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강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3
녹취자: 백지영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에서 결론적으로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들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 기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하루에 세 번씩 우리가 식탁을 대하면서 그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주기도문을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하는 우리를 위한 간구의 의미들을 일부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처음 창조될 때에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혼은 그 양식을 진리로부터 공급받고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또 그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 데 있어서 이 먹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은 온 인류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실 때부터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양식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심으로써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지평의 기도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는 하나님이 이런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자비로부터 인류가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이것들이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였기에 굶주림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식의 문제와 그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생활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기도는 공동체적 지평의 기도입니다. 공동체적 지평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더 확장해서 본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지평을 가지고 있는 기도입니다. 이 공동체적인 기도의 지평은 교회를 넘어서 온 세계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만 양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심각합니다. 2005년을 기준으로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 명씩 굶어죽어 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한 명 꼴로 나타나고, 전 세계의 인구의 칠분의 일정도 되는 8억 5천만 명이 만성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이 발생했고,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그 전쟁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돈은 미국인들이 한 해 평균 약 2천억 달러 이상씩의 청구서를 받는 셈이라고 합니다. 2000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쓰는 군비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인 들어가는데 아마도 지금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전 세계의 군비의 약 50%정도를 미국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돈이면 가장 가난한 49개국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줄 수 있고, 빈민촌을 퇴치할 수 있으며, 에이즈 치료요법과 영양실조와 기아를 모두 퇴치할 수 있는 정도의 돈입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이런 돈을 합친다면 얼마나 막대한 돈이 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양식을 풍족히 주십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현재 이 세상에 있는 농지를 유효하게 활용해서 작물을 생산해 내면 약 120억 정도 되는 인구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곡물 시장이 있는데, 곡물가격 조정을 위해 아주 과학적인 통계를 통해서 작물의 출하를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넓은 농지를 가진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나라는 곡물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농지를 놀립니다. 그 다음에 곡물 값이 오를 것 같으면 출하를 안 하고 매점매석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곡물 값들을 조절하는 바람에 곡물가격이 실제보다도 훨씬 더 높이 치솟게 되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어려운 형편이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육류 생산을 위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보통 고기 1kg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가축이 약 9-12kg의 곡물을 소비해야지만 나옵니다. 생산되는 많은 곡물은 사람이 먹기도 하지만 그 중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이렇게 고기를 생산해 내기 위해 짐승이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결국 부유한 사람이 고기 1kg를 먹기 위해서 곡식 9-12kg를 소모해야 하니 생산된 곡식들이 골고루 모든 사람들에게 할당이 되지 않게 되고 굶주리게 됩니다.
이제 이 문제를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에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하는 이 기도 속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한 그릇의 밥, 한 그릇의 국, 반찬 몇 가지, 외국사람 같은 경우에는 빵과 같은 것들, 이렇게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이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물질적인 부를 누리면서도 행복하지를 않고 불행해 집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맞이한 산업사회,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아주 사악해지면서 소위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같은 풍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불행은 사용해야 할 사물과 누려야 할 사물의 질서를 혼동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모든 사물들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림설명) 예를 들자면,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사람이 있고, 물질이 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려야 할 사물이고 물질에 대해서는 사용해야 할 사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중간에 있는 것입니다. ‘누린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남녀가 사랑을 합니다. 어느 날 여자가 남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그럼 내가 왜 그렇게 좋아?” 그런데 이 남자가 엉겁결에 “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합니다. 이 여자를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이 사랑이 끝이 아니라 더 높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녀의 아버지가 가진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여자는 이것을 위해 이용을 당한 것이고 돈이야말로 이 사람이 진짜 누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용과 누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누림’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상위목표가 없어서 그것이 끝인 것, 그게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누림을 받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도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