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부흥과 목회
녹취자 : 오희열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목회에 있어서 주기도문을 우리들이 가르쳐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3직에 대해서 신학교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다스리셨습니다. 특히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이 온 우주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그 왕권은 이 세상나라의 왕권과는 달리 우주적인 왕이면서도 이 세상의 도덕적인 질서들이 펼쳐질 때에는 한 사람 한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왕 되심이 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왕적인 권세를 이 세상에 잘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관이 교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오셔서 우리의 대속 제물로 당신 자신이 죽으셔서 구속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장의 직무가 죄를 지은 죄인, 악을 행한 죄인인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의해서 되풀이 될 수 없는 중보적사역과 되풀이 될 수 있는 사역으로 나눠집니다. 되풀이 될 수 없는 사역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는 속죄의 사역은 교회에 의해서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사역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이의 중간에 있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빈다는 것은 일정 부분 제사장으로의 역할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왕과 제사장을 함께 묶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이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계승이 되는데, 교회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 이치가 무엇이고, 그래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될 것인지를 선포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선지자적인 직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에서 교회로 연결시켰는데, 이것을 한 번 더 끌어내려서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차원에서 적용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와 평신도는 모두 한 교회의 질서 속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의 지체입니다. 그 지체로서 이 왕권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 성도들도 그 일에 참여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신학에서 배워 잘 아는 것이고 이 때 우리도 그 왕권에 어느 정도 참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왕이 아니지만 그 왕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순종하면서 그 왕국이 이루어지기 위해 봉사하면서, 또 이루어진 왕국 안에서 기뻐하면서 그 왕권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산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왕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목회자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사역을 목회자나 성도들이 되풀이 할 수는 없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이 우리 믿는 목회자와 성도들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또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 직분을 승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대의중 하나가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장의 교리였습니다. 가톨릭의 사제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중보자라는 사상을 타파하고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당신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사상을 수립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와 성도는 바깥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도록 섬기며 기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저는 23년 전에 여러분과 똑같이 맨바닥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지하실 교회에서 일곱 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23년을 목회하면서 저는 단 한 번도 내 주위의 목회자들을 나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분들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분들과 제가 가는 길이 따로 있다고 걸어왔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코 단 한 번도 주위에 있는 크고 작은 교회를 나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분들보다 우월하다는 뜻에서 경쟁상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목회의 대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결과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운동을 한다고 모두가 조용기 목사님 같은 교회를 하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한다고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 같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찬양집회를 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예전에 하용조 목사님께서 하시던 온누리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목회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어디에 나오며, 실제로 우리의 목회자들이 그렇게 큰 교회를 한다고 해서 누가 행복한지 묻고 싶습니다. 모세가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남전도회 회원만 67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죽도록 고생하고 광에서 죽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로서 목회자가 누구인가 라는 이 정체성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목회자가 누구로 보일 것 같습니까? 언젠가 어느 잡지사에서 우리 교회를 취재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신문에 제 이름이 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처음엔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그 잡지사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곳이 아니라 불신자가 하는 잡지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날 취재하려고 하느냐?” 했더니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돌아가면서 취재하는데 마침 종교 차례가 되었고, 가톨릭과 불교는 했기 때문에 개신교 차례인데 누가 추천을 해서 취재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취재를 하는 동안 하나님은 누구이고, 예수를 왜 믿어야 하며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우리의 인생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신학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차분히 가르쳐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 기자가 하는 말이 재밌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취재를 하면서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과 천주교 신부님들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네, 그런데요?”,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럼 누구 같습니까?”, “목사님은 스님 같으십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기자가 스님을 인터뷰했더니 철학자 같았고, 개신교 목사들은 비즈니스맨, 사업가 같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목사의 인상입니다.
목사님들 친구들과 만나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거나 주의 진리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대개 땅 사고 교회 산 이야기, 말 안 들은 장로들 혼내 준 이야기, 아니면 고생한 이야기들입니다. 이게 우리들이 깊이 자성해야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누구인가 라는 것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를 볼 때, 가장 성경으로 돌아간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한 부류가 영국의 청교도였습니다. 이 청교도들이 국교도와 싸우면서 철저한 종교개혁을 따를 것을 주장했고 결국 이들이 핍박을 못 이기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잉글랜드를 거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했고 거기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벌떼처럼 파송되는 새로운 개신교 부흥의 시대를 연 장본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목사를 누구라고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등록했을 때 한 번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목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의 어른이요.”, “교회의 CEO요,”, 아니면 “회사로 말하자면 사장 같은 사람이요.”, “최고 지도자요.” 라고 합니다. 재밌는 것은 아무 교인도 목사를 ‘진리’와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목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자손이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생각했던 목사의 정체성입니다.
목사가 열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업, 그래서 교회를 크게 키워서 마치 사장인 것처럼 행세하고 그 큰 교회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은 목사의 본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사명은 조상의 사명을 이어받은 것이고 목사의 조상은 구약에서 핍박을 받고 죽어간 아벨로부터 스가랴에 이르기까지 피 흘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에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왜 죽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죽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진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에 의한 선지자직의 계승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진리, 순전한 말씀을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거룩하고 완벽한 소명이란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모든 일을 못해도 그 일 하나만 잘하며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충성스런 종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을 다 잘한다고 해도 그 일을 하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여러분이 신학교 다니셨을 때 들었을 신학자가 있습니다. 마틴 부처입니다. 이 사람은 가톨릭의 사제였다가 종교개혁을 통해 회심을 하고 스트라스부르(프랑스에서는 스트라스부르, 독일에서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목회를 할 때, 제네바에서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다가 쫓겨나서 도망친 곳이 이 곳이었고 거기서 마틴 부처를 만나서 목회를 배우게 됩니다. 그 전까지 칼빈은 샤프한 신학자의 소양이 있는 젊은이였고 이미 스물두 살 때, 아마도 유럽에서는 가장 탁월한 지성인일 것이라고 인정을 받던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칼빈은 종교개혁에 뛰어들어 로잔에서 가톨릭을 박살내고 로잔시가 종교개혁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장본인이었었습니다. 그리고 파렐, 비레, 프로망 같은 사람들과 함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제네바 삐에르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차갑고 날카로운 신학은 있었지만 목회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결국 교인들과 부딪히고 실패하여 쫓겨나서 스트라스부르에서 마틴 부처를 만났습니다. 마틴 부처는 신학자이며 탁월한 목회자였습니다. 거기서 많은 프랑스의 난민들을 상대로 이민 목회를 했습니다. 이 사람의 확고한 목회 신학은 가톨릭이 부패하게 된 이유는 초대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는데,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에게 계승되는 선지자의 직무였습니다.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선포할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일이었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설교하고 설교가 끝난 후에는 그 설교를 이해시키는 교육 목회를 하신 것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고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능하게 선포하는 것, 설교가 너무너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 하나로 목회가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잘 자라나서 성도들끼리 선지자로서 섬겨서 지식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일으켜 세워주어서 그물망처럼 온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성경과 신학적인 지식이 유통하게끔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이 거기서 배웠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틴 부처의 주선으로 이델레뜨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고 2차 종교개혁을 위해서 제네바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예전에는 피 끓는 젊은이였다면 이제 돌아갈 때는 아주 노련한 목회자가 되어서 제네바로 돌아갔기 때문에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엉터리들과 싸우면서 엄청난 모함과 고난을 받으면서 31가지의 질병을 얻으면서까지 목회를 했는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제네바 교회에 2차 부임할 때 교인이 5천명이었는데 마지막 칼빈이 운명할 때의 교인이 1만 5천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대자들이 칼빈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칼빈의 교회가 그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을 마틴 부처의 목회의 실천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칼빈은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매우 어려운 신학적 지식을 아주 쉬운 말로 성도들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화란에서 학자를 한 분 만났는데 이 분은 평생을 마틴 부처의 연구 헌신한 대학자이신데 그분의 서재를 인수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여러 해 그분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칼빈 시대에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칼빈만 그렇게 유명하게 되었습니까?”, “칼빈은 아주 어려운 신학적인 지식을 평신도들이 알아듣게끔 소통해줄 수 있는 대중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마틴 부처는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칼빈의 스승이었지만 잊혀졌고 칼빈의 그에게서 배웠지만 오늘날까지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많은 신학자 중에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칼빈밖에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칼빈밖에 없었습니다.” 90세가 다 된 할아버지이신데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칼빈의 목회 방식은 탁월할 설교자였지만 설교하나를 믿지 않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평신도들을 가르치고, 신학교에 가서 강의하고 병자들을 심방하면서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제가 이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거론함으로써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냥 내버려둬. 교회가 잘 되든지 말든지,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있더라도 그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맘대로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입니다. 그렇다면 상전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숨 거두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치다가 죽어야 그것이 목회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까지의 몸부림을 보면 어떤 방법을 하나 배워서 목회를 변화시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서 하는 무슨 훈련을 해보겠다거나, 찬양집회를 해보겠다거나, 금이빨을 만드는 것, 사람 쓰러뜨리는 것, 웃음 치료법, 건강식품을 팔면서 해보는 것, 이런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목회자가 해야 할 고유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위대한 힘은 진리의 힘입니다. 그 진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예레미야의 고백을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었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말을 안 들어서 그 말씀을 덮어버렸고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고백을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발 벗고 뛰어다니면서 성도들을 돌본다고 해도 모든 성도들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러면 결국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고 신앙을 심어주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설교를 애쓸 쓴다고 해서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목사라서 남의 교회에서 예배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안식년도 없어서 더더욱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 입원하여 두 눈을 수술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 수가 없었지만 다른 사지는 멀쩡하니까 외출증을 끊고 그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 두 군데를 갔습니다. 하나는 장로교회, 하나는 감리교회였습니다. 오전에 장로교회에 갔더니 50대쯤 되어 보이는 목회자가 나와서 400명 정도의 교인들에게 성경 한 절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면서 수많은 간증들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설교를 누가 듣는다고, 그렇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한 절은 그냥 지나가듯이 읽고 한 시간 내내 그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뒤에 앉아있는데 예배시간에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강단을 지키고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의 거룩한 예배를 이렇게 조잡하게 만들 수 있을까?’ 했습니다. 저녁에는 옆에 있는 침례교회를 갔습니다. 거기서도 그 나이쯤의 목회자가 설교를 하는데 차라리 오전에 드린 교회가 훨씬 나았습니다. 거긴 시종일관 말은 안 되도 목사 잘 섬기면 복 받는다는 주제라도 뚜렷했는데, 이 침례교회의 목사는 45분쯤 설교를 하는데 신학자인 나도 무슨 내용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코미디 얘기도 나오고 성경얘기도 나오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오고 신문 얘기도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신학을 공부한 나도 모르겠는데 성도들 중에 누가 알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저는 너무 슬픈 생각이 든 게, 오전 설교는 몸에 안좋은 불량식품을 먹인 엄마 같았고 오후는 영양가가 아무것도 없는 멀건 죽을 먹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교인들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칠 때, 공부는 많이 못했어도 피 절인 음성이 그 안에서 나와야 하잖습니까? 그게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하고 몸부림쳐야합니다.
설교의 내용에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베끼십시오. 내용도 안 되는 설교를 해서 죽도 밥도 안 되는 것 보다는 베끼십시오. 베끼더라도 시시한 사람을 베끼지 마시고 칼빈이나, 감리교라면 웨슬레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로이든 존스, 루터 이런 사람들의 설교 중에서 아주 잘 된 것을 베끼십시오. 그리고 그냥 베끼는 게 아니라 자기 목회에 맞게끔 자기가 그 설교를 모두 읽고 은혜를 받은 후에 다시 정리를 하십시오. 상당한 수고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화를 하고 은혜를 받고 설교를 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베낀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은혜 받아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을 베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를 베끼는 것은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가지고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마치 한 사발의 피를 토하듯이 그 설교 속에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말씀의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게 주기도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그렇게 감화력 있게 설교를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해야 할 욕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이 질병 상태에서 깨어나서 몸이 회복이 될 때, 추어탕도 먹고 싶고, 메기탕이나 갈비나 중국 요리가 먹고 싶다고 생각이 나지만, 건강이 너무 나빠지면 먹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저도 작년에 두 번이나 수술을 했고 두 번째 수술은 네 시간 반을 했습니다. 저는 평생을 열렬하게 살았고, 낮잠을 잔 적이 없고, 여섯 시간이상 자면 죄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수술을 받고 나니 움직일 수가 없어서 3개월을 그림같이 집에서 누워있었습니다. 밥상을 차려오면 수저를 드는 게 힘이 들었습니다. 밥 먹고 오줌 누는 일은 우리 힘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이 일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해 보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호응을 안 해줍니다.”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 것입니다.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기도문 학교를 만드십시오. 먼저 여러 목사님들이 피나게 배울 생각을 하셔야합니다. 요즘의 문제는 목사가 진리를 배우려고 하지는 않고 방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릇이 몇 억짜리면 뭐합니까, 담겨진 음식이 먹을 만한 음식이 없는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면 방법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그것을 습득하기위해 몸부림을 쳐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생활의 달인을 보면서 회개했습니다. 부산에 있는 원산면옥이라는 냉면집인데 그 분이 42년째 거기서 냉면을 한다고 합니다. 그 만드는 과정을 보니까 숙연해서 차마 냉면을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냉면을 시장에서 사다가 만드는데 이분은 녹말가루로 만듭니다. 이 녹말가루도 시장에서 사다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고구마를 사서 썩혀서 그것을 녹말을 내고, 지붕에 깨끗이 말리고, 말린 것을 빻고 채로 내려서 냉면 반죽을 만듭니다. 육수는 직원들을 모두 퇴근 시키고 밤 10시 반부터 혼자 만듭니다. 회냉면은 홍어로 만드는데 홍어의 물기를 빼기위해서 탈수기를 쓰지 않고 손으로 밤 12시까지 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기계에 걸어놓으면 다음날 이것이 돌멩이처럼 되고, 이것을 바닥에 집어던지면서 하나씩 해체를 해서 고명을 만들고 양념장을 해서 만드는데, 제가 확고하게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설교 한 편을 절대로 저렇게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설교 한 편을 위해서 저렇게 준비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냉면 한 그릇 먹고 지나갈 것을 위해서 저렇게 미친 듯이 42년을 해오는데, 그분 제자가 수없이 많이 있는데 고명 담당제자, 면발 담당제자, 육수 담당제자가 따로 있지만 아무에게도 안 맡기고 그들은 자라고 하고 그분 혼자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회개했습니다. 정말 설교 한 편을 저렇게 준비하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설사 놀라운 일이 안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목사의 마음속에는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못 알아주고 안 알아줘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고혈을 짜내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의 목사님들을 제외하고는 교인들이 “와! 주기도문이 저런 뜻이었어?” 이럴 정도로 가르칠 수 있는 목회자는 별로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일식집에서 생선의 사시미를 뜰 때까지 3년 반이 걸린답니다. 그동안에는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매운탕거리나 다듬다가 그 칼로 사시미를 썰 정도가 되려면 3년 반이 걸린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얼마를 공부해야하겠습니까? 주기도문 학교를 먼저 만들게 아니라 여러분이 모여서 혼자 하기 힘들고 결심이 약하면 뜻이 맞는 목회자들 예닐곱이 모여서 월요일 마다 매주 모여서 세 시간씩 공부하기로 하십시오. 주기도문에 관한 책이 이 방을 절반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영어로 쓰였거나 독일어로 쓰였거나 불어로 쓰였거나 서반어로 쓰였습니다. 그럼 그런 것 다 빼고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 읽는다고 해도 작은 캐비넷 하나 정도는 채울 것입니다. 그중에서 의미 없는 책은 집어치우고 의미 있는 책들을 놓고 공부하기 시작해야합니다. 냉면도 배워야 그런 냉면을 만들지 배우지 않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한 권 썼습니다. 한 달에 걸쳐서 썼는데,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제가 참고한 책이 약 120권정도 됩니다. 대부분 제가 읽은 책입니다. 저도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탄탄하게 하고 그것을 소화한 다음에 주기도문을 설교하십시오. 제가 18주에 걸쳐서 주기도문을 설교했습니다. 23년 목회하는 동안에 두 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교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공부하고, 공부하고 나면 이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를 쓸 수 있는 내용들이 풍부해지고 그때 정신을 집중해서 써야합니다. 이런 말을 하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은 도시에서 목회하니까 시골 목회에 대해서 뭘 아십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여긴 설교를 준비하든 안 하든 노인들이 졸기는 마찬가집니다.” 합니다.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힘은 나이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 안하고 가면 졸고 많이 준비하고 가면 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중에 보좌 앞에서 주님께서 “너는 어떻게 내 말씀을 전했니?”하고 물으시면 “저는 설교 준비 안하고 그냥 올라갔습니다.” “왜?” “늘 교인들이 졸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었겠구나. 나라도 그랬을 거다. 잘했다.” 하시겠습니까? “비록 졸았지만, 어떤 사람은 이해를 못했지만, 어떤 사람은 설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지만 그것이 내 사명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너무 적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종을 칭찬하시겠습니까? 포사이스(P. T. Forsyth)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로 상을 받는 게 아니라 과정으로 상을 받는 것이다.” 어떤 자세로 몸부림치며 준비했는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주기도문에 대해서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라면 2박 3일을 쉬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여러분의 것이 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아주 실제적이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하지 마시고 기도하시면서 지금으로부터 6개월 뒤에 주기도문을 연속해서 설교하겠노라 마음을 먹으시고 책을 읽고 공부하시는 겁니다. 원고는 그때 가서 써도 되지만 공부하시면서 쓰십시오. 그렇게 해서 주기도문을 쉽게 설교하도록 끝까지 준비하고 원고를 잘 쓴 후에 가능하면 원고를 외우십시오. 필요하면 금식기도를 하시고 올라가서 이 한 편의 설교에 피를 토하고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설교를 하십시오. 그러면 성도들이 움찔할 것입니다. ‘뭐야 이거, 평소에 듣던 그런 설교가 아니잖아, 이건 뭐지?’ 할 겁니다. 그 다음 주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 이 교회에 불을 한 번 주시든지,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든지 하십시오.’하며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사모님과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성도들이 목사님이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마치십시오. 저는 18주가 걸렸지만 여러분은 20주가 걸릴 수도 있고, 14주가 걸릴 수도 있고 10주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하고 싶은 만큼 하십시오. 또 이 책 같은 좋은 자료가 있잖습니까? 이 책에는 여러분이 30권의 책을 읽어도 정리할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 압축되어 들어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준비하기 위해서 몇 천만 원 어치의 책을 샀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잘 정리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 쓴 원고들을 모으시고, 프린트해서 책을 만들거나 교인이 얼마 안 되면 제본하십시오. 그리고 “담임 목사인 내가 여러분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줄테니 공부하러 오십시오.”하면서 장로님들은 의무적으로 참여 시키시고, 협박만하지 마시고 잘 타일러서 사람을 열댓 명 정도 모으십시오. 그래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테니, 아무개는 차를 준비하고 아무개는 다과를 준비하라고 하면서 매주 가장 좋은 시간에 모이셔서 차도 마시면서 서로 대화도 나누면서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했던 설교를 모두 한 번은 들었을 것이고, 나누어준 책을 한 장씩 읽고, 각 장마다 문제를 대여섯 개 정도 내고 답을 달아 오라고 한 후에 목사님은 얘기하지 마시고, 그것을 읽고 들은 후에 느낀 점을 얘기하라고 하십시오.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주 잘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하나씩 풀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난 후, 목사님께서 정리를 해주시는 겁니다. 교인들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설교를 듣고 공부한 것이지만 여러분은 6개월 동안 공부하고 설교한 것이기 때문에 지식의 분량에 있어서 성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책도 그런 책 중에 하나이니 읽으십시오. 교인들이 나눈 이야기를 여러분은 깨알같이 적으시고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 구절은 이런 뜻이고 저 구절은 저런 뜻이고, 마지막으로 이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니까 우리가 이런 교회,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간절히 기도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을 공부해오라고 하십시오. 자발적으로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동안 기도를 하자고 독려하여 새벽기도를 하거나 하루에 한 번씩 교회에 나와서 20분이라도 기도하자고 타일러서 신앙으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공부가 끝날 때쯤에는 은혜를 받을 것이고, 공부가 마치기 몇 주 전에 곧 공부가 마칠 것이니 다음 2기에 공부할 사람을 한 사람씩 데려오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에게 선전해서 데리고 올 것이고, 혹시 아이가 있는 집에는 그 아이를 봐주면서 성도들끼리 엮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는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자세도 달라집니다. 이렇게 1기, 2기, 3기를 할 동안 여러분은 그 다음 공부를 하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도신경이라면 사도신경에 관한 책들을 모아 놓고 목사님들 예닐곱 분이 모여서 열심히 공부해서 사도신경을 설교하고 사도신경 성경공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을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경우에는 예수 믿겠다는 사람에게 1년을 가르쳤습니다. 이 주기도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평소에 하시던 기도였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을 때에는 예배 끝날 때 외우고 흩어지라는 용도로 가르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의 하셨던 많은 기도들의 패턴을 모아 놓은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기도가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 속에는 이러한 초대교회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교회, 이런 신자,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든 게 사람이라면 성경과 다르니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품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목사님이 계시고 11년 동안 교회를 이끌어 오셨다고 합시다. 그런데 교인들이 ‘도대체 저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어떤 교회로 만들고 싶은 걸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가끔 들어도 구체적으로 그런 말씀을 안 하시면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가장 좋은 비결은 목사님의 기도를 엿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1년 내내 이런 교회가 되고 싶다고 기도를 안 하신다면 목사님의 마음에 목회에 대한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하나님,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 교인들이 정말 회심하고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우리 교인들이 참 사랑이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한다면 목사님의 마음속에 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싶은지 그림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크게 4부로 나뉩니다. 1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까지 입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3부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인데 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마지막 4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송영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4부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초대교회 공동체, 그리고 우리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이 땅의 나라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소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 왕국을 이루어가는 소명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그 왕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일평생 가르쳐야 할 사명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가 임하게 하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동참시키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런 위대한 뜻들을 인간을 참여시켜서 이루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첫 번째 관심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가르쳐서 은혜를 받으면 성도들의 삶의 초점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 나라를 위해,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공동체를 위한기도이고 마지막은 송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이 목표를 따라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피가 배어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기도에 이르는 쉬운 길’이라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해 동안에도 얼마나 많이 주기도문이 외워지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수천 년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주기도문의 본문 안에 있는 일점일획의 맛도 볼 수 없고 하나님께 기도가 올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기도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순교자이다. 주기도문은 온 몸으로 고문을 당해왔고 오용되어 왔는데 오직 소수의 신자들만이 그것을 올바로 사용해서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 오늘날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의 도덕성 부패성을 가지고 개탄을 하는데 나아지는 게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관심사가 세속적인 상황에서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언제나 이런 문제는 목회자나 성도들을 통해서 바깥으로 계속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한 영적인 변화가 오고 목회 자체가 어떻게 하든지 영혼을 살려서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목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님들이 하여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깊이 만나셔야 합니다. 젊은 시절 신학 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목회를 하면서 목숨을 걸고 주님을 깊이 만나서 우리 목회자들이 새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 목사님들은 기도를 많이 안 합니다. 나이가 들고 몸의 근력이 사라지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젊었을 때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 하루에 세 시간 기도가 목표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합니다. 체력이 안 됩니다. 더구나 두 번 수술을 하고 나서는 더욱 못합니다. 전에는 새벽기도 나가려다가도 몸이 안 좋아도 “충성!”하고 이불을 발로 차고 나갔지만 지금은 새벽에 몸이 안 좋으면 그냥 잡니다. 그렇게 안하면 육체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젊은 목회자들은 그런 것을 보고 배우면 안 됩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되더라도 지금은 몸부림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세 번째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전국의 서점 주인들이 모인 수련회에서 설교를 했더니 서점 주인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들이 정말 책을 안 읽습니다. 저희의 소원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교회에서 주는 도서비는 꼭 책을 사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생활이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피나게 공부해야합니다. 일평생 학생이 되어야합니다. 제 나이 환갑입니다. 저도 어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공부합니다. 제가 주일에 아파서 설교는 못해도 월요일에 공부는 하러 나갑니다.
이번에도 국민일보에 나왔지만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을 썼는데 180권의 책이 동원이 되었습니다. 저도 어떤 때는 쉬고 싶고 손녀와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공부해야합니다. 제 아내는 “여보, 이제 공부하지 말고 좀 쉬어요.”, “여보, 내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매 주일 마다 레일 바이크를 타고 저 탄광 속으로 들어가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석탄을 캐다가 주일에 그걸로 불을 붙여 때서 열을 내어 성도들의 마음을 덥히는 사람이야, 일주일 동안 공부 안 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그동안 많이 공부했잖아.”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교만입니다. 공부해야합니다. 제 나이 50이 넘어서 어거스틴을 읽으려고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53세에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방에 내려왔을 때 거기는 경상도였고 후배 목회자 한 사람이 서울에서 부목사 생활하다가 탈진해서 시골에서 한 5년만 체력을 보충하고 시골교회 목회는 힘들지 않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불꽃처럼 서울에 올라가서 목회하려고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모습은 서울에서 불러도 못 갈 정도가 되었답니다. 처음에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설교 준비를 하든 안 하든 할머니들 졸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족대 들고 고기 잡으러 가고, 닭 잡아먹고, 친구들과 볼링 치러 다니고 있고, 책 한 권 읽을 정신적 의욕이 다 상실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꼴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본의 에도 시대대의 두 막부가 있었는데 서로 감정이 안 좋아서 대립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 가문이 바둑대결을 열어 대국을 했는데 한 사람이 불계승으로 졌습니다. 가문의 대표로 나갔는데 졌습니다. 그 집을 세다가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토혈국’이라는 기보로 아직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드러져 죽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회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진리를 선포하도록,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외치도록 부름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만족스럽게는 못하더라도 너무너무 그렇게 하고 싶어서 피는 토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있는 것 아닙니까? 리차드 백스터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성도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겠습니까?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눈물로 외쳤지만 여러분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목회입니다. 그 속에서 깊이 살을 찢는 고통을 느끼면서 예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목회자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부림은 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서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내가 많이 공부를 못해서 짧았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그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신학 책을 읽으며 탐구를 했고 기도했고 그것을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피를 머금은 채 설교하려고 몸부림 쳤고 설교한 후에는 성도들이 그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고 울었습니다. 주님이 제 살아온 모든 날들을 보셨지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제가 오늘 말씀드린 대로 실행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더 공부를 하고 싶다면 저희 교회 홈피에 아주 쉽게 설교한 18개의 주기도문 설교가 있습니다. 들으시면서 이해하면서 어떻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지를 여러분 자신이 준비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설교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교회 성도 한 사람이 의사인데 은혜를 좀 받았는데도 왜 예수를 믿는지를 모르고 힘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고백하는 말이, “주기도문을 공부하기 전에는 쪽배를 타고 흔들거렸는데,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군함을 탔습니다.” 결국 모든 훌륭한 신앙생활이 이 지식과 성령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저의 강의를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