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시는 하나님
“요한이 말려 이로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 지라 예수계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4-17)
녹취자: 김순미
이 말씀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낮아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자기의 백성들과 당신이 일체가 됨을 이 세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렇게 하심으로 당신 자신이 메시아로써의 공적인 취임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낮아 지셨습니다. 당신이 죄인에게 세례를 받는 것쯤은 하찮게 여기시고 낮아지셨으니 이는 그분의 겸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첫 번째 원리가 ‘겸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신보다 학식이 높고 혹은 나이가 많고 혹은 나이가 어리고 문화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두 번쯤은 그런 사람이 별시 받을지 모르나 일관성 있게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에 첫 번째 우리에게 당신의 행동을 통해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들이 이 겸손을 잊어버리는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권력이나 혹은 어떤 위세 앞에서 쉽게 굴복하고 비굴해 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 겸손의 원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고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아지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은 그냥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낮아지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예언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그가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그 백성과 하나가 되시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이 당신의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어찌 응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의 무지나 혹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겸손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겸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뜻들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깊이 관심을 갖는 정도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갈망과 비례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매우 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갈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으면 굳이 그런 갈망을 갖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세례요한이나 당신이나 거기에 모인 수많은 백성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도구들이다.’ 라는 인식을 가지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일하던지 혹은 그 바쁜 생활에서 물러나 잠시 휴식을 취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기쁨은 자기 같이 미약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입니다. 그 뜻을 기뻐하면서 살 때 그가 가장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당신이 인정하시는 표를 성령이 임하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함은 바로 이것은 ‘평화’를 의미합니다. 얼마나 적합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제 그 험난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한 가지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신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단에게 미움을 받고 마지막에 원수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까지 하신 이유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이 바로 ‘화목’입니다. ‘샬롬’, 평화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평화 속에서 인간은 정신의 먹구름을 걷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거나 시간을 사용하지 아니하기를 마치 자신의 욕망을 따른 삶을 멈추지 않는 것과 같았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 언급이 얼마나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가 그대의 정신의 먹구름을 걷어내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갈 것이요. 그대도 갈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 길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찾으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인생을 흘러가게 돼 있고 얼마 더 살았던 사람에 생애나 지루할 정도로 긴 인생을 산 사람이나 결국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 그것은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다른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곡하고 있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요. 내가 죽고 곡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떠메어 질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허무하기 그지없는 인생은 결국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 평화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평화 혹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서의 평화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계가 그 분께로부터 창조 된 것처럼 그 분께로부터 이 모든 세상이 다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고 얕잡아 보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는 일을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언 하셨지만 은 사람들이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조금도 흔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미 하나님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숙제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칼빈과 그의 아버지 사이는 목격자들에 의하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억지로 신학 공부하게 했다가 그다음에 호떡 뒤집듯 법률 공부하게 했다고는 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또 한편으로는 칼빈의 마음에 안 드는 면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종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가 죽었을 때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극도의 슬픔을 참다가 울먹거리고 마지막에게는 그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고 고백했던 어거스틴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그렇게 울지 않았던 이유를 우리들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깊이 존경하고 좋아했던 세네카나 혹은 키케로 같은 사람의 영향일 수 있고, 또 하나는 천국의 대한 소망으로 현세의 슬픔을 이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하늘나라에 가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삶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삶이 뿌리째 흔들릴만한 소유도 갖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그런 무엇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세상이 빼앗아 가도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아들, 단 하나의 아들, 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가 기뻐하심이 그 아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지금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할 것 이 모든 것을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는 의미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이상하게 정신이 산만해 지고 집중하기 힘들어 지는 때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머릿속에 한 번 그려봅니다. 옛날 여인들이 사대부집 여인들이 여름에 깨끗하게 몸을 씻고 그리고 잠자리 날개 같은 빳빳한 모시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지고 가지런히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 번 흐트러진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 그리고 그분이 이루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모든 의 그리고 그분을 인정해 주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며 단정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