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을 헤아리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녹취자 : 오희열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라는 사람이 책을 썼습니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썼고.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였는데, 요즘 새롭게 일어나는 신에 대한 견해 중 안티데이즘(antitheism)이라고 하는 반신론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신론이라면, 반신론은 신이 있고 없고 자체에 관심이 없이 무조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티데이즘, 반신론이라고 합니다. 무신론보다 훨씬 적극적입니다. 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반대한다, 있고 없고에 달린 것이 무신론, 유신론이라면 반신론이라는 것은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우리는 신이 싫다, 그의 통치를 우리는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고 반신론을 확산시켰는데 그 중에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만약 기독교에 신이 살아있다면 기도하는 너희보다 아이큐가 낮은 신일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신에게 제발 좀 이해를 하라고 간청하는 것이 기도이니, 그렇다면 당신이 알려주어야만 겨우겨우 그것을 알 수 있는 신이니 아이큐가 여러분보다 나쁘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런 신을 어떻게 의지하고 살겠느냐” 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뿐만 아니라 기도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에서 그런 식으로 기도를 이해한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더욱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이고 무한하고 완전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히친스에 대해 반론을 가지고 논쟁할 이유는 없지만 자연스런 의문은 가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당신께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도 아주 간절한 방식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간절히 말해서, 마치 그것을 모르고 있는 하나님을 깨우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기의 기독론에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시면서 변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에게 비취시고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불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에게 비취시고 당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면서 사물들은 움직이시고 또 움직이는 사물가운데 하나님은 안 계시면서도 하나님 없이 움직이는 것은 없게 하십니다. 일은 끊임없이 바꾸시지만 뜻은 고치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신비한 관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비추시질 않으시면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훈하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인 하나님과 인간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인식되는 그 사이에 구별을 가지고 생각해야지만 이런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성경에서 보면 깊은 신앙의 세계와 철학적 깊이를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 그런 중학생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하고 간단한 철학적 논리에 대해서 이해를 못한 채 이 기도를 올렸을 리가 없습니다. 모든 그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불변함, 영원성, 완전성에 대한 수없는 찬양이 나온 것을 보아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 나타나는 최대의 신학자는 사도 바울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최대의 철학자는 사실 다윗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다윗은 아주 우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성경속의 어거스틴 같은 인물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런 정도를 모르고 얘기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해를 했겠습니까? 오늘 기도하는 내용은 자기를 괴롭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오만한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 속이는 자들, 이런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고난 받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정확하게 이 시를 언제 썼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왕이 된 후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썼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울에게 쫓기는 때에 썼다고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기가 아니라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심정을 헤아려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의 심정은 무심한 하나님, 무정한 하나님, 몰라주시는 하나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 토해 놓고 하나님께 진지하고 진심으로 간절히 충분히 아뢰기 전까지는 나의 사정이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확신이 안 들게 해주십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찢어진 인간의 정신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거스틴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을 찢어 놓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우리의 정신을 찢어 놓습니다. 정신을 찢어 놓는다는 것은 정신이 파편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파편화되지 않고 하나로 모여 있어야지만 사물들의 질서, 그 안에서 사물의 위치, 가치, 균형, 이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것이 다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데 렌즈가 박살이 나서 수없이 금이 가게 되어 사물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정신의 찢어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찢어짐이 왜 찢어지는가하면 사물들이 나타나는데 사물들을 보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보질 못하고 주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객관적으로 보일 때 없던 지식들이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어떤 교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아이가 너무 공부를 안 하니까 교역자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고 국어와 산수를 가르쳐주라고 했습니다. 더하기를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100 더하기 300이 얼마니?" 물으면 계산을 못합니다. 질문을 바꿔서, "아빠가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주고 잠시 후에 세 개를 더 주면 얼마니?", "400원이요!" 하고 맞추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욕망이 생기게 되면 새로운 지식이 양산되거나 원래 있던 지식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수학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수학을 욕망이 배제된 학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욕망을 불러일으킨 게 무엇이냐 하면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이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이 찢어지면 마음의 조율이 흐트러지면서 헝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타나 바이올린의 줄이 튜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몰라주시는 구나 생각을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금방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흐트러진 마음의 튜닝이 되는 것입니다. 망원경 렌즈의 깨졌던 흔적이 없어지고 명료해지고 사물을 보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살기에 적합하도록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나를 들으셨도다, 나의 간구에 응답하셨도다”라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 히친스의 말대로 하나님이 모르셔서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을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도록 개조하고 수선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감격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인생에 신앙으로 말미암는 유익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있는 인간과 그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놓고 보면 기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우리는 불완전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지 모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지만 우리는 시간 과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사야에서도 많이 나오고 시편에도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약의 제사의식 속에서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바로 ‘증인들’입니다. 시인과 시인을 괴롭히는 악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는데, 그것이 누가 옳은 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땅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하는 신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언약체결 의식 속에서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흐트러졌던 마음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이 모두 하나님이 그를 덜 사랑하거나 징계하시기 때문에 겪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간단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셔서 그 속에서 흐트러졌던 마음을 모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바입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들은 점자를 읽는데, 그들은 시간이 나면 하는 일이 사포로 두 손가락의 끝을 갈아내는 것입니다. 지문이 없어지고 각질이 끼질 않도록 보들보들하게 해 놓아야지만 글이 읽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도 하나님 그런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비록 지금 자신이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인생의 모든 일들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를 당신의 성품에 맞게 구현하시고 말 것이다, 그 때 유익을 얻을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에 악인들이 잠시 이기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통해서 그들이 가진 믿음을 시험하시고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간절히 기도하라,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 자체가 시련이요 고난이 아니라 망가진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편에 서 있으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선한 길로 그들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사경회 때에도 이런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