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마9:20-22) 2012.4.2 십자가 사경회(새벽) 1
2. 간절히 부를 때(마15:21-28) 2012.4.3 십자가 사경회(새벽) 7
3. 그리스도께 구할 것(마20:29-34) 2012.4.4 십자가 사경회(새벽) 10
4. 기도하는 믿음(막9:25) 2012.4.5 십자가 사경회(새벽) 14
5. 낮아진 마음의 갈망(눅19:9-14) 2012.4.6 십자가 사경회(새벽) 17
6. 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때(눅23:44) 2012.4.6 십자가 사경회(새벽) 20
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1 (2012.4.2 새벽십자가사경회)
1.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녹취자 : 김세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만나셨고 또 그들을 고쳐주셨지만 아마 이 열두 해를 혈루 병으로 앓은 여자가 치유 받은 사건만큼 감동적인 사건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혈루증이라고 하는 것은 학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부인병의 일종이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계속 하혈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 대해서 상세한 신상명세가 안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자가 결혼을 한 사람인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로서 이러한 질병 상태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2년 동안이나 이 혈루 증을 앓았다고 했으니 이 여자가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혼을 안 했다면 결혼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미 결혼을 했다면 아마 이 질병 때문에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 증을 앓았으니까 다른 병인 기사에 보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허비했다고 했으니 아마 어쩌면 유복한 여자였을 텐데, 이렇게 복병과 같은 혈루 병을 만나서 12년 동안을 보내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더 병의 증세가 심하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큰 질병에 걸리게 되면 많은 의원에게 호소를 할 것이고, 이 여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이 점점 더 병이 깊어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크게 나누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그냥 우연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힘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고, 또 어떤 문제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원을 모두 동원을 하고 우리의 지혜를 모두 바쳐도 해결이 안 되는 그러한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크고 작게 만나는 아주 작은 일, 모든지 하나님이 안 도와주셔도 되는 일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일 경우에 조차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신앙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리고 뒤로 물러가기 좋아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히 어려운 일을 만나도록 허락하셔서 그래서 작은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크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 이게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내용들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십자가를 주셔도 자기가 지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고생이 되는 것이고, 고생스러운 일이 생겨도 자신이 그것을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열 두 해 동안 혈루 병을 앓은 것이 이 여자가 자기의 힘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안에는 그것이 그냥 고생이었지, 은혜의 수단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 병으로 앓아서 가산을 다 쓰고 많은 의원에게 호소하였지만 질병이 더 깊어져가서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 여자의 마음에 예수를 만날 마음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상황을 바꾸는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허물 많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인데, 어딘들 시련이 없겠으며 어딘들 고난이 없겠습니까. 누구나 모두 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면, 그 사람은 반대로 여러분을 부러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알지 못하는 고난과 시련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찾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섭리 속에서 허락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여자는 열 두 해 동안 이 혈루 병을 싸우는 동안에는 이것이 고생거리였지만, 이제 열 두 해 만에 자신의 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짊어지고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을 때와 주님을 만날 때와 똑같은 정신 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비상하리만치 놀라운 집중력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놀랍게 집중하고, 또한 예수께 나아가 그 분께 매달릴 때에도 놀랍게 집중합니다. 혈루증 하나만이 이 여자에게 문제였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깨어진 가족관계, 낭비된 돈, 줄어드는 재산과 경제적인 곤란, 주위에서 사라져가는 친구들, 외로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여자의 모든 생각이 예수께 집중이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이 여자는 예수가 그 길을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하혈을 하는 몸을 이끌고 예수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나아가 나 좀 살려달라고 하는 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이러한 질병은 아주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래서 예수의 옷을 만졌습니다. 이것은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여자는 자기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치료의 은혜를 얻기에는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뒤로 왔고, 그리고 겉옷을 만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신 후에 당신을 찾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높고 그리고 교만해진 마음을 낮추는 것 없이는 주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주님의 음성이 주님의 귀에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목소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목소리,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목마른 자의 음성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 병을 앓고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원해 볼 수 있는 아무수단도 없이 완전히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여자는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졌고, 이게 내 인생에서 해 볼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던 것입니다. 자기처럼 이렇게 피가 흐르는 이 불결하고 더러운 여인이 존귀하신 예수님의 그 옷을 만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에 와서 예수님 모르게 살짝 그 옷자락을 만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깊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오늘도 그가 당신께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가난해지고, 시련을 만나면 모두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환란을 만났는데 그리고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는데도 여기에서 사람을 향한 미움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들을 쏟아놓으면서 하나님 앞에 도전하듯이 대드는 불순종의 때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곤고하고 인생의 너무 괴로운 길목을 지나면서 마음이 한없이 강퍅해지고 주님께 이를 악물고 대들듯이 그렇게 못된 인간이 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 이용해서 우리 인생의 문제 고친 후 하나님 버리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받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그렇게 주님을 멀리 떠나 환란을 당하게 만들었던 우리의 못된 본성을 고쳐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환란을 바꾸려고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고치려고 들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가 이렇게 긴 세월동안 고통을 당하여도 통렬하게 하나님 앞에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을 굳게 붙들며 그 은혜에 매달릴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 뒤로 와서 그 옷 가를 살짝 만지고 예수님도 모르게 고침을 받고 싶어 하였으나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신 분이었으니 행로에 지날 때마다 빗발치듯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리고 예수님의 주위를 에워쌌습니다. 예수님과 부딪히거나 혹은 예수님을 만지거나,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 모두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느끼셨을 리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 가를 살짝 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 이 여자의 손길을 통하여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여자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여자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제 마음에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며,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 안수해달라고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처지였지만, 그 겉옷을 만지기만 해도 구원을 받겠다고 굳게 마음속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병 고침을 낫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모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또한 그 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예수를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한 온전한 의탁이었고, 그리고 의지였으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시련을 당하였을 때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서 그 말씀을 굳게 믿는다고 말합니다. 권장할만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그 말씀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말씀에 대한 믿음은 하나의 자기에 대한 암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18세기까지 특별히 영국에서는 자기가 무슨 상황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한 후 성경을 확 펼쳐서 점을 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고 이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우매하기 짝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믿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 말씀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깊이 의존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찾아낸다고 하는 것도 점치는 것이지, 무슨 신앙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실하신 인격, 환란 받고 고난 받는 날에 나를 건지사 구원해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의 인생의 이 곤고한 문제들도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는 믿음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인 것입니다. 그래서 큰 풍파와 시련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멀리떠났던 마음을 돌이켜 그 분을 향하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시련을 당하고 있다면, 이 여자가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라고 하는 이러한 간절한 주님의 인격을 향한 의탁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그 깊은 환란과 시련으로부터 건져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돌이켜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시고, 여자가 그 시로부터 질병이 낫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환란과 시련은 주님이 직접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많은 경우 우리가 잘못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허락해서 만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스스로 자업자득처럼 얻게된 환란과 시련 때로는 질병,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밖에서 이렇게 고단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건강하게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서 때로는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리고 정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주고 싶은 사람인데, 그런데 내가 어떠한 희생을 해도 그를 그 불행한 질병에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랑하는 것 만큼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삶의 모든 상황, 대부분 우리가 있게 된 시련과 환란은 하나님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애매히 당하게 되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우리가 뿌려놓은 씨앗들을 우리가 거두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자비의 씨앗을 뿌렸더라면 은혜와 자비의 열매를 거두고 우리가 만약에 시기와 질투와 분쟁의 씨앗을 뿌렸더라면 우리는 거기로부터 미움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은 우리에게 없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여 죄를 짓고 주님께로부터 멀리 불순종의 길을 걷고 오늘날 우리가 시련을 당하게 되었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비참한 결과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께 간절히 매달리고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가 자비와 긍휼에 호소할 때 이 여자가 은총을 입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도 은총을 입히십니다. 이 여자는 감히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를 갖을 것은 생각도 못하고 옷만 만지고 얼른 고침을 받고 얼른 가려고 하였으니 이는 예수를 못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지극히 높으신 거룩하신 분이요, 자신은 그 분과 대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그 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기 전 이 여자를 대면하여 주시고 더욱이 감격적으로 딸아,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는 그러한 호칭으로 이 여자를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심하라. 이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치고 있는 마음이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평생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모두 빼앗겨 주님께 드릴 마음이 없게 하고, 시련과 고난을 만나도 걱정과 근심 때문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를 생각할 심적인 여유가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마음은 요동치고 고통을 받으며 그러한 염려와 근심이 이 여자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 매달렸을 때 주님께서는 제일 먼저 이 여자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오신 후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Peace with you."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심적인 상태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래서 요동치고 분노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고 오히려 마음 깊이 잠잠한 가운데 그를 향하고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평정 속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여자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시련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가장 필요한 것이 자신의 시련을 피할 길이라 생각하지만, 주님은 제일 먼저 평안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시련과 환란 속에서 주님의 은혜로 평안을 주실 때 우리는 놀랍게도 안개 속을 해매는 것 같은 우리의 인생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풍랑을 지나는 것 같은, 비록 우리가 바다에서 항로를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일단 이 무서운 풍랑이 멈추고 나면 별자리라도 보면서 항로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풍랑이 부는 그 밤에는 어두워 별빛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놀라운 평안을 주십니다.
(예화) 저도 이런 경험을 교회를 하면서 참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교회를 건축을 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슨 큰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리고 집안에 돈이 많아서 그런 씀씀이를 본 적도 없는데, 오천 만원, 일억은 껌 값입니다. 껌 값. 해결이 안 됩니다. 오천 만원, 일억을 오전에 빌려오면 점심 때 다 썼다고 하고 그 다음에 한 이억 빌려오면 3일 있으면 돈이 필요하다고 하고, 마음이 막 요동치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내 집 짓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서야 어떻게 끝까지 가겠습니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날 새벽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아, 하나님이 돈을 왕창 보내 주셨나보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을 외적인 환경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은혜는 많이 주셨는데 돈은 안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주셨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염려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했는데 이제는 찾아봐, 어디 있을 거야. 그리고 정말 공사 끝날 때까지 돈 걱정을 거의 안 했습니다.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데, 얼마나 놀라웠는가 하면 이 땅을 주인 할아버지한테 샀는데, 계약금 밖에 못 줬는데 인감과 그 모든 것을 다 주면서 가지고 가서 우리는 혹시 이 사람이 속이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변호사 자문을 받아서 계약서를 이 만큼을 만들어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종이를 주면서 쿵쿵 찍었더니 그 다음에 그랬습니다. 그냥 인감도장 가지고 가세요. 어떻게. 그냥 교회가 가져가세요. 누가 그렇게 합니까. 그러더니 그래서 대출을 받아서 땅 값을 치루시죠 그러는 것입니다. 다녀온 집사들이 울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이 나오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면 사기꾼이란 말 듣습니다. 나는 내가 땅 주인이고, 교회 땅을 누구한테 팔아도 절대로 그렇게 안 합니다. 내 성격에 할 리가 있습니까. 죽을 때까지 안 할 것입니다. 왜 하겠습니까. 누구를 믿고 인감도장을 다 주고 5억인가 3억인가 받고 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많이 놀랐지만, 정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근심을 딱 끊고 돈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냥 강물이 흘러가듯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깊이 마음에 깨달은 것이 이 마음의 평안이 응답의 증거이구나. 열렬히 기도해도 이것이 응답이 아닌 것 같으면 이 마음이 계속 분탕질을 합니다. 응답이 올 것 같으면 조용해집니다.
그러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 입니까. 내가 주님을 의지하리라. 주님은 나를 고쳐줄 것이고, 그리고 나는 주님께 순종하며 살리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의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끗이 그 시로 병 고침을 받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의원에게 치료받을 때에는 증상이 완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제 이 질병이 다 나았나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순간 다시 도졌고 불행이 불행을 뒤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쳐주심은 완전한 해결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하나님이 당신 만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주신 시련과 환란은 우리의 재능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복종과 순종, 주님을 향한 완전한 복종과 순종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과 같이 고통을 받는 여러분이 이 새벽에, 특별히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첫날에 예수께 나아가 그 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여러분의 고통 받는 상황을 모두 쏟아놓고 주님의 은총을 힘입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2 (2012.4.3 새벽십자가사경회)
2.간절히 부를 때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녹취자 : 김세나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예수께 부르짖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 여자도 어제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어 예수께 간절히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예수께 간절히 매달린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딸 때문이었습니다. 흉학히 귀신이 들렸다고 했으니 정신병인데, 그 상태가 매우 심하여 그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큰 고통을 받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여자는 아마도 열두 해 혈루증 걸렸던 여인처럼 백방으로 여를 많이 쓰며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러한 심령술사 같은 사람들에게 많이 찾아가서 자신의 딸의 문제를 의논하고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상황은 흉악히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아무 곳에도 의지할 수 있거나 혹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특히 병든 자를 고치고 치료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놀라운 일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이 여자의 마음속에 예수를 의지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어도 될 사람이 그 분을 진실하게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한계 상황에 왔을 때 그 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예수께 나아왔고 수많은 사람에게 에워 쌓여서 행로에 지나가고 있었을 터이니 그가 길 자랑자리에 삐쭉 서있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띄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며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고, 행색도 남루하고 그랬을 텐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인,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따라서 자신들을 지킬 것이라고 하는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고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모종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에 대한 멸시와 박대는 네 단계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제일 첫 번째는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부르짖는 자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여자의 소리 질러 부르는 이 간절한 부르짖음에는 한 마디도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조차 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 와서 시끄러우니 보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이 여자를 박대하였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비로소 입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무슨 은총을 배푸실까 했더니 냉정하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는 만인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거늘 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육신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이 여자를 박대하듯이 말 하는지 이 여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예수께 와서 절하고, 예수께 경배하며 나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예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비천한 가나한 여자라 할지라도 모역에 가까울 정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묵묵부답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이 저 여자를 보내버리라고 박대하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은 적이 없노라고 하신 말씀으로는 자신을 그저 박대하신 그 정도였는데 이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이 말씀은 그야말로 멸시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자녀라 함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말이고, 떡은 예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가리키는 것이고, 개들이라고 함은 이것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정도 상태에서 뒤로 물러가거나 낙심하거나 혹은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박대를 받을수록, 심지어 멸시를 받을수록 이 여자의 마음속에 불같은 믿음이 타 올랐고, 그 불같은 믿음은 이 여자에게 아주 독창적인 해석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주여 옳습니다. 그렇지만 개들이라고 할지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예수께 대답을 했으니 이것은 말대답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께 드리는 하나의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네 번이나 이 여자를 무시하고 박대하고 나아가서는 멸시하는 언사까지 베푸셨겠습니까. 이것이 과연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을 선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마치 무엇이냐 하면, 모닥불을 피우는 것 같은 것입니다. 불이 있으면 그 불이 잘 피도록 이렇게 후 붑니다. 그러면 그 바람은 불이 약할 때 부는 바람은 불을 끄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방향을 잘 맞춰서 불면 그 바람을 받으면서 불이 계속 비어 오릅니다.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왔을 때 이 여자의 믿음이 얼마 만큼인지 예수님께서 몰랐다든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을 때 물론 믿음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을 충만한 믿음으로 이렇게 불 일 듯 일어나게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마지막에는 박대를 하는 것처럼 대하셨을 때 그 때에 이 여자의 믿음이 불 일 듯 확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이 여자의 믿음이 더욱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앙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한번만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우리의 기도를 아신 것처럼 섭리 속에서 우리의 원하는 일들을 이루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불같이 일으키시기 위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우리의 응답을 지연시키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 불같이 타올라 이 기도의 제목이 응답된 후에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종종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상황을 바꿔주시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기도의 제목이지만, 하나님은 그 기회를 통하여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사 그렇게 시련과 환란을 당하게 된 원인이 되는 우리 자신을 고치고 바꾸심으로 이후에도 당신을 따르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태도를 보십시오. 주님께 무시당하고 박대당하고 마지막에는 멸시 당하게 되었지만, 믿음은 더욱 활활 타올라 그래서 처음 예수께 나아와 자기의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탁월한 열망으로 오직 자신을 개라 불러 주셔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열망에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때까지 기다리셨다는 듯이 이 여자의 고백을 보고 너의 믿음이 참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후로부터 그의 딸이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이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의 죄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거슬러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악을 행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매달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두 번의 기도와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 거나 혹은 여러분 자신의 기도는 하나님께 이미 들리지 않는바 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러한 의심을 마음속에 다 불태워 버리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여러분이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연단하시는 이 과정을 통하여 처음에 예수께 나아와 귀신들린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부르짖을 때에는 관심이 고통 받는 자신의 딸, 그로 말미암아 괴로운 자신의 처지에 있었지만,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멸시에 가까운 박대를 받으면서는 이 여자의 마음이 타올라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모든 마음이 모아지고 정신이 고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었고 그 분께 더욱더 매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도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믿음만큼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비록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시련의 폭풍 한 가운데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가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다면 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성심으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소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으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들이 고통을 받으면 큰 능력으로 시련에서 건져 내주십니다. 그들이 무지하면 주님이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이 깨닫게 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이 모자라면 성령을 통하여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유한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만 가진 사람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이 여인처럼 주께 사랑과 그리고 소망을 발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3 (2012.4.4 새벽십자가사경회)
3.그리스도께 구할 것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마 15:21-28)
녹취자 : 김세나
어느 시대이든 그렇지만 특히 예수님 살아계시던 이 시대에 가장 대접 받지 못하고 비천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중 한 부류의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도 보면 소경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눈을 뜨게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은 정상적인 직업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겨우 다른 사람들의 자비에 호소하여 빌어먹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 행진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만, 예수님이 큰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니까 혹시 이 분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의 메시야를 그런 각도에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소경이 길가에 앉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의심할여지 없이 구걸을 위해서 길가에 앉은 것입니다. 그 길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왔을 것이고 그들은 사람들이 가장 잘 다니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그 길가에서 구걸 행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을 때 소경은 누군가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예수께서 지금 지나가고 계시다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쳤습니다. 무리들은 예수께서 가까이 오실 때에 큰 소리를 지르는 이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시는 은혜로운 행진에 소경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불경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또 이러한 소경이 예수 그리스도 지나실 때에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좋은 가르침을 받으며 그 분을 옹위하며 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재가 가해지자 이 두 사람은 오히려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더 간절한 목소리로 더욱 소리를 질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똑같이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부르짖는 그 곳 가까이 머무르셨고, 그리고 이 사람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우리 삶의 중요한 교훈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만할 때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었고, 그들은 언제든지 자기의 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을 지나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때야말로 예수를 만날 만한 때라고 생각하며 간절히 소리를 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어느 시기이든지 주님을 만나지 않아도 좋을만한 때는 없지만, 그러나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상황을 주셔서 주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때가 바로 간절히 부르짖어 주님을 만나야 할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치하게 소리를 질러 주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기도로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또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찬양이 나오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가 고통을 받고 어려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토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로 이어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주님께 부르짖고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이 우리의 고백과 어울리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당신을 찾도록 부르시는 그 시점에서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쓰라린 마음을 안고 오래 견디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녹이고 우리의 심령을 찢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것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면서 우리의 삶에 은총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한 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와 아주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고, 세리인 죄인도 기도하였고 또 바리새인도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위해 기도하였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런저런 일도 했다고 기도하여 이 사람의 기도와 정 반대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아버지께 기도하지만, 마음속에는 그 분의 은총에 호소하기 보다는 자기 의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이루는데 이에 비하여 죄인인 세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똑같이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이 두 소경의 간절한 기도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기도였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즉,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본다면 이렇게 자기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관심을 갖으시거나 사랑을 베푸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 분의 사랑의 성품에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특히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이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우리만큼 정확히 알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그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만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삶의 상황을 아뢰며 기도할 때, 주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호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시련을 당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사람은 우리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를 실망시킬만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를 버리고 포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차 없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이 세상의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셋째로 기도의 장애를 만났을 때, 그들의 기도는 더욱 열렬하여 졌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찾았고, 큰 소리로 불렀으며 외쳤습니다. 무리가 꾸짖었다고 했으니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제재를 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 내지 말라고 꾸짖었고, 그러자 이 사람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같은 기도를 반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아주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순간들,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떠올랐다가는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끊임없이 씨를 뿌리나 그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의 각성은 생기지만, 실제로 간절히 부르짖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아뢸 때 이런 기도의 장애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 때에 우리의 기도는 간절히 불타오르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한번 이 사람들이 부르짖는 이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실 수 있었을 텐데, 제재를 당하고 더욱 간절히 부르짖을 때까지 이들을 가까이 오셔서 머물러서시지 않았습니다.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들이 오히려 난관을 만남으로 이들의 기도가 더욱 뜨거워져 당신을 향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연단하여 죄와 불순종으로 어그러졌던 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지만 주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치고 싶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절히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고 그들은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렀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까이로 오셨고 그리고 저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눈 먼 자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를 찾을 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눈을 뜨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누군가에게 인도를 받거나 떠 매여져 여기에 왔을 것이고, 여기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이 사람들의 최대의 희망은 그날 자비로운 가객을 만나 넉넉하게 동냥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오늘 밥을 먹을 수 있는 약간의 돈을 원합니다, 혹은 오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약간의 식량을 원한다고 했다면, 그 식량은 혹은 그 돈은 하루나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또 다시 이 소경들을 똑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문제를 근원부터 해결한다는 데에 신앙의 신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며 눈을 뜨게 해달라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 정직하게 믿음으로 아뢰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의 눈을 어루만져 주셨고, 그리하여 저희들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누구에게 가지고 옵니까. 혹시 여러분은 예수를 만나고 눈을 떠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던 처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한 푼의 동냥이나 혹은 한 번의 구걸로 만족하며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관에 처했을 때, 당신께 나아와 부르짖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난관이 올수록 더욱 소리를 지르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 중 일부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여 우리의 인생 자체를 바꿔 놓을 것을 믿으며 당신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사람들로부터 넉넉한 동냥을 얻어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더라면 이들의 하루 생활은 바뀔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인생 자체가 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예수께 간절히 부르짖었을 때 이 사람들의 인생은 바뀌게 되었으니 길거리에 앉아 동냥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입니다.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으로 많은 나날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이처럼 간절히 구하고 믿음으로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자비와 긍휼이 가득하셔서 당신에게 은총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던 이 소경들의 눈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을 보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문제를 이렇게 찾아오셔서 해결해 주시고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변화된 인생을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가 이 소경처럼 주님을 찾는 오롯한 마음을 주시도록 우리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주께 간절히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4 (2012.4.5 새벽십자가사경회)
4.기도하는 믿음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 9:25)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 없이 제자들끼리 있었습니다. 그 때에 누군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많은 기적적인 일을 행하는 광경을 보았고, 소문을 들었던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가서 기도를 받으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서 변론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고 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초지정을 모두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바로 앞에 보면 이 아이의 아버지가 귀신이 얼마나 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였는지 죽이려고 물과 불에 자주 던져 버리고 그러한 일들이 있었는데 만약에 주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달라고 빌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 주시기 전 무엇인가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북돋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고 나를 전심으로 믿어야 하느니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네가 진실로 믿는다면 그렇게 가정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는 정말 예수님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 안에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주님이 보시기에 충족하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만약 나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셔서 믿음을 갖게 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탄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고백을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당신 한분께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을 아시게 되었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꾸짖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고, 다시는 그 아이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시자 소리를 지르며 귀신이 나오고 아이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결국 그 귀신에서 놓인바 되었는데 아이는 이 영적인 많은 투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처럼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일어서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조용히 집에 가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궁금하였던 것을 여쭙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찌해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는 간절한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것은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과 함께 말씀사역을 하셨고, 그리고 인근각처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큰 권능을 주셨고, 그리고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들을 고치고 치료할 수 있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귀신들려 고통 받는 이 아이를 이 아비가 데리고 나왔을 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잊히지 않는 아주 인상 깊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모든 상황은 자신들의 평판을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로부터 빼앗아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여쭤보지 못하고 상황들이 모두 끝나고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예수님과만 있을 때 조용히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이런 유는 종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이 귀신과 같은 종류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여기에서 이 종류라고 하는 이것이 다른 많은 것들과 비교한 영적인 세력이라고 보지 않고 귀신들 중에도 힘의 강함과 약함에 있어서 등급들이 있는데 바로 이 제자들이 만났던 이 귀신은 굉장히 센 귀신이었고 바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류에 해당한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귀신은 매우 특별하게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었고 제자들의 영적인 능력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기도였습니다. 기도. 다시 말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약한 자를 고치고 또 모든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영적인 권세를 주셨지만, 너희의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그 영적인 능력은 증대되고 그 때에 이러한 종류의 상황을 감당할 수 있다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모든 병을 고치고 약한 것들을 치료하고 또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을 때, 처음에는 이들도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며 많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이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우쭐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록 그들에게 큰 권능을 주셨지만, 그들이 지속적으로 간절히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종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셔서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또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믿음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고 또 그것들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게 할 때에 자칫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것들 때문에 자만할 경우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었는데 그 돈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말씀에 있어서 무지한 사람에게 말씀의 탁월한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된다든지,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주셨는데 지혜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들이고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그러한 은사들을 주신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겸손하게 주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물질을 맡기실 것입니다.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탁월한 은사를 주셨어도 더욱 더 연구에 헌신하고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셔서 그의 은사를 빛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한없이 많이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 지혜를 믿음으로 사용하였을 때는 하나님께로 더 많은 축복을 받았고, 그 지혜가 빛을 더 발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 주님이 주신 지혜는 오히려 인간적인 용도의 사용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맡겨주신 분은 주님이시지만,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믿음으로 신앙 생활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쏟아 부으며 간절히 기도할 때, 만약에 그가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실 것이고,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주실 것이고, 또 물질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물질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핍과 어려움 속에서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주님을 찾지만 주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결핍과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한분을 향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도록 그렇게 매달리며 아버지를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은혜를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적은 은혜 밖에 못 받았으나 그 적은 은혜라도 붙들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더 어여삐 여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은 말씀을 깨달았어도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 오늘 여러분이 처한 그러한 종류의 상황이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기도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은 아닌지 한번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풀기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주 한분만을 앙망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우리의 그 마음의 움직임들을 보시고 우리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어렵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님의 큰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의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염려와 걱정에 빼앗기게 되고 그 걱정과 근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기도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과 근심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도 마음의 향로에서 타오르는 향불임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지 말고 우리의 생사를 주님 손에 온전히 의탁하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오라 5 (2012.4.6 새벽십자가사경회)
5.낮아진 마음의 갈망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세리와 그리고 바리새인의 비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도 올라갔고, 세리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성전을 내려올 때에는 주님께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인정을 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아마 이 비유를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은 세리보다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오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철저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오늘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죄인들과 함께 섞이지 않는 자신 나름대로의 성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세리와 같이 이름난 죄인들, 포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자기 구별을 가진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귈 사람, 못 사귈 사람 함께 어울리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 보다는 얼마나 구별된 삶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을 행하는 이 세상의 많은 죄인들과 구별된 생활이 있음을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도 모든 사람이 이 정도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한다고 했으니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는 것인데, 한번 여기 나온 대로 실시를 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게 어려운가. 남이 하는 이야기이니까 우습다 하지 마시고 한번 실험을 해 보십시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정확히 드렸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기는 하겠지만, 과연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헌금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한가한 시간에 대한민국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숫자와 국민소득을 곱하고 거기에다가 곱하기 십일조를 해 봤더니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이 나옵니다. 그 액수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엄격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이 사람보다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실제로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을 하며 살아왔을지 모르는 이 악한 세리가 오히려 주님께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내려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새인의 잘못된 판단은 이것이었습니까. 즉,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나의 행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말씀을 전혀 오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행실이 의로움으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내면의 질이 당신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당신의 의로움을 덧입혀 주시는데 이것은 신약시대에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동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리의 무엇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까. 이 놀라운 증거가 오늘 성경 본문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 비하, 혹은 자기 겸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여기에 두 개 나옵니다. 첫째는 이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그는 감히 눈을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하늘은 영광과 거룩함의 상징이었고 처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하였고, 유대인들이 서서 하는 기도는 대게 손을 올리고 하늘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그렇게 기도를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 하는 기도는 경건한 자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건하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면 오히려 머리를 숙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가슴을 쳤다고 하는 것은 애통을 상징하는 것이고, 혹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폐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폐가 응축될 때 이 혈액의 흐름이 원만치 않고 이 때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가슴을 두드리는 동작은 피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어서 통증을 경감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 사람은 가슴을 쳤고, 이것은 자기가 이 하나님 앞에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기도하기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 통절한 삶의 회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 한분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며 자기가 죄인일 뿐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름답고 예쁘기 때문에 베푸시는 사랑의 측면도 없지 않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 때문에 베푸시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당신 안에서 사랑의 성향이 있어 당신 자신의 성품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게 되는 그런 사랑입니다. 만일 아름다움이 있어 사랑한다면 일평생 죄 짓고 악을 향한 이 세리를 사랑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굳게 믿는 세리의 의존하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리고 그가 무엇을 구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갔느니라.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면 기도의 제목을 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하늘의 문을 닫으심으로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기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께서 그를 대하여 주시는 것만큼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그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때로는 넘어질 찌라도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많이 입으면 그는 사랑스럽고 은총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할 때 들리는 소리 없고 하나님 앞에 외면당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반성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현저하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꺾음, 자기 죽임이 없는 삶도 역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라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이 사람, 세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 줄을 알고 그 분의 은총 밖에는 사모할 바가 없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은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시고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낙망하지 말고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6.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때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눅 23:44)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시서부터 여섯 시까지 온 땅에 캄캄한 어두움이 내렸습니다. 이 온 땅에 내린 어두움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이 간단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열 번의 재앙이 내렸는데, 여기에서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재앙을 생각나게 합니다. 열 번 째 재앙은 애굽의 처음 난 초태생 들을 짐승으로부터 그리고 왕의 첫 번째 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었고, 아홉 번째 사건은 그 일이 있기 전 어두움이 깊이 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문설주에서 잡았고, 그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의 사자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범하지 못하고 넘어가도록 이렇게 만들어서 유월절이라고 하는 행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 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을 영원한 형벌의 죽음에서 건져내실 그러한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예표로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 이러한 커다란 재앙이 내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 모든 인류와 나아가서는 이 우주 전체를 구속하고자 하는 그러한 놀라운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 성소의 휘장은 열여덟 평으로 되어 있는 성막 중 열두 평으로 되어 있는 성소와 그리고 여섯 평으로 되어 있는 지성소 사이를 가로 지르고 있는 천이었습니다. 이 천은 얼마나 단단하게 지여졌는지 양쪽에 황소를 매달아 채찍질을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의 천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찢어졌는데 마태복음에 보면 위로부터 찢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위에서 직접 하나님의 주권으로 찢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위로부터 찢으셔서 그래서 이 성소의 휘장을 갈라버렸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을 찢으심으로 실제로 성소의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성소는 제사장이 들어가던 곳이었고,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꼭 한 차례 속죄일에 들어가서 주님을 뵈었고 심지어 그곳에서 대제사장이 어떤 일이 생겨서 죽어도 시체를 꺼내러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에 방울을 매달고 들어가서 이 방울 소리를 들으며 밖에 있는 사람은 이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죽지 않고 섬기는 것을 확인했고, 죽으면 그 줄로 그 사람을 잡아당겨 꺼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소는 그야말로 거룩한 성소중에서도 거룩한 성소였고 그래서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구별이 없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름이 아닌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이 막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제사장들도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까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베드로사도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왕같은 제사장이며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우리 모든 신자들을 제사장으로 불러 주시고 그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제 성소에 들어간 제사장들이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어 지성소까지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분의 보혈을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찢어진 휘장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구속의 사건이 하나님이 홀로 주관하신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이는 하나님이 우리들과 교통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주님의 이 성소가 지성소와 하나가 되어 모든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뿌리신 보혈의 핏길을 걸어 지나 하나님의 임재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누구든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길을 하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결국 우리를 향한 적용을 끌어내자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또 휘장을 찢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사 우리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의 평화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행하시면서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놀라운 구속의 사건을 토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고 또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믿음생활을 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멀어졌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화목의 길이니 이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심으로 이루신 이 구속의 열매들을 누리며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그렇게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이 놀라운 평화를 굳게 붙들며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사는 십자가의 화목을 끝까지 누리며 사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나오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