 안에서 자기의 신학과 신앙을 매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또 하나의 원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놀라운 것이 16세기의 개혁파 전통주의 저자들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페트루스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17세기의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의 뒤를 이어서 아카데미를 이끌어가는 프란세우스 튜레틴, 그리고 튜레틴과 같은 사람의 작품들을 매우 숙독했고 친근히 했으며 헤르니무스 잔키르를 비롯해서 많은 17세기 개혁파 전통주의 작품들을 조나단 에드워즈와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탄탄한 개혁주의의 기반에 놓았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같은 대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과 해석적 순환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저자와 학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러분도 그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불투만 같은 신학자가 이야기 하는 전이해, 혹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가 이야기 하는 선험적 이해, 이런 것들이 먼저 있고, 모든 학문의 결과들을 받아들일 때 어느 누구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이해의 토대위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에 어떤 선이해 어떤 선이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해석의 방향, 그 해석의 품부함의 정도는 여러 가지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있는 자에게는 더하여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지식의 세계에서 정확하게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하면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공부는 하나의 전문적으로 그 지식을 습득해서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기 위한 그런 의미에서 학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17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경 다음으로 애독한 책이 페트루스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사진을 이미 지난 시간에 보여드렸습니다. 그 사람이 쓴 떼올로기아이라고 하는 TPT라고 하는 두 권으로 된 책인데 그 책을 제가 2년 동안 유럽에서 수소문해서 가까스로 구입을 했습니다. 그 책을 아주 깊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숙독했는데 그 사람이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런 정리를 했습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신학이라고 할 때 신학교를 생각하고, 목회자라고 생각 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예전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자체는 모두 신학자가 된다는 것을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류는 다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신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신학은 올바른데 잘못된 태도로 신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함이 있는 신학을 한다는 차이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사람의 신학의 정의를 그대로 채용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신학의 정의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성을 한 것이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를 통한 은혜, 성령 안에서의 생명과 사랑의 공급,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곧 신학입니다. 신학은 곧 사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신학을 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 계속 공부를 해야한다 라고 강조를 하다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열린교회는 이과 출신들이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문과 출신들이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과 이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학문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미학적 신학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철학을 모두 포괄하는 신학의 구축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라는 것이 오늘날 이야기 하는 철학의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철학은 삶과 밀접한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철학은 과학적 실증주의, 역사주의, 상대주의 이런 쪽으로 가니까 사실 삶의 뿌리와 근본, 그리고 인간의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삶의 기반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사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역설적으로 굉장히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잘하는데 삶의 기저를 공격하면 그 자체의 기반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냐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이런 철학을 포괄하는 철학의 원래의 고전적 의미에서 그리스 철학은 철학의 근본적인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지만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가장 사변적이고 현실과 의미가 없어 보이는 그 진리의 탐구가 사실은 지금 우리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물음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태에 대한, 기반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생각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전에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지 참으로 행복할 것인가를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고민 했는가를 그 흔적을 읽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흔적을 읽는 것은 한 편으로는 문학을 통해서 그 흔적을 읽는 것이고 그런데 답을 주지 않습니다. 또 한편은 사상과 철학을 통해서 읽는데, 문학의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이 내렸던 답들을 역사에 대해서 추적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서양철학의 역사는 예전에 쌓아올린 사상의 토대위에 또 다른 것들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매번 인류가 쌓아왔던 철학적인 토대를 허물고 또 다른 토대를 세우고, 허물고 또 다른 토대를 세우는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파괴를 통한 새로운 건설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커다란 지적인 도전이 되고 끊임없는 발전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을 공부해 나갈 때 이전에 있었던 사상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철학사적인 교류가 있어야만 우리들이 실제로 우리 삶을 위한 어떤 사상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단절된 가운데에 하게 되면 항상 그것은 어떤 한계를 지니게 되고, 한 시대에서는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 사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철학과 사상가의 각광을 받는 시기라는 것이 탁월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철학을 포괄하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궁금해 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인간은 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 무엇을 가치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진실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전도가 되지 않는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면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논리의 구조들이 교회에서나 통하는 언어이지 불신자들과는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는 철저히 단절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섰을 때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느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일 경우에는 초라한 자신을 느끼면서 지식에 대해서 반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독단 속에 아집을 갖게 되어서 결국은 선교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미학적 신학에 대한, 주제들에 대한 많은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미학이라는 것은 17세기 말에 시작이 됩니다. 사조적으로 데카르트에 의해서, 데카르트와 칸트로 이어지는 시대에, 특히 데카르트에 의해서 인간 사유의 중심이 사람에게 있다는 근본적인 전환이 도입된 다음부터 이성주의에 의해서 아주 엄격하게 이루어집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이나 방법서설 같은 책을 보면 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실 이것은 그 전에 있었던 이미 르네상스시대에 있었던 모든 사상의 대 전환들을 모두 정리한 것이고, 더듬어 올라가면 실재론을 중심으로 한 서양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12세기, 13세기의 변화의 족적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이성을 신뢰하면서 추구해 갔는데 그러면서 사람들이 싫증이 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명증하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이성이 그렇게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가 된다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수만은 감정과 느낌에 의해 우리의 삶이 결정되는 경향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렇게 해야 돼’라는 의무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하기가 싫고, 학생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 놀러가고 싶고, 친구와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친구한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합니다. “야 우리 오늘 영화 보러 갈래? 그러면 좋아” 합니다. 그러면 감정을 따르는 것입니까 이성을 따르는 것입니까? 그건 또 뭐냐 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이렇게 일어나는 감정과 느낌들은 정말 쓸데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근대 미학이 태동을 합니다. 원래 미학은 철학보다 하등한 학문입니다. 철학은 보이는 모든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그 위에 보이지 않으면서 이 사물들을 움직이는 원리들을 찾아감으로써 초월적인 실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도움을 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가,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미학이 착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미학의 출발을 보면 하나님이 정말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미학의 맨 처음 시작이 예쁜 옷이나 예쁜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양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함, 숭고함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는 인간이 도대체 숭고함, 장엄함에 대한 가슴 뛰는 느낌의 근거와 정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미학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기얌바티스타 비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조셉 에디슨 등, 이 사람은 전기를 만든 그 에디슨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있었던 질서, 조화, 균형, 규칙, 이런 것들을 아주 중시하던 데카르트 이후의 이런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18세기 낭만주의운동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낭만주의가 무엇입니까 프랑스어의 로망을 옮긴 말입니다. 거기에서 로맨스가 나오지 않습니까? 사랑의 감정입니다. 낭만주의 작품들을 보면 사람들에게 엄격한 규범 같은 것들이 아니라 커다란 충격을 주는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문학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떤 관점을 가지고 각각 강조점이 변하면서 문학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러시아문학을 예로 들면 고글리에의 경우는 검사의 입장에서 어떤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하면 톨스토이에 와서는 판사의 입장에서 기술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피고석에 앉은 관점에서 어떤 인간의 사태들을 기술을 합니다. 안톤체어프의 경우에는 방청석에 앉아서 보는 느낌으로 어떤 사태를 기술합니다. 그것은 각각 서로를 배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입장에서 그것을 이야기하느냐 이것이 어떤 동일한 인간의 실존과 사태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제시해 주고 이런 관점들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인생의 사태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가 입체적이고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랑 없음이 신앙적으로 설명하면 은혜를 받지 못함이지만 대부분 보면 자기가 사물을 보는 그 틀 안에 갖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해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수많은 편견을 내면서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젊은 날에 독서와 사색 없이 보내는 것은 미래의 짐승적인 삶을 예약 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참 맛깔스럽지요? 젊은 시절에 독서와 사색, 신앙적인 헌신이 없는 삶은 미래에 짐승적인 삶을 예약 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과 남북아프리카에 전개된 문화사조입니다. 고전주의에서 경시되는 고전주의에서는 인간의 감정들을 무시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의 현상들 속에서 인간이 마땅히 도달해야할 당위성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현재적이고 진실한 모습 속에서 참답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했던 그런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미학적인 신학은 1722년 그가 뉴욕에 있을 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과 관련이 됩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말을 가끔 타면서 건강을 관리했는데 숲 속에서 주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그때의 성경구절이 디모데전서 1장 17절입니다. 이 깊은 체험을 하면서 온 땅과 하늘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임재를 체험하고 엎드려서 한 없이 웁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미학적인 단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달콤함, 탁월함, 아름다움, 알맞음, 감각, 조화, 사랑스러움, 균형, 규칙, 관계, 어울림, 일치, 사랑 이 모든 단어의 공통점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시면서도 인간과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찬란하게 드러내시는 광경들을 통해서 거룩함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책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미학적인 표현들, 이런 것들은 그의 신학의 미학적인 성격과 우주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결국 인간의 가장 큰 의무를 조나단 에드워즈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전도와 선교에 대해 말하기를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웃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방식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보여 줄때 그가 자기가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2년 전에 현재 살아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현재 살아있는 최대 연구가인 조지 마스턴교수를 미시건에서 만났습니다. 굉장히 할아버지이고 다 은퇴하셨습니다. 다행히 시간을 내주셔서 강변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계속 질문하는 입장이었고, 이 할아버지는 답변을 하는 입장이었는데 마지막에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에 미국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은 피상성이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들을 공부해서 이것을 목회사역의 모델로 삼아야한다”. 그래서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의 판단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미학적인 신학에 대한 커다란 이해를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물질 속에서는 자연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이 녹아 있는데 이것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똑같은 삼겹살이라도 꽉 막힌 지하실에서 구워 먹을 때와 강변에서 나무그늘 아래서 구워 먹을 때 맛이 다를까? 똑같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갑갑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피곤할 때 이야기 하는 것과 바닷가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할 때의 느낌이 다를까? 결국은 자연적 아름다움이 인간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미학적 감흥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중생과 회심의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변화를 도입해 주시는데 존재적 변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식론적인 전환인데 거듭나지 않았을 때는 파악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령한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정말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기에는 재미없지 않습니까? 이 젊은 나이에.. 여러분들 10시 쯤 왔지 않습니까? 이게 하루 종일 뭐하는 것입니까? 도시락하나 줬다고는 하지만 요새 밥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먹고 이 갑갑한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때로는 혼나기도 하면서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언뜻언뜻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모임, 섬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기도, 성찬 심지어 우리들이 나누는 교제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어서 그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정말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온 천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엑기스처럼 뭉쳐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속에 관한 역사 속에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불꽃과 같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불꽃의 절정의 스파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에드워즈는 사물의 존재의 본질을 성향이론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에드워즈가 이런 성향의 이론을 가지고 과연 존재를 설명했느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향의 에드워즈가 사물의 본질을 성향이론으로 설명을 했다는 증거를 찾기 쉽지는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설명할 때 그의 속성의 이론을 가지고, 그 속성을 근거로 해서 세계화의 관계를 추적했다는 점에서는 이런 이론으로 말을 했다고 충분히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조나단 에드워즈 학자가운데 이상현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1950년대에 아주 탁월한 우등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했고 프린스턴 신학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을 했고, 이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들, 여러 가지 책들을 했고,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한은 박사학위 논문인데, 어떤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50년 내로 가장 탁월한 논문이었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많은 비판을 소장 학자들이 가하고 있기는 합니다. 학문의 세계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이분은 그의 성향이론을 설명을 하면서 이것이 희랍의 철학에서 말하는 헥시스, 라틴어로는 하비투스라고 하는데, 헥시스는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서 형성된 어떤 경향성입니다. 이런 헥시스 또는 하비투스가 어떤 존재 속에 형성되게 되면 그 성향을 따라서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인간도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도 그런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에게로 부터 부여받거나 습득된 성향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스스로 기쁨으로 가지고 계시는 성향이고, 이 성향 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이 무엇에 의해서도, 성향자체에 의해서도 필연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선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성향 이론에 대한 적용의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설명할 때와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을 설명할 때 각각 다른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이상현 교수는 아주 혁신적인 설명이라고 하는데 알고 보면 기독교 전통 안에 있었던 내용을 이미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내적인 역동성, 즉, 삼위일체와 외적인 역동성 즉 그 삼위일체의 바깥으로 외재적인 삼위일체의 행동이 창조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신학의 초보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헷갈리는 것은 존재, 본질, 실존입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영이신데 그 영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레벨의 성격의 영도 아니고, 마귀나 귀신 혹은 영들의 실체와 관련된 그런 방식의 영도 아니십니다.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존재의 다른 방식으로서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가 본질이고 본질이 실존입니다. 지금 현재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실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셋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형성되어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과정 철학자도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항상 현실태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경우는 존재는 본질과 다르고 본질은 실존과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김남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지만 여러분과 같이 젊었던 시절이 있고 더 어렸던 시절이 있고, 더 어렸던 시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더 늙어서 지팡이 짚고 올라와서 겨우 이야기를 해야 하는 때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죽을 모르지만……. 그러나 죽는 그 순간 까지 그 모양이 이때의 모습을 보고는 70년 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이라고 하는 정체성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마도 본질 일 것 아닙니까? 도대체 본질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그것을 기억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억이 싹 지워져서 망각증에 걸려서 오늘 이전에 있던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하면 나 김남준이 아닌 또 다른 사람으로 불리 워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외모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간단합니다.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하나의 영혼이고 그 하나의 영혼은 고유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의 본질, 실존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우리를 혼란시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철학책을 보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 개념 하나 하나가 국어사전에서 통일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이야기 하는 바가 다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에서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에 속한, 관념 속에 속한 것으로 넘어가는 것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에드먼드 후설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초월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현재 경험하는 이 세계의 많은 사실들, 이것들 을 객관화할 수 있는 상위의 관념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초월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을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있는 초월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책들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지식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 밖에는 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까도 우리 형제가 라흐라미노프를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되게 부러웠습니다. ‘나는 왜 저런 것을 못할까?’ 왜냐하면 라흐라미노프 같은 사람을 모르는 사람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듣는 사람은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라흐라미노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주하는 사람들의 고백 들어보면 밖에서 국외자로 연주를 들을 때와 자신이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몰입해서 피아노를 연주를 할 때는 밖에 있는 사람은 수백 번을 깨어나도 그 감동을 이해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까 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수많은 작용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해 체험을 가지고 사는 것과 체험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한 것이 우리의 지식의 활동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섭취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것이 그른지 옳은지 성경의 진리로 판단할 수 있는 은혜까지 주셨는데 우리들이 나태하게 산다는 것은 넌센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책을 읽어도 10년만 그런 삶을 살면 동료들이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지성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최악의 발명품이 스마트폰입니다. 학자들에 의해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메모를 하는 사람들은 기억력이 알고 기억력이 스스로 능력을 뚝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메모를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인데 머리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저장능력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모에 의존해서 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존재, 본질, 이런 것들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적인 삶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중생과 회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독력적 사역이어서 인간이 여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데 회심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논리적으로 회심이 불가능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이 협력함으로서 회심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회심을 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책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하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회심과 함께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에 대한 감격과 은혜, 그 영광, 그 사랑, 그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무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무감 하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이 의식 하나만 가지고 일생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순종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예입니까? 우리가 종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끌려온 노예냐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렇게 살 수 있지만 일평생을 그렇게 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종이라고 한 것은 그런 것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종이 되고, 스스로 노예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의무를 달콤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바가 있고, 그것을 자신이 행할 때 기쁨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짜식 능력도 없으면서 까다롭기는, 그냥 집어치워?”그러면 이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능력이나 있으면서 그러면 몰라. 지금도 그냥 안 버리고 간신히 만나주는 것도 내가 큰 인심을 쓰는 것인데 요구사항이 많아? 얼굴이 잘 생겼어? 능력이 있어? 몸만 건강해가지고…….”이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이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의무가 아주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나에게 명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내 마음에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시간에 17년 만에 죽은 전투경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사랑하니까, 17년 동안 있으면서 가정이 얼마나 피폐해졌겠습니까? 한 사람을 24시간 동안 돌봐야 하는데, 그런데 “네가 이렇게 식물인간으로 있으면서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아빠 옆에 있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라고 말을 합니다. 사랑이 그 의무를 달콤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십니다.
구원과 인간의 영혼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에드워즈가 이런 설명을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경향성이 변화입니다. 자아를 사랑함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가운데 마틴 부버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마틴 부버는 오늘날에 각광을 받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통하는 사상이 아주 많습니다. 저는 레비나스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 없는 어거스틴 주의자,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어거스틴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마틴 부버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된다.” 멋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자가 있어서 그 사람 앞에,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보면 자기가 이렇게 준비가 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결혼을 하고 나서 깨닫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고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입만 까닥거리면 됩니다. 입술만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인간을 결핍으로 가득 찬 존재로 보고, 인간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면서 유익을 얻는 것은 내 사랑을 받는 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러한 신학적인 결론의 희미한 그림자입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영혼의 기능에 구원이라는 것은 회심을 하면서 마음은 기능의 행동을 산출하는 공장입니다. 머릿속에 A라는 생각이, 마음에 B라는 생각이 있으면 A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B대로 움직입니다. 지성은 지혜, 미에 대한 감각, 미에 대한 감각은 오성이 담당하는 몫입니다. 오성(이해한다)은 것은 지혜, 미에 대한 감각의 모든 이해를 다 가르칩니다. 오성이라는 것이 플라톤이나 기독교 철학에서 말하는 오성과 칸트 이후에 이야기하는 오성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지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심취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며 매달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의지입니다. 선택한 것들을 행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의지가 선한 것들을 선택하고 행동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 다음에 신앙 정동론인데 신앙 정동론에 대한 책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을 했는데, 여기에서 조금 더 보태자면 에드워즈의 인간 마음의 정동이론에 대해서 18세기 옥스 브리지의 도덕심미주의의 연관관계라든지 경험주의와의 맥락은 이미 지난 시간에 설명을 다 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신앙 감동론이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으면 명쾌하게 들어오지 않고 논리적으로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랄프 커드워스나 샤프츠베리, 이런 사람들을 읽고 도덕 심미주의의 이해를 갖는데, 존로크 이 사람들에 의해서 경험주의가 도입이 되고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존 로크는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계몽철학과 이성주의로 나가는 길을 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 말 가운데 유명한 것이 “따블라 라사”라는 용어입니다. 백색 석판의 상태다. 인간은 선험적인 것이 없고 모두 학습에 의해서 경험된 것이다. 나중에 비판을 받습니다. 에드워즈의 신앙 정동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 철학, 로크의 인간 오성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18세기 도덕 심미주의자들에 대한 이해를 모두 종합해 볼 때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 혹은 정동론이라는 것은 성경과 개혁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위에 로크의 오성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미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18세기 도덕심미주의자들의 이런 주장들. 그런데 에드워즈는 워낙에 탁월한 사상가였기 때문에 누구의 것을 그대로 갖다 쓰는 법이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유익이 되는 어떤 것들을 도구로 선택해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에클레티즘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절충적인 방식으로 이해를 해서 에드워즈의 신앙 정동론이 성립이 되었다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가 뉴턴주의인데 뉴턴주의는 맨 처음에는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이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와서 인문주의자인 레뻬브르 데타플, 칼빈에게 사사했던 인물이고 16세기에 람베르트 다네우, 17세기의 홀베르따, 드레이 및 레이 레기우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구분이 편만해지기 시작했고 데카르트가 철학의 원리에서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뉴턴은 명확하게 구분해서 자연철학과 수학의 원리라는 쁘린끼삐아라는 원리를 만들어 냅니다. 아이작 뉴턴을 먼저 보겠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만 사랑을 했습니다. 학문이 애인이었고 부인이었습니다. 미적분을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발명을 했다고 하는데 라이프니찌가 먼저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것 내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것이 아니라 거의 같은 시기에 따로따로 연구하였는데 거의 동일하게 발견하였고, 이 사람은 쌓아 놓았고 라이프니찌는 발표를 하는 바람에 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간 것입니다. 미적분학의 발견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현대의 위상수학이나 제타 function이라든지 많은 현대수학의 화려한 발전들이 기본적으로 미적분을 기초로 변형을 해서 수많은 수학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빛의 입자설 주장을 하고 그리고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천년의 역사에서 세계를 움직인 열권의 책안에 드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아이작 뉴턴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입니다. 사과나무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뉴턴의 사과나무입니다. 캠브리지에 있습니다. 이 나무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수백 년이나 되었는데 이만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 뒤편에 이 사람의 기숙사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는 분명한데 뉴턴의 그 나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300년이나 되었는데 저만 할리가 있겠습니까?
데카르트와 뉴턴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관심은 인식의 주체인 인간입니다. 예전에는 인식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한 분입니다. 강강술래비유가 가장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술래로 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다 강강술래를 돕니다. 하나님이 주체이고 나머지는 모두다 패러다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강강술래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인간이 “여기는 하나님이 열 번째 돌아가고 있네? 이것은 자연사물이구나?”이렇게 판단하게 됩니다. 각각의 위치와 성격,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되고 규정되는 것입니다. 설명하는 방식이 인과관계입니다. 모든 것들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봅니다. 이것이 나중에 현대 철학에 와서는 환원주의(Reductionism)으로 발전이 됩니다. 환원주의는 무엇이냐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환원해서 그것을 사물간의 과학적 사실로 설명할 수 있고, 그것을 더 들어가면 분자식으로, 화학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환원주의적인 설명이 도파민입니다. 도파민이 사랑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의 리미트가 18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개 18개월을 사귀면 사람들이 헤어지는 것입니다. 도파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권태기가 2년, 3년 이면 찾아오는 것은 도파민이 종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 것이 나 때문인가? 나의 몸의 기능이 좋지 않아서 도파민이 조금씩 나오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그런 것들을 연구하면서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속박논리입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면 인간은 참 건조한 존재가 되고 도덕이고 무엇이고 아주 우스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제 동아일보 신문에 1면 특집으로 『2030의 신新연애』라는 특집이 실렸습니다. 꽤 많은 분량인 세 쪽 정도 실렸습니다. 오늘 집에 가서 꼭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읽을 때 동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냉철한 시각에서 과연 이런 풍조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인가? 아주 유익합니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다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있습니다. 자연에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일어나는 수학으로 운동, 정지, 충돌, 변화 등 모든 것들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람의 프린기피아의 논지입니다. 예를 들면 천둥이 칠 때 신이 노했나보다 하며 다 엎드리던 사람이 +, -가 충돌했나 보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몽주의, 이것은 과학주의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신론과 무신론으로 발전하며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제가 데카르트, 칸트, 에드워즈, 이 세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인과관계에 관심을 가졌다면 칸트는 수학적 법칙을 이야기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모든 것들을 인정했습니다. 당대의 뉴턴주의의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꿀 정도의 어마어마한 혁신적인 사고이었습니다. 인식론 중심의 법칙 중심이었습니다. 저쪽의 관심은 법칙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칸트는 만물간의 힘, 그리고 에드워즈는 힘이 하나님의 영향력, 이게 폐쇄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방적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원인과 법칙의 고리 속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절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가 유익을 얻었던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문제입니다. 칼빈대학의 철학교수 쿠퍼 교수는 그의 책 『만유내재신론: 철학자들의 또 다른 하나님』,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플라톤에서부터 현재 철학자들까지의 부제를 가지고 씁니다. 책 이 책이 그 책의 표제입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즈가 고전적 유신론에서 볼 수 있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결핍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초월한 하나님이 실체이고 인간은 영원히 개별적인 실전을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에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는 벗어나지만 피조물을 하나님의 사유의 연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전체는 하나님에 속하며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구절을 토대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접해 있는 판엔데이즘으로 봐야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맨 앞에 보면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도표를 보면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고, 유신론은 범신론, 만유내재신론, 초월신론으로 나뉩니다. 범신론은 모든 세계의 신의 본질과 자연의 본질이 현상에 있어서는 신과 자연이 구별 되지만 모든 것이 환원되어 본질로 돌아가면 신과 일체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물이 얼면 얼음이 삐죽삐죽하지만 녹으면 모두다 하나의 물이 되듯이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유내재신론 신은 피조물과 구분되기는 하지만 모든 만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신은 없고 하늘에만 있을 뿐이다’라는 초월신론입니다. 이 모두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에드워즈의 신론 변증에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신론을 변증한 것은 소극적으로는 뉴턴주의가 들어오면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사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던 모든 것은 결국은 과학에서 일어나는 것에 속임수적인 해석에 우리가 기만되었다”고 깨달으면서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잠재울 목적이 소극적으로 있었다면, 적극적으로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없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이 세계에도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균형 있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문맥이 초월성을 너무 강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적극적으로 내재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데서 이런 오해가 빚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론을 도표로 설명하자면 이런 것 입니다. 에드워즈의 신론은 기본적으로 성경과 개혁신학에서 보고, 유대주의의 까발리즘의 형식을 빌린 까발라의 형식을 빌리고, 뉴턴에 대한 해석, 기타의 자료를 사용해서 신이 없다고 하는 계몽주의적인 이신론에 대한 공격을 하는 것이 에드워즈의 신론 변증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단지 교회 안에 있는 신학자들만 대상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적인 철학자들과도 싸웠기 때문에 이런 적극적인 설명을 강조하다보니 이런 오해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신론 해석은 그의 당시의 사상적인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에드워즈를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에드워즈가 범신론자이라는 주장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을 합니다.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는데 부정하고, 특별히 에드워즈가 쓴 개인 적인 편지에서 이미 그런 비난을 받을 때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편지를 보면 에드워즈의 소상한 입장이 나옵니다. 물론 에드워즈에게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에마네이션 리마네이션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용어인데 오해의 여지를 남긴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 내재성만을 강조하면 범신론, 만유내재신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시안더라는 칼빈시대의 이단이 있는데 이 사람은 칭의를 예수그리스도가 자기의 본질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집어넣어 주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나의 본질이나 그리스도의 본질이나 일치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누어 가진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루터파의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extra calvinisticum)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주에 편만하다. 우주에 편만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떡에도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공재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신론입니다. 소키누스와 보르티우스, 제세레파 볼퇴르, 본회퍼,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오류라고 보는 것입니다. 개혁파 전통주의 가운데 하이데거루스라는 17세기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위스 쮜리히에서 사역을 하는데 아주 유명한 교회신학자입니다. 그리고 프란체스 튜레틴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하늘에 계시고 다만 물리적인 매개적 원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디서 일하시는 마치 왕이 자신은 왕궁에 거하고 방백을 통해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모든 주장들은 가증한 것이라고 결론을 냅니다.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오해들은 마지막 도표 사물의 실존 양식을 보겠습니다. 사물의 실존 양식을 보면 한정적인 존재, 제한적인 존재, 충만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모두스 이그재스틴디 하나님은 실존이라는 것이 따로 없으시는 분이지만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실존이라는 것을 갖기 때문에 실존의 양식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돌, 나무 인간의 육체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영혼, 마귀, 귀신들은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설명했습니다. 나의 영혼을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는 없지만 내 밖에 튀어 나와 있거나,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가거나 출장가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은 존재 양식자체가 두 카테고리의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기 그것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셀무스의 고백대로 무한차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두 존재 양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에드워즈의 사상을 보면서 목회자로서의 마지막 적용을 발견한 것이 이 네 개입니다. 성경이 중심이고 부흥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부흥을 기대합니다. 그것을 가운데 놓고 네 개로 나눕니다. 회심의 중요성,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회심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 설교사역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신앙교육입니다. 설교사역을 통해 회심한 사람이 그 회심을 계속 보존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앙을 교육시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을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면서 이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사역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몸부림치다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티끌만큼이라도 이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사는 존재요, 보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살 능력이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고, 빌려보는 것도 귀찮으면 테잎이라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이것들을 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제가 깊이 목회에 있어서 배운 것이 도표로 나옵니다. 네 가지입니다. 회심 목회의 중요성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실로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 이것은 뜸물통에 생수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새로운 그 무엇이 산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고 뭐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거듭나지 못한 사람,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구원받았는가를 집요하게 묻고 그가 정말 거듭나서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는가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부패하기 쉬운 음식처럼 변질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사람을 은혜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개인 적인 경건생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가르치는 신앙교육이 아주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7년, 14년, 21년간 듣는 설교의 목록을 만들고, 읽어야할 책의 목록을 만들고, 클래스를 만들고 계속해서 공부를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데에서 오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사역의 중요성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때 이 마음에 거룩한 정동이 일어나서 열렬히 신앙교육도 참여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는 있지만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어야 하고, 이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에 하나님의 부흥이 부어질 때 그때에 폭발적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지성의 이해 없이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욱이 성화생활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 진리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영혼의 변화로 이끌지 않지만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변화될 수는 없다.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정동시키시는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우리에게 있도록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와 탄원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개가 합치될 때 드디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인식하는 것과 정동이 합치될 때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지성의 힘과 의지의 능력이 함께 작용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다면 에드워즈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나라의 건설이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