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바꾸신 목적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창 50:20下)
하나님은 해가 될 것 같은 일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섭리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섭리 속에서 해로운 것이 선한 것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고통스럽고 아픈 일들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일까? 요셉이 살아온 지난 모든 생애는 정말 생각하기 싫은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에서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던 따뜻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 시기하는 형들에 의해서 팔려진 그 이후로부터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떼어놓아지고, 아무데도 의지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애굽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요셉은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아마 보디발의 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어디에서도 신앙의 동지를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육체적인 외로움과 그리고 사회적인 외로움과 영적인 외로움까지 아마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길도 편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모함과 오해, 그 속에서 한없이 고난을 받으면서 보디발의 집에서 다시 옥으로 옥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그러면서 가장 젊은 세월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묘하냐면 요셉이 옥에서 나왔을 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후에 애굽의 고고학 자료를 연구한 결과 당시 바로 시대에 30세가 공무를 담임할 수 있는 법정 연령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30세가 되어야지만 공직에 취임할 수 있게끔 그렇게 법이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어린 나이에 미리 세상에 내 보내봐야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옥 속에 묻어 놓으시고 거기에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면서 자라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어느 정도 익었다고 생각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꺼내 놓으셔서 그 때가 섭리 속에서 애굽에서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연령이 되게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절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굽에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어서 바로의 꿈을 기가 막히게 해석했기 때문에 총리가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요셉이 가진 다였다고 한다면 그것만을 가지고는 그 오랜 세월동안 국무총리로서 그 위기에 처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보디발의 집이기는 했지만 노예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는 밑바닥에서 빗자루를 들고 쓰레질을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보디발의 그 큰 집을 관리해 나가는 총체적인 기획과, 그리고 관리업무에 이르기까지 총무의 일을 감당하기까지 그는 모든 면에서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들을 갖추면서 성숙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애굽의 정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닥에서부터 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유혹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에게 배신도 경험하고, 고난을 받는 것도 경험하고, 그러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 성숙해갔던 것입니다. 이 형들이 동생을 돈 받고 팔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는 사자에게 찢겨서 죽었나봅니다. 그리고 그 옷에다 피를 묻혀서 가지고 가서 아버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짓이죠. 그것 한 토막만을 딱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죠.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가 않죠. 그러니까 갈아 마신다는 표현이 너무하면 쥬스를 만들어도 시원치가 않죠. 그래서 사람이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들은 항상 생각이 이렇게 어느 하나만을 크게 확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요셉이 “아니 나보고 뭐라고 하는데 목사님이 내 입장이 한번 되어보십시오. 목사님이 형이 없어서 그렀지만 목사님이 형들을 믿고 따랐는데 그런데 동생인 목사님을 데려다가 인신매매 범에게 팔고 내 옷을 벗겨서 선지피를 발라서 아버지에게 가서 짐승에게 뜯어 먹혔나봅니다. 그리고 그 인신매매 범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가면서 양복도 맞춰 입고 밥도 사 먹고 갔다고 칩시다.” 그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죠. 마치 인간도 아니고 극형에 처해도 할말이 없죠. 요즘 같으면 법관들이 흔히 잘하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버려도 시원찮죠. 그것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맞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인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계속 원수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에 사무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좁은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적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번 눈 밖에 나면 그러면 다시 상대를 안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적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가 무슨 한 나라의 황제쯤 되어서 내 눈에 나면 재미없어. 그러면 아마 죽을 때까지 기겠지 그런데 요즘 황제가 어디 있어요. 대통령만 되어서 한판 해보려고 덤벼드는 세상인데 아니 이제는 학교 선생님들도 애들 마음대로 못 때리잖아요. 야단치면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데 그것 무서워서 어떻게 해요. 학교 선생님들을 체육을 시켜서 태권도 9단씩 만들어야합니다. 꼼짝도 못하게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가는 길에 수없이 누구를 만나느냐면 적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요. 물론 자기를 좋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그 원수들이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잠깐 얘기했잖아요. 요셉이 그런 피눈물 나는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었는데 그것이 모두 인간들 때문입니다. 형 때문에 또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그랬고, 또 보디발도 책임이 있지 자기 아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말이죠. 그러면 요셉을 믿어야지. 멍해가지고 말이지 그랬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옥에 가니까 그 떡 맡은 관 원장 술 맡은 관원장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또 자기를 배신해요. 다 배신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면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얘기가 뭐냐면 “나는 히브리 사람인데 보디발의 집에 있으면서 나는 거기에서도 이렇게 옥에 갇힐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내가 진실을 얘기하지, 내가 진짜 혈서라도 쓰라면 쓴다. 그 나쁜 년이 그리고 시작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그 사람은 행실이 그랬다. 말이지. 그리고 완전히 한 여자를 매도해버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요히 보디발의 집에서도 옥에 끌려올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진실을 규명하면서 자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가 어려운 상황에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보디발의 아내가 옳았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요렇게 그 한 토막만 보았으면 그럴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뭘 잘못했냐? 볼일이 있어서 계량기 검침하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니 이 여자가 어디에서 딱 튀어나와서 그리고는 분위기를 잡을 새도 없이 같이 자자. 낮인데 왜 자냐?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주인이 나를 사랑했고, 나에게 모든 것을 신임하고 나이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내게 맡기지 않은 것이 있는데 자기의 먹는 것과 자기 아내인 당신은 내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시는데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 있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여자가 그런 정도는 우리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도 포기했을 터인데 이 정욕이 불붙듯 하니까 이 남자를 권력으로 겁탈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막 도망을 나오니까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보세요. 이 옷을 가지고 나와서 이 옷 임자가 누구냐? 이 옷 임자 이놈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 그야말로 주스를 만들어도 시원치 않지. 아니 그런 일이 없는데 이것이 말이죠.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해보았습니까?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것이 가슴에 맺힙니다. 한이 됩니다. 그 한이 맺힌 것은 그래도 조금 풀리는 때가 언제인지 하십니까? 그것을 말을 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슴에 묻어놓은 것입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살 것 같습니다. 정말 못살았을 것입니다. 아니 예를 들자면 그 일이 남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덕스럽게 내가 그것을 얘기하면 뭐하냐? 그리고 나만 알고 묻어 줄 수 있지만 그런데 지금 그 진실이 안 밝혀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억울하게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잖아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에 죄가 어느 정도 되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호실장이나 무슨 그런 사람의 장관급이 되는 각료의 옛날로 말하자면 판서에, 정승의 집안에 가서 그 집 부인을 겁탈하려고 그랬는데 신분이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입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이죠. 근거는 없지만 이것은 추측은 아니고 역사입니다. 요셉이 갇혔던 곳이 말하자면 단순한 잡범들이 투옥되는 옥이 아니라.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이것이 보디발의 집 근처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해석하기를 이 보디발도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이 요셉을 훨씬 더 믿었다. 만약에 아내를 믿었더라면 단칼에 잘라버렸을 터인데 워낙 좀 문제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셉이 억울한 것을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요셉을 미래를 기약하면서 여기에 가둔 것이 아니냐. 자기는 그렇게 한번 추측을 해본다. 뭐 추측을 한데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참고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이 누구냐면 정치범들 아닙니까. 떡 맡은 관 원장, 술 맡은 관 원장들이 잡범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그 억울한 사정을 푸는 진실을 규명하는 대신 그것이 결국은 자기의 이 불행한 사태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잖아요. 그런데 안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아이고 요셉은 굉장히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그것이 뭐냐면 인생을 그렇게 한 토막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한 토막 한 토막 그렇게 보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교회가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가 어느 여 전도사님과 호텔에서 나온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확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 사실은 다른 것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어도 그것은 용서 못하잖아요.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을 쪽을 믿기보다는 안 좋은 쪽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거기에서 혹독하게 연단을 받고 이분의 신앙이 참 훌륭하지 뭐냐면 하나님이 나의 결백을 밝히실 때까지 나는 침묵한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유감 있던 사람들이 그 사건을 이용해서 교회를 발칵 뒤집혀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약에 맞대응을 하고 고소하고 싸움하고 만약에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가 나누어지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토막을 보면 이것이 진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형 놈의 새끼들 갈아 마셔” 이렇게 만약에 말을 했다고 쳐요. 그러면 그 때에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그 마음에 “야, 진짜 무슨 쓰레기차를 피하고 나니까 똥차가 나타난다고 이 형들을 피하고 나니까 보디발의 아내 이 여자 똥차가 내 인생을 망쳤어, 이것을 갈아 마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속에 하나님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 같은 기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딱 그 한 토막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원수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도록 좋아하는 친구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인자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도 만족을 못 시켜주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변하고 요사스럽고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마음에 정함이 없는 그런 인간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분들을 낳아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해서 완전하게 여러분들의 인생에 만족을 주는 인간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세요. 그런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 기다리세요. 곧 실망을 줄 것입니다. 착각이 깨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도 만족시켜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만족시켜줄 인간이 있겠습니까. 한 토막을 딱 보면서 “이. 인간을 갈아 마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토막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면서 ”저 놈을 갈아 마셔“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이 치열한 칼부림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동료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인생길에 칼과 그리고 피 맺는 미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산산조각 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뭐가 남겠습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아무개. 아무 아무개. 성도가 죽었더라. 그가 죽었으나 아끼는 자가 없더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불러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언약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죠. 그렇죠. “너로 인하여 히브리 성경에는 ”백하“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며” 우리를 한 사람 주님 믿는 자녀로 불러주신 것은 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사람하고 만나면 어쨌든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손을 잡으면 하여튼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관계를 맺고 한 동료가 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의 원천이 되라고 부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 만났는데 덕을 좀 볼까 했더니 등껍질까지 벗기려고 한다. 거기에서 아주 학을 띠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느냐면 하나님에 대해서 넌덜머리를 내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직접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야, 진짜 하나님 잔인하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선교 적으로 조사해보면 불신자들이 예수를 안 믿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복음을 못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뭐냐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잘못된 예수님의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질리는 것입니다. 인간을 상종도 하고 싶다. 않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위선자로 보는 것이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임이며” 요셉의 생애는 그런 생애였습니다. 요셉이 다 살려준 것 아닙니까. 형들이 와서 벌벌 떨면서 지금 비는 것 아닙니까. “얘들아 나를 팔아서 생고생을 시킨 놈들이다. 머리를 정리해라.” 그러면 미용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칼 들고 망나니가 와서 다 정리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이 사람이 입만 뻥긋했으면 죽었습니다. 살려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라.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조금 구제하면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벌써 보디발의 집에 끌려와서 빗자루 들고 마당을 쓸던 시절에 이미 보디발의 집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9장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생각하사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느니라.”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돈 몇 푼주고 사 왔겠습니까. 그 쪼그마한 애를 말이죠. 그러니까 딱 들어왔을 때 초라한 몰골에 옷까지 벗기고 그리고 긴 여행길에 짐승처럼 끌려와서 내동댕이처 졌을 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끌려온 이방의 불결한 아주 더러운 새끼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뭐 집사를 하네, 구역장을 하네. 뭐 집을 사네, 파네. 그리고 뭐하고 직분을 맡고, 그러면 뭐합니까. 사람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 토막 가지고 “나쁜 자식들 말이지.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이러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 소인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도 깊이 인생을 나눌 아름다운 동지 없습니다. 정치가를 하면 철새가 되는 것이고, 사업을 하면 눈 살살, 살살 돌리면서 말이지 야바위같이 사업을 하는 야비한 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끼는 사람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 가로질러 흐르는 한줄기 강물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강물신앙’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 내가 흘러가느냐? 쭉 흘러가야합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이 안에서 놀게 되고 짐승들은 핥아먹게 하고 그리고 내가 메마른 땅에 스며들어서 그래서 그 모래바람 밖에 일지 않던 땅에 흥이 돋고 꽃피고 새 노래하게 만드는 그게 바로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일생입니다. 이것을 강물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누가 어느 후배가 그래요. “목사님 목회가 뭡니까?” “목회는 메마른 대지를 가르고 흐르는 한줄기 강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를 다 좋다고 합니까. 아니 그렇게 인생을 거의 그렇게 인생을 맨몸으로 사시면서 가시고기처럼 자기를 다 내어주시는 예수님도 사람들이 다 좋다고 안했는데 그러니 내가 예수를 닮으면 닮을수록 예수 싫다고 한 사람들이 나도 싫어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적절하게 그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내가 참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가 맬랑히턴이라고 하는 자기의 제자에게 편지를 쓸 때 그랬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아니면 듣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 되게끔 설교를 하십시오.” 해석 안 해줘도 이해하겠죠. 그렇게 얘기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누가 다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저의 인생의 스승입니다. 다윗과 이 요셉은 구약에서 제 인생의 맨토 입니다. 참 많이 배웠습니다. 이 두 분이 성경에 안 나왔더라면 아마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같은 성경에 있어서도, 그런데 이 요셉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인생을 이렇게 한 토막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체, 이 굽이치는 물줄기와 같은 인생 전체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소인배적인 기질을 가지고 그렇게 한 토막을 보고, 원수 맺고,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독한 마음을 품고 사는 그런 야비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을 그렇게 총체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안 산 것은 아직 살지 못했으니까 못 보는 것이죠.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온 인생도 그렇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쭉 굽이치면서 살아온 인생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토막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물과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큰 토막이 보이는 것입니다. 맞아요. 형이 나를 팔았어요. 그것 하나만큼은 얼마나 어린 아이의 그 애굽에 끌려온 노예로서의 그 첫날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나는 언젠가 그것을 묵상하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요셉이 불쌍해서,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불쌍하겠지만. 그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 온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사랑 받으면서 자라온 그 아이가 아무 혈열 단신으로 끌려와서 내팽개쳐져서 첫 날밤을 지낼 때 얼마나 무서움 속에 몸부림 쳤겠습니까. 정말 죽여도 시원치 않죠. 그런데 그가 애굽에 와서 배운 것은 뭐냐면 인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간다. 라고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이 팔았는데 그것은 그렇게 가슴 아프고 찢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하나님이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한 것도 몸이 부서지듯이 일한 것이죠.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에게 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그 때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신명을 다해서 보디발을 섬겼는데 주께 하듯이 섬겼는데 마지막 돌아온 것이 차가운 옥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어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또 징검다리가 되어서 정치범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게 되니까 그다음에 또 배신을 당하게 되고, 배신을 당하는 동안에 2년이 지나면서 30세가 되고, 그러는 가운데 흉년이 들고, 그러니까 30에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가장 남으로부터 해를 받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하나, 하나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하나만 빠졌어도 거기 바로 앞에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게 하죠. 그 신앙을 가지고 인생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한번 딱 하고 고정되어 있는 어떤 점이 아닙니다. 연결이 없는 한순간에 터지는 섬광과 같은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이것이 강물처럼 쭉 흘러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쭉 흘러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뼈아픈 배신, 그리고 그 치열한 고난, 그 음모와 모함,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인 그 고통을 통해서 드디어 세계를 가슴에 품고 경영할 수 있는 지도자적 심성이 신앙과 함께 영글어 간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이제 자신을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이렇게 돌아 볼때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돌아보니까 가장 해 받으면서 혼자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웠던 거기에서 원수 맺을 수 있는 사이로 만났던 그 인간들이 사실은 자기로 하여금 섭리의 시내를 건너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이를 수 있는 징검다리 돌 맹이를 하나씩 갖다놓았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요. 스토리를 다시 써 볼까요? 애굽으로 끌려갔는데 오밤중에 손톱깍기로 수갑을 풀고 그리고 끌려가던 노예 창고의 자물통을 끌러서 뛰어 나왔어요.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저 형 놈들이 나를 돈 받고 팔았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칩시다. 그 요셉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죠. 아버지는 형들과 의절했을 것이고, 가슴에 한을 품은 아버지와 그리고 형들을 잃어버린 채 외로운 아버지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양의 똥이나 치면서 인생이 끝났겠죠. 두 번째. 그래요. 옥에 안 끌려가고 죽어라고 버럭, 버럭 소리 지르면서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지만 몰래 카메라라도 들이 대면서 “봐라. 네 마누라가 나를 유혹했지, 나는 안 된다고 계속 그러다가 외투를 빼앗긴 죄 밖에 없다.” 그것을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 인터뷰를 해서 모든 것이 풀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그 집에서 마당을 쓸었겠죠. 마당 쓸다가 끝났겠지 아니 그러다가 늙은 노예로서 죽었겠죠. 그렇잖아요. 물론 요셉이 적극적으로 저기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이렇게 이용을 당해야지 그랬던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인생이 한순간 번쩍이고 끝나는 섬광이 아니라. 마른 땅을 가로지르고 흐르는 한줄기 강물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요셉은 이 고난을 통해서 이 근거 없는 비난을 통해서 내게 다가올 또 다른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요셉이 말이죠. 다윗이 요셉과 아주 유사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보다도 더 나쁜 놈입니다. 진짜 갈아도 시원치 않죠. 그런데 “임금님 큰 일 났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쳐들어옵니다.” 왜? 아들이 그렇게 면민주도하게 아버지인 자기의 등에 칼을 꼽기 위해서 준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죠. 도망을 갑니다. 그 때에 “임금님, 저 법궤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 법궤는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나둬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다시 와서 보리라.” 그리고 도망을 가는데 한 때는 자기 백성이었던 그 인간들이 말이죠. 막 흙을 던지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을 네가 말아먹더니 똑같은 꼴을 당하는구나. 그러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하가 “저 놈을 내가 단칼에 날려버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칼을 빼들려고 하는데 “나둬라.”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나둬라. 내가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용해서 나를 욕하시는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서 보복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강물 신앙입니다. 그래요. 저 사람이 나를 욕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있어 저놈은 내 백성이었고, 나는 왕이었는데 며칠 전까지 내 앞에서 숨도 못 쉬던 놈이 내 앞에서 욕을 해.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욕한다는 생각을 했으면 단번에 뛰어 올라가서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시켜서 나를 욕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물신앙입니다. 성도의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함이니라.
왜? 일곱 해의 흉년입니다.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모든 곡식을 거둬들여서 큰 창고에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풀어서 그 창고에서 나오는 곡식, 칠년 동안 풍년이 들어서 모아놓은 곡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부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뒤집어서 이야기 하면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인생 한 토막, 한 토막 마다 뒤집어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깔깔대고 히히덕거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도 안중에 없이 뒤집어져서 거의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마지막에는 그렇게 웃고 울고 분노하고 수많은 원수 맺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끼는 자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가 되겠느냐고요. 여러분,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에서 제가 그랬죠. 피 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를 해요. 형제를 찌르고 아직 따뜻한 피가 그 마음에 칼에 묻어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칼부터 버려라.” 요셉이 만약에 그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으면 이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섭리 속에 자기를 맞기고 살수가 없었죠.
여러분,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이루어질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요즘 미국에서 화성으로 쏘아 올려 보낸 탐사선이 계속 사진을 보내오잖아요. 요즘 그것 보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한번 보니까. 뭐냐면 새로운 이론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주고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적게는 뭐 백억 광년. 어떤 사람은 구백억 광년. 그렇게 얘기 하는데 그것이 나는 우주인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과학자가 상세하게 기고했는데 그런 우주는 10의 500제곱개의 우주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는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마 어마한 우주입니다. 그 한별에 몇 개월 동안 날아가서 ( ?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그 중요한 부품들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서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특허만 1500몇 개를 받았데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것은 특허도 안 받는답니다. 왜? 특허내면 그 원리를 설명하게 되니까 감추기 위해서 그것도 안 보여주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부속 하나를 이렇게 깎았습니다. 그래서 참 잘 깎았다. 이것도 굉장히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 하나가 수십만 개가 조립이 되어서 그래서 우주를 날아가서 그래서 인간이 전혀 가보지 않는 별에 도착해서 사진을 전송해오고 하는 장면들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하나 인생의 우여곡절이 모두 모여서 연결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훌륭하게 하나님께서 그 섭리를 통해 흘러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강물과 같은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먹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좋은 역할 하나는 있습니다. 그 사람과 만나는 경건한 사람들을 성화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행하죠.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을 때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 옥에서 배신을 당했을 때. 이렇게 기구한 인생의 날들을 보낼 때 그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의 수많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었고, 요셉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징검다리. 하나, 하나를 건너왔더니 그 섭리가 이루어졌고, 그 섭리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은 매순간, 순간마다 몸부림치면서 살았던 그래서 쏟아야했던 그 희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섭리의 신앙.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강물과 같은 섭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신앙이 그 사람의 인격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다음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