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시편 9편은 다윗의 시라는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시의 분류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시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찬송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은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님을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큰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고임을 받지 못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고, 아버지도 형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어린 시절부터 만난 그 하나님이 다윗의 일생을 사는 동안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는 궁창에까지 미치고 하늘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보았고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자비를 일생 살면서 자신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영광과 자비, 그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소중한 엑기스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평생 살며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 하고 그 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용기를, 배신을 당할 때에 위로를, 역경을 당할 때에 힘을 공급받으며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II. 주의 이름을 아는 자
시인은 먼저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님을 의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A. 하나님의 이름
이 이름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이름은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사물이나 인간, 본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을 요구합니다. 우리 사람의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자면 제 이름이 있습니다. 남준. ‘남’은 남쪽이라는 뜻이고, ‘준’이라는 것은 영어로 ‘Hero’입니다. 영웅, 아니면 걸출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집안이 하도 함미하고 별로 별볼 일 없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하나 태어났을 때 이놈은 그래도 ‘남’은 돌림자를 사용하였으니까, 이놈은 조금 난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붙인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다 똑같지 아이를 깊이 꿰뚫어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소망을 가지고 붙이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함미한 가문에서 어떠한 인간이 태어나면 아주 함미하고 낮아지는데 지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붙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수님은 아들들 이름을 전부다 조선시대 임금 이름을 붙였습니다. 성종, 태종, 세종, 이렇게 말입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니까 너무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 노예 비슷하게 조상들이 사니까 할아버지가 한이 맺혀서 애를 낳으니까 태종, 세종, 광종, 명종, 왕의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현재이지 미래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 10년쯤 지나면 하나님이 새로운 하나님이 된다든지 보다 더 성숙해지셨다든지 하나님이 보다 더 원숙해지셨다든지 하는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러한 측면이 있다고도 생각하는 철학자들,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려운 말로 현실태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언제나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서 현실태의 반대는 가능태입니다. 꽃이 필수도 있고, 날이 추우면 안 필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가능태입니다. 그런데 현실태는 더 이상 과거,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활짝 있는, 그래서 변함이 없는.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 할 때에는 사람의 이름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가능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노숙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애가 일찍 죽을 수도 있고 110세까지 살수도 있고 그러한 것 아닙니까? 그러한 가능태에 있으니까 희망을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성종, 너는 성종 같은 인물이 되어라. 세종 같은 인물이 되어라.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한 현실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그러한 앞으로의 하나님이 변화되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대부분 하나님 자신이 직접 계시하신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주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함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에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여호와를 먼저 부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할 것입니다. 혹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이 최상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부르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그 뜻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리다. 즉 어디로부터 말미암고, 또한 누구에게 기대어서,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분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을 당신 자신에게 가지고 계시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다 만든 자가 있고 생성된 시간과 장소가 있고, 원래의 본체였던 것이 있고 커다란 나무에서 자른 것이 아닙니까? 모두 원래 인자 몸이 있고 원천이 있고 거기에서 파생되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이시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주 하나님은 홀로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이시고 자신은 그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이 이 땅에 여전히 살아있도록 육체와 영혼을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겨우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를 오늘 시인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도나이. ‘주’ 이것은 뭐냐 하면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여호와의 소유이고 그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으신 자기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끔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여호와여 주님의 이름을’ 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은 이 시련과 환란을 모두 겪고 그러면서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당신의 자녀인 시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모든 과정을 보면서 자신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존재라고 하는 것,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이 세상을 지켜보노라면 때로는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짓밟는 사람들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산다는 그 자체가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이 아무 힘없고 태산 같고 커다란 절벽 앞에서 호수로 물을 뿌리며 그 절벽을 쓰러뜨리려 하는 것 같은 아무 힘없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종종 그러한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꿔 놓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 그 수레바퀴에 오물들이 묻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오물들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거대한 마차가 지나가면서 똥을 밟았다고 해서 북쪽으로 가던 마차가 남쪽으로 돌아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흘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의 반영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은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주님’이라고 하는 이 말은 모든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모든 세계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이 원하는 그 뜻을 모든 인간과 세계를 통해 펼쳐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함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거나 혹은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께 기대어 있어도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셔서 홀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이것은 곧 이름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무엇인가 혹은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공부는 우리가 일생 신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일생동안 힘쓰는 많은 지식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같은 경우 교리공부, 새가족 공부, 신학공부 등 점점 어려운 것도 배웁니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가는데 모든 공부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배우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듣고 감동과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이 선언 하나만 들어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구나.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구나.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주여’라고 하는 그 풍부한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감동으로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시구나’ 밀려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수에게 짓밟히고 고난을 당할 때 내가 의지하던 하나님이 엘로힘이시구나. 모든 만물위에 가장 뛰어난 어느 것 하나도 당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굴복시키실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시구나.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엄청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배우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9월 15일에 산상 세미나 가는 것 아십니까? 모릅니까? 기대하십시오. 9월 15일에 가서 시간이 짧아서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평생 만났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책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에드워즈는 무엇을 보든지, 심지어 처마 끝에 매달려 움직이고 있는 거미 한 마리를 보면서도 그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르르쾅 하고 뇌성과 천둥이 청천벽력처럼 울려 퍼집니다. 주님을 깊이 못 만났을 때는 에드워즈가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는 쾅 하고 천둥이 치면 말이죠. 미국은 땅이 평평하고 기상이 이변이 심하니까 천둥소리도 한국보다 훨씬 큽니다. 비가 와도 정말 큰 나라처럼 쏟아집니다. 눈이 와도 잠깐 사이에 1m가 쌓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트럭을 길거리에 던져 버릴 정도로 토네이도가 불고, 그렇게 우르르쾅 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일기 속에서 말합니다. 자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장면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달콤한 광경이 되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모든 지식이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름은 이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의 삶이 이름과 숙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리 황제처럼 호의호식을 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예화) 저도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교인이 아이를 데리고 살다가 어떤 엄마가 너무 너무 괴롭고 정신적인 우울증이 있어서 목 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심방을 했답니다. 심방을 하고 돌아와서 그 중의 한 사람이 ‘야, 애들이 이 다음에라도 자기네 엄마 생각하면 그 집에 갈 때마다 목 매달아 죽은 자기 엄마가 생각날 텐데, 야 그거 끔찍해서 어떻게 그 집에 들어가나?’ 그리고 깔깔 거리고 웃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아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검정색 옷 입고 심방은 하고 왔는데 그 사람에 대한 연민, 가엾음, 그 다음에 그렇게 죽은 사람 때문에 땅에 떨어지게 되는 가족들의 명예, 그 아이들이 미래에 받는 상처, 이러한 것들은 아무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그래서 요즘은 제가 심방 대원들 훈련을 안 시킵니다만, 예전에는 심방가면서 차타고 갈 때까지 심방하고 아무 관심 없이 잡담하고 떠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하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으면 그 엄마가 죽고 없어지고 그 아이들이 집에 들어갈 때에 그 엄마 생각을 하면서 겪게 될 고통과 상처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사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다윗이 갔습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면서 불꽃이 튈 줄 알았는데 양쪽에 군인들이 대치해 있고 커다란 꺽다리 같은 거인이 하나 나와서 입에 개 거품을 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합니다. 말도 안 되는 욕을 하는데 사람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어떻게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된 백성들을 향하여 모욕할 수 있을까? 저 자식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하면서 혼자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 사랑 안 한 것입니다. 다윗만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그렇게 모욕 받을 때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이기느냐, 지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인간을, 저 입을 막아 버려야겠다. 다물 이유가 없으니까 죽여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주기도문」을 구역공과 하고 계시니까 실감이 날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시며’ 여기까지 갔습니까? 아직 못 갔습니까? 빨리 가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신자로 일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호의호식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살기 보다는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집에 마당에 쓰레기질을 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나에게는 더 행복하다, 이것이 진실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가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얼굴이 조금 예쁘게 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과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대접을 받으셔서 알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남이 대접 받는 것은 보셨을 것 아닙니까?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들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구, 그리고 군대 갔다 온 이야기.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여자들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못생긴 여자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다 싫어합니다. 돈이 좀 있어 보십시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 너무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사회적 지휘가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타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모든 것들이 다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에서는 그렇게 사람을 가르지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이 세상을 내려다 보시면서 당신의 이름에 목숨을 건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을 때 한 없이 즐거워하고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 한 모퉁이에서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헛되고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 기준을 하찮게 여기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름에 대한 태도는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에 위로를 받는다는 것 또한 같은 말인 것입니다.
B. “이름을 안다”의 의미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이름을 아는 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통해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마리아의 대답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내가 잉태할 것이다.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마리아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인데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이 ‘안다’라는 의미가 이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남자와 정을 통한 적이 없는데, 내가 남자를 사랑하고 그에게 내 몸을 준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 아이가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혼인관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경험과 인격적인 사랑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깊이 진수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달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말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가 수박입니다. 저는 수박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금도 너무 먹고 싶습니다. 냉장고에 차갑게 냉장이 되고 너무 잘 익어서 하얀 가루 같은 것들이 있는 그러한 것, 속에서 수박이 저절로 깨지는 것 같은 너무 맛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무등산 수박이 아주 맛있다고 합니다. 광주에 한번 집회를 갔는데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그게 아주 큰 것은 한 통에 50만원 이라고 합니다. 50kg이라고 합니다. 우리 보통 수박이 아, 크다 하는 것들이 9.5kg정도 되는데 5개 정도 되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무등산 수박, 먹어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냥 수박이라고 합시다. 이 수박을 처음 보았습니다. 다들 대게 맛있다고 합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부시맨이 공중에 떨어진 코카콜라 병을 보고 이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모르고 빨아도 보고 핥아도 보고 두드려도 보고 그러듯이 그것을 굴리면서 5-6명이 혀 바닥으로 핥은 것입니다. 생전처음 보는 것인데 맛있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핥아보아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호박 겉핥는 거나 오이 핥는 거나 마찬가지인 느낌인 것입니다. 그것을 탁 잘라서 쪼개서 푹 파서 입에다 놓고 입을 꽉 다물면 붉은 물이 확 쏟아지면서 입 속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들어갑니다. 아삭하는 느낌이 쏵 드는데 한번 씹으니까 즙이 되어서 다 넘어갔습니다. 또 한번, 그 때의 그 맛은 수박을 기어 다니면서 혀 바닥으로 핥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5년, 10년은 다녀도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계속 기어 다니면서 수박 겉을 핥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 혀 바닥으로 어디에서 세상 맛 한번 보면 맛없는 하나님 맛 백 번이라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시인이 답답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맛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비옥하게 하는 것이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죽을 때도 눈을 감으면서 유언하면서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 배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운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방식이 다 동원되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수박을 먹으면서 마음속에서 무심코 수박을 먹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수박 먹을 때만 유난히 그렇습니다. 수박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호박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수박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호박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수박은 정말 저절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수분이랍니다. 그러면서 찬송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상황과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그 알게 되는 그 곳에 막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럽니다. 교리반에 들어와 공부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막말이 어디있습니까?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목사님, 제 나이에 누가 제발 공부 좀 하라고 하면서 숙제 내주고, 숙제 안 하면 뭐라 그러고, 시험을 보자 그래서 점수가 안 나오면 혼을 내고, 이 나이에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모두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만나든지 발 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구나. 정말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심지어는 아직까지 주님을 모르는 인간들, 심지어는 어둠속에 무지 목매여 걸어가는 이교도들조차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구나’,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느끼면서 깊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됩니다. 밤 하늘의 불꽃 있지 않습니까? 작렬하듯이 팡 터지는 불꽃이 눈부실 정도의 노란 빛부터 시작해서 빨간 빛, 파란 빛, 초록 빛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화약이 폭발할 때 합성작용을 일으키는 금속의 성분에 의해서 빛깔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이 활활 탈 때 거기에다가 플라스틱을 집어넣고 종이를 넣고 철사를 넣고, 무엇인가를 집어넣으면, 각기 그 모든 것을 태워 넣으며 다른 빛깔의 빛을 내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건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만납니다. 기쁜 일도 만납니다. 배신도 당하고, 그리고 정말 더러운 일도 만나게 됩니다. 그 자체를 보고 하나만 보면 뼈저리게 가슴 아픈 일, 가슴이 터질 것 같이 행복한 일로 밖에 분류가 안 되지만, 그것을 전부 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도구라고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불 속에 집어넣으면 하나 하나가 타 오르면서 찬란한 빛깔을 내면서 다양한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보면 파도치고 뒤웅치는 우리의 인생의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고통스러운 일,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서 나에게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할까, 사실은 그것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성품, 주님의 사랑, 그 놀라운 은혜,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그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알게 될 때 거기에서 진실한 사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경험하고, 그래서 결국 그 이름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사는 존재의 이유가 내가 높아지고, 존귀해 지고 위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매일 매일 배워가는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래서 그 하나님으로 깊이 만족하며 사는 삶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있고 거기에서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 행복을 꿈꿔라. 당신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슬픔이여 안녕, 행복 시작! 다 속임수입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행복할 것처럼 생각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고 죄가 들어왔고 모순과 갈등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면서 일평생 살아가면서 행복한 일만 만나며 사는 길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인생은 살지 못합니다. 거짓말인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어느 교수가 글을 썼습니다. 잘 나가는 학자요 정신과 교수이고 그렇습니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똑똑하니까 학교에서도 일을 잘 하려고 하고 집에 와 보니까 일이 산더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있지 않습니까? 자기 살림살이를 파출부나 다른 사람에게 해준다고 해도 못 맡기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 있지 않습니까? 양쪽을 하려니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걸레질까지 하려니까 너무 힘이 듭니다. 하루 하고 나니까 휴일은 퍼집니다. 불만에 가득 차 있으니까 친정어머니한테 ‘엄마, 나 진짜 힘들어 죽겠어’, 그러니까 걸레를 딱 보여주면서, ‘얘야, 이 걸레가 뭔지 아니?’ ‘몰라요’ ‘도 닦는 도구다’ 걸레질을 하면서 집안이 더러워서 닦아야 한다고 하면 신경질 나는 식모살이가 되는데, 이 걸레질을 하면서 도를 닦는다고 생각을 해라. 인생에는 어차피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시련과 고난이 다 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너무 너무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슬픈 일도 일어나고 가슴 아픈 일도 일어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쓰고 달콤한 모든 것들을 다 삼키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승화시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자신이 깊이 있게 그리고 큰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자기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소화하고 이기며 살아가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깊이를 더해주게 만드는 그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겪어 가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에게, 여러분이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모든 환경 속에서 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하나님을 의지함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의 결정적인 표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좌절도 잘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니까 자기 자신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그러다가 강적을 만나면 한 없이 자기 자신이 추락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청나게 높은 평가와 저평가가 출렁거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되면,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의지 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의지 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두려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행복한 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이고 나는 사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나면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데, 그 의지는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하나님과 부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연약할 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 아주 쉽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 사랑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이 고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곳에 자신의 마음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의 결정적인 특징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하나님을 기대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납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거나 혹은 무시를 당하거나 혹은 배신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을 위로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내 부모도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깊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맺자면 우리의 가장 힘쓸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떠한 분인지, 내가 하나님께 모두 알려진 것처럼, 또한 하나님도 나에게 당신 자신을 가르쳐 주십시오.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나면 하나님을 예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지휘에 있든 떠나든 여기에 있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든지 함께 있든지 모든 우연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바다 끝에 가서 새벽날개를 치며 저 바다 끝에 가서 거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나를 붙드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변화, 주님이 우리를 어디에 두시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알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서 이 모든 인생의 시련과 파도를 극복하고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