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7:7)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그 시대에 부패한 타락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족들과의 관계가 모두 무너지고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고 그리고 자식들이 부모와 집안 식구가 함께 원수가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실 때에는 진실한 신자가 되려면 결국 진실한 신자의 길을 함께 들어서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집안 식구들과 원수가 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세계를 찾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다, 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만, 예수님이 인용하신 원래 출전이 되고 있는 이 미가서에서는 신앙 때문에 서로가 원수가 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패역과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범죄가 만연하여서 각기 사람들이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모두 파괴되고, 심지어는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 가족들의 관계까지도 궤멸되어 버린 그런 상태를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미가 선지자는 의인을 발견할 수 없었고, 그리고 선을 행하는 정직한 사람을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가장 살기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악하게 되어 갈 때에 살맛이 나고 활개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의로워지고 모든 사람들의 삶이 환한 빛 아래 살아가는 삶이 될 때, 불법과 그리고 불의를 일삼고 어두움의 일들을 좋아하던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형제들에게 서로 그물을 던지며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강포한 때에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150편이나 되는 그 많은 시편 속에서 사실 대부분이 바로 이런 경건한 자녀들이 모순과 슬픔, 박해와 범죄, 불의와 거짓이 가득한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흘리는 눈물과 그리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서 탄원하는 그러한 기도들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은 자신만 진실해지는 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 수가 없어요. 만약에 우리들이 이 죄악되고 그리고 불법과 거짓이 가득한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세상을 상당히 닮은 사람, 그리고 그 세상에 살기에 어울리고 안성맞춤인 사람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진실한 하나님의 신자이고 자녀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진정한 신앙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불의하고 불법하고 포악한 이 세상에 거하는 것 그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위한 것이에요. 왜?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 자기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어.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거예요.
때로는 이 미가 선지자의 시대와 같이 정직하고 공의를 행하는 사람, 주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일에 인생의 가치를 두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그 자체가 고독이고, 이 땅에 숨쉬고 존재하는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의 연속인 그런 시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의 고통은 그만큼 더욱 가중되게 됩니다. 오늘 이때가 바로 이런 시대였습니다. 포악과 강포가 만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리고 힘없는 백성들을 약탈하고 유린하는 그런 무자비한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자비를 외치는 사람들이 돌에 맞고, 그리고 공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짓밟힘을 받는 그런 시대가 되어서 선지자도 대접받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 미가선지자는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라. 그러면 그 하나님이 나를 도울 것이라.’ 이렇게 아주 어린아이와 같이 간단한 신앙의 공식을 가지고 이 어려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시대를 지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가 시대와 같이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견디기 힘든 박해와 고난, 그리고 팽배한 거짓이 그의 경건한 심령을 괴롭힐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번성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산 사람들이 성공의 지름길로 달려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의 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선지자가 견디기 힘든 박해받는 시대 상황 속에서 아주 간단한 공식,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이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이런 유사한 구절들을 대개 hope라는 말로 번역을 했어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그런 이야기에요. ‘하나님을 바라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오히려 널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에요.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는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는 거예요. 신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유익이 무엇이에요. 신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유익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요. 왜 그러느냐?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다른 것에 도무지 희망을 갖지 아니하면, 결국 그 하나님만이 자기가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으실 거라는 고백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미가의 이 고백은 뭘까요? 그렇죠. 지금 정직자가 모두 끊어지고 선인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고 식구가 식구를 죽는 데 내어주는 이 피가 피를 잇대이는 이 끔찍하고 강포한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 힘이 없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을 능가하시는 분이에요. 이 상황을 자기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나아가려고 하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하나님은 이 상황을 훨씬 뛰어 넘는 분이시거든요. 하루아침에도 수백만의 악인을 수천만의 악인을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인을 없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고, 당신을 의뢰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단숨에 당신의 품으로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상황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되는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들은 왜 내가 이토록 간절히 하나님 앞에 구하고 상황보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능히 이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데 왜 잠잠히 계실까? 그게 끊임없는 질문이에요. 여러분,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100% 결론은 어디서 납니까? “여러분, 오늘 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실까요? 죄 때문이래요.”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바란 사람, 하나님의 도움심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에 놓여있는데 주님의 도움이 끊쳐진 것 같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소외된 것 같은 것을 느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무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세월을 흘러가면서 그저 천천히 자라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키가 자라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조금 씩 조금 씩 자라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물론 아주 조금씩은 자라죠. 그렇지만 특별하게 키가 자라는 때가 없는 사람들은 항상 작은 키를 유지하며 살 수 밖에 없어요. 키 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1년에 1센티씩 클 때 자기는 2센티씩 20년 동안 큰 사람이 아니라 쭉쭉 커요. 중학교 1학년 때 백 사십 몇 센티였는데 2학년 때는 160,170 일년에 10센티씩 쭉 쭉 쭉 쭉 3년 딱 크고 스톱이에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서서히 자라지만, 물론 서서히 내려가는 사람도 많아요. 서서히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서서히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긴 한데, 서서히 올라가다가 이렇게 어느 한 순간에 확 올라가요.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게 돼요. 그런데 언젠가 잘 생각해 보세요. 그저 성실과 인내로 꾸준히 교회에 나올 때도 물론 신앙은 자라요. 설교를 반은 듣고 반은 흘려보내고 그저 기도하는 것도 같고 자는 것도 같고, 찬송 하는 것도 같고 노는 것도 같고,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도 같고, 세상에 있는 것도 같고, 순종하는 것도 같고 불순종하는 것도 같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도 같고, 또 안 살고 싶어 하는 것도 같고, 그렇게 애매모호한 신앙생활을 할 때도 신앙은 자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주 적게 자라요. 그러나 언제 우리의 신앙이 쑥 하고 크냐 하면, 하나님도 바라볼 때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때, 그 때 우리의 신앙이 쭉 하고 크는 거예요.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노래시라.
하나님도 바라볼 때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때. 그래서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하나님 한 분밖에 바랄 분이 없을 때에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고정돼요. 그리고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온 마음이 나를 이 깊은 시련과 절망적인 웅덩이에서 건져 내실 수 있는 유일한 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집중될 때에 그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고,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 역시 깃들일 곳이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된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확 자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든 영혼의 변화,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는 하나님만 집중하는 데에서 오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신령한 기도가 그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에서 나오는 거예요. 신령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신령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신령한 세계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요령을 빨리 터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만 주목하는 그러한 삶, 하나님께만 시선을 두는 온전히 집중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기도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신문에 보니까, 은희 자매가, 간증을 썼어요. 조명숙 자매도 잘 쓰고 아주 대단합니다. 명필가들이 다 모였습니다. 제 위치가 위협을 받고 있어요. 그 얘기에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시리즈를 발견했다는 것이에요. 나이가 어리거든요. 자기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왔대요. 정말 똑 소리 나는 애, 착실한 애,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애, 그래서 자신은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그거였대.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그런데 열린교회 와 보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시리즈가 있더래. ‘그래 맞아.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그 시리즈를 사면서 그런 생각을 했대. ‘난 원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보조 자료라도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워낙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조금만 손질하면 될지도 모르고 그런 힌트가 여기에 있을 거다. 대부분은 내게 도움이 안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테잎을 하나 씩 둘 씩 듣고 나서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저리가고, ‘내가 정말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바로 그거에요. 그러니까 주님만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허상을 붙들고 살아가요. 하나님에 관한 상상도, 하나님에 관한 인식도, 헛된 것.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생각도 허상. 허상을 늘 좆고 살아가는 사람이 허당에 빠진단 말이죠. 바로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실한 삶을 살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 마음자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히 집중된 사람, 그렇게 될 때에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주님에게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거에요.
우리는 흔히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김목사가 정신 나갔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사람을 봤습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어느 형제, 자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대는 이 교회에 와서 등록을 했으니까 담임목사의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 그랬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들으면 정신병자들이 모인 그런 교회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열렬하게 기도하는 그 불을 끄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세요. 왜 그래요? 또 그런 사람은 별로 못 보았어도, 이런 사람은 많이 봤을 거예요. 열심히 섬기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사람. 그래서 다른 교회로 옮겨서는 절대로 일 안하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이번에 옮긴 교회에서는 일을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사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보세요. 기도가 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겠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겠어요. 문제는 일이나 기도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만 주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자꾸 뒤로 물러가요.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고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한 자신의 모습을 대견스러워 하는 태도에 붙잡힌 사람들이에요. 기도생활 자체가 외식이 돼요. 말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주목하는 삶이 없었던 사람들은 항상 말씀을 배우고 나면 그 지식이 거침돌이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점점 어두워지게 돼요. 여러분 그런 사람 보셨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말이죠. 성경 어디서 이상하게 배워서 그리고는 비비틀린 신앙관 가지고 그 쓰레기 같은 신앙을 붙들고 거기에 맞추어서 진리를 받으려고 하는데 거기 들어가는 진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먹을 것이 쏟아지는데 자기 나름대로 만든 칸막이 쳐진 바구니에 담아보고, 배는 고파 죽겠는데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으니까 결국은 바구니를 버리고 다른 바구니를 가져오는 대신에 먹을 것을 버리고 빈 바구니를 들고 가면서 이 먹을 것은 참된 먹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정신병자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 많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데나 다니면서 성경공부하고, 아무 책이나 잡식성으로 읽는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생각하라고. 그렇게 되면 안돼요.
그것에 대한 답을 여기서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려가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주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라, 그리고 나를 돕는 자시라. 나를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져내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도움이 끊겨진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 평탄한 언덕으로 나를 올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희망,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께로 더 다가가. 말씀으로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지식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의 신앙에 날개를 달아주어서 더 하나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게 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씀이에요?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고, 그 마음의 시선이 하나남께 집중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수가 없으며 자신의 영혼에도 유익이 별로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큰 풍파와 환난을 만나서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때에 다시 말하면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릴 때에 거기서 주님을 붙드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까지 내몰렸으면서도 손을 벌려 주님을 붙잡는 대신에 뒤로 물러가서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실패들을 많이 경험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인생이 벼랑끝으로 내몰린다고 해서 주님의 도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해서 거기서 주님을 붙잡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모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일 때에 주님만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 때에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인생이 벼랑 끝에 내몰릴 때에 주님만을 붙드는 사람. 혹은 하나님의 도움 아니면 그 어떤 도움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때에 하나님만 붙드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까지 그들은 긴 세월동안 정말 하나님만 의지할 이유가 없는 때 같은 때 하나님만 의지해. 모든 것이 평탄하게 흘러갈 때에도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하는 가난하고 절대 의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붙들고 매달리는 거예요.
오늘 선지자가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고 수천, 수백만, 수억의 간구하고 기도하는 자들을 찾으시되,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과 성공한 사람들을 먼저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전심으로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의지하고, 당신께만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그 사람들을 찾으셔서 주님이 그들이 주님밖에 없는 것처럼 주님을 주목하는 것처럼 주님도 그들밖에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신앙생활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답을 찾으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