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족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편)
녹취자: 김경애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여호와가 시인의 목자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는 더욱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실 수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고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혼인을 하는 날에는 모든 일가친척들과 그리고 지인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축하를 하는데 이때에 주인은 자신들이 장만하고 간직해왔던 포도주 중에 최상의 포도주를 그 잔칫날 내놓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물이 흔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관계시설이 아주 잘되어있고 나치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국민들에게 10원도 주지 않고 그 돈을 전국을 바둑판처럼 수로를 만들어서 어느 땅이나 물이 들어가는 기름진 땅으로 만드는 일에 모든 돈을 투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척박하고 기후가 어려운 나라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목축업과 그리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유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물을 우리처럼 자유롭게 먹을 수 없고 샘을 파도 물이 대부분 쓴물이고 물을 마시면 대부분 다리가 퉁퉁 붓는 풍토병에 걸리기 쉬워서 물대신 이사람들이 포도주를 늘 물처럼 그렇게 음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집이건 담가놓은 포도주가 항상 있게 마련이고 또 그 나라는 엄청나게 포도농사가 잘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에스골’이라는 말 자체가 ‘덩어리’, ‘Cluster’라는 뜻입니다. 어마어마한 포도송이가 생산되고 카일 앤 델리치 라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주석가들이었는데 자기의 주석 속에서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에서는 포도 한 송이가 4.5kg 내지 6kg가 생산된다고 기록할 정도였으니까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포도가 나왔겠습니까? 그런 포도를 이용해서 충분히 저장고에 포도주를 담가놓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잔칫날에는 제일 좋은 포도주를 가지고와서 주인이 모든 하객들에게 베푸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잔에 그 질이 좋은 포도주를 가득 채워서 서로 건배를 하고 주인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잔이 넘쳐흐르도록 가득 따라주고 온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풍경을 지금 5절 하반 절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이 고백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이 고백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사회가 이렇게 자본주의화 되고 물질중심으로 산업화되다 보니까 우리의 경제생활이나 소비생활은 정말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집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핸드폰 요금까지 내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그런 정도로 잘 살게 되었고 오늘 뉴스를 들으니까 최근에 1인당 소득이 26,000불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잘 살고 이제는 우리들이 가전제품이나 먹는 것들은 전 세계 어느 나라 부럽지 않을 정도로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최근에 대화 속에서 혹은 여러분 마음속에서 이런 단어를 사람과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까? 벅찬 기쁨, 희열, 환희, 기쁨, 유열, 가슴 가득한 감격, 그런 것이 있습니까? 가난하던 시절에는 있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문학전집이나 철학책을 읽고 내려오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서 나의 키가 즉 정신의 키가 한 뼘쯤 컸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1년 지나고 나면 1년 전의 나를 불러놓고 무릎을 꿇리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환희를 느끼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서, 혹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에서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른 아침부터 늦게까지 미친 듯이 일을 해야지만 핸드폰 요금도 내고, 아이패드도 사고, 월부로 장만한 자동차 할부도 갚아야하고, 그리고 평수 늘려간 아파트 불입금을 갚아야하고, 생명보험도 넣어야하고, 그러면서 고달프게 사는 것입니다. 1860년대 미국사람들에게 인생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16가지가 나왔습니다. 120년 뒤인 1980년대쯤 와서 물어보니까 이것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256가지나 된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손에 넣으려니까 미친 듯이 일을 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사귀고 교제할 사람들이 아니라 경쟁하며 살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잔은 차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채워지지 않는 엄청난 마음의 공허를 사람들이 쾌락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중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 수유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는 여기 수유리가 경기도 수유리였습니다. 그러다가 넓어져서 여기까지 이렇게 서울이 되었는데 우리 중학교 때만 해서 여기에 반딧불이 날아다녔던 곳입니다. 그런데 서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쓴 글을 직접 읽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새벽에 당직을 서는데 새벽 4시쯤 되는데 택시가 오더니 사람들이 환자를 업고 응급실로 뛴 것입니다.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방금 쓰러졌는데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까만 양복을 입고 까만 넥타이를 맨 사람이 쓰러졌는데 보니까 장사 집에서 온 사람입니다. 보니까 이미 벌써 죽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가족들이 새벽택시를 타고오고 달려 오고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사람이 태어날 때는 이렇게 하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이렇게 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쪽 손은 쥐고 이쪽 손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여태까지 20년이나 의사생활을 했지만 처음으로 본 시신입니다. 가족들이야 울고불고하지만 이 사람은 남이니까 궁금해서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이상한 폼으로 죽었을까? 하도 궁금해서 열어보았습니다. 화투 두 장이 떨어지더랍니다. 딱 보니까 삼팔광이었습니다. 의사가 ‘삼팔광땡이네!’ 그리고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 스토리를 들어보니까 경기도 이쪽에 직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회사에서 사람들이 단체로 문상을 온 것입니다. 문상을 와서 서로 위로한답시고 술을 먹다가 화투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밤새도록 쳤는데 다 잃었는데 그러다가 막판에 끗발이 붙어서 돈이 이렇게 쌓였는데 화투가 들어왔는데 삼팔광땡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가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다음에 후손들이 ‘엄마 우리 아빠 왜 죽었어?’ 그러면 뭐라고 대답 할 것입니까?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어?’ 태어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도 ‘그 할아버지 어떻게 태어나셨어?’ ‘우리 아빠 어떻게 태어났어?’ 그렇게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돌아가실 때 ‘왜 돌아가셨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지금 여러분은 깔깔대고 웃으셨지만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에는 삼팔광땡을 들고 ‘삼! 삼! 삼!’ 그러면서 졸도해서 죽은 사람이나 땅문서 한 장, 집문서 한 장, 그 다음에 골프장 회원권 한 장, 학위증서 하나 들고 있는데 이 화투는 조그마한 것이고 이 문서는 클 뿐이지 그것을 들고 ‘땅! 땅! 땅! 집! 집! 집!’ 그러다가 죽는 것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오나시스라는 사람을 기억합니까?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을 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태리의 탁월한 천재 오페라가수 마리아칼라스의 남자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재클린을 보고는 마음이 동해서 마리아칼라스를 버렸고 마리아칼라스는 그래서 쓸쓸하게 56세의 나이에 파리의 하숙집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손자가 있었습니다. 신문에 났는데 유산을 9천억쯤 받았답니다. 그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고모 수많은 사람들을 평생 동안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가 물려받은 유산 9,000억 전부를 기부해버리고 자기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겠다고 했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그 무엇 하나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왜?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산업화되어가고 물질주의적인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시대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돈을 벌어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림으로 행복해지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기쁨을 얻으려고 하면 우리는 진정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시는 참 신날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속담이 있습니다. ‘일 년이 행복해지려거든 집을 사고, 한 달이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그리고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만 행복해지고 싶다면 결혼을 하라.’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군다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관과 행복관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제는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회개해보신적이 언제입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혹은 홀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마음이 녹으며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를 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 주님만 보게 되는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여러분의 마음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신앙의 감격에 북받치고 하나님 한분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기쁨과 희열이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차서 하나님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 없는 그런 행복 속에서 살아본 때가 언제입니까? 있기는 있습니까? 전도에 최대의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불행해 보이는 얼굴입니다. 행복해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우울한 얼굴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참 좋아요!’ ‘우리교회에 꼭 나와 보세요!’ 그리고 슬픈 기색으로 돌아갑니다. 믿는 사람이 그러면 됩니까? 어떤 사람이 물을 팝니다. ‘아주머니 이 물 드셔보셨어요? 너무 좋아요! 우리들이 2년째 이 물을 먹고 있는데 아이들이 이 물을 먹는 시간을 그렇게 행복해하고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이러고 물을 팔아도 살까 말까인데 복음을 판매하는 전도자들이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 나오시면 저처럼 사연이 많아 보이는 여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저처럼 교회 다니는 것이 인생에 보탬이 되지 않을걸!’ 그런 표정으로 전도지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쁠 때 그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 저에게는 참 감사합니다.’ 회개할 때는 ‘내가 나인 것인 것이 정말 죄송합니다. 나보다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데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나님 정말 이런 내가 나인 것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 때문에 저희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 신앙으로 눈물을 흘리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희망을 갖고, 실패 속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용기를 얻고, 절망으로 가득한 길에서 사면을 돌아보아도 갈 길이 없을 때에 위를 우러러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입니다. 시인은 수많은 난관을 겪었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그 환희와 기쁨을 그 시련을 이기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렇게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과 환희로 인도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즉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만들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첫째 옛날의 번역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이번 번역에서는 ‘차려주시고’라고 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없는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옛날 성경을 보면서 그 ‘상’을 초등학교 졸업식 때 받는 개근상이나 최우수상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상장인줄 알았던 사람이 내가 만난 사람 중에 한 40% 이상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상이라는 것이 ‘슐한’ 이라는 단어인데 이 ‘슐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밥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밥상은 높이 곧추앉아서 먹는 식탁이 아니라 야트막한 소파 같은 데에 기대서 받아서 티 탁자 같은 식탁에서 비스듬히 기대어서 편안한 자세로 식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편안한 자세라고 확신이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처럼 하루 종일 일하다가 저녁에 이렇게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서 밥을 먹었던 것입니다.
30년 전에 제가 시편 23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5절에 와서 정말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느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상을 차려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상을 차려주셨는데 그 밥상을 차려주신 것이 왜 그렇게 감격이 되는가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의 의미를 우리들이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문맥은 사실 서양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입니다. 그런데 사실 식사에 있어서는 동서양이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이 누군가를 자기 집에 식사로 초대할 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매우 특별한 환대입니다. 그러니까 특히 우리 동양사회에서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형제 됨, 가족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상민과 양반이 있을 때 반상의 구별이 있을 때에는 여행을 하다가 날이 너무 추울 때에는 양반이 상민들과 함께 등을 맞대고 잠을 잘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을 같이 먹는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도 양반은 상민들과 한 가족은 될 수는 없다는 특권적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족 간의 위계질서에 있어서도 매우 분명합니다.
저의 할머니가 시집을 오셔서 한창 대가족일 때 가족 수가 42명이었답니다. 42명이 한집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름을 외우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다가 방장을 세우고 그 다음에 그 집안에 구역을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집안을 가만히 보면 큰 집은 밥을 먹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어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상은 안방에 차려집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어가시고 그 다음에 우리 아버지가 들어갑니다. 우리 어머니도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작은방에서는 우리 어머니, 나, 삼촌 등이 들어갑니다. 우리 아내도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다음에 차려지는 마루에 있는 상에서 며느리들이 둘러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그 다음에 저 아래에서 멍석을 깔고는 일하는 노비들이 밥을 먹습니다. 부엌에는 멍석을 깔고 부엌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거기에 앉아서 누룽지를 긁어서 먹습니다. 당연히 그 상마다 반찬의 가짓수나 품질이 다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와 내가 들어갑니다. 우리 집사람은 세 번째 방에서 두 번째 방으로 오는 것입니다. 승진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예외가 있습니다. 아주 귀여운 손자는 깍두기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피우면서 밥을 먹는데 특별회원이지 정식회원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밥을 먹는 것이 형제 됨의 맹약이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죽도록 종살이를 했는데 이 꾀가 많은 라반이 순순히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큰 지혜를 주셔서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풍나무 껍질을 물속에 넣었다 뺐다가 하면서 야곱다운 짓을 해서 어쨌든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사흘 길을 도망갔는데 드디어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렸고 거기에 있는 라반과 라반의 자식들이 말을 몰고 복수를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으면 몰살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을 텐데 하나님이 라반에게 ‘너 야곱에 대해서 일체 간섭하지 말라 간섭하면 가만 안두겠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깨고 나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가서 ‘왜 진작 간다고 했으면 잔치를 해주고 노래를 부르고 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경계를 넘어서 너를 추격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어디를 가든지 네가 복을 받기를 바란다고 내 말을 믿으라고 하면서 거기서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갈사하두다’라는 증거의 무덤을 쌓고 거기서 함께 밥을 먹음으로써 약속을 맺고 헤어진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은 언약을 맺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식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섰을 때 모두 똑같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한 밥상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역사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은 밥을 먹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달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받으셨던 가장 커다란 비난이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느냐하면서 그것은 죄인과 한통속이 아니냐며 비난을 했더니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나 의원이 필요하나니 나는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죄인들이 자기를 믿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지만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온 자신이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음으로 그들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계속 넘어가서 결국은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온 성도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서 애찬의 시간을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성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계시록으로 넘어가서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교회가 나옵니다. 정말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아주 호된 질책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먹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너희가 너희의 나태함을 회개하고 진실한 신앙으로 돌아오면 나와 너희들 사이에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영적인 생명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래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는 나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내가 그 교회를 다스려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66권에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 함께’, ‘누, 우리와’, ‘엘,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별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교역사를 가르치시던 분에게 저도 배웠는데 지금은 선교사들이 통신도 발달되고 여행도 아주 쉬워졌기 때문에 사실 비행기를 타고 하루만 지나면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남미나 그런 나라를 빼놓으면 거의 하루면 도착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어느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지 가본 사람도 없고 갔다 와도 여행기를 써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선교사들이 중국에 있는 오지에 글자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갑니다. 그러면 참 놀라운 것이 아무리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3시간을 서로 대하다보면 손짓, 발짓으로 의사가 소통된답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언어적 본능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큰 지도를 펴놓고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먼데서 너희 나라로 왔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왔다. 그런데 여기 잠깐 머물다 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여기서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으니 허락을 해 달라.’ 이 말귀를 알아들은 것입니다. 촌 노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을 회의를 소집하고 수염이 긴 촌장들이 모여서 장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면서 족장이 나와서 맞이하며 ‘우리 모두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우리와 함께 살아도 좋다.’ 그러는 것입니다. 너무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선물도 주고 그러고 나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우리로 말하자면 마을회관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서 한 마을사람들로 살게 되었다는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국 사람들의 식성이 대단히 폭넓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매우 폭이 넓습니다. 사스가 일어난 다음에는 많이 정화되었습니다. 제가 1990년대에 중국을 여행할 때도 베이징 시내에 아주 커다란 음식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이쪽 벽하나 전체가 거대한 닭장 같은 철망으로 이루어져있고 각양 짐승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는 쥐도 있고, 뱀도 있고,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물론 원숭이도 있습니다. 여기는 육지식물이고 옆으로 가면 각종해산물들이 살아있습니다. 1근에 얼마라고 쓰여 있습니다. 요리를 포함한 가격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주문하면 즉석에서 고양이를 잡아서 튀겨주기도 하고 삶아 주기도하고 요리를 해줍니다. 쥐는 물론입니다. 그런 풍부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서양선교사는 세상에 보도 듣지도 못하던 음식입니다. 구더기볶음이라든지 어떤 사람이 중국의 차가 너무 맛있어서 한없이 마셨는데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주먹만 한 거북이 하나하고 바퀴벌레 20마리 정도가 그 속에 있었답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에 빠져서는 결코 결혼식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왜 결혼식에 가면 어느 뷔페 집에 가도 국수가 있지 않습니까? 똑같이 그런 만주에서 먹는 결혼식 음식이 있는데 뱀 국이랍니다. 그래서 저렇게 나이가 든 처자를 보면서 우리는 ‘아이 쟤도 국수 먹을 때가 되었는데’ 그러면 거기서는 ‘너는 뱀 국을 언제 먹느냐?’ 뱀도 작은 뱀이 아니라 커다란 구렁이를 동태 치듯이 툭툭 쳐서 물을 붓고 가마솥에 푹 끊여서 그것을 한 대접씩 먹어야만 결혼식다운 결혼식이라고 합니다. 그런 음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솔직합니다. ‘저는 이런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저는 이런 음식을 혐오합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먹는 척이라도 하면서 눈치를 볼 텐데 외국 사람은 칼 같아서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식당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끌고나가서 죽여 버렸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선교사는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식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습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살고 싶다고 해서 많은 고민 끝에 이 사람들을 받아들였는데 그리고 식탁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예식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같이 살고 싶은데 너희들과 하나 되기는 싫다고 하니까 그것은 스파이입니다. 그러니까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를 생각하면서 이 성경을 해석하면 매우 풍부한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여기서 ‘상을 베푸시고’ 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이 시인 사이에 있었던 가족 같은 생명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장년 교인이 1100명 정도 출석할 때까지는 그 주에 등록한 사람을 꼭 심방했습니다. 한주에 못하면 두주에 걸쳐서라고 꼭 했습니다. 저는 심방을 가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집에서 밥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주방 일을 즐겨했습니다. 즐겨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애들도 요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은 제가 목회하기 전에 교수생활 할 때는 항상 아빠가 요리해주는 주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시장에 가서 우리 집사람은 돈이 아까워서 사지 못하는 좋은 고기를 사고 좋은 재료를 사다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주었습니다. 돈가스도 해주고 비프스테이크도 해주고 탕수육도 해주었습니다. 애들이 굉장히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보니까 접시에 요만한 돈가스 하나를 먹는데도 보통 일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매들을 보면 가엾습니다. 왜 어느 집에 가면 음식을 해옵니다. 그래서 내가 ‘하지 마라.’ 항상 광고를 합니다. 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 가서 갈비탕 하나 정도면 되고 그것도 없으면 국수 한 그릇이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즘은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차 한 잔을 하면 주부들이 많은 일을 덜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매들이 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꼭 하겠다는 사람이 가끔 나옵니다. 지금부터 15년 전이었는데 50세 정도 된 부인이 우리교회에 와서 은혜를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분명히 밥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목사님 저렇게 밥을 한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지 말라고 그래라. 다 쓸데없는 일이지 한 끼 먹으면 다 없어지는데 왜 그런 고생을 하느냐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하겠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내버려두라고 그랬습니다. ‘그 대신 간단하게 하라고 해라.’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한없이 자기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간증을 하니까 너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겸손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나니까 밥상이 나오는데 밥상을 4명이서 들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큰 교자상을 갖다놓았는데 그 상 두 개를 갖다놓았는데 마음이 너무 상했습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은 하느냐?’ ‘목사님 제가 이 식탁을 한 달 전부터 기획하고 열흘 전부터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일은 하느냐?’ 이 많은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그랬느냐고 하니까 짜증을 확 내는 것입니다. ‘기도도 했고요 성경도 읽었거든요! 얼른 드세요!’ ‘알았다.’ 밥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데 나는 그 밥상이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나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도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셋이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언니를 불러다가 했다는데 내가 이렇게 마음을 기울일 정도로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열흘 전에 장을 보기 시작해서 김치와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했고 일주일 전부터 필요한 것들을 사기 시작해서 3일전부터 만들고 그날 새벽부터 상을 차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반찬이 많은지 세어보지 않은 것이 후회됩니다. 그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찍어놓는 것인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밥상만 나오면 외국에 가서 사진을 찍습니다. 외국에서 만난 사람이 그럽니다. 자기는 그것이 한국인의 식사예절인줄 알았답니다. 밥상이 나오면 사진부터 찍는 것이 말입니다. 젓가락을 주었는데 사정거리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의 사정거리에 미치지 않는 반찬을 날라다 주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것이지만 15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1년에 몇 번씩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잊히지 않는 밥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반찬은 무엇이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속에서 성도의 나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저 사람에게 주셨던 은혜의 사랑 그것만 생각나는 것입니다.
음식문화가 정말 발달한 지방은 전라도 지방입니다. 전라도 지방에 집회를 갔는데 이렇게 부흥회를 했는데 장로님이 나를 데리고 8명이 함께 가는데 새벽집회를 하고 오전집회까지 했는데 그러니까 지칩니다. 얼른 가서 쉬어야하는데 식당을 찾아서 40분을 달려갑니다. 식당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밥을 먹고 돌아와서 숙소에 잠깐 누우면 한 시간 정도 있으면 다시 밥을 먹자고 벨을 누르는 것입니다. 괴롭지만 갔습니다. 한정식 집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비싸고 호화로운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집도 아니었고 그냥 괜찮은 집이었습니다. 먹는 것을 조절해야하는데 얼마나 들어오는지 알아야 조절을 하는데 끝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2/3쯤을 먹다가 나는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릇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4명이 먹는 한상에 들어오고 나가는 그릇이 200개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굉장한 것입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베푸시고’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아라크’ 라고 동사로 나오는데 이 ‘아라크’라는 동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군대들을 정돈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많은 군대들을 ‘좌우로 정열!’하고 늘어서는데 이것이 ‘아라크’입니다. 물건이 있으면 하나나 두 개는 ‘아라크’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개의 물건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을 ‘아라크’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차려주신 밥상이 간단한 식탁이 아니라 정찬에 아주 화려한 만찬과 같은 식사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손님이 온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 집안에 중요한 사람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지는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짜고 일주일 전부터 중요한 반찬거리를 마련하기 시작하고 3일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집에 있어서 나는 매우 중요한 손님이라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젊은 처자들이 시집을 갔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부모 속을 많이 썩인 것입니다. 정말 아니 것 같은 녀석을 하나 물고 와서 콩깍지가 씌어서 죽어도 그 남자한테 가겠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렸는데도 간다는 것입니다. 몇 달을 사귀면서 뜯어보아도 영 아닌 녀석을 결국은 신랑이라고 붙든 것입니다. 부모마음이 차지 않습니다. 인격도 별로고 배운 것도 별로고 돈도 별로 벌지 못하고 등등 별로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으니까 마지못해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드디어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시댁에 갔다 오고 친정에 갔습니다. 전화를 합니다. ‘엄마, 나야!’ ‘신혼여행 잘 다녀왔니?’ ‘네! 내일 우리 김 서방하고 같이 엄마 집에 인사하러 갈 거예요.’ ‘그래 와라.’ ‘점심때 갈게.’ ‘그래 와!’ ‘우리 밥 줄 거지?’ ‘그래.’ 끊었습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나서 남편이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하는데 ‘아이 좀 참아 엄마가 잘 차려놓고 기다릴 텐데 지금 먹으면 맛이 없잖아!’ 밥을 하기 싫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서 덜렁덜렁 선물 하나를 들고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빠도 없고 엄마 혼자서 베개를 베고 낮잠을 주무시는 것입니다. 뭔가 전을 부치고 맛있는 냄새가 날줄 알았는데 별로 없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가서 절을 하고 딸은 집에 오니까 마음이 편하니까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줘!’ ‘그래 잠깐 기다려라.’ 그러더니 그때는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까 부엌에 나가더니 3분 만에 밥상을 차려온 것입니다. 보니까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조그만 소반에다가 밥 두 그릇이 있는데 열어보니까 그것도 아침에 누가 먹다가 남긴 밥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냉수 한 그릇을 놓고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를 갖다놓은 것입니다. ‘들게!’ 그러면서 갖다 놓을 때 물이 흘렀습니다. ‘먹어!’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너는 도대체 우리 집에 왜 왔니? 나는 네가 온 것이 싫다. 네가 우리 가족이 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그 표시를 밥상이 해주는 것입니다. 그 밥상은 ‘아라크’의 밥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시인이 배고팠을 때 진수성찬을 차려서 네 줄로 매달려서 교자상에 내려왔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습니까? 그런 밥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구름을 타고 내려온 밧줄이 달린 밥상을 받아본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시인 다윗은 왕이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결핍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까지 손을 대서 허기를 채워야했던 사람입니다. 자기를 열렬히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고관대작이나 재벌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한 맺힌 그런 장애인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다윗왕국을 세우는 주축세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버이와 같은 왕의 심성을 하나님이 훈련시키셨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시인이 영적으로 허기지고 주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셨던 영혼의 식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내 원수의 목전에서’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하나나 둘의 원수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수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었고 기회가 있으면 시인을 죽이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홀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죽이겠다고 공격을 했는데 시인이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 식사의 밥상을 차려주신 주인과 함께 겸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식탁을 차려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너희의 힘으로 이 시인을 죽일 수 있고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잊지 말아라 이 시인과 나는 가족이다. 식구이다.’ 그 이야기는 이 시인을 공격하면 그것은 곧 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은 원수들로 에워싸인 인생의 시련의 골짜기를 지날 때 무슨 힘으로 이깁니까? 가난이나 시련 영적인 원수들이 나의 인생을 에워싸고 인생의 어두운 밤 날이 계속되고 어떠한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기고 그것을 극복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힘,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자원을 동원해서 그 불행을 이겨보려고 하고 고통 속에서 받은 상처들을 고쳐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은혜의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풍성한 말씀의 식탁에서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영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참 신기합니다. 일생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 때문에 불행하던 사람들이 딱 하루저녁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그 일평생 갔던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여고생 하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굉장히 가정 폭력적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온갖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너무 미울 것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버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비참한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외국에 가서 선교사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이 선교사 부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얌전하고 말도 못하시던 분이었는데 외국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빌딩 청소를 하고 그러면서 약품 같은 것들을 마시고 그런 다음부터 변한 것입니다. 막 퍼붓기도 하고 냉탕과 온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우울증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도 있고 딸도 있었는데 그 어린 딸이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할 때인데 엄마가 그렇게 퍼부으니까 웬만한 애들 같으면 상처를 받거나 가출을 할 텐데 그런데 자기는 자기 딸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막 포달을 떨고 퍼부으면 딸이 와서 자기를 살며시 안아주면서 엄마 ‘많이 힘들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러면 엄마가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엄마 이럴 때는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 괜찮아 잠깐 기다려!’ 그리고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엄마를 욕조에 넣고 찬송을 불러주면서 엄마를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이 머리까지 감겨준 다음에 타월로 다 닦아서 잠옷을 입히고 그리고 침대에서 자기 무릎에 재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엄마한데 그렇게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한테 상처를 주었는데 ‘엄마도 얼마나 영혼이 곤고하면 그러실까?’ 하면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감기고 자기 방에 재우면서 토닥거리고 ‘엄마 한숨 자고나면 훨씬 좋아질 거야! 자장자장 자장 우리 엄마 잘도 잔다.’ 그게 무슨 힘입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이 생명적인 은혜의 공급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원인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입니다.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받는 것이 있으니까 너무나 기쁘게 그것을 이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도망 다니며 죄도 없이 도망을 다니며 죽음의 위협을 무릅써야하는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것을 늘 경험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이 시인은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말씀의 식탁을 베풀어주셔서 영혼이 배불렀기 때문에 그 시련과 고난을 이기면서도 상처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은혜의 사람, 진리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여러분 시월드 많이 싫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십니까? 씨푸드 말고 시월드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하는 ‘시’자 들어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또 5년째 처갓집에 얼굴도 비추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전부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누가 교인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문상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자매 하나가 나를 만나더니 나를 붙들고 온몸을 흔들면서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딸인 줄 알았는데 며느리였습니다. 그렇게 효도를 했습니다. ‘걱정마라 너는 그래도 할 일을 다 했다. 아버지는 뜻이 있으셔서 시아버지를 불러가셨지만 너는 참 잘했다.’ ‘아니에요. 목사님 저는 더 잘해 드릴 수 있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러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찬양)
주의 사랑 나의 사랑
내 마음에 넘쳐 그대를 사랑해
이것은 내가 어느 책에서 읽은 것도 아니고 철학자의 글에서 인용한 것도 아니고 문학작품에서 읽은 겻도 아닙니다. 저도 다윗처럼 상처가 많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 시련 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두 번을 반복 할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래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5월이 되면 항상 6월까지 두 달 동안 가정의 달 설교를 합니다. 대게 5월 한 달 첫 주부터 마지막 주까지 하고 좀 길어지면 6월까지 갑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우리 교인중 하나가 자기 친구를 보니까 너무 가엾은 것입니다, 이혼을 하려고하는 처지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자기 친구가 불쌍해서 만나서 차도 사주고 밥도 사주는데 주일날 교회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습적으로 교회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날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한 번도 교회에 온 적이 없는데 그날 기둥 옆에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펑펑 울면서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간 것입니다. 자기는 이미 이혼증서에 도장을 찍고 남편에게 던져준 것입니다. 이것을 남편에게 던져준 것입니다. 이제 이 인간하고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집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집에 있는 것입니다. 각방을 쓰면서 산지 오래되었으니까 ‘여보 나 좀 봐!’ 남편이 ‘저 인간이 이혼해달라고 괴롭히겠구나!’ 생각하면서 풀이 죽어서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부인을 보니까 아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입니다. 자기는 서있는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결국은 그렇게 빗나간 거였어.’ 그러면서 우니까 남편은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내가 오늘 교회라는 곳을 처음으로 갔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당신에게 한 너무 나쁜 일이 생각났어.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줘!’ 남편이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발로 퍽 차면서 ‘야 이년아 그것을 이제 알았니? 내가 네 잘못이라고 그랬잖아!’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생전 처음 아내한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아냐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었어! 나를 용서해줘!’ 이것이 한 여자가 인생을 살다가 이혼을 하려고 결심하는 것은 하루나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보려고 하다가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끈을 놓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놓치는 것입니다. 그 힘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의 힘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끊임없는 사랑을 공급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요즘 부흥회를 이렇게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우리교회도 비슷합니다. 이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30년 전 같지 않게 너무 바쁘고 회사에서 무한충성을 요구하니까 그 시간에 교회에 올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냥 여러분 520명 정도 모인다니까 주위사람 전도한 것까지 합해서 700명이나 800명 정도 꽉 차야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여러분이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말씀의 식탁에서 배부를 때 거기에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고 그것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보듬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내가 아니었으면 불행했을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며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은혜의 식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인이 그런 시련의 가시밭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자 그러면 이제 시인의 가슴을 가슴이 벅차서 터질 것처럼 만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 다음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이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특별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스려가는 솥발과 같은 세 개의 직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이것을 삼직이라고 합니다. 왕은 그 가문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을 율법으로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그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실제 삶속에서 실현되도록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공평과 사랑을 세울 의무가 왕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이 일을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직분의 도움을 받아야했습니다. 한 직분은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의 중요한 직무는 모세 오경을 잘 해석해서 모세시대와는 다른 자기가 사는 시대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해석해주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하고 그의 영광을 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은 전통과 습관, 이 세상의 정치, 이런 것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뜻이 있었습니다. 선지자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보여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큰 부분은 이미 있는 성경을 해석해서 오늘 너희들이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야하는데 이것은 너희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용기 있게 질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믿는 길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선지자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제사장은 선지자가 그렇게 하나님 편에서 백성들에게 온 사람들이라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빌고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였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죄인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주된 임무는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이 계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에게 나아왔다면 제사장들은 전통을 중시여기며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선지자와 제사장 사이에 마치 해석의 갈등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되는 것은 그냥 ‘내가 선지자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사장인 아론의 가문에서 나와야합니다. 왕은 이제 다윗을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실 때에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그때에 이 다윗은 기름부음을 세 번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기름부음이라고 할 때 이것은 곧 성령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약시대 때 성령이 역사하시던 방식과 신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에는 연속성도 있지만 상당한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한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영원히 떠나시지 않으시지만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한 일꾼으로 부르시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 기름을 부을 때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임하게 해주셔서 그에게 신령한 것들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또 용기와 그리고 능력을 주셔서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끝나고 나면 성령은 다시 떠나가시는 것이 구약시대의 성령의 경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이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첫 번째 이새의 집에 사무엘이 와서 기름을 부었을 때 이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그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의 세계의 비밀과 그리고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자하는 정결한 삶의 동기 그리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도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이 시인이 경험한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그리고 아주 변화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21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신론을 신봉하고 문학과 사상과 철학들을 읽기 좋아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인생의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매일 눈을 뜨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 ‘나는 왜 살아야하는가?’ ‘왜 태어났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등등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마다 공부를 하는데 새벽이면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저 벌판에서 뎅그렁 뎅그렁 새벽안개를 가로지르며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때가 4시경이었습니다. 4시에 초종을 치는데 일어나라는 뜻이고 4시 15분에 종을 한 번 더 치는데 이제 곧 예배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게 4시 30분에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루도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날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공부를 하는데 그 종소리가 들어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막 신비스러워지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뒤뜰로 나갑니다. 넓은 벌판에 안개가 자욱한데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나는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물론 친구 한사람이 가끔 나와 같이 공부하러 왔다가 전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고 나 혼자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예배당의 한 1/30정도입니다. 조그만 예배당이었는데 수요일에 갔더니 약 20명의 성도들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차가운 비닐장판위에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톱밥난로를 피우고 말입니다. 그리고 삐거덕거리는 풍금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
태어나서 철이 든 이후로는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멀리 떠났다가 고향집에 돌아온 것처럼 그런 평화를 느꼈습니다. 교회에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목사님이 면담을 하자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이 먹은 할아버지 목사님이셨는데 당신도 40이 넘어서 신학을 하고 육십이 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고 하니까 그러면 학습은 받을 필요가 없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말이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렇게 악하게 살았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주님과 결혼하고 당신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저녁 예배당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그리고는 결국 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1m 74cm의 체중이 55kg 정도 밖에 나가지 않던 아주 연약한 청년이었습니다.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세례를 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는데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런 무게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음속에서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눈물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은혜와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살고 싶다는 그리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는지 눈을 떠보니까 사람들은 거의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제가 첫 번째 경험한 성령의 체험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경험을 했지만 항상 마지막은 똑같았습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 그리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항상 똑같은 고백이었습니다. 결혼을 일찍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혼 초창기에 나에게는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빨리 들어주셔야 할 텐데 그래서 직장을 다니며 야간신학교를 다닐 때인데 새벽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날 가난한 동네교회에서 기도를 하는데 아주 가난했습니다. 창문을 막을 돈이 없어서 비닐로 하고 시멘트로 발라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12월이었습니다. 땅바닥을 이렇게 쳐다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편안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가 보다! 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매달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불쌍해서라도 응답해주시지 않을까 하고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대었더니 견딜 수 없는 12월의 차가운 한기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저는 원래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시죠?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헤쳐 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는데 저는 그렇게 은사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으로 너무 신기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강대가 이렇게 있었는데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나도 보이고 강대도 보이는 것입니다. 강대의 한복판에서 핸드볼보다는 좀 작은 이만한 펄펄 붙은 불덩어리가 나를 행해서 직선으로 천천히 날아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저게 나한테 날아오면 맞을 텐데’ 그러면서 기도를 하는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나의 머리에 쾅하고 부딪히는데 쾅하고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확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요한 것이 아니라 온몸이 땀입니다. 뜨거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입니다. 한참 기도를 하다보니까 이상한 소리가 막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혼자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얼마를 기도했는지 보니까 이미 땅바닥에 내려앉아서 기도할때부터 교인이 하나도 없고 기도하시던 목사님도 들어가셨습니다. 이 추운겨울에 유리창을 대신해서 붙인 비닐종이에 하얀 성에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그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기도를 모두 끝내고 눈물로 범벅이 되고 몸은 모두 냉기에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서 그런 기쁨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을 때도 너무 행복했지만 그런 행복과는 비교될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했습니다. 그 기쁨이 가득차면 가득 찰수록 한편으로는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기쁨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지금 약 3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런 유사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했을 때 항상 동일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도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지막 한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사람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찾아오셔서 나의 지성에 말을 건네고 사랑해주시고 싶으신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신앙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은 그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성취되고 소망도 이루어지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합니다. 이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배울 적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도록 주님의 큰 성령의 은혜로 나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가든지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불행한 사람 이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해주는 도구로써 자신을 희생하며 살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한 마음이 되어야하고 그리고 항상 연약한 지체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그리고 은혜로 돌보고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이 험한 세상에서 교회에 와서는 우리가 홀로 외로운 존재들이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라’ 그런 사랑을 교회에서 온전히 누리면서 결국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나눌 때까지 그런 나라를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이루실텐데 그 나라를 먼저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살과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목사님도 장로님도 집사님도 권사님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그 예수님 때문에 한마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삼으시는 이유입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시편 23편의 강의를 끝내는 것을 매우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6절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또 만날 기회를 주시면 6절의 숲속을 들어가도록 하고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권합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올 수는 있지만 말로 물을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의 지성으로 생각하고 그 마음이 설복되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종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이러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고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에 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여러분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라고 저 같은 사람을 보내어 특별사경회를 갖게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전했고 시편 23편에 있는 모든 진리는 아니지만 핵심적인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렸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스스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입니다. 마지못해서 끌려나오던 신앙생활, 그리고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억지로 하나님을 믿는 척하면서 사는 신앙생활, 이것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며 사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투덜거립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은 왜 나를 지켜 돌보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접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인격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시편 23편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모두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서 어두운 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