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 1
녹취자: 김경애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학장님이 그러셨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강의를 어느 수준에 맞추어서 해야 하는지를 고민을 많이 했고 지금도 사실은 어느 수준에 맞추어서 강의를 해야 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강의안은 2011년도인가 2012년도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미국에 있는 Chicago Trinity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 강의안입니다. 원래 영어로 썼는데 그것을 한국어로 해서 가져왔는데 오늘 와서 보니까 교정도 덜 되었는데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래서 강의안 그대로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강의안은 그냥 강의안대로 놓고 커다란 줄거리는 강의안을 따라가되 저는 저대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8시간에 걸쳐서 다 할 수 있을지 아니면 8시간 보다 훨씬 더 일찍 끝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데까지 해서 못 끝나면 다음에 와서 또 하고 만약에 생각보다 일찍 끝나면 나머지 시간은 다른 내용으로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해드려서 이것과 연관을 이루도록 어쨌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쨌든 예정대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책을 한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무슨 책을 읽으셨습니까? 신앙과 정서를 읽으셨습니까? 자유론을 읽으셨습니까? 그러면 Freedom of Will 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습니까? 원서로 읽으셨습니까? 제 1권입니까?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러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다른 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어떤 책을 읽으셨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를 읽으셨습니까? 훌륭한 책입니다. 어떤 것을 읽으셨습니까? 대답하기 싫으십니까? 좋습니다. 다른 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데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이고 그 다음에 그분의 생애까지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면 시간이 한없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집에 가셔서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위키피디아에 들어가셔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치시고 그리고 한번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인지 쭉 읽으시면 2, 3 페이지로 정리되어있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 비블리아로 들어가면 아마 한 30분을 읽으면 이 사람이 대충 어떤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피상적인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읽고 오시면 그래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심시간에도 아이폰이나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오시면 그것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인지 왜 이 사람이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하는 것을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의 강의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1706년에 태어나서 50대 중반까지 살았고 마지막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예전에는 뉴저지 신학교였는데 총장으로서 이제 섬기다가 일생을 마감하게 되고 비교적 아까우리만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오늘날 각광을 받고 300년이 넘는 세월의 이전 사람인데 왜 오늘날 이렇게 사람들에게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나라를 많이 다니는데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학계에서 아주 중요한 관심의 대상입니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뿐 아니라 사회주의권에 있었던 동구라파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뿐 아니라 일본, 한국, 중국, 대만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고 심지어는 러시아에서도 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각광을 받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우선 제일 커다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가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유의 방식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이번에 오늘과 내일 공부하면서 사상사적인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만 알다시피 지금은 다원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우리들이 복음주의적인 시각에서 신학적으로 용납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다원화된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원화된 사회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회가 서로 서로 각기 인종과 그 다음에 사회적인 지위, 성별, 빈부의 차, 문화, 이런 것들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그런 다양성들을 수용하고 그것들을 포용하면서 어떻게 이 사회를 영위해나갈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 전통적이고 직선적인 이런 신학적 사유의 방식들이 해결의 길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한계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신학의 어떤 다양성들을 그런 다원주의적이고 다양한 사회들을 어떻게 우리들이 이해하고 그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해갈 것이냐 하는 것들에 대한 상당한 답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삶 전체 나아가서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인간 자신, 그리고 이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지평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신앙과 어떤 의미를 갖고 연결을 갖는가 하는 이러한 통합적인 사유들이 모두 파편적으로 흩어져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통합을 이루어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지혜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파편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안목들 이런 것들 그리고 선교적인 그의 동기들, 우주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합적인 설명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기독교신앙을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신앙이 아니라 원대한 질서를 찾아가는 신앙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고 에드워즈의 신학이 그런 동기를 제공해 준다는 것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관심을 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였느냐 하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30년은 좀 안됐고 25년 전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때 저는 영국 청교도에 깊이 심취해있었는데 그러다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원래 영국의 잘나가는 외과의사의 길을 가고 있었고 왕립 주치의였던 해더 박사 밑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병원에 있으면서 수많은 귀족들과 부자들을 치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하면 자신이 여태까지 아는 것은 인간의 모든 비참과 악, 불행 이런 것들이 사회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가난이라든지, 무지라든지, 경제력이 없다든지 아니면 인간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아주 귀족들 사회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든 죄악들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구나 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목회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정식으로 신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박사라고 그럴 때 그 박사는 사실은 신학박사가 아니라 의학박사 학위입니다. 어쨌든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물론 이전에 다른 교회에 갔다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정착을 해서 오래도록 설교를 하셨는데 거기에서 정말 당시 영국 사람으로서는 드문 개혁주의적이고 청교도주의적인 설교로써 명망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텅 비었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이 사람들로 꽉 차게 되고 특히 금요일에는 로마서 강해를 굉장히 오랫동안 합니다. 그때마다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1,200명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영국에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씀을 듣겠다고 모였는데 유장한 로마서 강해를 청취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오늘날 볼 수 있는 로마서 강해라는 책이 그렇게 해서 쓰인 것입니다. 결국 끝까지 쓰지는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해서 영국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청교도에 눈을 뜨게 만들어주고 그래서 그 청교도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웨스트민스터 Conference를 열어서 청교도신학을 재조명하는 일들을 하게 될 때에 그때 거기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청교도에 관한 관심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Puritan이라고 할 때 그냥 꼬장꼬장하고 말이 많은 사람들로 여겨지고 사실 이미지가 그렇습니다. Puritan이라는 말이 영어의 Pure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태도로 부른 것이 아니라 자칭 ‘청결파’ 이런 의미로 부른 것입니다. 네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냐는 식으로 불린 하나의 시니컬한 호칭이 Puritan이었는데 이게 역사적으로 이름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Puritan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설명하면 역사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대륙에서 일어나는 종교개혁의 갈래가 영국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잘 아는 토마스 후크라든지 아니면 칼빈 시대에 활동했던 특별히 존 낙스 같은 사람입니다. 낙스는 실제로 제네바 아카데미에 가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심지어는 배 밑창에서 노예처럼 노를 저으면서 살았던 사람이고 그래서 이 사람이 스코틀랜드에서 조지 위셔트의 제자로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조지 위셔트는 해밀턴이라는 주교가 있었는데 그 당시는 당연히 가톨릭 사람이었는데 그러다가 이 사람이 깊이 회심을 하고 가톨릭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Reformed 개혁주의로 회심을 합니다. 그 계열이 위셔트가 화형을 당하고 낙스가 간신히 살아서 탈출해서 나중에 스코틀랜드를 개혁하는 인물이 됩니다만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대륙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이 영국적인 독특한 형태를 띤 개신교신앙을 만들어냅니다. 그게 Puritanism입니다. 그래서 이 Puritanism은 기본적으로 영국적인 개신교운동인데 이 Puritanism이 처음에는 대륙으로부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서 청교도주의가 생기는데 이 청교도주의가 후에는 다시 대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적으로 잘 아는 나델의 레포르마티에라는 운동이 화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나델이라는 것은 Second 라는 뜻인데 제 2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17세기입니다. 그때 대륙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꺼져갈 때 대륙에 있는 네덜란드의 학자들이 영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영국에서 일어나는 청교도운동의 영향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돌아와서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 이것을 강력히 실천하고자 개혁을 시도합니다. 이것을 나델의 레포르마티에라고 합니다. 뵈티우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제자 마스트리히트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종교개혁이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바돌로메 대학살 같은 것들에 의해서 청교도가 박해를 받고 수많은 청교도들이 놀라드파나 왈도파의 사람들이 스위스 같은 곳으로 도망을 가고 그 다음에 스위스는 스위스대로 종교개혁에 성공한 도시들도 있었지만 핍박을 받는 도시도 있었습니다. 독일도 마찬가지고 이태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곳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 사람들이 이제 제네바로 모이고 이 사람들이 화란으로 들어가고 화란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화란에서 이 종교개혁의 신학이 꽃을 피웁니다. 지금도 많은 개혁주의에 대한 자산들이 사실은 화란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운동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소위 언약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그러면 이 언약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유럽대륙에서 물론 언약사상이 성경에 나오고 그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라든지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 언약사상이 나옵니다만 이 언약사상에 대한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 16세기입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이 언약사상에 대한 것들이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언약사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히브리어에 보면 언약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베리트’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베리트’는 어디에서 왔느냐하면 여기에 ‘카라트’라는 말을 붙입니다. ‘카라트’는 히브리말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베리트’를 자른다는 것은 언약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 ‘베리트’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느냐하면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볼 때에 이것은 아마 아카드어 즉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벨로니아의 언어입니다. 쐐기글자로 되어있는 언어인데 아카드어 ‘바리투’에서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세미티 랭귀지에서는 이것이 모음은 의미가 별로 없고 자음이 같으면 그것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아카드어에서 ‘바리투’가 무슨 뜻이냐 하면 족쇄입니다. 이 족쇄가 무엇이냐 하면 죄수 두 사람을 서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은 쇳덩어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서로 상관이 없던 두 당사자가 언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사람들이 하나로 묶여서 그래서 이 사람들이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공동체적인 결속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이것이 ‘바리트’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 ‘카라트 베리트’ 사상은 어디에서 왔느냐하면 이것은 아마 조나단 에드워즈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앞으로 신학을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평생 잊지 않도록 제가 그럼처럼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물론 그 이전에도 제사가 있었습니다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십니다. 그것을 토라라고 합니다. 그 토라 속에서 그 토라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이게 무엇이냐 하면 첫째 민법인데 시민법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의식법입니다. 세 번째로 도덕법으로 나뉩니다. 이것도 물론 들어가지만 이것이 십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이 민법은 당시의 사회질서를 위한 것이었고 이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제사에 관계된 것이었고 이 도덕법은 지금까지 영구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소위 모세의 토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의식법에 보면 제사제도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제사제도는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있는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법 속에 무엇이 나오느냐하면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이 나옵니다. 여기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주신 다음에 피를 뿌리고 그리고 모든 백성들은 ‘아멘, 아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언약관계를 맺고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그 대신 너희는 나에게 순종해야한다.’ 이렇게 언약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언약체결의 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고대의 Accident Real East.라고 이야기 하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이 언약체결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체결에 고대의 문화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의 엄중함을 그 시대 문화에 젖어있는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어디에서 나타나느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그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짐승을 쪼개놓고 그리고 쪼갠 고깃 사이로 하나님이 횃불로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바로 고대 근동에 있었던 언약체결의식을 아브라함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브라함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써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짐승을 잡아서 커다란 소를 절반으로 쪼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가 낭자하게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수저레인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베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저레인 트릿트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은 누구냐 하면 왕입니다. 이것은 누구냐 하면 봉신입니다. 왕이 나라를 이만큼 가지고 있는데 이만큼을 떼어서 이 사람을 보니까 자기에게 충성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을 불러서 ‘내가 이만큼 땅을 너에게 떼어주마 여기서 세금을 걷어서 네가 쓰고 그리고 나쁜 짓하는 놈이 있으면 감옥에 가두고 그리고 진짜 나쁜 놈은 죽여도 좋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다 네 말에 복종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너는 나에게만 충성해야한다. 그리고 일정한 세금을 나에게 내고 그리고 만약에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그러면 너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죽기까지 나를 위해서 싸워야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저 한량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높은 지위에 불러주면 영광이겠습니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무엇이라고 썼든지 이 사람이 A이고 이 사람이 B라면 B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갑자기 호주에서 이번에 호주의 사회부장관을 맡아달라고 하면 여러분 중에 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합니다. 그때에 당신이 장관이 되면 이런 것을 준수해야한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이 조건은 못하겠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함께 왕과 봉신 이 두 사람이 여기를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것을 3부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여기를 지나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섭니다. 물론 신들도 내려다볼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이 언약을 파기하면 이렇게 짐승이 쪼개진 곳에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커다란 황소를 쪼개놓고 피가 낭자한 곳을 맨발로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저주가 약속을 어긴 사람에게 임하기를 바란다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지사의 맹약’ 이라고 부릅니다. 죽기까지 맺은 언약입니다. ‘Oath To Death’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에 아브라함을 비롯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복주고 복줄 것이며 네 자손을 많게 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는 수많은 사기꾼 같은 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실성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거지처럼 몰려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인간들이 말을 안 들으면 불행을 주어서 깽판을 치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앙이 거의 없는 어린 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약속이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하나님이 불 가운데 지나가시니까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너한테 약속한 것은 꼭 지킨다. 안 지키면 나를 죽여라.’는 뜻과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약속을 안 지키면 내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누가 저주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최고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위해서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사상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 구약, 신약 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약이 이 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Testament 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이것은 곁가지이고 이런 언약사상이 대두되었는데 원래 이 언약이라는 것은 당사자 A가 있고 당사자 B가 있어서 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계약이 성립하니까 언약이라고 그러는데 이 언약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Covenant 인데 사실은 번역할 말이 없어서 언약이라고 그런 것인데 우리말 언약은 그냥 내가 말로 약속하는 일방적인 것인데 이것을 신학에서는 계약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계약이라 하면 무슨 전세, 월세 계약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이 사람들 사이에 맺는 언약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랍어로 들어가면 ‘디아데케’ 그 다음에 ‘쉰데케’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언약이 둘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이 ‘디아데케’가 무엇이냐 하면 A와 B사이가 워낙 대등하지 않은 왕과 신하라든지 부모와 자식이라든지 이런 경우에 이런 관계로 맺어지는 언약을 ‘디아데케’라고 부르고 대등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쉰데케’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새 언약을 주노니’ 라고 할 때에는 이게 ‘디아데케’가 됩니다. ‘디아데케카이네’라고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새롭다는 것도 두 가지 뜻입니다. ‘네오스’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카이네’는 ‘카이노스’인데 이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필인데 이런 것은 완전히 새로운 품질의 분필입니다. 이런 것들은 ‘카이노스’가 아니라 ‘카이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것인데 최근에 나온 것, 3년 전에 나온 것이라고 그럴 때는 ‘네오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 언약사상이 있는데 그래서 이 언약사상은 두 개의 해석학적 긴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언약사상을 이야기할 때 봐라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주권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다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뿐이라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데 언약사상이 사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칼빈의 언약사상 같은 것을 보면 이쪽으로 많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언약사상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방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언약의 쌍무성과 편무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쌍무성과 편무성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으로 인간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시고 이 모든 약속 성취의 권한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약속의 편무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편의 강조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사상들이 나오느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비록 부대등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약속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도 약속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쌍무성에 대한 강조가 이 대륙에서도 있게 되는데 언약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의지하지는 않지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칼빈 같은 사람이 언약의 편무성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블링거 같은 사람은 쌍무성에 강조점을 둡니다. 이것이 영국으로 들어갑니다. 영국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라는 종교개혁의 이 기본적인 정신에 일치시키면서도 그러면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언약백성답게 우리의 의무에 충실할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백성임이 입증된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을 지킴으로써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은 아니고 결과적인 결정론적으로 한 사람이 정말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렇게 언약을 준수하며 살아감으로써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 할 것이다. 그것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새로운 언약사상에 대한 쌍무적 해석을 견지하면서 철저한 Puritanism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Puritan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Duty입니다. 의무입니다. 이 의무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으로써의 의무가 아니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그 한없는 은총과 혜택을 하나님께 받는 것처럼 우리는 그 은총에 부합하는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그 언약 안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는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고 이제 16세기, 17세기에 화란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나델의 레포르마티에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이 나델의 레포르마티에 운동이 1세기 후에 독일의 피에티스무스 경건주의 운동의 뿌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선조들이 1세기 전에 여기서 화란에 있으면서 이런 사상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보에티우스 같은 사람은 아주 어마어마한 학자였는데 그는 아주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논쟁적인 책들을 꽤 많이 씁니다. 그는 위트레이트의 교수였습니다. 이 사람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당시에 가톨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화란에서 몇 년 전에 나온 17, 18세기의 철학자 사전에 신학자로 등장할 정도로 두 사람이 제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학교에 살면서 소위 Puritanism이라는 운동을 펼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말로 번역하면 엄정주의, 엄격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불가능하지만 않다면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문자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엄격주의입니다. 이 사람이 한 독특한 운동이 뭐냐 하면 당시로써는 드물게 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그 학생들을 소그룹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여기서 방식을 배운 사람들이 독일에 가서 1세기 후에 경건주의 운동을 싹틔우는 뿌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청교도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1899년생입니다. 이미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 아주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되어있는데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ume 2) 가 있습니다. 영국의 Banner of Truth 사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인터넷에서 주문하면 아주 싸게 살 수 있습니다. 십만 원이면 살 수 있습니다. 재수가 아주 좋아서 Sale 할 때 들어가면 오만원이나 육만 원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돋보기를 써야 볼 정도로 글씨가 깨알 같습니다. 어쨌든 그것을 안 사려면 예일대학에서 나온 최근에 비평본을 사야합니다. 그것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28권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아주 비쌉니다. 그것을 사시려면 지금 아마 한국 돈으로 320만 원 정도 됩니다. 권당 USD로 100불이나 120불이 넘습니다. 권수에 따라 다른데 그 책을 사셔야합니다. 그 책을 사시면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메뉴스크립트에서 다시 다 읽어서 식자를 다시 했고 앞에는 해제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아주 좋습니다. 어쨌든 그 책을 고서방에 갖다가 다 낡은 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봅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을 펼칩니다. 그 펼친 부분이 제가 보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였던 것 같습니다. 보면서 그분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하면 여태껏 자신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조나단 에드워즈가 믿는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격차를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 무한한 격차 때문에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느낄 정도의 무한한 격차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신학저술들을 다 읽었을까 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제가 거의 다 읽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인용하는 내용들이 특정한 자료에 쏠려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에 소개된 것, 그리고 영국에 소개된 것, 21세기에 소개된 모든 가장 중요한 소스를 사실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제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청교도 사상을 이야기하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기를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이런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견해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청교도들을 알프스산맥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위대한 종교 개혁가들은 히말라야일 것이다. 그러나 참 조심스럽지만 만약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냐고 말한다면 나는 히말라야에서 솟은 가장 높은 영봉인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반은 동의를 하고 반은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에 확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국에도 알려지게 되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영국 사람에게도 연관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 흔적이 미미했다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영향력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소개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알리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사실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이 많이 팔리기는 했지만 70여종 정도가 번역이 되었고 팔렸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팔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를 두 권을 구입해서 그중에서 특별히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관심을 가졌던 리바이벌이 여러분들이 역사적으로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 1736년부터 1743년 이때에 미국에 괄목할만한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1740년대에 일어났던 부흥은 엄청난 부흥이었습니다. 동부를 강타한 그런 엄청난 부흥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알기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부흥이 무엇인지 Revival 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하는데 이 부흥은 오늘날 여러분들이 ‘교회가 부흥되었습니까? 그 교회가 부흥했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한 시대 한 장소에 확연하게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각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눈을 떠서 그래서 자신의 전 존재를 주님 앞에 바치며 살고자하는 그런 영적인 각성과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부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성령운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영어에서 표현할 때 Revival 이라는 말과 Revivalism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Revival은 그냥 부흥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인위적 부흥운동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부흥이라면 이것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Revival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1860년대에 미국의 역사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납니다. 1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주도적인 인물이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였다면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에서는 그 중심 자가 누구냐 하면 찰스 피니 입니다.
이 찰스 피니는 여러분들이 찰스 피니가 쓴 유명한 책이 있는데 ‘Lecture of Revival’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무엇이라고 번역되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부흥에 관한 강론인데 부흥론인데 부흥론이라고 번역된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찰스 피니라는 이 사람은 아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는 전도자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화가 있느냐하면 맨해튼 거리에서 아침에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냉담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주저앉아서 어린아이처럼 막 울면서 ‘하나님 저들은 저렇게 지옥에 가고 있는데 나는 저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며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고 이제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 가는데 며칠에 만나서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을 하고 가는데 여행을 하며 가야될 것 아닙니까? 아내 될 사람은 아내 될 사람으로 그곳으로 오고 자기는 자기대로 그곳으로 가는데 결혼식에 20일 늦게 도착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가다가 마을에 들르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너무 가여운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가다가 도착하니까 결혼식 예정일이 20일이 지난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였다가 이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저는 성령세례론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겨울에 스토브 옆에서 있다가 불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불타는 전도자가 됩니다. 이 사람은 전도자로서는 굉장히 본받을 사람인데 집회를 하러 갔다가도 뭔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 같으면 산속에 들어가서 4시간씩 5시간씩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참 훌륭한 사람인데 신학적으로는 아주 엉터리였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원죄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믿는데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한다는 것은 믿는데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등등 인간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회개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매우 부주의한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이 기본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신학노선은 알미니우스주의 아니고 펠라기우스주의자였습니다. 세미도 아닙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사람에게 건질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하면 부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다 맞추어져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면 마치 자판기에서 동전을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면 와르르 하고 음식물이나 캔이나 콜라가 떨어지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만 맞추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실제로 복음전도 사역에서 이루었던 혁혁한 성과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살아생전에 마이크도 없던 그 시대에 직접 전도한 사람이 50만 명 정도 된답니다. 그러니까 아마 사도 바울 이후 D. L. 무디와 함께 최대의 전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헌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굉장히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은 성경적인 부흥이 아닌 매우 혼란스러운 부흥의 형태를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하면 그 전까지는 전통적으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기 형제가 한분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제가 며칠 전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의료선교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내일 개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시겠습니까? 법적으로도 동의하지 않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목사가 될 수 있는 종자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제대로 된 집안에 태어나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 그중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영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의사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왔었는데 이 1860년대에 일어났던 Revivalism이 미국에서 어느 시기와 딱 맞아떨어지느냐하면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와 딱 100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 산업혁명은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면서 이 사회와 인간 모든 것들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분출해내는 새로운 새 시대였고 이것이 기독교에까지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영향들을 받은 그때에 이런 Revivalism이 일어나면서 이제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지성과 공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만 받으면 누구든지 목사가 될 수 있고 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역사하실 때 소위 이야기하는 Wonderful Freedom 이라는 것들이 주어지는데 이런 것들이 주어지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포할 수 있는 예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상들이 18세기 후반에 일어나고 이런 것들에 대한 가장 타락한 형태가 1890년대에 있었던 소위 이야기하는 맥 리머 같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켄터키 부흥운동에서 그 타락한 실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타락한 실상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중에서 질문하실 분이 있으시면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
(답변)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고 못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찰스 피니도 마지막에는 자기가 이루어놓은 이 복음 선교적인 업적에 대해서 상당한 회의를 품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가 너무 작은 것입니다. 그 열매는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하고나서 ‘와’하고 회개하고 사람들이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보니까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서 사랑으로 삶의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비율이 너무 낮은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획일적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피니가 이런 잘못된 신학으로 전도했기 때문에 전도 받은 사람은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항상 충만한 복음의 지식만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지식 하나만을 가지고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어떤 선교 운동이나 설교들이 이후에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습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하는 역사적인 평가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공은 공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잘못은 잘못대로 이야기해서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바로잡으면서 우리들이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 평가들을 우리가 앞으로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타산지석으로 삼는 이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같이 겸해서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