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진노하시는 하나님I(롬1:18上) 1998.8.12 수요예배 1
2. 진노하시는 하나님II(롬1:18上) 1998.8.12 수요예배 12
3. 하나님의 진노와 복음전파의 화급성(롬1:18) 1998.9.19 수요예배 19
4. 경건치 않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롬1:18) 1998.8.26 수요예배 35
5. 진노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출9:16) 1998.9.2 수요예배 48
6. 하나님의 진노의 선교적 성격(출9:16) 1998.9.9 수요예배 61
7. 사죄와 진노(사1:18-20) 1998.9.16 수요예배 75
8. 질투하시는 하나님(신6:15) 1998.9.23 수요예배 84
9. 은총 안에 사는 길(신7:11) 1998.10.7 수요예배 98
1. 진노하시는 하나님Ⅰ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찾아 나타나나니(롬1:18上)
2월 5일부터 8월초까지 무려 여섯 달 동안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를 들었습니다.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거의 끝나갈 무렵쯤에 제 마음속에는 꼭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주제가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 고린도전서 13장이 끝나기 전에 제 마음속에서 구체적인 결심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수요예배마다 어느 정도 될 거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충분히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교회에 들려졌다 생각될 때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차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대해서 잘못 알고 있거나 알아도 뭔가 왜곡된 인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지가 우리의 삶을 죄로 가득 차게 만들고 어둠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바르게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도덕과 심지어는 협박과 심지어는 형벌과 심지어는 자신의 살을 깎는 수양을 통해서도 해방될 수 없었던 죄의 사슬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이해가 덜 되시는 분들을 위해서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당신이 누군가를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건 하나가 일어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태어나고 어떤 왕국이 일어섰고, 어떤 왕국이 망했고, 전쟁이 일어났고 어느 나라가 이겼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어느 학생이 와서 물었습니다. “전도님 이상해요”, “왜?” 그랬더니. “세계사 책을 보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두 줄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세계사 책에 두 줄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렇게 자세하게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이렇게 반문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보면 경상남북도의 역사만큼도 하찮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이 그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의 성품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던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때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망하시게 하는 역사,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단지 나라가 망했다, 무너졌다 다시 광복을 찾는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이 사건을 해석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인생의 곤고함과 죄 가운데 가득 차서 소망이 전혀 없이 살다가 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고, 그 분이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구나 라고 생각될 때에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 지식의 극치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희미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통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이전에 죄의 짐이 풀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찾아오게 됩니다.
불신자에게 뿐만 아니라 신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리를 하면 두 줄이나 석 줄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간단한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일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사실들은 제가 깊이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주일 아침마다 듣고 있는 죄 죽임의 교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로마서 8장 13절입니다. 너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것입니다. 그 한가지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패하고 은혜 받고 좌절하고 엎드러지고 주님이 자신에게 놀라운 구원을 주셨는데 살아보면 구원이 너무나 시시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주셨는데도 그 사랑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거의 숙명적인 반복된 패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얻은 것이 정말 우리에게 찬란한 행복으로 다가오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감격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의 죄를 죽이는 치열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가게끔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알아 가는 동안에 결박이 끊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제일 처음 특강하던 때를 기억을 합니다. 12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서 반짝반짝 눈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 어느 지체의 표현에는 다 강의를 듣고 나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통쾌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이제 마귀야 이제 너는 오늘 이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무지했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너가 어둠 속에서 나를 굉장히 지배했지만 이제 너의 계교는 이 말씀을 통해서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나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너는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앎은 우리의 풍성한 삶과 직결된 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과 직결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풍성한 진리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의 삶을 풍성한 삶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성경을 통해서만 발견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는 은혜의 경험, 체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확증하고 그것들을 증명하고 더 큰 확신을 갖게되는 일들은 우리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제일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이 매우 자위적이라고 하는 데에 우리의 신앙 생활의 깊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절름발이 이면 그는 절름발이의 삶을 살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전하지 않으면 온전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천박하면 그는 경박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면 그는 풍성한 삶을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제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왜곡 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분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옛날의 습관이고, 옛날 하나님은 진노하셨지만 요즘 하나님은 사랑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이렇게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모습과 신약의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 약간 톤이, 색조가 다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자비하시고 사랑도 베푸시지만 진노하시는 광경이 아주 많이 실려 있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풍부한 언급을 받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은 신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사랑만 하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그렇게 쉽게 확신을 해 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춰오는 하나님 사랑의 빛은 아주 찬란한 태양 빛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자 해도 참 하나님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율법을 준수하면서 그 희미한 그림자 뒤에 오시리라고 믿어지는 구원자이신 그 분을 추억해서 받아드리고 믿어야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밝히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가르쳐 줘도 믿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그렇게 구약의 제사와 구약의 제도와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 것을 알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모두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밝히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오해할 만한 여러 말씀을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은 사람 없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만드신 세계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모든 사람을 휴식으로 부르시는 안식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도 이처럼 십자가를 오해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죽음을 사람들이 오해하는 중요한 근거 구절들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우리들이 죄 가운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회개만 하면 된다는 이런 사상, 그리고 그 회개는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하나님이 자기의 죄만 자백하면 하나님이 일체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신다고 하는 이런 생각,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사실입니다만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아니라 교리가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많은 진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볍게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뷔페 식으로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교리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학의 틀 안에서 하나님이 행동하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신앙의 세계 속에서 깊이 알지 못한 사람들이 세우는 교리, 세우는 신학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연구하든지, 교리를 세우든지, 성경을 해석하든지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가져야할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외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교리를 세우고, 하나님을 탐구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 가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불꽃과 같은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면서 깊이 심취하면 안됩니다.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또 하나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읽으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여러분들은 희망을 갖습니까? 절망을 갖습니까?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우리는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반대말이 행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두 가지는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줄을 믿습니다, 아멘’ 이것은 믿음이지만 그 반대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단지 거저 구원을 받는 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바로 마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절규하던 구절입니다. 여러분들은 희망을 갖고 있는 이 구절을 보면서 마틴 루터는 절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울부짖었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어찌하여 복음 속에 칼을 두셨나이까?” 의라는 단어를 통해서 마틴 루터는 철저한 구약적인 사상, 카톨릭적인 사상 속에서 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모든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보호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거룩하게 살아가고,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로 가까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시거나 교회를 세우시거나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셨을 때에 가지고 계셨던 자기를 거룩하게 인정하는 삶의 틀에서 너무나 벗어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다음에 두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고 생명나무 주위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셔서 거룩한 나무들을 보호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함이 사람들에게 의해서 인정되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질서에 의해서 인정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슬리고 거기에 항거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종의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호하시려는 성품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좀더 진전을 해서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를 이제는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아멘하고 믿고 그분을 우리 속에 받아드림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면에서 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오직 은혜밖에는 가져다 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인간들의 수 없는 과거의 도전, 특별히 구원받을 백성들이 과거에 하나님을 향해 거슬렸던 거룩에 대한 도전, 지금 계속되고 있는 도전, 이후에도 계속될 도발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의입니다. 그래서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떨어본 사람이 아니면 십자가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도하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만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이제는 그 하나님을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어 하셨던 본래의 그 모습을 바로 깨닫지 못하리 만치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인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좀 심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랑의 교리는 하나님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악을 향해 달음질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걸어가는 그 와중에서 죄의 길을 걸어가다가 발등에 난 상처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있거나, 특별히 하나님을 이미 믿고 구원을 받은 자녀들은 정죄함이 없다라고 하는 성경구절 하나를 가지고 마치 자신이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범죄 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은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의 욕심과 죄악 된 욕망을 따라서 그릇된 길로 치달으면서 자기가 아무리 방종하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주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한번 우리를 구원이라고 하는 증서에 도장을 찍으셨기 때문에 가슴을 조리시고 속이 부글부글 끓으시면서도 결국은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말한 아멘이라는 도장 하나를 가지고 범죄 면허를 받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사랑이 뛰어나다라고 하는 그 표현을 너무나 강조한 너머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한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능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성품을 모두 무장 해제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교리라는 창살에 가두어 놓고 자기는 은혜라는 미명하에 자기 살고 싶은 데로 다 살아도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라는 창살에 매달려서 눈물만 흘리실 뿐 기껏해야 ‘돌아오라, 돌아오라’ 그렇게 애처롭게 부르실 뿐, 우리를 향한 아무런 실권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 분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면 감지덕지 하는 분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것만 해도 하나님은 감지덕지 하셔서 우리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 돌아가고 나서 ‘저 돌아왔습니다.’, ‘나 네가 이렇게 돌아왔구나’ 그러면 ‘그 정도야 보통이지요’ 이렇게 뭔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이런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믿기는 이런 식의 잘못된 현대주의적인 기독교 사상 때문에 아마 수 없는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갈 것이고 지금 현재도 가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거나 애매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그야말로 집단학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식의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인간의 진노를 생각합니다. 인간의 진노, 어떻습니까? 반드시 인간이 진노할 때에는 아주 거룩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진노할 때에는 반드시 신경질 적인 히스테리를 동반합니다. 정신 신경 증세적인 히스테리를 동반합니다. 통제력을 잃어버립니다. 뭔가 부들부들 떱니다. 동기와 출발은 선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중심을 잃고 좌우로 휘청거리면서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을 때 비로소 인간은 충분히 진노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히스테리나 신경증세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신경질을 부리고, 골을 부리고, 핏대를 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노라고 하는 단어 하나를 하나님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두 그림이 합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의 신앙의 세계, 인식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것을 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교리를 기독교인의 사상 속에서 빼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방종과 육신의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인간의 타락밖에는 찾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생각을 빼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빼어버리고 나면 아이러니 한 것은 진짜 진노가 무엇인지를 맛보기 위해서 죄를 쌓아 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말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기를 거절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이스라엘이 결국은 바벨론에게 망해서 비참한 멸망으로 갔던 이유는 그런 식의 잘못된 신학화 작업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조상들의 역사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개의 신앙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수파였고, 하나는 다수파였습니다. 다수파의 신앙 사상은 자신들의 오늘날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는 좋은 자료로서 근거를 아브라함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아브라함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추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사상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만 다섯 번이나 나타나시는 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 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재앙이 약속이 아니라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네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 언제 달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조건 적인 호의라는 것입니다. 땅을 줄 것이라고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믿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아브라함 속에 믿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짐승을 쪼개어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놓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불꽃과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그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제물을 쪼개놓고 그 사이로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같이 지나가는 것은 약속을 어기면 짐승이 쪼개어 진 것처럼 천지 신명이 우리를 벌주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네가 쪼갠 고기를 내가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내가 너하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저주할 수 있는 주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브라함은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분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여호와라’ 라고 시작을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났던 갈데아 우르에서 만났던 수많은 신들은 어느 날 나타나서 ‘내가 다 보호해 줄게’ 그러다가 다른 신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가는 그런 신, 내일은 도망가는 신들밖에 못 본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런 신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수준에 내려가서 신학적으로 말도 되지 않고, 논리도 맞지 않는데도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무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은총이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느냐?’,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밖에는 베푸실 것이 없는 분이다’라고 하는 신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방종하게 살아가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거야, 우리에게 복 주실거야!’ 하는 이런 생각에 계속 싸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풀린 자동차처럼 이제 마음놓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죄악을 향해 달음질을 치면서도 하나님은 죄악된 길로 달려가다가 발등에 난 상처를 보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 정도로 생각을 해 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아주 적은 목소리, 적은 소수였지만 그러나 확실한 하나님의 분명한 사상을 백성들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희미해 진 적은 있었지만 한시도 사라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 속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해야할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만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세의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함께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은총만 베푸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모세의 시대에 와서는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더니 ‘애굽에서 탈출하라, 홍해를 건너라, 시내산으로 가라, 받아써라, 낭독하라, 지키면 살고 복을 주거니와 어기면 너희는 죽으리라’ 축복과 칼이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아주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아닌데!’ 아브라함의 약속과 모세의 약속은 시간적으로 연속관계에 있기 때문에, 쉽게 얘기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체를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숙한 단계를 다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엄마, 아빠”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애야, 아빠에게는 두 성품이 있단다, 하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고, 네가 옳지 않는 일을 할 때 심판하는 것이란다.” 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잘못을 해도 다루다가 나이가 먹으면은 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 달라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이해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순한 무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한쪽으로 치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만 베푸시고 사랑만 하실 뿐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죄를 향해 계속 치달아 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양심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선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장기간이 있었고, 진노가 매우 가까웠을 때에는 다급한 호르라기 소리 같은 메시지들이 울려 퍼진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습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히스테리칼한 증세, 혹은 하나님이 앙심을 품고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복수심으로 보복하시는 방편정도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귀신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설화가 바벨론의 신화에 나옵니다. 길가메시에픽에 나옵니다. 우트나 피시팀이라는 사람이 노아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왜 홍수를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는 현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삶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아파하시면서 노아를 통해 의를 외치게 하시고 참으시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는데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악인들을 쓸어버리시고 메시아가 태어날 거룩한 혈통을 인류 가운데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고차원 적이고 도덕적입니다. 그러나 길가메시에픽에 나오는 홍수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들이 가만있었는데 인간이 너무나 떠들어서 화가 남으로 “물 부어버려” 그래서 물을 부으니까 홍수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신경질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단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히스테리라거나 아니면 인간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으시는 비신사적인 행위라거나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을 이 세상에서 보존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알려주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불행해지는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신다고 한다면 우리의 상황은 지금 보다도 훨씬 더 끔찍할 것이며 여러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여기에 나와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와 있다면 여러분들은 아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깊은 신앙심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두려워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 두려움도 두 가지 두려움이 있는데 하나는 노예적인 두려움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귀가 두려움들을 대개 노예적인 두려움입니다. 겁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은 항상 도덕적이고 거룩합니다. 이번 집회에서 박용준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귀신을 보고 겁을 먹으니까 그 다음에 거짓말을 치고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모아서 굿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두려우심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자기의 부도덕한 삶에 대해서 전율하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직감적으로 내 삶 전체가 방향이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심판을 당해서 다시 회개할 기회도 없이 이슬로 사라지는 극단적인 경우의 사람에게는 진노를 당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안 당하는 것이 훨씬 좋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옆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감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있고, 주님을 위해서 애틋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막가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언젠가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를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러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까? 요즘은 모두 하나님을 친구처럼 노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죄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뻗어도, 사다리를 타도, 비행기를 타도, 로케트를 타도, 닿을 수 없는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을 내어서 신약성경 속에서, 구약은 원래 그런 책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신약성경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사랑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신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심각하게 계시되어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도에 관한 훌륭한 변증서라고 말할 수 있는 로마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난 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자랑했고 자신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십자가의 고난의 충족성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복음적인 사람의 글인 로마서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이 열 번 이상 반복되어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 중의 하나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만 맞는 것이지 다 맞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 이전에 세상의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그에게 쉼을 주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간 그 사람이 죄를 돌이키지도 않고 그냥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안식을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안식이 없는 삶을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러한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훌륭한 증인들입니다. 죄를 버리고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에 대해서 눈떠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주 없이 살던 지난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않았던 죄 짐을 지고 무거웠던 날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후회하는 마음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초청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정말 내가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는데 안식이 있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도 ‘다’ 속에 들어간 줄 알고 갔더니 주님이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곤고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지난주에도 만났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가운데는 여러분들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마음 깊이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번민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수많은 약속들이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절하게 깨달아서 결국은 여러분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인가’ 의문을 갖게끔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그럴 때 하늘에서 칼이 내려와서 우리의 목을 치는 것만이 진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는 면역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진노에는 인간이 면역된다는 사실을 보면은 인간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완전하고 아름다운 동산, 에덴에서 떠나서 주님이 손수 지어 입히신 가죽옷을 입고 동산을 향해서 추방되었을 때 그들의 첫날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밤이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가 있고 자연과의 완전한 화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조금도 자신을 불행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마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사자와 함께 어울려 장난하고 재앙이 일어나서 산사태가 나서 사람들이 죽어버린다든지 묻혀버린다든지 하는 끔찍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려움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함께 사이좋게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창조의 동창생들로서 사이좋게 놀던 맹수들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때리고 낙뢰가 자신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앙으로부터 그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자연과의 화목이 완전히 깨뜨려져 버렸습니다.
2. 진노하시는 하나님Ⅱ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上)
아담과 하와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동일한 고통을 느끼면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주님 없이도 수많은 날들을 잘살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없이 사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죽을 수 없게끔 된 인간들이 죽음 저편의 세계로 떠내려가는 장면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이제 거기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려도 잠시 울고는 끝났을 떠나보내도 그저 팔자려니 하며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진노에 만성이 된 그런 삶이 계속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을 창조했습니까? 더 담대해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더 담대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눈치를 보며 어기던 계명들을 이제는 대놓고 어기게 되었고 전에는 어둠 속에나 행하던 그 일들을 백주 대낮에 주님이 보는 눈앞에서 도전하듯이 " 자 내가 이렇게 한다. 당신이 어쩔 거야 " 하고 대드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좋은 신앙의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정도와 속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님을 모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과도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하늘로부터 칼이 나와서 우리의 목을 치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늘에 약속된 기업의 풍성함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위기 속에서 부르짖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부르짖는 그 기도를 향해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갈 길을 몰라서 자신의 갈 길을 묻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대응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약속들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주님을 거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진노를 쌓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송두리째 가져가시므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입적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사형장에 홀로 버려진 것과 같은 그런 고독을 느끼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 부패함이 얼마나 극도에 달했습니까? 좋으신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도 사람들은 버젓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살아가는 고통보다는 내 멋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고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왠지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하는 느낌이 들면 생각을 해야합니다." 괜찮을 꺼야, 좋을 꺼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나오는데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지" 그런 식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내버려두셨다가 마지막 불붙는 지옥에 영원한 형벌 가운데로 내동댕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결국은 이제는 일반적인 방법, 하나님과의 교제를 앗아간다든지,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게 한다든지, 아니면 버림받은 느낌을 받게 한다든지, 그 정도 가지고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 형벌을 형벌로 느끼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할 수없이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를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걸어갈 때 우리를 불같이 징벌하실 수도 있다는 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단입니다. 그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새로운 종류의 이단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님에게 도움이 안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도움을 못 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여러분들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제거하심으로써 아니면 여러분들을 징벌하심으로써 그렇게 범하고, 그렇게 훼방하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은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체험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구약에 사람으로서 대표자로서 이제 제 설교에 등장했습니다. 어느 날 호렙산에서, 불은 불인데 가시나무 떨기에 막 붙었는데 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저게 뭘까?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어쩌면 생전 처음들은 음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네가 서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평생 신고 다니는 신발입니다. 집안에 들어갈 때도 신고 갔고 그렇게 신던 신발이었습니다. 인생 살면서 어디서도 문제가 안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 오시니까 문제가 됐습니다. 호렙산은 언제든지 신발 벗고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타지 않는 불꽃으로 주님의 임재가 거기에 임하시니까 그 땅은 구별된 땅이 되었습니다. 그 타지 않는 불꽃,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설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버리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모세는 얼마나 큰 두려움 속에서 엎드려 졌겠습니까?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 야! 이거 희안하다 음성도 들리네. 뭐라고 말씀을 하시네. 야! 웃긴다. 이게 뭘까?" 그런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오! 하는 두려움 이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어떠했습니까? "아! 좋다. 그랬습니까? 할렐루야! 그랬습니까? 주님! 역시 사람을 보실 줄 아는군요. 저 아니면 누가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주님! 우리 손잡고 뭐 좀 한번 해봅시다." 그랬습니까? 그는 거기 엎드려 졌습니다. 울부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괜히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의를 갖출 틈도 없이 엎드려져서 덜덜덜 떨며, 진짜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이 현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워 떨었습니다. 자 신약으로 넘어 가보십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에 실패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님의 명령에 의존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에 어부의 상식을 깨트린 놀라운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광경을 보고 엎드려서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뭘 보고 놀랐다는 겁니까? 오! 형님 제가 졌소. 고기에 있어서는 내가 대가 인줄 알았는데 저보다 한 수 높으시군요. 한 수 전수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무릎 끓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감탄한 것은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 때문에만 감탄 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 제가 오늘 가다 복권을 하나 사 보십시오. 그리고 복권을 샀는데 여러분이 천 만원 짜리에 당첨 됐다고 그러면 여러분들이 내일 새벽에 덜덜덜 떨면서 내 앞에 와서 엎드리면서 "목사님! 전 죄인 입니다."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그럴 것입니다."목사님 맞았어요 반씩 나누어 가집시다." 그럴 것입니다. 그것도 착한 사람이나 그렇지 아무나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누가복음 5장에 장면은 단지 그런 놀라운 예수님의 예견하는 능력에 감탄하고 있는 장면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 예수님의 초라해 보이는, 시골 사람 같은 그 모습 속에 순간적으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그를 압도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두려워 떨면서 나를 떠나달라고, 나는 죄인이라고 깊이 예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만 더 하고 맙시다. 뒤로 넘어가면 요한계시록에 1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바로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를 당하고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주어지는 장면이 보입니다.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먼저 요한은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두려워 떨었다면 이해가 갑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떨었다면, 요한과 예수님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 품에서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포도주도 먹고 떡도 떼던 사이였습니다. 늘 같이 다니던 사이였습니다. 주님에 그 찬란한 모습이 하늘에서 비취기 시작할 때에 요한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오! 예수님 저 예요. 왜 이제 오셨어요. 그랬을 겁니다. 그랬습니까? "주님!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좀 일찍 오시지 미워요." 그랬습니까? "선생님! 저예요. 저 기억하시죠?"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겠습니까? 죽은 자처럼 엎드려졌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임한 것은 오랜만에 만난 예수님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왜? 그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을 뵈옵는 자리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에 거룩한 성품에 대한, 거룩하심에 대한 체험이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 줄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에 거룩하심에 대해서 인간이 체험 때 즉각적으로 깊은 두려움이 인간에게 밀려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인간에 의해서 쉽게 훼방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거룩함 속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할 때 깊은 두려움에 휩 쌓이는 것이 모두 공통적인 경험인 이유는 물론 그 이후에는 기쁨과 사랑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차적으로 그 두려움이 쌓이는 것은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 그 자체가 거룩함을 훼방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에 단호한 의지를 거룩함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입니다. 자, 사도가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맥과 연관을 시키기 전에 우리 좀더 진전을 해야 되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삼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영혼에 친밀함은 날마다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을 누구에게 나타내 보이시는가. 그것은 바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을 향한 불순종들을 거두어 드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친밀함을 더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항상 주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있을 때 너무나 놀라서 두려워 덜덜 떨면서 엎드려졌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속 엎어져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항상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을 상대해 주시거나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거나 하는 장면들이 공통적으로 뒤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수없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순서도 결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먼저 신앙은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신 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그 거룩함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거룩한 두려움을 통로로 하여서 여호와의 친밀함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표징이고 하나님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함부로 깔보는 것이 마치 고도의 영적인 수준을 살아가고 있는 표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망할 자 들의 소행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치는 자들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 그 자체를 함부로 들먹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분 앞에 그분의 성품에 어떤 말을 듣거나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들에게 들리거나 그분 앞에 무엇인가를 말할 때에 여러분들은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뜻밖에 죽으니까 하나님이 실수 하셨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구약 같으면 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경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경박한 마음은 영적으로 성숙하거나 고밀도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막 보고 깔보는 그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한 두려움과 떨림이야말로 환희와 기쁨과 짝을 이루어야 할 신앙생활에 덕목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환희와 기쁨과 함께 신앙생활에서 짝을 이루어야 할 두개의 중요한 기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지만 당신보다는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기억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이 사악하고, 이기적이고 죄악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에 거룩이 훼방을 받고, 도전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방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셨지만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주고도 안 바꾸시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아들도 죽이실 수 있고 우리도 없이 하실 수도 있고, 창조하실 수도 있고, 창조를 없애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제는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그 장면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볼모로 잡고 우리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생각하는 것은 이건 완전히 사기꾼 심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영원히 멸망 받을 자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이 사실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수없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왜! 알면 병, 모르면 약 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살다가 한번도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채 주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어떡해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해서 이 백성들을 더 이상 여기에 버려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걸어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하나님을 거슬리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고. 주님의 영광을 많이 가리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뭔가 뚜렷한 진노를 그에게 보이셔서 징벌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를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그런데 그 인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 중 일부입니다. 진노가 하나님의 성품에 일부인 것처럼 인내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거슬리고 당신의 거룩함을 훼방하는 자들을 손보고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성품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오묘한 섭리와 이유 때문에 견디고 참으시면서 고통 가운데서 기다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성품 중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인내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 인내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장난을 쳤던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가지고 장난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가두어서 우리가 방탕한 길로 가더라도 그저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처럼 만들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의 인내를 마치 하나님의 발목을 기둥에 묶고있는 노예를 묶은 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인내라고 하는 성품, 그 성품을 따라서 인간에게 행동하셔야 하는 교리의 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려고 몸부림 쳐도 하나님은 한없이 허우적거리실 뿐이지 우리를 멸망시키시거나 아니면 현저하게 우리를 징벌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무슨 노예입니까? 하나님이 무슨 짐승입니까? 누가 무엇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묶어둘 수 있겠으며 그 죄악 때문에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못하시게끔 제한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교리는 아무대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를 멎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멎게 하는 방법은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방한 것에 어울리게끔 그를 징벌하거나 생명을 거두시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그가 가슴 아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떠한 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떤 식에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충분히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있습니까? 죄가 누적되어서 여러분들의 인격중의 일부가 되어서 지속적인 불순종들이 여러분들 속에 쌓여가고 영적인 모든 하나님과의 화해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택한 백성으로 부르신 그 거룩한 풍성한 삶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끝까지 믿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면서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던 그에 기반을 허물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끊어져도 건강하기만 하면 버그적거려서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이 건강을 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주님이 나를 안도와 주신다고 할지라도 내게 제물이 있는 한은 그 제물이 나를 어느 정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돈 통을 깨트리셔서 흩어버리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던 관계가 가시를 찌르는 듯한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 줄 것이며 기쁨을 주었던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못 박도록 만들기 시작하셔서 가정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이 사라지게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에 진노아래 살아가는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거나 징벌을 받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참된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모든 화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잠시 보이는 육신의 즐거움이나 세상의 것들에 대한 사랑이나 영혼에 위로는 주지 못하는 것들을 육신의 위로를 주는 것들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덮어두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위안거리로 삼는 사람들은 마치 핵 폭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초가지붕으로 머리 위에 이엉을 올리고 그것이 자기를 그 폭격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면서 우리를 향해서 당신이 누구이신 가를 보여주시는 훌륭한 방법으로 우리가운데 당신의 진노를 행동으로 드러내 보여주시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것을 가르켜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을 알고 그분의 두려움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떨림으로 환희와 기쁨가운데 주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막가파 그리스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없고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여러분들의 자랑은 자신의 범죄와 하나님을 거슬리며 산 담대함일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우리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깊은, 가슴 아파하시는 배신감과, 상실함으로 아파하실 뿐만 아니라 일정기간에 인내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행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행동이 시작되면 좀처럼 하나님의 그 뜻하신 바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루이스 베일리라고 하는 청교도는 우리에게 그 시대에 경건한 삶이 모두 무너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드는 가운데 한가지를 지적했는데 언제든지 마음먹을 때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청산하는 일들을 미루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나면 죄악의 즐거움도 함께 빼앗겨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모든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인간이 하고싶을 때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오늘이 은혜 받을 날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 앞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요즘 이 주제에 대해서 계속 가슴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지고 한꺼번에 마차 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큰 축복과 그리고 오랜 동안에 영혼이 굳어져서 도무지 돌이키지 않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에 두려운 경고의 음성이 제 마음속에 함께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자신의 영혼에 위태한 상태를 깨닫고 깊이 돌이켜서 주께서 우리를 방문하실 때 아무도 그 앞에 재앙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저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서부터 계속되는 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에 진노의 교리에 대해서 깊이 귀를 기울여야 될 것이며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껏 살아왔던 안일하고 방종한 신앙의 태도, 안하무인격이고, 제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던 그런 막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그 인내가 끝나고 더 이상 당신의 거룩함이 훼방 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징벌하실 수 있고 심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와 복음 전파의 화급성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첫 번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지가 가득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대립된다고 생각하거나 구약 시대는 공의의 시대였지만, 신약 시대는 사랑의 시대라고 하는 식의 이러한 구분-하나님을 향해서 버릇없이 구는 것이 마치 하나님과 친밀한 자신의 영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오해하는 오늘날의 방종 하는 생각들이 성경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 드렸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그 성품 가운데 진노하시는 이 성품이 얼마나 성경에 의해서 풍부하게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리고 이 진노는 인간이 흔히 생각하는 신경질적인 성질 부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진노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지켜 나가는 그러한 거룩한 거룩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진노는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의는 거룩을 침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방어적인 행동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진노는 심판을 동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리들이 깊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도가 무엇을 말하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하늘로 좇아 난다고 경고하고 있는지 문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사도가 무엇을 말하다가 오는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하늘로 좇아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지 이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그 진노가 역사 가운데 나타난 그 심판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는지 우린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가 무슨 말을 하다가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습니까? 우리 한 번 사도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성경을 잠깐 찾아보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1장 14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그러니까,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기 전에 사도는 지금 복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능력, 그 복음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사도로서 복음의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전도자로서 나는 그러한 모든 사람들- 아직까지도 주님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전파와 관련된 사실을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맥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장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두 사실 복음 전파와 관련된 진술과 하나님의 심각한 진노 이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복음의 화급성에 대하여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매우 강력하게 복음 전파하는 이것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주어진 기간동안 교회가 힘을 쏟아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 전파에 헌신해야 할 것을 성경은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디모데서에서 우리에게 권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고 마지막 유언적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만 천하에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다음에 즉시 사도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나가서 제일 먼저 전하기 시작한 것은 구원의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화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맘먹으면 할 수 있고, 하다가 말면 할 수 없고, 하는데 까지 하다가 그만두고 집어치우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위탁된 이 복음은 화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자 그들이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만난 다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그 그리스도인들이 땅과 집과 전답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두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땅을 팔고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해서 보따리 보따리 쌓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두 고 공동 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마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으로 볼 때 학벌도 높지 않고 뭐 그리 괄목할 만한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재산을 정리해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두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이단에 빠져서 사람들이 재산을 처분해서 거기 들이밀고 공동생활 하는 것과는 동기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았고,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재산을 정리해서 사도들 발 앞에 갖다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 두었기 때문에 갖다 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무엇인가 커다란 MISSON을 느꼈습니다. 사명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명감을 느끼겠습니까? 무엇을 느꼈을까요? 뭘 느꼈을까요? 그렇죠? 복음 전파의 화급성을 느꼈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깨달을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사실을 한꺼번에 인식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압도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복음이 빨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더 보람있고 더 중차한 일을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고 사도들의 발 앞에 재산을 갔다 두고 자신들은 무엇하는 사람으로 변모했습니까? 공동생활 하면서 뭘 했느냐 말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온전히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이 발 앞에 갖다 두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복음 전파에 대해서 화급성을 느끼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와! 예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이구나!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놀랍구나! 이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 그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더 선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음 전차에 열심을 내고 화급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라는 것입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즉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부르면서 살아온 이스라엘에 백성들 그 위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생애를 온통 뒤바꿔 놓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몰랐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 하나님이 계셨는데 사람들이 그 공정하고 공평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편견과 오해, 그 시대가 가르쳐 준 잘못된 지식, 이런 것들로 모두 덕지덕지 쌓여서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렌즈가 모두 오염되어 버려서 참된 물체를 참되게 바라 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자,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 전파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출발이 복음 전파를 위한 출발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밀어 부치기 식의 전도- 그 뒤편에 있는 것 그런 생각들을 우리들이 한번 꼼꼼히 조사해 보기 바랍니다. 밀어 부치기 식의 전도 혹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 자체가 출발점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정확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성경의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가 화급을 다투는 일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의 끔찍한 진노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손으로 창조한 그 인간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가르침을 따라서 자신의 육신의 조언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한 번도 마음껏 범죄 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신 적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범한 악한 일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형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상이 당신의 성품을 닮은 세상이 되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이런 것들을 원하시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이 거룩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화급을 다투며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복음을 전하면 이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행복하지만,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음은 화급을 다투는 복음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의 복음은 불행한 자들만을 위한 불행이 될 것이고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복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미없는 사람들,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떠서 왕이나 귀족들이나 권세를 가진 자나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자나 천한 노예나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바로 알고 거기에 반응하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이미 진노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완전한 심판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그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노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창조의 위대한 능력과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찬송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위대한 권능으로 만약에 창조가 아니라 이 세상을 파멸하고 인간들을 심판하신다면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마치 날아다니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쳐서 잡는 것이나 기어가는 개미를 발로 밟는 것이나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파리채로 쳐서 떨어뜨려 문질러 버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문질러 버림을 당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고 그리고,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것이 인간의 상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복음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의 전파에 대해서 화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에 대해서 눈뜨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이 복음밖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으며 이 복음을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에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운명에 대해서 성경은 정직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영혼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들은 단지 약간 불행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서 이 세상 신이 그들을 어둡게 하며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성령께서 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피붙이요, 우리의 형제, 우리의 자매라 할지라도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오랜 동안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들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설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그러한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들도 동일하게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고, 이후로 그들의 유업은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밖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한 성경의 증언이요. 복음의 증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파의 모든 화급성을 여기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희석되어 버리고, 참된 복음의 맛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잃어버린 채 가냘픈 껍데기만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전해지고, 마지막에는 그 형식과 내용이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에는 아무 내용도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머물러 있다고 하는 이 심각함에서 떠나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기 전에 그들은 먼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처참한 운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죄를 깊이 심어주고, 죄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만큼 끔찍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만들어 주는 그 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형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제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놀랍습니까? 그래도 형제는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을 필요조차 못 느끼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옵션(option)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없어도 되지만 선택으로 하나쯤 가져도 괜찮은 것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동차를 사면 돈을 더 내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달아줍니다. 그런 것 하나도 없어도 자동차는 굴러갑니다. 그렇죠. 굴러갑니다. 그런데, 더 달면 더 편리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더 안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내고 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이라는 것을 받았다면 , 그래도, 혹시 또 죽어서 진짜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있으면 미리 대비해 놓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라는 정도의 생각 아니면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잘 나아갈 때는 별로 필요 없지만 인간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때는 그래도 뭔가를 의지하면 그래도 정신적으로 좀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이런 정도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 어떤 처절한 심판에 놓여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는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수수의 교회들을 제외해 놓고 오늘날의 평균적이 교회에 가서 정말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그만큼 복음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는 동안에 너무나 많이 변색되고 탈색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실용론적인 것입니다. 즉 현실적인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어떤 현실적인 반론을 제기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을 말해도 들을까 말까한데, 주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 그 모든 것을 할 때 사람들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황당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 잘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많은 전도 방법 속에서 우리는 이런 현실적인 고민들을 많은 전도자들이 한 흔적이 우리들은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마치 먹는 사람들도 모르게 사탕으로 껍질을 씌어서 살짝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복음전파의 목표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기 보다는 더욱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하는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인생의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고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함으로 자신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교회에 부여된 가장 커다란 임무인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이렇게 정확하게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말하는데 그것 때문에 더 열렬하고 간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도 있었고, 혹은 방법자체가 너무나 투박하고 시작하는 그 자체가 기분 나쁜 주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다음 얘기를 들어보지 않으려고 하는 세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이것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그때에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재주로 이 복음 그 자체를 모든 사람이 환영을 받는 제품으로 새롭게 생산해 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복음 자체의 권위였습니다. 누가 그분보다 복음에 대해서 잘 말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분보다 더 큰 권능으로 자신이 복음인 사실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을 사람을 믿게 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오히려 사람들은 뚜렷하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이 허물어져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믿는 사람을 배척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을 나뉘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때마다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복음을 환영하고 그 복음 때문에 커다란 소망과 구원의 위로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상이라 배척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고 매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이 정직하게 전해질 때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더 빨리 복음이라는 피난처로 피해가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정직한 선포를 들을 때 견딜 수 없어 하면서 그 복음 자체를 거부하고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으로는 이 복음의 질 자체를 변증시키지 않고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고 달콤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복음이 꼴깍하고 입으로 넘어 들어가서 구원받게 되는 그런 방법이 만약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사도가 복음을 미련한 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에게 십자가가 거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고, 그리고, 그 출발점은 그 복음의 화급성은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날개 아래로 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부터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팔리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이라는 제품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모든 사람에게나 필요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흥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고, 그리고, 무엇인가 우리의 지혜를 자극할 만한 그러한 놀라운 사실도 없고 미련하기 그지없습니다. 능력을 사모하는 유대인에게는, 기적을 사모하는 유대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너무나 능력이 없는 것이요, 지혜로 가득 찬 헬라인에게는 너무나 논리가 맞지 않는 그러한 도리가 바로 십자가의 도리이고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깊이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올 것이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이미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예언한 바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인이시고,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생애를 사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으신 생애를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여인이나 계층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뜨거운 사랑의 대상이었고, 그분 밖에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결국은 생명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목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질을 변질시키면 더 빨리 이 복음을 전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이 복음의 심각성을 깨닫고 우리는 오늘 사도가 로마인들을 향해 쓰고 있는 이 마음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출발은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까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복음의 화급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심판의 관계입니다. 우선 어떻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경건치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한 이 모든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기대하고 계신 바는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은 단지 종교적으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건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그러한 면회소와 같은 곳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정결하고, 의롭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식의 빛이 있습니다. 구원이 먼저요, 그 다음에는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경건입니다. 예배도 지식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경건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정확한 빛이 있고, 진리가 있고, 지식이 있고, 그리고, 경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건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지만, 자신이 너무 더럽고 불결하고 경건한 삶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 좀 보실 때 그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 축복이 있는 그런 사귐은 경건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기초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건이라는 말이 희랍어로 좋은이고, 두려움입니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좋은 두려움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의 기초 그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침범했을 때 우리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는 누구도 경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 친구처럼 생각하고 하나님하고 장난치면서 놀 수 있을 것 같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경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경건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여튼 경박한 것을 미워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쉽게 질려 가라고 하는 신앙의 지름길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단의 가르침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적게 희생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일이 모든 교리는 실패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없이는 그가 경건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건 없이는 그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가 불결하게 살아가는 육신을 피 흘리듯이 쳐서 복종시켜서 청결한 삶을 살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느냐는 말이죠?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 경건의 기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않는 사람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것,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고 경건치 않는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데서 출발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진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마지막 날에 우리를 파멸로 던져 버리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원래의 위치를 잃어 버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보복이 없어도 원수를 맺고 사는 것은 서로를 향해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죠? 하늘에 계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오늘 내 마음속에 오시고 이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아주 작은 일에 간섭하고 계시고, 내가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신비한 방법으로 내게 손을 내미셔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경험들은 예수 믿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예수 믿고 나니까 일어나게 되었고, 또, 지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 그 무엇이냐 하면 부패한 인간의 성품, 죄악 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치는 인간의 그 사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 바닥이 그렇게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원래 좋은 사람 없어요. 원래 좋은 사람 없다고, 다 악하고 그리고 죄악된 삶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깊이 넘치고 우리의 죄가 우리의 미음 속에서 말갛게 씻겨질 때 그때 우리는 더욱 크게 벅차 오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는 소망과 그분 안에서 우리들이 얻게 되는 완전한 평강과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은 예수를 믿어도 이러한 놀라운 세계까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나를 죄 가운데 용서만 해 주셔도 내가 살겠고 하는 그런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두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고, 광야에 홀로 버려져 있어도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미래의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소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운 위로와 세상이 위로와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앙의 비밀들을 가지고 사랑의 비밀들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위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그곳의 주님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믿을 수만 있다면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주님이 거기에 계심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무섭지 않고 폭풍이 몰아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행복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서 맛보면서 살아가도록 원래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로 돌아간 것이고 그들은 아직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이러한 행복과 은혜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만약에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 사랑과 은혜가 없다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미 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세계 속에서 이어가는 그 생명을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삶이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어두움이고 거기는 사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었을 때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려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 하셨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별하고,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냈는데 우리는 왜 실패와 좌절과 근심 속에 살다가 죄 짓다가 마지막에는 지옥에 불길 속에 떨어져야 되는 가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이 있는 모든 인간들은 뭔가 이 인간의 생명과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부조화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인간세계 속에 찾아오는 이 많은 불행과 슬픔들이 인간 스스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들을 많이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허무를 보았고 그리고 그들은 인생이 깊은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정말 절망이다 라고 하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의문을 제기 했고 자기 나름대로 갈 길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영혼을 향한 허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술이나 학문이나 오락이나 이런 모든 일들에 정신없이 자신을 매몰 시켰고, 그리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영원한 운명을 외면하면서 보이는 물질문명을 건설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다가오는 이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한 것이 오늘날의 세상의 역사의 한 일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얼마든지 당신 앞에 나아오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회복하고 바로 믿고, 은혜생활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비밀들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누리게 만들어 주시고 천국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자기에 배를 신으로 삶고 섬기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아니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행은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은혜가 없습니다. 불행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데, 그들은 작은 불행에 엎드러져서 더 커다란 불행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치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제어장치가 없는 브레이크가 파괴된 자동차와 같은 처지로 그들은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서 그치지를 않습니다. 이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잠시 후에는 더 끔찍한 진노를 사람들은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때 혹은 자기들이 죽어서 그리스도 앞에 가게될 때 그들은 끔찍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세상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마치 동화책의 그림과 같고, 그리고, 진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주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심판은 진짜 실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화영화와 실물-만화와 진짜 실물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이 초등학생들이 그려놓은 불조심 포스터와 같다면 그때에는 정말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들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기초인 것입니다. 아니 이 자체가 복음입니다. 이것 없이는 복음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기쁜 소식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가 처참하도록 불행하게 느껴져야지만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8.15 특사에 아직은 나오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혹은 10년은 더 살아야 하고 혹은 살아서는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인생을 포기했거나, 혹은 5년, 6년 병은 점점 깊어가고 아마 옥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초조하게 약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죄수 번호 몇 번 8.15 특사.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험해 보신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그러나, 경찰이 와서 너 오늘부터 아무 곳이나 다녀도 좋다 그러면 즉시 말할 것입니다. 미친 녀석 어제도 마음대로 다녔고, 또, 내일도 다닐 것이고, 모레도 다닐 것인데, 당연히 다니는 사람보고 너 아무 곳이나 다녀도 좋다, 뭔 소리를 하는 거냐?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너 돈 있으면 뭐든지 사먹어도 좋다고 하면 따귀를 한 대 맞을 것입니다. 그것 당연하지 않느냐?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훈련소를 들어가서 한 두 달 동안 집에도 못 가고 매점도 이용하지 못하고 그저 주는 밥만 먹으면서 박박 기어야 하는 때에 "너, 넌 특별히 건강도 안 좋으니까, 너 만은 뭐든지 사먹어도 좋다" 그러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복음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 삶이고 그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던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끝 날에 농담처럼 들었던 그 복음을 거절했던 순간들을 이를 갈며 슬피 울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장난처럼 들었던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사실은 자기의 영혼의 운명이 달렸다고 하는 사실에 아마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은 마지막 때에 처절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나타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지옥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한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항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던 악한 삶들이 이런 진노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불 못과 심판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여 주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온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서 온 인류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한 방울의 수증기라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약한 것이 갈대와 같은 인간이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죄인들을 향해 나타날 때, 죄인들은 그 끝 날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과 파멸로 떨어질 것이며 그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필서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심판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옥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엄연히 존재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천국도 없을 것이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기초부터 허물어지는 거짓말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이 있는 것과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영원한 심판이 있고, 성도들의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불붙는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이 세대 속에 살면서 나약하고 이 세상과 많이 타협한 복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고, 피묻고 선명한 복음을 우리들이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그 진리 자체에 사람들에게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이런 얘기예요. 여기 모여 있는 여러분들을 울게 하고, 감격하게 하려고 미리 설교자가 수를 쓰지 않아도 복음이 정직하게 전하고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그 위에 성령이 축복하시면 흐느낄 사람은 흐느끼고 기뻐 할 사람은 기뻐하고 뒤집어 질 사람은 뒤집어 진다고... 왜 그래요.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지들을 향해 예비된 영원한 지옥과 그 끔찍한 심판과 그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기에서 극에 달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냥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자녀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슬프게 하기 때문에 어느 날 아버지가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고, 말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옛날의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란 인간이 원래 그렇게 되 먹은 인간이라면 그 자체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거예요. 아버지가 1층 가면 난 2층으로 올라가고 1층 따라 올라오면 난 지하실로 내려가고, 지하실도 좇아오면 난 밖으로 나가 버리고 문 열어 봤다가 아버지 아직 안 자면 문 닫고 도로 나가고 들어오면서 코 굴고 자면 들어오고, 아버지 일어나기 전에 가방 챙겨서 나가고 이런 삶들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심판, 그러한 종류의 심판-생명과 은총을 잃어버린 그런 심판 자체도 상당히 견딜만한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놓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받을 심판을 쌓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인간을 다루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가 많이 쌓였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사람이든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서는 죄가 쌓일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 실례를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점령했던 가나안 원주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아직은 아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아직 그 땅의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다. 죄악이 아직 꽉 차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아직은 그 죄가 끔찍하지 않다. 가득해서 도저히 이젠 그 죄의 수위가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치십니다. 그러면 그들을 쳐서 그들을 회개하게 하고 다 뒤집어지게 만들어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아닌 것은 뭘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들을 겁을 주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숨쉬는 것들은 모두다 죽어 버려라. 이것은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신경질적인 그런 반응은 없지만 거기에는 보복이라는 측면도 굉장히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민족들이 그 땅에서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거기에서 도저히 하나님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죄를 계속해서 제동장치 없이 계속 쌓아 버리게 되었을 때 그때에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고, 선택되지 아니한 백성이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명백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만 쳐서 복종시켜서 울고 불고 회개하게 만들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안 믿으면서도 형통하게 사는 사람이 있던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오묘한 섭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악하게 살면서 마지막까지 형통하다가 마지막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한 몫의 심판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악하게 산 사람들은 구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수학적인 완전한 원칙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이 완전한 원칙을 지키실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지혜는 우리보다 훨씬 신묘 망측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게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불평할 이유가 없는 이유는 비록 이 세상에서 불공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제어장치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다 정리해 버리셨어요. 구약에 보면은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빼앗기고 그럽니다. 그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 분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손으로 그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린 이걸 기억해야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좀 착하고 바르게 살게되면 구원의 축복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부릅니다. 기본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 믿는 가운데 그 위에 더 보태어서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쓸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옛말에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할 것도 없이 하여튼 악한 자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서 우리들은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반드시 그 날로가 비참할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代에 안되면 그 자식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런 식의 확신을 갖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근거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만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은 더 잘 그런 방식으로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 죄를 짓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죄를 지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을 형통하게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한 몫에 청산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 반드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대가를 치루게 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그를 때리고, 치고, 징계하셔서 자기의 (그의) 불순종을 향한, 죄를 향한 불순종을 보이시므로 그 속에 사라졌던 하나님의 향한 두려움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됩니다.
그는 철저하게 파괴된 삶을 살 것이며 고생을 죽도록 할 것이며 그리고 마음의 평안이 없을 것이며 결국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죄 가운데서 자신을 정결케하고 피할 수 없이 범죄 했을 때에는 주님을 얼굴을 피하기보다는 주님 앞에 나아와서 정직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주님의 새롭게 하심을 힘입으며 날마다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잠시 고난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더 행복하게 복 주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어떤 문제가 생겨나느냐 하면은 인생을 살아가다 하나님이 한대 치셨는데, 주님의 손이 나를 치셨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한대 얻어맞고 여기가(얼굴) 이렇게 부었는데, '주여, 감사합니다' 이만큼 밖에 안 다치게 하시고 멀쩡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건 완전히 하나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딱 한 대 얻어맞으면은 다리 하나가 만약에 부러지면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데 왜 이렇게 다리가 부러졌을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습니까? 하나님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으면 이렇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무섭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오! 하나님, 한 다리를 남겨 두시니 감사합니다. 이건 감사가 아이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도하고는 빗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오만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참 이상한 공식이 하나 성립하는데, 뭐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친밀하게 느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공식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막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내어쫓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주님을 향한 두려움을 내어쫓아 냅니다.
주님이 누군가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늘로부터 진리로 말미암아 넣어주시면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을 향해서 두려움과 떨림을 느껴요. 은총의 증거가 많이 나타날 때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해 준다고 생각할 때 이제는 주님이 이 정도 사랑해 주셨으니 맞먹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면 오실 수록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고, 나는 그 발아래 엎드려 있는 이 땅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경외가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 스스로 불러일으킬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람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이런 식의 경박한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감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을 점점 우습게 여기고,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 하에 방종하게 행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지 간에 선악간에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가 주 앞에 갈 때에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곤궁한 위기 가운데 만약에 여러분이 놓여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앉고 곤고와 그리고 사망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불행해지고, 하는 일마다 안되고 그리고, 고통과 위기 속에서 도울 곳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 속에서 헤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이전의 하나님의 계명을 우습게 생각하며 불순종하고, 범죄했던 모든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해 없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는 한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진노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아버지 앞에 매순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행여나 무심코 행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거나 주의 도를 어겼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대충이 아니라 주의 모든 계명을 찬찬히 배워가야 하고 온전함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도 주님께 불순종하고 무지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거룩한 소원을 간직한 착한 성도들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경건치 않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하나님의 말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두 번째 말씀드리는 시간에 저는 복음의 화급성과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해서 저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왜 복음이 전해져야합니까? 왜 교회당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야하고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속의 이 복음의 빛 아래로 들어와야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 복음을 믿으면 훨씬 더 좋은 삶을 살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들이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으며 또 그 진노는 마지막날에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인 심판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화급함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며칠 전 로이드 존스의 생애를 읽으면서 그때 그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막 불꽃처럼 번지고 있던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 폭발운동이었습니다. 제임스 케네디라는 사람이 그 전도 폭발 법을 만들어서 한 팔십 명 모이는 교회에 갔는데 다 떠나가고 마지막에는 자기 부인도 '여보 나 뒤에 있는 동네 다른 교회에 가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는 은혜가 없어서 못 다니겠다고.... 부인마저도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상황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발견해 낸 것이 전도폭발방법입니다. 그래서 일만 명이 넘는 대교 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례가 있었는데도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반대한 것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적인 복음전도는 밀어붙이기 식이나 내몰기 식의 전도를 통해서는 진짜 성경 적인 전도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전도방법이 대두되고 있지만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은 뚜렷한 회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출발 자체가 그 영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속히 전해져서 저 영혼들을 구하여야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복음전도의 화급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잘못 변질되어서 원래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전파되면서 잘못 전달되어 가지고 쉽게 얘기하면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동기자체가 교인 수를 늘이는 것이라거나 아니면은 자기의 어떤 능력을 과시한다거나 어떤 성취의 목표를 이룬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복음 전도가 말하자면 저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세일즈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런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 분이 덧붙인 얘기가 더 많이 기도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교회가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갈망으로 뜨거워지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이 두려운 현실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진정으로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은 진노아래 있는 백성이라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1장의 문맥은 2장까지 쭉 넘어가면서 특별히 1장에서는 이방인들의 죄악된 상황 거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는 그들의 상황을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뒤편으로 넘어가면은 인간이 짓는 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총론 비슷하게 1장 18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다. 어떻게 진리가 불의로 인하여 가로막힐 수 있겠는가? 진리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진리인데 그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불의로 말미암아 가로막힐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고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고야 맙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하는 진리는 전달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아닙니까? 성령이 이 세상에 역사 하시는데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역사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특별한 은총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지고 역사 하시고 또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거나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이런 일들을 하지만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도 성령은 강력하게 역사 하십니다. 우리들이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어서 성경에 의하면은 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 쭉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서 문명을 일구어 나가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 이제 이 세계에는 4개의 문명발생지역이 있었고 각기 강을 끼고 그리고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해서 이제 문명이 계속해서 확산되게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떨어져 살아서 언어도 다르고 문명도 다르고 그리고 종교도 다른 그런 사회를 구성해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놀랍게도 인생을 살아가는 경험에 있어서 일치를 보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문명사회에서나 나라를 향한 충성과 부모를 향한 효도 같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강조됩니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골격을 이루는 도덕적인 근간들이 뿌리째 뒤집히고 뒤바뀌면서 동양사회에서 심겨지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통하는 인간적인 윤리와 원칙들이 서양사회에서 통하고 그리고 동양사회에서 좋은 사람이 서양사회에서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악평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법을 보더라도 모든 법들이 서로 내통을 하고 주고받고 협의를 하는데 기본적인 골격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 바로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일반영역에서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꼭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만드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통해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우리들이 충분히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우리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런 구속의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악해지고 나라가 부패해지면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는 자연적인 재해나 커다란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사책을 보면 중국 같은데서 는 황제를 천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자도 지금과 같이 이렇게 홍수가 많이 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은 이문의 이름으로 그를 사형시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홍수가 나고 나라가 살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너를 하나님이 버린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네가 천자지만 버림받은 천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공경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홍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중국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같은데도 얼마든지 나옵니다.
바로 그저께인가 어제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잠이 안 와서 TV를 틀었는데 마침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폼페이의 유적을 파헤치는 역사 다큐멘터리였습니다. 흥미진진하게 밤늦게까지 봤습니다. 그게 바로 폼페이가 순간에 하루아침에 완전히 지하로 사라지는데 그게 유명한 베스비우스 화산에 대 폭발 때문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화산재가 뒤덮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몰살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하가 파헤쳐지면서 이제 그 도시가 발굴되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뭐 엄청난 문화를 누리면서 산 것으로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벌써 그 시대에 2천년 전에 말입니다. 제과점이 있어 가지고 빵 굽는 오븐, 밀가루를 만드는 기계 이런 것까지 전부 다 나옵니다. 그 사우나 냉탕, 온탕, 약간 뜨뜻한 탕 이런 것같이 쭉 나옵니다. 아주 그런 문화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뭐냐하면은 그 화산재에 묻혀서 죽은 사람들이 발견되는데 그 터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은 사창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창가가 이제 발굴됐는데 그 사창가는 벌써 이미 사창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여자들과 동침하는 방 하나 하나에는 문패처럼 그 성행위 하는 장면들이 하나 씩 하나 씩 붙여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행위 하는 장면이 아니라 두 남자와 한 여자, 두 여자와 한 남자 이런 식으로 그림들이 동물처럼 쭉 그려져 있습니다. 그 내레이터가 하는 얘기가 이런 성적인 타락 때문에 신이 이 도시를 심판을 한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가득 차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재앙이나 커다란 재앙을 통해서 한나라를 치시거나 아니면 전쟁이나 기근을 통해서 한나라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하고 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붙들고 부흥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런 커다란 위기가 닥치므로 말미암아서 그 나라는 불의가 확 줄어들고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것도 무조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할렐루야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도덕적인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믿는 건 더 급하지만은 도덕적인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 나라를 향한 자연적인 축복을 증대시키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다급한 심판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요나서 강해를 들으신 분은 여기서 얼마 안되실 것으로 압니다. 이미 역사가 많이 흘러갔기 때문에 그때 제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요나는 히브리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하나님 앞에 가서 외친 것은 앗수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외국에 갔습니다. 물론 말도 다릅니다. 히브리말과 앗수르 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더듬어서 알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서 그들은 하나님이란 말도 생소했고 심판이란 말도 생소한 사람입니다. 아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 가서 그래도 커다란 대구에서 왔다고 할 것 같으면 좀 대접을 해주겠지만 뭐 우리 나라 같은데서 온 사람이 저기 뉴욕 한복판에 가지고 계속 대통령이하 계속 이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이 가만 안 두신다 이러면 당장 경찰차가 와서 잡아가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자기도 그 말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도 않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서 의무감을 가지고 그저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신다고 그러시더라.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한마디에 왕서부터 거꾸러지면서 그저 제일 위에서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금식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짐승들이 무얼 안다고 짐승들까지 금식하라고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 국민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픽션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연대를 잘 맞춰 가지고 천문학 적인 통계를 내보니까 바로 그 선지자가 그 시점에서 말하자면 일식현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매우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태양을 신처럼 숭상하는 그런 사람들이 요나가 그 말씀을 외쳤을 때 처음에는 이상하고 우습게 들었는데 딱 보니까 자기들이 우상처럼 생각하는 태양이 달에 의해서 삼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달에 의해서 삼켜지는지 뭐에 의해서 삼켜지는지 그걸 알겠습니다. 딱 보니까 그냥 삭삭하면서 태양이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갈아먹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커다란 공포와 위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태양신이 저렇게 삼켜져버리니 저게 끝나고 나면은 이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라고 하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놀라운 회개와 각성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편입이 됐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이 됐습니까? 할례를 받았습니까? 율법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이 이방세계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살고 있는 어느 세계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악이 너무나 지나치게 창골해지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손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목사님 그러면 그 많은 이슬람국가들은 왜 내버려둡니까? 전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예수 믿는 선교사들을 만나면 잡아죽이는 불교국가나 그 이방종교의 국가들은 왜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까?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 나라 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기를 향해 거슬리는 나라를 한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권리도 가지고 계시고 능력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심판을 행하셔도 누구도 과하다가 얘기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안 믿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그 사회가 도덕적이고 불법과 불의가 매우 적은 사회일 것 같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듬어 알기에 훨씬 쉬워진다 이겁니다.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훨씬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물론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상으로 꽉 차고 그 다음에 죄악된 습관으로 깊이 젖어 있을 때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서 새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집과 아집으로 먹고사는 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는 일은 평범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전해주는 도구가 되어서 복음을 들고 나아갈 때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는 비율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 깊이 젖어있다 돌아오는 사람보다 높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께서 오늘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 그리고 그들 속에 주신 양심 이런 것들을 모두 화인 맞은 자와 같이 변해서 모든 것들을 다 짓밟으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격렬하게 대항하는 반도덕적이고 패륜적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존중심과 두려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 바로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그런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에 바로 이 시점에 어디 가든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비록 좀 많이 변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것이라도 많이 만날 수 있는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을 정말 감사를 해야됩니다. 왜 아멘을 별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저 아프리카 오지 그런 곳에서 만약에 태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에스키모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구원받을 가망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마는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서 태어나서 이 하나님 앞에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신자로서 닫힌 교회가 아니고 그것도 열린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까.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서 좇아 나타나나니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에 실제적인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가르쳐서 경건치 않음이라고 말하고 두 번째는 불의라고 말합니다. 경건치 않음이라는 희랍어 단어 아세베이아라는 단어인데 쎄베이는 두려움이고 아는 없다 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불의는 이웃을 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과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은 절묘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저는 제일 큰 계명이라는 시리즈, 그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저는 굉장히 강하게 여러분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만약에 이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만나느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관계없이 이웃사랑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왜 빈번하게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왜 의미가 적은가에 대한 문제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일 큰 계명이라고 하는 4개로 된 시리즈를 들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자, 그러면 이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절묘하게 만나고 이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경건치 않음이란 말은 아세베이아 두려움이 없다 이고 불의 하다라는 말은 아카이아 입니다. 카이아가 없다. 의가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이웃을 향한 의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제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심판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정당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논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방의 사회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사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가장 문제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8세기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 하나님 앞에 탄원했던 그 두 가지 아메리칸 사람들의 죄목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신문지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도덕적인 부패는 물론이고 그리고 이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종교적인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아주 하찮게 여겨지고 아주 우습게 여겨지는 그런 것들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인들을 많이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은 오래 미국에서 목회 하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미국인들 속에는 어떤 면에서는 도덕적으로 밑바닥에는 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누가 만들어 냈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사람과 한국사람이 같은 도시에 있었는데 지진이 났는데 미국인은 간음하는 현장에 있었고 한국인은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지진이 쾅하고 터지니까 미국사람은 주여! 하고 뛰어나가고 한국사람은 나 살려라 하고 뛰어나가더랍니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십니까? 한사람은 거룩한 현장에 있었고 한사람은 범죄한 현장에 있었는데 범죄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주여를
부르고, 거룩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날 살려라 하고 뛰어나간 것입니다. 뭐 엄마, 아버지, 조상님하면서 뛰어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는 더더욱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이방사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무엇입니까? 이방사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벽지에서 목회를 하는 그 후배들이나 동역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한계에 부딪혀있는 것을 고백합니다. 제주도 같은 곳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는 것보다 힘듭니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딸 시집갈 때 혼례보자기에다가 뱀, 살아있는 놈을 집어넣어서 보내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 정도입니다. 그런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믿어도 뭍에 있는 사람들이 가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다 발령 나서 육지로 돌아가는 것이지 실지로 토박이들이 예수를 믿으면 지금도 결국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제주도에서 예수를 믿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목사님이 내려가셨는데 막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그랬습니다. “서울서 문상 왔다고......저희 교회 목사님이십니다”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본 척도 안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도도 못하고 그냥 올라오셨습니다. 그런 정도입니다. 그런 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인간관계중심의 전도법 물론 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희박한 얘기입니다. 중요한 건 무엇이냐 하면 이기풍 목사님이 거기 내려가셔서 일으키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이 자신의 우상들이 무너지는 놀라운 이적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밖에는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것같이 조상신 섬기려 막 무당질하던 사람들이 거꾸러져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막 뒤집히고 귀신이 나가고 하는 역사를 보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두려움을 알지 않습니까. 보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이기풍 목사님 그 일대기 보면서 그것이 실화입니다. 그 연기한 그 사람이 외손자입니다. 그 목사님 거기 가서 그렇게 복음 전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매년마다 딸아이 하나를 신에게 바치는데 동굴에 큰 구렁이가 사는 것입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지 뭐, 그게 와 가지고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씩 바쳐야지 만 이게 평안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울며불며 딸을 바쳤는데 이 목사님이 이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말려도 안 들으니까 자기가 간 것입니다. 주님 의지하면서 그 뱀하고 밤새도록 싸워서 결국은 그 뱀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전도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그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로우신 분이고 두려우신 분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는 커다란 각성과 두려움이 떨어지지 아니하면 그들이 왜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방 신에게 사로잡혀있고 거짓된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그 사상의 말로는 향한 하나님의 독기가 얼마나 무섭고 그런 헛된 종교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목 위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피묻은 심판의 칼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큰 두려움이 부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1890년대에 캐나다 토론토의 역사를 보면서 그 얘기 나옵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자기 간증을 합니다. 막 토론토에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니까 술집주인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술꾼들이 오질 않으니까 왜 그러냐고 하니까? 부흥회를 한다고 그러드라. 그래서 회심을 했기 때문에 술을 끊게 하다니 죽일 놈들 그리고 몰려간 것 아닙니까. 그 중에서 회장쯤 되는 사람이 집회를 깽판 놀려고 가운데 앉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프레드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설교를 하려고 하나님 오늘은 가서 무엇을 전할까요?
이사야서에 나오는 히스기야를 향한 이사야의 예언이 있습니다. 너는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그 말씀을 전해라 전도집회인데 어떻게 그 말씀을 전합니까? 그래도 전해라. 가 가지고 막 그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가운데서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막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을 배역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그 자리에서 건장한 사람이 피를 하늘로 솟구치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도시가 기세가 확 꺾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력하고 거룩한 부흥의 때에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엄위로우심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함께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대안이 있는가?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 우리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께서 낙뢰를 벼락을 내리듯이 그렇게 부흥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 사석에서 믿는 친구들을 쭉 만날 때 열린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만 닫힌 교회는 조금 있습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는 분들이 오늘 많은 것 같습니다. 앉아서 이야기 할 때 한사람이 툭 터놓고 자기네 교회 욕하기 시작하고 자기네 교회목사 험담하기 시작하면은 저쪽 사람은 아주 그 교회 우습게 보고 얘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야, 솔직히 말해서 너희 같은 교회가 오늘날 문제가 아니냐 이러는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이 세상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 하나님이 우습게 볼 분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믿는 여러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안 두려워하더라 너희들도 안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내가 왜 두려워하랴 죄를 지음에 있어서는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담대하고 용기가 있다 이겁니다. 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고 그들은 모르니까 훨씬 더 용감한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진실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계명을 어기는 것을 교통법규 어기는 것처럼 하찮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주님의 명백한 계명을 위반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두려워할 줄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 거짓된 하나님의 사랑, 거짓된 안전의식,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 사랑해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곳에 교회인데 세상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집에서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대접받는 것 보셨습니까? 집에서 아내가 존경하지 않고 자식들이 존경하지 않는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걸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부인이 그건 부인도 아닙니다. 마누라지 마누라가 막 욕지거리 해대고 애들은 그것을 배워 가지고 자기 아버지한테 반말을 하고 욕하고 하는 이런 대접을 받는 가장이 이웃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를 가장 잘 알고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 주는 가장 훌륭한 표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꼬리표입니다. 복음이라는 제품의 꼬리표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신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경건치 않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거의 사라진 시대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기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거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에 교회에 거슬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풍조를 거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지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안일한 신앙의 커다란 물줄기에 떠내려가는 한 방울의 수증기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막 산 짐승과 다름없는 이방인과 같은 삶 때문에 여러분들이 심판을 받으면서 교회가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얘기해봐야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이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 중에 어느 자기가 좋아하는 한 요소를 취하고 성경의 진리가운데 자기가 특별히 갖고 싶어하는 한 진리를 취해서 거기에 빠져들면 신앙자체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싶어해야 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증거는 교회 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바로 불 의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불 의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유세베이아는 세베이야가 없다는 것이고 아 카이아는 카이아가 없다는 뜻인데 그러면 두려움이 없으니까 경건치 않음이 됐고 그 다음에 의가 없으니까 경건치 않음이 됐고 그 다음에 의가 없으니까 경건치 않음이 됐고 그 다음에 의가 없으니까 불의가 된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뭔가를 추가적으로 했다는 개념보다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빠진 개념을 더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사람들에게 인간들에게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저는 이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저는 이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친 말 가운데 하나가 역사와 관계없는 교회의 뜨거운 영성, 그리고 삶의 현장과 관계없는 개인의 깊이 있는 영적인 삶 이것은 모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몇 주전까지 고린도전서 13장의 위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는 위대하지 않았지만 그 설교에서 말하고자하는 본문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고린도전서 13장은 결국은 어디서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사랑에 관한 놀라운 인식들에 대해서 경험했다고 말씀했습니까? 어디입니까? 산 속에서입니까? 기도원에서입니까? 아니면 깊이 하늘 꼭대기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는 가운데 신비한 체험을 하는 가운데 얻어 졌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가 있고 사랑이 사라져서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함도 없고 투기가 가득하고 성내고 타락한 그러한 방탕한 세상 속에 소망도 없고 믿지도 않는 그러한 세상 속에서 시달리며 살면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원리는 실천을 통해서 내면적 원리가 잘 검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장 좋은 것은 만약에 기도에 변화를 받고 싶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이고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달은 다음에는 즉각적으로 여러분들이 실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면은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깨달은 다음에는 즉각적으로 실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실천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그 이론이 어떻다는 것을 깨닫게되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거룩과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지를 여러분들은 확인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도무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유익을 말씀을 통해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즐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투쟁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에 빠져들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 속으로 헤엄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식상해 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소리가 다 그 소리야 그러고 교회 문을 나가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한마디로 그 사람은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 것이지 그는 하나님 앞에 실천하고 삶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설교를 들으면서만 그 소리가 그 소리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을 안해서 그렇지 그런 사람은 그 소리가 그 소리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 이것은 결국은 의로운 삶이 없다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 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은 의에 대해서 제가 지난 시간에 정의를 내려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의는 하나님의 거룩을 방해받는 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실 때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신경질적인 진노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진노! 의로운 심판! 왜 먼저 하나님을 그 사람들이 건드린 것입니다. 침범해서는 안될 그 영역을 인간들이 범죄와 죄악으로 침범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더럽혀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으시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계속 이 상황을 계속 내버려두었다가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오해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자의적인 행동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삶 물론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한 모든 인간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고 계시지만 특별히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왜 여기에 모였습니까? 좋은 얘기도 안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이미 지난주에 광고했는데도 여러분들은 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어도 시원치 않은데 그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에 대해서 듣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 받고 싶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깨워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지금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를 깨닫게 하시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정녕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비추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거룩한 소망에 붙잡히게 하면 여러분들은 이 대문을 나서서 무엇을 하면서 살려고 하십니까? 왜 은혜 받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 같은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빛은 빛을 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타고 있을 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소금은 무슨 자기가 짜지려고 노력을 해서 짜지자 짜지자 그런다고 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소금은 소금일 뿐입니다. 그냥 자기존재로서 거기 있을 뿐입니다. 빛은 빛으로서 거기 있을 뿐입니다. 등대가 노력합니까? 촛불이 애를 씁니까? 그건 다 시인들이 하는 이야기이지 그저 촛불은 촛불이고 소금은 소금일 따름입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 죄악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고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자동차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의 패역함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 무얼 해야겠느냐? 어떤 의미로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된 성경이 가르치는 그 존재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브레이크가 잡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가 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깊은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의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의로운 사람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인간들에 불의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방해받을 때 견디지 못해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로운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사회에 대한 마지막 유일한 대안은 무엇이냐 하면은 의로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 주님은 이 세상에서 거룩이 여김을 받으셔야 하고 그 이름이 인간의 죄악된 행동과 불의로 인하여 더럽혀져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는 모든 세력들과 더불어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갖는 사람들로서 삶의 눈보라치는 현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광적인 부흥운동이 있었던 195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에 커다란 오류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격렬한 삶의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철야기도 속으로 내몰고 기도원 속으로 내 몰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도원에 가지 말자 거나 철야기도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가 막히게 삶과 신앙이 완전히 이분화 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 있는 순위가 세상에서 부패한 순위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뭔가가 잘못될 적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감초처럼 모두 껴들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 주느냐하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의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가에 대해서 눈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결국 이방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거늘 이라고 그 다음 19절에서 말합니다. 그렇게 작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였는데도 그렇게 커다란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풍부하게 알고 주님이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지 충분하게 아는 우리들이 불 의하게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진노는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는 반드시 교회를 먼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들을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경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은 그는 쭉정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셨을까요? 죄 많은 세상에서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지금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거슬리면서 살아가면서도 기분 좋게 살아갑니다. 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먼저 믿게 만드셔서 오늘 여기에 나와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 그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여러분들을 남달리 사랑해서 하나님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목회자 심정이 불안한데 뭐 며칠 있다 왜 그러냐고? 차를 골아 박았다. 애들이 높은데서 떨어져서 부러졌다, 깨졌다, 병원에 입원했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하나님이 하신 건데.. 그러면 오 주여! 이래야 하는 건데 뭐라느냐 하면 그래 얼마나 걱정되겠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오히려 자기가 목자 다됐어. 아휴 목사님 인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 속으로 잘났다. 이렇게 뭔가 맞는 일이 있어야 일이 되지.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 아닙니다. 목사님 이거는 제가 요새 정신 안 차리고 살았더니 하나님이 한번 손대신 겁니다. 저 회개 많이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 깨우치시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가 눈물을 글썽거려야지 만 이게 뭐가 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좋은 게 나올 줄 알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넣어주려고 하는데 아! 그럴 수도 있습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다 신경 쓰면 인생을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 엑셀에다 밟으셔야겠습니다. 2단 가지고는 안됩니다. 참 그러니 그렇게 해서 계속 단수가 올라가는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이시니까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같이 사는 게 아니고 뭐냐 이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하지 개가 막 사람한테 덤벼들 때 한대 때리면 멈칫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얻어맞았는데도 아호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뭐! 이게 도대체 무엇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야단치실 때는 능력이 모자라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이 이 수준에서 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작은 진노에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큰 능력으로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있는 길을 주시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음과 이웃 속에서 양심과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한 그러한 불의한 삶으로 인하여 하늘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말씀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알만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의 삶의 목표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도록 시종일관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또 믿으며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5. 진노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9:16)
우리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로마서 1장 18절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은 진노를 통해서 어떤 일들을 이루시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 백 삼십 년 동안 억압받았던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달라고 요구하는 모세 앞에서 번번이 거절하거나 자기의 약속을 어김으로서 주님의 진노를 점점 가중시켜가고 있는 애굽의 바로의 상황을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노는 애굽의 온 하수가 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개구리였습니다. 세 번째는 이였습니다. 그 다음에 파리였습니다. 그 다음에 악질이었고 그 다음이 독종이었으니 지금은 여섯 번째 재앙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이적들을 보면서, 우리들에게야 이적이지만 애굽에 있는 바로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재앙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당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놀라운 재앙의 이적들을 보면서 오늘 다시금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모세를 통해서 받게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어떻게 말하라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내가 너를 세운 것은’이라고 얘기할 때 ‘너’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입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능력을 보이시고 자기의 이름을 온 천하에 밝히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 바로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왕국과 역사도 친히 주관하시고 통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만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온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참된 경배와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기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모세에게 확실하게 바로의 왕국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렇게 깨달은 사실을 바로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애굽에 놀라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된 징벌이었습니다. 이미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진노와는 달리 신경질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을 들렸습니다. 주님의 거룩함, 그것이 드러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함께 갖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곳에 하나님이 임하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들에게는 그 순간이 말할 수 없이 복된 순간이었지만 그러나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임하심이 있을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서는 견디기 힘든 진노,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진노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성취하시려고 하실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때로는 나라를 멸하시고, 때로는 사람들의 생명을 걷어 가시고, 때로는 한 국가, 한 사회, 혹은 한 교회, 한 가족, 한 개인을 향하여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취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진노를 통해서 자기 앞에 죄를 쌓아왔던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징벌하시기 위해서 진노할 때에 심판을 받는 사람, 심판을 받고 징벌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분노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누구려 뜨려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불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불같이 타오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로서 심판하심으로서 노함의 불을 끄시고, 혹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아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진노의 마음의 불을 끄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이 광경은 죄에 대해서 인간을 향해 가졌던 하나님의 분노하는 마음을 누그려 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이 놀라운 진노가 단지 인간이 지난날 하나님께 한 일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진노의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 하나님의 복수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백성들이 그 당시에 수많은 우상과 이방의 신들을 바라보던 관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이방신, 이방인들이 섬겼던 이방신은 항상 히스테릭한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관성이 없고, 자기 기분에 좋은 대로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행동하고 인간을 향해서 인간이 쉽게 받아드리기 어려운 아주 진폭이 큰 감정의 기복을 가진 신들이었습니다. 표현을 이렇게 부드럽게 했지만 그것을 우리의 익숙한 말로 표현하면 변덕이 심한 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금방 웃고 헤헤거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폭발적으로 화를 내는 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신을 섬기면서 한번도 행복해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신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전전긍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편을 넘겨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신실하다는 뜻은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그 당시 문맥에서 보면 엄청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실한 신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그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하는 종류의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것이 신들의 분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이방의 신들의 진노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보복하고 복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든, 사랑이든, 진노이든, 심판이든, 때로는 우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하나님의 커다란 징벌이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훌륭한 뜻을 놀랍고 아름답게 매일매일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진노를 통해서 무슨 일들을 이루시는가! 우리는 이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진노가 단지 우리의 잘못한 과거에 대한 복수와 보복에 그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노를 당할 때 무섭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거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들에게 복수하시고, 하나님이 누구려질 때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받을 감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왜 진노를 발하시고, 그 심판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어떻게 이루시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향해 쏟아 부으시는 놀라운 진노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는데 얼마나 훌륭한 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를 마다하지 아니하였던 이유를 우리는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커다란 재앙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될 때 여러분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해야할까요? 오늘 우리들이 이 본문을 통해서 진리를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통해서 훌륭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하나님 안에 있는 당연한 그분의 성품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당신 자신의 모습과 성품을 가감 없이 배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품을 아는 것과 그 성품을 아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신경질 적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폭발하듯이 일관성도 없이 도덕적인 근거를 결핍한 채 인간을 향해 화를 내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노예와 같은 삶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유와 기쁨을 누릴 것을 여러분들은 기대하는 대신 ‘오늘도 하늘에서 책망이나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단지 우리를 사랑하실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한없이 방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하여 여러분들은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통제 받지 않고, 무엇으로도 억제 받지 않고, 욕심이 원하는 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부르는 하나님에 관한 이름은 모두 입에 발린 소리가 될 것이며, 여러분들의 삶은 방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기에 거침이 없는 삶이 되어서 사실상은 불신자와 같은 삶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모든 말씀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깊이 생각하고 그 성품을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누구냐? 한번 정의를 내려보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엄마는 밥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면 여러분은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엄마는 밥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마가 가지고 있는 많은 기능 가운데 일부이지 ‘엄마’ 곧 ‘밥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식당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전부다 그 아이의 엄마가 됩니까? 그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도 이렇게 균형 있는 앎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덮어놓고 살아왔던 그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시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함을 인간에 의해서 침범 당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심판하심으로 자기의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거룩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는 애써서 외면해 오거나 혹은 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너무나 지나치게 편협하고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쪽을 바르게 균형 있게 알지 못하면 저쪽 성품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탐구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자기의 선지서 속에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일에 대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여러분들 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가고 늘어가고 따라서 여러분들의 삶도 어느덧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성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격도 그분을 닮은 성품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뼈 없는 인간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장 커다란 문제중의 하나는, 커다란 문제가 둘이 있다면 하나는 뜨겁게 사랑할 줄 모르고, 또 하나는 뜨겁게 분노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큰사랑을 입었던 사람들, 주님의 큰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남다른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던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분노할 자리에서 뜨겁게 불같이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매우 분명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위에 기초한 사람들은 뜨겁게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울분과 분노와 통탄함과 가슴을 찢는 슬픔과 몸부림과 탄식과 그리고 통곡의 세계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에서 말합니다.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심판의 계시를 미리 비전하면서 그는 심판이 이루어진 때에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 없는 비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그리워하고 찾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현장 한복판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가슴속에 역사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열렬하게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기있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사람들로서 그 시대를 향해서 주님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일에 있어서 훌륭한 모본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생애를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냘픈 평화주의자로서 한 생애를 사셨습니까? 이발로 차면 절로 차이고, 여기에서 때리면 저기서 맞는 삶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생애의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릇된 길을 보고 걸어가고 하나님을 대적한 무리들을 향해 그저 눈물을 흘리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설교는 항상 사람들이 듣기 좋은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이런 말씀 들릴 때에는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지, 과연 사랑의 주님이시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많은 예수님의 설교는 축복하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설교였습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의 화인 맞은 양심을 지닌 채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진노의 설교는 정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어떤 방식으로 그 영혼들에게 전달되었는지를 그 숨결을 우리들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의 돈 바꾸는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것들을 후려치는 분노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균형 된 이해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현실에 순응하고 단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좋은 말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형벌 받을 이 백성들을 끌어안고 제사장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을 자신의 말과 삶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노하실 때 우리는 동일하게 치를 떨며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이 엄위로우심을 보이시며 당신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보이신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분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균형있게 아는 놀라운 체험들을 성경을 통해 가져야 할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왜곡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부분들이 이번 설교를 통해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단지 복수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거기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훌륭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워서 세상의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훌륭한 수단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심으로 바로와 그 백성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망하지만 그러나 그 죄 때문에 직접적으로 망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어서 그 능력의 위대함을 알게 하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슬픔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말동무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고, 그리고 떠나갔다가는 우리가 다시 호출할 때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를 다독거려주고 도와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이 신비한 천체의 광활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놀라운 권세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진정한 출발이 이렇게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앞에서 티끌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 떨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먼저 나의 삶 속에 오셔서 간섭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이웃이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 헤아릴 수 없이 넓고 큰 피조의 세계를 창조하신 주인으로서의 하나님, 그래서 오직 이 세상에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위대하고 높으시며, 나머지 우리들이 떠받들고 숭배하는 모든 사람이나 우리들이 떠받들고 숭배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은바 된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영원과 영원을 잇대는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틀동안 울산에서 집회를 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잡지를 한 권 읽었습니다. 그 속에 보니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감탄하게 하는 글이 하나 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저 ‘하늘의 구름이 비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상학자 얘기는 미터, 1미터, 1미터 1입방미터의 구름이 겨우 한방의 비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줄기 비가 쭉 내리는데 있어서 수백 평방미터 내지는 수천 입방미터의 엄청난 구름이 겨우 한 줄기가 되어서 내려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름이 가득했을 때에는 얼마나 많이 끼는지, 구름 층 자체가 몇십 키로 미터가 되어서 하늘의 백 오십 만 톤의 물이 둥둥 떠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름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순식간에 나타나서 대기수와 지상수 사이를 비율을 맞추면서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고 다시 그것들을 증발하게 하시면서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통치해 가지는 장면들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런 기상과 천재지변들을 나라를 벌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편으로도 사용하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크고 광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나타났던 열 개의 놀라운 재앙들이 단지 애굽의 바로와 신하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그 백성들을 징벌하신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주 훌륭한 선교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하나님의 진노가 선교적인 사건이었나?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선교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애굽은 4대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입니다. 4대 문명의 발상지에는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비옥한 옥토를 넓게 걸치고 있고 풍부한 작물을 재배해서 사람들이 곡식을 취했습니다. 그렇게 드넓은 곡물을 내는 땅, 곡물을 낼 수 있는 커다란 이유는 한복판에 강이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자연을 향해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강을 숭배하지 아니하였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이나 바다 같은데서 사람을 재물로 던지는 설화들을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속에는 무엇인가가 살고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굽사람에게 있어서 우상적인 커다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나일강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의 커다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곤신’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다곤’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다그’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다곤’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곤’ 자체라고 본다면 곡식이 되지만 ‘다그’에서 왔다고 보면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넓은 애굽의 강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모양의 물짐승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교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섬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숭배의 대상인 강,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고기 자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모든 하수를 피로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서 그대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충격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흘러가다가 흐름을 멈춘 강이 거대한 선지로 변했을 때 고기들은 모두 죽어서 배를 내놓고 강물 위에 하얗게 떠있는 피 냄새나는 천지가 되었을 때, 그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들은 전부다 피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수돗물을 틀면 피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정수기에서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피입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차가운 통에 들어있는 물이 시원한 피가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겪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개구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섬김의 우상이었습니다. 수없이 올려보낸 다음에 한번에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구리 시체 덩어리가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악질이 일어나게 만드셔서 모든 짐승에게 달라붙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애굽에서 어떤 신을 향해서도 제사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애굽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이 이제껏 까지 섬겨왔던 모든 우상들을 초월해 있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보면 죄악이 가득 찼다고 생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버려 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셔서 그 중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깨어난 사람들을 하나님이 준비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분인지를 깊이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진노를 보게될 때,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를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점에서 많은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키는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조차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바로는 징벌하신 것은 바로와 그 신하들이 가지고 있는 완고함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완악함 때문에 징벌을 당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커다란 고통을 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왕국이 커다랗게 손해를 보는 놀라운 역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넘어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단순히 보복이 아니라 두 종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변화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만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는 수많은 이방족속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 길에 들어서고, 그러기 위해서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한 회중이 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로서 광야 생활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피도 섞이지 않고, 살도 섞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하는 상황에 거기에 묻어서 나왔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갈 때 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있었습니까? 동맹을 맺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광야에 들어섰고,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굶주림과 질병과 고통밖에는 없었고, 그들이 점령하려고 하는 땅도 지금은 강성한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따라가 봐야 고생하는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는데 그들은 뛰쳐나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왔었는데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만이 대단하고 위대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으로 졸지에 피로 변하는 애굽의 하수와 수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애굽 사람들이 이제껏 섬겼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만이 참 여호와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그 사람들이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진노를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펼쳐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일밖에는 하실 수 없는 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이건, 개인이건, 그리고 이 세상 나라이건 죄악이 관영하고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경고와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나라와 사회와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진노로 징벌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믿는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거나 당신의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실 때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진노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 때에 즉시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바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시며 그 하나님이 온 땅 위에 뛰어난 만물을 통치하시는 전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살아와서,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삶이 불러온 수많은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함 때문에 패망의 자리에 서게 됐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처럼 멸망당하거나 혹은 진노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도 자신이 그렇게 심판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보여드리는 예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고,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매순간 겸손하게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자세의 겸비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얼마나 굴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워낙 지엄하고 워낙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는 순종할 수밖에 없고,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위대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것이다.’ 라고 하는 자부심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찮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화나게 하고, 주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기회로 삼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에 우리를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무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순간에 한 도시나 한 민족도 모두 멸하실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위대한 능력을 감추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알고, 그러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즉시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보고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진노의 불을 끄되 심판을 당함으로 능력을 보여서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회의 눈물과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진노의 불을 끄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당신을 거슬리는 자들에게 엄위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도 경고하지 않고 진노하시는 법이 없고, 미리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수차 돌아오도록 부르시지 아니하시고, 심판하는 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이 놀라운 진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이방의 백성들을 심판하고자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보내시고, 당신의 마음을 수시로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국가에게 있어서나 경고 없는 하나님의 심판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만약에 경고와 그들을 깨닫게 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는 노력 없이 하나님께서 어느 한 순간에 곧바로 심판을 행하신다고 하면 아마 이 지구상은 오래 전에 폐허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경배할 사람도 없고, 주님을 찬송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진노의 마음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수시로 교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국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얼마나 잘,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백성으로서 그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해석을 해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 개인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가지고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일과 아울러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슬퍼하시는 마음이나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읽어내는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까? 물론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에는 해명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몸이 아프면 과로했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으면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되었으면 돈을 못 벌었기 때문이고, 사업을 망했으면 경영을 잘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고 그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여관이나 호텔을 싫어하니까 배려를 해서 바닷가의 자기네 교회 집사님의 오피스텔을 이틀동안 빌려주었습니다. 잠이 안 와 TV를 보는데 PD 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드리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 제목이 뭐냐하면 북한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의 증언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명쾌한 증언이고, 실제로 인육을 먹어보았다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순대를 가지고 나왔는데 사람들이 먹어보더니 맛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안전부 요원이 걷어가서 검사를 해보니까 사람의 창자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열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중국으로 도망을 나왔는데 그 아이도 먹어봤다는 것입니다. 두 번은 맛있었는데 세 번째 먹을 때는 역해서 못 먹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아이를 잡아먹은 사람들도 심심지 않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먹느냐고 물으니까 잘라서 구워먹기도 하고 삶아먹기도 한다는 거예요. 황당한 얘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총살을 시키는데 많은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는 광경을 봤다는 것입니다. 산을 보여주는데 전부다 소나무 껍질이 벗겨져 있어요. 인가에서 가까운 곳에는, 그것을 다 벗겨 먹은 것입니다.
역사적인 회고 속에서나 나올만한 이러한 일들, 임진왜란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로 우리의 동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갖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심판하시기 전에 들려주시는 경고는 굉장히 많이 반복되는 것이고,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이 불시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맞이하고 죄 가운데서 돌이킬 틈도 없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사명은 그런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먼저 들어서 그 뜻이, 그 진노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주님의 진노하고 분노하시는 마음이 우리의 회개의 눈물로 누구려 뜨려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긍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제사장처럼 탄원하고 기도하고 그것을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외치면서 살다가 죽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게됩니까? 여러분의 이웃은 정말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두려우심에 대해서 눈뜨고 있습니까? 자기가 걸어가던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도구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곳에는 주님의 능력이 알려지고, 주님의 능력이 알려지는 곳에서는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복된 사람들은 그 심판의 와중에서 자신의 끔찍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그 심판의 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마땅한 본분이요 인생의 참된 사명이었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우리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만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훌륭한 이름을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혁혁하게 드러내어서 오만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입을 닫게 만들어 버리고, 주님 앞에 도무지 무릎을 꿇지 않던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 주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한 놀라운 방편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이 많으신 분인지를 알리는 길은 두 가지가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사랑의 예증이 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심판의 예증이 되는 방법입니다.
오늘 불행히도 바로는 그런 예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의 왕국을 박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악하는 애굽 전역에 커다란 비극이 깃들에 만드셨습니다. 이제 그 후에 일어나는 재앙가운데 마지막 재앙이 애굽에 있는 모든 첫 번째 난 것들, 짐승으로부터 바로의 맏아들까지 모두 죽어버리게 만들어서 결국은 온 땅에 커다란 죽음의 슬픔을 경험하게 하는 불행한 일들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났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발 나가달라고 애원하며 손에 금붙이와 보물들을 들려서 왕국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불행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사명을 감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안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을 증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쓰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능력으로 나타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보호하는 놀라운 힘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고 거슬리는 자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이 땅에서 쓰러버리려고 할 때에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기를 우리는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 받을 자의 표본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심판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완강히 거슬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멸망 받을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통해서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본보기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안되지 만치 그렇게 순결한 백성들, 이 땅에 남겨두면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아름답고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는 백성들로 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진노를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사랑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이시고, 선교적인 목적들을 성취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진노야말로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이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바로의 때와 유사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강퍅했던 바로의 백성들과 같은 백성들에게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실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마치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살아가는 것 같은 낯선 땅이 바로 이 땅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는 일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향해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베푸셔서 이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시기 나게 만들고, 끝까지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을 향해 도무지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나 혹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셔야 할 필요가 오늘 우리에게 대두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악한 자들을 징벌하심으로 주님의 엄위로우심을 드러내실 때 함께 멸망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라고 부른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며 우리가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전파하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이 세상의 열방이 주목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주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진노의 선교적 성격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라(출9:16)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이 땅에 진노를 베푸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져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그 하나님만이 홀로 창조주이시며 만주의 주(主)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바로의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지도록 버려 두시고 하나님의 장엄한 심판을 통해서 전혀 낯설어 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애굽 온 땅에 두려움으로 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은혜만 베푸실 때만 그분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죄인을 향해 진노하시고 진노 가운데 당신의 엄위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하실 때 조차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인이나 선지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깊이 눈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견디기 힘든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 행해질 그때에도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안락하고 좋은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이 불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그 보좌 위에 앉으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시는 그 분을 주목했기 때문에 그런 불변했던 신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제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나면 영적인 수준이 자꾸 높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일층 건물에다 아무리 인테리어를 하고 예쁜 벽지를 바르고 그래도 일층은 일층입니다. 1층의 집에 올라서서는 2층집에 가려서 그 다음 집은 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 서울에서 제일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 소방서의 망대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거기 올라가서 망을 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안 볼 곳 같습니다. 뭘 보겠습니까. 빌딩의 유리창 밖에 안 보일텐데....
그런데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안 그랬습니다. 그때 저희 초등학교 때 제일 높은 빌딩이 조흥은행 빌딩이었습니다. 우리 이문성 집사가 다니는 조흥은행 빌딩이 22층인가 그랬는데 제일 높았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낮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그 삼일 빌딩이 들어선 것이 엄청난 큰 NEWS 거리였습니다. 한국의 번영을 상징할 때는 판자촌 제쳐놓고 그것만 열심히 찍어 가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뭐 다 시시해졌습니다. 그때는 동네에 이렇게 서 있으면 우뚝 솟아오른 건물은 모두 망대였습니다. 소방서 망대. 한 5층 높이밖에 안되는 망대가 제일 높았습니다. 거기 서서 두루 사면을 살펴보면 어느 판자 집에서 불나는지 다 보이는 시절이었습니다.
신앙의 수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정성 들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잘해 보려고 해도 그건 그 수준에서만 잘 하는 것입니다. 그 수준에서 수준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한 번 만지고 지나가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수준은 전혀 높아지지 않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인식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실한 신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하고,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Q.T하고, 착실하게 교회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보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번영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자기 신앙을 져버릴 순 없었습니다. 이젠 생각하기를 ‘살 때는 저렇게 살아도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을 거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나. 죽을 때도 아주 만연의 미소를 띄며 죽는 것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요즈음으로 말하면 암 말기에 시달리다가 해골처럼 에이즈 걸린 사람처럼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웃으면서 죽고 나서는 꽃가마에 실려 가지고 호화롭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팍 깨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 수준에서는 그런 생각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한번 그의 영혼을 만지시고 눈을 뜨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뭘 깨닫느냐 하면 성서에 들어갈 때 그들의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뭘 깨달았어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렇게 궁금하게 생각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한 번에 확 뚫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의 수준이 높아진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입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화롭기를 바라고 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던 모르던 하여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안녕하고 평화롭고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꿈이고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 전쟁과 기근, 땅이 갈라지고 도시가 땅에 묻히는 그런 끔찍한 지진, 파괴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하겠습니까?
몇 년도인가? 지구가 이렇게 도는데 6시간 전에 있던 자리로 커다란 위성 하나가 지나갔습니다. 6시간 전에 있던 그 자리로 만약에 지구가 6시간만 늦게 돌았으면 지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런 재앙들을 누가 원하겠느냐? 아무도 원하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편으로 보면은 우린 그러한 소원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진노하셔서 개인을 심판하시고, 교회를 심판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실 때 그것을 우리들이 부당하다고 말한다든지 아니면은 불평한다든지 그것을 인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졌다고 있었던 인격적인 신뢰나 하나님을 가지고 있던 이런 신앙들이 허물어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방법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당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자기의 이름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이 눈을 뜨고 그런 수준에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장본인이신데,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슬리면서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아서 이제는 당신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 가를 드러내야 되겠다 라고 마음먹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개인도 심판하시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나라를 심판하시고, 교회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들을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가져다주는 생활에 미친 영향 때문에 허덕거리다가 세월을 보내지만, 어떤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전능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신 가를 새롭게 그리고 두려움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위대함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은 진노 속에서 불평하면서 비참하게 죽어가거나, 그런 진노 속에서 자기의 죄 값을 당하지마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하나님을 내가 주님으로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한없이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하나님을 내가 주님으로 부르고 있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지하면서 더욱더 그의 마음속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함과 그 정당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되겠다 라는 신령한 각오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황무하게 되어버린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통곡하듯 탄식하다가 문뜩 부흥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부흥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사야 64:1-2)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옵소서. 대적을 물에 끊음과 같이 표의 불사름과 같이 하소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하는 간구인 것입니다.
부흥을 위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핵심에 부흥의 시대마다 거기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인식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끔찍한 진노에 대해서 아주 실감나게 눈뜨게 되는 때가 언젠가 하면 부흥의 때입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 무엇을 느끼게 되느냐 하면 그러한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인식이 그 자리에 강하게 역사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느껴질 때 그때에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거기에서 한꺼번에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인격 가운데 우리들이 한자리에서 어느 한 성품만을 느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해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그리고 주님을 뜨겁게 그리워하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오랜 동안 그렇게 뵙고 싶다고 부르짖고 기도하던 것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 기회를 허락해 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그는 거기서 흐느껴 울 것이며 그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마음이 녹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 속에 심각한 불결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어두운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면 주님이 거기에 임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커다란 두려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시고 자기가 너무나 비참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하신 그 자체가 자기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핵심입니다. 부흥을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막 물 붓듯 부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정의할 수만은 없습니다. 부흥의 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의 변화의 축복도 물 붓듯 부어지지만, 거슬리는 자들을 향한 놀라운 심판도 함께 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봅니다.
아나니와 삽비라 뭘 잘못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사람 만약에 다 죽어야 한다면 교회에 살아 있는 사람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아니, 건축헌금도 써놓고 그냥 안 내고 딴 곳으로 가 버리던지 아니면은 그냥 슬쩍 넘어가 버리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지만 있는데, 이 사람들이 작정해서 써낸 것도 아니고 이것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갖다 두자 이렇게 생각하고 팔았다가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마음이 변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베드로가 칼 가지고 찔렀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심판 받고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시체로 떠 매어서 지나갈 때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그런 공포 분위기 몇 일 동안 계속 되었어요? 아닙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더 커다란 복음의 능력을 맛보았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면서 권세 있는 설교를 이루어 갖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흥에 대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느냐? 그 끈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마음에 열정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닙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오시는 그것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어야만 주님을 오심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입니다. 자기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실 때 아멘 ‘주 예수여 나중에 오소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서 오소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죄 죽임의 교리도 있고 은혜생활의 교리도 있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되는 의무도 있고 많이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을 온전히 순종하면서 정말 불꽃과 같은 그리스도인 주님이 말씀하신 8복의 그리스도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때 그의 영성의 핵심부에는 바로와 같이 거역하는 자들이 가득 찬 이 세상을 자기의 힘으로 뭔가를 봉사하고 섬겨서 이 세상을 완벽하게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하는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주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한 영혼이라도 돌아오게 하고 돌아온 영혼을 가르치고 가르친 영혼을 올바르게 서도록 권고합니다. 그런 모든 일들을 하면서도 그가 기도할 때는 항상 가슴 저미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이 사실은 창조주 여호와이시고 이들이 이렇게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하고 있는 이들의 농담이 되고 있는 그 하나님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이미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들이 세상의 거대한 풍조가 되어서 탁류와 같이 흘러가는구나! 내 자신으로서 어찌할 수 없다. 이럴 때 그가 진정으로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피에 젖은 목마른 기도는 주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 고통하는 자들을 이 죄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그런 일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한 사람도 심판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을 부흥의 본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점령하고 그 다음에는 광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때 걱정하고 근심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거기서 친일파 노릇하면서 밥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빨리 변신해서 어디 가서 줄을 서서 목숨을 부지하던가? 아니면 도망을 치던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렇게 임하실 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엄청난 위로지만 그릇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인 것입니다.
부흥 속에서는 심판과 축복이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제 하 반절에서 주의 능력을 보이시는 것과 함께 주님의 이름을 알리시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진노를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만 천하에 알리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이름이 정말 인간에게 존중히 여겨야 될 분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선교적인 목표는 반드시 우리들이 좋아하는 그런 달콤한 일들을 통해서만 성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커다란 진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그 여호와 앞에 무릎을 끓게 되는 변화와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선지자의 니느웨 선교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헌신된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가기 싫어서 억지로 가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기 있는 수많은 시민들을 무릎꿇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심으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망이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만 천하에 알리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인 목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사실은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만 천하에 알리시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고 우리는 구원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절박하고 간절한 목표인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리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사모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알린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름이 사람들에게 단어로 기억되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통해서 이름에 주인이 되는 원래의 그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한 역사를 이루심으로 결국은 그 속에서 참답게 자기를 경외하는 백성들과 당신을 끝까지 저항하는 백성들을 가려내시는 방법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때묻지 않은 정직한 복음이 아주 정직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선포되기 전까지는 그가 하나님 향하여 마음속에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탕하고, 완악하고, 아주 못 되 보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직한 복음을 듣지 못할 때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정직한 복음을 듣고 나면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부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며 떨며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상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고 호인이고, 진짜 법 없이도 살 사람 같고,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희미할 때는 교회도 잘 다니고 신앙생활도 잘하다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아주 정직하게 피묻은 복음을 소개할 때에는 증거해서 그로 하여금 무엇인가 이 복음에 대해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복음에 대해서 너의 태도를 확증하라 할 때에는 주님을 버리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결국은 나는 복음을 통해서 내게 제시하시는 내가 누구고,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나는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잘 교회에 나오고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정직한 복음이 선포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바르게 반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교회에서 피묻은 복음이 정직하게 선포되는 곳에서는 거짓된 교인이 발붙일 확률이 적어집니다. 그러나, 물 탄 복음이 유행하는 곳에서는 정말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거의 발견하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말씀을 전해서 그것이 도구가 되어서 변화를 받았던 많은 지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 변화되고 나아 가지고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까지 몰랐던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속에 심겨져서 참된 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과 자기가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성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때 사람들이 모두 하는 이야기는 뭐냐하면은 “너 잘못됐다”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하면 그것은 대답을 못합니다. 하여튼 잘못됐다. 매일 잘 들었던 이야기가 “치우쳤다.” 그것은 신앙이 골고루 균형이 잡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맨 처음에 그 말에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 맞다. 균형이 잡혀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균형을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안 잡아집니다. 이번에는 균형을 잡자. 그리고, 설교하러 올라가도 꼭 균형을 잃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래 균형을 잡자. 균형을 잃습니다. 모든지 균형을 잃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 성경을 보고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치우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균형 잡을 수 있는 잘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 그냥 잘난 사람들끼리 살게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런 균형이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것은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펴 보니까 성경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존경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밤새도록 얘기해도 다 못합니다. 다 치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물론이고 모세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날 시대에 살아 나오면 이단으로 몰릴 것이 분명합니다. 왜! 광신자입니다. 뭐라 그랬냐하면 네 골육 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습니다.
만약 내가 이 발언을 공개적으로 만약에 했다하면 당장 나는 신앙사상을 의심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얘기 그대로 했는데... 저 이상한 사람 아니냐? 자기는 천국 가기 싫다 그러더라. 모든 하나 딱 집어서 결국은 지옥이 좋다는 얘기 아니냐? 모세가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달라고 그럽니다. 뭐! 세대가 벌써 바울하고 이 사람하고는 거의 1500년이 넘는 사람입니다. 표현만 다르지, 치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을 보면 얼마나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미쳐도 그리스도를 위해 미쳤고 온전해도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하다.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온전한 것. 미쳐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베스도가 ‘너 미쳤구나’ 그러니까 ‘맞습니다. 각하’ 네가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나처럼 돌아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점은 그것입니다. 진짜 변화 받고서 보면 이 인생들이 이러고서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왜 살까? 어떻게 살까? 저 사람 맞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 사람 그리스도인 맞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곳에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 온전히 높이 여김을 받고 경배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버려서 사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온갖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혜택과 은총을 한 몸에 받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해서 살 소망을 가지고 죽고, 죽을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우리는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얘들아, 너희는 네게로 오라. 그리고 나와 함께 죽자. 이것이 예수님의 초청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어디로 가셨습니까? 주님, 어디를 가셨습니까? 어디를 가셨냐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지만 그러나 가는 그 과정은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서 갔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알려지는 그 일을 그렇게 사모하신 이유는 당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곳에 그 이름을 위해서 진실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충성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겉으로는 그럴 듯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였습니까? 심판의 메시지였습니까? 물론 목마르게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고 기다렸던 안나나 시므온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거짓된 종교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천국이 자신들에게 복 주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자신들을 깔려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태도를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을 가져온다는 경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외치고, 그의 이후에 이어지는 복음사역의 모든 생애는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집념으로 매달리신 그런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은총이 부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들이 통보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없는 사랑과 인자하신 인격을 통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아픔 속에서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만 사랑하고 구원 안 받을 것 같은 사람들은 그 목 앞에 왔다 갔다 하는 칼을 생각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수많은 영혼들, 구원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심판 받을 길을 걸어가고 있는 영혼들조차도 예수님에게는 슬픔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목 박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눈에는 한없이 불쌍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계시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의 그 인격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셔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목표는 죄인 하나 하나를 구원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거짓된 가르침 속에 묶여서 살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것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참된 것을 가르쳐 주었을 때 ‘참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그 경외해야 할 그분이 다스리고 있는 그 나라가 이러한 나라다.’ 라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쳤을 때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곳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이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리시고 나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참된 신앙의 도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 경건해 보이던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그리고,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굉장히 가까이 다가와 있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던 사람들이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해서 하고 싶어하는 일이고, 우리가 그 일을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까? 여러분들을 보면서 열심히 뛰어가던 인생 길을 잠시 멈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진노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마땅히 공경하고 경외해야 할 분이시고, 우리는 그 분 앞에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사람들에게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자신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살다가 주님께 심판을 받아서 사람들이 우리가 망하는 것을 보고,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고 위대한 분이시구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한없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겠구나! 이것을 깨닫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기서서 갑자기 이런 폼을 계속 잡으면서 이러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오래도록 이러고 있으면 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저쪽 뒤를 쳐다보려고 할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이러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제 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 뭐가 있나? 계속 볼 것입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나쁜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 눈을 비비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뭘 잘못 봤나? 그 다음 하는 말이 여러 사람이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슴에 손을 얹게 됩니다.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없는 것을 가지고 흉내를 내니까 인간의 트릭이지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영광과 경배를 받아야 하는 분이고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진심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스스로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이제 실패했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점치는 사람이나 무당에게 감화를 받은 것을 보셨습니까? 여러분, ‘귀신이 어디 있어?’ 까불며 다니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저에게 귀신을 만나서 죽을 뻔한 이야기를 쭉 늘어 놓으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기 시작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전도는 긍정적인 방법의 전도가 아니라 부정적인 방법의 전도입니다. ‘너, 굿만 하면 잘 될 텐데...’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너, 오늘 조심해’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 생각이 팍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재앙을 모면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가 전혀 믿지 않던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런 무책임한 삶, 일관성이 없는 신앙의 생활, 삶과는 전혀 유통하지 않는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그 믿음이라고 하는 이런 것들은 결국 세상을 망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두려워해야 할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 살고 하나님 앞에 어그러지고 불순종하면서도 농담 한 두 마디로 그냥 자기의 불순종한 삶을 덮어 버리고 그런 식으로 거짓된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면서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강퍅해지면서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미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아가기에는 완전히 무능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리로 말하자면 모두 부서져 깨뜨려졌기 때문에 아무리 사물을 가져다 비쳐도 사물이 무엇인지를 분간해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고 잔잔하던 호수의 물이 모두 흐트러져서 아무리 주위의 사물들이 그물 위에 비춰도 그것을 보고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리시는 가장 우월하고 중요한 방법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누구이신 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한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한가운데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전혀 인식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방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문제가 많은 이 땅에 우리를 심으신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서 거기에 합당한 자신의 태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믿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에게 공정한 하나님을 알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매일매일 공포에 절여 가지고 교회 다닌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아주 심술궂고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알 것입니다. ‘너 왜 교회 가니?’ 안 갔다 무슨 일이 일어 날려고’ ‘너 왜 헌금하니?’ ‘야, 그래도 조금 하고 많이 건지는 것이 낫지? 그 조금 안하고 많이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니?’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반대로 여러분들이 전혀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 ‘너 그렇게 살아도 되니? 하나님을 믿는 다면서? “괜찮아, 하나님이 다 봐주시지. 어차피 나는 인간이데...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상관없어. 하나님의 사람은 태평양 같은데. 새가 똥 한 번 싼다고 해서 바닷물이 더러워지겠니? 이러면서 살면 사람들이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지 않으시구나 !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했던 사람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서 그런 삶을 삶 속에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지성소를 누리고 살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마음과 삶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지성소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만남을 가진 사람들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방종한 세상 속에 방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고덩이 속에 들어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아는 나는 역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느끼면서 주저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이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좋아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겠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하신 그 하나님과 만나는 지성소가 없는데, 거기에서 그런 지성소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신지를 알고 그 앞에서 부복하여 엎드려지는 경건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는 두렵지만 거리가 먼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친밀함을 약화시키지 않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사랑으로 융합된 그 마음을 가지고 이 백성들을 향해 이 하나님이 어떻게 살으라고 명령하시는가? 생각하면서 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를 향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최선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이런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다는 미명하에 그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 하나님이 한 번 목소리를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이 망할 수도 있다고 하는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져 가고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거룩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산출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드러내는 방법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경외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단지 그의 손가락 지으신 그런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 분이 우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면, 우리는 그저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수많은 먼지와 비슷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살아갈 때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 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바로 심판 받는 비참한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대신에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오늘 수요일에도 TV를 안 보고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얘기도 아닌 죄 죽임의 교리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가책을 받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단순하게 한 번 성경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끝까지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남겨진 몫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예비하신 마지막 기업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향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입으로만 순종하고 계속해서 불순종한 삶으로 빠져 들어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몸에 배여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마지막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신 몫을 각자 그것이 폭발하는 시간과 장소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막 보고 사는 사람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끊임없는 초청을 하십니다.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당신과의 관계로 돌아와서 참다운 하나님을 아는 진리와 그 지식 안에서 참다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끊임없이 실로 지루할 정도로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도 자존심이 있으신가?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끊임없이 기회를 인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내가, 하나님이 인내하시는 것이 더 이상 당신 자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거두시고,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이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순간 하나님을 커다란 일을 통해서 한 번에 하나님을 활짝 웃게 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 나는 순교의 기회가 오면 주를 위해서 불꽃처럼 한번 죽어 볼텐데... 그런 일 안 일어나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런 장엄한 상황은 주를 위해 일생동안 작은 일에 있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을 택한 사람들에 마지막 인생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 갈까? 십일조 낼까? 이런 사람에게 ‘너 순교할래 배교할래? 그런 기회는 안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해서 진노하실 수 있고 진노하시는 것을 통해서 당신의 엄위하심을 드러내어 그 이름을 알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갈 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작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나를 기쁘게 할 것인가? 선택할 기로에 주를 기쁘시게 할 선택을 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나의 명예를 위해 살 것인가? 주님을 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진노를 통해서 주님이 누구이신 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대신에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람보적인 생애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여러분을 기쁘게 할 것인가? 세상을 좇아 다닐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좇아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오늘도 여러분들은 서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내 육체를 기쁘게 할 것인가? 사람을 즐겁게 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즐겁게 할 것인가? 순간 순간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생명이 달려있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을래? 계속 교회 다닐래?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때 순간 순간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택하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작은 것들이지마는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고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 여러분들의 그러한 태도를 향해서 하나님이 슬퍼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슬픔이 변하여서 하나님의 진노가 되는 것입니다. 쌓아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 있어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정정 자라서 아주 커다란 불순종을 행하면서도 얼마든지 그런 불순종은 괜찮다는 생각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때입니다. 교사 한 분이 주일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주일날 안 나왔습니까?’이렇게 물어 봤습니다. ‘왜 안 나왔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이상하니까. ‘어디 아팠어요?’ ‘아니요’ ‘특별한 일이 있었어요?’ ‘아니요’ ‘시골 내려갔었어요’ ‘아니요’ 그러니까 멀쑥해집니다. 그럼 왜 안나왔어요? 그냥 안나왔어요.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이천 앞 바다에 갔었어요, 그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힘겹고 힘들다는 이유 하나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된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고 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성경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고 애썼던 사람들은 너무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신경과민에 걸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상태에 떨어지든지 간에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변명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떨어지면서 “나는 지금 잘못 되었습니다. 잘못된 길로 왔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가긴 가는데 이건 가서는 안 될 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뭐 어떻습니까? 내 맘입니다.”남 이사? 어떻든 상관 마세요. 냅두십시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라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이 꾸준히 쌓여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찌하든지 우리의 인생이 선교적인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는 사람이 되겠는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매 순간 순간 그 위대하신 하나님에게 의하여 지명되어서 어두운 세상에서 부려냄을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뽑혀서 당신에 그 놀라운 사랑을 맛보도록 만들어 주시고 광야와 같은 그러면서 인생이 길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만남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들 향해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매일매일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우린 펑펑 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움과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을 함께 가지면서 살아갈 때 그때 우리는 훌륭한 선교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여금 제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마음을 유발시킵니다. 이러한 선교의 도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거치는 자들로 살고, 주님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기를 좋아하고 잠깐 동안 편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를 마구 짓밟아 버리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과연 ‘네가 망한 것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구나 고백을 받아내는 도구들이 되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바로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그 왕국이 부서지고 망가지면서 결국 거둬들인 것이 바로 우리가 믿던 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종살이 하다가 도망친 아니, 도망쳤다기보다는 늠름히 걸어서 나간 그 사람들이 믿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었어. 그것 하나 자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렇게 멸망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깊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혁혁히 드러나는 그런 도구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기를 바랍니다.
7. 사죄와 진노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罪)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所産)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背叛)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아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8-20)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사야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번 이 하나님의 특별한 진노와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몇 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항상 그렇듯이 유명한 본문일수록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매우 적게 밖에는 모르고 있을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이 본문을 좀더 깊이 이해해서 우리들이 수요일마다 다루고 있는 이 주제에 핵심에 접근 할 수 있었으면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선지자는 우리에게 유명한 말, "너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복음적인 약속을 오늘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1장 전체는 아주 비관적인 내용으로 이제 선지자가 내용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상했고, 주님의 징계를 받아서 어느 한 구석 터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나 소도, 짐승들도, 구유와 또 자기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아보지를 못하고, 그렇게 죄 가운데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징계 속에서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통해서라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불행한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항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데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책망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책망을 받고 주님의 진노를 받으면서도 죽기 직전까지도,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감정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모르는 채 그렇게 죄 가운데 징벌 받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면서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떨어지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비참한 상태를 비관적으로 묘사한 후에 갑자기 선지자는 아주 놀라운 복음의 정신을 가진 이런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자신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로 해도 너희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논리적으로 승복시킬 수 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전체적인 구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고 인간이 그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반응함으로서 우리의 신앙 생활 전체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총에 가장 뚜렷한 특징은 죄 사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트고 다시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죄 사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그는 결코 막혔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관계에서 죄 사함이 있고 나면 그 죄 사함을 통해서 주님과 자신사이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허물어진 다음에 사람들은 이제 그 허물어진 그 담장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비춰 오는 거룩한 은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받는 문을 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죄 사함 뒤에는 즉시 사랑이 따라옵니다. 교제의 회복이 따라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먼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이 죄 사함은 주님을 처음 믿노라고 고백할 때, 한번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새로운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이 놀라운 복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터졌을까요? 죽을 정도로 여기저기 터져서 모두 핏덩어리가 되고, 문둥병 환자로 말하자면, 머리끝부터 얼굴을 포함해서 다리 아래 발가락까지 한 걸음 떼어놓으면 발가락이 허물어서 떨어질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병든 그러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의 상황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렇게 비참한 몰골이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서, 누가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해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손 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두들겨 맞은 피투성이. 문둥병으로 꽃이 하얗게 핀 그러한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그들을 죄 사함으로 불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하나님의 진노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진노의 징계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은 자와 같은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 속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용서에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가장 가슴 저미는 간절한 소원은 자기에게 대항하는 자들이 징벌을 받아서 그 죄의 대가로 멸망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찌하든지 내 백성들이 돌이켜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살려준 그 거룩한 계획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심정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사죄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죄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해서 너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도 이상으로 너무나 생각하고 좌절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무너져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시고 다시 회복하실 소망을 갖질 못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에 대해서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거나 하찮게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언저리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안전의식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괜찮다. 괜찮다"는 마음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실 이상으로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제가 가기 한 2년 전에, 청년 하나가 자살했는데, 태종대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태종대에 가면 진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가 봤습니까? 신발 벗어 놓고, 거기서 뛰어내려서 죽었습니다. 뛰어내리면 아주 확실하게 죽습니다. 왜냐하면 바다로 다이빙이 안 되게 끔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꼭 ( ? )에 뛰어내려도 바다로 떨어지게 끔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전하게 죽을 수 있죠. 그런데 유서가 재미있어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자 하였으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로...... 나 여기 죽노라.' 유서 써 놓고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너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로 말미암아 가책을 느끼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가책일 경우에는 가책을 받으면서 더 처절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쪽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근데 이제 이것이 잘못된 것일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데려가지 못하게 하면서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심각성을 보여준 다음에 여기에서는 사죄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변론하자."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가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확신을 가진 자가 있느냐?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라. 너희와 변론해서 나는 이길 것이며, 너희는 설득될 것이며, 그리고 너가 가지고 있는 이론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논리가 훨씬 완벽함으로 내가 너희를 이길 수 있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양털과 같이 희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여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시겠다는 이 놀라운 약속을 이사야 선지자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죄를 향해서 진노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회의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커다란 죄라고 할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그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전에 지은 그의 죄가 오늘 하나님과의 교통을 하게 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정결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죄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 주신 후에는 하나님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큰 죄 가운데서 자신을 정결케 하신 하나님의 사죄에 감격하며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서 위대해 지기 위해서는 큰 죄인이 한번쯤은 돼 봐야 한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어 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참회하는 그 정신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새 사람 만들었고, 그 참회한 자를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용서가 그들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데려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의 마음속에서 참회의 정신이 사라져 갈 때, 그의 마음에는 어두움의 마음이 깃들이기 시작하고, 그의 심령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강퍅한 마음의 밭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적게 지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진실한 참회의 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속히 참회하는 사람들. 늘 하나님 앞에 깨어진 참회의 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내리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속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용서가 더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도저히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온전해 진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더 잘 깨닫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처절하게 자신은 결코 주 앞에 온전해 질 수 없다고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부족하고, 도저히 온전하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역설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삶을 살면 살수록, 거룩의 삶을 살면 살수록 그들은 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요동하지도 말아야 하고, 흔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유혹 받지도 말아야 하고, 더 더욱 유혹에 흔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잠근 동산과 같고, 주님 이 외에는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자가 없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온전히 구별하여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께 바쳐져야 하고, 언행심사도 모두 주의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잠시 한 순간도 세상이나 세상에 붙은 것들을 사랑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순결한 것을 꿈꾸며 거룩한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애통하며 거짓된 것을 향한 분노를 간직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 100분의 1도 못했지만 여러분들은 제가 말씀드린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살기를 원해도 내 삶의 경험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오늘도 말해 주고, 또 내일도 말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그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그 놀라운 믿음의 표준. 그렇게 살아도 주님에게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그렇게 온전하게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초청이 담긴 표준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그렇게 사는 사람 누가 있겠어?”, “어차피 이렇게 밖에 못 사는 것이 당연하잖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뻔뻔스러운 사람이고, 그 삶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 본 적이 없는 삶입니다.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과 같은 크리스천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땅히 살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그 표준을 우리들이 높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용서와 그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을 등진 우리를 십자가로 자기의 몸을 갈라 아버지와 화목케 하는 악수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에 그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뻔뻔스럽게 그렇게 사는 것인 당연하다고 하나님 앞에 말해서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좀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날마다 날마다 싸우며 이 길을 나아가며, 어제보다는 오늘이 좀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좀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날마다 더러운 우리를 씻고, 모난 우리를 깎고, 그리고 단정하지 못한 우리들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단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혀지지 않는 그 격차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죄이고, 그것은 분명히 불순종이고, 그것은 분명히 허물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단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밖에 못사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뻔뻔스러움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이 은혜 주신 것만큼 그렇게 온전히 깨끗하고 정결한 삶 그리고 그 놀라운 주님의 그 구속의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 지 못한 데 대해서 우리는 깊이 참회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용서를 받는 것 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게 끊임없이 피할 수 없는 격차를 숙명적으로 느끼면서 일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결코 우울하거나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선지자를 통해 우리보다 더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는 것처럼 자기의 죄를 진실로 참회하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진실로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사죄의 은혜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가진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는 마치 사냥꾼의 화살에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는 그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결국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를 제발 용서를 받아 달라고 애원하다가 끝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거역하는 날에는 칼이 삼키우리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죄를 향한 그런 복음의 초청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음의 강렬한 초청이 끝난 후에 다시 한번 시퍼런 칼을 되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한없이 그 죄인들을 향한 가슴 저미는 긍휼로 그들을 향해 흐느끼는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 죄 사함의 길이 있으니 너희의 죄를 진실로 참회하고 내 앞에 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간절히 그들을 부르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힘이 없고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단지 힘없고 간절하고 목 메인 간청만은 아닌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참회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의 그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시지만, 참회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그 엄위함을 보이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기 전에 먼저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하면 땅에 아름다운 것을 먹으려니와, 거역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크고 놀라운 사죄의 은총 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믿음입니다.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그 하나님의 은총의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이 사죄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그 베푸시는 은총을 향한 인간들의 그 놀라운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순종이 없는 심리학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선지자는 결국 사죄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을 그래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누구도 용서해 줄 수 없는 누구보다도 더 정결하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 앞에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오늘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야 될 유일한 삶은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타협이나 어떠한 다른 길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은 그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며 가는 것 이외에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우리는 길이 있다고 해서 그 길이 다 걸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오라고 부르고 있는 수많은 이정표가 있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이정표는 많고 갈림길은 수없이 있지만은 순간순간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만나는 것 같지만 이미 정답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죄 사함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즐거움을 누려도 주님께 순종하는 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배워야 돼요. 다른 길에서 즐거움을 배우려고 할 때, 그것은 결국은 계속해서 불순종을 낳을 수밖에 없고, 죄를 낳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도록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고기를 먹고 부추를 좋아하고, 마늘을 좋아하고, 우유를 좋아하고 그곳에 있는 토산물들을 좋아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신분에 있었지만은 그들은 맘먹으면 어느 정도 조달해서 먹을 수 있었고, 아니면 뜬 물통을 뒤져서라도 아마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런 즐거움을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즐거움은 그런 즐거움, 참외를 먹는 즐거움, 정력에 좋은 마늘이나 부추를 먹는 즐거움, 고깃국을 먹는 그런 즐거움을 광야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걸로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이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징표. 아침마다 만나게 되는 그 만나,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그 놀라운 만나, 이동하면 이동하는 그곳에 다시 새롭게 내리는 만나. 오늘 내린 만나는 어제 내린 그 만나가 아니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아침마다 새로운 증거를 드러내시기 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봐라. 나는 오늘도 너희를 위해 일한다.” 아침에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찾아오실 때 여러분, 무얼 생각하십니까?
주일날 은혜 받았는데, 수요일 와서 다시 은혜를 받을 때 여러분 무얼 생각하십니까? 수요일 날 은혜를 받았는데, 목요일 아침에 성경을 펴면서 다시 은혜를 받을 때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감격입니다. 성실하신 하나님. 아침마다 새롭게 일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우리가 주님을 위해 있는 건지 주님이 우릴 위해 계신 건지 어떤 때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항상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위해 매일 매일 새롭게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라고 매일매일 그런 은혜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음식을 매일 먹으니 지겹습니다. 그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많지도 않겠지만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합시다. 계속해서 아침, 점심, 저녁, 밤참, 새벽 해 가지고 이틀만 먹으면 질릴 것입니다. 제가 고기 좋아하는 편입니다. 근데 정말 질립니다. 미국가면 매일 고기만 줍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음식점에 들어가니까 베개 만한 거를 줍니다. 진짜 베개만 합니다. 그것을 베고 자면 될 정도입니다. 도저히 제가 음식을 남기는 사람이 아닌데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놓고 나면 이틀도 못 갑니다. 막 소화가 안되면서 그 구수한 된장국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만나는 안 그랬겠습니까. 그것도 음식인데....처음이야 꿀 섞은 과자 같겠지만, 꿀 섞은 과자 자꾸 먹어 보십시오. 그것도 죽을 맛입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안 됩니다. 그것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거 우리는 이거를 보고, 우리는 이 광야에 버림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이런 만나를 내려 주셔서 우리를 주 앞에 살게 하시는 구나 “오 주님”이래야 된다 이겁니다. 처음에 잠깐 감격하다가 다음에 “야 만나 주우러 가자.” “에이 씨, 또 만나야.” 그리고 “할 수 없지. 그거라도 먹어야지.” 그리고 갔습니다. 누구보고 아냐? 여러분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배웁니다.
인생에 갈림길에 서서 폭풍이 몰아치는 밤바다와 같이 도저히 갈 길을 모르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나서는 “오, 이제껏 까지 내가 이렇게 고통가운데서 있었던 것이 이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몰랐고, 무엇이 옳은지 몰랐기 때문에 내가 불순종했고, 불순종이 죄가 되어 하나님과 내 사이를 내었고, 그래서 내 영혼은 곤비해 졌었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근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는 처음 하나님께 나아 올 때에는 말씀으로 나를 고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 조상들이 살았던 그 모든 역사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비춰 보면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 비춰 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이고, 거기에 비춰 보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길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거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죄 사함과 사죄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있는 욕심과 그리고 내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편한 삶을 택하려고 하는 방종을 좇은 그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진노는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렵긴 하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그릇 가는 그런 비극은 없습니다. 물론 늘 사죄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내가 의로우냐?”라고 물의면 “의롭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밖에는 내게 소망이 없으며, 내가 주께로 피할 때에 주께서 나를 영접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아름다운 확신이 없습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아름다운 확신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놀랍고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 그 분께로 오는 말할 수 없는 은혜로운 죄 사함을 입은 우리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우리의 분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의 것 자기의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지나 나와서 많은 나라를 거치고 지났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에도 분명히 나라가 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에돈이 있었습니다. 그 위로는 다른 나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땅 기름진 곳. 문화가 발달된 곳에서도 살았고, 그리고 여러 나라들을 다 거쳤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영토를 얻기 위해서 그 나라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애굽땅이 아무리 기름져도, 모압과 암몬과 에돈땅이 아무리 그럴 듯 하고 거기 정착하면 편할 것 같아도 그것은 그들의 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땅은 오로지 요단강 건너편에 기다리고 있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 우리들이 맛볼 수 있는 많은 행복과 즐거움이 우리 앞에 수없이 차려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순종이라는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우리들이 먹어 볼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 형벌 받을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진노아래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가슴깊이 받아 주셨는데, 우리가 그 품을 버리고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죄의 사랑을 저버리고, 만약에 우리들이 그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가로 어떤 즐거움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그 즐거움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우리에게는 매우 좁은 길밖에는 우리 앞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거기는 길이 협착하고, 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습니다. 어울리기 좋아하고 이 세상에서 세상적으로 사람들에게로 소외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즐거움을 버리고 고난을 택해야 합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칼에 삼키운다'라는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개념이었습니다. 히브리어단어에 성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근데 칼은 여러분 기분에 볼 때, 칼은 남성일 것 같습니까, 여성일 것 같습니까? 아, 직감적으로 빨리 말해 봐요. 시퍼런 칼. (남성이요!) 여성이에요. 왠지 아십니까? “치면 잘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두 개가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는 것입니다. 쪼개어진다는 것입니다. 칼에 삼키운다 라는 이 말은 결국은 칼 자체가 강한 사람을 삼키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칼 자체가 인간을 죽여야 되겠다 라고 하는, 생명을 삼켜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욕망을 가진 인격체처럼 묘사를 해서 그 칼 자체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이고, 살해적인 의미를 여기서 아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을 삼켜도 칼은 만족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에 하나님의 죄 사함의 그 놀라운 은혜. 주님의 가슴에 피가 떨어지는 그 가슴 저미는 큰사랑을 거절하고 불순종의 인생을 살아가서 돌이키지 않는 자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가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은 이해가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 살 깊은, 살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그 멀리 떨어진 태양으로부터 비취는 그 빛을 받으면서 태양을 더듬어 아는 것 뿐 입니다. 누구도 태양을 가서 만져 본 사람은 없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으로부터 비취는 빛을 받으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조금 멀어지면 춥고, 조금 가까워지면 더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우리는 그렇게 온전히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중 극히 작은 것 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그렇게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우리들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리고 우리의 심령을 파고 들어가서 뼛속 깊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무칩니다. 뼛속 깊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무친다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집을 나간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클까요? 불러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목자 잃은 양같이 목자 잃고 헤매 이는 양들에 대한 주님의 사람은 얼마나 클까요? 우리는 누구도 그 사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것은 그저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 그렇게 집을 나간 처지에 있는 죄인들을 돌이키지 않는 불쌍한 인생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미루어 알 뿐 이지, 우리들은 그 깊이와 넓이를 다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얼핏 얼핏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과시하면서 떠들 듯이 그렇게 소란스럽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뼛속 깊이 사무친 설움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액을 짜내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 사랑을 안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우리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동일한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수많은 방해물도 그 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오는데 거침돌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떠내려오는 양자강의 홍수를 댐이나 혹은 바위나, 흙으로 막을 수 있다 하여도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곤고한 인생의 위기가 그 사랑을 막았습니까? 우리의 병든 몸이 그 사랑을 막았습니까? 죽음이 그 사랑을 가로막았습니까? 절망도 그 사랑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8. 질투하시는 하나님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嫉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滅絶)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6:15)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좀 색다른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질투라는 말은 결코 좋은 뜻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질투 속에는 왜곡된 감정이 있고 그리고 그 질투 속에는 뭔가 속이 좁은 듯한 느낌이 있고 그리고 그 질투 속에는 뭔가 정상적으로 감정의 체계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행동보다는 무엇인가 왜곡되고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친 그런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그런 감정의 체계들을 가르쳐서 우리들이 질투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당신이 바로 그렇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셨을까 하는 의문이 우리에게 듭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를 좀 빌리신 그런 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질투하시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실 때 그 계명은 항상 첫 번째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앞에 있게 하고 그 우상을 향하여 경배를 드리는 일 계명과 나아가서는 이 계명의 영광되어서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여호와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는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서 말씀하신 질투라고 하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이 질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왜곡된 감정의 체계나 아니면은 편협된 행동을 가져오는 신경질적인 반응이거나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질투의 감정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질투로 그대로 이입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군가에 대해서 질투를 느낄 때 마음속에서 저 솟아나는 그 절멸한 감정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질투는 인간에 그것과 같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질투의 감정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가득 차고 복받치게 될 때 그는 결코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잠깐 그는 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질투의 감정이 복받치는 그 진노로 가득 차시면서도 진노의 의해서 하나님의 정상적인 판단이나, 이성적인 추론들이 정지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질투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질투의 관한 이런 차이점들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자리 매김을 하고 나아가서 왜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이렇게 철저하게 첫 번째, 두 번째 계명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가 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하는 많은 잘못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겠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많은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살았습니까? 어떨 때는 여러분들이 주님보시기에 살아있는 것, 행동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렸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마음의 생각이나 계획하는바 혹은 행동하는 바가 주님을 매우 불쾌하게 해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해 드렸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번도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를 향해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는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실 때 어떤 감정을 품으셨습니까? 선하고 좋은 감정을 품으셨습니까? 아니면은 진노를 참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계명과 연관시키셔서 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행동들을 통해서 주님 마음의 감정들을 유발시키시지만 그러나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려고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동시켜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킨다 그것이 만약에 가능하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해야지만 놀라실까요? 주님은 일을 하시되 어느 정도로 하셨습니까?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우리의 존재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이 일을 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일하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하더라도 천지를 창조하시며 일하셔서 지금도 그 천지 만물들을 질서 정연하게 주장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능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도 우리 주님에게 경리를 불러 일으킬만한 일은 우리 인간이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두드리면서 감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한사람의 성도가 주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한 기쁨, 그리고 주님밖에는 더 좋으신 분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충만한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역사 했습니까? 주님이 어떤 일을 해 주셨을 때 그러한 사랑의 역사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구해 주셨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 여러분들을 위해서 구해주신 그 사건은 여러분들 보는 눈앞에서 이러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구원에 행동은 오래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심으로 터가 잡혔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여러분들을 건져내기 위해 주님의 계획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의 만져지는 삶의 외면적인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말하면 우리는 무엇으로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믿게 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에 주민등록증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영혼 속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구원에 관련된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고 예수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이 오셔서 내게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 은혜와 참 사랑을 나에게 깨닫게 해 주셨을 때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여러분들의 사업에 놀라운 번영이 일어났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위기에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평탄한 곳으로 옮겨졌습니까? 물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내가 놀랍게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랑 하나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가서 여러분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증거 하니까 여러분들은 인생 전체가 뒤바뀐 사랑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변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은바 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나로 우리의 인생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바꾸어 놓으신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같이 이 미천한 인간들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감동을 받으시고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 있고 주님이 주님을 향한 진실하고 애절한 변함이 없는 애정만 역사하고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그 사랑 때문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멈췄던 곳에서 손을 내밀어서 일 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나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하는 자의 편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려고 할 때에 주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간절히 원하셨던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의 감화를 입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래서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과 이스라엘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어하던 것이 주님이 원하셨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 남녀가 둘이 같이 사랑을 하면 좋습니다. 아니면 둘 다 서로 사랑을 안 한다든지 불행한 일은 한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한사람이 아주 열렬하게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언제든지 사랑하고 있는 사랑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매우 친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자기는 아주 절제하고 그를 향해 친근함을 표현했는데 그런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약간 돈 사람 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의 정서가 역사하지 않을 때 그때 그런 언발란스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뜨겁고 불붙는 가슴을 가지고 계셔도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서서히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격적인 감화를 받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슴을 열고 밀려들어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칼 들고 가서 난 너를 사랑해 죽을 거야! 결혼할거야! 이거는 신파극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지, 실제에 있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먼저 열기 위해서 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자에게 먼저 주님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능력의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왜 아무리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도 나를 보호할 수 없으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이제껏 우리가 보고, 섬겨온 모든 신들 위해 뛰어난 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굽을 떠나서 광야의 40년 가까운 생활 끝에 여기 요단강 건너편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 하셔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뜨거운 그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있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향해 그런 사랑을 갖고 살아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얼 원하시는가? 애굽에서 혹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에서 사랑을 나누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남의 집에서 가끔 만나는 부부와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과 만나는 공간을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면 두 사람만의 공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런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나안으로 하여금 두 가지 가나안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막혀야 하고 하나는 열려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막힌다 라고 하는 의미는 그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배신 할 수 있는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해서는 안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이 완전히 순결한 그 땅에서 완전한 교제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장소가 되길 원하셨던 점에서 가나안 땅은 막힌 땅이어야 했고 그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독점적으로 받고 하나님만을 그렇게 독점적으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이방의 여호와의 거룩한 도를 선포 할 수 있는 그런 선교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충만하게 받은 후에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독점적인 은총을 힘입으면서 그들은 담장의 문을 열고 빗장을 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계로,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욕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일생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대양 육대주를 휘저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는 목사가 그저 초라하게 한 가정을 지키면서 아이 낳고, 밥하고 빨래하면서 일생을 산 아녀자 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원동력이 되어서 인생을 사십니까? 오늘 하루 왜 사셨습니까? 그리고 내일은 무슨 힘으로 사실려고 내일에 대해서 계획을 하고 일과를 작성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가게끔 만드는 참다운 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 받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그런 관계가 이스라엘과 독점적으로 맺고 싶은 관계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맺고 싶으셨던 관계이셨던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는 사랑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랑은 그 이름 석자에 목이 메이는 것입니다. 그는 없고 이름밖에 남지 않았어도 그 이름 석자에 목 매이는 사람 그 사람이 그 이름의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어도 그 석자가 그리움이 되는 관계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커다란 고통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한 나머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낄 때만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실 때가 있습니다.
늘 대학에 총장을 지내던 톰마스에 따르면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길을 쭉 걸어 가다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때 어는 순간에 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을 향한 사랑이 뜨거워져서 그 아이를 길거리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볼을 부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아버지가 원래 자기 아버지였지만 그 아버지가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훨씬 실감나게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물론 우리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으셔서 오늘 사랑하다가 오늘 저녁에 토라져 버리시고 내일 다시 사랑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감정과 정서가 있으신 분이시지만 그것을 표출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신데 우리가 그것을 느낄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 받은 적이 얼마나 드문지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초라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가슴 저미는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함은 초라한 체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심장부에는 주님이 우리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고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재연되어 있지 않고 그 사랑의 대한 감격과 감동이 우리의 죄와 주패함으로 말미암아 신속히 느껴졌다가는 사라지고 잠시 보이는가 했다가는 다시 훨씬 더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변함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지 못하니까 당연히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다든지 아니 표현은 고사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에 대해서 한없이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본분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그 본분을 우리는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불순종은 바로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반응이 사라져 갈 때 모든 불순종은 자라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약에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그 인간은 절망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이 남아있고 사랑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허무에 굴복하거나 좌절해서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나누시길 원하셨던 관계가 바로 이러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위험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갖고 계신 간절하고 뜨거운 이 사랑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하는 죄가 하나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상숭배,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이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만 살고 싶어하는 그 땅에 외간 남자를 끌어드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간음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서 이것보다 더 커다란 욕망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놀라운 피로 구원을 얻을 때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빈부나 귀천에 관계없이 유능하고 무능한 것에 관계없이 지난날에 정결하게 살았든지, 죄로 가득 찬 삶을 살았든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주님이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니까 이런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받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이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질투를 말하시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질투의 경멸하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 뜨겁고 진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반역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뭐 조금 남편이 다른 한 여자에게 살짝 눈길을 주었는데 바가지가 날아가고 유리창이 깨지는 집안은 희망이 있는 집안입니다. 손잡고 돌아다니고 이런 일, 저런 일 다 벌어져도 바가지도 안 깨지고 유리창도 안 부서지고 모든 것이 조용한 집안은 이미 끝난 집입니다. 가정은 사라지고 집만 남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투의 감정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끔찍하게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 사랑은 핏빛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면 그 사랑을 헤아릴 수 있고 우리가 어찌하면 우릴 향한 그 하나님의 그 뜨겁고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일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주일날 참된 영성은 깊이 있는 영적인 통찰 이런 것은 모두 무엇과 관련된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관련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 속에서 죄가 온전히 사라지고 죄 죽임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나면 그 죽은 죄 위에 강력하게 흐르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현재적인 깊은 감동은 죄를 죽이고, 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현재적인 이 임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모든 요소들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 엮어져서 유기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비유를 잘 듭니다만 하나만 고쳐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편지를 받았습니다. 요새는 편지 쓰는 것도 아주 바쁩니다. 그래도 안 해줄 수도 없습니다. 내 이름을 김만중 목사님이래 이름이나 좀 제대로 쓰지도 않고 김만중 목사님 난 그래서 김만중이 누군가 그래서 다른 곳에 휙 던져 놓았는데 알고 보니까는 나한테 온 것입니다. 극동방송의 설교를 듣고 나서 새벽기도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다녔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당신 설교를 나서는 새벽기도만 나가면 뭐 될 것 같았는데 아무리 가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데 그래서 오늘 편지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새벽 기도는 당신 힘으로 나갈 수 있지만 은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나갔는데도 하나님은 왜 은혜를 안 주실까요? 그러면 이제 당신은 전에 새벽기도 안 나갔을 때는 안나와서 안 주시나 보다하고 생각했는데 나왔는데도 안주니까 이제는 돌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 마치 태어나서 상당한 세월이 흘렀는데 아이가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단을 해 보니까 희귀한 병명이 나왔는데 그게 뭐냐하면 온몸이 죽을 때까지 안 자라는 병입니다. 그런 놈을 갖다 놓고 다리 하나만이라도 정상으로 키워 보겠다고 막 약 집어 놓고 해 가지고 성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몸은 갓난아이 몸인데 다리 하나만 시커먼 털이 나가지고 쭉 뻗었습니다. 상황이 나아졌습니까, 나빠졌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지만은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의 회색지대가 없다고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설교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스펄젼도 신앙의 세계에는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을 믿고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아니면 그만 두느냐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중간이 있다라고 생각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살아가고 이는 삶의 형식이 우리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지 진짜로 그들이 중간지대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든지, 부끄러워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중간지대에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이 삶의 모든 이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면 그 사랑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불꽃처럼 사는 삶들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본분 그런 것들을 하나의 차가운 교과서적인 명제로만 남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재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차가운 습관으로 존재하든지 뜨거운 열정으로 존재하든지 둘 중에 하나지 중간은 없다 이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여러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여러분들은 다른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이런 식의 우상은 존재하긴 하지만 교회 나오는 그리스도인과는 거의 관계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가 우상을 섬기도록 강요를 받고 있습니까?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지만은 그러나 누가 생명을 걸고 자기 의사와 반해서 이런 우상을 섬기도록 강요받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심각하게 존재하는 이 우상은 사실 이런 의미의 종교적인 우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외에 우리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우상을 대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결국은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받은 상태를 계속 표현하는 말이 그 땅 안에서 가나안 땅 안에서 그 땅에서입니다. 그것이 신약으로 그대로 넘어가면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실 때에 그 독점적인 장소에서 이스라엘 백성과만 마음껏 사랑을 부으시고 마음껏 그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그런 독점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들을 구원 해 주셨을 때 하나님이 거셨던 기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하시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매울 분명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실제적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구원을 누리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독점적인 관계가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 어떤 것들에 대한 사랑도 개입되지 않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런 느낌이 자꾸 듭니다. 사역을 하면 할수록 진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높이 여김을 받는 사람은 아마 지상에서 아무도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많을 것이다. 유명해질수록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영광을 받습니다. 너무 많이 상을 잃어버립니다. 너무나 많이 범죄하게 됩니다. 너무나 많이 교만해지게 되고, 너무나 많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망 없는 존재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자기인식을 잃어버립니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유명해지고, 높아지고, 유능해 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내 인생의 최대에 행운은 누구에게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주님만을 마음껏 사랑하며 살도록 주님이 나에게 허락해 주셨다 라고 하는 이런 고백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것은 아마 매우 위험한 사람, 김목사와 비교되지 않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싸움은 사랑의 싸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우리들은 보화와 같이 생각하고 언제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그 얼굴 빛을 우리를 향해 비추사 당신을 우리를 향해 은총을 보이사 그 사랑의 관계가 초가삼간 가진 것 없고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홀로 떠날 수밖에 없는 가장 가난한 성도이리라도 마음껏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이 구원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성도의 행복이고, 즐거움인 것입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우리의 기쁨은 얼마나 많이 외부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식의 삶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참된 만족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를 의무가 아니라 특권으로 여기며 감격해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하시는 진노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불 같이 뜨거운 사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는 인생에 있어서 일부를 그의 손에 지은바 된 인생들을 에 불과하고 우리말고도 이 세상에는 주님이 지으신 인생들이 수 없이 많지만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우리의 사랑 받는 것을 하나님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여기시도록 관계를 여셨습니다. 그것이 왜 우린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에 속한 것이고 이 세상에서는 왜 하필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실 하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다는 것과 그리고 내가 그 사랑으로 이렇게 주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내 인생의 그것밖에는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그리고 내 인생의 본분은 그분 보호가 아니라 그분만을 사랑하면서 살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그런 불붙는 사랑을 배반할 때 그 때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 그 끌어 오르는 사랑은 진노로 바뀌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대상을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일 수 없습니다. 유쾌한 예는 아니지만 한번 들어보도록 합시다.
사랑이 없었더라면 질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랑이 경박한 것이었더라면 질투도 형식적이었을 것입니다. 한사람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는 그 가지고 있는 질투가 얼마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지 보면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질투는 겁주기 위한 질투가 아니었습니다. 엄포를 위한 질투가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자기를 떠나서 우상과 짝하여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하여 끌어 오르는 질투와 분노가 사랑의 깊이 만큼이나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최소의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흐르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가 와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만족해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랑이 질투로 바뀌게 만들어 주는 그 무엇이 어느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을 치고 들어 올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뜨거운 사랑이 흐르는 그 사이에도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목마르게 그리워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나 권세나 이 세상 주관자들이나 어떤 것들도 주님이 우리를 향해 쏟아 부으시는 그 사랑은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부터 하나님께 가는 사랑은 다릅니다.
조그만 어려움에도 막히고 조그마한 고통에도 좌절됩니다. 사랑하고 약속하고 아주 쉽게 식언을 해 버리고 우리를 더 즐겁게 하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 그 사랑의 약속을 파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심지어 가장 진실하게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했던 높은 수준의 경건과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향한 그 자신들에 뜨거운 사랑에 순례가 자주자주 끊기는 노래와 같은 생각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것에서도 방해받지 않는 완전한 성도의 안식을 그리워했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은 거기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이 땅에서 주님이 그렇게 갖기를 원하셨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완전히 이룰 수 없었던 이 사랑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 정을 줄 수 없었고 그 나라를 영원히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하지 않는 성도들이 내세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내세를 향한 소망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들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불붙은 질투심 이것은 내면의 마음이고 그 질투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제가 이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주님의 사랑을 진노로 바꿀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 방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아주 유아와 같은 어린 신앙을 가졌다면 여러분 아마 여러분들을 향해서 무서운 진노가 다가오는 일들은 일어날수는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어둠 속에서 건지시는 그 은혜와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매일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세밀한 손길로 어린 신자들이 알 수 없는 그 풍성한 사랑의 증거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모저모 인생의 이때 저 때에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 하시고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그런 사랑을 많이 체험하고 또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지금 여러분들이 만약에 느끼고 있고, 또 여러분들이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런 관계가 여러분들에 죄와 불순종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열심히 말미암아 깨뜨려졌을 때 분명히 여러분들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질투를 폭발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조차도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병이 된 끝에 오는 그런 심판이기에 그건 질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죄 가운데 있으면서 곤고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버리신 것 같고 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이 은혜를 내게로부터 거두신 것 같은 그런 어두움을 여러분들이 느낄 때 나는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영적인 좌절과 하나님과 관계에 단절에서 오는 그 막막함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고 계신가 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별것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이 별로 진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베푸신 사랑이 있었고, 주신 감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거져 주시는 축복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 여러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된 것 같은 어두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그러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내 느낌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사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죄, 독점적으로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에 반응하여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독점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또 다른 내 육신의 즐거움들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기에 되어서 결국은 우리가 깊은 영혼에 어두움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냉대하심이 사실은 우리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질투로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향해서 단지 질투하고 계시는 그 동안에는 진노로 말미암아 그 성경이 기록한대로 멸절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우리 같은 인간에 정말 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관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손에 의해서 진멸되어서 죽어 버린다고 합시다. 그렇게 주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은 배신으로 갚은 주님의 마음에 고통입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인간은 범죄 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마는 자기가 지은 그 죄에 갚을 칠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진노는 죄에 갚을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마땅한 심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숨이 무엇이관대 주님의 진노를 받아서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므로 주님에게 입혀 드렸던 불명예와 주님의 영광을 가린 것과 전능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이 어떻게 원위치로 복구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친절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할 미래의 범죄를 미리 예고하시면서 그들을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지 않은 과일을 먹고 아무 것도 그림에서 스스로 모아들이지 않은 그 모든 집에서 그렇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될 그 때에 너희들이 배부를 그 때에 여호와를 잊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경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그리고 이런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서 사랑으로 올케 반응하면 계속 살아가는 이 긴장된 삶을 하나님에 유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사랑에 부흥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배반으로 갚아서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을 질투의 감정으로 바꾸어 놓고 급기야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이 권고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지침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렇게 너희들이 내가 준 땅에서 심지 않은 과일을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거두어 모아들이지 않은 재산을 누리며 살아가고 그리고 너희들이 배부를 그때에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종 되었던 애굽의 종 되었던 그곳에서 너희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참사랑으로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모두 절망적인 상황 속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상황자체가 절망적이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희망이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구원의 놀라운 기쁨으로 막 바로 들어갈라고 구원은 진실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언제 거듭났는지 모르게 그렇게 모태신앙과 같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 사랑이 놀랍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위해서 내 죄를 위해 주님이 진노를 대신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게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절망하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된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며 구원받지 않으면 내 인생은 참된 희망이 없다고 라고 하는 그 정죄 가운데 떨어진 그 확실한 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확신을 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한 번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몰랐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내 인생의 혼자 잘 사는지 알았는데,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드러내는 복음의 빛 앞에서 내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거벗은 모습이요, 창조주 하나님만을 모욕하는 삶을 살았으며, 내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큰칼로 진노하셔서 우리를 베어 쪼개신다고 하신다고 우리는 성경의 기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은 의로우시다 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주님의 그 진노를 담당하신 후에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나의 하나님과 그리고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붙잡게 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누렸던 즐거움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오히려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 누렸던 작은 즐거움 구속받지 않은 그 작은 행복, 비교되지 않는 그 수많은 고통과 주님 없이 살았던 그 무목적 했던 날들, 절망적인 인생의 벼랑에 섰어도 아무 것도 의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과 사에 기로에 놓여야만 했던 그런 끔찍한 날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당하는 가장 쓰라린 고난과 고통이 주님 밖에서 맛보는 가장 크고 놀라운 즐거움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인생의 어떠한 구비에서 만나주셔서 거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아무도 부러 주지 않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셔서 구속하시고 어떠한 삶의 역사를 거쳐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인도하여 여기까지 사람으로 데려오셨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그런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잊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이 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그 독점적인 놀라운 사랑,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그 수만은 신들을 꺾으시기까지 그렇게 능력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기치 못했던 때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변덕스러운 감정을 보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 그것을 보여 주시고 싶으셔서 하나님이 잊지 말라고 그 사건을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정신으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인생의 난관에 부딪쳐서 주님의 사랑에 집중 할 수 없을 때에 여러분들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지금 나보다는 훨씬 소망이 없는 거기에서 주님이 인도하셔서 여러분들을 죽은 자와 방불한 자로 아니 이미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셔서 오늘처럼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꿈꿀 수 없었던 사람들은 주님의 신실하심이 의심될 때마다 우리 주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보십시오. 변함없이 서 있는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표징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불붙은 사랑이 질투와 진노로 바뀌지 않도록 우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어떤 죄악에서 건져 주셨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오직 구분의 능력만을 의자하고 그분의 사랑만을 의지하며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성도의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9. 은총 안에 사는 길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라(신7:11)
오늘은 이제 이 교회당을 떠나면서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시리즈를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새 성전에서 새로운 시리즈로 수요일 여러분들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읽은 앞장 부분에서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다른 표시라는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다른 표시라는 사실을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감정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이 독자적으로 받는 사람이거나 혹은 자기만이 그런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할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질투처럼 변화무쌍하거나 변덕스럽거나 예측 불가능하거나 하는 그런 기복이 있는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질투하신다고 약간은 하나님으로서 자존심이 상하실지도 모르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고 계시는 사랑이 얼마나 독자적인 사랑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만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만 사랑하면서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어떤 것도 함께 사랑해서도 되지 않으며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것을 향한 사랑을 가져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대신한다거나 대신하려고 하는 그때에는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 마음은 우리를 향해서 당신도 사랑 받는 삶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당신만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은 자기의 계명을 어기고 당신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의 진노는 한편으로는 그 사랑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인생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진노를 통해서 그 자신을 경고하시고 그래서 책망하심으로 바른길로 돌아서게 만드시고 때로는 돌이킬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멸망과 징벌을 통해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며 그분을 공경해야 할 분이며 그의 법도 안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원하시는 뜻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근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그 뜻을 어기는 그런 모든 불순종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데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가는데도 원동력이 있듯이 주님을 향해 불순종하고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게 되는 그 모든 일련의 불순종에 원동력이 있다 얘깁니다.
인간은 절대로 이 그 내면의 세계가 아무 것도 없이 텅빈 채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의 정체를 이야기합니다. 정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전진도 안하고 후퇴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 이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오늘 전진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뒤로 물러가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반드시 물러가는 것이고 거룩해져가지 않으면 반드시 그것은 부패해져 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원동력이 필요하고 주님이 준엄하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뒤로 물러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질투하고 계시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유독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만 이런 강렬한 질투의 감정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족속들이 우상에게 경배하고 악을 행하는 그것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가나안을 징벌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차 강조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의롭고 그들이 훌륭하고 그들이 잘났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들이 의롭고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땅에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이 너무나 부패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파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스리면서 아무리 하나님 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악이 극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감정은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붙는 것처럼 여기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그 질투의 감정이 불붙듯 하는 여호와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먼저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이 질투의 감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대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그 진노의 감정과는 그 종류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빛깔과 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은 놀라운 그 사랑과 비할 데 없는 그 큰 은혜와 그런 놀라운 사랑을 우기가 특별히 받은 것처럼 그런 특별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감정도 특별하다는 사실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투라는 표현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남녀 사이에서 쓰여지는 단어 아닙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 백성과 입양한 관계 혹은 혼인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독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길렀으면서도 호세아 같은 선지자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혼인한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독점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고 나만 경외하고 나만 공경하고 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러한 독점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순결한 독점적이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자매들이 아무리 사랑하고 꿈이 그리워하는 남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가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결혼을 원하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누구도 끼여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독점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우리들로부터 받으실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한없는 우리와의 관계를 다른 이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뛰어나고 귀하게 여기시면서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그런 관계를 져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특별한 사랑의 감정, 독점적인 사랑을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욕구는 아주 강력한 진노의 감정으로 바뀌어서 우리를 향해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우리가 읽은 본문에 바로 이런 이야기를 죽 들어오는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그런즉 이라고 시작된 이 결론 부분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이러한 진노하시는 하나님, 진노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러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들어가면 우상을 훼파하고 그들과 어떤 교제도 갖지 말라고 아주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다 보면 그러면 삶을 함께 나눈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결국은 그들의 삶을 형성해가고 있는 그 중심에 있는 인생관 그들의 삶을 이어가게 만들어주는 중심에 있는 그 원동력이 자신들에게 전해져오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상을 향한 사랑이에요. 우상을 향한 사랑은 극도의 자기사랑입니다. 사람이 왜 우상을 섬기는지 아십니까? 우상께 영광을 돌리거나 우상을 찬미하거나 그 우상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고 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이 살아도 그 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다고 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허영, 극도의 자기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게 하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사랑하게 금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잔인할 정도로 너희들이 만약에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든 족속들을 죽여라, 그리고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리고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 그리고 그 땅을 취해서 새 땅을 만들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 땅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장점을 결합시켜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지도 말고 모두 쓸어버립니다. 모든 더러운 것들이니 쓸어버리고 너희가 거기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뜻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교훈은 무엇인고 하니 그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해서 그 어떤 것들도 끼여들기를 원하지 않고 그들과만 독점적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성공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어주는 신앙생활을 해주는 대가로 무엇인가 하나님과 거래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자체입니다.
신앙의 참 도리는 바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기자신을 절실하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가슴 저미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서 자신도 그 하나님밖에 필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것이 결국은 신앙의 참된 도리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말씀을 드릴 적마다 저는 아퀴나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원에서 남보다 뛰어나게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니까 무엇인가를 매일 간절히 고행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상 중에 하루는 아퀴나스에게 나타났습니다.
“아퀴나스야! 내 종 아퀴나스야! 네가 나에게 무얼 원하기에 이토록 간절하게 구하느냐? 내가 네게 무얼 해주랴” 아퀴나스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금식하고 고행하며 과도히 나에게 매달리며 애처롭게 기도하느냐!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랴?” 그때 아퀴나스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제게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주시려거든 주님 자신을 제게 주시옵소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관계가 그런 관계야 심지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서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대치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사모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고 뜨겁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해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일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어야지 됩니다. 그 일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을 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며 사느냐도 문제가 되지만 누가 그 일을 하느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모든 삶을 기다란 끈에 구슬을 매달고 돌리는 것과 같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원심력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깊은 결함 그런 것들은 구심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정한 구심력이 유지되어야만 그 실에 매달린 커다란 공이 원을 그리면서 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과 함께 하는 그러한 교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누구도 끼여들 수 없는 비밀스럽고 완전한 그런 사랑,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알기를 원하시고 거기에서 깊어져 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 멋에 겨워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엇도 하고 무엇도 했고, 무엇도 할 것이라는 생각 그 속에서 수없이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정작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 그분과만 나누는 그러한 진실한 독점적인 사랑의 비밀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인데도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을 수 있고 그 삶이 가장 경건해 보이는 삶이고 이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방탕한 삶을 위하여 한번도 자신을 바친 적이 없건마는 여전히 하나님의 참 사람이 무엇이고 진정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을 만날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이야기하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특별한 이단들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은 대개 그 이단에 속한 종파에서 아주 열렬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자기는 주님을 만났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그렇게 열렬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자신이 힘에 넘치도록 헌신하고 그렇게 열렬하게 거기서 주님을 만나서 봉사를 했으면 그러면 이제 그런 이단에서 벗어나서 참된 복음이 전파되고 참된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 접하게 되면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던 뜨거운 것들은 공통이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도 자기가 진실로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웠다면 그게 진짜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다면 여기서도 결국은 가리키는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일치를 하니까 그러면 참된, 거짓된 이단에 속해서 뜨거웠던 사람이 참된 복음을 들으면 그러면 잘못된 것을 자꾸 고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의 사랑,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일치를 하니까 그 뜨거움은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아닙니다. 이단에 잘못된대서 이만큼 올라온 사람들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회복이 없습니다. 진리가 들려지고 참된 복음을 깨닫게 되면 깨닫게 될 수록 그는 잘못된 사고와 그릇된 교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사고방식과 신앙의 그릇된 견해들을 버리게 됩니다. 그것만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기서 나름대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리고 있었던 그 모든 사랑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는 다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얼마나 독점적인 사랑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얻어진 사랑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반복해서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들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어느 순간에 깊이 느끼고 눈물 흘리는 커다란 감동은 여러분들이 눈물을 씻고 그 사랑에 의한 어떤 삶을 살아갈 때만 그런 체험들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령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너희들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면서 모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명령을 지키면서 살도록 아주 평범한 권면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참된 율법에 대한 관심이 없이한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연애감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연애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혼인의 관계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밀려들어올 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런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함께 결함을 하여 서약을 하고 그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옵니까? 왜 하나님께선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주셔서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렇게 힘들여서 구원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진노의 칼을 드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눈물을 흘리시면 서도 자기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채찍으로 때려서 그 백성들을 벌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법도와 그 계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더 우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여러분들은 신앙과 양심 속에서 더 많이 괴로워할 것이며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더 많이 갈등할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서는 신앙적인 갈등을 할 것이요, 그리고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세속적인 갈등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고, 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므로 섬길 자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 건너편에서 혹은 이 땅으로 들어와서 섬겼던 많은 우상들을 택하던지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의 삶은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승부가 높은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철저히 세속적으로 무장된 사람들 세상을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 그들을 세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두 정신은 악수할 수 없고 두 정신은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패와 모든 타락과 모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악행들이 바로 이 두 정신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고 믿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웨스터 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에서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대답은 이렇게 주어지지 않습니까?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가는 본분이라고 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체하는 것도 없고 신앙에 있어서 중립지대라는 것도 없습니다. 쉬고 있는 중 그런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어제보다 오늘이 거룩해져 가면 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것이 아니면 패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그분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 가운데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유언 속에서 그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할 것이요. 만약 네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너를 버리시리라고 말입니다. 왜 그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버리는 것 그 흑백밖에는 왜 몰랐을까요? 신앙의 이해가 좁아서가 아니라 그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진노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는 죄악 때문에 그토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질투의 감정이 되어서 우리에게 진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람대신 자신을 향한 사랑, 세상을 향한 사랑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고집하려고 하는 아집 적인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으로 가득해져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중심에 모든 사람을 바친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이 무겁다거나 부담이 된다거나 너무 잔인하거나 고통스럽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언제나 전쟁 하에서 인자한 상관이 자기에게 입혀주는 같습니다. 무겁지만 그러나 그것을 입고 전쟁터에 나갈 때 칼날을 피하고 창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그의 몸을 누르는 갑옷만큼이나 가벼워집니다.
철모를 써 보신 적 있습니까? 자매님들이야 써 본 일이 없겠지만 그것을 쓰고 한동안 여름에 행군을 하면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일어납니다. 모자 하나만도 한 3kg정도 될만한 것이 화이버 하나 쓰고 화이버 위에다가 이제 철모를 함께 쓰는 것입니다. 이게 무거워서 결국은 이 머리를 누르면서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그것이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그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병사가 남긴 어느 간증에서 6.25때 치열하게 전투를 하는데 막 총알이 비오듯 날아가는데 뒤에서 소대장이 “이 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화이버만 쓰고 왔느냐” 무거우니까 아마 철모를 벗어버리고 화이버만 쓰고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총알이 그냥 뚫습니다. 그리고 딱 벗어주고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기는 살고 그리고 그 소대장은 자기한테 모자 벗어주고 자기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해서 살려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쓰면서 이제 특별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너무 잔인하고 무겁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천하지 못할 것을 아셨다고 감히 그렇게까지 생각할 때에는 이미 그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고갈된 사람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되는데 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했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모든 진노가 바로 우리의 모든 불순종과 하나님의 계명을 하찮게 여기는 죄악 된 실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만들어주는 그 모든 사악한 원동력들 죄의 영향력들을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무거운 계명을 가볍게 여기고 그 주님이 준수하도록 우리에게 부르시는 그 계명을 정말 기쁘게 생각하면서 그 길은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원동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진노를 막는 길입니다. 모든 회개는 이 두 가지의 회복을 겨냥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하여서 진노하는 장면을 상기시키실 적마다 주님의 꼭 그들에게 함께 기억나게 만드셨던 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신실했었는지를 언제든지 가르쳐 주십니다. 상기시켜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그 거스르는 불순종과 언약관계를 파괴하는 그 배은망덕한 행동과 대조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대우하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곤고하심이 얼마나 진실하고 진지했는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사랑이 그렇게 뛰어 나셨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주님의 계명을 멋대로 파괴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삶인가를 하나님이 함께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이셨던 하나님과 이방의 신들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방 신들은 그 신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는 백성들은 그 신들이 언제 화를 낼지 무엇 때문에 화를 내게 될지 무엇 때문에 그들이 진노할지를 그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데 보면 가끔 하얀 옷 입고 머리다 풀든 사람이 그런 사람은 한국에만 나타납니다. 머리다 풀고 그리고 여기다 피를 좀 떨어지는 그런 사람 그것도 남자는 안타나 나고 여자가 잘 나타납니다. 나타나 가지고 그 집안에 계속해서 흉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이유를 말해줄 때 사람들은 아! 그렇지 그럴 만도 해! 그거 내가 예상했었어 그렇게 생각합니까? 얘기하는 것 보면 거기에 있는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죽었는데 묘자리가 불편하다던 지 아니면 무덤에서 물이 계속 나온다던 지 아니면 무슨 심지어는 자기가 억울하게 죽었다던 지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사항을 요구들을 하면서 먼저 진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또 뭐 말도 안 되는 얘기 ‘배가 고파서 못살겠다’ ‘왜 제사를 안 지내주냐!’ 이런 식으로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한가지를 해주고 나면 그러면 됐겠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다른 것이 튀어나오는데 그런데 어떤 귀신은 묘자리에 대해서 예민한 귀신이 있는가 하면 어떤 귀신은 먹는 것에 대해서 예민한 귀신이 있다. 그러니까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귀신은 묘자리도 관심 없고 먹는 것도 관심 없고 복수에 관심 있는 그런 귀신도 있다 얘기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 종잡을 수 있냐 얘기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인가 격렬한 질투의 감정을 보이실 때 세상에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다니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우리가 무디기 때문이지 성경에 미리 하나님이 어떨 때 진노하신다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너희들이 사랑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보다는 오히려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하여 축복을 거두시고 진노하시는지를 훨씬 더 많이 보여주십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훨씬 더 많이 보여 주셨어요. 그러니까 아주 도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인간이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예측할 수 있게 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나는 내게 임박한 진노를 모르는데 경건한 옆에 사람은 나를 보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다가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내 일을 잘 알지 않겠어요?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삶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겠어요? 그런데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쉽게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 사람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용기가 없어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불러서 경고하기도 합니다. 그 경고가 야속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이 경고를 해봐야 저 사람이 전혀 듣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두려움 혹은 판단 때문에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잘 보이는 것입니다. 복 받을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 길로 가면 안 되는데 자꾸 간다 얘기입니다. 경고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그래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몫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자기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너희에게 두 귀를 두었느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순종하고 하나님께 축복 받는 길이 있고 하나는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징벌 받는 길이 있다라는 사실을 아주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간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이젠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사고를 좀 단순화시켜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많은 지식들을 한없이 쌓아 올리는 것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체험을 쫓아서 헐떡이는 사슴처럼 자극을 받기 위해서 쫓아다니는 짐승과 같은 태도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많은 개념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차고 그런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과 더불어서 여러분들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삶을 기뻐하시는지를 부지런히 탐구하며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걷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길을 가라고 명령하셨으니 그 길을 걷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 될 것이며 그 이외의 길은 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라도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공식이 복잡한 것 같아도 모든 신앙의 교리와 공식은 이 한가지를 결론 내리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길고 지루한 죄 죽임의 교리를 배우고 있습니까? 여러분 오랫동안 20주 가까이 들었는데 1/4밖에 안 끝났습니다. 다해도 성경의 죄 죽임의 교리를 다 말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길고 지루하고 우울한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만 사랑하고 왜 내 마음속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만이 가득하지 못하고 그렇게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왜 내 속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마음과 삶들이 자리잡고 있을까를 가지고 고민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만나는 빗줄기와 같이 여러분의 고민의 해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과 갈등이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정말 우울하고 지루한 설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우울하고 지루해 보이는 설교를 그렇게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으며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만을 사랑하는 이 독점적인 신앙을 간직하면서 일생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과 마귀와 죄악된 우리의 육체가 그 사랑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도움 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잠근 동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봉한 샘, 덮인 우물 그 속에서 샘물은 아주 정결하게 그 동산의 주인만을 위해서 순수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습니다. 잠겨졌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몇 년 몇 해전만 해도 가서 산을 보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그래도 풀 포기가 있는 산을 예외 없이 철조망 두르고 입산금지 출입하는 자는 법에 의해서 처벌합니다. 고지 판 붙어있는 산만 무성합니다. 잠그지 않고 그 동산이 동산의 주인만을 위해서 순수하게 보존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몇 군데에서 이렇게 길게는 못했지만 간단 간단하게 전할 때 아주 확연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뭐냐하면 이런 신앙의 문제 정말 신앙의 본분은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되는데 왜 나는 그러치 못할까 왜 나는 한때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가 받은 것만큼 속히 그 은혜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데로 물러나가는 원인이 무엇일가를 가지고 많이 고민하던 사람들은 빛을 만난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그것을 깨닫고 결심하는 순간 그 순간이 자기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손목이 끊어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간절한 고민과 투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사변적이고 너무 복잡하고 그런 설교를 들으면 머리 나쁜 사람들은 도저히 기독교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항상 신자들을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대구에서 젊은이들이 새 시대 새 역사를 창조해 보겠다고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 쪽에서는 대부분 원하는 설교들이 뭐냐하면 띄워주는 것입니다. 청년! 너희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일어나라! 뒤집어라! 뒤집힐 것이다. 약간은 선동적인 설교를 원합니다. 뭐 한 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니까 그 심리를 압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필요합니다. 아! 그래 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시구나 그게 났지 하나님 우리 아무 쓸모 없습니다. 그러면 힘들게 모인 게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려가는데 계속 그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줍니다. 두 시간동안 죽 사람들이 숨소리도 안 나고, 열내지 안았습니다. 왜 열내겠습니까? 열 낼 장면입니다. 거기가? 차분히 설득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그 중간에 끝나지도 않아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뭘 본 것입니까? 역사를 뒤집자 알고 보니까 그걸 못 뒤집게 만드는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여러 사람들에게 생애 적인 전환점을 주셨으리 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그런 스트러글이 있느냐 간절한 몸부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 아무리 여러분들이 신앙적인 번민을 많이 하고 들아 와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고단한 세월 다 방황하다 돌아와도 주님이 하시는 말씀, 언제나 그 말씀 “얘야, 너는 나만 사랑하고 나만 경배하고 나만 영화롭게 하며 너는 그 보람에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 50대에 돌아오면 그래도 좀 낫습니다. 똑같은 대답입니다. 방황하다 돌아오면 똑같은 대답입니다. 아무리 고민하고 긴 세월을 돌아보아도 그것입니다. “얘야 네가 나만 사랑하니? 나만 경외하고 나만 경배하니? 나만 즐거워하니? 내가니 인생의 전부니?” 그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대답입니다. 피할 수 없는 대답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 주에 걸 처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진노가 가능한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질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시리즈의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이 언제나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은총 받는 삶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는 평범한 신앙의 공식, 즉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에 관한 그 모든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보람으로 아는 것이 그 은총의 빛 아래서 사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우리는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정죄함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도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감격적인 은혜만 있을 것이며 거룩한 은총만 있을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시기가 날 정도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며 그를 붙들어 사용하실 것이며 그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