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심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62:7)
녹취자: 김경애
신앙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과 세상을 향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그런 세상의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에 것에 열어 두는 모든 마음은 세상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두 마음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느 한편이 완전히 이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경건의 기술들 중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두 자아 사이의 대화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자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려는 자아에게 해줄 말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73편에 보면 그런 대화가 나오기도 합니다.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아침마다 하나님께 징책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 무엇인가? 악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편안하게 죽는데…….’ 하나님 없이 살려는 자아가 경건한 자아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시편 42편, 43편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려는 자아는 끊임없이 요동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내 안에 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뛰쳐나가려는 것도 내 자아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려는 것도 내 자아입니다. 자아의 분열현상이 일어나서 하나이어야 할 자아가 둘로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은 궁극적인 해소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해소가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해소되는 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날까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두 개처럼 보이는 자아가 거의 하나가 되어서 자신에게 이런 심한 갈등과 괴로움을 안 주는 상태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참된 자기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체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면 타락이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참된 인간성의 상실함과 함께 개별적인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 자기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고, 중생과 회심이란 잃어버렸던 보편적 인간성을 다시 찾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으로서 독특한 개별성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화란 끊임없이 보편적인 인간답지 않은 것을 덜어내고 나답지 않은 것을 덜어내면서 참된 인간, 참된 내가 되어가는 것이며, 영화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적 은혜로 그것을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두 자아가 싸우는데 마치 제 3의 주체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찢어진 마음을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여기서 바란다는 것은 히브리말로 ‘바타흐’ 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처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뢰한다’(Trust)는 뜻입니다. 혹은 ‘소명을 갖다,’ 혹은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이 경건한 시인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끊임없이 두 개의 자아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아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하나님 의존적인 자아이고, 세상을 사랑하고 빠져나가는 자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려는 자아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 독립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세상을 향한 사랑은 세상을 의지하게 만드는데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었으나 사실은 없는 것이고 지금은 여기에 있으나 끊임없이 흘러가고 마치 물을 잡으면 잡은 것 같지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런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그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니까 거기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요동치는 자아를 한 개로 통합하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동하고 부산하던 영혼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랍니까? 영적으로 ADHD에 걸린 교인들이 많습니다. 영혼 저 깊은 곳에부터 분열증이 생깁니다. 죽어도 집중을 못합니다. 미디어를 보면서 집중하던 것의 1/10만 말씀에 집중해도 변화가 일어날 텐데 도통 집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열이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우리 영혼을 집중시키는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고,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숙고로서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이시오.’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말로 ‘추루’라는 이 반석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치된 해석이 있는데 조금 큰 돌맹이 같은 작은 바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를 말합니다. 산에 올라가면 하나로 된 통 바위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즐겨 다니던 기도원에 가면 천석바위가 있습니다. 천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한 바위라는 뜻인데 그것이 하나의 암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 바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돌멩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반석이라는 단어가 신약에 와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에 나옵니다. ‘그 반석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 할 때의 그 반석입니다. 그 반석은 교회입니다. 그 반석을 터트리면서 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라는 찬송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요동치는 마음은 결국 두 가지인데 상상 속에서 나오거나 현실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현실을 본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다 보입니다. 보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눈에 보이는 상황은 희망이 없이 절망적으로 전개가 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찢어집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세상의 상황을 보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이제껏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지진이 나고 수많은 군대의 마차가 달려와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바위의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곧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오.’라고 말합니다. 요새는 전쟁에서 일당백으로 싸울 수 있게 만듭니다. 남한산성에 올라가보면 거기에 수호장들이 보이는데 100명이 올라와도 이 한 명을 못 이기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나무들이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나무들을 놔두었겠습니까? 놔두면 나무속으로 다 피하니까 나무를 모두 깎았을 것입니다. 거의 80도 각도로 깎아 지르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올라온다면 위에서 끊는 기름을 붓고, 돌을 굴리고, 활을 쏘고, 불울 놓으며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 패망할 것 같고 전투에 질 것 같은데 이길 수 있게끔 우리를 보호하시고 공격에 유리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내 인생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분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거기에서 자아의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고 합니다. 나를 둘러싼 삶의 상황은 크게 요동칩니다. 안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26년을 목회하면서 육지를 걸어 다닌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배를 타고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배 위에서 걷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좋을 때는 항공모함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안정적이고 조금 안 좋을 때는 3, 4인용 쪽배를 두 팔을 벌리고 걷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항상 배 위를 걷는 느낌이었지 육지 위를 걷는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는 고백은 자신에게는 자기에게 좋지 않은, 자기가 힘들어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나의 믿음이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내 구원이신 하나님을 앙망하기 때문에 흔들리지만 항공모함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항공모함 위를 걸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한 십만 톤짜리 항공모함 위를 걷는다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크루즈는 한번 타보았습니다. 75,000톤짜리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생각보다는 좋은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꿈꾸는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것을 하려면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가격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쨌든 3등석에 탔는데 이렇게 보는데 바다가 요만한 창으로 보이는데 갈 데는 먹방을 주어서 숨을 쉴 수 없었는데 수없이 올 때는 창문이 요만한 것이 달렸는데 바다를 보고 있는데도 이 배가 가고 있는 것인지 서있는 것인지 주위에 산들이 없으니까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500킬로를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느끼는 것은 75,000톤만 되어도 -물론 그날은 바다가 잔잔했지만- 전혀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100,000톤 되는 항공모함 위를 걷는다고 생각해보면 아마 육지를 걷는 것과 거의 똑같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은 흔히 아주 작은 2인용 쪽배에 올라타고 그냥 빌기를 바다가 거의 민물처럼 되어서 안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사실 일어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고 파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 없이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배를 크게 키워야합니다. 쪽배에서 큰 군함으로 마지막으로는 큰 항공모함처럼 키워야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요동치 않으면서 그러면서 그 위를 육지처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하는 이야기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라고 합니다. ‘나의 구원’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고, ‘나의 영광’이라는 것은 중요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영광’이라는 말은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이 세상에서 내가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겪지만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중히 여겨주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의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 힘의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 힘의 반석’이라는 말은 내 힘이 딛고 서있는 요동하지 않는 기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견딜 수 없는 설움이나 고난을 당하고 이 현실 속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실제로 도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지만- 위험들이 엄습하여 내가 피난하고 싶을 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난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특별한 섭리로 인도하십니다. 시편 31편 19절부터 20절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피난처로 피했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이 시인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평탄케 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하고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 피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붙어있던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불신앙적인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