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009년 설교모음)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목 차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1. 어미가 참척에 울 때(눅7:11-16) 2009.9.9 수요예배 1
2. 자녀를 위해 울 때(막7:25-30) 2009.9.13 주일오전 8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3.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딛3:5) 2009.9.16 수요예배 18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4. 거듭남의 비결(벧전1:22-23) 2009.9.20 주일오전 27
5. 어미의 마음(창21:14-16) 2009.9.20 주일오후 34
6. 중생의 본질(겔36:26) 2009.9.23 수요예배 38
7.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스8:21-22) 2009.9.25 금요기도회 47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8.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라(행20:32) 2009.9.27 주일오후 53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어미가 참척(慘慽)에 울 때
눅 7:11-16
I. 본문의 배경
II. 참척을 당한 어미
III. 어미를 불쌍히 여기심
IV. 살리시는 주님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자녀를 위해 울 때
막 7:25-30
I. 본문해설
II. 예수께 엎드린 여인
A. 헬라인․수로보니게 여자
B. 귀신들린 딸
C. 간구하는 믿음
III. 참척(慘慽)과 부모의 간구
A. 영적 참척이란?
B. 부모의 믿음을 사용하심
IV. 결론 : 자녀를 위해 울라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3 2009.9.16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
딛 3:5
I. 본문해설
II. 성경이 말하는 인간
A. 원죄
B. 실행죄
III. 밖으로부터의 구원
A. 중생의 씻음
B. 성령의 새롭게 하심
IV.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거듭남의 비결
벧전 1:22-23
I. 본문해설
II. 인간의 고통과 행복
A. 인간 불행의 뿌리
B. 인간의 행복
III. 거듭남의 방편
A. 썩지 않을 씨
B. 살아있는 말씀
IV. 결론 : 간구하라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9.23
중생의 본질
겔 36:26
I. 본문해설
II. 중생의 본질
A. 영을 주심
B. 새 마음을 주심
1. 굳은 마음을 제함
2.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
C. 율례를 행하게 하심
III. 결론: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1.어미가 참척에 울 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눅 7:11-16).
I. 본문의 배경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가시기 전에 가버나움에 가신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이제 병든 자를 고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인이라는 성은 아주 작은 성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행하셨고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거나 또 70인의 전도대처럼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영혼을 구원하던 일에 헌신하던 전도자들의 무리였습니다.
그때 저쪽 성에서 또 많은 일련의 행렬들이 예수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장례행렬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을 멘 사람들이 가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어미가 따라오고 그를 슬퍼하고 조문하는 아마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웃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치는 것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행렬에는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앞서고 영혼을 살리는 전도자들이 뒤따르고 그리고 저쪽 행렬에는 죽은 자가 앞서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어미와 가족 친지들, 사랑하는 이웃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만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참척을 당한 어미를 만납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요즘은 잘 안 쓰는 어려운 단어인데 ‘참척’ 이라는 이 단어는 ‘참’이란 단어는 ‘비참하다.’ 라고 할 때 쓰는 단어이고 ‘척’도 그렇게 비통한 고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참척이라는 단어는 무슨 듯인가 하면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경우 그것을 참척이라고 부릅니다. 상과 관련해서는 젊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그것을 ‘악상’이라고 하고 나이가 충분히 많으신 부모님이 편안하게 수를 마치시고 숨을 거두시면 ‘호상’이라고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 호상이 나면 춤까지 춥니다. 복되다고, 왜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한번은 가는 것인데 충분히 나이가 드셔서 기력이 없으셔서 그것도 심한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간 게 아니라 편안하게 이제 기력이 다해서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편안하게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슬픔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호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어차피 한번은 가셔야 하는데 사고나 불행한 고통이나 이런 질병이 아니라 편안하게 떠나실 때 자손들은 춤까지 추었습니다. 그것을 호상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의 정 반대가 자식이 부모 앞에 먼저 죽는 것은 죽은 자식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를 불효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상에 참여를 안 합니다. 그래도 그것은 부모로서 모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참척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여자가 참척을 당한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자, 자식이 죽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이 나는데 회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저 가끔 만나던 친구 중에 한 아이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수양회를 가서 수영을 워낙 잘하니까 배 뒤를 따라가다가 배가 도착해서 강을 건너보니까 없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쇼크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찾아냈습니다. 그 부모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장로교 교인이었는데 자식이 죽고 나서 교회를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 아들을 데려갈 수 있겠는가 하고, 그런데 그분들이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었습니다. 6대 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 죽으면 다섯이나 남았는데 그까짓 것, 10명인데 하나 죽어도 90%는 생존했는데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 하나, 하나가 다 하나처럼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이 참척을 당한 어미에게 이 자식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훨씬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자식이 다섯이 있는데 하나가 참척을 당하면 슬프기는 하지만 소망은 있습니다. 왜 넷을 봐서라도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유일한 혈육입니다. 죽었습니다. 그 슬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어 죽었어도 남편이 살아있으면 다시 낳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늙었고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몇 년을 과부로 살았는지 여기에는 안 나오지만 어쩌면 아주 아이가 어린 나이 때 남편을 여위고 이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여자입니다. 하필이면 그 여자의 단 하나의 혈육인 이 독자, 외아들이 참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신학을 공부했는데 자식이 하나도 아니고 몇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땅바닥에 엎드려 막 우는데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나더랍니다. 땅을 후벼 파서, 얼마나 슬프면, 그래서 누가 그 광경을 보면서 저 목사가 저렇게 우는 것을 보니까 천국이 없는 것 같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참척을 당한 어미의 비참한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자녀 누군가가 이런 참척을 당했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마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미울 듯이 여겨질 때도 있고 아마 백 명의 부모라면 거의 모든 부모가 죽어간 자식의 목숨과 살아있는 자신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영적 참척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적 참척은 그 아이가 주님을 잘 믿다가 죽은 아이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다. 잠시 헤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참척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커다란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참척을 당한 아이입니다. 참척의 상태에 있는 아이입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 신이 믿지 못하게 복음의 광채를 그 마음에서 가리고 있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참척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참척을 당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마음이 자식에게 가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맨 처음에 만들 때부터 이 나라에 저런 것을 왜 만드는가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원도에 있는 카지노 센터입니다. 염려했던 데로 그것을 세운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난 지금도 외치고 싶습니다. 그런 것을 왜 만드는가 하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아주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재산이 4백억이나 되는 사업가였고 얼마나 절약하며 애를 썼는지 주차를 할 때도 주차를 하는 한 시간에 공영 주차장비를 내는 게 아까워서 그 사람들 퇴근한 다음에 차를 댈 정도로 그 정도로 알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우수중소기업으로 특별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초상을 만나서 친구 집에 문상을 갔다가 시간이 잠깐 나니까 강원랜드라고 하는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하는데 한번 가보겠는가 하고 주위에서 그러니까 한번 구경이나 갑시다. 그래서 가서 장난삼아서 돈을 몇 십 만원 들여서 돌려봤는데 그날 7백만 원을 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일주일 안에 다시 간 것입니다. 아마 맨 처음 방문하면 일부러 돈을 따게 해주는가 봅니다. 그래서 한 번씩 가면 돈을 따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 번째 가서 이천만원을 잃은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특징이 손해보고 못 배기는 이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좋게 말하면 사업에 있어서 지독한 승부사적인 기질이 있기도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대국적인 면을 못 보는 그런 쫌생이같은 기질도 자수성가한 사람의 떼놓을 수 없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이천만원 날렸으면 에이, 자식들 하고 털어버리면 그만인데 300원씩 주차비를 아껴서 이천만원을 모으려면 얼마를 모으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수를 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4백억을 모두 날렸습니다. 한참 돈을 잃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미국에 유학 간 우리 딸이 죽었데. 빨리 와. 사업상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하고 계속 도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람들이 나중에는 인간도 아니라고 욕을 합니다. 너는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인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식보다 더 사랑한 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제 새끼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람도 아마 진짜 그 사람의 고백대로 노름이 아니라 사업상의 일 때문에 출장을 갔더라면 접고 미국으로 갔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자기가 왜 그랬는지 그때 내가 죽이도록 밉다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육신의 자식이 죽었는데 그 죽은 자식의 육신을 보고도 슬퍼할 수 없게 된 것은 정신이 다른데 가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신이 다른데 가있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게 사랑이 떠난 것입니다. 정신이 다른데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참척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너무 강퍅해서 회심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참척한 상태에 있는 영혼을 위해서 슬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먼저 보낸 이 어미는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비통하게 울며 이 장례의 행렬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는 어떤 상태입니까? 자녀가 참척되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림을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 속에 마음에 있는데 속사람은 관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슬프지 않습니까? 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는 청교도 목사는 자기의 책 속에서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눈물과 동일한 눈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혼이고 그리고 결국은 그 형상의 원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슬퍼하는 그 마음의 핵심은 결국은 죽은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의 혈육인 자기 자식이고 핏줄입니다. 참척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중생하고 회심한 자식이 죽었을 때는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다시 만나니까. 여러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어린아이 하나가 먼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 엄마 아빠가 손을 꼭 잡고 너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기다려, 엄마 아빠가 갈게. 영문도 모르고 애는 응, 엄마 알았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영원히 계속될 하늘가족으로서의 그 삶이 어떻게 이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가족의 삶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말이 없고 자기의 죽은 육신의 상태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III. 어미를 불쌍히 여기심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참척당한 어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다가올 때 이웃이나 제자들로부터 이 여자에게 죽은 아들이 청년이며 또 독자이며 어미는 과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그 정보를 여기에다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오늘 성경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러셨습니다. 이 과부가 열렬히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이 과부가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지고 다가왔다는 이야기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이 기사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 때 주님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고 고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이 기적을 보여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봐라. 믿으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또 어떤 때는 저렇게 간구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가.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뭘 보여주시고 싶으셨겠습니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봐라, 이 여자의 믿음이 이스라엘에서 제일 크구나. 이런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믿음의 중요성이나 간구의 중요성이나 이런 것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무엇 밖에 없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것 밖에 없습니다. 이 기사는 그래서 믿음을 가져야 할 필요, 그리고 열렬히 간구해야 할 필요,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교훈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위해 참척당한 상태에서 통곡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커다란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서 아무 한 일이 없는 단지 참척을 당한 가운데서 누구도 도울 자가 없어서 통곡하고 있는 이 여인의 아들을 주권적으로 살려주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커다란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기적의 사건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그 사랑이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주권적으로 주님이 자기를 원하시는 자에게 부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오고 있는 죽은 아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보신 적이 없는 청년일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청년이 불쌍해서 예수님이 살려주셨다기보다는 통곡하는 참척에 목매어우는 이 과부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친히 울지 말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통곡하면서 우는 그 과부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애처로웠으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울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실 필요가 있을 정도로 참척당한 자식을 위해서 울고 있습니까? 그만 울거라. 울지 말거라. 죽은 네 아들보다 우는 네가 더 불쌍하구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이 울지 말라고 말씀하리만치 그렇게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마음으로 그리고 실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로 여러분들은 먹을 때나, 잘 때나, 누울 때나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식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십니까?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식을 위해 해야 할 어미의 의무가, 아비의 의무가 큰 집을 짓는 것이라면 돈이 없는 사람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유창한 글을 써서 참척의 상태에 있는 아이에게 바치는 것이라면 글재주가 없는 어미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는 것은 마음으로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기 새끼를 불쌍히 여기기만 하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 어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죽은 자기 자식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식을 잃어버리고 홀로 외톨이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중적인 슬픔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대원 1학년 때 저 시골로 전도활동을 갔습니다. 그저 동리에 있는 아녀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녀자들 중 하나가 이제 길거리에 잠깐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 전하고 났더니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까? 그럼요. 그러면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그러면 한번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다시 천국으로 갈 기회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그러면 저는 더더욱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모시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예수를 안 믿고 죽었는데 그러면 그분들은 지옥에 가셨을 텐데 내가 지금 당신의 말을 듣고 믿으면 천국을 가는데 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지옥에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있는 그곳이 어떻게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반응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면 자식 된 도리로서 차라리 거기 내려가서 같이 고통을 받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고 한동안 정리가 안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아녀자의 논리로 말한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 네 자식은 죽어서 참척의 상태에 있다가 지옥에 있다고 치자, 또 지금 참척의 상태에 있다. 그런데 네가 지금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고 치자. 그리고 미래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치자. 네 자식이 없이 간 그 나라가 천국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네가 진정으로 부모의 마음을 가진 자인가? 이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IV. 살리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시면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그리고 청년에게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었던 자가 일어나고 말도 하고 거기에는 절망에서 큰 기쁨으로 변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곧 혹은 잠시 후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르실 것입니다. 자 너희 가족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물으실 때 주님 여기에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잠시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 후에는 곧 주님 앞에 올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부모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가지만 해주면 다 해준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시켜주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회심하게 해주었으면 부모로서는 할 거의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일은 첫 번째 일이 토대가 되어 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살리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해도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의 큰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살려주셨고, 믿지 않았는데도 살려주신 이유는 혹시 우리의 자녀가 예수 믿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잘 믿고 잘 기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식을 인하여 참척의 상태에서 슬피 우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죽은 영혼으로 참척되어있는 우리 자식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사랑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믿었어도 내가 믿고 자식이 믿어서 우리 자식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무한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회심의 놀라운 역사를 주셨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특히 나이 많이 들어서 예수 믿게 된 자식이 있는 부모를 찾아서 가보십시오. 부모가 피눈물을 흘리든지, 목회자가 눈물을 흘렸든지, 주위에 누가 대신 흘렸든지 거기는 반드시 애통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을 뿐만 아니라 영으로 다시 한 번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옥 속에서 복음 안에서 내가 낳은 자녀라고 부른 것처럼 여러분들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아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영혼으로 자신의 자식을 깊이 참척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위하여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부모의 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2.자녀를 위해 울 때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쫒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 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5-30).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깨끗케 해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예수님이 베푸시는 큰 이적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넘치시는 사역이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들렸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은 평소처럼 제자들을 거느리고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두로 지방에 가셨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함께 동행 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Ⅱ. 예수께 엎드린 여인
A. 헬라인 · 수로보니게 여자
이때에 예수께 와서 급히 엎드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오늘 마가는 이 여인의 신상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대하였고, 유대인들은 기적에 있어서 헬라인들이 자신들을 따라올 수 없다고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더욱이 이 여자는 수로보니게 여자였습니다. 페니키아 쪽에서 온 태생의 여자였던 것입니다. 페니키아는 해상민족이었고 그야말로 이 사람은 고향과는 거리가 먼 남의 나라 땅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때에 여기 와서 살게 되었는지, 핏줄이 그러한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민의 구주이시지만 혈육의 계통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사람인 이 사람이 엎드리는 것은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B. 귀신 들린 딸
이 여자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엎드리게 되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여인에게 귀신 들린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딸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오직 어미인 수로보니게 여자와 딸의 이야기만 나온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추측 컨데 그저 과부로서 어린 딸 하나만 데리고 사는 불쌍한 처지의 여인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귀신 들린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다고 하는 것은 오늘 여기 성경에 쓰인 묘사를 통해 분명해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그랬습니다. 어느 귀신이 깨끗하고 청결한 귀신이 있겠습니까마는 이렇게 굳이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쓴 이유는 귀신의 영적 추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아이는 어린 딸이었죠. 그러니 더더욱 어린 딸이 이 귀신에 들려서 심각한 발작과 정신병 증상을 일으키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녹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을 내어 쫒아준다고 하는 소위 ‘축 기사’들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민간에는 이러한 퇴마사의 도움이 아니어도 또 민간 나름대로의 요법으로 이런 병을 경감시키거나 치료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비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요법들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이 딸의 상태는 아주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C. 간구하는 믿음
이러한 절망 속에서 어미인 이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유대인인 그에게 간구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에게는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믿음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 간구하였다는 점에서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믿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할 수 없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종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의지해서 간구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겠지만 수많은 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신다는 그 큰 선지자의 능력과 그 모든 기적의 베풂을 통해서 언약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을 경험했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을 때 이 여자는 자신의 처지가 심히 안타까운 처지였기 때문에 이 소문은 실낱같은 희망을 그에게 주었고, 어느덧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그 발아래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소문을 듣고 곧’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소식과 예수님이 이전에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식이 거의 같이 들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고 그분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간구한 간구의 내용은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주시기를 원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간구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여자가 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예수께 와서 자기의 딸을 위하여 빌었습니다.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여자이면서, 유대인인 예수께 엎드려 도와달라고 간청했으니 이쯤 되면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걱정하지 마라. 네 딸이 그 시로 나았느니라.” 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위로하고 돌려보내실 만한데 예수님은 매정하게도 이 여자의 도와달라는 간절한 탄원에 대해서 그 탄원을 분지르기도 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이 여자의 간절한 간구를 부러뜨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차가운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서 떡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진리, 혹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분의 진리 뿐 아니라 사랑, 자비와 은총은 우리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떡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산 떡이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 떡은 유대인들에게나 주는 것이지, 너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개들’ 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간구하는 어미와 귀신 들린 딸을 함께 묶어 ‘개들’이라고 표현하심으로 이 여자의 간구하는 기도를 부러뜨려 버리시는 것 같은 대답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예수님의 냉정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이것은 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위한 매우 훌륭한 은혜 주시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할 때만 해도 이 여자의 마음속에는 병든 딸에 대한 생각이 가득 있었고,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것은 오직 이 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하였을 때 예수님이 그 간구의 기대를 부러뜨려 버리듯이 냉정하게 말씀하셨을 때 이번에는 이 여자의 마음이 병든 딸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주권을 가졌던 예수께 모아졌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 나아가 엎드렸을 때에는 병든 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주님께서 냉정하게 말씀하실 때 이 여자의 마음은 이 예수를 붙들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예수를 향하여 불타오르게 되자, 그는 고백하기를 “주님, 맞습니다. 주인의 집에서 어린아이들이 밥을 먹는데, 그 집의 개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와 내 딸을 개로 취급해도 좋겠으니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고 남은 어떤 긍휼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나에게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언가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단번에 들어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도하지 않고 마음에 생각만 했는데도 들어주시는가 하면,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시간을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가슴 아프게 기도했는데도 응답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을 때도 있지만, 명백하게 하나님이 원하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의 시기를 지연시키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기도하는 우리를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섭리 가운데 우리를 이끄시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는 기도제목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기대가 좌절되고 주님께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우리의 마음은 예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래서 기도제목으로 가득 찼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지만, 주님의 마음이 가득 찼을 때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산불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 해 전에 고성에서 훈련을 하다가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나고 그 불길이 고성군 전체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절도 태우고 수많은 집들과 수많은 재산을 태웠습니다. 그 불이 꺼지고 얼마 안 되어서 갔을 때의 그 광경은 처참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산과 저 산 사이에 4차선 도로가 나 있고 양쪽에 인도도 있는데, 저쪽에서 붙은 불이 건너편 산으로 옮아와서 길 건너에 있는 산까지 태운 것을 보고 저는 불의 위력에 깜짝 놀랐습니다. 밤이 되어도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불길이 무섭게 치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번지는 산불이 무섭기는 해도 절대로 쇠를 녹이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그 불길에 비해서 산소 용접기에서 나오는 그 작은 불은 얼마나 하찮습니까? 그러나 그 불꽃은 산에서 타오르는 불꽃과는 다른 불꽃입니다. 그 불길은 집중된 불길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그 큰 산불이 녹이지 못하는 쇠를 그 산소 용접기의 작은 불꽃은 쇠를 녹이기도 하고 자르기도 하고 단단한 쇠를 물처럼 흘러내리게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원하는 기도의 제목을 품고 아무리 뜨거워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께 집중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한 역사가 불붙어 타오를 때, 내 마음의 그 불꽃은 아주 작은 불꽃이지만 쇠도 녹일 수 있는 집중의 힘이 있는 것이죠. 집중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는 집중한 상태의 한 마디의 신음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는 더 큰 기도가 되는 것이죠. 이런 마음의 불꽃과 같은 집중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무엇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종종 하나님이 분명히 기뻐하실 기도의 제목인데도 가혹하리만큼 그 응답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마치 은을 일곱 번 단련하듯이 단련하여 순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딸을 위해 기도할 때 단번에 그 간구를 분질러 버리는 것처럼 냉정하게 취급하셨을 때 이 여자의 믿음은 더욱 치열하게 타올랐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을 채우고 그분께 영혼의 응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되었고, 그 절대의존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통해 기도하는 과정으로 우리를 바꾸시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인 절대의존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이 여자는 탄식하듯이 고백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당신 이외에는 아무 곳에도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곳이 없고, 당신만이 나와 내 아이의 인생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어린 딸을 사랑하던 이 엄마의 마음은 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예수께 간절히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어미의 마음입니다.
나는 종종 어린 나이에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슬픈 부모들을 목회하는 중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무엇으로서 그들을 위로해야 될지 차마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하고 느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부모의 아픈 마음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가 만약에 질병에 걸렸다면 속히 의원에게 데려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병원이 너무 멀다고, 치료비가 많이 들지도 모른다고 아이를 고쳐주기 게을리 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 병이 심각한 병이라면 여러분들은 온 맘을 다해서 그 병을 고칠 의사와, 그 의사에게 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매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여인을 보면서 여러분들 자식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여자처럼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부모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식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우리 자식은 이 여자처럼 흉악하게 귀신 들린 자식도 아니고 또 어린 딸도 아닙니다.”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체가 이렇게 병들고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혔을 때 믿음이 없는 이 여자가 예수께 이렇게 매달렸다면, 이미 믿음이 있고 예수를 알고 영적으로 죽은 것 같은 자기의 자녀를 둔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예수께 간절히 더 매달려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새끼를 낳기만 하면 모두 부모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물적 사고방식입니다. 동물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모두 부모가 아니라 삯꾼 부모도 있습니다. 그냥 시집 장가를 갔고 쾌락을 즐긴 끝에 자식이 태어난 그런 부모들 말입니다. 자식을 낳았지만 아무 목적도 없고 그저 자신의 인생을 위한 한 장신구처럼 자식을 생각하고 그리고 팔자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되는대로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이 삯꾼 부모입니다. 자녀의 영혼을 위해 근심하지 않는 그 부모가 삯꾼 부모이고, 자녀의 영혼과 정신을 위해서는 황폐하도록 내버려두고 육신만을 보양하는 그 부모도 바로 삯꾼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부모가 아닌 삯꾼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와 어두움 때문에 자기가 원하지 않지만 삯꾼 부모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무지하지도 않고 어두움에 있지도 않은데 사랑 없고 자기 사랑의 욕망에 붙잡혀서 자식을 향하여 삯꾼 부모가 됩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가장 거룩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결혼의 열매로 맺어지는 자식은 그 출생이 가장 거룩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주셨을 때, 그 부모가 부모를 통하여 자식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가르치기 위한 훌륭한 교사로, 하나님의 본보기로 이 자녀들에게 부모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참된 사명은 바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고 어떻게 하나님과 멀어진 세상인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고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해서는 죽은 영혼으로 태어나는 죄악에 출생하는 자식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동안 참된 부모가 되어야 할 길은 포기하고, 삯꾼 부모가 될 길만을 택하며 걸어간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자식들의 부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을 돌보는 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 것처럼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자녀들로 구원을 이루는 지혜가 성경을 통해 주어지게 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Ⅲ. 참척과 부모의 간구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 귀신들린 부모를 보면서 참척과 부모의 간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참척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참척이란 단어는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지만 비참할 참(慘)자에다가 가슴 아프고 괴롭다는 의미의 척(慽)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참척이라고 하는 어려운 한자어는 바로 부모를 앞두고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참척이라고 부릅니다. 삶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호상이 있습니다. 부모가 나이 90이 넘도록 충분히 건강하게 수를 누리시고 어는 날 잠자는 것처럼 돌아가셨을 때 그것을 우리는 호상이라고 부릅니다. 제사를 지내고 상을 치르지만 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상주들에게 축하해 줍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부모가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수를 평안하게 누리고 잠자는 듯이 갔으니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다 누렸는데 어찌 곡을 하겠느냐는 것이죠. 심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안의 상중에 와서 꽃을 꺾어들고 춤을 추면서 호상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악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젊은 나이에, 어린 나이에 자식이 죽는 것을 가리켜서 악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악상은 그야말로 자식이 어쩔 수 없이 죽었지만 부모에게 커다란 불효를 한 것이고, 악상인 경우에는 자식의 상중에 부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관례입니다. 그 상중에 나타나지 않아도 부모의 마음은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고, 동네 사람들은 자기 아들을 산에다 묻지만 부모의 마음에는 이미 그 아들이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썩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가슴을 녹이는 한이 되어 마음속에 품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참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먼저 여의게 되었을 때 그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미는, 아비는 미친 듯이 울부짖을 것이며 자신의 생명과 죽은 자식의 생명을 바꿀 수 있다면 백만 번이라도 그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까짓 육체의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인생은 잠시 살다가 지나가는 것이고, 십 년, 이십 년을 더 살고 덜 사는 것이 영원 속의 한 점처럼 왔다가 사라져가는 인생사에 비하면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미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이 잠시 머무는 육체의 죽음은 사랑이라는 버릇을 급히 끊어놓느라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프기는 하지만, 결국 이 육체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는 만남과 이별의 사슬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육체를 벗게 될 때에 그것은 영원히 함께 살 동고동락의 행복이며 육신의 껍질을 벗음이 곧 부활 시에 다시 입을 거룩한 육체의 옷을 덧입기 위한 준비인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A. 영적 참척이란?
그러니 육체의 참척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영혼의 참척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생기발랄하게 뛰어놀고 있지만 영혼으로는 참척의 상태에 있어서 부모인 내 영혼은 살아서 우리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사랑하는 내 아들의 영혼, 내 딸의 영혼은 죽은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어떤 교제도 없이 육신은 빛 가운데 거할 때에도 영혼은 흑암 에 있고 온 육신은 자유로운 가운데 있어도 영혼은 피 흘리듯 결박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영적 참척의 상태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이 참척당한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울어줄 것입니까? 목회자가 그를 위해 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여러분 자식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기업이 아닌가요? 여러분들의 태의 열매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자녀가 영적으로 죽어있고 영적으로 참척의 상태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어떻게 편안하게 밥을 먹고 편안하게 눕고,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행복해서 매일매일 웃고 재잘거리며 생활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영적인 눈이 감기지 않고야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자녀가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들렸다면 여러분들에게 더 중요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거기가 어디든지 여러분들은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중요한 일도 여러분들에게는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자기도 죽은 영혼이었기 때문에 참척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부모 밑에서 영혼을 돌봄 받지 못함으로 그 긴 세월 동안을 방황하고 어두움과 죄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흑암을 헤매며 버림받은 자처럼 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부모도 내가 참척당한지 모르며 살 때에 주 친히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의 영혼에 손을 내미시고 당신의 주권으로 그 참척의 상태에서 살리셨으니 죄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은총의 빛 아래서 살고 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내가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는 것과 내 영혼이 주님이 복음의 빛으로 내게 다가오시기까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내 부모로부터도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참척의 상태에 있는 나를 위해서 빌어주지도 않았고 울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미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도 알고, 은혜도 알고, 죄도 알고, 심판도 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주지 않습니까?
토요일 날도 교육관에 가 보니까 수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손에 손을 잡고 모여요. 그래서 “무슨 일로 토요일 날 이렇게 왔느냐?” 고 물었더니 등불학교 면접을 보러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마음속으로 그랬어요. ‘얘들아, 너희들은 정말 복 받은 애들이로구나. 이제 유치부 어린이들인데, 초등부 다니는데 이렇게 너희들이 엄마의 손에 아빠의 손에 이끌려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돌봄을 받는구나. 참 너희들은 행복하겠다.’ 그랬습니다. 우리 한번 감추지 말고 우리가 아는 복음의 진리의 빛으로 그대로 판단해 봅시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한번 적나라하게 복음의 빛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자녀들은 이미 회심하였을 것입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회심의 열매가 없으며 그 회심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녀 중 어떤 자녀는 아직도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5년째 되었지요? 회심집회 시작한지. 그런데 여러분, 그때에도 ‘우리의 자녀가 곧 회심하겠지.’ 그러던 자녀가 벌써 초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자녀들은 이제 거의 고등학교를 마쳐 갑니다, 중학교 다녔던 때 기도했던 그 자녀들이 이미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회심 안 했죠? 앞으로 5년 뒤에는 저절로 회심하라는 법이 있나요? 가슴 아픈 얘기지만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는 틀림없이 죽을 때까지 회심 안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런 가능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끝까지 신앙을 거부함으로 불신자로 살다가 죽는 사람들, 있을 수 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칠 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천국에 갔습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얘야, 내가 너에게 기업으로 준 자녀는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실 때 저 어두움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 “왜 부모로서 나에게 단 한 번도 이렇게 주님 앞에 회심하지 않은 자를 위해 예비한 불붙는 고통스러운 지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 적이 없습니까? 어머니, 아버지.”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 여러분들이 서 있는 거기가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자녀의 위험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 부모의 영혼의 병든 상태를 보여줄 뿐이에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찼을 때 남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피붙이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뿐이지,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아졌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자녀가 무엇이 변화가 되었으며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날이 지날수록 마음은 더 강퍅하게 되고 지성은 이 세상의 사상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점점 더 어리석은 것으로 그 마음에 비치고 그의 감정은 점점 육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무슨 좋은 일이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B. 부모의 믿음을 사용하심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 여자,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이 자기 딸을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자기 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귀신에 들렸고 나이는 어린 딸입니다. 더럽고 흉악한 상태가 되어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제 정신도 없는데 어떻게 믿음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이 여자아이를 낫게 했고, 우리는 틀림없이 귀신이 내어쫒기는 과정을 통해서 이 딸에게도 자기를 고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종의 믿음이 심겨졌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이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간절히 믿고 자식의 영혼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처럼 안타깝게 매달릴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셔서 자녀들에게 믿을 마음을 주시고 순종할 뜻을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로 회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마음에 꽉 찬 사랑과 자녀의 영혼을 향하여 눈물을 머금고 손을 붙들고 복음의 진실을 말해 주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네가 참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해 보십시오. 잘 아는 가족들끼리는 진리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합치하는 삶이 있을 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진리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들을 사역할 때 장난만 치고 도저히 회심을 안 하는 애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자기 친구들이 먼저 꺾어져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고 나니까 얘가 무서워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분명히 변했거든요.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모르는 거예요. 가족의 변화가 그런 것이에요.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줘 보십시오. 은혜에서 멀어질 때 얼마나 괴로운지를 보여줘 보십시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행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면서 사는 거죠. 가치가 없는 허탄한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기며 살기에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들을 위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것이에요. 여러분의 자녀가 참척의 상태에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들이 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 자녀가 죽어서 관에 누워 마지막 얼굴을 나에게 보여 주는데, 이윽고 사람들이 나를 때내며 관 뚜껑을 덮으려고 할 때 굳은 손으로 그 관을 부둥켜안고 우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의 죽어 누워 있는 영혼을 위해 이렇게 몸부림치며 울고 계십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고, 가슴 치는 사람들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부모들이 여러분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슬픕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신앙과 회심에 대해 무관심한 그 쓰디쓴 열매들을 인생을 살면서 거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자녀를 낳아서 두 가지만 해주면 부모로서 거의 다 한 거예요. 교육을 받게 하고, 그 아이를 회심에 이르도록 한다면 부모로서 거의 모든 일을 다 한 것이에요.
Ⅳ. 결론 : 자녀를 위해 울라
나는 이 세상의 기독교인의 가정에 더 많은 자녀를 위한 눈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삯꾼 부모들이 말고, 참된 부모들이 많이 있는 것은, 교회에 삯꾼이 아니라 참된 목자가 있어야 될 필요성보다 절대로 덜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전 지난번에 네덜란드에 갔을 때에 좀 새로운 인상을 받았고 앞으로 한 번 연구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방문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 덩치의 두 배 되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사용되는 비용은 막대해요. 그런데 화란에 가니까 화란 뿐 만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모든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당들이 다 본당 건물 하나만 달랑 있습니다. 거기 와서 밥 해 먹고 그런 거 없습니다. 시간 돼서 와서 모두 모여서 예배드리고 모두 집에 가는 거예요. 그리고 주일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어떻게 해요? 집에서 쉬고, 경건서적을 읽고, 당일 들은 설교를 함께 나누고, 그리고 꼭 필요하면 가난한 자를 찾아가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하는 그 정도예요. 이렇게 주일학교 교육이 층층이 있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됐단 말이죠. 그 위대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지금도 화란에서 신앙 좋은 가정에서는 밥 먹을 때에 아이들 둘을 앉혀놓고 교리문답 하나 외우고 함께 식사해요. 그 부모가 가르쳐 주는 거예요. 집에서 이 교육을 담당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예배드리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고 심방해주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어때요? 지금은 교회에서 주일날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서 가정에 보내면 다음 주일날 올 때는 다 털어놓고 냉장고가 되어서 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서너 시간 동안에 돌려서 용광로를 만들어서 보내달라니, 자기들이 한 번 와서 해 보라고 해요. 그게 되나.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도움 없이는 이 교회 교육이 성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거꾸로 주도권을 가정에서 지니고 있어야 되요. 가정에서 품어야 해요. 그러니까 자식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부모는 애를 낳지 말아야 해요. 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생각하기를 가장은 목사에요. 그 부인은 전도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녀들은 자기의 교인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정에서 교육을 시킨 거예요. 신앙교육을. 그런데 교회에서 다 차려 놓고 보내만 주면 어떻게 한번 해 보겠다는데도 안 보내요. 그래서 마음이 아픈 거예요. 등불학교 만들어서, 물론 등불학교 차고 넘쳤어요. 280명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할 정도에요. 그렇지만 그렇게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은 훨씬 더 많단 말이에요. 그런데 무엇을 해도 요동하지 않는 부모들이 있어요. 나는 묻고 싶어요. 왜 자식을 낳았느냐고. 더 심하게 말하면 “그대가 부모입니까?” 묻고 싶어요. 거울을 보고 한번 스스로에게 말해 보세요. “하나님, 제가 엄마입니까?” “하나님, 제가 아빠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거울은 말할 거예요. “아니다.” 라고. “넌 삯꾼이다.”
회심집회를 해도 그냥 와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부모들은 다 회심한 부모예요. 진짜 회심하지 않은 부모는 나타나지도 않아요. 애들을 보내지도 않아요. 다른 부모들은 금식을 한다, 기도를 한다, 철야를 한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심지어는 집안에 있는 자기 친척 애들까지 불러서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게 해 주려고 하는데, 정작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해요. 두렵지 않으세요? 그렇게 하다가 주님을 어떻게 뵈올려고요? 나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세상을 위해 울기 전에 자기의 새끼들을 위해 운다면, 우리의 교회가 자기의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해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예수님이 얼마나 쓰라리셨겠어요? 머리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은 채찍에 맞아 피가 낭자한 가운데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에 통곡과 눈물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힘겹게 예수님이 고개를 돌리시며 여인들에게 남기신 한마디, 유언과 같은 한마디 말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다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는 내 새끼를 위해 흘릴 눈물도 없나이다. 내 영혼을 버려둔 것처럼 내 자식의 영혼도 팽개쳤고 나는 삯꾼 부모입니다.” 고백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일천하고 예수님을 만나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이 여자가 예수께 와서 간절히 구하며 그분께 매달렸을 때 주님은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그 딸을 고쳐주셔서 이 가정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이러한 영적 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복음에 대한 여러분의 자녀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지만,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여러분들의 태도가 변하기를 이제껏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을 찢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너희의 회심이 지연되는 것은 이 어미의 아비의 마음이 강퍅함 때문이다. 나를 용서해다오. 주님, 내가 이 아이의 부모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아이에게 회심을 주시든지 나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 참척당한 내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영적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3.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날에 인간들이 어떻게 신앙을 떠날 것인가를 보여주고 그것은 미래에 될 일뿐만 아니라 이미 그 당시에 목회자들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적하고 난 다음에 사도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의 근본을 강조하며 그 기초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로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함께 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회고하듯이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의 행한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생”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중생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인데 그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은 이 중생과 회심의 교리가 이제 거의 교회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한 사단의 가장 성공적인 도전인 것입니다.
이 성경적 기독교 신앙, 이것은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생에 관한 교리는 눈으로 말하자면 돌쩌귀와 같습니다. “돌쩌귀”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영어로 말하자면 “신지”입니다. 문이 커다랗고 무거운 문이 아이들이 밀어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 큰 문이 열리기 위해서는 문이 움직이면서도 위아래가 고정되어있어야 합니다. 고정되어서 매달려있고 그래서 적은 힘을 주기만 해도 문이 움직이지만 위아래로 붙들어주고 있는 그 기둥 같은 신지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신지라고 부릅니다. 신지가 떨어지면 그 문은 주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 움직이는 문이라면 이 중생과 회심의 교리는 문의 신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중생과 회심의 교리들이 깡그리 잊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의 어느 교수님이 개인적인 석상에서 고백하기를 자기는 교회에 갔을 때 선명하게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는 진지한 외침을 30년 전에 들어보고 아직까지 못 들어봤다고 했습니다. 이게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중생의 교리가 그렇게 문의 신지처럼 중요하다면 그러면 그 교리는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상태, 영혼이 사망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살아서 움직이고 먹고 하는 이것은 영혼이 죽어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고등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적으로 그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이 영혼의 교제를 통하여 미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방향이 정해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는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단지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이 죽어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어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영혼은 죽어있으면 죽은 행실을 맺습니다. 그 죽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물리적으로 완전히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영적인 관계가 없는 동물들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면 그 삶이 동물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이제 살리신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II. 성경이 말하는 인간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왜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안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도 없고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것은 결국 죄의 영향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완벽하게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그 절망은 결국은 죄로 나타납니다. 죄 때문에 절망적인 존재이고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죄룰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A. 원죄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도 원죄라고 말하고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들이 물려받은 것도 원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만이 원죄이고 우리는 물려받은 죄다. 라고 혹은 본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째든 이 원죄는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우리가 그 모든 죄를 물려받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원죄는 왜 생겼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처음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처음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두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돌보라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영적인 은총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존재하고 유지되어야지만 보다 높은 창조의 목적을 실현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렇게 이 세계가 아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질서 있고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개척되어져서 하나님이 이미 이 세계 안에 주신 더 아름다운 세계가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인간이 노동과 봉사를 통해서 가꾸어나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이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할 수 있으면 우리 때문에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오도록 우리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얻고 그리고 또 참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써야지 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공직을 맡은 사람은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학문에 이치를 탐구하고, 교육을 하는 사람은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들에게 참된 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주십니다. 그것은 동산나무에 있는 실과는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보통나무였고 과실도 그냥 보통 있는 과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을 것이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나무 앞에 설 때마다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대신해서 다스릴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가장 잘 보이는 그 나무 앞에서는 이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하며 자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이야 말로 이 모든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시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해서 그 실과를 따먹었을 때 그 실과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동기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땅에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그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할 높은 왕의 대리자와 같은 위치에 하나님이 두셨지만 그는 수많은 피조물들 위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분 하나님 아래 있는 것에 불만하며 하나님처럼 되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이 세계를 창조주로서 직접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궁극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아름다운 상호연결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셨고 세게 안에 찬란했던 영광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습니다. 우주 안에 가득했던 자연적인 영광도 거두어가시고 또 인간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아주 영혼과 육체와 마음 간에 아주 아름답고 질서 있는 관계,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의지로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인간과 창조된 모든 세계의 만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아는 이런 명료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트려져 하나님에게 낯선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깨트려져서 사랑하고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를 본받으며 만족한 가운데 불멸의 낙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죽고 죽이는 그런 갈등과 미움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관계가 끊어져서 이제는 인간을 명령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도망 다니고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받을 해를 무서워하며 오히려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니 섬김을 받아야 할 자연을 인간이 종노릇하며 섬겨야 할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과의 관계도 끊어져서 이제는 혼란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지은 죄는 아담 안에 그대로 남아서 이 죄는 그 모든 후손들에게 물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한 사람 개인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대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맛도 보지 못한 선악과 때문에 이렇게 원죄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만약에 아담이 그 계명을 잘 순종하고 지켰더라면 아마 우리는 한 번도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아담처럼 애쓴 적이 없어도 그 하나님의 무한한 복락을 아담의 순종 때문에 누리며 살았을 것이니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죄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망가트린 이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빚쟁이의 집안에서 옛날에 태어나면 속절없이 부모의 그 빚을 상속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망가트린 그 무서운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인간이 물들어서 태어날 때부터 좋으신 하나님은 대적하고 그리고 미워하고 싫어해야 할 죄지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랑해야 할 가치가 뒤바뀐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염입니다. 이 오염은 결국 선천성을 가지고 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무수한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런 미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천적”이라고 합니다. 고양이가 배가 고프면 쥐를 잘 잡습니다. 그러나 먹을 의지가 없어도 쥐는 죽입니다. 집에서 사료를 많이 주어도 쥐를 발견하면 고양이는 쥐를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을 지독히도 미워하고 하나님과 원수 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 인간에게 어떤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것은 운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오염은 부패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부패했다고 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무엇인가 결핍되거나 상해서 망가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이렇게 물을 담는 컵이 있는데 이게 깨트려져서 구멍이 났다면 그래서 물이 줄줄 샌다면 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망가진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망가진 존재로 처음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이 망가진 것은 입증이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조금도 받아 들여질만한 선한 것이 없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고 이것을 전적인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속속들이 완벽하게 썩어서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만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선한 것도 혹시 생각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그 마음을 가져도 몸이 마음 가진 대로 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무능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인간들은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행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B. 실행죄
이제껏 말씀드린 것이 원죄라면 이제 이 원죄라는 뿌리로부터 인간 스스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수많은 실행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죄는 마음으로 짓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와 음란과 살인하는 마음, 이런 것이 있는가 하면 이것들이 아예 충분히 밖으로 행동으로 표출이 되어서 거짓말을 하고 살인하고 온갖 악을 행하는 구체적인 실행으로 나타납니다. 이 죄는 인간의 죄의 이미 물려받은 죄의 성향을 강화시키고 이 죄의 성향이 살아가면서 강화될수록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또 죄를 지으면 물려받은 죄의 성향이 강화되고 강화되면 더 큰 힘으로 자기를 죄에 이끄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인간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는 그것이 충분히 마음과 삶속에 발휘되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충분히 발휘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악할지라도 그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지만 어른이 되고 그 죄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가 쏟아놓는 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힙니다. 이런 실행죄 속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고 태어날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과 맞서려는 대담하고 맹렬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모하고 이런 강퍅한 인간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어떻게 노력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선한 행동을 혹시 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죄의 영향을 어느 정도 억제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일반본성을 따라서 그래도 선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질만한 어떤 공로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징벌을 받는 것은 영혼이 썩고 부패하고 죄로 가득차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적하기 때문인데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행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이 행동의 영향을 끼치지 선한 행실을 했다고 해서 이 선한 행실이 그의 영혼이 거꾸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II. 밖으로부터의 구원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못 박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은 밖으로부터의 구원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내가 이렇게 하면 행복할 텐데, 이렇게 하면 나는 참 만족스러울 것 같아, 이렇게 하면 나는 참 기쁠 것 같아. 하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모두 움직여도 그것으로서는 그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예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이성으로는 구원받을 길을 찾을 길이 없는 눈먼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밖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선명하게 둘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A. 중생의 씻음
첫째는 중생의 씻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간들을 주권적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 중생을 "씻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정결케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이 과거의 죄를 깨끗케 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이라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그렇게 깨끗이 지난 죄를 용서받고 씻음 받은 인간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영혼에 힘을 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이 지나간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정결케함입니다.
이 중생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중생을 위해 노력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이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을 살려주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고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잘 믿더라도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살렸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때문에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이 책임을 인간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모두 망가트려놓은 우리의 이 큰 죄를 우리의 어떤 행실로도 씻을 수 없는 이 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으며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죄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기준도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지은 죄도 하나님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를 통해 예비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의 죄를 씻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는 것입니다.
B. 성령의 새롭게 하심
그래서 주님이 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때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 죄에서 모두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람들로 인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끝난다면 인간은 곧 죄를 지을 것이고 그리고 또 다시 심판당할 죄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 일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회개하고 거듭날 때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나 혼자 살았는데 우리 안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진리의 세계를 계시의 말씀을 통해 보게 해주시고 예전에 이길 수 없었던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큰 능력과 힘을 하나님이 은혜로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가시면 보혜사를 보내어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는 그렇게 재미없어 보이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달콤하게 느껴지고, 예전에는 그렇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들이 오늘은 그렇게 지키면서 살 때 기쁨이 샘솟는 아름다운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혹은 묵상을 하고, 설교를 듣고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영혼 가득히 밀려오는 그 환희와 영적인 기쁨을 이 세상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난도 오고, 시련도 오지만 그것은 죄 많은 세상에서 언제나 있는 일이고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안에 계셔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는 한 성령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한, 갈 길을 밝히 보여주시는 한, 그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길은 없는 것입니다.
IV.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을 지금 여러분들이 지극한 사랑과 말할 수 없는 희생으로 돌본다고 칩시다. 영혼이 돌볼 수 있겠습니까? 또 부모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 부어도 그렇게 돌봐주는 부모의 보살핌이 자식들에게 항상 기쁨을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부모의 착각입니다. 오늘 부모가 된 여러분도 예전에는 부모가 그렇게 돌보는 것이 싫었던 사람들입니다. 부모는 불안전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돌볼 때도 있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실수와 오류 없이 지극히 선한 동기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런 완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적이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말고 하늘에만 계시기를 원하는 때는 없었습니까? 그렇게 완전한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들이 싫어하는데 그러면 부패한 성품을 가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완전한 부모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완전할지 모르겠지만 자식들은 그 완전한 부모의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돌보기 위해서 애쓰고 희생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자신으로 돌봄으로 이 아이들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아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훌륭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실망하게도 함으로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참된 부모가 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완전한 부모이신 하나님을 이 아이들로 하여금 만나게 해줄 때 그 부모의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적인 다스림과 은혜 아래 살아갈 때 인간이 중생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유산을 물려주어도 그 유산을 자녀들이 지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좋은 교훈을 물려주어도 그것을 따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굴지의 대그룹의 회장의 후계자가 유언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수십 만 명의 직원을 손끝하나 말 한마디로 다스려도 자기 자식 하나의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렵구나. 그것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여러분들은 완전한 부모가 아니지만 완전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붙들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붙드시고 여러분들의 자녀가 믿음으로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갈 때 여러분이 없어도 그 아이들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험해도 내 주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더 어려운 시련과 환경도 믿음 하나로 극복하며 이기며 살아왔던 것처럼 여러분의 자녀도 그렇게 살아가야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여러분들의 자녀의 회심을 위해 깊이 기도하고 몸부림쳐서 이 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덧입는 주의 자녀들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4.거듭남의 비결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2-23).
Ⅰ.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핍박을 앞두고 있는 흩어진 성도들에게 준 편지입니다. 그는 이 편지 속에서 다가오고 있는 핍박과 고난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구원의 본질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나그네와 행인 같던 이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그 구속하신 보혈로 건져주신 구속의 은혜를 높이도록 그들을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상태와 그런 복된 신양생활을 하게 된 근거로서의 중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어 하지, 불안하고 고통 받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이든지 불신자이든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악한 인생을 살기 보다는 복되고 평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Ⅱ. 인간의 고통과 행복
A.인간 불행의 뿌리
인간불행의 뿌리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인간의 세상에서 경험하는 인류의 모든 불행이 외적인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가난은 끊임없는 고통의 원인이고, 물질의 부족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상에는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넉넉하게 물질을 누려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를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불행이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수명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한 나이에 죽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가정에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고 믿는 것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무지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지식을 전달해주면 그들의 삶이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지식들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도 인생을 참답게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은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올바로 인생의 갈 길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지식은 많아도 몰 지혜 화된 지식을 가지고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만들고 그것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도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를 법으로 규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도리와 규칙을 세워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들을 통해서 인간 불행이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질병적인 현상들이 개선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고통과 갈등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고통과 악의 뿌리를 죄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는 것은 감기에 들린 것인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몸이 감기 균에 의해서 전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이 사람의 몸을 이겼기 때문에 감기라는 증상이 온 몸에 퍼진 것이죠. 그러므로 근원적인 처방이 없이는 물질이나 지식의 보급, 의약품의 보급, 엄격한 법의 제정, 이런 것들을 통해서만은 인간을 진정한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뿌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B. 인간의 행복
. 비록 핍박과 고난을 앞두고 있는 연약한 성도들이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가 수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도 역시 똑같이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모르는 것이 많고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고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느니라.” 고 이 수신자들, 곧 성도들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 인간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진리에 복종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복종 속에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그의 영혼들은 정결하게 되었고 거기에서는 주님을 향한 참다운 사랑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또한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예수 믿었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다든지, 예수 믿었기 때문에 성공하게 되었다든지, 예수 믿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변화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인간의 영혼에 있고 모든 것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 세상의 사조에 섞이지 않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우리의 영혼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미국을 뒤흔들어놓던 유명한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짐 베커(Jim Bakker)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최근에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책의 이름은 “I was wrong" 이라는 책입니다. “나는 틀렸었다.” 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는 소위 televangelist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하는 방송 설교자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대개 방송이 밤에 나가는데, 미국에 당시에 불면증 환자들이 2500만 명이었대요. 너무 말을 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밤중에 불면증 환자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거예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옷장에 가서 그날 저녁에 수표에다가 사인을 하고 자는 거예요. 그 당시에 미국의 여러 대통령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아주 놀랍게 성공한 복음사역자였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선교단체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의 사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사상은 성공주의였어요. 예수를 잘 믿으면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인생의 분복이라고 믿었던 것이에요. 이런 성공주의적인 복음이 텔레비전 설교를 통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그는 갈수록 유명세를 타면서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여러 가지 도덕적인 추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 그 추문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서 존경과 모든 명성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은 그가 그 이후에 잃어버릴 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재단을 운영하면서 거액의 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수사를 받았고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인가의 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결국 횡령혐의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벗어나게 되었지만, 2000만 불에 가까운 소송비용을 대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모두를 팔아버렸습니다. 수많은 저택들이 모두 날아가고, 자식들은 유리방황하고 마약중독자가 되었습니다. 4년 6개월 동안을 감옥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실패한 사역자로 쳐다보지도 않는 한 사람의 죄수로서 그는 감옥 속에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이 아닌 것을 그 자신이 오랫동안 전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믿으면 우리에게 성공을 보장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감옥 속에서 사심 없이 읽는 동안 예수님은 그런 이 세상의 성공에 대한 관심보다도 우리의 진정한 영적 삶,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생활, 이런 것에 관심이 더 많으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오히려 예수님이 결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예전에 나는 틀렸었다.” 라는 책을 쓴 것이에요.
문제는 우리들이 복음의 밝은 빛 아래서 인생의 진실을 보면, 우리들이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매우 강렬하게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지만, 이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우리들이 이 세상의 생각으로 기독교신앙을 보면 우리 인간의 불행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이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이 본문을 마당에서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내 자식이 진리를 순종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산다면, 거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중 어떤 아이들은 정치 지도자가 될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학교 선생이 되어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동네에서 슈퍼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아이들도 우리 자손들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구루마를 끌고 다니면서 행상을 할 자녀들도 우리 가운데서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삶의 양태일 뿐입니다, 그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를 점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리를 어려서부터 알고 거기에 순종함으로 순결한 영혼으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며,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나고 회심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자기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진리를 순종하고 영혼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 그 뿌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좋은 환경, 훌륭한 부모, 넉넉한 가정생활, 사회의 좋은 제도나 법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시련과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 깨끗한 영혼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주님을 공경하며 살 수 있었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말이에요.
III. 거듭납의 방편
여기서 사도는 거듭남의 방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썩지 아니할 씨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씨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실제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이 씨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에 보면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질 않고, 오히려 ‘썩지 아니할 씨로부터 그리고 항상 있는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서 이 두 가지가 다른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 썩지 않을 씨
그럼 여기서 말하는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썩지 아니할 씨로 여기서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 구원 받지 못했을 때에 우리 인간은 성령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저 자연적인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역사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이 사람 속에 썩지 아니할 씨인 성령을 심으십니다. 썩지 아니할 씨인 성령을 그에게 심으심으로써, 이 씨가 마치 이 세상에 있는 작물의 씨앗처럼 온도와 습기와 양분과 시간이 맞을 때 그것이 싹을 틔우고 줄기, 가지, 잎을 뻗어나가 마지막에 열매를 맺게 되고 마지막에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씨를 심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심겨진 거듭남의 씨, 곧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썩지 않도록 심겨지는 이 씨는 결국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서 놀랍게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이 중생이 먼저 일어나고 회심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중생과 회심이 거의 같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결국 이 썩지 않을 씨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넣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인데, 이제는 그 영혼 안에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중생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B. 살아있는 말씀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거듭남의 방편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씨가 심겨진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회심시킬 사람들은 반드시 중생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에 그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중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썩지 아니할 씨를 우리 속에 심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 홀로 하는 역사이지만, 이 역사가 일어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 개, 곧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 자녀들의 영혼에 심으시는 썩지 아니할 씨인 성령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가 함께 역사해서 우리 자녀들을 거듭나게 하고 회심하게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러한 말씀과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관심은 크지만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느라고 한 것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말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와 영원히 함께 할 수도 없고 그의 모든 삶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지식도 우리에게 없고 능력도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일평생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아무리 매질하며 교육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본성을 아름답게 바꿔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악하고 불순종하는 자식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심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이 풍부하고 편안하고 좋은 환경만 사용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거룩하게 만드심에 있어서 편안한 환경보다는 고난과 시련, 고통을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 선생이 말한 십자가였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불행과 고통과 시련 때문에 인생을 점점 망가지게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불행과 고통의 십자가가 그를 예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고 순결한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자기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만들어줍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안 계시고의 차이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주 어린 아이들이라도 중생하고 회심해서 말씀이 심겨지게 되면 자기의 거듭난 영혼에 양식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놀랍게 섭취하려고 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에게 고통과 시련, 혹은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질 때, 아주 작은 아이인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는 해석능력이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날마다 이 아이를 감시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의 영혼 속에 이미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말씀으로 끊임없이 그를 변화시켜 나가시는 것이에요. 성령을 그들에게 넣어주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정확하게 들려주고, 건성으로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 아이들에게 보다 쉽게, 정확하게, 아름다운 언어로, 논리적으로, 그들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게끔 그렇게 들려주고,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면서 해야 될 일이에요.
IV. 결론 : 간구하라
이번에도 등불학교를 하면서, 우리 교역자들이 애를 많이 썼는데,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지난 번엔 책이 그저 허접하게 나왔는데, 이번에는 출판사에서 그 책 출판사에서 내면 좋겠다고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아주 예쁘게 만들었어요. 아주 정확하고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어요. 서점에 가서 한번 사 보세요.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와 부모가 할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으로서 우리의 아이들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우리의 아이들이 중생하고 회심하는 강력한 은혜의 역사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달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대목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그 위험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줘야 할 사람이에요.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늘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로 자녀들의 거듭나지 못한 영혼에 변화를 주시도록 매달린다면, 자녀들의 영혼에만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매달리고 기도하는 동안에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도 더 놀라운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에라도 집에 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했는지 돌아보십시오. 부지런히 버기적 거리며 교육시키고 먹여 살렸지만 혹시 여러분들의 부모로서의 봉사가 그들의 육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 깊이 돌아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남을 지배하는 자녀가 되기를 꿈꿨지만, 그 아이의 영혼이 진리에 순종하므로 순결하게 되고,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므로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보기에 아름다운 영혼이 되도록 그렇게 가꾸었는지 한 번 반성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녀의 회심이 더디어지지 않도록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가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서 살도록 부모인 여러분들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그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 속에서 살도록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5.어미의 마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두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 21:14-16).
사라가 오래도록 아이가 없었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일이죠. 주님은 분명히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열매를 사라의 태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사라도 믿음이 없었고 아브라함도 믿음이 적었기 때문에 결국 불신앙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대신 이제 이 아브라함은 사라의 청을 받아들여 하갈에게로 들어가게 되고 이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이 앞에 이 아이가 태어나고 잠시는 기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자라면서 결국은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요동쳤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따라서 약속대로 사라에게 잉태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한에 미치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이가 이삭이었고 난지 팔일 만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세였습니다. 아이가 점점 자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이 되었습니다. 젖을 뗄 때까지 살았던 것은 당시에 기적에 가까웠기 때문에 큰 잔치를 베풀고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애굽 여자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이 사라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쩌면 질투심에 가득차서 이 아이를 내어쫒으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언제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주면서 이 여자를 통해서 내 무릎에 아이를 두겠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아들을 낳고나니까 이제는 내어쫒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라의 입장에서는 이미 자기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제 첩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그 몸에서 난 후사가 자기에게 무슨 그렇게 큰 기쁨을 주었겠느냐고 내칠 수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비록 그가 정실부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정이 들고 그리고 그 몸에서 열매까지 맺었으니 그 인간의 끈끈한 정을 어떻게 사라의 마음에 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사라의 어떻게 보면 표독한 간청을 들으며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이 아들과 첩이지만 사랑하는 하갈을 내어쫒아야 한다는 것이 깊은 근심이 되었고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인하여 깊이 근심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이 아들이 이삭일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이스마엘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자신이 돌봐주었는데 하갈과 더불어 쫒아내고 나면 펼쳐질 이 아이의 일생이 너무 기구하게 느껴졌던 것이죠. 그래서 고심하고 있던 차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두고 근심을 했더니 이르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보내도록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아브라함은 이 하갈에게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해서 어깨에 메워 나가게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목적지가 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 하갈이 방황했던 것으로 보아서 특별히 가고자 하는 정착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성지순례를 안 가봐서 모르지만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물은 광야에서 생명이라고 합니다. 지금같이 이렇게 통신이 발달하고 교통수단이 발달한 때에도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물이 없어서 광야로 여행 나갔던 여행객들이 객사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결국은 떡과 물가죽 부대가 다 떨어진 후에 특별히 물이 다 떨어진 후에 이제는 기갈 하여 죽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갈은 자기가 죽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만 이 어린 것이 목말라 괴로워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에 두었습니다. 커다란 나무그늘이 있었더라면 그 아래 두었을 텐데 광야에 무슨 그런 큰 수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햇볕이 덜 드는 이 떨기나무 아래에 이 어린 아이를 두고 살 한바탕쯤 물러났다고 했으니 화살을 쏘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쯤 되니까 당시의 화살이 이후의 시대보다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200m 이상 떨어진 거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떨어진 것은 아마 결국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식이 목말라 죽을 텐데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바로 앞에 눈뜨고 볼 수가 없고 또 이 아이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이 아이와 생사를 같이 해야 되겠는데 차마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어서 살 한바탕쯤 떨어진 곳에서 멀찌감치서 이 아이를 마주앉아 바라보면서 그가 한 일은 방성대곡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고 ‘가서 마주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였다.’ 고 되어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갈이 무엇 때문에 이 광야에서 이렇게 방성대곡하고 있습니까? 가시나무 떨기사이에서 간신히 목마른 가운데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자기의 아들, 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생명, 또 다른 생명을 연장할 어떤 도움의 가능성도 없는 속에서 그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기운을 잃고 죽어가는 자기 자식을 바라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방성대곡하며 우는 것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울었다고 되어있지만 이후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심으로 하갈을 부르셨다고 되어있으니까 아마 이 여인이 방성대곡하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철저히 녹아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갈에게 뜨거운 신앙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족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느 정도 분여되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그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방성대곡하고 울었는데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운 것으로 하나님이 받아들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통곡하며 우는 것은 오직 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육체적인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물만 있고 먹을 것이 있고 거처할 집만 있어도 이 하갈이 이렇게 목 놓아 통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비할 데 없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설교를 듣고 인터넷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생계의 위협 때문에 통곡하는 부모들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목마름은 육체의 목마름만이 목마름이 아니고 육체의 배고픔만이 허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긷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생수를 먹으면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먹음으로써 우리들이 진정한 배부름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 하갈이 탁월한 신앙은 없었지만 진실한 어미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가시나무 떨기아래서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보면서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자 하갈이 좀 더 깊은 신령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아이의 육체의 목마름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을 위해 더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충분히 공급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거의 다 했고 우리의 애들은 남부럽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또 다른 신약시대의 하갈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자가 누렸던 복음의 빛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찬란한 복음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복음의 빛 아래서 구약에 나타났던 많은 사건과 예표들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의 목마름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갈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다시 그 물을 먹고는 저녁이면 다시 목마르게 될 사마리아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목마르지 않는 물이었습니다. 육체의 물이 다하면 육체가 죽을 뿐이지만 영혼의 목이 마르면 그 영혼이 기갈 하여 죽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근본이 이 영혼의 목마름에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오늘날 복음으로 만나주실 때 제일 먼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게 하십니다. 그리함으로 영혼 하나, 하나 그 생수의 물에 풍부하게 젖어서 아버지 앞에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저는 종종 공공장소나 그런 곳에 가보면 그 말로 할 수 없는 그 불결한 낙서들이 어린애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교회 시설물 중에서도 종종 이런 불결한 낙서들이 발견됩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하면 이렇게 욕설과 그리고 더러운 말들을 쏟아내면서 까지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고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이 깊이 고민하는 것이 아이들이 오락에 빠지는 것이죠. 이런 것들도 결국은 그 아이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의 은혜에 넘치는 사람은 허탄한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습니다. 곤고하고, 목마르고, 배고파지면, 인간은 허탄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에게 이 생명의 물이 없는 것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걸어 올라가다 보니까 어느 녀석이 벽에다가 ‘나 여기다 낙서했다. 어쩔래?’ 얼마나 사는 게 시시하고 괴로우면 애들이 그러겠어요. 사랑은 사랑 없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들어주고, 사랑은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줍니다. 남은 만져도 느낄 수 없는 것을 사랑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조용히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들의 가슴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울부짖는 소리침이 들이지 않습니까?
(찬양)물가로 나오라 내 곁에 서라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속에서 흘리던 눈물, 고통 속에서 탄식하던 신음들을 주님이 들으시고 그 목마른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주실 때에 영혼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갈은 여러분보다 충만한 계시를 누리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완고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교만하여 자기의 분수를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은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살 한바탕쯤 떨어져 떨기나무 아래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굶주린 채, 목마른 채 몸으로는 멀쩡히 살아가지만 마음으로는 소리치는 여러분들의 자녀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녀를 위해 대신 간절히 간구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6.중생의 본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구약의 본문이지만 중생의 본질에 대해서 훌륭하게 그 제시해주고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죄 가운데서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비록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인간관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죄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그 영혼의 기능들도 모두 부패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무엇이 하나님 마음에 기쁜 것인지를 알 수도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시처럼 인간 마음에 있는 전적인 부패성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실제의 영혼과 마음과 삶 속에 실현이 되어서 그래서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바위가 언덕을 굴러가는 것처럼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조치 없이 방치될 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렇게 숙명적으로 불행과 죄악을 향하여 굴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죽은 영혼의 상태에서 겨우 동물적인 기능, 거기에다 조금 보태어진 이성의 기능정도만 가지고 살아가던 인간을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에 또한 그가 육신적으로 살아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수 없는 완전히 죽은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위에 하나님도 몰라보고 수많은 삼라만상들이 자기 앞에 펼쳐져있어서 그것이 어떠한 이치로 거기에 있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위하여 있고 자기는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누구를 진정으로 위하여야 하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본래의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으로 돌아가게 하시고자 하는데 첫 번째 세상은 창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재창조하시는 행위로서 이제 이 세상을 고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본질입니다.
II. 중생의 본질
오늘 본문은 이 중생의 본질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A. 영을 주심
첫째는 “새 영을 주심”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본질입니다. 즉 인간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철저히 죽어있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무엇도 행할 수 없는 아주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새 영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없이 그저 살아가던 짐승과 같은 인간을 주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 이게 바로 중생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중생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을 결합시키는 본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을 결합시키는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인간은 이제 영혼 자체가 죽어있던 상태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아주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중생의 본질입니다.
누구도 그 새롭게 주시는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일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는 것은 교회에 교적부나 대문에 붙은 교회의 표찰이나 아니면 믿음의 자녀로 태어나서 유아세례 받은 증서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가장 위대한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 성령님이 바로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새 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새 영을 주시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표현으로 똑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각각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러면서 중생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른 표현들로 보여줌으로서 중생의 다양한 다이아몬드와 같은 국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몇 가지만 들자면 첫째는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그것이 바로 성령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라고 할 때 하나는 중생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의 은혜가 있고 또 하나는 중생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셔서 역사하시고 감화시키시는 영향력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예전에 잘 가르쳐준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 즉 은혜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해하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는 이 은혜의 정의는 두 번째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것은 성령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성령과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성령과 그리고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그 다음에 솟아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주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다양하게 이렇게 중생을 묘사합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비유는 씨입니다. 지난주에 했습니다. “너희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이게 바로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분여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어떻게 묘사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너희 안에 있나니” 이 생명이 곧 중생의 또 다른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중생을 통해서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실 때 이 성령이 죽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는 역사를 베풀어주실 때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령은 또한 살리는 영,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과,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말과, 그리고 또 하나님의 씨가 내 안에 있다는 말과, 내가 중생했다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영을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제일 놀라운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제일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고등한 기능은 지성과 의지이고, 그리고 하등한 기능은 감각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색깔을 분별하고 하는 중생하지 아니한 사람들도 잘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하등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별개의 두 영혼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영리하신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까 목사님이 영혼이 죽어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죽었다면 고등한 기능, 하등한 기능이 다 꺼졌을 텐데 그러면 중생하기 전에는 빛깔도 못 알아보고 따뜻하고 차가운 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옛날에 본 사람, 새로 만난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고 음식이 맛있고 맛없는 것도 구별하지 못하겠네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그 표현은 육체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시체니까 썩어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며칠 지나면 시체 국물이 나오는데 냄새가 나고 그게 아무 것도 못하지만 영혼은 죽어있어도 부지런히 죽어있어도 제 할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죽은 행실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영혼의 신비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살았다는 의미는 영혼에 적용될 때는 육체가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등한 기능이 아무리 살아있어도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죽어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왜? 인간의 본래의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가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요, 중생하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잘합니다. 또 수완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 중생하지 못했지만 중생한 사람을 수 만 명을 부하직원으로 거느리면서 왕처럼 군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출장 갈 때도 남들은 걸어 다니지만 몇 십억 짜리 자가용을 타고 다닐 수도 있고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뭐가 바뀌었다는 것입니까? 아니 곰이 네발로 뛰어다니면 곰이고, 그것을 그랜저 승용차 뒷자리에 태우고 가면 인간이 됩니까? 식인종이 풀로 앞을 가리고 숲속을 뛰어다니면 식인종이고 양복을 입혀놓고 지하철을 타면 그게 문화인이 됩니까? 본질에는 하나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람이 성공해서 부자 만드는 종교가 아니라 양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식인종같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본질적인 바뀜을 가져다주는 게 그게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문화인과 식인종의 차이는 그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배고프면 식인종이 됩니다. 충분히 됩니다. 일본사람들이 대동아 전쟁을 치를 때 인육을 먹고 그랬습니다. 극한 상황이 되면 다 그렇게 합니다. 한 2-30년 전에도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해서 산속에 있으면서 결국은 도저히 굶어죽을 상황이 되니까 한사람, 한사람이 얼어서 죽는 사람들 다 벗겨서 먹고 살다가 몇 달 동안 먹고 살다가 그 사람들이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중생자와 중생자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서 헛된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그 아이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양상에 대해서 더 많이 마음을 뺏깁니다. 그것은 양상입니다. 정치인이 되고 돈을 많이 벌고 무슨 학자가 되고 리어카를 끌고 이게 다 양상입니다. 그것만이 양상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고 안 하고 이것도 다 양상입니다. 본질로 접근하는 한 수단일 뿐이지 중생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 엉터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중생함으로 비로소 그 영혼에 사위적인 기능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거 먹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중생하고 회심해도 여전히 잘 먹습니다. 자연적인 기질은 그렇게 잘 바뀌지 않습니다. 안 바뀌어도 상관없지 많이 먹으면 좀 어때,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런데 문제는 고등한 기능이 바뀌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오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단을 하는 기능입니다. 이성은 원인과 결과를 엮으면서 추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가 있는데 이게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중생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성입니다. 인간이 영혼이 성령을 받음으로 중생을 통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이 정확하게 말해서 판단하는 기능인 오성이 신령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또 무엇이 참으로 좋은 것인지 그것을 올바로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좋은 정보를 하나 줄 테니까 귀담아들으십시오. 올 추석에 솔잎을 따다가 송편을 해먹으면 큰일 난다고 합니다. 그게 9만5천 헥타르에다가 소나무의 병충해를 예방하는 주사를 났는데 그것은 5그람내지 30그람만 섭취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어디에 주사를 났는지 알 수가 있나. 그러니까 솔잎 향기가 없어도 되니까 절대 파는 사람들이 잘 분별해서 뜯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오성을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시지 않으면 인간이 무엇이 참으로 진리인지 두 번째는 무엇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그것을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생각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된 것이라고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의 영혼에 참으로 좋은 것인데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중생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성령을 그에게 주시면 제일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영혼의 빛이 확! 들어오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조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조명은 중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빛이 들어옴으로서 판단력이 놀랍게 생겨서 그래서 진리를 알아보고 또 선하고 좋은 것을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판단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아! 이것이 그것이구나. 알아보려면 먼저 우리 속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도 아! 이게 송편이잖아. 라고 말하려면 이미 송편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 어느 순간에 진리가 주어져서 진리를 딱 봤을 때 아! 이게 진리구나.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자기가 진리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진리를 다시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 진리를 그렇게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개 같은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했던 질문입니다. 왜 그럴까? 어떻게 진리가 주어졌을 때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던 그 인간이 아! 그것이 진리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진리가 우리에게 이렇게 제시되기 전에 먼저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러면 이 진리가 제시되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영원 전에 알았는가, 아니면 아담 안에 우리가 있을 때 아담과 함께 그것을 알아보았는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 미리 알게 해주시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이든지 선인이든지 모든 인간들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아! 진짜 행복하다. 정말 기분이 좋다. 그렇게 되려면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지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아! 정말 여기가 행복하구나. 그렇게 느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게 아닌데도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아랫목에 있는 상황인데도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 얻어진 행복,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범죄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그게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행복에 대한 경험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면 참된 행복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하나님이 그것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에 대해서 감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뭐가? 중생이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애들도 회심하고 나면 그래서 영혼이 중생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왕성한 식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을 때 월요일과 수요일 사이가 너무 멉니다. 수요일과 주일 사이가 너무 깁니다. 한주일과 한주일 사이는 형벌처럼 너무 깁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어쩜 그렇게 주일이 빨리 돌아오는지,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식욕이 막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이 오성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등한 영혼의 기능이 또 하나있습니다. 그게 의지입니다. 의지를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B. 새 마음을 주심
오늘 본문은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본질 중 하나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가 ‘레브’ 혹은 ‘레바브’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철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세밀하게 분석해서 쓰지 않습니다. 뭉뚱그려서 사용해서 어떤 때는 이 ‘레브’라는 단어가 지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감각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의지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주로 의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새 마음을 주시는데 새 마음을 주시는 방식을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1. 굳은 마음을 제함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굳은 마음을 제거해주시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레브하에벤’이라고 나오고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레브바사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에덴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봤을 텐데 ‘에벤에셀’이라고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돌맹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돌맹이의 마음을 제거하고 살코기의 마음을 줄 것이며 그것입니다. ‘바사르’는 살입니다. 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랑말랑합니다. 그런 고기일수록 비쌉니다. 힘줄이 많이 섞여있어서 한번 씹으면 다른 사람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빨운동을 해야 하는 이런 고기는 싸구려입니다. 좋은 고기는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삶아도 육즙이 그대로 있는 그런 좋은 고기입니다. 그런 살코기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주시는 것이 의지의 관한 중생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지가 무엇인가 나오는데 조금만 하고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교리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교리를 공부해야지 된다고 하는데 그 여섯 번째 이유가 “재미있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굳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돌같이 굳어진 의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의지가 돌같이 굳다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안 좋은 방향으로 교정되지 않은 채 계속 뻗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밀가루 반죽으로 비교를 하는데 이제 송편을 이번에 빚을 텐데 말랑말랑한 것을 이렇게 만지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양이 바뀝니다. 그런데 돌맹이를 수없이 주물러보십시오. 손에 껍질만 벗겨지지 돌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비중생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열을 받아서 뜨거워질 때도 있고 차가워질 때도 있고, 이쪽으로 쏠릴 때도 있고 저쪽으로 쏠릴 때도 있습니다. 살살거리면서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려고 애교를 부릴 때가 있는가 하면 야단을 치면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 나오는 소 잡아먹은 귀신같이 그렇게 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두 양상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하여 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문제와 관련되어보십시오. 얼마나 살살거리면서 움직입니까? 돌부처 같은 사람도 이해문제가 걸려보십시오. 얼마나 싹싹해집니까? 이해문제가 걸렸는데도 싹싹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사람은 계속 쳐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아부해야할지 빨리빨리 파악해야지 인생에 있어서 뭔가 풀릴 것입니다. 그런 것은 너무 잘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변화되어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항상 일관된 것인데 그것은 돌같이 딱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생각에 의해서 휘지를 않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셔도 감동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이 명령하셔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주 완고함이 이게 비중생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
2.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
그것이 돌맹이에 던진 유리구슬처럼 탕! 하고 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비중생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알고는 있으나 이런 인본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이 부드러운 마음을 어떻게 바꾸어주시는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설명하면 감화를 받아서 저절로 마음이 녹는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그런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굳이 주님이 십자가에 못에 박히실 리가 없습니다. 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감동용이 아니라 속죄용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속죄와 중생의 교리는 문을 움직이는 신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지 두 개를 붙들고 기독교 신앙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 못 살거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려는 것을 행하려고 할 때 내가 누구인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생각할 때 내가 아무 쓸모없는 무지막지한 더러운 죄인인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살려주셨구나. 오직 그분이 당신의 영을 내게 주심으로 거듭나게 해주셨구나.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녹이시는 게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직접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집회도 해보면 은혜 받았던 애들이 계속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한 놈이 비중생자로 왔습니다. 돌맹이가 온 것입니다. 하나는 반죽이 온 것입니다. 반죽이 왔는데 또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회심집회 하기 몇 달 전부터 엄마가 다독거리고 아빠가 위해서 기도해주고 교회에서 말씀 듣고 이번 주일날 요셉이라는 초등부 학생이 나타나서 은혜를 받고 죄를 이기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게 말랑말랑해진 마음입니다. 그 애가 회심집회를 앞두고 기도하면서 내 영혼이 이래서 어떻게 하나.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성령이 오셔서 그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져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루만져진 애들하고 돌맹이로 왜 오는지도 모르고 끌려온 애들하고 똑같겠습니까? 말씀이 탁! 들어갈 때 여기는 쏵! 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3년쯤 되어서 회심집회를 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을 모아놓고 잠깐 설교를 했는데 75분을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에 가서 애들이 엄마, 우리 회심집회 최고였어, 한 가지 빼놓고, 뭔가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 설교가 너무 짧았어. 실화입니다. 그게 결국 아이들이 준비되었을 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돌맹이 같았던 그 마음이 한순간에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새 영을 받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래도 지난 주 보다 꽤 나왔네. 여기 지금 꽉 차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런지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말이지.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도 영을 부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새 영을 주셨을 때 그 마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나도 그것을 의식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하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생하라, 네 자식 중생시켜라.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은 회심하라, 너희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하라. 성경이 그런 의미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생과 회심의 원리가 이렇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그 초자연적인 역사를 우리 아이에게 주시되 그 아이가 회심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렇게 미리 해달라는 기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C. 율례를 행하게 하심
이렇게 되면 그렇게 하나님이 새 영을 통해 새 마음으로 의지를 바꾸어주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무엇을 위함인가 하면 율례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한번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적인 판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이 신앙으로 판단해보십시오. 자, 다음 세대에는 지금보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예고된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워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으니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실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요동치며 변화한다고 할지라도 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붙들고 계신데, 물론 우리 아이들에 미래에 지금보다 훨씬 더 시대가 악하여진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직장생활을 하고 전도하고 그리고 선교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가 그렇게 살 때보다 더 큰 고난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자녀가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라도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서 사는 것이 옳지, 이 세상에 개, 돼지처럼 잘 먹으면서 결국은 신앙을 다 버리고 얼마든지 믿음을 버리고 세상에 굴복하며 그렇게 죄에 종노릇한 덕분에 좀 더 많은 물질을 누리고 편안하게 사는 그 삶이 어떻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녀에게 바라는 소원일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 당시 쯔빙글리가 없는 사이에 가톨릭 신앙을 가진 마음이 8천명의 군인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결국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급히 돌아와서 결국은 3천명을 이끌고 8천명과 싸우다가 자기도 죽고, 사위도 죽고, 아들도 죽고 다 죽습니다.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유언처럼 전쟁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말입니다. “너희는 육체만 즐기려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이 육체로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러워해하는 분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권한을 한손에 가지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 뿐이시다.” 이게 쯔빙글리가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III. 결론 :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산다면 고난을 받을지 모르지만 또 하나님이 얼마나 혁혁하게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관심이잖아요. 예수 믿고 열심히 신앙으로 살면 온갖 핍박과 고난이 올 줄 알고 이를 악물었는데 하나님이 놀랍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인간을 값지게 하시고 죄 아래 있을 때는 꿈꾸지도 못했을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비전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멘! 그렇습니다.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자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영혼에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새 영은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삼대 가는 부자가 없고, 삼대 가는 거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이라고 하는 것, 오고 가고 가고 오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진정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심으로 아! 이 중생이 그렇게 기적과 같은 일이구나. 돌맹이같은 마음이 살코기 같은 마음으로 바뀌는 이 놀라운 중생의 역사는, 회심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있구나. 하나님 우리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보탤 수 없사오니 주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영혼의 생명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7.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스 8:21-22).
포로에서 귀환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게 무슨 아름답게 지어놓은 아파트에 가는 것도 아니고 먼 길을 여행하여 옛날에 떠나온 지 70년이나 된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물론 왕이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돌아가서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살라고 명령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 않습니까? 이상은 멀고 현실은 코앞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이야 그렇게 명령했지만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70년이면 20년씩 쳐도 3대가 지나서 4대가 흘러가고 그 땅을 자기 땅처럼 차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서 70년 전에 내 땅이라고 하면서 집과 땅을 차지할 때 그것을 좋아할 백성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막상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포로 귀환을 하지만 그러나 에스라의 마음에는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에 아하와 강까지 백성들을 이끌고 오던 이 에스라는 온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 앞에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이제 세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선포한 것이 금식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 강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꼭 이 아하와 강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고생할 때에 바벨론 강변에서 자주 울었다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해석하기를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고단한 노역의 삶을 살고 저녁때 쉼을 얻을 때에는 강가에 모여서 그렇게 씻기도 하고 또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강가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할 때에 두고 온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주님 앞에 기도하기도 하고 그리움 속에서 향수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 그런 장소였습니다. 이 아하와 강가에서 그들은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이죠.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전에는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들이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헤치고 갈 그 수많은 난관들이 한없이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때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길을 살아갈 때에 내 마음대로 잘되고 내 뜻대로 잘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커다란 근심과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안가기 때문에 그럴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신 길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그 길이 그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금식입니다. 금식의 강력한 효력은 밥을 굶어 고통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금식의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상은 고행사상이에요. 그것은 복음주의적인 생각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거라.’ 당시에는 사람이 병이 들면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름을 바른 것은 ‘내 육체가 단정하고 아무 문제없습니다.’ 하면서 자기의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감추기 위함이죠.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한분만을 의식하기 위해서예요. 금식의 위대한 능력은 그래서 고생이 아니라 집중이에요. 하나님 한분께 대한 집중이에요. 이것을 금식이 도와주기 때문에 성경은 금식기도를 종종 우리에게 권장하는 것입니다.
이 아하와 강가에서 떠나왔으니 이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가야하겠는데 펼쳐질 앞의 일들이 어떠할지 에스라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에스라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집중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마음을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에는 집중하지 않았을 때에 수없이 들리던 말씀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분께 집중하는 섬김 속에서 뒤로 물러가는 후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을 때에 난관이 있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 집중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의존의 감정이고 의존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의 마음이에요. 집중하지 않는 사랑, 집중하지 않는 의존의 마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한분께만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찬양)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그것이 신앙이지요. 두 번째는 에스라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섰습니다. 이 겸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치를 추호도 내세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비참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깨달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상태가 겸비함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이 자기의 처지에 대해 비참하게만 느낀다면 이것은 패배한 감정이고 좌절된 정서이지요. 겸비의 정서가 아니에요. 겸비의 정서는 절망과 아주 유사한데 하나의 차이는 절망은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집중하는데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는 혼돈과 무질서의 연속이에요. 그래서 빨려 들어가듯이 침몰하는 것이 절망의 감정이라면 겸비의 감정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얼마나 절실하게 깨닫고 좌절한다는 점에서는 절망의 감정과 유사한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나 밖에 계신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겸비한 마음이에요.
위대한 기도는 위대한 마음에서 나오고 기도에 있어서 위대한 마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 주님께만 희망을 두는 의존의 마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 때에 순종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을 늘 의지하며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언제나 같은 정도로 주님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우 특별한 섭리가운데,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서, 때로는 상실을 통해서, 때로는 갑작스러운 슬픔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며 살던 마음을 부숴버리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의지할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그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 있어서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한 통로가 되는 것이죠.
꽃의 아름다운 향기, 이것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해충이나 자기를 해치려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발산하는 냄새랍니다. 그래서 가시밭에 있는 가시떨기나무 가까이에 있는 백합이 더 많은 향기가 나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수시로 가시에 찔림이 그 때마다 그것이 자기를 공격하는 그 어떤 공격인줄 알고 향기를 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시밭에 있는 백합화에서 더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시시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짐으로써 그 하나님 앞에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가시를 보내시고 이때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이나 괴로움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괴롭히시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리가 더 많은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본받아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겸비함의 기회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것은 세 번째에 에스라가 이 백성들과 함께 한 것은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금식이 먼저 나오고, 겸비함이 나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드디어 간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금식이 지성의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다면 마음은 이제 이 겸비함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주님께 기울어지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받으심 직한 마음은 깨뜨려진 마음이고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산 사람들이 독립하여 사는 삶속에서는 영광을 받지 아니하시지만 오히려 죄를 지어도 당신을 의존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그러니 금식이 지성의 집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다면 이 겸비함은 그렇게 하나님을 집중한 가운데 자기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 나오는 이 간구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구하며 자기의 소원을 토해놓는 그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큰 전쟁에서 이겨 많은 땅을 차지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간 것이 아닙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 공터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로 돌아갈 사람을 모집할 때에 맨 정신으로 갈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포로 귀환에 나섰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대부분 본토로 돌아가서 큰 땅을 차지하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에서 포로귀환의 길에 올랐던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포로로 귀환해 오는 이 사람들이 그렇게 간구할 때 그 간구의 제목 속에는 자기와 자기의 자녀들이 평안히 하나님이 주시는 그 예루살렘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이 최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전에 마음이 겸비해지고 지성이 하나님을 집중했던 이유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어린 것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겸비해진 가운에 온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공동체 전체가 뜻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습니까? 아마 이 아하와 강가에서 포로시절을 생각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하나님의 축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에 만나게 될 수많은 어려움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여러분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은 귀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죠. 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것, 그것을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함께 동행하는 어린 아이들의 생명은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그의 생명과 그리고 어린 아들 베냐민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에 자녀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린 것들의 미래의 일들이 우리에게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것들이 이 환난과 풍파가 많은 세상에서 주님 한분만은 굳게 붙들고 믿음의 도리를 지키며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믿음의 행동이었고 신앙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아하와 강가에 앉아서 기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멀기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왕의 칙서가 있었고 왕의 보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손들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아무도 보호해줄 자가 없습니다. 오고가는 시대에 우리는 미래를 바라볼 때에 우리의 자녀들은 더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마음과 뜻을 기울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우리 다음 세대인 우리의 자녀들에게 활짝 꽃피어나도록 우리는 그렇게 전심으로 우리 어린아이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이 공간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지나고 영적인 고난의 땅을 건너서 영적인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이 세상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저 우리의 눈과 튼튼한 다리 교통수단이 있으면 될지 모르지만 영적인 순례의 길에서는 이런 것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걷는 사람들 중에는 영적으로 넘어진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뛰어가는 사람도 죽은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하나님이 그들을 굳게 붙들어주시도록 신앙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강력하게 사로잡히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린 것들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아마 다음 세대에는 이 세상은 훨씬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희소해질 것이고 그래서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가 더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도록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강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어린 것들을 지켜 영적인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필요한 믿음이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왕에게 이전에 고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뜻이에요? 이렇게 포로 귀환의 길에 오를 때에 어떤 위험과 어려움을 만날지 모르니 왕에게 청구해서 보병과 기병을 받아 호위를 받으며 가면 안전할 텐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다는 것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왕에게 그렇게 구하면 들어주었겠지만 이것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이 포로 귀환의 길에 나설 것으로 결심한 것이죠. 주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은 사람의 눈에는 그를 붙들고 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약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약한 마음으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우리의 마음에 충만히 오십니다. 그래서 멀리 계셨던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에는 우리 안에 더 가까이 오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정말 내 인생에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버지를 의지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오forks만에 깨끗하게 책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나오면서 얼마 있다가 요즘에 그렇게 바빠요. 너무 바쁜데 그래도 아침에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서 여기가 내 자리였는데 공사를 해서 하도 시끄러워서 할 수 없이 교육관으로 갔는데 거기에 앉아서 펼쳐놓고 아침에 한 장, 조금 더 읽을 때는 두 장, 이렇게 읽어요. 그런데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생각하니까 그래요. 모든 교리가 그러하지만 구원의 교리를 우리들이 올바로 구원의 교리를 받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구나!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가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구나! 구원받아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성화의 길도 나 혼자서는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 한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길이구나!’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제 아침에 읽었어요. 24번째 읽었습니다. 24회독을 했어요. 내일부터 25회독을 시작해요.
(찬양)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그렇게 구원의 도리를 옳게 깨닫고 나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인간인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살아온 것도 주님의 은혜요,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앞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이에요.
우리는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10년 뒤에, 20년 뒤에, 30년 뒤에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합니다. 통일은 될까? 얘가 공부는 잘하는데 진짜 의사가 될까? 아니면 얘가 노래에 재주가 있는데 정말로 유명한 가수가 될까? 아니면 얘가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앞으로도 얘가 무슨 큰 인물이 될까? 뭐 그러면서 궁금한 게 굉장히 많잖아요? 10년 후에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될까? 여기에 계속 있을까? 양쪽에서 집이 높이 올라가서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런 일이 계속될까?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핵심가치가 아니에요. 이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에요. 무엇이 되든지 우리는 열심히 교육시키고 가르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핵심가치가 아니에요. 주님을 꽉 붙들고 주님의 진리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면 다음 세대에는 주님의 능력이 지금보다 더 감퇴될까요? 아닙니다. 문제보다 더 큰 것은 주님의 능력이고 세상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요. 그분의 손에 붙들려서 산다면 우리의 자손들은 어디서든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것이고 그 아이들이 이 세상에 있음으로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고 그 아이들이 있음으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굳게 믿었기 때문에 창칼과 마병의 보호 없이 주님 한분을 의지하여 광야의 길을 걸어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여 자기를 찾는 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선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1 (2009/09/09,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2 (2009/09/1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3 (2009/09/16, 수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4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5 (2009/09/20, 주일오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6 (2009/09/23, 주일오전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7 (2009/09/25, 금요예배)
회심치 않는 자녀를 위하여 8 (2009/09/27, 주일오후예배)
8.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참 이 사도행전 20장은 언제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참 눈물이 나지요. 사도 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성령님은 ‘내가 너와 동행 하마,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형통의 복을 더해 주마,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혁혁한 복음의 성과가 나타나고, 너는 존경을 받을 것이고, 교회는 그 이름이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를 않고, 성령이 오히려 증거 하기를 ‘환란과 결박이 예루살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증언을 해 주었습니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순풍에 돛단 것처럼 형통에 형통으로 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이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처럼 역경에 처하고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주님께 불순종 했는데도 순풍에 돛단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왜 그렇게 올라가고 싶어 했습니까? 거기에서 누가 벼슬을 준답디까? 아니면 돈을 준답니까? 누가 열렬히 말씀을 사모하면서 바울을 기다린다고 합디까? 가고자 하는 것은 오직 동족들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는데도 하나님은 ‘네 가는 그 길에 결박과 환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주님을 섬기면서 평안하고 복 받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놀라운 승리의 증거들이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그 형통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언제나 형통해야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예요. 그래도 그 물은 내려가면서 큰 돌, 작은 돌에 부딪치면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저 연못에 가면 그렇게 부딪치다 내려와서 멍이 들어서 시퍼런 물이 고여 있잖아요. 그것이 자연의 이치잖아요. 이치를 따라도 그렇게 부딪치고, 흐르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어도 그렇게 고난을 받는 때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더 넓은 하나님의 섭리의 시각에서 보면, 더 넓은 하나님의 섭리의 시각에서 보면 일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느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환란을 당하고, 때로는 형통하고, 위로가 넘쳐도 그것까지도 양상에 불과하고 그 양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 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는 달려가는 인생의 힘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틀렸는데 힘이 세면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거죠. 오히려 그것은 힘이 없는 게 좋죠, 힘이 없는 게. 힘이 없는 게 좋죠.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때에 바라시는 것도 우리는 더 큰 섭리의 구도 안에서 고난과 시련, 그리고 형통과 위로조차도 ‘이것은 양상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너른 마음을 가질 때에 우리가 정말 사람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붙들리는 섬김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에요.
실화예요. 너무 오래 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때 한국교회에 널리 유행하던 예화였습니다. 근데 한국사람 예화는 아니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랍니다. 가서 선교를 하지만 사실 그 선교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와락와락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피부가 같고 얼굴이 똑같아도 이게 뺀질거리고 안 믿는데, 그 문화와 모든 생각이 틀린 사람들이 거기서 선교할 때 그렇게 호락호락 사람들이 믿겠어요?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했지만 얻은 게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그만 첫째 아이가 풍토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더니 죽었어요. 통곡을 하면서 그 첫째아이를 묻고, 그래도 가족이 합심해 기도하면서 고난을 이겼는데, 한 이년 지나니까 그 다음에 둘째 아이가 또 죽었어요. 그래서 또 묻었어요. 그리고 부부만 남아서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충성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아내도 죽었어요. 그래서 세 식구를 거기다 다 묻었을 때쯤에는 이 선교사가 완전히 탈진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생겨났어요. ‘하나님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 내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다가 이제는 사면을 다 돌아보아도 도저히 자기 사역을 계속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 이제 선교를 접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마침 그 비행기에 대통령이 같이 탄 거예요. 대통령이 그저 외교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사냥을 하러 휴가차 갔다가 돌아 왔다네요. 그러고 같이 내렸는데 아 놀랍게 막 쭉 카페트가 깔리고, 대통령을 마중 나오고 경호원들이 둘러싸고 그걸 보면서 그 사람 마음속에 슬픔이 생겼어요.
저도 똑같은 거 한번 겪었어요. 어디라고 말을 못하는데 하여튼 자주 가는데, 갈려고 비행기를 타는데 밤 비행기를 탔어요. 근데 사람도 그렇게 승객이 많이 안탔는데 내가 맨 앞자리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비즈니스 클래스에 탄 사람 한 두 사람이 먼저 내리고 그 뒤따라서 내려가는데, 아 그 도시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나를 마중을 많이 나왔어. 그러더니 손에, 손에 꽃을 들고 그러고 나왔어요. 사람들이 막 흔들어서, 나도 뒤에서 손을 흔드는데, 알고 보니까 날 마중 나온 게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청바지 입은, 내가 보기에는 그냥 날라리 같이 생겼던데, 걔가 그렇게 유명한 스타래요. 걔를 보겠다고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밤 10시는 됐는데 새까맣게 모여서 걔 이름을 부르면서 뭐라고, 뭐라고 이러는 거예요.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구요. 다음엔 이런 상황이면 내가 더 늦게 와야지 그랬어요.
이 사람은 이제 쓸쓸히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이 돌아오니 그 대통령은 그저 총이나 쏴서 짐승이나 잡으려고 놀러갔다가 오는데도 저렇게 환영을 하는데, 자기는 선교를 한답시고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그렇게 했는데 4식구 떠나서 결국은 3식구 모두 묻고, 인생의 막차 탄 사람처럼 돌아올 때 한없이 눈물이 나서 그래서 공항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구석에 앉아서 훌쩍거리고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니가 나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충성했으니 이 대통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환영식이 하늘에서 있을 터이니 너는 죽도록 충성하거라’ 그래서 바로 그 짐도 풀지 않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서 종신을 했다더라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 동안 오늘 사도바울이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인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3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하는 것입니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에게는 밤도 없고 낮도 없고 휴식의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각 사람에게 기독교의 조직된 진리를 가르쳤는데 그 태도는 눈물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닥치는 시련 때문에 흘리는 눈물, 자기의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 영혼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할 일은 많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데서 오는 자기 부족을 깨달은 눈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눈물로 자기의 약함을 끊임없이 주님께 맡기면서도 이 사람은 3년이나 쉬지 않고 그것도 수많은 사람 모였을 때 스타처럼 나타나서 한번 마이크 잡고 간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 각 사람을 훈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훈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최근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회심집회를 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을 드립니다만 교회가 사경회를 하는 것은 사경회가 필요가 없는 교회를 꿈꾸면서 하는 것이고, 회심 집회를 하는 것은 이런 회심 집회가 없기를 바라면서 하는 것이에요. 집에서 부모들이 사랑과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반듯하게 세운다면 그 회심집회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만약에 청교도들에게 그런 회심집회를 하자고 그러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야, 왜 그런 거를 하냐? 부모는 뒀다 국 끓여 먹니?’ 그럴 거예요. 그거는 부모가 해야 될 일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런 게 없기를 꿈꾸는 거예요. 오늘도 영상의 뉴스를 보니까 그 초등학교 한 5학년쯤 됐을까? 마지막에 나와서 ‘우리의 제일 큰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임을 고백하며’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그 결심선서를 낭독하잖아요. 보세요. 아이들이 신앙이 들어가면 그게 마음의 울리는 고백의 소리로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거는 사람의 이성이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있는 그런 신비한 영의 역사예요. 이것이 우리의 자손들의 가슴에 심겨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 신앙이 자녀들뿐이겠습니까? 온 교인 가슴 가슴마다 이 신비한 영의 역사가 심겨져서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않는다면 그들이 젊은 시절, 혹은 성인의 시절을 교회에서 보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목회자는 물론이고, 목회자의 일을 도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피붙이처럼 여기며 예수님이 계시면 가르치셨을 그러한 가르침으로 영혼 하나하나에게 이 말씀을 먹이는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끊없이 받고, 그렇게 아이들이 사랑의 교훈을 받으면서 변화되어 가도록 여러분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돌봐야 하는 것이에요. 회심 집회 한 번에 마치 판돈 모두 걸고 일어서는 도박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돼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회심을 했든, 회심을 아니 했든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자라나는 그 어린 영혼들, 교회 안에 아직 회심하지 않았거나, 회심 했어도 여전히 견고함이 없어서 흔들리는 지체들을 이렇게 사도 바울이 가졌던 이 마음, 이 마음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부어주시는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을 눈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본론을 말하는데 ‘이제 내가 지금 내가 너희를 좋아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라’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다른 때에 가르침 같았으면 큰 감동이 없었을 텐데, 이제 그는 떠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그런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21장에 보면 이제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수족을 결박하여 넘겨줄 것이다,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울 때에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랬습니다.
순교의 길을 가겠다는 목회자나 그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나 그 마음 안에는 모두 한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돌보며 목회를 했는데 이제는 그들과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 길을 갈 때에 사도 바울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목회자를 잃는 교인들은 또 얼마나 허전한 마음에 불안하였겠습니까? 그때에 사도는 신앙의 원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주님께 맡긴다는 이야기는 주님의 말씀께 부탁한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강하게 붙들려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거기에서 교리를 찾고, 그 말씀에 강력하게 붙들려 그 말씀의 효능 아래서 살아갈 때에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성경 한 권 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들을 떠나고 그리고 우리가 돌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살아계셔서 주님이 말씀, 주님의 말씀이 그를 강하게 붙들고 계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붙든 강한 손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지키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 교회 안에 있는 연약한 성도들, 우리의 지체들이 이 말씀께 부탁받을 수 있도록 그 말씀께 붙들려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세워줄 수 있을까 이거죠.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그렇게 말씀을 도구로 사람을 돌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정을 나누고 정감을 나누며 사람들의 심신을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은 그런 세상적인 방법이 성도의 교제의 모두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은혜의 말씀이 저희들에게 굳게 심겨져서 그래서 그 말씀에 굳게 붙잡혀서 영향을 받으며 사는 우리의 자녀들, 또 성도들이 될 때에 세상은 아무리 다르게 변해도 우리는 그들이 이길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이기도록 붙들고 계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늘 특이하게 그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 속에 이 큰 은혜의 영향력이 숨어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은혜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불길처럼 솟아나서 영혼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고치고 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영광을 당신의 교회와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교회의 지체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십시요. 회심에 이르도록, 회심에 이른 자들은 이 은혜의 말씀께 붙들려 살도록 여러분들이 마지막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은혜의 말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은혜의 말씀이 지체들의 마음속에, 여러분들의 육신의 자녀들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이렇게 바울처럼 사랑으로 눈물로 가르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