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행복론의 역사와 조나단 에드워즈
녹취자: 백지영
시간이 없어서 그냥 서론 빼고 바로바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떠오르는 것은 크리스챤 히드니즘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해피니스, 행복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행복론의 역사는 세속철학에서의 행복론의 역사와 잘 분리되지 않고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서구 고대 철학사 속에 나타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헬라 그리스철학에서는 이 행복론이 목적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잘 사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잘 살 수 있겠느냐 그런 것들을 이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규명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래서 ‘잘 산다’라는 판단이 서려면 삶이 어떤 자기 위에 있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에 의해서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삶',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러한 각도에서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보았고, 그 다음에 '이성(理性)을 실현하는 덕스러운 삶'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이 다섯 가지 지성적 덕입니다. ‘에피스테네’, 이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누스’, 이것은 직관적인 지성입니다. ‘소피아’ 철학적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지식을 실제로 삶에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적응시키는 힘, 그런 철학적 지혜가 있어야 하고, 기술지 ‘테크네’인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그렇게 안 것을 행동할 수 있는, 그러한 기술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프로네시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 몸에 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눅6:45上))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똑같이 뭐냐 하면, 매순간 이성적으로 다 논리를 따지면서 내가 지금 떨어진 휴지를 주울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결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몸에 배어있는 것, 이것을 ‘프로네시스’라고 부릅니다. 이게 성경에도 ‘프로네마’라고 나오는데, 결국 이렇게 죽 몸에 배어있는 그러한 실천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덕스러운 삶의 부수적인 요건으로 육체적인 선, 외부적인 선의 필요성도 제시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들고 그 다음에 괴롭힘을 당하고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 무지하고 그러면 행복할 수 없다 아예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음 스토아철학에서는 신과 유물론을 일원론적으로 보고,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뭔가 끊임없이 불안정하고 출렁거리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끊임없이 출렁거리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마음이 묶여버리게 되면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추구한 게 뭐냐 하면 ‘아파데이아’입니다. ‘아파데이아’는 뭐냐 하면, ‘파데’가 겪음입니다. ‘파데’라고 하는 것이 영어로 passion 패션입니다. 겪음인데, ‘아’가 붙어서 겪지 않음입니다. 비피동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비이성적 정염(情炎)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이상은 인간의 마음이 돌덩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바위가 비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고 변함이 없듯이 그런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운명을 인식하고 그것에 일치되게 살아가는 영적, 도덕적 현자(賢者)의 삶입니다. 키케로 같은 사람의 책에, 특히 ‘선과 악의 마지막 궁극적 목적’이라는 그런 책 속에서 나오는데, 운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명백하게 이야기 안 합니다. 그것을 갖다가 ‘휴먼 네이처’(human nature)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리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넘어가겠습니다.
플로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입니다. 플라톤주의를 재해석해 내서 그 시대에 맞게 만들고, 이 사람하고 같이 암모니아 사카스 밑에서 공부하던 기독교 인물이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암모니아 사카스 밑에서 공부를 하고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신플라톤주의를 사용하고, 이 사람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플라톤을 재해석해 냅니다.
그런데 이 플라톤을 어떻게 재해석해 냈느냐면, 에드워즈도 사실은 플라톤 철학에 너무 많이 물들었다고 비난을 많이 받는데 사실 에드워즈의 용어 사용이 ‘에마네이션’과 ‘레마네이션’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게 플라톤 철학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너무 꼭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만 가지고 에드워즈를 플라톤의 사상에 오염됐다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기본적으로 크리스챤들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에마네이션’과 ‘레마네이션’이라는 이런 표현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용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용어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이 신플라톤주의는 그러면 이것은 플라톤주의와 뭐가 대조가 되기에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플라톤주의는 가지계(可知界)라고 하는데 정신세계, 신에 속한 세계가 있고, 그 다음에 가시계(可視界)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개가 구분된다고 하는 것은 잘 설명을 했는데,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아주 탁월하고 선한 일자(一者)로부터 이 세상이 나오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이 연결성을 잘 설명을 못한 채 플라톤은 자기 철학을 마감을 했습니다. 그때 이 플로티누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일자(一者), 토온인데, 일자가 있는데 일자의 넘쳐나는 신성으로 세계가 창조되었는데 그게 이제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일자가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정신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세계혼이 나오고, 그 다음에 사물이 나온다 이렇게 층차를 만들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이원적인 플라톤의 세계관이 일원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플로티누스가 해결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의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로마에서 밀라노로 갔을 때, 그때 엄청나게 출세해서 갔을 때 거기서 두 가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암브로시우스라는 주교와의 만남이고, 하나는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까지 있었던 모든 기독교사상들이 다 모여서 그것을 다 정리해서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용해서 기독교를 정리를 해서 내보내는 수문의 역할을 한 사람이 어거스틴인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성경 읽을 시간도 없으니까 없겠지만 이 사람이 쓴 ‘엔네아데스’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시면 이게 조직신학책 같아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굉장히 신비주의적으로 보았습니다. 신비주의자입니다. 영혼이 일자와의 합일을 통해 신성에 동화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그러니까 신과 하나 되는 영혼의 내적인 본성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 다음 기독교사상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기독교에서 행복을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리차드 멀러 교수님이 자기의 신학 사전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습니다. “인간존재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온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확실한 인식 안에서 올바로 질서 지어진 삶을 살 때만 참된 행복이 가능하다.” 이게 기독교의 기본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면, 초대교회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행복론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행복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이룹니다. 그런데 강조점이 시대마다 좀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교부시대를 보면 ‘데하티픽 엔조인먼트’입니다. 그래서 ‘지복적(至福的) 즐거움’입니다. 지복(至福)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인데 ‘비지오 데하티피카’라고 부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비지오’는 보는 것이고 ‘데하티피카’는 지복입니다. 그래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합니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그래서 상당히 직관적이고 지성주의적인 행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복직관의 행복개념이 에드워즈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목하셔야 됩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는, 당연히 이런 전통이 중세까지 계속 내려오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는 당연히 이 중세시대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반발과 함께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러한 지성 중심적인 논의를 단절하고 복음적인 행복으로 단순화합니다. 루터도 마찬가지고 칼빈도 마찬가지고 사변적인 것을 일부러 많이 끊어버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 시대의 맥락에서는. 그러다가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 시대, 개혁파정통주의 시대를 1720년까지 보는데, 그러니까 칼빈 사후 16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1720년 정도까지 보는데, 그 후에는 이성주의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시대 때는 종교개혁 시대 같이 단순하지는 않은데 이것을 경건의 행복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경건 안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행복에 관한 논의를 굉장히 주관적이고 단순하게 만든 그런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 고대 교부들은 필멸할 인간의 비참,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데서 행복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과 또 하나님 앞에 있는 데에 행복이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종말론적입니다. 내세적이라 이것입니다.
중세교부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철학이 유입되게 됩니다. 1245년에만 그런 게 아니라 완전히 해제되어서 제한 없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권에서는 별로 안 읽혀졌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너무 어려웠습니다. 책이. 그리고 책이 쓰인 게 파피루스에 많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보존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리우스 같은 이런 이단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푹 빠지면서 이단들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플라톤에 의해서 기독교세계가 전부 뒤덮이게 됩니다. 나중에 이슬람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발견하고, 그 가치를 발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소위 이야기하는 네스토리우스파들, 아리우스를 추종하던 사람, 네스토리우스파 이런 사람들이 도망을 가면서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가고, 그런 자료들의 가치를 이슬람 세력들이 인식을 하면서 그것들이 번역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이 엄청난 속도로 유럽을 지배하면서 로마가 900년 동안 이루었던 업적들을 한 80년 만에 이루어내게 됩니다. 두 배 이상으로. 그래서 엄청난 세력을 만드는데, 거기서 그것들을 번역을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슬람 사회가 훨씬 더 발전하게 되는데, 기독교사회에서는 대학의 기원을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12세기입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같은 데가. 그런데 이슬람 사회에서 아랍권에서는 9세기 중반에 대학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종합병원이 생기기 시작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은 이미 벌써 다 버리고 아비첸나의 의학정전 같은 것들이 기본 교과서로 등장하게 되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내고, 이 사실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는 순서로 말하자면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래서 중세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래된 다음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보면 이렇게 손을 위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플라톤이고, 그 사람 손에는 티마이오스(Timaeus)라고 하는 책이 들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이렇게 아랫것들을 가리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 사람 손에는 니코마코스의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이 들려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플라톤은) “모든 것은 저 이데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보다도 더 먼저 출발해야 될 것은 이 현실세계입니다.”(라는 것이니,) 그러면서 티마이오스는 세계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책이고, 니코마코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 두 사람의 관심사가 굉장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든지 아니면 플라톤주의자든지 둘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둘 사이의 컨플릭트(conflict)를 많이 강조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플라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카데미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속 머물며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느 날 수업에 안 나오니까 플라톤이 이야기하기를 ‘교실이 텅 비었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으니 교실이 텅 비었구나.’ 할 정도였고, 그 다음에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미천한 사람들이 그분을 칭송하는 것조차도 그분에게는 불명예다..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이가 들면서 근본적으로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서로 유명론과 실제론자처럼 그렇게 갈라진 사이였느냐 아니냐에 여러 가지 의논이 있는데, 철학계의 대체적인 통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들어오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에 관심에 많습니까? 아버지가 의사였습니다. 매일 동물 내장 만지고 이렇게 자연을 보면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책을 쓸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중세 고대까지는 피안(彼岸), 내세(來世)의 세계에 대한 행복이 관심이 많았는데, 이것은 이제 현실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 결과물로 나온 중요한 역사적인 신학 저작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숨마 데올로기아’(Summa Theologiae), 신학대전입니다. 60권 이상으로 쓰였는데, 그중에 30권이 윤리학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면, ‘화란 무엇인가?’, ‘울화는 왜 치미는가?’, ‘울화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왔고 그것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해서 해 놓았으니까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일반 철학사에서도 한번 읽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금자탑을 만든 것입니다. 철학 역사에 있어서도.
그 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경우에는 이 사람은 그야말로 진짜 행복을 찾았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근본적으로 현대 철학에서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뭐냐 하면, 여태까지 우리가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믿어왔는데 진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피하려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행복한 상태를 찾아가는 것이겠지만, 어거스틴의 이 행복에 대한 관심사는 사실은 회심하자마자, 그러니까 회심하게 된 것도 행복에 대한 거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밀라노에서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문화공보부 장관 정도의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밀라노에 황제가 와 있었습니다. 거기 홍보 처장쯤 됐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술을 먹고 해롱대는 거지가 너무 행복해 보이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가 나보다 행복해 보였다. 나의 이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고통스러워하는데, 나중에 회심을 하고나서 이것을 정리를 합니다. 그때 쓴 게 ‘베아따 비따’(De Beata Vita), ‘행복한 삶’이라는 책입니다. 초기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뭐냐 하면, “사라질 것들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진리를 소유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변하지 말고, 영원히 있는 것이고, 또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어야 된다. 그런데 그것이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크게 두 가지 질서인데, 인식의 질서와 사랑의 질서입니다. 존재의 질서가 있으니까, 그 존재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하찮은가 하는 것을 봐서 가장 많이 있는 것은 많이 사랑하고 별로 없는 것은 거의 사랑하지 말아야지만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는 것이 없이는 결코 의지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의지적으로 결단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행복은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아퀴나스는 넘어가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행복론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화두가 인간의 죄와 타락,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이것이었고, 그래서 구원론적이고 기독론적인 행복론을 추구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복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나는 확실히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리스도는 순전한 의, 생명, 영원한 복됨이시고, 죽음을 지배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안식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육신을 배제한 영혼만의 행복과 쉼이 아니라, 종말의 그 날을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서 깊고도 영원한 잠을 누리는 시간, 이것을 종말론적인 안식으로 표현한다고 알트하우스가 정리를 했습니다.
그 다음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복적(至福的) 행복의 그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의 큰 공로는 뭐냐 하면 학문과 기회의 영역 안에서 인간의 존엄의 개념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때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같은 경우 인간이 왜 그렇게 존엄한 존재이냐에 대해 어떻게 답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상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발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도 여전히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연적인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철학적인 토대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존 칼빈은 중세에 대한 반발, 특히 소르본느 학파를 통해 발전되어 왔던 중세의 이 철학적 전통에 대한 강한 반발감이 있었고, 어떤 때는 그것이 도가 넘는 적개심으로 발동을 해서 그런지 지복직관(至福直觀)의 행복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 지복직관의 행복에 대해 너무 치우치지 말도록, 다시 말해서 사유와 관념으로 흐르는 행복론에 너무 취하지 말도록 조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중하라. 한계를 잊어버리고 담대하게 솟아 올라감으로써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적합한 정도 이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 욕망에 얼마나 휩싸이게 되는지를 느낀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직관의 전통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일단 절제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소명과 열심, 영적 문제에 대한 진지함을 이야기하는데, 존 칼빈의 행복론은 그렇게 적극적인 행복론 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에드워즈로 넘어가겠습니다. 에드워즈의 행복론은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행복은 에드워즈가 보기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것과 행복을 찾는 것은 결코 나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조나단 에드워즈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동시에 사랑한 사람으로서 저는 에드워즈가 누구냐고 말하면 ‘더 스튜던트 오브 어거스틴’(the student of Augustine)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에드워즈 사상을 기초로, 행복론에 있어도 역시 똑같이 에드워즈의 사상을 기초로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신학을 전개해 갑니다. 그래서 ‘체리티 앤 잇츠 후르츠’(Charity and Its Fruits)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에서 그는 참된 신앙의 본질을 사랑에 있다고 보고, “그것이야말로 모든 정동(情動)들의 원천이다. 그것은 뭐냐 하면 존재일반에 대한 마음의 일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기쁨이 당신의 속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에트리뷰트’(attribute),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들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시고, 그 행복 때문에 사실은 인간과 교통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그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과 탁월하심의 원천이시고, 하나님의 선하심, 사랑, 거룩함에 대한 지식으로서 그 기쁨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스위니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감각, 중생의 본질이 에드워즈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가 사랑과 생명이라는 말을 교차적으로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의 가슴에다 확 심습니다. 이게 중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심겨진 것이 계속 잘 자라도록 이렇게 돌보아주시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더 이상 이 땅에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꽉 차게 된 상태가 글로리피케이션(glorification),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식이 들어오고 이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지식이 무슨 지식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볼 때 사랑의 원인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힘으로서 사랑을 심으시는 것인데, 그런데 그 사랑이 증진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의 증대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가 성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 역사 전개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무지갯빛처럼 보여준 수단이 있는데 그게 구속사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구속사 자체가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아주 아름답게 보여준 전개의 과정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될 때 이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사랑의 어팩션(affect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혜가 필요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은혜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곧 성령이고 성령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은혜를 통해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죄의 속임과 강압으로 불행하게 될 인간을 은혜가 행복으로 돌이키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즐거워하고 그분과 교통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꽤 부자였고 그리고 넉넉한 생활을 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진정한 행복의 핵심이 이 세상의 것들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즐거워하고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성경에 가장 진한 농도로 나타나 있고, 일반 학문들에는 그것이 농도가 낮지만 다 흩어져 있습니다. G. K. 체스터턴이 말한 것처럼 난파선에서 흩어진 보물처럼 일반학문에도 다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김성태 박사님 논문하고 겹칠 것 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에드워즈는 이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행복한데 어떻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이 슈퍼볼 복권이 천만 불짜리가 당첨이 됐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며칠 동안은 잠을 못 잘 것입니다. 미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서는 그것이 영원히 할 수 있을까? 너무 일이 없고 노동을 안 해서 지겨워하면 천국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서는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까?” 이런 질문을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더 씨어리 오브 인크리징 글로리’(the theory of increasing glory), ‘점증하는 영광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설명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둘로 대비가 되는데, 천국은 행복이 증진하는 곳이고 지옥은 불행과 고통이 점증 되는 곳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점증 되느냐 하면 지옥에서는 매 순간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무서우심이 새롭게, 새롭게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겁나지 않으십니까? 별로 공감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되고, 천국에서는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서 새롭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지금은 성경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서 배우는데, 그때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점점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 기쁨이 점점 더 점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의 행복은 결코 고정적이지를 않고 계속 점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한히 점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여줘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모두 보여줬다고 하는 날은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증하는 영광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사실은 조지 마스턴 교수와 토론을 했습니다. 그분과 한 2시간 반 동안 토론을 하는데 그분이 마지막에, 자기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너무 좋아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는 동의를 못 하겠다고 그게 뭐냐면 지옥에서 지옥의 그 점증하는 공포의 이론, 천국 이것은 사실 누구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지옥이 점점 더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서 날마다 매순간 새로운 공포 속으로, 공포가 증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받아 들기가 너무 힘이 든다고, 그래서 그러면 받아들이지 마시라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생각 안 하고, 어쨌든 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충분히 동의가 되고, 그러므로 똑같은 논리로 지옥에 대해서 적용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좀 헤지테이트(hesitate)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천국에서의 진정한 행복은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매 순간 새롭게 알아 가는 데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하나마 누릴 수 있으니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5분 지나서 미안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