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강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1
녹취자: 조경훈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데 있어서 먹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우리들이 양식이라고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자비의 삶이고 주기도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주기도문 강좌의 김남준 목사입니다.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시간까지 저희는 주기도문의 네 개를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간구” 세 가지와 “우리를 위한 간구” 한 가지 즉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를 두 번에 걸쳐서 공부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두 번째 간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앞 부분에서 다루었던 양식을 위한 기도가 우리의 육체를 위한 기도라면 여기에서 다루는 사죄를 위한 기도 또는 사죄와 용서에 대한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간구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라는 표현과 함께 “우리의 영혼에 필요를 위한 기도”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되어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부분이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이 두 본문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용서의 간구를 드리는 주체가 누구인지, 죄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빚이라는 것, 그리고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두 복음서의 본문의 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용서하는 시점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 대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되어 있어서 사람을 용서한 것을 완료형 시제로 표현하고, 누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되어 있어서 사람을 용서 한 것을 현재형 시제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차이로 느껴집니다. 마태의 경우에는 우리가 죄를 이미 용서해 줬으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용서의 공로에 대한 대가처럼 느껴지고, 누가는 우리가 용서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즉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는 것이 과거의 공로보다는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차이의 원인은 마태는 그 편지의 수신자인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고 누가는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수신자의 문화적인 맥락에 맞춰서 용서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들을 살펴봐야지만 이러한 어리석은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를 짓는 것과 용서하는 것에 대해 ‘빚의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설명할 때에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던 문화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렇게 빚을 지는 것에 대한 개념을 사용해서 죄를 짓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반면 누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죄를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활을 쏠 때에 과녁이 있는데 화살이 그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바에서 인간이 어긋난 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짓는 죄를 ‘하마르티아’라는 표현을 썼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을 ‘빚을 진다’는 라는 의미의 단어 ‘오페이론티’(ὀφείλοντι)를 사용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고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 이렇게 설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런 용서의 간구를 드릴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바로 이것을 드릴 수 있는 주체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기도의 주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와 욕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사람들이 바로 이 기도를 드릴 일차적인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로 이런 제자들의 뒤를 이어서 이러한 간구를 드릴 주체들이 되는데 그 핵심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일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 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얼마든지 누군가를 용서 못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키는 하나님이라고 교리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기도의 핵심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신인보상(神人報償)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만큼 하나님이 보상을 해 주신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복음의 정신은 유대인들의 신인보상의 개념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의 기도가 유대인들과는 기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복음적인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의로운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지고 방만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그리스도의 노예를 자처 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하는 자세로 주님을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결국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빚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그분의 지극한 은총을 입게 됩니다. 이 은총에 대한 반응이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은총의 약속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잘못 살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해선 하나님이 응당 벌을 내려야 하시기 때문에 이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빚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용서는 이미 받은 것이고 영원한 용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용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데 이것을 경험적 용서라고 합니다. 이 경험적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물질이나 이 세상의 복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죄 용서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다윗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자신의 복된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은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는 구원과 함께 영원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구원 자체의 의미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지만, 소극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면서 짓게 될 모든 죄들도 함께 용서해 주시는 것을 영원하고 완전한 용서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이 바로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우리의 의무로 여기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신학적 개념이 나오는데 단순 오성지(單純 五性知) 또는 단순지(單純知)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사물들의 전건과 후건의 원인-결과 관계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지성으로 한 번에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A상태에서 B상태로 변할 때 앞에 있는 A를 전건 B를 후건이라 부릅니다. 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고, C상태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물리법칙을 알고 있으면 인간은 이러한 전개과정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차가 산길을 지나갈 때 그 차는 자기가 가는 길밖에 못 봅니다. 그러나 위에서 헬리콥터가 한 번에 내려다보면 전부다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십니다. 이것을 단순 오성지라고 말한다면 인간들처럼 사물들의 전건과 후건의 원인-결과의 관계를 통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는 것을 현견지(現見知)라고 부릅니다.
이 신학적 개념을 적용해보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미 알고 계시지만 실제로 그 계획을 따라서 뭔가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면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못 느꼈던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지만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용서함을 받았지만 지금도 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앞서 설명한 지식에 따른 분류에서 나온 단순지, 현견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현견지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구원 받을 때 딱 한 번만이 아닌 구원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