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 (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1-5)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시편 108편은 다윗의 많은 기도들 중 특별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찬송시 이지만, 그 안에는 찬송으로 나아가기까지 악인에게서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탄원의 내용을 담은 찬송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찬송시인데,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 것까지도 결국 이 시인을 찬송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탄원이라기보다는 찬송을 하기 위한 준비적인 서술로서의 탄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
이 시인은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를 지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구약의 인물 중 이 사람처럼 환란과 풍파가 많은 시련의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도 성경에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로부터 태어났으나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였고, 특별히 아버지의 편애에 의해서 피해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 아내는 자기가 갖은 신앙의 세계를 이해할 줄 모르는 영적 수준이 안 맞는 여자였고, 그리고 장인은 자기를 죽이면 딸이 과부가 되는데 자객을 풀어서 호시탐탐 목숨을 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식들이 끊임없이 분쟁하고 싸우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노년을 보내었고 우리아의 아내의 사건으로 징계를 받아 가혹한 시간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오죽하였으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노래하였겠습니까? 그러한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를 지나면서 이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 시인 다윗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이 지구가 온 우주의 많은 별들 중 특별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대기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기하게 이 지구는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기권, 쉽게 이야기 하면 공기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디로 가지 않고 지구에 딱 일정한 두께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것들은 희박하거나 메탄가스 같은 덩어리로 되어 있거나 예전엔 있었는데 다 날아가 버린 것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하면 돌고 있는 별의 크기와 중력, 위에 얹혀 있는 대기, 이러한 비율이 딱 맞을 때 중력에 의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기가 지구의 동그란 것을 쭉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넓게 잡으면 100km 정도, 작게 잡으면 한 16km 정도를 두껍게 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우리 은하계에 있는 모든 별들이 초속 220km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게 안 없어지고 그대로 거기에 얹혀 있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대기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는, 우주는 침묵이 흐르지만 이 지구 위에는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폭풍, 억수로 쏟아지는 비, 계절의 변화, 바람, 폭설, 그리고 아침에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하얀 들판에 내린 서리, 이러한 것들이 변화입니다. 그 두께의 대기가 움직이면서 구름이 되고, 비가 쏟아지고, 눈이 오고하면서 위에 있는 것은 내려가고 내려 온 것은 올라가고 한 쪽이 더워지면 바람이 불고, 한쪽이 식으면 얼고 하면서 막 다양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 온 세계를 통치하시고 우리 모든 인류를 다스리시지만 우리의 삶 속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과 기쁨, 고통, 많은 것들이 출렁거리며 일어나서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 어떤 사람은 두 팔을 벌리며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낙심해서 흐느껴 울고, 어떤 사람은 인생이 더 이상 살기 싫어서 목을 매 자살을 합니다. 이러한 강한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그러한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맨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신기할 정도. 그래서 요즘 보면 사람을 한 10명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그 중 2-3명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서로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성도 한 분이 한 해 동안 목사님이 자신을 사랑해주시고 목양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뭘 선물할까 하다가 서점에 가서 책 한권을 사서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그 선물한 집사님을 부르더랍니다. 뭐, 그러한 것까지 감사표시 안 하셔도 되는데. 부르더니 자기가 선물한 책을 보는 앞에서 책상에다가 팍 집어 던지더니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과의 관계가 책 한권 때문에 깨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 이름이 앤드류 머레이의 『겸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그게 관계가 깨지나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탁 받는 순간 탁 던지면서 ‘김 집사, 내가 평소에 그렇게 교만해 보여?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구만!’ 제가 처음 쓴 책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처음에 나왔을 때 열흘에 3천 권씩 찍었습니다. 제 이름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책의 50% 이상을 평신도가 팔아 준 것입니다. 그 책을 목사님께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왜, 요즘 내 설교가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이미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마치 불에 녹아서 구불구불해진 거울로 사람을 쳐다보는 것처럼 삶의 상황도 이렇게 요동치는데 그것을 비춰서 보는 거울인 자기 자신이 굽어져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올바르게 볼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안팎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책을 선물하였습니다. 『내려놓음』 나는 그것을 받는 순간 ‘저 분이 보기에 내가 뭔가 안 내려 놓고 있나 보지?’ 저는 그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맨날 어려운 책만 읽으시니까 좀 쉬운 책을 읽고 설교를 좀 쉽게 해달라고 그러나보다’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뭘 안 내려 놓은 것처럼 보이나보지?’ 딱 그런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겸손』을 받았으면 ‘아이고 감사하네.’ 읽으면 되지, 그것을 왜 이렇게 꼬여서, 정성껏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해 드렸는데 꼬여서 ‘내가 교만하단 말이야?’ 이 분은 밤새도록 잠을 못 주무셨을 것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저 집사 내가 그렇게 안 봤는데, 나를 우습게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를 보고 ‘아, 선지자들이 설교를 이렇게 열심히 잘 했구나. 나도 좀 많이 본받아야겠다!’ 이러면 되지, ‘저 친구가 내 설교를 까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인사로 “집사님,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하니까 답이 띵 하고 옵니다. “왜? 내 몰골이 안 좋아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끊임없는 고통이 안팎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나는 안 그러려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흔듭니다. 삶의 상황과만 싸우는 것으로도 쉽지 않은데 그러한 사람들이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좌우에서 수없이 만납니다. 그것도 얼굴을 매우 마주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고 개념 없는 사람들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동안에 나도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이러한 속에서 정말 우리들이 너무 너무 원하는 것은 평정입니다. 평정. tranquility. 흔들림이 없는 평정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로운 것이 아니면 행복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로운 것이 아니면 행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것은 모두 행복한 것입니까? 그것 또한 아닙니다. 정신이 약간 돌아서 아무 거나 대게 “평안하네.” 할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평안한 것이 아니면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감옥 속에 갇혀있는 자신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평강.
Ⅲ. 평정의 길, 마음을 정함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 상태에서 불신과 거짓, 그 다음에 교만과 낙심, 이러한 것들이 강렬하게 출렁거리는 그 마음에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감옥 속에서도 찬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환경은 절대로 평화로운 환경이 아닌데 아무도 알 수 없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영어 성경에 보면 ‘over understand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왜 그러한 평강이 나에게 밀려오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론적으로 추론할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평화,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어디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확하고 오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회심하고 몇 달 안 되었을 때 교회만 가면 한 부지런히 걸으면 20분, 천천히 걸으면 30분쯤 걷는데 구름 위를 떠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평화롭습니다. 회심 안 하고 이 소설, 저 문학 작품, 이 철학자의 글, 이러한 것들을 읽을 때에는 신은 났는데 평화는 없었습니다.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면서 겨울에는 그 동네가 무지하게 추웠습니다. 도봉산에서 내려오는 집 한 채 없는 허허벌판을 지나 교회 도착하면 입을 떼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추웠습니다. 그런데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포근하였습니다. 그 포근함과 그 따뜻함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설명하려면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뿐이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그게 내 마음에 어떠한 식으로 작용하였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는 지금보다 신학 지식이 없었을 때이니까 더더욱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평안입니다.
(찬양)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영원토록 나의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그런 적 없으십니까? 외형적으로 가만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옛날의 저 같았으면 한강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 같은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게 저 먼 동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진이 났데.” “어디서?” “저기 뭐 남미에서” “많이 죽었데?” 그렇게 말합니다. “지진이 났데.” “어디?” “지금 여기.” 그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기도도 간절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그것 보다 작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온 몸과 마음이 요동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커다란 핍박과 고난도 견딘 사람이 나중에 아주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까? 결국 평정입니다. 평정. 평강.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어떠한 견고함도 끊임없이 요동치고 솟구치는 물 같은 요란함, 그러한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A. 마음을 정함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러한 평정의 길이 마음을 정하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에 보면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본문이 이런 뜻 같지 않습니까? “내가 내 마음을 이렇게 정하였습니다.”라고 느껴집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내가 주어가 아니라 본문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고 나오는데, ‘내가’ 주어가 아니라 ‘내 마음’이 주어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다시 해 보면 ‘나쿤 리비’라고 나옵니다. ‘쿤’이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시여, 나의 마음이 고정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고정되었습니다.” 혹은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뿌리박았습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어디에 고정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고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요동치고 움직이는 물건들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인가 눌러놓든지 못으로 박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막 요동칠 때, 그것을 움직이지 않도록 박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 비유를 하자면 요동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망치를 가지고 믿음을 못으로 박을 때 그 믿음에 의해서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시간 마다 반복하는 말 하나가 있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요동치게 되어 있고 흔들린다. 환경은 계속 변한다. 그런데 두 가지만 확실하게 붙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때로는 우리를 때리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화풀이 하거나 복수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니다.
(예화) 저는 골프채로 애들을 두들겨 패서 죽이는 일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때 차 안에서 뉴스를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그러는 것입니다. 개 패듯 패서 아이가 죽으니까 아이 시체에 석유를 뿌려서 불을 붙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타다 남은 것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뚜껑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부모가 이제 체포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악한지 모릅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어느 아이는 갈빗대 24개 중 16대가 부러졌다고 하는데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식으로 다루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첫 번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정확히 집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신다.”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붙들어서 건져 올리실 때에도 언제나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 길이 아니고 이 길이야.”라고 가르쳐 주실 때에도 언제나 우리의 지성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람을 끝까지 사랑해야 할 텐데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그때에 “내가 너에게 힘을 줄게.” 그럴 때에도 하나님이 엉덩이에 주사 놓듯이 그렇게 주사약으로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가 아니라 머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류에 빠져서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때 “그것 틀렸어.”라고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지성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일을 볼 때 겁이 많고 그것을 어떻게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언제나 그의 심장에 영향주사를 놓으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말을 건네셔서 사자처럼 담대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지금은 잘했니 못 했니 떠들어도 칼 가지고 덤비지는 않지 않습니까? 수시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그 고통을 겪으면서 루터가 낙심해서 울고 있으니까 폰 보라가 상복을 입고 예배당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목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담임목사인 자신도 모르는 초상이 났나. 우리로 말하자면 어디 장례 심방 가야 하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당신이 목사가 되어서 낙심에 빠져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운명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상복을 입었습니다.” 보통 여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천하를 휘어잡을 그런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 이외에 무서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수십 명의 왕과 제후들이 합쳐서 칼을 겨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폰 보라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성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두 번째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평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외적인 상황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으로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균형과 조화, 균정을 이룬 상태라는 것입니다. 균정과 조화를 이룬 상태가 마음의 평정입니다. 마치 물이 잔잔한 것 같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정을 누리고 있는 이 상태, 그리고 그 평정의 원인이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사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고 장악하고 계셔서 결국 당신의 뜻대로 이 모든 질서들을 운행하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못이 박힌 것입니다. 쾅쾅쾅 하고 못이 박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않는 정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내 마음이 고정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마음이 얼마나 오묘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 했으면 이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큰지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을 담고도 모자라지 않습니다.”라고 까지 이야기 할 정도입니다. 크기로 따지면 인간은 정말 조막만한 인간인데 거기에 이 사는 세계와 모든 식물과 동물과 곤충에 대한 지식, 모든 천사와 인간에 관한 지식,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지식을 담아도 아직까지도 더 담을 수 있는 공간이나. 그래서 그가 표현하기를 “방마다 각기 들어가 있을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무엇인가 생각나고 싶어서 찾으면 각자 방에서 소리치며 내가 여기 있다며 튀어 나옵니다. 무수한 방들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결국 이 마음은 영혼의 기능인데 이 마음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만납니다.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과 주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인식이 만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 은혜를 받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무엇인가 결정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만납니다. 객관적으로 박혀 보이는 아름다움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마음이 그것을 해석해서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고 추한 것을 보았을 때 객관적인 그 추한 것을 주관적으로 느껴서 혐오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이 마음의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확고하게 사람이 이 마음의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여러분도 그러한 말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게’ 아니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이’ 루터가 고백하였듯이 “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습니다. 달리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내 마음이 무엇인가에 타율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는 하나님에 의해서 뿐 아니라 마귀에 의해서도 자기의 마음이 장악되어서, 악한 본성에 의해서 장악이 되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끌고 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도 피해자인 것입니다. 그 비밀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일반학문에서도 이 심리학은 임상적인 학문입니다.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 부피와 크기,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둘 사이에서 연관관계를 찾아서 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데, 왜 저 사람을 보면 우습게 보이고, 저 사람을 보면 겸손해지고 싶고, 왜 저 사람을 보면 사랑스러운데 저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나는가. 이것이 일부는 설명이 되지만 “왜 가을이 되면 단풍이 떨어지는가?”와 같이 딱 부러지게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가장 혼란을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선악의 선택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이것이 ‘마음의 평정’과 관련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이것입니다. 요동을 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고, 평정을 누리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먼저 작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충만히 주장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고 나서 자랑 할 것이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작용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마음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우리의 삶과 온 인생에 영향을 끼치며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붙들릴 때 그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큰 시련 속에서 대적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 혹시 우리 버리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십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것입니다. 전쟁을 생각나게 하는 위기입니다. 그 속에서 이 시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고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됨으로써 시련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B. 노래와 찬양을 함
이어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이다.” ‘아슐라 바 아자멜라’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뒤에 강력한 소원을 나타내는 시구의 표현법입니다. 내가 꼭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노래하다’와 ‘찬양하다’는 다른 단어인데 나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노래하며 찬양하리이다” 같은 말의 반복이기도 하지만 이 노래는 구약성경에서 마음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잠언에서도 보면 그런 표현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기쁜 사람의 마음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찬양하리이다”라고 할 때 일반적인 기쁨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경건한 기쁨입니다. 만약에 여기에 나오는 ‘아쉴라’라고 하는 이 단어가 ‘happiness’ 행복을 이야기 한다면, 뒤에 나오는 이 ‘아자멜라’라고 하는 단어는 깨달음에서 오는 희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에 즐거움을 나타내는 세 단어가 있는데 ‘pleasure’라고 하는 단어는 일반적인 쾌락입니다. ‘happiness’는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나 정말 기분이 해피해. 복권을 맞았어.” 이러한 것입니다. ‘jo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깨달음에서 오는 이 세상에 있는 물건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joy’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대로 ‘노래하며’가 ‘happiness’를 이야기 한다면, ‘찬양하리라’는 ‘joy’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시련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 행복해. 그래서 나는 노래해. 그 행복과 기쁨의 원인이 우리 하나님이야. 그래서 나는 찬양해.” 여기에서 시인이 하늘에 계신 그 분을 뭐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이여 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엘로힘. 그게 뭐냐 하면 크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우주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큰 능력을 가지신 위대한 우주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으로 지금은 잠시 지는 것 같고 패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노래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쁨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마음을 정할 때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기쁨과 보상이었습니다. 아멘.
매우 중요한 표현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라고 나옵니다. 이게 많은 논란꺼리가 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 앞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단어가 아닙니다. 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일까?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앞에 나오는 단어는 ‘레브’라고 하는 단어로 마음, 지성, 뜻,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뒤에 나오는 이 마음은 사실은 마음이라고 히브리 성경에 안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베케바디’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뭐냐 하면 ‘베’는 ‘with, 무엇 무엇을 가지고’라는 전치사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놀랍게도 ‘영광’입니다. ‘영광, 카보드’ 그래서 ‘베 케보디’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영광이라는 단어에 나의 영광, 그래서 직역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의 영광을 다하여, 나의 모든 영광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해석하면 커다란 은혜가 됩니다. 성경에서 ‘카보드’라는 단어, ‘영광’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로 사용하는가 하면 여러 가지로 사용이 됩니다. 우선 이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멀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덜덜 떨었던 것, 또한 모세가 이제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불붙는 기이한 광경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에 영광이 뭐냐 하면 장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돋보이는 훌륭한 점, 혹은 많은 물질, 높은 지위, 어쨌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게 보이는 무엇,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기차를 타도 3등 칸 타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데 특등 칸 타면 텅 비어 있고 혼자서 앉아서 가고 와서 종업원들이 커피도 주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을 영광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나의 영광을 다하여 찬양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참 저 사람 훌륭하다. 어쩌면 저렇게 성품이 온화하지?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신중하지?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친절하지?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학문이 뛰어나?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믿음이 뛰어나?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힘이 세?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워? 어쩌면 저렇게 헌신적이야? 이 모든 게 ‘카보드’, 영광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찬송하겠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잘 들어 보십시오. 마지막 해석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단순히 노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점들이 있는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합니다. 그 도탄과 시련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이 나를 구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폭풍과 흑암 속에서 나를 이끌어서 사람들이라면 나를 백번이나 버렸을 텐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끊임없이 변천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떨림, 거짓된 희망과 좌절, 미움과 사랑 속에서 인간의 정념이 고르지 아니하여 끊임없이 요동치는 동안에는 출렁거리는 파도위에 작은 판자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면서 몸부림치는 조난당한 선언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우리 하나님께 믿음으로 고정하였습니다.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를 건져주실 것이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 마음이 굳게 박혀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happiness가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강과 함께 정신적인 기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때문에 그 기쁨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생겨나는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까 하나님께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그 분을 섬기고 인정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이러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너무 기쁩니다. 혹시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나은 그 좋은 어떤 무엇이 있다면 나는 빈손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을 높이겠습니다. 찬송하겠습니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 눈에 돋보이는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서 ‘저렇게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저렇게 겸손하게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있는 게 틀림없구나.’ 돈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섬기면, ‘저렇게 부자인 사람이 저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니 확실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저런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실만한 하나님이 나에게는 섬김을 받을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는 “모든 영광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하고 싶습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최선의 것을 드려서 섬겨도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것을, 최선의 것을 드려 섬겨도 아깝지 않아야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화) 주후 110년의 일이었습니다. 로마에 커다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 de Loyola, 1491-1556)라는 유명한 교부였습니다. 이 사람이 체포되었습니다. 예수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그리고 사형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투옥되기 전에 얼마나 고매한 인품과 덕성을 지녔는지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깊이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제자들이 면회를 왔습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온 도시의 사람들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그나티우스 같은 훌륭한 인품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로마에 커다란 손해가 될 것입니다. 제발 이그나티우스를 석방해달라는 탄원서를 썼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 조정에 보내졌습니다. 로마는 생각보다 민주주의적인 나라였습니다. 심사를 해서 상당한 설득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로마의 조정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제자들이 이야기 하자 이그나티우스가 말하였습니다. “하지 말거라. 하지 말거라.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았고 영광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감옥 속에서 나의 최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가 주님께 드리고 싶었던 최선의 것은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 많으면 노래가 나오고 사업이 형통하면 찬양이 나온다고 합니까? 안 그럴 때 많습니다. 이 노래와 찬양은 환경이 우리에게 저절로 주는 것 아닙니다. 잘 되니까 불평이 나오고 너무나 많으니까 하나님 대적하는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형통할 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가난한 가운데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이 설득력 있지 않습니까?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고정되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입니까? 요동치는 이 세상입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그렇게 주님께 고정된 이 마음은 여러분의 영광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헌신하고 섬기도록 마음 깊은 곳에서 복받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영광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신 주님이십니다. 짧은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모순도 생겨나고 미칠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때로는 분노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이 세상의 질서가 모두 깨뜨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은 그 모든 세계위에서 이 모든 만물들을 내려다보시고 인간의 마음을 성찰하십니다.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움직이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출렁거리고 요동치는 이 세상 너머에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고정하는 방법을, 고정하는 믿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높으신 주를 모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의 바다에서 요동치는 인간이 되어서 그래서 세상에 의해서 출렁거리며 평강도 없고 갈 곳도 찾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오늘 우리 하나님을 우러러 봅시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보다 높으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지성에 말씀의 언어를 건네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