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족이신 하나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녹취자 : 조원정, 김명진
논리 정연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후에 2절서부터 어떻게 자신이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5절에서는 더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꽃놀이를 보면 어두운 밤하늘에 폭죽을 쌓아 올리는 것을 보면 가느다란 그림을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고 정상까지 올라간 다음에 장렬하게 폭발하며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불꽃을 만듭니다. 시편 23편에서 5절은 그렇게 하늘 높이 솟은 정점에서 장렬하며 밝은 빛을 내는 폭발하는 불꽃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5절에 제목을 붙인다면 나는 더 넘치는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익숙한 잔치집의 맥락입니다. 혼인 예식이 이루어지고 신랑신부 양가의 식구들과 그들을 축하하는 친인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즐거워 할 때 주인은 자기 집에 보관하였던 최상의 포도주를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를 아낌없이 하객들에게 가득가득 잔에 따라줄 때 그렇게 거품을 일으키면서 잔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가득 차 있는 포도주의 모습을 오늘 여기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은유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모두 이런 빈 잔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잔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 주신 영혼의 빈 잔입니다. 그 영혼의 빈 잔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으로만 가득차야지만 인간이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빈 잔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놀랍게도 행복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입니다.
오늘날 보면 사회에 굵직굵직하게 터지고 있는 불행한 사태들을 보면 누군가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고 시도를 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불행입니다. 유병언씨는 유병언씨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를 띄우고 한번 출항할 때마다 이름 지어준 값으로 백만 원씩 받고 말도 안 되는 자기 계열사에 자기 사진을 한 장에 4억 원씩이나 받고 팔아먹고 승객의 안전은 무시하고 그렇게 운항을 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그 나름대로 그것이 가장 좋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비명횡사했는지 타살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죽었습니다. 그룹의 회장이 분식회계를 하고 금융을 거의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해서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법정에 서게 되어서 다 죽게 된 것도 결국은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공통된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기에 드라마나 보고 있을 시간에 왜 나와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와서 말씀을 듣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지 이웃집 때문에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솔직히 교인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내가 스물한 살 때 전도하는 사람 없이 내 스스로 교회 나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나는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었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영광을 돌립니다. 왜입니까? 매일매일 눈만 뜨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눈만 뜨면 오늘 하루도 인간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에 대한 빈 잔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얘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이것이 희미해졌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겨우 그 잔이 채워질 수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기의 영혼의 갈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모르고 술 마시고 쾌락에 빠지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그래도 그때 잠깐 마취제처럼 잊을 뿐이지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돈만 벌면 행복해질 것 같은데 돈 있는 사람은 불행하지 말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화) 대림 그룹이라는 그룹이 지금도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하던 시절에 회장집이 바로 교회 옆에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넓습니다. 까만 옷 입은 경호원들이 항상 보초를 서고 집안에 농구코트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어느 날 신문에 났는데 그 회장이 부엌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를 해서 자살을 기도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왜 부엌칼로 자기 목숨을 끊고 싶어 했습니까?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래도 돈이 없고 저래도 돈이 없으니까 그냥 위로하는 말로 하나 보다 하지만 안 그렇다고 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지만 말입니다.
한 20년 전에 신문에서 본 기사인데 서울 강북에 가면 수유동이라고 하는 동이 있는데 예전에는 수유리였는데 거기에 병원에 있던 의사가 신문에 칼럼을 썼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병원에 와서 멎더니 어떤 중년 남자를 친구들이 떠메고 와서 응급실로 달려와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눕혀 놓고 당직 의사니까 간호원을 불러서 보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진찰해 보더니 자세한 것은 부검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얀 수건을 덮어 놨습니다. 한 시간도 안 되서 유족들이 울고불고 택시를 타고 달려온 것입니다. 의사야 이 사람하고 살이 섞였습니까? 피가 섞였습니까? 늘 환자가 죽어가는 것이 병원의 일이니까 큰 슬픔도 없이 이렇게 보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태어날 때는 사람이 이렇게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이렇게 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하고 죽은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의사 생활을 했어도 저런 시체는 처음 보는 것입니다. 유족들을 막 울고불고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죽을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속에 무엇이 있을까 하며 펴봤습니다. 펴 보니까 화투 두 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펴 보니까 3.8광입니다. 실화입니다. 스토리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직장을 다니는 양반인데 상이 났다고 해서 상가 집을 갔습니다. 술을 먹고 밤새도록 상가 집에서 화투를 쳤는데 돈을 많이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끗발이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판돈이 쌓였는데 3.8광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딱 보다가 충격을 받아 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우리 후손들도 자기 조상에게 우리 할아버지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아빠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그렇게 묻는 후손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는 어디에서 죽었는지 물어 봅니다. 사실은 어디에서 죽느냐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엄마 아빠 왜 죽었어? 화투치다가 3.8광에 충격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여러분 웃었습니다. 화투 두 장 들고 광하고 죽은 사람이나 집문서 몇 개 들고 내 집 내 집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나 무슨 학위증서 몇 개들고 우리 딸 박사학위 우리아들 박사학위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나 그림의 크기의 차이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모두 다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오늘 날 전도가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우울합니다. 복음이란 제품을 사용한 사람들의 사용후기가 너무 후집니다. 얼굴에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 살기 너무 힘든데 교회에서 복음을 소개하더라, 내가 사용을 해 봤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더라, 그것이 얼굴에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스물한 살까지 제가 불신자였고 스물한 살에 제가 예수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복 받은 것 때문에 설득되어서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평안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주여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고아와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네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왜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까? 엄마 치맛바람, 할아버지의 재력, 강남의 학군, 이런 것이 영광을 받지, 그리스도의 존재의 울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안 되던 일이 술술 풀린다는 기대 때문에 내발로 교회 걸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나에게 감동을 준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평안이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만족, 그거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우울하고 사연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모습이 마치 뭐 같은가 하면 정 떨어진 부부가 살기 싫은데 애들 장래 생각해서 할 수 없이 버티고 있는 것같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곧 이혼할 텐데 할 수 없이 사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봐도 우리에게 오히려 묻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그렇게 묻는데 우리의 얼굴은 별로입니다. 그렇게 답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포이고 외침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에서 사라진 것이 있습니다. 기쁨, 희열, 환희, 감격, 이런 것들이 사라집니다. 정말 다른 것 말고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너무 기뻐서 눈물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런 감격 때문에 하나님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시인은 그런 환희와 희열과 기쁨과 감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이 시인의 가슴을 그 기쁨과 환희로 터질 것처럼 만들어 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오늘 시인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첫째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무슨 뜻입니까? 옛날에는 베푸시고 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70%가까이는 이 상이 학교에서 졸업식 때 주는 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등상, 개근상 하고 주는 그런 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상이라고 말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슐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슐한’은 식탁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식탁은 우리처럼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는, 땅바닥에 앉아서 철퍼덕 앉는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소파처럼 기다란데 이렇게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아주 게으른 자세로, 그래서 당연히 식탁은 티 탁자 높이 정도 되는 상이었습니다. 그 상을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베풀어주시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 얘기는 밥 먹는 이야기입니다.
원수의 목전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시인이 일생을 사는 동안에 수많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특히 언젠가 하면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을 때에 전임자 사울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집요하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정처 없는 도망자의 길을 걸어야했습니다. 수많은 환란을 겪었고 왕이 된 후에도 세바의 반란이나 압살롬의 반란을 겪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런 수많은 대적과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에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마음을 환희의 불꽃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밥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밥상을 베풀어 주신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여러분 그래도 학교를 다니신 분들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으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 중 단 한번이라도 진짜 밥상을 차려서 하늘에다 줄 네 개를 매달아다가 내려 보내서 다윗을 밥 먹여 본적은 없습니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와 신앙에 대한 관계를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간략하게 성경을 훑은 다음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기억하십니까? 밧단아람에서 20년이나 되는 종살이를 하고 야반도주를 합니다. 그때에 라반이 자기 아들들과 함께 집요하게 추격을 해 옵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가부간에 말하지 말고 손대지마라, 하나님이 엄중하게 경고를 하시니까 꺾어져서 야곱과 화해하고 그들을 축복하면서 보내줍니다. 거기에다 돌무덤을 쌓습니다. ‘여갈사하두’라는 돌무덤을 쌓는데 아람어로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입니다. 이 돌멩이를 쌓아서 여기가 경계이다, 너는 이것을 넘어서 나를 침범하지 말고 나는 이것을 넘어서 너를 헤치지 않겠다하며 마지막으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밥을 먹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관습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양반이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민들과 함께 몸은 부딪히면서 잠은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민들과 함께 밥상을 같이 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 가보면 대가족 사회였는데 저희 할머니가 시집오니까 가족이 마흔 두 명이었다고 합니다. 마흔 두 명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집도 없지만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일 먼저 안방에 상이 차려집니다. 거기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들어갑니다. 우리 어머니도 거기 못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건넌방에 상이 차려지고 거기에 엄마, 나, 삼촌, 고모,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밥을 먹고 마루에 상이 차려져서 어린아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다음에 부엌에서 며느리들이 먹고 마당에서 종들이 먹고 그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죽습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올라가고 내가 우리 집 사람 남겨놓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안방에 차려진 상은 메뉴가 다릅니다. 어른들 상이니까 거기에는 고기와 생선이 그치지 않습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별 볼일 없고 하인들은 바가지에 담아서 비빔밥해서 먹습니다. 이것이 딱 정해져 있어서 엄격한 룰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학을 공부하신 분하고 이야기 하다가 중국 초기 선교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언어를 배울 수가 없으니까 무조건 맨 몸으로 들어가서 바디랭귀지로 말문을 트는데 세 시간이 걸린답니다. 그 다음 부터는 그들과 살면서 언어를 익히면서 손짓 발짓하면서 그들에게 글자를 만들어 주고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들을 bible translator들이 했습니다.
구라파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사상은 많이 다릅니다. 이 사람들이 가서 지도를 보여주면서 손짓 발짓하면서 우리는 구라파에서 온 사람들인데 당신들하고 같이 살고 싶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싶다하고 의사소통을 간신히 합니다. 그러면 수염이 긴 촌장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장시간 동안에 회의가 이루어집니다. 마침내 거기에 대표자 되는 사람이 환하게 웃으면서 나오면서 너희들이 여기에 이제 살아도 좋다고 우리들이 결론을 내렸다하며 서로 기뻐하며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데 그게 우리로 말하자면 마을회관 같은 곳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와 함께 한 형제 가족이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가 식사를 같이 하자며 밥이 나오는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음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럽니다.
(예화) 누가 중국을 갔는데 스프가 나오는데 뚜껑 덥힌 냄비에 스프가 나오는데 그것을 계속 주전자처럼 따라서 먹었는데 너무 너무 맛있더랍니다. 다 먹은 다음에 뭐가 그렇게 맛있나 해서 뚜껑을 열어 보니까 바퀴벌레하고 거북이가 들어가 있더랍니다. 그 사람들은 식문화가 광범위합니다. 물속에 있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 하늘에 있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 땅에 있는 것 중에서는 책상 다리 빼놓고 모두 먹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식재료이고 실제 중국 역사에 보면 사람의 고기가 부위별로 다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 얘긴 인육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한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나오는 것을 보니까 상상도 못하는 요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벌레, 뱀, 뭐 이런 요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주에서는 젊은 처자들이 결혼을 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갈비탕이 필수이고 국수를 먹는다고 하는데 거기는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는데 뱀국을 끓인답니다. 동태처럼 커다란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무을 넣어서 잘 끓여서 먹어야지만 결혼식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국수 먹을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서는 뱀국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 합니다. 그것을 받아보다가 기겁을 한 것입니다. 우리 이것 못 먹는다고 안 먹을 거라고, 그러면 갑자기 아주 차가운 적막이 흐르면서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끌려 나가는 것입니다. 끌려가면서 이 사람들은 저렇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왜 이 식탁에서 저렇게 화를 내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살고 싶다 해서 고민을 많이 해서 형제로 받아 주었습니다. 이 식탁은 단순히 밥이 아니라 언약체결의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솥밥을 먹는 한 형제가 되었다고 하며 밥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속에 살고는 싶지만 형제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파이입니다. 거기에 살게 해주고 형제로 받아준다고 하는 중국 사람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가차 없이 죽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성경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죄인들과 그렇게 먹고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보기에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도 죄인들 중에 한 형제요, 세리 중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충격적인 말씀으로 답변을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가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데가 있으니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밥을 먹어야겠다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과 세리들과 자신 사이에 줄을 확실하게 그었습니다. 너희는 죄인이고 값어치 없는 인간이고 쓰레기 같은 창녀지만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함으로서 바로 당신이 그 죄인들에 친척이요, 형제요, 한 가족임을 보여주셔서 그 사랑을 통해서 그들을 그 죄인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회개하고 와라, 그래도 너하고 친구가 안 될 것이라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메시지였다면 예수님은 빨리 떠나 이리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 친구, 형제 해준다가 아니라 형제가 먼저 되어 버리고 형제의 관계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에게 진정한 참 영적인 형제로 이끄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전도할 때 많이 쓰는 구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내게 들어와 먹고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회의 기능이 다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바깥에 축출했습니다. 뭔가 결단을 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다시 중심에 모셔 들이고 교회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을 좌정하게 하는 일은 엄청난 신앙적인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각성과 대 결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막 집도 주고 차도 주고 돈도 주고 너희 자녀들 다 일류대학 보내주고 하나님이 온갖 선물을 다 주셔야 하는데 그런 것 다 치워 버리고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약을 하면 먹는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가 하면 가족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아주 극명하게 표현된 예식이 뭔가 하면 성찬 예식입니다.
하나의 빵에서 하나의 포도주에서 우리들이 모두 먹으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함으로 예수와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을 성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찬을 행할 때 믿음으로 행하면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영적인 실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보면 답이 나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주께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나는 너무 기쁘고 희열과 감격에 넘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화) 요즘은 제가 집회를 잘 다닙니다. 시간도 없고 저도 연구해야 되고 교회에서 사역도 많고 신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가고 목사님들 오라하면 가고 대개 그런 정도지 잘 안갑니다. 옛날에는 많이 다녔습니다. 가는 지방마다 약간 특색이 있는데 전라도 쪽으로 가면 먹는 것은 확실하게 대접해 줍니다. 그때도 잊혀지지 않는데 광주인가 목포 그쪽으로 갔는데 새벽기도 하고 아침 집회하고 밤 집회하고 하니 완전히 강사 본 김에 본전을 뽑는 것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새벽집회를 하고 나서 숙소에 가서 잠깐 쉬었다가 아침 집회를 하고나면 보통 열한시 반 되어야 끝납니다. 아무거나 한술 먹고 얼른 들어가 쉬어야 되는데 좋은 것 대접한다고 차를 타고 한없이 가는 것입니다. 한 시간 가까이 가는데 어느 한정식 집이 나왔습니다. 여덟 명이 들어가 앉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집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비싼 집도 아니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한없이 음식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아야 조절을 할 텐데 중간쯤 갔는데 나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나오는데 밥을 안 먹고 접시가 몇 개 나오는지 세어봤습니다. 그릇 개수가 이백 개가 넘습니다. 두 개의 상인데 저것을 설거지를 하려면 진짜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이십년 전에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읽었습니다. 조용히 읽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은 것이 바로 차려주시고 라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아라크’라는 단어가 군대에서 많이 쓰던 용어였습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 줄지어서 대열을 맞추고 진을 칠 때에 그런 것을 가리켜 ‘아라크’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개수의 물건이나 사람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는 것이 ‘아라크’였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받았기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이 밥상이 어떤 종류의 밥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딸내미가 결혼을 하겠다고 웬 녀석을 데리고 왔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마음에 안 듭니다. 나온 학교, 집안부터 시작해서 얼굴 생김새까지 하나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 말라고 했더니 쥐약을 먹고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자식 잡을까봐 걱정이 돼서 할 수 없이 결혼을 시켜줬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여보 아침 먹자고 하니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아침 걱정 하지 마, 오늘 어차피 친정에 인사하러 가야돼, 엄마가 잘 차려 놓고 당신을 기다릴거야, 그러니까 좀 참아, 밥하기 싫으니까, 처음부터 남편 그렇게 길들여야지 고생을 안 하는데 그리고 점심때 엄마한테 간다고 전화를 합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갔다 왔어요, 엄마가 시큰둥하게 그래 잘 갔다 왔다, 엄마 우리 인사하러 갈 건데 점심때 갈 건데? 그래라, 우리 밥 줄 거지? 그래, 하며 툭 끊는 것입니다. 엄마가 밥 준데, 당신 이제 첫 사위니까 잘 해놨을 거야, 하며 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고 부침개도 부치고 전도 부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엄마 혼자 낮잠 자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 왔어, 어 그랬니? 아빠는? 아빠 바빠서 회사 가셨어,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줘, 어 그래, 절 받으십시오 장모님, 절을 받더니 엄마 내가 뭐 도와줄까? 아니다 그냥 앉아 있어, 라고 하더니 3분 만에 밥상을 차려 가지고 온 것입니다. 팔각형으로 된 밥상에 귀퉁이도 깨지고 밥풀도 눌러 붙어 있는 그런 밥상에다 밥을 가지고 왔는데 냉장고도 있는지 없는지 누가 먹던 밥에다 물어 부어서 숟가락을 하나 꽂은 다음에 반찬을 가지고 왔는데 딱 하나입니다.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고추장 딱 하나 갖다 놓은 것입니다. 들게 하며 탁 갖다 놓는데 물이 찍하고 쏟아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정말 자네가 싫어, 왜 우리 집으로 장가를 온 거야, 나는 평생 자네 보기 싫어, 자네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 뜻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저는 아직도 심방을 다닙니다. 많이는 못 다닙니다. 왜? 어차피 교인들 다 모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집에서 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주부의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지를 압니다. 하지마라, 그냥 갈비탕 하나 먹든지 아니면 냉면 한 그릇 먹던지 집에서는 하지마라, 항상 그 주의입니다. 어느 자매의 집을 심방하게 되었는데 40세 후반 50세 정도 되는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네 집에서 밥을 하겠다고 하기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밖에서 갈비탕 하나 먹고 들어가서 심방하고 오자고 했습니다. 그 교구의 전도사님이 그 집사님이 꼭 밥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하지마라고 다시 했는데 그래도 하겠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할 수 없이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은혜 받은 이야기를 나누고 예배를 다 드렸습니다. 목사님 점심 드셔야죠? 하며 밥상을 셋이서 들고 오는데 교자상에다, 생전 태어나서 그런 밥상을 처음 받아 봤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각으로 된 교자상에 가득 차렸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너무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것을 차립니까? 이것 할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지, 한 끼 먹으면 다 없어지는 것을 내가 무슨 대단한 인간이라고 날 위해서 이런 시간을 씁니까? 자매가 정색을 하며 쳐다보더니 목사님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었습니다. 얼른 먹으세요, 제가 심방가기 열흘 전부터 준비를 했답니다. 김치를 담그고 장들을 준비하고 일주일 전에 장을 보기 시작하면서 3일전에 본격적인 장을 보면서 고기는 미리 재놓고 생선부터 하나하나 거기에 있는 수많은 반찬 중에 있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은 김치 밖에 없습니다. 아니 김치도 담근 것입니다. 여러 가지 김치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인생이 바뀌었는데 제가 오늘 목사님을 한번 이렇게 만나서 점심을 대접하지 제 생애의 다시 이런 기회가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런데 이것을 나는 정말 한 달 동안 기도를 하면서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뭉클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밥상입니다. 우리 어머니한테도 그런 밥상은 못 받아 봤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멀어서, 그래서 자기는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가 이것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것을 집어다 주는 것입니다.
나라는 손님이 그 부인에게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나는 확신하건데 그 자매님이 자기 시부모님한테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정 부모님도, 남편에게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에게 그래본 적 있습니까? 남편 하나만을 위해서? 한적 없습니다. 그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얘기는 식탁은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찬밥에 물 말고 고추장 하나 달랑 올라오는 귀 떨어진 소반에 담긴 밥상이 아니라 하인들이 몇 명이 간신히 들고 오는 궁중에서 왕의 만찬으로 차려진 거대한 식탁입니다. 그 식탁에 시인과 하나님이 겸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면전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시인이 아주 하잘 것 없는 외톨박이인줄 알고 공격을 하려고 왔는데 함께 밥상을 마주하고 있는 분이 어디에서 많이 뵌 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과 가족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생명적인 은혜, 어떠한 경우에서도 자기를 하나님이 가족처럼 생각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던 공동체적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도 제가 사실은 3주 전에 네 시간짜리 내과 수술을 받았습니다. 정말 여기 안 오고 싶었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꼭 필요해서 이 교회에 보내셨을 것이다. 정말 여기에 오지 않고 싶었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꼭 필요해서 이 교회에 보내셨을 거야.’ 제가 주일날 네 번씩 설교를 해야 하는데 요즘 두 번 밖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복이 아직 되지 않아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갈비뼈 사이를 찢고 큰 종양 두 개를 심장과 폐 사이에서 도려내고 작은 종양이 있는 살을 절개하여 빼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수술을 앞두었는데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기분이 참 착잡했습니다. 제가 단 몇 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제가 5시간 이상 자지 않습니다. 써야 할 책도 많은데 마음속에 너무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어차피 내가 살아온 인생이 시련과 역경의 인생이었는데 이까짓 수술 한 두 번 더 겪은 들 내 인생에서 뭐 그렇게 커다란 충격이 되겠는가? 한순간에 마음이 다스려졌습니다. 몰핀을 맞는 고통을 이기면서도 줄을 달고 병실에 누워서, 너무 고통스럽게, 수술을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진통제도 맞으면서도, 책이 없으니까 책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머니 속에 구형 G2핸드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제가 거기에서 100페이지짜리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을 목사님도 드리고 집사님도 한 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불행도 오지 않고, 만사형통한 길로 인도되고, 아프지도 않고, 정리해고도 안되고, 나이만 차면 최고의 시집을 가고, 사업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박이 터지고, 그러는 것 같습니까? 그런 이유는 그런 사람만 간증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잘 될 줄 알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요새는 끼니가 간데없다는 사람은 이런데 나오지 않습니다. 대박난 사람만 그런데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하면 계속 하나님한테 원한이 쌓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하나님 없이 살 때 시련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고, 여러분이 은혜 충만할 때의 시련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 시련을 만나면 ‘도대체 누가 내 인생에 이런 손해를 끼친 거야?’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까 남편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찢어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든 사장이든 동업자이든 누구든지 있을 것인데 이를 박박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폭행도 일어나고 살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왔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고 싶은 데 능력이 없습니다. 겁도 많고, 힘도 없고, 완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삭이면서 매일 매일 하루 밤에도 몇 번씩 그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면서 원한에 맺힌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에 시련을 당할 때의 우리들이 살던 인생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다음에는 분명히 저 사람이 나에게 큰 해를 입히고 저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저 나쁜 자식 죽여 버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원망보다는 하나님 앞에 비친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비취는 등불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등불이 비취면 자기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살았기 때문이구나, 혹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사업을 했기 때문이구나, 내가 혹은 내가 교만했기 때문이야’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할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과 이 세상의 자원을 주셔서 내가 피할 수 있도록,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는 인간인데 어느 날 너무 불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의 세계가 아니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자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생생하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72시간만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내 나이에, 내 기력에 이렇게 설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원이 없습니다. 육체에 필요한 이 세상의 자원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소비하면서 오늘 하루를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지금도 소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에너지를 태우면서 집중하면서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혼도 무엇인가를 계속 소비하면서 영혼의 영혼다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리의 말씀, 성령이 은혜, 하나님의 사랑,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이런 신령한 것들을 받아서 그것을 자원으로 삼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티코가 목숨을 걸고 달린 들, 트레일러가 끄는 어마어마한 짐을 매달고 대관령 고개 길을 넘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안 걸고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매우 특별한 가족인 것처럼 ‘아라크’의 밥상을 차려 주셔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은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아라크’의 밥상을 차려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배려해주시는 말씀의 식탁으로 우리가 새 힘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며 살게끔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지 모릅니다.
제가 올해 8월 말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출장을 갔습니다. 네덜란드에는 학자들을 만나러 갔고 주 목적은 영국에서 목사님들이 모두 모여서 수련회 강사로 갔습니다. 끝나고 나서 스코틀랜드 쪽으로 가서 한인교회에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고 끝나서 나오는데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누구십니까?” 제가 봤을 때 50세 정도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누구세요?”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6년 6개월 전부터 목사님의 설교를 한 편도 빼지 않고 인터넷으로 들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자세히 이야기는 하지 않고 “어쨌든, 제 인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다음날 또 왔습니다. 맨 앞자리에 이번에는 남편과 같이 왔습니다. 다시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가정이 이혼하기 직전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고 우리 가정이 놀랍게 회복이 되어서 이제는 사이좋은 부부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더니 우리 손녀딸의 옷 두 개를 포장해서 가져 왔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거의 빌어먹을 수준에 있는 남자를 만나서 시집을 가서 펼쳐지는 인생과 재벌의 남편과 결혼해서 펼쳐지는 인생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 남편이 아니고 다른 남편을 만났으면 내 인생의 방향이 달랐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남편도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인생의 본질적인 변화는 아닙니다. 가는 방향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걸어가느냐, 구르마를 타고 가느냐, KTX타고 가느냐,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 1등석이냐 이코노미냐입니다. 가는 방향은 같은 것입니다. 어차피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방향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가다가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비록 비행기 1등석을 타고 가더라도 그것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면 불행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서 걸어가도 행복이 있는 곳으로 방향 쪽으로 가면 내 인생은 바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을 하나님이 말씀의 식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데 시인이 그런 은총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었는데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고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 이 신앙생활이 전인적인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가슴으로 들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고 무엇이고 소용이 없습니다. 가슴만 뜨겁게 해주면 뭐든지 믿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단적인 가르침에 노출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손과 발부터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행위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이만큼 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5년 동안 성가대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헤아리고 살았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헤아릴 생각을 합니까? 그런가 하면 머리만 들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인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은혜를 받아서 마음에 감동이 일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을 하고, 그 사랑이 명료한 지식과 함께 작용해서 체계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그것이 이성의 이해든지 믿음을 통한 이해든지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어떻게 어루만지는지 인격적인 은혜를 경험하면서 인격적인 반응을 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최소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자마자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어디를 읽고 있습니까? 가슴이 저미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탐구 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소원을 품고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즉각적으로 답변해야할 네 가지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매일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몇 주일에 한 번씩은 성경을 읽다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매주 그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몇 주일에 한 번씩은 예배를 드리다가 “저 말씀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이구나, 부끄럽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혹은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는 자기의 영혼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아라크’의 밥상이었고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이면서도 그 하나님을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시련과 결핍으로 가득 찬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슴 터질 듯이 기쁘게 만들었던 놀라운 비밀이 결국은 하나님이 차려주신 말씀의 식탁, 그것을 통해 오는 생명적인 교제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섭리적인 복입니다. 섭리적인 복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잘 되었다고 하더라. 아들이 공부를 조금 했는데 기대보다 좋은 수능 성적이 나와서 좋은 대학에 갔다고 하더라.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신기하게 병이 나았다더라. 집을 샀는데 제법 값이 올라서 기분이 좋아다더라 등등의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여 할렐루야 하고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가난한 집에 갑자기 돈 벼락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예수를 믿지 않고 핍박을 하는 남편이 무릎을 꿇고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속 썩이는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반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이기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하게끔 이기게끔하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씀의 은혜를 누려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왜 시인이 환희와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그냥 기름을 붓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직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정통치체제의 국가를 세 개의 솥발처럼 떠받들어 있으면서 이 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은 각각 하는 역할이 달랐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서 하나님 마음에 있는 사회의 질서를 이 세상에 정치적으로 구현해서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왕을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렇게 왕이 왕의 권한을 가지고 법을 만들고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해도 질서의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의 정치로는 그것을 완전히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입니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경을 해석하거나 미래의 일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서 그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직무였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좀 달랐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편에서 백성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어서 불결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을까 할 때 그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에게 오는 사람이라면 제사장은 백성들 편에 서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중보자가 되어 제물을 바치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런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는 것이 제사장의 일이었기 때문에 불결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매우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진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기름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기름을 부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해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새롭게 하고, 총명하게 하고, 용기와 덕을 갖출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그 사람을 기계처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처럼 타락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그 뜻을 배반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성령이 개개인 신자들에게 역사하는 양상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가 구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령이신데 역사하는 방식이 구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 사이에 교통할 수 있게 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성령님을 우리에게서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부어지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총명과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시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그 성령을 불러 가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일생에 세 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 일생동안 가장 다윗의 마음속에 잊혀 지지 않았던 것은 첫 번째 기름 부음을 받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첫 번째 기름을 부으며 하나님의 왕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예전에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순결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보다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성령에 의한 기름부음 때문에 오늘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저런 물질들이나 사물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이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는 피할 수 있는 길이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때로는 그런 일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저는 사 본적이 없지만 여러분은 로또 복권을 사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사실은 슈퍼볼이라고 하는 로또보다 판돈이 큰 복권이었습니다. 여러해 전에 계속 당첨자가 없어서 쌓인 돈이 2600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2600억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 10명이 계를 해서 매달 돈을 모아서 십년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 약속하기는 그 열 명이 산 복권중의 하나가 2600억짜리가 제대로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260억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 5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TV방송에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추적했습니다.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그래서 260억을 받아서 첫 번째 한 일은 사표를 냅니다. 두 번째 한 일은 자동차를 바꿨습니다. 세 번째로 한 일은 이혼입니다. 네 번째 한 일은 재혼입니다. 다섯 번째 한 일은 집을 삽니다. 여섯 번째 한 일은 돈을 탕진합니다. 일곱 번째 한 일은 새 아내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범위를 더 넓혀서 로또를 받아서 대박을 맞은 사람과 신도시 개발을 해서 졸지에 갑부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을 했는데 다 불행해졌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호박 밭에 똥 지개를 지던 할아버지가 신도시에 그 땅이 편입되어서 180억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나는 평생 땅을 일구던 농부였으니 이 돈으로 땅을 사겠다.”고 했더니 자식들이 탕자와 같이 “아버지가 죽었다고 치고 똑같이 나누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줬더니 형제들 간에 서로 불공평하다고 대판거리 싸움이 벌여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속이 상해서 목을 매어 죽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누어가진 자식은 똑같습니다. 차부터 바꾸고, 사표내고, 헌 마누라 버리고, 새 아내 얻고, 그 아내에게 버림을 받고 차례대로 그랬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영국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했는데 결론은 똑같았습니다.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고,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지만 회심하기 전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 죄인이었어도 내 인생을 돈이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0년 전에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너무 커다란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 그 자체를 물질적인 성취와 만족에서 구하지 말고 관계에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해서 “요즘 사업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어서 “밥이나 먹고 삽니다.”하면 야단을 칩니다. 겨우 밥 먹자고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업을 하면 열심히 사업을 해서, 자기의 욕망을 가지고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주신 자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는데 불신자들이 불법으로 점령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구겨지고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점령한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다시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놀라운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어느 곳에 가서 직장생활을 하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 ‘내가 당신이 주는 월급을 먹고 있지만 내가 섬기는 분은 하나님이다’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힘들이 하나님이 생명적인 관계에서 베풀어주신 은혜에서 나옵니다.
제가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제가 16살부터 인생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학교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아침에 눈을 뜨면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들에 핀 이름모를 풀이나 돌멩이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내가 너희들처럼 생각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를 믿기 전이었으니 문학 작품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나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답을 주지 않고 문제가 있다는 것만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사상과 철학서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답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도 내가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미친 듯이 고민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톨스토이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는데 감동을 주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며, 인생론은 읽으며, 처음으로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챤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갈 것인지 고민을 하며 무조건 돌아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저 벌판에 이 교회의 십분의 일만한 교회인데 그 교회에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교회에 올라갔습니다. 수요일이었는데 교인 20여명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위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위에 장판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저도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삐거덕거리며 풍금이 울렸습니다.
(찬양)
돌아 와 돌아 와 어서 돌아오라
집을 나간자여 어서와 돌아 와
풍금소리가 나는데 생전 처음으로 안식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자살까지 시도했는데 안식을 경험했습니다. ‘도대체 이 평화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하고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렇게 불과 몇 달을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부르셨습니다. “너는 세례를 받아야겠다.”, “목사님, 제가 무슨 세례입니까? 방금 믿기 시작했고 학습도 받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이제 바로 세례를 받아도 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쳐 주는 것도 별로 없더니 이만한 책 하나 주더니 읽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고민이 생겼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내가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인데, 나같이 걸레같이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매일 저녁마다 2, 30분을 걸어서 교회에 나가 촛불을 켜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예수님과 혼인을 할 수 있습니까?”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드디어 11월 둘째 주쯤 추수감사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매우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젊은이였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고 예배당에 갔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물에 손을 잠그고 나에게 물을 뿌리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생전 처음 느낀 느낌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대고 기도하는데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내려와서 밑에까지 꽉 차고 나니까 내 몸 전체가 일체의 무게가 없이 구름에 뜬 것 같이 신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밀려왔습니다. 세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 흩어졌는데 오랫동안 거기에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까 사람들은 거의 흩어졌고 예배당에 창문이 있었는데 너무 추우니까 성에가 끼었습니다. 그리고 햇볕이 내리 쬐었는데 너무 눈부신 햇살이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일체의 근심과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셨으니까 내가 살아가는 나의 인생의 모든 날 동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 순결해지고 싶고, 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깊은 체험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깊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언제나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고난 후에는 동일한 마음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거룩해지고 싶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확실하게 성령을 받은 증거는 사랑의 인격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신자 안에 역사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을 강력한 성령을 체험했을 다윗을 생각해 보면 성령이 떠나지 않는다는 안정성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훨씬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강력한 성령의 체험을 했던 다윗 역시 놀라운 성령의 체험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체험하면서 이 시인이 그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그 감화를 받으면서 자기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환희와 희열, 감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갈망하면서 살아갈 때 그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셔서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런 승리의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행복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